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부장님.”
일찍 일어난 김에 김한세의 노트북을 뒤지다가 잠시 한눈을 팔았다. 화요일. 하영진이 없는 날이다. 어제도 하고 그제도 했는데 생각날 때마다 하고 싶어서 회사까지 나왔다.
“영진 씨는 본부장님 이름을 모르시던데요.”
“응. 안 알려줬으니까.”
김한세는 서류 가방을 뒤에 던져두고 코트를 벗었다. 꽃샘추위. 402호는 그날보다 더 추워졌을 것이다.
“영진 씨 생일은 챙겨주셨습니까?”
그럴 리가. 김한세는 핸드폰을 들어 조작하고는 옆에 의자를 끌어 벽에 바짝 붙어 앉았다. 저러면 또 그 빌어먹을 한국어 시간이 생각난다. 금방이라도 2분, 3분 초시계를 들고 내 단기 기억력을 시험할 것 같다.
“내일 저녁은 미역국을 드시게 될 겁니다.”
“미역국 싫은데.”
“제가 대신 영진 씨와 저녁을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내일 저녁 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안 가야겠다. 사실 미역국이 무슨 맛인지 기억이 안 난다.
“하영진한테 약을 권해보는 거 어때?”
“…….”
“적당히 하면 기분도 좋거든. 내가 아니라 하영진한테 더 잘 맞을 것 같지 않아?”
십 년 동안 그런 상태였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맞지. 평범한 방법으로 나를 낫게 하지 못한다면 특수한 방법을 써야 하는 것이다. 특수한 방법도 안 된다면 그땐 모두가 말리는 위험한 길을 선택하는 게 맞다. 낫고 싶다면.
“기분이 안 좋으시면 집에 들어가셔서 쉬십시오.”
“기분 좋아. 나쁠 이유가 없지.”
입으로 막상 당했을 땐 익숙하니까 다행이다 싶었는데 시킬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손으로 시켰을 때는 미끄러뜨리고 울고 사과해서 더 비교가 된다.
“건주는 어떻게 처리할 거야?”
김한세가 생각하는 요주의 인물 세 명은 이건주, 진우한, 유형오 이 세 명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건주가 유일하게 형을 살았으니 오히려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우한이랑 형오는 나도 불러줘. 얘기 좀 들어보고 싶어.”
“아시는 건 괜찮지만 나서시면 곤란합니다.”
김한세가 컵에 커피를 따라 내게 한잔을 건넸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를 내려 마시고, 남은 커피를 보온병에 싸서 회사에 온다.
“일찍 일어나는 편이야. 깊이 자지도 못해서 내가 조금만 뒤척여도 일어나고.”
김한세의 매끈한 안경에 김이 서렸다.
“그래서 원인을 제거하면 지금보다 낫지 않을까….”
“제거하는 건 문제가 안 됩니다. 다만 저런 건 계획이 있어야 합니다. 여차했다 들키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글쎄… 알아봐. 뒷감당은 아버지가 하시겠지.”
이 파일의 공백이 모두 채워지면 그때 알 수 있을까. 커피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화요일에 하영진한테 사람 좀 붙여. 뭐 하는지 궁금해.”
“보통은 궁금하면 물어보죠.”
“보통은 그렇겠지.”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사장님도 저한테 아들 잘 지켜보라고 하셨거든요.”
“하영진은 내 아들이 아니잖아.”
차라리 아들인 게 나을지도 몰라. 그럼 극심한 빈부격차에 좌절하는 것도 안 봐도 되고 비데를 이따금씩 힐끔거리는 더러운 것도 안 봐도 되지. 가끔 식기세척기와 하영진이 단둘이 남아 있을 때 울리는 쿵쿵 소리도 안 들어도 됐을 것이다.
“어제 이나솔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라 누군가 했다. 연락이 왔던 것도 같은데… 왔었나?
“거기에 뭘 두고 왔다는데 본부장님이 연락이 안 된다고 하던데요. 물건은 돌려주는 게 맞지 않습니까?”
“지금 이 집은 안 되고 내가 집 빼면 그때 오라고 해.”
아침부터 눈알이 빠지도록 읽어서 뇌에 한글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경비원으로 일한다는 놈 옆에 처리 중으로 나와 있는 걸 보니 조만간 끝이 날 것 같다. 어떠한 기준으로 이렇게 모인 걸까. 나이도 다르고, 친한 사이로 보면 유형오와 진우한이 친하고, 박병희와 한상진이 친하다.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유급한 이건주. 진우한이나 유형오나 둘 다 친구가 많은 타입도 아니라고 했었다.
“그냥 하영진한테 물어볼까.”
김한세가 넣어준 도시락을 까다가 골똘해졌고 소파에서 자세를 바꿔 바닥에 노트북을 두고 화면을 바라봤다. 이건주는 학교에서 유명했던 문제아다. 진우한은 전혀 다른 위치였고. 커다란 안경을 끼고 생글생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댔다. 아무렴. 매달 봉사활동을 가고 어디 회원사에 기부를 얼마나 하고, 나처럼 밥 먹듯이 결근을 하지도 않는 남자다.
쉬는 날인데 웬일로 문자를 다 했지. 그것도 사진을 보내오다니. 사진 문자는 비싸다고 들었다.
[사진]
[전호야. 나 엄마랑 싸웠어. 놀러 가도 돼?]
[지미 사진은 뇌물이야.]
“…….”
[사실 내가 복]
‘복’ 뭐. 더 이상 문자는 없었다. 화요일엔 이런 식으로 사람을 꾀어내서 만나는군.
[죄송합니다. 문자를 잘못 보냈어요.]
문자는 어려워도 전화는 내가 할 수 있다. ‘하영진’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조금 있다가 받을 줄 알았는데 신호음도 가기 전에 받는 게 엄청 놀란 모양이었다.
― 죄….
“뇌물?”
― 친구가, 지미를 좋아해서요.
“나도 뇌물 좋아해.”
유치하게 누가 더 너한테 잘하냐고 물어볼까. 전화로 듣는 하영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재미가 없다.
“우리 집으로 놀러 가면 되잖아. 나도 없고.”
― 아무도… 없어서 조금 그래요.
“그럼 내가 가면 내려올 거야?”
― …원하시면 내려가서 기다릴게요.
“그래. 그럼 내려가서 기다려.”
핸드폰을 넣어두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입가에 흘러넘치는 웃음을 본 김한세가 대뜸 욕부터 하려고 해서 먼저 물었다.
“오늘이 하영진 생일이야?”
“얼굴 좀 가만히 놔두시겠습니까?”
냄새난다는 듯 파닥파닥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손바닥.
“미역국 어디서 가져가면 돼? 나 지금 나갈 건데 갈 때 가져가면 되나?”
“영진 씨 생일은 내일입니다.”
오늘 해주면 안 되나. 큰일 나나. 한국은 뭐가 다른가.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데 하영진이 기다릴까 봐 차 키를 챙겼다.
“내일로 넘어가는 정각에 챙겨주면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
“네. 신경 쓴 시간이니까요.”
정각. 해보자.
미역국은 무슨. 턱턱 막히는 교통상황이었다. 내일이 하영진 생일이니까 나의 시간도 순조롭게 풀리는 게 맞지 않나. 보통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가 이렇게까지 늦어진 적은 처음이었다.
“왜 이렇게 차가 밀리는 거야?”
― 점심시간이라 딱 밀릴 시간입니다.
“알았어. 끊어.”
하영진한테 다시 전화해볼까. 어차피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을 것 같지만, 상단에 있던 번호를 누르고 귓가에 가져갔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왜 안 받지?”
벌써 내려온 거 아니었나. 늦어진다고 조금 더 기다리라고,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말하고 싶었다. 문자는 아직 서투르고… 최대한 빨리 가는 수밖에.
내가 이젠 집 앞에 서서 하영진처럼 갈등했다. 안에 들어가면 하영진이 있을까. 실망하기 싫으니 4층 초인종부터 누르고 와볼까. 지문을 찍고 안으로 들어섰다. 차라리 자고 있어. 올라가서 나쁜 소리도 하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셋까지 센 뒤 문턱을 넘어섰다. 냄새.
“오셨어요?”
오늘은 다시 노란 앞치마를 두른 하영진이 꾸벅 내게 인사를 해왔다.
“점심시간이고, 먹을 게 마땅히 없어서… 제가 국을 끓여봤어요.”
말하는데 왜 눈이 빨개져.
“근데 별로 맛이 없는 것 같아서 버려야 할 것 같아요.”
생일 전날 눈물을 흘릴 일이 엄마와의 싸움인가. 본인의 요리실력이 형편없어서인가.
“알았어. 버리고 새로 하든가 사 먹자.”
더 침울해져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앞치마를 벗기고 숟가락도 딴 데 치워두고 하영진을 안아줬다. 아니면 챙겨주고 싶던 나 때문일까.
“너 생일이 내일이야?”
“어떻게 아셨어요?”
“갖고 싶은 생일 선물 있어? 돈도 괜찮아. 편하게 말해.”
많이 먹이면 살이 붙어야 하는 게 당연한 우주의 섭리라며. 하나도 안 찌고 오히려 빠지는 게 아닌가 싶다. 하영진을 안고 망쳐서 눈물까지 흘리게 한 국을 보러왔다. 된장국이네.
“먹자.”
“아니요.”
“그럼 넌 다른 거 먹어. 난 이거 먹을게.”
어떻게든 먹을 만하게 만들겠다는 건 지금은 어려워 보인다. 이미 차려진 밥상에 된장국을 올려놓고 내 자리에 앉았다.
“드시지 마세요.”
“맛없으면 덜 먹을 테니까 넌 네 거 먹어.”
한입 떠먹으니 생각보다 괜찮아서 도리어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가 언제 이런 거 하라고 했냐고.
“앞으로는 요리하지 마. 그 시간에 다른 거 해.”
이를테면 내 생각 같은 거. 아니면 생산적인 일.
“그렇게 맛이 없으세요?”
그게… 후.
“됐어. 너는 이거 먹지 마.”
나를 위해서 한 거니까 다 내 거야. 두부를 크게 한입 떠먹고 여기저기 거미처럼 늘어져 있는 나물을 우걱우걱 씹어먹었다.
“저 한입만….”
“앙 돼.”
“마지막 간을 못 봤어요.”
“그애도 안 돼.”
동그랑땡, 김, 김치 1, 김치 2, 젓갈, 겉으론 물컹물컹처럼 보여도 식감이 딱딱한 기다랗고 빨간 무언가, 멸치, 어묵볶음. 이걸 남긴다면 가지고 올라갈지도. 내 집에서도 그런 궁상을 떨면 또 부숴버릴 것이다. 근데 이거 생각보다 맛있네. 멸치도 투박해 보이지만 맛있잖아.
“갖고 싶은 게 뭐야. 맘 변하기 전에 지금 말해.”
“저 진짜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지금 주시는 돈도 너무 많고… 매번 감사합니다.”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유독 내 반응을 살피는 그 날, 난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생일은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잖아. 다음 연도에는 내가 없을지도 몰라.”
“…….”
“그래도 나한테 원하는 게 없어?”
월급 인상. 1년도 안 된 사람한테는 함부로 올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하영진의 입에서 나오길 고대하는 문장은 몇 가지 없었다.
“저 딱 한 가지 있어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묵을 씹어먹던 하영진도 젓가락을 내려놓고 망설였다. 월급 인상해주세요. 현금 주세요. 집을 바꿔주세요. 집을 사주세요. 차를 사주세요. 취업을 시켜주세요. 월급 인상해주세요. 현금 주세요. 집을 바꿔주세요. 집을 사주세요. 무엇을 얼마나 바라든 모두 이루어줄 것이다.
“이름을 알려주세요.”
“사줄게.”
“네?”
“…뭘 알려달라고?”
굳은 어깨를 들썩인 하영진이 아까보다 더 머뭇거렸다.
“이름을 알려주시면, 부르지 못하게 하셔도 알고 싶어서요.”
“이름이?”
“네. 아, 어려우시면 그럼, 이거 맛있게 먹는 척해주세요.”
된장국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점점 굽어 들어갔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않는 하영진이 고개를 숙이고 내 눈을 피했다.
“안 알려줄 거야.”
“…….”
“맛있게 먹는 척도 안 할 거야.”
“…네.”
“난 다 먹었으니까 너 먹고 다 버리고 가.”
방으로 들어와서 침대를 걷어찼다. 주고 싶은 게 결코 적지 않아서 내 마음이 모두 부정당한 기분이 든다. 이름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유일하게 무언가를 줄 수 있던 기회를 날리는 저 멍청함. 일전에도 수십 번씩 가르쳐줄 수 있었는데 하필. 깨지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가봤다.
“손이 미끄러져서… 치우고, 갈게요.”
“너 또 울어?”
손은 다치지 않은 것 같다. 조만간 병원에 데려갈 거고 저 붕대 묶인 손도 곧 멀쩡해질 것이다. 하영진이 싱크대 위에 유리 잔해를 올려두고 잠시 등을 보였다. 멀쩡한 손으로 눈물을 무지막지하게 닦아내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 나와. 내가 치울 테니까.”
슬리퍼는 왜 안 신고 있는 거야. 하영진을 안아 올렸다.
“못생겼으니까 울지 마.”
“죄, 송해요….”
딸꾹질까지 골고루 하네. 소파에 앉혀두고 발밑을 샅샅이 봤다. 가뜩이나 검은색 양말이라 다쳤는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양말을 벗기고 바지 밑단을 올려 살갗을 살폈다.
“울어. 참는 게 더 신경 쓰여.”
“우는 거 안 좋아하시잖, 아요.”
“그럼 참아보든가.”
다친 데는 없는 것 같다. 이걸로 건강검진 받으러 가자고 하면 흔쾌히 해줄까.
“집에 가고 싶어요.”
“안 돼.”
“소원 들어준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이걸 안 들어주면 더한 소원을 들을 것 같아서 하영진을 보내줬다. 설거지하다가 깨뜨린 접시를 치우고 곁눈질로 배운 대로 청소기를 가져와서 그 부분을 밀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울고 나가기 전에 울고. 소원은 하나만 들어주면 되니 새벽에는 안 보낼 것이다.
옥상에 닿기 직전에 멈춰 계단 난간에 기댔다. 조금만 기다리면 하영진이 옥상에서 나와 나를 알아봐 줄 것이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왜 안 나오지. 좋아하는 장소에서 그럴 리가 없어. 옥상 문의 손잡이를 열려던 순간 바깥쪽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다… 피웠는데요. 안 올라오시는 줄 알았어요.”
“하나 더 피워.”
“이미… 아니에요. 들어오, 아니 나오실 거예요? 많이 추워요.”
난 어릴 때 러시아에서 살다 와서 이런 추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영진을 따라 나가서 내 자리에 앉았다.
“그… 오늘 제 생일이에요.”
“알아.”
깊이 빨아들이고 뿜어낸 연기가 허무하게 날아간다. 건조한 눈으로 말을 꺼내놓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축하라도 해달라는 건 아닐 테고.
“집을 구할 때까지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손이… 다 나았어요. 이 정도면 일을 다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손이랑 집이랑 무슨 상관인데.”
가뜩이나 추워죽겠는데 또 나가겠다는 건가. 걸핏하면 그만두고 싶다고 하네.
“월급을 받으면, 원하시는 만큼 추가금을 드릴 수 있어요. 아니면 이제까지 받은 돈을 다 돌려드릴게요.”
“…….”
“집 구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아서요.”
담배꽁초를 처리한 하영진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남아있던 연기와 입김이 새카만 어둠에 모두 날아갔다. 젖은 머리카락에도 작은 서리가 맺혀있을 정도로 추운 날에 준비한 말을 곱씹고 있었나.
“넌 내가 해고하기 전까지는 그 집에서 살 수 있어.”
근데 해고도 바라고 그 집에서도 살고 싶다는 거잖아. 그런 억지를 받아줄 사람은 여기 없어.
“내가 왜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해?”
“저 장난으로 건드리시는 거 알아요. 저는… 그런 거 잘 몰라서….”
공손히 모은 손이 꿈틀꿈틀.
“계속 기대하게 돼요. 저도 피해자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고, 받아들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러니까.”
“넌 네 생각밖에 안 해?”
손목을 강하게 주물럭대던 하영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 하라는 대로 할게요. 시키는 건 다 할 테니까 착하게 대하지 말아주세요. 계속 나쁘게만… 끝나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사이에 넌 집을 구해서 나가고. 찬바람에 내 눈에도 저렇게 눈물이 차오를 것 같다. 추위에 데인 귓불에 손을 가져가니 하영진이 몸을 뒤로 뺐다.
“이런 거… 싫어요.”
“하라는 대로, 시키는 건 다 한다며.”
꽃샘 어쩌고는 생각보다 훨씬 지독한 놈이었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바로 하고 하영진의 손목을 잡아 일으켰다. 나쁘게가 어떻게 하는 거야. 매일 욕하고 때리고 짜증 내면 그게 나쁘게인가. 나쁘게는 그 잔상이 나에게도 영향을 끼쳐서 싫어.
“가서 씻자.”
“흑, 으… 네… 저… 집에 갈래요.”
저 집을 빌미로 나를 협박했으면서 아직도 저게 자신의 것으로 보이나.
“저, 집에… 집으로 갈래요. 지미, 흑, 지미가 보고 싶, 흐, 어요.”
걔는 내가 볼 때마다 어디서 자고 있던데. 김한세가 주차장 바닥을 기어 다닐 때도 걔는 차 밑에서 자고 있었다.
“나쁘게 대해달라며. 오늘 너 안 보낼 거야.”
붕대 감긴 손으로 열심히도 눈물을 닦아냈다. 저렇게 눈물을 흘리면 눈물샘도 지겨울 거야. 하영진부터 들여보내고 돌아보는 뺨을 안아 입을 맞췄다. 콧물이 묻어나서 하영진이 급하게 코밑을 문지르고 나를 떼어냈다.
“아, 그… 더러워서. 닦고… 지금 바로 닦고 올게요.”
손가락으로 코밑을 닦아주고 눈가에 입을 비벼 눈물을 닦아줬다.
“난 네가 궁금해.”
“…….”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고 진짜 네 마음대로 결정하고 나한테 통보하면 안 돼.”
“…죄송해요.”
이름 하나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오늘도 두텁게 입은 눈사람을 벗겨냈다.
“다 벗기실 거예요?”
“응. 내가 원하는 대로 하라며.”
여기저기 묻어 있는 흔적들에 악의가 느껴져서 더 보란 듯이 보게 된다. 일부러 상반신에만 묻혀놓은 곳을 쓸어줬다.
“보여드리기… 싫어요.”
“오늘따라 싫다는 말을 많이 하네.”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요.”
“말장난하지 마. 네 몸은 눈 감고서도 그릴 수 있어.”
바닥에 주저앉아서 고무줄 바지를 벗겼다. 검은색 속옷을 내리면 처음 봤을 때부터 만져보고 싶었던 살덩이가 나온다.
“신기하게 여기는 깨끗해.”
“…….”
“나 먹으라고 남겨놨나?”
내 머리카락을 보고 있던 하영진의 눈이 나를 가만 쳐다봤다.
“씻겨줄게. 손이 조금이라도 덜 나았을 때 해줘야겠어.”
평소에 한 손으로 애먹을 때 도와줬으면 저런 식으로 날 쳐다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기대하라고 한 적도 없고, 기대할 만큼 잘해준 적도 없었다. 내가 붕대를 풀어주자 하영진은 손을 안쪽으로 숨기고 내 눈치를 살폈다. 네가 자꾸 그러면 내가 한 번쯤은 아는 척해주고 싶잖아.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줬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
“…오늘만요. 기대한 게 아직 남아서 그래요.”
온도를 조절해 뜨겁기 직전의 물을 뿌려줬다.
“내일은 괜찮아질 거예요.”
식물에게 물을 주듯, 쑥쑥 오늘이 이대로 계속 자라나서 내일이 안 오기를.
* * *
잠을 설쳐본 적이 손에 꼽는다. 오늘이 그 손에 꼽는 날 중의 하나였다.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하영진의 육체를 안고 쏟아내지 못했던 걸 퍼붓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고, 그리고 지금. 아침인 게 분명한 시간에 하영진이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젯밤에 셔츠차림으로 내게 안 하냐고 물어봤던 대담한 모습과 다르게 내 바지를 걸쳐 입고, 밑단은 두어 번 접은 차림새였다.
“괜찮으세요? 어제 너무 추웠나 봐요. 안에서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약을 좀 먹어 보라는 손을 뿌리쳤다. 열이 있다. 병원에 가자. 김한세의 연락처를 좀 알려달라. 핸드폰 잠금 좀 풀어주지 않겠냐. 하나같이 다 듣기 싫은 부탁이다.
“네가… 조금 더 옆에 있으면 나아.”
그리고 또 잠이 들었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 하영진은 없었다. 머리가 아픈 게 누구 때문인지를 모르겠다. 감기 때문이겠지, 하영진이 올려주는 두통은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어. 마른기침을 이렇게 큰 소리로 쏟아내도 안 오는 걸 보니까 진짜 나갔나. 결국 내가 찾으러 올라가야, 갑자기 하영진이 들어와서 나를 다시 눕혔다. 방금 내가 어떻게 일어난 건데….
“이거, 집에서 가져온 감기약인데… 처방받은 지도 얼마 안 됐고,”
“누가 처방받은 건데.”
너는 아니겠지. 하영진은 엄마 거라며 이상한 약이 아니라고 나를 설득했다. 중간중간 빠지는 부분이 많고 해석이 안 돼서 약간의 집중이 필요한 대화였다.
“입을 벌려주세요. 물은… 여기 있어요.”
“물 먹여주면 입을 벌려줄게.”
“네. 제가 컵을 이렇게.”
“아니. 여기로.”
힘들어서 말부터 하고 손을 들어 입술을 가리켰다. 뭐야. 빨개지잖아.
“거짓말쟁이.”
“네? 아니… 제가 먹여드릴게요.”
내가 뭐 죽을병에 걸린 건가. 물이 먼저인가 약이 먼저인가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가. 하영진은 내 눈을 감기고 벌어진 입속에 약을 넣었다. 뜨거워. 쓴 것 같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곧이어 축축한 입술이 내게 닿았다.
“넘어갔어요?”
“응.”
안 넘어갔으면 한 번 더 해줬을까.
“안 넘어갔어. 한 번 더 해줘.”
“…네. 해드릴게요.”
입술에 가볍게 붙었다 떨어졌다. 물 한 방울 없이.
“넘어갔나요?”
“몰라… 한 번 더 해줘.”
“…주무세요. 제가 회사에라도 찾아가서 한세 형 모셔올게요.”
“내 옆에 있으라고, 아무한테도 전화하지 마.”
손을 단단히 품에 안고 잤다. 어릴 때 공항에서 길을 잃었을 때처럼, 화난 얼굴로 나를 찾아다니던 어머니의 손을 다시 찾았을 때처럼 꽤 절실하게.
눈앞에 번번이 비껴가는 건 글자도 무엇도 아니다. 이게 다 흩어지고 나면, 하영진이 누워있는 소파가 나를 찾아왔다. 손끝에 맺혀 떨어진 핏자국까지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절대로 함부로 떨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은 막을 자신이 있었다.
“…하영진.”
또 빠져나갔다. 옆으로 몸을 굴려 침대에서 일어났다. 툭 무겁게 기울어진 흰 수건이 아마 내 이마에서 떨어졌다. 방이라는 걸 두지 말고 벽을 다 터버리든가 했어야지. 아니면 문은 달지 말걸.
“하영진.”
문밖에는 하영진이 누워있었다. 어디 가지도 않고 소파와 테이블 틈에 누워서 왜 저러는 거야. 침대는 일부러 하나밖에 두지 않았는데. 피곤했나.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잠만 잤는데 왜 여기서 자는거야? 테이블을 밀어내고 옆에 쭈그려 앉아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아… 일어나셨어요?”
“내 이름 천재상이야.”
“네?”
“내 이름 천재상이야. 나도 별로 안 좋아하고, 네가 어차피 안 불러줄 것 같아서 안 가르쳐줬어.”
일어나다 멈춘 자세가 불편해 보여서 뒤로 조금 물러났다. 잠결에 몽롱했던 시선은 제대로 앉고 나서 온전히 돌아왔다.
“알려주지 않으셔도… 됐었는데요.”
“생일 축하해.”
하영진을 안고 머리카락을 차분히 쓰다듬었다. 근데 나 너무 쓰러지고 싶다. 오늘이 제발 생일이길. 밤이니까, 아직 날짜가… 아, 그날 이미 지나갔… 아닌가. 며칠이야.
“저요… 저, 죽을 만들었는데 드실래요?”
“죽?”
“네. 약만 드시면 속에도 안 좋고… 그래서 만들어봤는데 아니면 나가서 사올까요? 대로변이라 조금 걸릴 텐데 바로 나가서.”
“집에 죽이 있는데 왜 나가.”
“…드실래요? 제가 만든 건데 맛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아요.”
“알았으니까 가져와. 아니야. 내가 가져올게.”
저 정도로 말하는데 내가 직접 가져와야지. 또 의미 없는 소리 하느라 시간은 시간대로 보내고, 안 먹이려고 애쓰면서 또 안 먹으면 서운해하고. 솔직히 복잡하고 귀찮다. 뒤따라오던 하영진이 나를 보고 뒷걸음질을 쳤다.
“네가 먹여.”
“네?”
“되묻지 말고 내 입에 먹이라고. 네가 만들었다며. 배고프니까 빨리 가져와.”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을 소파에 바짝 붙여놨다.
“너 그리고 어디 갈 때 내가 말하랬는데 왜 말을 안 해? 내가 찾는 게 재미있어?”
“아니, 그… 앗 뜨거.”
“…….”
한심하다. 물소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전혀 들리질 않는다. 다시 돌아가 보니 하영진은 손가락을 쭉쭉 빨며 찬장을 뒤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키가 크네. 입에서 손을 뽑아 차가운 물에 담가줬다. 더럽게 차가워.
“네 침은 데인 것도 낫게 해준대?”
“진짜 살짝이라서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 감기 걸렸으니까 네가 빨아주면 낫겠다.”
심하진 않네. 죽그릇을 식탁에 올려놓으려다가 소파로 가져갔다. 식탁은 안기가 불편하다. 여기저기 만지고 싶어도 피할 구석도 많고. 나무 딱딱해서 기분 나빠. 숟가락을 들고 있던 하영진은 내가 다리 사이를 툭툭 치자 안으로 들어왔다.
“나 너무 뜨거워. 이마 좀 만져봐.”
이마에 조심히 닿는 손등이 빠르게 떨어졌다. 그 약은 가짜였나.
“아까보다는 떨어졌어요. 이따가 한 번 더 먹고 주무세요.”
“고양이한테 가지 마. 나 아프잖아.”
작게 벌린 입을 따라 나도 벌렸다. 아. 따뜻하네. 간도 적당해. 괜찮다.
“아픈 사람 두고 어디 안 가요.”
“고양이는 안 아프잖아.”
“네. 여기 계속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가 아파도 내가 먼저 아팠으니까 가면 안 돼.”
“…네. 아.”
감자죽. 폭신한 식감이 감자. 감자 같은 것보다 사각한 식감이 더 좋아.
“원래 아프면 그래요. 누구 하나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고 평소보다 더 외로운 것 같고, 그렇대요.”
“경험담이야?”
미소를 따라 입술을 덧그렸다. 점점 무표정으로 변해서 손가락 끝으로 끌어 올렸다. 웃어야지.
“아 하셔야 해요.”
“하고 싶다.”
“…….”
테이블에 죽그릇을 올려두고 하영진을 뒤로 눕혔다. 넉넉한 셔츠를 끌어 올려 드러난 몸을 아무렇게나 만졌다. 내 공간이었을 곳이다. 고이는 곳을 입에 머금고 천천히 점령했다. 잡을 곳이 없어서 셔츠를 잡고 있던 하영진의 손이 점점 떨리기에 내 손을 넣어 단단히 안아줬다.
“흐읏.”
“한 번만 할게.”
솟아오른 유두는 붉어서 하영진의 입술처럼 빨아먹고 싶다. 바지 틈으로 내 것을 비비고 맞잡은 손을 풀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무릎 안쪽으로 비비적대다 몇 번이나 홀로 흘려대도 하영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아, 아….”
“여기는 어때?”
“간지러워요.”
허리를 따라 손가락을 천천히 내렸다. 발버둥이 작은 반동을 내게 전해줬다. 바지 버클을 풀어 속옷 사이로 내 것을 집어넣었다. 밑에도 만지고 싶어. 지금 보면 못 참을 것 같다. 정신없이 생각만 하다 하영진의 구멍에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갔다.
“흐아… 잠, 잠깐…!”
아. 아직 안 되지. 반대편 유두에서 떨어져 반응을 살폈다. 왜 안 되더라.
“…저와… 하고 싶으세요?”
“…….”
“섹스하고 싶으세요?”
“응.”
“그럼 지금 하실래요?”
지금?
“하셔도 돼요.”
조곤조곤한 말투와는 다르게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급해서 손목을 안고 입술을 차례로 맞추며 옷을 벗겼다. 모르겠어. 이대로 해야, 하면, 하고 싶어. 고개를 들어 지금 상황을 돌이켜봤다.
“…안 해. 이렇게 하려고 참은 거 아니야.”
“…….”
후. 옷을 입혀줘도 아쉽지 않아. 정체 모를 비이성도 수그러들었다.
“씻고 주무실 거예요?”
“나 냄새나?”
“아니요. 원래 일어나면 바로 씻으시잖아요.”
내가 그렇게 손을 잡아줬는데 옷자락을 끌고 가다니. 입에 치약과 칫솔을 한 번에 넣고 오른손을 위아래로 휘적였다. 씻기 싫다. 내가 하는 모든 짓이 나아지는 지름길 같아서 낫고 싶지 않았다.
“제가 닦아드릴까요?”
“아니. 기다려. 내가 이거 닦고 너 닦아줄게.”
다 나아가니까 내가 씻겨주고 싶다. 어제도 씻겨줬으니까 오늘도 씻겨줘야지. 매일 문밖에서 지켜보던 때는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