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엄마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는 게 무서워 종일 방에만 있던 아들놈이 하루가 멀다 하고 외출에, 집에 와서도 방문을 잠그고 전화만 붙들고 있으니 여자 친구가 생겼나 보다 생각하실 수밖에.
아니라고 말하긴 했는데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가 거실에 있는 엄마를 보고 흠칫 놀랐다.
휴무셨구나. 의심 받고 있다는 걸 알고 나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엄마, 오늘 쉬어?”
“응. 이제 일어났어?”
“으응. 근데 이따 나갈 거야.”
“어디 가는데?”
“친구랑 놀러……. 그냥 밥 먹고 산책하고 그러려고.”
“우기 요즘 너무 외출 자주 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별로 자주 안 나가.”
미적거리며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기 전에 신발을 신으며 윤정신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어, 나 지금 나가……. 엄마, 나 다녀올게.”
“얘, 그러고 가니? 밖에 쌀쌀해, 뭐라도 걸치고 가지 않고선.”
“괜찮아.”
나는 다급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현관을 나섰다. 대문 앞에 주차 된 까만 그의 차가 보였다. 윤정신이 멋있는 척을 하며 운전석에서 내려 차에 기대어 섰다.
“오늘따라 예쁜데?”
“오늘따라?”
“아니, 오늘도.”
윤정신이 헤헤 웃으며 뒷좌석 문을 열더니 내게 화려한 꽃다발을 건넸다. 그리고 동시에 대문이 삐거덕 열리며 얇은 외투를 든 엄마가 나왔다.
“수국 꽃…… 다발인데…….”
……망했다. 완전 망했다.
나는 일단 꽃다발을 든 윤정신을 가리고 섰다.
“엄마, 왜?”
“아니, 쌀쌀하니까……. 카디건 하나 챙기라고.”
“아……. 엄마, 이 형이 전에 그 스파 초대한 그 형이야. 오, 오다가 꽃집 아주머니가 잘생겼다고 그냥 줬대, 신기하지?”
다행히 윤정신이 남자라 가볍게 속여 넘길 수 있었다. 윤정신은 당황하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엄마는 엄마대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잘생겼다고 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카디건을 받아 들었다.
“엄마, 아무튼 나 놀다 올게. 집에서 푹 쉬어!”
“그래, 조심히 놀다가 와, 우리 아들. 우리 우기 좀 잘 부탁해요.”
“네, 네. 당연하죠. 들어가세요, 다음에 정식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런 소리를 왜 해? 나는 손을 뒤로해서 그의 손등을 마구 꼬집었다. 다행히 엄마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문이 닫히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윤정신이 신기한 듯 나와 어머니가 서 계셨던 대문을 번갈아 보았다.
“깜짝 놀랐네. 너 어머니 닮았구나.”
“조마조마했어, 진짜. 형이 ‘갑자기 아드님을 주십시오!’ 이런 말 할까 봐.”
“그랬으면 좋겠어? 다음에 만나면 해 볼까? 에이, 그나저나 김샜네. 자, 받아.”
윤정신이 입을 비쭉거리며 꽃다발을 내 품에 안겨 주었다.
연분홍빛의 예쁜 수국이었다. 살면서 졸업식 이외의 날에 꽃다발을 받아 보기도 하는구나. 내가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예쁜 꽃다발이었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것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산 거야?”
“그럼 키웠을까 봐?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나 갈까, 정원 만들게.”
“좋다. 원예 같은 거 배워 봐, 형. 아니면 카페에 심으면 안 되나?”
“꽃 좋아해?”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볼 땐 예쁘잖아. 있으면 좋지. 근데 진짜 예쁘다, 수국. 형은 꽃 키우면 물 주는 거 맨날 까먹을 거 같으니까 내가 매일매일 말해 줄게.”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었다. 감동스러워서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풀렸다. 윤정신이 귀엽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근데 금방 시든대.”
“정말? 꽃병에 꽂아 둬도?”
“그럼 좀 더 가긴 하겠지?”
“나, 그런 거 해 본 적 있어. 플라워 박스 알아? 어버이날 선물로 드리려고 해 봤었어. 그때부터 꽃이 더 예쁘게 보이는 것 같아.”
“오……. 나 곧 생일인데 기대해도 되나?”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다. 나는 새삼 스스로의 무심함에 감탄을 표했다. 잘해 주고 싶은데 생각처럼 안 된단 말이지……. 나는 그제야 물었다.
“생일 언제인데?”
“그것도 모르냐? 너 진짜 너무하다, 야.”
“형도 내 생일 모르잖아.”
“12월 24일.”
……알려 줬던가? 나의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는지,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민증에서 봤지.”
“뭐야. 그걸 언제 봤어?”
“전에.”
“형 민증도 줘 봐.”
윤정신이 어깨를 으쓱하며 지갑째로 내게 건넸다. 나는 조수석에 올라타며 지갑을 열어 그의 주민 등록증을 확인했다. 윤정신이 운전석에 오르며 안전벨트를 매기에 나도 아차 하고 그제야 안전벨트를 둘렀다.
……우와, 근데 이게 저 윤정신이라고?
이때가 이상해씨라면 지금은 이상해꽃이다. 포켓몬도 아니고 어떻게 사람이 진화를 하지? 지금도 척 봤을 때 장난기가 많아 보이긴 하는데 뭔가 능구렁이 같은 느낌이 강해서……. 이때는 한층 해맑고 순수해 보였다. 얼굴에 장난기가 득실득실한 게 꼭 비글 같았다. 되게 귀여웠네?
“와, 형. 풋풋해. 언제 찍은 거야?”
“고3 때. 귀엽지?”
“증명사진 남은 거 있어? 나도 한 장 줘. 지갑에 넣고 다닐게.”
“다음에 집에 오면 가져가.”
참, 사진이 문제가 아니고……. 11월 15일? 오늘이 11월 3일이니까 12일 남은 셈이다. 얼마 안 남았긴 하네. 나도 앞으로는 중요한 기념일 같은 건 달력에 표시하든지 해야겠다.
“말하지.”
“진작 물어보지. 근데 딱히 안 챙겨 줘도 돼. 안 물어봤는데 내가 먼저 생일 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웃기잖아? 너한테 선물 뜯어낼 것도 아닌데.”
“얘기했으면서.”
“그래. 안 챙겨 주면 뭐, 나 좀 섭섭하고……, 집에서 혼자 촛불 끄면서 쓸쓸해하고 그러면 되지, 뭐. 별거 있나? 그냥 나만 좀 섭섭하고 말면 돼.”
“그리고 부처럼 울고.”
“그렇지…….”
나는 그가 체념한 듯 수긍하는 게 웃겨서 작게 웃었다. 장난삼아 지갑 안에 든 돈을 확인해 보았는데, 외국 화폐와 영수증 같은 것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현금도.
나는 대충 봐도 필요 없어 보이는 영수증들을 모조리 빼내었다. 집은 깨끗한데 이상하게 가방이나 지갑 같은 건 정리를 잘 안 한단 말이지. 그나저나 왜 이렇게 외화가 많은지 궁금했다.
“형은 한국인이야, 외국인이야? 한화가 제일 적네.”
“보통 카드 쓰니까. 네가 가끔 타코야끼 트럭 같은 거 보고 먹고 싶다고 하니까 조금 들고 다니는 거야.”
“형 해외 많이 갔나 보다.”
“많이 가던 시기가 있었어. 요즘은 그다지…….”
나는 킁킁, 꽃다발에 코를 가까이하고 향을 맡아 보았다.
생일 선물로 뭘 주면 좋지? 물어봐도 대답은 뻔할 것 같고. 용돈 모아 둔 걸로 그날 하루는 내가 대접해야지 싶었다. 본인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수도 있지만.
수국을 보니 다시 아까의 아찔했던 상황이 떠올랐다.
“근데 우리 엄마, 형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렇게 웃는 거 오랜만에 봤어.”
“오, 그래? 잘 보여야 하는데. 네가 안 되면 너희 가족이라도 꼬셔야지. 그래야 결혼을 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거 집에 어떻게 가져가지?”
“내가 줬다 그래. 문제 있나?”
“그래야겠다. 병에 꽂아서 사진 보내 줄게.”
“네가 수국보다 훨씬 예뻐서 난 크게 감흥은 없던데.”
나는 뜬금없는 그의 버터 줄줄 멘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어우. 오그라들어, 형. 손발 다 없어지겠어.”
“싫어? 사실인데 어떡해.”
“싫은 건 아닌데 부끄럽잖아…….”
난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말 못해. 손바닥으로 열이 오르는 볼을 감싸자, 윤정신이 웃으며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부끄러워?”
“……놀리지 마.”
“왜애. 자기 너무 귀여워.”
“형은 하나도 안 귀여워.”
“나 볼에 뽀뽀.”
윤정신이 내미는 볼에 뽀뽀를 해 주자, 그의 입꼬리가 잔뜩 찢어졌다.
“아이고, 예뻐.”
“예뻐 죽겠지?”
“응.”
그가 은근슬쩍 내 어깨를 안으며 키스까지 하려고 하기에, 나는 황급히 그를 밀어냈다.
“형, 여기 집 앞인데.”
“선팅 돼 있는데…….”
“그래도 싫어.”
“다른 곳에 차 대면 돼?”
“나중에 해. 내가 내일은 일 있어서 못 만나고, 모레. 아니다, 형 생일날 테마파크 갈래? 내가 도시락 싸 갈게.”
윤정신이 아쉬운 듯 몸을 뒤로하다가 도시락이라는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네가?”
“무시한 거야, 방금?”
“설마. 그냥 네가 요리하는 거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그래, 가자. 평일이라 줄도 괜찮을 거 같고?”
“요리 잘 못하긴 하는데, 너무 어려운 건 안 하면 되지, 뭐.”
“기대해야지.”
“기대하지는 마…….”
윤정신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점심에는 만화 카페에 가서 만화를 보고 저녁에는 연극을 보기로 했다. 우리는 만화 카페에 가기 전에 점심을 먹으러 파스타 가게로 왔다.
“형, 나 그거 먹어 볼래.”
윤정신이 포크로 먹기 좋게 파스타를 돌돌 말아서 나에게 먹여 주었다.
윤정신 것은 오일 파스타였고 내 것은 크림 빠네 파스타였다. 샐러드 하나와 기본으로 나오는 크루아상, 생크림도 함께였다.
보통 데이트 코스는 윤정신이 짜고, 나는 그날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하거나 간혹 가고 싶은 곳을 말하는 편이었다. 윤정신이 고르는 곳은 대체로 인테리어나 커트러리 같은 게 예쁘고 맛이 좋았다.
식사를 끝내고 식기를 물린 뒤에 차를 주문해서 마시는데, 윤정신이 뜬금없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기야, 내가 손금 봐줄게.”
“형은 맨날 손잡고 싶으면 그러더라. 못 보는 거 알거든?”
“정말인데. 어제 배웠어.”
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하면서도 한 손을 윤정신에게 건넸다. 그가 내 손바닥을 제 손 위에 펼쳐 놓더니 갑자기 내 손가락에 무언가를 쑥 끼웠다. 나는 차가운 감촉에 당황해서 화들짝 손을 뺐다.
반지였다.
“……뭐야?”
윤정신이 제 손을 펼쳐 자신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여 주었다.
“서프라이즈로 주고 싶어서. 깔끔하게 예쁜 거 샀는데, 어때?”
나는 그제야 유심히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윤정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깔끔하게 예쁜 반지였다.
“예쁘다. 나중에 나 로또 당첨되면 형한테 엄청 비싼 거 하나 사 줄게. 괜히 미안하네…….”
“싼 거야.”
“거짓말. 그래 놓고 또 비싼 걸 거면서.”
“에이, 결혼반지도 아니고.”
“고마워……. 맨날 낄게, 정말로.”
뜬금없는 타이밍에 받아서 그런지 꽤 감동적이었다. 내 약지에서 얇은 링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커플링은 처음 해 본다.
“나도 고마워해 줘서 고마워. 솔직히 시큰둥할 줄 알았는데.”
“왜? 좋은데.”
낯간지러운 말을 못해서 그렇지, 애정 표현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내가 그를 모르는 만큼, 그도 아직은 나를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티를 안 내서 그런가?
“난 뭔가 의미 있는 선물 엄청 좋아해.”
“어려워, 네 취향. 맞다, 그거 물어보려고 했는데.”
“어떤 거?”
“너는 이상형 같은 거 없어?”
이상형? 딱히 구체화한 적 없는 거 같은데. 나는 그의 반지에도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건지 확인하며 대충 답했다.
“윤정신.”
“좋아하는 연예인은?”
“음……. 윤정신.”
“아, 장난치지 말고.”
“왜? 성형해서 오려고?”
그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알려 줘, 빨리.”
“딱히 없는데.”
“나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투가 사뭇 비장했다. 느닷없기는…….
“지금도 잘 보이고 있어. 걱정 마.”
“주접떤다면서, 내가.”
“담아 뒀어? 그래도 괜찮은데. 형 주접은 좀 귀엽잖아.”
“정말? 나 귀여워?”
“콩깍지인가? 난 좀 귀여운 거 같은데. 누가 우리 보면 욕하겠다.”
“욕하라 그래. 나만 좋으면 되지. 나, 손잡아 주라.”
윤정신은 참 종잡을 수 없다. 기분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아무튼, 지금은 다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 * *
연극은 정말 재미있었다. 보고 나오니 어느새 밖이 어둑했다.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가서 아이스크림까지 사 먹고 나니 슬슬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윤정신은 괜히 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지기 싫어.”
“전화할게.”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
그가 또 떼를 쓰기 시작했다. 핸들에 짓눌린 얼굴이 우스웠다.
“그러다 엄마가 형이 나한테 나쁜 물 들인다고 오해하면?”
“……그것도 싫어.”
“나 그러면 집 가야 하는데.”
“싫어, 가지 마.”
“어쩌자고?”
“……나 너희 집에서 자고 갈래!”
윤정신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는 듯 네비게이션 목적지에 자신의 집을 등록했다.
“우리 집 먼저 들러서 필요한 거 가져오자.”
“난 상관없는데……. 엄마랑 아빠가 실례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리고 나, 내일 친구 만나야 하는데.”
“잠만 자고 내일 일찍 갈게, 응? 과일 같은 거 사 가면 괜찮지 않을까? 지금 전화드려 봐. 우리 집 공사해서 못 쓴다 하고……. 응?”
“물어는 볼게.”
아직 전화도 안 걸었는데, 그는 잔뜩 신이 나서 제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전화해 보니까 엄마는 꽤 반기는 눈치긴 했는데…….
윤정신은 중간에 빵집에 들러 컵케이크와 타르트를 예쁘게 포장했다. 나는 옆에서 부모님이 좋아할 것 같은 맛을 집어 주었다. 와, 예쁘게도 생겼네. 군침이 돌았다.
“맛있겠다.”
“네 몫으로 더 살까?”
“응. 난 이거랑 이거.”
윤정신이 내 몫으로 타르트 몇 개를 더 집고 레어 치즈 케이크까지 샀다. 역시 달콤한 게 최고지. 얼른 먹고 싶어서 들뜨기 시작했다.
* * *
윤정신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금세 우리 부모님과 친해진 것 같았다. 같이 거실 소파에 앉아 타르트를 먹으며 하하 호호 즐거워 보였다. 나는 옆에 앉아서 열심히 레어 치즈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어휴. 우리 아들은 내가 사다 놓는 빵은 항상 안 먹고 썩히다 버리게 만들더니, 저건 입에 잘 맞는가 봐? 잘 먹네.”
엄마의 말에 나는 괜히 머쓱해서 웃었다. 하지만 맛있는 걸 어떡해…….
윤정신이 내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더니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핥아 먹었다. 무심코 나온 행동이었는지 곧 그의 얼굴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변했다.
“우리 우기가 아직 애 같지? 스물일곱 살이 보기에 스무 살이면.”
“네? ……아, 네, 네. 까마득하게 동생 같죠. 저 군대 있을 때 군대 캠프 왔을 나인데……. 제가 외동이라 우기 보면 귀여워서 자꾸 챙겨 주게 되네요……? 이렇게 어린 친구랑 친해진 건 처음이라.”
“우리 아들이 새침한 거 같은데, 보면 되게 귀여워.”
“네, 귀여워요. 그래서 자꾸 이것저것 사다 먹이는데, 이상하게 살이 안 붙네요.”
“어릴 때부터 애가 마르고 살도 잘 안 붙고 힘도 없고 그랬어. 맨날 넘어져서 울면서 오고……. 언제 저렇게 컸는지 몰라.”
“우기 어린 시절 궁금한데…….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이야기도 잘 안 하고. 혹시 앨범 좀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지. 기다려 봐, 내가 가져올게. 주스 더 줄까? 당신, 가서 정신이 마실 것 좀 더 갖다 줘.”
“아, 괜찮습니다. 아직 컵에 많이 남았어요!”
결국, 그들은 기어이 내 앞에서 내 어린 시절 앨범을 폈다. 나는 이 상황에 약간 불만이 있었지만 다들 즐거워 보이는데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왜 본인을 앞에 두고 자기들끼리 사진을 보며 난리인 건지.
“아, 귀엽다. 이 사진 정말 귀엽네요.”
윤정신이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실실 웃었다.
내가 아기 때는 좀 귀엽긴 했지. 그는 한참 동안 우리 부모님과 웃고 떠들다가 내가 잠에 들락 말락 할 즈음에 씻고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비좁아……. 바닥에서 자.”
“전에도 여기서 같이 잤었잖아. 딱 붙으면 둘 다 누울 수 있어.”
윤정신이 나를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익숙한 샴푸 냄새가 났다. 체온이 포근해서 잠이 더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가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재우려 했다.
나는 그 손길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윤정신의 겨드랑이에 정수리를 박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윤정신은 한쪽 팔을 내 머리 위로 늘어뜨린 채 칼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그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돌려 눕혀 둔 뒤 이불을 목 아래까지 덮어 주었다.
가족들은 각자의 일을 하러 나간 후인 것 같았다.
막상 아침 되니까 나가기 꺼려지네. 귀찮기도 하고……. 나는 만나기로 한 친구에게 오늘 몸이 안 좋아 못 나갈 것 같다는 연락을 남겨 놓고,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씻고 나온 뒤 TV 소파 앞에 앉았다.
그렇게 한참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윤정신이 잠이 덜 깬 듯 까치집이 된 머리로 뚱하게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너뿐이야?”
“응. 부모님은 출근, 형은 학원.”
“너무 좋은데. 우리 정말 결혼 안 할래? 눈떴는데 너 있으니까 너무 행복하다.”
“나 약속 취소했어. 그냥 집에 있으려고.”
“왜? 나랑 있고 싶어서?”
“응.”
반은 진심, 반은 농담이었는데 윤정신의 표정이 꽤 진지해졌다.
“정말?”
“반은?”
“감동인데. 나 여기서 하숙하면 안 되나? 진심으로.”
“될 리가.”
“우리 집 오라 해도 안 올 거잖아. 아, 같이 살고 싶다. 같이 장 보고,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자고, 같이 일어나고.”
“음. 난 아직 가족들이랑 살고 싶어. 정 그러면 하숙하게 해 달라고 형이 설득하든지.”
“나도 그 정도로 뻔뻔스럽진 않거든……. 옆집으로 이사 올까, 나? 그럼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옆집 분들 나 엄청 어릴 때부터 사셨어.”
“세놓는 방 없어?”
“형 지금 집 좋은데 이사하지 말지.”
“난 지금 집 싫어, 네가 없어서.”
“언젠간 갈 테니까 가지고 있어 봐.”
내가 장난으로 그렇게 말하자, 그가 또 녹음이라도 할 기세로 물고 늘어졌다.
“너 약속했어. 6년 뒤에도 우리 사귀고 있으면 결혼도 하겠다고 했다, 분명히? 안 오기만 해 봐.”
“무슨 말을 못해…….”
정말이지, 막무가내다. 하긴 진지하게 결혼 타령하는 것부터 정상은 아니지. 사람이 너무 터무니없다 보니까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게 일상이다. 아니, 진심이라기보다는 ‘저 인간이 맨정신일까?’ 하는 의문에 가깝지.
윤정신은 욕실로 들어가 한참 씻더니 얼마 뒤 덜 마른 머리카락을 털며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어차피 말릴 거 완전히 좀 말리고 나오지, 참. 나는 수건을 그의 머리에 싸매 놓았다.
“너는 보통 집에 있으면 뭐 해?”
“TV 보기, 게임.”
“그게 전부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답답하다는 듯 몸을 뒤쳤다.
“산책하고 오자.”
“산책?”
동네를 안 돌아다닌 지 꽤 된 것 같긴 했다.
초, 중, 고가 다 이쪽이었어서 사실 추억이 많은 장소인데……. 생각해 보니 윤정신도 아예 모르는 동네는 아닐 것 같았다. 여기서 고등학교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충 이 근처 번화가에서 놀았었을 테니까.
윤정신과 슬렁슬렁 밖으로 나가 천천히 산책을 하다가, 우리가 다닌 고등학교가 있던 쪽으로 갔다. 나야 졸업한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니 기억하는 모습과 학교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윤정신은 연신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이게 많이 좋아진 거라니, 대체 그땐 시설이 얼마나 후졌길래.
교정을 조금 돌아보다가 경비 아저씨의 눈치가 보여서 학교를 빠져나왔다. 윤정신이 계속 가 보자고 졸라 대서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어느 작은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윤정신이 학교 다닐 때 자주 갔던 곳이라고 얘기하는 걸 종종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와 본 곳이라서 솔직히 낯설었지만, 그의 추억의 장소라니 온 김에 먹고 가자 싶었다.
“뭐 먹을래? 떡볶이?”
“순대 먹을까?”
“……아. 그래, 그래. 그럼 떡볶이랑 순대?”
아주머니가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툭 물으셨다.
“순대는 내장 섞어 줘?”
“어쩔래?”
그게 생명인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머니와 친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이 집 아들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분위기가 친근했다. 정말로 유부 주머니가 담긴 어묵 국물도 내주셨고…….
아주머니가 접시를 테이블에 가져다주시며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이제 순대 먹는가 보네?”
“저 원래 잘 먹어요.”
“안 먹는다며?”
“에이, 먹어요. 다른 사람이랑 헷갈리신 거 아니에요?”
그래 놓고 떡볶이만 집어 먹는 폼이 어째……. 순대 못 먹는 사람이 있다고 듣긴 했는데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못 먹으면 먹지 마.”
“왜 못 먹어?”
“형, 허세 부리다가 나중에 다 토한다?”
“야. 이런 거로 왜 허세를 부려, 내가.”
윤정신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순대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그래도 피순대 아니라 무난하긴 할 텐데. 그는 의외로 덤덤하게 순대를…….
“욱.”
“어! 여기에 하면 안 돼! 이쪽에 화장실!”
윤정신이 입을 틀어막으며 다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내 저럴 줄 알았다. 그러게 못 먹으면 먹지 말라니까……. 나는 칸으로 따라 들어가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왜 이런 거로 허세를 부릴까, 그러게.”
결국, 나는 남은 음식을 포장하고 초췌해진 윤정신과 함께 얌전히 집으로 돌아왔다.
* * *
포장해 온 음식을 플라스틱 통에 옮겨 두고 거실로 나와 시계를 보는데, 욕실에서 그가 양치하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집에 가족 아닌 누군가가 있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런 일상적인 소음이라니. 나는 욕실에서 나오는 윤정신을 보다가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라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그게 무슨 창피야.”
“뭐가……. 자연 현상인데.”
그가 투덜거리며 욕실을 나와 자연스레 내 옆에 섰다.
이제 뭐 하지? 혼자 있을 때는 별생각 없이 이런저런 걸 하며 시간을 때웠는데, 그를 데리고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선택지가 모두 막혀 버린 기분이었다.
“……게임 할까?”
“그래.”
나는 식탁 의자를 하나 끌어와 컴퓨터 의자 옆에 놓고 뭘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크레이지 게임을 켰다. 2P 모드로 접속해서 게임을 조금 했는데, 곧 질려 관두었다.
결국, 그냥 저스티스를 켜서 윤정신이 게임 하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기로 했다. 그가 자신의 계정으로 로그인을 했고, 곧 게임이 로딩 되었다. 쏟아지는 인사 사이에 익숙한 닉네임이 보였다.
[현지> 죽어]
저건 왜 아무 잘못도 안 한 사람한테 죽으라 마라야.
나는 키보드를 뺏어 와 대신 답장을 보냈다.
[토라> 사랑해]
[현지> 아;;; 싫어서 눈물 고임]
이런 게 진정한 고백해서 괴롭히기지. 나는 양치를 한 번 더 하고 오겠다며 그가 사라진 틈을 타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토라: 죵시니눈... 고굼아가 넘모 조앙}
{기망: 미쳤습니까 휴먼?}
{현지: 아ㅡㅡ 시력 보호 좀}
{토라: ㅡㅡ 둉디니한테 모라구 하지망}
{토라: 둉띠니는 현지 넘넘 조아♡ 이따 통장에 1억원 입금해듀꼬야}
{현지: 엥^^ 저도 사랑합니다}
{나도: 헐 저는요?}
나는 내친김에 메가폰까지 했다.
[토라: 안농하데여 토라예욤♡ 다들 내 방송 마니마니 놀러 오구... 후원 마니마니 쏴조!!! >< 헷...]
[토라: 아듀 오래오래 안 녹는 아수쿠림 있나용...?♡]
[별풍이: 토라야 실시간이나 켜고 그런 소리를 해라 수금 안 하냐]
[밀실: 엥 저거 진짜 토라임?ㅋㅋㅋㅋㅋ 아침부터 약했나]
[장발장: 머니 1억에 4500 ㅅㅅㅅㅅㅅ]
곧 돌아온 윤정신은 채팅 창 스크롤을 위로 쭉쭉 올려 보며 내가 벌인 짓을 확인하더니 헛웃음을 쳤다.
“야, 나 이런 거 해도 타격 없어. 다 그러려니 해서.”
“안 그래도 반응이 심심하더라. 해킹 의심하는 사람 한 명도 없던데.”
그렇게 윤정신이 게임 하는 것을 옆에서 방해하기도 하고 돕기도 하며 시간을 때우다가 나중에는 내 방에 있는 어린 시절 일기나 교지 같은 것을 함께 보았다.
어릴 때 산 만화책들을 보며 추억팔이를 하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만화책을 내려놓고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갔다.
“형.”
“어, 집에 있었네.”
벌써 형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구나……. 시간이 정말 훅 가 버렸다. 형과 짧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윤정신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며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려고?”
“슬슬 가야지. 나 있으면 불편할 텐데.”
“그래…….”
이걸로 당분간은 투정 안 부리겠지? 나는 대문 앞까지 그를 배웅하고 혼자서 터덜터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시끄러운 존재가 있다 사라져서 그런지 본래 비어 있던 자리임에도 묘하게 허전했다. 나는 게임을 조금 하다가 슬슬 윤정신이 집에 도착했겠지 싶은 시간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자기야.]
“형이 가니까 허전하다, 뭔가. 사운드가 많이 비어서 그런가.”
[내가 보고 싶은 건 아니고? 나는 너 너무 보고 싶은데…….]
“아까 헤어졌잖아.”
[돌아서면 보고 싶은데.]
나는 작게 웃었다. 기분이 한결 안정되었다.
“이제 뭐 할 거야?”
[집 청소 좀 대충 하고, 저녁 먹고. 전에 네가 말한 드라마 볼까 하는데.]
“그래? 나도 그럼 형이 말한 거 봐야겠다.”
[너는 그 드라마에서 누가 제일 좋아?]
“경성 스캔들?”
[응.]
“강지환.”
[왜 오늘은 윤정신이라고 안 해 줘?]
“내 마음이야.”
[오늘 그 사람 연구해야겠다.]
“오늘은 방송 안 해? 켜면 나 볼래.”
[오늘……. 안 하려 했는데 그 말 들으니까 켜야겠네.]
“안 하면 어쩔 수 없고…….”
[아니야. 켤 건데 콘텐츠가 없어, 나. 쯔꾸르 게임이나 할까? 아아, 그거 해야겠다. 새로 나온 게임.]
윤정신이 방송 준비를 한다며 전화를 끊었고, 나는 침대에 누워 유×브를 켰다.
얼마 뒤, 그의 채널에 생방이 켜졌다. 나도 바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들어왔을 땐 이미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조금 뒤 몇십, 몇백 명으로 늘어난 사람들이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윤정신은 화면 구석에 작게 캠까지 켠 뒤, 채팅 창에 올라오는 인사들을 대충 읽고 있었다. 그는 이제부터 할 콘텐츠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한 뒤, 미리 설치해 둔 게임에 접속해 아이디를 생성했다.
[닉네임 뭐하지? 우리 자기 이름 해야겠다.]
그의 말에 윤정신이 연애를 한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시청자들의 반응들이 쏟아졌다.
이번엔 무슨 캐릭터냐, 외로워 미쳐서 망상 시작한 것 같다, 또 누굴 속이고 사기 연애하는 거냐, 등등. 장난이 섞인 반응들이 쏟아졌다.
방송에선 멋진 척 좀 하지……. 그가 뻔뻔스럽게 내 이름을 닉네임란에 써넣자 지난번 내가 게스트로 왔을 때 윤정신의 닉네임에 등장했던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김샌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에 우리 결혼했어요 찍던 그분 아니냐고요? 맞는데요. 네, 남자인데요. 문제 있어요?]
대부분은 장난이라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함께 장난을 치는 반응이 많았다.
[호모나, 게이 뭐람? 이거 존나 웃기다. 와, 님들 이런 생각 어떻게 하세요? 자, 튜토리얼 패스하고 바로 매칭 갑니다. 연습요? 그냥 하면서 배우는 거지, 뭘.]
그래도 튜토리얼은 하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당당히 전장에 나선 윤정신은 처참하게 팀에게 거대한 민폐를 끼치며 끽소리 못 하고 죽어 버렸다.
그의 팀원이 채팅으로 욕을 했다.
[gusdn22: 우기야 겜 접어라]
[gusdn22: 유사인류 수준ㅋㅋㅋ 지 혼자 수류탄 놓고 지 혼자 죽네]
[최우기: 야 욕 하지 마ㅡㅡ]
[아, 쟤가 우기 이름으로 욕했어요. 아, 속상해. 닉네임 바꿀 수 있나? 이런 애들 때문에 게임 망하는 거예요. 저거 다 영정 먹여야 돼.]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짧게 채팅을 쳤다.
[우기: ㅋㅋ]
윤정신이 그 수많은 채팅 사이에서 용케 그것을 보았는지 아는 체했다.
[어, 우리 자기 왔다. 님들, 지금 우기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진짜 제 애인 맞다니까요.]
[우기: 네 마즘]
[우기: 싸럽 게이예요]
시청자들 몇몇이 긴가민가한 눈치로 언제부터 만났냐, 진짜 랜선 연애냐, 윤정신이 대체 왜 좋느냐, 같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이걸 믿네. 나는 뒤늦게 수습을 했다.
[우기: 농담인데요 ㅎㅎ;]
윤정신이 채팅을 보고 있었는지 즉각 반응했다.
[예, 농담 아니에요. 우리 애인이 쑥스러움이 좀 많아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우기: ㅋㅋ...]
[죄송합니다. 농담이에요. 여러분, 이런 거 자꾸 진지하게 믿지 마세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맨날 속으세요. 그냥 친한 동생이에요. 몇몇 분들이 너무 진지하게 믿으셔서 그만할게요, 친한 동생입니다.]
다행히 윤정신이 농담이었다며 수습을 했고,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닉네임을 [정신쓰]로 바꾼 뒤 다시 게임을 진행했다. 몇 판 허무하게 죽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에임이 꽤 괜찮아졌다.
[와, 킬수. 아니, 여러분. 주워 먹었다니요. 이렇게 시기 질투하시면 방송하기 힘들어요.]
윤정신은 어느 순간부터 나는 까맣게 잊은 듯 게임과 방송에 빠져들어 있었다.
괜히 섭섭했다. 내가 보고 있는 거 까먹은 거 아니야? 그냥 영상 통화를 할걸 그랬나. 나는 채팅을 칠까 말까 깔짝거리다가 그냥 핸드폰을 잠금 해 두고 침대에 편하게 몸을 누였다.
전화라도 오기만 해 봐. 섭섭한 티를 잔뜩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전화가 오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 * *
[부♡: 자기 자러 갔어?]
[부♡: ㅋㅋㅋㅋㅋ 아이고 자나보네]
[부♡: 감미로운 내 목소리 주체가 안 돼 sorry^^]
[부♡: 일어나면 연락해]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발신된 카톡이 있었다. 괜히 조금 삐쳤던 것도 자고 일어나니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시시껄렁한 일처럼 느껴져 순순히 그에게 답을 했다.
[지루해서 잤어]
[형은 방송 켜 달랬다고 어떻게 그렇게 게임만 죽어라 해]
어제 그러고도 뭘 더 하다가 잔 건지 윤정신은 아직 꿈나라인 것 같았다.
스트레칭도 하고, 상큼한 자몽 티도 한잔 마시고, 창을 열어 바깥 날씨까지 확인하고 난 뒤에야 답장이 도착했다.
[부♡: 꿈에 자기가 나왔는데]
[부♡: 아니야 일단 지금 만나자]
[부♡: 아니다 이걸 적어 놔야겠어]
[???]
무슨 헛소리인지.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윤정신이 보낸 카톡을 다시 읽으며 무슨 뜻인지 해석해 보려 하는데, 연이어 카톡이 도착했다.
[부♡: 아니 자기야ㅠ 미안 내가 생각이 짧자나]
[부♡: 별 생각 없이 그런 건데]
[부♡: 방송 보고 싶대서 방송 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
[뭘 적어? 잠 덜 깼어?ㅋㅋㅋ 횡설수설이야]
[부♡: 아니 ㅋㅋㅋ 자기야 로또 사러 가자]
[부♡: 꿈에 자기가 나왔거든]
[부♡: 형 나 로또 당첨 됐엉~~ 이걸로 결혼식 하자]
[부♡: 이러면서 번호를 딱 보여 주는데 그게 존나 선명하게 기억이 나 ㅅㅂ]
[부♡: 미쳤지?ㅋㅋㅋㅋㅋ]
꿈도 꼭 저 같은 걸…….
와, 그런데 로또 번호라니. 그거 엄청난 꿈 아닌가? 현실의 나도 모르는 로또 당첨 번호를 꿈속의 나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헐 까먹기 전에 적어 놔 빨리]
[부♡: ㅇㅇ 안 그래도 방금 적었어]
[부♡: 이따 사러 가자]
[부♡: 우리 자기 복덩어리야]
[부♡: 뽀뽀 왕창 해 줬어]
[헐 ㅎㅎ]
[당첨 되면 나 줄 거야?]
[부♡: 결혼 자금으로 쓸 건데 ㅎㅎ]
[으악 ㅋㅋ;;]
[내 돈 ㅠㅠ]
[부♡: ㅋㅋㅋ어차피 부부 되면 공동재산]
[부♡: 아까워하지 마^^]
[부♡: 넌 돈 생기면 튈 것 같아ㅡㅡ 내 제일 큰 메리트라;]
나는 그의 말에 웃음이 나오는 한편 어쩐지 억울했다.
[ㅋㅋㅋㅋㅋ와 사람 못 믿네]
[부♡: 작은 모험도 하고 싶지 않음...ㅋ]
[형 장점이 돈밖에 없어?]
[부♡: 다른 거 뭐 있는데?? 알려줘]
[깜찍함]
[부♡: ㅋㅋㅋ><♡]
[부♡: 또또]
또? 글쎄, 뭐가 있지. 나는 일단 생각나는 대로 답했다.
[착하다]
[자상하다?ㅋㅋㅋㅋ]
생각해 보니 이건 좀 아닌가? 그래도 나보단 착한 것 같은데. 솔직히 생긴 것도 괜찮은 편이고, 잡다한 지식도 많이 알아서 신기하기도 하고. 나랑 성향이 꽤 다른 편인데 그런 부분도 좋다.
[부♡: 헐 자기 감동ㅠㅠ]
[부♡: 보고시푼 울 쟈기 ㅠ 엉엉]
[부♡: 눈에 어른어른거려]
[형 생각해보니까 장점 많은데?]
[형 변태 같은 거랑 가끔 너무 깝죽거리는 거 빼면 완벽한 듯;;;ㅋㅋ]
[부♡: 아 정말?ㅎㅎ 그럼 로또 당첨금 줘도 되겠지?]
[웅웅]
[ㅋㅋ]
[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 그럼 우리 반반 하자 ㅎㅎ]
[ㅋㅋㅋ이랬는데 당첨 안 되고]
[부♡: 설마 ㅋ 예감 좋음]
우리는 같은 번호로 로또를 여러 장 샀다.
그리고 얼마 뒤, 5천 원에 당첨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당첨 번호를 확인했을 때의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와, 그게 당첨이 아니네. 속았다, 속았어. 꿈에서 자기가 이렇게 웃으면서 막 당첨됐다고, 막 그랬거든. 이야, 꿈에서도 너는 너구나. 이상하게 결혼하자고 하더라. 어차피 5천 원으로 못하는 거 아니까 그런 거였어…….”
“하긴. 1등이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지?”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딱히 기대를 많이 한 것도 아니었다.
역시 꿈 해몽 같은 건 다 사기야. 새삼 그걸 진지하게 믿고 신나서 로또를 산 우리가 우습게 느껴졌다.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또 그러겠지만…….
“기대했는데. 하긴, 너 만난 것도 되게 행운인데 로또까지 당첨되면 나 죽을 때까지 불행한 일만 생겼을 거야.”
“원래 없던 돈인데 어때. 다음에는 내가 돼지 꿈 꿀게.”
“미안. 너도 괜히 들뜨게 한 것 같다.”
“괜찮다니까.”
“대신 오늘 백화점 갈까?”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데. 윤정신은 내심 미안했는지 내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됐어……. 아니다, 가자. 가서 내가 형 옷 골라 줄래.”
“내 옷을? 네 외투 하나 사려고 했는데.”
“난 됐어, 집에 많아.”
곧 윤정신 생일이니까, 이렇게라도 대충 뭘 좋아하는지 봐 둬야지. 정말 뭘 해 주면 좋을까? 일단 테마파크에 가자고는 했는데 그걸로 끝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말에 그가 심각한 얼굴로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내 옷 별론가? 나 좀 패션 테러리스트야?”
“아니. 왜?”
“갑자기 옷을 골라 준다니까……. 내 스타일이 좀 구린가 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골라 주고 싶어서.”
“그치? 나 요즘 사람 같지? 이만하면 스타일리시 하잖아.”
“맞아.”
내가 바로 긍정을 하자, 그가 얼떨떨한 듯 어색한 손짓으로 제 귀를 만지작거렸다.
“……오. 요즘 되게 순순한데? 네가 면박을 안 주니까 좀 어색해.”
“욕해 줄까, 그럼? 형 옷 입는 거 로다주 같아. 이러면 돼?”
“아니……. 좋다는 거지, 내 말은. 욕하지 마.”
“어색하다면서?”
“그냥 어색할래. 원래 어색한 게 설레는 거잖아. 아니야?”
“몰라. 형은 그럼 나랑 있을 때 부분적으로 안 설레?”
내가 장난으로 눈을 흘기자, 그가 뻘뻘거리며 해명했다.
“아니, 아니! 맨날 심장 터질 것 같지. 나 전에 셔츠 단추가 여기 가슴 부분만 터져 버려서 다시 달았잖아. 몰라?”
“만져 볼까? 심장 빨리 뛰는지, 안 뛰는지?”
“만져 주면 난 좋긴 한데, 네가 거기에 손대면 안 뛰던 심장도 터지려 하지 않을까?”
“형은 뭔가 가슴 털 있을 것 같아. 그냥 확인 안 할래.”
“뭐? 야, 없는 거 다 봤잖아. 나 민가슴이야. 지금 셔츠 찢어서 보여 줘?”
“아닌데. 털 북실북실했던 것 같은데?”
내가 계속 장난을 치며 모르쇠 하자, 그가 억울한 듯 말했다.
“야. 솔직히 아래랑 겨는 안 밀지만, 가슴 털은 진짜 없다. 나 다리털도 관리해, 왜 이래.”
“아, 좀. 그런 건 자세하게 안 얘기해도 돼! 아, 진짜. 형 때문에 털 생각밖에 안 나잖아.”
무슨 추접한 이야기를 저렇게나 솔직하게……. 나는 진심으로 억울한 듯 항변하는 그가 너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다. 윤정신이 비틀거리는 내 몸을 넘어지지 않게 꽉 붙들었다.
“어떻게 웃음소리가 그렇게 나지? 나도 따라 해 볼까.”
그가 신기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며 내 웃음소리를 흉내 내려 애썼다. 내가 저렇게 웃는다고? 평생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웃음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저게 사실이라면 좀 무서운데.
“그건 그냥 개 아니야? 내가 그렇게 웃어?”
“비슷하게 안 되네. 이야, 근데 오늘 날씨 진짜 좋다. 바람도 상쾌하고. 이런 날 밖에 오래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안 쌀쌀하니까 먹을 거 사 와서 공원에서 먹을까?”
“그럴까? 그러고 뭐 하지? 운동?”
운동이라, 글쎄. 할 만한 게 있나? 별로 생각나는 게없었다. 이 넓은 땅에 왜 이렇게 놀 거리가 없는 거야.
“어떤 거? 볼링? 일단 형 옷 사러 백화점 가야하고, 그 후에 뭐 하지.”
“VR 체험 갈까? 아니면 오락실? 영화나 연극, 뮤지컬 같은 거도 있고.”
“좀 새로운 거 없나? 이런 거 생각하는 것도 일이네. 가끔 만나면 좀 괜찮은데 형이 매일 불러내니까 소재가 너무 빨리 고갈돼.”
“매일 보고 싶은데 어떡해. 너무 의미에 집착하지 말자. 보고 싶으면 만나는 거지. 혼자 있는 것보다 둘이 있는 게 낫잖아. 어떤 날은 할 거 없어서 돌아다니다가 쓸데없이 시간만 흐르는 거고, 어떤 날은 재밌는 곳 찾아서 즐겁게 노는 거고. 난 이제 너랑 같이 보내는 하루가 기본값이고 혼자 있는 날이 변수 같은걸.”
“매일 봐서 질리면 어떡해?”
“설마. 난 볼수록 좋던데. 네가 질린다고 하면…… 참아야지, 내가. 그렇게 되면 큰일이니까.”
“아니. 나도 뭐, 괜찮아. 아직은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이왕이면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고 해 줘.”
“알았어. 그렇다고 해 둘게.”
“고맙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질릴 수도 있겠구나. 나, 지겹다는 소리 친구들한테 자주 듣는데.”
솔직히 앞으로의 감정이 어떻게 흐를지는 장담할 수 없는 거라 확답을 주긴 힘들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다. 윤정신이 혼자 심각해져서는 가던 길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밀당을 좀 해야 하나? 난 도저히 밀기가 안 되던데. 비법이 뭐야?”
“그런 건 튕길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좋아 죽겠는데 어떻게 밀어.”
“아……. 약간 상천데. 그렇게 말로 못 박지 마. 마음 아프잖아.”
그냥 별생각 없이 이야기한 건데……. 그가 상처 받은 척 가슴을 부여잡으며 우는 소리를 내자,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내 얘기는 아닌데? 나 일부러 그런 수작 부려 가면서 연애할 정도로 고수 아니야, 형. 연애도 별로 못해 봤는데.”
“너한테는 밀기가 패시브로 있는 것 같아. 누가 머리채 잡고 날 냉탕이랑 온탕에 번갈아 던지는 느낌이랄까…….”
“지금은 어딘데?”
“냉탕…….”
“어떻게 하면 다시 온탕 가는데?”
“뽀뽀?”
저걸 개수작이라는 말 이외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형은 저체온증 와야겠다. 그런 경험 나쁘지 않을 거 같아.”
“그러면 손잡기.”
“그거는 뭔데? 미지근 탕? 미온수?”
“온탕이지.”
“너무 뜨거워도 안 좋은데. 그럼 엄청 뜨거웠다가 갑자기 엄청 차가워지면?”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파고들지 마……. 몰라, 나도. 아무튼, 중요한 건 네가 날 그렇게 만든다는 거지. 아주 종잡지 못하게, 응? 쥐락펴락 안달 나게 초조하게. 감질나서 미치게 말이야.”
“형 이야기만 들으면 나 무슨 희대의 팜므 파탈 같다. 언제 콩깍지 벗을래?”
“다음 생? 이번 생은 그른 것 같아.”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슬쩍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윤정신이 활짝 웃으며 손에 깍지를 꼈다.
“이거 봐. 미친다니까…….”
“나 그래도 형한테 엄청 잘해 주고 있는 거 같은데. 아니야? 예전을 생각해 봐.”
“그런가. 하긴, 전에는 훨씬 차가웠던 것 같네. 되게 건방진 스무 살이었지. 지금은 많이 순해졌다, 그래.”
“그래, 노력하고 있다니까.”
“근데 넌 뭘 어째도 귀여워서 괜찮아.”
윤정신이 마주 잡은 손을 앞뒤로 붕붕 흔들며 눈웃음을 지었다. 참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묻게 되었다.
“그렇게 좋아, 내가?”
“신기할 정도로. 아무래도 운명인 것 같아.”
“날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해…….”
이런 애정이라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나한테 그렇게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는 말인가? 연예인이라도 해야 하나.
윤정신이 실실 웃으며 답했다.
“그래서 좋지?”
“고맙기도 하고. 그래서 나도 좀 잘해 주고 싶어. 살면서 겪기 흔한 일은 아니잖아. 좋은 것 같아, 형이랑 만나는 거. 처음에는 절대 안 만나고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만나길 잘한 것 같아. 안 그랬으면 후회했을 것 같아서.”
“뭐야, 갑자기. 감동스럽게.”
“서로 감정 안 상하고 잘 지내면 좋겠어.”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 거야? 장한데.”
윤정신이 내 머리에 가볍게 손바닥을 얹었다.
달콤한 핸드크림 향기가 난다. 마음에 쌓인 먼지들을 모두 거두어 가는 듯한 부드러운 향이었다.
나는 이렇게 마음이 평온해질 때마다 그가 참 좋았다. 새삼스럽게 세상이 평화로워 보였다. 원래 세상은 나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았는데……. 그처럼 격정적인 사랑을 느끼고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건 아니지만, 나는 나름대로 그와 함께 평온한 삶을 계속 영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우리 잘 지내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노력하면 되지.”
“그래. 나는 나대로, 형은 형대로.”
“아니다, 우리 같이. 방식은 달라도 같이 노력한다는 마음으로.”
“그래……. 같이.”
지금은 그도 만족하고 있을까. 나는 큰 동요 없이 잔잔하게 설레는 지금, 정말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지 궁금했다. 우리는 바라는 게 다르면서도 같은 것 같은데, 평행선이 되어 버리진 않았으면…….
그러니까 생일 선물 정도는 센스 있게 골라 선물해 줄 수 있게 되면 좋겠는데. 속속들이 생각하는 거 하나하나 알자는 것도 아니고 딱 그 정도만 그에 대해서 알게 되면 좋겠다고 조용히 생각했다.
* * *
공원에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고 백화점에 가 매장을 돌아다니며 그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추천해 주었다.
다 마음에 든다고는 하는데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면서 윤정신이 무심히 집어 와 계산대에 놓는 물건들을 열심히 관찰했는데, 글쎄……. 표본이 너무 없어서 선물을 잘 고를 수 있을지 걱정됐다.
나는 백화점에서 산 짐과 함께 윤정신의 집으로 향했다. 이젠 내 제2의 집 느낌으로 편한 곳이었다. 나는 쇼핑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윤정신의 뒤로 가 그를 끌어안았다.
윤정신이 몸을 숙이고 있어서 그의 어깨에 턱을 걸칠 수 있었다. 내가 등에 매달리다시피 붙자, 윤정신이 팔을 뒤로해 내 허벅지 아래에 받치며 나를 업어 들었다. 갑작스럽게 붕 뜨는 느낌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몸을 편하게 기댔다.
“어유, 내 새끼. 솜털처럼 가볍네.”
“형, 늙은이 같아. 그런 말 하지 마.”
“형 이거 정리해야 하는데, 왜 와서 애교 피워서 정신 사납게 하지?”
나는 팔을 쭉 뻗어서, 내가 골라 준 니트를 집어 들었다. 그가 잡기 편하게 몸을 낮춰 주었다.
“입어 봐.”
“지금?”
“샀는데 잘 어울리나 입어 봐야지. 아니면 환불해야 하잖아.”
“음. 뭐, 그래.”
윤정신이 날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은 뒤, 니트와 청바지 하나를 집어 들어 제 발치에 던져두었다. 그러더니 곧장 훌렁훌렁 옷을 벗지 않겠나. 나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아, 좀 들어가서 입어.”
“어때, 볼 거 다 본 사이에.”
그는 꿋꿋하게 거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드레스 룸으로 가 전신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았다. 그가 곧 쪼르르 방에서 나오며 양팔을 벌리고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어때, 잘 어울려?”
“응. 어울린다.”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되게 얌전한 거.”
윤정신은 개성 있는 프린팅이 있는 것을 선호하고 나는 민무늬를 좋아한다. 그 정도 차이이다.
“형은 튀는 게 좋아?”
“옷? 아니. 그럴 거면 원색 계열 입지. 난 보통 하얀 거 아니면 까만 거…….”
“프린팅 있는 거 좋아하잖아.”
“프린팅 정도는 안 심심하고 좋지 않아? 튀려고 입는 건 아니야, 너무 안 무난하려고 그러는 거지. 중도의 감성, ok?”
그런가. 뭔가 알듯 말듯 어렵다. 캐주얼 한 옷만 입나 싶다가도 한 번씩 멀끔하게 차려입기도 하고. 확실히 오버 하는 차림은 아닌 것 같다. 너무 정식도 아니고, 너무 힙 하거나 프리 하게 입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까, 형 추리닝 입은 거 본 적 없는 것 같다. 정장 입은 것도.”
“트레이닝 복 자주 입는데. 정장은 왜 입어, 내가. 백수인데? 결혼식 갈 때나 뭐 행사 있을 때 입지.”
“형도 그런 거 입어?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윤정신이 혀를 쭉 내밀며 내 헛소리를 일축했다.
“아니. 아디×스 입는데.”
“시시해.”
“야, 시시하다니……. 뭘 기대한 거야? 어차피 네 앞에서 추리닝 입을 생각 없어.”
“왜? 몸매 좋으면 트레이닝 복도 패션이잖아.”
“내 몸매 좋아? 내가 입으면 좀 스타일리시 할 것 같아? 좀 섹시할 거 같나?”
저 정도면 귀가 팔랑거리는 걸 넘어서 파르르 떨리는 수준 아닌가? 나는 애써 웃음을 감추며 진지한 척 맞장구를 쳐 주었다.
“운동하는 섹시한 남자.”
“내 엉덩이 만져 볼래? 완전 애플 힙인데.”
“그래. 맞다, 맞아. 형 말이 다 맞아.”
“헬스나 다닐까. 복근 만들까, 나?”
“지금도 괜찮은데.”
“하긴. 잔 근육 멋있지?”
“그런 게 있어? 형 옷 태 좋긴 해.”
윤정신이 싱글벙글 웃으며 다른 옷들도 다 꺼내서 하나하나 입어 보았다. 내가 하나하나 열심히 반응해 주자, 그는 신이 나서 제가 자주 입는 트레이닝 복들과 정장까지 보여 주었다. 트레이닝 복은 뭔가 이미지랑 꽤 맞는 것 같은데 정장 입은 모습은 너무 어색했다.
“와. 어색해, 왠지.”
“멋있지, 그렇지?”
“어……. 멋있긴 하다. 넥타이는 형이 고른 거야?”
“아니. 아버지한테 선물 받았어.”
“그렇구나.”
별론데. 넥타이나 하나 사 줄까?
내 표정이 읽혔는지 그가 조용히 넥타이를 풀었다.
“왜, 왜?”
“별로라고 생각했지? 눈빛으로 상처 받았다, 나.”
“아닌데…….”
그래 봤자 저 넥타이가 내 용돈으로 살 수 있는 넥타이보다 비싸고 좋은 거긴 할 텐데. 그래도 형이 맨날 비싼 것만 쓰는 것도 아니니까. 넥타이핀도 사 줄까? 돈 쓸 일이 많이 없었어서 모아 둔 용돈이 꽤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형 진짜 옷 빨 잘 받네. 근데 정장 입으니까 뭐라 해야 하지, 좀 불건전해 보여.”
“삐끼 같다고? 아니면 제비?”
“좀 그런 느낌? 형 평소 이미지 때문인가?”
“우리 교복도 정장식이었잖아. 그럼 난 고등학생 때도 불건전한 사람 같아 보였다는 거야?”
설마 그랬으려고. 나는 곰곰이 교복 입은 윤정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더럽게 말 안 들을 것 같은 남고딩 하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땐 귀여웠겠지. 교복은 느낌이 다르잖아. 구두도 안 신고, 외투도 캐주얼 한 거 걸치니까.”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았어, 우기야.”
윤정신이 금세 샐쭉해져서는 실망한 척 고개를 돌렸다.
“또 삐칠 거야? 응?”
“달래 줘, 네가.”
그가 검지로 제 입술을 툭툭 쳤다.
“뽀뽀.”
“뽀뽀해 줄까? 고개 좀 숙여 봐.”
나는 냉큼 고개를 내리는 윤정신의 입술에 짧게 뽀뽀를 해 주었다. 그는 금세 기분이 풀린 듯, 아니, 애초에 삐친 것조차 연기였던 듯 활짝 웃었다.
참 단순한 인간……. 나보다 한참 나이 많은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 보이긴 처음이다.
“바보 같아.”
“맞는데, 바보. 너밖에 모르는 바보.”
내가 어이없어서 웃으니, 그가 조금 들뜬 투로 말했다.
“우리 따릉이 타러 갈까? 너 자전거 탈 줄 알아?”
“아니.”
“내가 가르쳐 줄게.”
그가 지갑을 챙기며 나갈 채비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밖으로 나가 자전거를 타며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게 되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두발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