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8)

5. 

한 달은 꽤 긴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순식간이었다.

내 생각보다 지옥 같은 시간은 아니었다. 초 단위로 세며 카운트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신기하지만 정말로 그랬다. 윤정신은 어쩌면 이럴 걸 알고 그런 제안을 했던 걸지도 몰랐다. 확실히 이번 기회로 그가 전과 다르게 연애 대상으로 고려되기 시작했으니…….

며칠 뒤면 역할극이 끝이 나고, 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오늘도 비몽사몽 눈을 뜨고 윤정신의 연락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윤정신: 자기야 일어나면 전화 주세여 ㅎㅅㅎ]

[윤정신: 아직 자? 나는 1분 1초가 아까운데]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윤정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신호음 두 번 만에 전화를 받았다.

“으응.”

[이제 일어났어?]

“응.”

왜 이렇게 자도 자도 졸린 건지. 내 목소리에서 졸음이 묻어 나왔는지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졸린가 본데? 집에 혼자 있어?]

“부모님 출근하셨고 형은 학원 간 거 같은데.”

[아침은?]

“11시인데 무슨 아침이야. 입맛도 없어.”

[너 그러다 건강 나빠진다. 그럼 집에 혼자 있는 거네?]

“설마 오고 싶어서 까는 밑밥?”

[점심 사 갈게. 너 좋아하는 스시.]

“그럼 나 배고프기 전에 빨리 와.”

나는 초밥에 훌렁 넘어가 그를 집으로 초대하고 말았다.

별일이야 있겠냐만, 나는 샤워를 하며 묘한 찝찝함을 느꼈다. 윤정신이 자꾸 내 일상 공간에 소변 누는 강아지처럼 영역 표시하고 다니는 것 같단 말이지.

그리고 한편으로 나는 그에게 길들여 가는 강아지가 된 것 같다. 오구오구 밥 떠먹여 주고 똥오줌도 치워 주는 윤정신과 있다 보니 안락함에 길들여 가는 거다. 사랑 받는다는 느낌은 꽤 달콤하니까. 설령 내가 받아 주지 않더라도,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적당히 수위 조절을, 소위 말하는 밀고 당기기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포옹하는 정도의 스킨십은 자주 나누게 되었다. 그 정도는 나도 꽤 좋기도 했고…….

머리를 말리고 대충 집을 청소하고 나니, 초인종이 울리며 윤정신이 나타났다.

“나 왔어.”

내가 쪼르르 달려가 초밥이 담긴 쇼핑백부터 받아 들려 하자, 그가 투덜거리며 손을 위로 쭉 올리고 까치발까지 들어서 내가 쇼핑백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

“나보다 음식을 먼저 반기냐?”

“당연히 형이 제일 반갑지.”

내가 윤정신의 가슴팍에 팔을 둘러 꼭 안자, 그가 얌전히 팔을 내리고 나를 마주 안았다. 그의 옷에서 바깥바람 냄새와 편안하고 좋은 향기가 번져 나왔다. 체온에 잘 구워진 그만의 향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렇게 안고 있는 건 참 좋은데. 따뜻하고, 안심되고, 뭔가 포근한 느낌.

편안함에 취해 내가 점점 몸을 기대 오자 무거웠는지, 윤정신이 조용히 나를 품에서 떼 놓았다.

“어디가 네 방이야?”

“아, 들어가지 마. 창피해.”

“창피할 것도 많다.”

“형은 근데 향수 같은 거 써? 아니면 섬유 탈취제 같은 거.”

윤정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가 곧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향수 쓰지. 왜?”

“어떤 거? 항상 되게 좋은 냄새 나. 아저씨 냄새날 것 같은데.”

“맨날 이거만 뿌려야겠다.”

내가 다시 품에 안겨 킁킁 냄새를 맡자, 그가 몸을 움칠 비틀더니 나를 번쩍 들어 올려 식탁 앞으로 옮겼다.

“집에서 이러지 마……. 나 힘들게.”

“변태.”

“그냥 변태 되고 내 욕심 채우는 수가 있어.”

“어떻게?”

“보여 줘?”

그냥 장난친 거였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묘해졌다. 나를 의자에 앉힌 윤정신은, 의자 등받이에 한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가 조금 짓궂게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입술이 포개졌다. 뭔가 보드랍고 말랑한 게……. 멍하니 있는데 입술 사이로 혀가 쑥 들어왔다. 나는 놀라서 윤정신의 어깨를 밀었고, 그는 순순히 뒤로 밀려났다.

……이 형 진짜 좀 흥분했었나 본데. 표정이 진짜다.

그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안 돼?”

생각해 보면 연인 사이에 혼자 있는 집에 초대한다는 것부터가 무언가 은근한 것인데, 지난번에 윤정신 집에 놀러 갔을 때 너무 아무 일도 없었어서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을 못했다.

“다른 짓 안 할게. 키스만.”

“나……, 나 근데 처음인데.”

“처음이 나면 안 돼?”

윤정신이 제법 애절하게 조르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그의 얼굴이 천천히 다시 다가왔고, 나는 마음속에서 위험한 호기심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어김없이 혀가 쑥 들어오고, 그는 깃발부터 꽂겠다는 심산인지 바로 혀를 마구 얽어 댔다. 나는 무르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철렁했다.

윤정신은 이미 심취한 듯 허기진 짐승처럼 입을 겹쳐 왔다. 다른 짓은 안 하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슬그머니 그의 손이 내 티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잡고 있던 그의 팔을 꽉 쥐었다. 그때 의자가 뒤로 휘청였고, 윤정신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떼고 넘어가려는 의자를 잡았다. 나도 놀라서 사레가 들렸다.

윤정신이 괜찮다는 듯, 내 등을 토닥거렸다.

“혹시 배고파?”

“그, 글쎄…….”

“많이 고픈 거 아니면 방으로 갈래?”

나는 꽤 직접적인 그 말에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이러려고 부른 거 아니었는데? 윤정신이 진지하게 이런 짓을 한 적이 없었어서 당황스러웠다.

“저기, 오해한 거 같은데. 난 이러려고 부른 건 아니었어…….”

“나도 이러려고 온 거 아닌데. 아무튼, 이렇게 됐으니까.”

“……방으로 가면, 그거 하는 거야?”

“꼭 안 하더라도……. 안 돼?”

“나 넣는 건 무서운데……. 그리고 너무 갑작스럽고, 나 그냥 이런 상황이 좀…….”

그래, 무섭다. 분명 무섭고 두려운데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얼마나 기분이 좋기에 다들 그토록 찬양하는지.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오만가지 걱정이 머릿속을 스치고 갔다. 한 번 자고 나면 이미 잡은 물고기라고 미끼 안 주는 쓰레기들도 있다던데. 아니, 근데 윤정신이 그럴 리는 없겠고, 당연히 책임이야 지겠지만…….

아니야. 확신할 수 있나? 솔직히 윤정신이 날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잘해 준 것도, 잘난 것도 아닌데. 애초에 이런 목적으로 다가왔던 거면 어떡하지? 설령 책임져 준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 같고……. 애초에 좋아서 사귄 게 아니잖아, 나는.

그리고 다른 거 다 차치하고서, 아프면 어떡하지? 남자끼리는 뒤로 한다던데 그게 가능한 건가? 나중에 흥분한 거 가라앉고 현타 오면 어떡하지? 되게 후회할 것 같은데. 얘랑 그런 짓 하고 뻔뻔하게 계속 얼굴 볼 수 있을까…….

멍하니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방 침대 위였다.

윤정신이 내 위로 몸을 겹치며 올라탔다. 그가 내 뒤통수에 한 손을 받친 채 다시 키스를 시작했다. 그의 다른 손은 분주하게 내 파자마 단추를 풀고 있었다. 윤정신은 내 맨살이 드러나자마자 목표를 바꾸어 내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아, 윽. 잠깐만……. 느낌이 이상해.”

“아……. 자기야, 내 것 좀 만져 줘. 나 진짜 못 참겠어.”

그의 앞섶이 불룩했다. 윤정신이 다급히 퍼스너를 내리고 바지와 팬티를 살짝 내리자, 외면하고 싶은 그의 신체 부위가 꺼덕거리며 존재를 과시했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잡아끌어 제 아래로 가져간 채, 그 위로 제 손을 포개서 반쯤은 자위인 행위를 시작했다.

나는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핏줄이 돋은 생생한 그 물체의 감촉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미친! 내가 지금 뭘 만지고 있는 거야?

“아윽, 하……. 자기야, 나 이것 좀…….”

내가 움칠거리며 손에 살짝 힘을 주자, 윤정신이 내 어깨에 손을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 다시 조심스럽게 손바닥 아래의 살덩어리를 아까 그가 했던 것처럼 쓸었다. 윤정신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까보단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좀 더 대담하게 그의 것을 애무했다. 끙끙거리며 앓던 윤정신은 곧 제 것을 쥐고 있는 내 손을 구멍 삼아 허공에 피스톤질을 했다. 내 몸에 그의 귀두 끝이 부딪히며 미끈하게 마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신이 사정을 했고, 그의 정액은 내 상체와 바지 위로 흩뿌려졌다. 윤정신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게 몸을 기댔다. 그는 사정의 여운을 조금 즐기는 듯하다가, 곧 자연스럽게 내 바지를 속옷과 함께 끌어 내렸다.

나는 황급히 옷을 잡았다.

“안 돼!”

“나만 좋으면 미안하잖아. 나도 해 줄게.”

“괘, 괜찮아.”

“그럼 빨아 줄까? 기분 좋게 해 줄게.”

말릴 새도 없이 내 바지를 끌어 내린 윤정신이 조금 일어서 있던 내 중심부를 제 혀 위로 얹었다. 나는 따뜻하고 축축한 점막이 예민한 그곳을 감싸는 느낌에, 부끄럽지만 너무도 느껴 버렸다. 괴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정신은 내 허벅지 사이 은밀한 곳에 머리를 파묻은 채 야시시한, 꿀쩍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그곳을 빨고 있었다. 허벅지가 움칠움칠 떨렸다. 몸을 비틀며 이 이상한 감각을 참아 보려 했는데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나는 사정감이 밀려와 그에게 반쯤 애원하며 말했다.

“아, 형, 잠깐만……. 아…….”

그는 흘깃 내 얼굴을 살피고는 계속 애무를 이어 갔다.

“형, 나 나올 것 같은데…….”

불안해졌다. 이러다 진짜 나올 것 같은데. 머릿속이 이글거리는 열기로 다 녹아내리는 것 같다.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 윤정신의 머리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그렇게 해 줄 용의가 없는지 내 손목을 꽉 잡아 그를 저지했다. 나는 결국 그의 입안에 사정했다.

“아윽.”

엄청난 쾌락이었다. 손으로 자위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몽롱해지고 기분이 좋은 것도 잠시, 곧 창피함이 밀려들었다. 그걸 못 참아서……. 이럴까 봐 그만하라고 한 건데.

더럽다고 생각했을까? 나는 힐끔 시선을 들어 윤정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입안의 정액을 뱉어 내고 뻔뻔스럽게 말했다.

“나도 빨아 줘.”

아깐 내가 만져 줘서 빨아 주는 거라며! 계산이 왜 이렇게 돼?

윤정신이 내 뒤통수를 살짝 잡아당겼다. 점점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아까 그의 입안에 싸 버린 게 미안해서, 결국 나는 조심스럽게 어느덧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그 거대한 것을 입에 물었다. 턱이 뻐근할 정도로 입을 벌리자, 겨우 반쯤 머금을 수 있었다. 나는 결국 그것을 뱉어 냈다.

“……나 턱 아파. 못할 거 같아.”

“나 그럼 뒤에 넣어도 돼?”

왜 말이 그렇게 되지?

윤정신이 조급한 투로 물었다.

“잘 풀어 줄게. 별로 안 아플 거야. 응?”

“……그건 좀…….”

“제발, 소원이야. 나 진짜 너랑 하고 싶어서 그래. 안 돼?”

안 되는데……. 분명히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거절 못하고 그렇게 우물쭈물 있다가, 나는 그를 다리 사이까지 들여 버렸다.

미쳤지, 내가. 윤정신이 젤을 대신할 것을 찾는 게 보였다. ……이제 모르겠다. 나는 윤정신을 믿어 보기로 했다.

“미안.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젤 사 왔을 텐데. 그래도 괜찮을 거야. 잠깐만, 다리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좁은 구멍을 파고 들어오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불편하고 뻐근한 그 감각이 익숙해질 때 즈음, 손가락은 하나씩 늘어 갔고, 손가락이 네 개가 되었을 때 다음 순서는…….

“아윽.”

“잠깐만……. 아파?”

“아파……. 형, 잠깐만. 아윽. 넣지 마…….”

윤정신이 진입시키려던 귀두를 빼고 구멍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들락거리던 손가락이 안을 조금 휘젓는 것 같다 싶더니, 드디어 스팟을 찾아냈다.

“하윽. 아!”

그도 더는 참을 수 없는 듯, 로션으로 번들거리는 제 귀두를 내 구멍에 조금 비비적거리다가 음경의 반절 정도를 쑥 밀어 넣었다. 윤정신은 내 비명을 무시하며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고는, 귀두로 스팟을 긁듯이 자극하며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푹,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성기가 내 구멍을 아슬하게 벌린 채 그 속을 드나들고 있었다. 이 강아지 새끼, 기어코 여기까지 영역 표시를…….

머리가 새하얘지는 쾌락을 몇 번 경험한 후에야 윤정신은 내 안에 사정하며 정액을 쏟아 내었다. 이제 끝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지며 나는 탈진해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내 뒷구멍에 처박혀 있는 윤정신의 성기는 착실하게 다시 크기를 키워 가고 있었다.

“형, 나 더는 안 돼……. 하아.”

“한 번만. 응?”

그가 축 늘어져 있던 내 몸을 안아 올렸다. 윤정신은 나를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 내 엉덩이를 꾹 내려 아주 깊은 곳까지 제 음경을 밀어 넣었다.

생소한 깊이까지 그것이 느껴졌다. 나는 윤정신의 목에 팔을 둘러 안고 얼굴을 그의 어깨에 묻었다. 윤정신이 천천히 아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사정해서 감각이 예민했다.

“으응……. 이, 이상한데……. 아……, 읏……, 하.”

“후……. 자기야, 너무 좋아……. 윽…….”

이미 안에 사정을 한 번 해서, 정액과 쿠퍼액이 윤활제 역할을 했다. 천천히 움직이며 안을 들어왔다 나갔다 하던 그가 일순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 바람에 안을 채우고 있던 그의 성기가 내벽을 비비며 빠져나갔고,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꾸물거리며 조금 흘러나왔다.

벽에 날 밀어붙인 윤정신은, 선 채로 다시 성기를 삽입했다. 나는 공중에 뜬 부유감이 무서운 한편, 구멍을 가로지르고 들어 온 성기에 큰 자극을 받았다. 나는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고 팔로는 어깨를 꼭 잡았다. 윤정신이 탄력 있게 아래를 박아 올렸다. 

결국, 나는 이성의 끈을 놓았다.

* * *

“헉.”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지나간 후였다. 나는 감기려던 눈을 퍼뜩 뜨고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그러니까, 내가 초밥 먹으려다 말고 윤정신과 그렇고 그런 짓을……. 정말 뭐에 홀렸던 거 아냐? 윤정신이 페로몬 향수를 쓴 거였다든지, 아니면 몰래 나한테 약물을 주입했다거나…….

욕실에서 그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기절하고 윤정신이 씻긴 건지 보송해진 맨몸을 옷으로 가렸다.

……미쳤지, 진짜 미쳤지. 이제 윤정신 얼굴은 어떻게 봐? 이틀 뒤에는 어떻게 해? 첫 경험이 남자라니……. 아무리 내가 양성애자라 해도, 심지어 사귄다기도 모호한 남자랑? 아래에서 올라오는 찌릿찌릿한 통증만이 모든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래, 죽어도 먹고 죽어야지. 

나는 우선 허기짐부터 해결하자는 생각으로 그가 사 온 초밥을 꺼냈다. 장에 와사비를 풀어 초밥을 찍어 먹고 있는데, 윤정신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감싸며 욕실에서 나왔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노려보자, 윤정신이 당황하며 쭈뼛거렸다.

“……왜?”

“빨리 이리로 와 봐. 나 지금 심각해.”

“뭐가?”

윤정신이 식탁 앞으로 와 의자 하나를 빼 앉았다.

“어쩔 거야?”

“뭘?”

“미친. 어쩔 거야? 왜 나 부추겼어? 네가 형인데 말렸어야지!”

“내가 왜? 난 하고 싶은 입장인데.”

“씨. 어떡해! 내 인생 어떡해! 윤정신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질 나쁘다. 스시 먹자며!”

내가 발로 그의 다리를 마구 차며 신경질을 내자, 윤정신이 슬그머니 꼬리를 말았다.

“아니……. 잠옷 보니까 괜히 기분이 좀 그래서. 아, 때리지 마, 아파. 책임지면 되잖아, 안 그래?”

“어떻게 책임질 건데?”

“데리고 살아야지.”

“아, 그게 뭐가 책임이야!”

내가 젓가락을 던지며 식탁 위로 엎어지자, 윤정신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집어 초밥 하나를 건넸다.

“일단 이거 먹고 진정 좀 해 봐.”

하필 내가 좋아하는 연어 초밥이었다.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나는 심란한 와중에 초밥을 받아먹었다. 애초에 윤정신을 집에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믿을 만한 놈이 아닌데 방심했다.

“근데 진짜 어쩌지?”

“뭘 자꾸 어쩌지야? 누가 보면 너 전 재산 잃은 줄 알겠다.”

“동정을 잃었잖아!”

“그게 의미가 있어? 한 번 잤다고 뭐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진화해?”

“의미 있어. 완전 있어.”

기분상의 문제란 말이야. 나는 굉장히 시무룩해졌다. 윤정신도 내가 너무 싫어하니 기분이 조금 상한 것 같았다.

“첫 상대가 나라서 싫은 거야?”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던 게 문제야. 상대가 너라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좀 경솔했네. 난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어.”

“형이 싫은 것도 아니고 형이랑 한 게 싫은 것도 아닌데. 아, 그냥 지금 한 게 좀 아니었어. 난 좀 더 관계가 확고해지면 그걸 바탕으로……. 하.”

나는 식탁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윤정신이 내 이마 아래에 제 손바닥을 받치며 저지했다.

“그만해, 멍들어.”

“나 진짜 쓰레기 된 것 같아. 의지도 없고, 자제심도 없고, 충동적이고……. 이러다 나중에 후회할 일 많아져서 우울증 오고 그러면 어떡하지? ……미안, 짜증 내서. 근데 진짜 그렇게라도 안 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안 그래……. 내가 미안. 그냥 내 탓해. 근데 그렇게 별로였어?”

“……묻지 마, 그런 거. 나 진짜 쪽팔려서 자살할 수도 있어.”

윤정신이 작게 웃으며 다시 초밥 하나를 집어 주었다. 윤정신한테는 별일도 아니었나 보다.

“형은 아무 생각 없어? 하다못해 기쁘다든지.”

“죽여줬지.”

“안 그래 보이는데?”

“좋아하면 눈치 없다고 때릴 거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하아, 이제 어쩐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가, 다시 윤정신을 보았다.

완강하게 거절 못한 내 잘못인 걸까? 난 정말 하고 싶었던 걸까? 찝찝했다. 윤정신이 너무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까지 모두 나를 의심과 불안의 소굴로 밀어 넣는 것 같았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며 윤정신에게 물었다.

“한 달이었잖아. 이제 다 끝나 가고.”

“응?”

“어쩔 거야? 우리 계속 만나?”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윤정신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한 달 끝나는 날에 내가 너랑 계속 사귈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거지? 안 사귀겠다고 하면 다시 네가 일방적으로 구애하게 되는 거고?”

“전자는 맞고, 후자는 내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는 거고.”

“뭔데, 그 말? 이제 나 질려 간다는 소리로 들려.”

“설마. 한창인데……. 그러는 게 너한테 민폐인 건 사실이잖아? 어떻게 보면 내 감정 강요하는 건데. 너무 부담스럽게 안 하려고.”

“나 사실 차려고 했거든. 근데 이렇게 되니까 좀 고민돼. 시간 좀 더 주면 안 돼?”

“싫어. 궁금한 거 잘 못 참아.”

“그럼 며칠 뒤에 차일래?”

“얼마나 줄까? 1주? 2주? 아니면 한 달 더?”

진작 그럴 것이지 튕기긴 왜 튕기는지. 그러게,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한 달은 좀 길고……. 생각 정리되는 대로 답 줄게. 그때까진 지금처럼 지내자.”

“알겠어. 천천히 생각해.”

고민이다. 윤정신을 막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헤어지긴 싫다. 계륵 같은 존재인가? 나 지금 좀 쓰레기 같은 짓 하는 건가……. 갖기는 싫은데 남 주기도 싫은, 뭐 그런……. 아무튼 저쪽은 진심이라는데 말이다. 너무 내가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

“뭐가?”

“그냥. 자꾸 내 기분대로 해서. 솔직히 형이 아쉬울 것도 없는데.”

“아쉬울 게 왜 없냐?”

“그렇잖아, 솔직히. 아무튼, 미안. 이제부턴 나도 더 진지해질게.”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윤정신도 새끼손가락을 내밀어서 고리를 걸었다.

후회할 선택만 하지 말자……. 일단은 결정을 유예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 * *

윤정신은 점심 식사 때까지 뻐기다가, 결국 형이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척하고 한 번 돌아와서 마카롱을 주고 가긴 했는데 내가 금방 쫓아 버렸다. 그래도 그 센스 하나는 참 대견했다.

고급스러운 포장은 늘 사람을 설레게 한다. 나는 조심조심 마카롱을 꺼내서 먹기 전에 사진을 찍어 그에게 보냈다.

[마카롱 잘 먹을게]

[(사진)]

[ㅎㅎ 맛있다]

[윤정신: 그거 비싼 거야]

[윤정신: 입에 맞아서 다행이네 ㅋ]

[ㅋ 하나 보내는 거 되게 재수 없다]

[윤정신: 다행이네*^^*~~ㅋㅋㅋ]

[ㅋㅋㅋㅋㅋ 더 재수 없어진 거 같은데?]

[윤정신: 다행이네ㅠㅠ]

[ㅇㅋ 겸손하다]

[윤정신: ㅎㅎ아싸!]

[윤정신: .....]

[ㅋㅋㅋㅋㅋㅋㅋ 방금 나한테 좀 정색한 거 같았는데?]

[윤정신: ㅅㅁㅇ~~~?*^^*]

[오 이젠 대충 초성으로 보내고?]

[윤정신: ㅋㅋㅋㅋㅋ 전화 가능?]

[ㄷㄷ 진짜 좀 빡친 거 같은데?]

[윤정신: 아니요 자기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ㅠㅠ]

[거짓말 걍 타자 치는 거 귀찮아서 전화가 더 편해 가지구 그런 거자나]

[윤정신: 헉~~;;; 눈치백단^^~~]

[윤정신: 그래도 전화하자]

[나 형 있어서 안 돼]

[윤정신: 아...ㅎ 너희 형 공부 안 해?]

[ㅋㅋㅋㅋㅋ 왜 우리 형 구박해]

[윤정신: 아니 그냥 좀 화 나서^^;;;; 신경 쓰지 마ㅎㅎ;]

[같이 던전 돌까]

[윤정신: ㅇㅇ 일단 나 옷 좀 갈아입고]

[윤정신: 좀만 기다려 자기얌 ㅎㅎ]

[ㅎㅎ]

[ㅇ]

[윤정신: ♡]

[♡♡♡♡♡]

[윤정신: 헉... 심쿵...]

[5개나 줬어염 ㅋㅋ]

[윤정신: ㅎㅎ감사해염]

[윤정신: (이모티콘)]

나는 기다리는 동안 친구 창을 둘러보았다.

버찌는 없네. 웬일로 심현지도 없고? 쭉쭉 스크롤을 내리다 거슬리는 닉네임을 하나 보았다.

[토라> 자기 나 왔뗘염 뿌우]

[청혼> ??? 귀척하지 마세요...;;]

[토라> ㅋㅋ]

[토라> ㅈㄴ쪽팔]

[토라> 우기 갈수록 잔인해지네]

나는 토라의 위치를 확인했다.

[검은 포자 숲 13]? 또 사냥터에서 바로 껐었나 보네. 그리고 방금 스크롤 내리다 본 미미 누나의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검은 포자 숲 10]…….

[청혼> 형 빨리 이리로 워프 와봐]

[토라> 잠시만]

[청혼> 아 빨리]

[청혼> 빨리빨리 ㅠ]

[토라> ㅋㅋㅋ 진짜 잠시만]

[청혼> ㅡㅡ 아 빨리 지금]

[토라> 왜? 무슨 일 있어? 일단 말로 해봐]

[청혼> 지금 뭐하는데?]

[토라> 누가 뭐 물어봐서]

[청혼> 뭐라고?]

[토라> ㅋㅋㅋ별거 아님 일단 던전 입장 필드 있어봐 금방 갈게]

아, 진짜! 왜 안 와? 왜!

나는 짜증이 났다. 보나 마나 미미 누나가 붙들고 있을 게 뻔했다. 내가 부르는데 왜 그걸 얌전히 잡혀 있는 거야?

[청혼> 나 삐친다]

[토라> 왜??]

[토라> 무슨 일인데 그래? 많이 심각해?]

[청혼> 와서 보면 알잖아]

[청혼> 왜 내가 부르는데 안 와]

[청혼> 벌써 변했다]

[토라> ㅋㅋㅋ알겠어 갈게갈게;]

[청혼> 됐어 오지 마]

[토라> 아 왜 ㅠㅠ 미미가 찾아와서 대답 좀 해주느라 그랬어]

[청혼> 난 그 누나 싫어ㅡㅡ]

[청혼> 왜 내 말 안 듣고 그 사람만 챙겨?]

[토라> ㅋㅋㅋ자기 설마 질투?]

[토라> 미미랑 전혀 그런 사이 아닌데...?]

[청혼> 머가 아니야 형 좋아하는 거 같던데]

[토라> 야 설마 ㅋㅋㅋ 내가 너랑 사귀는 거 아는데?]

[토라> 게인데 왜 좋아해]

[청혼> 그 누나가 레즈인 거도 아닌데 무슨 상관임]

[청혼> 암튼 형 짜증나 ㅗ]

[토라> 아 왜애]

[토라> 던전 같이 하기로 했잖아]

[청혼> 형이 오라는데 안 왔잖아ㅡㅡ]

[토라> 지금 갈게 ㅠㅠ 미미 버리고 갈게]

[토라> 매몰차게 버리고 갈게]

[청혼> 딱 30초만 기다린다]

[토라> 알겠어 귀욤둥이야ㅎㅎ 질투하지 말구]

[토라> 내가 미미 친삭하면 너 버찌 친삭+번호삭제 가능?]

[청혼> 15초 지났어]

으름장을 놓은 게 효과가 있었는지, 윤정신의 캐릭터가 순식간에 내 옆으로 왔다.

[토라> ㅎㅎ나 왔어]

[청혼> ㅎㅎ]

[토라> 자기 근데 왜 내 말에 대답 못 해]

[토라> 나 지금 미미 친삭한다?]

[청혼> 우정을 소중히 좀 여겨 형 그렇게 의리 없이 살지 말고]

[토라> ㅋㅋㅋ뭔데]

[토라> 이서진 지금 죽이러 간다]

[청혼> ㅋㅋㅋㅋㅋㅋㅋ]

[토라> ㅇ농담 아님 담에 만나면 죽빵 갈겨놓으려고 ㅎㅎ]

[청혼> 헐 ㅎ 내 죽빵도 아니고?]

[토라> 널 어케 때려]

[토라> 걔만 없어지면 되는데 뭐^^]

[토라> 원수 새끼 내 인생에 방해만 되고]

[청혼> 형이 잊은 게 있는데]

[청혼> 난 원래 버찌 친구였고 형은 버찌 통해서 소개 받았던 거야;]

[토라> 아 맞네 ㅎㅎ]

[토라> 은인이었네 ㅎㅎ 그래도 싫어 ㅅㅂ]

[청혼> 파티 받아]

윤정신은 파티 신청을 받고 던전을 깨면서도 집요하게 그 이야기를 물고 늘어졌다.

(토라: ㅋㅋㅋ야 솔직히 대답해 봐)

(토라: 나랑 걔 중에 누가 더 좋아)

(청혼: 아 그만해 좀)

(청혼: 어차피 그 형도 나 안 좋아해 나 혼자 좋니 마니 하는 거도 웃기다니까)

(토라: 안 좋아해서 아쉬운 거 아니지?)

(토라: 그냥 네 생각만 말하면 되잖아 누군데)

(청혼: 서진이 형이겠음?)

(청혼: 최근에 연락도 안 했어)

(토라: 그래서 나라고?)

(청혼: ㅋㅋ솔직히 형이지)

(청혼: 둘 중 고르자면; 아오 됐냐)

(토라: ㅎㅎ웅)

(토라: 기프티콘 쏴줄까?♡♡♡)

(청혼: 형이나 먹어)

(토라: 응...^^ㅠ)

(토라: 고맙네 나 밥 먹는 거 걱정해주고)

(청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혼: 그래 그거 맞다ㅎㅎ)

(토라: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구나)

윤정신과 채팅 하며 설렁설렁하다 보니, 순식간에 하위 던전 돌이가 끝났다. 나는 던전을 나와 마을에 의자를 깔고 윤정신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미미: ㅡㅡ윤정신]

[토라: 어잉??]

[미미: 왜 내 말 씹음?]

미니 맵 포탈 위로 유저 표시가 뜬다 했더니 미미 누나가 또 윤정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토라: 미미 나 데이트 중이잖아 분위기 읽자]

[청혼: ㅋㅋ]

[토라: 오붓하게 둘만 있고 싶다]

[미미: 아 그래 미안 눈치 없어서]

미미 누나가 기분이 상한 듯 그렇게 말했고, 한순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나는 누나가 섭섭해하는 이 상황 자체가 납득이 안 됐다. 일전에 나한텐 윤정신이랑 전혀 그런 사이 아니라고 오해하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청혼: 엥ㅋ 왜 상황이 치정극처럼 흘러가지]

[청혼: 누나 근데 눈치 없는 거 아시네요 ㅋㅋ]

[청혼: 그럼 저 일부러 엿 먹이는 거예요?]

[미미: 내가 뭘?]

[청혼: ㅋㅋ누나 지금 하는 말들이]

[청혼: 윤정신 좋아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아니에요?]

[미미: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 자꾸 말 무시하는 거고]

[청혼: 솔직히 제가 쪽팔린 거랑 제 겜생 지장 갈 거 감수하고 사귀는 사이라고 말까지 했는데]

[청혼: 굳이 자꾸 본인이 애인 행세하고 저는 방해꾼 된 기분 느끼게 하는 이유가 뭔데요?]

[청혼: ㄹㅇ 누나 섭 이전해서 친구 없어서요? 그래서 일부러 친구까지 소개해 줬는데 ㅅㅂ 뭘 더 하라는 건지]

[청혼: 얘가 제 애인이지 누나 보모 아닌데 ㅋㅋ 왜 자꾸 저랑 있고 싶다는데 와서 이러냐고요ㅋㅋ]

오가는 사람이 없는 마을인 게 다행이었다. 사람 많은 곳에서 이런 대화했으면 박제되기 딱 좋다. 내가 하는 채팅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윤정신이 내게 슬그머니 귓속말을 했다.

[토라> 우기야 말 너무 날카롭게 하지 마]

[토라> 멘탈 약하잖아 알지?]

[토라> 왜 싸우고 그러냐 네가 참아]

[청혼> 어]

한참 말이 없던 미미 누나는, 마음을 추스르는 건지 꽤 오랜 정적 뒤에야 채팅을 쳤다.

[미미: 진짜 얘한테 그런 감정은 전혀 없고]

[미미: 네가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봐 미안]

[토라: 미미 너무 마음 쓰지 마]

[토라: 울 자기가 오늘 기분 안 좋아서 그래]

[토라: 속상하다고 울지 말고]

[미미: 그래 ㅎㅎ 둘이 재밌게 놀아]

나는 순간 화가 나서 쏘아붙여 놓고도 괜한 화풀이를 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실수한 건가? 솔직히 저렇게 시무룩해서 가는 걸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토라: 기분 많이 나빴어?]

[청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청혼: 걍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어서 좀]

[청혼: 잠깐 그랬어]

[토라: ㅋㅋㅋㅋㅋ내가 잘해줘서 그냥 좀 의지하나봐]

[토라: 다른 의미는 없을 거야]

[토라: 넘 미워하지 마 외로워서 그래]

[청혼: 내가 좀 오버했던 거 같아]

[토라: 미안하다 이 형이 마성의 남자라서]

[청혼: 사과할까?]

[토라: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는 거지만 나는 하는 걸 권유해]

[토라: 자기도 마음 쓰여서 묻는 거자나]

[토라: 나도 이서진 가끔 짜증나서 너가 무슨 마음인진 이해해]

[청혼: 아 그놈의 이서진 진짜]

[토라: ㅋㅋㅋ니가 결백한 만큼 우리도 결백함]

……하.

아무튼,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내가 해결을 봐야겠지. 나는 친구 창을 열어 미미 누나의 위치를 확인했다. 누나는 사냥터에 있는 듯하더니 로그아웃을 해 버렸다.

[청혼: 형 미미 누나 연락처 알아?]

[토라: 알지만...ㅋ 어케 알려줘 그걸]

[청혼: 아니 나 사과하게]

[토라: 1. 개인 정보라서 2. 그냥 내가 싫음 이상의 이유로 거절함]

[청혼: 웃기지 말고 누나한테 내가 사과하고 싶은데 연락할 수 있냐고 물어바 형 지금]

[토라: 2번이... 해결이... 안 되는데...... 자기야....]

[청혼: 형 나 지금 징짜 기분 별로야]

[청혼: 나 사과하고 겜 끄고 좀 쉬게 빨리 알려줘]

[토라: ㅠㅠ 카톡으로 보내줄게 그럼]

[토라: 지금 가서 좀 누워있어]

[청혼: ㄱㅅ]

[청혼: 나중에 전화할게]

[토라: ~~~]

나는 게임을 끄고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윤정신이 보낸 카톡을 확인했다.

미미 누나의 카톡 프로필이었다.

나는 누나에게 아까는 내가 오해해서 감정적으로 군 것 같고 경솔했다고, 내 행동을 후회하고 누나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을 매우 장황하게 풀어 보냈고, 다행히 미미 누나는 따뜻하게 나를 용서해 주었다.

[최윤정: 나도 오해하게 만든 거 미안하고 앞으로는 행동 주의하도록 할게 ㅎㅎ 기분 나쁘게 해서 미안하고 먼저 사과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내가 몇 살 더 먹었으니까 더 의젓하게 굴어야 했는데 너한테 너무 무능력한 모습만 보인 것 같네^.ㅠ]

[최윤정: 내가 성격이 많이 소심해서 친구를 게임에서 주로 사귀었는데 최근에 걔네랑도 오해 때문에 좀 심하게 다퉈서... 남은 친구가 쟤밖에 없더라고ㅎㅎ...]

[최윤정: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무 집착했나 봐 근데 정말 다른 마음이 있다거나 너한테 나쁜 감정을 품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ㅠㅠ 난 네가 친구도 소개해주고 해서 되게 고마웠는데... 미안해 오해하게 해서]

[ㄴㄴ 제가 싸가지가 없었어요... 괜히 화풀이한 거 같아서 죄송해요]

[윤정신이 뭐라고]

[최윤정: ㅋㅋㅋㅋㅋ 너의 사랑스러운 자기잖아 ㅎㅎ]

[ㅋㅋㅋ 그건 아닌데요 사실]

[저 좀 오징어 지킴이 같았죠]

[최윤정: ㅋㅋㅋ그런 건 아닌데 나 직장에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서]

[최윤정: 정말 걱정 안 해도 돼^^; 나는 조용한 남자 좋아해서]

[누나 그게 진국이에요]

[남자들이 좋다고 하는 애들은 그냥 믿고 거르고]

[제가 잘못한 거 있으니까 연애상담 해드릴게요 다음에]

[최윤정: 아니야 그냥 짝사랑이라서 ㅠㅠㅠ 고백은 안 하려구]

[최윤정: 아무튼 고마워 ㅎㅎ]

[누나 심심할 때 불러 주시면 언제든 가서 노예 할게요 앞으로]

[최윤정: ㅋㅋㅋㅋㅋㅋ그래]

[ㅋㅋㅎㅠ]

[누나 근데 진짜 남자 아무나 좋아하지 말고 너무 잘해주지도 마요 진짜 쓰레기 천국]

[사고방식 저질인 애들 많아서]

[최윤정: ㅠㅠ그래]

[최윤정: 너도 윤정신 같은 애 만나지 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최윤정: 걔는 애가 너무 문란해]

[왜요?? 그래도 윤정신은 사고방식은 노멀한 편 아니에요?]

[최윤정: 음ㅋㅋㅋ 그렇긴 하지 농담이야]

[최윤정: 본심은 착한 거 같아ㅋㅋㅋ 표현이 가끔 거칠어서 그렇지]

마냥 농담은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직감 같은 거였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스멀스멀 윤정신을 향한 불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누나 뭐 아는 거 있어요?]

[최윤정: 어...]

[최윤정: 이런 얘기 하니까 뒷얘기 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ㅋㅋㅋ]

[최윤정: 정신이는 평소에는 상식적인데]

[최윤정: 좀 그렇잖아 그게]

역시나 뭐가 있는 거다.

나는 좀 더 캐물었다.

[저 뭐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최윤정: 그, 취향이 좀...ㅋㅋㅋ 그렇지 않나?]

[게이라서요?]

[최윤정: 아니 그런 게 아니랑]

[최윤정: 너는 몰라??]

[최윤정: 걔 좀 이상한 거 좋아하잖아]

[이상한 거 뭐요? 저 몰라요 아무 것도]

[최윤정: 내가 이런 소리 했다고 하지 말아줘 ㅋㅋㅋㅋ큐ㅠ 사귀는 사이니까 너도 아는 줄 알고 말 꺼낸 건데...]

[최윤정: 넌 아직 어려서 걱정 되니까 그냥 얘기할게]

[최윤정: 진짜 윤정신한테 내 얘기하면 안대 ㅠ... 나 쟤한테 욕먹어]

[안 할게요]

[최윤정: 근데 막 되게 이상한 건 아니야]

[최윤정: 걍 개인 취향인 거고... 나쁘고 뭐 그런 건 아닌데 난 좀 ??? 했거든]

[최윤정: 아 근데 역시 내가 이야기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최윤정: 내가 더 말하면 좀 오지랖 같고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ㅠㅠ 걔가 혹시 그런 부탁해도 네가 싫으면 무리 안 했음 좋겠어]

[최윤정: 걔가 보수적인 건 확실히 아니잖아 그건 너도 알지?]

그렇지……. 솔직히 기대하는 게 좀 이상할 정도로. 윤정신이 전 애인들 가볍게 만났던 것도, 이런 쪽으로 굉장히 개방적인 것도 알고 있었다.

[최윤정: 그냥 걔한테 휩쓸려서 하기 싫은데 하고 그런 건 안 하면 좋겠어ㅠ 당연히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최윤정: 사실 취향 그거는ㅋㅋㅋ 막상 뭔지 들으면 내가 좀 오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최윤정: 솔직히 내가 이러는 거 오지랖이긴 해]

[최윤정: 근데 그냥 나 첫 애인 만날 때 겹쳐 보여서 그랬어 그때 누가 조언해 줬었다면 그런 사람 안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싶어서...]

그 말을 듣자, 이어 지난번에 윤정신이 했던 전 애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떠올랐다. 하긴, 진지하게 만난 적 없다고 했지. 밝히는 것도 사실이고. 누나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대충 어떤 생각에서 하는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아...ㅇㅋ]

[누나 저 또 연락할게요]

[최윤정: 그래 ㅎㅎ]

[최윤정: 근데 이건 정말 내 생각일 뿐이니까 난 네가 정신이랑 진지하게 대화해 봤으면 좋겠어 네가 진지하게 만나는 거라면]

[최윤정: 미안해 갑자기 이런 얘기 해서ㅠ 당황했겠다]

[ㄴㄴㄴㄴㄴ 감사해요 얘기해볼게요]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또 무슨 폭탄이지? 치정극이 순식간에 추리극으로 변해 버렸다. 윤정신, 대체 뭘 좋아하기에? 전 애인들이랑 나는 다르다고 하긴 했으니 그 부분은 미미 누나의 오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 터질 일 있나. 그것까지 의심하게 되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서진의 이름 위에 엄지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결국 나는 꾹, 전화기 모양을 눌렀다.

[여보세요?]

* * *

[아, 난 또 뭐라고. 그 얘기 누가 했어?]

“그 사람이 비밀로 해 달라고 했어서. 형도 내가 이거 물어본 거 티 내면 안 돼.”

[어……. 음……. 나도 윤정신 허락도 없이 막 말하긴 좀 그런데.]

“뭔데? 그렇게 심각해? 별거 없는 거 같았는데…….”

[아. 어, 음……. 심각한 건가? 그냥 정신이한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때? 내가 말했다고 해도 되니까.]

“그럼 형 때리러 갈 거 같은데.”

[한 대 맞지, 뭐. 그러고 고소하면 돼.]

“윤정신이 알려 줄까? 순순히?”

[다 안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불어야지. 속이는 놈이 양심 없는 건데.]

뭐기에? 뭔데? 이쯤 되니 두려운 것보다 궁금함 때문에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곧장 윤정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꽤 오래 이어지다가 끝자락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 자기야.]

“뭐 해?”

[씻고 있었어. 페이스 타임 할래?]

“미친……. 너 몸뚱이 닦고 나와 봐. 전화해, 다시.”

[어? 무슨 일 있어?]

“완전 있어.”

[알겠어, 잠시만.]

전화를 끊은 윤정신이 조금 뒤에 전화를 걸었다.

“윤정신.”

[……응?]

“너 이상한 거 좋아하는 것 같던데.”

내가 그렇게 묻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런 반응은 처음인 것 같았다.

“대답하기 싫어?”

[어.]

“그래, 그럼. 전화 끊어도 되지?”

[아니.]

“그럼 네 입으로 직접 얘기해.”

그는 또 한참 말이 없다가 투덜거리듯 입을 뗐다.

[야, 근데 이거는 프라이버시잖아……. 내가 너한테 뭐 강요한 적 있어? 그런 거 안 했잖아. 앞으로도 안 그럴 거야. 이건 약속해.]

“그 프라이버시가 뭐냐고. 뭔데 자꾸 숨겨?”

[너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는데? 뭐 보고 묻는 거야?]

“본 거 없어. 몰라, 뭔지. 너한테 직접 들으라고 하길래 물어보는 거야.”

[아, 씨. 누가 얘기했구나? 누군데? 미미야?]

“아니. 서진이 형이.”

[걔가 갑자기 그 얘기를 너한테 했다고?]

윤정신의 목소리가 일순 굉장히 싸늘해졌다. 뭐지, 갑자기 왜 화를 내는데? 윤정신은 서진의 이름이 나오자 내 예상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넌 그래서 걔 얘기 듣고 지금 나한테 뭐라 하는 거고?]

“서진 형이 네 일이라서 함부로 얘기 못하겠다고 해서 너한테 물어보는 거야.”

[너 진짜 걔랑 뭐 있냐? 나 코스튬플레이 좋아한다, 왜? 너한테 내가 뭐 입어 달라고 조른 적 있냐? 없잖아. 이게 그렇게 궁금했냐? 내가 너한테 이상한 짓 할까 봐서?]

“왜 말을 그렇게 해.”

[빡치잖아, 씨발. 아……. 나 이따 전화할게. 이서진이랑 전화 좀 해야겠다.]

“왜 그래? 왜 화를 내? 화가 나도 내가 날 상황이잖아. 왜 형이 화를 내? 내가 뭘 어쨌는데? 내가 걱정돼서 그거 좀 물어본 게 그렇게 기분 상할 일이야? 형이 강요할 마음 없었다면, 이렇게 화낼 이유 더 없는 거잖아. 그냥 나는 궁금해서…….”

[이서진이 너한테 갑자기 그런 얘기 했다는 건 대놓고 너랑 나 사이 훼방 놓겠다는 거 아니냐? 그럼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심지어 너는 걔 말만 듣고 나한테 취조하듯이 묻는데, 내가 지금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냐고.]

“그냥 네 취향 독특하니까 조심하라고 알려 준 거밖에 없어.”

[그럼 걔 말대로 나 조심하는 게 맞았다고 생각하는 거네. 그래서 전화한 거 아냐? 내가 너한테 이상한 짓 시킬까 봐? 넌 그럼 걔 믿는 거냐, 나 믿는 거냐? 누가 봐도 이서진 믿고 있잖아. 너 같으면 빡이 안 치겠냐? 내가 너한테 그런 얘기 안 하고 티 안 냈다는 건 너한텐 안 그러겠다는 거잖아. 참을 거였다고.]

“내가 형 속마음까지 어떻게 알아? 나, 독심술 못해. 나는 형이 그런 취향 있는 줄도 몰랐는데 참고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잖아. 형이 평생 참을 거였다고 치자. 그럼 내가 계속 형 취향 몰랐으면, 형도 계속 숨겼겠네. 사실 참고 안 참고, 그딴 건 형 의지에만 달려 있는 거잖아. 내가 막을 방법이 있어? 난 이 관계에서 굉장히 수동적이 되는 거잖아. 형이 참을 거였으니까. 그냥 나는 몰라도 됐던 거지, 그치. 형, 이게 맞아? 형 멋대로 숨길 문제 아닌 거 같지 않아? 나도 알아야 했던 게 맞잖아. 왜 그거까지 부정해?”

[……넌 그냥 나 아예 안 믿고 있네. 너 왜 고민해 보겠다고 했냐? 그럴 것도 없네. 너 나한테 하나도 마음 안 넘어왔어. 그냥 그만하자. 이러는 거 너한테나 나한테나 낭비야.]

“너 쓰레기냐? 먹고 버린다고?”

[뭐가 먹버야? 나 계속 버리고 싶어 하는 건 너야.]

“실망하려고 그래. 그래서, 진짜 지금 끝내자고? 내가 너한테 네 이상하다는 취향 뭔지 물어봤다고?”

[그딴 게 문제가 아니고 네가 이서진한테 애매하게 구는 게 문제라고. 너 진짜 자신하냐? 이서진한테 진짜 아무 마음 없어?]

“어. 없는데?”

[그럼 정리해. 내가 확신할 수 있게.]

“뭘 더 어떻게? 사실 네 취향 다른 곳에서 알게 된 거고, 서진 형한테 자세하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고 연락했던 거야. 내가 먼저 물어봤다고.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우기야. 너는…… 지금 모르는 거야. 네 눈빛만 봐도 알아. 좋잖아, 이서진.]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아니, 그래. 맞다고 쳐. 그럼 너는? 내가 너한테는 아무 감정 없는 거 같냐?”

[…….]

“그냥 네가 질투하는 거잖아. 왜 자꾸 내 탓만 해? 내가 형 못 믿는다고? 그럼 형은 나 믿어? 그래, 나 솔직히 못 믿겠어. 너 나한테 진심인 거 맞는지 의심돼서 미치겠어. 확신? 넌 나한테 확신 줬어? 아니라고 믿어야 내가 편하니까 생각 깊게 안 하려고 했는데, 계속 의심되니까 마음 주는 것도 망설여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형이 나 가지고 노는 거 아닌지 계속 의심돼. 내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봐, 넌 나 이해 안 돼? 오늘 얼떨결에 네 부탁 거절 못하고, 나 평생 해 본 게 뽀뽀랑 손잡는 거뿐인데 오늘 너랑 끝까지 간 거란 말이야……. 근데 사람들은 너 조심하라 그러고, 넌 나한테 갑자기 화내고, 평소처럼 안 굴고, 심지어는 헤어지재. 넌 내가 지금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너는…….”

말하다 보니 설움이 복받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최대한 목소리는 가다듬고 싶었는데 내 능력 밖이었다. 누가 봐도 우는 목소리가 나와서 나는 그냥 숨기는 걸 포기했다.

“오늘 내가 얼마나 용기 냈던 건지 알기나 해? 너 내 생각하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거면 나 힘들었던 일은 왜 물어봤어? 하나도 배려 안 해 주고 있잖아. 내가 그때 싫다고, 이런 거 싫다고 했잖아. 넌 근데…… 왜 항상 네 욕심이 먼저야.”

[……미안. 울지 마.]

울지 말라는 그의 말에 외려 눈물이 더 터져 나왔다. 나는 침대 위에 수화기를 잠시 내려놓고 아예 오열하듯 울었다. 공부하던 형이 놀란 눈으로 달려와 방문을 기웃거려서, 나는 그냥 전화를 아예 끊어 버렸다.

“우기야, 왜 울어?”

“혀엉…….”

“왜? 응? 무슨 일인데?”

형은 아마 그때 일과 연관된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형, 나 애인하고 싸웠어. 뭔가 그렇게 말하기 어려워서, 나는 꿍얼거리며 대충 둘러댔다.

“친구가 이민 간대…….”

내가 그렇게 말하자 형은 약간 어이가 없는 눈치였다.

“아……. 난 또, 위험한 일 생긴 줄 알았잖아. 이민 간다고 평생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뭐. 너무 속상해하지 마. 맛있는 거 시켜 줄까?”

“아니……. 나 그냥 좀 혼자 있을게.”

“그래. 왜 울고 그래. 울지 말고.”

“으응.”

나는 울음을 그친 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 기껏 안정된 게 흐트러지지 않도록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 버리고 침대 아래에 던져두었다. 보송한 이불 안으로 들어가니 한결 마음이 차분해졌다.

정말 기분이 안 좋은 날이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애써 잠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좀 나아져 있길 바라면서.

* * *

다음 날에도 나는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게임도 켜지 않았다. 영화를 다운 받아 보면서 간식을 먹다가 기분이 꽤 나아진 저녁 즈음에야 게임에 접속했다.

[토라> .]

[토라> 우기야]

[토라> 전화좀받아봐]

접속하자마자 윤정신한테 귓속말이 왔다.

그를 보는데 화가 나지 않고 그저 무서웠다. 나는 조용히 토라 캐릭터를 차단했다. 버찌도 내게 전화를 했었는지 바로 귓속말이 왔다.

[버찌> 우기야 괜찮아?]

[청혼> 뭐가?]

[버찌> 윤정신이 너 싸우고 연락이 아예 안 된다길래]

[버찌> 전화해 보니까 계속 핸드폰이 꺼져 있어서]

[버찌> 걱정하고 있었어]

[청혼> ㅋㅋ아님 핸드폰 고장 났어]

[청혼> 별 일 없어]

[버찌> 아 그랬구나... 다행이다]

[버찌> 근데 혹시 윤정신 차단했어?]

[버찌> 너한테 문자 좀 봐달라는데]

[청혼> 그냥 형한테도 답장 안 온다고 해줘]

[버찌> 근데 얘 좀 심각한 거 같은데]

[버찌> 진짜 괜찮아?]

[청혼> 응]

괜히 게임에 접속한 것 같았다. 윤정신은 이제 부캐로 와서 귓속말과 파티 초대 등을 걸고 있었다.

나는 윤정신의 부캐를 하나하나 전부 차단해 버렸다. 그렇게 무시하고 있으려니, 윤정신이 아예 내가 있는 필드까지 쫓아와서 계속 말을 걸었다.

[토라: 우기야]

[토라: 내가 진짜 미쳤었나봐 진짜 미안해]

[토라: 전화 한번만 받아 줘]

나는 당황해서 바로 로그아웃을 했다. 잠깐 기분 전환하려고 켠 건데, 괜히 마음만 더 불편해졌다.

아예 게임을 끌까 하다가 그냥 부캐로 다시 접속했다. 어차피 윤정신이 모르는 캐릭터라 괜찮을 것 같았다. 심현지나 몇몇 친구들과는 친구 추가가 돼 있어서 혹시나 그들을 통해 윤정신이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낼까 봐 오프라인으로 접속을 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그가 지금 뭘 하는지 조금은 궁금해지기도 해서 윤정신의 위치를 찾아 그가 있는 맵으로 갔다.

[토라: 진짜 몰라?]

[현지: ㅇㅇ; 모른당게요]

[현지: 제 연락도 안 봄]

[토라: 나가기 전에 뭔 말 없었어?]

[현지: 저 잠수일 때 다녀가서 다녀간 줄도 몰랐어요]

[토라: 걔 형 연락처 알아?]

[현지: 모름 무슨 동 사는지는 알아여]

[토라: 친구 연락처도? 지금 그럼 연락 되는 사람 아무도 없어?]

[현지: 몰라요]

[현지: 암튼 소식 들으면 알려드릴 테니까 가보셈]

[토라: 그래]

심현지랑 있었구나. ……잠깐만, 심현지? 쟤 이 캐릭터 알 텐데. 기억하려나, 설마? 마침 심현지의 캐릭터가 내 지척까지 왔다. 오, 씨발. 제발 못 보고 가길.

[현지: ?]

[현지> ???]

[현지> 오프임?]

[옥이> 너 이르면 진짜 친삭하고 길드 나간다]

[현지> ㅇㅋ;; 의리녀다; 말 할 생각도 없었눈디ㅋ 멀루 보냐]

[옥이> 충실한 하인이던데 ㅡㅡ]

[현지> 뭔데 둘이 싸움?]

[현지> 아ㅆㅂ 귀찮아 진짜 종일 저래]

[현지> 연락 안 된다는데;]

[현지> 둘이 뭔 일 있냐?]

[옥이> 아니 별 거 아니야]

[현지> 근데 왜 부캐로 오프까지 타고 저 사람 스토킹 하는데?ㅋㅋㅋㅋㅋ]

[옥이> ㅈㄹ 자꾸 대화 걸어서 도망 온 거야]

[옥이> 너 찾아온 건데ㅡㅡ]

[현지> 엥? 나 왜 ㅋ]

[옥이> 걍 심심해서]

[옥이> 야 기습공격 할래?]

[현지> ㅇㅇ]

그렇게 얼결에 심현지와 다른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우게 되었다.

심현지랑 한참이나 게임을 하다가 잘 시간이 돼서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자연스럽게 잡다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왠지 가족들도 걱정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절대 다른 이유는 없다. 아마도.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에 던져두었던 핸드폰을 끄집어내 켜 보았다.

엄청난 양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나를 반겼다. 대체 뭔 일이야……. 윤정신과 윤정신의 강요에 마지못해 연락한 듯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하나하나 확인하기도 귀찮을 만큼 연락이 쌓여 있었다.

지잉― 지잉―

심지어 윤정신은 실시간이었다. 핸드폰이 꺼져 있었으니 전화는 많이 못한 것 같고 대신 문자와 음성 메시지, 카톡이 한가득했다.

[윤정신: 나 진짜 너무 힘들다]

[윤정신: 용서 안 해줘도 되니까 전화 한번만 받아 줘]

[윤정신: 진짜 걱정돼서 그래]

[윤정신: 게임도 나 갈 테니까 들어와서 해]

[윤정신: 너 싫어하는 짓 진짜 안 할게]

[윤정신: 제발... 연락 한번만 받아줘]

나는 또 윤정신의 이런 짓에 신물이 났다.

[이게 내가 싫어하는 짓이 아니면 뭔데]

그는 내 연락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카톡을 확인했다.

[윤정신: 걱정이 돼서]

[윤정신: 미안]

[멀쩡히 잘 있으니까 연락 그만해]

[윤정신: 통화 한 번만 하면 안 될까]

[윤정신: 아니면 만나서 얘기 좀 하면 안 돼?]

[너 집착하고 고집 부리는 거 진짜 싫어]

[그리고 너랑 할 이야기 없는 거 같은데]

[서로 싫어하는데 네 소원대로 이제 사귈 이유 없는 거잖아]

[윤정신: 홧김에 그랬어 진짜 미안해 내가]

[윤정신: 진심 아니었어]

[윤정신: 네가 왜 싫어 아닌 거 알잖아]

[윤정신: 너 정말 나 싫어?]

[끝내자고 했지 그렇게 하자]

[윤정신: 아니]

[윤정신: 난 그렇게 안 할 거고]

[혼자 실컷 그러든가]

[윤정신: 계속 만날 거야]

[윤정신: 우기야 진짜 한번만 기회 줘]

[윤정신: 한 수만 접어줘 진짜]

[윤정신: 나 진짜 잘할게]

[윤정신: 한번만 용서해줘]

[윤정신: 아니면 얘기라도 해줘]

[지금 해줬잖아]

[충분한 것 같은데]

[그만 얘기하자 차단할게]

[윤정신: 아 제발]

[윤정신: 우기야]

[윤정신: 우기야]

[윤정신: 사랑해 진짜로]

[윤정신: 의심 안 해도 돼 내가 확신 못 줘서 미안]

[윤정신: 나 정말 진심이야 너 없으면 못 살아 지금]

[윤정신: 종일 너 찾는다고 아무 것도 못 하고]

[윤정신: 네가 싫어할 거 아니까 집까진 안 찾아간 거였어 이걸론 안 될까]

[윤정신: 너무 걱정 돼서 연락을 안 할 수가 없었어]

[윤정신: 울면서 전화 끊기고 연락이 안 되는데]

[윤정신: 그렇잖아 걱정 돼서 미치겠는데]

[윤정신: 우기야...]

[윤정신: 물도 안 넘어가고 밥도 못 먹겠고]

[윤정신: 너무 초조해서 미치겠어]

[윤정신: 사람 살리는 셈치고 한번만 만나줘]

[윤정신: 아니면 전화라도...]

차마 확인은 못하고 미리 보기로 읽고 있는데, 이상하게 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한 번 눈물, 콧물을 쏙 빼고 나니 윤정신을 향한 가시가 꽤 많이 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결 이야기할 기분이 났다.

[장소 알려줘]

[윤정신: 너 편한 곳에서 보자]

[그냥 형이 골라]

[윤정신: 그럼 내가 너네 집 근처로 갈게]

[오면 문자 줘]

[윤정신: 응 고맙다 진짜로]

얼마 안 가 윤정신이 현관에 도착했다고 카톡을 했고, 나는 가족들 몰래 조용히 집을 나왔다.

* * *

못 마시고 못 먹었다는 게 아주 거짓말은 아닌지 윤정신의 몰골은 꽤 초췌해 보였다. 얼굴에 피곤이 가득했다.

우리는 집 근처 카페로 가 2층 창가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죽겠다는 듯 굴던 윤정신은 막상 자리를 마련하자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나도 그냥 조용히 있었다. 우리 사이가 서먹했다.

“……저기.”

“어.”

우물쭈물 입을 떼지 못하던 윤정신이 갑자기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울어?”

“아, 아니…….”

“형 찌질이 같아……. 뭐야, 갑자기.”

자기 나름대로 마음고생이 심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윤정신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맥이 탁 풀렸다.

“……너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어. 진짜 너무 걱정돼서……. 연락할 길도 없고, 혹시 너 들어올까 봐 게임 계속 켜 두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연락되는지 물어보고 그랬는데, 네가 싫어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을 못했어……. 그래서 미안. 어제 네 말 듣고 생각해 봤는데, 정말 내가 배려를 많이 못해 준 거 같아서……. 네가 갑자기 상황이 그렇게 돼서 많이 무서웠을 거 같아.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밀어붙였고, 자고 나서도 그딴 식으로 굴고……. 너한테 확신 못 줬어. 미안해. 근데 나 진짜로 너 많이 좋아해. 난 성격도 별로고, 변태 같고, 너보다 훨씬 늙었고, 그렇지만…… 네가 봐주면 안 될까? 나, 너 위해서면 착한 금욕자로 살면서 피부 관리 몸 관리 다 하고 젊어 보이게 살게. 쓸데없이 질투하면서 너한테 화내지도 않을 거고, 네가 싫다는데 조르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헤어지지 말자, 제발…….”

막상 그가 이렇게 울면서 비니까, 팽팽하던 긴장감이 탁, 하고 끊겨 느슨해진 느낌이었다.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으려 했더니……. 막상 울면서 찔찔대는 모습을 보니 화낼 기분도 안 나고, 의심도 그럭저럭 다 풀린 것 같고.

나는 그만 화를 풀기로 했다. 화보다는 속상함에 가까운 감정이었지만…….

“진짜 잘못한 거 알아? 너 진짜 그렇게 능구렁이처럼 하면 사람들 다 욕해, 진짜로.”

“난 그냥 너랑 하고 싶었던 건데, 네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 무서울 수 있고, 조심스러울 수 있다는 걸 별로 생각 못했던 것 같아. 미안……. 이제 진짜 안 그럴게. 이서진은 내가 전 애인들 만나는 거 보고 너도 가볍게 만나는 걸까 봐 말한 거라는데, 나 정말 그런 거 아니거든. 내 지난 행실들 때문에 의심하는 거면 안 그래도 돼, 정말로.”

“그냥 나한테 확신만 줬으면 좋겠어. 자고 나서 마음 식었다, 이런 소리 안 하고.”

“안 그래. 내가 어떻게 그래, 너한테.”

“그럼 사과의 의미로 내려가서 뭐라도 사 와. 나도 형 때문에 밥 제대로 못 챙겨 먹었으니까 같이 먹어.”

“그럼 나가서 밥 먹자.”

“안 돼. 나 몰래 나온 거라 금방 들어가 봐야 해.”

“그럼 내일 진짜 맛있는 거 사 줄게. 일단 지금은 그거 먹고, 집 가면 밥 챙겨 먹어.”

“형이나 먹어. 못 먹었다며.”

윤정신이 피식 웃으면서 지갑을 흔들어 보이곤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빨대로 내 앞의 요거트 음료를 빨아들이면서 멍하니 창을 내다보았다.

한국의 밤은 늘 이렇게 번뜩거린다. 수많은 조명과 네온사인으로. 그리고 나 역시 아주 말짱한 정신으로 이 밤에 깨어 있었다.

멍하니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윤정신이 샌드위치가 가득한 트레이를 들고 올라오는 것이 유리에 비쳐 보였다.

우리는 같은 코트를 입어도 울 함량이 다르고, 같은 니트를 입어도 나는 아크릴, 그의 것은 울 소재로 만들어진 다른 니트다. 알아채기 어려운 사소한 부분조차 같은 게 없는 우리가 어떻게 만난 거고, 만남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걸까? 사는 세상이 이토록 다른데 말이다. 우리는 언젠간 각자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내가 그의 손을 잡고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걸까.

방금 내가 그와 화해하고, 다시 관계를 이어 나가자고 말한 게 잘한 선택일지 너무도 헷갈렸다. 일단은 충동적으로 그러긴 했는데……. 이런 사소한 차이가 나중에 지나고 보면 큰 차이일까 봐. 우리 사이의 거리가 멀 때는 작은 흠집처럼 보였던 게 이목구비가 보일 정도로, 향기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고 나서 보니 의외로 큰 절벽일까 봐.

그래서 결국 손 닿을 순 없게 될까 봐, 그렇게 막막해질까 봐 걱정이 됐다. 계속 만나도 괜찮을까, 우리?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이상하게 불행해지는 것 같다. 그들이 가진 성실함이나 부유함, 사랑스러움 같은 게 나와 비교되어 너무도 비참해지기 때문이겠지.

나는 윤정신이 가져온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어둑하면서도 밝은 기묘한 도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럴수록 이상하게 점점 설득이 되었다. 어둠은 빛이 있어서 존재하는 거고, 빛은 어둠이 있어서 존재하는 거다. 도시가 어두우면서도 한편으로 밝은 것처럼 둘은 한 공간에 어울릴 수도 있다. 양상추와 햄은 전혀 다른 음식이지만 한데 모으니 이토록 어울리는 것처럼. 그와 내가 다른 성분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어울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나는 역시 혼자는 싫다고 느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우울한 내 손에 예쁜 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들려 보낼 수 있고, 나는 그가 우울함을 느낄 때 칭찬 몇 마디로 기분을 풀어 줄 자신이 있었다. 그게 우리 나름의 조화였다.

그럼에도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래서 묻고 싶었던 거다.

“형은 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갑자기?”

커피를 마시고 있던 윤정신이 당황한 듯 콜록거렸다.

“그냥, 난 잘 모르겠어서. 사람들이 날 왜 좋아하는지 진짜 잘 모르겠어.”

“너 그거 인기 많다고 자랑하는 거지?”

“아니. 대답이나 하라고. 뭐가 그렇게 좋았어?”

“음……. 전에도 말한 거 같긴 한데, 그냥 네 느낌이 좋았어. 어쩔 수 없잖아, 게임에서 처음 만난 건데 네가 뭐 하는 사람이고 어떻게 생겼는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처음에 호감이 좀 있었는데, 만나 보니까 더 좋아서. 생긴 것도 내 스타일이고, 투덜거리는 거도 귀엽고. 뭔가 완급도 있고. 요즘은 네 목소리가 제일 좋아.”

“오……. 꽤 자세하네.”

목소리라. 내 목소리가 좋은가? 허스키하다는 말은 들어 보긴 했는데, 딱히 목소리에 대한 칭찬을 들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살면서 너보다 목소리 섹시한 사람 못 봤어. 진짜야. 그래서 맨날 통화하자고 하는 건데.”

“내 목소리가?”

“응. 되게 허스키한데, 되게 높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낮은 편도 아니고. 아무튼, 좀 신기해. 그냥 듣기 좋아. 난 그리고 꼭 뭐가 있어야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좋으니까 좋아하는 거지. 사실 그게 이유야. 네 어디가 좋은 게 아니고 그냥 네가 좋아. 난 너 다 좋아. 네 융털도 좋아.”

내 융털까지? 나는 무어라 답하려다, 우연히 현재 시각을 확인하고 일단 대화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음……. 그건 좀 무서운데. 나 근데 슬슬 일어나야겠다.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서.”

“아, 어. 그래. 가야지……. 샌드위치만 다 먹고 가면 안 돼?”

윤정신이 불쌍한 척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망설여졌다.

“샌드위치? 어, 그럴까? 그냥 형한테 전화해야겠다, 나 나왔다고.”

“응, 응. 그렇게 해. 지금 빨리해. 걱정하고 계실라.”

나는 형에게 전화를 걸어서 지금 내가 밖에 나왔고 친구와 이야기를 좀 하다가 들어갈 거라고 말했다.

싸우고 난 뒤라 어색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더 편해진 것 같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페가 마감하는 시간까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