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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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고귀한 최상 계층의 수인이라서 그런 걸까. 그는 지칠 줄 몰랐다. 뜨거운 시선은 마치 은찬을 뼈째 씹어 먹을 것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널브러진 은찬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렸다. 여전히 성기는 삽입된 상태였고 마주 보는 자세로 체위가 바뀐 것밖에 없었다.

“귀여운 송곳니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어느덧 은찬의 뺨을 지나 송곳니를 만지작거렸다.

“유은찬.”

이주한은 관능적인 저음으로 은찬의 이름을 속삭였다. 바르르 떨며 겨우 그와 눈을 마주하자 이주한은 은찬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성기가 더 깊게 파고드는 묵직한 압박감에 은찬은 질끈 눈을 감고 옅은 신음을 터트렸다.

“아읏…….”

“그 자식 정리하고 나한테 와.”

“아, 흐윽! 아…… 하아, 하아.”

그는 좀 전과 달리 아주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내벽 안을 꽉 채웠던 그의 정액이 틈으로 삐져나와 시트를 적셔 갔다. 동시에 방안에 퍼지는 짙은 정액 냄새에 은찬은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네가 못하면 내가 처리해 줄까?”

은찬의 목덜미를 혀로 쓸어내리며 속삭이는 달콤한 저음은 들리지 않았다. 단지 은찬의 몸은 더 큰 쾌감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주한에게 몸을 맡긴 은찬은 아예 무릎을 세워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헉, 헉.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본능적으로 쾌감을 쫓았다.

“흐응…… 하읏! 아, 아!”

이주한은 그런 은찬의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쥐고 최대한 벌려 자신의 것을 더 깊게 박았다. 퍽. 퍽. 퍽. 성기가 깊이 들어갈 때마다 강한 자극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하반신이 감각이 없을 정도로 그는 은찬을 몰아붙였다.

은찬이 난잡하게 엉덩이를 흔들고 있을 동안 이주한은 양쪽 가슴을 탐했다. 젖꼭지가 송곳니에 씹히는 통증은 오싹하고 짜릿했다.

“아으응! 아흑! 하아, 아, 그만……. 더 못하겠…… 하아아!”

이주한의 몸 위에서 은찬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가 닿는 모든 부분이 뜨거워서 미칠 것 같았다.

“말해. 그 자식이랑 헤어지겠다고.”

“몰라, 모른다고! 그딴 거 몰라! 하아, 아앙!”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는 이주한의 질문에 은찬도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시끄럽게 소리치는 이주한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서 그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흐으으읍! 읍! 흐읍!”

미간을 찌푸린 이주한은 키스는 거부하지 않았지만 대신 더 난폭하게 욕망을 발산시켰다. 은찬은 어느새 난폭한 이 섹스를 즐기기 시작했다. 아프다, 싫다, 그만하자는 투정과는 달리 막상 체위를 여러 번 바꾸며 리드한 건 은찬이었다.

땀과 침. 그리고 정액으로 눅눅해진 침대를 벗어나 작은 테이블 위에서 엎드린 채 박혔고 벽에 등을 기댄 채 하기도 했다. 섹스에 미친 짐승처럼 둘은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목이 마르면 서로의 침을 핥으며 입을 축였다.

시간 개념 따위는 없었다. 몇 번의 절정을 맛보고 더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 비로소 두 사람은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그들의 신음과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던 방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자 둬.”

지친 몸은 수면을 원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들 힘없이 시체처럼 누워 있는 은찬과는 반대로 이주한은 아직 팔팔해 보였다. 은찬과 마주 보고 누운 그는 젖은 은찬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땀에 젖은 몸을 지분거렸다.

“……물.”

“물?”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은찬은 물을 요구했다. 즉시 침대에서 일어난 주한은 발치에 있는 작은 냉장고 문을 열어젖혔고 그 안에 들어있던 생수 두 병을 꺼냈다. 그는 한 병을 은찬에게 건넨 뒤 화장실로 사라졌다.

은찬은 생수를 벌컥벌컥 마신 후 다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절로 죽겠다는 소리가 튀어나올 만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대로 시체처럼 누워 있으니 화장실 문틈으로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이와 중에 샤워할 힘이 남이 있는 이주한의 체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멍하니 누워 공기 중에 남아 있는 정사 냄새에 피식 웃고 있을 때였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돌아왔다. 뒤늦게 집 나간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온 은찬은 헉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미쳐도 그렇지. 저 자식이랑 무슨 짓을 한 거야? 꿈일 거다. 꿈이어야 했다. 제발 꿈이길 바라며 눈을 몇 번이나 비볐지만,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안 돼에에…… 제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은찬은 짝 소리가 나도록 제 뺨을 갈겼다. 두 번 스스로 뺨을 때리니 눈물이 핑 돌았지만, 여전히 침대 위라는 사실이 은찬을 좌절시켰다. 두 사람이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듯 창 너머 하늘에 해가 뜨고 있었다.

“……미쳤다. 와씨, 진짜 돌았나 봐.”

차라리 술이라도 먹었으면 억울하지도 않지.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울상이 된 은찬은 방에 놓인 오래된 화장대 거울 속에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성스럽게도 해놨네. 누가 보면 짐승한테 물린 줄 알겠다. 온몸이 송곳니 자국으로 도배가 돼 있다. 특히 가슴과 목.

지독한 자국에 눈살을 찌푸릴 새도 없었다. 일단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여기서 어떻게 나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도망칠까? 어차피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지만 당장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에이, 모르겠다. 도망치고 보자. 생각할 것도 없이 바닥에 티셔츠를 집으려 할 때였다. 화장실 문이 활짝 열렸고 은찬은 냅다 침대로 몸을 날렸다.

“유은찬.”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탁탁 털며 나온 이주한은 침대 쪽으로 다가와 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눈으로 그의 상태를 살피던 은찬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주한의 몸에 손톱자국을 발견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자국이 왜 생겼는지 디테일하게 다 기억나서 미칠 노릇이었다.

“뭐 좀 사 올까?”

그가 은찬의 팔을 살짝 흔들며 묻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상냥한 거야? 민망한 상황에서 은찬은 몸을 뒤척이며 잠결에 속삭이는 척 연기를 펼쳤다.

“으으음…… 커, 피.”

사실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게 없지만 일단 그를 이 방에서 내보내야 했다.

“커피? 그거면 돼?”

“으응.”

“알았어. 사 올 테니까. 자고 있어.”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걸쳐 입은 이주한이 서둘러 방을 나가자마자 은찬은 자리에서 펄쩍 튀어 올랐다.

“소름 돋게 왜 저래?”

목소리 톤부터 달라진 이주한의 변화에 은찬은 오만상 인상을 찌푸렸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서둘러 벗어 던진 옷을 입던 은찬은 바지 속에 잠자고 있던 핸드폰을 꺼냈다.

김동만의 부재중 전화 30통. 읽지 않은 메세지 50건. 동만이한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숙소로 가도 눈앞이 암담해지는 것 똑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모텔을 나선 은찬은 곧장 택시를 잡아탔다.

정액과 땀으로 뒤범벅된 몸이 찝찝해 죽을 맛이고, 임신한 것도 잊고 그 지경까지 달린 자신이 저주스럽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 속에서 은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주한의 전화였다.

받을까 말까. 혼자서 끊어졌다 다시 울리기를 수차례 반복하자 보다 못한 택시 아저씨가 한마디 던졌다.

“거 좀 받아요. 아님 끄든가. 시끄럽게.”

보나 마나 화낼 게 뻔했기에 은찬은 통화 대신 메세지를 선택했다.

[부장님…….]

곧장 답장이 왔다.

[너 어디야. 당장 전화받아.]

또 전화가 오기에 아예 대놓고 받지 않았다. 뭐라고 둘러대야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핸드폰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은찬은 늘 그렇듯 그 녀석을 소환했다.

[동만이가 화가 많이 났나 봐요. 일단 숙소로 가는 중이에요…….]

[호텔로 가는 중?]

[네.]

[몸은 괜찮고?]

[네, 일단……. 먼저 숙소로 갈게요]

오오. 속는 눈치다. 은찬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득달같이 따라올까 봐 살짝 긴장했지만, 그 뒤 핸드폰은 잠잠했다. 그 틈에 생각의 정리를 해 보려 했으나 신경질적으로 머리털만 쥐어뜯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뭐에 홀린 게 틀림없었다. 이주한이 은찬을 꼬신 것도 아니고 스스로 그 자식 손을 잡고 모텔까지 끌고 간 게 더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왜 그랬을까. 유은찬! 왜 그랬니? 꼭 그래야만 했니?

분명 그 위스키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핑계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취했다면 저번처럼 술 핑계라도 될 텐데, 냄새 때문에 그랬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맨정신과 다름없는 상태에서 이주한과 잤다는 것이 은찬에게는 충격이었다.

세상을 다 산 표정으로 은찬이 막 택시에서 내리려 할 때였다. 이주한에게서 메세지가 왔다.

[그 자식이 뭐라고 하면 나 불러. 당장 달려갈 테니까.]

“미쳤냐? 내가 널 왜 불러?”

지금 마주치고 싶지 않은 놈이 너다. 은찬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그 메세지를 씹고서 터벅터벅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맞닥뜨린 김동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은찬을 노려보았다. 굳게 입을 다문 녀석이 한참 뒤에 던진 말은 딱 하나였다.

“했냐?”

은찬은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보아하니 했네, 했어.”

동만은 짧게 혀를 차며 은찬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평소에는 눈치를 밥 말아 먹던 녀석이 오늘은 또 기똥차게 빨랐다. 냉랭한 기운을 뿜어 대는 동만을 피해 은찬은 슬그머니 침대 쪽으로 향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하지? 지금까지 걱정한 사람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걱정했어?”

동만의 핀잔에 은찬은 뜨끔했다.

“그럼 걱정 안 하겠냐? 부장하고 그렇게 뛰쳐나갔는데! 나는 너하고 부장하고 무슨 사단이라도 난 줄 알았다고! 전화라도 좀 받던가! 걱정했잖아!”

한창 하는 중에 전화를 어떻게 받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성난 동만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마주친 시선에 머쓱하게 웃자 동만도 어이가 없는지 따라 웃는다.

“이놈의 고양이 자식을 어떻게 하면 좋지? 웃음으로 때우시겠다?”

“일주일 동안 점심 살게.”

“그걸로 퉁 치시겠다? 네가 가출한 고양이를 기다리는 사람 심정을 알아? 내가 밤새 너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

은찬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하는 동만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째, 잠 한숨 못 자고 걱정한 얼굴치고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밤새도록 잠 안 자고 나 기다린 거야?”

“……누가 안 잤데? 잤지. 사람이 잠은 자야지. 자는 시간 빼고 네 걱정을 했다. 이거지.”

방금까지 열변을 토하던 모습은 연기였던 건지 돌연 김동만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은찬의 팔을 툭 쳤다.

“술집에서 죽일 듯이 싸우더니. 그거 페이크였지? 감쪽같이 속았잖아. 그래서 좋았어? 너 얼굴이 반쪽이야.”

페이크 같은 소리 한다. 이제는 반대로 은찬이 동만을 살벌하게 쳐다봤다. 힘만 있었다면 이 자식을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았을 것이다.

“김동만,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네 얼굴을 반쪽으로 만들어 버린다?”

“말 참 살벌하게 한다. 부장하고 잘 됐으면 한턱낼 생각을 해야지! 너 부장 닮아 가냐? 말이 왜 그래?”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은찬은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은 동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동만은 눈을 반짝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부장과 하룻밤을 보냈으니 그에 합당한 결말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에 찬 시선에 은찬은 한숨부터 나왔다.

“왜? 부장이 너 싫대? 둘이 좋아서 한 거 아니야? 너 술도 안 마셨잖아. 그러면 게임 끝난 거지. 잴 거 뭐 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사귀라니까!”

연애도 못 해본 놈이 은찬을 보며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일까. 은찬은 가만히 있는데 동만이 설레발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침대로 털썩 쓰러진 은찬은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처음에는 실수라고 쳐도. 두 번째는 맨정신에 한 거잖아. 너도 좋으면 좋다고 말해.”

“그게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어제 그 자식이 시킨 위스키 때문이라고!”

“위스키가 뭐? 맛만 좋더만.”

동만 조차 은찬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기야, 저 녀석이 고양이도 아니니 그 기분을 알 턱이 있나. 그래도 녀석에게는 어느 정도 사실대로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이 시간 이후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각오를 할 테니까.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동만과 다시 마주했다. 생각보다 착하고. 생각보다 눈치는 더럽게 없지만 은찬을 잘 챙겨 주는 김동만. 그리고 현재 은찬의 가짜 애인이기도 했다.

“왜? 진짜 오늘부터 1일 하기로 했어? 잘된 거지?”

발랄하게 말하던 김동만은 잠시 뒤 은찬의 장황한 설명에 입을 떡 벌렸다. 순간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녀석에게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이해한다. 은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할 말을 마친 은찬이 도로 침대에 누워 버리자 동만은 꽥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 진짜 부장이랑 잘해 볼 생각이 없다고? 단지 그것만 하고 끝난 거라고? 리얼?”

“말했잖아. 그럴 마음 눈곱만큼도 없다고.”

“그럼 왜 잔 건데! 아예 그게 하고 싶었던 거면 방에서 딸이나 치지!”

“야, 몸은 달아오르지. 때마침 그 자식이 앞에 있는데 어떻게 하냐?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섹스라는 게 혼자 해서 재미있는 게 아니거든? 뭔가 같이 움직여 주는 게 있어야지 짜릿한 맛이 있다고.”

“그래서. 네 말은, 급해서 부장을 딜도 대용으로 쓴 것뿐이라는 거지?”

“그거지.”

“부장은? 부장도 그렇게 합의 봤고?”

“…….”

하여튼 신기한 놈이라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김동만은 눈치가 백단이 됐다.

“아…… 졸리네. 나 눈 좀 붙일게.”

은찬은 대답을 회피하며 등을 돌렸다.

“야! 그럼 뭐야? 사귀는 것도 아니고 섹파야?”

“미쳤냐? 내가 그걸 왜 해!”

“그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그럼 뭔데? 부장이 오해하면 어떻게 할 건데?”

솔직히 좀 전에 이주한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은찬은 싱겁게 웃었다. 설마, 자존심 강한 이주한이 그럴 리가 없다.

“야, 너하고 내가 사귀는 거 뻔히 아는데. 오해할 게 뭐 있냐?”

“그럼 나하고 사귀는 사이면서 애인 두고 부장이랑 잔 너는 뭐냐?”

허를 찌르는 동만의 공격에 은찬은 할 말을 잃었다. 확 짜증이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녀석에게 버럭 소리쳤다.

“쓰레기, 쓰레기! 나 쓰레기다! 됐냐? 됐어?”

“잘하는 짓이다. 임산부가 쓰레기 짓이나 하고 다니고! 너 언제 철들래? 나비야, 너는 절대로 그런 거 배우면 안 된다.”

“나비는 또 뭐야?”

인상을 확 구긴 은찬의 질문에 동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새끼 고양이니까. 태명은 나비가 좋을 것 같아서. 예쁘지? 절대로 널 닮으면 안 될 텐데.”

동만은 만족스럽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고 은찬은 그 면상에 베개를 던졌다.

“닥치고 체크아웃할 시간에 깨워! 부장이 찾거든 잔다고 해!”

은찬은 눈을 감자마자 금방 잠이 들었다. 얼마나 고단했는지 잠시 뒤 동만이 깨워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대충 씻고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부장에게서 두 번 메시지가 왔다. 딱히 다른 말은 없었다. 괜찮냐는 말과 그리고 약속 시각에 로비에서 만나자는 말이 다였다.

뜨거웠던 하룻밤에 대한 기억은 잠시 접어 두고 은찬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약속 시각에 맞춰 로비로 나갔다. 10분 일찍 나온 탓에 이주한은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동만은 제주도까지 와서 일만 하다 가는 게 처량하다며 신세타령을 했다.

“또 오면 되지.”

“같이 올래?”

“콜. 니가 호텔 잡아. 그럼 내가 비행기 잡을 테니까.”

이런저런 말로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싸늘한 냉기가 느껴진 두 사람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주한이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살기에 당황한 동만이 복화술로 속삭였다.

“야, 저 새끼 왜 저래? 나 씹어 먹을 표정인데?”

“몰라.”

은찬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코앞까지 다가온 이주한의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동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은찬의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예상 못 한 전개에 은찬은 눈이 커졌다. 가짜 애인 김동만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윤은찬 씨.”

“네?”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다행이네. 걱정했거든.”

이주한은 그대로 은찬을 끌고 로비를 가로질렀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은찬은 뒤따라오는 동만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주한은 잠시라도 동만과 눈을 마주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은찬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치면 사무적인 용건을 꺼내 차단했다.

그의 완벽한 가드는 공항까지 계속 이어졌다. 은찬은 비즈니스석인 이주한의 옆자리까지 앉게 되는 영광을 누렸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오는 내내 동만이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잠깐 사이에 얼굴이 많이 안 좋아졌다는 말을 쏟아 내며 은찬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은찬은 갑작스러운 이주한의 태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지옥 같은 한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해방되나 싶었건만, 그는 극구 사양하는 은찬을 억지로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물론 김동만은 공항에 버려둔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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