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7/11)

3.

깨끗하다. 머리도 마음도.

햇볕이 닿아서 반짝반짝 사기성이 짙은 외모로 변했다. 하영진은 내 이마 쪽으로 시선을 올리고는 다시 내려왔다.

“어제 계속 머리 아프다 하셨어요.”

“알아.”

“지금은 어떠세요?”

셔츠 잘 어울리네. 내 회사에 널 가져다 놓을까.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직장이 있는 것이 낫잖아. 보고 싶을 때마다 내려갈 거야. 틈날 때마다 올려오라고 시킬 거고.

“괜찮다고 하면 올라갈 거지?”

“네. 두 시간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새벽에도 뒤척이는 몸을 안고 억지로 잠을 재웠다. 앞으로도 돌리고 뒤로도 돌리고 여기저기 입술을 비비다 하영진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질척거렸던 것 같다.

“…알았어. 다녀와.”

“밖에 상 차려놨으니까 드시고 씻으세요.”

정리가 끝났나. 자신의 옷을 들고 나가는 뒷모습이 후련해 보인다. 문이 닫히고 핸드폰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다가 거실로 나왔다. 이 소리는 뭐지. 웅장한 소리의 행방을 찾아내고 표시된 110분을 보니 어이가 없다. 세탁이 끝나는 시간에 와서 집안일을 하겠다는 투철함. 전혀 관심 없다. 여기저기 들락거리다 찾은 핸드폰으로 한창 일하고 있을 김한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숟가락에서 툭툭 떨어지는 건 감자가 아니라 전복이었다. 문자도 안 왔던데 또 본인 돈을 쓴 건가.

― 밀린 결재가 많습니다.

“아팠으니까 봐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 아프시다니요?

“응. 그 새끼들 태워서 죽이지 말고 태운 다음에 며칠 널어둬.”

― 알겠습니다.

“몰래 하면 안 되겠어. 하영진도 알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 전 반대입니다.

“난 찬성이야. 근데 세탁기 2시간이라는데 다 기다려야 해? 조금 더 빨리할 수는 없나?”

― 쾌속 모드가 있을 텐데요. 귀찮아도 설명서를 읽어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쾌속… 쾌속? 세탁기로 다가가서 한글을 맞췄다. 쾌속으로 돌리면 되나.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전원을 켜서 쾌속으로 돌렸다.

“이거 빨래는 막 널면 되는 거지?”

― 막 널면 안 됩니다. 건조기 주문해드릴까요.

“아니. 그럼 하영진이 돌아다니는 걸 못 보잖아. 막 안 널면 어떻게 널어? 가르쳐봐.”

― 쾌속이 끝나면 전화 주십시오.

전화 예의가 아주 별로야. 하영진은 내가 끊을 때까지 숨도 안 쉬고 가만 기다렸다. 전화해볼까. 휴일에 잡아두고 그다음 날도 아프다고 잡아두고, 지금은 위험한 시기다.

사진을 찍어 보내 달라는 김한세의 부탁을 씹고 건조대를 뿌듯하게 바라봤다. 하나하나 탁탁 털어서 널었다고. 생각보다 내가 벗어 던진 옷가지가 많아서 하영진이 이걸 널면서 아무 생각도 없었을 것 같다는 추측에 침울해졌고 세수하러 가서는 거울 속 내 얼굴이 가관이라 아쉬웠다.

얼추 두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감기에 찌든 몸을 닦아내고 방도 대충이나마 치워뒀지만 하영진은 전화도, 문자도 없고 바깥은 고요하다. 노트북을 틀어 시간을 돌려본 결과 집에 있는 거고, 지금까지 안 나왔다는 건….

“하영진이다.”

어차피 2층인데 발끝을 콩콩 바닥에 찍어 운동화를 바로 신는 이유가 뭘까. 안쪽에 누군가에게 인사를 해주고 나가다가 다시 들어가서 고개를 숙여 무슨 짓을 한다. 좋겠네. 나도 나가다가 못 참고 돌아봐줄 일 좀 만들어볼까.

노트북을 침대 밑으로 넣어놓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빨래를 보고 놀라면 그때 나가서 내가 한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슬리퍼를 직직 끌어당기는 소리, 하영진이 다가오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내가 자는 걸 보면 세탁기가 하영진을 유혹할 것이다.

“…주무세요?”

응?

“천…재상.”

뭐? 굳은 몸을 풀려던 차에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영진이 나가자마자 이불 안으로 벌레처럼 들어가 얼굴을 숨겼다. 하영진. 하영진. 하영진. 하영진. 하영진. 하영진. 하영진.

* * *

“이사 안 하십니까?”

“아버지랑 짰지.”

점심시간을 틈타 김한세의 노트북 곳곳의 폴더를 열어젖혔다. 진우한의 가족들, 주변 지인들, 유형오, 이건주 등등. 서류 가방에서 꺼내던 보온병을 낚아채 바짝 말려둔 컵에 따라 마셨다.

“돈이 떨어지셨으면 제가 갚아드리면 되는 겁니까?”

“아니. 네 커피가 맛있더라고. 하영진도 갖다 줄까?”

“영진 씨는 커피를 드시지 못합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제가 하는 일이 그런 건데 모르겠습니까? 가지고 들어가서 마저 보시고 이제 제 자리에서 나와주시면 됩니다.”

“이비인후과는 왜 간 걸까?”

정신병원은 병명과 내용까지 상세히 나와 있었지만 이비인후과, 여기는 전화번호도 적혀 있지 않았다.

“동네 병원이라 자세한 정보는 구할 수 없었습니다만 거기가 원래 근방에서 알아주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감기라도 걸리신 게 아닐까요?”

많이 간 것도 아니고 그달에만 두세 번인 걸 봐서는 그럴지도. 그다음 장을 보다가 박병희의 파일을 옆에 열어두고 비교했다.

“박병희는 왜 하영진이랑 같은 군대야? 숫자는 다르지만 한글이 똑같잖아. 혹시 군인을 열 명만 뽑아?”

“같은 곳 맞습니다. 영진 씨는 중간에 제대했으니까 기록은 그렇게 남아 있는 거고요.”

“그리고?”

어제 혼자 웃다가 멈추기를 반복해서 사람 신경 쓰이게 하더니. 밥은 뭐 먹었는지,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싶다.

“박병희가 있던 곳에 영진 씨가 새로 들어갔고, 성폭행 미수로 잘 마무리됐다고 합니다.”

“……?”

“화장실에서 해보려다가 걸렸답니다.”

내가 아는 미수의 뜻과 성폭행, ‘잘’과 ‘마무리’의 뜻이 잘 연결이 안 된다. 안경을 한번 걸쳐 올린 김한세가 자리에서 비켜나라고 했다. 커피를 한입 마시고 김한세가 매일 소독하는 발 받침대에 구두째로 올렸다. 요새 하영진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잔뜩 꾸미고 나와봤다.

“원래 그런 곳이니까 이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 박병희는 끝났어?”

“진우한의 부름을 듣고 폐공장으로 갔고, 근처에 상주하던 만취한 노숙자들의 집단강간과 때마침 근처에 있던 휘발유의 의심스러운 발화로 인해 심한 화상을 입어 그저께 사망했습니다.”

“너무 늦게 알았네.”

“어디서부터 끼어드실 예정이십니까?”

기웅그룹 회장의 아들이지만 반쪽짜리고, 누나 진준희는 미국에 거주. 후계 싸움에서 밀려 유배되었다는 정보가 있으나 두 부부의 지속적인 미국 출장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하영진한테 어떻게 알려줘야 충격이 덜 할까?”

“본부장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는 게 충격이 덜할 겁니다.”

“혹시라도 잘못되면 우한이가 당하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네. 아무리 그래도 기웅 이사이고 그전에 자식이라 그렇게 될 일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뉴스를 타는 게 아무래도 가장 공개적인 방법이다. 나보다는 고등학교 동창인 배전호가 알려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생각 좀 더 해보고, 가장 평온해 보일 때 ‘듣자 하니 내가 아는 사람의 아들이’로 시작하는 귀띔도 괜찮을 것 같다.

보란 듯이 발 받침대에 바닥을 박박 문지르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던져지는 결재 요구는 들어주지 않을 생각이다. 급하면 알아서 내 방에서 이것저것 만지고 결재도 혼자 다 하면서 앞에 보이면 어떻게든 일을 시키려고 안달이다.

모니터를 지켜보다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전화를 받았다.

― 아들.

“네. 끊으세요.”

― 아닉! 아니!!

“주하한테 놀아달라 하세요. 바쁩니다.”

― 엄마한테 들켰거든. 그이가 너를 처리해야겠다고 벼르고 있어. 하고많은 구멍 중에 꼭 그 구멍이어야 하냐고.

“그렇게 말하셨어요?”

그렇게 말할 사람이 아닌데.

― 아니. 더 심하게 말했지. 내가 많이 순화시킨 거란다. 집에 좀 놀러와. 아빠 심심해.

“네. 때 되면 놀러 갈게요.”

― 근데 너 뭐하길래 한진이까지 바쁘다고 하는 거냐. 일을 잘하는 두 녀석을 다 써먹고 있으면 안 되지. 비록 내가 한올이를 비서로 써먹고 있지만~

눈앞에서 빨갛고 파래지는 시시각각 변하는 주식 창을 껐다.

“소란스러워질 거예요.”

― 왜.

“하영진 때문에요. 조금쯤은 아버지께 영향이 갈지도 몰라요.”

― 그래? 회장님만 무사하면 난 괜찮아.

“그분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멀쩡했는데요.”

― 그 양반은 돌아가실 만했지. 그 정도면 자살이야. 재상이 네가 큰 결심했지. 진짜 혹시나, 혹여나, 혹여라도 시작했으면 아빠한테는 꼭 말해줘야 한다. 알았지? 담배나 술은 괜찮아도 약은 꼭 얘기해줘야 해. 그건 주위 사람들도.

“…네. 들어가세요.”

꼭이라는 말이 없으면 못사는 사람처럼 꼭을 남발한다. 김한세처럼 전화를 끊어버리려다 책상에 엎드렸다. 다른 사람한테 전화 왔으면 좋겠다. 하영진. 노크도 없이 들어온 김한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다음 주 화요일에 쉬기로 했습니다.”

“너도 내가 지겹냐. 나도 내가 지겨운데.”

“영진 씨는 오늘 배전호를 만나러 갔답니다. 둘이 만나면 보통 서너 시간은 기본이라 저녁에 들어가실 것 같습니다.”

“나 하영진 없을 때는 어떻게 살았어?”

“매일 모르는 사람들과 모르고 싶은 일을 하셨습니다.”

“나 없을 때 하영진은 잘살고 있는 것 같은데.”

“일주일에 고작 하루 쉬게 해주면서 뭘 바라십니까.”

“나 전에 감기 걸리고 씻으려고 보는데 엄청 몰골이더라. 하영진은 사람 얼굴만 보는데 아마 그때 내가 싫어져서 화요일에 나는 안 만나주는 걸까? 3층으로 갔으면….”

“몰골이 엉망이라고 쓰는 겁니다. 보충 수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401호로 들어가면 휴일에도 우리 집에 놀러와 줄까? 아니면 나도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우자.”

“더 싫어하실 텐데요. 책임감이 없어 보일 겁니다.”

“고양이들은 다 비슷하게 털뭉치던데 왜 그 고양이만 좋아하는 걸까?”

내 물음에 점점 단호해지던 김한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주위에 사람 좀 더 붙여. 우한이 끝날 때까지는 줄이지 마. 김한진한테도 얘기 똑바로 해두고.”

“여차하면 자리를 뺏길 텐데 무모한 짓을 할까요?”

“네가 볼 땐 고등학생 때 했던 짓이 덜 무모했어?”

그런 애가 커서 어른이 되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고, 주렁주렁 누구라도 붙여두면 내가 마음이 편하다. 저녁에나 온다니까 나도 시간 맞춰서 들어가야지. 빈둥빈둥 넓은 공간에서 뒹굴대다가 핸드폰을 찾으러 갔고 또 뒹굴거리다가 핸드폰을 찾아 나섰다. 없다. 없어. 파닥파닥 종이 자락을 안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가기 전에 뭐 좀 물어보려고 했는데 김한세는 퇴근하고 없었다. 왜 이게 여기에 있지. 이젠 내 핸드폰도 압수하는 건가. 하영진한테는 아무 연락도 없다. 지금 저 엘리베이터에서 하영진이 튀어나와 주면 어떨까. 없네. 그런 일은 없어. 엘리베이터 창밖의 색색깔로 반짝이는 바깥 어딘가에 있다. 아직 안 들어갔다고 김한진에게 직접 들었으니 오늘은 정말 늦은 귀가를 할지도. 배전호네 집에서 잘 수도 있다. 저저번 주는 신문영을 오랜만에 만난다고 다른 사람들 다 싫어하는 월요일에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따라 가기가 싫어서 차를 끌고 빙빙 돌다가 내가 살던 집으로 가봤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이전처럼 정리되어 있어서 내가 가진 기억이 전날인지, 그 전날의 것인지 헷갈리는 일이 잦았다. 아마 하영진이 가장 좋아할 것 같은 자리에 앉아서 쏟아지는 달빛을 맞았다. 여긴 옥상 같은 공간도 있고, 높고, 천장도 뚫려있다. 전화해봐야지. 통화목록을 뒤적여 번호를 두세 번 읽어보고 번호를 하나하나 입력했다.

― 어쩐 일이세요?

“…….”

어쩐 일은. 유치하게 삐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도 시끄럽고.

― 저… 저 오늘 소주 마셨어요.

“…….”

― 많이, 흑, 많이 마셔서… 지금 뵈러 가면 후… 술 냄새까지 난다고 싫어하시겠죠?

이곳에 벽시계가 없었다는 걸 지금 알았다.

― 혹시 지금… 댁에 계세요?

“아니.”

― 아….

“차 보낼 테니까 이리로 올래?”

억지로 주소를 받아 김한세에게 연락했다. 하영진이 이곳으로 온다. 왜 이렇게 떨리지. 참을 수 없는 고동이 쿵쿵 내 몸을 점령했다. 깨끗하다. 사방을 둘러봐도 깨끗해서 내가 건드릴 것도 없었다.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안을 10초 이상 거닐다 나왔다. 아냐. 방이 너무 많아, 내가 거기로 갈 걸 그랬나.

“…죽을 것 같다.”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아무렇지 않게 맞을 수 있을까. 씻자. 한번 씻고 차가운 물도 좀 마시고. 머리카락을 괜히 정리했다. 그러다가 머리카락에 바디워시를 투척했을 때 잠시 정신이 들었다. 섹스하자고 하면 어떡하지. 그럴 리가 없어. 술김에 온다고 해놓고 돌연 집으로 가겠다고 하면 나는? 돌아가야지.

수건으로 머리를 탁탁 털며 지나치다가 발견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입던 옷을 걸쳐 입다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앉을 수 있는 곳은 다 앉아서 기다리다가 우두커니 문 앞에 서 있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엄청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털컹털컹. 어디에서 데려오는 건지 듣지도 못하고 뭐하는 거야. 핸드폰을 어디다 자꾸 두고 다니는 거지. 들락거렸던 곳을 찾다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뛰쳐나가서 다짜고짜 문을 열었다.

“…이나솔?”

“내 물건 좀 가져가겠다는데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내가 그 거지 같은 집까지 찾아갔다 왔어.”

“그래? 네 물건이 이 집에 있어?”

“아니.”

“그럼 그 집 가서 찾아야지 여기는 왜 왔어?”

“내가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응. 알았으니까 나중에 와.”

“진짜 그 남창하고 자니?”

아니. 자고 싶지.

“나 들어가도 되지?”

“아니. 나중에 찾아갈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

낮에는 몽롱해서 못 알아봤고 밤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다. 긴 머리카락이 굽실굽실거려서 섹스할 때 흔들리던 모양이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셋이서 해.”

“나중에.”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이래 봬도 우리….”

“남창 따위에 빠진 내가 더럽지 않아?”

이나솔의 날카로운 구두 끝이 번들거렸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내 초조했던 마음도 차분하게 만들었다. 왔네.

“더럽지. 근데 그건 일반 걸레였을 때도 마찬가지였거든. 남창에 빠진 너나 그 전의 너나 여전히 난 네가 천해로밖에 안 보여.”

“나도 알아. 김한세. 걔 데리고 와.”

뒤따르던 하영진이 나와 이나솔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나 마셨길래 얼굴이 저렇게 빨개. 모자 달린 보라색 옷을 입고 청바지에 검은색 운동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머리카락은 왜 저렇게 부스스한 거지?

“안…녕하세요.”

이나솔보다 크네.

“갈 테니까 연락받아.”

짓이기는 영어 발음으로 분노를 안전히 전달받았다. 복도를 구경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하영진을 향해 손짓했다.

“데려다줘?”

“아니. 난 누구와는 다르게 차가 있어서.”

내가 혹시 저렇게 유치해 보이나. 그 옆을 지나치던 하영진이 멈춰 섰다.

“저도… 차 있어요.”

“…….”

“적어도 서른, 아니 오십 명은 들어가요.”

차? 자동차? 아, 그 차. 후다닥 뛰어서 내게 온 하영진이 대신 문을 닫았다.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사실, 오십은 거짓말이에요. 서른… 꾸깃하게 넣으면 서른 명은 넣을 수 있어요.”

손으로 만든 3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을 어떻게 꾸깃하게 넣어.”

신발장에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앞만 보던 하영진이 나를 돌아봤다.

“죄송해요. 그분하고… 그런 사이인데 제가 갑자기 나섰어요. 싸우고 계시던 거 같은데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응. 저리 가서 앉아.”

술에 취한 하영진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밝은 곳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눈알을 굴려대는 모양이 어딘지 신기했다. 있으면 안 될 곳에 들인 것 같아서 죄책감도 든다. 물을 한잔 떠다 하영진에게 건넸다. 이건 확실히 이상하네.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많이 안 마셨어요… 적당히, 많이 마신 것 같기도 해요.”

“더 마실래?”

먹을 거라고는 술밖에 없더라. 구차한 사실을 말하기 싫었다. 갑자기 온 거지만 이제 와서 김한세나 김한진을 부르기도 싫고 이런 하영진을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았다. 고민하는 사람을 두고 유리장에서 아무거나 하나 꺼내오고 내 컵에 얼음을 가득 담아 텅 빈 물컵에 나눠줬다.

“이런 데다 마셔도 되는 거예요?”

“다 같은 컵인데 왜.”

“도수가 높을까요?”

“응. 너 그거 마시면 오늘 집에 못 갈 거야.”

나도 같이 마실 거라 운전할 사람이 없어. 조심스럽게 손을 모은 하영진이 내 쪽으로 컵을 내밀었다. 진갈색의 술을 따라주고 내 것에도 채웠다.

“실수하면 어떡해요?”

“아침에 누가 와서 치워주겠지. 네가 치우면 저 창문에 널 매달아놓을 거야.”

거실 창문은 강하니까 하영진 하나쯤은 거뜬히 받쳐줄 것이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 지끈지끈한 분위기를 풀어줬다. 단둘이 같은 공간,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 건드리지 않은 적은 처음이다.

“집이… 크고, 좋네요.”

“줄까?”

“네?”

나를 이제야 마주 본 눈이 슬금슬금 피했다. 발그레한 뺨을 아까부터 만져보고 싶었다.

“너 줘?”

“아니요.”

“왜 왔어?”

“…….”

“영진아, 너 왜 왔냐고.”

취했다고 어디든 따라가고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다음 날 되면 기억도 하고, 판단력에 무리가 갈 정도로 만취 상태도 아니지. 내 왼손에 깔딱대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뵙고 싶어서요.”

“그럼 전화하지. 번호 알잖아.”

“같은 마음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걸 알면서 왜. 괘씸하다. 헐렁한 바지를 벗기고 볼품없는 다리를 만져보고 싶다. 퉁퉁한 귓불을 빨아대면 하영진의 손이 급해진다.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려 양쪽 눈을 바라봤다. 무엇을 예상하고 있던 손이 더듬거리며 내 팔을 움켜잡고 젖은 입술이 점점 가까워졌다. 본인이 해놓고 숨을 못 쉰다. 가득 안아 내 쪽으로 가까이했다. 계속해서 떠오르려는 하영진을 내버려두고 틈에 파묻혀 입술을 묻었다.

“하아, 아….”

“여기 만져도 돼?”

“네, 네….”

벗긴 바지를 내리고 하영진의 몸을 감상했다. 아무 변화도 없지만, 변화가 생겼다. 붉어진 몸을 가리고 싶어 하는 손이 올라가 눈을 감췄다.

“부끄러우니까… 불을 꺼주시면.”

“알았어.”

리모컨을 조작해 집 안을 어둡게 만들고 달빛을 받은, 하얗고 내 전부를 사로잡는 존재를 황홀하게 바라봤다. 이제야 천장을 향한 시선을 조금도 기다릴 수 없었다. 넣고 싶은 곳에 내 것을 비비며 다리를 말아 내 허리에 둘렀다. 뻣뻣한 혀를 낚아 조립하듯 타액을 쌓았다.

“아, 잠… 흡.”

불편함을 호소하던 하영진을 안아 팔걸이 위로 올려뒀다.

“뒤에 아무것도 없어.”

“하아, 하아.”

“나 꽉 잡아. 너까지 신경 못 써.”

벌어진 다리를 고정했다. 살갗에 부딪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라면 안에는 더 좋을 것이다. 어깨에 가쁜 숨이 떨어졌다.

“후으으, 자국 내면 안 돼요….”

“안 보이는 곳이야. 괜찮아.”

“그게 아니라,”

곧은 쇄골에 붉은 상흔이 묻어나 있을 것이다. 잠깐 떨어진 하영진과 이마를 맞대고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작게 솟은 입술이 삐죽대는 게 귀엽다.

“입술… 입술 더 해주세요.”

“네가 해봐.”

머리카락을 그러쥔 손이 내 어깨로 내려왔다. 쪽쪽 떨어지는 소리가 한 번 정도 크게 났나. 흠칫 놀란 몸이 내게 다시 달라붙었다.

“다시 하실 거예요?”

“응.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어.”

“…저, 그 술 때문에 숨이 자꾸 차서요. 조금만 천천히 해주시면 어떻게든 쉬어보려는데… 어떠세요?”

난 어떤 것도 다 괜찮은걸.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손가락이 코끝을 가볍게 눌렀다.

“나중에 네가 진짜로 하고 싶게 되면.”

“…네.”

“아까처럼 숨 막힐 정도로 기분 좋게 해줄게.”

그런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깨끗한 둔덕을 쓰다듬고 축축하게 젖은 하영진의 것을 만지작댔다.

* * *

침대에 누운 채 하영진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씻고 왔나 보네. 촉촉한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손님 주제에 바빠.

“나 잘 때 말하고 갔어?”

“일어나셨어요?”

바로 앞까지 다가온 거리가 부담스럽다. 어제처럼 대담한 행동은 하지 않고 내 눈을 확인하고는 금방 떨어졌다. 실망이다.

“한세 형께 전화해서 음식을 부탁드렸어요. 차려드리고 바로 나갈게요.”

“오늘 너 일하는 날이잖아.”

“…….”

술 좀 먹일까. 진지하게 고민된다. 하영진은 손을 뻗어 내 엄지를 잡았다.

“여기가 더 좋으세요?”

“딱히 그런 건 아니야.”

“밤에는 몰랐는데, 낮에 보니까 너무 커서… 멋대로 구경했어요.”

왜 네 멋대로 구경을 하냐고 혼낼 빌미를 빼앗겼다. 저렇게 혼낼 거냐고 묻고 있는 눈은 그대로 해주기가 쉽지 않다.

“그동안 이렇게 넓은 집에서 혼자 사신 거예요?”

“아니. 여러 사람이 왔다 갔을 거야. 그중의 하나가 너고.”

손을 잡아당겨 하영진을 이불 안으로 구겨 넣었다.

“조금 더 자. 일어나면 바로 201호로 데려가 줄게.”

“여러 사람 중에 어제 그분도 계세요?”

“이나솔한테 관심 갖지 마.”

엉덩이를 찾아 만졌다. 왜 자꾸 허릴 빼지. 안 세웠으니까 이렇게 경계할 필요 없는데.

“지금 안 할 거니까 힘 빼. 제대로 안고 자게.”

잔뜩 힘이 들어갔던 엉덩이도 돌아왔다. 양손을 되찾은 하영진이 내 허리에 가볍게 팔을 두르고 어제처럼 어깨에 뺨을 붙였다. 편한가.

“머리 덜 말려서 여기 젖을 거예요.”

“괜찮아. 한두 번 젖은 거 아냐.”

웃고 있는데 얼굴을 볼 수가 없네. 대신 손으로 볼을 찾아 문질렀다.

“주무세요. 깨워드릴게요.”

하영진 말대로 여기는 넓어서 소리를 질러도 부엌까지 닿을 것 같지 않다. 핸드폰을 찾다 지쳐 몸을 일으켰다. 감사합니다를 몇 번을 하는 건지. 문밖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김한세가 문을 닫아줬고 하영진이 돌아보다가 놀라 들고 있던 것들을 떨어뜨릴 뻔했다.

“누구야?”

“한세 형이요. 가져다주셨어요. 제가 문을 여는 법을 잘 몰라서….”

식탁을 식탁처럼 써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의자에 앉아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사온 것치곤 시간이 걸리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색해하는 모습이 나도 낯설었다. 우린 저렇게 불편할 만큼 대단한 짓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피한다고 어제 기억이 사라질까?”

“…….”

“매일 술 마실래?”

내 앞에 반만 채운 밥과 하영진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소복한 한 그릇이 올라갔다.

“혹시 몰라서 북엇국을 부탁드렸거든요. 드셔본 적 있으세요?”

“너 어제 나한테 입술 내밀었던 거 기억나? 해달라고 졸랐잖아.”

“그, 그렇게… 간이, 간이 맞나 한번 드셔보세요. 다시 끓이든가 할게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뒷모습과 안으로 조여든 어깨에 웃음이 터지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안 해주니까 네가 했던 건 기억 나?”

“…….”

“샤워할 때도 얼마나 귀찮게.”

“그… 읍.”

읍. 나도 입술을 닫고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숟가락을 들고 오던 하영진은 역시 내 자리부터 노렸다. 열을 닦아내던 손을 잡았다. 눈이 빨개졌다. 조금 심했나.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앞으로는 그런 짓 안 할 테니까 이제 그만….”

몰래 놓으려던 숟가락을 잡고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보여줬다.

“불쾌해 보여?”

“…아니요. 샤워할 때도… 괜찮으셨어요?”

“응.”

빨아주는 거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그저 끊임없는 호평이 다소 변태 같아서 당혹스럽긴 했다. 나도 먹어본 적은 없지만 향만 봐도 맛없을 건 아니까.

“사실 아까 집에 가려고 했어요. 보통 아침에는 정신이 없으셔서 괜찮을 줄 알았거든요.”

혼자 집으로 간다는 생각은 어떻게 나온 건지 궁금하다. 결국 가지 않은 것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하루 정도는 무언가를 같이 할 생각을 해봐. 들어보고 선택할 시간은 줘야지.”

북엇국이라 불리는 푸슬푸슬한 생선 부품과 양파들이 흘러 다니는 누릇한 국은 맛이 괜찮았다. 원래 내가 구경하는 편인데 오늘은 하영진이 나를 유심히 살폈다.

“이거 혹시 네가 만든 거야?”

“…어떻게 아셨어요?”

왜 말을 안 해줘. 이제 와서 맛있다고 하는 것도 떨떠름해서 입에 북엇국을 흘려 넣었다.

“반찬하고 재료만 부탁해서 만들었어요. 입맛에는 맞으세요?”

“응. 그런데 너 요리 하지 마.”

집안일 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안 들어준다면 나도 자주 하는 수가 있다. 하영진이 오해할까 봐 조금 덧붙였다.

“빨래도 사람 와서 가져가는 거 알잖아. 청소도 그렇고.”

“…그럼 저는 그 집에서 뭘 하면 돼요? 집에 계실 때는 몰라도 혼자 있으면 할 게 없어요. 그리고 저도 도움을 드리고 싶고, 갔다 와서 집이 깨끗하면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콩나물은 먹어도 되는 것 같고.

“여기 있는 북어 먹어도 되는 거야?”

“아니요. 드시지 마세요.”

“응. 그게 네가 한 거면 기분이 안 좋아.”

“…….”

“손에 물 묻히는 건 세수할 때면 충분해.”

텔레비전이든 뭐든 사줄 테니까, 고양이도 데리고 내려오라고 했다. 데리고 온다 하면 바로 동거를 꺼낼 생각이다. 이런 관계 말고, 새벽과 아침으로 이어지는 시간까지 함께하고 싶다.

“고양이는… 어려울 것 같아요. 소파 같은 데도 다 긁어놓고, 냄새도 나고요.”

소파 같은 곳을 긁는 시늉이 어제의 서른 명이라는 고백과 겹쳐 보여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제가 재미없어도 자주 웃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재미가 없는데 어떻게 웃어.”

아쉽다고 속삭인 하영진의 입술을 열심히 쳐다봤다. 누가 처먹는 걸로 보이면 끝이라던데 난 처음부터 처먹는 걸로 보였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근데…그, 같이할, 큼.”

내 쪽에만 있던 물을 하영진에게 건넸다. 허겁지겁 한입을 들이켜고 일어나려 하기에 대신 컵을 가져왔다.

“같이할, 시간을 달라 하셨잖아요.”

그랬지. 밥을 떠먹고 북엇국을 들어 마셨다.

“사람이 많은 곳 좋아하세요?”

“어디 가고 싶어?”

“어린이 대공원이요. 벚꽃이 다 폈다고 해서… 보고 싶었거든요.”

이름만 들어도 사람 많게 생겼다. 질려오는 마음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봐주시면 좋을 거예요.”

오늘따라 왜 저렇게 예쁘지. 입술에 묻은 밥풀을 떼어주고 손등으로 발갛게 익은 볼을 쓸어줬다.

사실 드라이브를 기대했다. 차는 두고 가자, 사람이 정말 많다, 주차할 곳도 없을 거다. 끈질긴 만류를 들어주며 이런, 승차감이 엉망인 버스에 올라탔다. 어제 내가 멋지게 입은 건 못 보여줬네. 편하게 아무거나 긁어 입어왔더니 하영진이 앞만 쳐다본다.

“나 안 멋있어?”

“예? 네? 아니요.”

두 번에 걸쳐 쳐다보다니. 너무 좁아서 다리가 다 펴지지도 않고. 무릎에 걸쳐진 하영진의 손이 눈에 띄어서 덥석 잡았다. 앞만 보고 있던 고개가 내게로 돌아왔다.

“혹시라도 정거장을 놓치면 고생하실 거예요.”

“너하고 걸어서 돌아가면 되지.”

“돌아올 때는 택시 타고 와요.”

그러자. 근데 대가리 밭에 와있는 기분을 느낄 줄은 몰랐다. 이럴 거면 정거장을 기필코 놓쳤어야 했다. 이나솔에게서 자꾸 전화가 와서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렸다.

“사람이 정말 많네요.”

“넌 정말 이런 게 좋아?”

돌아갈까요? 물어보는 발 빠른 태도가 기가 막혀서 어깨를 안고 안쪽으로 거닐었다. 입구가 워낙 넓어서 사람이 많아도 괜찮은가보다. 지나치다 본 분수에는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저 물 깨끗한가.

“이렇게 한 바퀴 돌고 집에 가는 거야? 고작 산책하러?”

“보통은 밥도 먹고 영화도 보지 않을까요?”

출발하기 전에 갑자기 돗자리가 필요하다더니. 방금 누가 일어난 건지 커다란 벚나무 밑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꽃이 이렇게 떨어지면 불편했을 만도. 하영진의 눈앞을 지나치던 하나를 잡아 하영진에게 건넸다.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대요.”

이 자리에 앉으면 각종 첫사랑은 다 이룰 수 있겠네. 벌써부터 돗자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벚꽃이 소나기처럼 내린다.

“우린 지금 빗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거야.”

한 손에 소복이 쌓인 꽃이 내 손에 하나하나 들어왔다. 하영진의 손끝이 들어오면 주먹을 쥐고 빠져나갈 때 힘을 풀었다.

“보리쌀 게임 아세요?”

“응. 옛날에 동생이 좋아해서 자주 했어.”

“동생이 있으세요?”

응. 세 살 차이나는 여동생이 있다고 대답해줬다. 적잖이 서운해하던 하영진이 누워있는 내게 조금 더 다가왔다.

“얼굴에 꽃잎이 묻었어요.”

“어차피 치워도 다시 붙어. 내버려 둬.”

입에 들어오는 꽃잎까지 씹어먹는 판인데 붙었으면 다행이지.

“너 자꾸 가까이 오면 여기서 입술 한다.”

“같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을 떠보니 내 입을 막아준 하영진이 맑게 웃고 있었다.

“집에 가서 김밥 싸드려도 돼요? 엄마한테 배웠어요.”

일하지 말라고 아까까지 말하고 왔잖아. 손가락을 하나하나 옭아매서 아무도 못 보게 틈으로 숨겨뒀다.

“이번만 드셔주시면 다신 부탁 안 할게요.”

“나 말고 누가 또 먹어봤어?”

“…없어요.”

머리가 많이 길었네. 처음 봤을 때는 짧았었다. 꽃잎을 하나 가져다 내 볼에 올려준 하영진이 그 주위를 문질렀다. 세상에 우리 둘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전 음식과 비교해보려면 처음 먹이던 사람에게 계속 먹이는 게 좋지 않아?”

“아… 네. 그럴 것 같아요.”

머리 뒤로 꽃잎이 소복이 쌓였을 것이다. 꽃사람.

“이런 곳 데려와서 죄송해요. 저만 좋아하는 곳이라….”

“난 내 방식으로 즐기고 있어.”

싫다고 하면 나를 집으로 데려다 놓기라도 할 건가. 내가 꽃을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어제 있잖아요….”

“응.”

“어제 같은 걸 하면 정말 기분이 좋아지나요?”

“응.”

나 혼자 빼서 그렇지. 원래는 기분이 좋은 거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안 아프고요?”

“아프고 싶어?”

“아니요….”

뭔가 나까지 부끄러운 것 같다. 누구와도 이런 걸 대놓고 얘기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래도 궁금해하는 사람이 하영진이니까 아프지 않게 해줘야겠지. 자신 없다고 해서 지금부터 겁먹게 할 필요는 없다.

“한 번도 안 해봐서… 궁금했어요.”

“또 궁금한 건 없어?”

“지금은, 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모아둔 꽃잎을 흩뜨렸다. 울지 않는 얼굴이 심심해 보인다. 하영진의 마음이 있을 법한 곳을 끊임없이 두들긴 노력이 드디어 결과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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