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한동안은 허리 탓에 외출을 삼갔다. 사실 집으로 돌아온 후부턴 그럭저럭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론 나아졌는데 그때 욕실에서 꽤 오래 하기도 했고, 그러고 물기를 덜 말리기도 했고.
대충 그런 이유로 짜잔, 감기가 겹친 것이다.
열이 오르면서 몸살 기운이 더 심해져서 움직일 기력이 나질 않았다. 내가 우리 집은 이제 오지 말라고 못을 박아 둬서 윤정신은 아마 애가 타지 싶었다.
근 4일 사이에 단 하루, 잠깐 우리 집 앞 골목에서 1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게 고작이었다. 그 외에는 전화나 카톡 정도로만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보고 싶다, 정말. 얼굴 까먹겠어.]
“그렇게 내 인상이 희미해?”
[아니? 사실은 또렷한데. 아무튼, 보고 싶다고. 너 근데 정말 운동 좀 해야겠다. 아침마다 나랑 자전거 탈래?]
“아니야. 이번엔 감기가 겹쳐서 그래. 그래도 오늘은 자고 일어나니까 개운하더라.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 같아. 약도 먹었고.”
[과일 좀 사 갈까?]
“오지 말라니까. 가족들 눈치 보여.”
[아휴……. 그럼 내일은 볼 수 있는 거야?]
“노력해 볼게. 형, 나 지금 가족들 다 있어서 통화 오래 못해. 카톡 할게.”
[알겠어……. 미안해, 내가.]
“또 운다, 부.”
[보고 싶어.]
나는 괜히 부끄러워서 못 들은 척을 했다.
“나 그런데 내일 몸 좀 괜찮아져도 오래 걸어 다니진 못할 거 같아.”
[원래 그런 거 안 좋아하잖아. 괜찮아, 실내에 있자.]
“몸이 아프니까 뭔가 서러워……. 괜히 혼자 있을 때도 불쌍한 척하게 돼. 혼자 끙끙거리고. 나만 그런가?”
[난 잔병치레가 별로 없어서…….]
“나 대신 조금만 아파 줘.”
[만나면 찐하게 키스할까? 그럼 감기 옮는다던데.]
“글쎄, 별로 안 당기네.”
[너 대신 아플 수 있으면 진작 그랬지. 그냥 집에 보내지 말걸 그랬어. 계속 두고 간병하게.]
“그럼 우리 가족들 울어. 나 완전 우리 집 사랑둥이여서.”
[나한테도 사랑둥이인데? 나도 너희 가족에 들어가야겠다. 내일 도장 찍을까?]
“아니?”
[아, 아깝다.]
“전혀 안 아까웠거든. 아쉬워하지 마.”
[난 근데 너희 집에서만 괜찮다고 하면 정말 너랑 결혼하고 싶어. 물론 혼인 신고도 못하고 시민 결합도 못하겠지만, 우리끼리 인정하고…….]
“거품 무실 거 같은데. 포기해, 형.”
[싫어. 포기 안 해.]
“음……. 하긴, 속이는 것도 한계가 있긴 하겠다. 내가 좋다고 하면 언젠가 접어주시긴 하겠지만, 형 별로 반기시진 않을 것 같은데.”
[넌 나랑 결혼할 마음은 있고?]
“아니? 그런 고민할 나이는 아니잖아. 애초에 결혼 이야기 나오기는 너무 이른데. 너무 앞서가지 마, 부담스러워.”
[그렇지……. 그럼 나 33살 넘으면 그땐 고민해 줄래?]
그가 뜬금없이 구체적인 나이를 제시하자 괜히 호기심이 일었다. 서른셋에 무슨 의미 같은 거라도 있나?
“왜 하필 33살인데? 그럼 6년 후인가? 우리가 6년이나 만날까? 진짜 그런다면 당연히 고민해 보겠지.”
[33살 즈음에는 결혼하자 생각했어서.]
“6년 동안 내 마음 안 변하게 잘 붙들어 보든가. 그럼 진짜 결혼할게.”
[약속했다? 구두 약속도 효력 있어, 너.]
“알겠다니까. 일단 나 끊을게.”
[그래. 사랑해.]
그러곤 전화가 끊어지기 무섭게 카톡이 왔다.
[윤정신: 와 사랑한다고 안 해주네]
[사랑해(빈말)]
[윤정신: (사진)]
윤정신이 지난 카톡을 캡처해 두었던 것을 보냈다. 내가 그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좋아한다고 말한 부분만 절묘하게 자른 것이었다. 나를 [울 댜기ㅡ3ㅡ♡]라고 저장해 놓은 게 보였다.
[와 저장명 오글거려]
[윤정신: ㅋㅋㅋㅋㅋ사랑하는 만큼]
[윤정신: 자기는 나 뭐라고 저장했어?]
[그냥 윤정신이라고 했는데?]
[윤정신: ????????????]
[윤정신: 바꿔줘 애칭으로]
[애칭이 없잖아]
[윤정신: 최강정력윤정신 에너자이저윤 이런 거]
[ㅋㅋㅋ 그냥 핸드폰 없이 살면 살았지]
나는 갑자기 떠오른 게 있어서, 조용히 저장명을 바꾸고 그에게 화면을 캡처 해 보냈다.
[부: 앙 시뎌!!!!!!!!!!!!!!!ㅡㅡ]
[잘 설정한 거 같은데 ㅎㅎ 지금 완전 부인데?]
[부: 더 애정 담아서 해줘~~~~ 여보 자기 내 사랑 그런 거]
[그런 말 못해]
[부: 왜 나는 맨날 자기라고 하는데ㅡㅡ]
[내가 시켰나...?ㅋㅋ]
[부: 바꿔죠!!!!!!!!!]
[형이 이럴수록 더 바꾸기 싫은 거 알지?]
[부: 아 그럼 하트라도 넣어줘ㅡㅡ]
[알겠어 딱 거기까지 딜]
[부♡: ㅎㅎ]
[부♡: 지아비 부라고 속여야지~ㅋ]
[^^;;; 천재 같은데?;]
[부♡: 우기랑 결혼했어요♡]
[부♡: ♡아이 좋아♡]
[부♡: 혼전에 떽뜨도 해떠염ㅋㅋ♡]
[극혐이에여 ㅋㅋ]
[부♡: ㅠㅠ]
[부♡: 근데 정말 이런 말 하면 쓰레기인 거 알지만]
[부♡: 섹스 얘기 하니까 ㅈㄴ섹스하고 싶다]
진짜 미친놈…….
나는 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다니 다행]
[부♡: 자기야 아푸지마 ㅠㅋ]
[부♡: 근데 정말 참을 거야]
[부♡: 섹스라는 말 되게 야하지 않음?]
[부♡: 마찰음이라서 그런가]
[부♡: 구멍과 곧휴가 마찰하는 장면이 상상되지 아나? ㅎㅎ]
[부♡: 헉 윽]
[형은 진짜 중성화 해야겠다]
[부♡: 그저 자기가 너무 섹시한 탓]
[부♡: 근데 난 진짜 중성화 해야겠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이렇게 자꾸 분위기를 미묘한 방향으로 끌어올 때마다 조금은 낯설고 무섭게 느껴진다. 평소의 호구 같은 모습이 아닌 거 같다고 할까…….
[당분간은 좀 그래]
[부♡: 알지 ㅋㅋ 괜찮아 애초에 내 욕심인데 뭐]
[안 괜찮으면서 ㅋㅋ]
[부♡: 아니야...ㅠ 너 아프잖아]
[부♡: 일단 하면 절제할 자신이 없어]
[부♡: 시작을 안 해야 해 그냥 ㅋㅋ...]
[부♡: 자기 안에 내거 넣고 싶다]
[난 형처럼 시도 때도 없지 않거든;;ㅎㅎ]
[자꾸 이런 얘기 하면 차단한다]
[부♡: 미앙 ㅠㅠ]
[부♡: 안 할게]
[부♡: 싫어?]
싫다기 보다는 저 사람이 나랑 같은 종족이 맞는 걸까 의심이 되는 느낌? 유전자상의 문제일까.
[싫은 거까진 아닌데]
[가끔 형의 그 팔팔함이 무섭네 ㅎㅎ;]
[부♡: 우리 성욕에 솔직해지자]
[부♡: 나는 자기랑 야한 거 많이 하고 싶은데]
이런 인간 부류를 어디에서 많이 봤더라…….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를 보며 내도록 느껴 왔던 기시감의 정체를 문득 깨달았다. 랜덤 채팅 상대가 잡히면 늘 [ㄴㅈ], 또는 [변?]이라는 말로 서두를 떼는 족속들인데……. 그래, 이거였어.
[약간 무슨 느낌이냐면]
[나나라이브 변남 그런 거 같아]
[부♡: 야 ㅅㅂ그건 너무했다 사이버 발정충이잖아]
[형이랑 똑같지 뭐]
[부♡: 너무해~~~~~~^^;]
[부♡: 자기는 이런 거 싫어?ㅋㅋ]
[나도 사람인데 싫진 않지]
[근데 그거랑 별개로 좀 무서운 느낌이 있음]
[아까도 말했지만 다짜고짜 성희롱하는 이상한 인터넷 변태처럼]
[형 자꾸 뜬금없이 그런 얘기 하자나]
[맨날 은근슬쩍 지분거리고ㅡㅡ]
솔직히 그 사람들보다 윤정신이 더 심할 수도 있다. 실명을 달고 저런다는 점에서.
[부♡: 하고 싶은 걸... 어케 ㅋ]
[뭔가 내가 아는 형이 아닌 거 같아서 낯설고 무서운 거 같음]
[부♡: 나 완전 이런 앤데]
[얼굴 보고 있을 때는 괜찮은 거 같은데]
[텍스트로 그러면 유난히 그래]
[부♡: ㅋㅋㅋㅋㅋ 자기는 야설보다는 야동을 선호하는 타입?]
[아 이렇게 해석되나 이게]
[부♡: 그럼 텍스트로만 안 그러면 됨?]
[자제 부탁]
[부♡: 그러면 10번 할 거 1번 하면 돼?]
[ㅇㅇ]
[부♡: 그래...]
[부♡: 알겠어...]
윤정신이 한껏 시무룩한 척을 하며 자신의 서러움을 어필했다.
[ㅋㅋㅋ 또 우는 중?]
[부♡: 자기야 통화할 때는 괜찮음?]
[거기까진 봐줄게]
[부♡: 알겠어ㅎㅎ]
[형을 정말 어쩌면 좋아]
[부♡: ㅋㅋ어찌든 해줘]
[이거봐 ㅋㅋㅋ 아 개웃겨]
[기승전떡이야]
[부♡: ㅠㅠ]
[부♡: 자기야 근데]
[부♡: 나랑 학원 다닐 생각 없어?]
다행히 이번엔 건전한 대화 소재가 나왔다.
학원? 어떤 학원을 말하는 거지.
[부♡: 우리 카페 차리기로 했잖아]
[부♡: 슬슬 알아보려고]
[학원??]
[부♡: ㅇㅇ 바리스타랑 간단한 제과제빵 그런 거]
[언제부터?]
[부♡: 글쎄 너 편할 때?]
[ㅋㅋㅋㅋ어...]
으음……. 좀 귀찮을 것 같은데. 엄청 배우고 싶은 분야도 아니고.
[난 좀 더 나중에 하면 안 돼?]
[아직은 뭘 꾸준히 할 의욕이 안 나]
[부♡: 그래 ㅋㅋㅋ 천천히 생각해]
[부♡: 그럼 나도 몇 달 뒤부터 등록해야겠다]
[부♡: 근데 넌 꼭 안 배워도 되긴 해]
[부♡: 내가 배워서 능숙해지면 너도 가르쳐 줄게]
[부♡: 이건 어때?]
[그래 ㅎㅎ]
[부♡: 우리 얼굴 때문에 장사 잘 될 거야]
[부♡: ㅇㅈ?]
정말 그렇게 된다면 재밌긴 하겠지만, 이왕이면 평생직장을 찾고 싶었다.
[ㅋㅋㅋㅋㅋ 형이랑 안 좋게 헤어지면]
[즉각 쫓겨나겠지]
[그런 불안정한 일자리]
[부♡: 나 그렇게 안 야박함]
[부♡: 특히나 너에 한해선 ㅎㅎ]
[불편해지면 내가 나가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
[부♡: 지금은 잘 사귀고 있는데 그런 가정을 왜 해]
[부♡: 나 삐친다]
그와 조금 지내면서 알게 된 건데, 저런 말은 보통 농담이 아니다. 은근 잘 삐치고 잘 담아 둔다. 나는 바로 백기를 들었다.
[ㅈㅅㅈㅅ]
[삐치지 마]
[내 맘 알지 ㅎㅎ]
[부♡: 모르겠는데 ㅎㅎ]
[부♡: 직접 말해줘]
[ㅋㅋ 빈말로?]
[부♡: 빈말을 가장한 너의 진심^^]
[사랑해~~]
[부♡: 나두~~~♡♡♡
[부♡: 자기 너므느므 사랑해ㅎㅎ]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정말 신기한 사람이다. 내가 좀 애정 표현이 없는 건가?
[ㅎㅎ;; 닭살]
[닭 얘기하니까 치킨 먹고 싶다]
[형도 그런 거 먹어?]
[부♡: 왜 안 먹어?]
[라면은 안 먹잖아]
[부♡: 야 ㅋㅋㅋㅋㅋ 그거 그냥 별로 안 좋아하는 거야]
[부♡: 취향이라구^^;;;~~]
[부♡: 뭐 웰빙 식습관 이런 거 아니라고 ㅋㅋㅋㅋㅋㅋ]
[부♡: 나 방금 진짜 어이없었다]
[맞으면서 ㅋㅋ]
[부♡: 난 그냥 웬만한 거 다 잘 먹어]
말은 저렇게 하지만 솔직히 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 먹을 때랑 아닐 때랑 먹는 속도부터 차이 나는걸. 억지로 먹는 게 티 날 때가 많았다.
[라면 말고 또 뭐 싫어하는 거 없어?]
[부♡: 짬뽕도 별로 ㅋㅋ]
[부♡: 우동도 별로]
[부♡: 그냥 그 비슷한 국물 많은 면 요리 다 별로 안 좋아해]
[부♡: 물냉은 잘 먹고 소면 삶아서 하는 국수 요리도 ㄱㅊ]
[부♡: 아 가츠동도 싫어해]
[부♡: 크림 어쩌고들도 잘 안 먹고]
[부♡: 은근히 별로 안 좋아하는 거 많네]
[부♡: 근데 저런 것도 주면 먹을 순 있어 ㅋㅋ]
[부♡: 그리고 넌 내가 게장을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부♡: 사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부♡: 너^^]
[부♡: 제일 맛있지]
그 말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훅 끼쳤다.
[ㅁㅊ]
[스스로 머리 한 대 때려]
[지금 당장]
[부♡: 9번 참았으니 정당했음]
[부♡: 자기는 뭐 좋아해?]
[딱히 좋아하고 싫어하는 메뉴는 없는데]
[조리가 잘 돼야 해]
[요리 맛있게 된 거면 나도 다 잘 먹는 편]
[부♡: 세상에]
[부♡: 그렇게 어려운;]
[부♡: 그걸 내 된장찌개 따위가 통과했었다니ㅋ]
[ㅋㅋㅋㅋㅋ된장이 좋은 거 같던데]
[부♡: 아 ㅋㅋㅋㅋㅋㅋ 그거 이모네에서 받아온 거]
[부♡: 감사인사 드려야겠다]
단순한 것 같은데 은근히 알기가 어렵다. 조금은 윤정신에 대해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새로 알게 되는 사실들이 많았다.
역시 세상에 단순한 인간은 없구나. 복잡한 모식도로 나타낼 수 있는 것들은 차라리 파악하기 쉬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 하는 게 은근 재밌는 거 같아]
[우린 아직 잘 모르니까]
[알아가는 거 재밌다]
[부♡: ㅎㅎ 그랬어?]
[부♡: 귀여워 ㅠㅠ]
[부♡: 또 뭐 궁금한데?ㅋㅋ]
[형 학교 다닐 때 얘기 해줘]
[부♡: 그걸 타자로 치긴 좀 그렇고]
[부♡: 일단 시간 늦었으니까 우리 애기는 자자 ㅎㅎ]
[부♡: 내일 만나면 이야기 많이 해줄게]
[나 아직 안 잘 거야]
[부♡: 벌써 11시인데?]
그는 슬슬 대화를 끝내고 싶은 것 같았다. 하긴, 시간이 좀 늦었으니까……. 핸드폰으로 키보드 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는 말도 했던 것 같고.
[형 졸리구나]
[졸리면 자 ㅋㅋ 나도 그럼 자야지]
[부♡: 미안 나 그럼 좀]
[부♡: 해결을 보러 갈게]
[아 설마;]
[부♡: 응...^^]
[부♡: 한계가 왔네]
그러면 그렇지. 어째 조용해졌나 했다.
나는 혀를 쯧쯧 찼다.
[형은 진짜 문제가 있어]
[난 잘래 내일 바]
[부♡: 웅 ㅎㅎ 잘 자 자기야 내 꿈 꾸고]
[형도 적당히 좀 해]
[그러다 죽겠다]
[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 안 죽을 정도만 할게 걱정하지 말고 푹 자]
[웅]
나는 발정 난 듯한 윤정신을 뒤로하고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윤정신이 집 앞으로 찾아왔다.
“우기야!”
그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형, 근데 나 아직도 감기 기운 조금 있어.”
“그래?”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땅에 내려놓았다.
“나 차 뽑았다.”
“응? 면허 없다지 않았어?”
오토바이 면허만 있다고 했는데. 차를 모는 건커녕 오토바이 모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아니야. 스무 살 때 땄어. 근데 운전 자신이 없어서 그냥 없다고 했는데……. 계속 연습 좀 했거든. 너 택시나 오토바이 태우고 다니긴 좀 그래서.”
“괜찮은데……. 와, 차 반짝반짝하다.”
나는 신기해서 차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창에 선팅이 짙게 된 검정색의 매끈한 차였다. 윤정신은 차를 뽑고 기분이 꽤 좋은지 손가락을 꼽아 가며 제 목표를 이야기했다.
“이제 차 타고 영화도 보고, 드라이브도 하고, 섹…….”
“미쳤냐? 여기 우리 집 앞이야! 누구 들으면 어쩌려고…….”
나는 다급하게 윤정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어휴, 미쳤지, 정말. 윤정신이 내 손을 떼 내며 빙그레 웃었다.
“안 할게, 안 할게. 타! 안전 운전할 테니까.”
“형 오랜만에 보니까 좀 잘생겨진 거 같다?”
“더가 아니고 좀? 오랜만에 때깔 좀 냈지.”
“그러네.”
윤정신이 먼저 운전석에 올라타고 나는 조수석에 탈까 뒷좌석에 탈까 고민하다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덜컥거리며 뒷좌석 문이 잠겼다. 윤정신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조수석 창을 내렸다.
“앞에 타.”
“왜?”
“뒤에 타면 그대로 잡아먹는다.”
나는 순순히 조수석 문을 열었다. 윤정신이 작게 웃었다.
“뒷좌석에 짐 많아.”
“치우고 앉으면 되지……. 웬 짐이야?”
“음……. 그냥 좀 그렇게 됐네.”
“웃겨. 일부러 채워 뒀지?”
“응. 역시 눈치 백 단.”
윤정신이 민망한 듯 부러 더 크게 웃자, 나도 괜히 우스워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나저나 새 차라 그런지 내부가 깔끔하네. 대시보드 위에도 아무것도 올려 진 게 없었다. 노호혼 같은 걸 하나 사 줄까.
“차에 놓는 장식 같은 거 사 줘야겠다. 귀여운 거.”
“귀여운 거? 네 얘기야? 그럼 달고. 차 뽑았으니까 여행 갈래?”
여행이라. 나쁘지 않았다.
“좋아. 차 있으면 편하겠다.”
“다음엔 해외도 가자.”
“좋아, 좋아. 나 해외 가고 싶어.”
“어디 가 본 곳 있어?”
“일본 말고는 안 가 봤어…….”
“아시아 쪽이 좋아? 유럽 갈까?”
“유럽!”
아직 먼 이야기긴 하겠지만, 그래도 해외로 놀러 갈 생각을 하니 기대가 되었다. 윤정신이 저렇게 말했으면 정말로 데려가 줄 테니까. 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들떠 버렸다. 촌스럽게 보일까 봐 티 내진 않으려 했는데 기분이 좋아진 것까지 숨기기는 힘들었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오케이. 우리 되게 할 거 많네. 어디에 좀 써 놔야겠다.”
“오……. 그런 짓도 해?”
“100일 이벤트까지 준비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 전에 헤어지자 하면 안 돼.”
“정말? 나도 뭐 해야 하나.”
“기억만 해 줘.”
그래서 100일이 언제인데……? 미안해서 차마 물을 순 없었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점심 뭐 먹을까?”
“뭐 먹을래? 노량진 가서 회 먹을까?”
“좋지.”
“거기서 먹기는 좀 시끄러우니까, 포장해서 다른 곳에서 먹자.”
“어디?”
“어디 갈까?”
내가 마땅한 곳을 알 리가……. 나는 고민하다 가장 만만한 곳을 택했다.
“형 집 갈래.”
“우리 집? 오랜만에 외출인데 집에 있게? 안 답답하겠어?”
“편해서 좋던데.”
“그래, 그럼. 우리 집 가자. 가서 좀 쉬다가 저녁에 드라이브 좀 하고, 카페 같은 곳 가서 좀 쉬다가 한강에 야경 보러 가자. 너 어제 치킨 먹고 싶다며. 돗자리 깔고 먹으면 되겠네.”
“좋다. 와, 근데 형 진짜 운전할 줄 아네? 전에는 많이 못했었어?”
“따 놓고 안 타서 자신이 좀 없었지. 아직도 주차는 잘 못해.”
그럼 난 주차하기 전에 내려야지. 그래도 생각보다 그럴싸한 것 같았다. 정말 연습했나? 나는 창을 내려 얼굴에 바람을 쑀다.
햇살이 붓에 적당히 묻은 물감처럼 부드러운 농도로 얼굴 위에 칠해지는 것 같다. 정말 집에 있는 게 답답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 보면.
“낮에 나오니까 좋다. 막상 나오면 좋은데, 나갈 마음먹기가 힘든 것 같아. 준비하는 게 귀찮아서.”
“대충 하고 와. 그래도 귀엽잖아.”
“잠옷 입고 가?”
“잠옷 입을 거면 내 방으로.”
“아, 뭐야.”
“자기 잠옷은 뭐야? 어떤 거 입어?”
“그냥 파자마인데? 체크 무늬.”
“동물 잠옷 같은 거 없어? 귀여울 거 같은데. 입어 주면…….”
“아, 아! 안 들어. 안 입어.”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귀여울 거 같아서. 이상한 얘기한 거 아니야. 나 집에 동물 잠옷 있는데.”
이건 웬 끔찍한 소리. 저것도 괴상한 취향의 연속일까?
“그런 게 왜 있어? 형, 왜 이렇게 철이 없냐.”
내 말에 윤정신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고등학교 때 반 티였거든? 체육 대회 때 입고 한 번도 안 입었어. 공룡 모양.”
“귀엽겠다. 형이나 좀 입어 봐.”
“그럴까? 입으면 귀여워 해 줄 거야?”
“응.”
“그럼 한 다섯 벌 더 사야지.”
“그러진 말고.”
대답하며 윤정신이 내 쪽을 흘깃 보더니 슬며시 내 쪽 창을 다시 올렸다. 바람 때문에 거슬렸나?
“날씨가 슬슬 쌀쌀해지네. 밤에는 꽤 춥더라. 우리 집 가면 걸칠 거 하나 챙기자. 너 또 감기 때문에 골골거릴라.”
하긴, 가을이니까. 밤에는 티 한 장만 입어선 꽤 추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생강차 마셔야지. 형 집에 되게 맛있는 거 많은 거 같아. 반찬들도 다 맛있고.”
“그거 다 이모네서 사거나 받은 건데, 이모가 반찬 가게 같은 거 하셔서. 뭐라더라. 아무튼, 반찬 가게 같은 거.”
“우와……. 그랬구나.”
우리는 차를 몰고 노량진으로 가 싱싱한 회를 포장하고 윤정신의 집으로 향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볕이 참 예쁘게 들어서 좋은 집이다. 커튼 때문인가?
“자기야, 쌈 채소 좀 씻어 줘. 저기 꺼내 놓았어.”
“응.”
내가 쪼르르 주방으로 가 상추와 깻잎을 씻어 소쿠리에 담자, 종지에 초장을 따르고 있던 윤정신이 피식 웃었다.
“너 나중에 있잖아, 다른 사람 만나도 나한테 들키지 마라. 피가 거꾸로 솟을 거 같아.”
“전에는 헤어질 거 가정하지 말라며?”
“그러네. 미안. 손 닦고 와서 앉아.”
윤정신이 식탁 의자를 빼 주었다.
“형은 근데 혼자 살면서 식탁은 왜 이렇게 큰 걸 샀어? 의자도 네 개고.”
“음, 글쎄. 너랑 둘이 살려고?”
“손님 올까 봐?”
“아니. 그냥 이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데 의자 포함해서 이렇게 세트길래 다 산 거야. 시시하지? 원래 집에 사람 잘 안 불러, 나는. 그리고 뭐 올려 두기에도 큰 게 좋잖아? 집이 좁은 것도 아닌데.”
“만약에 내가 정말 들어와서 살면 내 방은? 빈방 있어?”
“내 방 침대도 더블인데. 그래도 방 따로 필요하면 내 방 치우고 쓰면 되지.”
“그럼 형은?”
“창고 치우고 쓰면 돼.”
“나중에 나 독립하고 싶으면 와도 돼?”
“당연하지. 난 너무 좋지.”
“돈 많은 애인 있으니까 좋다.”
“좋지? 헤어지기 싫지?”
윤정신이 턱을 괴며 배시시 웃었다.
꼭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라도 그는 늘 어딘지 여유로워 보인다. 그 점이 부럽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당황하고 허둥거리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가 힘들었다.
“참 능청스러워. 형은 명절에도 즐겁겠다. 음식도 맛있고, 형 성격이면 친척들이랑도 다 엄청 친할 거 같고.”
“내가 치대는 거 빼면 시체잖아. 어르신들이야 고스톱 잘 치면 원래 좋아라 하고. 음식은 맛있긴 해. 넌 별로 재미없어?”
“응……. 나보다 한 살 어린 사촌 동생이랑만 놀아. 또래가 별로 없어서. 사촌 형 중에 제일 어린 사람이 서른셋?”
“난 젊은 애들 중에는 많은 편이라서. 애들 데리고 어디 놀러 갔다 오고 이러면 어른들이 좋아해, 편하다고.”
“아기 좋아해? 형은 아기 잘 봐?”
“갓난애는 잘 모르겠는데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 정도는 잘 놀아 주지. 왜? 탐나? 너희 집에 하나 장만해 두고 싶어?”
“아니? 그냥 궁금해서. 형, 쌈 하나 싸 줄까?”
“응. 한 다섯 개 싸 줘.”
“싫어. 하나만 싸 줄 거야.”
내가 쌈을 싸서 입에 넣어 주자, 윤정신이 좋아 죽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문득 지나간 대화에서 고스톱이라는 단어를 캐치 해서 그에게 물었다.
“형, 근데 화투 잘 쳐?”
“나 작살나지.”
“이거 먹고 맞고 한번 칠래? 집에 화투 있어? 난 잘 못 치긴 하는데.”
“어. 화투 있어, 아마도. 돈 걸고 할 거야?”
“안 걸면 무슨 재미야.”
“근데 난 돈 필요 없는데. 성인용 맞고 고?”
“그게 뭔데?”
“……아니야. 점당 백?”
“뭐든 괜찮아.”
“안 봐줄 건데. 너 알고 보니까 엄청 고수고 이런 거 아니지? 설마 맞고도 잘 쳐?”
“그렇진 않아. 몇 번 쳐 본 게 다라서……. 이번에 치면서 배워 보려고.”
“근데 나, 돈 말고 뽀뽀해 주면 안 돼?”
“안 돼.”
윤정신이 샐쭉해졌다. 그렇게 회를 다 먹고, 우리는 이야기한 대로 고스톱을 쳤다. 그리고 얼마 뒤, 윤정신은 허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타짜야? 사기 쳤지, 너. 소매 걷어 봐.”
“아니. 잘 못 치는데 운이 좋네.”
“이만하자. 나 이제 현금 없어. 아까 회 샀더니…….”
“용돈 고마워.”
나는 그에게서 딴 돈을 지갑에 잘 넣었다. 사실 화투는 꽤 칠 줄 알긴 했는데, 결정적으로 윤정신이 허풍에 비해서 그다지 화투를 잘 치지 않았다.
판을 정리하고 나와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윤정신과 노래를 들으며 드라이브도 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해 질 무렵까지 이야기도 하다가 한강에 가서 함께 야경을 구경했다. 치킨도 시켜 먹자고 했었는데 막상 오니 배가 고프지 않아서 가볍게 맥주 한 캔씩을 샀다.
“한강만 오면 그 영화 생각나. 괴물.”
“아. 그 포름알데히드 때문에 한강에 돌연변이 생기는 그거?”
“형도 봤어?”
“응. 극장에서 봤었지. 대학 때 영화 관련된 교양 들었었는데, 그때도 배워서 대충 기억나.”
“형 영화 별로 안 본다 그랬지?”
“응. 난 드라마가 더 좋아서.”
하긴, TV 보는 거 꽤 좋아하지. 안 볼 때도 자주 켜 놓는다고 했다.
“드라마 뭐가 제일 좋은데?”
“네가 아려나? ‘안녕, 프란체스카’라는 건데…….”
“재미있어?”
“응. 너는 뭐 좋아해?”
재미있게 본 드라마가 뭐가 있더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하나를 골랐다.
“나는 경성 스캔들.”
“그거 옛날에 한 거 아니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서로 좋아하는 거 봐 보기로 하자. 나는 경성 그거 볼게. 넌 프란체스카 봐.”
“또 재밌게 본 거 없어?”
그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이 즐겁다. 내게 제공되는 안락함이 좋다. 이런 여유가 좋다, 정말로. 그가 주는 푸근한 체취 같은 편안함과 산들산들한 봄바람처럼 잔잔한 설렘이 좋다.
윤정신과 있으면 종종 살짝 젖은 풀 냄새를 맡을 때처럼 정겹고 편한,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나는 방금 내가 무심코 인정한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채고 난 뒤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가득 차오른 저 보름달처럼 서서히 내 안에도 무언가 차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분명 별 마음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싹튼 무언가가 자라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매점에 가면 아주머니가 이제 나 알아보고 빵 하나 쟁여 놓으셨다가 딱 주셨는데……, 자기야?”
“……어? 응?”
“추워?”
달빛에 비친 윤정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잘생겨 보였다.
이게 콩깍지라는 건가. 어느새 이렇게 좋아졌지?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열처럼, 서서히 번지는 잉크처럼, 두꺼운 천 아래 얕은 물처럼 천천히 스며든 것은 어느새 내 온몸으로 퍼져 있었다.
나는 어쩌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싫은 것처럼,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한없이 관대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닫혀 있다고 생각했던 문이, 어느새 열려서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