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이서진(3)
[으앙: 형은 근데]
[으앙: 무슨 일 하세요?? 전부터 궁금했어요]
그냥 돈 많은 백수라고 답하려다가, 뭔가 좀 아닌 것 같아서 이미 접은 사업들을 몰래 소생시켰다.
[버찌: ㅎㅎ 그냥 사업]
[으앙: 우와 어떤 거요??]
[버찌: 그냥 식당도 하고... 이것저것 하는데 관리자는 따로 있어서]
[으앙: 아아 ㅋㅋㅋㅋㅋ 우와 신기하다]
[으앙: 저 다음에 밥 먹으러 가도 돼요??]
왜 그랬지? 그냥 솔직하게 말할걸 그랬다. 얼마 전에 장사 다 정리했는데.
나는 심란해졌다. 누나가 하는 레스토랑 있기는 한데……. 어차피 가족이 하는 곳이 내가 하는 곳 아니겠는가?
[버찌: 그래 ㅎㅎ]
솔직히 오늘만큼은 김현수보다 내가 더 한심한 것 같다. 나는 옷장을 열어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괜찮은 게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삼천리 밖에서 봐도 파릇파릇한 신입생 같은 남자가 싹싹하게 웃으며 내게로 달려왔다. 성우가 민망한 듯 제 귀를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 불러 주실 줄 몰랐어요. 와, 근데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더 멋진 옷 입을걸.”
“괜찮은데. 걱정하지 마.”
“그런 것치곤 형 오늘 너무 차려입으셨는데요……. 저 멀리서 보고 진짜 배우인 줄 알았어요. 와……. 진짜 최고! 완전 잘생기셨어요. 저 그, 최근에 했던 의학 드라마 있잖아요. 거기 나온 배우 얼마 전에 실제로 봤었는데 형이 그 사람보다도 더 잘생긴 것 같아요!”
“아부하는 거야?”
“아니요?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성우가 내 뒤를 종종 쫓아오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조수석에 그를 태우고 내비게이션에 레스토랑 주소를 찍었다. 나도 굉장히 오랜만에 가는 것 같네.
누나한테 오늘 들르겠다고 미리 말을 해 두었더니 대접이 상당히 극진했다. 테이블로 안내를 받고 착석하자, 성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쭈뼛쭈뼛 제 가방을 빈 의자에 내려놓았다.
“어떡하죠? 저만 남방 입었어요. 혼자 캐주얼…….”
“신경 쓰여?”
“이거라도 벗어야겠어요. 어딘지 여쭤보고 올걸……. 학교 갔다가 바로 오느라.”
그가 민망한 듯 훅 숨을 내쉬었다.
학교라. 그러고 보니 입학했겠구나. 새삼 그가 어리다는 게 느껴졌다.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학교는 어때? 다닐 만해?”
“어……. 네! 재밌는 거 같아요. 근데 몇 달 놀아서 그런가, 아침에 눈이 안 떠지는 거 있죠. 9시 수업 신청했는데 엄청 후회하고 있어요.”
“재밌다니 다행이네. 친구는 좀 사귀었어?”
“네! 선배들도 잘해 주시고 너무 좋아요. 괜히 걱정했나 봐요. 와, 근데 동기 중에 정말 잘생긴 애 하나 있거든요? 걔 옆에 서면 좀 주눅 들어요.”
그런 것치곤 본인도 평범한 축은 아닌데. 거리에 흔히 널린 얼굴이니 어쩌니 해서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처음 봤을 때 조금 놀랐었다. 의외라서.
“왜? 잘생겼는데.”
“저 놀리시는 거죠? 그런 얼굴 하시고. 저 조금만 떼 주시면 안 돼요?”
성우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신기한 듯 가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와, 근데 형 부자인가 봐요. 솔직히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저 이런 곳 예전에 가족들이랑 한 번 오고 처음이에요.”
“종종 와도 돼. 학교 다니기 시작하니까 용돈 부족하지 않아?”
“맞아요. 얼마 안 다녔는데 쓴 돈 보니까 벌써…….”
성우가 말도 말라는 듯 고충을 토로했다. 그는 한참 무어라 조잘조잘 이야기하다가, 문득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참! 저, CC 할 것 같아요. 흐흐. 저 캠퍼스 커플 로망 있었는데.”
나는 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한테 좋지 않은 소식인 건 둘째 치고,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여자?”
“네? 당연하죠!”
“CC에 대해서 혹시 선배들한테 뭐 들은 거 없어?”
그가 음, 하고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발랄하게 답했다.
“아니요? 아무 말씀 없으시던데요.”
“후회할 것 같은데…….”
“왜요? 좋지 않아요? 자주 볼 수 있고, 강의도 같이 들을 수 있고.”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라서.”
“정말요? 왜요?”
헤어지면 계속 마주쳐야 하니까. 하지만 왠지 돌아올 답이 뻔했다. ‘안 헤어지면 되죠!’ 분명히 이렇게 말할 거다.
나는 조용히 분위기를 몰아갔다.
“나도 해봤거든, CC.”
“네.”
내가 경험에 과장을 조금 섞어 겁을 주자, 성우는 곧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좁혀진 미간은 음식이 나온 후에도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저 그럼 거리 두는 게 낫겠죠?”
“그렇지 않을까. 심지어 상대가 학회장이라며.”
“도움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좋을 줄 알았는데…….”
그가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나도 시무룩하달지, 약간 착잡해졌다.
더럽게 풀리는 일 없네. 나 진짜 저주 받은 거 아니야? 좀 한 번쯤은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 만나서 자연스럽게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면 안 되나, 서로. 오늘도 외로움이 사무쳤다.
갈 길이 멀구나. 정말 다행인 건, 나에게 얼굴과 재력이라는 큰 무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취향이고 뭐고 다 부숴 버리는 수밖에…….
나는 성우에게 접시를 밀어 주며 상냥한 척 웃었다.
“금방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너 매력 있잖아.”
“헐……. 형. 완전 멋있어요. 저 감동 받았잖아요.”
본의 아니게 잘될 뻔한 한 쌍의 남녀를 깨 놓았지만.
몰라, 이제 나도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나는 약간 윤정신 같은 다짐을 했다.
* * *
[청혼: 두 사람]
[청혼: 대체 뭔지?ㅋㅋㅋㅋㅋ]
[토라: ㅎㅎ 보기 좋다^^]
[토라: 으앙 님 혹시 김현수 부캐?ㅋㅋㅋ]
성우의 캐릭터가 다행히 여캐라서 사 두고 계속 못 쓰고 있던 반지를 이번에 겨우 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내 쪽과 달리 성우는 이미 결혼한 캐릭터가 있었는데, 내가 슬쩍 결혼 이야기를 꺼내자 눈앞에서 바로 이혼해 버렸다. 어차피 접속도 안 하는 실친이라나? 닉네임이 ID마이구미급이긴 했다. By슬픈늑대라니……. 그 나이에 뭐가 그렇게 슬펐기에.
아무튼, 어젯밤에 결혼을 시켜 놓고 오늘 같이 피시방에 와 부부 전용 아이템을 껴 보고 있는데, 어김없이 저들이 나타나서 초를 쳤다.
[버찌: 더러운 소리 하지 마 ㅎㅎ;]
[으앙: 김현수가 누구예요??]
[청혼: 버지ㅋ 해명이 필요한 시점]
[버찌: ㅎㅎ... 워프 때문에]
[토라: 또 개수작]
자기나 잘하고 저런 소리를 하지. 양아치도 저런 양아치가 없다. 옆자리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으앙: ㅋㅋㅋㅋㅋ 저희 요즘 짱친이에요]
[으앙: 히히^-^ 지금도 같이 피씨방 와 있지롱]
[청혼: ㅋㅋ 뭐지 이 조합?]
[청혼: 둘이 언제부터 저랬더라]
[으앙: 제가 팬이라서 막 들이댔어요 헤헤]
[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토라: 님이 들이댄 게 아닐 것 같은데 ㅋ]
[으앙: ㅋㅋㅋㅋㅋ 맞는데용~><]
성우가 빼꼼, 투명한 칸막이 너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내가 눈썹을 살짝 추어올리자 그가 헤헤 웃었다.
“형. 뭐 좀 드실래요? 허기지지 않아요?”
“뭐 먹을래?”
“제가 사 드릴게요!”
“됐어, 무슨.”
“왜요? 저 너무 신세 많이 진 것 같은데. 이거라도 사게 해 주세요. 네?”
“뭐 먹을 건데?”
나는 의자 바퀴를 굴려 그에게 몸을 붙였다.
화면을 보니 바로 주문을 넣을 수 있는 메뉴판이 팝업 창으로 떠 있었다. 세상 좋아졌네. 성우가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먹을 것을 이것저것 골랐고, 나는 성화에 못 이겨 대충 만두와 매실 음료 하나를 주문했다.
다시 게임 화면으로 돌아와 보니 윤정신이 또 신이 나서 까불고 있었다.
[토라: 이거만 딱 말해 보셈]
[토라: 님이 만나자고 함 쟤가 만나자고 함?]
[토라: 으앙 님아 말해 봐요]
[청혼: 뭐가 그렇게 신나 ㅉㅉ]
[토라: 자기도 ㅇㅈ?]
[청혼: ㅇㅈ은 무슨 ㅇㅈ입니다]
[청혼: ㅋㅋㅋㅋㅋㅋ]
[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역시~ 울 자기 똑똑이 ㅎㅎ]
[으앙: 머가요??]
[토라: 아님 ㅎㅎ]
[토라: 으앙 님 저 위에 말 답 좀]
[으앙: 잉 뭐라고 하셨지]
[으앙: 불닭 시키느라ㅠ 잠시만요]
“그냥 무시해.”
“네?”
나는 그가 채팅 스크롤을 올리지 못하게 마우스를 빼앗고 채팅 창을 리셋 해 버렸다. 성우가 움칠 몸을 뒤로 물렸다가 곧 어색하게 웃으며 제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토라 님도 저 여자인 줄 아나 봐요.”
“쟤는 그냥 원래 저래. 신경 쓰지 마.”
나는 성우가 내게서 시선을 돌린 것을 확인하고 윤정신에게 교환 신청을 걸었다. 곧 윤정신이 거래를 수락했고, 나는 교환 창에 머니 4,444원을 올렸다.
[토라: ?????? ㅋㅋㅋㅋㅋㅋㅋㅋ]
곧 교환이 취소되고 윤정신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짜 진상……. 나는 슬쩍 의자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전화 좀.”
“아, 네! 하고 오세요!”
피시방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자마자 윤정신의 짜증 나는 웃음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웃지 마.”
[야, 너 작업 치는 거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보이는데?]
“그럼 좀 너그럽게 모르는 척해 주면 안 돼? 넌 꼭 이렇게 사람을 놀려야겠어?”
[아니, 난 너무 웃겨서……. 내가 초 쳤냐?]
“상대가 게이도 양성애자도 아닌 것 같거든. 그러니까 제발 조용히 해. 너 때문에 더 망하겠어.”
[뭐래. 왜 내 탓하냐? 일단 알겠고, 잘해 봐. 뭘 정색을 하고 그러냐.]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신경 쓰여.”
[남잔 줄 몰라서 그랬어. 야, 근데 너 자신 있냐? 이성애자인 거 아는데 왜 그래?]
“알 게 뭐야. 난 아닌데.”
[……낮술 했냐? 일단 알겠다. 잘생긴 놈은 그런 거 좆도 신경 안 쓴다 이거지? 좋은 거 배워 간다.]
“차면 차이지, 뭐. 기대 안 해.”
[너 외롭다고 막 가지고 놀고 그런 거 아니지? 요즘 좀 제정신 아닌 것 같아서, 너.]
“놀랍도록 말짱해. 그러니까 너나 잘해.”
나는 전화를 끊어 버리고, 핸드폰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자리로 돌아갔다.
어느새 주문한 음식이 나와 있었다. 성우가 뭔지 모를 새빨간 면을 흡입하며 내 만두 접시에 얹어진 새우튀김을 콕콕 가리켰다. 감자튀김 시키는 것 같았는데 웬 새우가……. 설마 서비스로 하나 온 걸 나 준 건가.
“형, 이거 먹어 봐요.”
“괜찮은데……. 너 먹어.”
“새우튀김 싫어하세요?”
“아니.”
“그럼 드셔 보세요. 이거 진짜 맛있어요.”
계속되는 권유에 마지못해 새우튀김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내 몫의 만두를 반 덜어서 성우의 튀김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어?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요. 형 드세요.”
사실 간편 식품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딱 보니까 그냥 전자레인지 돌린 냉동 만두 같은데. 저녁은 좀 더 영양가 있는 걸 먹여야지 싶었다. 나는 그냥 웃음으로서 대답을 회피하고 매실 음료를 마셨다.
[청혼: 으앙 님 버찌한테 맛있는 거 사 달라고 하삼ㅋㅋㅋ]
[청혼: 똥도 돈으로 닦을 사람]
[으앙: 헉ㅋㅋㅋ 정말요]
[으앙: 저 근데 안 그래도 많이 얻어 먹었어요ㅠ 나중에 돈 벌면 갚아야지...]
[버찌: ?? 전혀 안 그래도 되는데]
[청혼: 나라면 안 놓친다 ㅋ]
[토라: ㅡㅡ]
[토라: 그게 뭔 뜻?]
[청혼: 내가 으앙 님이었으면]
[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토라: 전화 받아 봐]
[토라: 와 거절? 지금 거절 누름?]
[청혼: ㅎㅎ...저기요 오해임]
[청혼: 전화 그만 좀요^^;;; 지금 통화 불가]
[토라: 나 나감]
[청혼: 아 왜;;;;;]
[으앙: 헉 안녕히 가세요]
내가 그 말을 보고 작게 웃자, 성우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칸막이 위로 눈만 빼꼼 나와 있는 게 꽤 귀여웠다.
“형은 소리 내서 잘 안 웃는 것 같아요.”
“그랬나, 내가?”
“네. 신기했어요, 방금.”
성우가 해사하게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저런 맑고 화사한 모습이 나를 당긴 매력인 것 같다고.
……뭐, 그래 봤자 운명이 허락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되겠지만. 오랜만에 어머니 따라가서 기도나 하고 올까, 멍하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