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실 겸 주방, 그리고 작은 방 한 칸과 욕실. 땅값 비싸기로 소문난 중심지 한가운데. 그것도 냉장고, 에어컨, 전자레인지 등 풀 옵션을 갖춘 오피스텔. 한 달 월세는 무려 20만 원. 회사와의 거리는 도보로 20분.
하루가 멀다 하고 집값이 오르는 시기지만 회사는 사원들을 위해 기숙사를 마련해 주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회사 내 구내식당을 이용하면 밥 한 끼 3천 원. 회사 내 커피 전문점을 이용하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천 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물가였다.
물론 국내를 비롯해 해외에서도 입지가 탄탄한 IT 계열 회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기업들이 마이너스 성장 중인 시점에서 이 회사만은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권고사직이 판을 치고 취업난에 허덕이는 시대에 은찬은 무려 200대 1을 뚫고 이 회사에 합격했다. 남들과 달리 수인이라는 이유로 가산점이 붙어 아슬아슬하게 붙긴 했지만. 겨우 5점 차이로 합격이 판가름 났을 때 은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인이라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유은찬은 수인이었다. 그것도 고양잇과 수인.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그 시작은 명확하지 않지만 압도적으로 수가 많은 인류와 섞이기 위해 개와 토끼 같은 몇몇 동물은 진화를 거쳤고, 점점 사람의 모습을 갖춰 갔다. 아주 오래전 기록에 남겨진 최초 수인은 사람 모습에 토끼 귀가 있는 남자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인은 구경거리에 불과했기에 대다수가 모습을 감추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수인은 사람들 무리 속에 섞여 살기 위해 진화를 거듭했고, 그 결과 현대에 이르러선 귀와 꼬리를 자유자재로 감출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옛날과 달리 수인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멸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열렸다. 지금은 오히려 나라에 수인으로 등록되면 혜택이 더 많은 시대였다. 그만큼 수인이 세계적으로 희귀한 데다 과학적으로 연구할 만한 가치가 높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인이라고 다 같은 수인은 아니었다. 모든 것에는 등급이 있듯이 수인에게도 그런 게 있었다. 하층과 최상 계층의 수인이 존재했다.
지금껏 다른 수인을 만난 적이 없기에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유은찬은 남들이 우러러볼 만큼 멋진 수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검정 직모에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검은 눈.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니고 못생긴 것도 아니다.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김동만이 말하길 냉정하게 생긴 딱 고양잇과 얼굴이란다.
별수 있나. 모습은 사람이라도 조상이 고양이인 것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은찬은 거실 소파에 널브러진 김동만을 보며 혀를 찼다. 수인이라는 특이 사항에도 불구하고 기숙사를 신청한 이상 2인 1실이라는 규칙을 따라야 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은찬은 걱정이 앞섰다. 모든 수인에게 세상 사람은 두 가지로 분류됐다. 수인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그래서 인간 룸메이트가 수인을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동만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같은 입사 동기라는 접점이 더해져 둘은 금세 친해졌다.
사각팬티 한 장만 걸친 채 손톱으로 배를 벅벅 긁으며 은찬은 동만을 발로 툭툭 찼다.
“술 좀 작작 처먹지? 야! 방에 들어가서 자!”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던 동만이 은찬의 거친 발길질에 겨우 몸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죽을 것 같아……. 건들지 마…… 윽.”
말할 때마다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 때문에 은찬은 얼굴을 왈칵 찌푸렸다. 아무래도 고양이다 보니 코가 민감했다.
“지랄을 해라. 몇 시까지 처마신 거냐? 빨리 안 꺼져? 너 때문에 나도 술 마신 기분이잖아!”
“얼마 안 마셨어……. 은찬아 나 해장국 좀, 배달시켜 줘…….”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애원하는 김동만을 지나쳐 은찬은 거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오늘도 저 멀리 보이는 고급 아파트는 눈이 부셨다. 언제 저런 곳에 살아 볼까. 김동만이 계산해 본 결과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150년을 모아야 가능하단다. 그러니까 이번 생은 글렀단 말이다.
“야아! 너 야박하게 이러기야? 친구가 술병 나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데에!”
“그러니까. 죽여 버리기 전에 방으로 들어가지?”
“진짜아아, 너무한다아아아……. 내가 널 위해서 선물도 사 왔는데에에…….”
힘없이 중얼거리는 동만을 무시하고 은찬은 그를 지나쳐 냉장고 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거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무의식중에 그것을 들어 눈앞에 가져간 은찬은 김동만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이 새끼를 죽여 버릴까 하는 살인 충동이 생겼다.
김동만의 선물은 임신 테스트기였다.
“너 미쳤냐?”
“며칠째 소화도 안 되고 죽을 거 같다며. 그리고 자꾸 날생선이 당긴다며. 어제 썸녀한테 물어보니까 그거 임신 아니냐고 하던데?”
힘없이 축 늘어진 김동만이 고개만 돌려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누가 봐도 놀리는 느낌이었다. 빈정 상한 은찬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임신 테스트기 상자를 힘껏 움켜쥐었다.
“나 남자거든?”
“개소리하지 마. 너 남자도 되잖아.”
“그거하고 이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야아, 혹시 모르잖냐. 임신일지.”
원래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농담하는 게 주특기인 녀석이지만 지금은 선을 넘었다.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 판국에 동만의 시답지 않은 농담을 받아쳐 줄 기분이 아니었다. 화가 난 은찬의 동공이 노란색으로 변했다. 고양이처럼 세로로 변한 동공이 살기를 가득 담아 동만을 노려보았다.
“죽을래?”
은찬의 낮은 저음에 동만은 그제야 입을 다물고 소파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방으로 사라졌다. 주말마다 소개팅이다 뭐다 하면서 여자를 만나러 다니는 동만이지만, 안타깝게도 늘 썸 타는 것에서 끝나고 말았다. 저래 봬도 모솔이었다.
녀석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 동안 노려보던 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욕실로 발길을 돌렸다. 욕실 거울 속에 보이는 눈동자는 이미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얼떨결에 들고 있던 임신 테스트기를 세면대 위에 무심하게 던져 버리고 양치질에 한창 열중하던 중 거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젖꼭지 부분이 며칠 전보다 더 커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칫솔질을 하면서도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요즘 들어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나서 통 먹질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날생선은 계속 먹고 싶은 것이다. 고양이 수인이면서 날생선 따위 먹지도 못하는 자신이 말이다.
늦은 밤, 혼자서 회 대자를 게 눈 감추듯 먹고 있는 은찬을 본 동만은 입을 떡 벌렸다. 그래서 임신 타령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기에 더 그런 것도 있었다.
칫솔을 입에 문 채 은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4월 마지막 주에 워크숍을 갔으니 대략 석 달 정도 된 것 같다. 하필 그날 생각지도 못하게 발정기가 온 암컷 고양이 냄새를 맡은 덕분에 덩달아 몸이 달아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 그 지역 특산 술을 사 오는 바람에 은찬은 이성이 끊어졌다. 운도 지지리 없지. 하필 고양잇과 수인들이 환장하는 개다래 술일 건 또 뭐람.
그날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본 김동만의 증언에 의하면 은찬은 귀하고 꼬리만 안 내놓았을 뿐이지 한 마리의 고양이가 따로 없었단다.
은찬은 지금도 몸서리 칠만큼 그때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40대 과장님에게도 예외 없이 안겨서 뽀뽀해 댄 자신을 너무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부장이 그런 은찬을 끌고 간 것도, 그리고 그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것도 은찬은 다 기억한다.
그날 밤을 떠올리던 은찬은 무의식중에 머금고 있던 침을 꿀꺽 삼켰다. 재빨리 치약을 뱉어 내며 입안을 헹궜지만, 한숨이 절로 터졌다.
부장이 남자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발정 난 고양이가 지조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지금껏 하룻밤을 보낸 상대 역시 남녀 가리지 않았다. 문제는 상대였다.
하필 그 많고 많은 사람 중 부장이라니.
입사했을 당시 은찬의 사수가 바로 부장이었다. 30대 초반에 현재 미혼. 애인도 없다. 외관은 또 어떤가. 180 넘는 키에 연예인 뺨 후려치게 잘생긴 외모, 거기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된 그는 범상치 않아 보였다.
사실 그 당시 회사의 모든 여자가 사수를 노리고 있었단다. 사수가 잘났으니 덕분에 주위의 부러움도 한 몸에 받았었다. 김동만까지 부러움에 가득한 눈으로 봤었다. 은찬도 처음에는 그랬다. 다른 이들이 알고 있는 그는 친절하고 멋진 사수였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주한. 그 자식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개새끼였다.
사수면 사수답게 일을 제대로 가르쳐 줘야지. 친절하게 알려 주는 건 바라지 않았다. 그냥 일만 제대로 알려 주기만 해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알아서 습득하라는 식으로 일을 알려 주었고, 만에 하나 한 번만 더 알려 달라 애원한다면 그것도 모르냐며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그것뿐이면 억울하지도 않지. 매일 커피 심부름은 기본이고 자기 할 일을 은찬에게 떠넘기고 사라진 덕분에 늘 늦은 밤까지 혼자서 야근을 해야 했다.
알고 봤더니 매일 상대를 바꿔 가며 데이트하기 바빴다고 한다. 은찬이 야근하며 삼각 김밥 먹고 있을 때 이주한이 여자와 고급 레스토랑에 가는 걸 본 사내 직원에게서 직접 들은 말이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그 자식 때문에 어렵게 들어온 이 회사를 박차고 나갈 수는 없었다.
이주한 개새끼. 언젠가 한번 한 방 먹여 버리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쯤, 돌연 그가 부장으로 승진했다. 갑작스러운 승진 소식에 사내에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놀랍게도 소문의 대부분은 사실이었다. 무려 회장 손주란다. 두고 보자 이를 갈았던 부장이 알고 보니 우러러봐야 할 임원급이었고, 자본주의 시대에 수긍해 살아가던 은찬은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복수를 접었다.
그런데 그날. 회사 사원들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워크숍에 행차하신 이주한 부장과 나란히 침대에 누운 그때. 사라졌던 복수심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그의 인생에서 남자 수인과 뜨거운 하룻밤을 보냈다는 오점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거기서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맞닥뜨렸다.
잡아먹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잡아먹힐 뻔한 뜨거운 하룻밤을 보내고 맞이한 다음 날 아침, 은찬은 눈을 뜨자마자 그 방에서 도망쳤다. 어차피 일개 사원에 불과한 그와 접점도 없었고 사수였지만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더는 마주칠 일도 없었다.
문제는 그날 이후였다. 발정기가 온 암컷 냄새를 맡아도 몸이 반응하질 않았고 속도 메슥거렸다.
이런저런 생각에 다시 한숨을 내쉬던 그때 던져 놓은 임신 테스트기가 눈에 들어왔다.
“미친놈.”
모솔인 놈이 이런 걸 사 왔다는 게 웃겼다. 피식 웃으며 그것을 만지작거리던 은찬은 장난삼아 그것을 써 보기로 했다. 설명서 따위 읽을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아닐 테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소변을 테스트기에 묻히고 세면기에 툭 던져 놓았다. 그리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탁탁 털며 나오던 중 생각 없이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 줄이 눈에 들어왔다.
선명한 빨간색 두 줄.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은찬은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감지했다.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상자를 찾아 설명서를 꺼내 읽어 본 뒤 너무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테스트기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씨발……. 임신.”
진짜 당혹스러운 결과였다.
***
은찬은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굳어 버린 김동만을 빤히 바라보았다. 불과 30분 전 제 모습과 똑같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장난이라고 해 줘어어!”
김동만은 절규했다. 정적이 흐르는 거실에 그의 절규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어째서. 은찬은 녀석의 이런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김동만이 왜 기겁하는 것일까. 당사자 보다 더 오버 하면서 말이다.
“이건 상식적으로 아니잖아! 그래, 이건 아니야! 내가 아직 술이 덜 깬 거야! 그렇지? 이거 꿈이지? 은찬아! 이거 꿈이지, 응? 그런 거지?”
은찬은 말없이 녀석이 테이블 위에 벗어 던진 양말 한쪽을 들어 던졌다. 정확히 얼굴 정 중앙에 맞고 떨어진 양발 덕분에 동만은 정신을 차렸다.
“너 남자잖아……!”
“누가 그걸 모르냐!”
“그런데 어떻게 이게 가능해? 어떻게 임신이 가능하냐고! 고양이라며! 너 혹시 그거 개뻥이고 에일리언 그런 거 아니야? 설마 나도 잡아먹을 수 있어?”
불현듯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것인지 동만은 제 몸을 끌어안고 소파 구석으로 몸을 움츠렸다. 싸늘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던 은찬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저런 걸 베프라고.
“지랄은 다 했냐.”
“아니! 아직 덜했어! 에일리언이 아니면? 너 혹시 여자야? 암컷인 거야? 아니면 자웅동체?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되는 뭐 그런 건가? 그래,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지. 나 지금까지 2년 동안 여자하고 동거하고 막 그런 거야?”
거기까지 상상하는 김동만의 상상력에 박수를 던지고 싶었다. 저러니 애인은 고사하고 여친이 안 생기지. 은찬은 심드렁하게 받아쳤다.
“우리 같이 불알 까고 목욕도 한 사이 같은데.”
“……아, 그랬지.”
“나 좀 전까지 팬티 한 장 입고 돌아다니는 거 봤을 텐데.”
“아…… 그러네. 근데. 그럼 이건 뭐야? 장난이지?”
동만은 불신 가득한 시선으로 빨간 두 줄이 선명하게 떠오른 임신 테스트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찬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둘은 잠시 말없이 임신 테스트기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핸드폰을 들고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요즘 시대에 핸드폰 하나면 안 되는 게 없다. 고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해 줄 건 핸드폰 검색밖에 없었다.
남자가 임신 테스트기를 사용했더니 두 줄이 떴다. 이 내용을 쓰자마자 다른 사람의 사례가 검색됐다. 은찬이 읽기도 전에 동만이 먼저 소리를 꽥 질렀다.
“야! 이거 고환암일지도 모른다는데?”
“고환암?”
“고환암이면 그렇게 나올 수 있다잖아. 그럼 그렇지. 임신은 무슨. 하여튼 유은찬 가끔 개소리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너 임신하고 싶냐?”
“…….”
불과 5분 전과 달리 히죽 웃는 동만과 마주친 시선에 은찬도 긴장감이 풀렸는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임신보다야 그쪽이 더 이해가 되니까.
“인마, 너는 그게 할 소리냐? 암일지도 모른다잖아.”
“아직 모르잖아. 너 발정기 와서 호르몬 변화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사내놈이 무슨 임신이야. 너 임신하면……. 야, 나도 임신할 수 있겠다! 임신이 뭐 개나 소나 하는 건 줄 알아? 사람하고 동물하고 왜 여자 남자, 수컷 암컷으로 성별이 나뉘어 있겠냐? 그들만의 영역이 있는 거지! 그건 우리가 침범할 수 없는 여자와 암컷들의 신성한 영역이라는 거야. 고맙다, 유은찬. 덕분에 술이 확 다 깼다.”
동만은 소파에 힘없이 풀썩 쓰러지며 은찬을 향해 원망 어린 시선을 던졌다. 괜히 머쓱해진 은찬은 목을 긁적이며 다른 주제로 화제를 전환했다.
“썸녀랑은 잘됐냐?”
“잘됐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왜? 잘되는 것 같더니. 그럼 어제 누구랑 마신 건데?”
“둘이었다가 혼자.”
“혼자…….”
김동만 또 차였구나. 단번에 눈치챈 은찬은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가는 동만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냥 아는 오빠로 지내고 싶다잖아……. 도대체 아는 오빠가 어떤 오빤데? 야! 내가 매력이 없어? 진짜 이번에는 잘될 거 같았거든? 근데…… 여자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직장 탄탄해! 얼굴 봐 줄 만해! 도대체 내가 남들보다 못한 게 뭐냐?”
남들보다 못한 게 너무 많아서 말해 주기 곤란했다. 직장만 좋을 뿐이지. 얼굴은 평범해도 너무 평범했고 눈치도 너무 없었다. 게다가 고양이 덕후라서 팬티까지 고양이 무늬가 들어간 것만 입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있을까.
“더 좋은 사람 만나겠지.”
“너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어.”
그것 말고는 딱히 해 줄 말이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김동만은 인기 있을 타입이 아니라는 것이다. 딱 봐도 정력이 없을 것 같다.
“아, 몰라! 우리 밥이나 먹자. 해장이나 하게 국밥이나 시켜 봐.”
동만은 머리를 거칠게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술 냄새가 풀풀 나지만 실연의 아픔을 겪은 놈에게 뭐라 더 따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은찬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배달 어플로 밥을 시켰지만 한 수저도 먹지 못했다. 김동만이 맛있게 국밥을 퍼먹을 동안 화장실에서 헛구역질하기 바빴다. 불현듯 임신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정확히 다음 날 저녁. 김동만과 유은찬은 전날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월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병원에 들른 은찬은 의사에게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통보받았다.
“야, 뭔데.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데. 암이래? 심각하대?”
“……동만아. 김동만.”
“아, 왜! 어? 야! 귀가 왜 나와? 너 지금 긴장했냐? 왜 이래! 귀 집어넣어! 만지고 싶잖아!”
김동만이 고양이 수인을 좋아하는 건 그가 고양이 덕후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은찬이 고양이 수인이라는 것을 밝혔을 때도 김동만은 눈을 반짝였다. 덕분에 변태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은찬은 녀석이 사랑하는 고양이 귀를 내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제 귀에서 눈을 떼지 않는 동만에게 경고했다.
“내 머리에 손대면 죽여 버린다!”
“까칠하기는. 한 번만 만지면 안 돼?”
“그 손 분질러 버린다.”
“치사하게! 그래서, 병원에서 뭐라고 그랬는데 신경질이야! 너 고추 너무 써서 병 걸렸대?”
죽여 버릴까. 재수 없는 고양이 중독자 같으니라고…….
동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은찬의 귀를 바라보았다. 다른 날 같았으면 주먹을 한 대 날렸겠지만, 오늘은 그런 의지마저 사라진 상태였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군 은찬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쳤다.
“임신이란다!”
“어?”
“어.”
“어?”
“어!”
“맙소사……. 그게 돼?”
그러니까. 은찬도 방금 동만이 멍청한 표정으로 던진 그 질문을 똑같이 의사에게 했다. 그러자 의사는 아주 희박하지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비뇨기과 의사는 친절하게도 논문을 뒤적여 같은 수인일 경우, 즉 최상 계층 수인이 종족 번식을 위해 같은 과 수인과 짝짓기를 했을 경우 수컷도 임신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물론 아주 희박하다는 것을 다섯 번 넘게 강조했다.
은찬은 그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임신을 한 것이다. 로또 걸릴 확률보다 적다는데, 차라리 로또나 걸리지. 어떻게 이런 악재가 있을 수 있나 싶었다.
의사는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던졌고, 은찬은 넋이 나가 버렸다.
“하아…….”
“그게 되냐고! 이게 말이 되냐고……! 수인은 원래 그래? 남자도 돼?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이건 생물학적으로 교란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너 생태계 교란 종이라고!”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김동만 목소리에 은찬은 머리가 울렸다. 그러다 녀석이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은찬을 흘겨보았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건데! 지금 너 아니라도 나 되게 혼란스럽거든? 입 좀 닥치지?”
“너 무분별하게 아래 쓰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그래서 신이 노하셔서 너 벌하신 거야.”
“아니거든! 왜 갑자기 신을 들먹거려, 종교도 없는 놈이!”
“지금이라도 회개해. 아니면 내가 대신해 줄까? 오, 주여. 발정기 때마다 아래를 무분별하게 사용한 이 어린 고양이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은찬은 두 손을 꽉 움켜쥐고 고개를 푹 숙이는 김동만의 머리에 주먹을 내려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어금니를 꽉 깨물며 중얼거렸다.
“같은 수인끼리는 된다잖아. 임신!”
“……현실을 부정하는 저 어린 고양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오, 주여.”
“죽을래? 정말 죽여 줘?”
힐끔거리며 은찬을 곁눈질하던 동만이 눈을 깜박였다. 도저히 못 믿는 눈치다.
“다른 병원 가 봐. 병원 오진도 많다고 하더라.”
오진은 아닐 거다. 친절한 의사 선생 덕분에 배 속에 아기집이 생긴 것까지 확인하고 왔으니까. 그래서 더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부모님도 수인이고 조상님도 수인이지만 최상 계층 수인은 수컷도 임신시킬 수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은찬은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울고 싶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 버릴까…….’
병원에서 나와 지금까지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죽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이제야 겨우 인생의 빛을 보고 있는 이 시점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냔 말이다.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했고 그 망할 사수 개자식도 없는 아주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발정기 시기에는 문란한 밤 생활도 즐기며 말이다.
“진짜야?”
눈치 없는 동만이 드디어 은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럼 새끼야, 지금 내 표정을 봐라! 장난 같아?”
“……같은 수인끼리 된다는 게 무슨 말이야. 너 부장 말고 따로 누구랑 잔 사람 있어? 없잖아! 그럼 아니잖아! 다른 병원 가 보라니까!”
조심스럽게 던진 동만의 질문에 은찬은 그동안 녀석에게 말하지 못한 사실 한 가지를 고백했다.
“부장이…… 수인이야.”
“어?”
“부장이 수인이라고.”
“……어?”
“아, 진짜! 귓구멍 막혔냐? 부장 그 새끼가 수인이라고! 이주한 그 새끼 수인이라고, 수인!”
괜히 화가 난 은찬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에도 김동만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부장이 수인이라고? 그 부장이……?”
“그래! 와씨, 너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할래? 언어 능력 딸려? 우리나라 말 이해 못 해? 수인 몰라? 수인?”
“야……!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이해가 되냐? 부장이 수인이라고? 그 사람이? 야! 그 자식 회장 손자잖아? 그럼 회장도 뭐야, 수인이야? 그럼 우리 회사가 수인 회사였어? 그래서 수인한테 특혜도 많이 주는 거였어? 헐…… 대박. 근데, 같은 수인끼리 된다며?”
“…….”
동만은 이상한 부분만 빠르게 이해했다. 녀석의 말 그대로 어쩐지 이 회사 수인 특혜 점수가 다른 곳보다 높았다. 최상 계층 수인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특권계층에 있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그 실체가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회장이 수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런 비슷한 소문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럼 부장도 고양이야? 그 덩치에? 뭐냐. 매치 안 되게.”
부장과 고양이를 머릿속으로 매치시켜 본 모양인지 김동만은 인상을 쓰며 정색했다. 그럴 만했다. 180이 넘는 몸 좋은 이주한과 고양이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외모와 어울리는 동물은 딱 한 가지.
“표범.”
“…….”
나지막이 던진 은찬의 말에 김동만은 입을 다물었다. 거실에 정적이 흘렀다. 충격을 받은 동만은 이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이해한다. 은찬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그날 부장이 수인인 걸 알았을 때 은찬은 똥 밟았다고 생각했다.
씨발 새끼. 섹스하는 도중에 귀하고 꼬리를 들어내는 게 어디 있어.
“표범이라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같은 고양잇과였기에 임신이 가능했던 거로 추정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이주한 새끼. 종족 번식 능력이 얼마나 좋으면 수컷한테 임신을 시킬 수 있느냔 말이다. 이것이 최상 계층의 위엄인가. 미친 정력.
“하아…….”
작은 거실에 은찬의 한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인가 보다. 이 와중에 은찬은 싱싱한 회가 먹고 싶어졌다.
“김동만.”
“어?”
“회 먹을래……?”
“미친놈. 넌 지금 그게 먹고 싶냐?”
동만의 기가 찬다는 표정을 무시하고 은찬은 핸드폰을 들었다. 빠르게 배달 어플로 회를 주문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지만, 옛말에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 했다. 그래, 유은찬. 일단 먹고 생각하자. 은찬은 벌써 입맛을 다셨다.
***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이 자식 보소? 야!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남 일처럼 말해야 해? 몰라서 묻냐?”
동만의 쓴소리에 은찬은 손에 들고 있는 음료수 캔을 만지작거렸다. 임신 사실이 확정된 그날로부터 눈 깜짝할 사이 이틀이나 흘렀다. 그날, 어떻게 할 거냐는 동만의 물음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틀이나 지났건만 은찬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자 결국 동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낳을 거냐?”
“…….”
시큰둥하게 던진 질문에 은찬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낳을 것이냐, 아니면 지울 것이냐. 지난 이틀간 은찬이 끙끙 앓은 이유였다. 유은찬 답지 않게 연달아 한숨만 계속 내쉬며 파란 하늘을 응시했다. 긴 정적이 이어졌다.
꽃과 나무로 꾸며진 옥상 정원은 업무로 지친 사내 직원들의 유일한 휴식처 공간이었다. 한참 뒤에야 은찬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고민 중.”
은찬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동만이 인상을 팍 쓰며 따졌다.
“고민할 게 뭐 있냐? 부장한테 말할 거야? 그날 하룻밤 잔 거로 애 가졌다고?”
“아니! 미쳤냐? 고작 하룻밤 잔 걸로 그 새끼하고 엮이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뭘 고민하고 있냐고! 지워야지!”
동만은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맞다. 지워야 하는 게 정상이다. 남자 수인이 애를 가졌다는 것도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보일 텐데. 그것을 다 감수할 만큼 사랑하는 남자의 애도 아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래야 한다는 거 아는데, 마음이 영 그러네.”
“뭔 말이야. 마음이 뭐 어쩌고 어째? 이 상황에 감성 돋는 소리 하지 말고 현실을 파악해. 아니면 너 부장한테 딴마음 생겼냐? 뭐, 하룻밤 잔 뒤 정이라도 붙었어?”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하면, 네 인생은 오늘로 종 치는 수가 있어! 여기서 확 밀어 버린다!”
은찬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동만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이주한 부장에게는 눈곱만큼의 감정이 없다는 뜻이었다.
“난 네가 더 이해가 안 된다. 그런데 뭘 망설여? 답은 정해져 있구만. 너한테 선택권은 두 가지잖아. 네가 죽을 만큼 싫어하는 이주한 부장한테 사실대로 털어놓든가 아니면 조용히 없었던 일로 아이를 지우든가.”
본인 일이 아니라고 너무도 쉽게 말하는 김동만을 떨떠름하게 바라보던 은찬이 녀석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아니지. 하나 더 있지. 나 혼자 아이를 키우든가!”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야! 너 애 낳게?”
김동만은 입을 떡 벌리며 은찬을 바라보았다.
안다. 개소리인 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아이를 지울 수는 없었다. 초음파로 보이는 콩알만 한 생명이 배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김동만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죽을 만큼 싫은 이주한의 아이이지만 은찬의 아이이기도 했다.
“너 미쳤어?”
“그래…… 미쳤나 보다. 동만아, 나 어떻게 하지? 진짜 미쳤나 봐. 애 못 지우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좀 그래. 그냥 내가 낳아서 키워 버릴까?”
“헐…… 대박. 이 자식 진짜 돌았네. 야! 너 이거 들키는 날에는 해외 토픽감이야! 알긴 아냐?”
인간보다 의외로 종족 번식이 힘든 쪽이 수인이었다. 게다가 남자 수인이 아이를 가졌으니 토픽감은 확실했다.
동만은 한참 동안 말없이 은찬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지난 2년간 함께 한 탓인지 은찬이 결심을 굳혔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챈 모양이다.
“어쩌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부장이야. 그것도 최상 계층 수인이라며! 그런 놈이 자기 자식을 몰래 낳고 키우는 걸 알아봐. 가만히 둘 것 같아? 특히 부장 성격,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너 맨날 나한테 뭐라고 그랬냐? 입에 거품 물고 부장 욕했잖아!”
“모르게 하면 되잖아! 왜 꼭 말해야 한다는 전제로 생각하는 건데?”
“뭐?”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이 격해진 은찬은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구석에 있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은찬은 주위 눈치를 보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오버 하지 마. 만에 하나 내가 그 자식한테 사실대로 털어놨다고 쳐. 그럼 그 새끼가 좋아할 거 같냐? 낳아서 키우자고 할 거 같아? 야, 그 자식 매일 매일 파트너 바꿔 가면서 데이트하는 쓰레기 같은 놈이야. 그 자식이 가지고 논 여자가 얼마나 많을 것 같아? 나도 그중에 하나겠지. 아니지, 하나도 아니지. 어쩌다가 침대 한번 같이 썼을 뿐이고! 너만 입 딱 다물면 아무 문제 될 거 없잖아!”
“그래서 진짜 낳으시겠다?”
“못할 것도 없지.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고양잇과 수인은 임신 기간이 짧거든? 겨우 6개월이야.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야? 복지 하나는 끝내주게 좋잖아. 조심하다가 배 좀 나오면 살쪘다고 둘러대고, 애 낳을 때 되면 병가 좀 내고 한 2주 쉬다 오지 뭐.”
김동만이 입을 벌린 채 은찬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냐……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은?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그렇게 잘 둘러댔다고 치자. 그럼 애는? 애는 누가 보는데? 결혼도 안 한 놈이 갑자기 애가 생겼어.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할래? 너 기숙사 나가야 하는 거 알지?”
물론 거기까지 생각해 둔 바였다. 은찬은 조용히 동만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신이 생각한 계획에 동만도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러대는 건 쉽지. 사고 쳐서 애가 생겼다고 하고. 애 엄마는 애만 두고 갔다고 하면 되는 거고. 기숙사는…… 그래서 말인데, 동만아. 같이 우리 나가서 같이 살래?”
“기숙사를 나가자고? 너하고 같이? 미쳤냐? 내가 왜!”
은찬의 제의에 동만은 펄쩍 뛰었다. 이럴 것이라 예상한 바였기에 은찬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 2년간 같이 산 룸메이트로서 녀석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분하지 말고 생각해 봐. 너 내가 고양이 수인인 거 알지?”
“알지.”
김동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애를 낳았어. 그럼 그 애도 고양이 수인이겠지?”
“그렇겠지?”
“보통 애들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꼬리하고 귀 숨기는 능력이 없거든? 우리가 같이 살면 넌 고양이 귀와 꼬리를 가진 아주아주 귀여운 새끼 고양이 수인을 매일 보고 만질 수 있는 특혜를 누리게 되는 거지. 어때? 싫어?”
말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육아를 김동만에게 떠넘기겠다는 유은찬의 야심 찬 계획이었다. 슬쩍 김동만 반응을 보니 이미 새끼 고양이와 함께 사는 상상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반짝이며 광대가 승천하기 시작했다. 오케이! 넘어왔다.
“알지? 너니까 특별히 이런 특혜를 주는 거다?”
“고마워. 너밖에 없다니까!”
사실 지금도 기숙사에서 모든 청소와 빨래는 김동만의 담당이었다. 은찬이 하는 거라곤 차려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소파에 뒹굴뒹굴하는 정도랄까. 고양이 덕후인 김동만은 유은찬을 떠받드는 습성이 있었다.
이런 걸 사람들은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라 부른다지.
“근데 진짜. 정말로. 부장한테 말 안 할 거야?”
“안 해. 할 필요도 없고 할 의무도 없고.”
한참 떠들다 보니 목이 칼칼했다. 들고 있던 캔 음료수를 딴 은찬은 시원하게 한 모금 마셨다. 여름 태양은 뜨거웠지만, 옥상 바람은 땀을 식혀 줄 만큼 시원했다.
“양육비라도 받으면 좋잖아. 재벌인데. 그 정도는 그냥 주겠지.”
“됐거든? 난 그런 지조 없는 놈하고는 상종도 하기 싫거든?”
어쩌다 보니 사수로 인연이 더럽게 엮였을 뿐이다. 그 자식이 수인이든, 뭐든 배 속 아이의 아빠든 뭐든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남들은 이렇게라도 인생 한번 펴 보려고 하는데, 너는 어떻게 된 놈이 죽어도 싫다고 난리냐. 그리고 막말로 너나 이 부장이나 다를 게 뭐냐? 지조 없는 거로 따지면 둘이 막상막하지. 수인은 원래 다 그런가? 너도 발정기 기간만 되면 장난 아니었잖아. 이 여자, 저 남자 죄다 만나고 다녔으면서. 내가 볼 땐 둘이 똑같아.”
싱겁게 웃으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김동만을 은찬은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눈치 없는 김동만. 이 타이밍에 그딴 말을 꼭 해야 하는 걸까.
“엄연히 다르거든! 나는 내 일 다 끝내 놓고, 퇴근해서, 즐긴 거고! 그 개자식은 나한테 자기 일 던져 주고 그 짓거리 하러 간 거고! 너 당장 사과해! 그 자식이랑 나랑 동급으로 취급한 거 사과하라고!”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에 흡족함도 잠시 은찬은 녀석의 목을 팔로 힘껏 조였다.
“아야야야야! 아프다고! 야, 아프다고! 이거 놔! 좋은 말로 할 때 놔라!”
은찬의 공격에 동만은 버둥거리며 허공에 팔을 휘적거렸다.
유은찬은 풍성하고 부드러운 크림색 털을 가진 작고 귀여운 아버지 혈통보다 빳빳한 검정 털과 날렵한 몸을 가진 어머니 혈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귀엽지 않은 고양잇과 수인이지만 나름의 인기는 있었다. 김동만처럼 귀하고 꼬리를 내놓으면 환장하고 덤벼드는 놈들이 제법 있었으니까.
결혼 대신 혼자 아이를 낳고 지내면서 생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서 잘리지만 않는다면 아이 하나 키울 정도 수입은 되고 수인이 아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주는 혜택도 상당했다.
아기를 낳는 쪽으로 확실히 마음을 정한 은찬이 동만과 우정을 다지고 있을 때였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항복하는 김동만을 풀어 주고 핸드폰을 확인한 은찬은 인상을 팍 썼다.
“왜 뭔데?”
마른기침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동만이 물었다. 은찬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과장님 호출.”
“왜? 빨리 오래?”
“이 부장이 나 찾는다고.”
갑작스러운 호출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자식이 부장으로 승진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왜 하필 지금일까. 워크숍 이후 석 달 만의 만남에 은찬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임신 사실을 들킨 걸까. 사무실로 뛰어가는 동안 은찬은 지레 겁을 먹었다.
한때 사수였던 이주한. 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회사 내의 모든 이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꼼작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는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손자였고 언젠가 이 회사를 이어받을 남자였다.
그럼으로 고작 사원인 은찬은 회장 손자 이주한의 호출에 부리나케 달려가는 중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일대일 면담이 아니라 그가 친히 마케팅 부서 쪽으로 발걸음 했다는 것이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굳게 닫힌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잔뜩 긴장한 팀원들이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일개 팀원에 불과했던 이주한의 현재 사회적 지위가 절실히 잘 드러났다.
은찬이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맴도는 저곳에 들어갈 자신이 없어 망설이던 그때, 과장과 눈이 마주쳤다.
“유은찬 씨 거기서 뭐 해. 얼른 들어오지 않고.”
“아. 네…….”
그의 부름에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주한이 회장 손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던 시절. 잘생긴 이주한에게 매일 히스테리 부리던 과장이었건만, 회장 손자라는 꼬리표가 달린 지금은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사회생활은 동물의 세계처럼 약육강식 그 자체였다. 제일 꼭대기에 있는 포식자 회장 밑으로 제일 밑바닥에 있는 사원 유은찬. 더럽고 치사하지만 취업난에 허덕이는 이 시대에 이런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이제는 배 속에 입 하나가 더 생겼으니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도 못 하게 생겼다.
마지못해 과장에게 다가간 은찬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이주한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했다. 석 달 만의 만남이 반갑기는커녕 불편했다. 숨기고 있는 게 있어서인지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어째서 수인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인상을 쓴 채 그를 힐끔거렸다. 염색인 줄 알았던 옅은 갈색 머리카락도 본래 털 색깔이고, 가끔 흠칫할 정도로 자신을 매섭게 쳐다보던 것도 원래 눈매가 사나운 표범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1년 동안 같은 팀에 있었던 동료로서 은찬에게만 살짝 알려 줬어도 그날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같은 수인으로서 동지애 따위도 없는 새끼. 그래, 너는 표범이고 나는 고양이라 이거지.
은찬이 속으로 그를 비아냥거리며 바닥을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유은찬 씨.”
“네? 아, 네…….”
은찬의 이름을 부른 이주한은 잠시 침묵했다. 덕분에 사무실 안에 무거운 정적이 맴돌았다. 이곳 분위기가 원래 이렇지 않았다. 우스갯소리도 던지며 화기애애한 방이었건만 이주한의 등장에 시베리안 벌판처럼 싸늘해졌다.
“자리 오래 비우네.”
은찬은 자신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는 차가운 시선에 의무적으로 입꼬리만 올렸다. 역시 이래야 이주한이지. 개새끼라는 명성 어디 안 갔다. 사수 때부터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냐. 옛날 그 버릇 또 나왔다.
자리를 비울 시 목적지를 말하고 갈 것. 사수 시절 그가 은찬에게 명령한 지침이었다.
“똥 싸러 갔다 왔습니다.”
“화장실?”
“네.”
“시원해요?”
전 부사수 쾌변까지 신경 써 주는 이주한을 바라보며 은찬은 환하게 웃으며 받아쳤다.
“그럼요.”
“곽 과장님. 유은찬 씨 일 잘하고 있습니까? 내 밑에 있을 때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내가 고생을 좀 했잖아요.”
1년 만에 체험하는 이주한의 꼰대 짓에 은찬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과장은 이주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부성 짙은 말을 던졌다.
“누가 가르쳤는지 여기서 일 잘하기로 소문났는걸요?”
지랄. 저 새끼가 가르쳐 준 게 뭐가 있다고. 커피 심부름에 온갖 잡다한 일은 다 시켰다는 걸 이 사무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서 제일 최악은 업무 시간에 본인 차 내부 청소를 시킨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급 스포츠카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좋기는커녕 그 안에서 나뒹구는 콘돔 상자를 보고 욕이란 욕은 다 퍼부었었다.
지금에서야 콘돔 상자가 왜 그렇게 많았는지 이해가 되는 바였다. 그 정도 정력이라면야. 표범이라서 그런지 힘 하나는 끝내주게 좋았다. 섹스하다가 너무 좋아서 귀하고 꼬리가 나오기는 은찬도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자식은 갑자기 왜 찾아와서 이 지랄일까. 가뜩이나 정신도 사나운 판국에. 얼른 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본론을 꺼냈다.
“내가 여기까지 직접 온 건 여러분께 직접 전달할 것도 있고 당부할 것도 있어서입니다. 이왕이면 팀원들 전부 있을 때 전달하고 싶어서요.”
은찬을 포함함 열 명 되는 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주한에게 집중됐다. 세 명의 여자 팀원은 눈에서 하트가 쏟아졌고 남자 팀원들은 질투와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돈 많은 재벌에 잘생겼지 몸매 좋지. 거기다 머리도 좋지. 게다가 최상 계층 표범 수인이다. 유은찬이라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이주한으로 태어나고 싶을 만큼 모든 게 완벽한 남자였다. 만약 그가 사수가 아니고 멀리서 바라만 보았던 존재였다면 은찬도 다른 이들처럼 동경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를 동경하기에는 이주한의 인성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워크숍. 망할 개다래 술……. 후회만 가득한 그날을 저주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남의 속도 모르고 이주한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번에 회사에서 처음으로 인공 지능 프로그램을 개발했습니다. 회장님께서 거시는 기대도 상당합니다. 그만큼 상당히 정성도 들였고. 해서 이번 마케팅을 제가 맡게 됐습니다. 물론 원래 마케팅 2부서가 담당하기로 했지만 제가 잠시 몸담았던 1부서가 영 마음에 걸려서요. 1부서 담당으로 제가 강력히 밀어붙였습니다.”
맙소사……. 저 표범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주한의 말이 길어질수록 은찬은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두 달 정도 잡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해 주시면 그만큼 성과가 돌아갈 테니까. 나도 면목이 서고 여러분도 경력이 쌓일 테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안 된다. 저 자식하고 두 달 동안 얼굴을 보고 지내라고? 절대 못 한다. 1년 동안 자유를 맛본 탓에 두 번 다시 그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임신도 한 상태였다. 저 표범 자식의 아이를 말이다.
이주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무실 내 팀원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유은찬만 빼고 전부 다 반기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케팅 1부서는 실적이 부진해서 늘 마케팅 2부서에 무시를 당해 왔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잘 부탁합니다. 잘해 봐요. 우리.”
다시 이주한 하인 노릇을 해야 한다니! 아니. 싫다. 못 한다. 너나 잘해 봐라.
은찬은 이 현실을 부정하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주한과 눈이 마주쳤다.
“유은찬 씨.”
부르지 마! 부르지 말라고! 은찬은 대답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못 보던 사이에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봐.”
“네?”
그의 동공이 짐승처럼 살짝 변하는 게 보였지만 이름이 불린 당사자를 제외한 사무실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마치 사냥감을 노려보듯 은찬을 흘기며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거짓말하면 혼납니다.”
“…….”
“화장실이 아니라 옥상이잖아.”
낮은 저음으로 나지막이 던진 속삭임에 은찬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1년 전 끝난 줄 알았던 지옥문이 다시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