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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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떻게 좀 해 봐!]

[내가 뭐 어떻게 해! 나도 미치겠거든?]

[집에 좀 가자! 벌써 30분째 저러고 있잖아! 이러다가 여기서 날밤 새우겠다! 불금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니가 총대 메고 퇴근하자고 말해 보라니까?]

[됐거든? 왜 내가 희생해야 하는 건데?]

핸드폰을 손에 꼭 쥔 은찬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동만을 노려보았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고양이가 그러하듯 고양이 수인 유은찬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건 지금도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은찬이 눈으로 욕을 퍼붓자 동만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주한 쪽을 힐끔거렸다. 비단 동만뿐만이 아니라 팀원 전부 몇 시간째 과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주한의 눈치를 보았다. 이미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6시 30분. 더군다나 직장인이라면 학수고대하고 기다린 금요일 저녁.

하지만 다들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앉아 있는 이주한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그저 그가 빨리 퇴근하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은찬은 자신의 책상 위에 쌓인 삼각 김밥과 이주한을 번갈아 보았다. 뜬금없이 편의점에 나타나 은찬에게 처치 곤란할 정도로 삼각 김밥을 사 준 이주한. 그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시하려고 해도 어느샌가 은찬의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소리 없이 주변을 맴돌았다. 지금도 그랬다. 동만이 은찬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도 아까부터 그가 은찬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욕하고 소리치던 지난날이 더 좋았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다들 퇴근하기만을 희망하고 있는 이 시점, 은찬은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를 껐다. 팀원을 위해 희생하려는 게 아니라 본인이 얼른 퇴근하고 싶어서였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은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주한을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부장님! 저 먼저 퇴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나는 네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갈 길을 가련다. 말투 속에 퇴근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다들 그런 은찬을 존경스럽게 바라보는 듯했다. 동만도 이 정도까지 나올 줄을 몰랐는지 소리 없이 손뼉을 쳤다.

짧은 시간 동안 이주한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은찬을 째려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퇴근 한번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

“……가세요. 퇴근 시간인데 당연히 가야죠.”

이주한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 은찬은 괜히 발끈했다. 30분간 할 일 없이 앉아서 저 녀석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게 억울했다.

“팀장님이 그러고 있으니까, 눈치 보여서 갈 수가 있어야죠.”

은찬이 던진 말에 누군가 헉 소리를 터트리며 숨을 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찬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불금인데 약속 없으세요?”

“……그러는 유은찬 씨는 불금이라서 바쁜가 봐요.”

“그럼요! 애인하고 데이트해야죠, 데이트!”

순간 이주한은 인상을 구겨졌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살짝 동공이 동물처럼 변했다가 돌아왔다. 꿀꺽 침을 삼킨 은찬은 재빨리 대화를 종료했다. 더 깐죽댔다가는 살해당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시선을 느꼈다.

“주말 잘 보내세요, 다들! 다음 주에 뵐게요! 동만아, 가자.”

그대로 사무실을 도망치듯 나온 은찬의 등 뒤로 동만이 허겁지겁 따라오며 혀를 찼다.

“너 미쳤어? 왜? 우리 둘이 사귄다고 아예 회사 건물에다가 써 붙이지?”

“그럴까? 난 상관없는데. 오늘 보니까 우리 응원해 주는 사람도 많더라.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나 같은 고양이하고 평생 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애교 있지. 말도 잘하지. 그리고 돈도 벌지.”

“너 지금 나 저주하는 거지?”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라는 말이지. 저주는 무슨.”

“애초에 너, 고양이만 아니었으면 나한테 뒈졌어! 아까 편의점에서도 너! 일부러 지갑 안 가지고 온 거 다 알거든! 꼭 그럴 때만 필살기로 눈 동그랗게 떠서 쳐다보더라? 꼭 뭐 가지고 싶을 때, 먹고 싶을 때!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요구할 때만 너는! 이 뭘 해 줘도 고마움을 모르는 새끼야.”

“그게 개하고 고양이의 다른 점이지. 너는 고양이가 꼬리 살랑살랑 흔들면서 애교 떠는 거 봤냐? 시크, 도도, 쿨함. 그게 우리의 가장 큰 매력이지.”

“너는 그냥 쓰레기고.”

“이게 진짜!”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동만과 입씨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동만의 어깨너머로 이주한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또다. 이주한은 하루 종일 이런 식으로 은찬의 주위를 맴돌았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슬슬 짜증이 났다. 행여 눈이 마주칠까 봐 슬쩍 고개를 돌린 은찬은 왜 그러냐고 묻는 동만에게 복화술로 속삭였다.

“부장, 부장.”

사무실에서 뛰쳐나온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그도 퇴근하러 나온 모양이다. 은찬은 바로 옆자리에 턱 하니 선 그는 말없이 정면을 응시했다. 어찌 된 일인지 다른 직원들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이 순간이 불편해 죽을 맛이다. 동만과 은찬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얼른 엘리베이터가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던 그때…….

“데이트 어디로 가요?”

“네?”

뜬금없이 던져진 질문에 당황할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안에는 이미 세 명의 직원이 타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시작도 못 하고 단절됐지만 좋아하기는 일렀다. 다들 1층 로비에서 내렸기 때문이다.

동만의 차는 지하 3층 주차장에 있었다. 그의 목적지도 지하 3층인 것 같았다. 그는 세 사람만 남게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까의 질문을 이어 갔다.

“데이트 어디 가는지 말 안 해 줘?”

“그게 왜 궁금하신지…….”

“기분 좋게 퇴근하길래. 어디 좋은 데 가는가 해서.”

어째 말에 뼈가 있다. 슬쩍 기분이 상한 은찬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동만에게 무슨 말 좀 해 보라는 눈짓을 던졌지만, 녀석은 부장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은찬은 기세등등한 부장의 기에 눌려 얼어붙은 동만을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주한의 뒤통수도 무섭게 째려보았다.

굳이 그게 묻고 싶어서 따라온 건가. 아니면 싸우고 싶어서 이러는 건가. 편의점 삼각 김밥부터 시작된 그의 이상 행동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좋은 데 가요.”

은찬은 일부러 신나는 톤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살짝 고개를 튼 이주한이 은찬을 흘겨봤다. 은찬은 그 기세를 몰아 묻지도 않은 장소까지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호텔 가요. 호텔. 요즘 호캉스가 유행이잖아요. 거기 스위트룸 하나 예약했거든요. 애인하고 오붓하게 보내려고.”

“…….”

이주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등 뒤로 그의 분노가 보이는 것 같았다. 호텔이라는 단어에 동만도 경기를 일으켰다. 눈으로 은찬을 쏘아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주한이 고개를 획 돌리자 둘은 서로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럼. 좋은 주말 보내세요, 부장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한 쌍의 바퀴벌레 커플처럼 보이기 위해 은찬은 동만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 상태로 묵묵히 서 있는 이주한을 스쳐 지나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가고 있을 때였다.

“유은찬!”

이주한이 고함에 가까울 정도로 은찬의 이름을 불렀다. 지하 주차장에 쩌렁쩌렁 울릴 만큼 엄청난 발성이었다. 동시에 우뚝 멈춘 두 사람을 향해 이주한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뾰족한 송곳니만 안 드러냈을 뿐이지 이주한은 성난 표범이 따로 없었다. 은찬의 코앞에서 멈춘 그는 김동만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호텔인데!”

“네?”

“오늘 예약한 호텔! 무슨 호텔이냐고!”

이주한의 박력에 쫄아 버린 은찬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했다. 예약도 하지 않은 호텔 이름이 생각날 리 없었다.

“그건, 왜…….”

“나도, 나도 거기 예약하려고! 나도 오늘 거기서 호캉스 보내 보려고.”

“…….”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이주한 지 않은 황당한 답변에 은찬은 심란해졌다.

“말해. 어디야.”

“저기, 삼거리 쪽 큰 서점 맞은편에 있는 거기…….”

예전에 갔던 기억을 토대로 대충 둘러대니 얼추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굳은 표정으로 잠시 은찬을 뚫어지게 보던 그가 돌연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혼자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안 물어봤는데요.”

“나도, 그런 파트너쯤 있어. 많아! 널렸어!”

“네…… 그러시겠죠.”

“너……! 너, 너…… 내가 왜 너 따, 하아.”

너, 하는 소리만 몇 번을 반복하던 이주한은 알다가도 모를 표정으로 획 몸을 돌려 사라졌다.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는 그를 동만과 은찬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이주한의 차가 그곳에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동만의 차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는 길. 동만은 시큰둥하게 질문을 던졌다.

“뜬금없이 호텔은 또 뭐냐? 진짜 호텔 갈 거야?”

“미쳤냐? 그냥 지껄여 본 거지. 그 자식이 또 질척거릴까 봐, 나 오늘 애인하고 뜨거운 밤 보낸다고 바리케이드 친 거. 호텔은 무슨. 그럴 돈이 어디 있냐? 그 돈으로 맛있는 거나 사 먹겠다. 배고프다. 야, 뭐 먹을래?”

“부장 아까 되게 열받은 거 같던데.”

“열 받든 말든 우리랑 아무 상관 없으니까 신경 끄시고. 뭐 먹을 거냐니까? 닭발 먹을래? 뼈 있는 걸로.”

“너랑은 닭발 안 먹어! 닭발은 매운맛으로 먹는 건데 너는 매운 거 못 먹잖아!”

“반반 시키면 되지! 반반 시킨다? 아…… 배고파. 그 전에 이거라도 먹어야겠다.”

저녁은 닭발로 정한 뒤 은찬은 가방을 뒤적여 이주한이 사 준 삼각 김밥을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아, 행복해. 드디어 이주한 얼굴 따위 보지 않아도 되는 주말이다.

“작작 좀 먹어! 너 그러다 체해!”

“야, 먹고 싶을 때 실컷 먹어야 하는 거야.”

좀 전에 열받을 대로 열받은 이주한을 떠올린 은찬은 속이 시원했다. 그동안 당한 설움이 뻥 내려가는 느낌이랄까. 은찬은 이주한이 사 준 김밥을 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공짜라 그런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

화려한 샹들리에 조명으로 유명한 호텔 로비는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호텔 뷔페로 가는 길, 커피숍에 들리던 이들 전부 샹들리에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씩은 찍어 갔다. 호텔 카운터에서 멀찍이 떨어진 주한은 그런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바쁘게 눈을 움직였다.

지금쯤이면 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그가 이 자리를 지키고 선 지 벌써 세 시간째. 유은찬과 헤어지고 곧장 이곳으로 왔으니 늦지는 않았다. 제일 빠른 지름길로 신호 위반까지 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유은찬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그는 결국 카운터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예의상 밝게 웃으며 반기는 호텔 카운터 직원에게 투숙객 명부를 확인해 달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단칼에 거절당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 저희 호텔에서는 고객님의 편안한 숙박을 위해 투숙하시는 고객님의 신상은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회사에 중요한 일로 연락을 좀 해야 하는데, 지금 연락이 안 돼서 그래요. 여기에 지금 투숙 중인지 그것만 알면 되거든요.”

“고객님, 죄송합니다.”

주한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생떼까지 써 봤지만 소용없었다. 직업의식이 투철한 직원은 상냥한 미소와 함께 주한을 진상 보듯 바라보았다. 이주한 인생에서 오늘처럼 체면이 구겨진 적도 드물었다.

“미치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로비를 가로질러 흡연실로 들어간 주한은 급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혹시, 잠시 담배 피우러 온 사이에 들어간 건 아닐까. 여러 가지 추측을 하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아…….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한편으로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 제 모습이 기가 찼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망할 고양이 놈이 지금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주도에서 멀쩡한 얼굴로 자신을 유혹하더니 또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뭐라 따지려고 해도 명분이 없었다. 자신은 유은찬과 어떤 사이도 아닐뿐더러 그 녀석에게는 오늘부터 공공연하게 알려진 애인도 있었다. 1,500원짜리 편의점 김밥 하나 사 주는 것도 궁색한 김동만.

은근슬쩍 뒤따라간 두 사람이 편의점에서 다투는 모습을 본 주한은 저도 모르게 불쑥 끼어들었다. 그깟 거 얼마나 한다고. 고작 1,500원을 애인한테 쓰는 게 아까워서 버럭 소리치는 놈이 뭐가 좋다고. 그런데도 김동만에게 애교 떠는 유은찬을 볼 때마다 주한은 속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의지와 달리 눈은 계속 유은찬을 좇았다. 공식적으로 커플이 된 그들은 대놓고 손도 잡고 귓속말도 서슴없이 했다. 화가 났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자신이 저런 고양이 녀석 때문에 이런 기분을 맛봐야 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온종일 자괴감과 허탈감. 그리고 질투를 느낀 것도 모자라 이제는 미행까지 하고 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그럼에도 불과하고 그가 유은찬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김동만과 오붓하게 지낼 거라 말하던 유은찬의 행복한 모습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 모습을 다시 떠올린 주한은 갑자기 담배 맛이 썼다. 인상을 쓰며 담배를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던져 버린 그는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모양 없게 이 방법은 쓰기 싫었지만 지금으로써는 다른 수단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는 마지못해 핸드폰을 들었다. 곧이어 핸드폰 반대편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리한, 어디야. 나 지금 너희 호텔인데.”

급해 죽겠는데 버린 녀석이 대순가. 주한은 아무렇지 않게 이리한을 호출했다. 예상대로 녀석은 곧바로 주한의 눈앞에 나타났다.

“영영 안 볼 사람처럼 가더니 만 하루 만에 다시 보내? 솔직히 말해 봐. 쪽팔리지?”

인사 대신 던진 이리한의 핀잔에 주한은 대답 대신 피식 웃었지만, 솔직히 자존심이 상했다. 이전의 이주한은 한번 버린 사람과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런데 그 규칙을 오늘 깬 것이다. 바로 유은찬 때문에.

“그러게. 그런데 넌 부르자마자 바로 왔잖아.”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은 이리한은 주한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로비의 화려한 샹드리에는 이 호텔의 자랑거리이기도 하지만 서울 시내 야경을 볼 수 있는 루프탑 바도 유명했다.

“같은거 주세요.”

이리한은 주한과 같은 맥주를 직원에게 주문한 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녀석이 꼬리를 세워 흔들고 있는 기분이랄까. 눈이 반짝반짝 꺼리는 것이 뭔가 재미있는 것을 찾은 개의 눈빛이다.

“나 오는 내내 무슨 생각했을 것 같아? 맞춰 봐.”

“말 돌리지 말고 그냥 물어봐.”

“이주한. 너 차였어?”

제 앞에 놓인 맥주를 병째 마시던 주한은 순간 멈칫했다. 방금까진 고양이가 제 속을 뒤집어 놓더니 이제 개까지 신경을 긁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맥주를 내려놓으며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

“아니야? 정말?”

“아니.”

주한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귄 적도 없으니 차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합리화하며 그는 미리 써 놓은 쪽지를 이리한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김동만, 유은찬? 이게 누군데?”

“오늘 너희 호텔 손님. 고객 명단에 이 이름 있는지 확인만 좀 해 줘.”

“왜? 이 두 사람 중 하나가 네 애인이야? 애인이 바람펴?”

역시 개라서 그런가.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주한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아닌 척 말을 둘러댔다.

“회사 직원. 오늘 여기서 호캉슨가 뭔가 한다던데, 지금 일이 터졌는데 연락이 안 되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여기 있는지, 몇 호인지 그것만 좀 알아봐 줘. 해 줄 수 있지?”

이리한의 어머니가 이 호텔의 대표 이사였다. 은밀히 사람을 시켜 알아본다면 이런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인맥은 이럴 때 쓰는 것을. 급한 마음에 괜히 로비에서 진상 짓을 한 제 모습이 한심했다.

“겨우 이것 때문에 나 부른 거 아니지?”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자.”

“뭐야. 나 자존심 상해.”

“원래 개들은 그렇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부르면 꼬리 흔들고 달려오는 게 개잖아.”

주한의 독설에 이리한은 씩씩거렸다.

“나 이제 너 안 좋아하거든?”

“그러든가. 해 줄 거야 말 거야? 안 해 줄 거면 일어나고. 나 이럴 시간 없어.”

솔직히 지금 급한 사람은 주한이었지만 약 올리듯 던진 말에 이리한은 쪽지를 낚아채 갔다.

“부탁하는 태도하고는. 이번 한 번만이야. 원래 이런 거 안 된다는 거 알지?”

까칠한 말투로 톡 쏘아붙인 이리한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분쯤 지났을까. 호텔 매니저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주한에게 받은 쪽지를 그에게 건넨 이리한은 명부를 확인해 달라 일렀다.

그 남자가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오늘 이 호텔 투숙객 중 유은찬이나 김동만이란 이름은 없다는 말을 듣자마자 주한은 안도감과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망할 고양이 자식이 깜찍하게 거짓말을 한 것이다.

굳은 표정으로 화를 삭이고 있는 주한을 빤히 바라보던 이리한은 맥주병을 빙빙 돌리며 말문을 열었다.

“기분 안 좋아 보인다? 그럼 한잔하고 나랑 방으로 갈래? 재회의 기념으로 한번 어때?”

이리한은 어제 버려진 녀석답지 않게 신나 보였다. 이것이 개와 고양이의 차이인가. 개는 사람을 잘 따르고 애정을 요구하는 반면에 고양이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고양잇과지만 망할 검은 고양이 속은 특히 모르겠다.

“이리한. 뭐 하나만 묻자.”

“뭐?”

“애인 있는 놈이 다른 놈을 꼬셔서 침대로 데려가는 이유가 뭘까?”

이리한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쉽게 대답했다.

“그냥 하고 싶었겠지? 애인은 매일 먹는 밥이고. 다른 놈은 외식?”

“하…… 외식?”

“매일 밥만 먹고 살 수 없잖아. 적당히 다른 것도 먹어 줘야 살맛이 나지. 그건 왜 물어? 진짜 네 애인 바람펴?”

애인을 두고 매일 다른 남자와 자던 놈 입에서 나온 말이니 정확할 것이다. 이주한이 외식 취급을 당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애인하고 헤어질 확률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없겠지? 아니면 그쪽 애인이 모른 척해 주면 롱런하는 거고.”

“너는 왜 헤어진 건데?”

이제야 묻는 이별 이유에 이리한은 턱을 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일찍도 묻는다. 나? 들켰거든. 글쎄, 출장에서 하루 일찍 돌아온 거 있지? 난 그것도 모르고 침대에서 딴 놈이랑 섹스하다가 바로 눈앞에서 걸렸지. 그걸로 끝. 더 이상은 못 참아 주겠다고 해서.”

“그러면 헤어지는 건가?”

“그럼, 눈앞에서 애인이 다른 놈하고 뒹구는 걸 보고 용서할 놈이 누가 있어! 안 그래?”

제 일을 남의 일처럼 말하는 이리한도 웃기지만 주한은 그 방법도 괜찮겠다 싶었다. 지금 그의 최대 목표는 김동만과 유은찬이 헤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지금 이 호텔에 두 사람은 없으니 볼일도 끝난 셈이었다. 그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은 고맙다. 다음에 보자.”

“뭐? 이대로 간다고? 나는?”

“다음에 연락할게.”

주한이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벗어나자 등 뒤로 이리한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내가 네 개냐! 이딴 식으로 부를 거면 부르지 마!”

***

토요일 아침.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주한은 할아버지가 계신 저택으로 가야 했다.

자신의 집에서 40분. 차가 막히면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오늘도 그는 눈을 뜨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사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탓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 때문일까. 할아버지는 일주일 만에 만난 손주가 이상해 보였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셨다.

올해 80세를 넘긴 할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너무 정정하셨다. 취미가 마라톤이며 토요일 아침 등산을 심심치 않게 하실 정도이니 일선에서 물러나실 계획은 현재로서는 없는 게 확실했다.

주한이 하나뿐인 친손자였으니 회사를 물려받는 건 당연하겠지만, 딱히 관심은 없었다. 그저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만이라도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자는 주의였다. 지금도 해외에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토요일마다 할아버지를 찾아뵙긴 하지만 이 집 사내들이 그랬다. 무뚝뚝하고 말이 별로 없었다.

넓은 부엌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었다. 숨 막힐 듯 흐르는 고요한 정적 속에서 별안간 할아버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주한.”

“예, 할아버지.”

“일이 힘드냐.”

할아버지의 물음에 주한은 국을 휘휘 젓던 수저를 멈칫했다.

“지난주보다 수척해졌다. 밥은 제때 챙겨 먹고 다녀. 일보다 건강이 중요한 거다.”

“예, 할아버지.”

아침 일찍부터 대뜸 등산하자고 잡아끌고 간 노인네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싶다. 가뜩이나 잠 한숨 못 잔 탓에 피곤했던 주한은 등산 한 번에 녹다운이 됐다. 비위 좀 맞춰 드리다가 얼른 집에 가서 눈 붙일 생각만 하고 있는데 어째 식사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김 실장한테 간간이 네 소식은 듣고 있다. 제주도 리조트 건 따낸 걸로 나한테 칭찬받을 생각일랑 말아라. 너 그거 다된 밥상에 숟가락만 턱 하니 얻은 거 알지?”

“예. 그럼요, 할아버지.”

“그리고 네 방 놔두고 허구한 날 마케팅 1부서에 가서 직원들 못살게 구는 이유가 뭐냐? 너 갑질하냐?”

그 연세에 치아가 얼마나 튼튼한지 끼니때마다 고기를 늘 챙겨 드시는 할아버지는 갈비 한 점을 뜯으며 주한을 노려보았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거만하기 그지없는 이주한 일지라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그저 어린 표범일 뿐이었다.

분명 할아버지의 심복 김 실장이 일러바친 것일 테지만 주한은 발뺌했다.

“갑질이라뇨. 할아버지, 팀워크 다지는 거예요. 제가 잠시 있었던 부서잖아요. 다들 저 어려워 안 해요.”

“표범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지 마라. 사내 게시판에 너 때문에 눈치 보여서 일을 못 하겠다는 글이 올라왔다잖아! 자고로 웃대가리는 말이다. 밑에 있는 직원들이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하는 거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너, 마케팅 1부서 괴롭히려고 나한테 그런 부탁한 거냐?”

할아버지의 버럭 외침이 부엌을 들썩였다. 기필코 사내 게시판을 없애 버리고 만다. 그리고 누가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찾아낼 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꾹 누르고 주한은 활짝 웃었다.

“아니라니까요. 식사 다하셨으면 저 먼저 일어나 볼게요. 피곤해서 집에서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이주한.”

일어나려던 중 할아버지의 부름에 주한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도 더는 먹지 않을 생각인지 수저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어째 저번 주보다 잔소리가 더 길어진 느낌이다. 귀에 피가 나는 건 아닐까. 체념한 주한은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시선을 마주했다.

“증손주 언제 안겨 줄 거냐.”

역시, 왜 이 말이 안 나오나 했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마지막에는 늘 증손주 타령을 하셨다. 추진력이 강한 분이셔서 할아버지 고집으로 여자 수인과 맞선도 수없이 봤지만 거기까지였다. 주한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저 아직 젊어요. 할아버지.”

“서른이 젊은 거냐? 내가 네 나이 때, 네 아비가 다섯 살이었다! 이제 그만큼 놀았음 정착해서 살 때도 됐다. 내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나이인데, 증손주는 한번 안아 보고 죽어야지 편안히 눈을 감을 것 같아서 그래!”

몇 년째 똑같은 레퍼토리로 말하니 이젠 다 외우고도 남았다. 간신히 웃음을 참은 주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끈한 할아버지를 다독였다.

“할아버지는 아직 정정하셔서 괜찮으세요. 요즘 100세 시대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20년은 더 사시겠는데요?”

“뭐?”

“오래오래 사시려고 등산도 하고 마라톤도 하는 거잖아요. 김 실장한테 들어 보니까. 비싸고 몸에 좋은 거는 다 챙겨 드신다면서요? 저도 좀 나눠 주세요. 할아버지 말대로 서른이잖아요. 저도 요즘 밤일이 예전 같지가 않…….”

신나게 말을 주절거리던 중 할아버지 앞에 놓인 갈비뼈가 주한의 얼굴 정중앙으로 날아왔다. 민첩성 있게 피한 주한은 바닥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갈비뼈를 힐끔거렸다. 이봐, 이렇게 정정하시다니까.

“기운 넘치시는 거 봤으니까.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회장님.”

“이주한! 너 직원들한테 갑질하다가 걸리면 모가지야! 잘라 버린다!”

회장 손자인데 갑질 좀 하면 어때. 주한은 버럭 소리 지르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유유히 집 마당을 가로질러 나왔다. 아파트는 답답하고 싫다고 하셔서 산 근처 천 평 부지를 매입해 지은 저택은 나가는 것도 일이었다.

“벌써 가시게요?”

어느샌가 현관을 나서는 주한의 곁에 김 실장이 따라붙었다. 여우 수인인 그의 집안은 아주 오래전부터 대대로 주한의 집안을 섬겨 온 자들이었다.

“아저씨.”

“네, 작은 도련님.”

“사내 게시판에 내 욕 적은 놈. 누군지 알 수 있어요?”

“거긴 익명 게시판입니다.”

“알고 있는데. 아저씨라면 쉽게 알 수 있잖아요.”

“익명이 왜 익명이겠습니까. 회장님께서는 사내 직원들이 허심탄회하게 회사에 대한 불만 사항이나 정보를 교류할 수 있도록 그 게시판을 허용하신 겁니다. 물론 직원들 대화의 장으로도 이용되기도 하고요.”

역시나 조곤조곤 이유를 나열하는 김 실장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를 모시는 김 실장은 할아버지의 말만 들었다. 나중에 주한을 모시게 될 여우 수인은 이제 고등학교에 갓 들어간 김 실장의 아들이 될 것이다.

“작은 도련님.”

웬일로 멀찍이 떨어진 주차장까지 따라온 김 실장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그를 불렀다.

“왜요? 할아버지 대신 잔소리하시게요?”

“제가 아직 회장님께 보고드리지 않은 게 하나 있는데. 뭔지 알고 계시죠?”

주한을 어렸을 적부터 보아 온 김 실장이었다.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주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선대들이 왜 여우를 곁에 두었는지 알 것 같았다. 여우는 민첩하고 눈치가 빨랐지만, 생각보다 사냥은 꽝인 녀석들이었다. 이들의 조상은 최상 계층 표범 수인 집안을 모시는 조건으로 아쉬울 것 없는 윤택한 생활을 선사받았고 현생까지 이어지는 중이었다.

김 실장은 할아버지에게 거짓 한 점 없이 다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주한을 위해 뭔가를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 주고 있었다.

“…….”

“작은 도련님을 오랫동안 지켜본 입장으로 말씀드리는 건데……. 좀 놀랐습니다. 작은 도련님답지 않게 행동하셔서.”

“네?”

“회장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죠? 여자 수인도 아니고 남자 수인입니다. 회장님이 저렇게 손자 타령하시는데, 큰일 치르시기 전에 끝내세요. 참고로 회사 CCTV에 찍힌 작은 도련님 영상은 지웠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시지 마세요. 그렇게 쫓아다니시다가 회사에 금방 소문나겠습니다. 애도 아니고 그게 뭐예요.”

김 실장은 주한의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핀잔을 던졌다. 마치 삼촌이 조카를 놀리는듯한 뉘앙스였다. 돌아선 그가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멍하게 서 있던 주한은 뒤늦게 얼굴을 왈칵 구기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주한이 계속 유은찬을 쫓아다니니까 CCTV를 지켜보던 보안 팀에서 김 실장을 호출한 게 분명했다.

쪽팔려. 쪽팔려! 귀 끝까지 빨개진 주한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와 동시에 차 안에서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망할 고양이 자식! 유은찬! 그러다 고개를 획 들어 다시 차 시동을 걸었다.

망할 고양이 자식 하나 때문에 자신은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데 유은찬만 즐겁게 애인과 생활하는 게 화가 났다. 어제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속인 것도 화가 나고. 전부 다 화가 났다. 이렇게 된 거 유은찬을 만나 결판을 지어야겠다.

그는 밤새워 뒤척이며 생각한 결말을 통보하기 위해 유은찬을 호출했다. 짧은 신호음 뒤로 유은찬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난데.”

[아, 예…….]

반기지 않는 목소리 톤에 울컥 화가 났다가 겨우 평정심을 찾았다.

“어디야. 집이야?”

[네? 아, 아니요. 아직 호텔인데.]

이 자식이……! 어금니를 꽉 깨문 주한은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여기서 소리를 질렀다간 만나 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나 40분 뒤에 너희 집 앞에 도착할 거야. 잠깐 만나. 만나서 이야기 좀 해.”

[……]

“왜? 싫어? 너 제주도에서 우리 일. 그냥 이렇게 넘어갈 거야? 난 그렇게 하기 싫은데? 네 애인은 그 일 알아? 모르지? 내가 만나서 다 말해 줘? 40분 뒤 저번에 내가 내려 준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안 나오면 바로 김동만 핸드폰으로 전화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거기까지 말한 뒤 주한은 은찬의 대답 따위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한편으로 냉정한 말투에 섭섭했으면 어쩌나 싶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유은찬을 꼭 만나야 했다. 지금 주한은 녀석과 단둘이 있을 기회가 절실히 필요했다.

***

“지가 뭔데 나오라 마라야! 아, 짜증 나! 짜증 나!”

한가로운 토요일. 이제 막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뒤 느긋하게 소파에 벌러덩 누워 있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고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확인하던 은찬은 이름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이주한의 전화였다. 받을까 말까 몇 차례 고민하다 받아 줬다. 안 받으면 안 받는다고 지랄할 거 같아서 였다.

그런데 괜히 받았다. 은찬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노려보며 신경질을 부렸다.

“왜? 누군데?”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던 동만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은찬은 허벅지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부장 새끼.”

“부장? 부장이 왜?”

화들짝 놀란 동만이 빨간 고무장갑을 낀 채 고개를 획 돌렸다. 은찬이 소파 위에서 널브러져 있는 동안 동만은 언제나처럼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몰라. 뜬금없이 나보고 나오라네? 40분 뒤에.”

“왜?”

“난들 아냐. 아씨…… 나가지 말까. 오늘 할 일도 많은데 왜 온다는 거야. 귀찮게.”

은찬이 하품을 쩍 하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동만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할 일이 뭐 있는데? 너 일어나서 내가 차려 준 밥 처먹은 거 말고 한 게 뭐 있어? 누가 보면 엄청 바쁜 놈인 줄 알겠다? 빈둥빈둥 노는 놈이!”

“가만히 있는 게 더 힘든 거야. 아, 맞다. 나 병원 가야 하는데. 너한테 말한다는 거 깜박했다!”

“병원 무슨 병원?”

손뼉을 탁 치는 은찬의 행동에 동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찬은 소파 테이블 위에 먹다 던져 놓은 과자 봉지를 손에 쥐고 다시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 과자를 먹으며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무슨 병원이긴. 산부인과지. 부장이 사십 분 뒤에 온다고 했으니까. 뭐, 빨리 만났다가 병원으로 가면 대충 시간 맞겠네. 거기서 뭐 해. 가서 하던 거 마저 해.”

거실과 주방 사이에 멀대같이 서 있던 동만이 기가 차다는 듯 눈을 치켜세웠다.

“나보고 거길 또 가라고? 산부인과에? 차라리 동물 병원으로 가! 그러면 가는 거 생각해 볼 테니까! 내가 거길 또 왜 가!”

“그럼 어떻게 하냐? 나 혼자 가는 거 쪽팔린단 말이야.”

“나도 싫거든! 너랑 같이 갔다가 의사가 오해하는 거 봤잖아!”

그랬다. 동만과 함께 병원에 갔을 당시, 의사는 동만을 아이 아빠로 오해했다. 저 녀석이 아니라고 못을 박았지만 남자 둘이 산부인과에 간다는 것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니라고 말했으면 됐잖아. 그리고 너 우리 나비 대부라며! 대부면 그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치사하지만 은찬은 배 속의 아기를 인질로 잡았다. 아침나절부터 핸드폰으로 아기 고양이 동영상을 감상 중이던 김동만의 시선이 은찬의 배 쪽으로 향했다. 오만가지의 감정이 빠른 속도로 지나간 동만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니가 예뻐서 이러는 거 아니다. 내가 진짜 나비를 생각해서 참는 거다.”

“알아. 그러니까. 네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니까.”

은찬이 씨익 웃으며 미소를 던졌지만, 동만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는 휙 돌아서 다시 설거지에 열중했다.

“아, 맞다! 야! 누가 사내 게시판에 부장 때문에 일하기 힘들다고 썼다던데? 봤어? 아까 이 대리가 우리 팀원 중 한 명 아니냐고 묻길래 아니라고 했거든. 우리가 미쳤냐? 뻔히 얼굴 보면서 일할 건데 거기다 대놓고 그딴 글을 쓰게. 안 그래?”

설거지하던 동만이 혼자서 싱겁게 웃음을 터트릴 동안 은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먹던 과자를 조용히 내려놓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뒤늦게 확인해 본 단체 팀원 채팅방은 범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었다.

큰일 났다……. 동만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그 글의 작성자는 유은찬이었다.

“야, 병원 몇 시에 예약……. 뭐야. 너 그 표정, 또 사고 친 거야? 아니지?”

심각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은찬을 발견한 동만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등 뒤로 깔끔하게 설거지를 끝낸 주방이 보였다.

“그거…….”

“그거. 그거 뭐!”

은찬은 머쓱하게 웃으며 자백했다.

“내가 쓴 건데.”

“……뭐?”

“아니, 어제 하루 종일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따라다녔잖아. 일할 수가 있어야지. 근데 진짜 별말 안 적었는데? 요즘 이주한 부장 취미가 사무실에서 분위기 잡는 거다. 짜증 난다. 출퇴근도 눈치 봐야 한다. 부장 달더니 성격이 더 이상해졌다. 이게 단데?”

“너 미쳤어? 거기가 어디라고 부장 욕을 적어!”

“욕 아니라니까.”

미간을 찡그린 동만은 낭창하게 웃는 은찬에게 버럭 소리쳤다.

“그게 욕이지 칭찬이냐? 회장님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거기다 회장 손자 욕을 적었냐, 이 병신아!”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야! 익명인데 난 줄 어떻게 알겠어!”

혼자서 심각한 동만을 앞에 두고 은찬은 다시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아예 티브이 리모컨을 잡고서 채널 돌리기에 빠졌다.

“괜찮아, 괜찮아. 익명이야 익명. 근데 동만아, 나 쥐포 먹고 싶은데. 막 구운 쥐포.”

“하아…….”

인상을 구긴 동만이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야, 나 여기 좀 봐 봐. 어제보다 더 나온 거 같지? 그치?”

은찬은 히죽 웃으며 동만이 보는 앞에서 자랑스럽게 배를 까고 내밀었다. 확실히 은찬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커졌다. 쥐포가 먹고 싶다는 합당한 이유를 내민 은찬에게 동만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처먹으면 누구나 다 배가 처나와. 작작 좀 처먹어.”

“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임신 중에 그런 말 하면 두고두고 가슴에 한이 맺힌다는 말 못 들어 봤냐?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줄 알아? 다 우리 나비가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나비가 닭발에 닭똥집 맛을 안다고? 너 어제 나한테 졸라서 무알코올 맥주도 마셨잖아. 나비가 맥주 맛도 아냐? 됐고! 알았어! 지금 말은 심한 거 인정! 근데 그딴 것 좀 먹지 말라고! 내가 과자 먹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 그거 말고, 아기에게 좋은 연어 말린 거 먹으라니까? 너 먹고 싶은 거 먹지 말고 아기 두뇌에 좋은 거! 너는 DHA가 부족해! 두뇌 계발이 되는 걸 먹어야 한다고! 티브이도 보지 말고, 수학 공부나 하든가 클래식 들으라고 몇 번이나 말해!”

쿵쿵거리며 다가온 동만은 은찬의 손에서 과자와 리모컨을 획 낚아채 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연어 포를 접시에 담아 눈앞에 내밀었다. 은찬은 거실 전체에 은은하게 울리는 클래식을 들으며 뿌듯하게 서 있는 동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동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당성을 내세웠다.

“다 나비를 위해서야. 솔직히 너 머리는 영 아니잖아. 너 닮을까 봐 걱정되는 대부의 마음이랄까.”

“……내 머리가 어때서.”

“좋은 건 아니지. 솔직히 딱 까놓고 말해서 네가 이 회사에 입사한 건 십 퍼센트의 실력과 오십 퍼센트의 운빨. 그리고 수인에게 후한 점수를 준 회사의 너그러움이 사십 퍼센트 작용한 결과지. 결코 네 머리는 아니라고 본다.”

솔직히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거리도 없었다. 입을 삐죽 내민 은찬은 연어 포와 동만을 번갈아 보았다. 연어 포는 비린내 나서 싫어하는데……. 거기다 취향에 맞지 않는 클래식까지 들으려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이주한이 도착하려면 앞으로 30분. 차라리 이주한을 만나는 게 김동만의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30분 뒤. 은찬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핸드폰 하나만 손에 쥐고 오피스텔을 나서자마자 반대편 길가에 세워진 고급 외제 차가 눈에 들어왔다. 1년 전 은찬이 세차한 차보다 더 비싼 차 였다. 그쪽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가자 조수석 창문이 반쯤 열렸다.

“뭐 해. 타.”

그의 재촉에 은찬은 마지못해 차에 올라탔다. 주말까지 이 자식 얼굴을 봐야 하다니. 주말에는 사적으로 회사 사람들과 연락하고 싶지 않은 게 직장인이거늘. 주말에 만난 이주한은 여전히 재수 없었다.

“애인은.”

그는 은찬이 앉자마자 동만의 안부부터 물었다.

“집에요.”

“뭐라고 하고 나왔어. 나 만나고 사실대로 말했어?”

그럼 뭐라고 하냐? 반문하고 싶지만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은찬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상사의 명령이라 나왔지만, 이 만남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 대화를 끝으로 그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사람을 불러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던 은찬이 동만에게 따분하다고 메시지를 날리고 있을 때였다. 침묵하던 이주한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유은찬.”

“네.”

“제주도에서 우리가 보낸 그날은 너한테 뭐야.”

뭐긴, 그냥 발정 난 거지. 하지만 차마 이 말은 던질 수 없었다. 차 안의 분위기가 그 어느 때 보다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주한은 진지하게 은찬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은찬은 신중하게 생각했다.

“저, 동만이하고 헤어질 생각 없어요.”

“……없어? 왜?”

왜? 김동만만큼 자신을 돌봐 줄 놈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밥 주고 청소해 주고, 이제는 애까지 봐준다는데. 은찬으로서는 김동만만큼 좋은 조건도 없었다.

“그럼 나는. 나는! 그날 너. 나한테 그 자식하고 헤어진다고 했잖아!”

“그런 적 없어요.”

김동만과 헤어지지 않겠다는 은찬의 대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주한은 발끈했다. 진짜 이 양반 구질구질하구만.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아침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에 은찬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주한을 흘겼다.

“그때 그 일 그냥 없었던 거로 해요, 우리.”

“난 싫은데?”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저 동만이 하고 끝낼 생각 없어요. 부장님 저 말고 다른 사람 많잖아요. 동만이가 알기 전에 없었던 일로 해 주세요. 그게 서로에게 좋은 것 같아요.”

심각한 이주한에게는 미안하지만, 은찬은 이 대사를 내뱉으면서 웃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었다. 제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자신이 마치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른 파렴치한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의 불꽃 연기를 펼쳤으면 알아들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주한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나하고도 연애하자.”

“예?”

당황한 나머지 은찬은 삑사리를 냈다.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끔벅끔벅하는데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김동만하고 계속 사겨. 연애해. 그리고 나하고도 해. 너하고 나만 조용히 사귀면 되는 거잖아.”

“…….”

이 자식 머리가 어떻게 됐나 보다. 그러니까, 당당하게 양다리를 걸치란다. 난 싫다고! 죽어도 싫다고!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은찬이 버벅거리며 물었다.

“지금, 제…제정신…….”

“제정신이야! 그 정도로 너를 놓치기 싫다는 거지.”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짜고짜 은찬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간 은찬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가 자신의 입술을 머금고 있었다. 비집고 들어온 뜨거운 혀가 입안을 헤집고 다녔지만 거부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농후한 키스였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어느 순간부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눴다.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기도 하고 또다시 거칠게 밀어붙이기도 했다. 이주한의 손은 자연스럽게 은찬의 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딱딱하게 선 젖꼭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하, 아.”

가뜩이나 예민해진 젖꼭지는 이주한의 지분거림에 반응했다. 그렇게 서로를 탐닉하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로 꽉 채워진 차 안에 느닷없이 경쾌한 음악 소리가 분위기를 깨트렸다.

순간 반쯤 감고 있던 은찬은 눈을 번쩍 뜨고 자신의 코앞에 있는 이주한을 두 팔로 힘껏 밀쳤다. 그리고 상처받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주한보다 핸드폰에 집중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동만의 전화였다.

“잠, 잠깐 전화 좀.”

전화를 핑계로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주한은 허락하지 않았다. 아예 차 문을 잠가 버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받아. 내 앞에서.”

무척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듯 미간에 주름이 파인 그는 무서울 정도로 은찬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면 죽일 듯한 기세에 은찬은 마지못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왜?”

[뭐 하냐. 아직 안 끝났어?]

“어?”

[금방 온다더니 30분이나 지났잖아. 병원 안 가?]

30분? 잠시 키스만 한 것뿐인데 시간이 그렇게 흘렀단다. 깜짝 놀란 은찬은 난감한 표정으로 빨리 가겠다는 말을 하고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다. 재빨리 시간을 확인해 보니 정말 30분이 지나 있었다.

“왜? 빨리 오래?”

“네…….”

“하아…… 유은찬.”

이주한은 자괴감에 빠진 은찬의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바라보는 시선이 꿀처럼 끈적끈적거렸다. 은찬은 최악의 2단 콤보에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버텼다. 어쨌든 버텨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은찬의 태도를 오해한 것 같았다.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 애인이 알까 봐 무서워? 나하고 방금까지 키스했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애인 전화를 받는 널 보는 내 기분은 어떨 거 같아.”

난들 아냐. 은찬은 제발 이주한이 빨리 갔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내가 말했지. 우리 종족은 마음에 드는 짝이 있으면 동족도 죽인다고. 그런데 김동만은 지금 당장 죽일 수는 없으니까 당분간 네가 김동만을 정리할 때까지만 이렇게 지내. 안 된다고 하지 마. 너 지금 하는 거 보니까 나한테 마음이 없는 거 아니잖아.”

하늘에 맹세코 은찬은 이주한에게 다른 마음을 가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이주한이 키스를 너무 잘해서 반응했을 뿐이다. 밥 처먹고 키스만 갈고 닦았나. 고작 키스 한 번에 몸은 흐물흐물해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숨 막히는 어색함이 흐르고 은찬은 마른침을 삼켰다.

“……싫다면요?”

“그럼 김동만이 죽는 거지.”

이주한의 동공이 동물처럼 변해 있는 걸 보니 진심으로 던진 말이다. 회사에서 잘리면 안 된다고 울부짖던 김동만의 모습이 순간 은찬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상대는 회장 손자. 아무리 재수 없는 놈이지만 권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김동만의 목숨줄이 제 손에 달려 있었기에 은찬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컸다.

“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솔직히 말해 봐. 나한테 마음은 있잖아. 그렇지?”

개소리 좀 작작해라. 은찬은 속으로 그를 씹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조심히 들어가고. 어디 가는지 뭐 하는지 틈틈이 나한테 연락하고. 그리고…….”

은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주한이 말끝을 흐리더니 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그는 야하게 은찬의 귓불을 혀로 핥으며 말을 이었다.

“그 자식하고 필요 이상으로 붙어 있지 마. 필요 없는 신체 접촉이나 한 침대에서 자는 짓 따위 할 생각 하지도 마. 내가 냄새에 예민하거든. 만에 하나 네 몸에서 그 자식 정액 냄새가 나는 날에는……. 그 새끼 찢어 죽여 버릴 테니까.”

한방에서 자지만 애당초 침대도 따로 쓰고 있었고, 남자가 몸에 닿는 건 질색인 김동만과는 친구 이상의 접촉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이주한은 바람피우는 애인을 감시하는 사람처럼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하하, 하. 저 갈게요.”

“연락해. 기다릴 테니까.”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인 뒤에야 이주한은 은찬을 풀어 주었다. 재빨리 차에서 내린 은찬이 길을 건너 오피스텔로 사라질 때까지 그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온 은찬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서 소파에 벌러덩 앉아 있는 동만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키스하는 동안 기가 빨렸는지 앉아 있을 힘이 없었다.

“뭐야. 앉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어! 그대로 갈 거야?”

“…….”

동만은 그런 은찬을 향해 또다시 잔소리를 날렸다.

“왜 이래? 왜, 부장한테 한 소리 들었어? 혹시 너 어제 뻥친 거 걸렸냐?”

“아니.”

“그럼 게시판에 쓴 글 너라는 거 걸렸어?”

“아니.”

“그럼 표정이 왜 그래? 못 본 걸 본 사람처럼. 밖에 많이 더워? 그사이에 더위 먹었어?”

녀석은 에어컨 온도를 더 낮췄다. 은찬은 그런 동만을 지긋이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렇게 착한 녀석을 오늘 자신이 살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부장이…….”

“부장이 뭐. 말을 해야 알지!”

“나랑 사귀재.”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제는 섹파가 아니고 정식으로 사귀재? 회사에 나랑 사귄다고 쫙 소문 다 났는데? 보기하고 다르게 자존심도 없고 구질구질하게 질기네. 너는? 너는 싫다고 했을 거 아니야.”

동만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싱겁게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캔 콜라를 마시던 중…….

“너랑도 사귀고 자기랑도 사귀재.”

“풉!”

동만이 콜라를 뿜었다. 그리고 멍청한 얼굴로 은찬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동만과 시선을 마주한 은찬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자기랑은 몰래 사귀면서 너랑 조금씩 정리하래.”

“……너희 무슨 불륜 드라마 찍냐? 그것도 하극상으로.”

“…….”

“됐고! 그건 두 사람 알아서 해결하시고. 얼른 옷 갈아입고 와. 병원이나 가게.”

녀석의 등쌀에 힘없이 일어나려는데 순간 눈을 가늘게 뜬 동만이 은찬을 붙잡았다.

“야, 너 입술이 왜 그래?”

“어?”

“나가서 매운 떡볶이 먹었냐?”

“어? 왜?”

“아니, 퉁퉁 부었는데? 아니면 맞았어? 안 사귄다고 해서 혹시 맞은 거야?”

입술로 맞았지. 눈치는 밥 말아 먹으려도 없던 녀석이 오늘따라 유난히 빠르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피는 동만을 피해 은찬은 방으로 쏙 들어갔다. 입술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해 주지 않고 병원으로 향하자 동만의 추궁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은찬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했다간 녀석의 맹렬한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대체 난 여기 왜 따라와야 하는 거야.”

“나중을 대비한 연습이라고 해. 너도 결혼하면 와이프 따라서 계속 와야 할 거 아니야.”

“고맙다.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 너 때문에 이런 연습도 해 보고. 이러다가 분만실 체험도 해 보겠다?”

진찰을 끝내고 대기실에 앉아 있을 동안 동만의 투덜거림은 계속됐다. 이윽고 간호사의 부름에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아랫배가 조금 아프다고 하셨죠?”

“네.”

사실 이주한과 제주도에서 자고 난 뒤 이따금 아랫배가 아팠다. 혹시 아이가 잘못되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하던 차에 병원에 들른 것이다.

“혹시 심한 운동하셨어요?”

“아니요.”

“아, 그러면 혹시 섹스…….”

좀 전과 달리 은찬은 대답하지 못했다. 단번에 눈치챈 의사는 동만을 매섭게 흘겼고 녀석은 펄쩍 뛰며 강한 부정을 했다.

“저 아니거든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저는 이 자식 친구라고요, 친구!”

저번에도 그러더니 의사는 그냥 웃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주의 사항을 알려 주며 당부했다. 섹스해도 상관없으나 거친 삽입은 자제해 달라는 부탁에 동만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가 됐다. 마지막으로 의사는 화면을 두 사람 쪽으로 돌리며 뜬금없는 축하 인사를 던졌다.

“축하드려요. 지난번에는 몰랐는데 두 명이네요.”

“네?”

“두 명이요? 쌍둥이에요?”

은찬은 제 귀를 의심했고 동만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의사는 고개를 흔들며 그 말을 정정했다.

“수인은 적어도 두세 명까지는 낳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남자 수인은 극히 드문 케이스라서…… 저도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여기 보시면 이 아기 뒤에 바로 붙어 있어서 몰랐던 거고요. 여기 작은 꼬리뼈 하나 더 있는 거 보이시죠?”

맙소사.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던 은찬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한 마리도 버거운 판국에 두 마리라니. 은찬이 제발 아니길 바라며 현 상황을 부정하고 있는데.

“세상에……! 은찬아 이것 봐! 너 인마, 두 명이래! 꼬리뼈 작은 거 봐. 아, 태어나면 진짜 귀엽겠다. 너는 까망이로 정했다!”

흥분한 김동만은 신이 나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의사가 건넨 초음파 사진을 다시 핸드폰으로 찍으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저러니 애 아빠로 오해를 받지.

은찬은 긴 한숨을 내쉬며 제 배를 쓸어 내렸다. 믿기 힘들지만, 이 안에 두 마리. 아니 두 명이 있단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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