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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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른 아침.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동만과 은찬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심호흡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두 달만 버티자. 조용히 시선 교환을 하며 서로에게 파이팅을 던졌다. 어쨌든 티는 내지 말되 이주한 눈에는 사랑이 불타오르는 커플로 보이게끔 포장하기로 어제 합의를 본 터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활짝 문을 열어젖힌 동만은 텅 빈 사무실에 습관처럼 씩씩하게 인사를 던졌다. 뒤따라 들어선 은찬은 이주한부터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곽 과장 자리를 차지한 그는 은찬과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정확히 8시 30분.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고 해도 이번에는 은찬의 승리였다.

“일찍, 왔네요.”

“그럼요. 일찍 일찍 다녀야죠. 부장님도 일찍 출근하셨네요.”

“네, 뭐. 그런데 두 사람 같이 출근했네요?”

한집에 살아도 각자 따로 출근하고 퇴근도 따로 했다. 하지만 이주한에게 의심받을 여지가 있으므로 두 달 동안만 같이 출퇴근하기로 했다. 어쨌든 이주한 눈에는 사랑하는 연인으로 보여야 했으니까.

그것을 목표로 삼고 두 사람은 되지도 않은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은찬은 동만에게 찰싹 달라붙어 간지러운 시선을 던졌다.

“우리 동만이가,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다지 뭐예요. 그치? 동만아.”

약속은 약속일 뿐. 몸을 배배 꼬며 던지는 은찬의 혀 짧은 소리에 순간 김동만은 벌레 보듯 은찬을 보았다. 뭐! 눈 안 깔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어색하게 웃으며 던진 동만의 복화술에 은찬은 대답 대신 녀석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제야 동만이 이주한에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은찬이, 이렇게 귀여워서, 누가, 낚아채, 갈까 봐.”

국어책을 읽어도 이것보다 자연스럽게 읽겠다. 듣는 은찬의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엉망진창인 동만의 연기력이 펼쳐지는 순간 망했다는 단어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니나 다를까. 이주한의 묘한 시선이 쏟아졌다. 이 타이밍에 욕을 하지 않은 게 고마울 정도였다.

“너, 부장님 앞이라고 부끄러워서 그래? 동만이가 낯을 많이 가려서. 아시다시피 얘가 누구랑 사귀는 거 처음이잖아요. 그래서 저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몰라요. 오늘 아침에도 자고 일어나니까 밥까지 차려놓은 거 있죠?”

개뻥이다. 남자 둘이 살면 아침밥은 사치요 저녁은 배달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게 현실이었다. 눈 뜨자마자 씻고 출근하기 바쁜데 아침은 무슨. 의식의 흐름대로 튀어나온 거짓말에 오히려 동만이 더 놀라워하는 눈치다.

애써 ‘우리 이렇게 알콩달콩 잘 살고 있어요.’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지만 이주한은 별다른 흥미가 없어 보였다.

“안 물어봤는데.”

“네?”

“안 물어봤다고. 궁금하지도 않고. 사내 연애 들키면 안 된다더니. 혼자서 다 떠드네. 공식 발표 할 건가 봐. 그럴 마음으로 지금 나한테 이러는 거죠?”

너무 의욕이 앞선 나머지 이주한 성격을 건든 것 같았다. 순간 그의 한쪽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건수 하나 잡았다 이거지.

“……아니요.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들떴나 봐요.”

“윤은찬 씨. 회사가 놀이터입니까? 여기 회사예요. 신성한 사무실에서 해야 될 말이 있고 안 해야 되는 말이 있는 거예요. 아침부터 보자마자 애인 자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정신 못 차려요? 그 정신으로 어떻게 일할래요? 사내 연애. 이래서 사람들이 안 좋게 보는 겁니다. 두 사람 떨어뜨려 놓을 수도 있어요. 내 권한으로.”

그냥 좋게 넘어가면 될 걸 또 잔소리가 시작됐다. 오늘 시작은 은찬이 했기 때문에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덩달아 혼나고 있던 동만도 아니꼬운 표정으로 은찬을 흘겼다.

한참을 이어진 잔소리는 5분이 지난 뒤에야 끝이 났다. 아침부터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이 쫙 빠진 은찬이 동만과 사무실에서 도망치려는데 이주한도 함께 나선다. 설마 같은 방향일까 했지만, 그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은찬의 옆에 섰다.

“어디…… 가세요?”

“두 사람은 어디 가는데요?”

조금 전까지 입에 거품 물고 잔소리를 하던 놈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목적지를 물었다. 순간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생각했다.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동만에게 눈치를 줬지만, 녀석은 망설임도 없이 목적지를 발설했다.

“1층 커피숍이요.”

지금은 같은 편이지만 욕망을 위해 언제든 은찬을 버릴 수도 있는 김동만. 문득 이 자식이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 커피숍. 나도 거기 가려고 했는데 잘됐네. 같이 가요. 대신 내가 쏠게요.”

이주한의 말을 듣는 순간 가기 싫어졌다. 그대로 백스텝으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까. 갈등하던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은찬은 동만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다행히 이주한의 뒤통수를 볼 수 있는 구석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짧은 시간 안에 소리 없는 싸움을 벌였다.

‘그걸 왜 말해! 눈치도 없냐?’라는 은찬의 입 모양에 동만은 ‘그럼, 뭐라고 해!’라는 눈빛을 던졌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말 못 할 답답함에 은찬이 이주한의 뒤통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을 때, 하필 그 순간 뒤돌아본 주한과 눈이 마주쳤다.

“무슨 문제 있어요? 내가 두 사람 데이트 하는 데 방해하는 건가?”

“아니요. 회사에서 무슨 데이트를…….”

뻔히 알면서 이러는 것 같긴 한데 왠지 오늘따라 이주한이 이상했다. 평소보다 잔소리를 짧게 끝낸 것도 그렇고 커피숍으로 같이 가는 것도 그렇고. 특히 은찬에게 지금처럼 상냥하게 말하는 건 입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자식이 왜 이러지? 이럴 놈이 아닌데.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눈치는 얼마나 빠른지 동만과 사귀는 걸 의심한다는 소리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김동만한테 협박까지 한 놈이 친히 커피까지 사 준다고? 친절한 이주한이야 뭐야.

은찬이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주한이 피식 웃는다.

“왜 그렇게 봐요? 왜요? 뭐 묻었어요?”

“저기, 어제…….”

“아. 어제 잘 들어갔죠? 말도 없이 간 거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리고 아까 내가 한소리 한 거 다 두 사람 잘되라고 한 소리니까 마음에 너무 담아 두지 말고.”

세상에……. 이주한 개새끼한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앞장서는 이주한의 뒤를 따르던 동만과 은찬의 표정은 심각했다. 매운맛에서 갑자기 순한 맛으로 바뀐 이주한의 의도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야. 이 부장 왜 저래?”

“난들 아냐? 니가 보기에도 좀 이상하지? 살짝 맛이 간 것 같은데……. 나한테 엄청 잘해 주잖아.”

“그러니까. 난 아침부터 니가 헛소리하길래. 그따위로 일할 거면 짐 싸서 나가라는 소리 들을 줄 알았더니. 다 우릴 위해서 하는 소리라잖아.”

“어디서 머리 다쳤나?”

“머리?”

“아니면 나 포기한 건가? 어제는 그냥 해 본 소리고.”

“분위기가 영 그런데? 우리 아침부터 괜한 뻘짓 한 거 아니야?”

둘이서 머리를 맞대 생각해도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야 귀찮은 짓을 안 해도 되니 은찬도 좋았다.

이주한을 따라 로비를 가로질러 가던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 틈을 지나야 했다. 동만과 대화에 정신이 팔린 은찬은 미처 제 곁을 빠른 속도로 뛰어가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 남자는 은찬을 거칠게 밀쳤고, 중심을 잡지 못해 넘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 어, 어……!”

“야!”

땅에 부딪힐 것을 대비해 본능적으로 배를 감쌌다. 곧 땅에 어깨가 닿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어쩐 일인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짝 실눈을 떠 보니 누군가 은찬의 팔을 꽉 잡고 있었다. 은찬은 그 손이 동만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 김동만. 너 순발력 좋은데? 야, 너 때문에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똑바로 선 은찬은 손 주인의 팔을 툭 쳤다. 하지만 동만은 은찬의 코앞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동만과 마주친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자식이 왜 저기 있는 거지? 지금 제 팔을 잡은 사람은 김동만이어야 하는데. 설마…….

“나이가 몇 살인데 넘어지고 있어?”

자신을 살려 준 건 김동만이 아니라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이주한의 손이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은찬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개 같네.”

생명의 은인 이주한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

사무실의 공기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무겁다. 사무적인 전화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적막을 깨트리고 간간이 들려왔다.

이 정적의 원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곽 과장의 자리를 차지한 이주한 때문이었다. 하나둘씩 출근하던 팀원들이 던진 인사에도 그는 과묵하게 눈짓으로 대답할 뿐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들 이유 모를 그의 침묵에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은찬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주한이 살기 가득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대리가 총대를 메고 단체 메신저 방에 답답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부장님 오늘 기분이 안 좋으신가……. 왜 저러는지 아는 사람? 오늘 제일 먼저 온 사람 누구야? 김동만 씨하고 유은찬 씨지? 무슨 일 있었어?]

모두의 시선이 소리 없이 유은찬과 김동만 쪽으로 쏠렸다. 고요함 속에서 쏟아지는 팀원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은찬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글쎄요……. 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으신 거 같던데요.]

[그래? 진짜 별일 없었어? 아까부터 유은찬 씨만 계속 쳐다보는 것 같던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모두 은찬을 의심하는 것 같았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이주한이 아예 대놓고 유은찬 때문에 화가 났다고 광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맨날 저러잖아요. 한두 번 보세요? 맨날 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났잖아요. 다들 아시면서.]

[그건 그렇지. 그래도 너무하네.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갑자기 왜 저러시지……. 담배 한 대 피우러 갈 사람?]

이 대리의 제의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 주임이 가겠다고 말했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슬그머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숨 막히는 이곳을 탈출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다른 팀원들이 부럽게 바라보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들 눈치 게임 하듯 서로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텅 비기 시작한 자리가 늘어갈수록 은찬도 초조해졌다. 이주한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글이글 타는 시선에 뒤통수가 뚫어지겠다.

“야, 우리도 나가자.”

은찬이 동만의 팔을 툭 치며 속삭였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동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도 이주한의 예사롭지 않은 시선을 느낀 것이다. 둘은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문을 나서자마자 동시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어디 갈까?”

은찬은 이미 나올 때부터 옥상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옥상. 거기 말고 갈 때가 어디 있냐? 오랜만에 비도 안 오고 미세 먼지도 없고. 오늘 날씨 기가 막히지 않냐? 거기 가서 좀 죽치고 있다가 오자.”

“사무실 다 비우면 부장이 뭐라 그러지 않을까?”

목에서 흔들거리는 사원증을 와이셔츠 가슴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은찬은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람 마음 다 똑같은 거지. 누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하고 싶겠냐? 숨도 못 쉬겠드만. 아부의 대왕 곽 과장조차도 숨도 못 쉬고 쥐 죽은 듯 앉아 있는 거 못 봤냐?”

“그런데 갑자기 왜 저러시지? 우리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잖아. 갑자기 너 넘어지는 거 구해 주더니 그때부터 저러네. 혹시 그때 허리 다치신 건가? 너 고맙다는 말은 했어?”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중요하지! 모른 척 하면 그거 은근히 기분 나쁘다? 그래서 했어, 안 했어? 안 했으면 당장 가서 해. 아까부터 계속 노려보는 거 너 몰랐어? 엄청난 기세로 째려보던데.”

은찬은 대답 대신 쓰게 웃었다. 그걸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옥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을 더 올라가야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긴 복도를 지나 한 층 더 계단을 올라가면 시야가 탁 트인 옥상이 나왔다. 은찬과 동만은 문 앞에 놓인 음료수 자판기에서 음료수 2개를 뽑아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그런데 전망 좋은 곳은 이미 자리가 꽉 찬 상태였다. 다들 일 안 하고 여기서 수다나 떨고 있으니 실적이 그 모양이지. 할 수 없이 구석으로 향하고 있는데 누군가 은찬을 불러 세웠다.

“유은찬 씨. 오늘 아침에 이 부장님이 넘어지려는 은찬 씨 구해 줬다며? 부장님이 생명의 은인이 됐네?”

소문 한번 이상하게 났다. 생명의 은인은 무슨. 누가 구해 달라고 했다.

“네? 아하하.”

“이 부장님 달리기 선수였나 봐? 진짜 빨랐다던데? 나중에 회사 운동회 하면 계주로 나와 주실 수 없냐고 물어봐 줘!”

“하하, 하하하. 네. 그럴게요.”

은찬과 친분이 있던 타 부서 대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그 자리를 모면했다.

“진짜 빠르긴 하더라.”

동만까지 그 의견에 동조하며 감탄사를 쏟아 냈다.

“누가?”

“누구긴 누구야. 부장. 우리보다 조금 앞서가고 있었잖아. 그런데 너 넘어지려고 하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니 옆에 있던데?”

“아, 그래서 너는 나 그렇게 쳐다만 보고 있었냐? 아무리 가짜 애인이라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명색이 애인인데 멍청하게 쳐다만 보고 있어?”

그 자리에서 차마 따지지는 못했지만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는 김동만 멱살을 잡아 탈탈 흔들 뻔했다. 다시 슬슬 열 받기 시작한 은찬과 달리 동만은 별일 아닌 듯 음료수를 홀짝 마셔 댔다.

“너 하나에 남자 둘이 달려들어서 팔을 잡고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그리고 그 정도 넘어진다고 안 죽어.”

이게 말이면 단 줄 아나. 눈을 가늘게 뜨고 동만을 노려보던 은찬은 녀석의 발등을 뒤꿈치로 힘껏 찍었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왈칵 일그러진 동만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나왔다.

“나 임산부거든?”

“아파! 아프다고!”

“여기서 확 밀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라.”

“너 요즘 폭력적이야!”

동만이 불쑥 던진 말에 은찬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 최근 들어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순간적으로 좋았다가 화났다가. 원인 제공자는 따로 있는데 애꿎은 김동만한테만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도시를 내려다보던 은찬은 묵직한 한숨을 터트렸다.

“미안.”

“그렇다고 사과까지 할 건 없고.”

“그렇지? 방금 건 니가 자초한 일이니까.”

금방 돌변한 은찬의 태도에 동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은찬을 빤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를 동안 은찬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친구 김동만에게 고해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래도 동만이라면 뭔가 해결책을 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슬그머니 운을 떼 봤다.

“아까…….”

“아까?”

“이 부장이 나 잡아 줬을 때.”

“아, 그거. 왜? 야, 저기 좀 봐. 저 자식 상사한테 엄청 깨지고 있네. 아휴……. 죽을 맛일 거다.”

반대편 건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장면에 동만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은찬은 녀석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동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자꾸 이럴래?”

“저게 재미있냐? 너도 깨지게 해 줘? 우리 다 같은 입장이거든! 됐고. 내 말에 집중 좀 해 주지? 너는 애가 왜 집중을 못 해?”

“무슨 말! 부장이 아까 너 잡아 준 거 그게 왜!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호들갑이야.”

단순하게 본다면 별일 아닌 일이었다. 다만 그게 끝이 아니라 문제지. 짜증 내는 동만에게 바짝 다가선 은찬이 조용히 속삭였다.

“욕……했어.”

“어?”

“……부장한테 욕, 했다고.”

“뭐라고?”

“개 같다고.”

“너 구해 준 부장한테 그 딴말을 했다고? 그러니까 너 내가 말을 좀 곱게 하라고…….”

그 뒤 말을 흐린 동만은 한동안 침묵했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는 청아한 하늘이 야속해 보였다. 많고 많은 말 중에 왜 하필 그런 말을 했을까. 제 혀를 깨물고 싶었다.

“괜찮아.”

“어?”

정적을 깨고 동만이 입을 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은찬은 당황했다. 이게 괜찮다니.

“‘씨발, 개새끼. 좆같다’이 말을 안 한 게 얼마나 다행이야. 개 같다는 양호하네.”

“…….”

이게 위로냐? 기가 찬 은찬의 미간이 좁혀지고 있었지만, 눈치 없는 동만은 신나게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야, 하필 개 같다가 뭐냐? 부장이 들으면 화날 만하네.”

“그렇지? 어떻게. 사과해야겠지?”

“고양이한테 개 같다고 하면 당연히 화내지. 나 같아도 화나겠다. 존심 상할 거 아니야. 사람 없는 곳으로 불러서 개 같다는 말 취소하고 고양이 같았다고 말해 봐.”

“…….”

동만은 은찬과 마주친 시선에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저 자식이 지금 우리가 수인이라고 놀리는 건가? 오늘따라 얄밉게 보이는 면상을 손톱으로 확 긁어 버리고 싶었다.

“농담이지?”

“진심인데. 고양잇과한테 개 같다는 거 그거 욕 아니야?”

이런 상황에 딱 알맞은 단어가 개 같다가 아닐까. 은찬은 심각해 죽겠는데 김동만은 신나 보였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너 진짜. 내 친구라서 한번 봐주는 거다.”

담담하게 그 말을 뱉으며 은찬은 먹다가 만 음료수 캔을 동만에게 넘기고 등을 돌렸다.

“야, 어디 가! 왜 벌써 가는데! 삐진 거야? 왜 삐진 건데!”

“몰라, 이 자식아!”

어떻게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냐. 아니면 일부러 눈치 없는 척하는 건가? 이런 식으로 사람 엿 먹이는 고단수가 아닐까?

신경질적으로 문을 발로 닫아 버린 은찬은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기 싫어 괜히 이리저리 사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그때까지 이렇게 버터 볼까 싶었다.

“유은찬 씨.”

하지만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은찬을 잡아 세웠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재수 없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주한이 틀림없었다.

사무실 근처도 아닌데 저 자식이 왜 있는 건데. 힐끔 곁눈질하니 은찬은 흡연실 앞을 지나고 있었다. 투명 유리로 된 흡연실 앞에서 애써 도망친 보람도 없이 이주한에게 딱 잡혔다.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담배 들고 있던 손을 까딱였다.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으니 저 손짓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모르면 바보였다.

“뭐 해요? 오지 않고.”

“아, 예.”

은찬은 주인의 부름에 달려가는 개처럼 이 부장 앞에 섰다. 그럼에도 그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굳은 표정으로 은찬을 훑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김동만 씨하고.”

“잠깐, 머리 좀 식히려고.”

“머리를 식힐 만큼 유은찬 씨가 일을 했던가? 내가 쭉 지켜본 바로는 전화 몇 통화가 다였던 것 같은데.”

그럼 너는, 출근해서 뭐 했는데! 몇 시간 동안 사람 피 말리는 게 일이냐?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은찬은 애써 웃었다.

“그렇게 붙어 다니면 없던 소문도 나겠는데. 신경 좀 쓰죠?”

“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입사 동기인 김동만과 유은찬이 매일 붙어 다니는 걸 사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나 유은찬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여기서는 안 될 것 같고.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네? 아직 점심시간 안 됐…….”

은찬은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30분. 회사는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사회였다. 12시부터 1시까지가 정해진 점심시간이었고 규칙을 어기면 그에 합당한 상사의 눈치와 욕을 먹었다.

“가죠.”

물론 회장 손자인 이주한의 경우라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은찬은 이 자식과 밥 먹는 것 자체가 싫었다.

“아. 저, 약속이…….”

“취소해요. 회장 손자하고 밥 먹는다고 말하고 취소하면 되겠네. 간단하죠?”

최대한 피해 보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잠시 지난날 이주한이 자신에게 했던 짓들이 떠올랐다.

맞다. 그 이주한이지. 회장 손자라는 걸 몰랐을 당시에도 매일 은찬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던 놈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더하면 더했지 예전보다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SNS에 올라오는 다른 재벌 목격담을 보면 생각보다 겸손하다고 하던데,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겸손은커녕 자신이 회장 손자라는 것을 떳떳이 밝히는 꼬락서니에 은찬은 입안이 썼다. 흙 수인과 금 수인의 갭 차이가 오늘따라 이주한을 한층 더 재수 없게 보이게 했다.

“네. 알겠습니다.”

“뭐 먹을래요?”

“……아무거나.”

“아무거나. 나 그 말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랬지. 은찬은 재빨리 떠오르는 음식 메뉴 한 가지를 뱉었다.

“회사 앞에 감자탕 잘하는 집 있는…….”

“별로.”

“그럼 부대찌개는…….”

“딱히. 딴 거 없어요?”

“…….”

“그럼 내가 먹고 싶은 걸로.”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건데 개새끼야! 웃고 있지만 은찬은 눈으로 욕을 퍼부었다.

“가죠.”

이주한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자연스럽게 넘기며 유유히 앞장섰다. 이주한의 피다 만 담배를 손에 쥔 은찬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예전 수발들던 버릇이 아직도 몸에 배여 있었다.

아오! 이주한 개새끼! 담배꽁초를 녀석의 뒤통수에 던져 버려다가 말았다.

이주한 개새끼. 씹새끼. 좆같은 새끼. 망할 놈. 쓰레기 같은 새끼.

은찬은 맞은편에 앉은 이주한을 보며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사수로 있었을 때 분명 회는 싫어한다고 말했을 텐데 그가 점심으로 정한 메뉴는 회덮밥이다. 고양이 수인이지만 날 생선은 물컹한 식감 때문에 싫어했다.

최근 들어 임신 때문에 고등어회를 몇 번 먹긴 했지만, 그날뿐이었다.

“뭐 해? 먹어.”

“아, 네…….”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지만 뒤적거리며 밥알만 골라 입안으로 넣었다.

“별로예요? 저번에 보니까 회 잘 먹던데.”

그건 내가 먹고 싶었던 거고. 이건 네가 처먹고 싶은 거고. 하고 싶은 말은 가슴속에 담아두고서 은찬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동만이가 차려 준 밥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배가 별로 안 고파서요.”

“김동만. 그 이름 지금부터 한 번만 더 나오면 나 화내요.”

이주한은 밥을 한입 가득 퍼먹으며 별일 아닌 듯 협박을 툭 던졌다. 배가 고팠는지 벌써 바닥이 보이는 그릇에 은찬은 자신의 것을 슬쩍 내밀었다.

“더 드실래요?”

“내가 돼지로 보입니까? 유은찬 씨 그거 다 먹기 전까지 여기서 못 나갈 줄 알아.”

이럴 줄 알았다. 애초에 같이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그 자리에서 기절이라도 할걸. 이주한의 신박한 고문 방법에 은찬은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나 회 싫어한다고! 개새끼야!

“……밥이 너무 많은데.”

“어제 고등어회 대자 혼자 잘도 먹던데, 왜? 아니면 개새끼가 앞에 있어서 밥맛이 없어?”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했다. 개새끼가 앞에 있어서 밥맛도 없고, 은찬이 싫어하는 메뉴라서 더 그렇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 봤자 득 될 건 없었다. 이제 입하나 더 딸린 미혼부가 될 텐데 동만처럼 이곳에서 정년퇴직 될 때까지 붙어 있어야 했다.

상대는 회장 손자. 배 속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 하지만 유은찬 인생에서 제일 재수 없는 개새끼. 딱 두 달만 그의 비위를 맞추기만 하면 서로 볼일도 없을 것이다.

이주한이 지금 은찬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뻔했다. 뜨거웠던 하룻밤의 후폭풍. 지금도 은찬은 그때 생각만 하면 침대 위에서 발길질했다. 더 깊이 박아 달라고 조르던 자신의 흑역사. 인생에서 흑역사는 한 번이면 족하지 두 번은 없다.

“먹으면 되잖아요.”

어떻게든 다 먹고 만다. 한 수저 가득 떠서 입안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맛도 모르겠고 그냥 씹고 삼키고 있는 은찬의 모습을 이주한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밥 먹는 걸 보는 게 저렇게 진지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유은찬.”

말을 높였다가 내렸다가. 변덕스러운 이주한의 말투가 하루 이틀도 아니라서 그러려니 했다.

“내가 개 같아?”

부지런히 입안의 음식을 씹던 것을 멈추고 은찬은 이주한을 빤히 보았다. 역시나 그것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거지? 밥 먹는데 하필 지금 그 주제를 꺼내는 이유는 뭐냐고! 다급하게 입안에 있는 것을 삼킨 은찬이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기.”

“너 내가 수인인 거 알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그날 똑똑히 봤으니까. 혹시라도 다른 사람한테 떠벌리거나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그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아니라 둘밖에 없는 작은 방 안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말했어?”

김동만한테만 말했다고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다. 그랬다간 둘 다 잘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요! 저 입 무겁다는 거 아시잖아요!”

“니가?”

“…….”

순간 이주한이 비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치고. 말해. 내가 개 같아?”

진짜 집요하게 물어본다. 물론, 면전 앞에서 대놓고 욕한 은찬의 잘못이 컸다.

“죄송합니다. 그게 저도 모르게 나와 버린 말이라서. 일종의 습관 같은 거랄까.”

“습관.”

“부장님을 겨냥해서 던진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지 저 자식의 화가 풀릴까.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좋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 내가 뭔지 알면서 일부러 그런 거지?”

“네?”

“도도하고 날렵하기로 소문난 맹수. 표범에게 감히 개 같다니.”

“…….”

“유은찬 씨 동물원 안 가 봤어?”

“…….”

“한번 데려가 줘? 너하고 같은 고양잇과라고 해서 다 같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거 너도 어느 정도는 알 건데. 개? 개! 내가 부르면 달려오는 그런 개같이 보입니까?”

김동만 천재. 동만의 말이 맞았다. 개 같다. 흔한 욕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의도로 전달될 수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개 같다는 말 한마디에 자존심 상한 이주한은 진지하게 따지고 있었다.

그런 뜻으로 던진 게 아니라 욕이다. 이렇게 정정하는 것도 이상해 보였다. 은찬은 동만이 시킨 대로 사과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도도하고 날렵하고 무서운 맹수. 표범 같으세요. 개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

“그렇지?”

“그럼요.”

“당연하지. 감히 개 따위하고 비교를 해? 앞으로 말조심해. 너는 시시한 고양이라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에게 그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 나 먼저 일어날 테니까. 그거 남기지 말고 다 먹고 오도록.”

할 말이 끝난 이주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획 가 버렸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은찬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텅 빈 맞은편을 향해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세웠다.

“자존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보다는 개가 났겠다!”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은찬이 부랴부랴 가게를 나오니 점심시간은 이미 끝나 있었다.

***

동만이 은찬의 등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짧게 혀를 찼다.

“아프다고! 살살 좀 해!”

“그러니까 바늘로 따자니까?”

“아프잖아!”

“고통은 잠깐이라니까 그러네? 너는 점심때 얼마나 맛있는 걸 먹었으면 체해서 왔냐?”

한숨을 푹푹 내쉬며 던진 동만의 핀잔에 은찬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말했잖아! 회덮밥이라고!”

“별로 먹지도 않았다면서.”

“그 자식이랑 둘이 먹는데 소화가 잘도 되겠다! 난 그 자식 앞에서 물도 못 마시겠어! 물도 체할걸?”

“어휴……. 불쌍한 우리 고양이. 너 이래가지고 두 달 동안 어떻게 견디냐? 계모한테 구박받는 콩쥐가 따로 없다. 야, 그래도 점심 지나고 부장 기분이 많이 좋아졌던데. 사과한 거야?”

오후 내내 물고 늘어진 동만의 질문에 은찬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좀! 정성껏 두드려 봐! 집에 약 없어?”

“갑자기 집에 약이 어디 있어? 그리고 너 인마! 임신해서 약 함부로 먹는 거 아니랬다? 있어 봐. 냉장고에 탄산이 있나 찾아볼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동만이 냉장고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작은 냉장고에는 먹다 남은 배달 음식과 맥주, 소주병으로 이미 포화 상태였다. 그곳에서 작은 탄산 캔을 하나 찾은 동만은 환호성을 지르며 냅다 달려왔다.

“딱 때마침 구석에 이거 하나 있네! 이거 마셔 봐!”

그것을 받고 그대로 쭉 들이켠 뒤 은찬은 소파에 힘없이 축 늘어졌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림이 나왔고 좀 살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부랴부랴 사무실로 들어간 직후 체한 것을 직감했다. 혼자 끙끙거리며 검지와 엄지 사이를 얼마나 눌러 댔는지 빨갛게 부은 상태였다. 겨우 퇴근 시간까지 버텼고 집으로 돌아온 뒤 동만의 정성 어린 간호에 은찬은 눈물이 핑 돌았다.

“동만아…….”

“왜?”

“나 한 일주일쯤 쉴까?”

“휴가 죄다 모아서 막달 애 낳을 때 쓸 거라면서?”

“그런데 자유롭게 살다가 다시 자유를 빼앗기니까 너무 힘들다.”

“이 부장 때문에 그래? 많이 힘들어? 이제 겨우 시작인데?”

“그러니까. 내 말이. 그냥 우리 찐으로 사귈까? 나 여기 그만두면 나랑 울 애기 먹여 살릴래? 내가 평생 너의 고양이가 돼 줄게.”

이주한의 말도 안 되는 트집은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도 계속됐다. 거래처 전화 응대를 그따위로밖에 못 하냐는 둥 신제품 마케팅 전략을 트렌드 있게 생각하지 못한다는 둥. 틈만 나면 은찬을 쪼아 댔다.

그러다 퇴근 시간이 되니 같이 가자는 개소리를 하는 것이다. 집 방향이 갔다나? 내가 미쳤냐? 너랑 같이 가게.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동만에게 하소연할 시간도 없었던 은찬은 망설임 없이 그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렇게 집에 와서 동만의 시중을 받던 중 돌연 저 녀석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 좋지. 성격 좋지. 과거 깨끗하지. 그리고 은찬이 수인이라는 것에도 반감 없이 받아들이지.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좋은 아빠 감이다.

살짝 진심이 들어간 은찬의 제의에 동만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닌데?”

“……리얼?”

“리얼. 물론 니가 이 부장보다 얼굴도 못생겼고 돈도 없지만. 다른 건 뭐 그럭저럭 괜찮으니까.”

“다른 건 뭐 그럭저럭? 야! 너 사람을 그런 식으로 비교하냐? 그 자식이랑 나랑 뭐가 다른데!”

이주한과 비교당한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은근 자존심이 상한 모양인지 동만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 모습 자체가 황당한 은찬은 피식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솔직하게 말해 봐! 뭔데? 얼굴하고 돈은 인정! 그건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런데 다른 건 아니지. 나 어디 가서 성격 이상하다는 소리 못 들어 봤거든? 인성 갑. 이게 김동만 뒤에 따라다니는 꼬리표거든?”

“모솔도 있잖아.”

“뒤질래?”

“그리고 이주한 그 새끼는…….”

은찬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동만의 다리 사이에서 멈췄다. 그 시선을 따라 자신의 다리 사이. 그 부분을 빤히 바라보던 동만이 미간을 찡그렸다.

“거기 엄청 커.”

“나도 작은 편 아니거든?”

은찬은 턱을 당당하게 치켜세우는 동만에게 한심한 시선을 던졌다. 사람하고 수인하고 같냐?

“너는 그 자식에 비하면 잽도 안 돼. 그 자식 수인이잖아. 그것도 표범. 너 표범 덩치를 생각해 봐. 그럼 거기는 얼마나 클 거 같냐?”

직접 경험해본 은찬은 이해하지 못한 동만을 위해 두 손으로 대략의 길이를 측정해 줬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동만과 달리 은찬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달렸다. 비록 흑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겨졌지만 좋긴 좋았다.

“진짜? 그렇게 커?”

은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동만. 너 솔직히 나한테 마음 있구나? 그래서 그 자식한테 질투하는 거지?”

“누가? 내가?”

“내가 너만의 고양이로 살겠다고 하니까 혹해? 끌려? 우리 진짜 이참에 진짜 찐으로 어떻게 함 해 볼까?”

눈을 가늘게 뜬 은찬이 윙크를 날리며 슬쩍 거리를 좁히자 동만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급체해서 머리까지 돌았냐?”

“우리 동만이 수줍어한다.”

“개수작 부리지 마! 나 호모, 게이 아니거든! 난 그냥 고양이가 좋을 뿐이고, 넌 그냥 내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한 번만 더 눈 찡그려 봐! 입에다 마그네슘 한가득 처넣어 버릴 테니까!”

“아니면 아니지 무섭게 왜 그렇게 말해! 우리 애 다 듣겠다!”

“내가 더 무섭거든? 나 순간 소름 끼쳤거든? 너 자꾸 이러면 같이 나가 사는 거 없던 일로 할 거야. 나 건들지 마! 지금이라도 당장 이 부장한테 전화해서 사실대로 털어놓는 수가 있어.”

“…….”

순간적으로 은찬이 정말 무서웠던 건지 동만은 밑도 끝도 없이 막말을 퍼부었다. 왈칵 얼굴을 찌푸린 은찬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녀석이 이 정도까지 거부할 줄은 몰랐다.

“됐어! 나도 한번 해 본 말이니까!”

“나 씻고 나올 테니까, 너 옷부터 갈아입어! 아무렇게나 던져두지 말고!”

“내가 잠시 착각했나 보다. 넌 아빠가 될 놈이 아니라 잔소리 엄청 많은 엄마가 될 팔자 같다.”

“뭐?”

“얼른 씻어. 나도 씻게.”

욕실로 들어간 동만은 평소 습관대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동만을 다른 감정으로 보았던 은찬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아무리 급해도 친구는 손대지 말아야지.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최대한 이주한과 거리를 두고 입을 조심하는 수밖에.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은찬의 결심은 이주한에 의해 무너졌다.

오전 회의 시간 급작스럽게 출장 갈 일이 생겼다는 통보를 받았다. 제주도 리조트에서 회사 신제품에 흥미를 보였단다. 이주한 부장이 직접 가야 하는 건 당연했거니와 보조를 맞춰 줄 한 사람도 필요했다. 모두 만장일치로 유은찬을 지목했고 은찬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하하하…… 왜 하필 저죠?”

“그거야, 부장님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은찬 씨니까?”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은찬은 모두 앞에서 똥 씹은 표정이 됐다. 물론 그걸 본 이주한의 기분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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