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고9마9워요 길톡(14)>
(공지: 아 오빠 좀 아무거나 공지 올리지 말라고요)
[현서: (사진)]
[현서: 이번에 추가로 공개 된 이벤트 보상]
[현서: 이거 잘 안 푸는 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웬만하면 다들 이벤트 참여 해]
[심현지: 그래 우기야]
[이권민: ㅋㅋㅋㅋㅇㅈ]
[유정: 그래 왜 요즘 안 와ㅡㅡ 바쁜 것도 없는 주제에ㅋ]
[부♡: 울 자기 찾지 마]
[유정: 머래;]
요즘 윤정신이랑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체력도 없고 시간도 넉넉지 않고 해서 게임을 자주 하지 못했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정말 소홀하긴 했던 것 같아서 언제 마지막으로 열심히 했나 가만 세어 보았는데 날짜가 쭉쭉 뒤로 갔다.
그러게, 이러다 뒤처지면 나중에 복귀했을 때 땅 치고 후회할 텐데. 마침 오늘 던전 도는 날이라 접속해야 하기도 하고.
나는 윤정신과 함께 [가을의 전설, 천고마비!] 이벤트를 하기로 약속하고 게임에 접속했다. 윤정신은 나를 데려다주고 집에 가느라 이제야 도착했다고, 빨리 씻고 접속하겠다 말했다.
일단 오면 같이하기로 했으니까, 그 전까지는 좀 놀고 있어도 되겠지?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으앙 님과 꼽사리 낀 심현지와 함께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비주류 캐릭터의 전직 마을로 가서 수다를 떨었다.
[으앙: 그래서 기대하고 연극부 간 건데]
[으앙: 분신사바 하는 학생 역할로 잠깐 나가서]
[으앙: 증말 현타...ㅎ-ㅎ 맨날 저런 거만 시키는데]
분신사바라니. 대체 무슨 연극이기에……. 나는 동아리 활동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없어서 어쩐지 부러웠다. 재미있겠네. 물론, 창피한 건 질색이지만.
[현지: 그냥 나무나 돌이 나을 듯;]
[청혼: 22 나였으면 수치스러워서 무대에서 기절ㅋㅋ]
[으앙: 하하하...^^]
[으앙: 그래도 이번엔 사람인데 ㅋㅋㅋ 지난 학기에는 로봇이었어여]
[청혼: ㅋㅋ 그걸 어떻게 연기해요?]
[현지: 으앙은 로봇에게 패배했다...]
[현지: 그러나 인간 으앙이 진 것 뿐... 인류가 진 것 아냐,,,]
[청혼: 현지 특: 로봇임]
[현지: 위너라는 말... 어렵게 하시네요...ㅎ]
[으앙: 다음엔 진짜 돌이나 나무일 수도?ㅎㅎ]
으앙 님은 거의 반쯤은 포기한 듯, 체념한 투로 말했다.
애잔하시네……. 하지만 만약 나라면 대사 많은 주연보단 나무나 돌 역할을 하겠다고 나섰을 것 같았다.
[현지: 친환경적이다 ^^]
[청혼: 너도 환경 사랑하잖아]
[현지: ㅇ?... 내가?ㅋ]
[현지: heyㅋ naver. 저 쓰레기 투척 장인~]
[청혼: 음식 안 남겨서 음식물 쓰레기 안 만들잖아]
[청혼: 너 환경 많이 사랑한다 ㅎㅎ]
[현지: ㅋㅋㅋㅋㅋ you는 존재 자체 is 음~쥑이는 폐기물]
[으앙: ㅋㅋㅋㅋㅋㅋ 아 정말ㅜ]
[청혼: ㅋㅋㅋㅋ 으앙 님 다음 학기엔 외국인 역할 하기vs그딴 거 할 일 절대 없는 현지 되기]
[현지: 엥 시스템 오류로 방금 누가 친 채팅 사라짐ㅋ]
[현지: 으앙쓰 다음 연극 때 강아지 똥 역할 하기(주연임)vs그런 거 안 하고 청혼 되기]
[으앙: ㅠㅠ 고통스러워요]
한참 그렇게 현지와 아옹다옹하고 있는데, 윤정신이 로그인했다는 알림 창이 떴다.
[청혼: 헐]
[현지: 모 ㅋ]
[현지: -----염병 절취선------]
[청혼: ㅎㅎ엿]
나는 후다닥 그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청혼> 여보세요]
[토라> 예 ^^]
[청혼> 목욕탕 다녀왔나 봄니다 ㅋ]
[토라> 아닙니다. ^^ 집 와 보니까 택배가 와 있어서 정리하고 왔습니다^^]
[청혼> 어쩐지 전화를 안 받더라]
[토라> 어차피 들어올 거라 그냥 전화 다시 안 걸었슴미다 ㅋ]
[청혼> ㅋㅋ 잘해슴미다]
윤정신이 곧 워프를 타고 내가 있는 필드로 왔다. 그리고 또 현지와 놀고 있는 나를 보며 질린다는 듯 말했다.
[토라: 너희는 진짜]
[현지: 토하]
[토라: 캣독이냐]
[토라: 맨날 붙어 다니면 안 지겨워?]
[현지: ㄷㄷ... 님이 할 말? ㅋㅋㅋ]
[토라: 물론 하나도 지겨울 리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
[토라: 우기를 만나는 것은...]
[토라: 영화 ‘내면의 아름다움’의 현실 판과 같다]
[토라: 늘 새로움]
[청혼: 하하^^]
[으앙: ㅋㅋㅋㅋㅋㅋㅋㅋ]
[현지: 청혼은 인사이드에 뷰티 없는디요ㅋ]
[현지: 전형적인 외면의 아름다움 형 인간]
[토라: 현지...~]
[토라: 주사 맞는 거 좋아하니?]
[토라: 법의 따끔한 맛 보여줄까]
[현지: ㅋㅋㅋㅋㅋㅋㅋㅋ아;; 죠낸 아픔]
[현지: 지송지송염ㅋ(ㅗ)]
[으앙: ㅋㅋㅋㅋㅋ저는 진짜 현지 님이 너무 웃긴 거 같아요]
현지가 좀 웃기긴 하지. 사실 이 게임에 정 붙이게 된 것도 현지와 친해지면서부터였으니.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토라: 아 인정 ^^]
[현지: ㅋ 나 좋아하지 마]
[현지: 으앙: 그게 뭔데...]
[현지: 나 좋아하지 말라고...]
[현지: 으앙: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으앙: 좋아한다고는 안 했는데...;;ㅎ]
[청혼: 그냥 혼자 노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현지: 저한테 오면 ㅋ 백 원 중앙 사포로 곱게 파내서 은반지 만들어 드립니다...^^ 문의 쪽지...]
[토라: 넌 나한테 주접떤다더니 니가 더 하네]
[현지: 아 진짜 뒤끝 뭐야ㅡㅡ]
[현지: ㄹㅇ인간 딤x 냉장고]
[토라: 대체 그게 무슨 소린데?]
[청혼: ㅋㅋ담아둔다고]
[토라: ㅋㅋㅋㅋㅋ 와;;;]
[토라: 쟤 한국인 아니고 찌아찌아족 아니냐?]
[토라: 내가 보기에 한글만 쓰지 한국어 안 쓰는 듯 무슨 언어를 지 맘대로 쓰고 있어]
[으앙: ㅋㅋㅋㅋㅋㅋㅋ아]
둘의 다툼을 구경하며 웃고 있는데, 현지가 의미심장하게 불쑥 말했다.
[현지: ㅋㅋ 최우기 내가 재밌는 거 공유해줄까]
[현지: 저 오빠 유×브 가서 재생 목록 중에]
[현지: 질러라팅 한 거 봐봐]
[토라: 하 ㅆㅂ]
[토라: ㅋㅋㅋㅋㅋㅋ 야]
[토라: 잠시만]
[토라: 좀 그런 것 좀 찾지 마]
[토라: 와 미치겠네]
윤정신이 드물게 당황하며 횡설수설했다. 그 반응에 덩달아 나도 당황했다.
[현지: ㅋㅋㅋ괙트: 지가 올렸다]
[청혼: 뭔데?]
[현지: 노래 잘하더라ㅎㅎ]
[으앙: 아 그거 저도 봤는데]
[으앙: 근데 진짜 노래 잘하시던데ㅋㅋㅋ 댓글 보니까 예전에 오디션 나가서 방송 탄 영상 링크도 있던데요]
[으앙: 그거 진짜예요??]
[현지: ㅋㅋㅋ 지금 영상 삭제하러 뛰어 간 듯]
[청혼: 노래하는 거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으앙: ㅋㅋㅋㅋㅋㅋ 잘하는데 왜 숨기시지?]
[청혼: 오디션 얘기도 첨 들어;;]
궁금해서 유×브에 들어가 봤는데, 윤정신이 삭제하는 게 더 빨랐는지 영상이 보이지 않았다. 곧 윤정신이 채팅 창으로 돌아왔다.
[토라: ㅎㅎ현지야]
[현지: ?ㅎㅎ]
[토라: 이러지 마]
[토라: 서로 공격하지 말자 ㅎㅎ 콜?!^^]
[현지: 예 ^^]
[청혼: ㅋㅋㅋ뭔데?]
그러고 보니 노래방도 같이 간 적이 없네. 은근히 회피했던 걸까?
[청혼: 궁금하게]
[청혼: 형 음치야?]
[토라: ㅎㅎ... 아니야...]
[으앙: 아니에요 진짜 잘하시던데]
[청혼: ㅋㅋㅋ 팬 차단]
[으앙: 헐 진짜예요 ㅋㅋㅋ ㅠ^ㅠ]
[으앙: 그런데 토라 님 그 오디션 영상 진짜 토라 님이에요?]
[토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토라: 나 잠깐 혼자 있을래]
윤정신이 자신의 캐릭터를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현지: 근데 잘하긴 하던데 왜 쑥스럼 타요ㅋ]
[토라: ^^...]
[토라: 그리고 오디션 그거 저 아니고]
[토라: 제 사칭]
[현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사칭이 아니라 도플갱어ㅎㅎ]
[토라: 그거]
[토라: 하]
[토라: 너무 쪽팔린다]
[청혼: 왜 그래]
[토라: 저 맞긴 한데 진지하게 나간 거 아니고]
[토라: 내기 벌칙으로 나갔다가 방송 타서 쪽팔려서 튄 거ㅋㅋ]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참 열심히도 살았다. 별일 다 해 봤네. 뭔가 신기했다. 그걸 또 찾아낸 사람들도 집요한 것 같고…….
[청혼: ㅋㅋㅋ 그걸 또 찾네 사람들]
[토라: ㅎㅎ내말이]
[토라: 지나가듯이 얘기했는데 그걸 또 찾더라ㅎㅎ]
[현지: 오빠 노래 잘하잖아요]
[현지: 점수 따라고 알려 준 건데;;;;]
[토라: 하나도 안 멋져]
[토라: 얘 현지야ㅋ]
[토라: 진정한 멋이라는 건 말이야...]
[토라: 네추럴...?ㅋ에서 오는 거거든]
[현지: ????;;;; 어쩌라는 거지]
[토라: 멋있는 척하는 것 같아서]
[토라: 창피하잖아...^^]
[현지: 노래하는 게 똥 폼 잡는 거예요? ㄷㄷ;]
[토라: 당연]
[청혼: ㅋㅋㅋㅋㅋ 노래 하다가 차인 적 있음?]
[청혼: 무슨 발상?]
[토라: 니가 볼 줄 알았다면 절대 안 남겨 뒀을 텐데 ㅎㅎ]
[토라: 윤정신 인생 3대 실수 중 하나]
[으앙: 헐... 잘하는데ㅠㅠ]
[토라: ㅋ... ㄱㅅ...]
[청혼: 무슨 노래 불렀는데요?]
어떻게 나만 모를 수가……. 나는 그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노래해 달라고 졸랐지만, 창피하다고 계속 거절당했다.
하여튼 이상한 데서 쑥스러움을 탄다니까. 낯짝이 법전 수준으로 두껍다가도 꼭 한 번씩 저런다. 그럴수록 오기가 생기는 나도 나대로 이상하지만……. 나는 일단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토라: ㅠㅠ]
[청혼: ㅋㅋㅋ 영상 찍어 둔 거 없어?]
[현지: ㄴ]
[현지: 그러게 유×브 자주 봐주지 ㅋ]
[현지: 관심이 없네]
[청혼: ㅋ]
[청혼: 토라한테는 있다]
[청혼: 토라 유×브에 없을 뿐]
[현지: ㅋㅋㅋ오빠]
[현지: 돈 많은데 유×브 수익은 저한테 기부하면 안 돼요?]
[토라: 그럴까 ㅎㅎ]
[토라: 이제 수익 마이너스로 끌어 내리면 되는 거지?]
윤정신이 칼같이 헛소리를 차단하자, 현지가 주절거리며 악에 바친 말을 늘어놓았다.
[현지: 내가 저 오빠 싫어하는 이유]
[현지: 저따구로 사는데... ‘부자’임]
[현지: 하얀고무신 나오는 라면 훔쳐 먹는 거지형제가]
[현지: 내가 먹으려고 산 라면 봉지 훔치고 그거 숨기려고]
[현지: 땅 팠다가]
[청혼: 또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해]
[현지: 거기서 갑자기 석유 터져서]
[현지: 부자 된 것 같은]
[토라: 야 그 정도냐;;]
[현지: 흡사 그런 느낌]
[현지: 저 오빠가 빵 사 먹으려다가]
[현지: 500원 아끼려고 맛있는 소시지 빵 대신]
[현지: 팥빵을 사 먹었으면 해]
[토라: ㅋㅋㅋ 팥빵 더 좋아해 고마워^^]
[현지: ㅋㅋㅋ]
그렇게 한참 옥신각신하다가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해산했다. 돌아왔을 때는 서진과 보보네 커플이 접속해 있었다.
빨리 던전 돌고 이벤트 하러 가야 하는데……. 언제나 늦어지는 원흉은 윤정신이다. 그는 또 던전 들어갈 때 끼는 반지가 인벤토리에 없다며 시간을 한참 잡아먹었다.
(버찌: 이제 입장해도 돼?)
(토라: ㄱㄱ)
시작은 언제나 베르사유 하드다. 버찌가 입장을 신청하자 곧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가,천천히 돌아오며 웅장한 베르사유의 배경 음악이 들렸다. 시작은 궁전의 안쪽이었다.
<찾아와 주셨군요, 용사님……. 부디, 부디 이 변해 버린 궁전을 어머니가 그리워하시던 모습으로……!>
짧은 스크립트가 끝나면 베르사유 정원의 아름다운 식물이었다는 콘셉트의 몬스터들이 필드에 젠 된다. 일반 필드의 몬스터들보다 피통과 방어력이 높은, 이 던전에서만 나오는 몬스터였다.
이것들을 잡고 확률적으로 드랍 되는 씨앗을 5개 모아 화분에 뿌리면 주변 땅의 양분을 흡수하며 거대한 식물 5개가 자라난다. 식물을 키우는 데 성공하면 양분을 빼앗긴 필드 내의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시들어 죽게 된다. 그러면 숨겨져 있던 포탈로 이동할 수 있게 되고, 다음 스테이지로 갈 수 있었다.
(봉봉: 토라 님^^)
(토라: 네??)
(봉봉: 씨앗 떴으면 좀 뿌리세요 욕 나오려 하네요)
(청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씹인정 아니면 펫 좀 집어넣든가ㅡㅡ 주워서 뿌릴 수도 없게 다 쓸어가네)
(토라: 아 ㅎㅎ;; 죄송죄송 못 봤어요)
귀찮으니까 농땡이 피우기는…….
윤정신이 안 뿌리고 인벤토리에 모아 둔 씨앗들을 화분으로 가 하나하나 뿌렸고, 곧 [STAGE CLEAR]가 뜨며 필드 중앙에 일렁이는 포탈이 생성됐다.
우리는 두 번째 스테이지로 이동했다.
<궁전 내부를 청소해 주셨군요.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에요. 이번엔 변형 식물들 때문에 양분을 빼앗겨 시들어 가고 있는 식물들에게 도움을 주실 수 있나요? 한시 빨리 서쪽 정원으로 가 주세요. 어머니가 사랑하셨던 그 정원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참, 그곳은 남쪽 정원의 ‘그것’이 감시하는 곳이니 만큼 위험하니까 부디 안전에 유의하시기를……. 당신께 신의 가호가 함께할 거예요.>
<방어력이 짧은 시간 소폭 상승합니다. 지속 시간 10분>
두 번째 스테이지는 시들어 가는 평범한 식물들을 살리는 것인데, 튼튼한 유리관을 깨서 물을 공급해야 한다. 곧 나올 보스 몬스터가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쏘아 대는 공격들을 피하며 계속 유리관에 딜을 넣으면 되는데, 보스 몬스터의 즉사 스킬인 [섬광]만 안 맞으면 굉장히 무난한 축이었다.
시스템 메시지로 [섬광이 번쩍입니다.]가 뜨면 재빨리 맵 구석으로 도망가기만 하면 돼서 피하기는 쉬운 편이었다. 맵을 위아래로 나누었을 때, 중앙 쪽에만 있지 않으면 됐다.
<섬광이 번쩍입니다.>
(청혼: ㅅㄱ)
(보보: ㅌㅌㅌ)
(보보: 형 섬광)
넋 놓고 계속 유리관에 딜을 넣고 있던 윤정신이 뒤늦게 아차 하고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아래로 내려왔다. 간발의 차로 일자 기둥 모양의 빔이 맵 중앙에 쏘아졌다.
(토라: 오 씨발;; 머리 털 탔다 방금)
(봉봉: 고속도로 개통ㅋㅋㅋㅋㅋㅋㅋ)
(버찌: 정신 차려ㅋㅋ 니가 죽으면 강림도 없어)
(봉봉: 정신 차려요22)
(토라: 데미지 이상한 거 같아서 계속 보다가ㅎㅎ ㅈㅅ 진짜 똑바로 할게요)
안 죽었으니 망정이지, 죽었으면 제대로 분위기 싸해질 뻔했다. 어휴, 저 애물단지……. 그래도 무사히 부활 포인트를 하나도 깎지 않은 채 유리관을 깨는 데 성공했고, 마지막 스테이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거대한 식물의 뿌리가 남쪽 정원을 뒤덮고 있어, 퀴퀴한 냄새가 납니다.>
마지막 스테이지에 나오는 이 미친 식물의 무자비한 점은, 입장 후 저 짧은 스크립트가 끝남과 동시에 광역 즉사 스킬을 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번 죽고 시작하라는 뜻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맵 구석으로 도망가다가 죽는 경우가 10에 9라서, 이럴 때 실드를 써 줘야 했다. 죽음에 이르는 공격을 받았을 때 이를 한 번 막아 줄 수 있는 실드였다.
실드는 파티원 전체에 적용되기는 하나, 재사용 쿨 타임이 길어서 신중하게 사용해야 했다. 저 공격이 끝이 나면 우리 쪽에서는 보스에게 딜을 넣지 못하고 저쪽에서만 쏟아 내는 공격이 30초 정도 지속되는데, 다행히 사각지대가 있어서 30초 동안 그곳에 잘 숨어만 있으면 됐다.
(토라: 자기야)
(청혼: ㅇㅇ)
(토라: 하트 힐 쏴조)
(청혼: 거리 멀어서 안 돼)
(토라: 거짓말 올 수 있잖아)
내가 있는 사각지대에서 윤정신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필드 끝에서 끝으로 가야 하는데, 이 시점에서 아무 의미도 없을 하트 이펙트 힐을 받겠다고 사람을 오라 가라…….
그래도 몬스터 공격 패턴이 규칙적인 데다 즉사 스킬은 아니라서 갈 만하긴 했다. 나는 속으로 욕을 하며 윤정신의 캐릭터가 있는 쪽으로 가 힐을 주었다.
(토라: 거 봐 한 대도 안 맞았으면서ㅡㅡ 사랑이 모자라)
(청혼: 형이 딜 1등하면 종일 쏴 줄게)
(토라: 엥 못할 리가ㅋ)
(버찌: ㅋㅋㅋㅋㅋㅋ)
(청혼: 버찌가 무시한다)
(보보: 솔직히 유주가 제일 센데)
그렇게 갑자기 그들만의 리그가 시작되어서,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몬스터 피통이 30퍼센트까지 깎여 내려왔다. 현재까지 1위는 토라이긴 했지만, 2등인 봉봉 님과의 차이가 그리 크진 않았다.
<식물이 괴로워하듯 몸을 비틀며 변화를 준비합니다!>
식물이 꿈틀거리며 더 기괴한 색으로 변하는 동안, 그들은 참아 왔던 채팅을 우르르 치기 시작했다.
(토라: 야 솔직히 혼술은 보스 딜 순위 진짜 불리해)
(보보: 솔직히=변명의 서두)
(봉봉: 와 손 얼얼한데)
(버찌: 밥벌이 스킬 있잖아ㅋㅋ 숙명인가)
(청혼: 천명)
그리고 잠시의 휴식이 끝나면, 그 유명한 유사 슈팅 게임이 시작된다. 보스 몬스터가 쏘는 자잘한 칼날들을 최대한 피해야 하는데, 불규칙적인 데다 꽤 촘촘해서 피하기 어려운 편이었다. 나는 열심히 힐 서포트를 해 주며 그들이 짬짬이 딜을 넣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래도 이 패턴이 끝나면 보스 몬스터가 얌전히 공격을 다 맞아 줘서 사실상 끝이라고 보면 됐다. 곧, 불빛이 터져 나오며 보스 몬스터가 죽고 마지막 스크립트가 떴다.
<그림자가 거두어지고, 남쪽 정원에 햇빛이 찾아옵니다.>
이렇게, 베르사유 하드는 끝이었다. 항상 여기서 기가 다 빨렸다. 이어지는 던전들은 반쯤 기계적으로 빨리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깼고, 마지막 던전인 [버려진 나루터]를 클리어하며 드디어 파티는 끝이 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버려진 나루터]에서 드랍률이 낮아 물량이 별로 없는 [사공의 추억] 귀걸이가 뜬 것이다.
[버찌: 이건 어떻게 처리하지]
[토라: 그거]
[토라: 우기 줘]
[버찌: ? ㅋㅋㅋㅋㅋ]
[청혼: ㅈㅅ 아님 무시 좀]
[버찌: 내가 팔아서 돈으로 배분해 줄게]
[보보: ㅋㅋㅋㅋㅋ 수고]
[봉봉: 수고하셨어요~]
[보보: 유주야 터반으로]
[봉봉: ㅇㅇ]
그렇게 파티가 흩어지고 자연스럽게 셋이 남게 되었다. 우리가 이벤트를 하러 간다고 하니, 서진이 자신도 하겠다며 자연스럽게 사이에 끼었다. 그 꼴을 얌전히 봐 줄 리 없는 윤정신은, 서진을 쫓아내려고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토라: 그거 진짜 너무 필요함]
[토라: 제발 가서 장비제작 해줘]
[버찌: ㅋㅋㅋ 50억 머니 주면 해 줄게]
[토라: 바가지 미쳤냐]
[토라: 그래서 니가 도둑인 거야]
[버찌: 한 40억 내가 챙기고 만들어 줄게]
[토라: 재료비 10억이나 들어감?]
[버찌: 몰라]
[버찌: 10억으로 사람 구해서 만들어 달라고 할 건데ㅋㅋ]
와, 저런 기적의 계산법이…….
나는 그 양심 없는 창조 경제 수법에 속으로 감탄했다.
[토라: 거지는 안 된다?]
[토라: 돈 없으면 필요한 장비도]
[토라: 그냥 종이에 그려 써라?]
[버찌: 비약이 심하네...]
[버찌: 50억 못 내겠으면 네가 10억 내고 사람 구하면 돼]
[토라: 10억이나 함?]
[버찌: ㅋㅋㅋ 아니]
[토라: 이럴 줄 알았다]
[토라: 헛돈 쓰게 하려고 ㅋ 니 속셈... 내 전자두뇌가 이미 계산 완료]
[토라: 내 계산 범위 안이었다]
[청혼: ㄷㄷ...ㅋㅋㅋ 지능상승]
한마디 거들어 주자, 윤정신은 또 으쓱해져서 한술 더 떴다.
[토라: ㅋㅋㅋㅋㅋ 나 알파고 같지 않았음?]
[청혼: 그럴 리가]
[토라: ㅎㅎ으이구~ 다 알아]
[버찌: ㅋㅋㅋ다음에 우편 보내 줄게]
[토라: 헉 ^^]
[토라: 지금 안 갈 거라면 딱히 안 줘도 되는데]
[버찌: 궁금해서 묻는 건데]
[버찌: 진짜 통할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잔 수 쓰는 거 아니지?]
나는 서진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뼈를 때리네, 아주.
[청혼: ㅋㅋㅋㅋㅋㅋㅋㅋㅋ형]
[청혼: 저 남자는 진심임]
[청혼: 저렇게 말하면 형이 진짜로 속아서 장비제작 하러 갈 줄 아는 거]
[토라: 나의 순수함이 이렇게]
[토라: 조롱거리가 되다니ㅠㅠ]
사실 진심으로 잔머리를 굴린 건지 그냥 농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좀 귀여웠다. 나는 또 불쌍한 척을 하는 윤정신을 보고 있다가 문득 아까의 일이 생각나서 서진에게 물었다.
[청혼: 형]
[토라: 웅]
[청혼: 아니 서진이 형]
[버찌: ㅋㅋ나?]
[청혼: 형 윤정신 노래하는 거 본 적 있음?]
[버찌: 응 왜?]
와, 뭐야. 진짜 왜 나만 몰라? 나만 아는 것도 아니고 왜 나만 모르냐고. 이게 말이 돼? 이제 억울하기까지 했다.
[토라: ㅋ자기야]
[토라: 다음에 들려줄 테니까 이제 그만해ㅠㅋ]
[청혼: ㅎㅎ]
[청혼: 다음이 아니고 내일]
[토라: ㅋㅋㅋㅋㅋㅋ그거 들어서 뭐하려고]
[토라: 그냥 xy 염색체가 성대 진동하면서 내는 울음소리]
어쩌면 나한테만 안 들려주는 거 아닐까?
나는 다시 서진에게 물었다.
[청혼: 형은 어떻게 들음? 절대 안 해주려 하던데]
[버찌: 결혼식 하객으로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버찌: 축가 부르던데?]
[청혼: ;;;; 뭐냐고 선택적 부끄러움]
[버찌: ㅋㅋㅋ나도 그런데 많이 들어본 건 아니야]
[토라: ㅎㅎ그건 예외]
[토라: 좋은 날은 축복해야지]
에휴, 그래. 저렇게 쑥스러우시다 하는데.
나는 더 조르지 않기로 했다. 때가 되면 들을 수 있겠지? 어차피 이렇게 기대하는 거 티 내면 더 안 해 줄 것이 뻔했다. 경계심을 낮춰야 했다. 일단 전략적 후퇴다.
그날은 결국, 애초의 목적이었던 이벤트는 하지 못하고 던전과 채팅만 실컷 하다가 졸음에 져서 게임을 끄고 말았다.
* * *
그 후로 나는 생각이 날 때마다 노래를 해 달라고 슬쩍 부탁했다. 늘 거절하다가 하루는 그가 계속 그러는 게 미안했는지 코인 노래방으로 들어가 딱 네 곡만 불러 주겠다며 기계에 천 원을 넣었다.
“아무거나 예약해도 돼?”
“응. 근데 내가 모르는 노래면 안 부를 거야.”
어쩐지 져 준다 싶더라니. 이게 무슨 도전 2,000곡인 줄 아나.
“아, 뭐야 그게.”
“당연하지, 내가 주크박스도 아닌데.”
“아는 노래 뭐 있는데?”
“일단 예약해 봐.”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람. 나는 차트를 보며 고민하다가, 그가 알 것 같은 노래들을 엄선하고 또 엄선했다.
예전에 듣는 거 본 적 있는 노래, 길 가다가 노래 흘러나올 때 딱 한 소절 따라 부른 적 있는 노래 같은 거. 비즈의 ‘가시나무 새’와 회생의 ‘엔딩 스토리’는 성공이었고, once의 ‘ㅜㅜ’는 탈락이었다. 가사를 모른다며 거절했는데, 내가 보기엔 분명 알았다.
마지막 한 곡을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윤정신이 피식 웃으며 리모컨을 가져가 마지막 노래를 예약했다. ‘my everything’이라는 제목의 처음 듣는 곡이었다. 나는 열심히 탬버린을 쳐 주며 호응을 해 주었다. 쑥쓰러움 타던 것치곤 꽤 무덤덤한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귀가 붉어진 게 보였다.
정말 잘 부르는 것 같은데. 의외의 면모였다. 솔직히 마음 같아선 두고두고 놀림감으로 삼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다시는 노래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꾸욱 참았다.
내가 부르는 것도 아닌데 네 곡이 이렇게 아쉽구나. 나는 조용히 지갑에서 5백 원을 꺼내서 윤정신을 애절하게 올려다보았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다급하게 짐을 챙겼다.
“안 돼. 이제 가자.”
“딱 두 곡만…….”
“다음에.”
나는 결국 아쉬운 마음으로 노래방을 나왔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오늘 윤정신이 불러 주었던 노래들을 플레이 리스트에 넣었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얌전히 그 노래들을 듣고 있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윤정신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해 달라고 졸랐다.
또 새벽까지 실랑이가 이어졌다.
* * *
[박도원: 엥? 아직도 안 했다고?]
[박도원: 너 보상 안 봤지ㅋㅋㅋ 니가 갖고 싶다고 한 거 주는데]
[뭐]
[박도원: 코스모스 시리즈]
……세상에. 뭐? 코스모스 시리즈?
내가 그간 게임에 무심하긴 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이 번뜩해서 침대에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오늘 데이트는 없다.
나는 윤정신에게 이벤트 해야 해서 오늘은 만나기 힘들 것 같다는 카톡을 보내 놓고, 이벤트 페이지를 그제야 상세히 읽기 시작했다.
<가을맞이 이벤트 : 가을의 전설, 천고마비!>
(마감까지 서버 시간 기준으로 10일 14시간 39분)
[가을은 바로 천고마비의 계절! 어김없이 이번 가을에도 유니콘이 찾아와 배꼽시계를 울리고 있네요. 용사님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밤 타르트를 만들어 유니콘에게 전해 주세요~!
―밤 타르트 5개 공급 보상: 정화수(×5)
―밤 타르트 10개 공급 보상: 잘 익은 밤 의자(교환 불가)
―밤 타르트 30개 공급 보상: 쓸 만한 무기 상자(×3)
―밤 타르트 50개 공급 보상: 밤톨 표창
―밤 타르트 100개 공급 보상: 이달의 코스모스 set [구성: 코스모스 수술(무기), 코스모스 머리핀(머리), 부드러운 꽃잎 발그레(얼굴 장식), 코스모스 레이스(한 벌 옷, 공용)]
―밤 타르트 300개 공급 보상: 하늘을 담은 펜던트
―밤 타르트 500개 공급 보상: 달리는 말(라이딩), 힘찬 마의 기상(망토)
⚫이벤트 기간 한정으로 필드 내에서 일정 수 이상 몬스터가 처치됐을 시 ‘고슴도치 밤나무’가 나타납니다. 가까이에서 채집을 누르면 무적 상태로 밤나무 채집이 시작됩니다.(채집 스킬은 선행 퀘스트 완료 후 스킬 창에 생성되며, 이를 통해 사용 및 단축키 설정이 가능합니다.)
⚫진행도에 따라서 고슴도치 밤나무의 등장까지 남은 시간이 맵 전체 알림으로 나타납니다.
1단계: 밤나무가 미세하게 흔들린 것 같습니다.
2단계: 밤나무가 조금씩 밤을 떨어뜨립니다. 하지만 채집하기엔 시기상조!
3단계: 곧 밤나무가 무수히 밤을 떨어뜨릴 듯합니다!
(1단계 달성 조건 30마리, 2단계 달성 조건 50마리, 3단계 달성 조건 100마리, 150마리를 처치할 시 ‘고슴도치 밤나무’ 등장)
⚫이벤트 퀘스트를 완료한 모든 유저는 각 마을에 위치한 이벤트 NPC, ‘파티시에 현식’을 통해 수확한 밤 3개를 재료로 [밤 타르트]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고슴도치 밤나무’ 는 채집한 유저에게 10~15개의 밤을 지급합니다.
⚫‘밤’ 아이템과 ‘밤 타르트’ 아이템은 교환이 불가능하며 이벤트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소멸합니다.]
50개 보상까지는 솔직히 별로인데, 100개 이후부터가 엄청났다. 저 [하늘을 담은 팬던트]랑 [힘찬 마의 기상] 잘 안 뿌리는 건데……. 둘 다 능력치가 꽤 좋은데 귀속 아이템이라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거였다.
내가 엄청난 걸 놓치고 있긴 했구나……. 나야 100개 이상까지 모을 자신도 없고, 스펙 업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300개 보상부터는 따도 그만 안 따도 그만이지만 윤정신은 필요하지 않을까?
아직도 자려나. 나는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와 연락 온 게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부재중 전화 5통……. 나는 때마침 또 걸려 오는 전화를 서둘러 받았다.
[뭐 하는데 전화가 안 돼?]
“이벤트 확인 좀 하느라. 언제 일어났어?”
[방금. 야, 세상에 게임 한다고 애인 안 만나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중독이야?]
“나 아이템 얻어야 해. 코스모스 세트.”
[참 나. 그럼 우리 집 와서 같이 하든지. 전에 같이하기로 했던 그거 아니야?]
“완전 좋은 거 주던데. 봤어?”
[난 이미 다 있어서. 대충 이벤트 보니까 나무 띄우려면 몬스터 잡아야 하는 거던데, 도와줄 테니까 나와. 데리러 갈게.]
씻기는 다 씻었으니까 대충 옷만 갈아입고 나가면 되긴 한데……. 하긴, 10일 정도 남았으면 100개는 거뜬히 하겠지? 밤 3개에 타르트가 하나니까, 100개면 총 300개, 아무리 운이 나빠도 나무 30개만 채집하면 얻을 수 있었다. 쉽잖아?
생각해 보니 초조할 것도 없었다. 나는 컴퓨터를 끈 뒤, 머리를 정리하고 입을 옷을 고르며 여유롭게 나갈 준비를 했다. 곧 윤정신이 집 앞에 도착했고, 나는 그의 차를 타고 가면서 길드 채팅 방에 카톡을 보냈다.
[야 누가 오버했냐ㅋㅋㅋ]
[코스모스 따기 쉽더만]
[심현지: ㅋㅋ]
[박도원: ㅋㅋㅋㅋㅋ]
[왜ㅋ 또 무슨 작당들임]
[고주원: 하...ㅋ 야 해보면 안다 왜 저것들이 빠개는지]
[고주원: 망토 따려고 퇴근하고 맨날 돌렸는데 ㄹㅇ환멸의 시간이었다]
[유정: 헐 고주원이다 ㅋ 유물 보는 것 같음]
[심현지: ㅋㅋㅋ회사의 노비]
[박도원: 와중에 망토 땄네ㄷㄷ 의지 인정ㅋ]
……뭐지? 이 불길한 기분은.
금세 윤정신네 집에 도착하고, 어디선가 스툴을 가져와 내 옆에서 노트북을 펴는 그를 볼 때까지도 그 근원 모를 불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기야, 나 어디로 가?”
“어……. 선행 퀘스트는 깼어?”
“전에 해 뒀어.”
윤정신이 흘깃 내 화면을 보고는 내가 있는 마을로 워프를 해 왔다.
혹시 윤정신은 이유를 알까? 나는 슬그머니 그에게 물어보았다.
“형.”
“응?”
“이거 모으기 어려워? 애들이 겁주던데.”
“아아.”
윤정신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스틸 하는 놈들 때문에. 채집하기가 좀? 이게 타르트로 코인 바꿔서 코인 샵을 이용할 수가 있으니까 계속 수요가 있거든.”
“아아, 난 또 뭐라고.”
채집을 가로채 가는 족속들이 있다 이건데, 설마 뭐 얼마나 심하려고. 연타는 자신 있기도 하고.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한 사냥터에 자리를 잡고 구역을 나누어서 윤정신과 몬스터를 해치워 나가기 시작했다.
3단계 메시지가 뜨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슬렁어슬렁 누군가 필드로 와 밧줄에 매달리는 것이 보였다.
[타잔빤스: 곧무?]
곧무? 그게 무슨 뜻이지? 신종 욕인가…….
내가 의아해하자 윤정신이 대신 답을 해 주었다.
[토라: ㄴㄴ미세]
[타잔빤스: 안 믿ㅋ 존버]
[토라: ㅋㅋㅋㅋ매너 좀;]
“곧무가 뭔데?”
턱을 괸 채 못마땅한 듯 화면을 보고 있던 윤정신이 심상하게 답했다.
“곧 밤나무가 무수히 밤을 떨어뜨릴 듯합니다. 3단계 알림말인데, 저렇게 대기 타고 있다가 밤 스틸 하려고 하는 거야.”
“별걸 다 줄이네. 그럼 어떡해?”
“내가 나무 띄울 테니까, 너는 맵 중앙 가서 대기 타고 있어 봐. 채집 스킬 단축키 설정해 두고 연타해.”
“알겠어.”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맵 중앙으로 가 적당히 근처로 오는 몬스터들을 없애며 틈틈이 채집 키를 연타했다. 그러는 동안에 밧줄에 매달려 있는 사람은 어느새 3명이 되었다. 무슨 굴비도 아니고 저게 뭔……. 살풍경하다.
곧, 맵의 중앙에 나무가 생겨났다.
<야호~! 밤이다! ‘나좀주지스님’ 님이 밤 13개를 획득했어요!>
“헐? 형, 나 뺏겼어.”
“그렇다니까. 곧무원들 못 이겨. 진지하게 조직 아닌가 의심돼. 무슨 정보가 저렇게 빨라?”
[타잔빤스: 아; ㅅㅂ 훔치고 지랄이네]
[나좀주지스님: 꼬우면 연타 연습 해라 아가야^^]
아니, 내 건데…….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청혼: 다 나가ㅡㅡ]
결국 그렇게, 장소를 옮기고 옮겨 가며 힘겹게 모은 결과, 밤 타르트 10여 개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게 연타도 연타지만 멘탈 싸움이구나? 차라리 나도 스틸 하고 다닐까 싶을 정도였다. 힘들게 띄워 놨더니 슬그머니 와서 날름 밤만 가로채 가? 무슨 시스템을 이따위로 만든 거야? 차라리 드랍 템으로 주든지!
곧무원들에게 몇 번 밤을 빼앗기고 나니 멘탈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중간부터는 윤정신이 점심 차리러 가겠다고 사라져서 혼자서 몬스터 150마리를 잡아야 했는데, 그렇게 띄운 밤나무가 뺏기면 짜증도 배가 되었다.
……하. 안 되겠다. 머리를 조금 식혀야 할 것 같아서 부엌으로 가 식탁 앞에 앉자, 무언가를 열심히 굽고 있던 윤정신이 흘깃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화났어?”
“또 뺏겼어, 밤나무. 그것도 여러 개. 내가 먹은 거 세는 게 더 빨라. 성질 안 나게 생겼어?”
“……밤 사다 줄까?”
“됐어! 냄새도 맡기 싫어!”
부글부글 또 화가 끓었다. 그가 조용히 연어 샐러드가 담긴 볼을 내 앞에 놓아 주었다.
“계정 알려 주면 내가 모아 놓을게.”
“뺏긴 거 억울해 죽겠어, 진짜.”
“다시 모으면 되지. 코스모스만 딸 거라며? 100개는 금방 해.”
잠깐 솔깃하긴 했지만, 결국 내가 고통스럽거나 윤정신이 고통스럽거나 둘 중 하나다. 나보다 손도 느린 양반이…….
“안 돼. 형 힘들잖아.”
“새벽에 하면 별로 안 뺏겨서 괜찮아.”
“피곤할 텐데…….”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조건 하나 걸게. 콜?”
조건? 보나 마나 뽀뽀해 달라는 거겠지.
“콜.”
“오케이. 그럼 오늘 자고 가.”
……아니었네. 그것보다 더 귀찮은 거였다.
“뭐? 갑자기?”
“새벽까지 게임 하면 다음 날 너 만나기 힘드니까. 자고 가면 안 그래도 되잖아?”
“그래, 뭐……. 이럴 거면 말을 하지, 뭐라도 챙겨 오게.”
“새것 사 오면 돼. 아무튼, 내가 밤에 모으면 되니까 이제 그거 안 해도 되는 거지? 점심부터 좀 먹자. 살짝 늦긴 했는데…….”
윤정신이 아차 하며 굽고 있던 고기를 뒤집었다. 다행히 타지는 않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그는 혼자서 소스를 만들고 뚝딱뚝딱하더니 스테이크 덮밥을 만들어 왔다.
“칫솔은 있고, 속옷도 전에 사 둔 거 남아 있고. 생각해 보니까 딱히 살 거 없네.”
이제 그 거지 같은 밤을 안 모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다 후련했다. 나는 편안해진 속으로 그가 만들어 준 밥을 먹고, 후식으로 나×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일단 되는 데까지 설렁설렁 밤을 모아 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모아 준다니까?”
“조금만 더. 나 이제 요령을 알 것도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이스크림을 떠먹고 있던 그가, 일순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톡톡 쳐 불렀다.
“너 그거 알아? 예전에 했던 광고인데, 꼬마 애가 나와서 ‘아주 오래오래 안 녹는 아이스크림 있나요?’ 하고 묻는 거.”
“몰라. 왜? 그게 밤 맛이야?”
“아니야. 너 진짜 밤에 미쳤냐? 하여튼, 꼬마 애가 그렇게 물으면 점원이 평생 안 녹는 아이스크림 있다면서 아이스크림을 내주거든? 그걸 보는데 너무 궁금한 거야, 진짜 안 녹나 하고.”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잘도 안 녹겠다. 요즘에야 잘 안 녹는 아이스크림이 있다긴 하지만 예전이라면 택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걸 사 와 봤는데 녹더라. 근데 맛있어서 계속 먹고 있어. 광고 진짜 잘하지? 안 그래?”
“그러네. 정말 안 녹았으면? 뭐, 평생 그거만 빨고 있으려고 했어? 어쩌자고 샀대.”
“세상에 빨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거만 빨고 있어.”
뭐래, 이 변태가…….
윤정신이 심심하다며 놀아 달라고 치댔지만, 적어도 밤 타르트 50개까지는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내 밤이 아니라 생각하고 설렁설렁하니까 생각보다 즐겁게 밤을 모을 수 있었다. 그래, 비법은 체념이구나…….
대충 한 번 정도만 더 털면 꺼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심현지가 길드 채팅으로 짜증을 내는 것이 보였다.
{현지: 아니 ㅅㅂ 사냥 좀 하려는데}
{현지: 관음증 환자 왜 이렇게 많냐; 밤 처먹겠다고 다 구경 중이네}
{청혼: 야 곧 뜸?}
나는 심현지의 채널과 위치를 확인하고 당장 그리로 달려갔다.
[현지: ?]
[청혼: ㅎㅎ밤 내 거]
[청혼: 곧무?]
[현지: 애쓴다]
정말로 3단계였는지, 곧 밤나무가 필드 중앙에 생성되었다.
<야호~! 밤이다! ‘청혼’ 님이 밤 11개를 획득했어요!>
“아싸!”
[현지: 아니 내가 띄운 밤인데 왜 상관도 없는 인간이 3명이나ㅋㅋㅋ 참나]
[청혼: ㅎㅎㅎ현지 땡큐 오늘 이거 하고 턴다]
[현지: ㅇ 이제 꺼져]
나는 그 밤을 가져가서 50개째의 타르트를 만들고,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윤정신을 흔들어 깨웠다.
“형. 50개, 50개.”
“……응? 다 모았어?”
그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그러게 그냥 집에서 혼자 하겠다니까…….
“졸려?”
“약간.”
“새벽에 할 거라며. 그냥 낮잠 한숨 자.”
“너도 자면.”
그가 내 허리를 감아 안으며 내 어깨에 볼을 기댔다.
별로 낮잠 잘 상태는 아니긴 했지만, 뭐 이런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오랜만에 정말 편안하게 오후의 수면을 즐겼다. 비록, 윤정신이 새벽에 밤을 모으다 잠드는 바람에 내가 다시 밤을 모아야 했지만.
잘 거면 차라리 마을로 옮겨 놓고 아예 편하게 잘 것이지, 꾸역꾸역하겠다고 버티다가 사냥터에서 죽고 말이야……. 아침에 일어나서 보았을 때, 이미 내 캐릭터는 죽어 있었다. 깎인 경험치도 복구해야 해서 두 배로 귀찮아져 버렸지만, 마음이 중요한 것 아니겠나.
다행히 그날 오후 즈음에는 코스모스 세트를 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