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

3.

― 뭐하냐?

“일하고 있어. 나 지금 좀 바쁜데, 나중에.”

― 하영진. 너 목소리가 왜 이래?

“아니. 그냥 조금.”

― 또 우울하냐? 어?

“응… 조금.”

― 너 오늘 밤에 뭐해?

“엄마 와. 이틀 만에.”

― 또 엄마 없다고 혼자 우울 빨았냐? 애새끼도 아니고….

“그러게. 지금 바빠서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주위를 넓게 둘러봤다. 전에 살았던 곳은 맞지만 그땐 이런 커다란 건물들이 있는지도 몰랐다. 이름만 같은 구에 살았나.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나를 혼내고 욕해줬으면 한다.

“영진이 형, 얼굴이 왜 이래?”

점심시간이라 나름대로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문영이는 어제는 정말 미안했다며 오늘따라 더욱 나를 챙겼다. 거의 모든 반찬을 나에게 밀어주다시피 했다. 고맙지만 오늘은 나도 입맛이 없는데 어떡하지.

“빨리 먹어. 안 먹으면 진짜 나 일 안 한다?”

“…억지 부리는 거야?”

“응! 억지 부릴 거야! 내 말 안 들어주면 이거저거 다 해볼 거야!!”

숟가락을 다시 입에 가져갔다. 이따 게워내면 되겠지. 눈물이 올라올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어가면 되는데. 아무렇지 않게 열려버린 뚜껑을 막지 못해서 이렇게 되고 말았다.

― 거기 진짜 이상한 새끼 한둘이 아닌데 오늘은 다행히 안 시켰더라?

“네… 그런가 봐요.”

현상이 아저씨의 걸걸한 목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처음 대타를 뛰는 내가 걱정돼서 했다는 전화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

― 문자로 이렇게 이렇게 보내 달라고, 징그러운 문구를 써주는 놈이 있어. 그놈은 또 한 달에 한 번씩 잊지도 않고 시키는데… 솔직히 그런 놈이 진짜 변태지.

“그런 것까지 해주세요?”

― 뭐 어차피 문자는 보내야 하는 거니까 겸사겸사. 서비스지, 서비스. 음식물쓰레기만 아니면 난 다 괜찮아.

“맞아요. 저도 그래요.”

ᅳ 어떤 놈은 틈만 나면 그… 뭐야. 그거 하여튼 변태 물건을 시켜. 걔는 무슨 일을 하나 싶다니까. 들락거리는 인간들도 하나같이 다 또라이야. 머리 색도 이상하고 매일 달라져. 요즘 애들은 정말 무섭다니까. 내가 못 따라가는 건가? 집도 저번에 한번 들어가봤는데 아휴….

변태 사람에 변태 같은 물건은 대체 뭐지. 반복되는 말에 웃음이 터져서 히죽였더니 현상이 아저씨도 으하하 민망한 웃음을 터뜨리셨다. 난 오늘 그런 사람들 안 만났으니 다행인 거라고 하는데 만났어도 상관없었을 것 같다. 문자는 조금 당혹스럽겠지만 변태 같은 배달이야 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끔 했을 수도 있고.

“근데 범위가 되게 넓네요. 오래 하셔서 그런가 봐요? 문영이보다 넓은 것 같아요.”

― 좀 넓지? 늦게까지 해야 할 것 같으면 말해. 저녁에는 시간 좀 뺄 수 있으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저씨도 문영이처럼 털어놓을 게 많은지 귀에 육두문자가 고였다. 내게 하는 소리라고 기꺼이 들었다. 근데 대체 매직은 왜 챙기라고 하셨던 거지.

― 그래서 그 씨발놈이 집 나오기 전에 대문 좀 쳤다고 그거 가지고… 아, 영진아 어떡하냐? 나 지금 가 봐야 하는데. 마님이 부르신다. 혼자 잘할 수 있지?

“네. 나중에 봬요.”

― 그래. 오늘 수고하고. 운전 조심하고!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해!

“네. 걱정 마세요.”

매번 뻔해서 지루하기만 했던 운전도 할 만하다. 가끔 내가 알던 곳이 나오면 반가웠고, 바뀐 곳이 나오면 기억 속의 건물과 비교해봤다. 역시 일을 하는 편이 나아. 전화를 끊고 나니 전화와 문자가 와 있었다.

“문영아.”

― 형! 통화하다 중간에 전화 오면 뚜뚜 하는 거 신청 안 해놨어?

“그게 뭐야?”

― 그거 통신사에서 해주는 건데! 맨날 내가 할 때만 전화 안 받아. 딴 사람이랑만 통화하고. 나 진짜 서운해.

“아, 미안.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고 그냥 타이밍이 안 좋아서… 왜 전화했어?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 이따 저녁 같이 먹자고.

“미안. 오늘 엄마 돌아오시는 날이라 집에서 먹기로 했어.”

― 아, 그래?

힘 빠진 목소리를 듣고 있기만 하면 안 되는데. 내가 잘못했으니까 사과해야 하는데 입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문영아, 미안해. 내일… 내일 먹자. 내가 오늘은….”

― …형, 뭐야?

“…….”

―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안 그래도 돼. 기분 안 좋으면 티 내도 된다고.

한숨이 들려온다. 아…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 뭘 잘못한 것 같아. 고요한 침묵에 적응하지 못한 심장이 세차게 뛰어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귀를 기울였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게, 간단한 말로 나를 비웃었다. 끝났다. 내가… 내가 끝냈다.

― 나 형이랑 친하잖아. 기분이 안 좋으면 언제든지 말해. 숨기지 말고. 형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서운한지 알아? 내가 형한테 다 털어놓고 솔직하게 대하듯이 형도 그랬으면 좋겠어.

“미안해.”

― …뭐?

“미안해. 앞으로 안 그럴게. 조심하면….”

― 영진이 형. 지금 어디야?

느타리공원. 벤치에 앉아 문영을 기다렸다. 무릎을 움켜잡았다. 나 어제부터 제정신이 아닌가 봐. 제대로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못하는 나를 얼마나 챙겨줬는데. 왜 서운하게 만들었지? 그러지 말걸. 잘 보고 있을걸. 주위에 사람 몇 명 있다고. 그것도 못 챙기면 앞으로는 그 누구와도… 나는 나아지지 못하는 걸까. 끝났어. 이대로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틀렸던 거야. 녹아버리는 것 같다. 발목까지 차오른 물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이 내 현실까지 서슴없이 치고 들어온다. 이걸 일종의 과도기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친 희망인가.

“영진이 형!”

가능하면 오래 함께하고 싶었다. 내 과거를 모르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었고, 늦었지만 아니 늦었더라도, 막상 문영이가 앞에 서니 말이 대중없이 쏟아졌다.

“미안해. 그게 내가 원래….”

“응? 뭘 또 미안하대.”

“내가 원래 사람을 잘 못 사귀는데 그래도 너랑 같이 있어서… 즐거워서, 들떠서 내가 실수했던 것 같아.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아니, 잠깐만. 그만. 그만 말해.”

입술을 꾹꾹 눌러오던 손이 내 볼을 꼬집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남자처럼 내 말버릇이 마음에 안 드는 건가? 고치려고 하면 고칠 수 있을까. 그래도 노력을 해보면 계속 나하고 잘 지내줄까. 눈앞에서 딱딱 엄지와 중지가 부딪쳤다.

“형.”

“…그동안, 고마웠어.”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굴이 왜 그새 상했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냥 어제 잠을 못 잔 게 오래가네… 저기 문영아, 계속 나하고 같이….”

손에 이끌려 벤치에 도로 앉았다. 오면서 사왔다는 생과일주스가 내 손에 쥐어졌다. 시원하다 못해 차가웠다.

“이따가 전화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도 시간을, 조금 더 생각을 해주면….”

“자꾸 못된 소리 할래? 나 형 얼굴 보고 얘기하려고 온 거야. 걱정돼서!”

“…….”

“아까 점심 먹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죽상이야. 왜, 누가 형한테 해코지했어?”

“아니…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내가 생각… 진짜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 미안하단 말 나한텐 자주 안 썼으면 좋겠어. 아냐. 아예 쓰지 마. 형한테는 내가 막대할 수 있는 편한 존재였으면 해.”

흘긋 옆을 봤더니 몸이 나를 향해 열려있었다. 나도 저렇게 앉아야지.

“충분히 편안해. 덕분에 항상 고맙….”

“고맙단 말도 금지. 이제 뭐 받아도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기야.”

“그래도 인사하고 싶….”

“그럼 그 시간에 내 생각이나 해. 메신저를 보내거나 전화하거나. 그러면 나도 좋고 형도 좋잖아. 무리는 하지 말고. 응?”

“응. 고… 아니 그럼… 나 일하다 와서, 돌아가봐야….”

“같이 가. 내 거 친구한테 맡기고 왔어. 나 오늘 약속 있다고 했던 걔 있지? 걔한테 다 맡기고 왔어. 개고생 좀 해보라지.”

그러고 보니 유니폼도 안 입고 있었다. 니트 하나 달랑 입은 문영이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사람들은 문영이가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린다고 했었다.

“친구는 이런 일 해봤어? 그래도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내 생각이나 하라니까 또 남 생각하고 있네.”

“아, 미….”

황급히 입을 다물고 찌릿해진 눈을 피했다. 이러다가 할 말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닐까. 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내 잘못된 주위를 돌려주려 애쓰는 모습이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다.

“또 그 새끼야?”

“안녕하세요.”

3층 계단 위에 서 있는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화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가끔 웃어도 줬었지.

“그 새끼하고 같이 있었냐고.”

“네… 같이 일하는 사람이어서요.”

“너보단 많이 벌겠네.”

“……우리 둘 다 그런 일 하는 사람 아니에요. 계속 그런 소리 하실 거면 그냥 저한테만 해주세요.”

차라리 비꼬는 말투였으면 한 번쯤 대들었을 수도 있다. 진심인지 질문인지 파악하기 힘든 말투와 한 번쯤 더 생각해봐야 하는 번잡스러운 물음이 나를 힘 빠지게 만들었다. 내가 하는 일을 뻔히 알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남자는 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를 노려보는 걸로 추정되는 시선에 주눅이 들 뻔했지만 지금 여기서 물러나면 계속 그런 얘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할 거면 너한테만 하라고? 넌 그런 말이 듣기 좋아?”

“아뇨. 듣기 안 좋아도 다른 사람이 저 때문에 그런 소리 듣는 거 원치 않아요. 피해자분한테 그런 소리 들어야 할 이유도 없….”

“너 나한테 사과 안 해?”

뭐에 대해서? 남자는 오늘은 왜 생수를 내가 배달하지 않았는지 물어왔다.

“…원래 오늘은 휴일인데 제가 다른 구역으로 대타를 뛰고 왔어요.”

“대타?”

“네. 다른 사람 일 대신 해주고 왔어요.”

“바쁘네. 내가 일을 더 시켜야 네가 더 바빠지겠지.”

“……일,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를 향해 올라갔다. 얼마가 됐든 상관없어. 단둘이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해. 지미를 찾아준 고마움도, 담배꽁초를 버린 죗값도 막막하지만 월급이 나오면 조금씩 갚겠다고 말을 하고.

“너. 내 이름은 안 궁금해? 계속 피해자라고 부르려고?”

반 층만 더 오르면 우리 집이다. 난 바닥에 끌리는 시선을 아래층으로 옮겼다.

“우리는 언제까지 옥상에서 마주쳐야 할까요. 전 이제 밖에 쓰레기도 안 버리는데요.”

“…언제까지?”

“저 계속 보실 거 아니지 않나요? …그리고, 제 잘못을 더욱 반성하려면 계속 피해자분이라고 지칭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하영진 너….”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이따 옥상에서 뵐게요.”

남자와 만나는 건 잠깐이면 될 줄 알았다. 얼마나 더 남은 거지. 단순하고 알기 쉬운 사람만 이 세상에 남았으면 좋겠다. 나를 싫어하면 피해 다닐 거고, 나를 좋아하면 나도 좋아할 수 있게 투명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가고 싶다.

“엄마.”

“하영진! 너 왜 이제 와! 너 기다리느라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

“문자 보냈는데 왜… 먼저 먹지. 기다렸어?”

“아니 엄만 이미 먹었지. 나이 먹으면 허기를 못 참아.”

“잘했어….”

뛰어드는 지미를 안고 내 볼과 턱에 길게 부딪치는 털을 마주 비볐다. 귀 뒤에 코를 박고 킁킁 숨을 마셨다.

“너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엄마 없다고 너도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

“아니… 그냥 오늘 일이 많았어서.”

“하긴 벌써 열 시네. 빨리 와서 앉아. 바로 차려줄게.”

엄마는 밥을 퍼주고 맞은편에 앉아 내가 밥 먹는 걸 구경했다. 주스로 속이 든든한데 이 고봉밥을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빨리 무채부터 먹어봐. 맛있게 잘했더라.”

뷔페식이 거기서 거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사는 집안의 문중회는 달라도 다른지 맛이 다르다.

“맛있다.”

“그치? 빨리 갈비도 뜯어.”

밥이 생각보다 술술 잘 들어갔다. 점심때까지만 해도 진짜 쓰러지고 싶었는데 문영이와 화해도 했고, 엄마와도 울지 않고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순조로움.

“먹고 씻고 바로 자. 너 안 되겠다. 얼굴이 반쪽이 되어가지고… 너 진짜 잘 챙겨 먹고 다니는 거 맞아?”

“응. 어차피 내일 쉬는 날이어서 느긋하게 자려고.”

“근데 너 아까 계단에서 전화했어?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던데.”

“…같은 건물에 택배 기다리시던 분이… 뭐 좀 물어봐서.”

설거지를 마치고 수건과 잠옷을 챙겼다. 마지막에 아파트라고 쓰여있어서 방심했는데 빌라여서 문영이와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났다. 재밌었어. 시원한 바람이 나오게끔 드라이기를 조정하고 머리를 말리고 문을 열고 나가자 엄마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세로로 파랗고 하얀 줄무늬가 줄지어 떨어지는 잠옷이 마음에 드나 보다. 이걸 스…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진짜 귀엽네. 엄마도 그거 살까?”

“아니….”

“왜? 마음에 드는데.”

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상의를 죽 당겨서 보는데 시야에 지미가 걸렸다. 내 앞에 발라당 누워 몸단장을 하고 있는 걸 가만 두고 볼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 뱃살에 푸푸를 연거푸 했다. 나를 피하는 지미를 끈질기게 따라가다가 내 머리가 붙들렸고 아래턱도 뒷발로 사정없이 긁혔다.

한 명뿐인 친구 목록이 조금 부끄럽지만 인스타그램을 하는 친구가 전혀 없었다. 문영이의 것인 줄 알고 보고 있었는데 광고였다. 이건 어떻게 안 볼 수 없나… 강제인가? 전호에게 오는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 우울한 하영진, 뭐하냐? 어머니랑 밥은 잘 먹었고? 어때.

“응. 나 지금 인스타 해.”

― 인스타? SNS? 우울해서?

“아니… 친구가 우리 지미 사진 올려주는데 댓글 엄청 많아… 사람들이 우리 지미 다 귀엽고 예쁘대.”

― 하불출 신났네.

“기분 안 좋을 때 이거 반응 보면 되겠다. 아… 어떤 사람이 안 귀엽대. 고양이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 미친.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지 마.

“응. 밑에 댓글로 누가 뭐라고 해줬… 어? 문영이가 해줬네. 그런 거 보기 싫으면 댓글 달지 말라고 하네.”

― 문영이? 걘 또 뭐냐?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주자 자신도 방금 인스타를 깔았다며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해서 불러줬다.

“제이….”

― 시발 또 지미지미냐?

“…응….”

― 숫자는 0303?

“응….”

― 전에는 영진 0303이더니 아주 시발… 간단해서 좋다.

“고마워.”

― 칭찬한 거 아니거든? 아주 신상 털기 딱 좋아. 얘냐? m으로 시작하는 애?

“잘생겼지?”

― 응. 근데 얘는 뭔 얼굴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까냐? 잘생기긴 했네. 실물도 이러냐? 몇 살이라고?

더 이상 안 그래도 되는데 전호는 여전히 꼬치꼬치 물어서 확인한다.

“스물넷. 우리보다 네 살 어려. 성격도 되게 좋고. 나중에 같이 만나면 좋겠다.”

― 나보다 성격 좋아?

“응.”

― 아, 이 새끼 만나면 나 개발리는 거 아니냐?

“응….”

― 이 문영인지 뭔지 있잖아. 조심해.

“갑자기? 넌 너무 걱정이 많아.”

― 그냥 어디 밤섬에 갇힌 애새끼 같으니까 그렇지.

갑자기 다시 잘생겼다기에 지미 얘기를 하나 했더니 문영이의 얘기여서 조금 힘이 빠졌다. 우리 지미도 잘생겼는데.

― 지미 사진 좀 더 보내봐.

메신저를 안 쓰는 전호는 문자의 감성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난 mms 값을 지불하는 지미의 아빠여서 하루에 한 장 이상은 보내지 않는 편이다. 오늘 무슨 날인지 전호는 1부터 100가지의 잔소리를 하며 나를 챙겼다.

― 하불출. 너 정말 조심해야 해. 알았지?

“문영이는… 정말 괜찮은 애야. 너도 좋아할걸? 문영이가 술을 좋아해서 너하고 잘 맞을 거야.”

문영이한테도 한번 물어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둘이 아는 사이가 되면 나야 좋지. 엄마와 전호처럼 좋은 사이가 되어서 가끔 안부를 묻고 어색하지 않다면 좋을 텐데.

옥상으로 나온 내 감상은 ‘좀 춥네’였다. 아니 ‘많이 춥네’. 내려가서 뭐라도 걸쳐 입고 올까 하다가 말았다. 뭘 얼마나 오래 있겠어.

“안 추워?”

“…아뇨….”

“오늘은 죄수복이야?”

분명 매일 라디오로 날씨를 듣지만 이런 얘긴 없었다. 이렇게 밤에 갑자기 추워질 줄은 기상청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그 회사는 원래 자주 틀려서 고3 때 전호의 가방엔 늘 우산이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내 잠옷에서 떠나질 않는 걸 보니 역시 이번엔 내 눈이 정확했다. 그를 지나쳐 실외기로 걸어갔다.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켰더니 따뜻한 체온이 내 등을 감싸왔다.

“왜?”

할 말을 빼앗겨서 그런지 괜히 코가 간지러운 것 같아서 한 번 훔쳤다. 다행히 콧물은 나지 않았다.

“너 추울까 봐 그러는 거 아니야. 네가 추워 보여서 그러는 거지.”

“아… 네. 그럼 내려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니면 저기 바람 덜 부는 곳으로 가 계시면….”

“피워.”

바람이 엄청 불어서 불이 안 붙는다. 화기를 더 올려볼까….

“내가 준 거 있잖아.”

주머니에 넣어놓은 라이터를 꺼내서 켰다. 바로 붙는 불을 보고 새삼 지포의 위엄을 실감하고 있는데 남자가 나를 코트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억지로 몸이 돌아가서 손을 번쩍 올렸다. 코트에 닿을 뻔했어.

“아니, 저기요, 피해자분. 위험하게….”

“버리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엄청 비싼 것 같은데. 남자는 내 눈을 한번 확인하고는 끌어안아 왔다.

“아까우면 네가 입어. 줄 테니까.”

“…….”

“줄까?”

“네. 저 주세요.”

남자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어깨에 턱을 걸치고 오른손을 코트 위로 완전히 빼서 담배를 피웠다.

“어때?”

“혹시 흡연자셨어요?”

“내가 먼저 물었는데. 코트 받아서 어때?”

“아. 네… 좋네요.”

“흡연자였지. 근데 할아버지가 폐암으로 죽어서 끊었어. 그러니까 너도 지금처럼 하루에 한 대만 피워. 더 피우지 말고.”

“…네… 혹시 주위에 담배 피우는 분이 없으세요?”

담배 냄새라도 맡으려고 이러는 건가? 남자가 나를 조금 떼어냈다.

“내가 피우지 않는데 누가 피워.”

“좋은 친구들을 두셨네요.”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숨이 나오려나. 남자도 버릇이 들어 매일 보면 어떡하지? 의외로 남자는 무언가를 참는 표정으로 나를 다시 안아줬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춥지도 않아요. 좋은 코트인가 봐요.”

“그래서 달라고 했어?”

품이 넉넉한 코트가 내 등 뒤로 여며진다. 담배를 다 피우고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꽁초를 들고 있던 손도 최대한 멀리 떨어뜨렸다.

“라이터 드릴까요?”

“아니. 가지고 있어.”

“네… 춥지 않으세요?”

“추워?”

솔직하게 말하기엔 조금… 남자는 나를 벗어내고 내 손을 잡아 뺨에 붙여줬다.

“넌 성격이 별로야.”

“…신랄하시네요.”

그는 콧잔등에 힘을 주더니 코트를 벗어서 나에게 둘러주고 다시금 안아줬다. 왜 지금….

“준다고 했잖아.”

목소리를 가득 채운 웃음, 한 번만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자마자 그의 손에 뒷머리를 잡혀 품으로 파묻혔다.

* * *

이른 아침 털뭉치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내 뺨과 코에 사정없이 박치기를 해대는 지미를 보듬고 눈을 깜빡였다. 행복한 휴일의 시작을 끊어준 고롱고롱 소리가 밤새 내 방을 차지한 케케묵은 침묵을 밀어냈다.

“영진아― 엄마 나간다.”

“어디 가?”

“설거지하러.”

“어제 갔다 왔는데?”

일어나서 방문을 열었다. 엄마는 내가 자는 사이 이미 준비를 다 끝냈는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거기 사람들이 사정 봐줘서 괜찮아. 넌 오늘 집에서 꼼짝 말고 놀고, 쉬어. 게임이라도 하든가.”

“응… 고마워. 나 오늘 전호네 가려고,”

“집에 맛있는 거 많으니까 전호 불러서 밥 같이 먹어. 걔는 남은 음식 같은 건 안 먹으려나?”

“응. 나 혼자만 먹고 전호는 안 줄 거야.”

“욕심은….”

엄마는 씩 웃으며 내 팔을 툭 치더니 바닥이나 보라고 했다. 그새 지미도 외출 준비를 끝마치고 현관 앞에서 기웃대고 있었다. 지미를 안아 오른발로 함께 인사를 해주고 난 밥솥을 열어보러 갔다. 전호가 온다면 분명 모자랄 양이다.

“전호야.”

― 왜.

“엄마 없는데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점심 먹을래? 뷔페 가서 싸 왔는데 갈비찜도 있고 되게 맛있어.”

― 갈비찜? 야, 근데 우리 집에 소고기 있어. 그거 가져간다.

“어? 아니야. 그냥….”

― 제발 주는 대로 좀 먹어라. 응? 언제까지 이런 걸로 싸울래?

“…아냐. 고마워. 천천히 와.”

밥을 안치고 방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와 거실에 주저앉았더니 지미가 쪼르르 달려왔다. 높이 솟은 쥐돌이를 쳐내는 건 언제 봐도 멋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난 어떤 걸로 태어나야 이 모든 것에 적절히 보답할 수 있을까.

전호가 빨리 온 건 좋지만 들고 있는 걸 보니 절로 한숨이 올라온다. 반찬을 한 보따리씩 가져와서 건네는 일은 원래 자주 하던 일이긴 한데, 항상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와도 뱉지 못했었다.

“이렇게 많다는 말은 안 했잖아.”

식탁 위로 턱턱 올려놓던 큰손은 나를 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네가 고맙다는데 어떻게 소고기만 가져오냐? 냉장고 냉동실 다 털어서 가져왔다. 난 어차피 혼자서는 잘 먹지도 않으니까 어머니랑 같이 먹어.”

“…너 이러면 또 맨날 야식 시켜 먹어서 건강도 나빠지고 고혈압….”

“아아아악―! 잔소리! 하영진 또 잔소리하네!”

“잔소리가 아니라….”

전호는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반찬 뚜껑을 열고 내 입에 동그랑땡을 쑤셔 넣었다. 맛있어도 절로 샘솟는 원망을 조절하지 못하겠다. 혼자 사는 자신은 제대로 챙기지도 않으면서. 전호는 내 다리를 톡 찼다.

“넌 이걸 좀 보고, 양심이 있으면 찌워. 난 뭐 너 평생 말라비틀어진 꼴만 보고 살아야 하냐?”

“난 지극히 평균이야.”

“평균? 너 내가 계산해서 1킬로라도 미달이면 한 끼에 밥 세 그릇씩 먹는 거야. 한 달 동안. 콜?”

“…….”

전호의 억지를 무시하고 밥을 펐다. 반찬통에 꾸겨져 있던 새 반찬들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고 전호와 함께 앉았다. 소갈비찜 맛있겠다.

“많이 먹어.”

코웃음을 못들은 척하며 밥을 입에 넣었다.

“졌으니까 두 그릇은 먹어라.”

배가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 거실에 널브러져 세 그릇째 먹는 전호를 올려다봤다.

“전호야, 내가… 내가 아메리카노 사줄까? 문영이는 그거 먹으면 많이 먹어도 좀 내려가는 것 같대.”

“너 커피 못 마시잖아.”

“너만… 난 안 먹을 거야.”

“넉넉한 백수한테 빨대 꽂지. 왜 네 코 묻은 돈을 쓰려고 하냐?”

“넉넉한 건 네 복이잖아. 염치없이 그걸 왜 같이 써.”

“친구끼리 좀 같이 쓰면 어때서.”

“전호야… 빨리 가자. 아니다. 잠깐, 나 좀 씻고.”

준비를 다 하고 나오니 전호가 선물이라며 내 머리에 모자를 푹 씌워줬다.

“친절한 데빌용왕.”

미친놈이라고 웃어젖히는 전호를 두고 나와 발을 맞춰 걷는 지미를 내려다봤다.

“오랜만에 그 남방이랑 외투 보네.”

“응. 밖에 춥지? 어제 나가니까 춥더라.”

전호가 외투의 지퍼를 올려줬다. 바지 빼고는 다 전호가 입던 것들이라 사이즈가 넉넉한 것들이 많다.

“응. 내가 작년에 줬던 목도리 버려.”

“왜? 아직 쓸만한데.”

“이번에 새로 샀는데 색이 마음에 안 들어. 너 가져.”

내가 잔소리를 한다고 하지만 전호가 더 심하다. 운동화를 고쳐 신을 때도 험하게 신지 마라, 매년 운동화만 선물하는 사람의 심경을 이해하라, 등등. 201호 앞을 지나가며 현관에 붙은 전단지를 떼어냈다.

아마 일주일에 서너 번씩 오시는 아주머니가 아니었다면 이 집 상태가 이렇게 좋진 않았을 것이다. 혼자 사는 집에 방이 세 개나 있는 전호의 집은 말 그대로 투박하다. 그 어디에도 집을 꾸미고자 하는 노력은 엿보이지 않았다. 목욕탕처럼 화장실 옆 바닥에 있는 체중계가 눈에 띈다.

“다이어트는 잘 되어가?”

“…조용히 해.”

“나 오늘 늦게까지 못 있어. 세탁소 가야 해서.”

“세탁소는 왜. 저거 다 바로 입어도 돼.”

알지. 문 앞에서부터 섬유유연제 향기를 가득 마셔서 모를 수가 없었다.

“근데 너 어제 아침에 뭐였냐?”

“어? 아… 별일 아니었어. 비도 오고, 알잖아.”

“뭔 일 생기면 혼자 알아서 할 생각 말고 전화를 해. 새끼, 섭섭하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안아줬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까.

“미안. 어떻게든, 잘 지나갔어. 아침 되니까 괜찮더라.”

전호의 집에서 돌아오자마자 방에서 쇼핑백을 꺼내 들고 집을 나섰다. 내려오는 길에 다른 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세탁소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서 얼른 움직여야 한다. 해가 지니까 어제만큼 추워진다. 편의점과 카센터, 교회를 차례차례 지나 오른쪽으로 틀었다. 세탁소 입구 옆에는 작은 호스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드라이클리닝, 코트, 드라이클리닝, 코트.

“코트, 드라이클리닝 맡기려고요.”

“급한 거여?”

“아니요. 언제쯤 가지러 오면 될까요?”

아저씨는 말없이 내일모레가 적힌 종이쪽지를 건네주고 작업하던 옷을 붙잡았다. 주머니에 넣고 가격을 물으려다 밖으로 나왔다. 쇼핑백 하나만 덜렁 들고 걷다가 근처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해서 신발의 앞코를 손끝으로 털고 가던 길을 서둘렀다. 씻고, 자야… 못 자는구나. 버튼을 누르고 위에서부터 주르륵 선을 그었다. 2580이 순서대로 눌리며 문이 열린다. 여기도 실내라고 추위로 굳었던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내가 걸치고 있던 외투도 일반 패딩이 아니라 따듯한 롱패딩이었다. 연노란 목도리까지 두툼하니 따듯한 게 둘 다 가격이 적잖이 나가는 게 분명하다. 옷이 자주 질린다는 배전호는….

“너 뭐야? 검은 눈사람이야?”

“…안녕하세요.”

201호 앞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침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고 있어서 그런지 남자가 거인처럼 커다래 보였다.

“어디 갔다 와?”

“친구네요.”

“친구?”

“네. 고등학교 때 친구. 죄송하지만 이름은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

“올라가 봐도 될까요?”

“오늘 휴일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밟았다. 옆으로 피해 가려는데 남자가 내 허리를 감싼 채 몸을 돌렸다.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건가? 날 데리고 들어가려고? 무조건 빠져나가야 하는데 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가만히 있어.”

문을 연 남자는 내게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으라 했다.

“왜 안 들어와? 뱀파이어야?”

“네?”

“우리 집으로 초대할게. 들어와.”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잡히겠지. 저번 날 남자처럼 신발장부터 훑어보고 슬리퍼를 신었다. 남색, 푹신푹신해. 내 새까만 양말이 꿈틀거리는 게 보인다. 흰색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거 다 네 거 아니지?”

내 후드를 잡아당기던 그가 덧붙일 말은 없는지 기다렸다. 이 정도면 적선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뭐지? 왜… 진짜 단순하게 물어보는 건가?

“…네… 친구한테 선물 받았어요.”

“네 친구는 적선이라고 생각 안 할 것 같아?”

손목이 잡혀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모자 위로 후드를 뒤집어 씌워준 그가 앞으로 딴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하영진. 집중해. 집구경 시켜줄 거야.”

“…네.”

“이따 숙제 낼 거니까 다 기억해야 해.”

2층은 201호 하나뿐이니까 우리 집을 두 개 합친 크기일까 막연히 생각해보긴 했지만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다. 같은 빌라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구조가 전혀 달랐다. 창문들이나 문도 새로 한 것 같고, 그동안 공사하는 것도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됐지?

새까맣고 값비싸 보이는 가구들과 그에 반한 새하얀 벽지가 보였다. 가구 색상의 통일감이 집 안의 분위기를 좌우한다고 전에 아침 방송에서 그랬는데. 이래서 사람들이 맞춰 사는 거구나. 함부로 집을 둘러보고 있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나를 불러들였다. 어정쩡하게 다가가서 집에 대한 짧은 칭찬이라도 하려는데 그의 긴 팔이 다가와 순식간에 모자와 목도리를 벗긴 뒤 패딩에 손을 가져갔다. 급하게 붙잡은 손이 부드럽게 내 손을 밀쳐내고 지퍼를 내렸다. 분명 옷을 입었는데 왜,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눈으로 벽을 타고 다녔다.

“너희 집하고 비교하지 마.”

“네? 아, 네. 죄송합니다.”

남자는 내 패딩을 바닥에 그대로 두고 다른 방도 구경할 거냐면서 나를 데려갔다. 닫혀있던 방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느 인기 연예인의 옷방 같았다. 여기가 안방인가? 방을 둘러 설치된 장롱에는 정장 재킷과 셔츠, 카디건, 바지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저걸 평생 다 입을 수나 있는 건가. 옆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중간에 놓인 낮은 서랍으로 나를 이끌었다.

“시계가… 엄청 많네요.”

“응. 이것도 가질래?”

“아니요. 괜찮아요.”

시계 차는 거 본 적 없는데.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쯤 되면 충분하다고 여긴 건지 다른 방으로 나를 데려갔다. 침실은 침대만 덩그러니 있어서 더 볼 것도 없었다. 협탁 하나 침대 하나. 엄마 방과 비슷한 크기지만 그래서 그런지 훨씬 넓어 보인다. 전호의 집도 아무것도 없지만 이 집은 잔뜩 꾸며놓아도 사람 냄새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닫혀있는 마지막 방은 창고쯤인 것 같았다. 가구가 이렇게 없으면 춥지 않을까. 보일러를 매일… 대단하다. 우리 집은 전기장판이 최고의 사치이다 보니 끊임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다 둘러봤어?”

“네. 집이 참 피해자분하고 잘 어울리네요.”

“…분명 나쁘지 않았는데 갈수록 듣기 싫어.”

“네?”

“아니야. 그럼 이거나 먹어.”

남자는 내 손목을 쥔 손을 내려 잡고 식탁 앞으로 이끌었다. 식탁마저 검은빛 일색이다. 오늘 뭐 잘못 먹었나. 상한 거 먹었나. 식탁에 앉아 얼떨결에 남자가 건네는 빵을 입에 물었다. 안 상했는데. 맛있어. 갓 구운 것처럼 속도 촉촉하고 식감도 퍽퍽하지 않아서 우유가 없어도 잘 넘어갔다.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거기 우유도 먹어.”

잠깐의 시선에도 혐오감이 느껴진다. 내가 여길 둘러볼수록 싫어하는 것도, 미안하지만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집요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남은 빵을 입에 욱여넣고 우유도 비웠다. 안타까운 건 정확히 언제부터 화가 난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저… 이거 치우고… 이만 가도 될까요?”

“집에 가서 할 거 있어?”

“엄마 오기 전에 집 좀 치워두고 고양이랑 놀아주고… 그러려고요. 이미, 많이 늦었고….”

“그때 너희 엄마 어디 있었어? 나랑 너 잤을 때.”

“…그때 잠깐 출장 가셨어요.”

“출장? 넌 엄마도 일 시켜?”

“…….”

“뭐야? 왜 말이 없어?”

괜히 내 처지를 말하면 또 거지 같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빈 그릇과 컵을 가지고 싱크대로 갔더니 설거지가 한두 개가 아니다. 나 말고 다른 손님이 더 있었나 보다.

“하는 김에 그것도 다 해도 돼.”

“…네….”

퐁퐁으로 접시 모서리를 빙빙 돌려가며 닦고 있는데 남자가 내 턱을 잡아 자신 쪽으로 돌렸다.

“물이 따듯해서 좋네요.”

“한겨울에 찬물로 샤워하는 게 신선하더라.”

“아….”

“넌 돈이 없어서 찬물로 씻는 거야?”

“…….”

“왜 말이 없어?”

“아니요. 저 설거지하고 가려는데 놔주시면 안 될까요?”

생각보다 쉽게 놓아줘서 설거지를 급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바지에 물을 닦고 나가려던 차에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가 다가왔다. 여긴 저 사람의 집이고 난 손님, 아니 그저 설거지를 잠깐 도와준, 잠깐의 동정심이 들어 먹여줘 본, 그런 사람일 뿐이다. 그가 나를 집에 안 보내줄 이유가 없다.

“어디 가려고?”

“아까 집으로, 간다고….”

“집. 너희 집 춥잖아.”

“…그렇죠.”

보일러를 때지 않으니 춥긴 한데… 전기장판을 틀면 되는 일이다. 내 방은 그래도 햇빛이 들어와서 덜 추운 편이다.

“물도 차갑고,”

“…평소에는 그렇죠….”

“그럼 조금 더 있다가 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집이 더… 고양이도 있고.”

그보다 너무 가까운 것이 신경 쓰여서 거리를 좀 두고 싶다. 언제 이렇게… 남자가 팔을 잡아당겼다.

“궁상떨어도 좋으니까 여기서 떨어.”

“아니 저기….”

“고양이고 뭐고 혼자 둬도 안 죽잖아.”

“그게 아니라 제가 좀….”

“좀 뭐?”

불편해.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얼버무렸지만 남자가 나를 다시 안아왔다.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안아오는데 떼어내기도 지쳐서 가만있었다. 차라리 차가운 게 더 편할 것 같다. 가볍게 던지는 질문도 대답하기 힘든 것 일색이다.

“하영진.”

“네.”

“하영진.”

“네….”

“하영진.”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 해주실래요?”

“응.”

“왜 자꾸 부르시는 거예요?”

“이름?”

“네.”

웃는 건가? 귓가에 닿는 소리가 생소해서 궁금증을 못 이기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평소와는 달리 부드럽게 풀린 눈이,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보기 좋았다. 맞닿은 시선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웃는 게 되게 보기 좋으셔서요. 자주 웃으시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어요.”

“넌 웃지 마. 이제 별로야.”

평범하다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안아준다. 가끔 이것저것 챙겨주면서도 나를 괴롭히고, 눈만 마주쳐도 눈살을 찌푸렸다.

“답 안 할 거야. 네 이름 부르는 이유.”

내 턱밑으로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대신 다른 거 궁금하면 말해줄게.”

“다른 거요?”

“응.”

내 착각일지 몰라도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 내 허리를 감은 팔도 뭔가 아까보다 힘이 더 생기는….

“죄송한데, 지금 이 자세가 많이 불편해서요.”

“내 집에서 설거지했잖아. 상 줄게.”

“아뇨, 아니 괜찮아요. 아무것도 안 해주셔도 되….”

남자는 그렇게 닿은 채로 가만있었다. 감긴 눈을 살짝 뜨고 고개를 뒤로 빼서 거리를 벌렸다. 한 번도 이상하지만 두 번은 더 이상해. 맞물린 입술 안쪽의 촉감이 뭉실뭉실거려서 기분이 안 좋았다. 빵가루라도 묻은 건 아닌지도 신경 쓰였다.

“아니 저기… 피해자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너 진짜 뭐야?”

“예?”

뒤로 한껏 접혀있던 내 상체가 곧게 펴지고 그의 입술이 내 귓가에 닿을 정도로 안겼다. 숨소리가 불규칙적이고 뒷머리를 안은 손도 정신없이 움직인다.

“괜찮으세요?”

“아니. 기분 나빠.”

“떨어질까요?”

“아니.”

난 그의 등 뒤로 손을 올리고 토닥이듯 움직였다.

잠에 취한 지미가 내 방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난 집들이를 시켜주듯 지미를 안고 방마다 둘러봤다. 정말 같은 건물 맞나. 군데군데 곰팡이가 숨어서 피어 있어 빈말로도 멀쩡하다고는 못할 집이다.

“그 사람은 대체 뭘까?”

입술에 닿았던 촉감이 아직도 뚜렷했다. 거부감이 별로 없었던 것도. 하루 같이 잤다고 나도 경계심이 풀린 걸까.

남은 휴일이 가기 전에 청소를 하고, 남은 밥을 확인하니 시간이 벌써 여덟 시다. 빨래 바구니 안의 내용물을 세탁기에 탈탈 쏟아붓고 물의 높이를 정했다. 물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가루세제가 섞이는 것까지 확인한 뒤 뚜껑을 닫았다.

* * *

“아니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직원을 두고 뭔 업계 1위라고 광고를 해?”

“죄송합니다.”

“내가 한 시까지 갖다 달라고 했잖아. 어? 이럴 거면 요청사항은 왜 쓰라고 난리야?!”

“아까 제가 전화를 드렸다시피….”

“전화? 아 그건 그냥 통보지, 이 사람아! 나보고 너 바쁘니까 닥치고 기다리라는 거 아니야!”

내게 집어 던지는 택배를 엉겁결에 받았다. 반품한다는 소리에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하니 별안간 화를 버럭 낸다. 그러고는 택배를 들고 들어가 버렸다.

“아니 그래서 그걸 그냥 뒀어? 그런 새끼는 진짜 신고를 해야 한다니까?”

“괜찮아.”

“형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이런 각박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래.”

“고마워….”

“칭찬하는 거 아니거든? 그리고 고맙다는 말 금지라니까.”

화를 내다 말고 웃음을 터뜨리는 문영이를 따라 웃었다. 그치만 그 사람이 도로 들고 들어간 게 웃겼단 말이야.

“대신 욕 해줘서… 난 원래 그런 거 말 잘 못 하거든.”

“기다려 봐. 곧이니까.”

“응?”

“됐어. 기다려.”

“응.”

오늘 저녁 약속이 있다는 문영이가 왜 나를 태워다 주는지 잘 모르겠지만, 거부하면 거부하는 대로 표정이 쀼루퉁해지기 때문에 웬만한 건 들어주는 게 편하다.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내 목도리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차갑네.”

“그래? 싫어?”

고개를 저었다. 짜릿짜릿해.

“이따 전화할 테니까 받아. 다른 사람하고 전화하지 말고, 알았지?”

“응.”

버스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다 세탁소로 향했다. 며칠 만에 만난 코트는 당시에도 그랬지만 기분 탓인지 지금이 더 깨끗한 것 같다. 자글자글한 세탁소 특유의 비닐을 만지작거리며 현관을 거치다 발을 세웠다. 물. 깜빡할 뻔했다.

다 옮긴 다음 숨을 충분히 고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걸어둔 코트를 잡아 들고 용기를 내자고 세 번 되풀이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지금 주는 게 맞나? 아님 이따 새벽에 줄까? 가장 깔끔할 때 주고 싶다는 마음이 이겨 201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물을 기다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것도 같이 말하자. 문이 열렸다.

“누구세요?”

“…아, 이거 피해… 아니 그, 드리려고요.”

“이걸 왜 그쪽이 가지고 있어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의심쩍게 나를 보던 사람은 큰 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풀풀 풍기는 익숙한 향수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오빠라는 친근한 부름에 남자가 나오더니 나를 보고 인상을 구겼다. 머리가 축축해 보이는 걸 보니 방금 씻은 것 같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물도 다 옮겼고 코트도 주고 왔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왜 한겨울에 바지만….

“하영진.”

3층에 닿아서 방심했던 것 같다. 최대한 천천히 뒤돌아 남자를 봤다. 껄끄러워. 어떡하지.

“…안녕하세요.”

“너 이거 뭐야?”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은 내가 여자에게 건넨 코트였다.

“전에 저한테 주신 거 깨끗하게 냄새 안 나게 빨아, 아니 제가 한 게 아니라 세탁소에서….”

“버려.”

“예? …왜요?”

“네가 안 입을 거면 버리라고.”

“…….”

“나더러 이걸 입으라는 거야?”

세탁소에 맡겼다고 말했는데 못 믿는 걸까. 남자는 내 쪽으로 코트를 집어 던졌다. 비닐째로 떨어진 그것을 피해 한 발짝 올라섰다.

“버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

“이따… 아니 한 시에 알아서 담배 피우고 내려갈 테니까 올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진짜 그럴 일 정말 없을 거예요.”

“하영진.”

“물도 다 옮겨놓았으니까… 그럼, 안녕히 계세요.”

옷을 주워 안고 빠르게 인사한 뒤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안 오겠지. 주위조차 살피지 않고 옥상 문을 열었다. 아까 말하는 김에 그 약속을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여전히 내 앞엔 남자가 있었다. 남들 다 평범하게 지나는 하루인데 나는 왜 쉽게 끝나는 법이 없나.

“너 아까 코트. 진짜 버렸어?”

“네.”

센서 등마저 꺼져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어깨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남자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이 이렇게 없으면 보통은 그러니까.

“버리라고 하셔서 버렸는데 가져올까요? 아직 폐의류 함에 있을 텐데요.”

“가져와.”

1층에 다다라서 건물 옆에 있던 폐의류 함에 손을 집어넣었다. 거의 다 차 있어서 코트를 잡아 뽑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개중에서도 제일 부드러웠던 재질이다. 다 구겨진 코트를 꺼내 보고 조금 씁쓸해졌다. 분명 제대로 깨끗했던 것이었는데. 색깔도 남자하고 엄청 잘 어울렸을 거고. 낮에 한번 보고 싶었다.

내 옆으로 뻗어온 손보다 더욱 놀라운 건 남자의 옷을 대하는 방법이었다. 굳이 버린 걸 다시 꺼내 오라는 것도 지금 저렇게 다시 집어 던지는 것도 그 무엇 하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너야말로 지금 뭐하는 거야?”

“버리라고 하셔서 버린 것뿐인데요.”

남자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깊은 화를 삭이는 듯 눈이 감긴다. 원래 이렇게 참는 사람이 아니었어.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이건 맞았다.

“말대꾸하지 마.”

“…….”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사람 자꾸 자극하지 말라고.”

일그러진 얼굴을 살펴보다 고개를 숙였다. 문영이였으면 어떻게 했을까. 전호였다면, 이렇게 서로가 답답하진 않았을 텐데.

* * *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놈 또 그놈이지? 이번에도… 어휴.”

“문영이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관리자는 내 어깨를 위로하듯 어깨를 도닥였다. 요 며칠 남자의 심기가 사납다. 3일 내내 두 배에 가까운 분량으로 배달을 시켰다. 가뜩이나 근래 퇴사자가 급증해 담당 구역이 넓어졌기 때문에 물량을 견디기가 어려운데…. 팔,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아서 오늘은 엄마에게 파스까지 받아서 붙였다. 평소처럼 미안하다고 사과했으면 됐으려나. 그렇게 옷과 남자를 두고 올라오지 말아야 했을까. 매일 새벽 남자와 함께하던 시간은 다시 나 혼자만의 것이 되었다. 또 다른 끝이 보인다. 전호에게 말하지 않기를 잘한 것 같다.

“지미… 아빠 힘들어…….”

피곤함에 취해서 널브러져 있는 내게 엄마가 물을 떠다 줬다.

“고마워. 엄마.”

“고생했어. 팔 어떡하니.”

“괜찮아. 좀만 누워있으면 돼….”

엄마는 내 팔을 주물럭대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퇴근하고 나서 옮기는 게 가장 나았다. 그때가 가장 널널해서 쉬면서 할 수도 있었고, 집이 가까워서 그런지 동기부여도 잘된다. 고개를 들고 보리차를 마셨다. 지미 안고 뒹굴뒹굴 하고 싶다. 발매트에 앉아 있는 지미에게 간절히 손짓했다.

“어젠 10시였는데 오늘은 11시야.”

“응… 요즘 퇴사자가 많아서 일이 많아졌거든.”

그래서 오늘은 문영이 얼굴도 못 봤어. 엄마는 나 대신 보일러를 켜주고 잠옷과 수건을 챙겨 욕실 앞에 갖다줬다. 나는 욕실까지 굴러가서 지미를 끌어안았다.

“너 진짜 일 힘들면 그만둬. 괜히 몸 상하게 하지 말고.”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겨우 반년도 안 됐어.”

엄마의 작은 한숨 소리를 듣고 나도 몰래 따라 쉬었다.

새벽 한 시. 담배를 피우고 내려가는 길이었다. 일주일 만인가. 5층에서 남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하나 안 옮겼던데?”

그랬나. 1층으로 내려가면서 진짜 내가 집에 그렇게 가고 싶었나를 돌이켜봤다. 매일 홀수로 시켜서 그럴 수도 있겠네…. 남자는 굳이 1층까지 내려와서 내가 옮기는 걸 감시했다. 들자마자 몸이 휘청거렸다. 깜짝 놀랐네. 이러다가 다치면 병원비는 어떡하려고.

“너 뭐해?”

“아… 죄송합니다. 발을 삐끗해서요. 다 옮겼으니까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남자가 내 팔을 잡았다. 평소 세게 잡는 것과는 다르게 걸치듯이 잡는다.

“하영진.”

“네.”

“영진아.”

“네.”

“우리 집에 들렀다가 가.”

“아니요.”

남자가 내 어깨를 벽으로 밀쳤다. 이것도 몇 번 해봤다고 용케 중심을 잃지 않았다.

“내 말 안 듣겠다고?”

“…그게 아니라,”

“설거지가 많아. …와서 설거지해. 물도 따뜻해.”

내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줄 아는 건가.

“저번엔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번만 와서 해줘.”

설거지가 대체 얼마나 쌓였길래.

“그럼 설거지만 하고 갈게요.”

내 검은 발을 숨겨줄 슬리퍼를 꼼꼼히 신었다.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보니 접시가 한두 개가 아니다. 패딩을 벗어 식탁 의자 위에 올려놓고 소매를 걷었다. 뜨거운 물을 틀어 접시들을 일차로 헹구고 한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너 그거 택배. 그거 하면 얼마나 받아?”

남자는 식탁 의자를 하나 빼고 앉아 한쪽 턱을 괴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월급은 대외비라….”

“보통 5백은 받아?”

5백이 보통인가? 그건 아니어서 고개를 흔드니 희망의 급여가 두 배로 불었다.

“그렇게 많이는 안 받아요.”

수세미에 퐁퐁을 묻혀서 문질러봐도 물에 불려놓지를 않아서 잘 닦이지를 않는다. 밥도 아니고, 아… 그릇이 원래 이렇게 우둘투둘하게 나온 건가. 남자는 오늘따라 말이 많았다.

“12시간은 하지?”

“보통은….”

“근데 5백만 원도 못 받는다고?”

“네.”

“요즘 몇 시에 퇴근하는데?”

“…매일 다릅니다. 어제는 열 시쯤, 오늘은 열한 시쯤…?”

말끝마다 멈춘 손을 빨리했다. 어서 이 집에서 나가야 해. 잠시 동안 조용했던 뒤편에서 무언가를 톡톡 치는 소리가 났다. 나를 부르는 건가?

“안아도 돼?”

“네? 아니… 아니요. 안 되는데요.”

미끌미끌한 그릇을 제대로 손에 잡았다. 뒤돌아보려는 마음을 접고 수세미를 더 빨리 문질렀다.

“왜 안 되는데? 이제까지는 쉽게 안겨주더니 왜 비싸게 굴어?”

그러게. 그때나 제대로 거절할 걸 그랬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게 정상적으로 들리는 건 아니다.

“짜증 나.”

“…….”

“나 안고 싶은데. 왜 못하게 해?”

지금 나한테 투정을 부리는 건가? 그럴 리가. 안을 사람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왜 저러지. 이 집에 고무장갑 같은 건 없나.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치웠을 수도.

“하영진 너, 기분 나쁘다고.”

“알아요. 금방 다 하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들어가 계세요.”

혹시 내가 뭘 훔쳐 갈까 감시하는 건가. 그렇게 비싸 보이지는 않는데, 비싼 건가. 깨끗이 헹군 접시들을 건조대 위로 올렸다.

“아무것도 안 가져갈 거라서, 끝나고 집에 바로 갈 거예요.”

“네가 여기서 뭘 훔쳐 가도 난 다 알아.”

물 묻은 손을 아무렇게나 닦아내고 패딩을 집었다. 역시나 나를 가로막는 남자를 보며 내 조급함의 이유를 되새겼다.

“내일부터 나도 올라갈 거야.”

“…옥상에요?”

“그래.”

“그렇게 하세요.”

옥상은 이 건물 주민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공용 공간이다. 현관문을 열고 우리 집, 402호로 올라갔다. 문득 생소함에 위아래 계단을 한 번씩 봤지만 홀로 남은 내 발소리만 들려왔다.

* * *

문영이의 휴일에 맞춰 품앗이를 해주겠다고 보조석을 차지했다. 쉬는 날에 왜 자신을 도와주냐는 투덜거림이 전호와는 달리 귀엽다.

“너도 내가 그랬는데 끝까지 내 말 안 들어줬잖아.”

“그건 형이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그러지.”

“그래도… 나도 도와주고 싶어.”

괜히 왔나. 평소와는 사뭇 다른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렇게 동행하는 건 처음이다. 고민할 동안 시동이 켜졌고 안전벨트가 매어졌다.

“그, 문영아. 많이 불편하면 나 내릴까?”

“뭐?”

“아니… 너한테 말도 없이 와서 괜히 방해만 하는 게 아닌가… 해서.”

“그런 거 아니야. 하나도 안 불편해. 편하기만 해. 혼자 일하다 버릇해서, 어쨌든 아니야. 오해하지 마.”

“그럼 나 오늘 계속 여기 있어도 돼?”

“물론이지!!”

잠시 신호가 멈춘 틈을 타서 문영이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 어제 인스타 봤어. 댓글도 다 보고. 사진 되게 잘 나왔더라.”

“형, 내 사진도 봐?”

“응. 나 되게 자주 봐. 재밌어. 사람들이 좋아요 누르는 속도가 되게 빠르더라. 잠깐 사이에 하트가 200개가 됐어.”

문영이가 나를 흘긋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

“네가 올려놓은 거 아니야? 왜 부끄러워해?”

“이 와중에 맞는 말 하지 마.”

“지미 사진에 안 좋은 댓글 달리면 네가 뭐라고 하니까 이제 다른 사람들도 뭐라고 하는 것 같아. 되게 고….”

“…….”

“그 사람들한테 고맙더라고.”

신호가 정지된 틈을 타 내 머리카락이 양손으로 헤집어졌다. 그 손은 내 귓가를 스치고 내려왔고 뺨을 삭삭 쓰다듬어왔다. 비슷한 시기에 만난 사람임에도 이렇게나 다르다.

높이 있는 사람이 보기 편하도록 조금 떨어져서 손을 휘저었다.

“잘 가고. 운전 조심하고.”

“응. 연락할… 잠깐만.”

시동이 켜진 차에서 내려 내 팔을 움켜잡은 문영이가 나를 이끌었다. 주차장에 있는 센서 등이 가까운 것부터 차례로 하나둘셋 켜지고 우린 빛을 등진 외벽의 뒤로 숨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갑자기 왜 그래?”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온 손가락이 따뜻해서 나도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됐다. 나 갈 거야. 형도 나 없다고 울지 마.”

문영이는 이미 지퍼가 채워져 있던 패딩의 똑딱단추를 맞춰주고는 바람에 떠밀린 내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

“오늘 고마워.”

“아니야. 잘 가. 문영아.”

“그래도 앞으론 휴일에 쉬어. 나 도와주지 말고. 알았지?”

아, 음. 물어보려다가 알았다고 대답했다. 무슨 이유가 있겠지. 도움이 안 됐던 건가.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문영이가 가고 난 우체통을 뒤적였다. 엄마의 이름이 담긴 카드청구서가 한 장, 수도 요금…. 비밀번호를 누르고 얼마나 나왔나 펼쳐보다가 2층과 1층을 연결하는 층계참에 서 있던 남자와 마주쳤다.

“인사 해봐. 목소리 괜찮은가 보게.”

“…안, 녕하세요.”

“그래. 근데 쟤는 되고 나는 왜 안 된다는 거야?”

변함없이 무표정하고 아름다운 얼굴과 또박또박, 쉽게 뭉개지지 않는 발음. 그날로부터 꼬박 일주일 만이다. 제일 먼저 드는 헛된 의문은 나와 문영이를 어떻게 봤느냐는 거였다.

“제 몸이에요.”

“그래서.”

“제 몸이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 저 새끼 앞에서는 네 그 대단한 폐소공포증도 안 나와?”

“대체 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싫으면 안 보시면 되는 건데.”

“하영진.”

“네.”

“따라 들어와.”

1층까지 내려와서는 내 손목을 잡아 끌어간다. 비밀번호를 칠 때 위층으로 피신을… 아, 열려있네. 문 안쪽으로 물건처럼 던져져서 그의 등 뒤로 닫히는 문을 지켜봤다. 문영이가 하나씩 잠가준 똑딱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회색 후드티셔츠를 보며 짓는 만족스러운 미소에 소름이 돋아났다. 내 허리를 가득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어딘가를 비비적대며 등을 마구 만진다.

“말해. 소리 내.”

“…….”

남자의 눈이 내 입술을 향했다. 양손으로 입가를 단단히 덮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물어볼까. 그럼 이 답답한 관계도 정리되고, 모두 끝낼 수 있을 거야. 내가 결론을 짓고 물음을 준비할 때 남자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영진.”

힘이 풀려 떨어지는 손이 내 손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이 장소와 내 상황이 모두 꿈처럼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 집에서 쫓겨나고 싶어?”

“네?”

“계속 그따위로 행동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 여기 살잖아.”

무슨 뜻이지. 그는 내게 같은 말을 되풀이해줬다. 여기. 여기…? 201호는… 원래 주인아저씨가 살던 곳이고, 그럼 세를 놓은 게 아니라….

“혹시, 이 건물 인수하셨어요?”

“오자마자 너희 엄마하고 계약서도 다시 썼지. 서로 얘기 잘 안 해?”

전혀 몰랐다.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는데 그쪽으로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남자는 내 충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후드 깃을 멱살 쥐듯 잡아 올렸다.

“그 집에서 계속 살고 싶으면 나한테 잘해야 해. 계약도 몇 개월 안 남았잖아.”

“협, 지금 저 협박 하시는 거예요?”

“협박으로 들리니 다행이네.”

기세등등한 태도에 반항심이 치솟았지만 치기를 부리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것저것 묻고 싶었던 것도 현실에 매여 사라지고 말았다. 내 눈동자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회갈빛 눈을 응시했다.

“…제가 뭘 해야 하나요?”

“별거 아니야. 내 집에서 하루 12시간씩 집안일 해. 돈은 줄 테니까. 5백 정도면 할 만하지 않아?”

“아니….”

“내 말대로 해.”

나는 분명 정신적으로 지칠 텐데. 못 견딜 거야. 하고 싶지 않아. 돈을 얼마를 줘도 못하겠어.

“생각을 할…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하루.”

“죄송하지만 저 지금 하는 일도 있고… 그렇게 빨리 결정 못 해요.”

남자의 시선에 닿은 손목을 뒤로 숨기려다 붙잡혔다. 강하게 옥죄어오는 손목이 내 목줄이라도 되는 것 같아서 꼭 돌려받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때도, 지금도 내가 이걸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은 없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거예요?”

“넌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돼.”

“…….”

“이번 달 안에 생각 끝내고 뒤처리도 다 해놔.”

저 눈은 분명 나를 향한 혐오감이었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내가 원인인 것이다. 비가 다시 쏟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엄마가 어딜 갔다 이제 오냐며 인사를 건넸다. 소파 앞에 주저앉아 지미를 안고 턱밑을 건성건성 긁어줬다. 요즘 나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어제와 오늘의 일도 분간을 못하는 것 같다.

“엄마, 건물주인 바뀌었어?”

“응. 2층 남자.”

“정말?”

“내가 말 안 했나?”

엄마는 굳이 네가 알아서 뭐하겠냐며 땅콩을 한 움큼 먹고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지미가 놀아달라고 내 허벅지를 톡톡 쳤다.

“아빠가 생각이 좀 많아.”

당장은 결론이 나기 어려운 것들뿐이다.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면 어떡하지?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지금 나가는 것도 아닐 테고. 엄마도 처음에는 조금 불평을 토하다 또 다른 매물을 찾아 헤맬 것이다. 부동산 아저씨도 이 전세금에 방 두 개는 요즘 씨가 말랐다고 했었는데.

“……”

핸드폰을 손에서 놓고 지미의 눈곱을 떼어줬다. 이미 충분한 도움을 준 전호를 더 이상 괴롭힐 수는 없다.

* * *

날씨가 화창해도 겨울은 겨울이구나. 입김을 훅훅 불며 차에 올라타서 히터에 손을 뻗다가 물러났다. 갑자기 내가 나약하게 사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장갑을 끼고 창문도 조금 열었다. 자주 보는 관리자 아저씨의 표정이 안 좋아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었다.ㅅ

“영진아… 이 양반은 전생이 하마래?”

“모르겠….”

“얼굴은? 봤어? 못 봤어?”

“아니요. 못 봤어요.”

대체 공들여 나를 주저앉히려는 이유가 뭘까. 억지로 밥을 먹다가 한참을 게워냈다. 기분이 좋다가도 금방 나빠지고, 친절하다가도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기도 한다. 변화에 뒤처지기 일쑤인 내가 그런 순발력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까, 하고 싶지 않아. 당장은 내가 필요한 이곳이 훨씬 낫고,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그가 원하는 걸 내가 줄 때까지, 필요할 때까지만이었다. 그 최소한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도 힘들었는걸. 나는 내 한계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바람과는 달리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건물 2층에서 생수를 나르다 넘어져 전치 8주. 뼈에 철심을 박아서 고정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돈이었다. 두 달 치 월급을 잃어버린 셈이다. 1년 정도는 거뜬히 채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그러면 그렇지.

“그래서… 죄송합니다. 집안일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차라리 이 사람의 말을 따르겠다고 했다면 손을 다치지 않았으려나. 잠을 자다 정신없이 올라오느라 외투도 제대로 걸치지 못했다.

“뭐?”

죄송하다고 다시 한번 인사하고 난생처음 만난 실장에게 했던 것처럼 진단서를 보여줬다. 내일 수술을 진행한다는 통보와 함께 받은 것이다. 그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지만, 휴직으로 처리해준 회사처럼 내 사정을 단번에 이해해주길 바랐다.

“내일… 자정이 지났으니까 오늘, 제가 수술을 해야 해서. 앞으로 3일 정도는 병원에 있을 예정입니다. 혹시 옥상에 올라오실까 봐요. 더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 약속은 이제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남자는 내가 가져온 진단서를 빤히 바라보다 내 왼쪽 손을 훑었다.

“내가 뒤처리를 하고 오랬지, 다치고 오라 그랬어?”

“…….”

빼앗긴 진단서가 둥글게 말려서 내 왼손을 치는 도구로 변했다. 세게 치는 것도 아니었지만 퉁퉁 부은 손등이 불에 그슬린 듯 아프다. 남자는 그렇게 두어 번을 더 치다가 내게 라이터의 행방을 물었다. 내 주머니에서 꺼낸 라이터로 인해 활활 타오르는 만 원짜리 진단서를 보다 뚜렷한 한숨을 들었다. 내 잘못이니 딱히 서러웠던 것도 아니다.

“나이가 몇이지, 너?”

“…스물, 여덟이요.”

“잘하지도 못하면서 고집 부리니까 그렇게 다치지.”

“…….”

“그 병원 가지 말고, 내일 내가 부르면 나와.”

“아니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미 예약한 곳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

“굳이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마 거기도 할 수 있으니까 하겠다고 했을 겁니다. 저 보험도 있고… 그래서 괜찮….”

“시끄러워.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했지.”

“그치만….”

“그치만 뭐?”

내가 그의 코트를 버린 건 정말 잘한 선택이었을까.

“말해.”

“…….”

“하영진.”

“…병원비… 다른 병원은 제가 감당하기엔 많이 버거울 것 같아서, 거기가 나을 것 같아요….”

더 심한 말을 퍼붓겠지.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때 코트를 챙겼다면 내 처지에 대한 솔직한 대답이 그에게 와닿았을까.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도 어둡고, 그래서 안 보인다. 몸이 점점 움츠러드는 걸 방치했다.

“내가 너한테 돈을 대라고 했어?”

“…제 몸인데요.”

“네 몸 줘도 안 가지니까 부르면 나와. 내가 어려운 말 하는 거 아니잖아. 병신도 아닌데 왜 못 알아들어?”

재만 날리는 옥상에 온전히 홀로 남았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 내려가는데 코끝이 시큰하게 아파온다. 1층까지 내려가서 주차장 외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슬리퍼에 삐쭉한 맨 발가락을 보며 눈물을 닦아냈다. 차라리 두 손을 다 다쳤어야 했다. 그때 뒤로 넘어가 머리를 부딪쳤어야 했던 게 맞아. 내가 다친 게 뭐라고 무심한 동정이라도 기대했나.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관심도 없을 텐데 조금 안아주고 조금 신경 써줬다고, 또 나는….

“…흐읍….”

컴컴한 공간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아무도 없을 내 등 뒤로 센서 등이 켜졌다. 곧 공용현관문이 열리는 소리, 질질 끌리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 들킬까, 숨을 죽이고 불빛으로 삐져나간 발을 당겨 안았지만 결국 그건 내 앞에 다다랐다.

“넌 진짜.”

황급히 눈물을 닦아내고 나니 자존심을 지키고 싶은 내가 한심하다. 이 사람은 나를 사람 취급해줄 생각도 없는데 왜 애써 발버둥 치지. 반항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왜 이러는 거지. 이럴 시간에 정말 필요한 곳에 집중을 해야 한다.

“피해자분 때문에 우는 게 아니라… 제가 지금, 기분이 울적해서.”

“이런 걸 청승이라고 하나?”

“…….”

“알았어. 일어나. 우리 집으로 가자. 가서 울어.”

“아니요. 그냥 제가 다른 곳으로 가서….”

“빨리.”

남자가 뻗은 오른손에 왼손을 내어주니 외려 내 손을 피한다.

“…왜 그러세요?”

“너 지금 다 알면서 이러는 거지? 나 시험해?”

아. 알면서, 방향을 착각한 건 줄 알았는데.

“…그저 원하시는 만큼….”

“나 죄책감 느끼라고 이러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저도 당할만하니까 그런 거겠죠. …제가 잘못한 게 많나, 봐요. 저 눈치도 없어서… 사실 왜 이렇게까지 저를 싫어하시는지 이해가 잘 안 가요. 그래서, 죄송합니다.”

“…….”

“제가, 조금… 병신같기는 한가 봐요.”

약한 척한다고 생각할까 봐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분명 익숙했는데, 다시 익숙해지면 되는데 이제 다 그만두고 싶다. 손등은 잠깐 움직였다고 아픔을 호소했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저 가볼게요. 이거, 손은 그냥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집에서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사정이 있는 거니까… 부탁드릴게요. 한 번만 도와주시면, 나중에라도 꼭, 갚을….”

“불쌍해서 도와주는 거야.”

왼쪽 손이 튀어나와 내 오른쪽 손목을 잡고 끌었다. 다른 사람 집 말고, 우리 집에 가고 싶어. 눈물이 자꾸 흘러내릴 것 같아서 팔로 눈을 단단히 막았다.

“내가 너 불쌍해서 도와주는 거라고. 네 친구들이 하는 적선. 알아들었어?”

적선. 도움을 받길 원하는 사람에게 손을 뻗는다면 더 나을 텐데, 왜 하필 그게 나야. 당기는 대로 움직이는 내 팔도 마음에 안 든다.

“내일 말고 지금 당장 가자.”

“네? 아니요, 전 괜….”

남자는 코트나 차 키처럼 내 손목을 재차 챙기고 다시 문을 열었다. 뒤꿈치에 힘을 싣다가 집을 빼버리겠다는 협박에 굴복했다.

“누나. …하영진 손이 부러진 것 같아. 나 아니야. 해주면 안 돼? 딴 사람은 없어? 네가 한다고? 응. 끊어.”

처음 봤던 차와는 또 다른 차였다. 차체부터 새까맸고 계기판은 뭔가 내가 아는 것과 아주 다르다. 두리번거리다가 몸을 바로 했다. 괜히 기분 나쁘게 만들지 말자. 여기서 또 그런 모습을 보이면 뒤처리도 곤란할 거야.

“많이 아파?”

“아니요. 괜찮아요.”

“그… 자. 깨워줄게.”

갑자기 문이 열렸을 때 난 내가 갓길에 버려지는 줄 알았다. 따뜻해서 잠이 들었나. 낮뿐이 아니라 밤에도 소름 끼치게 빛나는 곳이었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목을 덮쳐와서 팔에 소름이 올라온다. 내 어깨로 코트를 걸쳐준 남자를 따라 빨간 응급실로 들어갔다. 첫 번째는 여름, 두 번째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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