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윤정신(2)
[청혼> 그럼 메가폰 해봐]
[토라> 못 할 거 같니 ㅎㅎ]
[청혼> 아니^^;;;]
[청혼> 잘못했어 하지 마]
답장이 잘 오는 걸 보니 또 버프 셔틀 중인가 보다.
그는 거의 매일, 긴 시간 이서진에게 경험치 버프를 넣어 주는 셔틀을 하고 있었다. 돈 받고 하는 거니 셔틀은 아니고 알바에 가깝겠다.
그래도 저러고 있을 땐 심심해서 답장을 잘해 주기 때문에 큰 손해는 아니었다. 이서진이 사냥 중이라 둘이 딱히 대화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이서진, 아무리 봐도 작업 치는 거 같은데. 이쪽도 나쁘진 않은 눈치고. 아니면 설마 둘이 사귀나? 이서진은 아니라고 하긴 했는데, 그리 믿을 건 못 됐다.
세상에 게이나 양성애자가 그렇게 많겠나 싶긴 했다. 내가 가능하다고 너무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건가, 너무 눈치 없이 끼어들고 있는 걸지도……. 그래도 청혼과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거워서 조금만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니, 내가 언제부터 남 눈치 봤다고. 어차피 내가 다른 감정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건데.
하여튼, 보면 볼수록 두 사람 사귀는 건 모르겠고 서로 묘하게 감정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이서진은 잘 보이려고 하는 게 딱 보이고, 청혼이도 이서진에겐 유별나게 잘해 주니까. 둘이서 낯간지러운 장난도 잘 치고, 아무튼 둘 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랑 자기들끼리 대화할 때랑 태도가 극명하게 차이 났다.
[청혼: 자리]
[토라: ㅎㅇ]
최근 업데이트로 추가된 광역기를 드디어 최고 레벨까지 찍어서, 기념 삼아 이 스킬이 어느 정도 유용한지 실험하는 방송을 켰다.
사냥과 보스 던전에서 대충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며 조언도 얻어 볼 생각이었다. 마침 이서진이 전세 낸 듯 쓰고 있는 사냥터가 확인하기 좋은 곳이기도 해서 나는 그쪽 근방의 마을로 워프를 했다.
고스펙 도적 상대로 스틸이 가능할 정도면 사냥에 꽤 유용한 스킬이라는 말이겠지? 사냥 중인 이서진 대신 자리를 외친 청혼이 상대가 나라는 것을 알고 어리둥절한 눈치를 했다.
[청혼: ㅋㅋ뭐지?]
[토라: 데이트 현장 포착]
[청혼: ㄴㄴ 벞셔중]
[토라: 너도 쟤 펫들 옆에 서]
아주 펫처럼 종일 이서진 꽁무니만 쫓아다니는구나. 괜히 괘씸하기까지 했다.
[청혼: 나는 우두머리라서 똘마니들이랑은 같이 안 서도 됨ㅋ]
[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찌: ? 왜 왔어 ㅋㅋ]
채팅을 보고 있긴 했는지, 이서진이 사냥을 하다 말고 반응을 보였다.
[토라: 심심해서]
[버찌: 어쩌라는 거지ㅎㅎ]
[토라: 스틸하러 왔어ㅎㅎ]
[청혼: ㅋㅋㅋㅋㅋㅋㅋ]
[버찌: 너 방송 중이지 ㅋㅋ]
헉. 눈치가 귀신이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나는 무어라 변명할 말이 없어 그냥 웃었다.
[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토라: 너 나 구독했냐?]
[버찌: ㄴㄴ 티 나]
[버찌: 딴 데 가라 ㅎㅎ]
벌써 가긴 싫은데. 아직 몇 마디 나눠 보지도 못했다고! 나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보려 했다.
[토라: ㅈㅅ 스틸 안 할게 ㅈㅅ]
[토라: 워프 쓰고 왔는데 아]
[토라: 온 김에 청혼이 인터뷰 해야지]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가 흔쾌히 응하는 듯 내 캐릭터 옆으로 와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귀엽다…….
하는 짓을 보면 꼭 고양이 같다. 종잡을 수 없는 도도함이라는 점에서.
계획에 없던 인터뷰라, 나는 대충 생각나는 말을 던졌다.
[토라: 노동력 착취당하고 계신 것 같은데]
[토라: 얼마 받기로 하셨는지?]
[청혼: ㅋㅋㅋㅋㅋ경쟁자 늘면 안 됨]
[토라: 오... 용돈을 좀 많이 쥐여 주는 것 같고요...]
[토라: 혹시 저 인간이 왜 갑자기 캐릭터 키운다고 난리인지 알고 계신지??]
[청혼: 알 리가...]
[토라: 아;; 이유 없는 발작인 것으로]
사실 내가 궁금한 거긴 했지만, 둘 사이에 수상쩍은 점이 없는지 질문을 통해 떠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그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청혼: ;; 나 xy 염색체...]
엥? 방송 보고 있었나? 어디서부터 본 거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저 반응은 확실한 부정 아닌가. 당연히 아니라는 투인데.
나는 갑자기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토라: 아 방송 보고 있었어?ㅋㅋㅋㅋㅋㅋ]
[버찌: 청혼 님이 너 팬이었대]
[토라: ㄹㅇ?]
[청혼: 그런 적 없음]
[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이상하게 유명 인사 어쩌고 하더니, 그런 이유가…….
그는 쑥스러운지 말이 없었다. 나는 조금 여유를 되찾고 그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토라: 청혼 님 시청자 분들이]
[토라: 동성애 무시하냐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청혼: ㅋㅋ 시청자 분들]
[청혼: 저 사실 게이고 토라 님이랑 사귀어요]
[토라: ?????]
당연히 장난이라는 걸 아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건 항상 두근거리고 있긴 한데, 스스로 박동이 의식됐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설렜다. 이러는 내가 징그럽게 한심한데, 가슴은 거짓말을 못했다.
……왜 이러지? 나 요즘 외롭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채팅을 쳤다. 캠 켰는데 표정 관리가 잘됐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반응은 부자연스럽지 않을 정도로 빨리했다.
[토라: 뭔 개소리지?ㅋㅋㅋ]
[버찌: ㅋㅋㅋㅋㅋㅋ]
[청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혼: 형 집에 언제 와요?]
짓궂은 장난이다. 그래, 짓궂은 장난이야. 그런데도 나는 마치 그가 정말 귀가하는 나를 진짜로 반기기라도 한 것처럼 웃음의 장벽이 낮아졌다.
그가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물론 그것이 나만의 착각이란 걸 알고, 나중에 이 들뜸이 사라졌을 때 내 자신이 부끄러워 후회할 거라는 것도 알지만…….
[토라: ㅋㅋㅋㅋㅋㅋ아니 ㅅㅂ]
[토라: 에이프런만 입고 있어?ㅎ]
[청혼: 와 너무 더럽다 이건]
[청혼: 버찌 님 살려주세요...]
[버찌: ㅋㅋㅋ 정신아]
[버찌: 적당히 하고 이제 좀 가...]
그 말에 조금 정신이 들었다.
더 오버 하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황급히 내 모든 감정을 주머니에 욱여넣듯 후다닥 정리했다. 그래, 오버 하지 말자.
[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킹 지금 뭐하냐]
[버찌: 부캐]
[토라: 전에 키우던 궁수?]
[버찌: ㅇㅇ]
[토라: ㅇㅋ]
[토라: ㅎㅎ자기야 같이 갈래?]
[청혼: ㅎㅎ아니요?]
[토라: 자기인 건 인정 하는구나 ㅎㅎ]
[토라: 일단 나 감 업 미리 축하 ㅋ]
씨알도 안 먹힐, 장난밖에 안 될 짓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 * *
그때부터였나, 계속 장난을 핑계로 그렇게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핑계라는 게 꼭 대외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인정하기 싫은 일이 있을 때, 나 자신을 속여 넘기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꽤 젖은 후에야 내 감정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건 아마도 내 자존심을 넝마로 만들고 처참히 실패했던 첫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추측은 그렇다.
이서진이 자신의 목표 레벨을 달성하고 난 뒤부터 그와 놀 시간이 꽤 늘어났다. 이제 이서진 따라 사냥터에 따라다니면서 버프를 안 줘도 되니 본래처럼 마을에 의자를 깔아 놓고 옷 입히기를 하며 채팅만 치는 짓을 자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때로는 그마저도 없이 그를 끌고 다니며 같이 있으려 했다. 그러면서 종종 그쪽에서 먼저 인사하기도 할 정도로 친해지긴 했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론 귀찮은 인간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는 듯했다.
알바는 끝났지만, 그는 여전히 이서진을 자주 찾았다. 알고 보니 둘이 연락처도 주고받았는지 카톡까지 하는 사이……. 아직 이서진에 비하면 한참 뒤처졌구나. 나는 괜히 이서진이 얄미워질 때가 많았다. 그래도 이서진과 있다 보면 청혼을 자주 만날 수 있어서 아주 싫은 것도 아니었다.
왜,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더 친해지는 걸 보면 질투 좀 할 수도 있잖은가. 그런 거였다. ……아니다. 아무래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가? 아닌가?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쪽팔리지만, 점점 짝사랑이 맞다는 쪽으로 결론이 기울고 있었다.
이제는 인정하고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어떡하면 이서진을 제치고 그를 쟁취할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하면 이 감정을 도려낼 수 있을까? 이 전개 너무도 익숙하다. 첫사랑 할 때도 꼭 이렇게 시작했던 것 같은데. 끝 맛이 얼마나 썼던가?
오늘도 반쯤은 습관으로, 반쯤은 장난으로 치근덕거리는데 어쩐 일인지 근래에 들어선 초대 메시지를 절대 한두 번에 받아 주는 법이 없던 그가 빠르게 초대를 수락했다. 너무 기대를 안 하고 있었던 터라 반응이 3초 정도 느렸다.
[토라: 헐 안 차였다]
[청혼: ㅎㅇ]
그가 있는 위치를 보고 워프를 탔더니 이서진이 있어서 당연히 둘이 같이 있겠거니 했는데, 없어서 허탕을 치고 오는 길이었다. 그러고 다시 위치 확인해 보니까 로그아웃한 뒤고……. 다시 오긴 했지만, King 때문에 불편해서 간 건가?
[토라: 너 사냥한다했다며]
[토라: 또 옷 입히기 하고 있지?]
[청혼: 당연]
[청혼: 아까 잠깐 나가서 문상 사 왔어]
[청혼: 가챠 할 거야]
[토라: ㅋㅋㅋㅋ미친 어딜 갔나 했더니]
[토라: 너 때문에 텔 썼잖아ㅡㅡ 위치 보고 갔는데 버찌만 있어서]
그런 거였구나. 생각보다 더 별거 아닌 이유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가 이렇게 말했다.
[청혼: 나 토라한테 좀]
[청혼: 감동햇슴]
[청혼: 그래도 인간이긴 했구나...]
[청혼: 네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집중 취재할 희귀 짐승이 아니었구나 ㅋㅋ]
왜지? 걱정해 줘서? 아니면 내가 열심히 쫓아다니니 그 정성에 감동한 거?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토라: 나한테?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토라: 내가 뭐했는데?]
[청혼: 토라쨩...ㅋ 본인에게 그렇게 자신감이 없다니]
[토라: 착한 일 안 하고 사니까 ㅋ]
착한 일? 딱히 한 기억 없는데. 유×브 영상 같은 거라도 본 건가.
[토라: 유×브 업로드 한 거 보고 그러는 거야?]
[토라: 그거 진짜 참교육 오졌다 ㅇㅈ?]
[토라: 나보다 딜도 안 나오는 게 스틸 짓거리]
[청혼: ㅋ조회수 올려 주기 싫어서 채널 차단한 지 오래]
[토라: ㅋㅋㅋㅋ그럼 뭐?]
이것도 아니었다.
그럼 진짜 뭔데? 다행히 궁금증은 곧 해소되었다.
[청혼: 나 사실 아까 마을에 있었는데]
[청혼: 킹 그 사람도 좀 싫고 내 얘기도 조금 나오는 거 같아서]
[청혼: 아는 척하기 뻘쭘해서 오프 타고 있었던 거임 ㅋㅋ... 뭐라고 하는진 좀 궁금하고]
[청혼: 근데 존나 기분 나쁠 때 님이 핵직구 날려서]
[청혼: 오열했다;; 감동 받아서]
아아……. 일이 그렇게 된 거였구나. 이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King이랑은 원래도 자주 티격태격하긴 하는데, 오늘은 그의 말이 유난히 더 거슬려서 평소보다 심하게 말한 감이 있었다. 마침 그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운 좋게 공짜로 점수를 땄다. 또 입꼬리가 주책맞게 올라갔다. 나는 들떠서 부러 더 King을 까 내렸다.
[토라: 그 새끼 원래 말 그렇게 해 신경 쓰지 마]
[토라: 전형적인 찐따 멸공]
[토라: 나한테도 말 그딴 식으로 해서 몇 번 싸웠었어ㅋㅋㅋ]
[청혼: 졷같아 ㅋ...]
[토라: ㅋ나 완전 백마 탄 왕자 같았다 인정?]
[청혼: ㅇㅈ]
길 가다 돈이라도 주운 기분이다.
이게 웬 재수람. 나는 평소와 달리 다정한 그의 태도에 얼떨떨한 한편 기뻤다.
[토라: 헐 이걸 인정해주네]
[토라: 웬일이지 ㄷㄷ 내일 섭종인가]
[청혼: 토라 최고^^]
[청혼: 오늘만큼은 갓라 ㅇㅈ]
[토라: 양심 ㅇㄷ]
[토라: 항상 갓라인데...;]
[토라: 양심 어디 갔냐고... 다 중동 갔다고...]
[청혼: 고마우니가 유×브 구독해줄게]
[토라: ㅋㅋㅋㅋ아 ㄱㅅ;;]
나는 별생각 없이 이 순간을 즐기려다,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실패해야 본전 아닌가.
[토라: 구독 안 해줘도 되니까 소원 하나 들어주면 안 됨?]
제발 알겠다고 해라, 제발.
[청혼: 들어만 볼게]
[청혼: 먼데]
[토라: 나 번호 좀]
[청혼: ??ㅋ]
[토라: ㅋㅋㅋㅋ 번호좀><]
[청혼: 아 이건 좀...]
반응 싸늘한데, 어쩌지? 지금이라도 접어야 하나. 그러기엔 늦은 것 같고……. 일단 더 찔러보자.
[토라: 그럼 카톡 아이디]
[청혼: 너한테 알려 줬다가 세상 사람들 다 알게 되면 어떡함]
[토라: 야 너라니;;; 나 그래도 27살인데]
[토라: 점점 저돌적인걸]
[토라: 아주 앙칼진 맛이 있어]
[청혼: ㅋ말실수]
[토라: xxixal1828]
[토라: 내 카톡 아이디임]
[청혼: 어쩌라고]
[토라: 제발 점 하나만;]
[청혼: 내 연락처가 왜 필요해]
[청혼: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
그가 드물게 정색을 하고 물었다. 평소에 별로 진지한 편이 아니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화났나? 그 말을 하는데 평소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뭔가 싸한 게……. 장난은 그만 쳐야 할 것 같은 느낌.
나는 조금 주눅이 들어 꼬리를 축 내렸다.
[토라: 싫어?]
[청혼: 좀 부담스럽]
[토라: ㅠㅠ]
[토라: 그래 알았어...]
텄구나. 본전도 못 찾고 괜히 비호감만 산 것 같았다.
점수 겨우 땄나 싶었는데, 역시 공짜로 얻은 건 그만큼 쉽게 내 손을 떠나는구나.
그런데, 아직 완전히 탈락한 건 아니었는지 그가 다시금 물었다. 이유를 알고 싶은 눈치였다.
[청혼: 왜 알려고 하는 거]
[토라: ㅋㅋㅋ연락처 궁금하다는 게 달리 이유가 뭐 있겠냐]
[토라: 연락하고 싶으니까 달라는 거지]
[청혼: ㄷㄷ; 왜 혼자 홀렸지]
[청혼: 꼬신 기억이 없는데]
[토라: 허윽 님 마성에 녹아내렸음]
[토라: 난 이제 노예예요]
[청혼: 나 근데 카톡 잘 안 봐]
[청혼: 괜찮아?]
헉, 그 말인즉……. 연락처를 주겠다는 거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린다고? 이러다 윤첨지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운이 좋다. 원래 운이 좋긴 하지만 연애 쪽으로는 더럽게 안 풀렸었는데…….
나는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채팅을 쳤다.
[토라: ㅇㅇ ㄱㅊㄱㅊㄱㅊㄱㅊ]
[청혼: ㄱㄷ]
미친, 미친! 기대돼서 미치겠네!
나는 내 카톡 프로필에 이상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지 몇 번이고 확인하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우기: .]
……왔다!
나는 곧장 친구 추가를 하고 그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문득 귀엽게 생겼다는 이서진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프사 누가 너야?]
[우기: 맞춰봐]
이름이 우기인 건가. 아니면 욱이를 발음 나는 대로 쓴 건가?
[ㅋ 맨 왼쪽?]
아까의 그, 눈에 띄던 사람을 지목하자 그가 놀란 듯 물었다.
[우기: 어떻게 알았어???????]
[귀엽댔잖아]
[오 근데 진짜 귀엽게 생겼다 ㅎ]
[완전 내 스타일이다^^ 이제 나한테 장가만 오면 되겠는데 ㅎ]
[우기: ^^ㅗ]
[엄마한테 데릴사위 온다고 말해놔야겠다 ㅎ]
[우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랄하지 마]
좋아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건진 몰라도 정말 귀엽게 생겼다. 성격은 좀 새침한 편인데, 얼굴만 보면 마냥 순하게 생겼다. 조금 감긴 듯한 눈 때문인지 나른해 보였다. 확실히 얼굴이 보송보송 앳된 게 갓 스물 된 아이 같다.
[ㅋㅋㅋㅋㅋㅋ아 근데 진짜 애기다]
[나도 스무 살 때 저랬나]
[7년 사이에 몸과 마음이 폭삭 늙었어...]
[우기: ㅋㅋ 27살은 중늙은이임?]
별 이야기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재밌고 즐거운지. 기대도 안 했는데 생긴 것마저 너무 내 취향이라 더 좋아졌다.
나는 그의 프로필 히스토리를 보다가 한 곳에서 손이 멈추었다. 어, 이거…….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어서 유심히 봤는데, 다른 사진까지 보고 확신했다.
이거 내가 나온 고등학교 같은데? 신기한 우연이다. 아니면 운명이라는 게 신기하게 내 인생으로 찾아오는 걸 수도 있고. 나는 이왕이면 후자이길 바랐다. 우린 운명이야, 어쩌면. 내 바람에서 끝나겠지만 말이야.
얼굴을 본 후에, 그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일까? 어떤 목소리로,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억양으로 말하는지, 말할 때 손을 꼼지락거리는 습관 같은 건 없는지. 어떤 체취가 나고, 어떤 자세로 걸어 다니는지, 앉은키나 신발 사이즈는 어떤지, 모든 게 궁금했다.
좀 더 구체적인 그를 알고 싶었다. 불명확한 정보에서 오는 거리감이 거슬렸다.
그런데, 운 좋게도 또 이야기가 그런 쪽으로 흘렀다.
[청혼: 근데 윤정신도 버찌 실친이야?]
[토라: 너 이제 완전 자연스럽게 말 깐다]
너에 이어, 이제는 아예 이름 석 자를……. 이서진과는 실제로 만나서 종종 노는 사이긴 하지만, 게임에서 먼저 알았으니까 실친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토라: 실친은 아닌데 가끔 만나서 놀아ㅋㅋㅋ]
[청혼: 버찌 왜 그런 선택을 했지...?]
[토라: ㅎㅎ 담엔 너도 ㄱ?]
[청혼: 생각해 볼게]
그냥 하는 소리겠지만, 그래도 단호한 거절이 아니었다.
그럼 조금은 생각이 있는 건가? 설득해 보려는데 눈치 없는 이서진이 초를 쳤다.
[버찌: ㅋㅋㅋ 재미없을 텐데]
[버찌: 쟤랑 만나면 피시방 아니면 당구장이라서]
좋게 얘기해도 올까 말까인데 그딴 말을!
나는 황급히 수습했다.
[토라: 야 다른 거 하려면 왜 못 해]
[청혼: ㅋㅋ 나 가면 맛있는 거 사 주나?]
[토라: 돈 내라 하겠냐 ㅋㅋ]
[버찌: 뭐 먹고 싶은데?]
[청혼: 몰라 생각 안 해봤는데]
[청혼: 둘이 언제 만나는데?]
오오, 넘어올 것 같다. 나는 최대한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가 알겠다고 하길 간절히 바랐다.
[토라: 난 너 오면 내일도 가능]
[버찌: 나도 요즘 일 없어서]
[청혼: 나가면 토라한테 한대 맞을 거 같은데 기분 탓?]
자신이 까분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누구 때려 본 기억 거의 없는데.
[토라: 때릴 데도 없겠더만]
[토라: 깝죽대는 거 육성으로 들으면 좀 빡칠 수도 있을 거 같네 ㅎㅎ]
[청혼: ㅋ 안 갈래 그럼]
[청혼: 나 연약해]
나는 조용히 타자를 친 손을 책상에 내리쳤다.
머리랑 협력하자, 손아. 헛소리하지 말고! 너무 좋아하는 티 내면 부담스럽다고 싫어할 것 같아서 해 본 말인데, 이건 이거대로 너무 오버였던 모양이다.
[토라: 절대 안 깝치겠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네]
[청혼: 그 좋은 걸 왜 안 해]
[토라: 아 화 안 낼게]
[토라: 만나자]
[토라: 같이 놀자]
그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청혼: 버찌 나 가면 뭐 해줄 거야]
[버찌: 음...]
[버찌: 뭐 하고 싶은데?]
[청혼: 나 그럼 칵테일 사줘]
[버찌: ㅋㅋㅋ 술 마시게?]
[버찌: 알겠어]
[청혼: ㅎㅎ 버찌 최고다]
그러게, 최고다!
나는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
* * *
다음 날, 나는 최대한 깔끔하고 무난한 옷을 꺼내 입고 약속 장소로 갔다.
택시를 생각보다 늦게 잡아서 일찍 온다고 온 건데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어 버렸다. 이서진에게서 전화가 오는데, 저만치에 이서진의 모습이 보여서 그냥 전화를 받지 않고 그쪽으로 가는 걸 택했다.
이서진의 옆에 우기로 추정되는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 그쪽에서도 날 발견한 눈치라 손을 들어 보이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술 먹기로 하지 않았나? 이서진 차 끌고 왔네.
“오, 차 끌고 왔네? 웬일? 집에 어떻게 가져가게?”
“어차피 집 들를 거잖아. 그때 놓고 오지 뭐.”
나는 힐끔, 서진의 옆에 서 있는 우기를 보았다.
키는 좀 작은 편이고 평균보다 조금 마른 체구였다. 얼굴은 사진으로 본 거랑 비슷한데, 확실히 실제로 보니까 느낌이 또 달랐다.
오밀조밀 귀엽게 잘생긴 얼굴이다. 귀엽네, 진짜. 절로 웃음이 나왔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뭔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반쯤 감긴 듯한 눈과 통통한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우와. 최우기다, 최우기. 아기다, 아기.”
“……미친.”
그가 질색을 하며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와, 어쩌면 목소리도 저렇게 좋지? 근데 얘 지금 나한테 욕한 거야?
“와……. 인사하기도 전에 욕부터 박냐? 너 진짜 나한테 너무한다고 생각 안 해?”
앙칼지네, 정말. 목소리 처음 듣는 건데 그 첫마디가 욕이라니. 귀여움 반, 괘씸함 반의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그의 볼을 쥐고 흔들자, 우기가 내 손을 탁 쳐 내며 입을 우물거렸다.
“하지 마.”
굉장히 허스키한, 살짝 높은 톤의 목소리였다. 생긴 거나 느릿한 동작 같은 걸 보면 굉장히 나른해 보이는데, 목소리는 또 섹시해서……. 그 조화가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에게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목소리 허스키하다. 완전 섹시.”
“아오, 좀 작게 말해.”
그가 창피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이서진의 뒤로 가 숨었다. 겁 많은 초식 동물 같았다. 그가 곧 도망치듯 이서진의 차 뒷좌석에 올라탔고, 나는 바로 옆자리에 탔다. 그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면허 없어?”
“없는데? 오토바이 면허는 있어.”
“그럼 넌 그거 타고 오면 안 돼?”
“싫은데? 네가 그러니까 더 놀리고 싶다.”
“아, 형. 얘 이상해.”
우기가 불편한 듯 이서진에게 칭얼거리듯 말했고, 이서진이 나를 말렸다. 아니, 반응이 귀여운 걸 어떡해.
“아, 진짜 안 되겠다. 우기 보쌈해 가야겠다. 형한테 장가오자.”
“내가 양성애자라서 성별 따지진 않는데, 그냥 넌 진짜 아닌 거 같아.”
그가 진심인 듯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면 나는 연애 상대로 어림도 없긴 한 것 같았다. 좋을 건 뭐겠냐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싫을 이유가 있나.
“왜? 나 해외여행도 자주 보내 줄 자신 있는데. 나도 여자 남자 안 가려.”
“무슨 해외여행?”
“웬 해외여행?”
“홍콩. 원할 때마다 보내 줄 수 있지.”
“……형, 혹시 아는 변호사 없어? 이런 거 성희롱으로 고소 안 돼?”
마이너스였다.
근데 진짜 자신 있는데. 자랑할 만한 것 중 하나다.
“윤정신, 선 좀 지켜. 스무 살 애한테 뭔 그런 말을 해?”
“헐. 진심인데. 그리고 나도 스물일곱 살 애야. 애초에 홍콩이 왜 성희롱인데? 너희 그거 음란마귀다.”
“나 조수석 갈래. 얘 무서워…….”
“그럴래?”
“아, 가지 마. 장난 안 할게. 뭔 말을 못하겠네.”
나는 일단 듣기 좋은 소리를 하며 항복하는 척 그를 붙잡았다. 그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잘하자, 정신아.”
“너 맞먹지 마라. 나도 형이라고 불러.”
“헛소리 안 하면. 딜?”
그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설마 약속하자는 건가? 아무튼, 손잡을 기회다. 나는 냉큼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나저나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나는 뒤늦게 이서진에게 물었다. 그가 봐둔 곳이 있는지 바로 답을 했다. 그 식당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는 동안, 나의 말에 계속 태클을 걸던 우기가 드디어 말 같은 말을 꺼냈다.
“근데 학교 선생님 더 아는 사람 없어? 이창선만 아는 거야?”
“박순자 선생님이랑 조재현이랑. 근데 아직 다 계시나?”
“박순자 선생님 아직 계셔. 신기하다. 우리 학교였던 거 보면 공부 못했구나?”
그러는 지는…….
“지는. 그리고 공부 못한 게 아니고 안 한 거지. 나 그래도 대학은 갔어.”
“대학 다녀?”
“지금은 졸업했지. 난 취업 생각 없었어서 입시 준비했거든. 근데 너 이름 들어도 어딘지 모를걸? 잡대라.”
“무슨 과인데?”
“중남미어.”
“그게 뭔데? 해 봐.”
“에스파냐어. 스페인 몰라?”
“그럼 처음부터 스페인이라 하면 되지. 인사해 봐, 나한테.”
나는 별생각 없이 인사를 해 주려다, 또 장난기가 동했다.
“Te quiero.”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욕이랑 이런 거만 열심히 외웠지.
우기가 어리둥절한 눈치로 이서진에게 물었다.
“형, 이거 맞아?”
“스페인어는 맞아.”
“인사가 아니구나? 욕했지, 나한테?”
“사랑한대.”
“아, 씨발……. 차라리 욕을 해.”
그가 질색을 하며 말했다.
웃긴 한편 조금 씁쓸했다. 쟨 나한테 마음이 없는 걸 넘어서 싫어하는 것 같은데 난 왜 쟤가 좋을까.
그래도 오늘 얼굴까지 보고 나니 확실히 느꼈다. 포기 안 된다, 이건. 감정이 자연히 소멸할 때까지 시간을 믿으며 기다리든가 쟤를 홀려야 한다.
도전해 보고 좆되느냐, 도전 안 해 보고 덜 좆되느냐의 차이인데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가능성 없는 거라면 작은 확률에 걸고 도전하고 싶었다.
“사랑한다는데 왜 욕을 하래?”
“언어 고문인데, 거의.”
“진심인데.”
“네 마음 거절할게.”
그가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눈치로 나를 힐끔거리며 불편한 얼굴을 했다. 눈빛이 정처 없이 떠도는 게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일단 그의 경계를 낮추려 거짓말을 했다.
“야. 농담이다, 농담. 인상 좀 펴라. 내가 그렇게 아니냐?”
“인간적으로는 나쁘지 않지만 그런 쪽으로는 진짜 절대. 상상도 안 가.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야, 그건 좀 상처다. 너 그럼 오랑우탄이랑 사귈래, 나랑 사귈래?”
“당연히 둘 다 안 사귈 건데? 둘 중 하나 안 고르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면 널 고르긴 하겠지만 마음은 죽고 싶을 거야.”
“뭘 또 죽음의 위기까지 가정하냐? 아무튼, 나랑 사귀겠다 이거지?”
“그런 조건이면.”
“사실 너 둘 중 하나 안 고르면 죽는 거였거든? 이렇게 되면 우리 오늘부터 1일이지?”
저렇게까지 싫다고 하니 이젠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그래, 어차피 망했는데 막 던져. 나는 실실 웃다가 그의 눈빛을 보고 조용히 입꼬리를 내렸다. 너 많이 짜증 났구나.
“너 눈에서 살기 나온다.”
“나도 느껴져.”
“……저기, 도착했어, 얘들아.”
다행히 마침 목적지에 도착해서 나는 그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피할 수 있었다.
나는 먼저 내려서 장난의 연장선으로 그에게 에스코트해 주듯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가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으며 내리는 것이다. 이건 또 잡네. 웃기기도 하고 또 귀여워서, 나는 아예 깍지를 끼고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아, 좀. 놔.”
“사귀는데 손도 못 잡아?”
“그만 좀 하라니까.”
그가 짜증을 넘어서, 조금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답답함을 토로했다.
너무 심했나? 이서진도 그를 느꼈는지 나를 우기에게서 조금 떼 놓았고, 나도 순순히 물러섰다.
“왜 그래, 너. 우기 진짜 싫대.”
무슨 몹쓸 놈 보는 표정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거라 이거지? 괜히 배알이 꼴렸다.
“귀엽잖아.”
“그래도 싫다는데 왜 자꾸 그래.”
“그래, 이 변태야.”
“변태라니……. 솔직히 맞긴 한데. 최우기, 네 이상형 뭔데? 일단 그게 난 아니라는 거 알았고.”
“너랑 정반대인 사람.”
저게 진짜.
나는 짜증을 꾹 참고 다시 물었다.
“야. 그럼 네 친구 걔는 어때? 전에 네가 침팬지라고 한 애.”
“너랑 동급으로 싫어, 걔도.”
“얘는? 이서진은?”
이게 본론이었다.
조금 긴장이 됐다. 이서진도 내심 궁금했는지 그의 답을 기다렸다. 우기가 어렵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음…….”
“어쭈. 고민하냐? 나는 1초도 고민 안 하고 차 놓고?”
“버찌는 뭐라 해야 하지……. 사이좋은 친형 같아.”
“친형이면, 얘도 못 사귄다 이거지?”
가망이 있다, 그래도. 나도 아니지만 너도 아니다. 이서진도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별로 아무 생각 없는데? 일단 넌 전혀 아니야. 너랑은 그냥 싫어.”
요컨대 이서진은 좋아하지 않는 거고, 나는 싫다는 거다.
자꾸 놀려서 그런가? 이서진처럼 좀 더 착하고 조신한 척을 해야 했나. 최대한 말도 순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건데, 더 힘을 써야겠다.
“와……. 왜지? 조만간 재검사받으러 온다, 딱 기다려라.”
“놀자고 모인 건데 넌 혼자 선보러 나왔냐? 왜 이렇게 자꾸 집적거려. 너한테 관심 없다니까?”
“관심이야 차차 생기겠지.”
내가 그렇게 말하자, 우기는 답답한 듯 제 가슴을 팡팡 쳤고 이서진이 은근한 경계를 보내며 물었다.
“너 원래 양성애자였나?”
“몰랐냐? 너랑 처음 봤을 때 즈음에도 남자 애인 있었는데.”
“몰랐는데. 난 계속 농담하는 줄 알았어.”
그냥 신기한 척하지만, 이서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야, 농담 아니라고 하면 얘 발작해. 농담이라고 쳐.”
우기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내 등을 팍 때렸다.
미안, 원래 난 의리보다 내 감정이 중요하거든. 나는 끝까지 모르는 척, 나는 나대로 밀어붙여 보기로 결심했다.
그 방식이 뭐냐면…….
[토라: 그니까 3일만]
[토라: 사귀자고 좋아질 수도 있잖아]
그냥 이렇게 들이대고 보는 거다.
[토라: 그럼 30일 동안 귀찮게 안 할게]
이런 구질구질한 조건을 달고. 이게 억지로라도 이서진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을 돌려놓을 미봉책이니까.
사실 이런저런 핑계는 댈 수 있지만, 이유라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정말로 3일이라도 사귀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리 명목상 관계라 해도 연인 사이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니까. 운이 좋으면 그의 마음을 돌릴 수도 있는 거고.
솔직히 별 기대 없이 되는 대로 떼쓴 건데, 그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승낙이었다. 심지어 기한도 늘려 줬다. 무려 한 달이나.
하지만 나는 체념 상태였다. 그에게서 단호함을 읽었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나면 오히려 내 입지는 전보다 못해질 것 같았다. 남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겠지.
네가 내 삶에 나타난 게 운명이긴 한데, 너와 내가 인연인 건 아니었나 봐. 이 기간이 지나면 우린 헤어지겠지. 넌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기한이 만료됐음을 확인하며 후련함을 느낄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왕 주어진 시간이니 최선을 다해 보고 싶었다. 내 능력 밖이라면, 제발 행운이 따라 주길. 한 번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그리고 정말 그 한 번의 행운이 찾아왔을 때, 나는 느꼈다. 그게 마지막 조각이었다는 걸. 내 안의 빈 공간에 딱 맞는 마지막 퍼즐이 채워지면서 내가 순도 100퍼센트의 행운이 돼 버린 것 같다고 느꼈다. 누구도 나에게 이러한 충만함을 준 적이 없다, 그 누구도.
나는 정말 운이 좋아서, 나와 빨간 실로 연결돼 있다는 이 지구 단 한 명의 운명의 짝을 만난 게 아닐까? 내가 운이 나쁘다 생각한 모든 일이 결국 이 결과를 위한 과정이었던 게 아닐까? 역시 나는 운이 좋다.
그는 나에게 타오르는 갈증과 충만함을 동시에 안겨 주는 완급의 달인인 조련사다. 나는 너의 앞에선 너무도 쉽게 웃고 울게 된다. 언제나 너무도 벅차니까. 옆에 서 있기만 해도 공기가 달콤하고 세상은 분홍빛 같으니까, 간질간질한 봄바람 같으니까.
너는 내게 봄의 섬세함이고 여름의 강렬함이며 가을의 세련됨, 겨울의 고요함이다. 낮의 활기이며, 밤의 서정이다. 너는 나를 너무도 쥐락펴락하는, 내 정신을 쏙 빼놓는 사랑스러운 여우다.
너를 좋아하는 일은 인과 관계나 감정의 발전 같은 걸 넘어서 불가항력 같은, 손댈 수 없는 운명의 무언가로 느껴진다.
사람이 이렇게 좋을 수도 있구나. 매시간 매 순간 나는 느낀다. 조잘거리는 소리도 너무나 기분 좋고, 너와 함께하는 모든 공간에는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헤벌쭉 웃다가 너에게 놀림을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나는 그래도 네가 참 좋았다.
“형은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그가 그렇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생각나는 대로 답하긴 했는데, 그 답변이 100퍼센트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다.
뭔가 찝찝한 기분……. 나는 그 답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을 얻었다. 그때 왜 말문이 막혔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너를 향한 나의 감정이 절절하다는 것은 스스로 너무 잘 아는데 왜 난 그때 대답하기가 힘들었을까? 그걸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어서?
뭐, 그것도 어느 정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거다.
그 차이를 내가 몰랐기 때문에 그랬던 거다. 좋아하는 게 ‘그래서’ 좋아하는 거라면, 사랑하는 건 ‘그럼에도’ 사랑하는 거였다. 좋아하는 게 어떤 조건의 달성을 필요로 하는 산식 같은 거라면 사랑은 그저 찾아오는 거였다.
에로스는 화살을 쏠 때, 자기 나름의 합당한 이유에 따라 활을 겨누겠지만 맞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운명의 차원인, 불가항력의 사건일 뿐이니까.
그냥 그렇게 돼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운명이라서. 그게 나의 운명이라서.
나는 사랑에 빠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