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윤정신이랑 점점 친해지면서 확실히 서진과 노는 시간이 줄었다.
한쪽은 맨날 나를 귀찮게 끌고 다니고, 한쪽은 어지간해서는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다 보니까 윤정신이랑 놀아 준다고 서진에게 신경 쓰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을에서 잠수를 타고 있는 그의 캐릭터를 보고 몹시 반가움을 느꼈다. 마침 윤정신도 없을 때였다.
[청혼: 버찌 잠수?]
[청혼: ㅠㅠ]
대답이 없어서 옆에 잠깐 앉아 있었는데, 곧 그의 캐릭터가 왔다 갔다 하며 움직였다.
[버찌: 잠깐 길드창 좀 보느라...]
[버찌: 잠수 아니야]
[청혼: 여기서 뭐해]
[버찌: ㅋㅋㅋ 창고 때문에]
[청혼: 너무 반갑자너]
[버찌: 요즘 너 너무 바쁘더라]
[청혼: 버찌 저번 던전 격파 때 보고 첨 보는 거 같아]
[청혼: 다시 벞셔나 할까 ㅋ]
[버찌: ㅋㅋㅋ그럴래?]
버프 셔틀 알바가 꿀이었나 싶다가도, 막상 다시 할 걸 생각하니 좀 꺼려졌다. 너무 지루하니까, 그건……. 으으, 역시 좀 아닌 것 같다. 한 번까지는 어떻게 했지만, 두 번부터는 좀 토 나올 것 같은데.
[청혼: 윤정신 죽여주면 생각해볼게]
[청혼: 더럽게 귀찮게 해; 미치겠어]
[청혼: 어제는 오프 해둠]
[버찌: ㅋㅋㅋ]
[버찌: 정신이가 너 자기네 스파 온다고 좋아하던데]
[청혼: 버찌도 보내 달라고 졸라 봐]
[버찌: 오라고 하긴 하던데 내가 그 날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버찌: 이번 달에 일정이 많아서]
[청혼: 안 되면 되게 하는 거시다 ㅋ]
[청혼: 나 가족들이랑 가는 거라 자기 혼자 있어야 해서 오라 한 듯]
[버찌: ㅋㅋㅋ아 뻘쭘해서?]
[청혼: ㅇㅇㅋㅋㅋ아마도]
[버찌: 갑자기 가주기 싫네;]
[청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혼: 그래두 나랑 놀아야디]
[청혼: 사실 저어는 형이랑 계속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버찌: ㅋㅋㅋ 최대한 가도록 노력해볼게]
서진을 부른 줄은 몰랐네……. 하긴, 아무리 뻔뻔스러운 윤정신이라도 가족 식사 자리에 혼자 끼어 있긴 불편했겠지. 그냥 가족들한테 잘 말해 두고 나 혼자 갔다 올걸 그랬다.
민폐가 된 것 같아 불편했다. 벌써 일정 조율도 다 한 마당에 무르기도 그렇고……. 그래도 서진이라도 오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은데, 될지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청혼: ㅋㅋ근데 나 솔직히 윤정신이 그렇게까지 해줄 줄 몰랐어서]
[청혼: 좀 미안하더라... 난 걍 님이 스파 좋다니까 궁금해서 함 데려가 달라 한 건데]
[버찌: ㅋㅋㅋ뭐 어때 자기가 해준다는데]
[버찌: 정신이가 원래 너 좋아하잖아]
[버찌: 그냥 가서 놀다가 와 ㅎㅎ]
[청혼: ㅋㅋㅋㅋㅋ버찌 네는 그런 거 없어?]
[버찌: 음... 없어 ㅠㅠ]
[버찌: 근데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데려가 줄게]
[청혼: 와 부자 둘이랑 친구 되니까]
[청혼: 무서울 게 없는데 ㅋㅋ 다 해준대]
[청혼: ㅋㅋㅋㅋㅋ 신난다 재미난다]
[버찌: 동생 만나는데 돈 내라고 어떻게 해]
[버찌: 우리랑 놀아 주려면 재미도 없을 텐데]
[청혼: ㅋㅋㅋ 아니야 재밌어]
[청혼: 돈 쓰는 게 제일 재밌는 거 같아 ㅎㅎ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대유잼 콘서트]
[버찌: ㅋㅋㅋㅋㅋ그 말 정신이한테 하면]
[버찌: 지갑 활짝 열리겠다]
[버찌: 근데 진짜 부담 안 가져도 돼 어차피 걔랑 나랑 둘이 만날 때도 돈 따로 안 내]
[버찌: 나도 윤정신한테 많이 얻어먹었는데]
[버찌: 갚아도 자기가 빌려준 거 자기가 기억 못 해서]
[버찌: 이제 그냥 자연스럽게 아무나 계산하게 되더라 ㅋㅋ]
[청혼: ㅋㅋ오키 그럼 이 나라의 빈부격차를 완화시키겠다는 명목으로]
[청혼: 좀 뻔뻔해질게]
[버찌: ㅎㅎ]
[청혼: 나 사실 히키코모리 되면서 가끔 답답했는데]
[청혼: 친구들 만날 때는 집밖에 나갈 메리트가 별로 없거든]
[청혼: 근데 돈 많은 친구 생기니까 안 하던 거 많이 할 수 있어서 먼가 좀]
[청혼: 오랜만에 그런 거 느껴]
[청혼: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대된다고 해야 하나]
[청혼: 암튼 그래 ㅋㅋㅋ 나가면서 준비하는데 귀찮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드는 거 같아]
[청혼: 담 생에는 부자로 태어나면 좋겠으]
[청혼: 그렇다고 지금 막 못사는 건 아니긴 한데ㅋㅋ]
부자가 못 된다면 돌 같은 것도 괜찮은데. 둘 중 뭐가 되든 지금보다는 사는 게 편할 테니까. 뭐, 돈이 많다고 꼭 고민이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혹시 일반화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을까? 조금 걱정이 되려 하는데, 서진이 곧 그런 걱정을 덜어 주었다.
[버찌: 지금 너도 충분히 좋아]
[버찌: 네가 원하는 만큼의 재력은 없더라도 그걸 상회할 만한 좋은 게 많으니까]
[버찌: 하느님이 그건 안 주신 거야 ㅎㅎ 누군가는 네 삶을 부러워 할 수도 있는 거고]
[버찌: 너는 아직 스무 살이잖아]
[버찌: 아직 도입부인데 네가 나중에는 로또에 당첨될 수도 있는 거고]
[버찌: 인생이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간다고 하지만 결국 아무도 결말은 몰라]
[버찌: 부모 잘 만난 내가 이런 말 하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가벼운 푸념 같은 거라 이렇게 진지하게 위로해 줄 줄도 몰랐고, 또 그런 걸 기대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쩐지 감동적이었다. 정말 서진이 형은 우리 형이랑 비슷한 것 같아. 가끔 겹쳐 보인다니까.
[청혼: ㄴㄴ 아니야 잘 들었어]
[청혼: 역시 버찌바께 엄따ㅠㅠ]
[청혼: 그냥 요즘 좀 현타 많이 와서 쭝얼거려봤어]
[청혼: 버찌 근데 크리스쳔임?]
[버찌: 아 ㅋㅋㅋ 아니 나는 무교인데 집안이 기독교라]
[청혼: 진짜 버찌한테 장가나 갈까]
[청혼: 개종도 할 수 있을 듯]
[버찌: ㅋㅋ미안... 기독교에서는 동성애가 죄악이라]
[버찌: 나 호적 파여야 가능한데 그럼 내 메리트가 없어져서]
[버찌: 별로 좋지 않아]
저런 말은 농담이겠지? 무슨 농담을 저렇게 진지하게…….
[청혼: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주는 거임?ㄷㄷ]
[청혼: 걱정하지 마... 호적에서 안 파이게 해줄게 ㅠㅋ]
[청혼: 버찌 인생은 소중하니까]
[버찌: ㅋㅋ... 고마워]
[버찌: 나 독립하면 해줄게]
[청혼: 헐 감사 ㅎㅎ 몇 살까지 독신으로 기다리면 돼?]
[청혼: 질척의 끝을 보여줄게]
[버찌: 어... 마흔?]
[청혼: 미안 걍 서민으로 살래]
[버찌: ㅋㅋㅋ 손절 당했다]
[버찌: 흑흑...]
[청혼: ㅋㅋㅋㅋㅋ하지만 모니터 뒤에서는 웃고 있었다]
[청혼: 인정?]
[버찌: 아니야 울고 있어ㅠㅠ]
[청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버찌와 꽁냥꽁냥 놀고 있는데, 윤정신이 로그인했다는 알림 창이 떴다.
[청혼: 아 잠만]
[청혼: 재앙 왔다]
[버찌: 정신이?]
[버찌: 맞네 왜 알림이 안 뜨지?]
[청혼: 버찌가 윤정신 재앙이라고 했다]
[버찌: ㅋㅋㅋㅋㅋ]
[청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앙 방송 하려나]
[청혼: 오면 잠수인 척하자]
[버찌: 알겠어]
양반은 못 되는지, 곧 윤정신의 캐릭터가 이동해 왔다.
[토라: 나 왔어 댜기야]
[토라: 이 새낀 뭐야]
[토라: 이서진 마지막 경고다]
[토라: 나가라, “이 맵에서.” 말로 하는 경고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음부터는 주먹으로 대화하]
[토라: ㅋㅋ]
[토라: 얘들아 반응 좀]
원맨쇼라는 건 저런 게 아닐까? 나는 혼자서 북도 치고 장구도 치는 윤정신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우리가 반응을 해 주지 않자, 그가 민망한 듯 캐릭터를 정신 사납게 움직여 댔다.
[토라: ㅅㅂ놈들아 대답해]
[토라: ㅋㅋ아]
[토라: 동생이 이상한 거 치고 갔네 ㅎ]
[버찌: 너 동생 없잖아]
[토라: 너 딱 걸림]
[청혼: 아 버찌]
[버찌: ㅋㅋㅋㅋㅋ 미안]
[토라: 너네 왜 나 왕따 시키냐 나 삐친다]
[청혼: 맨날 삐친대]
[토라: 너 미워]
정말 심리 공격 면에서는 윤정신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닭살이 오스스 돋는 것 같았다.
[청혼: 헐 뭐야 역겨워]
[토라: ㅠㅠ 자기 넘해]
[토라: 정시니 울꼬야...]
[버찌: ;;;]
[청혼: ㅋㅋㅋㅋㅋ버찌 반응ㅋㅋㅋㅋㅋㅋㅋ]
[청혼: 정시니 울디마]
[청혼: 뚝 그치라 하고 우리는 이제 고급시계 하러 가자 ㅎㅎ]
[버찌: ㅋㅋㅋㅋㅋ진짜 가는 거야?]
[토라: 아 진짜 너무한다]
[토라: 나 나갈래]
[청혼: 아 ㅈㅅㅈㅅ;;; 삐치지 마]
[청혼: 알겠어 안 갈게]
[토라: ㅡㅡ]
[토라: 진짜 개삐칠 뻔했다]
[토라: 나도 좀 잘해줘 10일에 하루 만이라도]
[청혼: 알겠어알겟어]
[토라: ㅠㅠ 진짜?]
[청혼: 아니아니]
[토라: ㅋㅋㅋㅋㅋ최우기]
[토라: 이러기 있냐]
[토라: 우리 좋았잖아...]
[토라: 저 놈이 그렇게 잘해주니^-^...]
[청혼: 엉]
[토라: 자기 오늘 놀까]
[토라: 피자 사 주까 ㅎ]
피자? 또 소비 아이템이고 이런 거 아니야? 장난을 하도 많이 치니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 믿기가 힘들었다.
[청혼: 실제로??]
[토라: 웅]
[청혼: 똑바로 말해 먹으면 MP 300 상승하는 소비 템 이딴 거 아니야?]
[토라: 아님ㅡㅡ 뭔]
[토라: 술친구 해줘]
[버찌: 무슨 일 있어?]
[토라: 노노 ㅋㅋ 걍 땡겨서]
[토라: 넌 오지 마;;;;제발;;;;]
[버찌: 아직 간다고 안 했는데 너 때문에 가고 싶어진다 ㅎㅎ]
[토라: 그럼 제발 와;;; 제발;;]
[버찌: 그래]
[토라: 아 ㅅㅂ 가드 불가네]
[청혼: 그래서 셋이 보자고? ㅋㅋㅋㅋ]
[토라: 분위기 읽자 서진아]
[토라: 서진아 분위기 읽자]
[버찌: ㅎㅎ 나 오늘 한가해서]
[버찌: 좀 끌리네]
[청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혼: 나 곱창 먹고 싶은데]
[청혼: 둘 다 곱창 먹을 수 있어?]
[토라: ㅋㅋㅇㅇ당연]
[토라: 나 아는 곳 있는데]
[토라: 특양이랑 대창 맛있어]
[토라: 잘 구워준다]
[토라: 갈래? 한우랑 곱창 막창 뭐 다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 왠지 윤정신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문제는 버찌였다.
[청혼: 버찌도 먹을 수 있어?]
[버찌: 아 응ㅋㅋ 대학 다닐 때 먹어봤어]
[청혼: 헐 그럼 나 갈래]
[토라: 이서진 나 픽업하러 와]
[토라: 오면 저나좀]
[버찌: ㅇㅇ]
[토라: 우기 주소 이따 알려줘]
[토라: 데리러 갈게]
[청혼: 왜 서진쓰가 운전하는데 토라가 생색이지...?ㅋㅋㅋㅋㅋㅋ]
[토라: ㅎㅎ 그냥 그러려니 해]
[토라: 윤정신 새끼가 그렇지 뭐 ㅎㅎ]
[청혼: 순간 버찌가 친 건 줄]
[청혼: 오늘은 10시 전에 들어갈래]
[청혼: 좀 일찍 보자 한 5시?]
[토라: 알게쏘 자기얌]
[토라: 그 전까지 우리 뭐할까 ㅎㅎ]
[청혼: ㅎㅎ윤정신 죽이기 게임]
[토라: 헉 ㅎㅎ 잼없겟당...]
[토라: 난 안 할래^^]
[청혼: 귀여운 척 그만 하자 자기야 ㅎㅎ]
[토라: ㅎㅎ 응]
[토라: 봤냐 우리 쌍방 자기임]
[버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혼: 화덕에 굽고 싶다는 점에서...]
[버찌: 도자기 ㅋㅋㅋ]
[청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혼: 울 자기는 언제 사람 되나 ㅎ]
[토라: ㅎㅎ...]
[토라: 그래도 너에서 자기 됐다 ㅎㅎ]
[토라: 절 좀 빚어 주세요 하윽]
[청혼: 아 진짜 또라이 같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청혼: 욕구불만 있나 봐]
[버찌: 그러게 좀 무서운데]
[버찌: 중성화 시켜야 하나]
[토라: ㄷㄷ무슨 미친 소리를]
[토라: 그렇게 평온하게 하는 건데?;;;]
[청혼: 진짜 그래야겠다]
[청혼: 저러다 언젠간 고소당할 듯]
[토라: ㅡㅡㅋ 너만 안 하면 고소당할 일 없어]
[토라: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니.까.]
[청혼: 난 시러 토라는 아조시잖아 ㅋ]
[청혼: 난 파릇한 슴살이라구]
[청혼: 토라는 같은 아조시 친구나 만나라구 ㅋ]
[토라: 나이는... 숫자에 불과]
[토라: 내 나이 27살... 최우기에 인생 배팅 대통령도 못 막아]
[토라: 한번만 하향선택 해주세요]
[버찌: ㅋㅋㅋㅋㅋ너 같으면 해?]
[버찌: 나 잠깐만 전화 좀 받고 올게]
[토라: 돈은 많잖아 잘생겼고]
[청혼: 나는 나중에 로또 당첨 되고 너보다 부자 될 것임]
[토라: ㅋㅋㅋㅋㅋ 그게 진심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청혼: 버찌가 될 거랬어]
[토라: 쟤가 먼데]
[토라: 그냥 나한테 장가오라고 내가 보톡스 맞아서 젊어질게]
[토라: 그럼 100퍼 확률로 돈 생김 근데 로또 당첨되는 확률은... 알지?]
[토라: 안전한 선택 하자]
[청혼: ㅋㅋㅋ 팩트: 결혼할 수 있는 확률도 적음]
[토라: ㅋㅋㅋ팩트: 어차피 울 부모님 나 체념해서 뭔 짓해도 터치 안 하심]
[토라: 너만 오케이면 오늘 저녁에도 가능]
[토라: 이제 문제 없어?]
[청혼: 당연히 있지; 내가 하기 싫어]
[토라: omg~~ 말 안 통하는 한국인... 국적 의심되는]
[토라: 괜찮아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청혼: 니 남은 생 모든 날이 다 아닐 거야]
[토라: ㅋㅋ난 자신 있어]
[토라: 너 내가 꼬신다]
[토라: 한 300년?ㅋ 만 줘봐]
[청혼: ㅋㅋㅋㅋㅋㅋㅋ300년 전에는 한번 받아줄게... 너무 불쌍하니까]
[토라: 아 자꾸 끝자락에 여지를 줘 너는]
[토라: 우리 진짜 3일만 사귀자]
[토라: 농담 아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늘 그렇긴 하지만 이번 건 정말 어이가 없었다.
[청혼: 무슨 체험판도 아니고]
[토라: 아니다 싶으면 차면 되잖아 문제 있음?]
[청혼: 좋아야 사귀지...]
[토라: 그니까 3일만]
[토라: 사귀자고 좋아질 수도 있잖아]
[청혼: ㅋ ㅈㅅ]
[토라: 그럼 30일 동안 귀찮게 안 할게]
[청혼: 어 좀 혹한다]
[토라: 아; 33일 딜?]
[청혼: ㅋㅋㅋ귀찮게 안 하는 기준이 뭔데?]
[토라: 걍 니가 싫다는 거 다 안 할게]
[토라: ㅠㅠ]
윤정신은 [울기] 감정 표현을 계속 써 댔다.
얘는 무슨 이런 말을 전체 채팅으로 자꾸 하는 거야? 누가 볼까 무서웠다. 사람이 거의 없는 곳이긴 하지만 잠수인지 뭔지 저쪽에 두세 명 정도 있는데 말이다. 심지어 방송도 하는 사람이……. 이렇게 조심성 없어도 돼?
나는 핸드폰을 들어 윤정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 그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런 말 좀 공개된 곳에서 하지 마.”
[왜? 못할 말한 거도 아닌데. 그래서 어쩔 거냐고?]
“나 근데 아직 네가 뭘 원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사귀자는 건 뭐 어쩌자는 건데? 난 너 안 좋아한다고 말했잖아. 좋아하는 척하라는 거야? 그게 의미가 있나.”
[그런 거지. 역할에 충실하자는 거지.]
“그럼, 그 33일 동안은 딱 너 다른 친구들 대하는 것처럼만 나한테 할 수 있어? 귀찮게 안 치근덕거리고?”
[맹세할게. 진짜.]
“33일 이후에는?”
[그때도 네가 나 안 좋아하면 다시 작업 걸어야지.]
“근데 내가 싫다는 건 이런 거 안 해도 당연히 안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뭐가 이래.”
[너 내가 너 좋아하는 거 티 낼 때마다 부담스럽잖아. 완전 이성애자인 것처럼 해 줄게.]
“너 근데…… 진지하게 나 좋아하는 거였어? 장난으로 그러는 거 아니고?”
[그럼 이 지랄까지 하는데 안 진지하겠냐? 진지해. 존나 진지해. 갑자기 각 잡고 고백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거 뻔하잖아.]
그래, 그래 보인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되는 거였다. 장난이겠거니 했는데 진심이었다니.
“아니……. 왜? 난 그냥 날 왜 좋아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서 그래.”
[왜 좋냐고 물어봤자……. 취향이 너인가 보지.]
“그럼 3일 말고 한 달 사귀는 대신, 내가 진지하게 싫다고 하는 건 앞으로 평생, 장난으로라도 하지 마. 이걸 조건 걸어야 한다는 게 어이없긴 한데 말 안 통할 거 아니까 해 주는 줄 알아. 오케이?”
[알겠어.]
“그리고 또. 한 달 만나는 동안 나도 너 애인처럼 대하긴 할 건데, 내가 너 안 좋아한다는 건 전제로 해 두자. 안 사랑하는데 사귀는 척한다고 사랑해, 너뿐이야, 이러는 것도 오그라들고. 스킨십도 내 동의가 있을 때 했으면 좋겠어. 별 감정 없이 사귀는 경우도 꽤 있잖아. 그런 것처럼 담백하게 하자. 그래도 데이트는 네가 가자는 대로 다 가고, 너 연인으로서 존중할게. 어때?”
[좋아. 한 달이면 그냥 무조건 해내야지. 그럼 오늘부터다?]
“무슨 자신감인진 모르겠는데……. 네가 자신 있으면 한번 그래 보든가. 나도 너 진짜 좋아지면 솔직하게 반응할게.”
[그래. 그럼 이따 봐.]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한 거지? 평소 윤정신답지 않게 진지한 모습이었다. 여태 나한테 전혀 어필이 안 됐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아무튼, 그렇게 이상한 계약이 시작됐다.
* * *
통화를 마치고 온 서진이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못 갈 것 같다고 해서, 윤정신과 둘이서 만나게 되었다.
진지한 고백을 듣고 난 후라 그런가 왠지 어색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윤정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해 버렸다.
윤정신이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왜 부끄러워해?”
“……내가 언제?”
“내 눈을 못 보는 거 같은데. 얼굴 좀 보여 줘.”
윤정신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내 눈을 빤히 보았고, 나는 얼마 못 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만해…….”
“알겠어, 알겠어. 손잡아도 돼?”
윤정신이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고, 나는 고민하다 그의 팔에 살짝 팔짱을 꼈다. 정말 아주 살짝.
“택시 타고 가자. 콜 불러 놨어.”
“응.”
“다음에 스쿠터 태워 줄게, 날 좋은 때에. 공원 가서 산책이나 하자.”
윤정신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알고 보니까 좋아한다니 어쩌니 하는 것도 다 거짓말이고 따로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겠지? 갈수록 알쏭달쏭한 기분이었다.
“곱창집은 여기서 멀어?”
“음……. 한 30분?”
“형 먹어 봤댔나? 기대할 만해?”
“난 맛있던데? 그쪽 토박이들은 아는 진국이랬어. 시설이랑 서비스도 좋아.”
“곱창 요즘 못 먹었는데 오늘 왕창 먹어야겠다.”
우리는 대기 중이던 콜택시에 올라 목적지로 갔다.
윤정신과 고등학교 때 있었던 웃긴 일화 같은 것을 이야기하다 보니 체감상 시간이 빨리 갔다.
도착한 곱창집 내부는 한적한 편이었고, 넓고 고급스러운 한옥 느낌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곱창이 주메뉴는 아니었지만 난 곱창 먹을 거니까. 준비되어 있던 일회용 앞치마를 두르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자 밑반찬이 나왔다. 윤정신이 적당히 주문을 하고, 나는 밑반찬으로 나온 전을 한 입 먹어 보았다.
“이거 맛있다.”
내가 젓가락으로 전을 조금 찢어 윤정신에게 내밀자, 그가 순순히 전을 받아먹었다. 윤정신이 호들갑을 안 떠니까 이상한데? 아니나 다를까 곧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가렸다.
“아주 좋아 죽겠지?”
“어. 나 저것도 먹여 줘.”
“어떤 거?”
“두부 김치.”
나는 김치를 두부에 말아 그의 입가에 묻지 않게 조심히 입속으로 넣어 주었다.
윤정신이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내 왼손을 제 오른손으로 잡아 가볍게 흔들더니 깍지를 끼었다. 정말 내가 그렇게 좋은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솔직히 말해 봐. 서진이 형한테 오지 말라고 그랬지?”
“아니야. 걔 진짜 가족 식사 자리 끌려갔어. 나 그렇게 안 유치하거든?”
“그래?”
하긴. 윤정신이 오지 말란다고 안 왔을 것 같지도 않고. 은근하게 내 손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한 그의 손을 뿌리치고 물을 한잔 마시고 있을 때, 주문한 특양 세트와 한우 생갈비가 나왔다.
증류 소주도 함께였다. 내 몫으론 맥주를 시킨 것 같았다. 종업원이 고기를 구워 주기 시작했고, 나는 그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와, 한 손으로 따르냐.”
“그럼 안 돼?”
“꼰대들이 보면 지랄할걸.”
“형은 꼰대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긴 한데.”
윤정신이 내 몫으로 나온 맥주잔에 소주를 조금 붓더니, 그 위로 맥주를 콸콸 따랐다.
자연스럽게 소맥을 마네, 허락도 안 맡고? 내가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자, 그가 머쓱한 듯 병을 한 번 들어 보이며 변명했다.
“아니, 소맥 좋아한다지 않았나?”
“나 섞어 마시면 더 알쓰 되는데.”
“한 잔만 마셔, 그럼.”
그가 새 젓가락을 꺼내 소주와 맥주를 섞고 건배를 청했다. 무슨 음흉한 짓거리지?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속는 셈 치고 마셔 주기로 했다.
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대창도 어찌나 고소한지, 역시 비싼 값을 한다 싶었다. 그래 봤자 윤정신한테는 그다지 비싼 음식도 아니었겠지만…….
나는 소맥 두 잔에 알딸딸하니 기분 좋게 취했다. 윤정신도 혼자서 소주를 몇 병이나 마신다 싶더니, 얼굴에 붉은 기가 돌고 발음이 뭉개졌다.
우리는 별로 언쟁할 것도 아닌 이야기로 언성을 높이기도 하고, 별로 재미도 없는 이야기로 눈물까지 뽑아내며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술김이긴 하지만 윤정신과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들뜨고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후식으로 나온 호두과자와 대추차를 먹고, 술 깰 겸 루프탑이 있는 어느 카페로 갔다. 술기운을 풍기며 오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분위기가 좋은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밤이라 쌀쌀해서 그런지 루프탑에는 손님이 별로 나와 있지 않았다. 윤정신은 케이크 몇 조각과 마카롱 두어 개, 커피 두 잔이 올려진 트레이를 들고 자리로 왔다.
“여기 좋은 거 같아.”
“다행이네.”
“서울에 참 예쁜 곳 많다. 친구들이랑 어디 갈 때는 낯간지러워서 딱히 이런 곳 찾아보지도 않았는데.”
“나도 데이트할 때만 찾아.”
“다른 사람이랑 왔었구나. 그렇지?”
“아니라곤 못하겠네. 근데 예쁜 곳인 걸 아니까 너랑 와 보고 싶었어.”
나는 새삼 그의 연애 경력이 궁금해졌다.
“너는 지금까지 몇 명이나 사귀었어?”
“다시 너냐?”
“아, 실수야. 그래서 어떻냐고.”
“글쎄. 한 7명? 아니다, 10명은 넘지 않을까.”
“남자가 몇 명이고 여자는 몇 명이야?”
“비슷해. 한 4대 6 정도?”
“왜 헤어졌어?”
“그냥, 뭐. 헤어지는 데 이유 있냐? 안 만나고 싶으면 헤어지는 거지. 차인 적도 많고.”
“아, 질리면?”
“질린다기 보다 사실 처음부터 안 좋아했던 거야. 애초에 좋아해서 사귀었던 게 아니라서. 그냥 소개 받으래서 받은 거거나,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이인데 그쪽에서 고백했거나. 근데 좋아하는 척하다가 어느 날 현타 오면 그게 주체가 안 되더라고. 진짜 꼴 보기도 싫어져. 좀 너무한 거 같겠지만, 진짜 좀 그래.”
“그럼 왜 사귀어? 형 사이코야?”
“그냥……. 심심해서? 좀 외로워서? 옆에 사람이 없으면 확실히 허전해. 만나자는데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잖아. 나한테도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니니까.”
“나랑도 그래?”
“그래 보이냐? 내가 그럼 이 지랄을 왜 떨겠어?”
“그럼 형 첫사랑이 나야?”
내가 빙글빙글 웃으며 묻자, 무표정하던 윤정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스물일곱 살에 첫사랑 한다니까 좀 우스운데. 아, 사실 솔직히 말하면 첫사랑은 아니야. 18살 때 좋아했던 애 있었어. 고백을 못해서 그렇지…….”
“왜? 고백도 못했다고, 윤정신이?”
“그때는 애기 정신이었잖아. 어차피 이제 걘 결혼했지만……. 작년에 결혼식 갔었는데, 이제는 별 감흥 없긴 하더라. 걔나 나나 많이 변하기도 했고.”
“뭐야, 좀 슬프다. 혼자 청춘 영화 찍었네?”
“짠내 났지.”
“나 근데 궁금한 거 있어. 내가 왜 좋았어?”
이건 정말 궁금했다. 혹시 계기 같은 게 있을까? 내가 서진처럼 생겼다면 얼굴이 개연성이 되겠지만 솔직히 그럴 정도는 아니니까.
그가 약간 민망한 듯 귀를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왜 자꾸 부끄러운 것만 묻냐?”
“재밌잖아, 형 부끄러워하는 거.”
“글쎄, 왜 좋았지. 그냥 계속 신경 쓰였어. 내가 좀 이상한 거에 꽂히는 스타일인가 봐. 보는 눈 이상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던 거 같고. 네가 이상하다는 건 아닌데, 그냥 좀 그래, 내가. 얼굴이나 목소리 같은 거 알기도 전부터 좋아지기 시작했으니까 처음에는 그냥 네 성격? 말투? 분위기나 그런 게 좋았던 거 아닐까.”
“어쩌면 형 마조히스트일 수도.”
“우리 같이 SM 플레이 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오늘 확인해 볼래?”
“난 사디스트 아니라서 싫어.”
“그럼 SM은 빼고 노멀 한 건…….”
저 좆의 숙주. 저럴 때는 오함마로 확 머리를 깨 버리고 싶다. 나는 혀를 쯧쯧 찼다.
“또 혼자 점수 깎지? 작작 해라.”
“넵.”
윤정신이 순순히 꼬리를 내렸고, 나는 야경을 내려다보며 달콤한 케이크를 포크로 한 입 베어 먹었다.
어디서 많이 먹어 본 것 같은 싸구려 크림의 맛이 아니었다. 얹어진 과일은 상큼하고, 빵은 부드러우면서 폭신했다.
나는 늘 뭐에 쫓기는 듯 마음이 너무도 촉박했는데 오늘만큼은 그 뒤처진다는 압박감에서 해방된 것 같다고 느꼈다. 언젠가 과학 기술이 더 좋아진다면, 지구에서 주어졌던 많은 것들을 무효화하고 우주로 도망칠 수 있겠지.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고 있을 때, 윤정신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우연의 일치였다. 나는 그게 우주로 도망치려는 나를 붙잡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술이 덜 깬 게 틀림없다.
“우기야. 네가 나를 평생 좋아할 일이 없다고 해도, 항상 나는 너한테 든든한 사람으로 남아 줄게. 그러니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연락하고……. 내가 너무 개연성 없이 이러니까 네가 이해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해. 아무튼, 내 감정은 그래. 진심이야. 너 가지고 장난치려는 것도 아니고, 어쭙잖은 감정도 아니야. 너한테 이런 거 속여서 뭐 하겠어? 그냥 네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니까 내가 어느 구석에 홀린 거겠지. 비록 난 너보다 나이도 많고, 성격도 별로고, 한량처럼 사는 놈이지만, 너 위해서라면 꽤 이거저거 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가깝게 지내자, 쭉. 한 달 지났다고 쌩하지 말고. 오케이? 네가 자꾸 장난치는 거라 의심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아……. 어.”
“나도 취했나 보다. 별소리를 다 하네.”
그가 내게 줄 수 있는 여유. 도시의 한가로운 야경이 마치 그를 보여 주기 위함 같다.
자, 잘 봐. 이게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여유라는 거야.
그건 눈앞에 놓인 케이크보다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 * *
그날부터 윤정신이 조금 달리 보였다.
사귀는 걸 의식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확실히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전에는 연애 고려 대상이 아닌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었는데 이만하면 큰 진전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윤정신은 박장대소하며 크게 웃었다.
“좋은 징조인데?”
“난 심각해. 미쳐 가는 건가 싶고.”
“그 정도라고? 너무한다, 너. 너 이거 먹지 마.”
“먹는 걸로 치사하게 그러지 말자.”
“넌 좋아하는 거로 치사하게 굴잖아.”
윤정신은 내 그릇을 뺏는 척했다가 다시 돌려주며 삐친 척을 했다. 그러다 또 혼자 마음이 풀려서는 웃으면서 은근하게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우리 집 놀러 올래?”
“어딘데?”
“별로 안 멀어, 여기서.”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지?”
“야. 미쳤냐, 내가? 나 그렇게 인성 쓰레기 아니야. 오면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뭐?”
“뭐든. 뭐 먹고 싶은데?”
“무슨 자신감이야?”
그는 인터넷에서 레시피만 찾으면 문제없다고 우기며 같이 마트에서 장 보고 저녁을 만들어 먹자고 꼬드겼다.
좀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간 김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집어 와야지. 그래서 점심을 먹고 번화가에서 조금 놀다가 대형 마트로 갔다.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저녁에 먹을 것들이랑 각종 간식거리를 담는데, 윤정신이 갑자기 카트를 나한테 맡겨 놓고 전화를 받으러 갔다. 누군가와 티격태격하는 것 같던 그가 곧 터덜터덜 돌아오며 한숨을 쉬었다.
“왜?”
“어? 뭐가?”
“누군데?”
“아……. 이서진.”
“근데 왜 오만상이야?”
“지도 온대서. 근데 착각하지 마라, 안 된다고 했어.”
“왜? 오라 하지.”
“됐거든. 내 집이야.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왜 저래? 내가 카트를 밀며 이해 안 된다는 듯 계속 그를 빤히 보자, 애써 내 눈을 외면하던 윤정신이 못 참겠다는 듯 결국 물었다.
“왜, 뭐, 왜.”
“오라 그래. 나 그 형한테 아무 감정 없는데.”
“근데 왜 오라고 해?”
“사람 많으면 재밌잖아.”
“난 둘이 있는 게 더 재밌는데……. 어후. 알겠다, 그럼.”
그가 마지못해 한다는 듯 한숨까지 내쉬자, 나는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니, 누가 꼭 그러라나? 나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면 안 그래도 된다는 거지.
“아니, 싫으면 말고. 그냥 난 왜 굳이 못 오게 하나 싶어서. 형이랑도 친하잖아.”
“걔가 오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아무튼, 넌 걔 있는 게 더 좋다 이거지?”
“아니, 그렇게 말하면 또……. 생각해 봐. 내가 너랑 서진이 형이랑 피시방을 갔는데 그거 가지고 질투를 해. 기분이 어때?”
그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가 가볍게 답했다.
“좋을 거 같은데. 귀엽잖아.”
“아 씨. 그런 거 말고. 오해하는 거 웃기잖아. 아무 사이 아닌데.”
“넌 나 안 귀여워?”
진짜 답 없는 인간…….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하나도.”
“차갑다, 차가워.”
“아무튼, 그런 거로 질투하지 마. 내가 이런 말 하는 상황도 웃기네. 서진이 형 그냥 인간적으로 좋은 거지 다른 감정은 없어.”
“알겠다니까. 오면 이서진한테 요리나 시켜야지. 쓸모없는 자식.”
“근데 좀 궁금하다, 윤정신 집. 혼자 살아?”
“너랑 둘이 살고 싶지만, 현재까진 독신.”
“정말 틈틈이 지랄하는구나. 나랑 살면 맨날 밥해 주고 돈 벌어다 주고 할 거야?”
“심지어 집안일도 내가 할 거야. 끌리지? 조신하지?”
“그럼 난 뭐 해?”
“할 수 있는 거 있잖아.”
그 말에 내가 그의 등을 팍 때리자, 그가 엄살을 부리며 아픈 체했다.
“형 지금 약속했다? 나중에 살길 막막하면 형 집에 얹혀산다?”
“너야말로 지금 약속했다. 남아 일언 중천금이야.”
“난 좋은 거 아니야?”
“나도 좋아.”
돌아온 윤정신의 반응에 얼떨떨해졌다. 사랑한다는 건 호구가 된다는 것과 동의어인 걸까? 그럼 난 사랑 같은 거 절대 안 하고 싶은데.
“왜 좋아하니까 또 하기 싫지? 나 그냥 자립심을 키울래.”
“이미 말했어, 너. 못 무른다. 정 오기 싫으면 살길 안 막막하게 성공하든가. 그럼 나도 포기할게.”
“싫어. 그냥 무를래.”
“야박하다, 진짜.”
그나저나, ‘막막하면’이라는 표현이 맞는 걸까? ‘막막할 게 뻔하니까’나 ‘막막할 테니까’ 같은 게 와야 했던 거 아닐까. 보나 마나 막막할 텐데…….
“근데 진짜 나 뭐 해 먹고 살지? 막막하다.”
이 얘기 왜 시작했지? 갑자기 우울해졌다. 취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해야 할 텐데, 우리 집은 그렇게까지 잘사는 편은 아니니 말이다.
내가 우울해하자, 윤정신이 사뭇 진지하게 내 어깨를 토닥이며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영 안 되면 내가 일자리 소개해 줄게. 떵떵거리면서 살 정도는 안 되겠지만, 꼭 그렇게 살 필요도 없잖아? 가끔 기분 낼 수 있을 정도면 됐지, 뭐.”
“무슨 일자리?”
“글쎄……. 자격증 딴 거 있어?”
“조금?”
“어차피 당장 취업할 건 아니잖아. 그렇지?”
“응. 아직은 좀……. 안 내켜. 마음은 뭔가 조급하고 불안하긴 한데.”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자리는 꼭 있어.”
순간 서진이 형이랑 대화하는 줄 알았다. 윤정신이 웬일로 이렇게 진지한 격려를?
“오. 방금 진짜 좀 형 같았어. 뭔가 연륜이…….”
“내가 성숙해진 값을 허리로 잘하는데.”
“지금은 다시 윤정신이네…….”
“너 왜 내 이름을 욕처럼 쓰냐?”
나는 윤정신의 반응이 웃겨서 작게 웃었다. 그는 욕먹고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허허 웃었다.
“난 너 웃으면 그렇게 좋더라. 막 간질간질하고.”
“나한테 너무 빠진 거 아니야?”
“새삼스럽게.”
“이만 사고 가자. 그래서 서진이 형은 부를 거야?”
“그런다니까. 나 진짜 요리나 배워 볼까? 학원 다니면서?”
윤정신이 계산대 쪽으로 카트를 밀고 가며 말했다. 요리라, 배워서 나쁠 거 없을 거 같은데.
“그럼 배워서 나 맛있는 거 해 줘.”
“맛있는 거 뭐? 한식, 일식, 양식 뭐 배워 볼까?”
“양식!”
한식이나 일식도 좋긴 하지만, 나는 양식이 제일 좋다. 내가 그렇게 답하자, 그는 전에 내가 디저트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린 듯 말했다.
“아니면 제빵 배워 볼까? 바리스타 자격증이랑 같이 따서 나중에 카페 하나 차리는 거지. 어때?”
카페? 돈 여유만 있다면 왜 안 좋겠는가? 상상만 해도 여유로운 삶이었다. 나도 적당히 한적한 가게 하나 차려 놓고 여유롭게 살았으면.
“좋다.”
“직원으로 너 하나 두면 진짜 딱이겠는데? 같이 학원 다닐까?”
카페 직원? 그럼 빵 굽고 커피 만들고 그러는 건가. 별로 자신 없는데.
“으음. 내가 딴 자격증은 컴활 같은 것들인데……. 회계도 있고. 나 그런 거 만드는 재주는 없어서.”
“내가 만들고 넌 다른 일 하면 되잖아.”
“그럴까? 나 써 줄 거야?”
“당연하지. 그럼 나 빨리 공부해야겠다. 인테리어도 예쁘게 해 놓고, 노래도 좋은 거 틀고. 재밌겠다, 그렇지?”
“나랑 헤어져도 직원으로 써 줄 거야?”
“헤어진다고 안 볼 건 아니잖아. 네 마음이 바뀌면 나랑 결혼하는 거고, 내 마음이 바뀌면 너한테 밥 잘 사 주는 형으로 남는 거고.”
“둘 다 안 바뀌면?”
“지금처럼 살겠지. 난 너 꼬시고, 넌 안 받아 주고.”
“완전히 자강두천인데? 형도 신기하다. 난 쓸데없는 자존심 있어서 나 안 좋아하는 사람 절대 안 좋아하는데.”
“자존심 안 상해서 이러겠냐? 굽히는 거지.”
그 말을 들으니까 새삼 내가 자존심을 많이 건드렸는데도 윤정신이 많이 참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워낙 오냐오냐 잘 받아 주다 보니 편해서 예의 없게 굴 때가 많았는데.
나는 장하다는 의미에서 그의 엉덩이를 톡톡 쳐 주었다.
“뭐야, 어딜 만져?”
“잘했다고 토닥토닥해 준 건데?”
“아닌데? 좀 주물럭댄 거 같은데? 헷갈리는데 좀 더 만져 볼래?”
“형은 진짜 이러는 것만 아니면 좋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좀 극혐이야.”
“거짓말하지 마, 그래도 안 좋아할 거잖아.”
눈치가 왜 이렇게 빨라졌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그런가. 근데 형도 꽤 매력 있어. 이건 진심이야.”
“고맙다……. 그렇게 말해 줘서.”
우리는 계산을 마친 후 산 것들을 택시에 싣고 그의 집으로 갔다.
* * *
윤정신이 사는 곳은 고급 아파트였다. 엘리베이터가 금빛이라서 왠지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외부만 보고 짐작한 것과 달리 집 내부는 굉장히 심플 하고 깔끔했다. 탁 트이고 넓어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그가 환기를 시킨다며 베란다 문을 열어 놓으니 상쾌한 바람이 산들산들 집 안으로 들이찼다.
“집 좋은데?”
“들어와서 살래?”
“아니. 형, 오늘은 방송 안 켜?”
내가 소파에 뛰어들며 그렇게 묻자, 그가 피식 웃으며 장바구니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왜? 먹방이라도 켜랴?”
“나 고급 인력인 거 알지? 잘생겼잖아.”
“이서진까지 올 텐데 셋이서 모니터 앞에 앉아서 음식 먹는다고 생각해 봐. 현타 진하게 올걸?”
그림이 좀 끔찍하긴 하다. 먹방은 일단 패스.
“게임 방송은?”
“글쎄. 이서진 계정 탐방이나 켤까.”
“어어. 좋다. 고자본이잖아. 난 토라 계정 구경할래.”
“지금?”
윤정신이 장 봐 온 것들을 정리하다 말고 저벅저벅 방으로 걸어가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그러고는 자신의 계정으로 로그인을 하고 게임을 실행시켜 둔 후, 서진에게 전화를 하러 베란다로 사라졌다.
오오, 토라 캐릭터. 한 번만 써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계정엔 부캐도 장난 아니게 많았는데, 그중에 닉네임이 우기인 게 있었다. 대체 이건 뭐야? 나는 쪼르르 베란다로 가서 그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닉네임 우기 뭐야? 원래 가지고 있던 거야?”
그가 송화기 부분을 손으로 가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 그거. 샀어.”
“미친……. 나도 안 산 걸? 징하다. 나 던전 좀 돌아도 돼?”
“응. 어, 뭐라고? 아니. 우기랑 같이 있지. 같이 장 좀 보고.”
나는 통화하는 그를 뒤로하고 다시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갔다.
토라 캐릭터로 접속하니, 언제나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그의 캐릭터가 사냥터에서 젠 되었다. 뭐야? 왜 이딴 곳에서 껐어? 나는 황급히 마을 귀환 주문서를 썼다. 안전한 곳에 옮겨 두고 좀 끄지……. 하여튼 윤정신.
장비 창을 좀 구경하려는데, 친구 창과 귓속말로 인사가 쏟아졌다.
[방울: yo 정신~~병자]
[보보: 토하]
[정글> 형 전에 찾던 장신구 제작 재료 우편 했어요]
[응뀨: ㅎㅇ]
[미미> 쩡신쓰~~]
본주 아니라고 말해야 하나? 나는 그냥 인사 오는 걸 다 무시하고 친구 창을 열어 보았다.
[방송]이라는 카테고리에는 게스트와 팬, 방송 매니저 같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고, 나머지 카테고리는 [1], [2]였다.
의미 불명이다. 나는 버찌나 King, 그 밖의 몇몇 사람들과 함께 [1]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 좀 친하면 [1], 덜 친하면 [2]인 게 아닐까? 나는 카테고리를 두 개 생성해서 나는 [귀욤둥이] 카테고리에, 버찌는 [사랑해] 카테고리에 넣어 두었다.
나는 장비 창을 조금 구경하다가 토라 캐릭터에 내가 평소 갖고 싶어 했던 한정 캐시를 입혀 놓고 던전을 격파해 보았다. 와, 몹이 그냥 녹아내리네. 감탄하며 인벤토리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파티 신청이 왔다.
[미미: 정신 히든 필드 같이 깨자구우]
[미미: 왜 내 말 씹냐그~~]
나는 파티 신청을 거절하고 미미 님에게 귓속말을 했다.
[토라> 본주 아니에요]
[미미> 지랄도 아니지?]
[미미> 윤정신 아니라고?]
[토라> ㅋㅋ진짜 아니에요]
[미미> 헐... 진짜?]
[토라> 넴]
[미미> 죄송 ㅠ]
[미미> 정신이 어디 갔어요?]
윤정신, 의외로 좋아해 주는 친구도 있었구나. 신기하다, 왠지.
[토라> 이따 오면 전해드릴게요]
[미미> 정시니한테 미미쟝이 기다린다고 호다닥 오라고 전해 주쎄용...♡]
……하트 뭐지? 윤정신 숨겨 둔 랜선 애인인가? 마침 윤정신이 통화를 끝내고 터덜터덜 돌아오기에 나는 화면을 가리켜 보였다.
“뭐?”
“누가 형 애타게 찾아.”
“누가?”
윤정신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화면을 확인했다. 그는 미미의 닉네임을 확인한 뒤에 무어라 귓속말을 남겼다.
“아아, 난 또 누구라고.”
“누군데?”
“친구.”
“남자야?”
“아니? 여자.”
[토라> 미미 나 지금 애인이랑 같이 있어서]
[토라> 바쁘니까 혼자 놀고 있어^~^]
[미미> 헐 너 연애 하냐]
[미미> 언제부터?]
[미미> 구라 아님 ㅡㅡ? 나 심심한데...ㅠ]
[토라> 그럼 우리 자기랑 던전 돌고 있어]
“싫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내가 왜?”
“조금만 놀아 줘. 쟤 친구가 없어.”
“뭐 하고 놀라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윤정신은 부탁한다며 그대로 주방으로 사라져 버렸고, 나는 미미 님과 어색하게 둘이 남게 되었다.
[토라> 뭐하고 노실래요]
[토라> 저 좀 노잼 인간인데]
[미미> 호고곡... 괜차나요 ㅠ 혼자 놀게요...]
[미미> 그리구 윤정신이랑은 아무 사이 아니니까 혹시 기분 안 나뿌셨우면...ㅠ]
[토라> ㅋㅋㅋㄱㅊ 그런 거로 질투할 사이 아니에요 저희도]
[토라> 근데 친구 없으세요?]
[미미> 아아...ㅎ 네 ㅠ 서버 이동을 해서]
[미미> 거기서 좀 안 좋게 돼서 이동해 왔어용]
[토라> ㅇㅎ]
[토라> 친소 해드릴까요]
[미미> 아 애인 님두 이 겜 하세여??!]
[토라> ㅇㅇ저 폐인임]
[토라> ㅈㅁ요]
나는 대충 미미 님과 맞을 것 같은 지인 몇에게 귓말을 보내 보았다. 대부분은 로그아웃이거나 잠수였고, 한 명에게서 답이 왔다.
[으앙> 오잉 토라 님!?]
[으앙> 귀하신 분이 왜 이런 누추한 사람에게]
[토라> ㅋㅋㅋㅋ으앙 님 똥꼬쇼 뭔데요]
[토라> 저 청혼이에요]
[으앙> 아 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팬이라...]
[으앙> 너무 황송했네요...ㅠ^ㅠ]
[토라> ㅋㅋㅋ혹시 친소 받으실? 토라도 덤으로 드릴게요]
[으앙> 헉 ㅋㅋㅋㅋ 누군데용?]
[토라> 초메 드릴게요]
나는 으앙 님과 미미 님에게 초대를 보냈다.
그들이 대화방에 입장했다.
<‘미미’ 님이 대화에 참여합니다.>
<‘으앙’ 님이 대화에 참여합니다.>
[토라: ㅎㅎ사실 저도 누군지 잘 모르지만]
[토라: 외로우시다니까 좀 놀아주시길]
[으앙: ㅋㅋㅋ청혼 님 근데 왜 그 계정에 계세요??]
[토라: 집 놀러왔다가 템 구경 중이에요]
[으앙: 안녕하세용 ㅎ 제가 친추 걸게요!!^0^]
[미미: 헉 ㅠ 감사합니다]
[미미: 잘 지내봐용...♡]
뭐 이렇게 나의 현명한 판단으로 귀찮은 일은 해결한 것 같고. 나는 다시 던전이나 뛰어 볼까?
[토라: 전 그럼 이만 ㅂㅂ]
[으앙: 본계로 오시게요?]
[토라: ㄴㄴ ㅎ 이거로 던전 깰 거]
[으앙: ㅋㅋㅋ 넵 화이팅!]
그렇게 던전을 두 곳 정도 돌았을까, 부엌에서 재료들을 손질하고 있던 윤정신이 미적미적 걸어와 화면을 쓱 보았다.
“어? 미미 없네?”
“어. 친구 하나 붙여 주고 그냥 왔어.”
“좀 놀아 주지. 나빴다.”
“뭐가? 내가 나쁘다고? 나 좀 섭섭해지려 한다?”
윤정신의 지대한 관심은 피곤하지만, 막상 그가 나 아닌 다른 사람 편을 드니 은근히 섭섭해졌다. 내가 서운한 티를 팍팍 내자, 그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나쁜 뜻이 아니라. 음.”
“왜 내가 불편해서 놀기 싫다는데 자꾸 놀아 주라고 그래?”
“아니, 그냥……. 쟤가 좀 사회 부적응? 그런 거라서. 아무튼, 그래. 미안.”
막상 윤정신이 쩔쩔매며 사과를 하자 마음이 좀 안 좋아졌다. 괜한 심술을 부렸나? 그래서 그냥 그의 배를 툭 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나랑 저 사람이랑 누가 더 중요해? 어?”
“당연히 너지.”
“한 번 봐준다. 근데 진짜 이분이랑 뭐 하고 놀아? 일부러 친구 소개해 주고 갔는데.”
뭘 해야 하하 호호 놀 수 있지? 고민이 됐다. 별로 그림이 잘 그려지진 않는데. 그러자 윤정신이 별거 없다는 듯 말했다.
“너 맨날 하는 옷 입히기 그거 하면 좋아할걸? 그냥 적당히 말동무 좀 해 주면 되긴 한데, 싫으면 말고.”
“근데 웃긴다. 형도 맨날 이 사람 안 놀아 주고 나한테 오면서 나는 나쁘다 하고.”
“그래서 네가 더 좋다고 했잖아. 그래도 하루에 얼마씩은 놀아 주고 있어.”
나는 으앙 님에게 귓속말로 미미 님과 함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으앙 님은 마을에서 다른 지인들과 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미미 님에게 초대 메시지를 보냈고, 곧 미미 님이 대화방에 들어왔다.
<‘미미’ 님이 대화에 참여합니다.>
[토라: 머하세요]
[미미: 앗 그냥 있어용 ㅎ]
[토라: 저하구 놀아여]
[토라: 저 제 계정으로 올 테니까 청혼으로 친 주세요]
나는 토라의 계정에서 로그아웃하고 내 아이디로 접속했다. 그러곤 미미 님을 데리고 으앙 님을 포함한 친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나도: 청혼ㅎㅇ~]
[청혼: ㅎㅇ]
[청혼: 저 친구 데려왔는데]
[청혼: 서버 이동해서 친구 없다심 다들 좀 챙겨주세요]
[시오: 좋겠다 전 서버 이동 안 해도 친구 없는데 ㅎ]
[으앙: ㅋㅋㅋㅋㅋ 시오 님 핵인싸시면서!!]
[세련: 서버 이동 ㅠㅋ 저도 한번 했다가 적응 못 해서 다시 왔어요 ㅋㅋㅋㅋㅋ]
[나도: 친하게 지내요 ㅎㅎ]
[미미: 안녕하세용...ㅎ]
[미미: 제가 친화력이 없어서 ㅠㅠ]
[미미: 토라 말고는 친구가 없어요...]
[으앙: 아 토라 님 친구셨구나ㅋㅋㅋ]
[으앙: 청혼 님이 아까 저한테 소개 먼저 해주셨는데 자기도 잘 모르는 사람이래서 뭐지 했어요]
[현지: 하나 뿐인 친구가 토라쓰면]
[현지: ㄹㅇ외로울 듯 토라쓰 맨날 청혼 뒤만 졸졸 따라 다니자나 ㅋ]
[청혼: ㅋ난 외롭고 싶어 차라리]
[청혼: 토라가 저녁밥 해주기로 했어ㅎㅎ]
[현지: 엥 만났냐??]
[미미: 근데 두 사람은 언제부터 사귄 거예요?? 처음 들어서 ㅠ]
아니, 윤정신……. 그딴 말은 왜 해서! 이게 이렇게 스노우볼이 굴러가네?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현지: 엥 청혼이랑 토라쓰가 사귄다고요?]
[현지: 그럼 gay 아닌가?ㅋ]
[현지: 너 어쩐지... 나처럼 완벽한 여자에게 짐승이니 뭐니...^-^ 방울 달린 남성이라기엔 수상쩍다 했지ㅋ]
[청혼: 게이도 방울 있는데;]
[청혼: 아 그리고 사귀는 거 아니에요 그거 농담한 거예요 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미미: 헉 남자셨구나]
[미미: 윤정신이 너무 자연스럽게 자기라고 해서 ㅋㅋㅋㅋ 진짜 속았네요 ㅠ]
[청혼: 아 ㅎ 아님]
[현지: 쟤는 약혼남 따로 있는 인기 게이ㅋ 토라쓰는 일방적 구애 ㅋ]
[현지: 버찌라고 초핸섬가이 있음요 ㅇ]
[청혼: 여물자 현지야 ㅎㅎ]
[현지: ㅎㅎ반사 너나 많이 ㅗ]
잘 넘겼나? 어차피 곧 헤어질 건데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피곤해지니까, 괜히.
대충 그렇게 놀다가 서진이 도착하고 본격적인 요리가 시작되면서 나도 게임을 끄고 싶어졌다. 나는 나가기 전에 미미 님에게 파티 신청을 걸었다. 곧 미미 님이 그것을 수락했다.
<‘미미’ 님이 파티에 참가합니다.>
(미미: 넵?)
(청혼: 저기 나중에 윤정신한테)
(청혼: 왜 사귄다고 거짓말 했냐 이런 소리 ㄴㄴ)
(미미: 앗 넵...! 근데 왜요?!)
(청혼: ㅋㅋ진짜 사귀어서요)
(청혼: 쟤넨 다 저 남잔 거 알아서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아서)
(청혼: 암튼 아웃팅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그렇다 치고 윤정신은 방송해서 좀)
(미미: 아아... 아 네네네!)
(청혼: 넴 ㅂㅂ)
아무튼, 거슬리는 건 쐐기를 박아 놔야지. 어찌 됐든 지금은 내 애인인데 다른 사람 꼬이는 건 사양이다.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컴퓨터를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