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
“나가라. 할 얘기 없으면.”
머리 아파. 잠을 한숨도 못 자서 몸이 늘어졌다. 할 때는 좋아. 다 좋다고. 술도 마실 때는 기분이 좋지. 그 후가 문제다. 그러면 또 다른 술을 마시면 된다. 더한 약을 흡입하면 된다. 내 정체성이 흔들린다. 사실 나는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었을까.
“몸이 안 좋으십니까?”
“어. 가서 감기약 좀 사와.”
“어떻게 안 좋으신지 증상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닥치고 나가라고.”
김한세가 내 옆에 서서 할 얘기가 있다며 버텼다. 가만 안 두고 싶다. 내가 몸만 괜찮았으면 당장 일어나서 후려쳤을 것이다.
“회장님께서 영진 씨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
“재상이는 아직도 그러고 사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번에 만났는데 왜 그러지? 할아버지 제사 있고 그다음 날 갔는데.”
“전날 가시지 그랬습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죠.”
그 자존심에 작은 상처라도 낼 수 있다면 못할 게 없었다. 그래도 죽는 날 정도는, 그렇게 사람이 찾는데 한 번쯤은 와 줄 수 있던 거 아닌가. 결국 러시아에서 돌아온 어머니와 주하가 볼 때까지 난 약에 취해 있었고 할아버지는 죽어있었다. 낡은 핸드폰을 손에서 떼어내느라 다들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마저도 그 대단한 회장님은 나를 원망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건주는 잘 묻어줬지? 안 보이게 묻어야 해. 혹시라도 하영진이 소환되면 일이 커지니까.”
“네. 처리했습니다. 진우한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무래도 출국을 노려야겠지. 깔끔하게 자살 같은 건 어때?”
“네. 준비하겠습니다.”
“준희는 진짜 안 들어온대?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텐데, 아깝네.”
“동생이 죽으면 들어오겠죠.”
같이 사는데 어릴 때부터 치열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난 천주하가 거의 모든 의사 표시를 대신 해줬기에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유형오는 진우한 덕분에 사업을 일으키고, 진우한은 가져가는 게 뭐지? 친구? 하인? 죽어버렸으니 내가 알 길이 없다. 하영진이라는 단 하나의 오점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곳을 들춰봐도 깨끗하다.
“형, 나 왜 이렇게 불안하지?”
“김한진이 영진 씨 어딨는지 좀 그만 물어보랍니다.”
하영진이 같은 일을 당하면 내가 옆에서 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벌써부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무서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진우한은 지금 진 회장에게 밉보이면 안 되니 섣부른 짓은 저지르지 않을 겁니다.”
요즘 그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내가 들어도 모르니 못 들은 척했다. 지금 나만 이렇게 피곤한 게 아닐 텐데, 눈이 뻑뻑하고 이명까지 울린다. 전화해볼까. 하영진이 김한세의 부탁을 듣고 나를 내보내지 않았다면 절대 그 호텔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몸은 괜찮으세요? 방금 일어났어요.]
문자가 와 있었네.
[배웅도 못해드리고 죄송해요.]
“영진 씨한테 온 문자입니까?”
“아직도 안 갔어?”
내 뒤로 와서 문자를 굳이 확인한 김한세는 내 핸드폰을 따라 눈을 굴려댔다. 재미없어.
“본부장님이 …라는 걸 알고 계십니다.”
“…뭐라고?”
하영진의 문자들은 느릿한 말투와 소리가 지원된다.
“본부장님이 연하라는 걸 영진 씨가 알고 계십니다.”
“? 자세히 얘기 해봐.”
뜻하지 않은 관심으로 몸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나한테나 물어보지. 그걸 왜 또 몰래 김한세에게 묻지. 아.
[괜찮아]
평균 답장 시간은 조금 느린 편이다. 내가 설득해서 두어 달만 더 하되 월급은 반으로 줄었음에도 그 융통성 없는 열정을 막기는 힘들어 보인다. 체크아웃하느라 힘들겠는데 김한세라도 보내야 하나.
“진우한의 출국일이 잡히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백화점인지 식료품인지 사업이 해외에서만 시끄럽다면 다행이지만 한국에까지 퍼져서 진우한의 실종이 들통나면 하영진이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다. 가능한 한 하영진에게 닿지 않게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었다.
“되도록 미국이었으면 좋겠다. 준희가 한국에 들어오지 않고도 우한이를 보러 갈 수 있잖아.”
“죽는 게 아니면 정말 오지 않을 겁니다. 둘은 상상 이상으로 사이가 안 좋거든요.”
“엄마는 달라도 아빠가 같잖아.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는데 그렇게 안 좋을 수가 있어?”
“네. 진우한은 엄마도 아빠도 다르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아예 다르다고?”
“그 사람도 진 회장 방에서 언뜻 들었다고 했습니다. 정확하진 않다고 했지만 진우한이 회장 부부를 전혀 닮지 않은 걸 봐서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지금 그쪽 분위기만 봐도.”
“그럼 친아들도 아닌데 물산을 내줬단 말이야?”
“자세한 것까지는 모릅니다.”
“가능성이 아니라 확실한 걸 가지고 와야지.”
“거의 확실합니다.”
거의… 애매하네.
“진우한이 이사로 취임한 이후 물산의 1분기 기준 영업이익률이 10% 가까이 올랐습니다. 이대로 친딸에게 넘겨주면 완벽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진우한을 없애면 진 회장이 고맙게 생각할까?”
작은 흠이어도 유일해서 더 눈에 띄는 법이다. 그것도 친자식이 아니라면 작다고 넘기지도 못했을 거고.
“모르겠습니다만 진우한 때문에 진 회장이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는 걸 봐서는 아마 아쉬울 건 없을 겁니다.”
“그 아저씨가 제일 문제였는데 들켜도 상관없겠어. 근데 넌 그걸 언제 안 거야?”
“한… 반년 됐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내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람이니 아버지가 나보다 먼저 아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나도 알려줄 수 있던 거 아닌가?
“제가 아무 정보도 없이 진우한을 건드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본부장님과 다르게 주위도 살펴야 합니다.”
“나도 계속 걱정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조용히 처리하라고 했던 거잖아.”
답장 올 때까지 마저 이 짧디짧은 문자를 읽어 보려 했는데 김한세가 또 내 뒤로 이동했다. 은근히 하영진한테 관심이 많아. 사진을 한 장 열어 자랑했다. 고작 이거 하나뿐이고 그마저도 자다가 찍은 것이지만.
“…영진 씨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뭔지 아십니까?”
“뭔데?”
“나중에 한번 보세요. 재밌을 겁니다.”
“고양이 아니야?”
쓰읍, 고양이 얘기에 주먹을 쥐고 넌더리를 내던 김한세가 나가고 그날이 떠올랐다. 팔에 선명하게 긁힌 자국과 실제로 상해를 청구한 서류. 처리하는 직원도 아닌 내게 굳이 서류를 들이밀던 그 뻔뻔한 낯짝을 하영진이 봤다면 지금까지 미안해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신발을 신고 들어가려다가 뒤로 돌았다. 이거 닦겠다고 걸레를 들겠지. 집에 없나? 아직 퇴근할 시간은 아닌데. 김한세의 핸드폰을 빼앗아보려다가 걸려서 그 김에 퇴근한 참이었다. 식탁 위에 올려 둔 메모 한 장을 발견했다.
[돌아오시면 연락주세요.]
나갔나? 그랬으면 김한진이 나한테 연락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핸드폰이 조용한 걸 보니 나간 게 아니라 올라간 건가. 내가 하영진의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다는 데 적잖이 놀랐다.
― 집이세요?
“응. 어디야?”
― 4층이에요.
“거기 왜 가 있어?”
― 그… 어제 우리 다시 거기로 돌아갔었잖아요.
그랬지?
― …….
“그랬는데?”
어제 그랬는데 왜. 항상 말하지만 피해야 하는 건 나지. 어제 무슨 짓을 했… 아하.
― 자꾸 생각나서요.
“나도 방금 기억났어.”
한동안 숨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주위가 고요해졌다. 내가 올라가? 엄마가 있으면 곤란하잖아.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숨소리가 울려서 현관문을 돌아봤다.
“…….”
― ……
“왜 눌러?”
문을 열어주고 나를 바로 껴안아오는 하영진을 토닥였다.
“어제 저는 왜 그랬을까요?”
그건 네가 변태이기 때문이지.
“술을 마시고 하지 말아야겠어요. 그래서, 그러… 근데 그게 그렇게 심각한 거예요?”
얼굴을 좀 보여주고 물으면 안 되나. 콕 박은 얼굴과 뭉개진 발음을 겨우겨우 해석하며 서 있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거고, 다시는 안 하겠다는 얘기인 것 같다.
“네가 그러고 싶음 그렇게 하는 거지. 이상할 건 없어.”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이상할까요?”
“글쎄.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야겠는데.”
아픔과는 별개로 게이 섹스를 처음 접하는 내가 이상하지 않은 게 있을 리가. 고집스럽게 나를 밀쳐 침대에 눕힌 하영진은 여전히 빨갛게 타올라 있었다. 처음엔 술을 먹었으니 단순한 갈증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체위가 있듯이 하영진도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것뿐이다. 그보다 저러다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하는 게 더….
“다시 해볼까요?”
“평범하게? 평범하게가 뭔지는 알아?”
24시간도 안 지났는데. 움츠러드는 다리에 힘을 꽉 줬다. 벌써 아파.
“아니요. 안 넣을 거예요.”
“그럼?”
“손가락만 해볼게요.”
추잡한 내용을 저렇게 저녁 메뉴처럼 얘기하냐. 들어 올린 한 손가락과 눈이 진지해서 웃음이 터졌다.
“씻고 올까?”
“아니요. 이대로가 좋아요.”
하영진이 내 바지를 벗기고 아래로 내려갔다.
“하영진. 아니, 너 지금 급하니까.”
“으으응.”
“알았어.”
손으로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어제처럼 흥건히 젖어 하영진의 혀까지 희미하게 느껴질 것이다.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와 민감한 곳을 머금었다.
“안 물 테니까 긴장 푸세요.”
심호흡을 하며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저런 단순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이 변태 같다는 거다.
“그만 좀 맡아.”
“…안 이상하다면서요. 왜 싫어하세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난 하영진의 머리를 밀어내고 똑바로 앉았다.
“이상한 게 아니라,”
“…….”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럼요?”
마음껏 맡으라고 자리를 내줬다. 하고 싶으면 해야지. 앉은 자세 그대로 계속해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훅훅 흥분한 숨소리가 부담스러워서 하영진처럼 발가락을 까딱였다. 점점 아래로 내려오는 타액의 느낌도 근질근질하다. 이젠 완전히 선 것을 하영진이 쪽쪽 빨아먹었다.
“할래?”
“아니요. 아직 빨개요.”
“괜찮을 텐데.”
“오늘은 이거 먹을래요.”
원래도 주식인 밥은 빼먹기 일쑤였다. 하영진에게 다리를 더 벌려줬다. 말하지 않아도 다 내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다.
“얼마나 주실 수 있어요?”
“어제 너무 많이 줘서 모르겠는데.”
“오늘은 조금만 먹을게요.”
눈이 마주친 뒤 내 입술에 가볍게 하는 뽀뽀가 기분 나쁘다. 정말 오럴 섹스가 더 좋아서? 내가 안 씻는 냄새가 좋아? 물어보기 껄끄러운 것들만 남았다.
“냄새나요?”
“응.”
“그럼 이건 하지 말아야겠다.”
주섬주섬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을 잡아서 침대에 눕혔다. 보면 볼수록 예쁘게 마른 몸이다. 상체에 흉터만 없었다면 벗겨놓고 마네킹으로 써도 될 것 같다.
“흉터 다 없애줄까?”
“시간이 많이 걸릴 거래요.”
“그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어. 매일매일 하면 사라지거든.”
내가 이렇게 매일 같은 자리를 새겨주면 되지. 색도 입혀줘. 웃음을 터뜨린 하영진이 나를 돌아봤다.
“지금 이상한 말 하면 너 내일 넘어진다.”
한쪽 볼이 불룩하게 튀어 올라서 엉덩이를 토닥였다. 나쁜 소리 하면 절대 안 줄 거야.
“직전에 넣어주면 되지?”
“네….”
누가 마지막으로 내 엉덩이에 손을 댔지. 김한세한테 일어나라고 걷어차였던 게 마지막이었다. 어린애가 피아노를 치듯 꾹꾹 야무지게 살을 눌러온다.
“하고 싶어?”
“아니요. 괜찮아요.”
“하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해.”
“…참을 거예요. 참으면 나중에 더 좋다고 하셨잖아요. 오늘 참고, 내일 또 참으면 그다음에 할게요.”
나 오늘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고 궁금증을 유발했다. 하영진은 어떤 얘기냐며 내 말을 받아주고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결을 따라 만져줬다.
“내 나이가 궁금해?”
다가오던 손이 우뚝 멈춰서 내 머리카락을 피해 내려갔다. 몽롱하게 내 외모에 취한 눈도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 어… 그, 그게. 그… 저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요.”
“무슨 뜻?”
“저도 나잇값을 못하니까, 상관없다고… 그렇게 얘기한 거라서요.”
“…….”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몸을 단단히 막았다.
“제가 잘못한 건가요? 한세 형하고는… 얘기하지 마요?”
차라리 김한세라면 괜찮다. 내가 아는 사람인 데다 금전적으로 엮인 게 많아서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니까. 그리고 하영진의 취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우선 키가 커야 한다. 응? 김한세는 합격이잖아. 아냐.
“한세 형은 괜찮을 줄 알았어요.”
“왜 걔는 괜찮아?”
“…아무래도… 둘이, 네… 그런 사이였으니까….”
무슨 사이? 하영진이 보고 있는 벽은 깨끗했다. 내가 짐작하는 그건 아니겠지.
“그, 네….”
글자마다 뜻이 묻어났다. ‘그’가 무슨 말인지 알았고 ‘네’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겉으로 봤을 때 나와 김한세가 그래 보이나? 어딜 봐서? 자주 붙어 다녀서 그런 건가?
“전에 상대도 있다고… 하셨고.”
“응.”
“친…해 보이셔서. 집도, 잘 아시는 것 같았고. 자주 와봤다고, 그래서….”
“넌 친해 보이고 집도 와보면 한 번쯤은 자 본 것 같아?”
“…….”
“내가 굳이 걔하고….”
생각할수록 어이없네. 풀죽은 볼을 누르고 좌우로 젤리처럼 늘였다. 김한세한테 꼭 들려줘야지. 얼마나 뒤집어질지 궁금하다.
“아무렇지도 않았어?”
“원래 그런 건가… 아무래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 맞는데. 비슷한 경험도 있고, 막상 당하면 절대 용납되지 않는 과격한 문화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질투는 부족하면 내가 더 하면 된다. 하영진을 안고 침대에 앉아 어깨선을 따라 자국을 내며 다리를 완전히 벌렸다.
“하, 으응.”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끝이 잠깐 닿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면 물이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앞이 맨들해진다. 내 것도 이렇게 길게 만져본 적이 없어서 신기하다. 가냘픈 숨소리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갔다.
“힘 풀어.”
엉덩이 좀 만지고 싶은데 이러면 곤란해. 잘록한 허리를 여러 번 쓰다듬어 긴장을 풀게 했다. 휴식기를 마친 내 것도 완전히 일어서서 하영진의 중심을 찔러 갔다. 급하게 도착한 손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엉덩이를 안아 최대한 시간을 끌고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무겁지, 않으세요?”
“응. 집중해.”
비비기만 해도 좋은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상대에 따라 기간의 넓이도 정해지나 보다. 어쩔 줄 모르던 발이 내 옆에 제대로 세워졌다. 쳐올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불규칙하게 변했다. 숙인 고개가 점점 들리면서 하영진의 몸이 곧게 펴졌다. 난 보이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고 벌어지는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할래?”
말없이 내려가던 하영진은 긴 소매로 눈을 훔치고 내 하반신과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어렵지 않아. 하고 싶으면 하면 돼.”
꼿꼿하게 서 있던 건 한번을 빼도 그대로라 적잖은 충격을 받긴 했다. 하영진의 것에 코를 가져가려다 손에 단단히 막혔다. 입술과 코를 가린 손과 절대 안 된다는 눈빛을 읽고 손을 올려 움직여줬다. 몸이 배배 꼬여 쓰러지는 사람을 안아 침대에 눕혀뒀다. 한 손으로 헤드를 받치고 자신의 것을 손으로 훑는 걸 지켜봤다. 빨라지다가 느리게 쳐지는 속도를 따라 긴 호흡을 천천히 내뱉었고 다시 빨라질 땐 숨을 멈췄다.
“흐윽, 윽… 도와, 주세요.”
도리질을 치던 하영진이 헤드를 받치던 왼손을 내게 내밀었다.
* * *
하영진을 꼬드겨 아버지가 좋아하는 식당에 데리고 왔다. 연못에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와 작은 폭포를 보다 휘둥그레지더니 자신이 이런 곳에 와도 되는 건지 물었다.
“한복이라도 입어야 하는 곳인가요?”
“입을래?”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요? 저 청바지….”
“여기 누가 있는지 네가 알아?”
“아니요….”
“네 이름 아는 사람이 있어?”
물고기나 보지, 쓸데없는 신경을 쓰고 있어. 그 시간에 내가 뭘 입었는지나 봐주고, 얼굴이나… 요즘 하영진이 얼굴을 보면 찜찜한데 또 안 보면 약간 우울하다. 돌아버린 건가.
“제 이름은 몰라도, 천재상이라는 이름은 알지 않을까요?”
할머니가 유명하니까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하영진의 뒤에서 진짜 한복을 입은 사람이 걸어와서 내게 고개를 숙여 아는 척을 했다.
“지금 들어있는 사람들 다 나가라고 하세요.”
“네?”
“네. 알겠습니다.”
“가자. 내 이름도 숨겼어.”
손을 내밀어도 반응이 없어서 내가 앞장서서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한복 사람이 떠나자마자 하영진이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끔은 나란히 앉아서 먹는 것도 색다르고 좋지.
“왜 이리 와?”
“갑자기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껴져서 물리적 거리를 줄여볼까…? 해서요.”
“그래?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살짝 벌어진 입술을 머금었다. 떨어질 때까지 눈을 뜨고 있던 하영진은 다 끝나고서야 눈을 감았다.
“좀 줄어든 것 같아?”
“한 번 더 입술 해주시면 더 줄어들 것 같아요.”
“밥 다 먹으면 해줄게.”
매일 보는 음식과 다름없는 한식임에도 눈을 반짝거린다. 여기는 몇 인분씩 파느냐는 황당한 질문을 던져 내 말문을 막히게 했지만 모른다고 할 수 없어서 뒤늦게 2인분이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두 명이니까.
“이걸 제가 다 먹을 수 있을까요?”
“억지로 먹지 말고 남겨.”
“…….”
제자리로 돌아간 하영진의 입술이 삐죽댄다. 먹지 말고 남기라고 한 게 그렇게 삐질 일인가. 이유를 묻지 않고 젓가락질을 하며 하영진을 살폈다.
“어떤 날은, 남김없이 먹으라 하시고, 오늘은 또 남겨도 된다고…….”
“누가 봐도 많은 양을 다 먹으라고 할 수는 없어. 그러다 토하면 돈이 아깝지 않을까?”
“돈이 아까우세요?”
“네가.”
내 돈도 네 돈처럼 아껴주고 있다는 걸 짚어줬다. 돈의 출처가 내 노동이었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어릴 때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는 걸 이제 와서 찾을 이유가 없다. 다음은 뭘 먹을까 고민하는 젓가락이 허공을 휘젓고 다녔다.
뒤이어 나온 수정과는 잘 마시더니 지금 내가 사 온 아메리카노는 찔끔찔끔 빨아들이고 영 좋아하는 눈치가 아니다.
“네가 커피를 안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것 같아.”
“네… 맞아요. 죄송하지만 이거 버려도 될까요?”
남은 반찬에 대한 집착 어린 시선을 겨우 떨치고 나온 길이다. 대뜸 내미는 커피를 받고 내 건 길가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두 잔은 싫으세요?”
축축해진 손을 잡고 이어진 길을 걸었다. 거의 한 달 동안 한국에 있던 진우한이 곧 미국으로 떠나면 김한세가 직접 따라붙는다. 그럼 난 그 시간을 틈타 하영진을 어떻게든 회사에 앉혀놓는다. 끝.
“왜 차도 쪽으로 걸어. 다치고 싶어?”
“아니….”
배부르다고 좀 걷고 싶다며. 하영진은 도로 뾰로통해졌다. 간장게장은 이긴 것 같고 이제 배전호인가. 고양이에게 한 걸음.
“차도가 좋으면 아예 내려가서 걷지 그래?”
“제가 다쳐도 괜찮으세요?”
“아니. 네가 내 말을 안 들으니까 그렇지. 너 이쪽으로 들어와.”
“안 돼요. 거긴 벌레가 많이 나온단 말이에요.”
벌레를 싫어해? 책상에 우유갑은 그대로 두고 살았으면서? 옆으로 조금 비켜서 안쪽에 자리를 만들어줬다. 유형오가 죽은 그날 돌아오던 길에 이곳을 발견했다. 인적이 드물고 차가 없으면 못 오는 곳, 단 하나 있는 테이크아웃 전문 카페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는 한적한 곳. 하영진은 나를 가득 끌어안기를 좋아한다. 키가 커서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내려다보는 정수리가 귀여워서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이렇게 손잡고 다니는 거 기분 좋아요. 우리 집 앞에도 이런 길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쵸?”
“근방의 건물을 다 사도 그건 무리야.”
옆에 소방도로 때문에 이사 가는 게 더 빠를걸. 입을 막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사레가 들려서 콜록댄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줬다.
“제가 번쩍번쩍 들 수는 없어도 어부바는 해드릴 수 있어요.”
“…갑자기?”
“네. 저 자주 안아주시는데 혹시, 안기고 싶으신가? 하고요.”
고개를 휘젓고 손을 잡아당겼다. 가던 길이나 마저 가자. 아직 푸르른 가로수가 한참 남았다. 뒷짐 지는 자세로 뭘 하고 싶은지 알아듣긴 했지만 어부바란 단어도 난생처음 접했다.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혹시라도… 우리가 헤어지면, 길거리에서라도 만나면 인사 해주실래요?”
“그러지 뭐.”
그거 뭐 어려운 일이라고. 헤어진 사람하고도 만나면 인사하고 회의하는 게 이 바닥이다.
“저 다음 주쯤에 회사에 말씀드리려고요. 문영이가 오라고 하는데 아직은 제가 준비가 안 되어서요. 일하면서 준비해보려….”
“거기 말고 우리 회사로 와.”
“예? 못 들었어요.”
하필 이런 때 차가 지나가서 하영진의 뒤로 작은 모래바람이 스쳐 갔다. 좀 더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해야지. 짧아진 머리카락을 한번 털어낸 하영진이 싱그럽게 웃었다. 여름에 만나서 여름이 가장 어울리는 줄 알았지만 어느 계절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나중에 알려줄게.”
갑자기 하영진이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면 무릎이 세게 부딪쳤을 것이다. 혹시 몰라서 앉아보니 무릎에 흙먼지가 조금 묻어 있어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털어줬다.
“안 다쳤어?”
“아, 네. 돌이 있는 줄 몰랐어요.”
뒤에 슬쩍 튀어나온 돌이 있었다. 머쓱해서 딴 곳을 보는 하영진의 손을 움켜잡고 마저 걸었다. 양 갈래 길이 나오고 한쪽은 아무것도 없었고 다른 쪽은 이 길의 연장선처럼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돌아가자.”
“네. 날씨가 좋네요.”
“내일도 나오면 되지.”
손도 얼마든지 잡아줄게. 바보처럼 웃는 얼굴에 예전 모습이 겹쳐졌다. 언제까지 함께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은 내가 힘들게 해도 옛날처럼 굴었으면 좋겠다. 답답하게 참고 서러워서 울고 금식으로 시위해줘.
“우리는 이런 곳에서 살게 되나요?”
“이 정도는 못 해도 비슷할 거야.”
“정말 지미도 같이 살아도 돼요?”
“응. 물론이지.”
우글우글한 표정 못생겼어. 볼을 꼬집자 울먹이던 눈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엄마한테 아직 말씀을 못 드렸어요. 제가 혼자 살아본 적이 없어서… 걱정하실까 봐요.”
아무래도 남자 동거인은 공개하기 꺼려지겠지. 하영진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 내가 재촉할 일이 아니다.
“천천히 해.”
순서대로 하는 일이 달갑지가 않다. 계획에 따르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싹트는 강박감이 부담스럽고 싫다. 그래서 내가 김한세와 맞지 않는 거고, 김한세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하영진은 앞서 걷다가 나를 돌아봤다. 봄의 꽃이 시들어서 아쉽다던 사람은 여름을 통째로 삼키고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전날부터 혼자 야근을 할 수 없다며 열 받게 하는 김한세 때문에 나도 회사에서 자느라 집에 늦게 들어왔다. 오늘 내 컴퓨터가 얼마나 개 같은 녀석인지도 알게 돼서 흠씬 두들겨 패주고 왔다. 하영진은 대낮에 도착한 나를 기다리다가 옆에 붙들려서 강제로 낮잠을 취하게 됐고 나는 마지막으로 드디어 내일 출국,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지금, 저 진동 소리만 아니었으면…. 머리를 긁적이며 전화를 받다가 이불을 걷었다.
“…뭐라고?”
― 지금 함께 계십니까?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와서 나가려다가 하영진에게로 돌아갔다. 이불, 이불, 이불을 덮어줘야 해.
― 보내드린 거 어서 보십시오.
아까 것도 다 해석이 안 됐는데 왜 이렇게 정신이 없게…. 건너편의 방으로 가서도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서 멍하니 서 있었다.
― 보셨습니까?
아니. 서서 잠들었어. 하라는 대로 문자를 눌러 밝은 화면 가득 올라오는 영상을 지그시 쳐다봤다. 밤 열한 시. 불 좀 켜고 봐야…지. 피곤해서 눈이 빠질 것 같아.
「어제 오후 아홉 시 ‘10년 전 Y고 성폭행 사건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올라온 이후 영상의 주인공 이 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엄희연 기자입니다.」
「4분 남짓의 이 짧은 영상은 이 씨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상의 주인공인 이 씨는 자신을 10년 전 Y고 집단성폭행 가해자 중 하나이며 당시 가장 높은 형을 선고받았던 인물로 소개했습니다. 이후 이 씨는 J가 요청한 거짓 진술의 대가로 받았던 금품들을 상세히 언급하고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눈물로 호소하며 이 영상은 끝을 맺습니다. 영상이 올라온 지 1분도 안 돼 올라온 이 씨의 댓글입니다. ‘나는 항상 J가 두려웠다. J는 나도 죽일 것이니 내가 먼저 죽어버리겠다.’ 이 댓글이 올라오고 얼마 안 돼 인근 파출소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확인결과 이 씨는 영상을 올린 이후 바로 자살했고, 경찰은 책상 위에 남겨둔 메모와 현장 상황을 토대로 범죄 혐의성이 낮아 부검은 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내일 J가 출국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퍼지면서….」
― 다 보셨습니까?
“…진우한이야?”
― 모릅니다. 어찌 됐든 오늘 출국은 못할 겁니다.
“너 제대로 묻었다고 했잖아. 아무도 안 찾을 거라며.”
― 뒤쫓아와서 꺼냈나 봅니다.
김한세가 뒤를 밟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바로 갈게. 기사는?”
― 기웅이 내렸습니다.
방으로 돌아가 하영진을 깨워서 데리고,
“…….”
데리고 갈 수 없어. 내게 안기는 몸을 일으켰다.
“나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집에 올라가 있어. 알았지?”
“…지금요?”
“응. 너 올라가는 거 보고 갈게. 같이 가자.”
같이 사는 고양이는 왜 사람이 아니지? 도움이 안 돼. 김한진을 올라오라고 할 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자신의 흔적을 더듬는 따뜻한 손을 내버려 뒀다.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어제도 늦게 들어오셨잖아요.”
“응.”
“쉬엄쉬엄하세요. 몸 상하지 않게.”
“입술.”
자기 전에 내 피로를 풀어달라며 들러붙길 잘한 것 같다.
“누가 보면 홍역인 줄 알 거예요.”
홍역? 나중에 김한세에게 물어봐야지. 어젯밤, 날 위해 찾아놓은 옷을 입혀줬다. 바지 밑단을 두 번 접고 뒤꿈치를 잡아 양말을 신겨줬다. 나는 이런 것도 키스라도 받고 있구나. 간장게장처럼 빨아달라고 빌어서 말이 씨가 된 것 같다. 하영진은 손으로 내 것을 만지작대며 내가 하는 것처럼 목선에 입술을 비비적댔다.
“여기도… 빨아 드릴 테니까 안 가시면 안 돼요?”
당장 나가야 하는데. 간절함이 가득한 눈을 가렸다. 사실 내가 제일 쓸데없을 텐데 이제 와서 가지 않겠다고 해볼까. 여기서 전화나 받으면서 지시하면 되나.
“제가 더 잘할게요.”
“응. 그래야겠더라.”
“그럼… 제가 문 앞까지는 데려다 드려도 돼요?”
내가 옥상 난간이라도 된 것처럼 매달려서 발을 살랑거린다. 에어컨이 차가워서 그런가. 이마에 손을 대봤다.
“너 오늘 왜 이래?”
“하고 나서 나가는 건 너무해요.”
불뚝한 볼에 코끝을 갖다 댔다. 이럴 때가 아니지만 조금 더 시간을 끌고 싶다. 1층에 다다라서 하영진을 내려놓고 들고 있던 신발을 신겨줬다. 컨버스, 벗기기 짜증 나서 신고 했었던 거라 기억하고 있었다. 걔는 노란색. 하영진은 보라색. 배전호가 준 건가.
“다녀올 테니까 오늘은 나가지 마.”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전에 누가 지켜보는 거 같다고 했었지? 위험하니까 나가지 말고 집에 고양이랑 같이 있어.”
언젠가 하영진이 멍하니 보던 곳에 김한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손짓에 밖으로 나온 김한진이 가볍게 인사했다. 젊은 새벽은 남색 빛이 돈다. 곧 끝이야.
“딴 사람은 몰라도 넌 문 앞에서 기다려. 혹시라도 문제 있으면 바로 전화하고.”
“네. 본부장님.”
“무슨 일이 생겨도 혼자 책임질 생각하지 마.”
시간 끌다가 하영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주소를 입력하고 도착한 곳은 진우한의 집 근처였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김한세의 앞에 앉아 이른 카페인을 섭취했다. 24시간 카페가 있는지도 오늘 처음 알았다.
“걱정 마십시오. 무슨 수로 수십 명을 뚫고 들어가겠습니까. 영진 씨 집에는 어머니도 계십니다.”
“걱정은 안 돼. 지가 살겠다고 기자들한테 둘러싸인걸.”
진우한을 감시하던 사람이 무탈하다는 것도 확인했고, 진우한은 현재 집에 있고, 그 누구도 나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방금까지도 저 집 앞에서 본 인산인해는 번쩍이는 대가리 구경 축제다.
“진 회장 집도 장난 아니겠지?”
“네. 십 년 전이면 몰라도 한동안 해외에 나가 있어야 할 겁니다.”
“기회가 또 생기겠지?”
“생길 겁니다. 몇 달 뒤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기자들도 지쳐 나가떨어질 테니까 그때를 다시 노려보겠습니다.”
이상하지. 그건 내가 찍으라고 한 영상이 아니었다. 진우한이 찍어놓고 그게 유출이 됐는데 하필 오늘? 해외 출국은 나에게만 기회가 아니다. 아니면 나 말고….
“유출한 사람이 준희일 수도 있나?”
“저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장난치길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이가 안 좋지만 일방적으로 싫어하고 괴롭힌 건 진우한 쪽이고요.”
“배제할 수는 없다는 거네. 그럼 진우한은 그걸 왜 건주한테 찍으라고 시킨 거지?”
옆에 있는 휴지를 조금 뽑아서 컵 주위에 송골송골 맺힌 물을 닦아냈다. 송골송골. 귀여워. 송골송골.
“이럴 때를 대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어쨌든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진우한도 사업을 넘기고 싶진 않았을 겁니다.”
자폭이거나 폭로인가. 그래서 지금 저 영상을 뿌린 게 진우한인지 진준희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아니면 완전한 타인. 내가 이런 짓을 하는 걸 알고 중간에서 떨어지는 이익을 받아먹는 사람일 수도 있다.
시커먼 바깥은 가로등 두 개뿐이었다. 테라스로 자리를 옮기고 핸드폰을 켜봤다. 하영진도 조용하고, 김한진도 마찬가지다.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오는 안전하다, 문제없다는 문자를 일일이 확인했다. 새벽이라 다행인 건가. 마침 자다 일어났으니까 바로 올라가서 고양이와 한숨 자고 있겠지.
“김한진이 그런 일은 잘합니다. 본부장님보다 더 영진 씨를 아낄 수도 있습니다.”
“뭔 개소리야.”
“보다 보니까 정이 좀 들었나 봅니다. 밖에 나가기만 하면 귀신같이 연락이 오더라고요. 저더러 뭘 어쩌라는 건지.”
이 새끼들이 정신 못 차리고 하영진한테 껄떡대면 둘 다 잘라버리겠어.
“네가 하영진 따라다니면 김한진이나 신문영처럼 될까?”
“그럴 리가요. 저는 본부장님과는 다릅니다.”
저렇게 비꼴 거면 말투라도 같이 꼬든가. 업무 보고하는 것도 아니고 무미건조하다.
“이 사태가 지속되면 아침까지 시끄러울 겁니다. 그럼 영진 씨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일 거고요.”
“알아. 잠깐 나갔다 올게.”
김한세를 두고 혼자 집까지 한번 걸어가 봤다. 이 사태를 막을 수는 없다. 기웅으로서도 저렇게 기자가 진을 치고 있으면 아침에는 무조건 터질 거다. 핸드폰을 뺏을 수도 없고, 아침 뉴스를 보면서 드라이기를 켠다는 엄마는….
“…….”
징그러울 정도로 많네. 나뭇가지가 삐죽삐죽 담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난 어릴 때 살던 집이 지겨워서 지금도 나와서 사는 중이지만 진우한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계속해서 터지는 플래시와 기자들의 목소리가 섞여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로 절박했나.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아마 나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진준희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라면 그 전에 제거를 해야…….
“하영진.”
이게 누구의 짓이든 가장 중요한 사람이잖아. 핸드폰을 카페에 두고 온 것 같다. 마음이 급해서 뛰어가던 내 앞에 못 보던 갈림길이 보였다. 길을 잃은 건가. 내가 이걸 아까 봤었나? 멍하니 서 있다가 나를 찾으러 온 김한세에게 핸드폰을 받았다.
“전화가 왔습니다. 어디 갔다 오신 겁니까?”
“잠깐 걸었어.”
아는 번호도 아니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끊어졌다가 다시 울린다. 굳어가는 손으로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 안녕하세요.
크게 들리도록 조절하고 핸드폰을 넘겼다.
“누구십니까?”
― 저 모르세요?
김한세가 입 모양으로 진우한이라고 알려줬다.
― 제 차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네. 알고 있습니다.”
― 거기 선물이 하나 있으니까 가보세요. 저는 바빠서.
“네가 왜 바빠?”
― 가보시면 제가 왜 바쁜지 아실 겁니다.
툭 끊어진 전화를 들고 있다가 김한세를 따라갔다. 가깝나 했는데 집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전화까지 해서 나를 차에 넣고 어떻게 하려는 거지. 앞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물러나고 김한세가 차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어딘가를 확인하더니 문을 열어줬다.
“터지는 거 아니야?”
“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습니다.”
“넌 모르겠지만 난 하영진하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위험하면 안 돼.”
“저도 영진 씨하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뭐? 나를 조수석에 욱여넣은 김한세가 반대편에 탔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오고 내비게이션이 켜졌다.
“…원격조종인가 봅니다.”
오랜 시간 방치된 건지 큼큼한 냄새가 난다. 뽀얀 먼지도 창문에 쌓여있었다.
―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로 말하면 됐던 거 아니야?”
“전화번호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핸드폰을 넘기고 내비게이션 화면에서 튀어나온 진우한은 안경을 끼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갈색 머리카락에 안경을 끼고 언제나 웃고 있다는. 키가 크고 인기가 좋아서 회사에서도 품평이 좋다 했었나. 조건을 갖춘 사람은 조금만 친절해도 좋은 인상이 될 수 있다고 김한세가 누차 내게 얘기했었다.
― 이런 건 얼굴 보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화가 나중 아니야?”
“먼저 찍어뒀나 봅니다.”
― 우리 영진이는 여전히 맛있나요? 구멍이 다 찢어져서 못 쓸 텐데, 어떻게 괜찮으셨나 봐요.
김한세가 말없이 나가고 난 시트를 조절해 뒤로 좀 누웠다. 새벽 다섯 시. 하영진이 일어날 법한 시간인가.
― 당신이 누군지 알아봤더니 천해더라고요. 저하고 상대도 안 되는 곳이라 조금 겁먹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진우한은 밤에 이곳에 와서 이걸 찍었다. 어젯밤이 아니라 오래된. 하영진에게 전화를 걸며 차창을 열려다가 구식인 걸 깨닫고 손잡이를 돌렸다.
“김한진한테 4층에 올라가 보라고 해. 집에 있나 확인해 봐.”
“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이런 조치를 취할 거라고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 앞 편의점에도 매일 똑같은 사람을 앉혀놓았다.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고, 동네 주민 누가 봐도 자연스럽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 아마 전화를 받지 않을… 아니, 받지 못할 겁니다.
“…….”
― 저하고 같이 있으니까요. 주소는 찍어드릴 테니 오셔서 데리고 가시면 됩니다.
그럴 리가. 아침이라 그런 거지. 어떻게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사람을 데리고 간다는 거야. 아까 받은 전화번호로 해봐도 꺼져 있다는 안내음뿐이다.
― 새벽 한 시에 담배를 피우러 간다고 배전호가 얘기해줬거든요.
“배전호?”
― 네. 당신이 썼던 그 사다리차로 지금 막 데리고 온다네요.
배전호? 배전호라고 했어. 녹화된 화면은 조용했다. 전화가 온 핸드폰을 내려놓는 손이 느리게 보인다. 그 옆을 지나가던 차의 헤드라이트가 진우한의 얼굴을 비추고 안경이 벗겨졌다.
― 유형오가 있었으면 좀 더 빨리 처리할 수 있었는데… 언젠가 다들 없애버리려고 하긴 했는데 그때가 지금이 되고, 김영진에게 두 번째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전혀 예상을 못 했습니다. 이건… 하루라도 안 보면 좀 힘들어서 실물을 한번 만져보고 가려고요.
창문을 톡톡 친 김한세가 고개를 저었다. 김한진은 하영진이 4층에 없다고 하고 하영진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 한번 태워본 숲에 다시 불을 지르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숲이 존나 타요. 활활.
커피를 왜 못 마시냐고 그 가로수길에서 물었을 때 하영진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잠이 오지 않는다며 왼쪽 심장에 손을 얹었었다. 전혀 다른 상황임에도 폭발하듯 풀리는 손동작이 그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 내가 끝날 때까지 눈을 떼지 말고 있었어야죠.
처음 만났을 때 하영진은 위태로워서 금방 어딘가로 떠날 것만 같았다. 어느 한 곳에 위탁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며….
― 몸에 물이 많다고 건조하지 않은 건 아니거든요. 아마 이번에 불을 지르면 못 일어날 거예요.
그래서 그 불안의 일부를 알고 싶었다. 벌써 몇 번째 듣는지 모를 기계음이 제발 목소리로 변하길 기도했다.
― 저번에 집에 찾아갔을 때는 제대로 건드리지도 못했는데 덕분에 기회가 생겨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연결되며 통화료가….
― 아, 선물은 백미러 뒤에 붙어 있으니까 가져가세요. 원래 목소리가 어땠는지, 왜 그렇게 됐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삐 소리 뒤로 내비게이션이 새까매졌다. 백미러 뒤에 덜렁거리는 주머니를 뜯고 차에서 내렸다. 한 시에 담배를 피우러 나갔고, 잡혀서… 납치됐고.
“배전호….”
차를 갈아타서 김한세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주머니에서 손톱만 한 USB를 챙겼다.
“인천으로 가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제 탓입니다.”
처음부터 싹 밀어버렸어야 했나. 아니 그러면 언론이 가장 먼저 알고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이건주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해서… 내가 건드리지 않았다면 잘 됐을까? 아닐걸. 하영진은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다. 긴장하면 세우다가 말기도 하고, 뒤는 건드리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때는 하루였다면 이번은 몇 시간뿐입니다.”
“…입 좀 닥쳐.”
또 한참의 시간이 흐르겠지. 다시 쓰레기를 모아서 하영진을 망가뜨릴 건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배전호가, 하영진의 친구가 아니라 진우한의 사람이었다. 하영진이 담배를 피우는 시간을 진우한에게 알려서… 전해서, 알려서. 근데 그건 내가 하영진과 약속한 시간인데… 그럼 내가….
“사람을 먼저 보낼까요?”
“아니.”
“…….”
“보내지 마.”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다. 인천까지 두 시간. 내 머리 위를 지나가는 표지판의 숫자를 지켜보다 눈을 감았다.
논밭에 우뚝 선 2층짜리 주택은 흰색과 회색으로 꾸며져 아침의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푹푹 꺼지는 비 묻은 진흙 위로 발자국이 나 있었다. 지금은 누군가를 탓할 때가 아니야. 데리고 돌아가야 해.
“이미 나갔겠지.”
“네. 부둣가가 옆입니다.”
“가서 넌 그거나 알아봐.”
십 년 전을 보게 되는 건가. 사실 보고 싶지 않다. 내가 그걸 봐서 뭘 하지.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그럼 내가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거짓말을 치면 되니까. 바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잠을 자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바다를 보여주려고. 인천에 우리가 온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내딛는 걸음에 억울함을 가득 담았다.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모르니 방문마다 들려 안쪽을 살펴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중간에 유리가 둘러싼 정원엔 벤치 하나가 있었고 층계참을 지나 2층을 둘러보니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나갔고. 깨끗하다. 1층처럼 방문을 열어보며 아무 냄새도 맡아지지 않는 집 안을 누비고 다녔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여기도. 마지막으로 오른쪽 끝에 있는 방문 앞에 섰다.
여기. 망설이는 발을 무시하며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2층의 거실보다 더 넓은 방의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 그 위로 하영진이 옷을 갖춰 입고 누워있었다. 왜 멀쩡하지. 안쪽에 있는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몸을 살펴볼 수 있었다. 팔과 다리를 매만지며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마지막으로 봤던 내 옷이 아닌 새로운 잠옷을 찢어버리고 싶다. 망설이다가 바지를 반쯤 벗기고 다리를 들어 안쪽을 살펴봤다. 붓지도 않았고, 설마. 속은 건가?
“…하영진.”
매일 끼고 다니는 시계가 빠져있는 걸 보니 집에 들렀다가 옥상으로 간 건 맞다. 한번 부르면 일어나는 사람이 전혀 일어나지를 않는다. 뺨과 이마를 만져 열이라도 나는 건지 확인했다.
“영진아. 하영진?”
양쪽 팔을 잡고 어깨까지 뒤흔들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심장에 귀를 붙이고 있을 때 살아난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하아… 너 왜 이렇게 못 일어나.”
“여기는 어디예요?”
“바람 쐬러 데려왔어.”
눈가를 비비던 하영진이 갑자기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름 불러도 된다고, 저한테 좋아한다고 해주셨었잖아요. 진짜인가요?”
뒤늦게 고개라도 끄덕여봤지만 하영진이 나를 떼어놓고 내 눈을 똑똑히 응시했다. 예상과 빗나간 상황이 당혹스럽다. 나를 사칭하고, 나인 척 하영진을 속이고. 그게 원하던 건가?
“…아….”
“바다 보러 가자.”
나를 밀치고 소매를 들추던 하영진이 급하게 내게서 팔을 숨기며 뒤로 물러났다. 손목을 잡아 소매를 걷어 올리자 푸른 빛의 멍과 중간에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처음 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당해봤으니 본능적으로 팔을 걷은 것이다.
내 속의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져 틈새로 흘러갔다. 그래서 하영진이 그 지하에서 나올 수가 없었던 거였다.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내가 지금은 아무것도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눈물이 가득 차올라 내 손 위로 떨어졌다.
“죄송해요.”
“…….”
김한세가 왔어야 했나. 물이라도 가져와야겠다. 내가 방을 나서려 할 때 하영진이 뒤에서 나를 잡아당겼다.
“잘못했어요. 절대로, 절대 제가 원해서 한 건 아니었어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다리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쓰다듬어주려는데 순간 하영진이 내 손을 피하고는 곧 양손으로 내 손을 가졌다.
“알고 있었어.”
“…네?”
“다 알고 있었다고.”
“왜, 왜 그동안 말씀 안 하셨어요?”
아는 척을 하기 싫었으니까. 비겁하게 어수룩한 반응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내가 어디까지 해도 되는가, 한계를 재보며 도와주는 척 위선을 떨었다.
“…재밌으셨어요?”
“…….”
“저는 재밌었나요?”
“하영진.”
처음은 그랬을지 몰라도 나중은 아니야. 알고 있으면서. 내 손을 굳게 갖고 있던 힘이 조금씩 풀려서 내가 움켜잡았다.
“그럼 제가 들은 건 다… 우한이가 한 짓이네요.”
“…….”
“…제가 더럽지 않으세요?”
“응.”
이렇게 코 흘리며 울어도 예뻐. 분노가 차오르다가도 하영진의 무사한 모습이 나를 진정시켰다.
“저는… 제가 더러워요.”
“그렇지 않아.”
“왜 단정하세요? 제가 처신을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걸 수도 있잖아요.”
“어떻게 잘못했는데?”
‘저는’으로 입을 떼었지만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릴 수 없어서 하영진의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다, 우한이가 잘못한 거예요.”
“맞아.”
“가장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를, 속인 거예요. 그치만… 저를 도와줘서 저는 당연히 좋은 사람이라고… 그랬고. 건주 형이 제일 먼저, 나중에도… 많이 봤는데.”
넉넉한 바지춤을 안은 손을 따라 소매가 흘러내렸다. 몇 번이고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어서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때 제가 성공했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으셨을 텐데.”
손목에 닿는 시선을 돌리려 쓰다듬던 머리를 젖히고 뺨을 뭉갰다.
“그냥 내 바지나 붙잡고 있어. 딴생각하지 말고.”
나가자고 하영진의 손을 잡아 일으키려는데 바닥에 담배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저게 뭐지. 하영진이 울 동안 난 나가서 담배를 줍고 뒷면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잘 쓰세요 :)]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반대쪽 손을 하영진에게 내밀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하자는 대로 할 것이다. 앞으로 알아가는 것마다 받을 충격을 대비하기엔 나도 모르는 게 많았다.
“화내고 싶은데… 어떻, 게, 후욱, 윽, 어떻게 하는지를 모르겠어요….”
그새 주저앉은 하영진을 안고 계단을 내려가다 우뚝 섰다.
“……보면… 안 돼. 눈 감아.”
이곳은 하영진의 집이다. 커다란 액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름의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들고 있는 하얀색 마이크, 편하게 앉은 자세가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뜨라고 할 때까지 절대 뜨지 마.”
그렇게 과거를 찾아다녔는데 모두 처음 접하는 사진들이었다. 사람들은 하영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기억하지 못했다. 나조차도 자극적인 것에만 초점을 두고 있지 않았나. 김한세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빈 공간이 메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