#9
“하아…….”
은찬의 한숨에 동만이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사방에 먹을 것투성인 편의점 안이건만 은찬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래. 주말 내내 한숨 쉬더니 회사까지 와서.”
“너도 내 입장돼 봐라. 한숨이 안 나오게 생겼나.”
축 처진 어깨. 힘없는 목소리. 삶의 의욕을 잃은 듯한 의찬의 행동은 주말을 지나 월요일 오후까지 이어졌다. 그 이유가 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동만은 현실적인 위로를 던졌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이미 생긴 애들을 어쩌겠냐? 낳아서 키우기로 했으면 좋게 생각해야지.”
“한 놈이면 모르겠는데 입이 두 개나 생겼어. 내 벌이로 그게 될까 싶다. 너 요즘 시대에 애 하나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드는지 모르지?”
“아직 낳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 걱정을 하냐? 그리고 수인은 나라에서 복지도 잘돼 있잖아. 오히려 너 나라에서 상 받을걸? 가뜩이나 수인 인구가 줄어드는 마당에 한방에 두 명이잖아!”
그걸 위로라고 던지는 거냐. 은찬은 육아 문제와 더불어 앞으로 들어갈 돈이 두 배가 된다는 사실에 심란해 죽겠는데 반대로 동만은 주말 내내 신이 난 상태였다. 두 명의 고양이 수인이 태어난다며 벌써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게다가 우리 회사도 복지가 좀 좋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도 있고, 너도 있고. 각자 한 마리씩 맡아서 케어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동만이 은찬의 등을 툭 치며 씨익 웃었다. 그런 동만을 보며 은찬은 애틋한 시선을 던졌다. 아니지, 김동만. 혼자서 두 녀석을 다 케어해야 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본인만 모르는 것 같았다.
“동만아, 고맙다.”
은찬이 미리 감사의 인사를 던지자 녀석은 멋쩍게 웃으며 앞에 놓인 게맛살을 집어 들었다.
“너 이거 좋아하잖아. 이거 먹을래?”
“먹을래.”
“그래. 이것도 먹고. 보자 보자……. 저것도 좋아하지? 치즈. 저것도 먹어. 오늘 내가 쏜다! 먹고 싶은 거 다 골라, 인마! 너가 많이 먹어야 애들도 무럭무럭 크는 거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각 김밥 하나에 매몰차게 굴었던 김동만이 변했다. 이것저것. 바구니에 한가득 담은 그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왜? 뭐 찾아?”
“부장 있을까 봐. 나 그때 완전 찍혔잖아. 그깟 삼각 김밥 하나 안 사 주는 놈으로 찍혀서 진짜 자존심 상했거든? 그게 얼마나 한다고. 나 그런 놈 아닌 거 알지?”
“알지.”
그럼 알다마다. 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줬다. 동만은 주말 내내 은찬을 먹여 살렸다. 두 녀석을 임신한 기념으로 최고의 재료로 맛있는 저녁을 해 주겠다며 큰소리치던 착한 김동만. 임신한 애한테 배달 음식을 먹일 수 없다나?
그런데 솔직히 녀석의 요리보다 배달 음식이 더 그리웠다는 게 최고의 반전이랄까. 특히 아이에게 좋은 음식이라고 내놓은 참치 눈알 구이는 최악 중 최악이었다.
“야. 부장 없어. 아까 호출당했잖아. 회장한테.”
“아, 맞다. 그랬지.”
30분 전 회장님 비서인 김 실장이 내려와 이주한을 데려갔다. 출근 이후부터 그때까지 이주한의 눈치를 보고 있던 팀원들이 겨우 숨이 트이는 시점이었다. 더군다나 은찬은 주말 내내 이주한에게 보고 형식으로 연락을 해야 했다.
[뭐 해.]
[밥은?]
[전화돼?]
하루에도 몇 번씩 지긋지긋하게 연락하는 통에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싶었다. 사수로 있을 당시에는 허구한 날 소리만 지르고 자존감 긁는 소리만 툭툭 내뱉던 놈이 달라도 너무 달라졌다.
게다가 오늘. 출근 직후 은찬과 눈이 마주친 이주한의 그 눈빛이란……. 버터를 국자로 퍼먹은 느낌이랄까. 소름 돋을 정도로 부담 그 자체였다.
오전 내내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던 은찬은 점심시간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자유는 오지 않았다. 그는 팀원들 단체로 밥을 먹자는 초강수까지 두며 은찬의 옆자리를 꿰찼고 이따금 스치듯 은찬의 손을 애틋하게 잡았다.
이주한은 동만의 눈치를 보며 은찬에게 애정 표현했고 동만은 그 짓거리를 모른 척한다고 애를 먹었다. 그래서 결말은 둘 다 이주한 때문에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서 편의점으로 향한 것이다.
“부장 말이야.”
“그 자식 이야기는 하지 말자. 이름만 들어도 진절머리 나니까.”
계산을 끝낸 동만이 치즈 하나를 까서 건넸다.
“변태 아닐까?”
“변태?”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은찬은 픽 웃음이 터졌다.
“아니, 은근히 이걸 즐기고 있는 것 같아서. 야, 솔직히 내가 지금 너의 공식적인 애인이잖아. 너랑도 같이 살고 있고. 그걸 뻔히 아는 사람이 주말 내내 대놓고 메시지에 전화에. 거기다 오늘 밥 먹는 내내 손이나 잡고 있고. 이런 짓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거 같던데?”
“그렇지? 니 생각도 그렇지? 난 또라이인 줄 알았다니까? 그 눈빛 봤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뇌가 있니 없니 지껄이던 자식이 갑자기 내가 밥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반찬은 뭔지 그걸 일일이 묻고 있다니까? 아까 그건 또 어떻고. 나 오른손잡이잖아! 근데 오른손을 잡으면 밥을 먹으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
“내 말이. 나 그거 보고 웃겨 죽는 줄. 너는 피하려고 애쓰고 부장은 잡으려고 애쓰고. 밥상 밑의 로맨스냐?”
“말도 마. 너하고 말만 섞어도 도끼눈 뜨는 거 봤잖아. 아, 맞다. 그리고 미리 알려 주는데 너 손 조심해라.”
“손? 왜?”
은찬의 경고에 동만은 제 손을 휙휙 뒤집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찬은 치즈를 오물오물 씹으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부장이 너 내 몸에 손만 대도 손모가지 잘라 버린다더라.”
“……세상에. 내가 밑장 빼기 한 것도 아닌데 손모가지를 잘라? 니가 무슨 국보급 보물이냐? 좀 만졌다고 손모가지를 자르게? 너 알고 보면 부장한테 엄청 사랑받고 있는 거 아니야? 일부러 나한테만 이딴 식으로 말하면서 페이크 치는 거 아니야? 어!”
동만이 경악한 얼굴로 따졌지만, 은찬은 심드렁할 뿐이다. 왜냐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니까. 녀석과 영양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터벅터벅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어? 안녕하세요.”
로비 안내 데스크에 서 있던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동만과 은찬은 멀뚱히 서서 그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분명 안면은 있는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 모르겠어요? 제주도에서 봤잖아요. 주한이하고.”
“아, 맞다.”
“아…….”
남자의 설명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예의상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기서 또 보네요. 오늘 주한이하고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지금 회장실에 있다나 뭐라나. 잠시 여기서 기다려 달라는데. 이왕 온 김에 회사 구경 좀 하고 싶은데. 시켜 줄…… 아. 김동만 씨, 유은찬 씨가 두 분이었구나.”
그의 시선이 은찬과 동만의 목에 걸린 사원증에 꽂혔다. 한참 동안 사원증을 응시하던 그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멍청하게 서 있는 두 사람 주위를 한 바퀴 휙 돌더니 콧잔등을 찡그렸다.
“유은찬 씨는 고양이 수인인가 봐요? 김동만 씨는 그냥 사람이고.”
회사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 딱히 숨길 것도 없었다. 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후각이 남들보다 좋거든요. 딱 고양이 냄새가 나길래. 흐음……. 그럼 이쪽은 아니겠네. 그럼 김동만 씨 쪽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주한 취향이 아닌데……. 취향이 바뀌었나?”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김동만의 위아래를 기분 나쁘게 훑었다. 멀뚱히 서 있던 김동만을 대신해 은찬이 그 시선을 차단시켰다. 동만의 앞을 가로막고 그 남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사람을 왜 그렇게 보세요?”
그는 털을 잔뜩 세우고 예민하게 구는 은찬을 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싱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사과도 칼같이 했다.
“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나 사실 오늘 이주한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찾으러 온 거거든요. 내가 가지고 있는 단서는 이름 두 개인데, 그 두 사람 중 한 명이 고양이 수인이면 답은 뻔해서. 그래서 그렇게 봤던 거예요.”
고양이 수인이면 답은 뻔하다? 이게 무슨 말이야.
이주한이 좋아하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남자의 말에 은찬은 저도 모르게 긴장됐다. 무엇보다 이 남자는 이주한과 그런 사이가 확실했다. 이 자식은 애인도 있으면서 자신에게 그런 제의를 한 건가? 순간 이러다 로비에서 이주한 때문에 치정 싸움이 일어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은찬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이번에는 동만이 나섰다.
“부장님이 좋아하는 사람하고 우리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러세요?”
“정말 몰라요? 혹시 이주한한테서 별다른 말 못 들었어요? 뭐 사귀자든가 그런 거.”
들었다. 지금 은찬이 강제적으로 사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남자는 동만에게 대놓고 물었다. 역시나 대답은 뻔했다.
“아니요.”
“이상하네……. 그때 그 분위기가 딱 돌진할 분위기였는데.”
남자의 예쁜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곧이어 그는 묻지도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왜 김동만 씨라고 생각하느냐면, 그 자식이 고양이 수인을 엄청 싫어하거든요. 예전에 그 녀석 밑으로 고양이 수인이 하나 들어 왔는데 진짜 멍청하다고 욕을 얼마나 하던지. 말도 마요. 그때 그 고양이 수인 욕 들어 준다고 마신 술이 몇 병인지 모른다니까. 제발 좀 그만뒀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하소연을 하던지. 물론 그 수인이 은찬 씨를 말하는 건 아니에요. 이 회사에 고양이 수인이 은찬 씨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아니, 이 회사에 고양이 수인은 유은찬뿐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남자는 노골적으로 동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주한 취향을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김동만 씨 주한이하고 자 봤어요? 어때요? 끝내주죠?”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앞뒤 안 가리고 던진 남자의 질문에 은찬은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물론 동만은 감정 없는 톤으로 딱 잘랐다.
“아니요. 저 부장님하고 그런 사이 아닙니다. 모르시나 본데, 제 애인은 여기 있는 이놈이거든요!”
갑자기 동만이 은찬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았다. 어지간히도 그 말이 싫었던 모양이다. 스스로 은찬과 사귄다고 이곳에서 크게 말할 정도니까. 회사 로비에서 당당하게 연인 사이라고 밝히는 동만의 행동에 남자는 진심으로 충격받은 눈치였다. 동공 지진을 일으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예요? 두 사람 사귄다는 거 진짜? 그럼 뭐야. 이 자식, 애인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였어? 그것도 인간 남자를? 눈이 왜 이렇게 낮아진 거야?”
이주한이 김동만을 좋아한다는 전제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이주한이 버럭 소리쳤다.
“이리한!”
“헉!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특히 김동만 씨! 나 그쪽한테 물어볼 거 많거든요? 우리 다음에 또 만나요!”
이주한과 약속을 했다는 말은 누가 봐도 거짓말인 게 분명했다. 이주한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남자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은찬은 남자를 쫓아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이주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새끼, 나를 얼마나 욕하고 다녔는지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다.”
“……그러게. 내가 어떻길래 부장 눈이 낮아졌다는 말을 듣는 거냐.”
자신이 부장과 그런 사이로 오해받은 것보다 다른 것에 상처받은 동만의 씁쓸한 물음에 은찬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눈, 코, 입 따로 보면 너도 꽤 괜찮아.”
“야아! 그게 더 기분 나쁘거든!”
제 딴에는 생각해서 한 말이건만 동만은 버럭 화를 내며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던 은찬은 녀석이 화내는 이유를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동만이 까 주는 치즈만 냠냠 받아먹기 바빴다.
이주한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침묵하는 이주한의 모습에 긴장한 팀원들은 눈치를 보며 소리 없는 대화를 시작했다. 분명 회장실로 불려 가기 전까지는 나름 컨디션이 좋았던 그였다.
[부장님 또 왜 저러는지 아는 사람?]
[회장님한테 깨진 거 아닐까요?]
[왜?]
[우리가 마케팅 2부서보다 실적이 안 좋아서?]
[아닌데. 나름 괜찮은데? 리조트 건도 있고. 이번 주는 H 호텔에서 미팅도 잡혀 있잖아. 이 정도면 선빵 친 거지. 그전에는 이 마케팅이 귀찮다고 던진 자질구레한 일만 처리했었잖아.]
[이거 원래 2부서 애들이 다 밑밥 깔아 놓은 거 우리가 거저 얻은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걔네 우리한테 이 갈고 있는 거 아시면서. 그러니까 우리 이번 일 진짜 열심히 해야 돼요. 부장님 욕 안 먹게. 그래도 이 회사에서 우리 부서 생각해 주는 사람 부장님밖에 없다니까요?]
박주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의 시선이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주한에게 집중됐다. 이주한의 시선 끝자락은 유은찬이었고 자연스럽게 은찬은 모두의 표적이 돼 버렸다.
[유은찬 씨 또 사고 쳤어요?]
단체 채팅방을 관람하고 있던 은찬이 드디어 한마디 남겼다.
[아니요.]
[은찬 씨도 나름 힘들겠지만, 부장님 말씀 잘 들어. 들어서 나쁠 건 없잖아. 오늘 보니까 부장님 은찬 씨 많이 챙기던데.]
[동만 씨하고 사귀는 것도 부장님이 먼저 아시고 눈감아 주셨다면서요? 저렇게 좋은 분 보기 힘들지.]
한때 다 같이 합심하여 이주한을 욕했던 게 얼마 전이건만 이제는 우리 부장님이라며 떠받들기 바빴다. 오늘 아침 사내 게시판에 마케팅 1부서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1년 동안 실적이 미비했던 마케팅 1부서가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보다 못한 이주한 부장이 나선 것이라고.
팀 내 게이 커플을 눈감아 준 것도 모자라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부서를 살리려고 애쓰고 있는 이미지 때문에 이주한의 주가는 지금 떡상 중이었다.
때아닌 죄인으로 몰린 은찬은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팀원들을 흘낏했다. ‘아니거든요! 저 자식이 여기로 온 건 그런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 나하고 자고 싶어서, 어떻게든 명분을 만들려고 온 거라고요!’라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팀원들의 살벌한 시선에 씨익 웃었다.
“야,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좀 써 봐. 애인이 뭐 이래? 내 편 좀 들어 줘야지!”
가만히 단체 채팅방을 보고 있는 동만에게 복화술로 따지자 녀석은 귀찮은 투로 속삭였다.
“야, 이럴 때일수록 공과 사는 가려야 해. 아니면 나까지 눈치받는다니까?”
애인이라는 새끼가 저 혼자 살겠다고 모른 척하겠단다. 이래서 네가 연애를 못 하는 거다. 은찬이 눈으로 동만을 욕하고 있을 때였다.
“유은찬 씨.”
사무실로 돌아온 이래 계속 침묵하며 은찬을 노려보던 이주한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천천히 은찬의 자리로 다가왔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네? 아, 네.”
은찬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이주한의 발이 빠른 속도로 김동만의 의자를 차는 걸 보았다. 속수무책으로 의자에서 떨어진 동만을 뒤로하고 은찬은 재빨리 이주한의 뒤를 쫓았다.
그가 향한 곳은 옥상도 커피숍도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최종 목적지는 임원 회의실이었다. 일개 사원은 꿈도 못 꿀 장소에 도착한 은찬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뭘 그렇게 봐.”
“……네……? 신기해서. 그런데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문 앞에 덩그러니 선 은찬을 보며 이주한은 피식 웃었다.
“안 되지. 아무나 들어 올 수 있는 데가 아니거든.”
“그런데 왜…….”
왜 하필 여기냐는 시선에 그는 은찬의 팔을 잡아 창가 쪽으로 향했다. 옥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졌기에 딱히 놀랄 것도 없었다.
“너하고 조용히 있을 수 있는 데가 여기밖에 생각 안 나서. 마음에 안 들어? 별로야?”
뭔가 거창한 리액션을 바라는 듯한 뉘앙스에 은찬은 즉각 대답했다.
“아니요. 완전, 좋아요.”
“그렇다고 감정 없이 말하지는 말고.”
“……하하하.”
티 났나 보다. 오늘 어떻게 해서든 그와 단둘이 있는 자리를 피했건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대면 신청을 해 버리면 피할 도리가 없었다.
“왜? 나랑 이렇게 있는 거. 애인 눈치 보여?”
은찬의 난처한 표정을 마음대로 해석한 이주한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은찬을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은 은찬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빨리 정리해. 회사 사람들 시선 때문에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커버 쳐 줄게. 그리고 지금 사는 집에서 나와. 내가 다른 집 알아봐 줄 테니까.”
“……그렇게 당장은 조금 무리인데.”
“뭐가 무리야. 김동만이 못 가게 잡아? 그런 거야?”
아니. 내가 싫다고. 은찬은 자신의 등을 쓸어 만지고 있는 이주한의 손길이 신경 쓰였다. 이 와중에도 그의 몹쓸 손은 은찬의 등줄기를 타고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시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갑자기 이러시면 저도 곤란해요.”
일단 시간을 질질 끌면서 이주한이 은찬에 대한 흥미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불과 이틀 만에 이렇게 독촉할 줄이야.
“그 자식하고 주말에 별일 없었지?”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도 전에 이주한은 은찬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깊이 빨아들였다. 멀뚱히 선 채 눈을 끔벅이던 은찬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표범이 개 같은 짓이나 하는 이 상황. 아무도 없는 방 안에 밀회를 하는 그들은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특히 이주한이 뻔뻔하게 내뱉는 말은 대부분 불륜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대사였다.
“아까 둘이서 무슨 말 했어.”
“네?”
“좀 전에 속닥거렸잖아.”
별 시답지 않은 것까지 보고해야 하는 제 신세에 은찬은 입안이 썼다.
“그냥…… 뭐. 별일 아니에요.”
“별일 아닌 거 뭐. 내가 그 자식하고 말 섞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앞에서 눈도 마주치지 마.”
이주한은 은찬의 얼굴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아이같이 칭얼거렸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애인 이전에 회사 동료라고 이 자식아. 크게 따지고 싶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행여나 또 화낼까 싶어 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찬.”
“…….”
“대답해. 유은찬.”
이주한의 달콤한 목소리에 은찬은 울고 싶어졌다. 차라리 목에 핏대를 세우고 욕을 해 주는 게 더 심적으로 편할 것 같았다.
“……네.”
“저녁에 뭐 해. 오늘 약속 없지?”
“……있어요.”
“누구?”
“오랜만에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없지만 갑자기 생겼다. 애인과 약속이 있다고 하면 뭐라고 할 것 같아서 은찬은 다른 걸로 둘러댔다. 하지만 이주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친구 누구?”
“어…… 저, 그게.”
“바로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딱히 친한 건 아닌가 보네. 취소해. 오늘 나하고 밥 먹자. 너 좋아하는 고등어회 잘하는 집 알아놨으니까.”
그래, 너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나도 이제 모르겠다. 체념한 은찬은 그냥 웃었다.
“아까 말이야. 이리한 그놈이 뭐라고 했어?”
“네? 누구…….”
“아까 너 붙잡고 말하던 놈. 로비에서.”
“아……. 왜요?”
그 남자 이름이 이리한 인가보다. 잠시 잊고 있던 남자가 생각난 은찬은 이주한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주한이 왜 이곳으로 데려온 지 알 것 같았다.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거다.
“부장님. 그분이랑 무슨 사이세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은찬의 물음에 이주한의 표정이 빠르게 달라졌다. 타이밍을 놓쳐버린 그는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친구. 친구라고 했잖아.”
“진짜 친구 맞아요? 아닌 것 같던데.”
“친구야.”
“잤어요?”
어지간하면 뻔뻔하게 나갈 텐데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케이! 됐다! 은찬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리한의 존재 덕분에 오늘 저녁 이주한과의 만남을 피할 방법이 생겼다. 비단 오늘뿐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끊어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은찬은 싸늘한 톤으로 말을 이었다.
“아까 그분이 그러던데. 부장님이 자기 밑으로 들어온 고양이 수인 욕을 그렇게 했다고. 얼마나 싫어했는지 모른다고. 그거 나죠? 내가 그렇게 싫었어요?”
“…….”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세요?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오해 아니잖아요. 몇 달 전까지 그랬잖아요. 나랑 그렇게 자고 싶었어요? 저요! 살짝 부장님한테 흔들리고 있었는데. 아까 그 말 듣고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세요? 그분 친구 아니죠? 부장님 애인이죠? 아니면 섹파예요?”
“내 말 좀 들어 봐. 그게 아니라.”
“됐고요. 나 오늘 로비에서 치정 싸움 벌어지는 줄 알고 얼마나 쫄았는지 아세요? 나도 나지만! 그쪽부터 정리하고 왔어야죠! 게다가. 난! 나 그렇게 씹고 다니는 사람! 별로예요!”
이주한의 가슴을 밀치며 은찬은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타당한 이유를 말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주한이 돌연 허탈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도 내 욕 했잖아.”
“…….”
치사하게 그걸 꼭 들먹여야겠냐. 에라이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 보자. 은찬은 눈을 부릅뜨며 따졌다.
“그러니까요! 애초부터 우리는! 이러면 안 되는 사이였어요! 안 된다고 했잖아요! 부장님이 왜 나한테 관심 가지는지도 모르겠고! 그 관심! 진짜 불편해 미칠 것 같거든요? 모르시죠? 사람 피 말려요! 부장님 종족 어쩌고 하셨죠? 우리 고양이는요! 한번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마음 잘 안 주거든요? 그건 모르셨나 보네! 내 욕을 그렇게 하고 다녔다는데! 내가 미쳤어요? 그쪽하고 사귀게?”
“그쪽?”
“왜요? 부장님 대우받고 싶으세요? 그럼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세요! 사무실 분위기 더럽게 만들지 말고!”
일단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더니 속은 시원하지만,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이주한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한 대 칠까 봐 슬그머니 배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을 때였다.
“서로 욕한 거 알았으니까 비겼잖아.”
예상과는 달리 이주한은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네?”
“난 내 귀로 직접 들었거든. 나 엄청 씹은 거. 나 머리 좋은데. 일일이 다 말해 줘? 1년 내내 나 씹었잖아.”
“…….”
“거짓말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사실대로 말할게. 그 녀석하고 한때 잔 사이 맞고. 네 욕 한 것도 맞아. 하지만 지금은 깨끗하게 끝났어. 네가 먼저 날 욕했으니까. 나도 너 없는 데서 욕할 수 있는 거잖아. 알다시피 나 그렇게 마음이 너그러운 편은 아니거든. 그리고 나 구질구질하게 연애하는 타입 아니야. 귀찮은 거 딱 질색이라고. 나도 네가 예전에 나 욕하고 다닌 거 알지만 네가 좋으니까 애인 있는 놈한테 매달리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불편해도 참아. 피 말려도 참아. 난들 좋아서 너하고 이렇게 시작하고 싶겠어? 네가 그놈이랑 당장 못 헤어진다며. 좋아하는 놈이 다른 놈하고 귓속말하고 붙어 있는데 어떻게 눈이 안 뒤집혀. 그 자식 목을 안 비튼 것만 해도 다행으로 알아.”
“…….”
“나한테 흔들렸다고. 그건 듣기 좋네.”
구색 맞추려고 넣은 말에 이주한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계획과 달리 전개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감지한 은찬은 망연자실했다. 지금 제 얼굴을 안 봐서 모르겠지만, 엉망진창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이주한에게는 다르게 보였나 보다.
“불안해하지 마. 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쓰레기도 개새끼도 아니니까. 장난삼아 이러는 것도 아니고.”
이러려던 게 아닌데……. 이 새끼 진심이다. 정말 이렇게까지 밀어붙였는데 이러는 걸 보면 진심이 분명했다. 그래서 은찬은 더 무서웠다. 제 무덤을 제가 판 것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감동했어? 왜 울려고 그래.”
아니, 어쩌면 도망칠 마지막 기회가 사라진 것 같아서. 내 미래가 안 보여서.
“자리 너무 오래 비워도 눈치 보이니까. 이쯤하고 가자.”
마지막으로 이주한은 은찬의 이마에 입술 도장을 찍고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까지 그는 은찬의 손을 깍지 껴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누가 볼까 무서워 두리번거리는 은찬과 반대로 이주한은 아주 태연했다. 마치 누군가 봐 주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아, 어디 아파? 아니면 살이 좀 찐 건가. 배가 조금 나온 것 같은데. 보기 싫다는 건 아니고. 귀여워서.”
사무실 들어가기 직전. 그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은찬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
바람대로 은찬과 저녁까지 함께한 이주한은 굳이 데려다주겠다며 오피스텔 건너 갓길에 차를 세웠다.
지금 시간은 10시 15분. 밥 한 끼 먹는데 무려 세 시간 이상 걸렸다. 월요일 저녁부터 제일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놈과 저녁까지 먹은 은찬의 기분은 그야말로 똥이었다.
“유은찬.”
“네?”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잔 마시고 가라는 소리 안 해? 나 들어가 보고 싶은데.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하고.”
이주한의 시선이 길 건너 높은 오피스텔을 훑었다. 뻔히 김동만하고 한집에 사는 거 알면서 그런 제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하기야, 상식이 있는 놈이면 이러지도 않겠지.
“안 돼? 왜? 그 자식 눈치 보여? 오늘 나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며.”
이주한은 이주한이고 회는 회였다. 고등어회가 무슨 죄가 있겠나 싶어 정신없이 먹고 있을 때 이주한의 기습 질문에 은찬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애인한테 뭐라고 하고 나왔냐고 묻길래 순간적으로 존칭을 빼 버린 ‘부장’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놀라운 점은 그는 거기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밥을 먹는 내내 은찬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싫어하는 색깔은 뭔지. 주말에는 주로 뭐 하는지. 사소한 것을 물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물론 은찬이 느끼기에는 취조당하는 기분이었지만.
“시간도 늦었고……. 다음에.”
시간을 핑계로 내세우자 이주한의 시선이 시계를 힐끔거렸다.
“아직 12시도 안 됐는데?”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소파에 드러누워 시원한 캔 맥주에 동만이 구워 준 쥐포를 씹고 있었을 시간이었다. 한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산산조각 내 버릴 줄이야. 은찬은 아직도 워크숍에서 개다래 술을 마시고 이주한을 꾄 자신을 원망했다.
“내일 출근하려면 일찍 자야 해서……. 이만 들어가 볼게요. 오늘 잘 먹었습니다.”
예의상 인사를 던지고 얼른 도망치려는데 이주한이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아, 왜! 밥 먹자 해서 먹어 줬으면 이제 좀 보내 주라! 너랑 있는 거 불편해 미치겠다고! 은찬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열어 달라는 시선을 던졌다.
“그렇게 빨리 애인이 보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나한테서 도망치고 싶은 거야?”
더럽게 눈치 한번 빠르네. 은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그런 은찬을 뚫어지게 보더니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너 나한테만 그러더라? 그거.”
“네? 뭘요?”
이번에는 뭐로 꼬투리를 잡나 싶어 눈이 커졌다. 그때였다. 이주한이 손을 뻗더니 돌연 은찬의 뺨을 꼬집었다. 밀려오는 고통에 은찬은 인상을 쓰며 버럭 소리쳤다.
“아프잖아요! 아프다니까요!”
“내가 언제까지 그러나 두고 불랬는데. 나만 보면 습관처럼 그런다? 그거 진짜 기분 나쁘거든?”
“뭐가요!”
살짝이 아니라 정말 감정을 듬뿍 실은 행위에 은찬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비싼 밥 사 주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예의상. 가식적으로 웃지 마.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면서 유독 나한테만 그러는 이유가 뭐야? 나한테 아직 앙금 있어?”
지금도 이러는 데 없다면 거짓말이지. 하지만 은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교묘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저 빨리 가야 해요. 동만이 전화 오기 전에.”
“보내 줄게. 그 전에 대답해. 설마 나 좋아하는 척 연기하는 건 아니지?”
정확히 허를 찌르는 말에 은찬은 숨을 들이켰다. 이 자식 비위 맞추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웃어도 지랄. 안 웃어도 지랄. 뭐 어쩌란 말인 거야.
“웃지 말까요?”
시큰둥하게 던진 말에 그는 뺨을 꼬집던 손을 거뒀다. 그리고 씩씩거리는 은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 애인하고 똑같이 해 줘. 선 긋는 듯한 가식적인 얼굴 말고. 김동만한테 내 욕할 때처럼 화도 내고 욕도 하고. 앵무새처럼 대답만 하지 말고 네가 먼저 조잘조잘 떠들어 보라고.”
이주한의 요청에 할 말을 잃은 은찬은 눈만 끔벅였다. 바라는 것도 참 많다. 이주한의 연애는 쿨할 줄 알았더니 알면 알수록 진짜 사람을 질리게 하는 스타일이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은찬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대답 안 하면 오늘 집에 들어가긴 그른 것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난 네가 날 편하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사무실에서 김동만 대할 때 보면. 솔직히 질투 나거든.”
아, 예. 그러셨어요? 그래서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봤냐? 이주한의 솔직한 고백에 순간 은찬도 입안이 간질간질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에 물어보는 건 웃기지만 진짜 진심으로 궁금했다.
“저도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니까. 뭐든. 나에 대한 거면 다 말해 줄게.”
이주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질문에 대한 기대감에 눈을 반짝였다. 사실 은찬이 처음으로 그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제가 어디가 그렇게 좋으세요? 이리한 그 남자처럼 잘생긴 타입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고. 부장님 말대로 머리도 멍청하고 사람 말귀도 못 알아듣는 멍청한 고양이 수인이잖아요.”
“인성 개쓰레기에 성격 파탄자 개새끼가 너 좋아해서 별로야?”
이걸 또 이렇게 받아치네. 괜히 물어봤나. 은찬과 이주한은 서로를 바라보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급 피곤함이 몰려온 은찬은 서둘러 인사를 고했다.
“저 진짜 가 볼게요.”
다행히 이번에는 잡지 않았다. 차 문은 열렸고 그는 한쪽 발이 바닥에 닿은 은찬의 등에 대고 뒤늦은 대답을 던졌다.
“미운 정도 정이겠지. 그냥, 돌아서니 네가 눈에 들어와서. 남 주려니 화가 나서 미치겠더라고.”
“네?”
제대로 듣지 못한 은찬이 고개를 획 돌려 되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들어가고. 들어가서 자기 전에 연락해. 기다리고 있을게.”
“꼭 해야 해요?”
“왜? 눈치 보여?”
요즘 이주한은 말끝마다 저런 질문을 던졌다. 눈치는 자기가 보고 있으면서. 회사에서 만나는데 굳이 눈치 보며 연락할 필요도 없는 것 같은데. 솔직히 귀찮아서 그런다.
“그래도 해. 너 자는 거 알고 싶으니까.”
예전 애인한테도 이랬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을 정말 귀찮게 하는 타입이다. 대답 대신 습관적으로 웃으려던 은찬은 그의 미간에 생긴 주름을 보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할게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서둘러 오피스텔로 들어간 은찬은 단숨에 집까지 질주했다. 현관문이 쾅 닫히자마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잠시 이주한이 뒤쫓아 올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홀몸도 아닌 놈이 왜 그렇게 뛰어다녀?”
현관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던 은찬은 소파에 반쯤 누워 맥주를 마시고 있는 동만을 발견했다. 부럽다. 고민 하나 없는 행복한 모습이. 불과 얼마 전까지 제 모습이었다.
“부장이랑 밥은 잘 먹고 왔어? 나 빼고 먹으니까 맛있더냐?”
“……어, 뒈지게 맛있더라. 비싼 건 달라. 입에서 살살 녹아.”
터벅터벅. 힘없이 걸음을 내디딘 은찬은 동만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녀석이 마시던 맥주로 손을 뻗었다.
“어허! 이게 어디다 손을 대? 목마르면 저기 가서 물이나 마셔!”
은찬의 손을 매섭게 찰싹 내려친 동만이 부엌으로 턱짓을 던졌다. 입맛을 다시던 은찬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물 줘.”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가서 네가 먹어. 오자마자 사람 부려 먹고 난리야!”
“물 줘.”
“……가서 먹으라니까? 그거 몇 걸음이나 된다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잖아!”
“물 줘. 목말라.”
“…….”
“물 줘.”
김동만은 은찬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찬은 외쳤고 결국 이겼다.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동만이 은찬 앞에 물을 대령했다. 하지만 고양이 수인 유은찬은 까다로웠다.
“나 얼음물 싫어. 미지근한 물.”
“그냥 주는 대로 처먹어!”
“싫어. 차가운 물.”
“날도 더워 죽겠는데……! 생각해서 얼음물 가져왔더니!”
“싫어. 그냥 물.”
“……내가 아주 그냥 상전을 모시고 산다! 모시고 살아.”
늘 이래 왔기에 은찬은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했다. 동만이 사라진 소파를 점령한 은찬은 늘어지게 몸을 쭉 폈다.
“아, 좋다.”
“너 혼자 좋겠지, 너 혼자!”
은찬의 요구대로 미지근한 물로 바꿔 온 동만은 그것을 거칠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저리 좀 가. 소파를 너 혼자 다 차지하냐?”
분노가 느껴지는 녀석의 말투에 은찬은 다소곳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물을 홀짝홀짝 마시며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니고 이 정도로 화낼 만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평소와 다른 동만의 행동에 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뭐가.”
동만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마시다가 만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은찬이면 몰라도 동만은 궁상맞게 집에서 이러고 있을 놈이 아니었다. 퇴근 전까지만 해도 혼자 맛있는 거 시켜 먹겠다며 놀리던 녀석이 왜 이러고 있지?
“뭔데? 너 원래 혼자 술 안 마시잖아. 왜? 무슨 일인데.”
“왜? 난 혼자 술 마시면 안 되냐?”
김동만답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며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곧이어 녀석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갔다. 김동만에게서 무거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어쩐 일인지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그런 동만을 말없이 바라보던 은찬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본인이 말하기 싫다는데 어쩔 수 있나. 뭔가 말 못 할 일인 것 같아서 더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
“안 될 거 없지.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
“썸 타던 여자가 있었어.”
언제? 분명 얼마 전에 썸이 끝난 거로 알고 있는데. 그사이에 여자라도 생겼나?
동만은 캔 맥주를 만지작거리며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어디서 또 본 거는 있어서 저렇게 있으면 멋있어 보이는 줄 아는가 보다. 할 말은 많지만 제 기분도 그리 좋지 않았기에 녀석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난 우리가 그날 끝난 줄 알았거든. 그런데 오늘 퇴근 시간에 딱 맞춰서 연락이 온 거야. 술김에 지운 줄 알았던 그녀의 번호가 내 폰에 그대로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녀의 이름이 액정에 딱 떴을 때! 나, 진짜 떨렸었거든? 근데, 근데……!”
뭔데 저래. 은찬은 캔 맥주를 꽉 쥐고 눈시울을 붉히는 동만을 시큰둥하게 응시했다.
“전화를 받았더니 다짜고짜 나한테 욕을 막 하는 거야! 나보고 자기 가지고 장난쳤다고!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면서!”
“너 뭐 잘못한 거 있어?”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는 동만과는 반대로 은찬은 심드렁했다. 김동만이 잘못했겠지 하는 투로 묻자 녀석의 검지가 은찬을 가리켰다.
“너! 너 인마, 너 때문에 그런 거잖아!”
“나?”
“회사 사람 지인의 지인이라고! 너랑 사귄다고 소문나는 바람에 내가 지금 이런 수모를 겪고 있는 거잖아!”
“……아. 그렇구나.”
“아, 그렇구나? 그게 다야? 그거 다냐고!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내가 웬만하면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냥 혼자 맥주 먹으면서 삭히려고 했는데! 너는 오자마자 나한테 이딴 물심부름이나 시키질 않나! 내가 네 종이냐? 어?”
어차피 그 여자하고 안 될 사이였으면서. 그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은찬은 씨익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야, 잘됐어! 그런 여자한테 네가 아까워! 솔직히 그 여자 어장 관리하는 것 같더만. 너 말고도 남자 많았을걸? 이게 어디다 대고 우리 동만이한테 욕을 해? 핸드폰 줘 봐! 번호 저장돼 있지? 내가 너 대신 분노의 욕을 날려 줄 테니까!”
“됐어……. 이미 끝난 거. 번호 아까 지웠어.”
방금 전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따지던 놈이 풀이 팍 죽어서 한숨을 팍 내쉬었다.
“야, 내가 진짜 괜찮은 여자 소개해 줄 테니까 미련 갖지 마. 여자들이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그래. 너처럼 진국인 놈이 또 어디 있냐? 집안일 잘하지. 착하지. 직장 좋지.”
“내가 소개팅을 쭉 받아 보니까. 집안일 잘하고, 착하고, 직장 좋은 것보다 일단 얼굴이 반 이상 먹고 들어가더라. 하아……. 적금 깨서 수술이나 할까 봐. 눈이랑 코만 좀 만지면 좀 괜찮지 않을까?”
솔직히 은찬은 그 의견에 번쩍 손을 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한참 동안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고뇌하던 동만은 뒤늦게 현실로 돌아왔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밥만 먹었냐?”
“그럼 밥만 먹었지.”
“늦길래 난 또 자고 오는 줄 알았지.”
“미쳤냐?”
“아니 왜, 제주도에서도 그랬잖아.”
“……치사하게 그 일은 들먹이지 말자? 넌 금기 사항도 모르냐?”
“그러니까 일찍일찍이 다녀. 요즘 너 어디 내보내면 조마조마해서 죽겠다. 어디 가서 사고치고 다닐까 봐. 뭐…… 더 이상 치고 다닐 사고도 없지만 애를 생각하라고. 배에 두 마리나 넣고 어딜 그렇게 쏘다녀. 밥 먹었으면 집에 곧장 와야지.”
김동만의 잔소리는 은찬을 위한 게 아니라 배 안에 있는 꼬물이들을 위한 잔소리였다.
“아, 몰라! 이 정도면 일찍 온 거지! 안 보내 주는데 어떻게 하냐? 지금도 겨우 도망친 거거든?”
은찬이 짜증을 가득 담아 던진 말에 동만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날아왔다.
“자꾸 이런 말 들먹여서 좀 그렇긴 한데. 진짜 부장하고 잘해 볼 마음 없어? 누가 아냐? 너한테는 진짜 진심일지? 너도 알잖아. 부장 틈만 나면 나 죽일 듯이 째려보는 거. 온종일 등골이 서늘해서 미치겠다. 나 이러다 정년퇴직은커녕 권고사직 당할지도 몰라.”
브라보 김동만. 요즘 녀석의 눈치가 나날이 상승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말대로 이주한은 진심이었다. 오늘 저녁을 먹으면서 확신이 든 은찬은 그래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
“잘해 보면, 그다음은?”
“그다음이라니?”
“너하고 내가 짜고 엿 먹였다는 거. 그거 잘 넘어가고 그 자식이랑 내가 사귀게 됐다 쳐. 그다음 말이야. 드라마처럼 해피엔딩 같겠냐?”
“그게 왜? 그럼 잘된 거 아니야?”
눈을 끔벅거리며 되레 묻는 동만의 질문에 은찬은 한쪽 입술을 비릿하게 올렸다. 이런 면에서는 동만은 아는 게 참 없다.
“우리 회사가 누구 거냐?”
“회장님이지?”
“그럼 그 회장의 하나뿐인 손자가 누구?”
“이주한이지.”
“재벌이 평사원하고 사귀면, 그것도 남자랑 사귀면 회장님이 참 좋다고 하시겠다.”
서서히 동공이 커지던 동만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애가 있잖아! 애가 있는데 무슨 문제야?”
“그래서 더 문제지. 너 내가 처음에 임신했다고 했을 때 믿었어, 안 믿었어?”
“못 믿었지…….”
은찬 스스로도 임신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을 만큼 황당무계했다. 하물며 그걸 이주한을 믿게 한다는 것도 어렵거니와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어쨌든 그건 믿게 해 주면 돼. 더 중요한 건 그 자식 마음이지. 너는 하룻밤 원나잇 상대가 임신했다는 소리를 들어 봐. 어떨 거 같아? 좋아하는 상대라고 해도 마냥 좋을 수는 없는 거잖아. 애 키우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아빠가 된다는 걸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사람한테 무슨 말을 어떻게 해. 그리고…….”
말을 하다 말고 말꼬리를 흐린 은찬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기엔 내가 이주한 욕을 너무 개같이 많이 해서……. 양심에 좀 찔리기도 하고.”
“그러니까. 작작 좀 하지. 괜찮아. 부장도 너 욕 엄청 했잖아. 그럼 비긴 거지. 그걸로 퉁 쳐. 좋네.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더 이상 동만과 대화할 의지가 사라졌다. 얼른 씻어야겠다고 생각한 은찬이 일어나려고 하자 동만은 재확인하듯 다시 물음을 던졌다.
“진짜 잘해 볼 마음 없어?”
“너 그 새끼한테 사주받았냐? 왜 자꾸 묻는 건데?”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지.”
“없어! 없다고! 이때까지 내가 설명해 줬잖아! 잔말 말고 이주한이 나한테 떨어질 방법이나 생각해 봐!”
“애인까지 해 줬는데 다른 방법도 필요해?”
“안 먹히니까! 지금 나는 너하고 사귀면서 그 자식하고도 사귀고 있는 거라니까? 전세 역전됐잖아! 애인은 넌데, 너하고 손만 잡아도 손모가지 부러뜨린다잖아!”
동만은 제 손을 슬그머니 보더니 다시 생각에 잠겼다. 몇 초 뒤 녀석은 능글맞게 웃으며 한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사람 질리게 하는 데는 이것 만한 게 없지.”
“뭔데?”
은찬은 귀를 쫑긋 세웠다.
“귀찮게 해 봐.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예를 들어?”
“부장님. 나 이거 먹고 싶은데 이거 사 주면 안 돼요? 부장니이이임, 나 이거 가지고 싶은데 이거 사 주면 안 돼? 이런 식으로?”
혀를 반 토막 낸 말투로 지껄이는 동만의 모습에 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제 모습이 흉했다는 걸 아는지 녀석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게 직방이지. 한두 번이면 모르는데. 계속 그러면 있던 정도 떨어질걸?”
“오, 김동만! 너 머리 좋다? 연애 빼고는 다 잘하는데?”
“……이다음부터는 혼자서 해. 난 손 뗄 테니까.”
은찬이 칭찬으로 던진 말에 동만은 싸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찬은 황급히 녀석의 옷자락을 잡았다.
“농담이지. 야, 그럼 시도해 볼까?”
마지못해 앉은 동만은 지금 당장이라고 말했다.
“지금?”
“지금.”
이주한과 헤어진 지 정확히 15분. 은찬은 핸드폰과 시계를 번갈아 보며 고민에 빠졌다.
“뭐라고 해?”
“너 지금 먹고 싶은 게 뭐야?”
“아이스크림.”
“오케이! 그걸로 하고. 여기서 차타고 40분 거리에 있는 서른 가지 맛 아이스크림 가게 거 먹고 싶다고 해. 그거 직접 가서 사 오라고.”
동만과 은찬은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며 작당하기 시작했다.
“사 올까? 너 같으면 할 거 같아?”
“미쳤냐. 왕복 한 시간 반이다. 그리고 지금 시간을 봐. 미안하다고 안 된다고 하잖아? 그럼 그걸 꼬투리 잡아서 싸워.”
“진짜 사 오면?”
은찬의 물음에 동만은 표정 변화 없이 말했다.
“맛있게 먹어야지.”
“…….”
이 새끼부터 손모가지를 부러뜨려 버릴까. 은찬의 살벌한 시선에 동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야, 처음 한 번은 사 올 수 있어. 아주 드물지만 사 올 수 있다 치고. 계속 쭉쭉 밀고 나가는 거지.”
“계속해 주면?”
“너 무섭다? 물에 떠내려가는 거 살려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심보네! 계속해 주면 진짜 너를 그만큼 사랑하는 거겠지! 일단 전화부터 해 봐.”
왠지 함부로 시작하면 안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딱히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고……. 까딱하다간 진짜 감정도 없이 사귀게 될 것 같은 흐름을 직감했지만, 은찬은 눈 딱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주한은 누르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동만은 핸드폰을 들고 멍하니 있는 은찬에게 얼른 말하라는 신호를 던졌다.
“아. 저…… 부장님.”
[먼저 전화를 다 하네.]
처음으로 은찬이 먼저 전화를 한 것에 대해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도착…하셨어요?”
[아니, 아직. 왜? 이렇게 전화해도 돼? 그 자식은?]
은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제 옆에 찰싹 붙어 핸드폰을 빤히 보고 있는 동만을 쫓았다.
[옆에 없어?]
“화…화장실 갔어요. 똥 싸러.”
왜 하필 똥이냐며 동만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따졌다. 그럼 어째. 생각나는 게 그것밖에 없었는데.
[그래? 변비였으면 좋겠는데. 너랑 오래오래 통화하려면.]
이주한의 저주에 동만은 핸드폰을 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저,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한데. 갑자기 부탁할 게 생겨서요…….”
[무슨 부탁? 말해. 다 들어 줄 테니까.]
핸드폰 너머 들리는 이주한의 목소리가 얼마나 달콤한지 숨죽여 듣고 있던 동만은 참지 못하고 토악질하는 시늉을 했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데, 사 주실 수…… 있나 해서.”
[지금?]
“……지금이요. 안 될까요?”
[편의점 가서 사다 주면 돼?]
그럴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은찬은 동만이 시키는 대로 왕복 한 시간 반이 걸리는 서른 가지 맛 아이스크림 가게를 콕 찍었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사다 줄 것 같았던 이주한은 말을 바꿨다. 미안하다며 내일 사 주겠단다.
“괜찮아요. 안 먹어도 돼요. 들어가서 쉬세요.”
통화를 끊자마자 은찬과 동만은 손을 붙잡고 환호를 질렀다. 내일부터 그거 하나도 못 사 주냐는 식으로 꼬투리 잡을 생각에 신이 났다. 그러다 은찬은 진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서 동만에게 물었다.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있지?”
“없어. 저번에 네가 다 먹었잖아. 잘 밤에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얼른 씻고 자.”
괜히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그랬나. 딴 걸 사 달라고 할걸. 아쉬운 마음에 은찬은 입맛을 다셨다. 얼른 씻고 나와 티브이 좀 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자려고 누운 채 이주한에게 보고성 메시지를 보냈지만, 웬일인지 연락 한 통 없다.
자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잠들기 직전,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무심코 핸드폰을 잡고 확인한 은찬은 그 자리에서 헉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왜에?”
반쯤 잠에 취한 동만의 물음에 은찬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주한 부장이 우리 집 앞에 있대!”
“뭐?”
옆 침대에서 동만이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났다. 은찬이 너무 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문 앞에 뭐 놓고 간다는데?”
후다닥 뛰쳐나간 은찬은 앞에 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활짝 열었다. 방금 전까지 이주한이 있었던 자리에는 하얀 아이스박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곧이어 다시 진동이 왔다. 당연히 이주한의 메시지였다.
[무슨 맛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한 가지씩 다 사 왔어. 맛있게 먹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이걸 좋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은찬의 뒤로 수북이 쌓인 아이스박스를 눈으로 확인한 동만의 혼잣말이 들렸다.
“재벌은 스케일이 다르네, 달라. 미친 거 아니냐? 이 밤에 저걸 왜 사 온 건데?”
네가 시켰잖아. 은찬은 뻔뻔스럽게 말하는 김동만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일단 그것들을 다 안으로 들여놓았지만 얼마나 많은지 냉장실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때마침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 은찬이 먹을 만큼 먹어도 많이 남았다. 그 아이스크림은 전부 김동만의 몫으로 돌아갔고 새벽까지 아이스크림을 억지로 퍼먹던 녀석은 결국 그날 배탈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