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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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 주의 시작 월요일.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일기예보에 의하면 늦은 오후부터 다시 비가 내릴 예정이었다. 늘 매고 다니는 가방에 3단짜리 우산 하나를 넣고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출근했지만, 사무실엔 반갑지 않은 사람이 은찬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은찬 씨. 지금 몇 시입니까?”

과장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이주한은 은찬이 문을 열자마자 살기가 득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활기차게 시작해야 할 월요일 아침부터 그 얼굴과 대면한 순간 은찬은 지옥이 시작됐음을 실감했다.

출근 시간 10분 전. 주위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팀원들도 있건만 저런다. 1년 만에 함께 일을 하게 된 이주한의 괴롭힘이 레벨 업 된 것 같았다.

“아직 9시 전인데요?”

“매번 이래요? 정각 딱 제시간에 출근합니까? 내가 없다고 너무 해이해진 거 아니에요?”

아직 지각이 아님을 강조했지만, 이주한에게 통하지 않았다. 지각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유은찬을 구박할 목적으로 이른 아침부터 사무실에 온 것이 분명했다. 하물며 과장도 출근하지 않은 시점에 말이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금 더 일찍 오도록 하겠습니다.”

더럽지만 더는 따지고 들 수 없는 처지였다. 부당한 사과를 하며 제 자리에 앉자마자 곽 과장이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섰다. 누군가 그에게 이 부장이 사무실에 있다는 정보를 준 게 분명했다. 숨을 헐떡이며 들어선 그는 사원증도 미처 목에 걸지 못한 상태였다.

“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곽 과장의 인사에 이주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은찬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 차가 느껴졌다.

재수 없는 새끼. 똥 씹은 표정으로 컴퓨터를 켜며 은찬은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은찬은 그를 등진 상태였다.

정각 9시. 하나둘씩 나타난 팀원은 이 부장의 존재에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제자리에 앉기 바빴다. 묵묵히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이 부장은 다른 사람은 다 제쳐 놓고 김동만을 보자마자 먹잇감을 기다리던 짐승의 시선으로 동만을 좇았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김동만 씨.”

“……네, 부장님.”

“지금 몇 시죠?”

“죄송합니다.”

“마케팅 1부서 기강이 많이 약해졌네요. 곽 과장님이 잘해 주셨나 봅니다. 이러니까 매번 마케팅 2부서한테 밀리죠. 특히 유은찬 씨, 김동만 씨. 이 두 사람은 앞으로 제가 주시하겠습니다.”

재수 없게 콕 찍어서 말한다. 그의 알다가도 모를 잔소리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월요일 아침부터 잔소리를 듣게 된 은찬과 동만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은찬의 옆자리인 동만이 소리 없이 눈짓으로 물음을 던졌다. 저 자식 왜 저러냐. 은찬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난들 알겠냐.

같은 집에 살지만, 출근은 각자 알아서 하기에 오늘 첫 대면부터 서로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그 뒤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진 긴 회의를 끝내고 돌아서니 점심시간이다. 금쪽같은 시간. 팀원들은 칼같이 사라지고 회의실에 남은 사람은 곽 과장과 이 부장, 그리고 김동만과 유은찬 뿐이었다. 하필 이 네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부장님 약속 없으시면 저랑 같이 나가시죠.”

“그럴까요? 아, 유은찬 씨하고 김동만 씨도 같이 가죠.”

회의 시간 내내 동만과 은찬에게 질문을 던지며 피 말리게 했던 인간이 잘도 웃으며 말한다. 더 이상 같이 있었다간 숨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 은찬은 망설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

“아니요. 저희는 따로 먹겠습니다.”

“특별한 일 없으면 같이 가죠. 오랜만에 같이 먹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지랄한다. 오랜만에 이주한과 밥 먹을 생각을 하니까 빈속에 체한 느낌이다. 오전 내내 자신이 저지른 짓을 잊어버린 것인지 이주한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러자 곽 과장까지 은찬과 동만에게 은근슬쩍 압박을 가했다. 이 부장님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시선까지 던지면서 말이다.

“다음에. 다음에 같이 하겠습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 딱 감고 무시한 은찬은 우물쭈물하게 서 있는 동만을 끌고 회의실을 재빨리 나왔다.

“야, 괜찮겠어?”

“뭐가.”

“과장이 우리 엄청 째려보던데?”

“꼬리는 지 혼자 흔들면 되지 왜 우리한테까지 난리야. 수인도 아니면서 진짜 꼬리 하나는 기똥차게 흔든다니까. 야, 빨리 가자. 아무거나 배에 뭐 좀 채워 넣어야지. 이러다 쓰러지겠다.”

혹시라도 잡힐까 봐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아직도 입맛이 돌아오지 않은 은찬은 회사 구내식당에서 겨우 쓰러지지 않을 정도만 먹었다. 심하지는 않지만, 음식 냄새만 맡아도 멀미한 것 같은 느낌. 병원에서는 이걸 입덧이라 했다.

식사 후 자연스럽게 회사 내 커피숍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30분 남은 점심시간을 그곳에서 때울 예정이었다. 평소라면 시원한 사무실에서 폭풍 수다를 떨어야 했지만, 이주한이라는 위험인물 때문에 장소를 바꿨다.

그 생각을 가진 건 비단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커피숍 안으로 하나둘씩 들어온 손님 중 팀원들이 제법 보였다.

“망했다. 앞으로 이 짓을 두 달 동안 해야 한다고? 와……. 미쳤다, 미쳤어.”

“야, 난 오늘 10분 일찍 왔는데도 까였어.”

“진짜? 부장 미친 거 아니냐? 야, 부장이 너하고 나 대놓고 찍은 거 맞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치사하고 더럽다.”

“그 자식 사람 아니잖아.”

“아…… 맞다. 그런데 진짜 예전보다 더 심해졌는데?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잖아. 오늘 히스테리 끝장나더라.”

“그러니까. 사이코패스 같다니까? 석 달이나 지나서 이제 와서 나한테 그런 제의를 하질 않나. 솔직히 정상적인 사고 회로를 가진 놈이면 부하 직원한테 그런 말 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자기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오케이 할 줄 알았나. 좆 까라 그래. 그 자식, 진짜 성격 이상하다니까? 아까도 봐. 너하고 나한테만 죽어라 질문 퍼붓던 거. 아니, 보통 이삼일 정도 아이디어 짤 시간을 주고 쪼잖아. 근데 오늘 아침에 자료 뿌려놓고서 그 지랄이잖아.”

한창 말하던 중 맞은편에 앉은 동만이 갑자기 어색하게 웃으며 이상하게 눈짓을 던졌지만 한번 입이 터진 은찬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더 분통을 터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왜? 뭐? 내 말이 틀려? 그리고 내가 지랑 왜 밥을 먹냐? 먹다가 급체해서 죽을 일 있어? 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똥 마려워?”

한쪽으로 눈알을 심하게 굴리는 김동만의 행동이 웃겼던 은찬은 킥킥 웃으며 수박 주스를 홀짝였다.

“어쩌겠냐. 일이 이렇게 된 거 우리 두 달만 꼭 견디자. 원래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하잖아. 두 달 뒤에 그 자식 가고 나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될걸? 야, 나는 그 짓을 1년이나 참고 견뎠다니까? 오죽하면 내가 1년 내내 이를 갈았겠냐. 나 죽으면 몸에서 사리 나올지도 몰라. 말해 봤자 뭐 하겠냐. 입만 아프지. 기분도 꿀꿀한데 오늘 저녁에 고등어회 먹으러 갈래? 갑자기 그게 당기는데.”

“……닥쳐.”

김동만이 복화술로 속삭이는 소리에 은찬은 콧방귀를 꼈다.

“왜? 내가 너보고 사라고 할까 봐? 오랜만에 내가 살게. 가자. 갑자기 나 그거 먹고 싶어졌어. 야들야들하니 쫄깃한 고등어회.”

은찬의 제의에 김동만은 굳은 표정으로 침묵했다. 왜 저러지? 좀 전과는 다른 분위기에 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동만 뿐만이 아니라 매장이 조용하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했다. 은은하게 울리는 재즈 음악이 은찬의 귀에 메아리쳤다.

“이주한 부장. 가까이에서 보니까 진짜 잘생겼다. 끝내준다.”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에 은찬은 제 뒤에 이주한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조용히 입 모양으로 맞은편에 앉은 김동만에게 물었다. 이주한 뒤에 있느냐고. 그러자 동만은 은찬의 등 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찰나의 정적 속에서 은찬은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어쩌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거지? 평소에 이 근처도 오지 않던 인간이 오늘따라 여기에 왜 온 거냐고! 젠장, 젠장!

뒷담화도 아니고 앞 담화를 한 탓에 뭐라고 둘러댈 핑계도 없었다. 이건 그야말로 빼 박이었다. 두려움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갔다.

“유은찬 씨.”

담담하게 은찬을 부르는 이주한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은찬은 숨죽여 대답했다.

“……예. 부장님.”

“고등어회는 오늘 저녁에 나랑 먹지. 우리 꽤 할 말이 많은 것 같으니까.”

“아니, 저. 그게…….”

이 상황에 거부권은 없는 게 마땅했지만 그렇다고 그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도 싫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은찬의 눈에 맞은편에 앉은 김동만이 들어왔다. 어차피 우리는 한배를 탄 몸이니까. 벌떡 일어난 은찬은 어색하게 웃으며 제의했다.

“김동만 씨하고 같이 가도 될…까요?”

눈을 가늘게 뜬 이주한이 잠시 김동만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어색한 침묵이 길어질수록 은찬의 손은 식은땀으로 젖어 갔다. 이윽고 그는 한쪽 입술을 비틀며 담담하게 허락했다.

“좋아요. 같이 보죠. 둘이서 먹으면 급체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셋이 좋겠네요. 그럼 장소 정해서 핸드폰으로 주소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주한은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잘생긴 이주한 부장을 가까이에서 봤다고 좋아하는 타 부서 직원들의 행복한 비명과는 반대로 그대로 얼어 버린 은찬과 동만은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있는 자리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왜 나까지 끌어들이는 건데!”

딱 한마디. 동만의 원망 가득한 목소리에 은찬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애인이잖아.”

“닥쳐! 내가 닥치라고 했잖아! 그리고 회사에는 그딴 말 안 하기로 했잖아!”

“말도 없이 그 말만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이 부장이 개소리하면 혼내 준다는 사람이 누구더라?”

“둘이서 밥 먹으러 가자는 것뿐이잖아! 날 왜 물고 늘어지는 건데!”

그야 둘이 밥 먹는 게 죽기보다 싫으니까. 은찬은 비밀 병기인 귀를 들어낸 채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동만을 응시했다. 이러면 구구절절 말을 길게 할 필요도 없었다. 촉촉이 젖은 고양이 눈과 마주한 순간 김동만의 노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집사의 표정이 된 동만은 두 눈을 반짝였다.

“한 번만 같이 가 주라.”

“귀 만져도 돼?”

“그래.”

단순한 녀석. 고작 은찬의 머리를 쓰다듬었을 뿐인데 김동만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

조상님들이 말씀하시길 같은 고양잇과지만 고양이는 요물이라고 했다. 특히 검정고양이는 아는 척도 하지 말 것이며 되도록 멀리 하라 하셨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검정고양이는 본 적이 없기에 그 말을 잠시 잊고 있었던 주한의 눈앞에 검정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난 건 2년 전이었다.

주한의 회사에 간혹 수인이 입사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자신이 수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유은찬은 달랐다. 면접 때부터 수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큰소리쳤고, 가까스로 수인 혜택 점수를 받아 합격했다고 들었다.

검정고양이 남자 수인이 입사했다. 삽시간에 사내에 퍼진 그 소식은 주한의 귀에도 들렸지만, 딱히 흥미를 끌지 못했다. 단지 언제까지 실적도 없는 마케팅 1부서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그 소문의 주인공이 자신의 발아래로 떨어졌다. 일주일의 연수 기간을 끝내고 마케팅 1부서로 발령받은 검정고양이는 당연하게도 이주한의 후임이 되었다. 그때까지 팀 내에서 막내였던 주한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케팅 2부서의 허드렛일을 떠맡은 1부서의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야근을 하는 일이 하루걸러 하루였고, 덕분에 밥 먹듯이 즐기던 밤 생활은 잠시 접어둬야 했다. 물론 그냥 내팽개쳐 버리고 가면 그만이지만 그런 식으로 일 처리 하는 건 성격상 맞질 않았다.

처음 유은찬을 봤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딱 고양이처럼 생겼네. 그 정도 감상이 다였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과 길게 찢어진 까만 눈. 거기에 대조되는 하얀 피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성인 남자의 평균 키. 수인이라는 특이 사항만 뺀다면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무엇보다 회사에선 수인이든 사람이든 무조건 일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생각보다 일을 못 했다. 어떻게 그 머리로 이 회사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멍청했다.

자고로 수인은 사람보다 지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바였다. 그런데 저 멍청한 검정고양이는 주한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한번 말하면 알아듣기는커녕. 몇 날 며칠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주한은 폭발하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고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유은찬을 구박했다. 그전까지 전혀 볼수 없었던 주한의 다른 모습에 다들 당황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하필 들어온 후임이 멍청한 고양이 놈일 줄이야.

그것뿐만이 아니라 망할 검정고양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주한의 신경을 건드렸다.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틈만 나면 팀원들과 수다를 떨었으며 조금만 혼내면 삐지기 일쑤였다.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반성이라도 하면 조금 봐줄 텐데, 망할 검정고양이는 눈만 떼면 사라져서는 이주한을 욕하고 있었다.

이주한 돌아이 개새끼. 녀석이 이주한을 주로 욕할 때 쓰는 단어였다.

끼리끼리 논다고 눈치 없는 동기 김동만과 함께 화장실이나 회의실에서 한참 동안 이주한을 씹어 댔다. 제일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에서 욕하는 건 무슨 배짱일까. 화장실 앞에서 조용히 그 욕을 다 듣고 있던 주한은 멍청한 두 놈이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주한도 수인이었다. 그것도 고양이보다 청각, 후각, 시각이 훨씬 뛰어난 최상 계층의 표범. 그가 수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만큼 철저하게 숨겼고 당연히 유은찬도 몰랐을 것이다.

표범 수인은 인내심이 많은 성격이었다. 하지만 유은찬에게는 예외였다. 그는 유은찬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주한 개새끼라고 욕할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몇 번 화를 내다가 저도 모르게 귀가 나올 뻔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 녀석을 구박했다. 눈물이 쏙 빠지게 망신도 주고 일부러 야근까지 시켜 가며 일을 시켰다. 그럼에도 유은찬은 잘 견뎠다. 앞에서는 웃고 있지만, 눈으로는 쌍욕을 던지면서 꿋꿋하게 견뎠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녀석은 성격이 밝고 활기차서 팀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여럿이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무뚝뚝한 주한과는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달랐다. 그래서일까. 망할 검정고양이는 혼내도 혼나는지도 모르고 낭창하게 돌아다니기 바빴다.

같은 수인이지만 너무나 달랐기에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주한에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물론 인사과에 말해서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면 그만일 테지만 이건 주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결국, 그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독한 생활을 1년이나 버텼고 마침내 부장으로 승진한 주한이 먼저 그곳을 떠나게 됐다. 마지막 팀원들과 인사를 나눌 때 주한은 처음으로 유은찬이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 걸 보았다.

주한도 진심으로 기뻤다. 더 이상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을 것이고 조용히 하루를 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동안 유은찬 때문에 없던 스트레스성 위염도 생겼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유은찬을 생각하며 혼자 화를 삭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적어도 다시 예전만큼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생각이 틀렸다. 부장이 되고 혼자만의 방을 가지게 된 직후 처음에는 좋았다. 멍청한 유은찬을 안 봐도 되니까.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주한은 저도 모르게 마케팅 1부서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 도장 찍자마자 커피부터 사 오라고 소리를 질러야 그제야 눈치 보며 뛰어가던 유은찬. 엑셀 양식을 몇 번이나 알려 줬지만 되묻던 멍청한 유은찬. 다른 팀원들하고는 잘 웃고 잘 떠들면서 유독 자신한테만은 가식적으로 대하던 유은찬. 불쌍해서 회를 사 줬더니 안 좋아한다며 김동만에게 다 줘 버린 유은찬. 어느새 주한은 지난 1년간 유은찬에 대한 기억들을 매일 곱씹고 있었다.

왜 이러나 싶어 당황스러운 주한과 달리 유은찬은 아주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마치 그가 사라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표정부터 밝아진 녀석을 볼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한 번은 김동만과 복도를 나란히 걷던 유은찬과 살짝 엇갈린 적이 있었다. 우연으로라도 한번 마주칠 법도 한데 유독 유은찬과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반가움에 들뜬 주한이 뒤따라가던 중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됐다.

‘너 어제 왜 안 들어왔냐? 또 그날이야? 고양이 발정은 1년에 몇 번이냐?’

‘관심 끄지. 왜? 부럽냐?’

그러고 보니 유은찬이 지나간 길에 동물만이 맡을 수 있는 수컷의 진한 냄새가 묻어났다. 유은찬이 수인이라는 것을, 저 녀석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발정한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주한에게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주한은 점점 멀어지는 유은찬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제야 자신이 지나치게 저 녀석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최대한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음에도 어느새인가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은 유은찬을 찾고 있었다.

더군다나 유은찬도 발정을 한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미친 듯이 화가 났다. 녀석이 얼굴도 모르는 다른 놈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하루하루가 초조해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1년간 주한이 유은찬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동안 유은찬은 이주한을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옛 어른들이 말하길. 검정고양이는 요물이니 가까이 가지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맞다. 요물이다.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드는 요물이었다.

뒤늦게 그 말을 실감한 주한은 늦은 밤 방에서 포효했다. 우렁차게 울리는 날카로운 짐승 울음소리에 아파트가 요동쳤다. 고작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이러는 제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다.

고양이라서 그럴 것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고양이를 가진 적이 없어서. 호기심에 이러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한 주한은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고양이를 가지겠다고 결심했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가지고 놀다가 흥미가 사라지면 버리면 그만이다. 같은 수컷이니 위험 부담도 없을 테고. 망설일 것 없이 실행으로 옮겼다. 때마침 이틀 뒤 있을 워크숍 자리를 빌어 유은찬과 오랜만에 대화의 물꼬를 틀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계획이 틀어졌다. 대화는 대화인데 몸으로 대화부터 나누게 됐다.

유은찬이 문제였다. 주한은 요망한 검정고양이가 개다래 술에 취해 다른 남자에게 애교부리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멱살을 잡고 방으로 밀어 넣자마자 주한은 순간적으로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유은찬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뒤 자신답지 않게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폭력에 가까울 정도로 물어뜯고 박아 대고, 울부짖는 유은찬의 눈가가 짓무르는 걸 보면서 짜릿해했다. 격렬한 삽입에 고양이처럼 신음 소리를 내던 유은찬은 짧은 경련과 함께 감춰 둔 귀와 꼬리를 드러냈다.

자신의 허리를 감아오는 고양이 꼬리 감촉. 파르르 떨리는 고양이 귀를 본 순간, 이주한의 몸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야성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의식과 상관없이 귀와 꼬리가 나왔고 본능적으로 맹공격을 가했다. 이성 따위는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밤새도록 그들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유은찬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제 정액으로 가득 채웠음에도 부족했다.

주한은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잠시 눈을 붙였다. 기절한 유은찬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일을 상의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을 뜨자마자 방 안에 홀로 남겨진 것을 알았을 때 또 한 번 자존심에 금이 갔다.

고작 고양이 하나 때문에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유은찬을 단념하려 했다. 그래서 비슷한 다른 고양이 수인과 자 보고 별짓을 다 해 봤지만, 오히려 유은찬과 보낸 하룻밤이 이주한에게는 독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 자식이 또 발정이 나서 다른 놈하고 그 짓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밤마다 애가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이주한이 먼저 나섰다. 마케팅 2부서가 맡기로 예정된 건을 할아버지에게 사정해서 1팀으로 넘기는 대신 주한이 그 일을 맡기로 했다. 대외적으로는 후계자 자리를 다지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사실 이주한의 사심 때문에 억지로 마련된 자리였다.

늘 잡일만 하는 마케팅 1부서에도 좋은 일이건만 유은찬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똥 씹은 표정을 짓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하여튼 저 자식은 유독 주한에게만 가식적인 표정을 지었다.

가식적인 고양이 놈.

늘 그렇듯 돌아서면 이주한 개새끼라고 욕할 것이다.

그날 침대 위에서 발정 난 유은찬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녀석과 마주한 순간부터 주한은 아래가 서는 것 같았다. 얼른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애인까지는 아니고. 둘 사이에 사랑이 오갈 정도로 뭔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일단 섹스만 하는 사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그런데 석 달 사이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다. 유은찬에게 애인이 생겼단다. 당당하게 김동만이라고 밝히기에 처음에는 비웃었다. 그 김동만이라고? 둘 사이가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아는 주한에게 그 말은 통하지 않았다.

농담이겠지. 애초에 유은찬이 쉽게 승낙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잘 구슬려 보는 수밖에.

그런데 지금 맞은 편에 앉은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애인 사이였다. 싱싱한 고등어회를 가운데 놓고 그들과 마주 앉은 주한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생겼다.

“안 돼! 마시지 마!”

“야! 부장님이 주신 건데 어떻게 안 마셔! 한잔 정도는 괜찮아.”

“한 방울도 안 되네요. 다 널 위해서 하는 소리야. 너는 이거나 마시고 있어.”

주한이 은찬에게 건넨 소주잔을 동만이 빼앗아 가더니 대신 콜라를 컵에 가득 채웠다.

“회는 소준데…….”

“나중에. 나중에 실컷 마시고! 지금은 안 돼!”

동만은 단호하게 말하며 은찬의 소주잔을 제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눈앞에 주한이 있건만 대놓고 애정 행각을 펼치는 이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주한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소주를 한잔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내가 주는 술이라서 안 되나요?”

“네? 아니, 그게 아니라…….”

두 사람의 대화에 주한이 불쑥 끼어들자 동만이 말꼬리를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애써 주한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동만과 회를 먹느라 바쁜 유은찬. 주한은 정말 이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인지를 두고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유은찬과 입사 동기에 같은 기숙사를 쓰고 있는 김동만. 사내에서는 그를 한 번만이라고 불렀다. 여자 직원만 보면 한 번만 소개팅 좀 시켜 달라는 말이 습관처럼 나와서였다. 늘 뜨거운 사랑을 꿈꾸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껏 단 한 번도 연애다운 연애를 해 보지 못한 그가 유은찬의 진짜 애인일까.

애매했다. 섹스만 하자는 주한의 요청을 거절하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했는데 둘 사이에 확실히 뭔가가 있었다.

“두 사람, 사귄다면서요.”

주한의 기습적인 질문이 긴 정적을 깨트렸다. 순간적으로 은찬은 젓가락질을 삐끗했고 동만은 사레가 들려 잔기침을 해 댔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만큼 주한의 눈썰미는 좋았다.

찰나의 순간, 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역시나 유은찬이었다.

“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비밀 연애거든요. 원래 같은 팀원끼리 사귀는 건 좀 그렇잖아요. 게다가 같은 남자끼리라서 눈치도 보이고. 비밀 지켜 주실 거죠? 부장님.”

유은찬은 주한을 향해 눈웃음을 던졌다. 망할 고양이 자식. 늘 보았던 가식적인 웃음이다. 지금 주한은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속에서는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석 달도 못 참고 그사이에 애인을 만들어? 그것도 하필 김동만.

“내가 왜요?”

“네?”

유은찬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동만도 놀란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한은 젓가락을 들어 회를 한 점 먹었다.

“내가 비밀 유지해 줘야 할 의무가 있나? 난 두 사람이 연애하든. 뭘 하든 관심 없습니다.”

“아…… 네.”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요?”

“네? 뭘…….”

또 혼자 술 한잔을 마시며 주한은 김동만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시선은 아까부터 그에게 꽂힌 상태였다.

“언제부터 사귄 겁니까. 김동만 씨.”

“아…… 네, 그러니까…… 한 2개월 됐나? 그쯤 됐으려나……. 하, 하.”

“소개팅받고 다닌 거로 아는데. 여자 좋아하지 않았어요? 남자 좋아하는지는 몰랐는데. 그것도 수인을. 취향 참 독특하시네요.”

“…….”

주한은 쫀득쫀득한 고등어회를 씹듯이 앞에 있는 김동만을 씹기 시작했다.

“두 사람 진도는 어디까지 갔어요. 키스는 해 봤어요? 잠자리는? 사귄 지 두 달이면 당연히 해 봤을 테고. 수인하고 자는 거 그거 쉽지 않은데. 인간하고 달라서 성욕이 월등히 높거든요. 어때요, 김동만 씨. 괜찮던가요?”

주한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김동만의 얼굴은 새빨간 토마토처럼 익어 갔다. 동공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리는 김동만의 모습에 주한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 지금 하는 모양새를 보니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않은 게 분명했다.

“더워요? 얼굴이 빨간데. 아니면 부끄러워서 그래요? 나도 경험 있으니까. 혹시라도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어디를 어떻게 공략하면 좋아하는지. 자세히 알려 줄 테니까.”

굳이 이 자리에 김동만까지 합석시킨 보람을 느낀 주한이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보다 못한 유은찬이 눈을 치켜뜨며 끼어들었다.

“부장님. 거기까지 묻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저희 프라이버시거든요?”

“유은찬 씨. 지금 체했어요? 괜찮죠?”

“네?”

“아니, 나랑 밥 먹으면 급체해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들어서. 괜찮은가 해서요. 내가 성격이 좀 그래. 사이코패스에 개새끼 같아서. 사수로 있을 때 유은찬 씨가 고생이 많았을 건데, 그렇죠?”

“…….”

유은찬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굳어 버린 은찬은 금방 상황 파악을 하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누가 그래요? 저는 부장님이 사수라서 정말, 정말, 정말 좋았는걸요? 제가 회사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부장님이잖아요!”

거짓말. 어떻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곽 과장 밑에서 저런 것만 배운 건가 싶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 줘서. 그런데. 나 진짜 개새끼 같아요?”

“……아니요! 누가 그래요? 전혀요. 하, 하, 하.”

이주한 개새끼. 씨발 새끼. 사이코패스 같은 놈. 사수만 아니면 진짜 한 대 쳤다고 유은찬은 매일 소리쳤다. 유은찬이 악에 받칠수록 독이 오를 때로 오른 주한도 더 지독하게 굴었다. 그 시절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던 사이였다.

서로 가식적으로 웃으며 침묵하고 있을 때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동만이 양해를 구하며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마자 주한은 미소를 싹 지웠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은찬에게 확인했다.

“진짜야?”

“……뭐가요.”

“진짜 둘이 사귀는 건가 해서.”

“그럼 가짜로 사귀겠어요? 봤잖아요. 우리 동만이가 나 걱정해서 술 못 먹게 하는 거. 동만이가 저러는 거 봤어요? 애인 사이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그러기엔 둘이 뭔가 어색한 거 같기도 하고. 솔직히 말할까? 난 네가 내 제의 거절하려고 김동만 이용한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좀 긴가민가하네. 사귄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섹스도 못 해 본 게 말이 돼?”

주한의 비아냥에 은찬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어떻게 사귄다는 개념을 섹스로 연관 지으세요? 플라토닉 사랑 모르세요? 동만이 하고 저하고는 순수한 사랑을 지향하거든요?”

플라토닉 사랑. 침대 위에서 온갖 체위를 하며 야한 신음을 내지르던 유은찬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사귄다고 극구 우기는데 증거가 없으니 따질 방법도 없었다.

잠깐 사이에 고등어회를 반이나 비운 은찬은 그사이에도 열심히 먹고 있었다. 분명 회를 싫어한다고 알고 있건만 주한은 너무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을 잠시 감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게요?”

어쩐지 목소리가 기대에 차 있다. 이대로 갔으면 하는 바람을 듬뿍 담은 톤이었다.

“화장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주한은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화장실 문을 여니 김동만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아까부터 단둘이 있을 기회를 노리고 있던 주한에게는 지금이 딱이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던 동만은 주한의 등장에 흠칫 놀라 서둘러 도망치려 했다.

“김동만 씨.”

“……예?”

주한은 그의 옆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사귀니까 좋아요?”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거울 속에 반사된 김동만과 시선을 마주했다. 주한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그는 주눅이 든 상태였다.

보통 이러는 게 정상이었다. 표범 수인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이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수인들도 그랬다. 하지만 유독 유은찬에게는 통하질 않았다. 멍청해서 그런가.

“내가 지금 이런 말 하는 게 좀 그런데……. 김동만 씨.”

“…….”

“유은찬 씨 다시 가져가도 되죠?”

“에?”

“내가 유은찬 씨 가지고 싶은데.”

멍청한 표정으로 몇 번 눈을 끔벅거린 김동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혹시, 은찬이 좋아…하세요?”

좋아해?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이었다.

“아니. 그냥 같이 자고 싶어서. 그 자식하고 잔 건 내가 먼저야.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치기해서 빼앗아 간 게 그쪽. 알겠어? 혹시 내가 빼앗겼다고 생각할까 봐 미리 알려 주는 거야.”

“……제가 싫다면요?”

잔뜩 겁을 먹고 있으면서 꼴에 남자라고 덤빈다. 주한은 동만의 와이셔츠에 젖은 손을 닦으며 한쪽 입술 끝을 비릿하게 올렸다.

“좋고 싫고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난 내가 좋으면 가져. 그게 누구든 간에. 팀원들끼리 얼굴 붉히면 그렇잖아. 융통성 있게 잘 생각해 봐. 김동만 씨 미래를 생각하면 어는 쪽이 더 나은 방향인지.”

짧게 그의 어깨를 툭 치고서 화장실을 나선 주한은 유은찬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가게를 나왔다. 오늘 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

일기예보는 틀렸다. 비가 온다더니 비는커녕 환하게 달이 떴다. 오랜만에 보는 달은 유난히 더 밝아 보였다. 거실 소파에 동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은 은찬은 그 달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주한 밑에서 1년이나 인내심을 갈고 닦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수양이 덜 됐나 보다. 짧은 탄식과 함께 입을 열자마자 욕이 쏟아졌다.

“이주한 개새끼.”

“인정. 진정한 개새끼지.”

“진정한 개새끼는 뭐야?”

“살다가 그런 쓰레기 새끼는 처음 봤으니까. 돈 있고 얼굴 반반하고 잘난 것들은 다 그런가 싶어서. 세상 참 불공평하다 싶어서.”

“왜 그래. 갑자기. 너답지 않게. 야, 김동만. 아까 회 잘못 먹었어?”

화장실 간다던 이주한은 인사도 없이 계산만 하고 가 버렸고 그 뒤 김동만은 오피스텔로 돌아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이따금 한숨을 내쉬며 은찬의 눈치를 살피기만 할 뿐이었다. 괜히 미안해진 은찬도 그런 동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자. 내가 좋아하는 명언이거든? 그런데 은찬아. 현실주의자라는 게 뭘까.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이 정말 이뤄질까?”

“……김동만. 어디 아파? 회 먹고 급체했어? 아니면 화장실에서 이 부장하고 무슨 일 있었어?”

“유은찬.”

갑자기 철학자가 된 동만이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은찬의 이름을 불렀다. 뭐야, 왜 저래. 김동만의 위아래를 훑어봐도 맞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김동만이 어떤 놈인데. 이 부장에게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드러누워 합의금을 받아 낼 놈이다.

이곳에 입사할 당시 사회의 때가 전혀 묻어 있지 않았던 유은찬을 타락하게 한 첫 번째 원인 제공자는 이주한이고, 그 두 번째가 김동만이었다. 사회생활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건 먼저 선빵을 날리느냐가 아니라 무조건 맞고 합의금을 받아 내야 한다는 걸 알려 준 게 녀석이었다.

수인과 한집에 사는 것도 그 수인이 임신한 것도 담담하게 받아들인 김동만이 보기 드물게 엄숙했다. 무슨 일이 터져도 크게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은찬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뭔데. 빨리 말해, 인마! 사람 간 보는 것도 아니고 말하다가 말아!”

“……우리 말이야. 입사하고 바로 같이 살았으니까 햇수로 따지면 2년쯤 되지?”

“그럴걸?”

“오래 살았다. 이러니 내가 너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지.”

“무슨 소리야. 나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설마…… 너!”

설마 날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 분위기라면 고백하고도 남을 분위기였다. 혹시 화장실에서 이주한이랑 나 때문에 싸운 건가? 뒤늦게 날 사랑한다고 자각해서 이러는 거? 지금까지 여자 친구 만들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게 페이크?

맞다. 그거네. 그러니까 지금까지 애인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척했던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은찬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동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결단코 단 한 번도 김동만을 두고 그런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난감해진 은찬은 동만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네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 이해해. 한집에서 2년 동안 같이 살았으면 없던 정도 생길 만도 해. 그런데 동만아. 난 너를 단 한 번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물론 네가 날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해 준 건 알겠는데.”

“무슨 개소리야.”

불쑥 말을 끊어 버린 동만이 눈살을 찌푸리며 은찬을 흘겼다.

“나도 너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거든? 야! 이건 확실히 하고 넘어가자! 난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뿐이지 널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 내가 미쳤냐! 너를 왜 좋아해. 어디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오해를 하고 지랄이야. 소름 돋게!”

동만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정색했다.

“나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며!”

“흔들렸지! 이 부장이 그딴 말 하니까!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너를 줘야 하나 싶어서!”

“나를 줘? 이 부장 그 자식이 뭐라고 했는데? 설마 너! 나 그 자식 애 가졌다고 죄다 일러바친 거 아니지?”

화들짝 놀란 은찬은 두 손으로 김동만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힘없이 상체가 흔들리던 동만이 은찬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야, 김동만! 사실대로 말 안 할래?”

은찬이 눈을 부릅뜨고 버럭 소리치자 동만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나보고 새치기했대.”

“뭐? 새치기? 누가?”

“누구긴 누구야. 이 부장이지! 그 자식 진짜 개새끼는 개새끼더라. 아니 나한테 다짜고짜 널 달라잖아! 그래서 내가 처음에는 싫다고 했거든? 그랬더니 너하고 자기하고 먼저 잤다, 그러니까 내가 새치기해서 너 가로챈 거다. 이러더니 앞으로 내 밝은 회사생활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생각해 보라잖아!”

“그래서 넌? 넌 뭐라고 그랬는데?”

진짜 애인이라면 그 자리에서 주먹이라도 휘둘러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김동만은 연애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런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턱이 있나.

이런 바보 멍청이하고 손을 잡은 내가 병신이다. 입을 떡 벌린 은찬은 당당하게 대답하는 동만의 멱살을 꽉 움켜잡았다. 살다 보니 모르는 게 죄가 될 때도 있었다. 그때가 바로 지금이다.

“이 멍청한 새끼야! 넌 드라마도 안 보냐? 유은찬은 내 남자다! 우리 사귄다! 내 남자 눈독 들이지 말라고 왜 말을 못 해! 설마 너, 나 진짜 이주한한테 넘기려고 한 거 아니지?”

무심코 던진 말에 김동만이 배시시 웃는다. 친구고 뭐고 오늘부터 이 새끼도 개새끼다.

“야! 니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야, 야! 진정해! 진정하라고! 컴 다운! 안 넘겼으니까 여기 있는 거잖아!”

믿었던 친구의 배신에 눈이 뒤집힌 은찬이 미친 듯이 지랄 발광을 했다. 종잇장처럼 나부끼던 동만은 그런 은찬을 다독이며 진땀을 흘렸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배신이야!”

“생각도 못 하냐?”

“내가 너를 아는데! 솔직히 엄청 고민했잖아! 너 이 회사에서 정년퇴직하고 싶다며! 왜, 곽 과장처럼 이 부장 똥꼬 빨아 보지?”

“왜! 너도 아까 장난 아니던데! 저는 부장님이 사수라서 정말, 정말, 정말 좋았던걸요? 제가 회사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부장님이잖아요. 웃기고 있네! 너 나한테 이 부장 욕한 걸로 따지면 책 한 권이 뭐야! 열 권도 쓰고도 남을걸?”

“…….”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은찬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고 동시에 다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둘도 없는 친구에서 배신자로 전락해 버린 김동만이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들어 보니까. 이 부장도 너한테 조금 관심은 있는 것 같던데. 그냥 둘이서 잘해 보는 게…….”

“지랄하네. 너 같으면 너 갈구던 군대 선임이 나중에 용서해 달라고 하면 할 거냐?”

“죽을래? 군대 이야기는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다. 수인은 면제라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게 엄청 예민한 문제거든? 내가 말했지? 내 선임. 그 새끼 사회에서 만나면 죽여 버린다고.”

“그러니까. 내 말이. 나도 그런 심정이거든? 애는 애고 이주한 그 새끼는 그 새낀 거야. 너, 경고하는데! 그 새끼한테 다 불어 버리면 친구고 뭐고 없어! 고양이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 알지? 검은 고양이 저주가 제일 무서운 법이다!”

“……너 빼앗아 간다던데?”

“그 새끼는 또 어디서 나오는 근자감이야? 다들 떠받들어 주니까. 죄다 지 눈길 하나면 넘어가는 줄 아나. 김동만, 똑똑히 들어! 다음에 또 그 소리 하거든 그냥 이거나 먹여 버려!”

은찬은 조용히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그러자 동만이 킥킥 웃는다.

“내가 그 새끼 밑에서 1년을 존버했는데 두 달을 못 참을 것 같아? 자고로 존버가 승리한다 이거야. 개소리도 듣다 보면 정겨울 때가 있으니까.”

“……나 회사 오래 다니고 싶은데.”

“다녀. 누가 뭐래냐?”

“아니 뭐……. 회장 손자한테 찍히기 싫다고.”

김동만의 솔직한 속내에 은찬은 활짝 웃으며 현실을 알려 주었다.

“너하고 나하고 이미 한배를 탄 몸이거든? 그 개 같은 성격에. 우리 둘이 자기 속였다는 거 알면 가만히 있겠냐? 두 달 동안 그냥 이대로 쭉 밀고 나가는 게 오히려 나아. 다시는 그딴 개소리 하지 못하게 토할 정도로 닭살을 떠는 수밖에.”

“그게 먹힐 거 같냐? 아까 이 부장이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니가 직접 들어 봤어야 해. 그래야지 이런 말이 안 나오지.”

김동만은 여전히 이주한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지만 은찬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지가 그래 봤자 뭐! 어쩔 건데? 너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해. 배신하면 진짜 끝이야!”

은찬의 다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동만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따라 질문이 참 많다.

“이 부장도 수인이잖아. 표범.”

“근데?”

“귀 봤어?”

“봤지.”

“꼬리도?”

“그게 왜?”

“완전 뱅갈 고양이 같겠다아아아! 나중에 나도 한번 만지게 해 주러나?”

미친놈……. 그 전에 널 물어 죽여 버릴걸?

동만은 두 눈을 반짝이며 뱅갈 고양이에 대한 예찬을 펼친다. 이주한과 벵골 고양이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데.

표범이란 말이다. 육식동물 표범. 이 멍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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