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윤정신(1)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아니, 행운아라고 해도 그럭저럭 수긍이 가능할 것이다. 그만큼 내 인생은 순조롭고, 운 좋게 술술 잘 풀렸다.
그런 내게 처음으로 쓰라림을 남긴 몇 안 되는 불운의 기억은 어린 시절 돌다리 위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진 것이나, 운 나쁘게 벌에 쏘인 것 같은 게 아니다.
첫사랑이었다. 나는 그 애 앞에서는 참 운이 없고, 풀리는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창백한 얼굴 앞에서는 나의 싱그러운 행운도 질려 얼어 붙는지 불운아가 따로 없었다.
늘 그 애 앞에선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이고, 모처럼 한 행동들은 죄다 헛수고, 짝 같은 건 절대 되지 않고 타이밍은 늘 사사건건 어긋나고.
그런 내게 소중하게 남은 그 애와의 기억이란, 단 한 번 운이 좋아 단둘이, 아이들이 하교한 후의 교실에서 아무런 실수 없이 이야기했던 그 5분 남짓한 시간뿐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청첩장을 우편함에서 발견했을 때, 이 지긋지긋한 불운 생활도 종지부를 찍은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 이제는 청산이다, 하고.
하지만 그 불운은, 지워지지 않는 자국을 깊게 새기고 간 듯했다. 아무리 빨아도 지지 않는 오래된 얼룩처럼, 저주 받은 것처럼 이후에도 나의 연애는 좀처럼 잘 풀리질 않았다. 아무리 사람을 만나도, 옆에 있는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있어도 사무치는 외로움이, 공허함이 지워지질 않는다.
수많은 모임을 나가고, 친구를 사귀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내게 호감을 표하고, 나는 그것을 막지 않고. 무의미한 시간들. 공허함이 좀처럼 채워지질 않았다.
그러자 드는 생각은, 이 공허한 빈자리에 맞는 퍼즐이 첫사랑, 그 애였던 것 같다는 거였다.
놓치면 안 됐던 건가? 도대체 이 빈자리의 이름은 무얼까. 너를 만났다면 나는 이 공간을 채우고 100퍼센트가 될 수 있었을까.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피곤에 절어 잠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코치니요 아사도와 공항에서 씁쓸한 얼굴로 이쯤에서 그만 만나자던 애인. 아니, 이제 전 애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성준의 얼굴이 교차로 떠오르는 듯했다.
이별이 별로 아쉬울 건 없었다. 혼자 여행 가는 건 쓸쓸할 것 같았을 뿐이니까, 여행이 끝난 이후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참 자다가 일어나서, 어제 너무 피곤해서 방치해 뒀던 짐을 풀고 냉수를 한잔 마셨다. 이제야 집에 온 것이 실감이 났다.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 위에 대충 수건을 얹어 둔 뒤 게임에 접속했다.
주스를 한잔 떠오고 보니 이서진에게서 초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수락했다.
[토라: 왜]
[버찌: 여행 좋았어?]
[토라: 좋자고 갔는데 좋기야 좋지]
[토라: 비행기 내리자마자 차임ㅋㅋㅋㅋㅋㅋ]
[버찌: ㅎㅎ; 너 같으면 너랑 만나겠니]
[버찌: 어제 전화로 말한 거]
[버찌: 지금 파티원끼리 다 모여서 대충 소개할까 하니까 나 있는 곳으로 와]
[토라: 갑자기 그 캐릭터는 왜 키움]
[토라: 와 언제 이렇게 키웠냐; 미친놈]
버찌 캐릭터 정보를 보자 레벨도 많이 올랐고, 장비도 대충 다 맞춘 것 같았다. 장사하느라 정신없는 놈이 갑자기 왜? 의문스럽긴 했지만 일단 그가 말한 곳으로 캐릭터를 워프시켰다.
이미 사람들은 모여 있는 듯했다. 나는 친목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라서 죄다 초면이었다. 그래도 개중 커플인 것 같은 두 사람은 유명한 길드 소속이라 대충 스펙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은 갔고, 다른 한 사람이…….
그런데 이 파티, 프리스트는 있나? 왠지 모르겠지만 프리스트는 다들 여캐를 많이 써서, 나는 자연스럽게 봉봉이라는 사람의 정보 창을 확인했다. 아닌데? 딜인데?
[토라: 아 봉봉 님이 프리가 아니구나]
나머지 둘의 정보를 확인할 수고가 필요 없게, 프리가 스스로 손을 들었다.
[청혼: 저예요]
뚱한 표정의 귀여운 캐릭터였다.
그가 캐릭터를 점프시켜 제자리를 폴짝폴짝 뛰었다. 귀엽다 생각했는데 진짜로 햇병아리였다. 스무 살? 풋풋도 하네. 나는 모두에게 말을 놓겠다고 이야기하곤 컴퓨터를 껐다.
* * *
[청혼: 하이요]
그를 다시 만난 건 그 후로 이틀 뒤였다.
아이템 받을 게 있어서 이서진을 찾아갔는데, 거기에 함께 있었다.
[청혼: 벞]
그는 서진에게 버프를 주고 있었다.
아, 같이 다니는 프리를 파티에 부른 거였나? 레벨 업도 이를 갈고 하나 보네. 나는 이서진의 독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청혼: 버찌 님]
[청혼: 버찌상ㅋ]
[버찌: 네???]
[버찌: 네네 죄송해요 멍 때리느라...]
[청혼: ㄴㄴ 토라 님 왔는데요]
[버찌: 아 ㅋㅋㅋ]
이서진이 바로 나에게 다가와 교환 신청을 걸었고, 나는 아이템을 건네받았다. 그가 교환 채팅에서 사과를 했다.
[버찌: 미안 오라 해서]
[버찌: 네가 한가하니까]
[토라: ㅡㅡ]
[토라: 와 근데 버프 알바도 쓰냐]
[토라: 이상하게 업이 빠른 것 같더라]
[버찌: 부탁 좀 했어]
교환에 성공했다는 알림과 함께 교환 창이 꺼졌다.
왠지 이상하게 그냥 가기 아쉽네. 이것들은 근데 사람 가는데 인사도 안 하고…….
[토라: 나 간다]
[청혼: ㅂㅂ요]
이게 다야? 이서진은 그나마도 없이 사냥을 재개했다. 매정한 새끼. 나는 찝찝한 마음을 안은 채 그들을 뒤로했다.
* * *
상위 던전은 주에 1번만 격파가 가능했다. 내가 콘텐츠 때문에 지난주 것을 격파해 놓아서 오늘이 이서진이 초대한 첫 파티였다.
[보보: 물약 키 그냥 꾹 눌러 놓아라ㅋㅋㅋ]
[청혼: 내 손가락만 있으면 됨ㅋ]
[청혼: 너 순위 본다 내가]
보스에게 넣는 딜은 유저 별로 누적이 돼서 순위가 매겨지는데, 그 순위를 보겠다는 거였다.
……내가 꼴등은 아니겠지, 설마?
갑자기 불안해졌다. 돈을 갈아 넣긴 했는데, 혼령술사는 딜 넣는 거 외에도 신경 쓸 게 많은 직업이라.
그나저나 이 파티, 나 빼고는 다들 이미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아니면 나만 모르는 모임이 있었다든지……. 영 동떨어진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친화력이 좋은 편이라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별로 치댈 기분도 아니고.
[청혼: 사랑의 빵!!]
그때, 청혼이 장난으로 이서진에게 하트 모양의 이펙트가 뜨는 힐을 걸어 주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스무 살이라더니, 귀여운 짓 하네. 단순히 버프 셔틀만 하는 비즈니스 관계인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친한 모양이었다.
[버찌: 으윽]
[청혼: ㅋㅋㅋ]
[청혼: 에임 좋다 이 말이야 ㅋ]
[버찌: ㅋㅋㅋㅋㅋ]
얼씨구, 맞장구까지?
둘이서 사랑의 총알을 쏘고 맞고 야단들이 났다.
[청혼: 저 어제 영상 찾아보긴 했는데]
[청혼: 실전 경험이 적어서 잘 할지 모르겠음]
[버찌: 그래놓고 다 피하실 것 같은데...ㅋㅋ]
[버찌: 칼날 뿌리는 건 피하기 까다로워도 피 회복 빨리 하면 괜찮을 거예요]
[버찌: 즉사기는 귀찮긴 한데 칼날보다는 피하기 쉬우니까]
[버찌: 죽어도 토라가 백업 잘 해줄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내 직업군 스킬에 죽은 파티원을 안전하게 죽기 전 상태로 복구해 주는 [강림]이라는 스킬이 있었다. 쿨 타임이 길어서 한 던전에 두 번 쓰는 건 무리고, 일단 내가 살아 있어야 쓸 수 있는 스킬이긴 하지만.
원래는 부활하면 보스가 피 회복을 조금 하고, 부활한 사람은 버프 효과를 잃은 채 줄어든 체력과 마나로 시작해야 하는 단점을 감수해야 하는데, [강림] 스킬을 쓰면 버프도 유지되고 체력과 마나도 풀인 상태로 부활할 수 있게 된다.
보스도 피 회복 대신 적은 양이지만 데미지를 먹어서 꽤나 유용한 스킬이기는 했다. 뭐, 그래도 안 죽는 게 최고지만. 그나저나 상위 던전은 별로 안 돌아봤나 보네.
[토라: 나만 믿어 ^^]
[청혼: 나도 그 모자 써야지]
[청혼: ㅎㅎㅎ]
근데 씹혔다.
나 진짜 여기서 왕따인 거 아니야? 둘씩 꽁냥거리고 있고, 난 그 눈꼴사나운 걸 저만치서 봐야 하는 건가? 보보랑 봉봉은 실제로 사귄다니 그렇다 치고, 저 둘은 뭔데?
[토라: 입장 안 하냐]
[토라: 서진아 입장 안 하냐~!~~!]
[청혼: 토라 님]
나는 처음으로 호명된 것에 기뻐 바로 대답을 했다.
[토라: 응??]
[토라: 형이라고 해 그냥]
[청혼: 넴]
[청혼: 저 혹시 죽어도 강림 ㄴㄴ]
[청혼: 다른 분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청혼: 저는 도핑 효율 젤 낮으니까 알아서 복구할게요]
자신 있다는 건가. 부활하고 나면 마나도 딸려서 실드도 못 쓸 텐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써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초에 청혼에게 쓸 일 자체가 생기지 않았다.
저거 미친놈 아니야? 캐릭터 히트박스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더럽게 잘 피하네. 나는 그럭저럭 피하고 그럭저럭 맞아 가며 피 회복을 했는데, 그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조그만 칼날들을 무빙으로 다 피한 것이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힐 서포트도 잘해 줘서 누구도 죽지 않은 채 격파가 끝났다. 다음 던전들도 무난하게 깬 뒤에 나는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청혼: 수고]
나는 두어 번 점프를 하며 인사를 하는 그에게 서둘러 채팅을 쳤다.
[토라: 수고했어]
[청혼: 형도요]
[청혼: 버찌 님 바로 ㄱㄱ?]
[버찌: 아니요 좀 쉬었다가 1시간 뒤에 하려는데 괜찮아요?]
[청혼: ㅇㅇ]
짧기도 해라.
그래도 묘하게 ‘형도요’ 했던 그 세 글자를 곱씹게 되었다.
* * *
그때부터 나는 그에게 관심이 갔던 것 같다.
내가 관심이 간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할 정도로 상대가 내게 무심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는 괜히 이서진 주위를 얼쩡거리며 그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분명 친해지고 싶었다.
[청혼: ㅎㅇ요]
[토라: 안녕]
[버찌: ??? 왜 왔어?ㅋㅋㅋ]
[토라: 걍 ㅋ]
[토라: 웬 일로 사냥 안 하네]
[버찌: 부주도 안 쓰고 어떻게 종일 해]
[토라: 대리 좀 해 줄까]
[버찌: 괜찮은데...ㅋㅋ]
[버찌: 평소답게 굴어]
[토라: 들어가서 아이템 좀 다 빼가려 했더니 ㅋ]
[버찌: ㅋㅋㅋㅋㅋㅋㅋ]
[청혼: 줄 서봄니다...]
[청혼: 사탕 지팡이 하나만 빼다주십쇼ㅋ]
[토라: 아 알지알지 ㅎ]
[버찌: 그게 가지고 싶었어요?ㅋㅋ]
[청혼: 예...^ ^]
[버찌: 재고 많아요 다음에 창고에서 가져오면 싸게 줄게요]
[청혼: 역시 버찌 님 최고 ㅎ 충성충성]
싸게 준다고? 나는 이서진의 착한 척에 미간이 좁혀졌다.
저 장사꾼이 싸게 줘? 상대가 어린애라 그런지 젠틀 한 척 꽤 하는데.
[토라: 내가 나눔 하면 0원인데]
[청혼: 왜 물건을 훔치고 그러세요]
[토라: 와;;]
[청혼: 노략질에 취미 없어서 ㅋ]
태세 전환하네. 나는 괜히 팽 당한 기분이었다.
[토라: ㅠㅠㅋ]
[청혼: 형 근데 그 옷 뭐예요?]
[청혼: 처음 봄]
드디어 나에게 관심이…….
나는 언제 얻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아이템 정보를 확인해 그에게 알려 주었다.
[토라: 이거 여우 도령 치치의 옷]
[토라: 예전에 이벤트로 뿌렸던 거야]
[청혼: ㅇㅎ]
[토라: 그냥 반말해도 돼 ㅋㅋ 편하게 해]
[청혼: ?? 괜찮아요]
[청혼: 지금도 ㅂㄹ 안 불편]
[청혼: 버찌 님 저 잠시 빨래 걷으러 다녀올게요]
[버찌: 네 ㅎㅎ]
[청혼: ㅎㅎㅎㅎㅎ]
뭘까, 이 소외감. 왜 껴선 안 될 자리에 있는 것만 같지? 나는 그가 간 사이, 이서진을 추궁했다.
[토라: 너네 뭐 있지]
[버찌: 뭘?]
[토라: 사이 수상한데]
[버찌: ㅋㅋㅋㅋㅋㅋㅋ]
[토라: 착한 척 좀 심하다 친구야]
[버찌: 척이라니 ㅎㅎ;;]
[버찌: 너야말로 듬직한 형인 척 그만하면 안 될까]
[버찌: 간지러워서 못 봐 주겠어 도저히]
[토라: 어색해서 그러지]
[버찌: 네가 어색한 사람도 있어?ㅋㅋ]
그러게. 너무 명확하게 벽이 느껴져서 그런가……. 반응을 잘해 주는 듯하면서도 또 무안할 정도로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이상하게 말할 때도 조심스럽고, 음. 어색하다기 보단 뭔가 쑥스러운 느낌?
아니, 그게 어색한 건가. 불편한 건 아닌데. 아무튼, 아직 못 친해진 건 사실이다. 친해지려고 일부러 노력한 적은 별로 없었는데, 의식해도 좀처럼 가까워지질 못하는 느낌…….
확실한 건 그가 발바닥에 박힌 작은 유리 조각처럼 신경이 쓰인다는 거였다. 얼마 후 청혼이 자리로 돌아왔지만, 그는 1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이서진과 손을 잡고 떠나 버렸다.
* * *
다음 날, 나는 눈을 뜨자마자 게임에 접속했다.
중간중간 계속 친구 창을 켜 가며 그가 접속했는지 확인을 했다. 이런 내 자신이 한심했지만 도저히 손을 멈출 수 없었다.
그도 양반은 못 되는지 정오가 되기 전에 로그인을 했다. 나는 부러 조금 시간을 두고 그에게 인사를 보냈다. 그래도 같은 파티라고 친구 추가를 해 둔 게 다행이었다.
[토라> 안녕]
[청혼: ㅇ]
[청혼: ㅋㅋ]
[청혼: 싫은디??????]
[청혼> ㅎㅇㅎㅇ]
다행이다, 그래도. 씹히진 않았잖아? 그다지 위로는 안 되지만 [ㅎㅇ]도 두 개나 왔다. 그는 계속 자신의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청혼: ㅋㅋㅋ]
[청혼: ㅇㅉ]
[청혼: ㅇ;; 너도]
[청혼: 확실한 건 너보단 나을 듯]
지금 말 걸면 눈치 없는 건가. 대화하고 싶은데……. 먼저 말 거는 건 너무 눈치 없는 복학생 된 기분이라 안 내키고, 먼저 좀 걸어 주면 좋겠는데 말이다.
이런 나의 바람이 전해졌는지, 그에게서 귓속말이 왔다.
[청혼> 나 아님]
[청혼> ㅈㅅ 잘못 보냈어요]
[청혼> 형 죄송해요]
[토라> 괜찮아 ㅋㅋㅋ 뭘 죄송까지]
[청혼> ㅠㅠ]
……끝? 이대로 끝?
차라리 안 괜찮다고 할걸 그랬나.
[청혼> 형형]
[토라> 응?]
[청혼> 저 뭐 물어봐도 돼여?]
[토라> ㅇㅇ 괜찮지]
드디어 대화다운 대화가……!
[청혼> 형 무기에 돈 얼마 썼어요??]
김이 샜다.
나는 대략적인 금액을 일러 주었다.
[청혼> 와...ㄷㄷ]
[청혼> 짱이당]
[청혼> 형 그럼 음산 쓰면 올 맥스 뎀이겠네요]
[토라> 스킬 데미지 퍼센트가 그럭저럭 높으니까 아무래도]
[청혼> 게임 할 맛 나겠다]
[토라> 나름 재밌어 다음에 한번 키워봐]
[청혼> ㄴㄴ 저 직업 바꾼 거임]
[청혼> 얼마 전까지 혼술이었어여]
[청혼> 프리는 진짜 딜 넣을 때 쓸 만한 게 하나뿐인데 공속도 개느려서]
[청혼> 좀 노잼인 듯 공격 스킬 좀 다양해야 연계하는 맛이 있는데]
[청혼> 그냥 눈치 봐서 힐 넣고 리버프 하는 거 말고 ㄹㅇ 뭐 없음]
[토라> 컨트롤이 아깝긴 하더라]
[토라> 잘하던데]
별생각 없이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하자, 그는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역시 칭찬이 최고인가?
[청혼> ㅎㅎ 죽이죠]
[청혼> 신컨]
[토라> ㅇㅈ]
[청혼> 형 보는 눈 있네요]
[토라> 좀 준수한 편이야]
[청혼> ㅋㅋㅋㅋㅋ]
[청혼> 즐겜 해요]
아, 또 끊겼다.
약간의 허탈감이 느껴졌다. 혹시 나랑 대화하기 싫은 걸까? 말 굳이 안 놓는 이유도 모르겠고. 계속 얘기하고 싶은데 자꾸 대화가 이어지질 않으니 답답했다.
이래서 어느 세월에 친해져? 나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다.
[청혼: 돈 빌려 줄 사람]
그래, 지금!
[토라: 빌려줄까]
[청혼: 헐 네]
[청혼: 형 어디세요]
[토라: 버려진 숲]
[청혼: 아ㅠ 저 거기 입장 퀘스트 안 깸]
[청혼: 돈 빌려 줄 사람 제발 당장]
[토라: 워프 쓰면 되는데]
[청혼: 형이 오시게요??]
[청혼: 좀 죄송한데]
[청혼: 그럼 한시 빨리 오페라로;; 제발 워프 좀]
[토라: 잠깐만]
나는 허겁지겁 워프를 타고 가서 그에게 게임 머니를 빌려주었다. 별로 큰돈은 아니었다. 허세가 아니라, 정말로. 뭘 사려는데 돈이 딱 그만큼 모자랐다나?
그는 신이 나서 새로 산 아이템을 꼈다.
귀엽네. 처음 보는 멜빵 바지였다.
[청혼: ㅎㅎㅎㅎ]
[청혼: 형 감사요]
[청혼: 이 은혜 잊지 않겠음]
[토라: 그럼 소원 하나 들어 줘]
[청혼: 먼데요?]
[토라: 그냥 말 편하게 해줘 ㅠ 내가 좀 불편해서]
[청혼: ㅋㅋㅋㅋㅋ 아 오키;;]
[청혼: 형은 유명인사라]
[청혼: 뭔가 말 놓기 좀 그래서 ㅋ...]
내가 유명인사? 유×브 때문인가. 그냥 하찮은 일반인일 뿐인데…….
[청혼: 돈 생기면 갚을게]
[청혼: ㄱㅅㄱㅅ]
나는 안 줘도 된다고 치려다가, 문득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니지, 이런 거 하나하나가 기회인데.
아닌가? 쿨 하게 이 정도는 사 줘야 좀 호감형이려나.
나는 고민하다가, 어차피 난 하나도 안 멋있고 머잖아 그건 들킬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내 성격대로 구질구질하게 가자.
[토라: 그래 ㅎㅎ]
그 돈, 꼭 받아 주마.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 * *
나는 다음 날도 아침 일찍 게임을 켰다.
종일 그와 대화할 기회를 잡으려고 게임을 켠 상태였다. 그는 이번엔 점심때가 지나서 느긋하게 게임에 접속했다.
[청혼: ㅎㅇ]
친구 채팅 창에 그가 인사하는 게 보였다.
인사할까? 인사 오길 기다려 볼까? 고민하는데 그쪽에서 먼저 귓속말이 왔다.
[청혼> 형 돈 갚을게요]
[청혼> 어디세요?]
……다시 원위치인가.
[청혼> 아 맞다 존댓말 불편하댔지]
[청혼> ㅇㄷ? 빨리빨리]
그냥 잠깐 까먹은 거였구나. 나는 다시 얼굴이 폈다.
[청혼> 잠수?]
[토라> ㄴㄴㄴ]
[토라> 나 근데 여기 사냥터라]
[청혼> 아 맞네]
[청혼> 사냥터고 자시고 그쪽 아예 못 간다니까]
[청혼> 그럼 이따 줄게]
[토라> 아니 쉬려던 참이야]
[토라> 성격 급하네]
[토라> 마을이야?]
[청혼> 어제 돈 빌린 거기]
[토라> 내가 갈게 잠시만]
나는 침착하게 캐릭터를 마을로 워프시켰다.
그에게 교환 신청을 걸어 빌려준 돈을 받고, 나는 다시 또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돈만 주고 쿨 하게 가다니. 이쯤 되니 완전히 질려 버렸다.
내가 바보같이 뭐 하고 있는 거지?
이제 신경 쓰지 말자. 나는 의식적으로 그에게서 신경을 끊으려 노력했다. 그래, 노력했다……. 실천은 못했던 것 같고.
내가 노력하지 않으니 당연하게도 그와 이야기를 나눌 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서진과 그는 몹시 친해지고 있었고 말이다.
나는 딱 이틀 그렇게 혼자만의 시위를 하다가, 이서진이 파티에 청혼을 부르겠다 한 단 한마디 때문에 와르르 무너졌다. 왜 이렇게 기대가 되는 거야? 왜 이렇게 들뜨지? 미칠 노릇이다.
그렇게 새벽에 하는 거 없이 디스코드를 연결하고 부캐로 던전을 도는 쓸모없는 짓에 그까지 가담하게 되었다. 그는 새벽이라 마이크를 켜긴 좀 그렇다며 우리의 말을 듣기만 하고 의사소통은 채팅으로 하고 있었다.
“쟤 바인드 못 걸었다.”
[아, 맞네.]
별로 진지하게 하는 건 아니라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이런 초보적인 실수는 오랜만에 보네.
랜덤으로 구한 파티원 둘은 아무래도 이 구간의 현지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가 껴 있어서 그런가, 유난히 재밌는 것 같았다. 내 목소리 듣고 있겠지? 괜히 의식이 돼서 목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짜리: 버찌 님 목소리 미쳤네]
[짜리: 귀 녹는 중;;]
관심도 없구나, 내 쪽엔.
이쯤 되니 내 처지가 처량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계속 이서진을 따라다니니까 그와도 동선이 많이 겹쳐서 그럭저럭 대화가 이어질 정도까지 친해질 수 있었다.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장난도 많이 치게 되고, 아무튼 평소 텐션이 나와서 금방 나이값 못하는 철부지라는 걸 들켜 버렸는데, 그는 면박을 주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다.
차라리 다행인가 싶었다. 나더러 입이 트이니 깬다고 하는데, 전에 그 유명 인사라는 말의 연장선인 것 같았다. 그도 나에 대한 괜한 환상이 깨져서 그런지 전보다 편하게 나를 대해 주었고 말이다.
이 정도면 꽤 만족이었다. 그래, 목표 달성이지.
그런데 왜 아직도 뭔가 빼놓은 기분일까?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