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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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포 공항. 평일 아침 국내선 쪽은 생각보다 한적했다. 불과 10분 전, 평화로운 공항 로비를 가로질러 미친 듯이 뛴 은찬은 가까스로 이주한과 만났다. 물론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은 상태였다.

손가락 까딱 안 하는 이주한을 대신해 티켓 발권기에서 부랴부랴 표를 뽑으면서 한숨이 터졌다. 이주한 옆에 김동만이 무표정으로 은찬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이주한의 표정도 김동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톡 건들면 터질 것만 같은 불 화산 같았다.

은찬은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소리 없이 한숨을 연거푸 내쉬며 그들을 향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왔어?”

“…….”

동만은 하루 만에 재회한 은찬의 인사를 가볍게 무시하고 곧장 비행기를 타러 이동했다.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냉기에 은찬은 괜히 서글퍼졌다. 게다가 이 타이밍에 이주한이 건넨 노트북 가방과 서류 가방은 자신의 처지를 한층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은찬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그들 뒤를 조용히 따랐다. 김동만이 평소와 다른 이유는 은찬 때문이었다. 그날, 이주한 부장과 함께 제주도로 가야 하는 수발 놈으로 당첨된 은찬은 물귀신처럼 또 김동만을 물고 늘어졌다.

당황한 동만과 그보다 더 당황한 이주한이 뭐라 말하기 전에 팀원들에게 김동만이 제주도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를 밝혔다. 단 한 가지의 사유로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주한도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인지 반박을 하지 못했다.

유은찬 덕분에 예정에도 없는 갑작스러운 출장을 가게 된 동만은 불같이 화를 냈다.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 보고 녀석이 좋아하는 고양이 귀와 꼬리를 내놔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결국, 늦은 밤 은찬과 같이 있기 싫다며 집을 뛰쳐나갔다.

안 오면 어쩌나 밤새 애를 태우다가 잠깐 눈만 붙인다는 게 늦잠을 자고 말았다. 그래도 집에는 들렀다 온 것인지 동만의 차림새는 깔끔했다.

“어디서 잔 거야.”

“……남이사.”

흡사 가출한 남편을 닦달하는 부인 같은 마음이랄까. 다행히 이주한은 홀로 비즈니스석이었고 그들은 이코노미석에 나란히 앉았다. 싫든 좋든 1박 2일 동안 내내 붙어 있어야 했기에 둘 사이에 틀어진 건 얼른 풀어야 했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진짜 미안하다니까. 야,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냐.”

“……내가 오냐오냐해 주니까. 호구처럼 보이지?”

“야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언제 너를 호구처럼 봤다고…….”

오늘따라 김동만답지 않게 예리해서 순간 속으로 뜨끔했다. 미간을 찡그린 동만은 아직 화가 덜 풀린 것 같았다.

“너하고 이 부장 문제는 둘이서 해결해야지. 왜 자꾸 날 끌어들이는 건데. 너 진짜 나 화내는 거 보고 싶어?”

“이번 한 번만…….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 네가 필요해서 그런 거잖아. 알잖아, 나 면허증 없는 거. 그렇다고 렌터카를 이 부장이 운전할 수도 없잖아. 저 자식 자존심에 직접 운전할 거 같아?”

“너는 그 나이 되도록 면허증도 안 따고 뭐 했냐?”

그랬다. 은찬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제주도 출장이 확정되자마자 이주한은 바로 비행기 표와 렌터카 예약을 지시했다. 그때 은찬은 자신이 면허증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운전기사로 김동만을 끌고 가는 건 너무 속 보이는 짓 같아서 입사 동기 김동만과 현장 경험을 하고 오겠다고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사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떠들어 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단지 이주한과 단둘이 갈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고 불행히도 그 제물이 김동만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 어렸을 때 교통사고 당해서 차 무서워하거든.”

“팀에서 너 빼고 다 면허증 있거든? 왜 굳이 나야!”

동만의 이마에 굵은 힘줄 하나가 솟아올랐다. 은찬은 녀석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간절히 애원했다.

“미안! 진짜 미안! 내가 다음에 또 이러면 너 시키는 거 다 할게! 뭐든지 말만 해!”

“유은찬 씨.”

한참 동만을 달래고 있는 와중이었건만 이주한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저 자식이 미쳤나 보다.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동공이 고양이처럼 변해 있었다.

비행기 이륙 전이라고 자리에 앉으라는 스튜어디스의 말도 무시하고 그의 시선은 은찬이 잡고 있는 김동만의 손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런 이주한의 기세에 덩달아 놀란 동만도 숨을 죽였다.

“두 사람 뭐 하는 겁니까? 지금 우리가 놀러 가는 걸로 보여요? 업무차 출장 가는 겁니다. 일 때문에!”

“…….”

어금니를 꽉 깨문 이주한의 경고에 은찬은 두 손을 공손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동만도 두 손을 다소곳이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정면만을 바라보자 그는 그제야 제자리로 돌아갔다.

징하다, 이주한. 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까지 쓸데없이 왜 온 거야? 진짜 하다 하다 별 트집을 다 잡는다 싶었다.

“저 봐, 저러니까 내가 둘만 가고 싶겠냐고.”

“내가 같이 가면. 뭐 다를 거 같냐? 너 때문에 지금 나도 많이 찍힌 상태거든? 방금도 나 엄청 째려봤잖아!”

평일 아침이지만 비행기는 만석에 가까웠다. 다들 여름휴가를 떠나는 모양인지 즐거워 보였다. 유독 은찬과 동만 쪽만 분위기가 어두웠다. 다른 이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두 사람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대화를 이어 갔다.

“첫째. 네가 있음으로써 저 자식의 쓸데없는 추근거림을 방지할 수 있고. 둘째. 나 혼자 듣는 잔소리보다 같이 나눠서 들으면 좋잖아. 셋째도 말해 줘?”

“됐다. 개소리겠지. 내가 말을 말자. 내가 미쳤지. 자고로 커플 일에는 껴서는 안 되는 건데.”

“미쳤냐? 누가 커플이야, 누가!”

“야! 연애 못 해 본 나도 알겠다! 이 부장 저 자식 지금 너한테 푹 빠진 거라니까?”

“너 어제 외박하더니 미쳤냐? 나가서 약했어? 너는 푹 빠진 놈을 저딴 식으로 쳐다보냐? 저 눈에 사랑이 담겨 있어? 저 자식 하는 행동을 봐! 사사건건 나랑 싸우자고 달려드는 거지! 내 말 틀려?”

“……그건, 그렇긴 한데. 아닌데……. 분명히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있긴 뭐가 있어? 연애도 한번 못 해 봤으면서 아는 척하지 말지? 자고로 누군가를 좋아하면 말이다. 그 사람이 하는 짓이 전부 예쁘고 귀엽고 깜찍하게 보이거든? 저렇게 광견병 걸린 개처럼 이유 없이 달려들지는 않는다고.”

“……너 거기 가서 입조심해. 또 개 같다느니 광견병 걸린 개라느니 그런 소리 했다가 욕먹지 말고. 그리고 너 자꾸 연애 못 해 봤다고 나 까는데. 누구처럼 발정 날 때마다 오는 놈 안 가리고 따먹히는 너보다야 내가 났다고 자부할 수 있거든?”

좀 전까지만 해도 동만에게 절절매던 은찬은 거친 숨을 내쉬며 코를 벌렁벌렁거렸다.

“너 말이 좀 심하다? 내가 무슨 시식 코너야? 오는 놈 안 가리고 따먹혀?”

“왜? 내 말이 틀려? 아니면 반박해 봐.”

원래 순하던 놈이 한번 화내면 무서운 법이랬다. 한번 삐뚤어지기 시작한 김동만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더 억울한 건 틀린 말이 아니라서 반박할 수 없었다. 너무 분한 나머지 은찬은 최후의 방법을 꺼냈다. 머리 사이로 까만 귀가 뿅 하고 나타났다.

“야! 여기서 귀가 왜 나와! 비행기 타서 긴장했어? 아니면 어디가 안 좋아?”

보통 수인은 자신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건 학계에 알려진 평균적인 내용이고 수인들이 귀와 꼬리를 드러내지 않는 건 귀찮아서다. 겉모습은 똑같은 사람인데 귀하고 꼬리가 달려 있다는 이유로 동물원의 동물처럼 신기하게 쳐다보니까.

인간 사회에 위화감 없이 섞여야 했으므로 감정적으로 큰 변화가 있을 때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혹은 본능적으로 나왔다. 지금은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어제오늘 신경 좀 썼더니…… 좀 그러네.”

고개를 힘없이 떨군 은찬의 속삭임에 동만은 안절부절못하며 두 손으로 고양이 귀를 가리기 바빴다.

“야, 미안. 이제 그만하자. 얼른 집어넣어! 사람들 본다!”

“……나 눈 좀 붙일게. 부장 오는지 망 좀 봐 줘. 그리고 나 컵라면 먹고 싶어. 갑자기 먹고 싶어. 스튜어디스 분들 지나가면 하나 시켜 줘.”

“알았어.”

뛰는 김동만 위에 나는 유은찬이 있었다. 이렇게 또 유은찬 쪽으로 기세가 기울었지만 정작 동만은 눈치채지 못했다.

라면도 먹고 콜라도 한잔 마시고. 동만의 극진한 수발을 받는 동안 한 시간의 비행은 금방 끝나 버렸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제주도에 도착한 은찬은 제주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다시 지옥 시작이었다. 어째서인지 이주한은 김동만과 은찬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고 그 상태로 렌터카가 있는 쪽으로 이동하게 됐다.

리조트로 향하는 길, 차 안은 숨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였다. 운전하는 동만도 조수석에 앉은 은찬도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이주한의 행동에 둘은 소리 없는 눈짓만 주고받았다.

다행히 리조트 담당자와 미팅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이주한과 담당자가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있을 동안 멀지 않은 곳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은찬은 졸음이 밀려왔다. 남들은 휴가로 오는 제주도건만 은찬에게는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쏟아지는 하품을 터트렸다.

비행기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부터 이런 사태를 예상해야 했다. 일하러 온 제주도에서 딴짓이라도 할까 봐 지랄하는 꼬락서니 하고는.

그나저나 여기까지 왔는데 저녁밥은 사 주겠지? 제주도 구역별로 나뉜 체인점 리조트라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점심도 거른 채였다. 비행기 안에서 컵라면 하나 먹은 게 전부였기에 없던 식욕도 다시 생길 판이었다.

“그럼, 이 부분만 저희가 리조트 시스템에 맞게 프로그램을 다시 짜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잘 부탁합니다.”

드디어 긴 협상이 끝났나 보다. 지금까지 인사 말고 단 한마디도 뻥긋하지 못한 은찬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의문스러웠다. 이럴 거면 혼자 왔어도 됐잖아. 조용히 시선이 마주친 동만도 은찬과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이주한은 정중하고 깍듯하게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 더 리조트 담당자와 악수를 나눴다. 그가 이동하자 두 사람은 바짝 그의 곁에 붙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네요.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 같네요.”

이주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찬을 바라보았다. 뭐라도 한마디 해 줘야 할 것 같은 부담스러운 시선에 은찬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잘, 됐네요.”

“그것뿐이에요?”

그럼?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는 건데. 동만과 은찬은 대화 자체에 끼지도 못했다. 그냥 구경꾼 모드로 앉아서 쏟아지는 졸음과 싸워야 했다.

“뭐, 이제 시작이긴 하니까. 앞으로 더 큰 기업에서 문의가 들어올 겁니다. 이런 잔챙이 말고.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아, 그 전에 호텔에 들러서 씻고 가죠.”

동만과 은찬에게 의견 발언 건 따위는 없었다. 오직 이주한만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둘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 말에 따르기만 하면 됐다. 뭐든 좋았다. 일단 잠시라도 쉬고 싶었던 은찬은 서둘러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유은찬 씨.”

“네?”

“거기 말고. 여기 타.”

주차된 차 문을 열고 막 타려는데 이주한이 그런 은찬을 단호하게 막았다. 그는 열려 있는 조수석 문을 닫고 은찬을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당연히 바로 옆자리는 이주한의 자리였다. 은찬은 이 자리가 불편하다 못해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왜? 싫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래도 부장님하고 같이 앉아서 가는 게…… 좀.”

억지로 웃으며 최대한 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다 이런 거니까. 더럽고 치사하지만 참는다.

“두 사람 또 붙어 앉으면 이상한 짓 할까 봐. 사람들 다 보는 비행기 안에서 손을 잡고 있는 대범함에 나 놀랐거든.”

“아…… 하하.”

“나한테는 비밀 연애라고 하더니. 회사 밖에서는 그런 것도 없나 봐?”

도대체 이주한의 트집은 어디까지 향할 것인가. 아마도 그와 함께하는 두 달이라는 기간 동안 최대의 고비가 오늘과 내일이지 싶다. 예상컨대 마의 1박 2일만 잘 넘기면 두 달 정도는 껌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봤는데. 호텔 방을 두 개 잡았잖아. 내방 하나 두 사람이 쓰는 방 하나. 그냥 세 사람이 같이 쓰는 거로 하면 어떨까 하는데.”

순간 잘 달리던 차가 도로 한복판에서 굉음을 내며 급정지를 했다. 안전띠를 했으니 망정이니 큰일 날 뻔했다. 놀란 은찬이 본능적으로 배를 감쌀 동안 이주한의 손은 앞으로 쏠린 은찬의 몸을 보호했다. 이럴 놈이 아닌데. 이주한의 다른 면에 의아한 것도 잠시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리에 은찬은 깜짝 놀랐다.

“김동만 씨, 미쳤어요? 다칠 뻔했잖아! 지금 나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목에 굵은 핏대를 세운 이주한은 차가 들썩거릴 정도로 버럭버럭 소리쳤다. 물론 은찬도 화가 났지만, 동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바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애초부터 씨앗을 뿌린 놈이 더 지랄을 하는 상황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저 새끼가 돌아도 단단히 돌았나 보다. 이제는 하다 하다 별 개소리를 다 한다. 세 사람이 한방을 쓰자고? 왜, 3P를 하자고 대놓고 말하지. 너무 놀라 굳어 버린 동만은 쏟아지는 이주한의 거친 발언에 귀 끝까지 빨갛게 변해 버렸다.

“죄…죄송합니다. 고의가 아니라……. 죄송합니다, 부장님.”

불쌍한 김동만. 울려고 한다.

“갑자기 뭐가 튀어나온 거야?”

“어?”

“아니, 너 운전하면서 이런 실수한 적 한 번도 없잖아. 우리 동만이가 이런 애가 아니거든요. 진짜 운전 잘하는데. 헛것을 봤나 봐요. 그치, 동만아!”

“……어. 그런가 봐.”

“죄송합니다. 부장님. 어디 안 다치셨죠? 많이 놀라셨어요? 이런 일 생기면 들어가서 푹 쉬어야 하는데. 저녁 건너뛰시고 호텔 방에서 쉬실래요?”

김동만을 이곳까지 끌고 온 사람이 은찬이었으니 이런 것쯤 도와줘야 인지상정이지. 은찬이 두 팔 걷어 변명을 하자 이주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은찬과 동만을 번갈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렸다.

“나랑 같이 방 쓰기 싫다는 거로 들리는데.”

재수 없을 만큼 눈치 빠른 새끼. 척하면 척이네. 은찬은 싱긋 웃으며 핑계를 둘러댔다.

“아니요. 다 부장님 생각해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모르셔서 그러는데. 김동만하고 아무나 같이 못 자요. 쟤 코도 엄청 심하게 골고요. 또 이도 갈아요. 그것뿐인지 아세요? 몽유병도 있어요. 낯선 사람하고 자면 그 사람 죽이겠다고 목도 막 조른다니까요?”

미안하다 김동만. 우리가 살려면 이럴 수밖에 없다. 본인 앞에서 본인을 험담하니 기분이 참 묘했다.

“……진짜야?”

“그럼요! 제가 2년 동안 같이 살아서 알잖아요. 그리고 한 침대를 쓰기도 하니까.”

더러운 성격처럼 잠자리도 까다로울 것이라 예상을 하고 던진 말에 그는 슬슬 넘어오고 있었다.

“그쪽 방 타입이 뭐야? 더블베드? 트윈 베드?”

예약을 내가 했냐! 한 가지 확실한 건 이주한의 방은 호텔 스위트룸으로 예약됐다는 거다.

“가 보면 알겠죠.”

그래도 1년 사수로 있었다고 이주한의 성격을 대충 파악한 은찬의 임기응변으로 잘 넘어갔다. 하지만 호텔에 도착하고서도 이주한의 지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참 여러모로 사람을 질리게 했다.

잘생긴 재벌이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김동만과 유은찬의 방이 더블베드라는 사실에 역정을 내더니 그 자리에서 트윈 베드로 바꿔 버렸다. 이제껏 유은찬에게 돈 한 푼 쓰지 않던 짠돌이 새끼가 직접 제 카드로 차액을 결제까지 하면서 말이다.

남자끼리 방을 쓰는데 트윈이든 베드든 무슨 상관이라고. 오히려 이주한이 더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가 화를 낼 동안 동만과 은찬은 두 걸음 정도 떨어져 타인인 척 행동했다.

이주한을 방 앞까지 모셔다드리고 드디어 두 사람에게 잠깐의 자유가 찾아왔다. 동만은 호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로 몸을 날렸다.

“아아아아! 하루가 1년 같았다…….”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 말에 은찬도 옆 침대에 털썩 누우며 맞장구쳤다.

“아직 끝난 거 아니다. 씻고 밥도 먹어야 하고. 내일 서울로 모셔다드려야지.”

“지옥이다, 지옥! 여기가 지옥이야아아! 아니, 진짜 저 새끼 돌아이 아니냐? 다 이해해! 이주한이 오늘 한 짓들 이해할 수 있다 쳐! 지 눈에는 우리가 애정 행각 벌이는 것처럼 보여서 짜증 나겠지! 그런데 같이 방 쓰자는 건 오버 아니냐? 나 그때 진짜 어이가 없어서 차 세웠다니까?”

“나야 니 기분 다 이해하지. 봤지? 내가 백날 말해도 사람들은 모른다니까? 저 새끼가 기분 맞춰 주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이제야 알겠지? 지금은 별거 아니야. 그나마 조금. 아주 조금 착해진 거니까. 옛날 같았음. 너 그 자리에서 팔도강산 욕이란 욕은 다 들어 먹었을걸?”

“와…… 너 어떻게 버텼냐?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니가 새롭게 보인다.”

김동만은 누운 채 은찬을 향해 박수를 쳤다.

“너, 아까 나한테 감동했지? 내가 막 너 편들어 줄 때.”

“……응.”

“그러니까, 봐. 나밖에 없지?”

“왜. 또 무슨 말 듣고 싶은데. 알았다. 너밖에 없다! 우리 유은찬이 최고다! 너 없으면 못 살겠다! 됐냐?”

농담 식으로 던진 동만의 말에 은찬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켜 세워 녀석에게 등을 보이며 명령했다.

“나 어깨 좀 주물러 줘. 아까 놀래서 굳었나 봐.”

“아, 맞다. 괜찮아? 미안. 많이 놀랐지?”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너보다 이주한 그 새끼가 목에 핏대 세우고 소리칠 때 더 놀랐어. 얼른 주물러 봐. 저 새끼 씻고 내려오기 전에 우리도 좀 쉬어야지.”

은찬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난 동만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하아……. 좋다. 우리 동만이 손길이 최고다.”

“그렇지? 내 손이 좀 좋긴 하지. 테크닉이 끝내주잖아.”

“아……. 아아. 거기 아파!”

“이런 데는 더 만져 줘야 해.”

딱딱하게 굳은 어깨 위로 동만의 손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시원한 통증이 번져 갔다. 동시에 오만상 인상을 쓴 은찬의 옅은 신음이 방 안을 꽉 채워 갔다.

***

주한은 자신이 이곳에서 서성거리는 행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자존심보다 두 사람이 한 방에 있다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김동만과 유은찬이 들어간 방 앞. 그 앞에 덩그러니 선 채 이주한은 내적 갈등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문을 두드릴까?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기를 두 차례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의 옅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자세히는 들리지 않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주한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아무도 없었다. 결국, 그는 자존심을 접고 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최상 계층의 수인. 대기업 회장의 손주라는 사회적 지위가 있던 그에게 이런 수치스러운 행위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 잊어버리고 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봐 숨까지 참았다.

“우리 동만이…… 최고다…….”

“테크닉…….”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와 함께 유은찬의 야한 신음이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눈을 부릅뜬 이주한은 주먹을 꽉 쥐며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이 고양이 새끼가!”

한 시간도 아니고 30분 뒤 로비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진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를 못 참고 저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문 너머에서 지금 무슨 일이 펼쳐지고 있는지 주한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살살…… 하아…… 아! 살살 좀……! 너무 세잖아!”

“알았어! 조금만 힘 풀어 봐. 하기 힘들잖아.”

두 사람의 대화는 적나라했고, 은찬의 신음은 화가 날 정도로 야했다.

“유……! 하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주한은 문을 두드리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가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고작 저 딴 고양이 새끼 때문에 이러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이번 출장에 굳이 유은찬을 끌어들인 건 그걸 핑계로 하룻밤 같이 보내기 위한 주한의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금붕어 똥 마냥 김동만이 딸려 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주한은 여전히 두 사람 사이를 의심했다. 회사에서 계속 주시했지만,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손을 꼭 맞잡고 있는 그들을 본 순간 가슴속에서 욱하고 무언가 올라왔다.

평소의 이주한이라면 애인 있는 사람은 건들지 않는 주의였다. 구질구질하고 말이 많아지는 그런 만남을 가질 이유도 없거니와 그의 전화 한 통이면 당장 달려올 녀석들 연락처만 핸드폰 안에 꽉 차 있었다.

“좋냐?”

“……더, 야! 좀 더 세게 좀 해 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아…… 아아. 좋다!”

더러운 고양이 자식. 상사하고 같이 온 출장에서 뭐 하는 행위인 거야? 너는 도덕도 없냐! 주한은 당장 이 문을 열고 김동만의 얼굴에 주먹을 갈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선뜻 문을 두드릴 수 없는 건 자신이 왜 이런 짓까지 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서였다.

부하 직원에게 섹스 상대가 되어 달라고 하는 것도, 애인 있는 놈에게 달라붙는 것도, 애인끼리 애정행각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그리고 두 사람이 방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에 화를 내는 것도 전부 다 이주한답지 않은 행동 투성이였다.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움켜쥔 주먹을 풀고 그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최상 계층 수인에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자신이 왜, 저런 볼품없는 고양이 따위를!

지금껏 이주한의 잠자리 상대가 된 녀석들과 비교해 본다면 유은찬은 정말 별 볼 일 없었다. 눈길을 끌만큼 잘생기지도 예쁘지도 않았다. 같은 팀에 있을 당시 눈만 마주치면 짜증 나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막상 이유를 파고들자니 말문이 막혔다.

“아…… 아아. 동만아…… 그만! 그만! 나 더 못 하겠어. 이따가 다시 하자.”

“하던 거는 마저 해야지!”

자신에게 안겼던 것처럼 김동만에게 안겨 있는 걸까. 그때 보여 준 그 모습이 주한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흥분한 유은찬의 모습이란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야했다.

문 너머 소리는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연신 신음을 터트리는 은찬과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김동만. 주한은 잠시 본인의 신분을 망각하고 그 소리에 집착했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내적 갈등에 휩싸였을 뿐 엿듣기를 즐기는 건 아니었다.

그때였다. 주한의 등 뒤로 여자의 앙칼진 괴성이 들렸다. 고요한 복도를 뒤흔드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주한이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다.

“꺄아! 변태, 변태야! 누구 없어요! 여기 고양이 수인이 방문 앞에서 엿듣고 있어요!”

고양이 수인? 그녀의 말에 주한은 본능적으로 제 머리를 만졌다. 미쳤다, 이주한. 자신도 모르게 귀와 꼬리가 나온 상태였나 보다.

“아니! 저기, 그게 아니라. 여기 내 부하 방……. 그러니까!”

“변태 새끼! 오지 마! 오지 마! 도와주세요!”

위험에 처한 그녀의 요청에 굳게 닫혀 있던 호텔 방문들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주한이 앞에 덩그러니 서 있던 문도 열리기 직전이었다. 미치겠네. 그는 재빨리 귀와 꼬리를 집어넣고 빠른 속도로 그녀의 반대편 복도로 달렸다. 진짜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도망간다! 저기, 저기로 도망쳤어요!”

때마침 근처에 있던 호텔 직원이 비상구 계단으로 달려와 주한을 뒤쫓아 왔다. 하지만 주한은 수인이다. 사람보다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는 표범 수인.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방까지 도착한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호텔 전화기를 들었다.

“하아! 하아, 하아! 지배인 좀 바꿔 주세요! 아니요, 직접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네! 그럼 제 방으로 와 달라고 전해 주세요! 당장이요!”

먹은 것도 없는 속에서 토악질이 올라올 정도로 사력을 다해 뛴 주한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 좀 전에 그 여자, 주한을 변태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굴욕에 수치스러움이 물밀 듯 밀려왔다.

정확히 5분 뒤. 멍하니 앉아 넋이 나가 있던 주한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주한의 부름에 달려온 호텔 지배인에게 그는 조심스럽게 조금 전 일을 꺼냈다. 아까 그 손님이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다. 내 일행이 그 방에 머물고 있고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것뿐이다. 즉, 자신은 변태가 아니라는 무죄를 강조, 또 강조했다.

제주도까지 와서 이게 무슨 개망신인가 싶었지만 주한은 최대한 근엄하게 말했다. 이미 주한이 누구인지 알고 있던 지배인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로 그를 안심시켰다. 보통 이런 일은 경찰까지 대동해서 CCTV 확인까지 하는 게 정석이지만 지배인 선에서 무마시킬 생각인 것 같았다.

주한은 고맙다는 의미로 그에게 50만 원의 팁을 건넸다. 주한에게는 지배인이 생명의 은인과도 마찬가지였다. 융통성 없는 지배인이었다면 빼도 박도 못하게 변태로 오해받아 경찰서까지 갈 뻔했으니까. 그것도 쪽팔리게 유은찬 앞에서.

지배인이 나간 뒤 로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대충 머리에 물만 묻히고 캐주얼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주한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로비로 향했다. 김동만과 유은찬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주한을 발견하지 못한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왜 이렇게 꼴 보기 싫은 걸까. 두 사람이 눈이 마주치는 것도, 가벼운 터치를 하는 것도. 대화를 나눈 것 자체도 다 싫었다.

지금 유은찬이 짓는 미소는 자신에게 보이던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는 게 주한의 가슴을 더 쓰라리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을 툭툭 치며 주한은 옅은 한숨을 터트렸다.

“기분 이상하네…….”

차라리 변태로 오해받는 게 더 나았으려나. 오늘 여러모로 유은찬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짓을 여러 번 벌인 주한이었지만, 웬일인지 녀석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냥 그랬다.

***

이주한이 이상했다.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창밖만 계속 응시했다. 깜깜한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한숨을 터트렸다. 덩달아 차 안의 공기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무거워졌다.

이주한 한숨 한 번에 동만과 은찬은 그의 눈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또 무슨 개지랄을 부릴까 싶어서 불안함이 밀려왔다. 보다 못한 은찬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입을 열었다.

“부장님, 아까 호텔에서 무슨 일 있었다던데. 들으셨어요?”

“……무슨 일?”

시큰둥한 그의 반응에 은찬은 일부러 더 신나게 떠들어 댔다.

“호텔에 변태가 나왔대요! 그것도 수인 변태!”

“…….”

“그치, 동만아. 너도 들었지? 우리 방 앞쪽이라고 하던데……. 변태가 방문 앞에 귀를 딱 대고 엿듣고 있었대요. 목격자 말로는 엄청 큰 고양이 변태래요! 그 변태 안 잡혔으니까 부장님도 조심하세요. 잘 때 방문 꼭 잠그시고요. 좋은 호텔이면 뭐 해요? 변태도 있는데.”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이주한은 맥락에 어울리지 않게 뜬금없이 메뉴를 들먹거렸다. 배가 많이 고픈가. 하기야 오늘 먹은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진짜 어떤 놈인지. 얼굴 한번 보고 싶다! 그런 놈이 수인 망신 다 시키고 다니는 거라니까요? 같은 수인이지만 진짜 내가 다 부끄럽다!”

“그러니까, 뭐 먹고 싶은데!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도대체 몇 번을 물어! 몇 번을……!”

갑자기 이주한이 목청을 높이며 꽥꽥 소리를 질렀고 덕분에 차 안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곁눈질로 훔쳐본 이주한은 웬일인지 힘이 쫙 빠져 있었다.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메뉴! 뭐 먹을 건데!”

이주한의 재차 물음에 은찬은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물론 저녁 메뉴는 동만과 미리 입을 맞춘 상태였다.

“제주도 흑돼지 삼겹살이 유명하다던데…….”

“그거 먹고 싶어?”

“아니요. 꼭 그런 건 아니고……. 유명하다니까 온 김에…… 먹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거 먹자.”

그 뒤 이주한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한소리 들을 줄 알았건만 쉽게 오케이 하는 이주한의 행동이 불안했던 은찬은 계속 곁눈질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잠시 뒤 설레는 맘으로 제주도에서 제일 유명한 흑돼지 삼겹살집에 도착했지만 길게 늘어선 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 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어쨌든 그 줄의 맨 끝자락에 선 은찬은 이주한을 또 힐끔거렸다.

그가 은찬의 사수로 있었을 당시. 사람 북적이고 메케한 연기가 꽉 찬 고깃집에서 회식을 할 때마다 이주한은 매번 불평불만을 터트렸다.

그리고 지금. 북적이는 사람과 작은 가게 내부를 꽉 채운 연기, 그리고 긴 웨이팅까지. 이주한이 싫어하는 요소 삼박자가 딱 떨어지는 지금 은찬은 지레 겁을 먹었다. 이쯤 되면 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저기…….”

제주도까지 와서 흑돼지를 포기하기는 싫지만 이주한의 지랄이 더 무서웠다. 김밥으로 허기를 때울지라도 말이다.

“왜.”

“좀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은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주한의 시선이 긴 줄을 쭉 훑어 내려왔다. 몇 초의 정적이 흘렀을 뿐인데 긴장감은 최고조였다.

“그러네.”

최소한 눈을 부라리며 그딴 것도 알아보지 않고 왔느냐고 소리치고 화낼 줄 알았건만 이주한은 예상과 다르게 아주 쉽게 수긍해 버렸다. 당황한 은찬은 그런 이주한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디 아프세요?”

“뭐?”

“오래 기다려야 한다니까요? 30분 이상이요. 괜찮으세요?”

“그게 왜! 너 왜 날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야?”

오히려 이주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은찬에게 핀잔을 던졌다.

“이거 먹고 싶다고 한 건 너잖아! 왜? 먹기 싫어? 맛집 어쩌고 하더니. 30분이 뭐. 제주도에서 소문 난 맛집이면 그 정도는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 정도는 나도 알거든? 이거 먹기 싫으면 다른 데 가고!”

“…….”

이상하다. 진짜 이상하다. 이주한을 알고 지낸 지 2년이 넘어가지만, 오늘처럼 이상한 적은 처음이다. 짜증 내는 건 똑같은데 사소한 거로 꼬투리 잡고 늘어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평소의 이주한이라면 길길이 날뛰고도 남았을 일인데 오히려 은찬을 생각해 주는 뉘앙스랄까…….

은찬이 가식적으로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 하자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건만 입을 꾹 다물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좀 전처럼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야, 내 표정이 어땠는데?”

그런 이주한에게 시선을 고정한 은찬은 살짝 뒤로 물러나 동만에게 속삭였다.

“이 병신 새끼 또 왜 저러나 하는 표정?”

“진짜? 그렇게 티 났어?”

동만은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며 강조했다.

“엄청.”

그때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린 이주한이 눈을 부릅뜨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유은찬 씨, 김동만 씨! 나하고 있을 때는 잡담 금지! 내 뒤에서든 앞에서든 터치도 금지!”

그럼 그렇지. 웬일로 인간답게 대우해 주나 했다. 재빨리 동만과 시선을 교환한 은찬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하려는 찰나, 한 가지 더 추가됐다.

“눈빛 교환도 금지!”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라는 건가? 우리가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이 정도면 인권 침해 아닌가?

“너무 심…….”

“어? 이주한?”

심하신 거 같다고 단호하게 따지려는데 누군가 이주한의 이름을 친근하게 불렀다. 가게에서 나와 막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던 웬 남자가 이주한을 보자마자 반갑게 달려왔다.

“네가 여기 어떤 일이야? 너 이런데 싫어하잖아.”

살짝 파마기가 있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는 짙은 쌍꺼풀 진 큰 눈을 반짝였다. 이 잘생긴 남자는 누굴까. 동만과 은찬은 대놓고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출장. 회사 직원들하고 저녁 먹으러. 너는?”

“난 휴가. 출장? 너도 일하긴 하나 보네.”

“그럼. 내가 넌 줄 알아?”

“모처럼 만났는데 이따 만나서 한잔할래?”

“나 놀러 온 거 아니야.”

“야, 저녁에 만나는 건 괜찮잖아. 다음날 일하는 데 지장만 없으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살짝 속이 비치는 하얀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에 검정 샌들을 신은 정체불명의 이 남자. 눈웃음치며 이주한에게 계속 들이대는 걸 보아하니 추측하건대 같이 잤던 놈 둘 중 하나인 게 확실했다.

반가워서 어찌할 줄 모르는 남자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이주한. 물론 은찬은 이 남자가 지금 당장 이주한을 데리고 가줬으면 하고 바랐다. 제발 말이다.

“너 못 보는 사이에 말 많아졌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

“너는 못 보는 사이에 좀 변했다? 이따 전화할게. 아 참, 나 애인이랑 헤어져서 혼자서 이별 여행 온 거야.”

“안 물어봤거든?”

“궁금해할까 봐. 몇 달 전에 나한테 애인 안부 물었잖아.”

“……개인적인 내용은 나중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지금은 가. 회사 사람들 앞이잖아.”

이주한의 반응은 쌀쌀맞았지만 남자는 계속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오늘따라 너 엄청 쌀쌀맞다? 회사에서 이런 캐릭터야? 우리 주한이 회사에서 이렇게 차가워요?”

우리 주한이란다. 그럼 게임 끝났지 뭐. 은찬은 뜨악한 표정으로 그 둘을 번갈아 보았다.

“야!”

“전화해! 알았지? 나 잠 안 자고 기다린다?”

이주한이 버럭 소리쳤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휴대폰을 흔들며 주차장 쪽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은찬의 시선도 그 남자를 따라갔다. 역시 유유상종이다. 저 자식도 부자였다. 주차장에서 제일 눈에 띄던 노란색 외제 스포츠카를 타고 남자는 홀연히 사라졌다.

“둘이 무슨 사이일까?”

동만은 이주한과 정체불명의 저 남자의 관계가 궁금한 모양이다. 하여튼 눈치 없기는. 우리라는 단어까지 나왔는데 그걸 추리 못 하나? 은찬은 이주한의 눈치를 보며 복화술로 속삭였다.

“딱 보면 모르냐? 나 오늘 밤 한가하다고 아예 대놓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친구 이상 연인 이하.”

“그게 뭔데?”

“섹파! 이 병신아!”

“진짜? 대박! 대놓고 저렇게 말한다고?”

김동만이 입을 쩍 벌리며 감탄하고 있을 때 또다시 이주한은 고개를 획 돌렸다. 은찬과 동만을 번갈아 보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친구입니다.”

“…….”

“…….”

“친구! 친구 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니고 정말 친구!”

들었구나. 은찬과 동만은 환하게 웃으며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친구입니다! 정말 친구. 지금 전화해서 확인시켜 줄까요?”

친구든 뭐든 두 사람의 관계가 딱히 중요하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고기 굽는 연기 덕분에 입에 침이 고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안 믿는 모양인데. 전화해서 확인시켜 줄게요.”

궁금하지 않는데 이주한은 그것에 집착했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다음 손님 들어오세요. 몇 분이세요?”

드디어 들어갈 차례가 됐다. 꽤 오래 기다릴 줄 알았더니 단체 팀이 나간 모양이다. 은찬은 이주한을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아주 밝게 외쳤다.

“3명이요!”

드디어 입에서 살살 녹는 흑돼지를 먹는다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가격에 헉 소리가 나왔다.

600g당 6만 원. 그러니까 100g당 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금을 두른 고기인가 싶을 정도로 비쌌지만, 오늘은 가격 따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패스. 이주한이 사 주겠지 뭐. 평소 고기라면 혼자 3인분은 너끈히 먹는 은찬은 자리에 앉자마자 7인분을 주문했다.

“사람은 세 명인데 7인분?”

자연스럽게 은찬의 맞은편에 앉은 이주한이 까칠하게 따졌다. 그들이 앉는 즉시 물과 몇 가지 반찬들이 식탁 위에 착착 놓였다.

“여기 양이 좀 적다는데요? 그거 먹고 모자라면 더 시켜도 되죠?”

물수건을 깨끗이 손을 닦으며 은찬은 경건하게 고기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주한의 시선은 뭔가 탐탁지 않아 보였다. 왜 저러지? 가격 때문에 그런가? 하기야 아무리 관광지라고 하지만 인간적으로 비싸도 너무 비쌌다. 양심적으로 미안했던 은찬은 그와 마주친 시선에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유은찬. 고기가 그렇게 중요해?”

“네?”

“내 말보다 고기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내가 말하는 중이었잖아.”

이주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은찬은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가게 안은 소란스럽기 그지없는데 이 테이블만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동만이 식탁 밑으로 은찬의 다리를 쿡쿡 찔렀다. 눈알을 굴려 녀석과 시선을 마주치자 ‘친구’라는 입 모양으로 힌트를 던졌다. 설마 고작 그거 때문에 저러는 거라고? 역시 이주한이다. 오늘도 여러모로 지랄을 떤다.

“아, 친구분…….”

다시 그 주제로 돌아가자 이주한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신의 말을 믿어 달라는 시선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기 시작했다.

“친구야, 친구. 걔가. 원래 말투가 그래서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가끔 만나서 술 한 잔씩 하던 친구. 술친구.”

무슨 설명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장황하게 할까. 딱히 관심 없던 은찬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불판과 함께 나온 두툼한 고기에 시선을 빼앗겼다.

“부장님 주위에는 다 그런 분들밖에 없나 봐요? 엄청 잘생겼던데요?”

동만의 관심 어린 질문에 기분이 좋았는지 주한은 턱을 세우며 거들먹거렸다.

“어쩌다 보니 다 그런 놈들뿐이랄까.”

“저녁에 만나서 한잔하실 거예요?”

“놀러 온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왔는데 사적으로 누구 만나는 게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에이, 다음 날 일에 지장 없으면 되는 거죠. 친구분 부장님 전화 기다린다고 한 것 같은데.”

“그보다 난 우리 셋이서 한잔하고 싶은데.”

“저희랑요?”

“이렇게 세 사람 같이 출장 오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지. 한 번 더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그땐 정말 은찬이 먼저 사표를 던질지도 모른다. 지글지글 구워져 가는 고기를 사이에 두고 은찬은 주한과 소리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 마주친 시선에 욕을 듬뿍 담아 입꼬리를 올렸다.

친구 같은 소리 한다. 너하고 아까 그놈 섹파인 거 다 뽀록 났어, 이 새끼야. 누가 친구한테 그런 식으로 꼬리 치냐? 순진한 김동만은 속여도 나는 안 속지.

“고기 타는데 먹어도 될까요?”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연 은찬의 물음에 어금니를 꽉 깨문 주한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먹어요. 배 터지게. 실컷.”

누가 그런다고 무서워할 줄 알고.

“잘 먹겠습니다! 부장님도 많이 드세요! 와, 고기 두께 좀 봐!”

적당하게 익은 고기 한 점을 입 안에 넣은 은찬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박……! 육즙이 그냥! 동만아, 너 이것 좀 먹어 봐! 진짜, 진짜 맛있어! 서울에서 먹는 거 하고 비교가 안 돼! 이래서 흑돼지, 흑돼지 하는가 보다!”

“그렇게 맛있어?”

“어! 완전. 나 이거면 오늘 5인분도 먹겠다.”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어, 너도.”

그러면서 은찬은 동만의 밥 위에 고기 하나를 올렸다. 그러자 동만도 은찬에게 고기를 올려 준다. 몇 차례 그런 행동을 보이자 고기를 씹던 이주한의 표정이 서늘하기 그지없다. 사실 이 모든 게 계획된 행동이라는 것을 그는 모를 것이다.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방에서 짜낸 계획이었다.

은찬과 동만이 서로의 입에 먹여 주며 희희낙락하고 있을 동안 이주한은 고기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저 팔짱을 낀 채 은찬과 동만을 지긋이 응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기 7인분은 어느덧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다. 비싼 거라서 그런지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았다.

“부장님 더 시켜도 돼요?”

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더 드세요. 먹고 싶은 만큼.”

“여기 2인분만 더 주세요! 그리고 밥……. 동만아, 밥 먹을래?”

“아니, 난 됐어. 더 먹으면 토할 거 같아.”

“그래 그럼. 여기 밥 하나만요!”

깔끔하게 된장찌개만 먹고 끝내야지. 기분 좋게 고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때까지 아무 말 없던 이주한의 공격이 시작됐다.

“두 사람 사귄 지 얼마 정도 됐다고 했죠?”

왜 또! 그냥 좀 넘어가자 제발.

“두 달 정도요?”

“아, 그랬지. 누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요?”

아뿔싸. 거기까진 입을 맞추지 않았다. 당황한 은찬은 재빨리 동만을 곁눈질했다.

“동만이가!”

“은찬이가!”

웃기게도 서로를 지목했다. 당황한 은찬과 동만은 동시에 큰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 하하! 야, 니가 나한테 사귀자고 했잖아. 거실에서 맥주 마시면서!”

“아아! 그랬었지? 맞다. 내가 그랬구나!”

은찬이 동만의 어깨를 퍽퍽 치며 말했다.

“아까 뭐 했어요?”

“네?”

“아까. 방에서 뭐 했냐고. 둘이서.”

대화의 전개가 왜 이럴까. 이주한은 심문하듯 은찬과 동만을 몰아붙였다. 그럼 그렇지. 비싼 고기를 사 준 이유가 있었다.

“왜 대답을 못 해? 뭐 했냐고. 방에서.”

“그냥 있었는데요. 그건 왜…….”

보다 못한 동만이 조심스럽게 대답했지만 이주한의 성에 차지 못했다. 짧게 혀를 찬 그는 더 자세한 상황을 요구했다.

“무엇을? 내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우린 놀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거라고! 신성한 출장에 허튼짓하지 말라고!”

이주한의 개소리가 또 시작됐다.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방에서 그 짓거리 한 거 아니냐고 따지는 투였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머릿속에 온통 섹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딴 걸로 몰고 가는 거겠지.

비싼 고기를 사 준 건 고맙지만 이건 아니다. 입맛이 싹 달아난 은찬은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저희 방에서 뭘 하든 그건 저희 사생활인데요? 부장님께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와서 연애를 하시겠다?”

“못할 건 없죠. 공과 사만 확실히 구분하면 되는 거잖아요. 억울하면 부장님도 아까 그 친구분 만나러 가세요. 밤에 할 일 없으시잖아요. 그분이랑 술 한잔하시면 되겠네요.”

“그냥 친구라고!”

“네, 그냥 친구요. 누가 뭐래요?”

지금까지는 이주한의 지랄을 곱게 받아 줬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은찬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던진 말에 이주한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받아칠 줄 몰랐을 거다. 솔직히 계급장 떼고 싸운다면 이주한 정도야 가뿐히 이길 수 있었다.

“유은찬.”

“저 부장님 친구 아니고요. 이름 좀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실래요? 유은찬 씨. 그게 그렇게 어려우세요?”

빡친 은찬과 표정이 험악한 이주한. 둘 사이에 낀 김동만은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알만 굴렸다.

“유은찬 씨!”

“네, 부장님!”

“이거 먹고 장소 옮겨서 좀 더 이야기해 볼까요? 나한테 할 말 많은 것 같은데.”

“친구 만나러 안 가세요? 저희가 방에서 뭐 하는지 그런 거 궁금할 시간에 친구분 만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은찬은 일부러 신경 긁는 소리를 질렀다. 순간 이주한의 이마에 핏줄이 빡 올랐다.

“유은찬 씨. 출장 온 것도 일의 연장입니다. 자리 옮기죠.”

“네, 알겠습니다. 일단 시킨 거 다 먹고 옮겨도 되죠?”

“그러세요.”

이주한은 은찬의 바람대로 깍듯하게 대해 줬다. 다른 테이블과 달리 그들이 있는 곳만 한 겨울처럼 냉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은찬은 마지막 고기 한 점까지 다 먹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세 사람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제일 처음 보이는 술집으로 향했다.

이곳도 나름 유명한 곳인지 테이블은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주문해요.”

주한은 종업원이 건넨 메뉴판을 은찬에게 건넸다.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은찬은 그것을 다시 주한에게 밀었다. 순순히 여기까지 온건 싸우기 위해서지 기분 좋게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알아서 시키세요.”

은찬의 도전적인 말투에 이주한은 건성으로 메뉴판을 훑었다.

“카투스 위스키 20년산. 병째로.”

카투스 위스키 20년산? 이주한이 주문한 술 이름에 은찬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캣닙이 첨가된 위스키는 고양이 수인 사이에서 먹어 보고 싶은 양주로 손꼽혔다. 수인뿐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에게도 독특한 맛으로 알려져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수요보다 공급량이 적기도 하고 가격도 일반 양주보다 비싼 탓에 쉽게 접해 볼 수 없는 술이었다.

그게 여기에 있다고?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가기 전 서둘러 그것을 펼쳐 본 은찬은 입이 떡 벌어졌다. 고급 술집은 아니지만,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라 그런지 술이 종류별로 다 있었다. 물론 가격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비쌌다.

카투스 위스키 20년 산. 한 잔에 7만 원. 이주한은 아무렇지 않게 병째로 시켰다.

“마셔 봤어요?”

“아니요…….”

“그렇지. 이렇게 비싼 술을 마셔봤을 리가 있나. 오늘 실컷 마셔 봐요. 내가 사 줄 테니까.”

유치하게 돈 많다고 대놓고 자랑하긴. 예전의 유은찬이었다면 웬 횡재냐 하고 얻어 마셨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술을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는 몸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비싼 술이래도 은찬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가게에서 제일 비싼 술을 병째로 시킨 덕분에 시키지도 않은 안주까지 서비스로 나와 테이블을 꽉 채웠다. 이주한은 양주잔에 술을 가득 채워 은찬에게 건넸다. 동만도 한 잔 받았고 세 사람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잔을 부딪쳤다.

“왜 안 마셔요?”

조용히 잔을 내려놓는 은찬을 향해 주한의 핀잔이 날아왔다. 나도 마시고 싶다.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캣닙 냄새 때문에 누구보다 마시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눈시울이 촉촉이 젖은 은찬이 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동만이 냅다 그 잔을 비워 버렸다.

내 술! 은찬은 소리 없이 절규하며 입맛을 다셨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은찬이 몸이 안 좋아서 당분간 술 마시면 안 되거든요.”

“……갑자기?”

갑자기 흑기사가 된 동만의 변명에 이주한이 눈을 치켜세웠다.

“대신 제가 오늘 술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나랑 상대하기 싫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유치한 발상 아닌가, 유은찬 씨? 갑자기 술을 못 마신다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갑자기가 아니라…….”

동만의 말을 믿지 못한 이주한은 성난 얼굴로 따졌다. 당황한 동만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싹둑 잘랐다.

“김동만 씨. 당신 유은찬 씨 엄마야? 아무리 애인이라도 상사 앞에서 선이라는 게 있는 겁니다. 내가 아까 말했죠? 공과 사는 구분하라고. 출장도 일의 연장선이라고. 술 못 마실 수 있고 강요 안 합니다. 그런데 그걸 왜 당신이 나서서 말하는 거냐고. 유은찬 씨는 입 없어? 회사 일 하나부터 열까지 김동만 씨가 유은찬 씨 보호자 노릇 할 건가? 아니면, 나 같은 개새끼랑은 말도 섞기 싫고 술 한잔도 마시기 싫다 이건가? 유은찬 씨. 입 있으면 직접 말해 보지 그래요?”

이주한이 속사포처럼 쏘아 댄 말에 고맙게도 은찬은 전투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래! 오늘 한번 피 터지게 싸워 보자.

“우리 동만이가, 사랑하는 애인 몸 생각해서 이러는 건데! 우리 사정 뻔히 아시면 어느 정도는 유도리 있게 이해해 주실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 둘이 사귀는 거 뻔히 아시면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그냥 일방적인 꼬투리 잡기로밖에 안 보이거든요? 동만이 하고 저! 너무 보기 좋아 보여서 배 아프세요?”

“이걸 그렇게 받아들이네. 난 지금! 왜 하필 지금 몸이 안 좋은 것인지 묻고 있는 건데. 그게 질투하는 거로 들렸습니까?”

“몸이 안 좋아서 술 못 마실 수 있는 걸 가지고. 유치하게 물고 늘어지는 걸로. 그렇게 보이네요.”

“내가 왜요?”

이주한은 그런 일은 전혀 없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며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몰라서 묻냐? 함께 일을 하게 된 직후부터 시작된 괴롭힘의 이유. 은찬은 삐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섹파 거절해서?”

담담하게 꺼낸 그 주제에 이주한보다 오히려 동만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말문이 막힌 녀석은 입에 물고 있던 수박을 떨어뜨렸다.

“내가 왜 그럴 거로 생각하죠?”

“그때부터 저만 보면 사사건건 괴롭혔으니까요. 아침에 일찍 출근해도 그걸로 꼬투리 잡고. 전화 받는 태도부터 시작해서 글씨도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셨으니까. 뭐, 다 이해해요. 원래 그랬으니까. 그런데 여기까지 와서 부장님한테 그런 식으로 지적당하는 거! 그거 되게 기분 나쁘거든요?”

“그런 식으로? 어떤 식인데요? 구체적으로.”

몰라서 묻냐? 모른 척 묻는 이주한의 물음에 은찬은 콧방귀를 꼈다.

“우리 둘이 뭘 하기만 해도 쳐다보고 눈치 주셨잖아요! 심지어 방도 같이 쓰자고 하질 않나! 왜 그러세요? 그러고 싶으세요? 혹시 제가 그거 거절해서 자존심 상하셨어요? 그렇다면 죄송한데, 저 진짜 부장님하고 그러고 싶은 마음 없거든요? 저요. 지금 애인도 있고 나름 만족하면서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만 좀 하세요! 짜증 나니까!”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나 그렇게 구질구질한 놈 아니거든요?”

은찬의 말이 길어질수록 이주한은 굳은 표정으로 연거푸 술을 마셨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누가 봐도 화가 잔뜩 난 모양새인데 아니란다.

“야! 그만해!”

“뭘 그만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보다 못한 동만이 말렸지만 은찬은 여기서 그만둘 수 없었다. 이왕 시작한 김에 지금까지 서러웠던 거 오늘 다 퍼부을 테다.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다른 팀원들도 있는데 왜 유독 저한테만 그러세요? 혹시 저 좋아하세요?”

“……하! 착각하지 마, 유은찬!”

이주한이 눈을 부라리며 은찬에게 삿대질을 했다.

“네! 그럼 착각 안 할 테니까 저희한테 관심 꺼 주실래요? 우리가 방에서 뭘 하든 말든 그런 거 묻지도 말고 상상하지도 말라고요!”

“나 눈곱만큼도 너희 둘한테 관심 가진 적 없거든!”

“아까 물었잖아요! 방에서 뭘 했는지! 그딴 게 왜 궁금한 건데? 난 변탠 줄?”

“변…… 하! 뭐?”

여기까지 속 시원하게 말한 은찬은 씩씩거리며 물 한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덩달아 술을 입안에 털어 넣은 이주한은 잔뜩 열 받은 표정으로 씩씩거렸다. 소란스러웠던 가게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두 사람이 목청껏 소리를 지른 탓이었다. 본의 아니게 집중을 받게 됐지만 열받을 대로 받은 은찬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이주한은 술 한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은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고 짧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내 욕했을까 봐 그랬다! 너, 유은찬! 내 욕 잘하잖아! 이주한 씨발 개새끼, 미친 새끼, 우라질 놈! 나 죽여 버릴 거라며? 나가서 뒈져 버리라며! 너 맨날 나 그렇게 욕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지?”

“…….”

오늘의 싸움은 자신의 승리라고 확신했지만 은찬은 생각지도 못한 이주한의 발언에 등에서 땀이 났다. 지금껏 이주한을 향해 퍼부었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욕이 떠올랐다. 마른침을 삼키며 동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 때, 이주한이 잠자는 고양이 코털을 건드렸다.

“왜? 더 큰소리쳐 보시지.”

“…….”

“내가 오죽하면 그랬을까. 유은찬 네가 얼마나 머리가 나쁘면, 사람 말을 이해 못 하면. 내가 그딴 식으로 말했을까! 내 고충은 생각도 안 하지?”

고충?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고충 같은 소리 한다. 다시 내리깐 눈을 부릅뜬 은찬은 동만의 말리는 손길도 뿌리치고 이주한에게 달려들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머리 나쁜 부하 직원 두셔서 고생 많으셨겠네요. 그런데 고충이요? 무슨 고충? 부장님 차 세차하다가 콘돔 상자 무더기로 발견한 내 고충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건 시키는 거 아니지 않나요? 아니면 나한테 야근 떠넘기고 애인 만나서 호텔 간게 고충입니까?”

“…….”

“이햐. 난 살다 살다 가 그렇게 콘돔을 무더기로 가지고 다니는 사람 처음 봤거든요. 섹스에 환장하셨어요? 아니면 병 있어요? 하루에 섹스 한 번이라도 못하면 미치는 병? 그게 뭐라더라. 동만아 너 알아?”

“섹스 중독증…….”

“맞다, 그거! 혹시 그거세요?”

이번에는 이주한이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었다. 은찬은 콧방귀를 터트리며 그가 저질렀던 말도 안 되는 행위를 떠벌렸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었지만 생각나는 대로 지껄일 때마다 이주한은 술을 홀짝였다. 비싼 술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 그는 딱 한마디를 던졌다.

“유은찬. 내가 그렇게 싫어?”

“네!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좋겠어요?”

당차다 윤은찬! 비록 수습이 불가능할지라도 오늘만큼은 속이 시원했다. 그런데 목에 핏대를 세우고 따질 줄 알았던 이주한은 턱을 괸 체 은찬을 지긋이 바라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었다.

왜 저러지? 충격받았나? 아니면 이대로 나 잘리는 거 아니야?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교차하고 있을 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왜?”

“아니, 뭐…….”

“술값 안 내고 도망갈까 봐 걱정돼? 나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거든? 이걸로 술값 계산하고 있어. 화장실 좀 갔다 올 테니까.”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이주한은 보는 사람이 불안할 정도로 휘청거렸다. 은찬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았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에게서 흘러나온 술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확실히 두 잔 마신 동만보다는 냄새가 짙었다.

“이거 놓지?”

“혼자서 못 걸으시잖아요.”

“누굴 병신으로 알아? 고작 이 정도로 안 취하거든.”

“네, 네. 알겠으니까. 화장실 앞까지만 모셔다드릴게요. 동만아. 계산하고 있어!”

위스키 도수가 높았던 건지 술이 꽤 센 동만의 얼굴도 불타올라 있었다. 거부하는 이주한을 억지로 부축해 화장실로 가는 동안 은찬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와 밀착한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소름 끼치도록 나 싫다면서. 왜 이러는 건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거든요?”

“아까 네 입으로 그랬거든?”

그랬나?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보다.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카투스 위스키 냄새가 은찬을 미치게 만들었다. 목적은 그를 부축하고 화장실까지 데려다주는 건데 어쩐 일인지 은찬은 그의 몸에 몸을 비비고 있었다.

“놓지?”

“아.”

어느새 화장실 앞이다. 보내 줘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를 보내기 싫었다.

“가 봐.”

“…….”

미쳤나 보다. 이주한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냄새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결국 은찬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화장실로 들어간 부장을 뒤쫓았다. 그를 다짜고짜 칸막이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고 깜짝 놀란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입술을 밀어붙였다.

“야! 너…….”

벌려진 입술 틈으로 혀를 밀어 넣고 입안에 남아 있는 위스키 맛을 보기 위해 구석구석 핥았다. 미약하지만 남아 있던 위스키 맛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그대로 이성이 날아간 은찬은 이주한의 멱살을 잡고 그르렁거렸다.

“입 더 벌려 봐! 맛 좀 보게!”

본능적으로 고양이의 그르렁과 비슷한 소리를 내며 은찬은 변기통 위에 주저앉은 이주한의 다리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를 세워 입술을 물어뜯다시피 잘근잘근 씹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키스는 처음이었다.

“유은찬.”

이주한은 갈라진 목소리로 은찬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미쳐 버린 은찬에게 통할 리 없었다.

“혀 좀 내밀어 봐요.”

은찬의 요구에 그가 입을 벌리자마자 기다릴 것도 없이 그 혀를 제 혀로 감았다. 숨을 쉴 때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마약 같은 향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상대가 누구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주한.”

천천히 그 이름을 부르며 은찬은 이주한을 꼭 끌어안았다. 서로의 바지 안에서 터질 듯이 발기한 성기가 맞닿았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떤 감정인지 확실히 알게 해 주는 존재였다. 이주한은 숨을 죽이며 마른침을 삼켰고, 은찬은 느리게 그의 귀를 혀로 핥았다.

“나랑 자고 싶어?”

“…….”

그는 은찬의 양쪽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은찬은 옅은 신음을 터트리며 부르르 떨었다.

“너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거지?”

조금씩 거칠어지는 이주한의 숨소리가 고요한 화장실 안을 꽉 채웠다. 고개를 숙인 은찬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동공이 세로로 변한 눈. 짐승처럼 돌변하기 직전의 그 모습에 입맛을 다셨다. 이주한이 침대 위에서 얼마나 열정적인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잘생긴 이주한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은찬은 자신과 같은 짐승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되게 따지네. 하고 싶은지나 말해. 할 거야?”

“……해.”

이주한의 대답이 떨어짐과 동시에 은찬은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입술을 거칠게 물어뜯고서 화장실을 박차고 나왔다. 물론 이주한과 함께였다.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다급하게 가게 입구로 직진했다.

“어? 유은찬! 너 부장님이랑 어디 가는 건데! 같이 가!”

계산을 끝내고 가게 입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동만이 허겁지겁 뒤를 따라오며 소리쳤다. 미안하지만 지금 은찬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주한과 맞잡은 손이 뜨거워서 미칠 것 같았고 얼른 그와 단둘이 있기만을 갈망했다.

“나 부장님하고 볼일 있으니까, 너 먼저 가 있어!”

“왜! 어디 가는 건데! 너 혹시 부장님하고 맞짱 뜨려고 그러는 거야? 미쳤냐! 선은 넘지 마! 야, 유은찬!”

은찬과 주한이 맞잡은 손을 보고 오해한 동만이 등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은찬은 신경질적으로 짧게 혀를 차며 어깨너머를 힐끔거렸다. 눈치 없는 동만은 허겁지겁 쫓아오고 있었고 은찬은 여전히 이주한의 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유은찬!”

김동만이 불러도 은찬은 멈추지 않았다. 어딘지도 모를 골목을 지나 계속 앞으로 나갔고 드디어 모텔을 찾았다. 망설일 것 없이 그곳으로 들어선 은찬이 계산을 할 동안 이주한은 멀뚱히 서서 그런 은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였고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이윽고 방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문을 닫자마자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입술부터 찾았다.

“하아, 하아……. 잠깐. 옷 좀 벗…….”

이곳까지 오는 짧은 시간 동안 이주한에게 안기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오래된 모텔방은 볼품없었다. 낡은 침대 하나와 작은 테이블. 부서질 것 같은 의자 두 개가 다였다.

하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침대를 앞에 두고 은찬이 티셔츠를 벗어 던지자 이주한은 이를 세워 딱딱하게 선 젖꼭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아…….”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은찬의 허리를 그가 두 팔로 끌어안았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은찬의 젖꼭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이래도 돼?”

“뭘요?”

무엇을 고민하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가 은찬의 젖꼭지 한쪽을 살짝 꼬집었다. 부르르 떠는 은찬의 반응에 한숨을 터트리더니 이내 와락 껴안았다.

“……모르겠다. 나도.”

동시에 은찬도 신음이 터졌다. 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가 싶어서 안달이 났다. 안 되겠다 싶었던 은찬이 먼저 그의 바지를 벗겼다.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발기한 성기가 배를 툭 쳤다.

한번 경험이 있지만 놀란 만큼 거대한 크기는 흉기와도 같았다. 그것을 손으로 꽉 움켜쥔 은찬의 행동에 이주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도 은찬의 바지를 단 한 번에 내렸다. 몸에 걸친 것들을 하나씩 벗어 버린 두 사람은 짐승처럼 서로의 몸을 비볐다.

“하아……. 하아, 좋아.”

특히 서로의 성기 쪽을 거칠게 비비던 은찬은 제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오는지도 몰랐다. 손가락 두 개가 작은 구멍을 벌리더니 연약한 내벽을 스스럼없이 긁었다.

“아…….”

은찬은 딱딱하게 선 앙증맞은 젖꼭지를 이주한의 근육질 가슴에 비비며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 그사이 저도 모르게 꼬리가 나온 모양인지 그가 은찬의 꼬리를 손으로 훑었다. 아니다. 이주한의 손은 여전히 은찬의 몸을 훑고 다니느라 바빴다.

그럼 저건 뭐지? 실눈을 뜨고 어깨너머를 훔쳐본 은찬은 자신의 꼬리를 감고 있는 다른 꼬리를 보았다. 금색 털에 검정 점박이가 박힌 무늬.

“유은찬.”

노란색 눈. 날카로운 송곳니. 뾰족한 귀.

같은 고양잇과지만 은찬과는 너무도 다른 이주한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은찬을 불렀다. 평소라면 위축됐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은찬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수인 송곳니에 홀린 듯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자신을 찢어 버릴 만큼 날카로운 그것을 핥고 싶었다.

“나 좋아해 봐.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이주한은 주문처럼 은찬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 조건 나쁘지 않잖아.”

이주한이 이런 말을 던진 이유를 심각하게 따질 여유는 없었다. 지금 은찬은 섹스를 하느냐 마느냐. 단순하게 그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뿐. 이주한이 숨을 쉴 때마다 흘러나오는 향기에 취한 은찬은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을 더듬으며 침을 삼켰다.

“일단 써 보고 결정해도 되죠?”

은찬은 흉기 같은 주한의 성기를 꽉 움켜쥐며 속삭였다.

“반품은 안 되는데.”

“그건 내가 결정하고. 일단 맛 좀 봅시다.”

눈앞에 있는 이주한의 송곳니만큼은 아니지만 은찬도 송곳니를 세웠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놀라서 까무러칠 일이었지만 이주한은 고양이 모습을 드러낸 은찬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너하고 내가 다른 점이 뭔지 알아?”

“너무 많아서 모르겠는데?”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 이주한의 손이 은찬의 고양이 귀를 만지작거렸다. 은찬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 손길을 음미했다. 몸속에 남아 있는 고양이의 습성이 오늘따라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지?”

이주한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눈을 번뜩였다. 황금색 동공은 마치 은찬을 잡아먹을 것처럼 번뜩였다.

“재수 없는 이주한.”

술은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건만 지금 은찬의 상태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주한을 향해 욕을 퍼부었으면서 지금은 그에게 그르렁거리며 교미를 하자고 매달렸다. 지금도 말과는 달리 그의 손길에 흥분하고 있었다. 이주한은 능숙하게 은찬의 귀와 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잘 들어, 유은찬. 우리 종족은 마음에 드는 짝이 있으면 동족을 죽여서라도 빼앗아. 그러니까 도망칠 수 있을 때 가. 맘 바뀌기 전에.”

“우리 종족은 하고 싶을 때 해야 직성이 풀리거든? 여기까지 따라왔으면서 왜 이렇게 말이 많아?”

섹스 한번 하자는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건지. 애가 탄 은찬은 살짝 발꿈치를 들고서 이주한의 짐승 귀를 콱 깨물었다. 고양잇과는 귀가 약했다. 순간적으로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간 주한은 은찬의 꼬리를 제 꼬리로 힘껏 감았다. 두 개의 꼬리가 풀리지 않을 정도로 뒤엉켰다.

“하기 싫어?”

“그럴 리가.”

“그럼 선 섹스 후 토크.”

그 뒤 시시한 대화는 생략됐다. 반대편 벽으로 은찬을 거칠게 밀어붙인 그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목덜미부터 공략했다. 마치 사냥감의 노리는 한 마리의 맹수처럼 목에 송곳니 자국을 만든 뒤 은찬의 엉덩이 사이로 성기를 비볐다.

“하아……. 핥아.”

그의 굵은 손가락 두 개가 은찬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어렸을 적 엄마가 준 마따따비 막대사탕처럼 그것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사이 그의 다른 손은 은찬의 젖꼭지를 손톱으로 우악스럽게 비틀어 댔다.

“하으으윽, 으응…….”

벽에 등을 기댄 은찬은 그대로 주저앉을 것처럼 흐느적거렸다.

“겨우 이 정도로 이러면 안 되지.”

은찬이 정성스럽게 깨물고 있던 손가락은 타액으로 번들거렸다. 그것을 꺼낸 그는 흘러내리는 타액을 혀로 핥았다. 한 마리의 맹수가 느리게 팔을 핥는 모양새였다. 만약 지금 그가자신을 잡아먹는다 하더라도 은찬은 기꺼이 몸을 바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원래 이렇게 야했어? 앞으로 이 얼굴 누구도 못 봐.”

이주한이 던진 경고를 은찬은 듣지 못했다. 그 말과 동시에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이 단숨에 엉덩이 구멍을 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연약한 내벽을 사정없이 이리저리 휘젓기 시작하자 은찬은 숨을 헐떡였다.

“하아, 아…….”

주한은 경험이 많은 남자였다.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애태울 수 있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구멍 깊숙이 삽입한 손가락을 단숨에 빼더니 성기로 벌려진 구멍 주변을 비비기만 했다. 그리고 단단해진 젖꼭지를 손톱 끝으로 살살 간지럽혔다. 눈시울이 촉촉이 젖은 은찬은 그런 이주한을 원망하듯 노려보았다.

“젠장! 유은찬, 너 왜 이렇게……! 하. 앞으로 나 말고 다른 놈한테 귀 보여 주면 가만 안 둬!”

갑자기 버럭 소리친 이주한이 은찬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잡고 입을 맞췄다. 혀뿌리가 뽑힐 정도로 얼얼한 기세에 버둥거리고 있을 때 그가 은찬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엉덩이 사이로 단숨에 삽입을 시도했다. 순식간에 내벽을 뚫고 끝까지 들어오는 그 감각에 은찬은 크게 심음을 터트렸지만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흐읍! 읍……!”

버둥거리는 은찬을 꽉 끌어안은 채 주한은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거대한 성기가 밑을 치고 들어올 때 은찬은 미친 사람처럼 상체를 파닥였다. 숨을 쉬기 위해 헐떡일 때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긴 타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 하읏! 아…… 하아, 하아.”

겨우 입술이 떨어지자 은찬은 거칠게 호흡하며 이주한의 목덜미를 와락 껴안았다. 그사이에도 몸은 심하게 요동쳤다. 퍽. 퍽. 퍽. 미친 듯이 박아 대는 힘과 속도는 지금껏 경험해 본 것 중 단연 최고였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쾌감이 밀려오기 시작하자 은찬은 손톱을 세워 이주한의 등을 긁어 내려갔다.

“하아. 하아…… 아아! 아! 좋아, 좋아!”

몸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에 적응해 갔다. 그가 거칠게 움직일수록 은찬도 허리를 낭창 하게 움직였다. 곧 그의 성기 끝자락이 어느 한 부분에 닿자 은찬은 교성을 지르며 거칠게 도리질을 쳤다.

“침대……! 침대에서!”

“왜? 난 여기가 더 좋은데.”

은찬의 요구를 일부러 무시한 주한이 성기를 느리게 뺐다가 단숨에 같은 곳을 퍽 찔렀다. 그 순간 눈물이 왈칵 터진 은찬이 그의 가슴을 퍽 치며 소리쳤다.

“망할 네 좆이 너무 커서 아프다고! 너무 깊잖아! 아프다고……!”

은찬이 어깨를 끌어안고 꺼억꺼억 숨을 삼키자 그제야 주한은 은찬을 그대로 들쳐 메고 침대로 향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은찬을 내려놓고서 게걸스럽게 입술을 탐했다. 혀가 뒤엉킬 때마다 날카로운 송곳니 때문에 쓰라렸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은찬이 미처 다 삼키지 못한 타액을 훑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목과 쇄골을 지나 양쪽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어 댔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가 연약한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좀 전까지 그의 것이 들어가 있던 구멍을 정성스럽게 핥기 시작하자 은찬은 밀려오는 달콤한 감각에 숨을 헐떡였다.

이윽고 또다시 그의 것이 들어오기 위해 구멍 주위를 배회했고 은찬은 스스로 다리를 넓게 벌렸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발기한 성기는 단번에 내벽 안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 짓은 격렬하다 못해 은찬의 몸을 부서트릴 만큼 저돌적이었다.

“하윽! 아, 아앗! 아!”

몸을 가눌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격정적인 움직임에 은찬은 짐승 같은 교성을 터트렸다.

“아! 아악……! 아, 아아악!”

은찬도 덩달아서 허리를 흔들며 그를 부추겼다. 음란하기 그지없는 행동에 그는 짧게 혀를 차며 핀잔을 던졌다.

“다른 놈한테도 이런 걸 보여 줬단 말이야?”

“아읏……! 아, 아! 아응!”

성기가 깊이 박힐 때마다 온몸에 쾌감이 퍼져 갔다. 은찬은 몰아치는 쾌감을 감당하지 못해 흐느껴 울며 그의 팔을 긁었다.

“하윽! 아! 아! 하아, 아응…….”

숨을 쉬지 못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짓이기고 유린당한 내벽이 계속된 자극에 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유은찬.”

“하아…… 아응! 하아, 아아아! 하흐으윽……!”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린 은찬은 견딜 수 없는 쾌감에 울음이 터졌다. 은찬의 신음과 울음소리, 그리고 곧 부서질 것처럼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낡은 침대와 이주한의 거친 숨소리. 좁은 방 안을 꽉 채운 소리는 음탕하기 그지없었다.

“그만! 그만……!”

은찬이 젖은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살 부딪치는 소리는 더 거세졌다. 박고 찌르고, 그러다가 문지르기까지 하자 은찬은 거칠게 도리질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아, 하아. 아…… 흐윽. 으…….”

그때, 강한 삽입을 연속으로 하던 이주한이 인상을 쓰며 은찬의 허리를 힘껏 잡아당겼다. 퍽 소리와 함께 은찬도 비명과도 같은 교성을 질렀다. 성기 끝자락이 닿아서는 안 될 부분과 동시에 스팟을 누른 탓에 고통과 쾌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순식간에 내벽 안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감각에 은찬은 몸을 부르르 떨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더는 무리였다. 하지만 막 사정을 끝낸 이주한은 무서울 정도로 금방 회복했다. 삽입을 한 채 다시 발기하고 있는 성기가 내벽을 꽉 채워 가자 은찬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은찬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주한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이러지 마. 이제 시작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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