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해적 계열의 신직업이 출시되었다.
나는 윤정신과 함께 피시방으로 갔다. 우리는 서버 점검이 끝나자마자 사전 생성해 놓은 신캐릭터로 접속해 보았다.
[우기lover: 뿌뿌 ㅎㅎ]
[정시니lover: ;]
나는 그에게 친구 신청을 걸어 놓고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연락 온 거 없나? 심현지도 온다고 했는데. 닉네임 알려 줬으니까 곧 친구 신청 걸겠지?
<‘대왕현지’ 님이 친구를 요청합니다.>
닉네임도 꼭 지 같은 걸 해선.
아니, 내가 할 소리는 아닌가? 윤정신의 강요에 못 이겨 하긴 했는데, 쪽팔려서 쓸 수나 있을지. 나중에 눈치 봐서 닉네임 변경을 할 생각이었다.
[대왕현지> 카악...! 퉤!]
[대왕현지> 역겹다잉ㅋㅋ 드lover]
[정시니lover> ㅎㅎ질투하니]
[대왕현지> 튜토 다 깼는데 어디로 가]
[정시니lover> 일단 우리 파티 퀘스트 하려면 70 넘어야 해서 업해야 해]
[대왕현지> ㅇ난 따로 올림 이따 보세]
[정시니lover> ㅗ 껴줄 생각도 없었다]
[대왕현지> 오붓하게 데이트 하려고?ㅋ 서로 너무 사랑하네]
[정시니lover> 고마워^^]
사실 사냥터 하나는 혼자 쓰는 게 제일 좋은데……. 어차피 옆자리에 있어서 손만 뻗어도 닿을 수 있는데 뭘 굳이 캐릭터까지 붙여 놓으려 하느냐고 그를 설득해 봤으나 들어 먹을 인간이 아니었다.
“정말 따로 안 해?”
“왜? 왜 굳이 따로 해?”
“시간 아깝잖아.”
“야, 시간 아깝다니…….”
“아깝지, 뭐. 빨리 올리고 파티 퀘스트 해야 하잖아.”
사실이 그런데 뭘 또 삐치려고. 윤정신은 금세 샐쭉해져서는 채널 이동을 해 버렸다.
“네 마음 잘 알았어, 우기야. 시간이 아깝다니.”
“아니…….”
조금 마음이 쓰이긴 했지만 기다리는 현지도 있으니까.
부루퉁하게 입을 다물고 게임을 하고 있던 윤정신은, 내가 반응을 해 주지 않자 지쳤는지 삐친 척을 그만두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렙 몇이야?”
“34.”
“너 퀘스트 받으면 지문 다 읽어? 왜 아직 30대야.”
“형은 몇인데?”
“46.”
나도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믿을 수가 없어서 그의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는데 정말로 46레벨이었다. 똑같이 경험치 포션 먹고 했는데 대체 왜? 그래도 나보다 짬밥이 있다고 요령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겨우 70레벨을 달성하고 셋이서 파티 퀘스트를 하러 입장 필드로 향했다.
경험치 모으기에 좋다고 정평이 나 있는 [말랑말랑 펫 미용실]을 할 예정이었다. [말랑말랑 펫 미용실]은 하루에 10회 도전이 가능했다. 나는 입장을 신청했다.
<이번 손님은 ‘까칠한’ 페키니즈야! 성격이 만만찮으니 잘 달래 줘야 해!>
손님 배정은 랜덤인데, ‘까칠한’과 ‘장난꾸러기’, ‘페키니즈’와 ‘샴’이 자동으로 배열된다. 특성에 따라 장난감, 샴푸 종류, 커트 방법 등을 잘 선택해 주고 젠 되는 몬스터들을 잡으면 됐다. 많이 해 봐서 정답은 다 알고 있었다.
(대왕현지: ㅋㅋㅋ 첫 도전부터 최우기 등판)
(정시니lover: 뭐래)
(우기lover: 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 진짜)
(우기lover: 오 진짜 닮았는데)
<첫 만남입니다! 펫이 당신을 보고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 보입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달래기 / 기선 제압]
나는 고민 없이 [달래기]를 선택했다.
선택지를 잘못 골라도 스크립트가 달라질 뿐 몬스터는 똑같이 생성된다. 다만, 나중에 펫의 만족도 점수를 적게 받아서 보상이 줄어들게 된다.
<나는야 노련한 미용사! 펫이 당신의 현란한 회유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얌전해집니다. 강아지의 경계를 풀 기회입니다.>
<필드에 ‘경계심의 요정’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열심히 경계심의 요정을 처치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몬스터들이 사라지고 다음 선택지를 고르는 창이 나타난다.
처음에 게임 막 시작했었을 때는 잘 몰라서 아무거나 선택했다가 항상 펫이 화를 내는 결말만 봤었는데……. 나중에야 알았지, 인터넷에 검색하면 정답이 정리된 포스트가 많다는 걸. 이제는 부캐 키우면서 하도 많이 해서 정답도 다 외웠다.
마지막 선택지까지 잘 고르고 몬스터를 처치하자, 퀘스트 퇴장 필드로 자동 이동되었다.
<펫이 마음에 들어 하며 행복하게 웃습니다! 성공적인 미용!>
(우기lover: 우기 웃는다)
(우기lover: 귀여워ㅠ)
(대왕현지: 눈갱)
남은 9번의 도전 횟수까지 열심히 채운 뒤에야 우리는 해산했다.
파티 퀘스트를 끝내고 얻은 결론은 신직업은 재미가 없다는 거였다. 출시 전에 크게 너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래, 너프 하는 거 좋지. 밸런스 조절은 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굳이 쓰레기로 만들어서 출시할 필요는 뭔가 싶긴 하지만. 뭐, 좀 더 키우면서 스킬이 더 개방되면 나아지려나.
신직업도 질리게 해 봤겠다, 슬슬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피시방을 나와서 함께 윤정신의 집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역 근처를 지나는데 어디선가 깡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귀여운 강아지 인형이! 움직이는 강아지 인형이 단돈 5,000원! 단돈 5,000원에 모십니다.”
난 또 뭔 소리라고……. 흘깃 보고 지나가는데, 왠지 따라오는 기척이 없는 것이다.
다섯 발자국 정도를 혼자서 가다가 옆을 보니 윤정신이 없어서 휙, 지나온 곳을 돌아보았다. 그가 가만히 멈추어 서서 강아지 인형을 보고 있었다. 나는 쪼르르 그에게로 달려갔다.
“왜?”
“아니. 귀여워서.”
“형은 고양이가 좋다며.”
“……그러게.”
윤정신은 아예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돌아다니는 인형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러더니 불쑥 하얀색 인형을 하나 샀다.
저런 취향이 있었던가? 인형 별로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 윤정신이 손바닥 위에 강아지 인형을 얹어 놓고 뿌듯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집까지 온 그는, 거실 바닥에 그 인형을 풀어 두었다. 짖는 소리가 큰 편은 아니라서 거슬리지는 않았는데,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게 그렇게 귀여웠나? 나는 바닥을 쫑쫑거리며 돌아다니는 강아지 인형을 집어 올려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형, 강아지 키우고 싶어?”
“아니? 난 너 키우고 싶어.”
“난 벌써 우리 부모님이 다 키워 놨는데?”
윤정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강아지 인형은 깡깡 하는 소리를 내며 발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건 티저에 불과했다는 것을 며칠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이게 다 뭐야?”
“뭐가?”
강아지 그림 카펫, 강아지 그림 방석……. 침실로 가 보니 거긴 더 심각했다. 베개 커버와 이불이 모두 강아지 패턴이었고, 머리맡에는 크고 작은 강아지 인형들이 즐비했다.
집 안 꼴이 이게 뭐지? 불만 같은 거라도 있는 건가. 일종의 시위?
“……내가 혹시 화나게 한 거라도?”
“너무 섹시해서 아랫도리 화나게 만든 적은 있지.”
윤정신이 싱글벙글 웃으며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커다란 강아지 인형을 끌어안더니 볼에다 쪽 뽀뽀를 했다.
“매일매일 안고 자야지.”
“……그래. 형 취향이니까 존중해 줄게.”
“하얗고 뽀송뽀송해서 딱 너 같아. 생긴 것도 순둥순둥.”
그런 이유였다고? 갑자기 집 안 가득한 하얀 털의 강아지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인형에 볼을 비비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렇게나 좋을까? 하얀 것만 보면 다 나한테 못 갖다 붙여서 안달이다. 찹쌀떡을 죽어라 사다 준 적도 있었고, 백설공주가 그려진 온갖 물건들을 가져다 준 적도 있었다. 하긴, 변기나 두루마리 휴지 같은 게 아니라 다행인가. 그것도 하얀색이긴 하지 않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은 햄스터였지만 강아지도 꽤 귀엽긴 했다. 형이 하도 예뻐라 하니까 괜히 눈길이 한번 씩 더 갔다. 저러다 어느 날 갈아타는 거 아닐까? 미안, 너보다 얘가 더 하얘서 좋아, 이러면서.
지금도 봐라, 정작 나는 내팽겨쳐 두고 강아지 인형만 예뻐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침대로 다가가서 인형들을 다 쓸어 침대 아래로 던져 버렸다. 형이 계속 안고 있던, 가장 큰 강아지 인형도 빼앗아서 거실로 던졌다. 이제 나뿐이지? 나는 침대에 팔짱을 끼고 앉아 가만히 그를 노려보았다.
“아, 진짜 예뻐 죽겠어.”
윤정신이 내 목에 팔을 둘러 안으며 내 볼에 계속 입을 맞추었다.
이건 마치 로테이션……. 아까 저 인형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내팽개쳐진 인형들을 내심 뿌듯하게 바라보며 원조의 기분을 만끽하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내 볼에 입 맞추던 그와 입술을 맞댔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게임 말고 연애>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