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를 불러내놓고 내가 정작 필요할 때는 지가 쉰다. 김한세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전화기를 내려놨다. 그래도 그 새끼가 법적으로 쉰다는데 내가 전화해서 뭐 어쩔 건데. 화풀이나 하다가 끝이 나겠지. 어차피 난 여기 붙박이처럼 앉아있을 것이다. 저저번 주와 달리 연락 하나 없는 핸드폰. 하영진을 따라다니고 있을 김한진에게 뭐하느냐고 문자를 보내봤다.
[친구와 카페에서 자몽에이드를 드시고 계십니다. 참고로 저는 아메리카노이고 김한올은 제주산 녹차라떼입니다.]
“…….”
그렇구나. 착하게 배려해주고, 참아보려 해도 혼자 하는 해결이 점점 역부족이다. 이렇게 떨어져 있어야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지. 아직도 아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가 서지도 않는 사람과 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 결국은 날 무서워하겠지. 자꾸 눈앞에 떠오르는 몸을 고개를 털어 쫓아냈다. 내가 잘 때 몰래 이름을 부르면 심장이 커져서 귀가 멍해진다. 그러면 이제 난 아침을 기다리게 된다. 늦게 자든, 일찍 자든 하영진이 올 시간에 발가락부터 깨어 내 이름이 불릴 시간을 찾아다닌다. 어느 하루, 까먹고 부르지 않으면 기분이 저 바닥으로 떨어져서 그날 하루 하영진에게 말을 걸 힘을 잃었다. 그럼 하영진은 영문도 모르면서 사과한다. 내 상태에 따라 사과법도 각각 다르다.
단 세 명이 남았는데 일단 건주는 지금 해외에 나갔대서 한국에 돌아오면 손을 보기로 했다. 지금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은 형오와 우한이다. 후자는 만일을 위해 남겨야 하고 그전에 형오를…. 첫사랑과 결혼이라고 써 있었지. 걔가 거의 유일하게 이상한 짓을 많이 했었다. 얼마 전까지도 술 먹고 사람을 치고 다닌 탓에 혹시 형오가 우한이를 협박해서 일을 꾸민 게 아닌가 했었다. 하지만 진우한은 결혼을 하지 않았지. 만나는 사람도 없고 진 회장과는 다르게 깨끗했다.
물고 있던 펜을 뱉고 문을 열어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김한세의 방을 뚫어야 내 방으로 올 수 있고 그곳은 텅 비어있었다. 금고를 따서 노트북을 꺼내 내 방으로 가져왔다. 주로 쓰는 비밀번호를 눌러보고 틀려서 다른 비밀번호를 쳤다. 김한세에게 복수할 생각밖에 없던 중학생의 나에게 요즘도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날짜별로 정리된 폴더를 하나씩 열어 새로 추가된 내용은 없는지 살펴봤다.
저 사람들은 모를까. 속은 건가. 아니면 배경에 취해 진우한의 치부가 감춰진 걸 수도 있다. 실상은 내가 같은 짓을 저질렀어도 별일 없었을 것이다. 마치 이나솔이 나를 천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진우한의 배경도 든든한 보호로 뒤를 받쳐줄 것이다.
착실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우한이와는 반대로 형오의 생활은 규칙이란 게 없었다. 금고 아래에 놓인 종이 파일을 열어 형오의 기록을 확인했다. 성실한 학생, 책임감이 있다. 쾌활, 반장이자 선도부로서, 지각이 없고. 반면에 우한이의 성적표는 달랐다. 말수가 없다. 공부를 잘한다. 선생한테 돈이라도 먹인 건 아닌가 했었는데 옆에 눈알 빠지는 글씨로 써놓은 김한세의 코멘트를 보면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업데이트된 건 남아있는 세 명을 제외하고 영상으로 남겨둔 거나, 이후의 사진들밖에 없었다. 시체는 시꺼메서 미라 같다. 날짜와 시간을 정리해둔 마지막 장이 복잡하다. 하영진은 이 부분이 화요일 빼곤 다 똑같을 것이다. 아홉 시부터 아홉 시까지 나와 함께, 아홉 시부터 한 시까지는 집에서 엄마와 고양이와 함께. 한 시부터 또 나와 함께. 김한진이 찍어준 사진엔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는 하영진이 담겨 있었다. 그 빌어먹을 새끼들을 다 죽여줄게.
5월의 내 옷차림은 겨울과 다름없지만 하영진은 반바지를 입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양말을 신게 됐다. 색깔은 여전히 검정색이다.
“그거 벗기면 반팔 나와?”
보리차에 얼음을 동동 띄워 얼핏 보면 위스키 같다. 밑 찬장에 냄비를 찾느라 엎드린 하영진을 위해 눈을 옆으로 돌렸다.
“에어컨 바람이 차가워서요. 아, 반팔 맞아요.”
한쪽 팔을 슬쩍 벗어준 하영진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묻지 않은 것에도 한 마디 더해주는 건 성격인가.
“입은 괜찮아?”
아. 입을 벌려 안을 살펴봤다. 살다가 상대가 기절한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숨이 안 쉬어지면 내 무릎을 쥐고 있을 게 아니라 후려쳐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닫으라 할 때까지 벌리고 있던 입을 닫았다.
“미련하게 당하고 있지 마.”
“하지만, 오랜만이었고….”
“응.”
“해드리고 싶었어요.”
한 번 더 할까. 눈만 마주치면 달아오르는 내가 부끄러웠던 적은 추호도 없었다. 온몸으로 부딪쳐서 나를 때려눕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 손 한쪽이라도 선뜻 내주고 싶다.
“저 진짜 괜찮아요. 하셔도 돼요.”
“아플 거라니까.”
소매에 걸쳐진 손이 내 것을 억눌렀다. 하영진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번 해보고 그만둬도 괜찮잖아요.”
“…….”
제정신이었다면 너 왜 이렇게 하고 싶어 하냐고,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는 게 먼저였을지도 모른다. 며칠째 이어지는 폭격에 어제도 넘어가고 오늘도 넘어갔다. 입술만 뻐끔뻐끔 움직이는 바보를 두고 연보라색 남방을 벗기고 밝은 흰색의 티셔츠를 넘겼다. 추위에 돋아난 살갗에 입술을 비비며 내 방으로 옮겼다. 머리를 안고 있던 하영진이 가쁜 숨을 쉬며 힘을 빼고 바지를 벗어줬다.
“나 진짜 할 거야.”
사정없는 끄덕거림과 두려움이 가득한 승낙을 기꺼이 받았다. 난 이런 날이 빨리 올 줄 알고 모든 준비를 끝마쳐놨다. 하영진이 퇴원하면, 내 집에 오면 바로 통째로 삼켜버리려고 했었다. 내 셔츠로 흘러내리던 하영진의 팔이 목에 걸쳐졌다. 손가락이 안으로 쑤셔박힐 때마다 하영진의 눈에서 당혹이 떨어졌다.
“힘 빼. 더 넓혀야 해.”
“후, 후욱, 그게 잘….”
어차피 안 서지만 그래도 긴장을 풀어야 뭘 하는데. 젤을 더 쏟아부어 이물감을 줄여봤다. 애쓰고 있다는 것도 안다. 어떻게든 버텨봐, 바로 넣어서 싸줄 테니까.
“그냥, 빨리 지금.”
나도 빨아주면 좀 나아지려나. 혀로 입 안쪽의 크기를 가늠해보고 손가락을 빼냈다. 코끝으로 무거운 살을 밀어내고 혀끝을 세워 사이를 핥아냈다.
“아, 아, 싫어… 싫어요.”
야릇한 신음과 달리 아래는 반응이 전혀 없다. 손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고 타액을 더해 하영진의 것을 빨아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오던 손가락이 꿈틀꿈틀 경련하기 시작했을 때였나.
아.
“너 섰어.”
“네?”
아. 한번 빨아주면 되는 거였어? 조금. 매일 만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한 번만 빨아주면….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하던 걸 마저 이었다. 한쪽 다리에 덜렁거리는 바지가 밑으로 쳐져 내 팔에 닿았다. 머리카락을 놓치고 등을 퉁퉁 치던 하영진도 사태를 알고는 나를 말렸다.
“아앙, 아, 잠!! 잠깐만….”
입으로 들어오는 부피가 점점 넓어지고 흐느낌도 주체할 수 없는 신음과 함께 터져 나왔다.
“제발, 천천히… 아, 흐.”
움켜쥔 옷에서 점점 힘이 빠져갔다. 입 안을 채우는 윤곽도 점점 더 뚜렷하게 변했다. 손가락을 빼내고 들어올 때마다 안으로 박아넣으며 엉덩이를 가깝게 끌어당겼다.
“너무, 세요… 금방, 나올 것… 아, 안 돼요, 제발 그만.”
등을 다시금 치는 손이 미끄러지고 안으로 더욱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이불을 퍽퍽 걷어차던 하영진의 움직임이 멎었다. 보고 싶다. 어떤 식으로 가는지 보고 싶어.
“안 돼, 나와… 아, 싫어. 으응 아, 안 돼. 거기가 아니에요. 거기는, 흐읏.”
마지막은 손으로 해결해주며 상단을 머금어 정액을 받았다. 한 번에 삼킨 맛은 하영진의 것이라 그런지 나쁘지 않았다. 양도 적었고, 무엇보다 펑펑 울고 있는 하영진이 서러워 보여서 내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 같다.
“좋았잖아.”
“흐윽… 윽, 흑.”
“별로였어?”
입술을 모아 하영진에게 선물했다. 가지런한 이빨에도 닿고 움직이던 코에도, 축축한 뺨과 동그란 눈이 있을 곳에도 닿았다. 지금 이러면 나중엔 정말 어떻게 하려고.
“처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응?”
어깨에 박힌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등을 토닥였다. 갑자기 떨어진 하영진의 눈에서 적지 않은 억울함을 발견했다.
“…처음이야?”
아, 말하지 마. 입술을 손가락으로 꼬집고 치솟는 희열을 인내했다. 처음이… 내가 처음부터 해석을 잘못했던 거였다.
“아팠어?”
작게 도리질을 치다가도 눈물을 닦아내고 어깨를 들썩인다. 나도 이런 걸로 즐거워하면 안 되는데 이미 들킨 것 같다.
“나이가 몇인데 이런 것도 한 번도 안 해봤어.”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안 했을 거예요. 하나도 기분 안 좋아요.”
“응. 그러니까 한 번 더 하자.”
그렇게 보지 않아도 안 잡아먹어. 다급한 하영진의 팔을 잘 잡아내고 젤을 배에 뿌려 놓았다.
“오늘은 가기 전까지 이거나 하자.”
“설거지해야 하는데… 할 일이 많아요.”
“나도 넣으려면 네가 힘이 빠져야 해. 그러려면 이걸 더 해야 하고.”
“하지만,”
“집에 가기 전에는 넣어 줄 테니까 조금 더 참아.”
조잘조잘 떠들던 하영진이 입을 다물었고 난 손에 묻힌 젤을 떨어뜨렸다.
* * *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기 무섭게 내 물컵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속삭이는 목소리도 평소와는 다르게 쩍쩍 갈라졌다.
“어제… 죄송해요.”
아침에도 밤과 별로 변함이 없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새벽까지 하다가 나도 모르게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저는… 안 되나 봐요.”
그래. 지금 그 상태로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 대답 대신 가득 고인 눈물을 닦아줬다.
“같이 해보고 싶었는데, 유일한… 유일한 방법이었는데.”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끝에 가서 왜 그만뒀냐는 물음엔 답할 것들이 많았다.
“아프다고 기절했는데 내가 그걸 계속하고 있어?”
“그래도, 전 딱 한 번…이면, 흑, 으흐윽, 한… 한 번이면 됐는데.”
아… 청승 대회 나가면 일등 할 거야. 한 번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숫자도 그렇고, 이 눈물바다도 처음이자 마지막을 간절히 원했던 것 같다.
“왜, 나는….”
“뭐가 그렇게 급해?”
“…….”
“뭐가 그렇게 급해, 영진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줬다.
“나를 해치워야 할 일거리로 생각하지 마.”
“그게 아니라,”
“설거지도 한번 하면 다시 쌓이잖아. 섹스 한 번이면 다 끝인 줄 알아? 내가 오늘 시켜주면 내일은 안 할까?”
“아니, 그게….”
“그럴 거면 내가 시체하고 섹스하지. 아프단 말도 안 하고 뒤척이지도 않을 거 아니야.”
혹시 나 방금 시체하고 섹스하겠다고 했나. 마지막에 삼킨 눈물 질질 짜는 애랑 안 했을 거다라는 말을 해버린 건가. 강물처럼 소리 없이 뽑아내는 그것에 이젠 질려버렸다.
“죄송해요. 생각 못 해드렸어요.”
“…….”
“마음이, 제 마음이 너무 급해서… 아직 저랑 하고 싶으실 때, 빨리… 좋아하는 사람하고 해보고 싶어서… 죄송해요.”
“사실 정말 지긋지긋하거든.”
“…오, 올라갈게요.”
침대를 벗어나는 몸을 빠짐없이 안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주어가 누구야?”
“…? 당연히 제가 좋아하는….”
헛웃음도 안 나온다. 이런 사람하고 뭘 하는 건가. 이래놓고 나를 긁어 안은 모양새도 어이없다.
“내가 기한을 정해주면 네가 마음을 놓을 수 있을까?”
대충 1년이라고 정할까. 너무 긴가. 조금 짧게 한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하지.
“3개월.”
난 곰곰이 생각하다 괜찮아 보이는 기간을 정했다.
“…….”
“괜찮아?”
어깨에 닿는 코끝이 긍정을 나타냈다. 우린 그 안에 섹스를 하게 될 것 같다.
한숨 재우고 집에 보내고 나니 엉망이다. 누군가를 들여서 처리할까 했지만 이런 날은 아무래도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불을 다 걷어내고 나니 진짜 문제도 깨달았다.
“청소는 어떻게 하는 거야?”
― 일하는 중입니다.
“이불은 다 걷어서 버리려는데 헌옷수거함에 넣으면 돼?”
― 청소를 왜 본인이 하십니까?
“떨어진 건 다 주웠고 청소기 돌리는 법은 알아.”
― 그럼 이불만 문제인 겁니까?
“응. 그리고 새로 사와야 해.”
― 오줌 싸셨습니까?
이 새끼가… 갑자기 이불을 버리는 게 이상해 보이긴 해.
“어. 오랜만에 쌌어.”
― 결국 시작하셨습니까?
“아니. 오줌 쌌으니까 이불을 버려야 한다고.”
― 술을 많이 드셨습니까?
“…야. 김한세.”
― 혹시 영진 씨한테 권하신 건 아니죠?
“하영진하고 잤어.”
― …….
“그래서 이불을 버려야 한다고.”
세탁하는 방법도 있지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하영진이 얼마나 신경 쓸지 안다.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게 만들고 싶다. 나도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해야 하고. 3개월은 나에게도 주어진 시간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약속을 지켜줄 것이다.
― 밖에 꺼내두시면 김한진한테 처리하라 하겠습니다. 근데 본부장님.
이불을 밖에다 내놓고 냉장고 문을 열어봤다. 간장게장 없나.
“간장게장도 부탁해. 하영진이 좋아하거든.”
― 영진 씨는 무사하십니까?
“지금 집에 고양이하고 있는데.”
먹다 남긴 우유를 버리고 하영진이 즐겨 먹는 사과 주스도 전화한 김에 시켰다.
― 제가 본부장님이 거기 들어갈 때부터 알아봤습니다만 많이 아프다고 합니다. 이것저것 더 챙겨서 보낼 테니까 영진 씨 잘 돌봐주세요.
“네가 하영진 보호자야?”
커피는 싫어한다 했고, 과일 좀… 제철 과일이나, 한국에서는 쉽게 접하지 못하는 것들로. 난 사과에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 그때 막노동한다는 아버지와 오늘 아침에야 연락이 닿았습니다.
아아, 그 아버지. 하영진의 보상금을 다 가지고 간 아저씨. 바쁜가.
― 묻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쪽과는 연락도 안 하니까 죽은 게 아니면 연락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쪽’은 빚을 져서 병원을 다니고 학교를 다닐 동안 ‘저쪽’은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사업을 하다 망하고, 막노동…. 죽어도 그쪽에는 나올 보험금도 얼마 없는데 그거라도 갖고 싶겠지. 할아버지는 저런 인간들에게 동정을 품는 이상한 사람이어서 숱하게 보았다. 갑자기 돈이 생기면 주체 없이 쓰고 다니다가 치명적인 경제위기를 맞아 도산한다. 그리고 또 돈이 생기면 같은 짓을 반복한다. 하영진이라면 어떻게 굴까.
― 얼굴 들고 다니기 창피했다고 했던 걸 보면 근방에는 소문이 퍼졌었나 봅니다. 영진 씨가 처신을 잘못했다고 하더군요.
“처신…?”
― 네. 몸가짐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혼자 떠드는 김한세를 끊고 남은 집안일을 마저 했다. 설거지는 컵밖에 없네… 화장실도 깨끗하고, 옷방은 안 들어갔으니 깨끗하고. 열어놓았던 창문을 닫았다.
‘처신이라는 단어 좋아하지 않아요.’
다른 건 몰라도 아저씨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알 것 같다. 가족이잖아? 소파에 던져둔 핸드폰을 집어 들고 김한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 안 하고 바로 받네.
“아저씨가 죽으면 하영진이 상속을 받나?”
―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아저씨 또 다른 자식은 없나 찾아봐.”
― 본부장님.
어제 지나가다가 발견한 물건을 걸어두려고 집 안을 둘러보다 달력이 달린 곳을 해체해 끈덕이는 것을 떼고 현관에 붙여뒀다. ‘어서 오세요’가 나갈 때 보였으면 한다. 위층에 닮은 고양이가 있으니까 먹히겠지.
“목에 보험금 좀 걸어놔. 필요하면 빼게.”
수평을 맞추고 뒤로 물러서서 옹기종기 모인 고양이 가족을 살펴봤다. 너무 어두워. 이렇게 휘저으면 바로 켜지니까 괜찮은가? 얘네를 보고 더 집에 가고 싶어지면. …뺄까?
― 영진 씨가 좋아하실까요?
“지금 네가 하는 짓은 하영진이 좋아할까?”
― …….
“넌 나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고 하영진과도 안면이 있지.”
전화를 끊고 수평을 흩뜨렸다. 두자. 가면 어때. 잡으면 되지.
“간수 잘해야겠네.”
* * *
착실하게 내 집을 지키고 있을 하영진을 두고 난 지금 내가 필요 없을 회의에 참여했고, 가족 모임이랍시고 떠들기만 하는 그곳에 있다. 하영진이 쉬는 화요일에 몰아서 하려던 것들은 모두 수요일로 미뤄졌다. 밥 먹을 때 제일 많이 떠들었던 아버지를 보며 깊은 연민을 느꼈다. 안타깝지만 우리도 같은 기러기 처지라 아버지와 어색하다.
“하영진이라는 애 좀 데려와. 그렇게 끼고 살다 한번은 털리지.”
어릴 때는 귀여웠다. 하영진이 좋아할 법한 외모라고 할 수 있나. 나와 비슷하지만 좀 더 밝은 머리 색을 가진 주하가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괬다. 저녁은 흰쌀밥이었다. 건강에 좋은 거라며 잡곡을 권하던 하영진은 내게서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하고 어색해했었다.
“너 나한테 몇 번을 털렸어. 다 뺏기고 살았잖아.”
“가져간 사람이 잘못된 거지. 빼앗긴 사람은 불쌍한 거고.”
“그래도 불쌍한 사람보다 가져간 사람이 행복하겠지?”
그런가. 친구는 새로 사귀면 됐고 물건도 새로 사면 됐다. 어머니? 어머니는 빼앗겨도 상관없었다. 근데 하영진은 주하의 취향에 완전히 벗어나서 빼앗길 일은 없을 것 같다. 얇은 테의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쓴 주하가 등받이에 한쪽 팔을 기대고 늘어졌다.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도 아래로 쏟아졌다. 요즘 저렇게 커다란 안경이 유행인가.
“엄마가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대. 아빠는 싫다고 기다려 달라는데 뭐… 조만간 같이 갈지도 몰라. 오빠도 알아둬.”
“응. 근데 나 집에는 언제 갈 수 있을까?”
벌써 오후 일곱 시다. 집에 도착하면 하영진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세가 거기 되게 좁다는데 살만해?”
“거기 하영진이 있거든. 그리고 걔는 더 좁은 데서 엄마하고 단둘이 살아.”
“아빠도 없어? 가격이 점점 떨어지네. 걔 결혼할 생각은 없대?”
하영진이 결혼? 생각도 못해 봤는걸. 입을 헹군 양주 한 병이 아래로 떨어졌다. 집에서는 편하게 주의라지만 오늘은 할아버지 기일이라 모두가 불편한 차림이다.
“할아버지가 지금 너랑 하영진을 보면 뭐라고 할 것 같아? 죽을 때까지 끼고 살았던 손자가 그러고 있으면 그 노인네도 안 좋아할 것 같은데.”
“회사는 매일 나가고 있으니까 좋아할걸….”
오랜만에 학교를 갔다 오면 다 죽어가는 몸뚱이로 마중을 나왔었다. 담배에 잔뜩 찌들어서 냄새나고, 더럽고. 어릴 땐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영진을 회사에 박아놓는 건 어때? 집에 데려오기 그러면 그렇게 보러 가면 되잖아. 아빠가 안 하겠다는 걸 정말 믿어?”
김한세 말대로 내가 너무 과보호를 하고 있는 건가. 어떻게든 보러 올 사람들이 둘이나 있다. 어머니는 그걸 굳이 막지 않을 거고, 나도 아마… 회사에 두면 그들을 막을 수가 없지. 하영진도 부담 없이 그들을 맞을 것이다.
“저 인간들은 다 늙어서 왜 저렇게 서 있는 거야. 정신없으니까 가서 앉아서 파티하라 그래.”
“사귀면 무조건 자는 거지?”
“자려고 사귀는 건데 뭔 소리야.”
작은 가방에서 꺼낸 담배 한 개비가 내게 넘어왔다. 아침부터 시험만 치는 하루. 이래서 내가 여기 오기 싫은 거다.
“너 꽤 오래 간다? 하영진은 술 담배 안 한대? 그런 남자는 또 싫대?”
라이터는 없냐고 물어와서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라이터는 하영진에게 있다. 주하는 가방을 뒤져 라이터를 찾아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모르겠는데.”
“진우한이 술 담배를 안 하니까 그럴 수도 있어. 원래 처음은 잊기 어렵다잖아.”
“처음이 걔라고 어떻게 단정해?”
“내기할래? 누가 처음인지?”
멋없는 검은색 구두가 잔디밭을 퍽퍽 내려쳤다. 어릴 때 개미가 나오는 곳에서 살아서 아직도 싫어한다. 길거리에 바퀴들은 찾아서 죽이고 다녔으면서 개미에는 벌벌 떨었다.
“할 거면 내가 진우한한테 직접 물어볼게.”
“안 걸어. 안 할 거거든.”
뒷굽에 푹 파인 땅을 내 신발로 다졌다.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지나칠 만큼 조용하다. 아무리 건주가 출장을 가서 안 돌아왔다 하더라도 난 형오를 잡고 있었다. 이틀 밤을 입 다물고 있다지만 곧 털어낼 것이다. 배우자와 자식으로 안 되면 부모를 건드리면 된다. 가족이란 건 실속이 있다.
“조심해. 걔 전에 한번 봤는데 좀, 별로더라.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페트병의 뚜껑을 따서 주하에게 건넸다. 원목 테이블 중간을 차지한 작은 유리병이 생수를 머금고 담뱃재를 적셨다.
“잠깐 재미 보고 관둬. 괜히 하영진한테 이상한 바람 들기 전에 그 집에서 나와.”
“그런 바람이 좋았다면 우한이한테 가지 않았을까?”
“하긴. 것도 그래.”
걔도 이상한 애라면서 주하가 높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식탁에 그대로 올려둔 담배꽁초를 유리병에 던져넣고 남은 물을 마셨다. 차라리 그렇게 됐으면 지금보단 모든 게 나았겠지.
“그럴 마음이 있었으면 벌써 그렇게 했을 거야. 십 년 동안 바보처럼 울기만 할 게 아니라.”
꼭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목을 다 젖히고 웃어야 하나. 담뱃갑에서 하나를 뽑아 유리병에 넣었다.
“하영진은 국산 담배만 피우거든? 거지라서 그런 걸까?”
“담배는 다 같은 값 아니야? 편의점 가봤어? 좋더라.”
김한세한테 말했으면 분명 한마디 들었을 것이다. 어디 가서 그딴 질문 하지 마라. 쪽팔린다.
“김한세 앞에서는 그러지 마. 또 싸잡혀서 무식하다고 욕 먹어. 걔도 입이 존나 싸단 말이야. 다 소문내고 다닌다고.”
“응. 끊은 지가 한참이라 몰랐네.”
“그 손으로 뭔가를 사본 적은 있긴 해?”
최근에 문 앞 장식을 하나 사보긴 했다. 현금밖에 안 돼서 적잖이 당황했었고 계좌이체도 된다는 소리를 못 알아들어서 옆에 있던 아줌마가 천천히 설명해줬었다.
“너도 현금을 좀 들고 다녀.”
“당연히 현금을 들고 다니지.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내 가방 열어봐.”
난 그때 지갑을 안 가지고 나갔었다. 원래는 들고 다닌다. 군말 없이 가방을 열어봤다. 내가 하영진에게 자주 주는 노랗고 빳빳한 지폐가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내 가방을 본 사람은 용돈으로 한 장씩 주고 있어. 가족이니까 두 장 가져가도 좋아.”
아까처럼 웃다가 뒤로 넘어갈 뻔한 주하는 똑바로 앉아서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
“가자. 또 뒤에서 무게 잡는다고 지랄해.”
몰래 주차장으로 내려가다 주하에게 붙잡혀서 계획에 없던 술을 걸쳤다. 고작 2년 된 죽음이 20년이라도 된 것처럼 화기애애해서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역시.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개개인의 사정과 무성한 소문을 잊을 수 있는 하루. 다음 날이 되면 자비 없이 서로를 헐뜯는 생태계로 돌아갈 것이다.
열한 시가 가까웠다. 씻고 새벽에 가서 데려와야지. 마음 한구석에서는 하영진이 나를 기다려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잠깐 봤는데 진짜 시간 다 됐다고 가버리면, 내가 연락을 안 했지. 지문을 쿡 찍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언제쯤 돌아갈 거다, 기다려달라 문자라도 남겨놨으면 내가.
“술 드셨어요?”
아직 집에 안 갔네? 난 뒤를 돌아보고 고양이 세 마리가 걸린 그것을 가리켰다.
“봤어요. 지미하고 닮았더라고요.”
“맞아. 이걸 달아두면 네가 집에 좀 천천히 가지 않을까 해서 달아뒀어. ATM기에서 돈을 뽑는 법도 배웠어.”
“아… 식, 사는 하셨어요?”
“응. 너 왜 안 갔어?”
“그럼 지금 갈까요?”
내가 물어봤는데 왜 간다는 물음이 나와. 볼을 뿍 꼬집었다.
“이리 와서 옷이나 벗겨줘.”
소파에 앉아 내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무릎의 윗부분을 더듬었다. 재킷을 벗기고 내 감긴 눈을 스치고 간 입술이 멀어졌다.
“넌 내 얼굴이 그렇게 좋아?”
“얼굴 말고 다른 곳도 좋아요.”
“어디가 가장 좋은데?”
“여기, 랑 여기.”
넓게 스치고 간 곳이 내가 생각하던 곳과 일치했다.
“여기는?”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맛있다며. 오늘은 눈을 가리고 한번 해보는 건가. 어제는 시도도 못 해보고 하영진이 못 세워서 끝이 났다. 한번 낫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하고 싶거든. 근데 네 상태 보면 참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해.”
“전에 그건 일시적이었나 봐요.”
“넌 하고 싶어?”
오늘은 청바지를 입었네. 하영진이 내 무릎 위로 내려앉았다. 어쩜 아직도 이렇게 입술만 움직일 줄 알지. 아니야. 이젠 내 혀를 피할 줄은 안다. 차라리 가만 있으라고 타박하지 않는 이유는 계속 하다 보면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멋없게 내 멱살을 잡은 하영진.
“흐으… 읍.”
바지를 내리고 속옷을 벗겼다. 어제랑 비슷한 수준이다. 이게 꼿꼿해져야 뭘 해보지. 숨이 막혀 떨어지려는 몸을 꼭 잡았다.
“으응, 하악, 읍.”
아래를 맞대고 손을 잡아 올렸다. 불 안 꺼줘. 이대로 볼 거야.
“저번에 한 번 하고 그 뒤로 아침에도 안 섰어?”
“…네.”
“오늘은 될 것 같으니까 힘 좀 풀어봐.”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내 것과 하영진의 것을 겹쳤다. 잔뜩 놀란 눈이 아래를 보고 싶어서 반짝거려도 못 보게 막았다.
“흐으, 으응… 아.”
“이번엔 꼭 기분 좋게 해줄게.”
처음의 눈물만 쏟아내던 때를 잊게 해줘야 이다음 기회도 열릴 것이다. 다리가 더 벌어지고 하영진이 내 뺨을 안아 입술을 포갰다. 가느다란 호흡까지 모두 들린다. 맞댄 살에서 결코 내 것만은 아닌 물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그걸 깨달은 하영진은 내 목에 더욱 매달려 애타는 숨을 토했다.
“하영진. 어때? 기분 좋아?”
이번에는 어때? 혼자 세워볼 때하고 비교해보면 내가 해주는 게 역시 낫지 않아? 내 뺨에 떨어지는 호흡에서는 민트 향이 물씬 풍겼다.
“좋아요, 아, 얼른 하고 싶….”
내 까만 털과 하영진의 하얀 살이 쩍쩍 떨어지는 액체로 어우러졌다. 얇고 곧은 손가락이 소파를 와락 쥐고 하영진은 눈을 닫았다. 그럼 안 돼.
“눈 떠. 똑바로 봐.”
커다란 신음이 나고 하영진은 급하게 제 입을 막았다. 가슴까지 튄 정액과 아직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성기에 기대를 가득 담아 바라봤다.
“그거 알아?”
“…하아, 아아… 해 드릴 테니까 저는, 그만….”
“처음엔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휘둘리거든.”
“…….”
“근데 혼자 있으면 다시 할 때까지 계속 그 생각만 나는 거야.”
가쁜 숨, 벌어진 입술, 갈등하는 눈동자. 풀숲을 닮은 포근한 향은 역시 내가 아니라 하영진에게 잘 어울렸다.
“그래서 막상 기회가 오면 지금 너처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해.”
“네….”
상체를 훔친 흥건한 손을 셔츠에 닦아냈다. 하영진은 빨간 물감을 뒤집어쓴 것처럼 빨갛다. 내가 만져주는 곳마다 붉은 얼룩이 피어나는 것처럼 예쁘게 물들었다. 나만 맹목적으로 따르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는 다음에 더 오래,”
“윽… 네.”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가리는 손에 비해 살의 범위가 높아진 게 보인다. 하영진에게 나를 보게 했다. 그만 떨고 이번에도 나한테 기대.
“다짐하게 되거든.”
내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이 실리고 상기된 뺨을 적시고 갔던 눈물도 모두 멎었다.
“어때? 우리 다시 해볼까?”
어깨로 올라온 양쪽 손이 점점 움직여 내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 저 다시 해볼래요.”
씻기려고 했는데 자꾸 달라 붙어와서 어쩔 수가 없었다. 하영진을 욕조 어딘가로 밀어 넣고 하얗게 변한 곳을 마찰시켰다.
“끄… 그만, 아, 조금….”
넣고 싶어. 넣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신경 쓰이는 손목을 잡고 하영진과 눈을 맞췄다.
“제발… 흑, 씻고, 아, 으으응.”
이 몸의 곳곳에 내 성욕을 담아두고 젖은 머리를 쓸어넘겨 눈물을 닦아줬다.
“씻자면서요… 씻자고 하셨잖아요. 이런 게, 어디, 아, 아앗!”
빨갛게 변한 유두에 입술을 가져갔다. 점점 더 커지던 신음이 타일을 치고 들어온다. 머리카락을 안은 손가락과 내 등에 닿는 발가락이 파슬파슬 떨리고 강한 힘이 나를 밀어내려 했다. 내 손에 남겨진 것들을 천천히 움직여 하영진의 몸을 열었다.
나를 뿌리치고 철퍼덕 떨어진 하영진이 욕조를 넘어 바닥을 짚고 엎드렸다. 기어서라도 욕조는 벗어나는 걸 보니 아직 힘은 남았네. 내 것을 한번 쓸어 올렸다. 아까 입에만 안 넣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저 자세부터 어떻게 하고 나를 말리면 안 되는 건가. 돌겠네.
“제가, 처음이라, 아직 처음인데 저는….”
“일어나.”
“먼저 씻고 나가시면 저도 곧….”
바닥에 앉아서 훌쩍거리는 하영진을 보며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팔에 떨어지는 물이 좋아서 흐르는 눈물이라기엔 상당하다. 저렇게 조용히 울면 속이 시원한가.
“다 울었어?”
“…네.”
“힘들었어?”
“네. 저는 그, 많이 후… 많이 안 해봐서….”
“괜찮아.”
하영진은 씻고 들어올 건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얼굴이 아니라 여기를 좀 봐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 생색내고 싶다. 다리 하나 제대로 못 펴는 욕조라서 무릎을 굽혔다.
“…처음보다 더 힘들어요.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요?”
“아니. 원래는 네가 기어 다니지도 못해야지.”
아, 그렇구나… 겨우 들릴 만한 혼잣말을 하고 또 잠시간 하영진은 조용했다.
“자꾸, 울어서 죄송해요. 좋아서, 좋은데 장난치시는 것 같아서….”
그건 참아야 더 좋은 거라고 설명해주고 입가에 묻은 말라붙은 자국들을 닦아줬다.
“저 뭐 여쭤봐도 돼요?”
“뭔데?”
“만약에 우리가 하면은… 하고 나서 별로면 어떡하실 거예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영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자리를 비켜줬다. 시키지 않아도 내게 안겨 어깨에 뺨을 붙인다. 찰랑이는 표면을 만지작대는 이상한 짓도 욕조를 쓰는 즐거움의 표현이다.
“별로였다고 헤어지는 사람이 드물걸.”
그런 사람을 딱 한 번 만나보긴 했다. 천주하.
“이제까지 만나신 분들하고는 다 해보셨어요?”
“응.”
이런 걸로 질투해주면 덧나나. 역시나, 하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면 기분이 어때요?”
“좋던데.”
아무것도 안 하고 이렇게 보고 있기만 해도 좋아. 갑자기 꿈틀대는 하영진 때문에 상당량의 물이 밑으로 떨어졌다.
“저도… 기분 좋아요.”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나를 보게 했다.
“저를 만나러 와주셔서, 복수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이 집에 들어온 날부터 후회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최근까지도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 모든 선택이 옳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같이 있으면 즐거워요.”
가장 못난 표정. 어색해하면서도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내 반응을 살펴봤다. 하영진의 몸에서 가장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내 눈에만 이렇게 보이는 건가.
“나도 즐거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나는 즐거운데 너는 어떻냐고 물어봐 주겠지. 본인을 다 돌아보고 나를 돌아봐 줄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패전국을 방문하는 승전국은 고유한 그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모두 유지할 수 있게 아량을 베풀었다.
* * *
진짜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거 아는데 어제 하영진에게 화요일도 내게 내줄 수 없는지 물어봤다. 약속이 있어서 안 된다, 저녁에 늦게 끝나니 고양이와 놀아줘야 한다며 거절당했다. 어제부터 휴일이라면서 신나있던 김한세가 왜 회사에 나와서 나를 째려보고 있지. 진짜 아침부터 재수가 없어.
“방해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건주가 왔다고 해서 바로 시작할 수가 없다니까요. 지금 유형오 가족이 실종 신고를 냈습니다.”
“알았어. 오늘 끝내….”
아무것도 하기 싫어. 소파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화요일… 화요일 내 화요일. 회사 오는 요일… 화나는 요일.
“일곱 시쯤 출발할 건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뭐?”
오지 말라며. 나가려던 김한세가 나를 돌아봤다.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셔야 합니다.”
“…나 지금 선택 잘해야 하는 거지?”
“유형오가 쓸모없어서 중요한 선택은 아닙니다.”
“갈래.”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소파에 앉아서 기다린 지 몇십 분째. 김한세가 들어와서 나가자고 고개만 건방지게 움직였다. 할 일 없는 내가 불쌍해 보였나. 이 차도 오랜만에 타본다. 어릴 때 나와 주하는 이걸 슈퍼카라고 불렀다. 아마 갑자기 전쟁이 터져도 이 차만 있으면 한 달 정도는 둘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뒤졌다고 네가 나 두들겨 팼던 거 기억하냐?”
“네. 맞을 만했습니다.”
“주하도 있었는데 나만 팼잖아. 내가 오빠라고.”
“저도 형이라고 많이 맞고 살았답니다. 그래서 김한진이나 김한올이 제 말을 잘 듣죠.”
“주하는 왜 내 말은 안 들어주지?”
“취하면 동생도 못 알아보는데 오빠 취급을 해줄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때는 주하가 도둑인 줄 알고 엄마가 가진 것들을 내줬었다. 아니 주하는 누구나 무시하잖아.
“너 혹시 주하 때렸냐? 왜 너한테만….”
“진우한은 우리가 본인을 못 건드린다고 생각할까요?”
“…전화해서 물어볼까?”
“아니요.”
끝은 다 똑같을 것이다. 세상에 알려진 열여덟의 이야기보다 더 처참하게 남지 못해 아쉽다. 하영진에겐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아무렇지 않게 되면, 그때. 내가 직접 알리면 된다. 모든 걸 알고 있고, 난 아무렇지도 않다. 넌 안전하다. 우리는 문제가 없고 괜찮다.
“준희는 뭐래? 들어오겠대?”
“아니요. 미국이 편하답니다.”
“이민을 가면 하영진이 살 수 있을까?”
“아니요. 한국이 편하실 겁니다.”
창밖의 딱딱했던 회색 시멘트 바닥이 도처에 돌이 깔린 갈색 흙바닥이 되었다. 배경이라는 건 인간의 한 부분이다. 나나 하영진이 이 배경에서 떨어지고 싶었다면 가급적 어릴 때 했어야 했다. 이나솔을 위시한 인간들이 내 뒤에 있는 천해를 보고, 무언가를 느끼고 결혼을 꿈꾸든 상관없다. 처음 만났을 때 하영진은 그런 것 하나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친구로서도 손색없지 않나. 돈 많은 사람이 다가오면 친구든 연인이든, 지인으로라도 두고 싶은 게 성인의 본능 아닌가.
한 시간을 넘게 시달린 차가 고르게 진동한다. 인적이 드물어 가로등도 설치되다 만 도로는 황폐함마저 느끼게 했다. 문으로 추정되는 곳은 뚫려있었고, 새까맣다. 미로 같은 곳을 김한세를 따라 걸었다. 문을 몇 개 정도 더 넘어서 홀로 빨갛게 타오르는 지점에 닿았다. 의자에 묶여있는 한 남자가 있다. 부패하기 딱 좋을 날씨, 습기도 엄청나고 악취가 심했다.
“저기입니다. 진우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저렇게 조용히, 며칠째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제가 진준희 쪽 사람인지 묻고 있고요.”
곳곳에 멍이 들고 다리가 어떻게 된 건지, 발목이 꼬여있었다. 재갈을 물려놓고 눈을 가리고 있어 내가 아는 얼굴을 찾을 순 없었다.
“건드리지 말고 보기만 하십시오. 대답하시면 안 됩니다.”
매일 이 짓을 한 건가. 멍청한 새끼. 자신이 조사한 걸 발표하듯이 유형오 앞에서 나열하는 김한세가 우스워서 몰래 큭큭댔다.
“부모님이 빚을 내서 형의 노름빚을 갚아주셨던 건 아십니까?”
“…….”
“액수가 꽤 크더라고요. 그때 유형오 씨에게 그 돈이 갔다면 부도를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우셨겠습니다.”
“…….”
“아마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유형오 씨는 사치스러운 삶을 누리지 못했을 겁니다.”
“…….”
“사실 지금도 그 친구에게 제 소식을 전하고 싶으시겠죠. 풀어드리면 제가 노리고 있다고 말을 전하실 겁니까?”
“진준희 쪽이야?”
“진우한이 하라는 일은 보통 다 하시는 편입니까?”
“…….”
“주로 어떤 일을 시키죠?”
쟤는 진짜 안 되겠다. 이 짓을 어떻게 매일 해왔지. 유형오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날벌레들이 점점 늘어난다.
“가자.”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니. 가망이 없어.
“더 시간 끌 거 없어. 오늘 끝내.”
사실 여기에 오면 하영진의 티끌이라도 알 수 있을까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어땠는지, 학교가 끝나면, 방학 때는. 사소한 거라도 괜찮으니까. 차를 빼 오겠다는 김한세를 기다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왜 여기까지 따라왔냐. 피곤하네.
“…….”
“…….”
“혹시.”
음? 재갈을 툭 뱉어낸 유형오가 내가 있는 자리를 똑바로 몸을 틀었다.
“진준희가 아니라, 김영진인가?”
“…….”
“아. 지금은 하영진이지.”
찢어져서 핏방울이 맺힌 입술이 웃음을 참듯이 다물어지고 안면근육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김영진이라는 이름을 듣고 올라온 소름이 가라앉질 않았다. 내가 자주 부르는 이름이 저런 식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맞다면 좋아하겠네. 혼자 외로웠거든.”
유형오는 푹푹 올라오는 웃음을 흘리며 실성한 듯이 자지러졌다.
“그 병신 새끼는 끝까지, 끝까지! 도움을 안 주네.”
주위에 굴러다니는 칼을 잡고 다가갔다. 눈을 가린 안대를 칼등으로 벗겨내고 조금 떨어져 앉았다.
“난 시발 할 만큼 했어.”
“네가 뭘 했는데.”
“피하라고 했지. 난 분명히 피하라고 말해줬어.”
같이 했으면서? 칼끝을 고쳐잡고 손잡이로 뼈가 드러날 때까지 내려쳤다. 침방울이 튀고 떨어진 이빨이 주위로 흩어져도 멈추지 않았다.
“그 새끼, 는 알아듣지도 못… 한 치 앞도 모르고 준희한테 줬지.”
“뭘 줘?”
“걔도 모를걸…? 김영진도 지가 뭘 준지 모를걸? 진준희도 모를 거야.”
진준희가 대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뭘 줘?”
“초대장.”
뭐? 유형오는 묻는 말에 대답은 없이 눈을 바락바락 뜨고 칼칼거리며 찢어진 입술을 가르며 웃었다.
나였으면 절대 안 그랬을 거야.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지.
그렇게 모르나.
드디어 끝이야.
발음이 나빠서 잘 안 들리지만 이 비슷한 문장을 반복하는 것 같다. 유형오의 입에서 핏덩이가 쏟아졌다.
“만나면 그동안 씨발 좆 같았다고 전해.”
갑작스럽게 내게 달려드는 유형오를 피하려다 칼을 놓치고 뒤로 물러섰다. 내 몸에 뿌려진 핏방울을 보고 자살한 유형오를 내려다봤다. 멀리서 달려오던 김한세가 멈춰서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너무 빨리 죽었네.”
하영진은 이런 어둠 속에서 3일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한세가 나를 말리던 이유는 내 신변의 안전을 위함이 아니었다.
옥상 난간에 매달려 우뚝한 건물과 그 주위의 거멓게 멍든 구름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너 기다리는데.”
열두 시부터 기다렸는데 벌써 한 시인가. 잠옷 차림을 한 하영진이 내 앞에 서서 말갛게 웃고 있었다. 하영진도, 진준희도 모를 거라고 했다. 진우한을 제외하고 초대장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던 유형오는 죽었다. 준희한테 물어는 봐야겠지. 지금 내가 전화하면 진우한은 절친한 친구처럼 나를 반겨줄 것 같다.
“오늘 제가 어디 갔다 왔는지 알려드릴까요?”
“응.”
차분하고 담백한 목소리가 내 분산된 집중력을 하나하나 모아냈다. 달빛도 가로등 빛도 받지 못한 하영진은 내 앞에서 점점 까맣게 변해간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목소리만 남아 내 주위를 맴돌았다.
“저 이사하기 전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거기 사장님을….”
“응.”
처음에 하려던 그 이야기가 아니었다며 당혹해하던 하영진이 내게 재미가 없냐고 물어왔다.
“아니. 계속 얘기해. 난 네 목소리 좋아하거든.”
“…언제부터요?”
“처음부터. 너와 말을 나눈 그 순간부터.”
겉모습이 눈에 띄어 들어왔고, 말을 나눠보고 이 집을 떠나지 못하는 유령처럼 지냈다. 출근을 늦추기 위해 한 바퀴를 둘러가던 길이 여기였다.
“그땐 널 상처 주고 싶었거든.”
“…….”
“재밌기도 하고. 네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도 짜증 나서.”
어둠을 이용해 하영진처럼 솔직하게 굴고 싶었다. 괜한 호기심으로 과거를 캐보려 했던 것이 부끄러웠고 한순간이나마 그런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나를 욕해주길 바랐다. 뒷머리를 슬쩍 긁은 손이 내려왔다. 잠옷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조금씩 밝아진다.
“눈치 못 채서 죄송해요.”
담뱃갑을 연 하영진의 입술에 흰 막대가 덜렁거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울리지 않는 건 여전하네.
“전에, 저 따돌림 당했다고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세요?”
“응.”
“그때 그 친구가… 사실 저하고 가장 친했거든요. 언젠가라도 한번 만나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뭐라고?”
“물어보고 싶어요. 궁금해요. 이제야 왜 그랬는지가 궁금해졌어요.”
하영진의 성격상 찾아서 궁금한 걸 묻진 않을 것이다. 절대로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내가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상,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내게 미안해서 나를 떠날 것이다. 남은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처음 만나는 거 아니에요.”
“만났다고?”
“네. 가끔 찾아오고, 그랬었어요. 그 만났던 카페를 오늘 갔다 왔어요.”
내가 하영진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도, 지금까지도. 모든 걸 알면서도 나를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나서, 뭘 어떻게 한 거지.
“찾아와서… 어떻게 됐어?”
“사람이 많아서, 괴롭히지 못했어요.”
미수. 잘 마무리된 미수. 잘 마무리된 미수도 박병희 혼자 저지른,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내가 모르는 빈 시간의 조각이 대충이나마 뭉쳤다.
“계속 무섭기만 했는데 용기가 생겼어요.”
잠시 과거에 다녀온 하영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토록 원했던 변화가 돌고 돌아서 나를 공격해왔다.
* * *
유형오만 살아 있었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건주만 남겨둔 상태에서 내가 덜 아는 게 무엇인지, 무작정 파헤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김한세의 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가 속아서 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체 왜 나를 자꾸 하영진과 떼어놓으려고 하는 거지. 내려오던 하영진과 마주쳐 난 1층에서, 하영진은 2층에서 나를 내려다봤다. 만난 이후로 좋아진 거라고는 생활 습관 단 하나뿐이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
“아, 그….”
쓰레기를 들고 있는 손. 대신 쓰레기를 내다 놓고 다시 돌아왔다. 앞치마 차림을 하고 나를 보고 있던 하영진이 문을 열어젖히고 내 점심 여부를 물었다.
“아직.”
“그럼 오늘은 같이 먹겠네요.”
이런 사소한 행복으로 얼굴을 붉히는 것도 익숙하다. 하영진이 밥을 차릴 동안 난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전부터 신경 쓰였는데 여쭤봐도 돼요?”
“응. 물어봐.”
“왜 그렇게 보시는 거예요?”
전에는 하영진이 한 번이라도 나한테 도움을 청해줄까 봐, 그걸 못 들을까 봐 그랬다. 그다음에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렇게 뒤에 앉아 있으면 가끔 기분이 좋은 하영진이 흥얼거리는 모르는 노래도 들을 수 있다. 내가 있다는 걸 눈치채면 조용해지지만.
“그냥.”
내가 양이 적은 것도 맞지만 저 그릇의 크기가 적당량에서 조금 부족할 거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조금 더 먹지.”
“방금까지 과일을 먹어서요.”
“너 살 빠졌던데.”
“어떻게 아셨어요?”
“아는 만큼 보이는 거야.”
저 몸은 근육을 토해내는 게 운동인지도 모른다. 집안일 같은 소일거리가 아니라 바깥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 내보내기엔 위험하니까 시간이 더 지나면….
“안 그래도 친구….”
“친구 누구?”
배전호야 신문영이야. 어금니에 들어간 힘을 뺐다. 과민반응이다. 배전호나 신문영이나 내 앞에서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가끔씩 엿들어본 대화도 딱히 문제 되는 건 없었다. 방심해도 된다. 하영진은 그런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나도 말했잖은가. 오독오독 오돌뼈를 씹어먹으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 입을 오물거렸다.
“친구 중에… 전호라고 배전호, 고등학교 때 친구거든요.”
“…….”
“옆 골목에 사는데 제 집도 구해주고… 그, 지미 데리고 올 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아. 이름을 나한테 말해줄까 고민했던 건가.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듣고 나니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다.
“그 친구네 아버지가 제약회사에 근무하시거든요. 영양제도 받아먹고, 그… 제가 입고 다니는 옷도 대부분 전호가 주는 거예요.”
“딴 친구는 없어?”
“친구라기보다는… 친동생 같은 애가 있는데. 아! 이미 전에 한번 보셨….”
“기억 안 나. 상세히 얘기해봐.”
“그, 언제더라…? 비 오는 날이었는데, 엄청 멋진 차를 끌고 왔던 친구 있잖아요. 마음에 들어 하시던 잘생긴 친구요.”
아직도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계속 얘기하라고 눈짓해도 아무 말이 없다.
“걔 이름은 뭔데?”
“문영이에요. 신문영. 지금은 택배 일은 관두고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대요.”
“그리고 또 내가 알아야 할 친구 없어?”
“제가 원래 친구가 별로 없어서….”
머쓱하게 웃던 하영진이 식탁 밑으로 손을 내렸다.
“왜?”
“…어디… 가서, 친구라고 자랑해도 돼요?”
“내가 네 자랑거리야?”
나 방금 뭐 실수했다. 갈 곳을 잃은 손가락이 숟가락을 다시금 잡았다. 숙주나물을 한 움큼 잡아서 하영진의 밥그릇에 올려뒀다. 한 가닥을 집어먹은 하영진이 기죽은 표정으로 날 힐끔거린다.
“내가 네 자랑이야?”
“…네….”
두 글자만 떼면 됐었네. 앞으로 한두 글자 빼고 얘기하는 걸로 하자.
“가장 좋아하는 친구라고 소개할 거예요. 이름은 말 안 할 거고, 그리고….”
“내 이름 불러봐.”
이러다 내가 가르쳐준 걸 까먹고 또 가르쳐줄 것 같다. 밥을 한입 떠먹은 하영진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서 터질 것 같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내 이름 기억은 하지?”
“네! 물, 물론이에요. 한 번도 잊은 적 없어요.”
매일 부르니까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지. 아무거나 입에 욱여넣은 하영진이 내 눈을 피해 국을 떠먹었다.
“하영진. 천천히.”
“…응, 에….”
맛있게 먹길래 나도 고기 한 점을 먹고 젓가락을 내려놨다. 짜. 하영진은 짠맛을 유독 좋아한다. 저래서 눈물도 더 짭짤한 걸지도 모른다. 하영진의 시선이 내 젓가락으로 향했다.
“너 두고 안 가니까 천천히 먹어.”
“…….”
“내가 없어도 밥 꼭 먹기로 약속해.”
나를 향한 시선과 슬쩍 삐져나온 입술을 나도 불만스레 쳐다봤다. 이건 절대 양보 안 해.
“네. 잘 챙겨 먹을게요.”
한번 굶을 때마다 휴일을 뺏는다고 할까? 내 밥그릇에도 올라오는 반찬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이 화요일이라서 오늘은 하영진이 부지런해질 예정이다.
예상대로 밥을 먹고 분주히 집을 횡단하더니 우뚝 멈춰 섰다. 나를 왜 빤히 보고 있는지. 내가 뭐라도 해야 하나. 난 지금 이 청소가 끝나지 않길 누구보다 바라는데?
“제가 청소기를 돌릴 때 발을 올려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넌 내일 쉬잖아. 지금 이 시간이 아깝지 않아?”
“그럼 이 시간엔 뭘 하는 게 좋을까요?”
하영진은 걸레를 치운 뒤 앞치마도 벗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 시간엔 이렇게 서로 안고 내일 뭐 할 건지 알려주는 거야.”
할 거 다 했는데 안는다는 말로 이렇게 빨개지나. 사과 같은 얼굴을 쿡쿡 찔렀다.
“저, 잠깐… 그, 오, 옷방에 다녀와도 될까요?”
갑자기? 옷방 문이 쾅 닫혔다. 이상한데. 어제도 좀 비슷한 순간이 있었던 것 같고, 그 전날도…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도.
“…저번 주?”
생각지도 못했네. 이걸 좋아하는 게 맞는 건가. 문을 열고 맞은편의 모퉁이에 쭈그려 앉은 하영진을 발견했다.
“문이라도 잠그고 해.”
“…어, 아… 그게.”
“뭐하는 거야?”
밥 잘 먹고 씻는 것도 도와주고, 청소한다고 해서 이불도 퍽퍽 털어줬는데. 한두 번 해본 게 아닌지 한 손에 받친 휴지가 익숙해 보였다.
“어… 그게, 아니, 어, 그….”
“바지 벗고 뭐하냐고.”
만나고부터 계속해서 새로운 난관이 나온다. 섹스까지 한걸음이라고 생각하는 나와는 다르게 중간중간 정해지지 않은 깜짝 깜찍한 조건들이 무더기로 출몰한다.
“이, 이건… 그러니까 이건 말이죠….”
“자위하는 거야?”
점점 벽을 향하는 몸을 안아 중앙의 진열대 위로 앉혔다.
“제가, 잘 못 하니까… 연습, 이랄까요?”
가려도 여전한 굳기의 그것에 당혹한 하영진이 내 눈을 감겼다. 조금만 신경을 못 쓰면 어딘가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네가 잘 못 한다는 건 누가 알려준 거야?”
“…제가요. 잘 못 하니까 싫어지신 건 아닐까….”
“어제도 했잖아.”
“만지기만….”
했어요. 뚝 떨어져 마치지 못한 문장에 고질적인 조바심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내가 화낼 걸 미리 알고 품에 들어온 하영진이다. 화가 난 게 아니라,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렵지는 않지만 묘하게 하기 싫은 일을.
“누구 생각하면서 했어?”
“아! 그야 당연히….”
“나? 그래도 혼자 하지 마. 연습하지 마. 알았어?”
“그러면, 하고 싶을 때는 어떡해요?”
“…….”
“아까도 사실, 저 요즘 몸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자고 일어나면 이렇게 되는 것도 이상하고, 꿈에도 자꾸 나오셔서….”
옷을 제대로 입혀주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이불에 얼굴을 박은 채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후. 됐어. 해보자. 다시 나가서 하영진을 데리고 침대에 올려뒀다.
“뭘 고민했는지 모르겠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
서랍에서 꺼내온 준비물을 보고 하영진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넌 세우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방금까지도 혼자 하던 사람이라 세우는 데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문제는 나다. 그 시간에 다 풀고 모든 걸 처리할 수 있을까. 일단 넣고 보면 뭐가 달라지겠지.
“오늘은 절대 안 피할 거예요.”
“…그래?”
아, 흔들릴 뻔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무리였지. 정신 차리자. 굳게 결심한 하영진을 따라 했다. 할 수 있어. 내 마지막 고민을 덜어준 입술이 가까이 붙었다. 이것도 연습한 건가. 움직이는 혀를 따라가며 손바닥 밑으로 하영진의 것을 압박했다.
“으응, 응.”
“숨, 쉬어.”
“하아, 하아… 너무 세요. 조금만,”
내가 나름의 준비를 하며 하영진의 사정을 막아 세웠다. 이거 진짜 기분 나쁘다. 정말. 세워야 할 사람은 나인가. 이렇게 된 거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끝내자. 하영진을 눕혀놓고 위를 차지했다. 다른 콘돔을 뜯어 번들거리는 상단을 중심으로 끌어내렸다.
“왜 저를….”
“나를 위해서지.”
“아… 네.”
끝까지 고민하는 내 마음은 하영진의 마음에 비해 보잘것없나. 아니, 그렇지 않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손목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하영진의 것을 제대로 세웠다. 내가 뭘 하는지 깨닫고 버둥거려서 몇 번에 걸쳐 넣을 새도 없었다. 한 번에 퍽 들어박혀 숨도 못 쉬고 몰래 이불을 갖다 내 것을 가렸다.
“뭐, 뭐하시는….”
“기…억해. 우리는 오늘 처음 하는 거야.”
작다고 놀렸는데. 이불을 움켜쥐고 미끄덩거리는 젤의 힘을 빌려 몸을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아니, 아니이… 이거, 아닌….”
도리질을 사정없이 치다 입을 가리던 하영진이 흐느껴 울며 허리를 슬쩍슬쩍 움직였다.
“흐윽, 이게 아닌데….”
“하영진. 정신 차려.”
“우… 네.”
“안 좋아?”
“…아파, 아파요.”
“이것도 똑같아. 금방 좋아질 거야.”
활짝 벌린 팔로 들어가 하영진을 끌어안았다. 내가 움직이는 것보다 하영진이 움직이는 게 더 빨리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몸을 뒤집었다.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해야지.”
진짜 바보인가. 이젠 박으라고 해도 쓰러지냐.
“어떻… 어떻게요?”
“…….”
몸을 일으켜 하영진의 엉덩이를 쥐고 내게 더 깊이 박히도록 당겼다. 아까보다 훨씬 큰일 날 것 같지만 이게 더 낫다. 눈앞에서 정신을 놓고 울부짖는 하영진도 볼 수 있고, 내 팔에 상처가 날 때까지 손톱을 박다가 놀라서 훌쩍이는 하영진도 볼 수 있다. 아마 찰나였을 것이다.
“나, 와… 저 나왔어요.”
“잘했어.”
열 시간은 한 것처럼 체력소모가 극심하다. 일단 빼내고 좀, 아… 부었어. 내일 아무 데도 안 갈래.
“아프, 세요?”
“왜? 너도 아파?”
“빨갛긴 한데 여기보단 덜 빨개요.”
뒤집어 누운 내 구멍을 만지작대던 하영진이 제 것을 한 번 더 바라봤다.
“너 또 하고 싶지.”
“…….”
“갈아끼지 말고 그대로 해. 두 번은 괜찮을 거야.”
얼마 하지도 않았고, 매일 빼주기 때문에 양도 많지 않을걸. 당장 몽롱한 하영진의 정신 상태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내 몸 상태를 보면 난 절대 저걸 다시 끼워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점점 밀려오던 하영진이 내 허리를 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장기가 앞으로 쏠려 기분을 더더욱 망가뜨렸다. 뒤에서 하영진이 끊임없이 헉헉 소리를 내며 아래에서 위를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참아내고 있을 때 내 것이 잡혔다. 아무 반응 없을 그것에도 불구하고 하영진의 손은 분주하다.
“나는 안 해도 돼.”
내 말이 들리긴 하는 건가. 오른손이 내 등을 쓰다듬고 날개뼈 주위에 입술을 묻혔다. 잠깐 멈춘 틈을 타서 나도 호흡을 골랐다. 찢어진 것 같은데. 하영진이 모르길 바랄 뿐이다. 열심히 나를 쓰다듬는 손바닥이 두 개가 되어 내 것을 쥐고 흔들렸다. 마음대로 해.
“얼굴… 보고 싶어요.”
“안 돼. 나중에.”
내 것이 서서히 반응을 보였다. 앞 상단을 문지르며 제발 하영진의 소원대로 서주기를 바랐다. 제발 서서 하영진 좀 같이 속여줘.
“아… 됐어요.”
겨우 선 것도 다 죽어버릴 만큼 하영진이 다시 시작했다. 난 필사적으로 앞을 만져 뒤로 간 내 신경을 끌어오려 했지만 원치 않은 긴장으로 인해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 앞뒤로 오는 고통에 무릎이 세워지고 몸이 굽혀졌다.
“후윽, 읏… 응, 아… 조금 더.”
더. 베개 밑으로 양손을 넣고 허리에 들어간 힘을 조금씩 덜어냈다.
잠깐 화장실에 가보겠다는 하영진을 보내놓고 척척한 젤을 닦아냈다. 부어버린 그곳은 다행히도 찢어지진 않은 것 같다. 콘돔을 안 씌웠다면 한 번 더 하겠다고 했을지도 몰라. 난장판이 된 방을 둘러보고 꾸깃한 베개를 보고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후회했다.
침대에서 내려와서 스트레칭을 하고 뻑뻑한 목을 쳤다. 처음이라 그런가. 계속하면 익숙해지겠지. 손에 피가 몰려 아직도 빨갛다. 단언컨대 내 생애 최악의 섹스였다. 씻고 있나. 물소리를 따라서 화장실 문을 조금 열어봤지만 내 시야에 하영진이 없어서 밑으로 서서히 내려갔다.
“후윽, 후… 읏.”
“…….”
지금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면 난 저기 껴야 한다. 저 차갑고 딱딱한 타일 바닥에서 하영진과 섹스를 이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들켰네. 차라리 지금 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얼른, 흑, 얼른 들어가세요.”
“왜?”
“보면… 자꾸 하고 싶어서….”
우는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눈도 이렇게 빨갛고, 우글우글한 입술이 가까운 내 입술을 찾았다.
“들어가세요. 네?”
“…….”
할짝할짝 내 아랫입술을 핥고 윗입술을 물던 하영진의 눈이 취한 것처럼 몽롱하다. 위스키에 취한 날도 이것과 비슷했다.
“제가 올라갈까요?”
“대담하다. 너희 집에서 하려고?”
“…어쩔 수가, 흑… 흐윽, 없, 으니까요. 몸이 이상해… 몸이, 윽.”
내게 기대오는 하영진을 눕혀놓고 따뜻한 물을 틀어 바닥에 던졌다.
“나 처음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못해서 내가 이 모양인 거야. 거머리같이 붙은 살이 밀려 하영진의 손을 채웠다. 거짓말을 쳐서라도 네 입에 꼭 맞는 사람이 되어줄게.
이 집의 방바닥이란 곳은 다 등으로 체험한 것 같다. 이마를 짚어 혹시라도 열이 나진 않는지 살펴봤지만 멀쩡하다. 잠귀가 밝은 편이라 자다가도 금방 일어나던데, 웬일로 자고 있네.
“…잤네.”
잤네. 방법이야 어찌 됐든 하기는 했다. 하체가 마비된 것 같지만 어제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 엄살이다.
“하영진.”
바라는 대로 움직였다. 체력이 부족한 하영진이 계속해서 달려들어 내 입술과 하반신을 노렸다. 덕분에 발목에 반달 모양의 상처가 생겼다. 넣으면서 사과하는 경우는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다. 하영진의 텅 빈 손을 들어 내 얼굴에 가져갔다. 늦잠을 다 자고. 열한 시를 넘어가는 나무 시계를 확인하고 내 팔을 베게 했다. 내 머릿속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고민들은 모두 사라졌다.
“너하고 자는 사람은 다 도망가겠다.”
이래서 두 번째는 어떻게 하지. 반대쪽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줬다. 동그랗게 생겼지만 얼굴형 때문에 둔하고 멍청하게 보이진 않는다. 내가 누르기 좋아하는 코를 손끝으로 비비고 아랫입술을 튕겼다. 손등의 수술 흔적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 정도 뜬 눈이 다시 감기고 떠졌다가 다시 감겼다. 갑자기 헐레벌떡 일어난 하영진이 덮고 있던 이불을 모두 들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불을 꽁꽁 싸맨 하영진이 고개를 휙 돌려 나를 확인했다. 다행이다. 바지를 입고 있어서 어제 같은 변태 이중인격자가 나오진 않을 것 같다. 우리 둘은 한참을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저 경계심 가득한 눈은 처음의 그것과 닮아서 난 오히려 반가웠다.
“한… 한… 한 건가요?”
“응.”
“…진짜요?”
“응.”
새벽에 깨워서 했잖아. 빨아주고 달래줘도 도저히 진정이 안 돼서 나한테 짜증 내는 것도 다 받아줬다. 이불 속으로 벌레처럼 숨어 들어가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기억났어?”
“…네. 말하지 말아주세요….”
“다 기억났어?”
불쑥 솟은 이불이 꿈틀거렸다. 내가 직접 내려가서 하영진을 벗겨냈다.
“옷은, 왜 덜 입으셨어요?”
“바지를 벗으면 네가 또 달려들 거고, 그런데 네가 한 짓은 꼭 알려주고 싶어서 반만 입었어.”
그리고 혼자 발가벗고 있으면 창피해할 거니까 내 나름대로 널 생각해 준 거야.
“안… 그럴 거예요. 어제 많이, 도와주셔서.”
그렇지. 그러고서도 더 하고 싶다 하면 진짜 문제가 있다.
“넌 어제 내 이름을 부르더라? 잊어먹었다면서?”
“네? 제가 언제….”
“내 이름 부르면서 하던 건 기억 안 나?”
진짜 모르는 건지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멍청한 혀가 입술을 한번 훔쳤다.
“제가 진짜 그랬어요?”
“응.”
“제가 정말 그랬어요?”
“응.”
그 상태면 좀 까먹고 모를 수도 있지. 하영진은 무릎을 지지대로 덜렁이는 내 한 손을 양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바람에 춤추는 들풀처럼 살랑살랑 몸을 움직이며 웃는 모습이 귀여워서 남는 손으로 꾹꾹 입술을 눌러줬다. 이렇게 기분 좋은 얼굴은 처음 본다.
“간지러워요.”
나도 이 고착을 벗어나고 싶었던 건 분명하다. 그래서 병적인 조급이 나에게도 옮겨왔던가. 멋대로 과거까지 떨어지는 하영진을 주워내기엔 내 힘이 아직 부족하다.
“앞으로는 숨어서 하지 마.”
앞으로는 어떻게 달라질까.
* * *
“어제 보험 계약을 체결하고 왔습니다. 수익자는 본인 이름으로 했습니다.”
엄마를 많이 닮았나. 얼굴도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빠는 모르겠고 엄마는 예쁘고 본인과는 다르다고 했었지.
“기뻐해?”
“네. 공짜로 보험을 드는데 싫어할 노동자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것도 알려주지 말아야겠어. 그게 맞는 것 같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들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저한테 물어보실 수도 있습니다.”
“너한테? 만날 일이 없는데 너한테 그걸 왜 물어.”
“저는 본부장님과 다르게 발로 뛰고 눈과 귀를 항상 열어두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쩌다 만나면 실수도 할 수 있지요.”
“너 죽으면 내가 눈은 꼭 열어줄게.”
“제 유서 내용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영진을 같은 건물에 앉혀놓고 싶다. 저번에 한번 김한세가 헤어지면 어떡할 거냐고 내게 일침 아닌 일침을 가해서 그 뒤로 한마디도 못 하고 있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영진은 일을 잘할 것 같지 않아? 네 일도 잘 도와줄걸?”
“들어오셔도 제 옆에서는 일 못 하십니다. 낙하산도 정도가 있죠.”
“네 옆에 있어야 내가 나가서 볼 수 있는데?”
“아니요. 제 옆에 있으면 저만 볼 수 있습니다.”
대체 나를 도와주는 건가, 방해하는 건가.
“그리고 영진 씨는 누군가를 보필할 성격이 아닙니다. 그러기엔 눈치도 없고, 손도 느리고요. 밑에서 남들한테 욕 먹으면서 몇 달 일하다 보면 눈물 콧물 좀 쏟다가 익숙해지실 겁니다. 독한 면도 있으니 의외로 잘 해낼 가능성도 배제는 못합니다.”
“징그럽고 짜증 나서 패고 싶다.”
익숙해진 하영진은 모든 걸 포기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그건 나만 알지.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다고 알려주는 것도 낙하산의 퇴사를 막을 수는 있을 겁니다.”
“형은 왜 그렇게 인간이 잔인해? 싫으면 놔줄 생각을 보통 하지 않나?”
왜 날 이상한 사람 보듯이 하지. 난 하영진을 억지로 앉히려고 하는 게 아니라 추후에라도 일을 하고 싶다면 앉히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건 부수적인 이익에 지나지 않는다.
“싫어하는데 놔주셨습니까?”
피식피식 비웃는 김한세를 내쫓았다. 왜 나한테 연락 하나도 안 하지. 집안일 하나. 이불 빨래한다고 한 건 들었는데 그동안 연습했던 문자 실력을 보여줘야지.
이젠 진짜 끝이 다가오는 건가. 복권이라도 맞은 듯한 보상을 주는 건 비록 내가 아니지만 어떻게든 전달될 것이다. 하영진을 닮은 집으로 이사를 가서 그놈의 고양이와 시시덕거리는 하영진을 겪어가며 행복하게.
마음에 무언가가 쉴 틈 없이 차올라서 하영진이 내 몸을 더듬더듬 만지며 미소를 지을 때 펑펑 터져간다. 너무 오랫동안 안 했는데. 나 다 나았는데 왜 안 하지.
[죄송해요. 지금 봤어요. 언제쯤 오세요?]
[밖에 비가 많이 내리니까 조심해서 오세요.]
비? 이 안에 있으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알 수가 없다. 창문이 있어도 통 보지를 않고, 높은 곳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위에서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희열을 알지 못했다. 다닥다닥 붙은 커튼 사이로 바깥을 바라봤다. 이렇게 하늘이 박살 난 것 같은 날 하영진은 창문 밖을 멍하니 쳐다본다.
[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인기척에 놀란 하영진이 뒤로 돌려다 바닥으로 넘어졌다. 들어오면서 친 천둥 때문에 갑자기 내가 나타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어두운 것도 무서워하면서 왜 불은 안 켜고. 문자를 받고 바로 달려온 내 추측이 부디 틀렸으면 좋겠다.
“저에 대해 잘 모르시는데, 제가 속인… 알려드리고,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을 했어요.”
거리가 멀어서 안 들리는 건지, 하영진이 말을 이상하게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재킷을 벗어 바닥에 던져놓고 소파에 앉았다.
“앉아서 똑바로 얘기해.”
일부러 나와 다른 칸에 탄 하영진은 무릎을 굳게 잡았다. 서먹할 때도 저곳에 앉지는 않았었다.
“거짓말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 거짓말은 아니지만, 거짓말을 쳤어요.”
고작 그 한 번으로 끝난 건가. 기한을 3개월이 아니라 3년이라고 정했어도 다를 건 없었겠지만. 한 번은 되고 왜 두세 번은 욕심 부리면 안 되지?
“저, 저를 괴롭혔던 친구… 전에 말씀드렸었던 그 사람이요.”
“응.”
“그 친구는 남자인데요. 전 그 친구하고…… 처음이 아니었어요.”
“…….”
“제가 그때 다쳐서… 몸이….”
주먹 쥔 손을 곧게 편 하영진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처음에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나는 지금 알고 있다고 대답해야 하나. ‘네 반응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식의 말을 해야 할까.
“그러니까 생각하시는 것만큼 제가 경험이 없다거나, 깨끗하지 않아요.”
“그래서?”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넌 왜 너를 위해 감추지 않아? 네 양심이 그렇게 중요해? 아니면 내 기분을 나쁘게 하고 싶은 거야?”
“그게 아니라… 나중에 알게 되면 실망하실 수도 있잖아요.”
“난 너한테 절대로 실망하지 않아.”
아마 내가 몰랐고,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을 죽이고 누군가를 다치게 해서, 아마 진우한과 같은 짓을 저질렀다 하여도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과거가 그렇게 중요했으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야.”
“…그럼 뭐가 중요하세요?”
테이블에 발을 쭉 뻗고 하영진을 비스듬히 바라봤다.
“중요한 게 꼭 있어야 해?”
“…….”
“꼭 그런 대단한 게 있어야 한다면 지금 올라가.”
난 그런 대단한 의지나 목표가 없는 사람이라 채워 줄 수 없어. 무거운 침묵을 그대로 받으며 앉아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하고, 하영진이 할 수 있는 건 하영진이 한다. 얼마든지 과거에 매달려도 좋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가 처리해줄 것이다. 미래가 두렵다면 내가 대신 봐줄 수 있었다.
“이만 올라가.”
“…안 올라갈 거예요.”
“있을 거면 가서 물이나 떠와.”
“안 떠다 드릴 거예요.”
그래? 그럼 내가 떠다 마시지 뭐. 컵을 두 개 꺼내 냉수와 정수를 각각 눌러 가져다줬다.
“밥도 안 차려줄 거야?”
“…….”
그것도 내가 차리지 뭐. 음식을 데우고, 밥 푸고 국 퍼서 상 위에 둥글게 놓으면 되는 거 아닌가. 냉동실을 뒤적여 하영진이 좋아하는 동그랑땡을 프라이팬에 쏟고 달걀을 풀어 바닥에 깔았다. 옆에서 끓기 시작하는 뭇국도 끄고 국자로 찔끔 퍼서 먹어봤다. 괜찮네.
김치는 종류가 또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몇 가지로 줄이려다가 무로 채 썬 김치도 올려두고 억세 보이는 풀 김치 등을 모두 차렸다. 빨가면 다 김치지. 이름 따위가 뭐가 중요해. 중간을 차지한 동그랑땡을 하영진의 자리로 밀어두고 밥과 국을 각각 푸고 하영진을 불렀다.
“밥 먹어.”
내가 주방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낼 때마다 움찔대더니 왜 저렇게 나무늘보처럼 오는 거지?
“잘 먹겠습니다.”
“응.”
이 식탁 어딘가에서 나트륨이 줄줄 새고 있을 것 같다. 국을 떠먹으며 조용한 식사를 이었다. 북엇국 친구인가. 맛이 비슷한 것 같아서 물어보려다가 수저를 내려놨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하영진은 아니었다.
“내가 체하는 거 보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쳐다봐.”
“아, 아니에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맛있어요. 나중엔 떡갈비도 가져올게요.”
“왜 자꾸 네 돈을 쓰는 거야?”
내가 감시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 실시간으로 알아챈 적도 별로 없어. 떡갈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넘어갈 뻔했다.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라서요… 아무래도 그런 건 제 돈으로 사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래서 내가 안 먹어?”
“많이 안 드시잖아요.”
하영진이 밥을 입에 담은 채 급하게 움직여 검은색 가방을 가지고 왔다. 허름한 지갑에서 나온 카드는 내가 한국에서 처음 만든 카드였다.
“계좌에 따로 넣어줄까?”
월급은 그대로 현금으로 주고 생활비는 따로 넣어주면 되는 건가.
“이제 돈 안 받을래요.”
“…….”
“월급도, 안 받을 거예요.”
가만히 앉혀놓은 이유는 어떤 방식으로 헤어질지 고민하라고 한 게 아니었다.
“저도 제 손으로 벌어서 해드리고 싶어요. 물론 부족한 거 없으시겠지만 그래도….”
아니었군. 김한세만 뚫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의 의지라면 낙하산도 쉽지 않겠는걸.
“내년에 생일 선물은 뭔지 알아?”
“뭔데요?”
“집이야.”
선불이라 조만간 받게 될 거야. 명의는 내 것이고 이름만 하영진의 것이다. 타인 간의 양도는 귀찮아서 김한세의 잔소리를 모두 뿌리치고 충동 구매한 신축이다. 하영진은 내가 무슨 재밌는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받고 싶은 생일 선물 알려줄까?”
“네. 알려주세요.”
“우리 한 번밖에 안 했잖아.”
“그거 말고 가지고 싶은 건 없으세요?”
“응. 없어.”
저렇게 난감해할 일이 아닌데, 정작 싫어해야 하는 건 나지.
“처음 아니라고 하셨었잖아요.”
“응.”
“그럼 아무래도 다른 사람하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저는 잘… 하지도 못하고, 아프게만 하는 것 같고… 저만 즐거운 건 내키지 않아요.”
이물감은 거의 3일 정도 이어졌다. 이번에 하면 좀 줄어들지 않을까.
“넌 내가 다른 사람하고 해도 괜찮아?”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럼 이 집에서 해도 돼?”
“…아니 나가…서,”
역시. 그럴 리가 없지.
“가 아니라 제가 나가면 되겠네요.”
“…….”
“그분이 불편하실 수도 있으니까, 도착하기 전에 알려주시면 바로 나갈게요.”
진짜 나중에라도 꼭 한번 해봐야겠다. 동그랑땡을 하나 집어 먹은 하영진의 볼이 불룩하다.
“이렇게 기름진 거는 몸에 안 좋아.”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그릇을 비우고 턱을 받친 채 하영진을 쳐다봤다. 그래서 우리 언제 해?
“그분은 오늘 부르실 건가요?”
“아니? 왜, 같이 할까?”
“셋이서요?”
응. 셋이든 넷이든. 협박용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도 내려놓았다.
“옷 벗어.”
“지금이요?”
“응. 옷 벗으라고. 지금 하게.”
“씨, 씻고… 씻고 하면 안 될까요? 아직 그분도 안 오셨고….”
하영진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 위로 손을 올렸다.
“화나셨어요?”
“아니.”
“그럼 삐지셨어요?”
“아니.”
“밥 먹고, 저하고 산책하러 가실래요?”
끈질긴 영업사원처럼 주위에 한강과 인접한 공원이 있다며 나를 유혹했다. 밥을 먹고 가벼운 운동은 소화가 잘되고, 어떻고 저렇고.
“거긴 차 댈 곳도 많아요. 저 설거지만 하고….”
설거지. 젓가락을 우뚝 멈춘 하영진이 말을 바꿔 식기세척기를 쓰겠다고 했다. 어린이 대공원에 이어 두 번째 외출. 하영진이 준비를 마치고는 신발장 앞에 서서 나를 불렀다. 다른 사람이 주는 옷은 색깔이 있고 하영진의 옷은 대부분 무채색이다.
“한강 가보셨어요?”
“응. 가봤겠지.”
유일하게 기억하는 곳이라고는 공항이 있는 인천이다. 기내 화장실까지 따라와서 감시하던 김한세를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이 많을 수도 있어요.”
“벚꽃보다 많을까?”
“아뇨. 거기보단 덜할 거예요.”
내 옷을 신경 써주며 머리카락을 매만져줬다.
“가기 싫어?”
“아뇨. 그냥….”
“응. 그냥 왜?”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기 싫어서요.”
차에서 안 나오면 되지. 미지근한 손에 내 것을 밀어 넣고 함께 내려갔다. 김한진은 내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문자를 보낸다. 각자의 퇴근을 마치고 여가 시간을 갖다가 아침이 되면 김한진이 출근을 한다.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숨어서 하영진이 나오면 그 주위를 맴돌았다. 눈을 떼굴떼굴 구르던 하영진이 무릎을 움찔거렸다.
“저… 요즘 누가 절 쳐다보는 것 같아요.”
“그래?”
“제 기분 탓이겠죠?”
김한진은 몇 달을 내내 보고 있었는데 그걸 이제야 알아차린 건가.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귓바퀴를 매만졌다.
“그래서 집에 바로 들어가는 거야? 밖엔 안 나가?”
“밖에 나가봤자 저는 문영이나 전호만 만나니까요. 보통은 화요일에 보곤 했어요.”
“만나면 뭐해? 걔네도 너하고 한강 가봤어?”
“…….”
왜 말이 없어. 가서 뭔 짓을 했길래. 또 돗자리 깔아서 도란도란 얘기나 나누며 놀았나. 내가 조금만 더 친했다면 나를 달고 다녔을까. 지금도 딱히 편한 사람 취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옆에서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심장 한구석이 차가워진다.
“돗자리는 안 가져갔지?”
운전이 한가해졌을 때 하영진을 꾸준히 바라봤다.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니라면 내 질문에 대답을 해줘.
“앞에 보세요. 사고 나요.”
생색내고 싶다. 그놈들보다 내가 더 해준 게 많다. 물론 다 좋았던 기억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너한테 실질적인 도움이 됐고.
“이렇게 몰래 질투하고 계셨어요?”
“응.”
하영진은 눈웃음을 지으며 핸들에 걸친 내 손을 만지고 떨어졌다. 여기 잠깐 세울 데가 있나.
“엄마가 보시는 드라마를 가끔 저도 보는데, 되게 귀찮은 감정 같더라고요.”
“귀찮지. 네 핸드폰을 집어 던질 정도로.”
“그땐 제가 전혀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그러실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넌 어디까지 봐줄 수 있어? 무슨 짓까지 가만히 당하고 있을 거야?”
“제가 봐드리는 거 싫어하실 거잖아요.”
“그래서, 안 봐줄 거야?”
왼쪽으로 가면 큰길이 나오고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야 해서 길을 좀 더 찾아야 한다.
“엄마가 보는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이 되게 바보같이 착한 사람이에요. 근데 그건 그 사람이 아름답고, 어린 시절부터 유복하게 자랐기 때문이에요.”
“응.”
“그래서 제가 누군가를 배려하는 건 사치라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어요. 아마 그래서 제가 자존심을 세우는 걸 싫어했던 거라고… 멋대로 추측했는데, 맞나요?”
“응.”
“거기 나오는 남자주인공은 돈이 없어서 억척스럽게 살고,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이거든요. 닥치는 대로 일하는 모습을 보며 여자주인공은 사랑에 빠져요.”
그 둘 중에 질투는 대체 누가 하는 거야.
“저는 거기 나오는 남자처럼 해야… 더 좋아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 제 말은 저를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지금처럼 신경을 써주신….”
“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잠을 자?”
아니라며 하영진은 고개를 휘저었다. 수풀이 우거져서 그 누구도 안 들어갈 것 같은 곳은 일부러 피했다. 차라리 조금 뚫린 곳을 더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아도, 잘 수 있잖아요.”
“넌 그래?”
“…아니요.”
“난 그런 편이긴 해.”
저기다. 가로등이 있어서 밝고, 사람도 옆길로 지나갈 법한 곳이었다. 한강이 바로 보이는 곳에 정차하고 하영진의 시트를 젖혔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안아오는 팔을 가볍게 안고 겨드랑이의 뭉클한 살을 만지작거렸다. 웃음이 터진 하영진과 다르게 난 진지해서 온몸을 끌어안고 아래쪽을 입 맞추듯 지분댔다.
“하아,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조금만 더 하다가 근처 어딘가에 잘 곳을 찾자. 허리로 넘어온 하영진의 손이 파고들었다. 등을 와락 껴안고 눈을 감는다. 오늘처럼 집에 가면 뭐 하는지 들려주는 날이 많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영진의 음성이 길을 찾아준다면 화요일마다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
“혹시… 저하고 처음 하는 게 있기는, 하세요?”
“응. 응?”
유두를 입에 머금으려 옷을 벗기고 있는 중이었다. 하영진은 내가 머리를 들자 작게 고개를 저으며 질문을 잊어달라 했다.
“갑, 자기 궁금해서….”
“또 궁금한 건 없어?”
“지금은 없어요.”
하던 거 마저 해야지. 흰색 티셔츠를 말아 올리고 있다가 하영진이 내 등을 톡톡 쳤다.
“괜찮으면 대답해주세요….”
“처음? 모르겠는데. 아마 없지 않을까?”
내 기억은 보통 똘똘 뭉쳐져 있지만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준 사람은 시간이 걸려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거북했던 처음도 지금은 얘기할 수 없지만 하영진이 익숙해지면 그때 털어놓기로 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질투는? 억척스러운 그 남자주인공을 따라 하영진의 마음도 일만 하다 삭막해지면 어떡하지. 내가 들어갈 공간을 찾기 위해, 내 분노를 풀어내기 위해 했던 짓을 되풀이할 의향도 있다.
“저, 씻고 왔어요.”
“알아.”
“아니요. 다… 씻고 왔어요.”
뜨뜻한 뺨을 부여잡았다. 밥 먹고 그 잠깐 동안 씻은 건가.
“그리고, 문제없어요. 아까 해봤어요.”
“연습했다고?”
“한번, 만져봤어요. 하고 싶다고 하셔서….”
이걸? 내 볼을 누른 손이 머리를 감싸 안고 귓가에 볼을 붙였다.
“어디든 데려가 주세요. 따라갈게요.”
지금요.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내 좌석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