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1
1.
“너 뭐하는 새끼인데 자꾸 밖에다 담배꽁초를 버려!!!”
목소리가 크다, 죄책감보다 먼저 든 생각이었다. 죄송해요. 작게 속삭이고 바닥에 붙어 옥상 문 쪽으로 기어갔다.
“너 대체 이게 며칠째인지 알아? 아냐고! 아냐고오오!”
알아요. 사흘째요.
* * *
사실 아저씨에게 들킨 지 사흘일 뿐 이 집에 온 이후부터 계속 무단투기를 해왔으니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402호의 작고 귀여운, 어떤 수식어도 무색하지 않은 내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에메랄드빛의 눈과 회색과 검은색의 줄무늬가 때론 큼직하고 때론 얇게 이루어진 친구다. 지미는 바닥을 기느라 더러워진 내 품에 안겨 얼굴을 맞부딪쳤다.
백수의 일상은 나열하기 민망할 정도로 평범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조그맣고 커다란 움직임으로 시간을 보내며 점심과 저녁을 건너뛰거나 라면으로 때우고, 가끔 집에 밥이 있으면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먹고. 집이 너무 더럽다, 한 소리 들으면 엄마가 나가기 무섭게 진공청소기를 돌린 뒤 걸레를 빨아 구석구석을 닦는다. 가끔 빨래도 하고.
― 힐 안 주냐 새끼야? 놀고먹니?
사투리를 정겹다고 표현하는 것도 지방민을 차별한다고 했던 남자다. 난 그런 것을 이해하기엔 수도권에 너무 오래 살아왔다.
― 드리면 되잖아요. 왜 욕질이냐. 존나 나 저 새끼랑 도저히 못 해 먹겠다. 지미지미야. 똥매너네, 똥매너.
“저도 힐 좀 주세요. 데빌용왕님.”
― 내가 닉넴 그만 부르라고 했지, 아 저 새끼 진짜… 나 이번 판만 하고 나갈 거야.
“저도요.”
옆에 둔 초코우유에는 곰돌이 푸가 그려져 있다. 유통기한 임박 상품이라 저렴하지만, 두고두고 먹을 수는 없었다. 데빌용왕이 나를 붙잡았지만 난 해야 할 설거지가 있었다.
기상 시간은 언제나 다르다. 기분이 좋으면 오후 한 시. 불안하면 아침 여덟 시. 보통은 열 시 정도. 언젠가는 새벽이 되었다.
“내가 그러니까 그냥 알바라도 하라고 했는데 진짜 말도 안 듣고. 내가 나가 죽든가 해야지.”
오늘 아침도 나이 먹은 드라이기 소리가 쩌렁쩌렁하다.
“진짜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지지리도 없고. 나더러 자식 복 많아서 말년에 잘된다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야.”
오늘 엄마가 가는 곳은 산이다. 쉬는 날마다 취미인 등산을 하러 가는데 나도 가끔은 따라갔다. 일을 하러 가는 날엔 따로 내 욕을 하진 않는다. 무슨 심리가 작용한 건지 꼭 놀러 가는 날이나 쉬는 날만 저러곤 했다. 나는 매일 놀아서 그런가보다.
“엄마 산 조심히 타고 와.”
“넌 일을 안 할 거면 나가기라도 해. 집에서 계속 컴퓨터만 하지 말고, 요새 택배 일도 돈 많이 번다는데 넌 도대체 집에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시간이 아깝지도 않니?”
그건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 보래서 그런 것이다. 난 알아보겠다고 했지만, 엄마는 도저히 못 참겠는지 한숨을 푹 쉬고 집을 나섰다. 지미가 아무리 엄마의 다리에 대고 꼬리를 살랑거려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오후 세 시는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시간이다.
이 집의 주인은 엄마고 난 능력 없어 월세 한 푼 못 내는 하숙인이기 때문에 방금 가장 흔한 택배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오는 길이다. 계산해보니 내가 들고 있는 이 담배는 무려 225원짜리다. 난 가만히 있어도 225원을 못 벌지만 한 갑에 4,500원짜리 담배는 내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가격임에도 내게 팔린다.
장초를 입에 머금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엄마는 숲의 음이온을 빨아들이고 있을 시간이다.
“야아아아아!!!”
급하게 아래로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바닥으로 꽁초를 던져버린 것이다. 이번엔 분명히 안 그러겠다고 올라오면서 그렇게 다짐했는데 왜 그랬을까.
“죄… 죄송합니다아아….”
윗니 아랫니를 딱딱 소리 나게 부딪치고 양옆으로 입술을 찢었다. 혹시라도 내가 고개를 쳐들까 봐 뒷머리를 손으로 단단히 감쌌다.
“너 진짜 뭐 하는 새끼인데 같은 시간마다 이 지랄이야!!! 왜!!!!!!!”
빠르게 문을 열고 옥상을 탈출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5층을 지났고 층계참 창문에 붙어 아래를 쳐다봤다. 정장 차림을 한 아저씨는 분노에 찬 발을 구르고 계셨고 뒷좌석에 난 창문이 오늘은 반쯤 열려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진짜 아니었는데, 습관이란 게 정말 무섭긴 한가 봐요. 변명인지 사실인지 모를 말을 뒤적뒤적 꺼내놓았지만 오늘도 전달되지 못했다.
* * *
어젯밤에 연락이 온 택배업체는 다짜고짜 오늘 면접을 보러오라고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뛰어노는 내 심장이 또 벌렁거린다. 엄마는 텔레비전을 화장대 쪽으로 돌리고 거울을 보고 있었다. 어제처럼 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묶여 사방으로 잔머리가 조금씩 삐져나와 있다.
“엄마. 나 택배… 면접 보러 오늘 오래.”
“정말? 뭐야. 언제 했어? 아니 그거 힘들어서 그렇게들 때려치운다는데 괜찮겠어?”
“응. 엄마 일 잘하고 와. 웬만하면 붙여준다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갔다 올게. 오늘 고기 구워 먹을까?”
고기는 무슨,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엄마는 내 면접을 핑계로 고기를 먹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제부터 아침의 엄마는 말을 잃어갈 것이고 난 나대로 시간에 맞춰 졸린 눈을 꿈뻑이며 출근을 하게 될 테다. 버스정류장에 서서 이어폰을 꽂은 사람들을 쳐다봤다. 다들 선이 없어서 내 주머니 속 거추장스러운 이어폰이 조금 초라하게 느껴진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 정작 벗어나지 못하고 답답하게 구는 내가 조금 지겹다.
주머니에 있던 이어폰을 가방으로 옮기고 버스에 올라탔다. 삑삑 찍히는 소음엔 버스비를 떠올렸고 착석할 땐 긴장이 부유해 내 눈과 마음을 빼곡히 덮었다.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 가방을 올려뒀다. 면접이라고 생각 말고 편하게 와도 된다고 했지만 그게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검은 슬랙스에 가벼운 셔츠는 지난 상반기 필기시험에 붙었을 때 기대감에 취한 엄마가 선물해줬던 것이다. 오랜만에 다린 그것을 괜히 한 번 더 펴보고 고개를 바로 했다.
버스가 이대로 멈춰서 엔진이 터졌으면. 사람들이 모두 다 헐레벌떡 나가고 나만 뒤늦게 남았으면 좋겠다. 불의의 사고로 죽고 싶다. 그래도 걔가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갔지, 하며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랐다.
생각보다 건물 층이 낮았다. 아까부터 벌렁거리던 심장은 엄마가 몰래 식탁 위에 두고 간 청심환의 효능을 극구 억제하며 사정없이 나를 압박했다. 숨이 막히지 않도록 나눠서 공기를 마셨고 주먹으로 심장을 치다가 촉박한 시간에 맞춰 들어갔다. 붉어진 얼굴의 나는 오랜만이라 낯설다. 다른 거울은 내 얼굴에 생소함을 줘서 이 모든 일이 꿈만 같다. 할 수 있겠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면접 보러 오셨어요?”
의상은 단정하지만 개성적인 머리 스타일의 그는 바깥이 많이 덥냐 물으며 나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종이컵에 담긴 새까만 커피는 도대체 언제부터 있던 건지, 난 언제부터 앉게 된 건지 모르겠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하얗고 둥근 테이블의 한켠을 잡았다.
눈을 좌우로 돌리고 열려있는 문과 화창한 창문 밖 사정, 새하얀 형광등 빛에 친숙함을 잡아먹고 나서야 조금 진정됐다. 딱 좋게 면접관이 들어와 통성명을 했다. 갖고 있는 파일은 두께가 제법 있었다.
“많이 마르셨네요. 일이 힘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원체 근육이 잘 붙는 편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얼마 안 있으면 또 붙고 안 쓰면 떨어진다. 당연한 것을 장점이랍시고 얘기하는 내가 색달리 보였다. 일을 정말 하고 싶나. 엄마가 지긋지긋하다고 잠깐 틀어보자 하고 끄기를 아까워했던 에어컨 장식, 그토록 오래된 장마에 온 하늘이 눅눅했던 시간. 그때도 난 이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눈여겨보던 탑차의 높이를 찾아 손바닥으로 공중에 표시했다. 아까 되게 높았었지. 혹시라도 내려오다 떨어지면 바로 다칠 것 같은 높이였어. 조만간 연락을 주겠다던 면접관은 슬픈 연락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은 월요일이니 다음 주로 미뤄질 일은 없다.
정류장이 가까운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골목 서너 개는 거쳐야 집이 나온다. 이리저리 가로등이 꺾인 코너를 지나 직진하면 조금 큰 길가가 나온다. 우리 빌라는 끝쪽이라 밑으로 낭떠러지처럼 격차가 큰 언덕의 아래에 있어서 고립된 것처럼, 집 앞에 있으면 위쪽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값비싼 외제차의 존재를 보고 있었다.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엄마가 좋아하는 외국 배우와 뒷모습이 꼭 닮아 있었다. 저 사람으로 배경화면을 바꿔놔도 엄마는 누가 누군지 못 알아볼 것 같다. 그는 안을 뚫어볼 수 없는 새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색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 차림이었는데 대낮부터 부지런한 저승사자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저 사람이라면 아까 그 탑차에서 떨어져도 안 다치겠다. 돌아본 이유가 나일까.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모르겠다. 비밀번호를 누르기 전에 유리창에 반사되는 그를 보며 비밀번호를 쳤다. 2… 하고 5, 8, 0은 재빠르게 눌렀다. 드르륵 열리다가 한 박자 쉰 유리문이 조금은 불안했지만 난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풀리니 조금 자고 싶었다. 지난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탕탕 내 덜거덕거리는 구두에서 소음이 인다. 아까 이러지 않아서 다행이지 혹시라도 벗겨졌다면 꽤 인상 깊은 면접자가 됐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복장이 지나칠 만큼 편해서 벌써 묻어두고 싶은 기억이 됐다. 옥상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구두를 직직 끌며 내려갔다.
“면접은? 잘 봤어? 뭐래?”
“이번 주 안에 연락준대. 안 하면 떨어진 거래.”
내게 득달같이 물어온 엄마는 집에 들어오면 보통 거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본다. 본다기보다는 그저 이 적적함을 물리치는 용도로 쓰는 것 같다. 지미가 베란다에서 햇빛을 쬐다 내게 일자로 걸어왔다. 3개월을 갓 넘은 아이를 버리는 사람은 어떤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던 걸까. 내 옆에서 반년을 머물러도 이렇게 예쁜데 이걸 나 혼자만 보는 게 아쉬울 정도다. 팔 아래로 손을 넣어주자 내 어깨를 짚어오는 작은 손에 시시때때로 감동받는다. 품에 가득 안아주면 고롱고롱 울어대고 가끔씩 내 뺨을 핥아오는 까슬한 혀도 아프지 않았다.
“아빠 오늘 면접 보고 왔어. 우리 지미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방에서 속삭속삭 지미의 귀에 대고 얘기했다. 문을 슬쩍 열고 머리만 내밀었다.
“엄마 나 잠깐 자도 돼?”
“응. 자자. 이따 저녁 먹을 때 깨워줄게.”
난 지미를 한 번 더 안고 털에 숨을 불어넣었다.
“아빠 잘 테니까 이따가 아빠 깨워줘. 알았지? 지미 예쁘다. 오늘따라 더 예쁘네.”
눈을 슬며시 감고 하품하는 얼굴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내일 우리 발톱 깎자.”
촉촉한 코끝에 내 뺨을 뭉갰다.
* * *
아침부터 울리는 기계음이 핸드폰의 진동인 줄 알았는데 역시나 착각이었다. 졸린 눈을 닦고 하품을 늘어지게 한 뒤 지미처럼 기지개를 켰다. 주위 어느 빌라에 누가 이사를 오는 건지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지미 맘마?”
내 이마에 냅다 박치기를 하는 지미를 안고 뺨에 입술을 부비며 거실로 나갔다. 엄마는 어제 늦은 저녁에 온 합격 문자에 들떴을까. 오늘 아침은 조금이라도 웃으면서 나갔기를.
냉장고 속 양푼에는 내가 안친 밥이 남아 있었다. 그걸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봉지에 남은 국물도 냄비에 담고 밑반찬을 몇 가지 꺼내면 내 점심상이 완성된다. 난 천천히 밥알을 음미했고 컴퓨터 앞에 앉기 전에 지미에게 쥐돌이를 던져주고 낚싯대를 흔들어가며 놀아줬다.
오늘도 반나절을 함께할, 내 유일한 친구 데빌용왕은 같은 자리에서 왜 이렇게 늦었냐며 핀잔으로 나를 반겼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많은 멍청한 초짜들이 자신을 힘들게 했는지 하소연했다. 유일한 내 친구에게 언젠가는 취업 소식을 전해야겠지.
“힐 좀 주세요.”
― 넌 날 보면 힐밖에 생각이 안 나냐?
“…….”
― 줬다, 줬어. 됐냐?
“고마워요.”
정작 게임을 더 오래, 많이 하는 건 그쪽이고 나한테 매일 매일 레벨업에 힘쓰라고 고집을 피우면서 왜 삐지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려면 난 힐을 받아야 되는데?
“데빌용왕님 화났어요?”
― 내가 닉넴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지. 지미지미야.
“미안….”
― 됐고. 너 오늘은 몇 판 할 거냐.
“이번 판만 하고 끝내려고요. 용왕님은요?”
― 야이씨!
“지미 화장실 청소해줘야 해서요. 또 봐요.”
나중에는 너무 바빠서 청소를 미룰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비를 해둬야 내일부터 시작하는 일이 다 잘 풀릴 것 같다. 난 화장실을 청소하고 집 안의 모든 먼지를 빨아들인 뒤 바닥을 닦았다. 회색 털이 너무 많이 나와서 엄마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담배를 피우고 와서 샤워 좀 하고, 엄마 오면 저녁 먹고 자야 하니까 설거지도 좀 해놔야지.
그래서 담배를 피우고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집에 귀신이라도 들인 것처럼 작은 소름이 팔을 타고 돋았다. 걸어가면서 내가 뭘 잊었는지, 그걸 어디 가서 찾아야 할지 뒤죽박죽 섞였다.
현관문을 열고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지미. 지미가 사라졌다. 예전에 엄마의 부주의로 집을 한번 나가보더니 가출의 맛을 깨닫고는 이따금씩 우리의 부주의를 노리곤 했다. 난 도대체 왜 방묘문은 쓰질 않고 지미를 믿은 걸까. 다다른 곳엔 작은 생물이 바닥에 온몸을 비비고 있었다. 옥상 문은 어김없이 닫혀있었다.
“아빠 걱정하잖아.”
내려가기 싫다고 우는 소리에 눈시울이 따가워졌다. 세상은 안전하지가 않아.
“미안해. 조심했어야 했는데.”
위로 올라가기만 할 줄 알아 다행이지 혹시라도 아래로 내려간다면, 갓 문밖을 나온 이웃들이 놀라서 큰소리를 낸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난 지미의 엉덩이를 옴짝달싹 못 하게 끌어안고 집으로 내려갔다. 탕탕 울리는 내 발걸음 소리에 놀라 손톱이 바짝 세워졌다. 내가 집을 어지른 걸까. 믿을 수 없는 꼴에 팔을 걷어붙였다.
저녁을 마친 식탁에 앉아 따뜻한 보리차를 한입 머금었다. 식으면 냉장고에 들어가는 것이라 우리는 일종의 제철 음식처럼 즐기곤 했다.
“그래서 그 인간이 나한테 그러는 거야. 여편네가 그러고 사니까 남편이 없는 거라고.”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누가?”
“아― 그 있잖아. 우리 옛날에 그 어디야. 저기 2층 살 때. 거기 위층 살던 인간이잖아. 아니, 아니 끝까지 들어봐. 그래서 내가 허구한 날 바람피워서 매 맞는 그쪽 마누라보다는 낫다고 했지. 그러더니 나한테 소리 소리를 지르고 마누라한테 전화를 하데? 그리고 전화로 또 싸우는 거 있지?”
싸움 내용이 흥미진진했나. 마침 엄마도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건 없다고 했다. 매일 비슷한 일을 하다 보면 새롭고 자극적인 사건에 끌리기 마련이다. 매일 숨어서 커피만 내리던 나도 사장님이 마감 시간에 해주는 바깥 손님들의 이야기에 흥미진진한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할 동안 엄마는 지미에게 닭가슴살을 길게 찢어 먹였다. 칵칵 소리는 정말 맛있는 게 아니면 잘 내주질 않는다.
“잘 먹지?”
“응. 그래도 너무 많이 먹이면 안 돼.”
“알았어. 설사할 수도 있다고?”
남은 닭가슴살을 잘 싸서 냉장고에 넣어뒀다. 내일 내 일정은 교육이다. 사흘 내내 교육을 받고 실전에 투입된다. 인수인계를 도와주는 분은 퇴사하는 사람이나 현재 구역이 감당이 안 되는 사람 등등 다양하다고 인터넷에 써 있었다. 자기 전에 탑차 사진을 보면서 올라가는 상상을 하고 유니폼을 위안 삼아 옷 고를 시간을 덜면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끝이 난다. 난 냉장고 뒤에 숨어서 엄마를 훔쳐봤다.
“왜.”
“그냥.”
“그냥 왜.”
그냥. 무서워서.
* * *
나를 맡은 사람은 다행히도 퇴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못 걸리면 인수인계를 X도 못 받고 개고생만 한다고 봤는데 나보다 어린 이 사람은 다행히도 맡는 구역이 방대해서 넘겨주는 사례였다.
“영진이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네.”
차에서 단둘이 남으니 몸이 다 꼬이면서 속이 울렁울렁거렸다.
“지금 내가 하는 말 다 적고 있어요?”
“아… 예. 어, 그.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아니에요. 안 하면 하라고 하려고 했어요. 이게 단순해 보여도 한번 꼬이면 진짜 골치 아프거든요.”
그는 갑자기 내 머리카락에 먼지가 묻었다며 손을 뻗어왔다. 발가락부터 올라오는 공포에 묶여 숨이 바짝 세워졌다.
“됐다. 전 집에 가면 바로 샤워부터 해요. 안 하면 진짜 냄새가, 아니 형이 지금 난다는 건 아니고. 제가 날까 봐… 제가 원래 땀이 많아요. 근데 이 일 하면 진짜 땀을 안 흘릴 수가 없다니까. 엘리베이터 있으면 고맙긴 하지. 근데 막 4층, 5층 이런데 엘리베이터도 없잖아? 그냥 대문에 던져버리고 싶어지는 거야… 요.”
손끝으로도 말을 하던 그가 나를 휙 돌아봤다.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형.”
“네?”
“나 말 놔도 돼요? 섞어서 쓰는 것보단 이게 나을 것 같아서요.”
“네. 괜찮아요.”
난 근육으로 뭉친 그의 팔을 힐끔 보고 반바지 아래의 다리도 훔쳐봤다. 나도 저렇게 되는 건가. 팔을 한번 주물럭거렸다. 지나가다 들른 것처럼 자연스럽게 탑차에서 뛰어내린 그를 따라 하다 발목을 살짝 삐었다.
여기구나. ‘빌어먹게 많이 시키면서 엘리베이터는 없는 6층 개새끼’가. 이 정도면 가족이 많겠지. 정신없이 생수와 생필품을 영차영차 날랐다. 마지막 박스를 올리고 내려가다가 3층 계단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덥고 지친 숨을 내뱉고 있는데 옆에서 내려오던 사람에게 손목이 잡혀 강제로 일어섰다.
“하아… 하아, 하아.”
“힘들어요?”
괜찮다고 이런걸로 안 죽는다며 다독이는 손길을 뿌리칠 기운도 없었다. 생수가 이렇게 위험한 거였구나. 달리 보인다. 대단한 사람이었고 근육마다 가득한 사연이 있었다.
“담배 피워요?”
“하루… 하루, 에 한 대씩이요.”
“왜. 돈 없어서?”
“…네.”
내 얼굴에 돈 없다고 써 있는 건 아닌가. 그가 건네준 향긋한 수건에 땀을 닦고 있는 게 조금 눈치가 보였다.
“죄송해요. 세수라도 하고 닦아야 하는 건데.”
“괜찮아.”
몇 시간째 함께 있다 보니 조금은 자리가 편해졌다. 첫날이라 신선해서 그런 건지 그가 하는 이야기들은 재미있었고 추임새처럼 잦은 욕도 활기찬 기운에 섞여 나쁘게만 들리질 않는다.
“그래서 그 십….”
“…네?”
내가 너무 조용했나. 나 진짜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아저씨가 노발대발 화내면서 슈퍼마켓에서 뛰쳐나와 멱살을 잡았다고…. 술에 취할 거면 같이 해야지 혼자 취해 있으면 재미없다고 누군가가 그랬었다. 핸들에 놓인 한 손을 보다 언짢은 미간을 훔쳐봤다. 내가 해줄 이야기가 있나. 움켜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땀에 젖은 손바닥을 바지에 밀었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갑자기,
“갑자기… 형은 욕 안 하는데 내가 너무 상욕을 하는 거 같더라고. 오늘 처음 만났는데, 원래 이렇게까지 경우 없는 사람은 내가 또 아니거든. 그걸 짚고 넘어가고 싶다가도? 그래도 욕이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어.”
“…아, 네. 아니, 괜찮아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냐… 자제해야지. 미안.”
단어만 바꾼 험담이 이어졌다. 나였으면 소란 피우기 싫어서 할 말도 다 못하고 도망쳤을 텐데 거기서 아저씨와 맞서 싸워 이겼다며 불끈거리는 정열이 딱히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형. 근데 나 되게 되게, 되―게 사적인 거 물어봐도 돼?”
“네.”
그가 지나가는 길에 세운 곳은 카페였다. 알바생과 친한 걸 보니 자주 들르는 곳인가. 입구는 유명카페처럼 감각적인 느낌인 것 같고 안에도 아마 그런 것 같다.
“일단 이거 시키고. 뭐 마실래?”
“아니요. 저는 괜찮….”
“물은 많이 마셨잖아. 그리고 그거 너무 마시면 또 안… 아니 형은 마셔. 마셔도 돼. 그냥 공원에서 처리하고 또 가면 돼. 몇 년 전만 해도 공중화장실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지금은 되게 좋아진 거라고 현상이 아저씨가 그랬어. 아니 그래서 뭐 마실 거야?”
고개를 저어보려는데 뺨을 와락 잡혀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손목을 잡으려던 손을 뒤로 물렸다.
“뭐 마실래? 커피? 스무디? 어… 저거 뭐야. 저거 뭐예요, 누나?”
“프라푸치노.”
“프라푸치노?”
이것 좀 놓고…. 얼굴에 점점 열이 올라서 터질 것 같다.
“뭐야? 왜 자꾸 누나를 봐?”
“그게 아니라 이것 좀….”
“그만 놓아드려. 카페인 괜찮으세요?”
난 고개를 젓고 풀려난 얼굴에 손등을 문질렀다. 진짜 어떻게 하려고 벌써 이러지. 후들거리는 발을 몰래 굴렀다. 아냐. 오히려 이게 첫날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커피를 못 마시는 사람을 카페에 데려왔으니 당혹하실 만도 하잖아.”
“나도 몰랐어. 형 미안. 근데 여기 디카페인도 있고 카페인 안 들어간 것도 진짜 맛있어. 저래 보여도 꽤 좋은 것만 쓴다니까.”
“혼날래? 생과일주스 드실래요? 오늘 망고 상태가 좋아요.”
망고는 비싸지 않나. 난 망고도 맛있다며 추천하는 그에게 휘말려 졸지에 망고주스를 먹게 생겼다. 가격표에 애써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검은색 바탕에 흰 글씨가 나에게만큼은 잘 보인다. 생과일주스 6천 원. 주머니 속 핸드폰 테두리를 만지작거렸다. 카드에 2만 원은 있었을 거야.
“형. 이런 건 원래 데려온 사람이 사는 거다?”
“웬일이냐. 네가 돈을 다 내고?”
심드렁한 인상의 사장이 포스를 톡톡톡 두들기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 같은 동아리였어. 까칠해 보여도 엄청 착해. 나를 되게 이뻐하거든.”
“아… 네.”
“나 솔직히 요리 진짜 못하는데 먹고 싶어서 요리동아리 들어갔거든? 근데 다들 되게 잘하더라. 난 아직도 그냥 멸치볶음, 오뎅볶음 이런 거밖에 못해. 요리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내가 그때 뭇국을 끓였는데 무가 존나 신선해. 아작아작 씹히더라고.”
“네 뭇국은 씹히는 게 문제가 아니었지.”
“아, 감사합니다.”
제법 커다란 컵에 담긴 예쁜 노란색 생과일주스다. 괜찮다고 먹으라고 재촉하는 주인의 말에 한입 먹고 내용물을 거듭 확인했다. 망고는 딱 한 번 먹어봤는데 이런 맛이었나. 이미 나를 보고 있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웃음으로 변해갔다.
“맛있지?”
“네. 진짜 맛있어요.”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등을 쿡 떠밀렸다.
“빨리 가자. 우리 엄청 바쁘다고. 누나 또 올게.”
내게 무언가를 먹인 건 이유가 있었다. ‘괜찮을 거야’ 했던 곳이었는데 하나도 안 괜찮았다. 차가 저렇게 크고 높은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걸 모두 가지고 있으려면 이 정도는 커야지. 그는 녹초가 된 나를 질질 끌어 차에 넣어두고 에어컨을 틀어줬다. 아직 더 남았다고 했으니 지금 지치면 안 되는데 눈이 가물가물 감긴다. 망고주스도 많이 녹아서 옛맛을 잃었다. 왜 다들 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어.
“형. 잠깐만.”
다 죽어가는 목소리였던 것 같다. 왜 부르냐, 어딜 가는 거냐, 뭐 그런 소리도 했던 것 같고.
“…우리 집?”
“여기 형네 집이지?”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여기 얘기했잖아. 나 옛날에 여기 살아서 빠삭해.”
난 근처 지하철 역밖에 얘기 안 했는걸. 아닌가? 집 앞에 골목 얘기를 했던 것도 같아. 그는 내게 이른 퇴근을 권했다.
“아니요. 저도 같이….”
“나는 말이야.”
“네.”
“내일 조금이나마 멀쩡한 사람이랑 같이 일하고 싶다…?”
“그건 자고 일어나면.”
“형. 일단 딱 하루만 자고 일어나봐. 그리고 내일 다시 얘기해보자. 응?”
핸드폰을 달라고 해서 난 잠금을 풀어 그에게 건넸다. 010부터 시작하는 번호는 외우기가 까다로울 것 같다. 아침에 정신없이 들은 이름이 기억 날 리가 없었다. 성은 분명 신 씨였다. 그것만 기억난다. 그래. 택배라고 먼저 저장을 해놓고 나중에 누가 부르면 수정을….
“형.”
“네.”
씨익 웃는 얼굴은 땀에 젖고 어두워도 상쾌하기만 하다. 난 지금 어떻게 보일까.
“내 이름 까먹었지?”
“아니. 그게, 신….”
신… 신 뭐지. 신….
“신문영. 그게 내 이름이야.”
예쁘지? 어둠 속에서 밝은 입 모양을 보며 숨을 죽였다. 어떻게 저런 이름을 까먹을 수 있었을까.
* * *
이른 아침 눈만 말똥말똥 뜬 채 누워있는 이유는 일어나다가 뒤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미가 내 주위를 맴도는 이유는 배가 고프기 때문이리라.
“영진아!”
“…응.”
“엄마 나간다!”
“잘 갔다와….”
엄마는 아마 내 말을 못 들었을 것이다. 현관문이 쾅 하고 닫히고 나서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은 내 옆에 있는 줄 알았던 지미였다.
“엄마 잘 배웅하고 왔어?”
옆으로 누워 바닥에 앉아 그루밍하는 지미를 구경했다. 학학 숨소리를 내며 털을 핥아 올린다. 옷장 위에 올려둔 밥그릇으로 폴짝폴짝 뛰어올라서 달그락달그락 요란한 식사도 한다. 밥이 있었는데 왜 그랬지. 지미는 옷장 바로 옆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손을 핥고 귀를 닦았다.
“아빠 나가서 일하고 올 건데 한 번만 안아주라.”
매정해. 울리는 진동이 뭔가를 두고 간 엄마인 줄 알았는데 전호였다.
“데빌용왕님.”
― 끊는다.
“아 왜에… 큼, 왜 전화했어?”
― 오늘 뭐하냐고. 집에 와서 소고기나 한 접시 드시고 가라고요.
“…….”
― 야. 왜 말이 없어. 소고기 먹자고, 소고기. 너 먹인다고 존나 많이 준비했다.
“그, 전호야. 나 말이야.”
― 응. 너 왜.
“나 택배사에서 일해. 어제부터 했어. 경황이 없어서 말을 못 했어. 미안.”
큰 소리에 놀라 핸드폰을 뗐다.
― 너 또 그러다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진짜? 제정신이야?
“아니… 혼자 하는 거잖아. 괜찮아.”
지금은 둘이 하긴 하는데, 카페 다시 들어갔다고 할 걸 그랬을까. 그렇지만 난 급했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가 없었다. 돈은 떨어져만 가고, 이러다간 엄마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기나긴 이야기의 끝은 결국 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변함없이 궁색을 면치 못했다.
땅바닥에 앉는 것도 아니면서 너무한 거 아닌가. 문영이는 내 몸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나도 저렇게 괜찮아서 웃어주고 싶다.
“솔직히 말해. 안 괜찮지? 그치?”
“…….”
“내 말이 맞지?”
버스에서 허벅지와 다리를 주물렀지만 인정하기가 싫었다. 문영이는 내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듯 차로 돌아가 하얀색 무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리 와, 이리 와. 이게 직빵이야. 다른 건 솔직히 별로 효과 없어. 내가 아는 약사가 이게 성분도 괜찮고 효과도 죽인대.”
내가 하려고 손을 뻗었지만 손이 티셔츠 밑으로 들어와 등에 찰싹찰싹 파스를 붙였다. 소스라치게 놀라 뛰어나가려다가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아니잖아. 대낮이야.
“그럴 줄 알았어. 다리도 아프겠지.”
팔과 다리 틈 사이로 탁탁 붙여진 파스가 뜨겁고도 시원하다. 난생처음 파스를 쓰는 내게 비교 대상이 없어서 상표를 힐끔 봤다.
오늘치의 노동을 마친 나는 어제처럼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입에 걸었다. 하루에 한 대를 피워서 좋은 점도 있다. 폐가 건강해지는 느낌이랄까. 군대 가서 못된 것만 배워왔다는 전호의 말은 틀렸지만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늦은 밤이라 아래는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질 않는다. 땀 뻘뻘 낸 몸으로 안아줬으니 지미는 지금쯤 내 소금기가 묻은 털을 솎아내고 있을 것이다. 난간에 매달려 검게 변해가는 하늘을 보며 한쪽 다리를 찰랑였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작은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손이 튀어나왔고 뒤로 나뒹굴었다. 바닥에 부딪친 등이 따끔따끔하니 긁힌 모양이다.
“누구… 누구세요?”
역광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인 건 분명하지만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얼굴이 아니라 몸이.
“…누구신데요?”
“역시 네가 버린 거잖아.”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와 뭉개지지 않는 발음이. 훤칠한 키가…. 내 손목에 찬 검은 수능 시계는 이게 현실임을 알려줬다. 아. 이 사람이었나. 외제차 앞에 서 있던 사람.
“죄송합니다.”
뒷좌석 창문을 열어둔 사람. 선글라스를 벗은 모습은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고 무서웠다. 주위의 어둠을 모두 삼켜 점점 거대하게 번져가고 멱살이 잡혔다.
“…그, 그 다신. 다신 안 그럴게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던 거라고, 습관이었던 거라고 변명을 하고 싶은데 목이 졸려왔다. 팔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관용을 바랐다. 내 손을 스치는 눈에 익숙한 짜증과 경멸이 드러났다.
“저, 저 잠깐….”
바닥으로 철퍼덕 내려앉아 울컥울컥 올라오는 숨을 토했다. 어깨가 떨리는 걸 주체하지 못하고 남자의 발끝만 바라봤다. 내 앞에 쭈그려 앉은 남자가 셔츠 소매를 쓸어내며 턱에 기댔다. 그렁그렁한 시야에 가려 표정이 잘 보이질 않는다.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았어야지. 괜히 궁금하게 왜 그랬어?”
뺨을 툭툭 치는 손바닥이 제법 아파서 난 고개를 계속 돌리다 말고 뒤로 물러섰다.
“죄송하다고 했는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리로 와.”
“아니요. 제가 죄송한 건 맞지만 이런 취급 당할 이유 없습니다.”
차라리 눈코입이 흐릿했으면 좋겠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인지 캄캄해도 잘 보였다. 자신의 손을 보며 찡그린 눈매도, 이런 건 별거 아니라는 듯한 행동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정말 죄송했어요. 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실수로, 버렸습니다.”
난 앉은 상태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너 몇 호야?”
“네?”
“되묻는 거 듣기 싫은 거 알아? 그것도 실수인가?”
일어나라는 제스처에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가로등에 비춘 얼굴 반쪽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 예상이 맞았다.
“4층?”
어떻게 알았지?
“5층? 3층? 몇 층이야?”
“왜 물어보시는데요?”
“너희 집 앞에 쓰레기 좀 버려놓으려고. 다 태운 담배꽁초 같은 거 있잖아.”
“지금 이것도 무단가택침입… 이에요.”
“아니지. 난 여기 2층에 살고 있는걸.”
2층은 주인아저씨가 사시던 곳인데. 잠결에 듣던 사다리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떨리는 입술을 훑어내렸다. 마침 매물이 나서, 그랬던…. 남자가 말했다.
“네 얼굴 보겠다고 저 좁아터진 집으로 이사를 왔어.”
“…….”
“앞으로 잘 지내보자.”
점점 다가오는 남자를 피해 달아났다.
* * *
문영이는 내 눈 밑을 보며 어제 잠을 안 자고 대체 뭐 했느냐, 직설적으로 물었다.
“…나 몰래 커피라도 마셨을까? 투잡이라도 뛰는 걸까?”
“아니요.”
“그럼 우리 형이 어제 뭘 했길래 여기가 새까매지셨을까?”
고개를 갸웃갸웃 움직이며 싱글싱글 웃는 눈과 길고 시원하게 터진 입꼬리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쪽쪽 빨아먹는 것은 샷을 세 번이나 때려 넣었다는 아메리카노다.
“그냥, 걱정이 돼서요.”
“어디가, 뭐가? 미래가? 앞으로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거?”
내가 대답이 없어도 문영이는 혼자 주절주절 이야기를 이었다. 앞으로, 미래. 맞지. 그것도 중요하지만 난 2층으로 이사 왔다는 남자가 걱정된다. 어제 지미가 나를 안아주고 뺨을 비벼주고 울어주고 안겨줘도 이 불안은 풀리지 않았다. 지금처럼 생과일주스나 죽죽 빨면서 탑차에 올라타다 자빠져도 지당하다. 그러기에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사과만 할걸. 왜 말을 덧붙이고 도망을 쳤을까.
“형 괜찮아?”
“…네… 괜찮아요. 발을 잘못 디뎌서.”
“어우, 주스 안 쏟아서 다행이네. 빨리 올라가.”
손에 안기는 주스는 파인애플이다. 어제는 비상금을 털어 문영이와 사장님께도 사드렸는데 오늘은 도로 얻어먹는 처지가 됐다.
“형 근데 진짜 무슨 일인데 이래. 종일 말도 없고. 아니 원래 말이 없었지만 오늘은 더한데?”
“…….”
“우리 영진이 형이 말을 해야 내가 저녁에 맛있는 거 먹여줄 건데.”
“괜찮아요, 이것도 맛있고. 죄송해요. 제가 사드려야 하는데….”
“어제 쌈짓돈 아직도 감동.”
가슴에 곱게 모인 손과 감동받은 표정 연기가 인상적이라 놀리는 말투도 싫지 않았다. 재밌는 사람이다. 연극 같은 거 하면 잘했을 것 같다.
“형네 집 주위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거든. 저녁엔 거기서 먹자.”
“네.”
“근데 말 놓아주면 안 돼? 나 아직 어려워?”
“아니요. 제가 이게 편해서….”
“오늘이 마지막 아니지?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바로 전화 주기야.”
“…네.”
“진짜야. 누가 시비라도 털면 바로 전화해. 알았지?”
난 앞으로 어떡하면 좋나.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갑자기 차선을 변경하는 바람에 놀라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형. 내 말 듣고 있어?”
아.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 문영이는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한테 전화하라며 신신당부를 해와서 난 거듭 알았다고 대답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문영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마주 보는 머리카락에 먼지가 묻어있어 손끝으로 털어줬다. 정신 차리자. 옆에 운전하는 사람 두고 딴생각하면 안 돼. 등록금 때문에 시작했다는 일이 어느새 1년 가까이 돼서 복학을 해보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냐는 평범한 질문에도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떨어지는 내 왼손을 따르는 눈을 피해 다리 옆으로 내렸다. 눈에 띄는 짓을 저지르기 전에 실패할 가능성까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반대편에 서서 담배를 물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보이는 게 벽뿐이라 답답한 속이 좀체 풀리지 않는다. 이래서야 이곳을 고집할 이유가 없지 않나. 연기 나는 하품을 길게 늘였다. 피곤해.
“또 너야?”
“…아, 안녕하세요.”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손목시계마저 깜깜한 밤, 손바닥으로 가려 어설픈 야광효과를 발휘해보니 열 시. 슬리퍼, 티셔츠, 여름에 어울리지 않는 카디건. 편한 차림이 내 외출복보다 더 외출복 같다.
“안녕 못해.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여기 있는 거야? 몰래 버리려고 잠을 안 자?”
“지금 보시면 아시겠지만….”
“내가 거기다 주차했다면 어떻게 할 거야?”
“…그렇다면, 저 옆으로 가서 피우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반대편으로 피하자. 도저히 불편해서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을 것 같다. 거리감이 있어서 그런가 무섭거나 하지는 않는데, 아무튼 나는 저리로 갈 거야.
“이리 와.”
몸을 근처 벽에 바짝 붙였다. 저렇게 서 있으면 반대쪽도 무리인데, 그냥 어제처럼 문까지 달려, 밑으로 내려갈까….
“이리 오라고.”
“저 그렇게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아닙니다.”
“잘못했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열 걸음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필요하면 알아서 오겠지. 벽을 짚어 난간에 매달리듯 기대 담배를 피웠다. 매일 편안했던 옥상이 낯선 이웃 한 명 들어왔다고 불편한 장소가 되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까만 하늘이 점점 더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다. 이걸 연기로 가리면, 나도 모르게 잠깐 딴생각을 하는데 또다시 뒤로 몸이 넘어갔다. 바닥에 제법 세게 내려앉았지만 아픔보다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나한테 자존심 세우는 거야?”
“……지금 이건….”
“네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그, 건 맞지만….”
오라 가라 할 때 오고 가줄 걸 그랬나. 손목을 기울여 꺾는 걸 보니 오늘의 말미는 뜻하지 않은 폭력이 있을 것 같다. 내일 일도 오늘과 별반 다를 거 없을 텐데, 아니 더 많을지도 모르는걸.
“그럼 하라는 대로 해야지.”
“죄송한데….”
“아님 여기 집값 네가 대줄 거야? 차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냥 몇 대 맞아주면 끝나는 건가? 내가 말을 안 들은 만큼 들어주면 끝인가? 아까운 담배를 쳐다봤다. 장초였을 225원은 이미 2원을 줘도 안 팔릴 것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남자의 입술 끝이 비틀리고 내 손에 있던 담뱃갑이 넘어갔다. 225원이 아니라 4,275원이 증발했다.
“이래야 어디 가서 함부로 안 버리지.”
던지고 받는 담뱃갑을 보며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텅 빈 주머니가 허전했다.
* * *
근처 슈퍼마켓에 들려 파란 몸통을 한 맥주를 한 캔 사 마셨다. 아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나에게 허락해주고 싶다. 조금 흘린 맥주를 손등으로 대충 닦고 봉지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마지막 교육이라고 문영이가 선물해준 담배 두 보루, 그 완강함을 꺾을 수가 없었다. 다른 걸로 갚아야겠지.
“…아, 시원하다.”
홀가분하게 올라가는 오르막길에는 사람 한 명 없다. 난 4층을 지나쳐 곧장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 기분이 좋아진다. 처음 내게 담배를 권한 사람이 엄마였다는 건 전호도 모른다. 나는 다 마신 맥주캔을 남의 집 실외기 위에 올려놓고 담배를 피우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는 거 맞지 지금. 나 혼자, 이 옥상 위에 나 혼자인 거지. 새벽 두 시잖아.
난간 바깥을 보며 연기를 마셨다. 붉은 십자가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어서 미관을 해친다. 교회는 꼭 저렇게 많아야 하는 걸까? 조금쯤은 서로의 구역을 이해해주면 하늘도 여유로워질 것이다.
“또 피워?”
헉. 담배 연기에 사레가 들려 거세게 기침을 토해냈다. 옥상 문은 기름칠이 덜 돼 누가 들락거리면 모를 수가 없다. 여긴 오른쪽이니까 왼쪽에서 날 기다렸던가. 그런 거라면 너무 무서울 것 같다. 새벽 두 시인걸. 봉지를 꺼내 눈앞에 들어 올렸다.
“오, 오늘은 여기다 버리려고요.”
“그래?”
“네.”
“너 돈 많아?”
“…아니요.”
“하긴 돈이 많은데 이런 집에서 살 리가 없지.”
스스로 말하고 납득도 혼자 한다. 내게 하는 말이 아니라 혼잣말인데도 불구하고 조용해서 그런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남자는 실외기에 올려둔 또 다른 봉지를 보고 있었다.
“담배가 두 줄이나 있네?”
“아, 이건….”
“돈 많아?”
“……선물을… 그, 같이 일하는 동생이 준 건데요.”
“하루에 몇 대 피워?”
“…한 대요.”
“그럼 내가 재수 없게 하루에 한 대 피우는 애한테 걸린 거네.”
그의 독백에 몸이 조금 쪼그라들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라서 더 뜨끔했다.
“요즘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예?”
“너 혹시 택배 날라?”
“네?”
“되묻는 병이라도 걸렸어?”
“어… 아니요. 아닙니다. 근데 제 일은 왜….”
“담배 피우려고? 적선 받은 거야?”
방금 친구한테 받았다고 대답하지 않았나? 적선이라, 적선인가. 남자는 내 손에서 담뱃갑을 빼앗아 한 손으로 던지고 받고 있었다. 설마. 가져가려는 건 아니겠지. 반쯤 돌린 얼굴은 흐릿해도 웃고 있다는 건 알았다.
오늘 쓰레기 봉지도 준비해왔고 앞으로도 거기다가만 버릴 건데요. 생각한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이유는 남자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천천히 걷는 것 같은데 도망가면 곧장 붙잡힐 것만 같아서 난간을 움켜잡았다. 주위의 공기가 나를 얼리고 발가락에도 저릿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못 이길 텐데 뭐하러 힘을 주고 있는 거야.
“내가.”
“네?”
“네 나쁜 버릇을 고쳐줄게.”
사람이 아닌지도 몰라. 엄청 가까이 있는데도 숨소리 하나 안 들리잖아.
“매일 이 시간에 퇴근해?”
“…….”
“왜 되묻지도 않아? 너 되묻는 거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당신이 날 보면 얼마나 봤다고. 뻑뻑한 목덜미에 서늘한 땀이 흘러내렸다. 여기서는 안 돼.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냄새가 나서 코끝을 비볐다.
“원래는 더 빨리 퇴근해?”
“…네.”
“그럼 새벽 두 시는 위험하니까 한 시면 되겠다.”
“네?”
“또 되묻네.”
입을 틀어막고 하품하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안 오면 나 정말 너희 집 찾아갈 거야. 3층부터 5층까지 다 눌러 볼 거야.”
“알겠….”
“그러니까 우린 약속한 거야. 앞으로 넌 매일 새벽 한 시. 나하고 여기서, 만나기로.”
내가 담배 피우는 걸 굳이 확인하러 이사를 왔고, 투기를 막으러 시간을 잡는 남자의 행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원래 사람은 다양하고 내가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도 아닌 이상 그걸 다 알 수도 없다. 이건 저명한 심리학자도 모를 것이다. 내가 당했으니 타인은 당하면 안 된다는 부지런하고 이타적인 그런 건…가? 그렇지만,
“대체 왜?”
늦은 나를 신랄하게 질타하는 원망 섞인 울음소리가 예쁘고 낭랑해서 지미를 담뿍 안아주고 내 작은 방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아빠가 미안해. 앞으론 일찍 다닐게. 문영이가 끝나고 저녁을 사줘서, 마지막 날이라니까 일찍 올 수가 없었어.”
앞뒤로 두어 발자국이지만 예전엔 방이 하나라서 엄마하고 함께 잤으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힘들다고 요 며칠 소원하게 군 것 같아서 난 씻기 전에 지미를 위한 자동장난감을 틀어줬고 나가는 길에 안방 문 밑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없나 샅샅이 훑어봤다. 손톱 끝으로 가볍게 보일러 전원을 틀고 재빨리 베란다의 문을 닫고 왔다. 아마 그냥 씻으라고 할 것 같지만 이미 몸에 익어버린 속임수다.
커다란 수건을 뒤집어쓰고 나온 난 보일러를 끄고 베란다도 열고 김이 풀풀 나는 화장실을 돌아봤다. 청소했고 창문도 열어놨고. 지미는 내 방 침대 한복판에 널브러져 몸을 핥고 있었다.
* * *
“너 새벽에 담배 피우러 가?”
“응.”
“너 잠깐 나갔다고 지미가 찾고 난리도 아니었어. 되도록 일찍 들어와. 엄마도 걱정돼.”
아침 일찍 나를 깨운 엄마는 어제 가져왔다던 이름은 어렵지만 건강에 좋다는 차를 건넸다. 도자기 컵을 양손에 안고 따뜻함을 음미했다. 오랜 시간 약을 먹은 내가 고양이 한 마리에 차도를 보였다는 건 아무래도 믿기 힘든가.
“이거 먹고 다시 자. 어유 저놈의 새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또 먹고 자고. 상전도 저런 상전이 따로 없어.”
엄마는 내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고 등을 토닥였다.
“힘들면 그만둬. 무리하지 말고.”
“응. 나 원래 잘 포기하는 거 알잖아.”
“가끔 미련할 정도로 고집부리는 것도 알지.”
“걱정하지 마.”
“엄마가 미안해. 근데 너 힘들어서 거실에 누워있는 거 보면 때려치라는 소리가 자꾸 나와.”
엘리베이터로 혼자 들어가는 시간이 차라리 나을 때가 있다. 누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벌벌 떨기보단 힘들어서 한숨을 돌리는 일이 잦아진 건 좋은 변화일까. 남자와 이상한 약속을 잡은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고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문영이는 매일 밤마다 전화를 해서 내게 일기를 쓰듯 하루를 들려주곤 했다. 어떤 날은 오늘처럼 점심시간을 노려 찾아오기도 했다.
“형, 이제부터 우리 매일 여기서 밥 먹자. 바쁠 것 같으면 내가 빨리 하고 도와주면 되잖아.”
“너도 집에 가서 쉬어야지.”
“왜… 나랑 같이 점심 먹는 게 싫어?”
“아니. 사실 나 아직 많이 느려서 점심시간을 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무조건 새벽 한 시 전에는 모든 걸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점점 나를 조여온다. 문영이가 혼자 할 때는 열 시 전에 끝나던 일이다. 심지어 그에 비해 구역도 훨씬 좁은데 열두 시가 넘어서야 거의 끝이 보이고,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조급해져서 실수를 연발하고, 그럼 시간이 또…. 앞으로 익숙해지면 잘 될 거라는데 글쎄. 문영이가 지금 욕하는 진상들은 아직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아니 나 택배 나르는 남잔데 고양이 똥도 치워야겠어? 여행 갔는데 어쩌라고.”
나는 얼마 전에 개밥 주고 나왔어.
“내가 남의 집 개 사료를 날라주고 있는데 계단에 있는 쓰레기도 버려줘야겠냐고.”
작은 그릇으로 두 컵.
“혹시라도 그런 거 해달라고 하면 절대 들어주면 안 돼. 버릇 나빠지거든. 걔네도 다 짐승이랑 똑같아.”
“…응.”
“절대 하지 마. 형은 부려먹는 것도 모르고 네네, 네네 할 것 같아.”
“아니야. 나도 다 알아.”
그건 그냥 그 소형견이 나를 보는 눈이 너무 사납고도 애처로워서 해준 거였어. 문영이는 내 쪽으로 장조림과 계란프라이를 밀었다. 카페에서 내가 동료들을 피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이 뭘 편식하는지도 알았을 것이다.
“문영아.”
“응.”
“계란이 맛이 없어?”
오징어 젓갈에 가져간 젓가락이 멈췄다.
“…비려.”
젓갈은? 난 계란프라이의 흰 부분만 따서 그릇에 올려줬다.
“싫어?”
“아니. 이 정도는 괜찮아.”
문영이는 새침하게 코끝을 찡그렸다. 언제였지. 사흘 전인가. 다 끝났다고 거짓말을 하다 걸린 적이 있는데 벌칙으로 밥을 얻어먹었다. 그때 처음으로 문영이네 집에 가본 적이 있다. 아파트 입구부터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커다란 단지에 살고 있었는데 외부 주차장에 세워둔 거대한 탑차가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아서 더 기억에 남았다.
“형, 다시 말하지만 그거 우리 집 아니야. 아는 형한테 얹혀사는 거야.”
“응.”
안 믿는 거냐는 세모 눈이 만화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를 닮았다. 입체적인 사람 앞에 나 같은 평면은 마땅히 묻혔으면 좋겠다.
“진짜라니까, 정말 얹혀사는 거야.”
“알았어.”
전호나 엄마에게 미안하지만 이제까지 난 새로움과 닿으면 당장이라도 까무러칠 것처럼 예민하게 굴어 그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고된 노동과 새로운 경험, 그리고 긴 시간과 낯선 사람이 내게 도움이 될지 모르고 애써 모든 변화를 꺼려왔다. 지미도 변화의 한 종류라서 통한 것일까. 그 어떤 것도 정확히 알 수 없다.
* * *
까마득한 아래를 보며 눈 밑을 훔쳤다. 창문 밖은 고층 건물이 가득하고 내가 저런 곳에서 일할 줄 알았던 꿈 많던 엄마는 그 꿈을 불사른 지 꽤 되었다. 엘리베이터 도착음과 함께 지친 몸을 싣고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까만 세상이 공포로 캄캄하게 바뀌어가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고 피범벅이 된 하체가 물에 잠겨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 번만. 딱 한 번이면 되는데. 힘 풀어. 내 팔과 다리를 단단히 붙든 것들이 떨어지지 않고 무거워졌다. 눈을 감기 무섭게 픽픽 튀어대던 빗물이 언제쯤 멈췄었더라. 이럴 땐, 다른 생각을 하는 거야. 좋은 생각, 좋은…. 거기선 일부러 소리 내서 울지 않았었다. 내 갈라진 목소리가 거북해서 숨을 죽이고, 뒤에서 쫓아온 어둠이 두려워 굳게 닫힌 문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문 밑의 작은 틈에 손가락을 욱여넣고 상처가 나고 부러질 때까지 매달렸었나.
발이 벽에 쿵 닿았을 때 눈이 번쩍 뜨였다. 더러운 바닥에서 일어나 코끝을 한번 훑고 손목과 팔을 타고 올라갔다. 컨디션이 별론가. 뒷목과 발끝에 피가 도는 감각 때문에 눈물이 고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경비원 옷을 입은 아저씨가 내리는 나를 보고 괜찮냐고 묻는 것도 같다. 손가락과 손목으로 하염없이 닦아내고 도망치듯 건물을 벗어났다. 누가 보면 일하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 거야.
“오랜만이네?”
하나도 반갑지 않은 남자가 실외기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언제나 난 운이 안 좋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정말 최악인지도. 이제까지 한 번도 올라온 적 없었는데 왜.
“안녕하세요.”
“표정이 왜 그래? 오랜만인데 이렇게, 이렇게 웃어줘야지. 잠옷은 네 취향이야?”
“엄마가….”
꽁초만 저기다 버리면 되는 일이다. 검은 봉지도 찾아서 저기 걸어놨고 그 뒤로는 바깥에다 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남자는 내 노란색 잠옷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방금 내 손끝을 벗어난 건 뭐였지.
“…내 앞에서 지금 밖에 버린 거야?”
“…….”
“여기에 남의 꽁초 주워다 넣은 건 아니지?”
흔드는 봉지 안의 저 꽁초들은 내가 버린 게 맞는데. 왜 바깥에다 버렸지. 나도 모르게 도망가다 뒷덜미를 잡혀 어깨와 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윽….”
“안 되겠어. 앞으로 우린 매일 봐야겠다.”
“저, 죄송합니….”
“저기다 주차했으면 어쩔 뻔했어?”
그는 말이 없는 내가 답답한지 발목을 툭툭 걷어찼다.
“폭… 폭력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잘못한 게 맞긴 한데.”
“저거 보닛만 얼마라고 생각해?”
“…….”
“저거 되게 비싼 거야. 이런 데 사는 거지가 감당할 물건이 아니거든. 아마 그럴걸? 사실 나도 잘 몰라.”
내가 보닛을 얼마나 태워 먹었는지 흔적 하나하나가 다 찍혀있다고 했다. 블랙박스는 장식인 줄 아냐는 말에 겁을 집어먹고 무거운 그의 발목을 간절히 잡았다. 난 지금 함부로 다치면 안 되는 몸이다. 이미 발목이 바깥으로 틀어질 정도로 짓밟고 있으면서 살살 하고 있다는 거짓말도 너무하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해서. 근데 이것 좀 치워주시면….”
“넌 가해자치고 아주 뻔뻔해.”
“피해자분이 조금만, 봐주시면….”
힘이 조금 빠진 그의 발목을 뽑아내고 급하게 도망갔다. 끼릭거리는 문을 열고 한 발 앞으로 내딛던 몸이 떠밀려 계단 난간에 늑골쯤을 부딪치고 뒤로 나자빠졌다.
“으으… 아.”
센서 등이 켜지지 않는다. 나를 밀었을 남자도 온데간데없었다. 층계참으로 흘러드는 달빛 한 자락도 아쉬운 건 내일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이었다. 끈끈한 검정색 이불을 뒤집어쓴 것 같다. 의사는 내게 가위에 눌리는 것과 비슷하냐고 물었지만 한 번도 가위에 눌려보지 못한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죄송해요. 다신, 흑 다신… 다신 안 그럴게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뭐?”
“제발 그만해주세요. 잘못했어요.”
“…야. 가해자.”
손바닥을 아무리 비벼도 눈앞을 가린 장막이 거둬지질 않는다. 울면 보였었는데 왜 오늘은 아니지. 공포에 깔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무서워. 문 좀 열어줘. 이미 젖은 몸에 차갑고 더러운 물이 번식해 나를 함부로 침투했다. 땀인가, 비였나. 모래에 다친 무릎이 흘린 피였을까.
“형. 형, 제발 흑, 한 번만 문 좀….”
아. 남자가 팔을 내리고 있었다. 주황빛의 동그란 중심이 내게 쏟아진다. 갇혀있지 않았는데. 어디 갇혀있는 것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니었어? 이건 전에 다 지나온 거잖아. 대체 언제까지. 주먹 쥔 손에서 땀이 흘러내려 바지를 몰래 적셨다.
“너 괜찮은 거야?”
“…제 이름이요….”
“너, 괜찮은 거냐고.”
내 이마를 덮는 손은 그의 것이다. 손이 굉장히 따뜻하고 크다. 비슷했어. 사람 손은 다 비슷해. 전혀 다른 사람이야.
“제 이름… 하영진이에요.”
저 사람한테 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인데. 갑자기 이러면 누구라도 저렇게 놀라겠지. 그에게 미안했고, 지금도 나만 신경 쓰는 내가 죄송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제가 그… 폐소공포증이 있어서. 가끔, 가끔 이럽니다. 정말 죄송해요. 진짜, 죄송합니다.”
뒤돌아볼 틈도 없이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거의 다 와 가는데 무릎이 꺾여 시야가 크게 흔들린다. 손잡이를 움켜잡은 손에 물이 넘쳐서 밑으로 미끄러졌다. 북받치는 무언가를 참고 현관을 열었다. 늦은 시간엔 조용히 해야 하는데 엄마를 깨우고 전호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통에 얼굴을 박고 소리 없는 헛구역질로 먹은 걸 모두 게워냈다. 더러운 입속을 헹구는 손에도, 뱉어내는 거품에도 피가 섞여 있는 걸 보니 입술이 터졌나.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문에 기대앉았다. 내 앞에 의자, 책상, 컴퓨터, 연필꽂이, 필기구, 지난달에 머문 달력, 그리고 저 옆에 있는 게 뭐더라.
“윽, 흐으… 흐읍. 끄윽….”
내가 잘못했던 걸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그때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이유가 있긴 했나. 내 등에서 나는 미약한 소리에 찬물을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문을 열고 졸린 눈의 지미를 끌어안았다. 수북한 털에 파묻히듯 코를 묻고 남은 눈물을 정신없이 쏟아낼 때였다.
“또 왜.”
화장실 문이 잘못 닫혀있었던가. 아닌데. 나 진짜 조용히 했어. 나는 문을 닫았을까. 조용히 할걸. 엄마의 피곤한 눈이 나를 전혀 타박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머리는 제멋대로 해석하고 또 그것을 번복했다. 공부도 잘하는 부자 친구에게 나도 모르던 선망이 티가 나서 그랬던가.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아.
“이제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지?”
“…응… 아니었나 봐.”
엄마가 곁에 없었을 땐 알리고 싶었는데 정작 지금은 숨고만 싶어서 지미를 안은 팔을 바짝 당겼다.
“영진아. 엄마는….”
“…….”
“전부터 생각했는데 난 네가 목표보다는 중심을 가졌으면 좋겠어. 언젠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네가 또 무너졌을 때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그런 거 있잖아. 친구나 가족보다는 직업 같은 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깐만.”
잠시 떠나갔던 엄마가 시원한 보리차를 건네줬다.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한입을 삼켰다.
“나한텐 그게 너지만 너는 다를 수 있으니까.”
내가 엄마한테 짐이라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엄마의 생활을 모두 부숴버리니까 내가 싫을 거야. 전호도 마찬가지야. 나아가고 싶어도 정체된 내가 계속 눈에 밟혔을 것이다.
“……내일 나가야 하니까 잘게.”
“응. 침대에 누워.”
내 한쪽 팔에는 지미가 갇혀있었다. 작은 손이 내 심장께를 꾹 눌러온다. 왜 이렇게 무거울까. 차라리 잊을 수 있는 약이나 치료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몇 시간이 지나고 지미가 잠꼬대를 하며 쩝쩝 입맛을 다신다. 거뭇한 날이 점차 밝아지는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지미가 기지개를 켜며 눈을 작게 떴다.
“…….”
아직도 안 자냐는 듯한 의문스러운 표정. 눈을 감았다.
피곤함을 감춰준 건 부은 눈이었다. 난 거울에 붙어 눈두덩이를 한 번씩 눌렀다.
“하영진! 나와서 불 좀 꺼!!”
재빨리 나가서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밸브를 잠갔다.
“이거 뭐야?”
“빨리 마셔. 몸에 좋은 거야. 이번에 산에 가서 따왔어. 오빠가 그러는데 이게 몸에 그렇게 좋대. 활기가 돈대. 온몸이 뜨끈뜨끈하대.”
팔팔 끓는 물을 머그컵에 담아 먹어봤다. 써. 봉지에 싸주는 건 뭘까. 주먹밥인가? 두 번째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쓰다.
“너 매일 저녁에 삼김 먹지 말고 이거 먹어. 내가 시간이 없어 못 챙겨준다고 너도 사 먹으면 어떡해? 엄마가 작은 것부터 아끼라고 했지.”
“응….”
몰래 세 개 중 하나를 빼서 반찬통에 옮겨놓고 은박지를 잘 닫았다. 어차피 저녁엔 힘이 빠져서 먹을 게 잘 들어가지 않으니 두 개도 충분하다.
“엄마 오늘 몇 시 출근이야?”
“곧 나가야 해. 너 얼른 나가. 늦겠다. 혹시나 네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엄마가 늙어보니까 젊은 애들이 늦으면 그게 그렇게 꼴 보기 싫더라.”
지미를 졸졸 쫓아다닐 때가 아니었네. 어느새 뒤따라온 예비탈출범을 다리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어제 그 난리를 피운 게 꿈만 같다.
“영진아.”
주먹밥 뺀 걸 들켰나. 돌아본 현관문 앞에는 엄마가 지미를 안고 서 있었다.
“너 이름 뭐야?”
“…하영진.”
“너 이제 김영진 아니잖아.”
“응.”
“주먹밥 잘 먹고. 절대 굶지 말고. 힘들면 바보같이 버티지 말고 관둬. 너 살 빠지는 거 보느니 차라리 내가 고생하는 게 낫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이 주름으로 가득하다. 엄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겠다고 맹세했던 아빠는 나를 참지 못해 떠나갔다.
* * *
문영이는 오늘 일도 많고 약속이 있어서 도저히 시간을 뺄 수 없겠다고 했다.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는데 지나친 사과에 대응할 줄 몰라 얼버무렸다. 점심을 먹으면 분명 난 토할 테니까 만나지 않는 게 나아.
졸음운전이 무섭다는 핑계로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하나 전화부를 휘리릭 넘겨봤다. 0.2초도 가지 않는 스크롤이 창피해 전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웬일.
“어제 잠을 못 자서.”
― 재워주랴? 내 꾀꼬리 같은 자장가가 듣고 싶었냐?
잠이 확 깨네. 울퉁불퉁한 목소리가 반가운 건 다행히도 나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 골목에 사는 전호가 이웃사촌 얼굴 한번 보기 어렵다며 내게 오늘 밤 시간을 내어달라 했다. 백수에게도 친구와 만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퍽 간지러운 투정에 핸들을 양손으로 쓸어내렸다.
“내일 쉬는 날이거든. 같이 점심 먹을까?”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친구는 단 한 사람뿐이다. 나보다 키도 훨씬 크고, 몸집도 크고, 목소리도 크고, 모든 게 큰.
“전호야.”
문영이가 들으면 욕을 할 고객들이 여럿인 하루였다. 난 우르르 몰려온 한탄을 내쫓고 웃는 얼굴로 전호를 맞이했다. 곰 같은 품에 안겨 휘둘리다가 잠깐 떨어져서 내 위아래를 쓱 훑는 눈에 조금 겁을 먹었다. 웃을 땐 푸근푸근 귀여운데 웃지 않으면 냉정해 보인다. 야무진 입매 양쪽 끝, 작은 보조개가 들어갔다. 보조개가 들어간 곰.
“하영진. 나 보고 싶었지?”
“아니?”
“새끼 한번을 보고 싶었다 안 하네.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전호야. 나 이번 달 25일에 월급 받아.”
“그래. 그땐 네가 나 맛있는 거 사줘. 존나 9첩 반상 이런 거 기대하고 있으면 되냐?”
어깨에 걸쳐진 팔이 무겁다. 난 바깥쪽으로 몸을 빼고 전호가 날 보듯 위아래를 훑었다.
“키 줄어들어.”
“나눠주는 거야. 나눠주는 거.”
힘으로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건 여전하다. 이래서 내 키가 덜 큰 게 아닐까. 아빠나 엄마의 키도 큰 편이라 난 185는 거뜬히 넘길 줄 알았지만 벌써 서른이 다 되었다.
“괜찮아. 너 정도면 큰 거지.”
“아니야. 다들 나보다 커.”
“야. 너도 대략 큰 거야. 그렇게 운전하고 다니면서 보행자는 안 보냐? 날 믿어. 넌 나보다 작아. 하지만 크지.”
그치만… 같은 건물에 사는 남자도 너만큼 크고, 문영이도 나보다는 크고. 현상이 아저씨는 나랑 나이 차도 있는데 나보다 큰걸. 나열하기도 피곤해서 그것마저 우울했다.
“가자. 진짜 맛집 찾았어. 나 요즘 다이어트 한다고 산책한다고 했잖아. 그러다가 저기 저 편의점 옆에 새로 생긴 데, 들어가서 먹어봤는데 진짜 조오오온나 맛있어.”
여전히 재밌게 사는구나.
“그건 그렇고 너 일하는 건 괜찮아? 어려운 건 없고?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바로 말해.”
“거의 혼자 하는 일이라 그런 사람 없어.”
수취인들도 거의 문짝이고 연락해봤자 다 핸드폰이라서. 덥다면서도 전호가 어깨동무를 풀지 않아서 나도 가까이 붙었다.
“웬일이냐? 뭐 잘못 먹었냐?”
“오랜만이니까… 그리고, 알잖아. 이제 괜찮아.”
머리카락을 털고 오른쪽 어깨를 툭툭 턴 커다란 손이 보여 발끝에 신경을 쏟아뒀다.
소주를 흘리지 말았어야 했다. 목덜미에서부터 올라오는 향에 휘청이면서도 옥상까지 올라가는 내가 비참하다. 왜 지미에게 돌아가지 못하는가. 4층도 힘든데 왜 5층을 넘어 옥상으로 올라가야 하더라? 왜 올라… 왜 올라가지?
“…하아, 하아. 아, 맞다.”
오늘 솔직히 안 올 것 같은데, 어제 그 난리가 났었는데 설마 올까. 난 새벽 세 시의 고요함을 좋아하니까 안 올 거야. 호기롭게 문을 열어젖혔다. 지난번처럼 당하기 싫어서 왼쪽부터 들어가 안쪽을 확인했다. 역시 3층 이웃이 올려놓은 화분만 줄지어 서 있다. 난 중간에 갈림길로 돌아와 오른쪽으로 몸을 홱 틀다가 무언가와 부딪쳤다.
“으아아악! 아….”
“뭐하는데?”
“…….”
“뭐하느냐고. 거기 뭐 있어?”
왼쪽을 둘러보고 온 남자는 ‘아무것도 없는데?’ 하며 내 얼굴을 유심히 봤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 제가.”
“술 먹었어?”
“…네. 오랜만에 친구하고 약속이….”
얼굴 가까이 들이미는 코를 피해 위로 고개를 도망쳤다.
“뭐 마셨어?”
“…막걸리요.”
“술인가? 어제 그래서, 나한테 쪽팔려서 마신 거야?”
왜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거지? 입 벌리면 막걸리 냄새가 날까 봐 두렵고 대체 이유를 몰라서 숨죽이고 서 있었다.
“맡아보게 입 열어봐.”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빨리. 재촉하는 엽기적인 행각에 그를 떠밀고 난간으로 대피했다. 미친 건가. 술 냄새는 나지 않는데 어디에 취한 거지.
“하, 하지 마세요.”
“왜? 나 막걸리 한 번도 안 마셔 봤어.”
“그게 아니라, 막걸리만 먹은 거 아니에요. 나, 나가서… 나가서 사드세요. 장….”
장수가 아니었는데. 난 뒤늦게 기억난 이름을 외치며 왼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필요하시면 바로, 사다드릴까요? 편의점에 많아요. 제가 사다드릴게요.”
“아니야. 난 맡고 싶은 거야.”
제발 먹고 싶다고 해줘. 움직임이 느려서 방심하다 손목을 잡히고 멱살이 붙들렸다. 풀고 싶은데 힘이 전혀 안 들어간다. 내 손이 닿은 옷자락을 털어내지 않아도 될 테니 그에게도 이게 나을 것이다.
“하영진.”
“네?”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나… 남자요?”
“응. 너 게이야?”
아니. 전호는 내 친구인걸. 아니라고 말해도 그는 딱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술도 깨고 나니 굳이 담배 안 피워도 될 것 같다.
“아닌… 전, 걔는 제 친구예요. 고등….”
“근데 왜 그렇게 안 떨어지고 붙어 있어? 넌 원래 같은 성별하고도 그러고 지내?”
어디서부터 정정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러고’가 어떤 거지. 어깨동무가 그렇게 심각한 스킨십이었나. 그의 갸웃거리는 고개를 따라가고 싶다.
“키 큰 남자하고만 노네. 그쪽인가? 얼마나 받아?”
“…피해자분은 남자도 되시나 봐요?”
“뭐?”
“말씀하실 때 거부감이 없어 보이셔서요.”
“…….”
“혹시 동성애자세요?”
“누가 게이라고?”
“왜 저한테 함부로 몸 파냐고, 하세요?”
“네가 처신을 그렇게 하니….”
술을 괜히 걸쳤는지 난 어느새 시비를 거는 인간으로 거듭났다. 얼떨결에 명치를 맞은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멱살이 놓이고 흘러내리다시피 바닥으로 떨어졌다. 변명을 하자면 술도 먹었고, 발로 찼고, 버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대 맞으면 되지.
“저도 사람 팰 줄 압니다. 피해자분만 남자 아니에요. 저도 멀쩡한 남자예요.”
“누가 너더러 남자 아니라고 해?”
나에게 물어보는 거면서 나는 쳐다보지 않는다. 그럴 리가, 누구도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남자의 시선이 나를 똑바로 향해서 말문이 막혔다. 어두웠지만 그린 듯한 웃음은 선명히 보인다. 원래는 저렇게 웃는 사람이었구나. 어제까지는 어딘지 이상했는데 오늘은 이상하지만 멀쩡해 보였다.
“아… 네가 그렇게 생각하나 봐.”
“네?”
“네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피해망상도 그따위로 하는 거 아닐까?”
“…….”
“네 반응의 방향이 이상하다고. 네가 이러니까 내가 이러는 건가?”
내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쭈그려 앉아 내 이마를 검지로 톡톡 쳤다. 저런 눈은 많이 봐서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을 풀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엇나가서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러버렸다. 옥상이 문제일까, 남자가 문제일까.
“그… 발로 차서 죄송합니다.”
“됐어. 피해자는 맞아야 합의금도 더 받는대.”
합의? 합의라니. 경찰을 부를 계획인가. 혹시 합의금도 할부로 결제할 수 있나? 검색하려고 데이터를 켜는데 핸드폰이 내 손을 떠났다.
“지금 뭐 하시는….”
“넌 뭐 하려고?”
어느새 일어나서 내 핸드폰을 던지고 받는 걸 보니 기시감이 들었다. 혹시라도 떨어뜨리거나 던지면 큰일 나는데…. 내 시선은 여지없이 던져지는 핸드폰을 따라갔다.
“뭐 하려고 했어?”
“그 합의금을… 할부로, 결제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요.”
그때 조금 높이 띄워진 핸드폰이 남자의 손에 안정적으로 들어갔다. 절로 안도의 숨이 새어 나오는 순간 그대로 핸드폰이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엉거주춤 일어난 내 몸이 채 굽혀지기도 전에 떨어진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제발. 간절히 빌었지만 액정을 가로지르는 금이 가 있었다.
“아니… 아니, 저기요.”
“이 정도면 적당한가?”
“…….”
“합의금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양손을 마주쳐 탁탁 소리를 내며 털어내고는 담배를 피울 건지 물어왔다.
“아니요. 안 피울 거예요.”
“그럼 내일 봐.”
육중한 문이 쿵 닫히고 주머니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집으로 내려오니 전호가 거실에 앉아서 나를 반겨줬다. 내일 만나기로…. 무슨 상관이야. 도저히 인사해줄 기분이 안 나서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게 뭐냐? 어디 갔다 와?”
“담배 피우다가 옥상에서 떨어뜨렸어.”
“그래… 야밤에 수고했다.”
“근데 너 왜 여기 있어?”
“내일 너 끌고 나가려고.”
전호는 능숙하게 낚싯대를 흔들었고 난 보일러를 켜고 수건과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합의금을 안 무는 건 분명 좋은 일인데 액정이 박살 난 게 싫다. 이게 무슨 도둑놈 심보야. 돈이 있는 사람이니 이 정도는 내심 봐줄 거라고 생각했었나. 이런 속물 같은 생각을 지우기 위해 화장실 청소도 하기로 했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거울, 샤워기, 세면대를 빛이 나게 닦고 남은 거품으로 바닥을 북북 닦으며 정신을 깨끗이 만들었다. 다음부터 안 그러면 돼. 무엇보다 사람을 함부로 때리면 안 되지. 술에 취한 범죄자들을 그렇게 욕하더니 같은 사람이 되면 안 돼. 화장실 창문을 연 뒤 뜨거운 공기를 더 빨리 가라앉히기 위해 차가운 물을 사방에 뿌렸다. 나가기 전 문에 붙은 작은 거울에 일부러 치아를 드러내 웃어보고 입술을 감췄다. 입술이 경련하는데, 턱이 어딘지 모르게 자연스럽지가 않아. 이게 연습해서 될 일인가. 한 번 더 씩 웃어봤지만 문영이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안 그래 보여도 저건 꽤 신난 거다. 보기만 해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귀여웠다. 하나는 되게 크고 하나는 되게 작고.
“지미 존… 진짜 많이 컸다.”
“응. 근데 엄마 오늘 안 들어오니까 욕해도 돼.”
전호는 나를 흘기며 왜 말을 안 해줬냐고 씨근덕댔다. 만약 엄마가 있었다면 현관문 소리를 듣자마자 손님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을 것이다.
“뭐라도 먹을래? 여기 주먹밥 있는데.”
“너나 먹어. 시발 빼빼 말라가지고 좆도 마음에 안 들어.”
지미는 지금 본분을 지키느라 지각한 보호자는 안중에도 없다. 자세를 잡고 장난감에 덤벼들다 말고 전호의 팔을 덥석 물었다. 아, 저거 엄청 아플 텐데. 사진을 찍는 데 열중했다.
“야! 이 새끼 왜 이렇게 물어?!”
무릎과 손목에 구멍이 생긴 기념사진.
“아 진짜 누가 하영진 새끼 아니랄까 봐!!”
전호가 흥분한 지미를 피해 일어났다. 끝까지 따라가서 종아리를 물고, 발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소파 위로 도피해 속상해진 전호가 나를 째려봤다.
“야, 하영진!”
“응?”
“주먹밥.”
위생장갑 하나와 주먹밥이 담긴 통을 건넸다. 전호는 드라마에 나오는 외과 의사처럼 고상하게 장갑을 끼고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게 그거, 그… 샤… 샤, 샤? 샥스핀이 아닌데.
“뭐하냐?”
“아니, 잘 먹길래.”
이럴 줄 알았으면 내 것도 그냥 남겨놓을 것을…. 복스럽게 먹는 전호를 보다가 전용 손톱깎이를 꺼내 들었다.
내가 아까와 다른 게 있다면 팔에 액정과 닮은 상흔이 생겼다는 점이다. 전호는 너도 별반 다를 거 없다며 나를 놀리다가 거실에 깐 이불 위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꼼지락댔다.
“대체 지미 새끼는 발톱만 깎으면 왜 저러는 거냐?”
“전 주인이 잘못 깎아서 상처를 냈던 것 같대. 그럼 그럴 수도 있다더라고.”
“그럼 쟤는 평생 저러는 거야? 죽을 때까지?”
“글쎄, 내가 더 조심해야지. 또 다치지 않게.”
이전에 살던 사람이 붙여놓은 야광별이 천장에서 미약한 빛을 낸다. 새벽부터 피곤하다.
“너 여기 이사 온 지 얼마나 됐지?”
“이제 1년 정도?”
“가까운 데 사니까 좋지? 여기 길냥이들 봐. 존나 우리 전에 살던 데였으면 길냥이들 다 뒤졌어.”
“응. 여기가 확실히 인심이 후한 것 같긴 해.”
“거긴 삭막했지. 가까이 사니까 너도 좋지 않냐? 어머니랑 싸우면 우리 집으로 오면 되고. 배고프고 심심할 때도 우리 집으로 오면 되고. 그치. 가까이 사니까 좋은 점밖에 없잖아. 뭘 그렇게 고집을, 고집을….”
“응. 고마워. 덕분에 좋은 집 구했어.”
“고맙긴… 야, 근데 핸드폰 어떻게 할 거냐?”
“월급 들어오면 싼 거로 교체하려고. 액정 말고는 별문제 없는 것 같아서 그냥 쓸까도 생각 중이야.”
전호는 핸드폰은 요즘 어느 기종이 나은지 얘기했다. 언급되는 핸드폰들은 못 살 테지만 잠자코 들었다. 상세한 설명까지 덧붙여줬기에 알아듣기 어려웠다. 배터리와 카메라는 절반 정도 이해했지만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이야기와 램과 씨피유가 어떻고 하는 얘기를 듣다 보니 뇌가 꼬이는 느낌이 든다.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가만 듣고 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검은빛의 색이 난무하고 땅과 하늘은 분간하기 힘들 만큼 이어져 있다. 꽃과 풀 한 포기 없는 허허벌판에는 사람 하나가 서 있었고 그 사람마저 형체는 새까맣다. 내가 무엇을 꾸었는지도 특정하기 어려운 꿈은 차라리 반갑기까지 하다.
목이 말라 급한 대로 수돗물을 마시고 자리로 돌아왔더니 지미가 내 베개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배에 얼굴을 부비작댔더니 양쪽으로 몸을 뒹굴뒹굴, 난 다시 배에 코를 박고 후후 바람을 불었다.
“아침부터 별….”
눈을 안 떴으면서 어떻게 알았지. 난 전호의 눈 위로 손을 휘휘 저어보고 지미를 다시 괴롭혔다. 작은 손이 내 얼굴을 있는 힘껏 밀어버려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귀여워… 너무 귀엽지?”
“뭐 귀엽지 않은 건 아닌데… 집에 먹을 거 있냐?”
“모르겠어.”
전호는 냉장고를 뒤지고 난 싫다는 지미를 안고 계속 빈둥거렸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보니 먹을 게 있나. 근데 밥은 있나?
“전호야, 밥 있어?”
“……없다.”
난 밥을 하고 전호가 국을 맡았다. 반찬이 하나하나 상을 차지하고 양쪽으로 갈라져 밥이 앞뒤로, 그리고 가운데를 김치찌개가 장식했다.
“찌개 맛있다. 전호야.”
“네 밥도 꽤 괜찮네.”
“밥은 원래 밥솥 맛이래.”
“아냐. 쌀도 맛있어야 되고 물도 잘 맞춰야 해.”
“내가 물을 잘 맞췄나 봐.”
“지랄.”
둘이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밥을 먹는데 지미 혼자 신경 써주지 않는다고 현관문 앞에서 운다. 데려와서 무릎 위에 앉혀놓았더니 혼자 꾹꾹이도 하고 내 한쪽 손에 얼굴도 부볐다.
“전호야. 우리 지미 진짜 귀여워… 그치?”
“미친놈. 다 커봐라. 존나 귀엽나.”
“이게 다 큰 건데. 너도 귀엽다는 거지?”
“개뿔. 꺼지고. 밥 먹고 바로 우리 집으로 가는 거야.”
“응.”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나도 화장실에 들어가서 양치와 세수까지 하고 나왔다. 사료를 챙겨주려다 밥그릇을 들고 나왔더니 전호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너 또 늦장 부리냐, 뭐 이런 뜻이다.
“이것만 닦아주고….”
“야, 물은 줬냐?”
“응! 그건 많아.”
방묘문과 현관문을 닫고 나오니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날이 좋다. 전호가 몸이 좋아진 것 같다고, 훨씬 보기 좋다고 칭찬해줘서 왠지 쑥스러웠다.
처음으로 받은 휴일을 모두 전호와 보내고 나니 남은 시간이 없었다. 오랜만이니 선물이라고 건네준 양이 어마어마해서 시야의 상당 부분은 포기해야 했다. 문을 열며 가장 나를 기다렸을 이름을 불렀다.
“지미.”
내가 너무 집을 오래 비워서 삐진 걸까. 신발장 앞에 짐을 내려놓고 방금 상황을 회상해봤다. 분명 난 현관문을 열고, 방묘문을 열었어. 체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심장이 고요해진다. 아니야. 분명 장롱 틈을 파고들어 자고 있을 거야. 너무 피곤해서 자느라 나오지도 못하는….
현관에서 오른쪽 맞은편 엄마 방은 열려있었고 장롱은 닫혀있었다. 온 집 안을 뒤집어엎어도 보이질 않는다. 난 지금 거의 여덟 시간 넘게 집을 비웠다. 낮에는 잠을 자는 시간이라…. 미쳤어. 문을 박차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드디어 5층을 벗어났지만, 옥상 문이 닫혀있길 바랐는데 활짝 열려있었다. 화분 뒤를 샅샅이 뒤져도 지미는 없었다. 분명 공사 소리에 놀라 그대로 아래로 뛰어내린 아이도 있었다고 했는데, 들어오면서 어땠지. 길바닥에 핏자국은 못 봤어. 집 주위에 있을 수도 있어.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차에 치이기라도, 죽었으면 어떡하지.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슬리퍼가 보였다. 남자가 센서 등 밑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지겨운 눈을 따라 왼쪽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손에 지미의 목덜미가… 잡혀있었다. 울컥 차오르는 안도감에 흘리다 만 눈물이 터질 뻔했다.
“네 거야?”
“…네… 네. 맞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진짜 너무 감사합니다.”
날 두 번 죽일 생각은 없었나. 찾아준 남자에게도 너무나도 고마워서 고개가 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혹시 몰라 눈 밑을 닦고 지미를 내 품에 안겨달라고 양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아래로 떨어뜨린다 해도 상관없었는데, 그는 내 품에 지미를 안겨줬다.
“정말, 진짜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줄 알고….”
“아까 화단에서 주웠어.”
“네? 어디요?”
“화단. 1층에 있는 거.”
나를 봐서 기분이 좋은지 그르렁거리다 내 품에서 몸을 뒤척인다. 집에 가서 혼내야지.
“아… 그, 정말 감사합니다. 사례라도….”
“왜. 사례도 할부로 하려고?”
“…….”
“그 털뭉치 갖다 놓고 담배나 가지고 나와.”
털뭉치를 안고 빠르게 집으로 돌아와서 바닥에 발을 딛게 했다. 나를 졸졸 쫓아다니더니 내가 바닥에 앉자 따라 앉았다.
“지미 너 진짜… 아빠가 나간다고 너도 나가면 돼? 응?”
코를 문지르자 이빨로 내 손가락을 콱 문다.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입에 입술을 몇 번이나 떨어뜨리고 귀를 살짝 물었다. 고개를 죽 빼며 기다란 목을 노출해서 손끝으로 마구 긁어줬다. 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제대로 사례에 대해서도 말해 봐야 하고. 이번만큼은 정말 뭘 달라고 해도 다 줄 수 있었다.
그릇에 작은 북어 조각을 두어 개 덜어 탁자 위로 올려놨다. 아삭아삭 소리를 확실히 귀에 담고 현관문을 닫았다. 실외기 쪽에서 난간 너머를 보고 있던 남자가 나를 돌아봤다.
“너 되게 느리네. 야근 자주 해?”
“네. 야근합니다.”
“말대꾸 잘하네.”
“감사합니다. 정말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더니 남자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가득 잡아 올렸다. 여름의 밤은 그렇게 어둡지 않아서 그의 눈의 색이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닫게 했다. 혼혈인가.
“내 눈 신기해?”
“회색빛이 도는 갈색이네요. 예뻐요.”
“난 멋있는 거지.”
비죽 웃는 입꼬리를 따라갔다. 저렇게 그림같이 생기면 저렇게 웃어도 되는구나. 돈도 많이 벌 수 있을까.
“멋있어요.”
“응. 넌 평범하게 생겼어.”
“알고 있어요….”
남자는 내 머리를 놓고 한 발자국 떨어졌다. 이제까지 맡지 못했던 향수 냄새가 은은하다. 옷차림은 매번 비슷한 것 같은데 향은 일관적이지가 않았다.
“이젠 피부만 하야면 다 되나 보네.”
“네?”
“너 같은 애가 먹히는 게 신기해서.”
“…예?”
“야밤에 늦게 들어오는 게 일이 다가 아닌 것 같아.”
“아니 대체 왜 자꾸 그런 소리를….”
“왜? 넌 제일 고결해?”
다시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한 발자국의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다가오는 걸 보니 원래 가까웠던 것도 같다. 화가… 화를 내는 건가?
“요즘은 산에 틀어박힌 놈들도 할 건 다 한다는데 넌 속세에 살면서 왜 깨끗한 척, 고고한 척이야? 여태 섹스 한번 안 하고 살았어?”
“…….”
“뭐야. 진짜야?”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코웃음을 치는 남자를 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제대로 사례에 대해 의논하고 싶었던 것뿐인걸. 마땅한 말을 찾고 있는데 남자는 더 다가와서 코를 맞대왔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물러나려고 발을 뒤로 내딛자 허리가 잡혔다. 생각보다 억센 힘에 욱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였다.
“하영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내 이름이 자연스럽게 들린다. 하지만 이 자세는 굉장히 이상하다. 손에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도 같고 주위가 온통 불편해지는 것만 같아서 온 힘을 다해 남자를 밀어냈지만 발을 뒤로 빼도 오히려 앞으로 끌려갔다.
“…저기, 피해자분. 이 자세가….”
“너 키스는 해봤어?”
물어오는 질문에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잘해?”
“아니 대체 무슨 소릴, 으으읍.”
입술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어깨를 힘껏 밀고 입술을 소매로 마구 닦았다. 뒤늦게 남자의 반응을 훑어봤는데 완벽한 무표정을 보니 내 황망한 정신도 차분해지는 것 같다. …별 게 아닌가?
“됐어. 이건 고양이 값이고. 그거나 피워.”
“이, 이게 사례라고요?”
“응. 돈도 없으면서 무슨 사례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서로 맞비비고 라이터를 켰다. 얼결에 하라는 대로 하긴 하겠는데 너무 오랜만에 잘 모르는 사람하고 접촉해서… 당황해서인지 심장이 제 속도를 잃고 피만 쏟아낸다. 남자는 이런 짓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닌지 나를 가만 보고 있었다. 동요하는 건 나뿐인가. 나도 저렇게 태연하게 굴고 싶은데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리려 한다. 마침 구름이 달을 가려줘서 붉어진 내 얼굴을 숨길 수 있었다.
“성함, 여쭤봐도 돼요?”
“물어보고 있으면서?”
“……궁금해서요.”
“너한테 알려줄 이름은 없어.”
싱긋 웃는 얼굴 때문에 뒤늦게 말을 이해했다. 먼저 내려가겠다는 말에 실망한 내가 어이없다. 얼마나 봤다고 날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친해지고 싶을 리가 없잖아.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와 있었다. 엄마는 진지하게 집에 도둑이 들었는지 물었다. 어지른 걸 치우지 않고 나갔으니 충분히 그럴듯한 추리다. 나 혼자서 신경 써서 될 일이 아니다. 난 방묘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가감 없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엄마는 굳은 얼굴로 가만 앉아서 팔을 그루밍하던 지미에게 다가갔다. 귀여움과 잔망으로 죄를 감춘 죄묘는 인간에게 잡혀 엉덩이를 맞는 법이다.
“누가 나가래! 응? 누가 나가래! 어디서 엄마한테 성질이야. 응?”
할머니인데. 난 입고 있던 남방을 벗어두고 엄마에게 혼나는 지미를 바라봤다.
“하나도 안 예뻐!”
입에 뽀뽀를 하면서. 엄마가 내 눈치를 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갑자기 너무 귀엽잖아…. 어린애가 뭘 알겠니.”
“이해해. 근데 엄마.”
“응?”
“내가 아빠니까 엄마는 할머니야.”
이 나이에 할머니냐며 버럭하는 엄마를 피해 방으로 지미를 안고 들어왔다.
“위험했어. 그치.”
아플 엉덩이를 조물딱조물딱 만져주다 지미에게 물려서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