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창문 너머 하늘이 노을 지고 있었다. 공항에서 헤어졌지만, 집에서 다시 만난 동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은찬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을 뿐. 고요한 정적 속에서 둘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고작 1박 2일 집을 떠났을 뿐인데 은찬과 동만은 많이 지친 상태였다.
특히나 은찬은 조금 전까지도 이주한에게 시달린 탓에 눈이 퀭했다. 억지로라도 도망칠걸. 강요 때문에 차에 탄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동만이 은찬의 애인이라고 철썩 믿고 있는 이주한은 당장 헤어지길 강요했다. 그리고 은찬은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한 이주한에게 ‘그냥 너랑 꼴려서 한판 했다.’는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그 자리에서 진짜 송곳니로 목이 물어뜯길 것 같았다.
그만큼 이주한은 진지했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다. 은찬에게 익숙한 ‘개새끼 이주한’은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이를 어쩐다. 동만과 이별을 강요하는 것도 문제지만 은찬이 자신과 당연히 사귈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문제였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그 머리로 어떻게 이 회사에 들어왔느냐고 정색하던 놈이 지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윽하게 바라본다는 사실은 호러 그 자체였다.
“하아…….”
“하아…….”
은찬이 긴 한숨을 내쉬자 기다렸다는 듯 동만도 똑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김동만. 나는 그렇다 치지만 너는 왜? 무슨 일 있어?”
인생에 두 번째 흑역사를 남긴 은찬은 그렇다 치지만 동만까지 왜 축 처져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은찬의 물음에 무릎을 꿇어 안고 있던 동만이 중얼거렸다.
“나 이러다 회사에서 잘리면 어떻게 하나 해서.”
“네가 왜? 사고 쳤어?”
“사고는 내가 아니라 니가 쳤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린 동만이 은찬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얼굴을 확 구겼다.
“호텔에서 부장이 나 쳐다보는 거 봤지? 그때 나 쫄아서 말 한마디 못 한 것도 봤지? 나! 너하고 부장 사이에 끼어서 공항에서도 말 한마디 못 하는 거 그것도 봤지?”
“…….”
“그리고 서울 와서도! 니들끼리 잘만 가더라? 너, 내가 너 어떻게 키웠는데……! 너랑 나 여기서 살 비비고 산 지도 2년이 넘었어. 내가 그동안 집안 살림 죄다 하고, 너 사 먹인 밥이 얼만데! 그런데 넌 고작 하는 짓이 공항에서 날 버리고 가는 거냐? 어!”
“아니, 그건…….”
은찬도 불가항력이었다. 이주한이 일부러 동만을 무시하고 은찬만 끌고 간 거 뻔히 봤으면서 이런다.
“됐어! 변명 필요 없어!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랬어! 너는 좋겠다. 부장한테 잘 보여서. 아아, 유은찬. 이제 네 앞길은 꽃길이겠다. 나는 부장한테 찍힌 죄로 보나 마나 좌천되거나 잘리겠지. 나는 차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울 엄마 용돈도 다달이 드려야 하고, 장가갈 밑천도 만들어야 하는데……. 애인 한번 못 사귀고 여기서 잘리면 누가 나 같은 놈이랑 사겨 주냐고오오오!”
은찬은 복잡한 심경으로 동만을 바라보았다. 1박 2일의 출장은 유은찬과 김동만의 우정에 작은 변화도 가져왔다. 급기야 녀석은 서럽게 소리 내 울먹였다. 아침부터 이주한의 눈치가 장난 아니었으니 이 녀석이 이러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바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주한은 회장 손자였으니까.
“그래서 뭐. 니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시큰둥한 은찬의 물음에 동만은 소심하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주한한테 사실대로 말하자.”
“뭘?”
“전부 다.”
“하……?”
“전부 다 말하기 좀 그러면, 너랑 나 사귄다는 거 그거 뻥이었다고. 그것만 말하자!”
“야, 치사하게! 너 혼자만 살겠다 이거지?”
“누가 먼저 치사하게 나온 건데! 너는 그 자식 싫다면서! 나한테 그렇게 말해 놓고 같이 잤잖아! 그 뒤로 부장 그 새끼가 날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거 못 봤냐?”
“너는 내 애인이잖아! 애인해 준다며!”
“애인이면 뭐 해! 그 자식이 대놓고 내 앞에서 너 데리고 가는 거 못 봤냐? 야! 이럴 거면 그냥 사귀라니까? 내가 부장이랑 너 사이에 끼어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고!”
“안 사귄다고! 안 사귄다니까? 몇 번을 말해! 그건 그냥……! 침대 위에서 내 테크닉이 너무 좋아서…… 그런 것뿐이야. 왜? 너도 맛보게 해 줘?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애인으로 만들어 줘?”
그 기세를 몰아 은찬이 살짝 엉덩이를 들썩이자 기겁한 동만은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이 자식이 미쳤나! 너 어디서 그런 짓을 배워 왔어! 너 내가 그렇게 키웠어? 어디 애 가진 놈이 함부로 바지를 훌렁훌렁 벗으려고. 너 인마, 앞으로 내 앞에서 바지 벗는 거 금지야!”
“왜? 우리 같이 목욕탕도 간 사이잖아.”
“그건 그때고. 우리 나비 듣는다. 말 가려서 해. 나비는 절대 너처럼 키우지 않을 거야!”
조금 전까지 울먹이던 동만은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은찬을 혼냈다. 지랄을 한다. 이 자식은 다른 데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는데 유독 고양이에 관련된 일에만 유난을 떨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왜 나비냐? 다른 좋은 이름도 많은데. 꼭 촌스럽게 나비라고 불러야겠냐?”
“내 로망. 널 닮은 검정고양이면 나비가 잘 어울릴 거 같거든. 아무튼 말할 거야, 말 거야? 이대로는 내가 진짜 잘릴지도 몰라서 그래!”
“……생각 좀 해 보고.”
“생각할 게 뭐 있어! 그냥 뻥이라고 하든가! 아니면 헤어졌다고 하든가!”
말은 쉽지. 지금 김동만이라는 방패라도 있으니 이 정도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표범처럼 은찬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하는 이주한에게 만약 애인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나올지 뻔했다.
“며칠 지켜보자. 그 자식 흥미 떨어지면 또 달라질지 모르잖아. 저번에 로비에서 봤잖아. 너…… 나하고 나비가 그 남자처럼 버려지면 좋겠어?”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너도 알잖아. 그 자식 연애사가 얼마나 더러운지. 조금만 더 버텨 봐. 영 아니다 싶으면 내가 먼저 말할 테니까.”
휴, 다행이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동만은 은찬의 설득에 넘어온 것 같았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동만과 체력을 다 소비한 은찬은 저녁이 될 때까지 소파에서 널브러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대화도 단절한 채 멍때리고 있다가 간단히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샤워를 한 뒤 각자의 침대에서 일찍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핸드폰 알람에 맞춰 눈을 뜨고 출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도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이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오늘도 동만과 함께 출근한 은찬은 사무실 문을 활기차게 열며 습관적으로 인사를 던졌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차가 밀린 탓에 조금 늦었지만 지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사무실 팀원들이 일찍 출근한 상태였다.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동만과 은찬을 이상할 정도로 빤히 쳐다봤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요?”
“회의 있어요?”
의미심장한 시선과 무거운 침묵이 맴도는 사무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은찬이 머쓱하게 웃으며 동만과 시선을 교차할 때였다. 침묵을 깨고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둘이 사귄다며?”
돌발 발언에 은찬과 동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너무 놀라서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네? 무슨 말인지…….”
당황한 동만을 대신해 은찬이 방어를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팀원들은 이미 모든 걸 다 안다는 시선으로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에이, 그러지 마. 우리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사귄 지 좀 됐다며? 어쩐지. 너무 붙어 다니더라. 티를 그렇게 내고 다녔는데 우리만 몰랐던 거네? 그렇지? 괜찮아, 괜찮아! 좀 놀라긴 했는데 우리 그런 걸로 편견 안 가지기로 했어!”
“근데 왜 그렇게 감쪽같이 숨겼어요? 부끄러워서?”
“에이. 놀리지들 맙시다. 우리까지 눈치 주면 어떻게 해요.”
“김동만 씨 여자 친구 못 사귄 게 아니라 안 사귄 거구나? 몰랐네.”
하나씩 핀잔이 날아올 때마다 은찬과 동만은 넋이 나가 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부정을 하려 했지만, 누군가 먼저 선수를 쳐 버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 몰라? 자기들 1박 2일로 제주도 출장 갔을 때. 휴가 간 우리 회사 직원들이 자기들 고깃집에서 봤다고 하던데? 유은찬 씨 모르는 사람 회사에 없잖아. 둘이서 아주 깨가 쏟아졌다는 증언도 있고. 술집에서 봤다는 증언들이 속속히 나오고 있지. 그것 때문에 어제 사내 게시판이 난리였다니까!”
은찬은 울고 싶지만 애써 웃었다. 휴가철이라는 건 알았지만 거기까지 회사 직원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거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애초에 비밀로 한다는 전제하에 약속한 거래였다. 은찬은 좀 전부터 넋이 나가 버린 동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김동만.
회사 사내 게시판에 둘의 스캔들이 터졌으니 이제 김동만 연애는 물 건너간 셈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마지막으로 은찬이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려 할 때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와 다르게 이제야 출근한 이주한의 등장에 은찬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필 이 타이밍에 나타날 게 뭐야. 찰나의 순간 그는 은찬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마주친 시선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부장님! 부장님도 아셨죠?”
“네? 뭘요?”
자연스럽게 팀원들 사이를 지나가는 주한에게 한 팀원이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에이, 아셨으면서! 그때 부장님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두 사람 사귀는 거 알고 계셨잖아요! 유은찬 씨하고 김동만 씨요. 사귄 지 꽤 됐다면서요? 그러고 보면 부장님 입 엄청 무거우시다. 그걸 지금껏 비밀로 해 주시고. 아무튼 두 사람 축하해.”
“축하해요.”
“축하해.”
“싸우지 말고 오래오래 사귀어 봐.”
“너무 닭털 날리면 우리 가만히 안 있어요.”
여기저기서 반갑지도 않은 축하 멘트가 날아왔다. 동시에 가던 길을 멈추고 우뚝 멈춰 선 이주한의 표정도 돌변했다. 어느샌가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 시선의 끝은 은찬이 아니라 김동만을 향해 있었다.
은찬도 이런 전개가 펼쳐질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건들면 바로 부서질 것처럼 보이던 동만은 허탈하게 웃으며 터벅터벅 문으로 향했다.
“야, 어디 가!”
“……죽으러.”
동만의 영혼 없는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진 은찬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녀석의 뒤를 쫓았다. 어쩐지 출근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직원이 동만과 은찬을 힐끔거린 이유를 이제 알았다. 가짜 애인 사이가 오늘부터 강제로 공식 애인 사이가 돼 버렸다.
죽으러 간다던 동만은 옥상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포효했다. 청아한 하늘에 동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아악! 악! 아니라고! 아니라고오오! 씨발! 씨발! 유은찬, 망할 고양이 새끼이이! 너 때문에 이게 뭐야아아아!”
죄인은 말이 없다. 울부짖는 동만을 뒤에서 지켜보던 은찬은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 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었다. 이 명장면은 길이길이 기념으로 남겨 둬야 할 것 같았다.
***
제주도에서 돌아온 그날 저녁. 주한은 차를 끌고 강남에 있는 카페 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골목 끄트머리에 있는 5층짜리 건물 주차장이었다. 1층, 2층은 카페. 3층은 헤어 숍. 그리고 4층과 5층은 라운지 바였다.
엘리베이터에 탄 주한은 망설임 없이 5층 버튼을 눌렀다. 4층은 단체 손님을 위한 층이라면 5층은 연인이나 조용한 장소를 선호하는 손님을 위한 곳이었다. 이곳의 오랜 단골인 주한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를 알아본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시네요.”
“조용하게 있고 싶은데.”
“이쪽으로 오세요.”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챈 직원은 주한을 창가 쪽으로 안내했다. 큰 나무가 파티션 역할을 하고 있어서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자리였다.
“늘 마시던 거로 드릴까요?”
직원의 물음에 주한은 아주 잠시 고민하다 거절했다.
“차 가지고 와서 술은 됐고. 알코올 뺀 칵테일 아무거나.”
“네, 알겠습니다.”
주문을 받고 사라진 직원은 몇 분 뒤 칵테일과 함께 누군가를 대동해서 나타났다. 제주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리한. 사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저 녀석 때문이었다.
[저녁에 만나. 오늘은 엿 먹이지 마. 나 어제 많이 기다렸으니까.]
애인이 있어도 다른 이와 섹스하는 것쯤 개의치 않은 이리한. 자존심 강하고 도도한 이리한이 이런 식으로 먼저 연락했다는 건 정말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사실 유은찬을 오피스텔 앞까지 데려다준 뒤 복잡한 심경으로 집안을 서성이던 주한에게 반가운 연락은 아니었다. 녀석과는 불과 몇 달 전까지 심심치 않게 섹스만 하던 사이였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더 이상 유지할 필요성이 없어진 관계였다. 유은찬과 두 번째 잠자리 이후 어떻게 해서든 그 녀석을 가지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는 마지막 인사를 위한 자리였다.
자연스럽게 주한의 맞은편에 앉은 이리한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핀잔부터 던졌다.
“도착했으면 했다고 연락이라도 해 주면 좋잖아.”
“시끄럽게 굴지 마. 금방 갈 거니까.”
“누가 금방 보내 준대? 나 저번에 보관해 놓은 양주 있지? 그거 줘.”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사라지자마자 이리한은 다리를 꼰 채 주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골적으로 화가 났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주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과하기를 바라는 듯한 녀석의 시선을 무시하고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집으로 들어간 유은찬에게서는 연락 한 통 없다. 또 김동만하고 싸우는 건 아닐까. 그 걱정에 주한은 앞에 앉은 녀석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늘 아침까지 유은찬은 주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유은찬의 노골적인 유혹에 주한은 마지막 이성을 붙잡고 도망갈 기회를 주었지만, 오히려 녀석은 그런 주한을 도발했다. 애인 있는 녀석인 걸 알면서도 그는 차마 그 유혹을 거절하지 못했다.
둘은 발정 난 짐승처럼 밤새도록 서로의 몸을 탐했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지쳐 쓰러진 유은찬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말에 잠시 나갔다 온 사이 모텔은 텅 비어 있었다. 두 번이나 이럴 줄은 몰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주한은 유은찬이 전화를 받을 때까지 걸었다. 하지만 녀석에게서 온 메세지는 주한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김동만이 화가 난 것 같다. 애인이 말도 없이 외박했으니 당연히 화가 났을 것이다. 전전긍긍하는 유은찬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밤새도록 사랑을 나눴지만 말 한마디 없이 애인에게 가 버린 유은찬이 야속했다. 그리고 걱정했다.
김동만 성격을 대충 파악하고 있지만, 애인이 다른 남자와 외박한 것을 용서할 남자는 없을 것이다. 불안함을 참지 못한 주한은 은찬의 방 앞을 또 기웃거렸다. 역시나 두 사람은 격하게 싸우고 있었다. 잘은 들리지 않았지만, 자신을 쓰레기라고 소리치는 은찬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혹시라도 김동만이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아닐까? 아니다. 그럴 놈으로는 안 보였다.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던 주한은 제 방으로 돌아가서도 유은찬이 걱정돼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얼른 헤어지라고 협박도 해 보고 타일러도 봤다.
은찬은 난처한 듯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아직 그 녀석에게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왜 자신을 모텔로 끌고 간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주한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사람 앞에 두고 딴생각하면 그거 실례 아닌가?”
“……며칠 더 있을 줄 알았더니.”
딴생각에 빠진 주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시울을 찌푸린 이리한은 양주를 단번에 입안으로 털었다.
“너 때문에 기분 나빠서. 오후 비행기로 바로 올라왔지. 너는? 언제 왔어?”
“오전.”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
“말했잖아. 출장이라고.”
“너 일에 목숨 거는 타입 아니잖아. 너 나만 보면 입버릇처럼 말했잖아. 애인하고 헤어지면 밤새도록 놀아 보자고. 그래서 헤어졌다고 말했잖아.”
“나 때문에 헤어졌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이리한의 신경질적인 말투가 거슬리기 시작한 주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가뜩이나 유은찬 때문에 예민해진 탓에 그의 톤도 한층 더 낮아졌다.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없는 척하는 거야?”
“나 말고도 많잖아.”
“뭐가?”
“너랑 놀아 줄 사람.”
잔에 술을 따르던 이리한이 멈칫하며 주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많지. 많은데, 네가 그랬잖아. 수인 중에는 내가 제일 낫다고. 나도 그래. 우리 잠자리 상대로는 괜찮았잖아. 갑자기 네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뭘까.”
“그냥, 그렇게 사는 것도 이제 지겨워서.”
주한이 대충 둘러댄 말에 이리한은 속지 않았다. 의자에 등을 기댄 그는 주한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내가 애인이랑 헤어지길 바라는 줄 알았는데. 1월인가? 내 애인 출장 간 날, 너 우리 집에 온 거 기억나? 애인이랑 아침까지 뒹군 침대 위에서 너 나하고 몇 시간을 즐겼는지 알아?”
물론 기억난다. 애인 없을 때 즐겨 보자는 이리한의 연락을 받고 찾아갔었다. 이 시점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녀석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봐, 이렇게 재미없다니까. 이주한. 너 누구 생겼어? 우리가 언제 이렇게 앉아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제로 입씨름한 적 있어? 당장 키스라도 하든가 화장실에서 박아야 정상 아니야?”
이리한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주한은 쓰게 웃었다. 맞다. 불과 몇 달 전의 이주한이라면 그래야 정상이었다. 이미 눈치챈 것 같으니 크게 둘러댈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난 이제 빼 줘. 그런 놈 다시 하나 구해 봐.”
“야, 이주한!”
굳은 표정으로 주한의 이름을 부르는 이리한의 머리에 밝은 갈색 털의 동물 귀가 튀어나왔다. 개 수인인 이리한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주한은 그런 이리한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
“내 앞에서 그딴 수작 부리지 마, 이리한. 나 지저분한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이리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녀석은 다른 놈들과 다를 줄 알았다. 애인이 널린 놈이니 질척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같이 끝은 똑같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누군데. 누군데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나도 들어서 알고 있거든? 너 섹파 다 정리했다며. 설마 나까지 정리할 줄은 몰랐지. 남자, 여자? 그 사람도 수인인가?”
이리한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며 연거푸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관심 가지지 마. 너하고는 볼일 없는 사람이니까.”
“왜? 그 사람 앞에서 깨끗한 척하고 싶어? 그게 그런다고 될 거 같아? 네가 어떤 놈인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데?”
이주한이 누군가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이리한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입을 삐죽 내밀며 한사코 주한의 관심을 받으려고 애쓰는 이 개가 주한은 그저 귀찮을 뿐이다. 감정 없는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며 그대로 등을 보였다.
“넌 누구하고도 안 사귈 줄 알았어! 그런 거 관심 없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런데 검정고양이 한 마리가 그를 바꿔 놓았다. 새까만 귀와 꼬리가 매력적이고 작은 송곳니가 귀여운 검정고양이를 떠올린 주한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져 갔다. 그 모습을 훔쳐본 이리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심이야?”
“잘 지내.”
주한은 울 것 같은 이리한을 홀로 버려두고 나왔다. 그리고 그가 곧장 향한 곳은 유은찬의 오피스텔 앞이었다.
그는 유은찬의 방으로 추측한 불 꺼진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끊임없이 한숨을 터트렸다. 유은찬과 김동만이 한집에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한 침대에서 자는 걸까? 키스도 했을까? 쓸데없는 생각으로 자신을 좀먹어 가며 밤새도록 오피스텔 앞을 서성였다.
결국,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온 주한은 당장 두 사람의 숙소부터 바꿔 버릴 계획을 짰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도 있으니까. 떨어져서 지내다 보면 사이가 소원해질지도 모른다. 남는 숙소가 없으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해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행하기도 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출근하니 김동만과 유은찬은 팀원들의 축복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묵인하고 지지해 주는 마음씨 좋은 부장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주한은 당장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엎어 버리려고 했지만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진 채였다.
“다들 부장님 멋있다고 난리인 거 있죠? 우리는 부장님이 유은찬 씨 엄청 구박하고 미워하길래 정말 싫어하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네요? 일부러 그러신 거죠? 김동만 씨하고 유은찬 씨 사귀는 거 티 날까 봐. 그렇죠?”
“…….”
“게시판에 다들 두 사람 사랑 지지한다고 난리예요. 부장님 보기에도 김동만 씨하고 유은찬 씨 은근히 잘 어울리죠?”
사내 게시판의 위력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잘 어울린단다. 주한이 보기에는 유은찬이 백배 천배 아까운데. 아주 흔한 얼굴의 김동만하고 귀여운 고양이하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주먹을 꽉 움켜쥔 주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쳤다.
“잡담 그만하고 일합시다, 일! 어제 제주도 가서 딴 리조트 건 그거 기술 팀에 넘겼습니까?”
“네? 아직…….”
“그걸 아직 안 넘기고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지금 일을 하자는 겁니까, 말자는 겁니까! 사내 게시판 볼 시간 있으면 일하세요! 일! 그 게시판 없애 버리든가 해야지! 직원들이 일은 안 하고 그런 것만 보고 있으면 되는 겁니까!”
기필코 사내 게시판을 없애 버릴 것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며 사무실을 박차고 나온 주한은 곧장 김동만의 뒤를 쫓아간 유은찬을 찾아 돌아다녔다. 두 사람의 행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명인이다 보니 어디를 갔는지 금방 파악됐다.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동만아, 화 풀어! 응? 진짜 미안해.”
“……니가 나 책임질 거야? 책임질 거냐고오오!”
김동만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은찬에게 소리를 질러 댔다. 쩔쩔매는 유은찬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반쯤 열린 옥상 문 너머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주한은 당장에라도 달려가 녀석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어진 유은찬의 행동에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유은찬은 동만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그 순간 주한의 가슴에는 이유 모를 통증이 번져 갔다.
***
“두 사람 진짜 사귀는 거 맞아요?”
다른 부서 대리가 은찬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옥상에서의 한바탕 소란 이후 동만과 조용히 타협하고 있던 은찬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와는 얼굴 정도만 알던 사이였다.
“네네. 사귀는 거 맞습니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사실이란 말이죠?”
“네, 그렇게 됐네요. 하하하.”
그를 비롯한 카페 내에 있던 사내 직원들 전부 은찬과 동만을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에 실소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붙어 다니더니 눈 맞았구나? 어쨌든 잘 어울려요.”
“고맙습니다.”
상대방의 인사에 은찬은 영혼 없이 대답하며 동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젠 거의 체념단계로 접어든 동만이 그런 은찬을 보며 허탈하게 코웃음을 던졌다.
“그러고 싶냐?”
동만의 비아냥에 은찬도 나름 할 말이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냐? 너도 게시판 봤잖아. 지금 와서 우리 사귀는 거 아니라고 오리발 내밀어 봤자 우리만 더 병신 되는 거야. 이럴 때는 조용히 수긍하는 게 최고라는 거 모르냐?”
제주도로 휴가 온 익명의 직원은 사내 게시판에 그날 일을 아주 자세히도 적어 놓았다. 고깃집에서 부장과 은찬이 나눈 대화 내용 일부분과 술집에서 싸웠던 일들까지……. 사람들이 믿지 못하자 작성자는 아예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고기를 굽는 사진까지 증거로 올려놓은 상태였다.
“이제 기분 좀 풀어.”
“나 지금 되게 후회하는 중.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인생을 되짚어 보는 중.”
“뭘 또 거기까지 가고 있어. 너무 멀리 갔다.”
“아마도 내 인생의 최대 실수는 입사해서 너를 만난 게 아닌가 싶다. 고양이 수인이라고 해서 좋아했더니 그게 아니야. 이 미친 고양이 새끼는 화만 나면 나 붙잡고 부장 욕을 해대질 않나, 발정만 나면 밤에 집을 안 들어와! 그것뿐이야? 밥도 대령해야 해!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좋아. 거기까진 내가 이해해. 집사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한다고. 그런데, 이제는 사고 쳐서 임신까지 하더니 순수의 결정체인 나를 공식 게이로 만들어 버렸다고! 너 정녕 네 죄를 알긴 아는 거냐? 이 망할 고양이 새끼야!”
아까 옥상에서 다 끝난 줄 알았던 김동만의 한풀이가 다시 시작됐다. 조용히 대화하고 있지만,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 봐 은찬은 최대한 목소리를 죽였다.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내가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진짜…… 진짜 괜찮은 여자하고 다리 놓아 준다니까! 그래서 너도 콜 했잖아!”
옥상에서 목 놓아 울고 있는 동만을 끌어안고 은찬은 될 때까지 소개팅을 해 주겠다는 딜을 제시했다. 절대로 회사 직원은 안 되며 예쁘고 착하고 가슴 큰 여자. 울면서 조건은 다 따지는 동만을 가까스로 달랬다.
“그것도 그거지만, 최대한 빨리 우리 헤어졌다고 소문내야 한다.”
단, 빠른 시일 내에 헤어졌다는 것을 알려 달라는 조건을 덧붙였다.
“알았다니까. 야, 나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지. 걱정 마. 두 달 뒤에 우리 헤어졌다고, 내가 너한테 차인 걸로 소문내고 다닐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고. 그전까지는 너도 내 애인 행세 확실하게 해 줘야 한다는 거 알지?”
“……어떻게?”
동만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어떻게 긴 뭘 어떻게야.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이주한 개새끼도 확실하게 좀 떨쳐 내 줬으면 한다는 거지. 나 어제 봤지? 얼굴이 반쪽 된 거. 세상 쿨한 놈처럼 보이더니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이주한, 진짜 구질구질하게 앵겨. 내가 지랑 두 번 잤다고 내가 자기 것처럼 군다니까? 자기 종족은 뭐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내가 세상에서 인간쓰레기라고 부르는 사람이 딱 두 명 있거든? 하나가 우리 형이고, 나머지 하나가 너다. 넌 도덕도 없냐?”
“내가 쓰레기라는 건 인정하는데. 너 형도 있었냐? 형도 쓰레기야? 나보다 더해? 잘생겼어?”
2년 만에 친구 호구 조사를 시작한 은찬을 향해 동만은 짧게 혀를 찼다.
“이주한도 진짜 불쌍하다. 어떻게 너 같은 놈한테 엮였냐? 진짜 넌 고양이로 태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야, 내가 잠깐 생각해 봤는데. 그냥 이주한이 너한테 관심 있을 때 모르는 척하고 사귀는 게…….”
은찬은 동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시고 있던 머그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크게 눈을 뜨고 동만을 빤히 바라보며 살벌한 목소리로 따졌다.
“왜? 계속 말해 봐. 이주한 그 새끼하고 나 엮어 보라고. 나 이러면 너랑 못 헤어져. 배 속에 있는 애도 너 애라고 소문 다 낸다? 너 그 자식한테 부탁받았어? 나랑 엮어 달라고?”
“무슨 개소리야.”
“그 개소리를 지금 니가 하고 있잖아! 말만 하면 잘해 보래. 대체 왜 그러는 건데?”
“…….”
“애 때문에? 아니면 두 번 잔 거 때문에? 동만아, 네가 아직 그런 어른의 세계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섹스란 삘이라는 게 오면 무조건 하고 싶어지거든? 이해해? 그때 딱 해야지 맛이 끝내주거든.”
“미친 새끼…….”
“네가 아직 안 해 봐서 이런다니까? 한번 맛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게 그거거든.”
뜬금없이 펼쳐진 은찬의 섹스 찬양에 동만은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장은 너 이러는 거 모르지?”
“뭘?”
“만년 발정 난 고양인 거 모르지?”
“알 게 뭐야. 자꾸 그 자식하고 연관시키지 말라고. 지금은 너하고 나. 우리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만 생각하자고. 연인답게.”
“그래서. 그놈의 ‘연인답게’가 뭔데?”
팔짱을 낀 채 동만은 정말 진지하게 물음을 던졌다. 은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툭 던졌다.
“드라마 좀 봐라. 남주가 여주한테 어떻게 하냐? 좋아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건 기본이요. 만나면 손잡고 끌어안고 키스하고. 그런 거지. 물론 너한테 이걸 다 요구한다는 게 아니라…… 야! 어디 가?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야!”
은찬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동만은 정색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집도 사무실도 같은 동만이 뛰어 봤자 은찬의 옆자리였다.
소란스러운 오전이 가까스로 지나가고 한참 일거리가 몰려오기 시작한 오후. 업무 전화 소리만 들리는 바쁜 사무실 안에서 유독 심각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사람이 있었다. 창가를 서성이며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이주한이 그 범인이었다.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이건만 사무실 안은 시베리안 벌판처럼 냉기가 맴돌았다. 모두 이주한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오늘 부장님 저기압인 거 같으니까 다들 조심.]
대리가 단체 채팅방에 경고를 던진 것을 시작으로 한마디씩 불만이 튀어나왔다.
[왜 저러시지? 제주도 간 것도 잘된 것 같은데.]
[그러게요. 유은찬 씨 부장님 제주도 가서 무슨 일 있었어요?]
딱히 그런 의도로 묻는 건 아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거로 느껴졌다. 그 물음에 동만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은찬을 쏘아봤다. 덩달아 은찬도 또 한숨을 내쉬는 이주한을 곁눈질했다.
그가 보기에도 심난한 표정으로 혼자서 미간을 찡그리다가 한숨을 내쉬기를 반복하는 이주한이 정상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눈만 마주치면 은찬을 닦달하던 짓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지랄 같던 이주한이 왜 저럴까.
그때 잠시 어제 그가 차 안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김동만과 헤어지고 자신과 잘해 볼 생각 없느냐는 그 물음에 은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가 어떤 놈인지 뻔히 아는데 잘해 보긴 뭘 잘해 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뿐 애초부터 악감정만 남은 사이였다. 이제 와 서로를 다르게 본다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다.
“야, 나가자.”
한 시간 꼬박 눈치 보며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아팠다. 은찬의 속삭임에 동만은 하품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리슬쩍 눈치를 보며 사무실을 빠져나온 그들은 1층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 배고프다.”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속은 이제 괜찮은가 봐?”
편의점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은찬이 진열된 상품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신기하게 말짱해. 오히려 돌아서면 배고픈 거 있지? 어? 이게 있네? 나 이거 먹고 싶었던 건데. 똥만!”
“뭐야?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은찬이 명란 맛 삼각김밥을 들고 혀 짧은 발음으로 이름을 부르자 동만은 질색했다.
“나 이거 사 주면 안 돼?”
“너 돈 없냐? 니 돈 내고 니가 사 먹어!”
“나 지갑 안 들고 왔는데에. 이거 사 주면 안 돼? 자기야, 나 이거 먹고 시포.”
“이 새끼 이거, 칼만 안 들었지 순 날강도 아니야? 너 일부러 안 들고 온 거지?”
“좀 사 주라. 애인인데 이거 하나 못 사 줘? 치사하게. 이거 얼마 한다고.”
“못 사 주는 게 아니라 안 사 주는 거지! 이게 한두 번이야?”
“사 주라.”
“안 돼. 싫어. 절대로 싫어. 그렇게 쳐다보지 마! 필살기 쓰지 말라고!”
삼각김밥 하나를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뻗어온 손 하나가 은찬이 들고 있던 삼각 김밥을 획 낚아채 갔다. 두 사람은 뻥진 표정으로 손 주인을 확인했다. 그들 뒤로 이주한이 삼각 김밥을 심오하게 노려보며 서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한 땀 한 땀 수제로 만들었을 것 같은 명품 슈트를 입고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릿밑으로 짙은 눈썹을 찡그린 그는 편의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손에 들고 있는 삼각 김밥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이깟 거 얼마 한다고. 유은찬, 이거면 돼?”
“……네?”
갑작스러운 이주한의 등장보다 그가 왜 김동만을 향해 화를 내고 있는지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주한은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고 있는 은찬에게 노란색 바구니를 쥐여 주며 말했다.
“사고 싶은 거 필요한 거 다 넣어. 네 애인 대신 내가 사 줄 테니까.”
은찬은 잠시 바구니와 이주한을 번갈아 보았다. 사 준다는 데 마다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도 없이 바구니 안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물론 그 대가로 동만은 이유도 모른 채 이주한의 이글이글 타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주한과 편의점에서의 만남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그는 노골적으로 은찬과 동만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마치 감시하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