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담쟁이덩굴
나에게는 연락이 올 곳이 항상 정해져 있다. 전호, 문영이, 한세 형. 그리고 정말 낮은 확률로 그 사람.
“천재상….”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은 역시 전호였다. 내 마음의 문제를 전호에게 덮어씌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혼자 오해하고 내 잘못을 남에게 돌리는 건 아닐까.
“…응. 전호야.”
제발 아니라고 얘기해줘. 밑도 끝도 없이 아니라고만 해도 다 믿을게. 가장 먼저 다가와 준 사람이었다. 피하는 사람과 무시하는 사람만이 남아 있던 내 세계에 말을 걸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 미안하다.
“…….”
― 미안해.
아침과 저녁을 분간하는 법을 잃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4층으로 들어갔다. 전호에게 연락이 언제쯤 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그 사람을 위한 공간이 점점 확장되고 있을 때 보란 듯이 껴들어 와서 나를 망쳐놓았다.
기억이 모두 돌아왔다. 조금만 엇나가도 흐트러지는 불완전한 기억이 아닌 온전한 기억이 돌아왔다. 그날 내가 처음으로 만난 이건주를 형이라 지칭하며 혼란한 진술을 한 이유는 얇고 투명한 주사 때문이었다. 나조차도 왜 망쳤는지 몰랐던 당시 내 가장 중요했던 진술의 단서가 나온 것이다.
난 오늘도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전호는 아니고 아예 모르는 사람의 번호로 전화가 며칠째 오고 있지만 난 받지 않았다. 필요하면 문자를 남길 것이다. 내 다리를 감싼 털에서 조그만 애정을 갉아 기생충처럼 살아갔다.
지미는 내 곁에 있다. 내가 무슨 짓을 하여도, 가장 친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혼자 우울해해도 여전한 식욕을 자랑하며 나를 살아가게 한다. 이번엔 사람이 바뀌어서 다시 전호가 되었다. 이 전화를 받으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전호가 전할까 봐 겁이 난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 한마디라도 한다면, 딱히 할 얘기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또 피해를 보게 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난 전화를 받지 않았다.
* * *
누군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엄마가 등산 간 시간, 난 또 2층으로 내려오다가 옥상까지 쉬지 않고 올라갔다. 사실 이때부터 기억이 없어서 내가 무서워할 곳이 아니다. 대낮이었고, 대낮이니까. 새벽에 그와 함께하던 시간의 마지막이 그래서 조금 미안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사이였나, 생각해보면 그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잘 못 해서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었고, 함께 자 본 것도 손가락에 꼽으니까.
중요한 사이였던 것 같다. 나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애써줬는데. 내가 처음이라 답답할 것임에도 하나부터 꼼꼼히 설명해주고, 도와주고….
“…….”
아낌을 받았었던 것 같다. 바닥에 버려진 꽁초를 주워 쓰레기통에 제대로 버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 골목을 지나치지 않는다.
* * *
문영이는 바쁜 사람이라 집으로 찾아오는 날이 더 많다. 난 지미를 안고 문영이를 맞았다.
“형, 수염 뭐야?”
“아, 까먹었어. 나갈 일이 없어서… 지금 밀고 올게.”
“아냐. 귀엽네.”
너무 짧아서 귀여운 건가. 나를 둘러 안고 왼쪽 오른쪽으로 흔들던 문영이가 집으로 들어왔다. 지미는 아마 문영이가 가져온 간식이 더 반가울 것 같다.
“안 사와도 되는데….”
“형. 혹시 그 일은 다 끝난 거야? 요즘 전화하면 바로 받네? 집에도 자주 있는 것 같고.”
“응. 애기가 다 커서 이제 안 해도 된대.”
“그 집도 웃긴다. 보통 매일 오는 사람은 이틀에 한 번씩으로 줄이거나 그렇게 서서히 자르는 거지, 애가 다 컸다고 뭘 그렇게 사람을 한 번에 자른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을 이해하면서 물을 한잔 건네줬다. 비싼 생수를 산 이유는 없다.
“밖에 진짜 엄청 더워.”
“어떡하지. 선풍기밖에 없는데, 우리 나갈까?”
문영이는 심각하게 고민을 하며 우리 집을 둘러봤다. 왜지. 뭐가 있는 건가? 털갈이를 하는 지미 때문에 요즘 청소는 깔끔히 하고 있다.
“에어컨 주면 싫어할 거지?”
“…….”
“알았어. 알았다니까? 집에 남는 게 에어컨인데….”
집에 남는 것이 많아도 사 줄 걸 알아. 1년이란 시간이 흘러서야 문영이가 간혹 내게 거짓말을 친다는 걸 알게 됐다. 전호는 내가 아는 어디까지가 진짜일까. 미안하다는 말은 사실일까. 그 사람은? 같은 1년을 보냈지만 문영이만큼 친밀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 지지대가 무너진 상실은 오랜 시간 나를 괴롭힐 것 같다.
* * *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한세 형에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난 아마 살이 빠졌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알 수 있을 정도라서 변명할 것도 없었다.
“밥은 잘 먹고 있는 거예요?”
“…아니요.”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 사람에 대해 물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내가 무슨 염치로 그걸 묻지. 내 손으로 정리를 해야 해.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더 이상 얽히지 않게 이 고단한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무섭지 않아. 할 수 있어. 다 처리하고 돌아가는 거야. 다 처리하지 못하면…?
“여기 케이크 직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하더라고요. 영진 씨도 먹어 봐요.”
한세 형은 내 손에 포크를 쥐여주고 자신의 것을 푹 찍었다. 생크림. 난 그의 생일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먹여드릴까요?”
“제가, 제가 먹을게요.”
내가 이 사람이랑 왜 만나고 있지. 내가 만나자고 했었나. 케이크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희미했던 기억이 확실해지면서 나에 대해 조금의 정보가 더해졌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아빠를 도와서 일을 하고, 엄마에게 생활비를 건네고. 그 사람이 보면 이게 유난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왜 사서 미래의 부담을 느끼냐고 내게 핀잔을 주고 코끝을 다그쳤을 텐데.
“어때요?”
“맛있어요.”
“진짜 맛이 있어요?”
“…….”
형도 그 사람처럼 내 거짓말을 간파하나. 난 물끄러미 형을 바라보고 아닐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니요. 맛없어요. 잘 안 느껴져요.”
“큰일인데요. 여기 비싼 곳인데.”
푸석푸석한 케이크가 아니라서 더 들어갈 것 같다. 엄마 생일이라 큰맘 먹고 산 프랜차이즈의 초코케이크는 맛이 없었다. 식감도 엉망이라 케이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우리는 그걸 바깥에 꺼내두고 한겨울 내내 먹었었다. 여느 날처럼 형이 주문해 준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도 한입 마셨다. 일을 할지도 모르니까 조금씩 시작해보라고 했지만 내 심장은 여전하다.
“소식을 즐기는 편이라고 말했나요?”
내가 일을 시작하고 형을 처음으로 사적인 자리에서 만났을 때, 먹이를 주듯 그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소식을 즐기고 간이 센 것은 피한다. 커피는 주면 마시고… 이런 케이크는 절대 안 먹을 것 같다.
“요즘 점심 저녁을 한 그릇씩 꼬박꼬박 챙겨 드시고 있습니다.”
다행이네. 난 포크로 위의 크림을 걷어내다 무심코 형을 봤다. 아, 크림을 혹시 좋아하면….
“계속해요. 크림이 맛이 없네.”
“네… 잘 지내고 계셔서 다행이에요.”
“원래 제시간에 회사에 안 온다고도 말했었나요?”
점심 전에 출근하면 어제 분명 사고를 친 것이라고 했었고 점심 이후에 출근하면 감사한 것이라고 했었다. 평일에 회사에 매일 나오는 일도 없었다고 했지만 나와 함께 한 그는 자주 회사에 간다며 집을 나갔었다. 바빠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아, 또 안 좋은 생각을 할 것 같다.
“요즘 매일 아침부터 출근하셔서 저를 굉장히 귀찮게 하고 있습니다.”
나하고 있을 때보다 더 성실하고. 울컥 치민 눈물이 흐를까 봐 크림 치우기에 더 열중했다.
“제 상태를 전하실 건가요?”
“아니요.”
“형은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본부장님이 알고 계시는 건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
생각보다 괜찮은 건가. 그래도 그 사람은 같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있겠구나. 잘 생각해보면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다. 내가 얼마나 그 사람에게 이상하게 굴었는데 한번 찾아볼 수도 있지.
“저를… 동정하셨을까요?”
“아닐 겁니다.”
“어떻게 단정하세요?”
“동정이었으면 돈을 주셨을 겁니다.”
돈을… 난 받았는데. 다시 만나면 이름을 불러볼 수 있을까. 몰래 숨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대로 앞에서 하고 싶다.
“동정이었으면 돈만 주고 떠났을 겁니다.”
“아….”
“그 사람들은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합니다. 우리처럼 만나서 얘기하지 않아요.”
형의 셔츠 깃이 빳빳하다. 넘긴 머리카락도 냉정한 눈도 엄청 유능한 회사원을 보는 것 같았다. 한 번만 건너면 그 사람을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다리가 움찔거린다. 왜 회사 옆에서 만나자고 한 걸까. 저 거대한, 높은 건물의 어딘가에서 그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형이 잠시 자리를 피한 틈을 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더 할 말 없죠? 집에 데려다줄게요.”
“아, 아니에요. 버스….”
“택시비 줄까요?”
갑자기 손이 붙들려 끌려가다가 어느 검은 차에 넣어졌다. 택시비를 달라고 할 걸 그랬나? 문이 잠겨서 조용히 안전벨트를 맸다.
“오늘 저 쉽니다.”
“예?”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것인 것 같다. 핸드폰을 조금 뗀 형은 왼쪽으로 전화를 받았다. 뭔가 화내고 있는 건가. 언성이 높은 것 같은… 아닌가? 점점 기울어가는 몸을 바로 했다.
“제가 천해에서 가장 일을 잘합니다.”
저렇게 끊어도 되는 건가?
“…형.”
“네?”
“…….”
아, 뭐라고 물어보지. 그….
“추어탕 좋아하세요?”
“추어탕 먹고 싶어요?”
맛있게 하는 집을 안다며 얼떨결에 추어탕을 먹으러 가게 됐다. 마침 보이는 간판이 추어탕 간판이었다. 경기도로 나가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사람들은 교외를 좋아하나. 어딜 가도 서울 밖으로 나가게 된다. 잠깐 나오는 줄 알고 지미의 밥을 덜 챙겨줘서 전호에게….
“아.”
“왜요?”
“…아니요. 지미, 고양이가 배고프지 않을까 해서요.”
아침과 밤을 가리지 않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지금도 오고 있는 진동을 무음으로 바꾸고 핸드폰을 돌려뒀다.
“집에 들렀다 갈까요? 어차피 집에 가려던 길이었으니까.”
저녁에 가까운 시간이라 엄마가 곧 올 것 같은데. 난 고개를 젓고 추어탕집으로 가자고 했다.
생각보다 가격도 저렴해서 일부러 나를 배려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교외치고는 작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
“저녁엔 사람 많아지니까 빨리 먹고 나가죠.”
“네.”
이 많은 양을 빨리 먹어야 한다니. 뜨거워서 앞접시에 담아서 한입을 먹었더니 목으로 알아서 넘어갔다.
“부드럽죠. 전 여기 아니면 추어탕 안 먹어요.”
“그….”
“와 보셨어요. 싫어하셨습니다.”
얼큰하고 괜찮은 것 같은데. 왠지 갑자기 맛이 없어져서 조금씩 먹다가 형이 후루룩 먹는 걸 따라 했다.
“저 오늘 저녁에 시간이 비거든요.”
“…예.”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묻었나. 입술을 휴지로 닦고 혀로도 한번 닦아냈다.
“저녁에 롯데월드 가 본 적 있어요?”
“아니요? 가시게요?”
“네.”
“그… 친구가 그랬는데, 자이로스윙은 저녁에 타는 거랬어요.”
그리고 또 뭐라고 했지. 전호의 옛날 여자친구가 롯데월드에서 일하는 사람이어서 갖가지 정보를 들었지만 모두 까먹었다. …난 도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본부장님이 조금 더 크시면 아마 밖으로 나돌기가 힘들어질 겁니다.”
“커진다구요…?”
“네. 키 말고요. 지위가 높아지면요.”
사람이… 커지면. 물을 마시다가 웃음이 터져서 뱉어낼 뻔했다. 형이 건네준 휴지로 입을 틀어막고 남은 웃음을 정리했다.
“저녁에 롯데월드 한번 데려가 보실래요?”
“제가요?”
“네. 사전연습을 하러 갑시다.”
더 먹을 생각이 없어도 아직 남았는데, 형은 다짜고짜 추어탕 집을 나섰다. 돈은? 이미 낸 건가. 아까 냈나?
“형, 잠시만….”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오세요.”
급하게 문밖으로 나가 형을 따라갔다.
“아… 네.”
“그러니까 벚꽃 구경 같은 무의미한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놀이공원이 나아요.”
그렇구나. 이건 그의 취향을 잘 아는 형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을까? 내가 나중에라도 그 사람을 데려오는 날이 올까? 차에 타서 벨트를 매고 어색한 손을 모았다.
“…왜?”
“…….”
“왜 그 사람은 괜찮아요?”
아무 전조도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형은 옆에 앉은 내게 손수건 하나를 건네줬다. 그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것과 향이 비슷해서 더 눈물이 났다. 괜찮아야 하는 게 맞아. 내가 잠깐 시간을 달라고 했으니까, 내가 지금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 한곳을 빙빙 돌고 있을 때 그는 정상적으로 살아간다.
“죄송해요….”
“혼자 아무렇게나 울고 있어요. 잊어줄게요.”
재차 울컥해서 눈물을 쏟아냈다. 내가 아침에 눈 떠서 저녁에 눈을 감기까지 무슨 기분을 느끼는지 알 수가 없다. 요즘 나는 나와 내외를 하는 듯 멀어지고 있었다.
“형, 먼저 들어가시면 저는 나중에….”
“이거 써요.”
갑자기 내 귀에 걸쳐진 선글라스 때문에 눈에 까만 조명을 받은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지금 정신이 없다고 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형,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 다시 올래요?”
난 고개를 휘젓고 가자는 대로 형을 따라갔다. 저녁인데도 롯데월드는 사람이 많아서 옷자락을 잡고 따라갔다. 아침부터 놀다가 지친 사람들도 보이고, 돌아가는 그네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조명을 켜서 대낮에 놀이공원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와본 적은 있는데 이렇게 밤까지 있었던 적은 없었어요.”
“원래 이런 곳은 아침 일찍 와서 마감할 때 집에 가는 겁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같이 다니던 친구가 집에 가자고 해서 갔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여자친구가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해서 갔었다. 2학년 때는 산으로 소풍 간다던 우한이가 찾아와서 나를 데리고 갔었다.
“뭐 타고 싶은 거 있어요?”
“…자이로스윙이요.”
이제 와서 다른 거, 저 컵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나 타자고 할까. 내가 어릴 때 저것만은 타지 말아야지 했던 것의 이름이 자이로스윙인 줄 이제 알았다.
“혀, 형….”
“탈 수 있어요. 겁먹지 말아요.”
겁먹지 않기엔 너무 높은데. 그리고 저 옆은 호수, 떨어지면 난 지미를 두고 즉사하는 무책임한 보호자가 된다. 나보다 높은 곳에 있던 눈이 나와 마주하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반사적으로 미소를 짓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탈 수 없을까요?”
“아니요. 탈 수 있습니다.”
“혀엉….”
“본부장님이 겁먹은 영진 씨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그 전에 여길 같이 올 수나 있을… 아니야. 진짜 올 수도 있어. 재밌다고 한번 타보자고 하면 난 용기 있는 멋진 사람으로 기억될까.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고 형을 마주했다.
“탈게요.”
“안경은 벗고 타야겠네요.”
양 주머니에 형의 안경과 선글라스를 넣고 보니 지금 이곳이 얼마나 밝은지 실감이 났다. 옆에서 계속되는 겁먹지 말라는 말이 주문처럼 내 겁을 모두 가져가는 것 같았다.
근처 편의점에 들러 얼음을 봉지에 가득 담아 뛰어갔다. 벤치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던 형이 손을 흔들어줘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형, 진짜 죄송해요.”
살포시 손등에 얼음을 올려두고 옆으로 물러났다.
“원래 악력이 센 편인가요?”
“아마, 아니요… 너무 무서웠나 봐요.”
“저도 손을 못 가눠서 부딪친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도 병원은 가보시는 게….”
“만져보니까 부러지진 않았어요. 어떡하죠? 더 놀지는 못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
형의 왼쪽을 사수하며 걸었다. 아직은 사람이 있어서, 지금 다치면 안 돼. 그래도 사무를 보는 사람인데 손가락을 다치면,
“영진 씨.”
“네?”
“저는 여기서 다친 것도 회사에 상해 청구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
“지금 업무… 보고 계시는 거예요?”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건가. 나도 이 작업에 좀 더 진지하게 임해야 했는데 혼자 겁먹고 난리를 피워서 형이 잡아준 손으로 안전띠를 부딪치고, 다치게 하고.
“아니요. 하영진 씨하고 노는 중인데요.”
“…….”
“다쳤는데 내 돈 쓰기 싫으니까 회사 돈을 쓸 거라는 얘깁니다.”
원래 그게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 난 그쪽 회사는 잘 모르니까, 높은 사람이라 되는가 보다. 형은 금방 차를 찾아서 그 앞에 서 있었다. 정장을 입고 있어서, 어둡고 컴컴한 곳이라 조금 무서운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형처럼 이성적이고 침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갑작스러운 말에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은 처음부터 인상적이었다.
“나 같이 이성적이면 본부장님이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주위에 차가 미친 듯이 지나다니는 교차로가 있나. 오토바이가 지나갔을까. 형은 내 앞으로 걸어와서 내 머리카락을 만져줬다. 왼손….
“오늘 나하고 놀아줘서 고마워요.”
형의 얼굴이 어딘가 허전해 보인다. 난 아까 대신 챙겨준 안경을 형에게 씌워줬다.
“형은 안경 안 쓴 것도 멋있네요.”
고맙다는 인사는 내가 해야 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오랜만의 내 외출이 달가울 엄마에게 ‘너 어디야?’로 시작하는 전화가 왔고 얼마 안 있어 집 앞에 도착했다. 형을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버스에는 자리가 많이 남아 있어서 앉아서 올 수 있었다. 도시를 나타내는 불빛이 반짝반짝 빛난다.
“…엄마 나 좀 더 걸릴 것 같아. 지미 밥 좀 부탁해.”
문 앞에 앉아있던 전호가 나를 올려다봤다.
“여기서 뭐해?”
“매일 밤마다 이러고 있었는데 이제 알아봐 주냐?”
“응. 밤에 나온 건 오늘이 처음이거든.”
“왜 차단도 안 해서 찾아오게 만들어?”
“…해줄까?”
나도 엄청 고민했어.
“아니 하지 마. 했어도 찾아왔을 테니까.”
“…….”
“너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안 물어봐?”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리고 합리적이라 생각이 들면 널 다 이해해줄까 봐. 그럼 나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안하니까. 이유는 다양해.
“십 년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가벼웠냐?”
“네가 할 소리야?”
“응. 난 그래도 나중엔 정신 차리고 하기 싫다고 말했었거든.”
“…….”
“근데 그러면 널 건드리겠다고 나를 협박하더라. 그 씹새끼가.”
“그래서 그 씹새끼한테 내가 너한테만 한 얘기를 해준 거야?”
내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지. 무슨 일을 하고, 누구와 일을 하고, 어떤 식으로 밥을 먹는지. 진우한이 마련해준 곳에서 잠을 자고, 진우한이 준 옷을 입고, 나를 챙겨주던 모든 것들이 배전호가 아니라 진우한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 집, 누가 구해준 거야?”
“…….”
“네가 입었던 옷은 정말 네 게 맞아?”
이러니까 내가 전화를 받지 않은 거야. 내가 바보 같아서 나를 속였다고,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전호가 미안하다고 내게 직접, 피하지 않고 얘기해줬으니 나도 친구로서 모든 걸 이해하고 용서해줘야 한다고 잠시나마 생각했었다.
“난 네 친구야?”
“…….”
“전호야, 우리 친구야?”
“…응.”
“나, 오늘 놀이공원 갔다 왔는데 그거 우한이한테 얘기할 거야?”
“아니. 이제… 그런 거 얘기 안 할 거야. 널 건드린다고 또 협박할 때 내가, 내가 어설프게 굴지 말았어야 했어. 난, 그냥… 네가 또 처음처럼 될까 봐 무서워서, 그랬어. 너도 이제 다 나았다고 하는데, 또 그러면… 이번에는 못 일어날까 봐 무서웠어.”
난 또 당해도 상관이 없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음식… 내가 준 음식은 다 너 먹이려고, 살찌우려고 주문한 거고… 옷도, 그 새끼가 고른 것도 있지만 대부분 다 내가 한 거야.”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던 전호가 울고 있었고, 난 가로등 빛에 기대어 가만히 듣고 있었다. 역시 이 집은 우한이가 준 게 맞구나. 그 전의 집은 어땠을까. 그 전은. 나를 돌봐주시던 카페 사장님은 우한이에게 사주를 받지 않았을까? 문영이는?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던 천재상이라는 사람은. 왜 괜찮다고 얘기해줬지. 왜 괜찮다며 나를 다독여줬을까. 내가 나아졌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우한이가 보낸 건가. 그 사람은,
“우리가 친해지기 전에 강당에서 연습하는 너를 본 적이 있어.”
“…….”
“한순간이나마 네가 그런 일을 당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 결국 그래서 내가 너와 친해질 기회가 생겼으니까.”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난 전호를 두고 작은 언덕을 올라 편의점으로 갔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아저씨가 소주 한 병에 오징어 안주를 먹고 있었다. 난 일회용 휴지와 맥주 두 캔, 담배 한 갑을 구매했다. 어차피 잊히지 않을 것이다. 술을 먹어도 담배를 피워도, 잠깐 진동으로 바꾼 틈에 울리는 전화를 지그시 쳐다보고,
난 핸드폰을 껐다.
* * *
배고프다며 왜 밥을 안 먹어. 지미가 아침에 머리카락을 잡아 뜯어서 일어났다. 내가 많이 늦었지.
“미안해. 응? 얼른 먹어야지.”
지미를 안아다 밥그릇 앞에 두고 한참을 타이르고 엉덩이를 긁어주니 그제서야 밥을 아그작아그작 씹기 시작한다. 아침에도 울리는 전화는 어제의 그것과는 다른 번호다.
“…….”
왜 저렇게 전화를 하는 걸까. 전호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깨끗한 물로 물그릇을 갈아주고 문을 나서려다 그만뒀다. 2층으로 더 이상 내려가면 안 돼.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걸 다 처리하고… 그리고 가야 해.
그가 씻겨준 몸이 좋아서 일주일 내내 씻지 않았었다. 그때는 그 시간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인 것 같았다. 문 앞에 서 있는 내가 이상한지 지미가 주위를 맴돌다 내 품에 폴짝 안겼다. 부엌에 걸려 있는 달력을 보니 이미 3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침대에 엎드려 떨어진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대체 언제까지 전화가 오는가. 천재상이라는 이름이 뜨는 일은 없을까. 어떻게 이렇게 독특한 번호로 전화가 오는 건가. 외국이라 그런가? 전호는 우한이가 미국에 있다고 했다. 절대 가지 말라고. 네가 미친 게 아니라면 거기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가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에 남을 것이다.
난 핸드폰을 두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일어섰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내 사사로운 반복의 해결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직면할.
* * *
매일 집에 있는 내가 엄마는 또 못마땅해진 것 같다. 지미가 잠든 내 방문을 슬며시 닫고 한 손에는 드라이기를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든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저러지? 천천히 빛이 드는 눈동자가 나에게서 멈췄다.
“엄마?”
“…….”
“엄마.”
“네 아빠가 죽었대.”
곧 장마가 시작한다더니.
정신없이 장례식 갈 준비를 하다 엄마에게 물어봤다. 우리가 가도 되는 걸까?
“가야지.”
“우리는 이제 아빠 가족이 아니잖아.”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한번은 보고 와야 하지 않겠니? 발인은 못 보더라도 한번 들르기라도 하자.”
엄마는 나와 함께 싸잡혀서 욕을 먹어도 아빠에게 예의를 지키려 했다. 나도 따라야겠지. 신발 바닥을 노리는 웅덩이를 여러 개 지나 버스에 올라탔다.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서울이었다. 일을 하다가 미끄러져서 고층에서 떨어졌다며 동료가 소식을 전해왔다고. 난 떨리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네 아빠야.”
“응.”
“엄마가 가는 게 맞는 거겠지? 갔다가 머리채나 잡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관심이나 있을까. 엄마가 아니라 내가 가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엄마를 혼자 보낼 수는 없어서, 가서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 무서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술 취해서 우리 집을 찾아온 아빠를 데리고 갔던 친척들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생각보다 커다란 장례식장은 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국화꽃의 화환과 꽃바구니까지 성대했다.
“…진짜 죽었네.”
무심코 화환에 박힌 글자들을 읽었다. 성진, 아연, 인설, 유한, 건축… 건축… 마지막은 기웅이었다.
“…….”
기웅? 하필 거기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회사명이다. 대기업이니까 우연이겠지. 엄마는 내 손을 풀고 당당하게 들어가서 조의금을 넣고 이름을 적었다. 우리에게 쏠리는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난 영정 앞으로 갔다. 여기 원래 우리가 서 있어야 했던 거구나. 그럼… 누구라도,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아는 익숙한 얼굴이 단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안 계시네? 아주버님도?”
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아빠가 아는 사람은 맞을까? 아빠가 죽은 건 맞아? 엄마가 조금 더 둘러보다 누군가와 아는 척을 했다. 아, 맞구나.
“영진아. 우리가 있어야겠다. 연락이 끊긴 지 오래라네.”
난 엄마가 건네준 상복으로 갈아입고 전호에게 연락해서 지미를 맡겼다. 검은 정장을 입은 직원에게 장례 예의를 배워가며 사람을 하나하나 상대했다. 혹시라도 기웅 쪽의 사람이 올까 봐 내 신경은 온통 입구에 향해 있었고 엄마는 사람이 없을 때 눈물을 짓고 아빠도 원망하다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했다. 깔끔하게 드라이 됐던 머리가 또 아무렇게나 묶여있었다.
아빠의 영정사진 앞에 둔 소주잔과 엄마와 내가 한 잔씩.
“젊은 나이에 술 먹고 떨어지는 게 웬 말이야. 허무해라.”
발인이 끝난 날 모두가 돌아가고 처음으로 가족끼리 술을 마셨다. 내가 우려하던 사람은 오지 않았고 가끔 사장님이라는 분과 홍탁이라는 아저씨가 와서 아빠를 위해 울어줬다.
“당신은… 영진이한테 심한 말 해서 빨리 죽는 거야. 벌 받은 거라고.”
“…….”
“빌어먹을 새끼.”
엄마의 술주정을 가만 들으며 진동을 껐다. 두 병을 더 가져와 뚜껑을 열어주니 엄마가 병째로 소주를 들이켰다. 이틀 동안 장례식의 어두운 분위기에 눌려 있었다. 큰 소리로 울어주는 엄마가 있어서 아빠도 가는 길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난 울다 쓰러진 엄마를 안아서 이불 위로 옮겨놓고 아빠에게 돌아와서 술잔을 마주쳤다.
엄마는 만나는 사람이 생겼어. 머리도 다듬었고, 이쁘게 염색도 했어. 소소한 정보를 나누다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하는 건 여전해.
“응. 우한아.”
― 내가 준 선물 잘 받았어?
“아빠를 죽였어?”
웃음소리가 익숙한 듯 어색하다. 그 전날에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일 방학이니까 집에 같이 가자. 공연 표를 구해놨으니 내일 자고 가. 엄마한테 말했어? 분명 그런 얘기들을 하며 중간에 웃음을 흘렸었다.
― 응. 딴 놈들도 다 죽였는데 그것도 알아? 나 뉴스도 탔어.
“…몰랐어. 뉴스는 잘 안 봐서.”
― 부의금은 넣어놨으니까 까먹지 말고 잘 챙겨.
“…….”
― 미국으로 와. 와서 얼굴 좀 보자.
“…싫어. 네가 한국으로 와.”
한국은 아무래도 위험하지. 놀리듯이 웃는 얼굴도 해맑아서, 나보다 키가 작아서, 착해 보이니까… 폭우처럼 쏟아지던 그 날도 우한이에 대한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왜 그랬어?”
― 네가 좋으니까.
“…왜 그랬어?”
― 궁금해?
“응.”
― 궁금하면 이리 와서 물어야 하는 거 아냐?
“……싫어.”
― 천재상 때문이야? 천해가 널 언제까지 지켜줄 거라고 생각해?
나를 지켜줘서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니까. 얘기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을 이어갔다.
― 전화 받아줘서 고마워. 보고 싶고 내가 너무너무 사랑해.
“…….”
―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여기로 와. 그럼 내가 다 알려줄게.
싫어.
― 김영진.
전화를 끊고 남은 소주를 들이켰다.
“아빠. 잘 가.”
장례식에서 썼던 칫솔, 양말 등을 버리고 쌓인 빨래도 하고, 집안일이 바빠서 전호의 전화도 받지 못했다.
“응. 전호야.”
― 아버지 잘 보내드리고 왔냐?
“응. 고마워. 아, 미안. 먼저 전화를 했어야 했는데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 아니야. 내가 한번 갔어야 했는데. 그게 미안하지.
“…너 나한테 각서 쓴 거 녹음해줬었잖아.”
왁!!! 소리가 커서 핸드폰을 잠시 떨어뜨려 놓았다. 깜짝이야.
“그거 듣기 싫으면 미안하다는 말에 너무 많은 걸 담지 마.”
― …….
“수육 좀 싸 왔는데 먹을래? 장례식 밥이라서 좀 그럴까?”
― 이따 갈 테니까 밥이나 해놔.
“응. 얼른 와. 나 점심 아직이라… 엄마?”
문소리가 들렸는데 왜 안 들어오지? 현관에 선 엄마의 손엔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고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전호야, 미안한데 나중에…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왜? 왜 저러는 거지. 오늘에야말로 2층으로 내려가서 그를 찾을 생각이었다. 소파에 쓰러지듯 누운 엄마가 머리를 짚었다.
“영진아. 우리 어떡하면 좋아?”
“…왜? 누구 만나고 왔어?”
“보험상담사. 아빠가, 아빠한테….”
정말 빚이 있는 건가? 보험상담사가 그런 걸 달라고 할 이유가 없잖아. 아니면 보험상담사라는 사람한테 돈을 빌린 건가? 난 잠자코 엄마를 기다렸다. 혼란스러운 마른세수가 끝나고 엄마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대체 얼만데.
“사망보험금이 나올 거니까 서류 좀 준비해달래.”
힘겹게 떨어진 보험금의 액수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아빠가 죽기 반년 전에 보험을 여러 개 들어놨다더라.”
“…….”
넣어놨다는 부의금이 이건가. 이러다 내 주위에 필요 없는 사람이 늘어나면 다… 다 죽여버리는 건가. 그런 적은 없었잖아. 갑자기, 그럼 그 사람도 지금 위험한 거 아닐까? 난 엄마를 두고 2층으로 뛰어 내려가서 문을 열었다.
“…어…?”
아무것도 없어. 신발을 신고 소파가 있던 자리와 자주 꾸겨졌던 카펫 자리를 훑어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난 핸드폰으로 달력을 보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연결이 되지 않아….
내가 너무 늦게 온 건가. 이렇게 바로 연결이 안 된다니. 바쁜 건가. 다시 걸자마자 익숙한 목소리, 또다시 걸어도 그대로였다. 연결이 안 된다고. 핸드폰으로 오늘 날짜를 다시금 확인했다. 한 달하고도 열흘이 지나있었다.
* * *
“진짜 혼자 가려고?”
“응. 지미 좀 잘 부탁해.”
엄마는 그날 이후로 충격에 몸져누워서 아직도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말로 배운 삼계탕을 끓이고 있을 때 새삼 우리가 가지게 된 돈이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 하나도 고맙지 않다.
그가 선물해준 값비싼 시계를 한번 차보고 제자리에 올려뒀다. 지미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돈 한 푼 없었던 아빠가 그 많은 보험금을 어떻게 냈을까. 어느 날 갑자기 기분 좋은 얼굴로 술을 크게 샀다고 했었다. 난 과거의 내가 아니니 혼자 가는 것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를 뒤따라오던 사람이 있는지 몰랐고 뒤늦게 뛰어가다가 잡힐 거라고는 것도 알지 못했다.
“…누구세요?”
요즘 사람들은 정말 키가 크구나. 난 커다란 벽시계를 다시 한번 보고 무릎을 모았다. 한 번 더 전화해볼까. 여기 있는 공중전화로 하면 내 전화인지 모를 거 아니야. 지금 나를 잡아둔 이 남자한테 전화를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지. 갑자기 때리고 윽박지를지도 모른다. 문자를 남기면 언젠가는 보지 않을까. 정말 이대로 끝인가. 난 지금 가면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그 사람에겐 더 나은 걸 수도 있다. 내 앞에 선 남자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손수건.
“…천재상이라는 사람을 아세요?”
그럴 리가. 우한이가 보낸 사람인가. 내가 진짜 오나 안 오나 보려고?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을 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자신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수능 볼 때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잠깐 교문 앞에 나타나서 나를 놀라게 했을 뿐. 아르바이트할 때도 마찬가지고 갑자기 집에 들어와서 내 방을 차지했을 때도. 다 내가 혼자 놀란 것뿐이지. 우한이는 나타난 잘못밖에 없었다. 난 내 손으로 눈물을 닦고 앞에 있는 사람의 재킷을 잡아당겼다.
“제 손으로, 닦으면 되거든요. 손수건… 여기 가져가세요.”
“…….”
가기 싫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그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어떡하지.
“왜 우시는 거예요?”
“…차였거든요. 엄청 심하게, 차였어요.”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고 집을 빼줄 수 없었나? 힘들 때 찾아오라고, 그랬으면서.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변덕이 심하고, 원래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다. 얼굴에 열이 올라서 눈물도 금방 차올랐다.
“제가 정말, 좋아했…는데… 그 사람은, 아니었나 봐요.”
우한이한테 이런 것도 얘기하는 거냐고 묻자 남자는 나를 가만 보다가 어디 가지 말고 앉아 있으라고 했다. 위험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출국 전 눈물 콧물을 흘리는 이야기가 들어가겠구나. 이윽고 남자가 물과 휴지 그리고 새콤달콤을 사다 내 품에 안겨줬다.
“감사합니다. 근데 차인 거 아니에요. 거짓말이에요. 우한이한테 차인 거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경황이 없어서 잘못 말한 거라고 아무렇게나 얘기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제가 아는 사람이 아마 차인 것 같네요.”
“…그분도 제, 동지네요.”
다녀와서 찾아가 봐야지. 그때쯤엔 한세 형도 내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큰 건물을 찾아갈 수는 있다. 앞에서 기다려보고, 아니면 뒷문에서라도 기다려볼 것이다. 그의 차를 찾아서 주차장도 가볼 거고. 휴지에 코를 풀고 봉지에 쓰레기를 버렸다.
“…….”
“담배 피우세요?”
“아니요.”
“그럼 저 피우고 와도 될까요?”
“아니요.”
“우한이가 저 담배 피우지 말래요?”
“…….”
요새 흡연량이 많이 늘어서 버티기 힘들 것 같은데. 서 있던 남자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저는 언제 들어가면 될까요?”
“곧 오실 겁니다.”
미국에 있는 게 아니라 한국에 있다니. 검색창에 기웅을 쳐봤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수많은 일이 터져 나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이건주의 얼굴은 모자이크가 되어서 알아볼 수 없었고 아마 실제로 사진을 보여줘도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한이를 찾던 사람들은 지금 조용하다. 증거가 없다. 자살이 맞다. 분분했던 의견도 더 새롭고 충격적인 소식에 묻혀갔다.
“우한이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온 건가요?”
“아니요. 계속 도망 다녀야 해서 한국으론 오지 못합니다.”
“그럼 누가 온다는….”
“하영진.”
들려오는 내 이름이 너무 낯설다. 난 몸을 일으키고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잘, 먹는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살이 빠졌지. 그의 손에는 여권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어디 가는 건가. 혹시 나를 찾으러 온 걸까. 그렇다면 집을 왜….
그가 하는 말이 다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하다가 여권을 빼앗겼다. 눈물이 다시 날 것 같아서 안쪽 살을 아프게 씹었다.
“즐거운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가세요.”
우한이 쪽 사람이 아니었구나. 손수건은 아직 깨끗해서 남자의 주머니에 몰래 넣어줬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삐쭉삐쭉해서 남자답고 멋있었다. 모를 줄 알았는데 남자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안 써서요….”
“손수건은 하나쯤 들고 다니는 게 좋습니다.”
검은색 하얀색 체크 무늬 손수건을 다시 받았다.
“아, 네. 감사합니다.”
멀리서 그가 내가 가진 표와 비슷한 걸 들고 걸어왔다. 진짜 같이 가려는 건가? 나를 잡아두고 못 가게 하려는 게 아니라?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혹시 몰라서 내 통장으로 들어온 돈을 엄마에게 수표로 전해줬으니까, 그래서 조금 홀가분하다. 눈물이 자동급식기처럼 규칙적으로 차올라서 따로 닦지도 않고 그가 닦아줄 때까지 가만 기다렸다.
“이렇게 울 거면서 뭘 헤어지재.”
“보고 싶었어요.”
“응.”
그가 땅콩을 입에 넣어줄 때도 와인을 마시게 해줄 때도, 입에 밥이 들어오든 면이 들어오든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모자란 걸 보충이라도 하듯이. 틈틈이 들어오는 물을 마셨다.
“한번 찾아올 법도 한데 잘 참았네.”
날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얼굴을 건드려보고 싶어서 손으로 내 팔을 잡았다.
“뭐 하고 살았어?”
“…아빠, 이혼한 아빠가… 돌아가셨고, 지미가, 중성화 수술을 했고.”
“그리고?”
“엄마가… 부자가 됐어요.”
그는 내게 계속해서 그리고를 물었다. 큰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설명해주고 혹시 몰라 전호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닦아주는 손이 따뜻해서 가까워진 그를 모르고 떠들다가 입술이 맞닿았다. 기분 좋아. 내 입 안을 촘촘하게 쓸고 가는 느낌이 솜사탕을 입에 가득 담은 것처럼 달콤하다. 난 그의 어깨에 팔을 감고 내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이상하게 주위에 아무도 없는 비행기였다.
“피하지 말고 좀 붙어봐.”
“붙은 건…데.”
“그게?”
황당해하는 그의 입술에 가까이 가서 살짝 빨아올렸다. 계속해도 되는 거겠지. 그가 잡은 내 팔이 조금 불편해졌지만 나는 튼튼하니까, 입가를 핥아주며 남아 있는 와인 향을 닦아내다 갑자기 떨어졌다.
“하지 말까요?”
“아니. 여기서 자위하기는 싫어서.”
위에서 우릴 비추는 옅은 조명을 껐다. 아까 그가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리모컨의 기능을 찾아보길 잘한 것 같다. 다시 나를 당겨 안은 그에게 몸을 붙이고 그의 중심에 손을 얹었다. 창문이 갑자기 열려서 밤하늘의 옅은 빛이 그의 얼굴을 밝혀줬다.
“이런 데서 해본 적 있으세요?”
“응.”
“저하고는 싫어요?”
“…아니. 그럴 리가.”
이제 와서 조금 고민이 됐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갈까? 심드렁한 표정을 좀 더 지켜보다 아래로 내려왔다.
“어디 가?”
“아, 가는 게 아니라 앉으려고요.”
“화장실 가서 혼자 하려고?”
그건… 그건, 어두워서 다행이다. 그때는 내가 조절이 안 됐던 것이다. 원래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나를 찌르는 손가락이 너무 야해서 그런 거였다. 옆으로 넘어가다가 허리를 안겨 무릎에 안착했다.
“애매하게 섰잖아.”
너 때문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워서 작은 웃음이 올라왔다.
“빨아드릴까요?”
“그럴래?”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묻혔다. 괜찮은 것 같으니 조금 더 붙어 있을래.
“머리카락… 부드러워요.”
“응.”
“몸을 보고 싶어요. 만지고 싶어요.”
내가 오늘따라 이상해도, 봐줬으면 좋겠다.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추고 그의 손을 풀어냈다.
“먹고 싶어요.”
얇은 옷을 더듬더듬 만지고 그의 뺨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소리 잘 참을 자신 있어?”
“…네. 자신 있어요.”
마주 보는 눈이 오늘따라 더 아름다웠다. 예고 없는 입맞춤에 약속을 까먹을 뻔했다. 소리를 삼키고 그를 도와 바지를 벗었다. 이런 데서, 아… 내가 하자고 했지. 내가 조금이라도 떨어질 것 같으면 그는 다시 입술을 붙였다.
“조용히, 할 수 있….”
“가만있어.”
그는 빠르게 나를 흔들었다. 같이 하면, 좋을 텐데. 그의 손이 척척하게 젖어가는 소리에 얼굴에 점점 열이 올랐다.
“흐….”
의자 위로 머리가 삐져나갈 것처럼 서 있던 걸 이제야 깨달았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옷이 다 구겨질지도 몰라. 조심해야….
“으응!”
입을 막고 그를 마주 봤다. 소리가 너무 컸어. 어떡하지.
“안 되겠다. 먹여줘야겠네.”
혼나지 않았어. 귓가를 쓰다듬는 손을 가져와서 핥았다. 좋아해. 이 사람은 내가 처음으로 좋아해 본 사람이다.
영어도 못 하는 게 용감하다. 그가 나를 끌고 온 곳은 내가 정말 용감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그래도 10년을 넘게 배웠는데… 그들이 하는 소리가 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 아무것도 안 입은 거지, 지금?”
“…짐을 열 수가 없어서…네. 예. 맞아요.”
젖어서, 더러워져가지고. 점점 목소리가 사라질 것만 같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춰줬다. 내가 흥분해서 혼자…. 난 앞서가는 그의 팔을 잡고 떨어졌다.
“죄송해요.”
“뭐가?”
“제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말도 없이 혼자 한 거요….”
화가 풀린 그의 눈은 어떤 감정도 갖지 않은 것처럼 무표정하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게 한정돼있어서 더 무섭게 느끼는 걸 수도 있다.
“여기, 정말 따로 볼일 없으세요?”
“있어.”
“…그럼 저는 제가 찾은 숙소로 갈 테니까, 나중에… 나중에 만날 수 있게 차단을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또 울 것 같아서 코를 한번 눌렀다.
“제가 전화하는 거 싫으세요?”
입술도 해주고, 다 했으면서. 내가 억울함에 속이 끓어도 그에게선 대답이 없다. 옆에서 새까만 차가 나타나 그 안에서 나온 남자가 그를 찾을 때까지 가만히 서서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한국에는 돌아오실 건가요?”
“…너 나하고 비행기에서 뭐 했어?”
“섹스, 그 비슷한 거요.”
그는 다짜고짜 내 팔을 잡아 차에 밀어 넣고 옆자리에 탔다. 안 데려다줘도 괜찮은데. 차단만 풀어줄 수는 없을까.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그만 듣고 싶다.
“여기서 버스 한 번이면 바로 간다고 인터넷에.”
“조용히 해.”
화났다. 난 창문에 바짝 붙어서 바깥을 바라봤다. 크다. 뭔가 엄청나게 크고, 큰 곳이네. 제주도 한번 안 가본 내가 처음으로 미국에 왔다. 핸드폰이 울릴까 봐 화장실에서 무음으로 변경을 해두길 잘한 것 같다. 핸드폰의 빛도 새어 나오지 않게 가방을 단단히 잠갔다. 내가 무사히 온 것이 궁금한 게 아니다. 내가 지금 이곳을 지나치고 있는 것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하영진.”
“네?”
“오늘 만나러 가는 거 아니지?”
“아… 네. 오늘은 아니에요.”
어릴 때처럼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쭈뼛쭈뼛 자신의 이름을 말하던 때는 지나갔다.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심각해져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이런 것들을 모아야 유리하다는 야비한 성숙인이 되었다.
“오늘 어디 가시나요?”
“응.”
“회사 일이 바쁘신가 봐요.”
“응. 바빠.”
나랑 같이 있을 땐 어디 출장 간 적이 없었는데. 그는 커가고 있는 걸까. 매일매일 얼굴을 보는 사이라서, 두렵고 즐거웠던 것도 다 옛날 일인가. 아까 전화 한 통을 해서 마음이 바뀐 걸까. 빠르게 변화하는 그의 기분에 내 모든 신경을 쏟았지만 내 예상은 번번이 비껴가서 자신감이 떨어졌다.
“가자. 섹스 비슷한 거 하러.”
짐을 챙겨야 하는데… 내 쪽 문을 열러 온 그가 내 손을 꼭 잡고 당겼다. 크다고, 크다고 그렇게나 말했지만 진짜 호텔이 이렇게 클 수가 있는 건가. 꼭대기가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높고 크다. 여긴 대체 어디지. 순식간에 엘리베이터에 태워진 나는 구석으로 가려다가 그에게 단단히 붙잡혀 중간을 꿰찼다. 손에는 어느새 카드키로 보이는 것이 들려 있었고 난 거실을 지나 엉뚱한 방에 던져졌다.
“짐부터….”
“그럴 시간 없어.”
하지만 내 짐에는 엄마가 입맛이 없을 때 먹으라던 먹거리들이 있었다. 여름의 나라에서 여름의 나라로 온 사람답게 나는 냉장고를 찾는,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많이, 피곤하세요?”
“지금 할래? 씻을래?”
“…….”
“씻을 거면 같이 씻고.”
하자는 거구나. 정말로.
모자란 손으로 그의 몸을 안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팔에 입을 맞췄다. 기억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아, 하아… 괜찮아요?”
멈칫한 고갯짓이 선선히 이어져서 제대로 들어갔는지 재차 확인하고 뒤로 물러섰다.
“못… 하겠어요.”
콘돔을 빼낸 뒤 나를 이불로 덮었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모순이 이제 와서 창피하다.
“…죄송해요. 못할 것 같아요.”
내 머리 위로 남은 이불이 덮어씌워졌다. 내가 보기 싫어진 건가. 또 답답하고 지겨워졌을까? 우린 공항에서 헤어졌어야… 그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우한이와 모든 걸 정리하고 돌아와야 했었다.
“네가 창피해하니까 덮어준 거야. 혼자 오해하지 말고 왜 이러는지 대답해.”
“하니까… 하니까 좋았는데,”
“응.”
“이러면 안 될 것 같아요. 역시 저는 예약해놓은 곳으로 가고….”
“가고?”
“여기에서… 업무를 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전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나도 모르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난 그게 핑계라는 것도 안다. 우한이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만날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이 관계를 가볍게 생각한다고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든 연락을 취할게요.”
“그래?”
“…네… 저, 한세 형 번호도 아직 있고, 어디 다니시는지도 알아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 뒷문이 괜찮으시면 그렇게 할게요.”
그의 원래 집은 아마 입구부터 못 들어갈 것이다. 경비가 허술한 201호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역시 회사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뒷문이 어디인 줄 알고 기다려?”
이불 안쪽은 생각보다 무섭구나. 바깥은 밝고 시원하고 안쪽은 어둡고 컴컴하다. 이대로 색이 온통 까매지기 전에 빠져나와야 하지만 목소리가 들려와서 참을 수 있었다. 가빠지려는 호흡을 정돈하고 뒷문이 없다면 어느 문이라도 좋으니 몇 날 며칠이라도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얼마나 기다릴 건데? 그렇게 기다려서 네가 나를 만약에 만나면 그때 나하고 섹스해줄 건가?”
“…….”
“그때 내가 안 되면 넌 계속 기다릴 거야?”
아. 이불에서 나와 그를 쳐다봤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시선을 내리고 비어있는 손을 잡았다.
“네가 더 죄책감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게.”
“어떻게요?”
“그 더러워진 몸으로 나와 자는 거야.”
나도 모르게 잡은 손을 놓자마자 그가 내 손목을 잡아 왔다. 그의 입에서 듣는 질타는 더욱 잔혹하다.
“왜? 네가 원하는 죄책감도 갖고 내가 원하는 네 몸도 갖는 아주 괜찮은 방법이야.”
“상처받았어요. 많이요.”
다른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이불 안으로 들였다. 커다란 손이 내 심장을 두들기고 점점 올라와 턱을 움켜잡았다.
“지금 하면 네 죄책감이 더 깊어질 거야.”
“하면 기분도 좋아질 거예요.”
틈으로 들어오는 에어컨 바람이 주위로 퍼져 나가며 점점 이불이 벗겨진다. 난 감은 눈을 뜨고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그를 가득 담았다. 행복해. 어두운 냄새가 밴 나는 그의 향에 스몄다.
“넌 그러면 안 되지. 기분이 안 좋아지게, 참아.”
“네. 참아, 볼게요.”
탄탄해.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안으로 점점 밀려 들어갔다. 안 그런 척 움찔대는 다리 안쪽을 쓰다듬었다. 이번에도 이불에 덮이기 전에 그의 것을 위아래로 만져줬다. 긴 팔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안아오는 품이 좋다. 난 마음껏 그의 몸에 흔적들을 남기다 아래로 떨어졌다. 움직임이 불편하다.
“아, 만지고 싶어요.”
손을 다시 그의 중심에 가져다 놓았다. 만지고 싶어. 다른 데도 만질래.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줬다.
“하아… 감사합니다.”
머리카락이 내 손에 감겨 그가 조금 더 내게 내려와 나를 안아왔다. 귓가에 미약한 숨소리를 듣고 손을 조금 빨리했다. 앞으로 밀려오는 그의 것이 점점 커져 간다. 입술을 찾아 내려오는 붉고 예쁜 그의 입술을 맞았다.
“으응… 으음.”
섹스를 하다가 그의 것이 이렇게까지 선 적은 처음이었다. 가르쳐준 대로 손가락으로 앞을 가로막고 질척해진 살을 잡았다.
“손에 다 안 들어와요. 다 잡아드리고 싶어….”
양손을 쓸 수 있게 손을 풀어주시면, 뒷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양손이 한 번에 잡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물에 가려 희미하게 보이던 그가 점점 멀어진다.
“화내지… 마세요.”
“응?”
“오늘은 화 안 내셨으면 좋겠어요.”
왜 오늘이냐면 어제부터 내 하루가 이틀로 늘어나서 그렇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멈춰서 내 눈물을 닦아줬다.
“기분이 어때?”
“좋아서 죄책감이, 느껴져요.”
벌써 너무 많이 했어요. 그에게 고자질하듯 일러바치고 눈을 감았다. 딱히 어떤 것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해버린 게 미안해서 슬프다.
“콘돔… 갈아야 할 거예요.”
그는 얼마나 했는지 봐야겠다며 내 것을 확인해줬다. 흥건하게 밑으로 흐른 정액을 보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졌다. 능숙한 손놀림이 눈에 들어와서 다시 만지고 싶어졌다.
“넣어주세요….”
안에다가, 정신없이 쏟아진 내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에게 손을 뻗었다. 다시 올라온 사람이 내 뺨을 만지며 내 것이 안으로 힘겹게 들어갔다. 몸을 뒤틀어 사정감을 낮추고 다시 그의 몸을 닿는 대로 만졌다.
“하아, 하아… 좋아… 너무 좋아요.”
하반신이 잡혀서 앞으로 계속 당겨진다. 난 손을 떼어내고 그의 몸에 내 온몸을 비비며 입술을 머금었다.
“아아, 하, 흐으응.”
“하영진, 좋으면 안 되잖아.”
목을 끌어안고 어깨를 핥고 입술을 비볐다. 엉덩이가 잡혀 사정하고서도 계속되는 절정이 나를 정신없이 만들어서 귀를 조금 깨물었다.
“흐윽, 아, 그만… 흐응, 아앙! 아! 아앗, 그만. 같이 할래요. 싫어….”
“계속해. 난 하고 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긴 호흡을 불어넣자 몸이 정신없이 요동쳤다.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저, 방금.”
“응. 그렇게 불렀지. 할 때마다.”
이럴 때마다 부르면 너무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내 볼을 쓰다듬던 손이 입술 안쪽을 침범했다.
“여기 만져봐.”
그가 비비는 배 쪽에 손을 넣었다. 땀인가? 왜 이렇게 축축하지. 손가락을 보니 하얀 점액 같은 것이 묻어나서 입에 넣어봤다. 우와.
“네 목소리만 듣고 싸버렸어.”
그는 내 입술에 길고 짧은 입맞춤을 나눠줬다. 작아서 다행이다. 조금 더 작았으면 덜 아팠을까? 몇 달 동안 병원에 갇혀있던 나와 다르게 그는 자유롭게 움직인다. 나를 욕조에 넣어주고 밖에서 기다리는 그를 보며 지난날이 떠올랐다. 정말, 죽을 것처럼 좋아서 쓰러질 뻔했었다.
“가운은 왜 입으셨어요?”
“네가 달려들까 봐.”
“아, 그건….”
그땐, 처음이라. 내게 물이 쏟아졌다. 얼굴을 마구 닦아봐도 물이 끊어지질 않아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네가 자꾸 더럽다고 해서 물 좀 뿌려봤어.”
“…….”
“이제 더러운 너를 좀 씻겨주고 다시 섹스해보려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하고 같이 있으려고 그렇게 말했던 거였어. 물과 함께 떨어지는 눈물이 멎고 난 그를 올려다봤다.
“좋아해요.”
“…뭐라고?”
“제가, 좋아한다구요.”
다리 틈으로 보이는 그의 것을 입에 머금고 속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었다. 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줬다. 목 끝을 짓눌러오는 살이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입을 더 크게 벌렸다. 내 뒷머리를 잡은 손이 급하게 나를 안으로 당겨 숨구멍을 틀어막았다.
“윽, 으윽”
“쌀 때까지 참아.”
고개를 마구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꼬불꼬불한 털을 헤쳐 코끝을 가져다 댔다. 끝까지 빠졌다가 들어오는 움직임 때문에 내 것도 점점 커지는 기분이 든다. 가까스로 숨을 들이쉬고 숨을 막았다.
“숨 쉬어. 바로 안 끝내.”
“으응.”
괜찮다고 그의 손가락 끝을 잡았다가 놓았다. 그의 혀가 내 입안을 헤집을 때보다 훨씬 숨쉬기가 편하다. 한참 동안 내 숨을 통제한 그의 앞에 기꺼이 입을 벌렸다. 곧게 선 내 것을 감추고 그의 정액을 남김없이 삼켰다. 끊길쯤 앞을 머금고 빨아들이면 그의 허벅지가 경련한다. 좋은 거겠지. 사정으로 그 여부를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하고 할 때는 좋다고 표현할까? 우리는 이런 행위에 대해 딱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넌 안 해?”
“네. 괜찮아요.”
다시 감춰진 살을 가만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쳐서 새어나가는 물을 마개로 막고 돌아왔다.
“좋아한다고 누구한테 한 거야?”
“…네?”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과 밑을 가리켰다. 방금 내가 한 짓의 순서를 돌이켜보다가 뺨을 움켜잡았다.
“네가 내 몸 좋아하는 게 하루 이틀이야? 부끄러워할 것 없어.”
“여기, 여기 앉아주세요.”
욕조도 이렇게 크니까 옆으로 나란히 앉아도 될 것 같은데 그는 거의 누운 자세로 나를 위에 올려놓았다. 따뜻한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았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응.”
“…왜 주하는 이름이 주하예요?”
“주하?”
“동생 이름이 주하라고 하셨는데, 천재연 선생님은 재잖아요. 그럼 주하도 재하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주하 이름을 알려줬었다고?”
그럼 내가 동생 이름을 어디서 들었지. 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눈을 감췄다. 아, 한세 형한테 들은 건가.
“내 이름은 할머니가 지은 거고 주하는 할아버지가 지은 거야.”
“그럼 천재연 선생님도 할머니가 지으신 거예요?”
“응. 천재연한테 관심 갖지 마. 걔 남자 많아.”
“…네.”
내가 마지막으로 병원에 간 날은 화요일이었다. 함께 가고 싶지 않아서 몰래 다녀왔었는데 그날도 그 의사는 피로라는 찜질방에 갇힌 사람 같았다.
“저, 쓰다듬어주세요.”
“응.”
“입술도 해주세요.”
“알았어.”
나른해진 눈가를 지분대다 눈꺼풀을 꼼꼼히 감겼다.
“잘생겼어?”
“네. 속눈썹 길고 많아요.”
“…갑자기 짜증 나네.”
몸에서 내려오려다 허리가 숨도 못 쉬게 안겨서 제자리에 안착했다. 그와 함께하는 물은 무섭지 않다.
* * *
카드키를 꼭 쥐고 호텔을 나와서 높이 솟은 건물의 끝을 확인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잠이 많은 사람이라 그대로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새벽에도 나를 덮쳐오던 몸이 새록새록 기억나서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다행히도 공원이 멀지 않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지나가다가 만난 큰 거울에 내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눈가를 유심히 살폈다. 새벽에 울지 말걸. 약해 보이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인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는데도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상상과는 달리 분수대는 조용했다. 아침 7시부터 운영하지는 않나. 난 세심하게 세공된 조각상을 보고 깨끗해 보이는 물속을 보다가 입을 뗐다.
“이 분수대가 굉장히 유명하대.”
“…….”
“여기 꼭 와보고 싶었는데 너랑 와 볼 줄 몰랐어.”
“…천재상은 이런 데 싫어한대?”
“여기서 살았으니까, 이런 거 재미없을 거야.”
문득 벚꽃을 보러 갔을 때가 기억이 났다. 황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하면서도 내 부탁을 들어줬었다.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뒤로 돌다가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가장 먼저 물에 빠졌고 이윽고 내 주위가 온통 차갑고 먹먹해졌다. 올라가는 공기 방울과 내 가슴을 억누르는 강한 힘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물만 먹히고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지미가 아직 한국에 남아 있어. 이 주위에는 그 사람이 자고 있다. 일어나자마자, 나를 찾을 텐데.
“푸하… 하아, 하.”
상반신이 쫄딱 젖어 몸이 떨린다. 난 숨을 쉬기 위해 정신없이 폐를 움직였다. 잘 보이지도 않는 손이 내 옷을 모두 벗기고 그 위로 새로운 옷이 입혀졌다. 정신이 없어서 아무거나 잡고 숨을 들이켜고 눈에 묻은 물을 닦아냈다.
“하아, 하… 무슨.”
“안녕?”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이 다가와서 내 뺨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머리에서 흐르는 물이 검은색의 후드티를 적셔간다. 우한이는 반팔 차림으로 내게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3월 3일이 누구 생일이게?”
“…….”
“내가 사랑하는 애 생일이거든. 근처에 엄청 유명한 초코케이크 집에서 사온 거야. 노래 대신 불러줄까?”
“나는 그런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
갑작스럽게 시작한 생일 축하 노래에 맞춰 줄 수 없어서 그저 가만 바라봤다.
“네가 옛날에 내 생일 챙겨줬었잖아. 아, 참. 왜 이번엔 안 죽었어? 시도도 안 한 것 같은데.”
“…….”
“천해가 그렇게 잘해줘? 돈 때문은 아닐 테고.”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빨아먹는 모습도 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웃는 얼굴, 무표정할 땐 조금 싸늘한 인상도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왜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나만, 나만 이곳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었다.
“나, 다 기억이 났어.”
그래?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포크질을 하던 우한이는 젖은 오른쪽 발을 뻗어놓고 포크를 흔들었다.
“그럼 네가 우리 집 앞에서 내 생일 챙겨주던 것도 기억해?”
초코파이가 없어서 난 좀 더 비싼 몽쉘을 샀고… 기억하기도 민망한 케이크였다.
“어떤 청년이 아저씨한테 세 배를 더 주고 그 건물을 샀대. 그래서 다시 사라고 돈을 줬더니 그걸 들고 튀더라? 시발. 잡아서 혼쭐을 내줬어.”
“…….”
“돈 좀 벌었다고 거들먹거리는 게 아주 마음에 안 들었거든.”
“우한아.”
“그 청년이 천재상이더라고. 난 천해 쪽 사람은 딱 한 명 만나봤어. 그쪽으로 연이 없기도 해서, 아버지나 그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냈지. 본인 기준에 귀한 사람들은 보여주지도 않더라. 주워온 자식 섭섭하게.”
아버지도 너무하시지. 웃고 있던 우한이가 케이크를 한입 떠먹었다. 질척질척한 식감에 우물거리는 입이 한참을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시간이 없어.
“왜 그랬어?”
“네가 좋아서.”
“…전화로 했던 말이잖아.”
“응. 그 정도 일은 쳐줘야 네가 와줄 것 같았거든.”
“…….”
“여기까지 와줘서 진짜 고마워.”
여기 오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궁금했다. 주먹질이라도 한번 해보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우한아. 나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왔어.”
“이거 한입 먹어. 너무 달다.”
커피를 못 마셨었는데 마시네. 다른 쪽에 있던 커피가 블록을 한 칸 넘어왔다.
“디카페인이야. 네가 마실 수 있는 거.”
“…….”
난 한 칸을 넘어서 커피를 가져왔다. 따뜻해. 조깅하는 사람들이 조금 늘어난 것 같다.
“내가 뭘 탔을 줄 알고 먹어?”
“탔어?”
“아니. 나는 타는 건 별로.”
다시 언급해봤자 제대로 된 답을 듣긴 틀린 것 같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내뱉을 게 뻔하다.
“나 그 사람하고 다시 잘… 화해한 것 같아.”
“그래?”
“응. 그래서… 방해하지 말라고 얘기하러 왔어.”
“그리고?”
“그리고 전호는 건들지 말라고… 부탁하려고.”
혹시라도 괴롭힐 거면 나에게 해달라고 말했다. 입술 주위의 초콜릿을 닦아 먹던 우한이는 포크를 물고 모자를 벗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끝으로 정리하고 손목에 있던 얇은 머리끈으로 뒷머리를 짧게 묶었다. 어릴 때는 안경을 꼈었는데, 안 보인다.
“한번 자주면 네 부탁을 들어줄게.”
“…….”
“천해는 걱정 안 돼? 내가 할멈도 아니고 그 손주 하나 못 건드리겠어?”
생각해보니 그는 무방비한 것 같기도 하다. 자동차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아빠처럼 불의의 사고를 가장해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딱히 걱정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안전한 곳이다.
“…우리 했잖아.”
“응. 좋더라.”
“…….”
“내 처음은 다 김영진이 가져서 더 좋더라.”
창백할 정도로 하얀 볼에는 아직도 초콜릿이 묻어있었다. 행복하다며 심장 쪽을 부여잡는 손을 뚫어져라 보다가 내가 왜 그런 상황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는지 깨달았다. 반대로 우한이는 내가 누구를 부르든, 나와 섹스만 한다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김영진.”
“응.”
“네가 원하는 조건을 말해. 최대한 들어줄게.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되고.”
자는 거 말고 다른 건 없나. 만나기도 힘들 것 같고. 주머니에 숨긴 손이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떨리고 있다. 추워서, 물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 커피는 아직 따뜻하다.
“비 오는데 왜 나를 두고 갔어?”
“비?”
“비가 오는 걸 알고 있었잖아. 난 네가 떠나고 빗소리를 분명 들었어.”
방학 기간에 공사를 시작한 학교에 잠깐 들른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난 그 창고에서 며칠을 더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한꺼번에 흘러간 그 시간 뒤로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왜, 그랬어?”
“알려줘도 넌 이해 못 할걸?”
“내가 거기 갇혀있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을 했어?”
“응. 내가 아니라 준희한테 초대장을 줬잖아. 준희는 이제 더 가질 것도 없는데 내가 찾은 너까지 뺏길 수는 없지.”
기억이 돌아온 게 맞는데, 왜 난 여전히 내가 뭔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 준희? 모자를 도로 쓴 우한이는 옆으로 흐른 머리를 귓바퀴에 따로 정리했다.
“……내가… 나한테 마지막 기회를 줘.”
아마 이 사람을 마지막으로 난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갸웃하던 고개가 똑바로 돌아왔고 조금 더 말해 보라는 듯 포크가 다시 위아래로 흔들렸다.
“너한테 돌아갈게.”
“…….”
“끝이 오면, 너에게 돌아갈게.”
“천해가 끝이라는 거야?”
결국 내가 해내지 못했지만 엄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난 엄마와 떨어져 지미와 단둘이 살게 될 것 같다.
“얼마 안 걸릴 거야.”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물음에 내 생각을 털어놨다.
“생각보다 둘이 깊은 사이는 아닌가 보네?”
“응. 내가 많이 좋아해서….”
“그 뒤로 노래한 적 있어?”
아니. 난 고개를 휘젓고 커피를 옆에 둔 뒤 손을 맞잡았다. 얼른 가야 하는데. 햇빛이 점점 밀려오고 있었다.
“전호가… 내가 노래하는 걸 보고 친해지고 싶었대.”
“그럴 수 있지.”
“너는…?”
“난 노래하지 않는 김영진도 사랑해.”
단지 취미에 가까운 특기였을 뿐, 노래가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리고 노래는 너의 전부가 아니었잖아.”
“…….”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하는 건 어때?”
“그래… 넌 만나는 사람 없어?”
“있어. 김영진이라고, 우는 게 이쁜 애 있어.”
난 흔들리는 다리를 다잡고 분수대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물 떨어진 소리에 놀라 앞으로 넘어질 뻔했지만 우한이가 나를 잡아줬다. 앉아 있어서 몰랐는데.
“키가… 컸어?”
나보다 작았었는데.
“응. 넌 들은 그대로야. 귀여워. 난 널 좋아해.”
분수대가 활동을 시작한 시간은 정각 여덟 시다. 생각보다 아무 일 없이 잘 끝낸 것 같아. 우한이는 나를 지나쳐서 분수대로 들어가 무언가를 가지고 나왔다. 양쪽 다리가 다 젖었다. 내 손에 얹어주려던 핸드폰은 상의에 한 번 닦여서 돌아왔다.
“안에 고양이 사진만 있던데 너도 좀 찍어줘. 나도 보게.”
“알았어.”
“보고 싶으면 찾아갈게.”
너무 가까이 있어서 지끈거릴 정도로 달콤하고 쌉싸름한 냄새가 풍겼다. 내 옷은 어디 갔지. 옷에 달랑이던 후드가 씌워졌고 앞에 끈으로 리본이 묶였다.
“눈 감아봐.”
“우한아.”
도저히 못 참겠어서 피하려고 할 때 손이 강제로 내 손바닥을 펴서 차가운 걸 떨어뜨렸다.
“이건 뭐야?”
“목줄.”
“…목줄?”
“응. 내 목줄이기도 해.”
볼을 문지른 손가락이 떨어지고 난 멍하니 우한이가 가는 걸 바라보다 목줄이라는 걸 내려다봤다. 작게 쓰인 지미라는 이름. 내가 모르는 날짜까지. 이건 나의 목줄이기도 하다. 겨우 한 살을 먹은 내 소중한 고양이가 있는 한 난 죽을 수가 없다.
“…발톱을….”
왜 그렇게 자른 거야. 조금 걷다 공원 입구의 휴지통에 커피와 케이크의 잔해를 버리고 벤치에 걸터앉았다. 긴장이 풀려 다리가 시리고 아파온다. 뒤에 있는 물이 나를 갑자기 덮칠까 봐 발바닥을 단단한 땅에 바짝 붙이고 버티고 있었다. 뻣뻣한 팔과 다리를 주물럭거리며 속으로 되뇌었다. 난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이제 가야지. 혹시 그에게 연락이 와있을까 했는데 핸드폰은 멀쩡했고 부재중 전화는 단 한 통도 없었다.
“녹음은 했어?”
“…왜, 왜 여기 계세요?”
떨어질 뻔한 핸드폰을 잡아준 사람은 지금 자고 있어야 한다. 그는 내 모자를 벗기고 동여맨 리본 끝을 풀어줬다. 봤나?
“따라왔는데?”
“…….”
다, 다 들은 건가? 어디서부터 본 거지? 그럼 내가 물에 빠진 것도 본 건가? 그래도 무서워도 잘 참았고….
“나 키 없으니까 빨리 들어가자.”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여기서 무릎 꿇으면 손 못 잡잖아. 그냥 가자고.”
아. 눈물이 핑 돌아서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내 것을 끼워 넣었다. 엉덩이 쪽이 좀 젖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멀어서 못 들었어. 도청기라도 설치해둘걸.”
도청기도 아마 핸드폰처럼 물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걸 노리고 했을 수도 있고. 그는 돌아서서 내 젖은 머리카락을 팍팍 소리가 날 정도로 털어줬다.
“나 지금 진짜 화났거든.”
“…죄송해요.”
“피곤해 죽겠으니까 질질 짜지 마. 구경할 기운도 없어. 자고 일어나서 다 봐줄 테니까 내가 안 볼 땐 아무 짓도 하지 마.”
보폭이 큰 그를 뛰듯이 쫓아가 따라잡았다. 빼앗긴 카드키로 빠르게 엘리베이터를 탔고 말 한마디 걸어보려다가 뒤로 물러섰다. 저렇게 피곤해하는 얼굴도 처음 봤고, 화난 것이 명백한 적도 처음이라….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운 그를 바라봤다.
“자야겠어.”
베개에 코를 박은 그가 내게 손짓을 한다. 옆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봤다. 가슴에 툭 올라온 손이 주물럭거려서 이불을 끄집어 올리고 그의 손을 올려뒀다. 함께 있을 때 이런 버릇은 못 봤으니 그동안 다른 사람을 사귀었을까? 기껏 올려둔 곳을 한 번 더 주물럭거려주면 좋을 텐데. 얼마 안 있어 손이 이불을 또 주물럭댔다. 씻고 싶다. 더러운 물을 모두 씻어내고 올까.
“……하영진.”
하영진? 벌떡 일어난 그가 주위를 휙휙 소리가 날 정도로 둘러보고 나가려던 찰나 내가 손을 붙잡았다.
“저기….”
“뭐야. 나간 줄 알았잖아.”
“아, 안 나갔어요. 계속 주무세요.”
이불 속으로 들어온 팔을 손으로 다닥다닥 덮고 토닥토닥 그를 재웠다. 그의 익숙한 향을 기대했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버릇처럼 뿌리던 향수도 까먹을 정도로 급했다면 좋았을 텐데. 잠결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치졸하다.
“…죄송해요….”
안에 있는 화장실도 크지만 거실에 있는 화장실과는 비교가 안 됐다. 호화롭다는 게 이런 거구나. 갑자기 금가루가 섞인 물이 나와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머니에 있던 어린 지미의 목줄을 왼손에 감다가 얼굴을 양손으로 만지작댔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자꾸 웃으면 안 되는데. 전화가 한창 올 시간임에도 핸드폰은 조용하다.
“…천재상.”
원래 이렇게까지 오래 자지는 않는다. 어제 너무 힘들었던 걸까. 얼굴이 조금 부었어. 오늘은 안 하겠다고 해야지. 내 손가락을 부러질 듯 잡은 손을 맞잡았다.
“일어나셨어요?”
“나 두고 가서 씻었어?”
“네.”
“네가 나 두고 아침에 나갔어. 맞아?”
“네. 맞아요.”
그는 본 것을 그대로 읊으며 내게 일일이 확인했다. 우한이가 나를 물에 빠뜨렸고 옷을 갈아입혔고, 커피를 마시게 했고 핸드폰을 주워줬다. 잠결치고는 엄청 많은 걸 기억하고 있네. 대체 어디서 보고 있던 걸까.
“몰래 이름 부르지 마. 대놓고 해.”
핸드폰을 한번 본 그는 도로 그것을 던져놓았다. 저런 걸 잘 기억해두고 있다가 그의 출근에 맞춰서 찾아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내 다리 안쪽을 베고 누운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내일 일 나가셔야 해요?”
“응. 너도 같이 갈 거야. 김한세가 간 김에 다 처리하고 오래.”
“저는 도움이 별로 안 될 텐데….”
“너 두고 어디에도 안 가. 아님 네가 하기 싫다고 김한세한테 말해.”
형이 내 말을 들어줄까? 난 조금 더 그에게 다가갔다. 아랫배에 닿는 숨이 뜨겁다.
“천재상이라고 부르는 건 싫으시죠?”
“응.”
재상아. 이런 식으로 부르라는 건가. 평소에 성까지 함께 불러서 입에 잘 달라붙지 않는다. 재상아. 재상아? 존댓말을 하면서 재상아라고 하면 이상할 것 같아.
“재상 님?”
“하지 마.”
“재상 씨?”
“하지 마.”
“…….”
뒷목에 올라온 뼈를 콕콕 눌렀다.
“재상 군?”
“…….”
어려워. 이제 와서 반말을 쓰기도 이상하고. 나도 불편하겠지만 무엇보다 그가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
“본부장님?”
“이럴래?”
“하지만 ‘재상아’는 존댓말에 어울리지 않는걸요.”
같이 고민을 해주세요. 난 작게 귓속말을 하고 그의 머리카락을 차근차근 쓰다듬었다. 외국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것 같다. 한국 어딘가에서 나와 이 사람과 단둘이 떨어져서, 에어컨 소리만 둥둥 울리는 곳에서 평화롭게. 내 손목을 만지작대던 그가 지미의 목줄을 확인했다.
“재상아.”
“…….”
“재상아?”
자나? 고개를 번쩍 쳐든 그는 내 호칭에 놀란 눈이었다.
“이렇게 불러드릴게요. 괜찮나요?”
잠시 조용했던 그는 내 허리를 다시 끌어안고 숨을 쉬었다. 우리는 같이 사는 걸까? 이대로 각자 살다가 내가 찾아가는 것도 괜찮다. 얼굴을 보고 싶고 지금처럼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그의 하루의 끝을 맺어주고 싶다. 만약 시간이 나면 같이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하고 싶고, 그 뒤로 내가 업무에 지친 그를 데려다줘도 되고.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 맛있는 걸 사주고 싶다. 문영이처럼 생일에 쓸데없는 선물을 하며 같이 웃고. 더 이상의 요행을 바라기엔 그에게 빚진 것이 많아서 난 말 없이 잠든 등을 바라봤다.
호텔비는 못 내겠지만 밥값 정도는, 어떻게든. 언제부터인지 내 짐가방이 방에 있길래 돈부터 챙겨뒀다. 우린 나가서 먹는 건가? 어제는 지쳐서 그가 내 입에 음식들을 채워주고….
“너 야한 생각 했지.”
“…….”
난 하품하는 그의 가지런한 치아를 보다 고개를 저었다. 부끄러워.
“배 안 고프세요?”
“너는? 고파?”
“네. 나가서… 뭐 사드릴까요?”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엄지로 쓸어줬다.
“혼자 나가겠다고?”
“네. 저 돈 이만큼 환전해왔어요.”
그동안 모은 돈의 절반을 환전해왔다. 혹시, 혹시가 겹쳐서 어쩔 수가 없었다.
“비싼 밥 사드릴 수 있어요. 맛있는 집도 찾아봤고, 포장도 되는 곳도 알았어요.”
영어로 ‘싸주세요’도 배웠고 말하는 번역기도 다운받았다.
“길은? 잘 찾을 자신 있어?”
“어플을… 다운받아 왔어요. 그리고 여기가 크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갈 준비 해야지. 어떤 걸 사와야 하지?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마 간단한 것부터… 나와 함께 일어나던 그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는 시간 동안 갔다 올 수 있을까. 양말을 신고 나가다가 뒷덜미가 붙잡혔다.
“…카드키 두고 갈까요?”
“같이 나가. 일도 봐야 하니까.”
사람이 둘이나 되는데 키는 하나만 준다니. 난 양치를 하는 그를 보다가 바깥쪽으로 나갔다. 일부러 숙박비를 알아보지 않길 잘한 것 같다. 화장실도 두 개나 있는데 키가 하나.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가네. 나중에 전호한테 이런 곳에 와봤냐고 물어봐야지. 커다란 차창 앞에 앉아서 무서울 정도로 높은 내 위치를 실감했다.
“하영진.”
이렇게 나를 뒤에서 안아줬었다. 그땐 불편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따뜻하다.
“이런 곳 자주 와보셨어요?”
“응.”
회사가 높은데 괜한 걸 물었네.
“이렇게 높은 데 서 있으면 안 무서우세요?”
“응. 무너지면 무섭겠지.”
그렇구나.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원래 우리는 무슨 대화를 나눴었지.
“나가자.”
저 바지는 편한 바지라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옷은 어디서 나온 걸까. 아무것도 없는 면 재질의 셔츠 소매를 걷고 있는 그를 몰래 훔쳐봤다. 내 차림이 오늘따라 추레한 것 같고 거울에 비춘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생기가 없는 것 같고. 평범하다고 했으니까 이런 것 정도는 신경을 안 쓰려나. 조금 떨어져 서서 내 운동화와 그의 샌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무섭다. 자꾸 그렇게 보니까.”
어제처럼 손잡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전해졌나. 눈을 돌리고 괜히 가방을 다잡았다. 담배 하나와 라이터 하나, 핸드폰, 별거 없는 보조 가방이다. 이런 곳은 한적한 길거리가 아니라서 힘들까?
“주, 중간… 아니 실, 실, 그 타는….”
“정리해서 말해.”
“…그… 여기는, 중간에 타는 사람이 별로 없나 봐요. 항상 한 번에 내려가네요.”
“층 전용이니까.”
엘리베이터가 그럼 엄청 많겠네. 그러니까 이렇게 클 만도… 핸드폰을 든 오른손 말고 왼손을 힐끔 쳐다봤다. 아직 십여 층이 남았다. 그의 엄지를 잡았다가 놓아도 반응이 없어서 손을 도로 가져왔다. 급하니까, 바빠서. 나에게 한 달은 길었지만 상대방은 아닐 수도 있다. 1층에 가까이 왔을 때 난 열림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손 잡고 싶어?”
“아, 괜찮아요.”
열림 버튼으로 뻗던 손도 가져와서 나가는 그를 따라갔다. 핸드폰만 보길래 1층인 줄 모를 줄 알았어. 난 핸드폰만 보고 걷다가 앞에 있던 커다란 전호라는 친구도 못 알아본 적이 있었는데. 그를 붙잡고 내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재미가 없어도 전처럼 들어주길 바랐다.
주위의 휘황찬란한 장식들을 보다가 넘어질 뻔했다. 혹시 그가 보고 있나 돌아보다 유리문이 있는 줄 모르고 머리를 부딪쳤다.
“아.”
빨리 따라가야지. 무심코 밀려던 문이 자동회전문이라는 걸 깨닫고 발만 움직여 문밖으로 나갔는데… 어?
“…….”
어디 갔지? 내가 놓친 건가? 시큰한 코끝을 잡고 주위를 둘러봤다. 찾아야 하나? 아님 기다려? 머리가 생각을 멈췄고 나도 가만히 서서 앞에 처음 보는 회색 건물을 바라봤다. 어제 본 차도 없고, 전화해볼까? 아직 나 차단되어있을 것 같은데. 핸드폰을 꺼내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동서남북을 한 번씩 밟아봤을까. 들어가야겠어. 일이 끝나면 이리로 돌아올 거니까, 뒤를 돌다가 무언가와 또 부딪쳤다. 아, 오늘 엄청….
“너 뭐 하는 거야?”
“죄송해요. 나가신 줄 알고….”
안으로 거의 끌려가다시피 들어가서 반대편 출구를 지나 모르는 차에 던져졌다. 분노한 그의 옆에 머쓱하게 앉아 조금 떨어진 무릎을 가운데로 모으고 목걸이를 지미의 이름이 보이도록 돌려놓았다.
“그, 저… 저는 호텔에 있을까요?”
“…….”
코끝이 아까보다 더 시큰거려서 오른쪽 차창을 바라봤다. 조용히 해야 해.
“함부로 자꾸 사라지지 마. 찾는 사람은 생각 안 해?”
“…죄송해요.”
“나만 따라다니는 것도 못 해? 넌 대체 눈을 어디다가….”
“…….”
“하영진.”
눈가를 한번 닦고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을 잡은 손을 가만 바라보다가 진정이 됐을 때 시선을 그에게 맞췄다.
“뭘 잘해서 울어?”
“…안 울었어요.”
“거짓말치지 마.”
“아까, 문에 코를 부딪쳐서 조금 아파서 운 거예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고양이들은 배고프면 ‘공복 토’라고 칭하는 흰색이나 노란색의 물을 토하곤 한다. 우리 지미는 아침에 내가 밥을 깜빡하면 그러곤 해서 저녁에 밥을 두둑이 주고 나가야 하고, 엄마는 토를 하면 내가 걱정할까 봐 말을 안 하기 때문에 유심히 살펴보고 새벽에도 귀를 열어둬야 한다. 전호도 엄마와 마찬가지라서.
“하영진.”
“네?”
“아니야.”
“…네.”
전호도 엄마와 마찬가지로 내가 지미에게… 싫어하기 때문에 다들 그걸 숨기곤 한다. 그리고 또… 병원을 가면….
“저 여기서 내려주시면, 호텔로 돌아갈 수 있어요.”
“…….”
“바쁜 일 마치시고 연락 주실 때, 카드키 가지고 내려올게요.”
이러면 차단을 풀어줄까. 내 얕은수를 아마 알아봤을 것이다. 그의 눈이 드디어 핸드폰을 떠나 내게 고정됐다.
“싫어.”
“…….”
“떨어질 생각하지마. 난 여기서는 죽어도 너 혼자 못 다니게 할 거야.”
나와 우한이의 잠깐의 만남이 그에게 고집을 만들었다. 말없이 나갔으니까 이 정도는 참고 견뎌야겠지.
“차단도 절대 안 풀어줄 거야.”
자신이 아니면 연락할 곳도 없지 않냐면서 핸드폰을 빼앗겼다. 차에 갇혀 노란 머리 외국인 남성이 게임 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도 이런 단순 게임을 좋아하는구나. 내가 좀 심심해 보였는지 뒤에 있는 나도 볼 수 있게끔 각도까지 조절해준 친절한 사람이다. 몇 마디 걸어와도 대답을 못 해서 이제 기사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행동으로 표현한다. 해보라는 듯 손가락을 놀려서 난 손가락을 뻗어 양쪽으로 휘저었다. 보는 게 재밌는 거지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이런 허허벌판에서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외국인이 친하다는 듯이 다가와서 그에게 어깨동무를 했고 또 다른 외국인도 옆에서 팔짱을 껴왔고 그들은 어딘가로 떠났다. 나도 나가서 보고 싶어. 뭘 하는지 궁금하고, 내가 도움이 될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보고 싶은데. 난 기사의 핸드폰으로 손을 뻗어 마지막 세 개짜리를 짚어줬다.
“Thank you.”
뒤로 의자를 조금 젖혀줘서 핸드폰이 더 잘 보인다. 빨갛고 파란색 젤리. 난 또 위기에 처한 기사를 구해줬다.
“How old are you?”
손가락으로 3을 만들어서 앞으로 뻗었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나를 돌아봤다. 외국인을 이렇게 눈앞에서 본 게 처음이라 조금 내 동작이 어색했을 것이다. 서른 맞는데. 곧 서른이지만 숫자를 두 개 보여주기가 여의치 않아서…. 놀란 목소리로 썰티를 외치는 외국인은 아마 내가 어려 보인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조금씩 뒤로 움직이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왜, 왜 점점 다가오는 것 같지?
“o… okay. okay.”
원래 동양인은, 길게 설명해주고 싶지만 갑자기 피부가 좋다는 칭찬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우리 게임이나 할까요. 게임. 게임만 연거푸 얘기하자 기사도 알았다는 듯 제자리에 앉았다. 나보다 더 젊어 보이면서 혹시 같은 서른이라 그렇게 흥분했던 건가. 난 노란색 젤리를 짚었다. 한참을 그것만 하고 있으니 눈이 서서히 감긴다. 내가 이렇게 배가 고프니까, 그 사람은 더 고프겠지. 안에서 혹시 먹고 있으면 다행이다. 배에서 소리가 나서 내 배를 가렸다.
“Are you hungry?”
“……yes.”
일부러 쉬운 영어를 골라주며 내 식성을 파악하던 기사가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 어디로 간지는 모른다.
뭐 하고 있을까. 한국에 있는 지미가 그립다. 밥은 잘 먹고 있나. 연락이 안 돼서… 엄마도 기다릴 텐데. 저기 돌아오는 기사의 손에는 종이백으로 된 음식이 들려있었다. 갇혀있는 나를 위해 문을 열어줘서 감동도 하고 굶주린 배도 채우며 그에게 엄지손가락으로 표현했다. 사실 맛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고파서 그런지 괜찮았다. 저 사람이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알았으면 고맙다는 표현을 더 풍부하게 해줬을 것이다.
“Korea?”
“yes.”
면을 후룩후룩 먹다가 다른 종이박스에 담긴 밥을 젓가락으로 우걱우걱 퍼먹었다. 나 혼자 먹으니까 조금 그래서 젓가락을 뜯어줄까 손으로 물어보니 싫다고… 혼자 상당한 양을 먹어치웠다. 빨리 먹어서 그런가. 조금 더부룩한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또 사라져버린 기사가 들고 온 건 콜라였다. 아, 저기 자판기가 있네. 까치발을 들어보니 좀 먼 곳이지만 건물이 하나 있는 것 같다. 햇살이 미친 듯이 쏟아지는 오후였다.
“…very thank you. 아, thank you very much.”
콜라를 들이켜다 사레가 들린 기사의 등을 두들겨줬다. 그가 이걸 못 봐서 다행이다.
“sorry. I can’t, can not speak english. fi… first time, 그… because foreigner.”
아직도 웃고 있는 기사가 약간 무서워서 쓰레기를 버리고 오려다가 빼앗겼다. 이런 날씨에도 정장 차림을 한 기사는 키도 남자만큼 크다. 근데 이거 한국 콜라와 맛이 좀 다른 것 같아. 기분 탓인가?
“Game?”
“…please.”
차 안에서 손가락질만 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이 되었네. 이러니까 안 데려갔나. 점점 실력이 늘어가는 기사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주고 가끔 뛰어난 활약을 펼쳤을 때 내 다리를 쳐서 작은 박수를 들려줬다.
“Did you see that?”
“…yes. good. nice. …excellent.”
그리고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비한국식 리액션 때문에 나도 자동으로 미소를 달고 있어야 한다. 언제쯤 오는 거지. 갑자기 운전석 의자가 당겨져서 앞으로 딸려가던 몸을 바로 했다.
“하영진.”
“아, 오셨어요?”
“…뭐 했어?”
“콜라 사주셔서, 마셨어요.”
밥도 먹었다고 털어놔야 하나? 의미심장한 눈으로 내 옆자리에 올라타는 그의 앞에도 누군가가 올라탔다. 아까 어깨동무를 하던 그 남자. 누가 봐도 친해 보여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에겐 어려운 사람이라 더 그런 것 같다. 옆으로 보는 팔에 근육이 우락부락, 혹시나… 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바로 했다. 처음이 한세 형은 아니라고 했는데. 이 사람인가?
“Hello.”
“hello.”
이름을 내게 소개해줘서 내 이름도 대답하려는데 그가 중간에 의미 모를 영어로 대신 얘기해준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유창한 영어가 그가 새삼 외국에서 오랜 시간을 있었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
“불편해?”
“아니요. 괜찮아요.”
“혼자 심심했어?”
“아니요. 앞에 기사님이랑 같이 게임도 하고, 그랬어요.”
게임을 잘하신다는 말이 엉뚱한 사람에게 전해졌지만 아마 생각나면 내 얘기도 전해주지 않을까?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사람이 달라서 그런지 소소한 소외감을 느꼈다. 영어 잘 배워둘걸.
일곱 시가 가까운 시간, 저녁 식사를 하러 가자는 걸 눈치로 알아듣고 그들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연락을 한 걸까. 사장이 직접 나와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익숙한 악수, 오랜만이라는 간단한 인사로 그들의 사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자주 오던 곳이었구나. 사람은 많지 않았고 조금 컴컴한 분위기에 다들 맥주 한잔은 마시고 있었다. 혹시 점심은 먹었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들어왔고, 또 다른 모르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그의 주위가 조금 시끄러워졌다. 친구가 많은 편이었나보다. 앞에 있는 스테이크를 먹으려다가 소란을 잠시 구경했다.
“Boring?”
“no… thank you.”
그의 옆자리임에도 옆자리가 아닌 자리, 앞에 앉은 알렉스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가 차라리 더 옆자리 같았다. 어울리지 못하는 내가 신경 쓰였나. 그가 얼마나 먹었는지 궁금했지만 괜히 외국인들의 관심을 받을까 봐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내게 먹는 방법을 알려주다 말고 그릇을 체인지하겠다고 했다. 칼질하는 능숙한 손에 시선을 빼앗겼다. 깔끔하고 멋있다.
“Excellent?”
“excellent.”
스테이크는 원래 먹을 때 자르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역시 이게 더 편리하고 빠르다는 걸 종주국도 아는구나. 내 앞으로 돌아온 스테이크를 보며 마주 웃고 있다가 뭔가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 옆을 바라봤다.
“…왜, 왜 그러세요?”
나이프를 탁상에 내려친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그를 따라나섰다. 빨라진 걸음을 쫓다가 발이 꼬여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옆에서 나를 도와주려던 외국인에게 괜찮다고 손짓하고 그를 따라가려다 멈춰 섰다. 꼭 이런 날이 있다. 계속 넘어질 듯 안 넘어질 듯하다가 이렇게 크고 창피하게 넘어지는 날이. 다행히 나에게 돌아온 그가 어중간하게 굽힌 내 눈높이를 맞춰줬다.
“다쳤어?”
“아니요. 괜찮아요.”
“…….”
“…일이 잘 안 풀리세요?”
“응. 시발 더럽게 안 풀리네.”
그는 잠깐 기다리라면서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 차 키와 내 가방을 챙겨왔다. 멀리서 기사가 흔드는 손을 따라 작게 흔들다가 나를 지나치는 그를 따라갔다.
“다리 안 아픈 거 맞지?”
“네. 정말 괜찮아요.”
그것보다 발걸음이 너무 빨라서 숨이 차오른다. 골목을 익숙하게 누비던 그를 따라 차에 타게 됐다. 보조석의 안전벨트를 매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정말 콜라만 마신 거 맞아?”
“…….”
“맞냐고.”
“사실 밥, 을 사주셨어요. 그… 종이 상자에 담긴 밥인데, 면도 있었고 숟가락이 없는, 젓가락이….”
그게 다라고 말했다. 알렉스는 내가 조심하고 경계했어야 했던 사람인가? 하지만 위험한 사람을 두고 나갈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가 한숨을 푹 쉬면서 운전을 시작했다. 예전으로 다 돌아간 것 같다.
* * *
어제 그의 심기가 너무 불편해 보여서 몰래 빠져나와 다른 방에서 자다가 걸렸다. 그래서 오늘 아침의 기분도 흐림이다. 오늘도 미국의 날씨는 화창하다. 한국은 소나기가 잠깐 내린다고 한다.
“저 오늘, 한국으로 돌아갈까… 하고요.”
“왜?”
“아무래도 제가 같이 있어서 방해만 되는 것 같고, 저녁 표는 아마 남은 게 있을 거예요.”
넘어가지 않는 조식을 입에 억지로 넣고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돌려달라고 했다.
“난 너 차단 아직 안 풀었는데. 그래도 갈 거야?”
“…….”
“차단 안 풀어도 돼?”
대체 왜 이런 걸로 나를 놀리는 거지. 당연히 나는 풀어주길 원하고, 연락하고 싶고, 목소리도 듣고 싶고, 안 올 것 같지만 끝내는 오는 문자도 받고 싶다.
“하영진.”
“왜, 왜… 왜 저한테, 자꾸, 저를 시험하세요?”
포크를 내려놓고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저는, 제가 좋아… 좋아한다고 해서 저를 좋아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어제, 도 저를 거기다 혼자 두고 가시면… 투정 부려서 죄송해요. 이럴까 봐, 가겠다고 한 건데… 진짜 죄송해요. 마음 내키실 때, 연락 주시면 바로 찾아갈, 게요.”
짐은 정리해뒀으니 이대로 공항으로 가면 된다. 돈도, 있고.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을 닦으려다 옷장에 들어가서 울었다. 조용히. 조용히 해야 하는데 자꾸 소리가 삐져나온다. 우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그가 들어온 줄도 몰랐다.
“그만 울어.”
“네. 다, 울었어요. 곧 나갈, 게요.”
오늘 아침에 일이 있다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다른 방에서 잤던 건데. 눈물을 말끔히 닦고 나가 그에게 최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아침에 일 있다고 하셨는데, 한국에서 뵈….”
더 이상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고개만 숙이고 짐을 챙겨 나왔다. 고작 1주일 있는 건데 뭘 이렇게 싸 왔지. 핸드폰은 없어도 될 거야. 사준 사람에게 돌아간 것뿐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심호흡을 여러 번 고르고 눈이 진정되게 부채질을 했다. 어디서 좀 울고 가야 할 것 같아. 내가 눈물이 이렇게 많은 사람인 줄 그를 보면서 알았다. 오늘도 빠르게 온 엘리베이터를 타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무심코 그쪽을 바라봤다.
“다시 들어와.”
“네?”
“너 두고 간 거 다 가지고 가야지.”
내가 두고 간…? 짐을 끌고 다시 집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칫솔은 여기 있는 걸 썼고, 수건도 안 꺼낸….
“앉아서 먹어. 이따 챙겨줄 테니까.”
짐가방을 문 옆에 세워두고 반대편에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났다.
“아니, 제가 지금 찾아서 가지고 갈게요. 식사하세요.”
“가지 말고 있어.”
난 도로 앉아서 남은 수프를 먹었고 그는 커피를 한입 마셨다.
“저… 가지 말아요?”
“응. 나랑 같이 귀국해.”
“언제쯤 하실 거예요?”
“내일모레. 그때까지 기다려. 최대한 빨리 끝낼 테니까.”
천천히 해도 괜찮은데. 몰랐던 상처가 그의 손등에 나 있어서 그걸 좀 보다가 남는 빵을 입에 가져갔다. 내 식사를 유난히도 신경 쓰는 날이 있었다. 이런 날은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한다.
“너 진짜 어제 다친 데 없는 거지?”
“네. 좀 접질린 거라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 좀 봐.”
들고 있던 빵을 내려놓고 그를 마주 봤다. 저렇게 조금 먹고 커피만 마시면 속이 상할 텐데.
“나 질투 심한 거 알지?”
“…네. 알아요.”
“어제 질투했어. 미안해.”
아니야. 그렇다기엔 출발할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았었는데.
“네가 처음 보는 사람하고 그렇게 잘 지내는 걸 본 적이 없어서 화가 났어.”
“그럼, 우리 나갈 때는 왜 화내셨던 거예요?”
“나갈 때?”
어제 일이 많아서 그랬나.
“내가 그때 왜 기분이 안 좋다고 생각했어?”
“핸드폰만 보셔서 제가 오해했나 봐요. 바쁘셨던 건데, 제가 갑자기 딴 곳으로 새서 찾아다니시느라….”
말하고 나니 조금 정리가 되는 것 같다. 기분이 별로였는데 내가 길을 잃었고, 가뜩이나 바쁜데 나를 찾아다니느라 기분이 안 좋았…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봐야겠다고 일어났다. 화장실 앞에 서 있다가 침대에 앉았고 그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저녁에 들어올 거야.”
“밥도 드시고 오세요?”
“아니. 점심만.”
“…오늘도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잘 따라다니고, 조용히 있을 거고, 친하게 지내지 않을게요.”
“…….”
“신경 쓰이지 않게, 괜찮으시면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싫으면 집에서 기다리겠다고도 얘기했다. 어떤 결정이든 따를 거고, 나를 잡아준 것만으로도 지금은 만족스러웠다. 금세 기분이 또 좋아져서 곤란하게 한 건 아니다. 난, 기다리겠다고도 했으니까.
“그럼….”
그럼? 단추를 채우던 그가 내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그럼 같이 가.”
“정말요?”
“응. 나도 그게 더 편해.”
핸드폰을 돌려준 그는 내 볼을 짓누르고 단단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진짜 조용히 있어야 해. 아무것도 하면 안 되고. 배고프면 나한테 말하고.”
“네에.”
“어제 손잡고 싶었던 거 맞지?”
“…네. 많이요.”
이제라도 잡아보려고 그의 손가락 틈으로 내 것을 집어넣었다.
“이렇게요.”
혹시 내가 어제 조금 불안했던가? 그래서 그의 평범한 시간을 예민하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점점 가까워져서 눈을 감았다.
* * *
자주 하면 큰일 날지도 몰라. 난 빨갛게 된 살을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떤 식으로 해야 안 아프고 기분이 좋아질까. 오늘은 어제와 비슷한 사람을 만났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친절하게 나를 소개해줬고, 내 말실수에도 전혀 웃지 않고 틀린 부분을 정정해줬다.
“하… 영진.”
“네. 저, 여기 있어요.”
왼손을 잡고 그의 눈앞에 얼굴을 비췄다. 내 머리카락으로 올라오는 팔 안쪽으로 들어갔다.
“배 안 고파?”
“네. 안 고파요. 더 주무세요.”
“나 긴장했나 봐.”
더럽게 일이 안 풀려서 긴장한 건가. 난 긴장을 거의 안 하고 있었다. 약속을 지킬 거라고 굳게 믿는 것도 있고, 그런 걸 신경 쓰느라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한국 가고 싶어?”
“아무래도… 지미가 거기 있어서요.”
이불을 덮고 그의 품에 더 들어갔다.
“언제 오시려고요?”
“너 없는데 여기 오래 있어서 뭐해. 죽이고 가려는데 아직도 못 잡아서 그렇지.”
“…우한이요?”
위험한 상황인가. 나였으면 한국을 못 나오고 바로 붙잡혔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시키면 안 되나요?”
“믿을 수가 없어서.”
이불에서 꺼내진 나는 그의 의아한 눈과 마주했다.
“죽이지 말라고 안 해?”
“하지 말라고 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아니.”
말릴 이유가 없다. 나를 건드린 것과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은 별개의 일이니. 아마 난 이 사람이 말한 것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힘들고 외로울 때 언제든지 찾아갈 곳이 있다는 위안을 죽어서라도 잊을 수 있을까.
“너하고 같이 있을 때 잡을걸, 후회 중이야.”
“또 기회가 올 거예요.”
내 얽히고설킨 과거가 그의 흥미를 유발했을까. 아니면 내 염치없는 곤궁함에 이끌린 건지도 모른다. 그가 내 곁에 머무는 이유가 무엇이든 남은 시간 최대한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 마찬가지로 그의 이야기도 무척 듣고 싶었다. 우리 사이에 더 많은 대화가 오가고 교환하는 침묵은 되도록 적었으면 좋겠다.
“네가 위험해질까 봐 어쩔 수가 없었어.”
도망쳐. 나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때까지 부디 시간을 벌어줘.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