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1)

2.

탁탁 신발 코가 바닥에 닿는 소리, 운동화가 쑥 들어간다. 오늘 날씨는 어떤가, 층계참의 창문을 통해 행인들의 옷차림을 훑다가 옆으로 불쑥 들어오는 얼굴에 깜짝 놀라서 소리 지를 뻔했다.

“안녕하세요.”

남자는 방금 일어났는지 멋진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머리카락 색이 오묘하다. 당연히 검은색인 줄 알았는데. 무엇보다 다 뻗쳐서 엉망이었다.

“응. 인사 잘하네. 아침마다 얼굴 보면 좋겠다.”

“저 출근하러 가야 해서요. 좋은 아침이었습니다.”

문득 아침에 또 나오려고 했던 지미가 떠올라 작게 웃었다. 엄마가 같이 출근하라고 했는데 지미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면 나처럼 웃었겠지. 남자가 집으로 들어갔나 흘끔 돌아봤다. 문이 저렇게 열려있는데 왜 안 들어가는 거지. 초췌한 얼굴도 저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은 거울 보면 무슨 기분일까.

“하영진. 지금 어디 간다고?”

꿈뻑거리다 찌푸리는 눈이 현실을 찾아 헤맨다. 이런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를 보니 실제로 에어컨을 쓰는 것 같아서 열린 문이 더 신경 쓰였다. 난 신발장에서 굽 높은 살구색 신발을 발견하고 그의 얼굴을 봤다.

“일하러 가요. 안녕히 계….”

“계?”

“주무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가려는데 그가 나를 다시 불렀다.

“영진아.”

할 얘기가 따로 있는 건가? 평소보다 늦어서 조금 급한데. 손목시계를 한번 보고 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뒤를 돌았다. 그의 아침을 따라가긴 어렵지만 역시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훨씬 보기 좋다. 내 머리카락도 그의 것처럼 삐쳐있기라도 한 걸까.

“조심히 잘 다녀와.”

“…네.”

문이 생각보다 세게 닫혔다. 생각해보니 뽀뽀 정도야 내가 매일 지미에게 하는 거니까. 자주 보는 것 같은데 볼 때마다 어딘가가 새로워지는 사람이다. 몸에 저절로 들어간 긴장을 풀고 차에 올라탔다.

* * *

문영이는 내게 자주 그런 소리를 한다. 성공하면 나를 꼭 써주겠다고.

“형 키보드 만지게 해줄게. 이런 핸드폰 말고.”

“말이라도 고마워.”

형인 내가 챙겨줘야 하는 건데 동생의 지나친 챙김을 받고 있었다. 가끔씩은 담배도 사다주고 택배도 같이 옮겨주기도 한다. 오늘도 쉬는 날인데 일부러 나를 도와주러 왔다.

“진짜야. 나 꼭 그런 사람이 돼서 형 부려먹을 거야.”

“응. 알았어. 월급 밀려도 꼭 네 밑에서 일할게.”

“빚을 내서라도 형 월급은 줄게. 빨리 먹어. 살찌워서 내가 부려먹게.”

요즘 직원들의 죽어가는 소리와 월급이 밀릴 것 같다는 소문이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었다. 벌써 두 달째 월급을 탔고 나름대로 근육이 생겨서 말랐다기보다는 멋있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는데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보다.

“문영아, 너도 많이 먹어.”

답례를 하겠다고 전호에게 추천을 받아 여러 종류의 영양제를 사줬는데 잘 먹고 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문영이가 잠깐 화장실에 간 동안 반찬의 배치를 조정해 다양하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우리 저번에 갔던 포장마차 있잖아.”

“응.”

“사장님 바뀌었더라고. 그래서 맛이 완전히 갔어.”

아쉽다고 대답했지만 같이 먹었던 식당이 많아서 당최 어디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알았는데 문영이는 나이가 스물넷이다.

“형 고양이 키운다고 했었지.”

“사진 보여줄까?”

바로 보여주고 싶었는데 핸드폰이 느려서 어플이 바로 켜지지 않았다. 원래 이 시간이 이렇게 민망했었나.

“이름이 지미라고 했었나?”

“응. 엄마가 지어주셨어.”

“지미는 몇 살이야?”

“지금 8개월이야. 여기… 어릴 때 사진. 귀엽지.”

“핸드폰 좀.”

잠금도 풀었는데 한쪽 눈썹이 들썩인다. 혹시 지미를 아는 건가.

“액정이 왜 이래?”

“아… 떨어뜨렸어.”

“언제? 아니 왜 말을 안 했어? 나 집에 남는 핸드폰 천지야.”

“아니, 나도 이제 월급 받아서….”

“아직도 저녁에 삼각김밥 먹는 거 모를 줄 알지?”

가만히 앉아서 물이나 마시고 있었다. 언제 봤지. 저번에 차에 남겨놓은 걸 본 건가. 나를 노려보던 문영이가 퉁명스레 핸드폰을 넘겨줬다. 까먹지 말고 재깍재깍 치우자.

“내일 가져다줄 테니까 그걸로 바꿔. 맨날 돈 없다 하면서… 사지 말고. 지금 보니까 액정도 엄청 심하게 깨졌더만. 그리고 난 형을 위해서 빌려주는 거야. 액정 깨진 거 잘못 쓰면 손 다쳐.”

“고마워.”

액정에 갇힌 지미가 뚫어질 것 같다. 진짜 아는 고양이는 아니겠지. 나와 지미를 번갈아 보는 눈이 사진에 멈췄다가 내게 돌아왔다.

“…닮았어.”

“어?”

맞은편에 앉아서도 내 양쪽 볼을 주물럭거린다. 할 말을 잃고 쳐다봤다. 닮았다니. 내가? 지미를 봤던 내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면 엄마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정색할 것이고 전호는 단칼에 아니라고 말해줄 것이다.

“이거 SNS에 올리면 안 돼? 초상권 있나?”

“아니, 괜찮아. 다 비슷하게 생겼을 거야.”

“진짜 닮았어. 원래 반려동물은 주인이랑 닮았다더니 그게 진짜였네.”

“지미는 잘생겼지 않아?”

“무슨 소리야. 형도 잘생겼어.”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하다. 조화롭게 어우러진 얼굴을 보며 딴생각을 하느라 잠시 문영의 말을 놓쳤다.

“미안. 뭐라고 했어?”

“2차 가자고.”

2차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들뜬 마음에 비가 온다는 걸 놓친 내가 뒤늦게 가게로 돌아갔고 문영이는 우산을 가지고 나오는 길이었다.

“2차는 글렀네. 집에 가야겠다. 데려다줄게.”

우리 집 앞 골목은 비가 오면 물에 잠기고 만다. 문영이의 슬리퍼도 내 운동화도 조금씩 적신 빗물을 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많이 온다. 형네 집에 누구 있어?”

“자고 갈래? 엄마 친구들이랑 여행가셨거든.”

“오늘은 안 돼. 집에 들어가 봐야 해서, 나중에.”

나를 주차장으로 넣어놓고 가는 문영이를 불러세웠다.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야. 빨리 들어가.”

“길은 알아?”

왜 저런 표정이지. 비 맞아도 상관없는데. 문영이가 우산을 접고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틱 켜지는 센서 등으로 주위가 밝아졌다.

“나 여기서 고등학교까지 나왔어. 무시하지 마.”

“…어… 미안.”

“형, 집에 들어가기 싫어?”

“…….”

볼을 조여오던 손이 슬쩍 펴지고 다시 조여들었다. 젖은 손을 잡아 내리고 문영이를 슬쩍 봤다.

“집에서 고양이가 혼자 기다려. 가자. 제대로 데려다줘야겠네.”

나 집에 가기 싫은 걸까. 문영이를 따라가서 키패드에 손을 올렸다.

“안 볼 테니까 얼른 눌러.”

“응.”

내 손이 오늘따라 굼뜬 것 같기도 하고. 2층 층계참의 창문을 열었을 때 문영이는 이미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오네. 돌아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조금 더 있었던 것 같다.

점심에 만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저녁에도 거의 매일 만나는데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떠들게 된다. 어느 날은 집 앞에서 헤어지고도 모자라서 전화를 하며 뒷얘기를 끌어갈 때도 있었고, 새벽에 적게 남은 배터리를 충전하며 뜨거운 메신저를 하던 때도 있었다. 그사이 나는 전호에게 밥을 사주는 데 성공했지만 어디서도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또 시키셨네….”

302호엔 아저씨 혼자 사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대체 무슨 물을 이렇게 많이 드시는 걸까. 운동이라도 하시나? 쉬는 날을 제외하곤 2주째 매일 배달을 하고 있는데 오늘도 택배 요청사항은 공란이다. 후들대는 다리를 추스르고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갔다. 사진과 문자를 빼먹었어.

차로 돌아와서야 물이 하나 더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어쩐지 매번 아홉 개를 시키시던데 한 개가 없더라니. 물 하나 빼고 사진 찍었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다시 찍어서 보내야 하는지 문영이에게 물어봐야 하나. 송장을 재확인하고 물을 잡아 들었다. 3층이라 다행이지 4층이었다면 이웃집에 안 좋은 감정을 가졌을 거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층계참에 우뚝 섰다. 나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뭐하세요?”

내가 가자마자 나온 걸 보니 문자를 확인하고 나온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피해자분.”

오늘도 뻗친 머리카락은 어둡지만 역시 흑발이 아니었다. 촘촘하게 짜인 눈썹, 햇살을 맞아 회색이 차지한 눈동자, 코끝에 슬며시 걸친 햇살까지 그의 외모를 받쳐주는 것 같다. 나를 보고 평범하다는 평가가 오히려 과찬일 정도였다. 넋을 잃고 남자를 보다 정신을 차렸다.

“배…달은 이쪽으로 하고 퇴근하는 길에 2층으로 내려놓는 거, 괜찮으세요?”

남자는 내 물음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 관계의 가해자인 동시에 수혜자는 나다.

“2층으로 옮기고 문자 따로 드릴 테니까 그때 가지고 들어가세요. 번거롭게 피해자분이 옮기실 필요 없습니다.”

“알았어.”

남자는 내 곁을 스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도 당장은 바쁘니 가져온 물을 한쪽에 세워두고 아래로 내려갔다. 끝난 줄 알았던 정산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굳이 신경 쓸 것 없겠지.

“형!”

“문영아.”

손을 크게 흔드니 문영이가 차 앞으로 다가왔다. 함박웃음을 따라 하면 내가 못나 보일 것 같아서 입매에 힘을 꽉 줬다. 서로 저녁을 먹었느냐고 묻는 중에 번뜩 떠오른 일거리가 있었다.

“문영아 잠깐만,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데 어떤 사람이 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선글라스를 껴서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단호한 미간이 나를 딱히 반기는 거 같진 않았다. 초인종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았는데 비밀번호를 치는 걸 보니 내가 잘못 들었던 걸까. 새까만 머리카락에 연한 하늘빛의 긴 치마, 굽이 높은 하얀 구두.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어서 물을 옮겨야 한다. 하나하나 들어다 아래층에 두 줄씩 쌓아놓고 9개가 됐을 때 허리를 펴니 우두둑 소리가 났다. 계단을 도로 내려가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덩달아 놀란 몸이 움찔했다. 상의를 반쯤 벗은 남자였다. 아. 그때 그 구두의 주인이었나.

“…안녕… 하세요?”

“지금 너 어디 가?”

“네?”

아, 맞다. 되묻는 거 싫어했지. 마침 남자의 눈살도 찌푸려져 있었다. 셔츠 사이로 남자의 맨살이 보여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그냥… 친구하고 나가서… 네….”

“한 시까지. 알지?”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치듯 밑으로 내려갔다. 그때 한 번 까먹은 이후로는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올라오려나. 솔직히 이사 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내 모든 추측은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 혼자 피우는 게 더 마음도 편하고, 이거 이렇게 되면 안 될 것 같은데. 초조함에 1층에 다다른 줄도 모르고 있다 표정을 추슬렀다.

나를 기다리던 문영이가 장난스럽게 화장실 갔다 왔냐고 물어왔다.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손이 부드러워 충격이 좀 가시는 것 같다. 몸이 되게 좋던데 운동이라도 하는 걸까.

“형 곱슬인데 머릿결 되게 좋다. 만지는 맛이 있어.”

“너도… 음….”

흘긋 보니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어서 말없이 등을 도닥였다.

“염색을 너무 많이 해서 그래. 최근에야 정신 차리고 갈색으로 덮은 거야.”

혹시 사진은 없으려나…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보고 싶지?”

“응.”

어떻게 알았지. 내 머리카락은 여전히 문영의 손에 말리고 있었다.

“사진, 나중에 보여줄게. 근데 형네 지미 인기 장난 아니야. 좋아요 엄청 많아. 댓글도 다 귀엽고 예쁘대.”

“아, 진짜? 나도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 근데 그걸 벌써 올렸어?”

팔로우만 해놓고 제대로 구경도 못 했는데 지미가 예쁨받고 있다니까 당장 보고 싶었다. 우리 애가 얼마나 예쁜데. 실제로 보면 더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진짜 귀여워.”

“우리 집에 보러 올래? 이따 밥 먹고 가자. 실제로 보면 더 귀여워. 진짜야.”

“집에 또 아무도 없어?”

“있는데 엄마 혼자 계셔. 말하면 돼.”

“그럼 나도 지미 보러 가야지.”

문영이가 즐겨 찾는다는 식당은 우리 집에서 멀지도 않았고 사람도 많았다. 즐거운 일이라도 있었는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내가 처음으로 사줄 밥을 기대하면서 눈을 반짝이는 게 귀엽다. 받은 월급을 거의 엄마에게 줬더니 내 수중에는 20만 원 조금 넘는 돈이 다였다. 많은가? 처음부터 의문을 가져봤지만 그걸 또 도로 달라고 할 수도 없어서 전에 문영이가 준 담배로 연명하며 캣타워 구매를 다음 달로 미룬 게 저번 주의 일이다.

문영이는 도대체 그 돈을 다 어디에 쓰는 거냐면서, 혹시 빚이라도 있느냐고 오늘도 나를 닦달했다. 빚. 내 학자금 대출과 사는 집의 전세자금대출. 빚이 없다고 해도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진짜 없어?”

“응. 없어.”

눈을 얇게 뜨고 나를 의심해도 말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 마침 밑반찬과 해물탕, 술이 나와서 소주를 잡아 흔들고 밑바닥을 팔꿈치로 톡톡 친 뒤 뚜껑을 땄다.

“형, 술 좋아해?”

“그냥 그래. 내 친구가 좋아해.”

“형 친구는 어떤 사람이야?”

술을 졸졸 따라주며 전호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봤다. 어떤 사람이지…? 문영이가 소주병을 잡고 내 쪽으로 기울였다.

“음. 고등학교 동창인데 성격이 좋아.”

“형보다 더 좋아?”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조금 더 나은 것 같아.

“형 그거 알아?”

“응? 뭐?”

“이런 장난 안 받아줄 거 같이 생겼는데 의외로 다 받아주는 거.”

화끈한 열이 얼굴로 달려들어서 숟가락을 제자리에 올려뒀다.

“왜 빨개져. 자. 오늘도 수고했어.”

컵에 가득 담긴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오늘도 나를 취하게 만들 셈인지 열심이다. 중간에 도망치듯 화장실에 왔더니 얼굴이 약간 붉다. 얼마나 마셨지. 조금만 더 마셔야지. 손을 닦으면서 입 안을 물로 헹궜다. 우와. 술 냄새 엄청 심하네. 온몸에서 나는 것 같다.

“형 밥도 먹어야지. 술만 마셔?”

“먹었는데….”

“밥 다 남아 있잖아.”

“으응?”

전호 생각이 나서 반이라도 먹으려 다시 숟가락을 가져갔다. 육수를 추가한 맑고 얼큰한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문영이의 젓가락이 내 밥그릇으로 향했다. 주는 대로 모두 먹었던 것 같다. 콩나물과 조갯살. 받은 걸 먼저 삼키고 밥을 한 숟갈 떠서 삼켰다. 국물도 훌훌 먹는데 적당히 취기가 오르니 속이 훈훈하다. 기분 좋아.

“형은 언제부터 여기 살았어?”

“여기 산 지 1년 안 됐어.”

“그럼 지금처럼 내가 좀 데리고 돌아다녀야겠다. 그래도 되지?”

그렇게 해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편하다는 게 이렇게 어색할 일인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이 지긋지긋한 후유증의 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왜 난 10년 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 너는 나보다 훨씬 잘살고 있을 텐데. 나도 할 수 있어.

“그럼 형, 나 이만 갈게.”

늦었으니 지미는 나중에 보겠다는 말에 아쉬웠지만 벌써 열두 시가 가까운 시간이다. 택시비라도 주고 싶어서 지갑을 향하던 내 손이 잡혔다. 컴컴한 주차장에 센서 등이 켜졌다.

“나도 돈 있어.”

“…그래도.”

한동안 잡혀있던 손에 지갑을 빼앗겼다. 뒷주머니에 도로 넣어진 지갑의 부피가 느껴지고 내 코앞까지 다가온 거리는 누구만큼 껄끄럽지 않았다.

“영진이 형.”

눈빛이 축 가라앉은 게 자못 심각해 보인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일을 그만두려나? 덩달아 긴장하고 있는데 공동현관이 열리고 아까 그 사람이 나왔다. 선글라스는 뺐지만 얼굴이 잘 보이진 않는다. 거의 세 시간 가까이 그 남자와 단둘이 있을 수 있다니. 저 사람도 대단한 사람이구나.

“뭐야? 아는 사람?”

“아니… 모르는 사람.”

“그럼 이번에 나 데려다줘. 형 데려다주는 거 좋아하잖아.”

지금도 큰길까지 갔다가 데려다준다고 우리 집까지 오는 길이지만 아직 남자와의 약속까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어느새 어깨에 다시 손이 걸쳐졌다.

“형 취했어?”

“아니… 문영아, 너 키가 몇이야?”

“184.”

“얼마 차이도 안 나는데 왜 이렇게 다르지?”

어깨를 조금 틀고 문영의 발부터 얼굴까지 주르륵 봤다. 내 호기심이 느껴졌는지 문영이가 내 볼을 톡톡 쳤다.

“왜? 형도 귀엽고 잘생겼어. 몸도 예쁘고 이젠 근육도 붙었잖아. 자신감을 가져.”

다시 어깨에 걸쳐진 손이 내 쇄골을 두들겼다. 지나가던 택시가 슬그머니 서서 문영을 기다렸다. 내 머리카락을 한번 휘저은 손이 떨어졌다.

“잘 가. 내일 또 봐.”

“응. 형도 잘 자. 들어가서 연락할게.”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지. 어설프게 끼워진 손깍지가 풀렸다. 문영이는 평소처럼 웃어주고는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집에 잠깐 들렀다가 술 냄새 좀 씻어내고 가야지. 오랜만에 만나는데 술 냄새 풀풀 풍기면 조금 그러니까. 4층까지 계단만 보고 걷다가 없어야 할 그림자를 발견했다. 우리 집 앞에 남자가 서 있었다. 혹시 내가 402호에 사는 걸 알고 있나?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거 좋아해?”

생각해보니 외국처럼 삼세번은 한 것 같다. 좋은 아침, 좋은 점심, 좋은 저녁. 남자는 나를 보고 따라오라면서 성큼성큼 옥상으로 올라갔다. 주머니를 뒤적여보니 다행히 담배가 있다. 오늘은 빨리 피우고 씻고 잘 수 있겠네.

남자가 갑자기 우뚝 섰다. 계단 끝을 밟고 있어서 중심축이 폭삭 무너졌다. 반사적으로 남자의 너른 등을 짚을 뻔했던 손이 계단 손잡이를 향했으나… 멀어. 그대로 뒤로 넘어가길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픔이 없다. 눈을 조심스럽게 떠보니 내 멱살을 잡은 손이 나를 구해준 것 같다. 난 발을 제대로 딛고 그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또 술?”

“예….”

혹시 냄새 많이 나나. 남자는 내 옷을 뿌리치듯 놓고 남은 계단을 올라갔다. 나를 기다리지 않는 문이 코앞에서 쾅 닫혔다. 마침 핸드폰 알림이 울리길래 확인하려는데 옥상 문이 다시 활짝 열렸다.

“빨리 들어와.”

꺼내다 만 핸드폰을 도로 넣었다. 아직 도착하진 않았을 텐데.

남자의 감시하에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꽁초를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정말 암울하게도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봉지가 있는데 왜…… 하필. 남자가 옆에 있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아무리 오랜만이어도 그렇지.

“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됐었나 봐요.”

“…….”

“내려가서 주울게요. 어제까지 정말 안 그랬어요. 오늘만….”

어차피 다 피웠으니 나가야지 하고 뒤로 도는데 팔이 붙잡혔다.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도 내 팔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하영진.”

“네.”

“하영진.”

“…예….”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목소리? 아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얘기하느라 목이 조금 쉬었나. 낮에 흐렸던 눈은 어둠에 물들어 옅은 불만을 띠고 있었다. 적막을 가르고 우렁찬 핸드폰이 연속으로 울렸다.

“그것 좀 끄면 안 돼?”

“놔주시면 무음으로라도 돌리겠습니다. 전 꽁초 버리고 들어갈 테니까 피해자분도 이만 들어가세요.”

“아까 걔 뭐야?”

“네?”

아. 또 되물었다. 한숨을 짧게 쉰 남자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되묻지 말아야지.

“술 같이 먹었지? 누구냐고.”

“…같이 일하는 친한 동생이요.”

“…….”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너 앞으로도 내가 시킨 거 옮겨놓을 거야?”

“네.”

이유를 안다 해도 막을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난 아래층으로 내려가다 그의 부름에 다시 멈춰 섰다. 피곤하고, 졸리고.

“하영진.”

“…….”

“하영진.”

“예.”

“아까 걔 이름이 뭐야?”

“네?”

“…….”

“아… 그 되물어서 죄송한데 제 이름이 아니다 보니 함부로 알려드리기가 조금….”

대체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지? 물어봐도 대답 안 해주겠지. 분명 내 추측이 맞을 텐데 어딘지 모르게 이 대화는 이상하다. 물음도 하나같이 문영이를 향해 있었다. 집에 가고 싶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시간도 늦었고… 꽁초는 제대로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저번에 그것도 잘 버렸어요.”

오늘따라 더욱 이상한 남자를 뒤로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한편에 세워둔 빗자루로 주차장을 겸사겸사 쓸고 있다가 시끄러운 알림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나 잘못한 거 없지.

[형 집에 잘 들어갔어?]

[사진]

[사진]

[사진]

이거 빨간 하트, 이게 좋아요인가…? 하나, 둘, 아니 일, 십, 백, 천… 팔만 개가량이 쌓여있어 정신이 번쩍 든다. 뭐가 이렇게 많아?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영진이 형이다!

“문영아. 나 사진 봤어.”

― 내가 인기 많다고 했잖아.

“이거 되게 기분 좋다. 고마워.”

― 아직 안 올린 사진도 많으니까 주기적으로 확인하자.

“응응. 혹시 자주 올려?”

― 자주는 안 올리는데… 그럼 지미 사진 올리면 전화할게.

“고마워.”

문영이는 팔불출이 따로 없다고 나를 놀렸지만 전호에게 워낙 자주 듣는 말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다.

“문영아. 나 지금 집에 들어가서 씻으려고. 너도 자.”

― 아직도 안 씻었어? 나는 답 없길래 씻는 줄 알았더니.

“아, 미안. 담배 피우느라 못 봤어.”

― 그래? 그럼 내일 봐. 잘 자.

급한 마음에 두 칸씩 뛰어 올라가는데 오늘 하루 종일 여기를 왔다 갔다 해서 그런가 보기만 해도 무릎이 아프지만 4층엔 나만의 보상이 졸린 눈을 하고 나를 마중 나와줄 것이다.

* * *

“…….”

“어떤 새끼가 물을 이따위로 시켜?”

“…….”

“와― 시발 진짜. 이 새끼 뭔데?”

“글쎄…?”

“물을 시발 스무 개? 묶음도 아니고 ‘낱개로 풀어서 배송요청’? 미친 새끼 아니야?”

쉬는 날이라고 좋아했으면서 문영이는 깜짝 선물처럼 내 옆에 있었다. 어제 이런 말을 못 들었는데. 몰래 내 일을 도와주려고 했다는 게 오늘만큼은 달갑지 않았다. 옆에서 연신 어처구니가 없다며 욕을 쏟아내는 걸 보며 나도 할 말을 잃었다.

주소를, 아니 물의 양을 보자마자 알았다. 남자라는 것을. 대신 3층이 아니라 1층 창고였고 묶음이 아니라 120개 낱개였다. 이제 1층에서 2층까지 올리라는 지시다. 옆에서 분을 못 이겨 핸들을 퍽퍽 치는 문영이를 보다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뭐라고 해야 문영이가 집에 갈까. 이따가 제대로 말을 해보고… 몰라. 어쨌든 보내야 돼.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 생기는 일은 없는 걸까.

“시발 물귀신 새끼… 만나기만 해봐. 아주 내가 물 마시다 뒤지게 해줄 테니까.”

“문영아, 아이스크림 좋아해?”

“아이스크림?”

“응. 먹을래?”

먹으면서 이야기를 꺼내 보는 거야. 문영이를 두고 편의점에 들어오자마자 보인 게 1+1 문구였다. 가격도 어마어마해 보이는 게 1+1. 뭔가 사야겠다 생각했을 때 난 이미 문영에게 포장지를 벗겨서 한입 물리고 있었다. 내 것도 까서 한입 먹었다. 엇.

“왜?”

같은 칸에 있어서 가져온 건데 왜 제대로 못 봤을까. 문영이는 내 손에 들려 있던 포장지를 가져가더니 짧게 탄식했다.

“녹차라서? 내 거랑 바꿔. 이건 바닐라야.”

“그래도 돼?”

“안 될 게 뭐 있어. 형 먹어.”

“고마워.”

문영의 손에 녹차 맛을 들려주고 바닐라 맛을 받았다.

“왜 이렇게 비싼 걸 샀어?”

“행사하길래….”

“맛있네. 고마워. 나 녹차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아니야. 내가 고맙지.”

한 손으로도 잘 먹는 문영을 보다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입 물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분위기가 괜찮아지니까 집에 가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그때 얘기해봐야지.

“문영아, 하지 마. 괜찮아. 내가 할 테니까 넌 가. 오늘 쉬는 날이라며. 진짜 이럴 필요 없어.”

분명 나는 점심시간에 생떼를 부리던 문영이와 극적으로 생수 합의를 이루어냈다. 집에 올라가 있기로 했는데, 내려만 준다고 했으면서 옮기려는 자세가 당혹스럽다.

“문영아. 우리 아까 얘기 다 끝냈잖아. 여기서 쉬어. 응? 비밀번호 알려줄게, 우리 집에 가 있어. 나 진짜 금방 하고 올라갈….”

“어떻게 이걸 형 혼자 해! 말이 돼? 아 진짜 내가 몇 층 사는 새끼인지는 몰라도 시발!!”

시작해버렸네. 이렇게 된 거 내가 더 많이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경쟁하듯 옮기다가 결국 마지막 두 개를 빼앗기고 화단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1층이라 무릎이 후들거릴 일은 없었지만 팔이 미친 듯이 떨린다. 묶음으로 해주지.

“문영아, 괜찮아?”

“형… 형 팔이나 좀 봐.”

문영이는 괜찮아 보이는데 나만 이 모양인 건 조금 그래서 팔을 도로 내렸다. 4층으로 얼른 가고 싶어.

“그… 문영아, 고마워.”

“됐어. 이 새끼 언제 다 처먹나 보자고.”

“그러지 마. 이웃집이라 들을지도 몰라. 신고당하잖아. 너 벌써 몇 번 당했다며.”

“몰라. 이제 그딴 거 상관없어… 담배 하나 피울래?”

고개 드는 것도 일정한 에너지가 드는 거였구나. 그렇지만 밤이라도 유니폼 차림으로 피우고 싶진 않다. 주저앉은 내 겨드랑이에 팔이 들어오더니 강제로 일으켜졌고 바로 뿌리쳤다. 본능적인 거라고 이해해주면 안 되나. 어둠에 가린 표정이 안 보이니 더 불안했다.

“미안해. 그, 그게 아니라, 놀라서….”

“…안아줘도 돼?”

“응?”

“안아줘도 되냐고.”

“어, 응? 응.”

한쪽 팔이 내 등을 안고 다른 쪽은 내 어깨를 감쌌다.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인지 전호에게 안긴 것보단 상황이 나았다.

“문영아 미안한데 나 땀 흘렸….”

“안 나. 샴푸 냄새만 나.”

머리에 닿는 뭉툭한 무언가가 느껴지고 닿아 있던 몸이 떨어졌다. 코끝에 얼핏 스치는 스킨 향이 처음 맡는 것처럼 새로워서 약간 다른 사람처럼 낯설었다. 주차장 끝의 센서 등이 없는 외벽에 붙었다. 담배가 없네. 어쩐지 오늘 뭔가가 허전하다 싶었다. 피우지는 않아도 주머니에 있어야 묘한 안정감이 든다.

“나 집에서 좀 가져올게.”

“어차피 여기가 마지막이잖아.”

문영이가 내 입술에 담배를 물려주고 턱을 감싸 안았다.

“빨아들여. 가스 다 써서 없어.”

작게 숨을 빨아들이자 불이 옮겨붙었다. 씻을 때 2층으로 옮겨놔야지. 내가 그사이에 그걸 다 옮길 수 있을까. 귓가를 쓰다듬는 손이 오늘따라 더 착하고 친절했다.

“끝나고 여기 오르면 힘들겠네.”

왜 이렇게 높은 거냐며 나한테 해명하라는 게 웃겨서 등을 톡톡 쳤다.

“웃지 마. 나 진짜 심각해. 올라가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괜찮아. 아직 그런 적 없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그새 나올 준비를 하는 지미를 손바닥으로 밀었다. 엄마도 없어서 많이 외로웠겠지.

“우와… 네가 지미구나.”

문영이는 털썩 주저앉아 지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와중에도 낯선 사람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 지미가 조금 원망스럽다. 나중에 도둑이나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도 저렇게 굴면 안 되는데. 엄마 말대로 전생에 개였는지도 몰라. 둘을 가만 보는데 지미가 킁킁 낯선 이의 냄새를 다 맡고 내게 걸어왔다. 품에 안고 머리털에 코를 묻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간식 줄래?”

“응! 줄래! 근데 화장실이 어디야?”

턱 끝으로 알려주고 손을 닦은 뒤 냉장고의 닭가슴살을 조금 뜯었다. 쪼르르 돌아온 문영이가 손 씻은 걸 확인받는 어린이처럼 양손을 내밀어왔다.

“고마워. 깨끗하네.”

“뭐… 확인하라고 씻은 거 아냐. 빨리 줘.”

문영이는 내가 건넨 닭가슴살을 조금씩 뜯어 지미에게 건넸다. 지미는 칵칵 흥분한 소리까지 내며 닭가슴살을 동내고 이제 문영이에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역시 좋은 사람은 동물들도 알아보나 보다.

“씻을래? 찝찝하지?”

“응. 그래도 돼?”

“옷 가져다줄게.”

내가 방에서 옷을 찾을 동안 문영이는 우리 집을 둘러보기로 했는지 여기가 내 방이냐 저기는 누구 방이냐 큰 소리로 물어왔다.

“전세야?”

“어?… 응.”

“어머니랑 둘이 살고?”

냉장고에 붙어 있는 사진들을 보더니 나를 돌아봤다. 고개를 끄덕이며 무난한 흰색 반팔 티셔츠와 검은 반바지, 마침 포장을 뜯지 않은 속옷을 챙겨 건네줬다. 보일러를 목욕으로 틀어주고 화장실로 들이려는데… 샤워부스도 겨우 있는 곳이 창피하다. 이미 아까 봤겠구나.

“나 옥탑방에서도 잘만 살았어. 걱정하지 마.”

“…응.”

“비바람만 피하면 됐지.”

내 머리를 톡톡 치며 위로하던 문영이가 들어가고 난 2, 3분 정도 낌새를 봤다.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현관문 안쪽의 지미에게 인사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 많은 물을 다 옮길 생각에 착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많아.”

이거 정말 많은 거였구나. 널려 있는 물통에 기가 질릴 정도다. 옮기고 옮기다가 겨우 60개의 생수통을 옮겼을 때는 무릎이 꺾여 앞으로 무너질 뻔했다. 나머지 반도 옮길 생각에 파묻혀 1층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많다. 그 사이에도 너흰 줄어들지 않았구나. 빨리 해야 올라가서 여유롭게 쉴 수 있겠지. 허리가 찢어질 것처럼 아파서 잠시 손잡이를 잡고 심호흡을 했다. 양쪽 복도로 차곡차곡 쌓고 지쳐서 4층은 꿈에만 그리며 2층 계단에 주저앉았다. 오래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느라 201호 문이 열린 줄도 뒤늦게 알아챘다.

“다 옮겼어?”

“네. 안녕, 큼, 안녕, 하세요….”

“힘들어?”

“아, 뇨… 조금. 괜찮습니다. 저 지금 올라가 봐야, 해서….”

몸을 겨우 일으키고 올라가려는데 남자가 나를 자신 쪽으로 돌려세웠다. 힘들어도 한층 더 올라가서 쉴걸.

“죄송한데 제가 조금… 힘, 들어서 놔주시면 안 될까요?”

“왜? 안 힘들다며.”

“…….”

“안 힘들다며?”

“되게, 잔인하시네요.”

성격도 되게 나쁘고. 손목을 잡은 남자의 팔을 겨우 떨쳐내고 발을 움직였다. 나를 굳이 세워서 힘든 것까지 확인해야 하나. 내가 만약 무사히 힘든 걸 숨겼다면 물을 또 얼마나 시켰을까. …원망하지 말기로 했잖아.

“내일도.”

팔로 손잡이를 안고 뒤를 돌아봤다.

“…….”

“내일도 이만큼 시킬 거야.”

“…….”

“오늘, 누가 도와줬지? 내일은 너 혼자 해야 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놀리는 건가. 건전지가 다된 로봇처럼 온몸이 덜그럭거린다. 3층 중반부터는 엉금엉금 계단을 손바닥으로 짚고 올라갔다. 정말 다행히도 문영이는 아직 샤워 중이다.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내 땀 냄새를 맡았다. 이게 무슨 샴푸 냄새야. 실소가 터져 나온다. 지미가 내 얼굴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아빠 지저분해… 하지 마. 지지.”

눈을 떠보니 문영이가 옆에 쭈그려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서 내 얼굴을 적셨다. 저 옷이 원래 저런 옷이었나.

“매일 이러고 있어?”

비슷해. 문영이의 손등이 내 이마를 어루만지고 턱을 단단히 안아 볼을 문질렀다. 다시 씻어야 할 텐데 내가 안 더러운가.

“형, 집에 뭐 먹을 거 있어? 시켜 먹을까? 배 안 고파? 야식 먹고 싶지?”

“…먹을 거… 라면도 없어. 뭐 먹고 싶어? 앞에 편의점 있어. 내가 갔다 올….”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서 씻어.”

무척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 바닥을 팔꿈치로 밀어 겨우 앉았다. 무릎 사이로 들어오는 팔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내 어깨까지 감싸 가뿐히 안아 올린 문영이가 나를 화장실까지 옮겨줬다.

“문영아, 너… 힘 되게 세다.”

날 내려주고 문도 닫아주는 문영이를 보며 뭘 잊은 건지 생각하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수건.”

“왜?”

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향하는 얼굴이 빨갛다. 한여름에 따뜻한 물과 무거운 무언가는 사람을 저렇게 만들 수 있었다.

“그… 옷 좀 가져가려고.”

“내가 갖다 줘? 아님 방까지 또 안아다 줄까?”

장난스러운 물음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아무리 너라도 못 챙겨줄 거야.

어제 화장실 청소를 해놓기를 잘한 것 같다. 문영이가 더럽기까지 한 화장실을 봤다면 정말 수치스러웠을지도. 나는 왜 잠옷을 들고 온 걸까. 딱히 유치한 느낌은 아닌데 색상 때문인가. 우비 같은 노란색도 아닌데….

“이게 내 잠옷이야. 내가 고른 건 아니고….”

“어머니가?”

문영이는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저게 더 나은 반응이라고 볼 수 있나. 전호는 내 잠옷에 관심도 없었는데 문영이는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차라리 아래층 남자처럼 반응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맛있는 거 먹자는 간단하지만 설레는 말에 이끌려 식탁에 앉았다.

“치킨?”

“응. 맥주도 있어!”

식탁 위에 던져둔 지갑을 잡았다가 문영이에게 혼쭐이 났다. 하지만 여긴 우리 집이고 초대한 사람도 나인걸.

“먹어. 형한테 묻지도 않고 시킨 건 나잖아.”

“나 때문에 너 고생했잖아. 매번 받기만 하는데 이런 거라도 해주고 싶어.”

“그럼 더 맛있게 먹어주면 돼. 나 밥 같이 먹어주는 사람 좋아해.

들이미는 닭 다리를 잡아 건배하듯 부딪치고 커다란 맥주캔을 들었다. 머리까지 아파오는 시원함에 오늘 하루가 드디어 끝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방금 맥주 사러 나갔다 왔는데 그 생수 시발놈이 벌써 가져갔는지 없더라? 진짜 그 개새끼 걸리면 가만 안 둬. 손을 다 부숴버릴 거야.”

그새 그걸 다 갖고 들어간 건가… 대단하네. 생각할수록 열이 나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누군지 몰라서 참 다행이야.

“문영아 자고 갈 거지?”

“아니. 차 때문에 집에 가야 해.”

“응….”

“형, 다음 주 화, 수 쉬어?”

“응.”

맥주를 마시려는데 손이 기름 범벅이라 휴지를 조금 뜯어 손바닥에 비볐다. 문영이는 내 손을 잡고 제대로 닦아야 한다며 손끝까지 하나하나 문질러 줬다.

“많이 먹어. 형은 진짜 이거 오래 하지 마. 다음 달에 그냥 때려쳐. 내가 일 잡아줄게. 아니다. 다다음 달? 그쯤이면 되겠네. 그동안 쉬어.”

“아니야. 괜찮아.”

“뭐가 괜찮아. 편한 거 해. 책상 앞에서 키보드 뚝딱대는 거.”

“…문영아. 너 근데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내 눈을 쳐다보는 올곧은 시선은 내겐 신뢰가 아니라 불안감을 조성했다. 식탁 위에 앉은 지미가 나를 바라본다. 아빠는 원래 사람을 잘 못 믿어.

“형한테 영양제 다섯 개 받았잖아. 그만큼 잘해주는 거지 뭐. 나 원래 사람 챙기는 거 좋아해.”

“아… 그래?”

“응. 나 이거 먹고 버스 타고 집에 갈 거니까 바래다줘. 치킨값이야.”

남은 가슴살을 발라 먹었다. 내 맥주가 더 맛있어 보인다며 바꿔먹자고 해서 입구도 닦아줬고 겸사겸사 나도 문영이의 손가락을 닦아줬다. 생각보다 굵고 흉터도 많아서 아직 멀쩡한 내 손과 비교된다. 웃고 있는 문영이를 따라 했다.

“그럼 나 갈게. 옷은 나중에 빨아서 줄게. 속옷도 이게 뭐야? 꺼멓고 꺼멓고 꺼멓고.”

“됐어… 돌려주지 않아도 돼.”

열이 오른 얼굴을 쓸어내고 민망한 숨을 들이켰다. 무늬가 있는 건 왠지 민망해서 새까만 것만 샀더니 어느새 내 속옷 서랍은 정말 까맣기만 하다. 손바닥이 내 머리카락을 스쳤다. 우리 집 샴푸 향이 이런 식이라면 나도 꽤 향긋하려나.

“잘 가.”

격한 운동을 하고 맥주를 좀 많이 먹어서 그런가, 흔들리는 손도 흐느적흐느적. 아니 이건 내 시선이 흔들리는 건가. 재밌다. 저번처럼 내 손에 깍지를 껴왔지만 저번과는 다르게 손바닥이 살짝 붙었다가 떼어진다.

문영이를 태운 버스를 무사히 배웅하고 집으로 걸어갔다. 가로등에 닿은 빌라가 까마득하다. 4층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주저앉더라도 3층에서…. 2580을 누르는 손이 내 손이 아닌 것 같다. 드륵 문이 열리고 무언가와 부딪쳤다. 몸을 떼어내기도 전에 센서 등이 먼저 켜졌다. 너무 높아. 조금 떨어져 있으면 괜찮은데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올려야 한다. 그것도 누가 봐도 화난 눈이면 후회가 밀려온다. 왜 봤을까. 진짜 재밌는 건 난 이 사람이 화가 난 건 바로 알 수 있다는 거다. 화가 났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조금은 부족한 것 같다.

“너 저 새끼랑 진짜 뭐야?”

“예?”

“저 새끼랑 뭐냐고.”

쟤나 걔는 그렇다 치지만,

“…같이 일하는 친한 동생인데요? 그리고 새끼 아니에요. 착하고… 향긋… 아니 좋은.”

남자는 닿지도 않은 내 몸을 팍 떼어놓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일부러 붙은 것도 아닌데. 곱게 떼어주면 안 되나. 내가 그렇게 더러워. 나도 알고 있다고. 근데 나 물도, 그 많은 거 혼자 다 옮겼고… 진저리 칠 정도로 싫은가. 나도 그런데. 잠깐 잡혔던 팔이 간지러워서 슥슥 밀었다. 근데 내가 대변하지 않으면 아무도 날 믿어주지 않아. 불분명해도, 난 확신이 있었어. 뜨끔한 통증이 느껴져 팔을 내렸다. 왜 긁혔지? 나도 나를 못 믿는데 누가 나를 믿어주길 바라.

“너 뭐해?”

“아… 그, 옥상 가시는 거예요? 저 죄송한데 저는 지금 좀….”

“좀 뭐?”

표정은 그대로다. 차라리 계속 화를 내주면 내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탓하는 걸로 들리려나. 화장실이 급하다고 할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만나야 했으니까 지금 만나고 집에 가서 양치만 하고 자야지. 힘들었지만 당장은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너 뭐해?”

“죄송해요. 아깐 안 힘들었는데….”

적당한 거짓말도 못 할 만큼 지쳐서 3층에 주저앉았다. 근육 경련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오늘 내 팔을 만지작대던 문영이가 떠올라서 웃음이 터졌다. 우와 하며 신기해하는 거 귀여웠지.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아무 걱정도 없이, 아니 당연하고 평범한 걱정을 하며 살고 싶다.

“왜 웃어?”

“아… 아니에요. 재밌는 게 생각나서.”

“아까 걔 생각?”

“맞아요. 제가 근육이 생겼다고 칭찬해줬는데… 다 소용없나 봐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오늘은 옥상에 못 갈 것 같아요. 넋을 놓고 있다 눈앞의 얼굴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저기 내려주시면, 먼저 가시면 제가 알아서 올라갈게요.”

“가만히 있어. 무거워.”

“아… 예. 근데 이제 댁에 계셔도 되는데요.”

“조용히 해.”

3층에서부터 5층, 나를 안고도 계단을 평지처럼 걷던 남자는 에어컨 실외기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힘이 세시다고는 말해도 되나요?”

“이미 말하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야?”

칭찬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면 남자의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을까. 정신 차리면 내던질 줄 알았는데 나를 더 바짝 끌어안는다.

“저기…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대로 피워.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하시는지….”

생각해보니 담배도 안 가져왔는걸.

“집에 가서 담배만 가져올 건데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나 안아봐.”

되묻기를 관두고 몸에 힘을 바짝 주고 그의 목에 팔을 걸쳤다. 라이터와 담뱃갑이 내 몸 위로 떨어졌다. 전에 갈취했던 건지 하나를 뺀 나머지가 곤히 잠들어있었다. 담배를 열어두고 오래 방치하면 맛이 없어지는데, 내가 뭘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 라이터는 묵직하고 네모나다.

“몸에 힘 빼. 무거워.”

“아, 네.”

남자의 목에서도 손을 뗐다. 청량할 정도의 딱 소리, 뚜껑이 열리며 불이 담배 끝에 옮았다. 도망가고 싶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꽁초를 버려야 하는데요….”

“그냥 바닥에 버리고 내일 같이 치워.”

“네….”

“근데 너 술 마셨어? 또?”

맞는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치킨 먹었어?”

“냄새나나요?”

나는구나. 난간 너머를 훑어봤다. 평일 새벽이라 사람이 없다. 아래쪽에 주점가는 좀 많을 텐데, 사람들이 보고 싶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를 만큼 어수선하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너 이렇게 약해서 계속 그 일을 할 수 있겠어?”

“아, 네… 오늘은 그냥 다른 일도 많아서 그랬던 겁니다. 그보다 좀 내려주시면….”

내가 담배를 다 피우고도 한동안 서 있던 그가 드디어 움직였다. 난 냉큼 문고리부터 잡았다.

“가고 싶어?”

“가야…죠?”

아래층에 집을 두고 옥상에서 노숙할 수는 없잖아요. 물끄러미 내 손을 바라보던 남자는 501호 앞에 나를 내려주고 아래로 내려갔다.

“저기.”

“왜?”

“라이터… 이거 가져가셔야죠.”

“…왜? 네가 가지고 있으면 안 돼?”

내가 왜 이걸 가지고 있어야 하지. 잃어버리면? 난 다급하게 그를 불러세웠다.

“언제 달라고 하실 건데요?”

“내가 언제, 어디서 달라고 할지 모르니까 계속 가지고 있어. 그거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거니까 잃어버리면 안 돼.”

“…….”

“넌 내 말을 거부할 수 없어.”

위치상 높은 위치에 서 있는 건 나인데, 왜 난 저 사람이 항상 나를 내려다보는 기분을 느껴야 하지. 내가 정말 저 사람의 말을 거부할 수가 없나.

* * *

처음엔 나를 봐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을 안 시키는 건 아니지만 묶음으로 주문해줬고 그다음 날부터는 숫자도 점점 줄어들었으니까. 중간에 문영이에게 걸릴 뻔했지만 어떻게든 넘어갔다. 멀거니 차창 너머를 구경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영진아.

“엄마. 내일 오지?”

― 왜, 아침부터 엄마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어?

“응… 집에 혼자 있으려니까 조금 외롭네.”

― 아이고 고양이 새끼한테만 관심 주더니 떨어져 있으니까 이제 엄마가 보이냐?

내일은 지방으로 뷔페 알바를 하러 갔던 엄마가 돌아오는 날이다. 뷔페는 벌이는 쏠쏠하지만 진짜 할 일이 못 된다. 내가 돈을 벌면 엄마가 저런 일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우린 여전하다.

― 찬 좀 싸가야지. 맛있더라.

“응. 밥 해놓을게.”

― 너는 밥밖에 못 하잖아. 생색은.

“…….”

― 어차피 너 오기 전에 내가 먼저 집에 가 있을 텐데 것도 내가 해놓겠구만?

그것도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어서 웃으니 웃지 말라는 타박을 들었다.

― 별일은 없지? 무슨 일 생기면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 알았지?

“응.”

겨울이 다가오는 비가 내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워 죽겠다고 땀 흘리던 나는 박스가 젖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제 쓰레기를 버렸으면 오늘은 안 버려야 하는데. 문영이가 진상 보존의 법칙 따위 여기서는 먹히지 않는다고 투덜대던 게 생각난다. 오늘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미뤄놓은 생수를 2층으로 옮겨놓고 3층 계단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반복되는 벨소리는 여전히 크고 놀라워서 부리나케 받게 된다.

― 형. 오늘 막걸리에 파전?

“응. 나 지금 끝났어. 빨리 끝나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 진짜? 나도 끝났어. 일 좀 더 달라고 해.

“안 그래도 현상이 아저씨가 내일 대타 좀 뛰어 달라 하셔서 도와드리려고… 전에 내가 살아 봤던 곳이라 괜찮을 것 같아서.”

― 뭐어? 내일 쉬는 날이잖아! 어딘데? 그래도 쉽지 않을 텐데.

“××구.”

― 아… 거긴 나도 잘 모르는 곳이라… 그리고 나 내일….

“약속 있다고 했잖아.”

문영이는 내가 쓸데없는 걸 다 기억한다며 기억력이 좋다고 칭찬했다. 주먹을 쥐었다 펴고 발을 밑으로 쭉 뻗었다. 뉴스를 듣고 있었는지 북한과 미국, 일본 얘기를 했다. 나도 마침 자금 부족으로 불매운동 중이었기에 맞장구를 쳤다.

“근데 문영아. 언제 와? 내가 데리러 갈까?”

― 아냐. 올라가 있어. 전화할게.

집에서 자고 있던 지미가 나를 무시해서 조금 괴롭히다가 나와 있었다. 10분 안에 도착한다는데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린다. 옆에 내려놨던 우산도 쫄딱 젖었고 주차장에 쭈그려 앉아있는 나도 픽픽 튀는 빗방울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찰랑찰랑 주차장을 넘보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손으로 바가지를 만들려는데 내 시야에 검은색 슬리퍼가 담겼다.

“빨리 왔…네?”

“그게 인사야?”

넥타이 없는 흰색 셔츠, 검은색 바지, 검은색 우산. 남자였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인지 복장이 처음 본 날과 비슷하다.

“안녕하세요.”

“왜? 나 말고 누구 기다려?”

“아… 예… 친구를, 죄송합니다.”

“뭐가?”

“그냥… 별로 보기 안 좋았을 것 같아서요.”

마주칠 때마다 평범하다고 말해주는 덕분에 나도 매일같이 내 얼굴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중이다. 새벽부터 그런 얘기를 들으면 꽤 괜찮았다.

“왜 보기가 안 좋아?”

“그야 평범한 얼굴이 웃으면 좀… 잘생긴 사람이 웃으면 좋잖아요.”

“주위에 잘생긴 사람이 있어?”

“네… 웃을 때 보기가 좋더라구요. 피해자분도 자주 웃으시면 좋을 텐데 아쉽네요.”

슬쩍 올려다보니 딱 화내기 직전의 표정이다. 역시. 그때 남자의 뒤에서 클랙슨이 작게 울렸다. 진짜 문영이다. 가려서 못 봤는데 은색 외제차. 뭐지? 빌렸나?

“아. 그럼 전 친구가 와서 먼저….”

다리에 쥐가 난 걸 모르고 일어나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용한 주위가 다들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아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조수석에 올라탔다.

“저… 봤어?”

“응. 무릎 봐봐.”

반바지로 감춰보려고 했는데 어디까지나 반바지라서 내려가질 않는다. 창피해. 붉어졌을 뺨을 안고 다리를 오른쪽으로 피했다.

“괜찮아. 나 안 아파.”

“알았어, 안 볼게. 많이 기다렸지?”

“아니야. 나도 방금 내려왔어.”

그나저나 이 우산은 어떡하지? 넘어지는 바람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발밑에 둬도 괜찮을까.

“문영아, 이거 여기다 둬도 될까? 물이 자꾸 떨어져서.”

“아까 그 남자 뭐야?”

“응?”

“아까 그 남자. 키 큰.”

“아, 이웃이야. 내가, 어, 내가 우산이 없는 줄 아셨나봐.”

“우산 그냥 거기 둬. 괜찮아. 내 차도 아니야.”

왠지 더럽히면 안 될 것 같은데… 장우산을 이미 젖은 내 바지 위로 올리려는데 문영이의 손이 나를 저지했다.

“뭐 하는 거야? 다 젖고 싶어?”

“아니… 집도 앞이라….”

“이미 신발에 다 묻었는데 우산이 뭐 어때서?”

신발이야 조금이지만 우산은 웅덩이를 만들어 낼 텐데? 옆에서 문영이가 한숨을 내뱉었다.

“기분 안 좋으면 오늘은 이만… 갈까? 나중에 먹어도 돼. 아니 그냥 안 먹어도 되고.”

“…….”

“나도 여기서 내려주면 내가 알아서….”

자신의 차도 아니라더니 문영이가 핸들을 콱콱 내려쳤다. 씨근덕대면서 오늘 만난 수취인의 욕을 버럭버럭했다. 이제까지 들었던 중 가장 최악의 케이스라 듣는 것만으로도 기가 다 빠지는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위를 한번 쓸었다. 깜짝 놀랐네.

“내가 이렇게 화내는데! 비도 오는데! 그래도 나 두고 갈 거야?”

“아니…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

“미안해. 내가 형한테 화풀이했어. 그 새끼가 잘못한 건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나도 가끔 그러고 싶은 날이 있으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바닥에 우산을 내려놓았다. 비 오는 날이라 가게에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막걸리가 시큼하니 입에 맞지 않았다. 역시 난 소주가 좋아.

“형 솔직히 말해. 막걸리 별로 안 좋아하지?”

“…….”

“아 진짜… 이럴 줄 알았어. 지금이라도 소주 시킬까? 잠깐만 기다려봐. 사장님!! 여기 사이다하고 오리지널 한 병씩 주세요.”

막걸리와 사이다와 소주를 팍팍 소리가 나게 섞고 있지만 왠지 맛이 없을 것 같다. 뭐라도 한마디 하려는데 휘휘 저어서 한입 먹고 역시나 하는 표정인 문영이를 봐서라도 조금 먹어보기로 했다.

머리 깨질 것 같아. 팔에 걸리적거리는 아무거나 붙잡고 거친 숨을 몰래 쉬었다.

“형 진짜 괜찮아?”

“응. 너… 지금 갈 데 있다며.”

이 늦은 시간에 약속이 생겼다는 문영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대리기사가 왔는데도 코앞에 사는 나를 데려다줘야 한다며 왜 이렇게 고집을… 주정이구나. 문영이를 안고 차에 밀어 넣은 뒤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빼서 대리기사에게 전달했다.

“형… 영진이 형, 우산! 우산 쓰고 가.”

창문 틈으로 손잡이가 먼저 나오고 우산이 밑으로 떨어졌다. 내가 더 마시자고 했었나? 집으로 돌아가야지. 지미가 기다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잡아 들고 걷다가 한숨을 쏟아냈다. 엄마에게 다시 전화해볼까. 저번 주에 홀로 바람맞은 전호에게 전화를 해볼까. 오늘은 지미만으로는 못 버틸 것 같아.

운동화 안쪽이 빗물로 가득 찬다. 나오지 말걸. 축축한 손을 털어내고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골목에는 사람 하나 없다. 포장된 도로의 새까만 여파가 번질까 무서워 가던 길을 서둘렀다.

취한 채 지미와 놀아주다 보니 시간도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고 자고 싶지만 이유 없이 무서워서 지미를 안고 숨을 쉬고 있었다. 이런 비 오는 날에 나올까. 한 시가 되기 몇 분 전, 현관문을 닫다가 우리 집 앞에 세워져 있는 우산을 발견했다. 왜 내가 저걸 안 가지고 올라가는 건지 모르겠다. 비 좀 맞으면 어때. 나 이제 돈 벌고, 엄마도 없으니까 뜨거운 물도 마음껏 쓸 거야. 보일러도 틀 거야. 추워. 선풍기도 계속 틀어놓을 거야. 예약으로.

내가 뭘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옥상 문 옆에는 또 다른 우산이 있었다. 그 사람들인가. 301호, 상추를 키우는 이웃. 그치만 옥상에 잘 안 올라오는 이웃. 바싹 말라가는 방울토마토가 불쌍해서 몰래 물을 주곤 한다. 막상 올라오고 보니 비가 그렇게 많이 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까 씻으면서 시계를 뺐구나. 긴 팔의 소매를 늘이고 지금쯤이면 한 시겠지 싶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면서 우산은 못 봤어?”

남자다. 흘긋 보니 무표정한 얼굴에 미적지근한 분노가 올라오는 것 같다. 말투는 침착하고 목소리는 듣기 좋고 깔끔한 저음. 아까와는 복장이 달랐다. 흰 티셔츠, 아직은 더운 카디건, 비 오는데 긴 면바지, 나까지 씌워준… 검은 우산.

“왜 말이 없어?”

“…죄송한데 제가 씻기는 씻었는데… 막, 끅, 막걸리를 먹어서 냄새가 아직 날지도 몰라서, 그래서 그런데요.”

“뭐?”

“막걸리를 먹어서….”

“막걸리? 그게 뭔데?”

“…으응? 전에 말씀드렸던, 술이에요… 발효, 발효한 으끅, 마시, 는 건데 냄새가 엄청 독하니까, 별로라서 저는 저기 조금 떨어져―서 후… 떨어져서 피울게요.”

아까 지미하고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딸꾹질은 없었는데 이게 뭐람. 뭐 이미 창피한 거 다 보여줬으니까, 난간 끝으로 가려다 신발이 죽 밀려서 뒤로 빙글 돌았다. 이 남자는 냄새 나는 사람도 이렇게 안아주네. 의외로 좋은 사람인지도 몰라.

“절대, 소주와 사이다에… 속아, 서는 안 돼요.”

“영진아. 아까 그 새끼 너하고 무슨 관계야?”

“…혹시요….”

“응.”

“혹시 그 친구한테 관심 있으세요?”

“뭐?”

“관심 있으시면 제가 말을 한 번… 윽.”

지금 나를 흔들면, 정말 상태가 안 좋아서 머리 너무 아픈데… 팔을 잡아도 힘이 안 들어간다. 조금만 나를 봐주길 바랐다. 아까처럼 안아주면 좋을 텐데. 정작 그가 나를 다시 안았을 때 들었던 건 의구심이었다. 왜? 멀리서 치는 번개에 정신이 들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왜?”

“화나셨잖아요.”

“응.”

“자꾸 닿으려는 게 아무래도 이해가 잘 안 돼서요.”

“넌 나 이해할 필요 없어.”

난 남자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어깨에 코를 묻었다. 빗소리에 움츠러든 몸이 전기장판에 누운 것처럼 힘이 풀린다. 발이 젖고 머리카락이 축축 쳐져도 느껴지지 않았다. 매번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시원하고 자극적인 향수는 사라지고 비 냄새만 배어 있었다.

“하영진. 이제 뭐 할 거야?”

“집에 가서 자려고요.”

“…….”

“…왜요?”

“집. 나도 가보면 안 돼?”

“오실래요? 근데 별로일 텐데.”

오는 건 딱히 상관없는데. 남자는 뭔가 들뜬 것 같아 보였다. 아니겠지. 서민체험? 충분히 가능하다. 근데 집이 조금 지저분했던 것 같은데…. 진짜 오는 건가? 따라오는 그를 반복해서 보다가 현관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아, 지미 나갈 수도 있으니까 잠시만요.”

들어가자마자 나오려는 지미를 안아 들었다. 남자는 신발장부터 꼼꼼히 훑으며 들어왔다. 거지 같다고 욕하려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게 더 어울리는 집이네.”

“…네… 그렇죠.”

역시. 예상이 적중해서 기분이 나쁜 적은 처음이다. 난 정말 머리가 나쁜 게 아닐까. 왜 데려왔을까.

“넌 이렇게 좁은데 살만해?”

혼자 있어도 좋으니 집에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방을 찾아 불을 켜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여기가 네가 자는 곳이지?”

“네.”

원래 저렇게 내 침대가 좁았나? 오래된 내 방이 그와 어울리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럼 걔네들하고도 여기서 하는 거야?”

“…네?”

설마, 그거 때문에…. 피해야 해. 남자가 점점 더 가까이 내게 다가왔다. 온몸에서 이건 피해야 한다며 소리를 질러서 내 살갗이 까맣게 타오르는 환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또.

“저기에서 섹스했냐고 묻잖아.”

“아니, 아니,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

“하영진.”

뒷걸음질을 치다 어깨를 잡혔다. 검은 손이 두려워 황급히 빛을 찾았다. 하필 불을 켜지 않아 캄캄한 거실, 공간에 부유하던 공포물질들이 나를 옭아매려 벼르고 있다. 남자가 가린 내 방의 형광등. 갈색 눈.

‘토하지 마.’

숨이 막혔다.

‘저 새끼들이 붙어먹는데 그럼 나라고 가만히 있어요?’

‘오랜만이야.’

‘그러길래 네가 처신을 똑바로 했었어야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어깨가 잡혀 강하게 흔들린다. 따끔하던 볼이 뜨거워졌다. 누군가의 온기가 내 살갗에 상처를 낸다. 그때도 이것과 같은 온기였잖아. 속지 마.

‘씨발, 누가 보면 우리만 재미 본 줄 알겠네? 너 진짜 하나도 안 좋았어? 보여줘? 네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보여줘?’

‘너 때문에 내가 동네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체육복 사물함에 넣고 다녀.’

내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불분명한 사람이다. 전호도, 엄마도 아니었다. 빠르고 넓은 보폭으로 다가오던 어둠이 점점 커지고 형체를 띠었다. 숨이, 숨이 안 쉬어져. 떨리는 몸에 서슴없이 닿는 손을 망연히 바라봤다.

‘어차피 기억도 안 나잖아.’

‘내가 누구야?’

“하영진.”

‘내가 누구야.’

환한 형광등이 제일 먼저 보였고 시선을 내리니 회색빛 도는 갈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나를 맞았다. 떨리는 손이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안… 안 하실 거예요?”

“뭘.”

“…….”

남자는 나를 보더니 다시 사라졌다. 눈이 안 보여서 벗어나려는데 또 따뜻하다. 허덕이기 바쁜 내 위로 체온이 덮어졌다. 그때도 이랬다. 같은 온도, 같은 인간,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정하지. 난 아무것도 모르잖아. 다들 내 착각이라고 했잖아. 얼굴을 바꾸고 나를 괴롭히러 온 게 아니라고 누가 감히 단정하는데.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형, 제발… 건주 형.”

“응. 계속 얘기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주세요. 잘못했어요.”

손바닥을 맞비비다 팔로 남자를 옭아맸다. 못 움직이게 꽁꽁 묶었다. 마음이 자꾸 들썩여서 남은 기억이 열리려 한다. 덮개를 덮고 못질을 하고 꼼꼼하게 틈을 막고 살아왔던 내 치부가. 기억하고 싶지 않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이대로 계셔주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다시는 안 할게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절대 안 할게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남자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덜커덩. 어둠 속 잠겨있는 철문이 열렸다. 이렇게 나를 방심시켜 놓고 그들이 저 문으로 들어와,

“안 해.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진정해.”

폭력을 휘두르고, 사지를 결박하고,

“영진아, 하영진.”

내 뺨을 사정없이 내려치며,

“하영진!”

강간을 시작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지미의 밥을 줬나. 별똥별. 야광. 별똥별은 내 방 천장에는 없다. 내 방 천장에는 오로지 별들만 가득하다. 그러니까 이곳은 거실이다. 왜 불을 껐을까. 불을 끄고 간 건가?

“…….”

어둠 속에서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던 건 남자였다. 내 뺨을 쓰다듬고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저번처럼 깔보는 손가락은 아니었다. 내가 그를 정말 잘 읽는 게 맞다면 저 눈도 호의적인 편이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손을 치우고 몸을 일으켰다. 지미의 밥부터….

“어디 가려고.”

“고양이 밥 좀 주고 올게요. 좀 씻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영진아.”

“2층에 가 계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중에… 내일 얘기하면….”

“하영진.”

‘하영진’. 남자는 내 이름 석 자를 퍽 자주 부른다. 놀랐을 텐데 괜찮은 걸까. 정작 나는 괜찮지 않아서 더 신경이 쓰인다.

“그럼 잠깐만요. 씻고… 금방이면 돼요.”

내 방에 들어가 느적느적 밥을 챙겼다. 화장실은 저녁에 치웠지만 굳이 챙겼다.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왜 집에 들였지, 이대로 갑자기 쓰러지고 싶다. 남자는 왜 집에 가지 않았을까.

화장실로 도망치듯 들어가서 차가운 물을 틀어 온몸에 묻혔다. 제발 부탁이니 내 정신을 온전히 돌려주길 바란다. 칫솔을 입에 쑤셔 넣고 피가 나도록 닦아냈다. 더럽다. 역겨워. 왜 그랬지. 모르는 사람한테까지 피해 줄 필요는 없었잖아. 왜 그런 것까지 보여줘. 샤워기 밑으로 파고들었다.

하긴. 나라도 누가 나처럼 굴면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해서 곁에 남았을 거다. 수건을 둘러도 차가운 몸이 남자의 품에 빨려 들어갔다. 사라진 줄 알았던 향수 냄새가 코끝에 맴돌더니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 사라졌다. 찰나의 변화도 부담이 돼서 남자를 밀어냈지만, 몸이 단단히 붙들려서 나올 수가 없었다.

“너는 그렇게, 나 정신없게 만들어놓고 고작 이런 것도 못 참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냥 넘기기엔 좀 심각해서… 일부러 그런 건 아니….”

“가만히 있어. 나도 공포증, 그거 같이 해줄게.”

“…….”

“이번엔 네 차례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무작정 그의 등을 쓰다듬고 그를 가득 껴안았다. 내 다리 사이를 스치고 가는 지미도, 나를 안은 남자도. 누구에게 받는 위로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좁은 침대에 누워 말없이 옆자리를 툭툭 쳤다.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손이 불편할 거라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낯선 사람과 조용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내가 잠들 때까지 그의 손길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 * *

작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림캐처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편두통이 생기고 팔다리가 저려야 할 아침이 개운하다. 햇살에 부딪쳐 백발처럼 보이는 환한 머리가 붕붕 떠서 귀엽다. 그 머리카락의 일부를 지미가 깔아뭉개고 있었다. 낯선 사람하고 같이 자면 안 되지. 턱 밑으로 손가락을 두고 살살 긁어주고 깊고 낮은 울림에 귀를 기울였다.

“…아….”

하반신은 속옷만 입은 상태였다. 무슨 짓을…. 아무 바지나 잡아 입고 베란다로 향했다. 지미의 배변을 삽으로 퍼서 통 안에 투척하고 재빨리 뚜껑을 닫았다. 아침을 안 먹는 편인데 사람이 있으니까 같이 먹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단둘이 있는 시간을 피해야 할 것 같다. 이러다 겨우 찾은 지미라는 구명줄이 쓸모없어지면 엄마와 나는 또 치료비에 허덕이고 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해놓을까 싶어서 냉동실을 뒤졌다. 잠자고 있던 식빵을 구울까. 유효기간… 지났어. 텔레비전에선 식빵을 버터로 굽던데 우리 집엔 마가린조차 없다. 계란을 구워? 아니면 음료수라도. 해서 냉장고도 열었더니 없었다. 바나나우유가 있는데 이거라도? 먹을까? 냉장고를 닫는 내 손에 두터운 팔이 겹쳐졌다. 언뜻 비친 핏줄은 나와 다른 색이었고 피부가 상처 없이 깨끗했다.

“영진아.”

“일어나셨어요? 죄송한데 혹시 아침 드세요? 저는 잘 안 먹는….”

남자는 내 목덜미에 뺨을 부비작대더니 허리를 꼭 껴안았다. 잠버릇인가? 다리를 살짝 앞으로 옮겼다. 남자는 내 행동을 보고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나를 앞으로 돌려 숨 막히게 안아왔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이 목을 문지르는데 상체가 닿아서 불편해 죽을 것 같다. 그는 자신이 하는 스킨십에는 유독 관대한 편이다.

“저기… 제가 나가봐야 해서요. 죄송한데, 집에 먹을 게 별로 없어서….”

“너 말 늘이는 거 버릇이야?”

“…….”

“되묻는 것도 버릇이고. 넌 말버릇도 별로야.”

“죄송합니다.”

“어제 그 난리를 쳤으면 아침에 혼자 떠나지 말고 나를 기다려야지. 섹스도 그런 식으로 해?”

“……죄송….”

“일부러 내 앞에서만 공포증 꺼내는 거지? 그 새끼들 앞에선 안 그러고.”

“그게 아니라….”

“얼굴도 별로면서 남자란 남자는 다 집에 들이질 않나.”

“누구를… 그 친구는 저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고….”

“계속 말해.”

“아니에요. 일단 이거 놓고, 침대도 좁아서 불편하셨을 텐데 댁에 가서 주무시는 게….”

“왜 또 말을 하다 말아?”

“아니요….”

절대 그런 게 아닌데, 해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쉬는 한숨에 혼자 상처받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덩달아 올라오는 한숨을 삼켰다. 저렇게 답답하고 지겨워할 거라면… 아니야. 이 사람이 맞고 내가 틀렸을 것이다.

“새벽에 늦지 말고 나오기나 해.”

문을 열고 나가는 그를 보며 쥐고 있던 우유가 떨어졌다. 어느 정도는 네 말을 인정해야 할 것 같아. 난 참 별것도 아닌 것에 관심을 두고….

“주는 것도 없으면서, 멍청하고… 혼자 상처, 받는….”

그다음에 뭐라고 했었더라. 피곤한 성격이라고 했었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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