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가 내렸다.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비는 은찬의 마음을 대신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이주한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놀란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4일째 넋이 나가 버린 채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이까지 낳겠다고 마음먹은 은찬이었건만 고작 두 달 뿐인 이주한의 괴롭힘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휴직계도 생각해 봤지만, 이주한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때려치울까?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넣어 둔 사직서를 꺼냈다가 넣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런 은찬을 관찰하던 동만이 어깨를 툭 치며 나가자는 눈짓을 던졌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은찬은 앞장서는 동만의 뒤를 따랐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 탓에 옥상 정원은 이용할 수 없었다. 대신 1층 로비에 있는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구석진 자리에 멍하게 앉아 있으니 동만이 오렌지 주스 두 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 사 오지. 나 시원한 커피 마시고 싶은데.”
“지랄. 주는 대로 처먹어. 애한테 커피가 좋겠냐?”
“아, 왜에! 나 커피 마시고 싶다니까?”
동만은 은찬의 투정에도 오렌지 주스를 내밀며 혀를 찼다.
“그냥 처먹어! 이게 더 비싸니까! 비싼 거 사 줘도 지랄이야. 누가 너 생각해서 사 왔겠냐? 곧 태어날 귀엽고 사랑스러운 새끼 고양이를 위해서 투자하는 거지. 그나저나, 며칠째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내가 뭐.”
오렌지 주스는 은찬의 입에 너무 시다. 고양이가 오렌지 주스 먹는 거 봤냐? 따지고 싶지만 육천 원짜리 오렌지 주스의 가격에 입 다물고 한 모금 마셨다. 역시나 입안 가득 쏟아지는 신맛에 은찬은 오만상 얼굴을 찌푸렸다.
“아닌 척하기는. 회사에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렇고! 내내 한숨만 푹푹 내쉬고! 뭐? 왜에? 이 부장 때문에 그래?”
“알면서 왜 물어! 입 아프게.”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동만이 피식 웃는다.
“왜 벌써 지레 겁을 먹어. 설마 부장이라는 직함까지 달았는데 그때처럼 너 부려 먹겠어?”
“설마가 사람 잡지. 그때 그 새끼 눈깔 못 봐서 그래. 나 잡아먹을 것처럼 보였거든?”
“그래서 쫀 거야? 부장이 너 괴롭힐까 봐 겁나서?”
“쫄기는 누가.”
쫄지 않았다. 다만 그때처럼 이주한의 말을 다 따를 자신이 없는 것뿐이다. 욱해서 그 자식 멱살이라도 잡는 날에는 이 회사와 영원히 안녕일 테니까.
“눈 딱 감고 두 달만 참아 봐. 어차피 이거 원래 마케팅 2부서가 어느 정도 진행한 거고 우리는 거기에 숟가락만 딱 얻는 꼴이니까. 너 마케팅 2부서 애들 오가다가 우리 쳐다보는 눈깔 못 봤냐? 진짜 죽일 듯이 보더라. 이 부장이 무슨 생각으로 우리 부서를 밀어 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변덕에 우리도 상여금 한번 받아 보자. 어차피 너 이제부터 돈도 많이 필요하잖아.”
김동만이 연애는 영 꽝이지만 회사 돌아가는 눈치는 누구보다 빨랐다. 은찬이 컵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녀석은 적극적으로 다독였다.
“정 그렇게 걱정되면. 중간에서 내가 커버 쳐 줄게.”
“웃기고 있네. 네가? 어떻게?”
“너 야근하면 나도 같이 야근하지 뭐.”
“됐거든요. 너나 잘하세요. 괜히 나섰다가 그 자식한테 찍히지 말고.”
은찬의 경고에 김동만은 오렌지 주스 한 모금을 마시며 싱겁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찍힐 일이 뭐가 있어. 너나 성깔 좀 죽여. 이 부장이 뭐가 무섭냐? 같은 수인이잖아. 표범이라며. 표범도 고양잇과 아니야? 덩치 큰 고양이쯤 되려나.”
김동만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표범을 덩치 큰 고양이쯤으로 생각하다니. 은찬은 혀를 끌끌 찼다.
“그런 개념이 아니거든? 걔들은 진짜 포식자라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면…….”
“야! 이주한!”
은찬이 말을 더 이으려고 할 때였다. 로비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시선이 쏠렸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로비 한 가운데서 웬 잘생긴 남자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울먹이는 남자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된 상태였다.
이 회사에 이주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있었나? 자연스럽게 은찬과 동만은 상대방 남자를 쫓았다. 역시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이주한이 맞았다.
“회사야. 여기까지 쫓아와서 이러면 너만 더 구차해져.”
“구차해도 상관없어!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왜 헤어져야 하는데, 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이주한은 주위의 시선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거만하고 차가운 표정. 그는 온정이라고는 없는 시선으로 한때 애인이었을 남자를 바라보며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재미없어졌으니까.”
그리고 남자를 남겨 두고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뒤이어 그를 쫓아가던 남자는 경비원들에게 제지당해 끌려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구경거리에 동만과 은찬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먼저 정신을 차린 은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표범이라는 족속들이 저래. 우리가 겉모습은 사람이라도 속은 아직 동물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단 말이지. 나 같은 피라미하고 표범은 급 자체가 틀려. 봤지? 재들은 피도 눈물도 없어. 한번 노리는 먹이는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가 흥미가 식으면 버릴걸? 그리고 먹잇감을 가리지 않아요. 저렇게 버려지는 애들이 얼마나 많겠어. 그러니까 네가 생각하는 고양잇과는 아니라는 점 똑똑히 새겨 둬. 착하고 귀엽고 깜찍한 나와는 아주 다르다는 걸 염두에 두고. 그리고 너 나 야근하면 같이 해 주기로 한 거 잊지 마! 약속한 거다!”
“뭐냐. 곧 그만둘 것처럼 징징거리더니.”
동만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은찬을 응시했다.
“야. 내가 이제 입이 하나 더 붙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만두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깨를 으쓱인 은찬은 저도 모르게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서 또 오만상을 지었다.
“아, 맞다. 너 그 소식 들었어?”
“으…… 써. 뭐?”
“오늘 회식한다는데?”
“오늘? 왜? 무슨 이유로? 곽 부장 기분 좋은 일 있어? 메뉴는 뭔데? 이왕 먹는 거 참치회 먹으러 가면 안 되나.”
뜬금없이 떠오른 참치회 생각에 은찬은 입맛을 다셨다.
“이 부장이 마련한 친목 도모 자리라던데?”
은찬은 오렌지 주스를 입안에 머금고 있다가 그대로 다시 뱉어 버렸다.
“아씨……! 더럽게! 너 미쳤어?”
“나 오늘 조퇴다.”
“어?”
“아파서 조퇴할 거라고! 내가 미쳤냐? 다음 주부터 지긋지긋하게 얼굴 볼 건데 오늘 저녁에 또 보게? 밥 먹다 체할 일 있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은찬은 당황한 동만을 버려두고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물론 사무실 안에 들어간 직후부터 아픈 척 연기를 펼쳤다.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며 과장님께 병가를 냈고, 어렵지 않게 회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홀로 기숙사로 돌아온 은찬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던 늦은 저녁. 곽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찬은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지만, 직장 상사의 전화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은찬 씨 몸은 좀 어때?]
“아, 예……. 자고 일어나니까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네요. 하하, 하.”
[그래? 그럼 잠시 나와서 여기 앉았다 갈 수 있을까?]
“예?”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은찬의 반문에 곽 과장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부장님이 팀원 단합을 위해 마련한 자리인데. 은찬 씨만 빠져서 내가 좀 그래. 무슨 말인지 알지?]
아니요.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주한 그 새끼한테 얼마나 잘 보이려고 이러세요. 그냥 아프다고 할걸. 열이 펄펄 끓는다고 할걸. 은찬은 빈말조차 하지 못한 제 혀가 원망스러웠다.
[나올 수 있어? 기숙사지? 여기 기숙사 근처 한우집인데.]
거듭 말하는 걸 보니 안 나가면 내일 죽일 기세로 째려볼 게 뻔했다. 소심한 곽 과장이라면 며칠 동안 그러고도 남았다. 은찬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
“……잠시 앉아 있다 오죠, 뭐.”
[그래, 고마워. 이런 걸로 기분 나빠 하지 마. 우리 오래 볼 사이잖아. 안 그래?]
“그럼요. 전혀요. 괜찮습니다.”
말투와는 반대로 은찬은 무척이나 기분이 저조했다. 검은색 꼬리가 소파를 탁탁 치며 기분을 표현하고 있었다. 예의상 좋게 대답하고 통화를 끊자마자 저도 모르게 손톱을 세워 소파를 박박 긁었다. 김동만이 장만한 소파지만 다행히 인조 가죽이다.
“하아……. 옷이나 갈아입자.”
까라면 까야지. 말단 사원 주제에 어쩌겠어.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은찬은 간단하게 흰색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걸치고 오피스텔을 나섰다. 그나저나 고기 냄새에 토하면 어쩌지. 그 걱정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은찬은 자리에 앉자마자 고기를 청소기처럼 흡입했다. 한우라서 그런지 입안에 넣자마자 살살 녹았다.
“어쩐 일이냐? 회식 싫다고 도망간 놈이?”
동만은 소리 없이 나타난 은찬을 보자마자 핀잔부터 던졌다. 원래 회식 날 도망가는 건 직장인 사이에서 반칙으로 통했지만 별수 없었다. 얼굴에 철판 깔고 은찬은 불판 위에서 익어 가는 고기에 시선을 고정했다.
“비싼 거라서 그런지 고기가 살살 녹네, 녹아! 야. 과장은? 나 왔다고 얼굴도장 찍어야 하는데 안 보이네?”
“과장이 불렀어? 아프다고 조퇴까지 한 놈을?”
“그러게 말이다. 이 부장이 팀원들 위해서 마련한 자리인데 한 명 빠지면 자기 체면이 어쩌고저쩌고하더라.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 안 나오고 배기겠냐? 그 성격에 내가 안 나오고 버텨 봐. 한 달 내내 구시렁거릴걸? 얼굴도장만 후딱 찍고 가려고.”
허겁지겁 고기를 먹는 은찬을 말없이 바라보던 동만이 제 앞에 있던 음료수 잔을 내밀었다.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밥 안 먹었어?”
“속에서 받아 줘야 먹지. 곽 과장은 사람 불러 놓고 어딜 간 거야. 야! 이 부장은 왔다 갔냐?”
“속 안 좋다는 놈이 며칠 굶은 놈처럼 고기를 처먹냐? 잠깐 화장실 갔거나 아니면 담배 피우러 갔겠지. 아쉽다, 아쉬워. 좀 전까지 저기서 곽 과장이 이 부장한테 잘 보이려고 알랑방귀 뀌는 거 봤어야 했는데.”
동만이 손가락으로 은찬이 앉은 테이블의 완전 반대편을 가리켰다. 곽 과장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이도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곽 과장의 행동을 팀원들은 술안주처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그러다 순간 다른 화제로 전환이 됐는데 역시나 낮에 있었던 사건이 화두에 올랐다.
“이 부장님 진짜 남자랑 사귄 거 맞아요? 오늘 회사 로비에서 난리 났었다면서요?”
“에이, 몇 번이나 말해. 은찬이하고 나하고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은찬과 사선 방향으로 앉은 여직원이 입을 떡 벌리며 감탄사를 연달아 내뱉었다.
“세상에! 미쳤다……. 그렇게 안 봤는데 게이였어?”
“아닌데. 내가 듣기로는 여자 좋아한다고 알고 있는데?”
옆에 여직원이 불쑥 끼어들어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영업부 쪽에 아는 사람이 미팅차 호텔 커피숍에 갔다가 이 부장이 여자랑 호텔로 올라가는 거 봤다던데? 진짜, 완전, 예뻤대!”
“그럼 오늘 그건 뭐야? 지금 그것 때문에 난리 났잖아. 그 남자도 엄청 잘생겼다던데?”
여자 직원들은 이주한이 누구를 사귀는 것인지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싶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주한은 원래도 이런 회식 자리에서 제일 많이 거론되는 사람이었다. 한때 팀 동료였던 그가 부장이 되고 회장의 손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제일 놀란 건 팀원들이었다. 그동안 이주한 앞에서 거리낌 없이 회사의 불만 사항을 지껄였기 때문이다. 특히 곽 과장은 대놓고 회장 욕도 했었다.
“게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우리랑 무슨 상관있다고.”
그녀들의 열띤 논쟁을 눈치 없는 동만이 불쑥 끼어들어 중재시켰다. 이럴 때는 가만히 놔두는 게 좋을 텐데. 하여튼 눈치 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
“동만 씨. 왜 상관이 없어? 혹시 동만 씨도 게이 아니야? 여자 못 사귀는 게 아니라 안 사귀는 건가?”
“아니거든요!”
“괜찮아, 동만 씨. 팀원들끼리 그런 거 감추면 불편하니까. 커밍아웃할 거면 마음 편하게 해. 우리는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이주한의 연애사가 어째서 김동만의 게이설로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화의 주제는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게나 흘러갔다.
“우리 이 부장님 게이면 진짜 아까운데. 잘생긴 DNA는 이어 가게 해 줘야지. 이 부장님 아이면 얼마나 잘생겼겠어. 안 그래?”
“그러니까. 김동만 씨는 게이여도 상관없는데, 난 우리 부장님처럼 잘생기고 돈 많은 사람은 자식을 많이 낳아야 한다고 봐.”
은근슬쩍 자신과 이 부장을 비교하는 그녀들의 대화 내용에 화가 났는지 동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앞에 놓인 빈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우고 연거푸 두 잔을 마신 녀석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불안해진 은찬은 고기를 씹다 말고 녀석을 빤히 바라봤다.
안 돼! 말하지 마, 김동만!
“이미 애 있……!”
“야, 김동만!”
불쑥 튀어나온 동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찬이 녀석의 벌어진 입안으로 길게 썰린 오이와 당근을 쑤셔 넣었다.
“벌써 술 취했냐? 안 되겠다. 너 잠깐 나갔다 오자!”
“…….”
그대로 김동만의 멱살을 잡고 방을 나섰다. 회사 근처 고급 한우집은 평일 저녁임에도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일단 동만을 끌고 화장실로 향한 은찬은 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좀 전에 김동만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뒷말을 듣지 않아도 예상되는 바였다.
“너 미쳤어?”
“…….”
동만은 제 잘못을 아는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거칠게 머리를 긁적이던 은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 부장 그 새끼 수인이라는 것도 말하지? 너 그거 말하면 회사 잘릴걸?”
“……미안.”
“너 내가 쉽게 말한다고 지금 내 상황이 별거 아닌 거 같아 보이지? 아니거든! 지난 며칠간 머리가 터질 것처럼 힘들었거든? 지금도 입덧 때문에 살이 쫙쫙 빠지는 거 안 보여? 여자 혼자 애 낳아서 키우는 것도 힘든 세상에 난 수인이야! 그것도 남자 수인!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애 낳는다고 결심한 거 같아?”
화장실에 은찬의 목소리가 쩌렁 쩌렁 울렸다. 은찬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버럭 소리치자 동만은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마음 약한 녀석이 금방이라도 울듯이 눈가가 촉촉이 젖어 가는 걸 보며 은찬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긴 한숨과 함께 화장실 내부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러려고 온 건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고 말았다. 안쓰러울 정도로 어깨가 축 처진 동만을 버려두고 은찬은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미안하다, 김동만. 연기 좀 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렇게 죽을 만큼 심각하게 고민한 건 아니다. 전혀 예상 못 한 임신에 놀란 것 반,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반. 딱 그 정도랄까.
은찬에게 지금 제일 큰 고민은 배 속에 있는 콩알만 한 녀석이 아니라 이주한과 두 달을 어떻게 견디느냐였다.
“한번 겁줄 필요성은 있었지.”
말도 안 되는 연기로 겁을 준 건 미안했지만, 너무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녀석에게는 충격 요법이 필요한 법이었다.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굳게 닫힌 화장실 문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벌써 10시가 넘었다. 곽 과장에게 얼굴도장 찍고 가려고 했는데 이대로 저 녀석과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조심해야 할지 진지하게 대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사람 없는 곳을 찾다 보니 가게 뒤편까지 발길이 닿았다. 야외 주차장 겸 흡연실인 그곳은 작은 조명 하나만 있을 뿐 사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하필 골라도 이런 날 회식을 하냐. 아무튼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니까. 은찬은 속으로 이주한 욕을 하며 괜히 바닥을 운동화로 툭툭 쳤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곽 과장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씨…… 안 받네. 이럴 거면 왜 오라고 한 거야. 짜증 나게.”
“내가 부르라고 했으니까.”
혼잣말로 던진 물음에 누군가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가 누군지 따위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은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씨발! 애 떨어질 뻔했잖아!”
심장을 부여잡고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보니 이주한이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그가 떡하니 서 있다.
“……했잖아?”
이주한은 웃음기가 전혀 없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고 은찬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필 만나도 여기서 만나냐.
“……요. 사람이, 사람이 없는 줄 알고 좀 놀래서…….”
말끝을 흐리며 은찬은 그에게서 한걸음 멀어졌다. 왠지 가까이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저기서 담배 피우고 있었거든. 누구 좀 기다리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
그가 눈짓으로 가리킨 곳은 비를 피할 만한 공간에 의자 하나가 있었다. 누굴 기다리고 있었는지 일부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가 표범 아니라고 할까 봐. 은찬이 이곳에 제 발로 들어오는 것을 숨죽여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주한은 아까부터 살벌한 시선으로 은찬을 노려보았다.
“몸…몸이 좀 안 좋아서.”
“도망치는 게 습관인가 봐?”
“네?”
“그때도 그러더니.”
“…….”
쏟아지는 빗소리가 커졌다. 이주한과 나란히 서서 그 비를 바라보던 은찬은 그가 왜 이러는 건지 의도를 이해할 수 없어서 침묵했다. 분명 워크숍 때 일을 말하는 뉘앙스였다. 석 달이 지난 이 시점에? 이제 와서 그 일을 들먹이는 건 늦은 감이 있는 거 아닌가?
“저기, 부장님.”
“말해. 눈치 보지 말고.”
그는 은찬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쏟아지는 비를 감상하고 있었다. 잠시 이어진 정적 속에서 은찬은 이주한이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고 붙이는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혹시 그때의 하룻밤으로 자신이 임신한 걸 알고 이러는 건 아닐까.
은찬은 차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기, 그러니까……. 워크숍 때, 혹시 그때.”
“오늘 진짜 몸이 안 좋았던 거 아니지? 나 때문에 도망간 거지?”
너무 정확하게 콕 집어서 말하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순간 은찬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임신 사실도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입안이 바짝 말라 갔다.
“유은찬.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
“예……?”
이건 백 프로 들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찬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혹시 지우라고 하면 어쩌나 해서. 아니면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까 봐.
“빙빙 둘러말하는 건 성격에 안 맞으니까 솔직하게 말할게. 그날 오랜만에 재미 좀 봤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만큼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서.”
“…….”
“은찬 씨도 마찬가지잖아. 네 꼬리가 내 꼬리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잖아. 안 그래?”
이주한의 말이 길어질수록 요동쳤던 은찬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이 망할 표범 자식이 뭐라고 하는 거야. 멍하니 듣고 있던 은찬은 주한의 말을 한참 뒤에야 이해했다.
“오늘 어때? 호텔 예약해 뒀는데.”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꽂고 은찬을 힐끔거리는 그 시선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이 자식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보고 있었던 거다.
“부장님.”
“너도 싫지 않잖아. 어차피 수컷이라 임신할 걱정도 없을 테고. 기간은 내가 질릴 때까지. 그때까지 같이 놀아주면 섭섭하지 않게 보상해 줄 테니까.”
“…….”
은찬은 순간 주먹으로 이 개자식의 명치를 내려치는 상상을 하고 말았다.
“왜? 자존심 상해? 연애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을 때마다 섹스를 하자는 것뿐인데. 고양이 주제에 고상한 척하는 건 아니지?”
은찬은 섹스 파트너를 하자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눈앞의 인간을 빤히 쳐다봤다. 이 자식이 지금껏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을지 안 봐도 뻔했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지금 섹스 파트너 하자고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그 단호한 대답에 은찬은 손을 뻗어 이주한의 입에 있던 담배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손으로 짓이겼다. 손바닥이 뜨거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죄송하지만 다른 사람 알아보셔야 할 것 같네요.”
“왜? 조건이 약해? 차라도 한 대 뽑아 줘?”
“아니요.”
“그럼? 원하는 거 말해 봐. 나도 쉽게 결정한 건 아니거든. 그날 이후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계속 눈에 밟혀서 일부러 마케팅 1부서까지 내려간 거니까.”
미친놈. 새로운 방법으로 괴롭히려고 이러는 건가. 은찬은 그를 경멸스럽게 쳐다봤다. 이런 놈을 멋있다고 한 좀 전의 팀원들이 불쌍했다.
“그때 일은 술 취해서 서로 실수한 거로 치죠.”
“넌 그렇게 생각해. 난 싫으니까.”
1년 내내 은찬을 괴롭히더니 섹스 한 번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은찬은 이주한과 마주친 시선에 어색하게 웃었다. 어떻게 하면 이 표범 자식한테 빅 엿을 던질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찾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그 방법을 찾았다.
“부장님 저 애인 있어요.”
“없는 거 알아.”
그가 피식 웃으며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역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하는가 보다. 그 모습이 마치 패션 잡지 한 페이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멋졌다. 하지만 장미에도 가시가 있듯이 저 표범은 날카로운 송곳니와 더불어 인성도 쓰레기였다.
“진짠데. 저 있어요, 애인. 아. 우리가 비밀 연애해서 모르시겠구나. 저 사내 연애 중입니다. 김동만하고 사귀거든요.”
“김동만? 내가 아는 그 김동만?”
“네, 그 김동만이요. 저하고 1년 넘게 같이 사는 그 ‘김동만’.”
툭. 그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팬 이주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은찬은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얼마 안 됐어요. 워크숍 갔다 오고 며칠 뒤에 사귀었으니까. 지금 부장님이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곽 과장님께는 저 왔다고 해 주세요.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주한을 뒤로하고 은찬은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미친놈. 어디서 개소리야? 일단 사귀는 상대가 있다고 했으니까 더 이상 그런 소리는 하지 않겠지.
아무래도 김동만과 더 입을 맞출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자신을 또 이런 식으로 팔았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은찬은 근래 들어 처음으로 기분이 좋았다.
조금 전 이주한 표정을 김동만도 봤어야 하는 건데. 은찬은 활짝 웃으며 동만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 멀리서 표범이 노려보는 것 모른 채.
***
목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주말까지 계속 내렸다.
토요일 늦은 아침. 여느 주말과 다름없이 동만과 작은 식탁에 마주 앉은 은찬은 배달 음식으로 아침 겸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자다가 막 일어난 그대로 눈곱도 떼지 않은 채 앉은 두 사람은 불필요한 말은 생략하고 묵묵히 밥에 집중했다.
하지만 은찬은 음식이 좀처럼 목구멍에서 넘어가질 않았다.
“너 오늘 뭐 해? 바빠? 약속 있어?”
순간 오늘 해야 할 일이 떠오른 은찬이 국을 한 모금 떠먹으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동만의 눈치를 살피며.
“아니. 별일 없는데 왜?”
“나랑 어디 좀 가자.”
“어디? 야, 이 집 김치찌개 맛있게 잘하네. 어디야? 새로 생긴 데야?”
목적지보다 김치찌개에 더 관심이 많은 동만은 이어진 은찬의 말에 움직임이 멈췄다.
“산부인과.”
“…….”
“비뇨기과에서는 진찰이 안 된데. 산부인과로 가야 한대. 같이 가 줄 거지?”
쨍그랑. 동만의 손에서 수저가 떨어졌다. 경악한 녀석이 입안에 든 것을 미처 다 삼키지도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미쳤어? 내가 거길 왜 따라가!”
“그럼 나 혼자가? 나 혼자 가기 쪽팔린단 말이야!”
“그럼, 나는? 나는 안 쪽팔리냐? 안 해! 못 가! 내가 왜 가!”
동만이 강하게 거부 반응을 일으켰지만 은찬은 굴하지 않고 세게 받아쳤다.
“야, 치사하게 이러기야?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냥 따라가 주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왜! 이렇게 귀찮게 할 거면 그냥 이 부장한테 사실대로 말해! 섹스 파트넌가 뭔가 그거 하자고 했다며! 딱 보니까, 그 자식도 너한테 어느 정도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자. 여자하고 키스도 제대로 못 해 본 놈한테 산부인과에 같이 가 달라는 게 말이 되냐?”
지금껏 여자와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 본 김동만은 진심으로 화를 냈다.
이러면 곤란한데…….
사실 회식에서 돌아온 그날 밤, 은찬은 동만에게 사실대로 고백하지 못했다. 단지 이 부장이 은찬에게 섹스파트너 제의를 했다는 단편적인 부분만 넌지시 던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김동만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이 부장 같은 놈은 성병에 걸려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감히 유은찬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냐며 말이다. 은찬을 평소에 아랫도리 가볍다고 타박하던 놈이 그런 식으로 감싸 주는 모습에 김동만을 다시 보게 됐다.
일단 분위기상 끝까지 말을 하지 못했지만, 상황 설명을 잘하면 이해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고작 산부인과라는 단어에 이럴 줄이야. 아무렇지 않게 오케이 할 줄 알았더니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다.
“언제는 이 부장 같은 놈하고 상종도 하지 말라면서! 그런 놈하고 엮이지 말라면서! 왜 말이 바뀌어?”
“네가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 지껄이면서 사람 짜증 나게 하니까 그렇지! 안 그래도 나도 이 부장 때문에 기분 이상하거든? 야, 나 어제 이 부장하고 같이 엘리베이터 탔었거든? 그런데 그 자식이 날 이상하게 보더라니까? 뭐랄까. 사람을 막 위아래로 훑는다고 해야 하나?”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은찬은 동만의 말에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 원흉이 자신이라는 걸 밝힐 때가 온 것 같았다.
“한참 뚫어지게 보다가 나중에 커피 한잔하자고 하더라니까! 우리가 언제 친했다고. 안 그래? 진짜 세상 불공평하다니까. 왜 그런 쓰레기들한테만 여자가 꼬이냐고! 여자뿐만이 아니라 남자도 꼬이잖아! 역시 사람은 외모지? 그치? 나도 이참에 성형외과 가서 보톡스나 맞아볼까?”
“……저기. 동만아.”
“너 그날 이 부장한테 그거 안 한다고만 말한 거 맞지? 혹시 성깔 못 죽이고 주먹으로 한 대 내려친 건 아니지?”
스스로 던진 농담에 동만은 싱겁게 웃으며 다시 밥 먹기에 여념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은찬은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망설였다. 김동만 어깨너머 먹구름이 꼭 은찬의 마음 같았다. 마주친 시선에 억지로 웃자 녀석이 짧게 혀를 찼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야, 아무리 불쌍한 척해도 나 같이 안 갈 거야.”
“실은…… 있잖아.”
“있긴 뭐가 있어. 밥은 왜 먹다 말아. 밥 넘어갈 때 좀 더 먹어 둬. 너 어제저녁에 보니까 깡말라서 배만 나왔더라. 며칠 됐다고 티가 조금 나긴 나네.”
짜식. 고맙게 계란말이 하나 남은 걸 은찬의 밥 위에 올려준다.
동만의 말대로 석 달 동안 밋밋했던 은찬의 배는 며칠 사이에 조금 부풀어 있었다. 그렇다고 많이 나온 건 아니고 마른 근육질 몸에 배만 작게 볼록 나온 모양새랄까. 옷으로 얼추 가릴 수 있는 정도였다.
“많이 먹어. 홑몸도 아니잖아.”
“저기, 그날…….”
“그날? 언제?”
“아니 왜. 이 부장 그 개새끼가 나한테 개소리 한 날. 그날…….”
“그날 왜? 너 진짜 사고 친 거야? 이 부장한테 무슨 짓 했어? 그래서 그 자식이 나 그렇게 쳐다본 거야? 너 대신 복수하려고?”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김동만은 불똥이 자신에게 튀었을까 봐 걱정하는 눈치다. 미안하지만 이미 김동만과 유은찬은 한배를 탄 몸이었다. 그걸 녀석만 모르고 있다.
“……내가 이 부장한테 애인 있다고 했거든.”
“애인? 너 애인 있었어? 없잖아. 갑자기 그런 건 어디서 생겼대?”
김동만은 남 일처럼 말하며 픽 웃었다. 그 얼굴과 마주 한 은찬도 따라 웃으며 고백했다.
“너.”
“어?”
“너라고. 너랑 사귄다고 했다고.”
“어……?”
“사귄 지 얼마 안 됐다고 했어. 사내 비밀 연애라서 조용히 사귀고 있다고.”
그 말을 던진 직후 은찬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방문을 잠갔다. 정확히 10초 뒤 미친 듯이 뛰어온 동만이 방문 손잡이 거칠게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유은찬! 너 이거 당장 안 열어? 야! 나 아직 여자하고도 연애 한번 못 해 봤는데! 그런 놈을 게이로 만들어? 야, 이거 당장 열어! 열지 못해? 유은찬……!”
“미안해! 내가 얼마나 열받았으면 그랬겠냐? 두 달만 참아 주라! 어차피 두 달 뒤에는 자주 안 볼 사이잖아.”
“내 인권은? 내 순결은! 사내에 소문이라도 나면 어떻게 할 건데!”
문 너머의 김동만이 자신은 여자가 좋다며 목 놓아 울었다. 사내자식이 고작 그런 일로 운다. 이번에는 조금 죄책감이 들었기에 은찬은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내 귀 만지게 해 줄게.”
“됐거든!”
“내 꼬리도 만지게 해 줄게.”
“…….”
문 너머 김동만은 대답이 없다. 갈등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여튼 고양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어쨌든 한고비 넘긴 은찬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이주한은 왜 김동만에게 그랬던 걸까. 같은 팀원이었을 당시에도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사이였다. 그 의도가 무엇일지 잠시 생각하던 은찬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알 게 뭐야. 이주한의 그 변덕이 어디 가겠어? 주말까지 그 자식을 떠올리며 끙끙 앓기는 싫었다. 은찬은 굳게 닫힌 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리고 소파에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 동만의 옆에 슬그머니 앉았다.
체념한 걸까?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은찬은 불현듯 그날 일이 떠올랐다.
그날. 개다래 술에 취한 유은찬을 끌고 자신의 방에 들어간 이주한은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다짜고짜 입술을 밀어붙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허락도 없이 들어온 혀는 난잡하게 입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평소 알고 있던 이주한의 모습은 없었다. 능수능란한 키스 한 방에 은찬은 등줄기부터 달콤한 전율이 흘렀다. 개싸가지 이주한의 키스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흥분한 몸은 그와 바짝 밀착한 채 아래를 비벼 댔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미 그의 것은 딱딱하게 발기된 상태였다.
‘유은찬. 이제 어떻게 해 줄까.’
엉덩이를 우악스럽게 움켜쥐면서 던지는 속삭임에 몸에 난 털들이 곤두섰다. 그때 위험을 감지해야 했던 건데. 본능이 위험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이미 발정 난 은찬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상대는 1년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좆같은 사수 이주한. 사수였을 당시 그는 은찬에게 말끝마다 생각하면서 일하냐는 개소리를 습관적으로 퍼부었다. 출근부터 퇴근 시간까지 그와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던 나날들……. 그 짧은 순간 그 모든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은찬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180이 넘는 장신에 운동선수 같은 몸매. 얼굴도 연예인급인 것도 모자라 회장 손주이기까지 한 이주한은 모든 게 불공평할 정도로 완벽했다. 개 같은 인성 빼고는 말이다.
은찬은 이런 완벽한 남자에게 침대 위에서 이불 킥 할 정도의 흑역사를 남기고 싶었다. 사실 이주한도 술에 꽤 취한 상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인 유은찬에게 이런 키스를 퍼붓는 것을 보면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사수로 있을 당시 1년간 야근을 도맡다 시 피한 은찬은 이주한 덕분에 연애다운 연애는 해 보지도 못했다. 원래 싫은 놈과는 몸을 섞지 않는 주의지만 개다래 술에 힘과 복수라는 원념이 은찬을 부추겼다.
‘남자랑 해 봤어요?’
‘없을 것 같아?’
그가 은찬의 귀를 살짝 깨물며 으르렁거렸다. 사수였을 때 매번 짜증만 냈던 터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이주한은 자신의 체중으로 은찬을 짓누르며 목을 깨무는 시늉을 했다. 흡사 맹수가 사냥감의 목숨을 끊으려는 행위 같았다. 그 촉감에 은찬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인은?’
‘수인이라고 다를 게 뭐 있나. 안 그래? 넣는 건 똑같을 건데.’
예고도 없이 바지 속으로 들어온 단단하고 굵은 손가락이 그의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파고들었다. 짧은 신음과 함께 은찬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매달렸다.
‘뭐야, 벌써 젖었잖아.’
‘부장님도 단단해졌는데요?’
은찬이 숨을 들썩이며 바지 위로 부풀어 오른 이주한의 성기를 매만졌다. 그 손길에 이주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은찬을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멍청한 고양인 줄 알았더니. 꽤 하는데?’
‘아직 감탄하기는 이른데. 좀 더 맛보고 그런 소리 하시죠?’
남자에게 안기는 것이 익숙한 수인 유은찬과 남자를 안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 이주한.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달려들었다. 거칠게 서로의 옷을 벗기며 침대 위로 뛰어들었고, 은찬은 그의 손길이 몸을 지나갈 때마다 쾌감에 거칠게 헐떡였다.
‘다리 벌려 봐.’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어 대던 그가 가볍게 혀로 유두를 튕기며 명령했다. 복수라는 명목으로 시작한 잠자리지만 이미 즐기기 시작한 터였다. 은찬은 흠칫흠칫 몸을 튕기며 그가 시키는 대로 다리를 넓게 벌렸다.
‘원래 고양이는 다 이래?’
진득하고 투명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발기한 성기 끝을 은찬의 배 위에 비비며 이주한은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었다. 엉덩이 구멍으로 성기가 아닌 손가락 하나를 넣고 느리게 움직일 때마다 은찬은 엉덩이를 들썩였다. 애를 태우는 것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그만 지껄이고 좀 넣죠? 다들 그러던데. 내 맛이 끝내준다고.’
은찬이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도발하자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좀 전까지는 흥미로운 시선이었는데 순간 날카롭게 눈을 가늘게 뜨고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놈이 앞에 있는 걸 여태 몰랐네.’
‘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다짜고짜 성기를 엉덩이 사이로 쑤셔 넣었다. 딱딱하고 뜨겁고 크고 두꺼운 그것이 작은 구멍 안으로 단번에 파고들었다.
크다. 보는 것보다 더 컸다. 사람의 평균 사이즈가 아닌 그것은 내벽 깊숙이 파고들고서 숨 쉴 틈도 없이 찍어 대기 시작했다.
‘하윽! 아, 아, 아아! 잠, 잠…… 하읏! 으……!’
격렬한 허리 짓에 은찬은 힘에 겨워하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였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온몸은 마구잡이로 찍어 대는 허리 짓에 전율하기 시작했다.
‘아, 아아……! 하아, 하아.’
퍽. 퍽. 퍽. 그가 박을 때마다 젖은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크기가 너무 크고 길어서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토악질이 올라왔다. 박고, 박히고 또 박히고. 허리가 녹아내릴 만큼 박아 대는 이주한은 지친 기색이 하나 없었다.
처음 그를 도발한 기세 따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소리를 얼마나 질러 댔는지 목은 쉬어 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행위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점점 더 밀려오는 강한 쾌락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 아아앗! 하아, 그만! 그만!’
은찬은 울부짖으며 그의 어깨를 밀어 냈다. 그럴수록 그는 힘껏 허리를 밀어붙였고 내벽은 수축하며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흠칫흠칫. 온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은찬은 울부짖었다. 젖꼭지를 비틀며 깨물던 그의 애무에서 고통은커녕 쾌락만 피어났다. 한입 가슴을 크게 베어 물때마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피부를 뜯어 먹는 느낌이 들었다.
쾌감에 젖은 은찬은 그 감각에 전율했다. 그러다 의지와 상관없이 귀와 꼬리가 튀어나왔다. 지금껏 많은 파트너와 섹스를 했지만 이런 일은 전무했다. 여전히 삽입한 채로 반쯤 정신이 나간 은찬이 헐떡이며 그에게 애원했다.
‘아, 파. 거기 그만…해.’
‘싫은데.’
이주한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젖은 목소리로 헐떡이던 은찬은 날카로운 손톱을 세워 그의 등을 긁었다.
‘애교치고는 거친데?’
‘애교 아니거…….’
숨을 헐떡이며 능글맞은 소리를 던지는 이주한과 눈이 마주친 그때. 은찬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이건 뭐지? 노란색 털에 검은색 점박이가 박힌 귀……. 이주한의 머리 위에 솟아난 건 분명 동물 귀다. 근데 저게 왜 이주한의 머리에 있는 거지?
‘잠. 잠깐만! 잠…… 아! 아아! 자…아암, 하읏!’
‘대화는 다 끝나고 나서. 집중해.’
그는 당황한 은찬을 향해 단호하게 말하며 더 힘껏 박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릴 만큼 강한 삽입에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은찬은 달콤한 신음을 터트리며 그가 주는 쾌락에 집중했다.
머리는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몸은 반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오히려 수인이라는 것을 인지한 뒤부터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기승위로 하기도 하고 후배위로 하기도 하고. 체위로 여러 번 바꿔 가며 밀려오는 쾌감에 정신 없이 몸을 내던졌다.
그럼에도 이주한은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은찬의 내벽 안이 정액으로 가득 차자 얼굴이며 배에 정액을 뿌려 댔다. 강한 수컷의 정액으로 온몸이 마킹당한 은찬은 몇 번의 절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해 결국 기절하다시피 쓰러졌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잠자는 이주한을 버려둔 채 줄행랑을 쳤다.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인생이 180도 틀어졌다. 이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에도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솔직히 이주한의 섹스가 끝내주긴 했다. 내벽 전체를 휘젓듯 박아 대는 힘과 속도에 온몸이 덜덜 떨렸을 정도였으니까. 거기다 최상의 포식자 표범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타고난 건지. 태어나서 그렇게 큰 성기는 처음 보았다.
사람의 것과 비교도 되지 않은 쾌감을 안겨 준 단단하고 굵은 성기. 방 안을 가득 채운 짐승 같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 진한 정액 냄새. 쾌감에 젖은 나른 한 몸……. 모든 게 좋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주한이 수인이었을 줄이야. 엿 먹이려다가 똥 밟은 격이었다.
“하아…….”
잠시 옛일을 떠올린 은찬의 묵직한 한숨 소리가 거실 가득 울려 퍼졌다. 방에서 나와 자신과 소파에 나란히 앉은 은찬을 지긋이 바라보던 동만이 굳은 결심을 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한 번만이다.”
“…….”
“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내가 어떻게 못 본 척하겠어. 의리도 있는데. 야, 그래도 그렇지. 말도 없이 애인 사이라고 한 건 너무 했다. 최소한 나한테 상의라도 하든가.”
“…….”
은찬이 잠시 이주한과 즐겼던 추억에 잠겨 있는 것을 아무래도 오해한 모양이다. 동만의 동정 가득한 시선에 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웃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힘내. 요즘 애 혼자 키우는 남자도 많다고 하더라.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그거라면 도와줘야지. 어차피 네 말대로 두 달만 참으면 되잖아. 대신 회사에서는 티 내지 마! 그것만 좀 지켜 주라. 모솔인 것도 억울한데 게이라고 소문나면 나 진짜 끝이야. 알았지? 그러니까 이제 웃어 인마! 이 부장 그 개새끼가 또 그런 개소리 지껄이거든 애인의 이름으로 내가 혼내 줄 테니까!”
“……그래, 고맙다.”
김동만이 눈치가 없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마음을 추스른 것인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동만은 의욕이 넘쳤다.
“뭐 해? 가야지.”
“어?”
“산부인과 가야 한다며. 얼른 가자.”
동만은 한결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산부인과에 도착한 뒤 두 사람의 등 뒤에 뜨거운 시선이 꽂혔다. 남자 수인과 사람 남자가 함께 산부인과에 온다는 것 자체가 이목을 끌 만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