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8)

3. 

[토라: 그래서 상금으로 그거 샀다고?]

[청혼: ㅇㅇㅇ]

[토라: ㅋㅋ귀엽네]

[토라: 나도 귀여운 옷 있는데]

[청혼: ㅁ?]

토라의 코디는 그리 자주 바뀌지 않는 편이라 새삼 그가 다른 룩을 입은 모습이 궁금해졌다. 곧, 토라의 룩이 바뀌었다.

[청혼: 헐 귀여워]

[토라: 근데 선물 받은 거라 교환 불가인 거 한 벌 뿐이야 ㅋㅋㅋㅋㅋ 줄 수가 없다]

[청혼: 그거 지금 비싸 ㅋㅋ]

[버찌: ㅋㅋㅋㅋㅋ 그런 거도 있었어?]

[토라: 안 껴서 그렇지 뭐 많긴 많아]

그렇게 말한 토라는 정말로 꽤 많은 한정 캐시 아바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인기 많은 거로…….

[청혼: 왜 저런 거 두고 코디 박제해 두지]

[청혼: 나라면 10분에 1번씩 갈아입힐 텐데]

[토라: ㅋㅋㅋㅋㅋ뭐가 제일 귀여워?]

[청혼: 두 번째 거]

[토라: 그럼 그거 간다]

[청혼: 왜냐면 나 그거 하얀색 있어]

내가 코디를 갈아 끼우자, 버찌 혼자만 붕 뜨게 되었다. 흔치 않은 그림이었다.

그때, 버찌의 룩이 바뀌었다.

[청혼: 헐 뭐야 그거?]

[청혼: ㄹㅇ 처음 보는데]

[버찌: ㅋㅋㅋ 이거]

[버찌: 예전에 편의점 도시락 콜라보 할 때 참가자 10명 추첨해서 준 거야]

[청혼: ㅁㅊ]

[청혼: 초록색도 있었구나]

10명 추첨에는 대체 어떻게 든 거래? 운도 좋다.

나는 새삼 버찌에게 질렸다. 저런 아이템이 있는 줄도 몰랐네. 웬만한 건 다 아는데…….

[토라: 눈새다 눈새]

[버찌: ㅋㅋㅋㅋㅋㅋ]

[토라: 거기서 한정 템이 나오네 ㅋㅋㅋㅅㅂ내 커플룩]

[청혼: 커플룩 이 난리네]

[청혼: 내 커플은 버찌뿐인데;;]

[버찌: ㅋㅋㅋㅋㅋㅋㅋㅋ]

[토라: ㅋ 우서?]

[토라: 이서진 쟤 가만 보면 은근 즐기는 것 같아]

[버찌: ㅎㅎ]

[청혼: ㅎㅎ♡]

[토라: 우기야 나도 좀 아껴줘]

[토라: 그새 뽕 빠졌냐]

[청혼: 하루치였어]

[토라: ㅅㅂㅋ]

[버찌: 어 이름 아네??]

버찌가 조금 놀란 듯 말했다. 나는 어제 저지른, 두고두고 후회할 그 일을 떠올렸다.

[청혼: 윤정신병자에게 신상 털린 것이에요]

[버찌: ㅋㅋㅋ 진짜?]

[토라: 전번 땃다]

[토라: 내 피앙세니까]

[버찌: 웬일이야]

[버찌: 아 ㅋㅋ]

[청혼: 손발(이었던 것)]

[토라: ㅎㅎ자기얌]

[토라: 보이스톡 걸어야지 ㅎㅎ]

[청혼: 받을 리가?ㅋㅋㅋ]

[토라: 그럼 페이스톡 걸어야지 ㅎㅎ]

[청혼: 토라 차단해야지 ㅎㅎ]

[토라: 잘못했어]

[토라: 잘못햐ㄲ어]

[버찌: ㅋㅋㅋ 왜 이렇게 집적거려]

[버찌: 부담스럽겠다]

[청혼: 아 내말이;;]

[청혼: 진짜 왜 저래]

[토라: 너 좋아서 그러지 ㅎ]

[청혼: ㅗ]

[토라: ㅋㅋㅋ내가 신기한 거 알려줄까?]

[토라: 너 내 고등학교 후배야;;]

어휴, 징글징글해. 물론 장난이겠지만 참 지치지도 않고 치근덕거린다.

나는 조금 짜증이 나서 팩트를 날렸다.

[청혼: 어차피 늙어서 나랑 같이 못 다녔잖아]

[토라: 갑자기 후드려 패네]

[토라: 근데 니 프사 넘기다가 본 건데]

[토라: 나 ㄹㅇ 거기 나왔어]

[토라: 나중에 스승의 날에 찾아가면 이창선 선생님한테 윤정신 아냐고 물어봐봐 ㅋㅋㅋㅋ]

그 채팅을 보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얘가 이창선 선생님을 어떻게 알지? 애초에 내 학교는 어떻게 안 거야? 게임 할 때 학교 이름 같은 거 올린 기억 없는데…….

[청혼: 미친 이창선 뭔데]

[청혼: 개소름끼치네 내 프사 뭐?]

[토라: 교복 ㅋ 졸업앨범 보여 줄까]

[청혼: ㅋㅋㅋㅋㅋ씨발 소름]

[청혼: 살려줘 버찌]

[청혼: 이제는 육신으로까지 찾아오려해]

[버찌: ㅋㅋㅋㅋㅋㅋㅋㅋ 와 그럼 동문인 거야?]

[버찌: 신기하다 인연이 그렇게 되네]

[청혼: 인연이라니 우연이지]

[토라: ㅎㅎ 조만간 같이 찾아뵐까 창선 님]

[토라: 나 빨간떡볶이 아주머니랑도 존나 친했는데]

[토라: 나 가면 맨날 유부 주머니 주심]

저렇게까지 상세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정말 같은 학교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스토킹 같은 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참 소름 끼치는 우연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청혼: 난 떡볶이 안 좋아해]

[청혼: 그리고 너랑 안 가]

[토라: 아 ㄲㅂ]

[토라: 야 글고 자꾸 나한테 너라고 하는데]

[토라: 누난 내 여자니까 식 논리냐?]

[토라: 너라고 부를게... 뭐라고 하든지...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게...]

[청혼: 아ㅋㅋㅋㅋㅋㅋㅋㅅㅂ]

[토라: 곧 이름도 부르겠다 아주]

[청혼: 윤정신]

[토라: 오... 박력]

[토라: 다시 한번 반했습니다...]

[청혼: 롤백 가능?]

[토라: 너만의 윤정신이 될게]

[토라: it’s a beautiful night ~~^^]

[토라: 아 띵크 아 워너 메리 유~~^^]

[버찌: 중간 가사는 어디 갔어]

[토라: 청혼이가 불러줬을 거야ㅎㅎ]

[청혼: 와 진짜 사람 빡치게 하는 방법 연구하는 게 분명함]

[버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와, 근데 진짜 신기하긴 하네. 어떻게 같은 학교였을 수가? 진짜 다음에 학교 가면 선생님께 한번 여쭈어봐야겠다. 사립 학교라 선생님들이 거의 바뀌지 않으니 얘기할 거리는 많겠다 싶었다.

[청혼: 버찌는 어디 살어]

[버찌: ㅋㅋㅋ 갑자기 나?]

[토라: 야 쟤 강남 살아]

[토라: 금수저야ㅋㅋㅋㅋ]

[버찌: ;;]

[청혼: 헐ㅋ 역시]

[청혼: ㅋㅋㅋ뭔가 돈 많을 거 같긴 했어]

사업한다면서 일 안 하는 거 보면 뻔하지, 뭐……. 그래도 이렇게 들으니 뭔가 더 거리감이 느껴졌다.

[청혼: 근데 윤정신도 버찌 실친이야?]

[토라: 너 이제 완전 자연스럽게 말 깐다]

[토라: 실친은 아닌데 가끔 만나서 놀아ㅋㅋㅋ]

[청혼: 버찌 왜 그런 선택을 했지...?]

[토라: ㅎㅎ 담엔 너도 ㄱ?]

글쎄, 내가 저 둘 사이에 껴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아무리 허울 없이 지낸다 해도 나이의 장벽이 있는데. 혼자 붕 뜰 것 같았다.

[청혼: 생각해 볼게]

[버찌: ㅋㅋㅋ 재미없을 텐데]

[버찌: 쟤랑 만나면 피시방 아니면 당구장이라서]

[토라: 야 다른 거 하려면 왜 못 해]

[청혼: ㅋㅋ 나 가면 맛있는 거 사 주나?]

[토라: 돈 내라 하겠냐 ㅋㅋ]

[버찌: 뭐 먹고 싶은데?]

[청혼: 몰라 생각 안 해봤는데]

[청혼: 둘이 언제 만나는데?]

[토라: 난 너 오면 내일도 가능]

[버찌: 나도 요즘 일 없어서]

별생각 없이 맞장구친 거였는데, 의외로 그들이 진지하게 환영하자 당황스러웠다. 뭐지. 진짜 만날 생각은 없었는데. 내일이라는 구체적 날짜까지 나오자 약간 불안해졌다. 좀 부담스러운데…….

[청혼: 나가면 토라한테 한대 맞을 거 같은데 기분 탓?]

[토라: 때릴 데도 없겠더만]

[토라: 깝죽대는 거 육성으로 들으면 좀 빡칠 수도 있을 거 같네 ㅎㅎ]

[청혼: ㅋ 안 갈래 그럼]

[청혼: 나 연약해]

[토라: 절대 안 깝치겠다는 선택지는 고르지 않네]

[청혼: 그 좋은 걸 왜 안 해]

[토라: 아 화 안 낼게]

[토라: 만나자]

[토라: 같이 놀자]

나쁜 사람들은 전혀 아닌 것 같긴 한데. 토라는 보류한다 쳐도 버찌는 꽤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일대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게임에서 사귄 친구들과 실제로 만나 논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슬슬 만나 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청혼: 버찌 나 가면 뭐 해줄 거야]

[버찌: 음...]

[버찌: 뭐 하고 싶은데?]

[청혼: 나 그럼 칵테일 사줘]

[버찌: ㅋㅋㅋ 술 마시게?]

[버찌: 알겠어]

[청혼: ㅎㅎ 버찌 최고다]

[청혼: 언제 볼 거야]

[청혼: 진짜 낼 보실?]

[버찌: 난 괜찮아]

[청혼: 나도 ㄱㅊ 근데 너무 일찍은 안 돼]

사정상 혼자 외출하기가 힘들어서 형이 학원에서 돌아오면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토라: 그럼 저녁 먹고 좀 놀다가 칵테일 바 가면 되겠다]

[토라: 버찌 집에서 방송 키자 ㅎㅎ 캠방]

[토라: 시청자 수 떡상 할 듯]

[청혼: ㅋㅋ]

[버찌: ㅋㅋㅋ 상관은 없는데]

[버찌: 재밌을까 그게]

[청혼: ㄹㅇ노잼 방송 각]

[청혼: 사람들 다 욕하고 구취해서 구독자 10만 명 하락]

[토라: 야 안 돼 나 구독자 10만 명대야;]

[토라: 그리고 바보들아 얼굴이 재밌잖아 그거면 다한 건데ㅋㅋ]

[토라: 꽃미남 삼총사 컨셉 간다]

[청혼: ㅋㅋㅋ현실은 1존잘과 2어물]

[토라: 아님 우리 비빌 수 있어]

[토라: 쟤 캠빨 안 받는 곳에 세우면 돼]

뭐 그렇게, 어쩌다 보니 만날 약속을 잡게 되었다.

* * *

약속 당일이 되었다.

막상 나가려고 하니 옷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좀 차려입으면 윤정신이 놀릴 것 같고, 편하게 입자니 칵테일 바도 갈 건데 좀 창피할 것 같고…….

고민하다가 약속 시간이 임박해 대충 옷을 꺼내 입고 약속 장소로 갔다. 형이 데려다주었고, 약속 장소 코앞에서 형과 헤어진 나는 혼자 남아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안한데. 토라 얼굴은 캠으로 작게 본 게 다여서 알아볼 자신이 아예 없었고, 애초에 정시에 나왔을 것 같지도 않고. 버찌 얼굴도 사진으로만 봤으니 어쩌면 못 알아볼 수도 있다.

걱정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그것이 기우였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하얀 승용차에 비스듬하게 기대 서 있는 저 남자, 누가 봐도 이서진이었다.

아는 얼굴이 보이자, 사실은 낯선 얼굴인데도 안심이 되었다. 나는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말없이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떼자, 그가 화색을 띠며 나를 반겼다.

“어, 맞지?”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걷어 올려진 셔츠 소매 아래로 보이는 시계가 무진장 비싸 보였다.

“언제 왔어?”

“10분 전쯤?”

“나 3분 늦었네, 일찍 온 줄 알았는데.”

“괜찮아, 어차피 정신이 맨날 늦어서. 전화 좀 해 봐야겠네.”

그가 자연스럽게 내 손목을 잡고 다른 손으론 윤정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 완전 모델이 따로 없네……. 같은 남자가 봐도 참 멋지긴 하다. 내 눈높이가 그의 턱선 정도까지 오는 것 같은데.

얌전히 서진의 옆에 서 있는데, 저 멀리서 묘하게 건들거리며 오는 인영이 보였다. 저쪽도 참 티 나는군. 못 알아볼까 봐 걱정한 게 무색했다. 서진도 그를 봤는지 꺼냈던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고, 윤정신은 멀리서 핸드폰을 흔들며 뛰지도 않고 여유롭게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오, 차 끌고 왔네? 웬일? 집에 어떻게 가져가게?”

“어차피 집 들를 거잖아. 그때 놓고 오지 뭐.”

윤정신이 서진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하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오버스럽게 아는 척을 했다.

“우와. 최우기다, 최우기. 아기다, 아기.”

“……미친.”

“와……. 인사하기도 전에 욕부터 박냐? 너 진짜 나한테 너무한다고 생각 안 해?”

윤정신이 내 볼살을 살살 꼬집듯 만지며 투덜거렸고, 나는 그 손을 쳐 냈다. 현실에선 좀 덜하겠지 했는데 오히려 이쪽이 더 정신 사나운 것 같다.

“하지 마.”

“목소리 허스키하다. 완전 섹시.”

“아오, 좀 작게 말해.”

내가 질색하며 서진의 뒤쪽으로 숨자, 그가 차 뒷문을 열어 주었다. 내가 도망치듯 차에 올라타자 윤정신도 냉큼 내 옆자리에 탔다. 어쩐지 그 모습이 아니꼬웠다. 조수석에 탈 것이지…….

“면허 없어?”

“없는데? 오토바이 면허는 있어.”

“그럼 넌 그거 타고 오면 안 돼?”

“싫은데? 네가 그러니까 더 놀리고 싶다.”

“아, 형. 얘 이상해.”

내가 운전석에 올라타며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서진에게 그렇게 말하자, 그가 백미러로 정신을 흘깃 보았다.

“싫다는데 왜 그래.”

“와, 너 웃긴다. 왜 얘는 형이고 난 얘냐?”

“정신이 형.”

“오오. 한 번 더 불러 줘.”

“나이값 하면 형이라 불러 줄게.”

“아, 진짜 안 되겠다. 우기 보쌈해 가야겠다. 형한테 장가오자.”

도대체 얘한텐 통하는 수가 뭘까? 뭐라고 말해도 타격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나는 질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양성애자라서 성별 따지진 않는데, 그거하곤 별개로 넌 정말 아닌 거 같아.”

“왜? 나 해외여행도 자주 보내 줄 자신 있는데. 나도 여자 남자 안 가려.”

“웬 해외여행?”

“홍콩. 원할 때마다 보내 줄 수 있지.”

“……형, 혹시 아는 변호사 없어? 이런 거 성희롱으로 고소 안 돼?”

내가 진지하게 그에게 묻자, 서진도 그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정색을 하고 정신에게 말했다.

“윤정신, 선 좀 지켜. 스무 살 애한테 뭔 그런 말을 해?”

“헐. 진심인데. 그리고 나도 스물일곱 살 애야. 애초에 홍콩이 왜 성희롱인데? 너희 그거 음란마귀다.”

“나 조수석 갈래. 얘 무서워…….”

“그럴래?”

“아, 가지 마. 장난 안 할게. 뭔 말을 못하겠네.”

윤정신이 내 손목을 잡아당겨 도로 뒷좌석에 앉힌 뒤,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여전히 미심쩍었지만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잘하자, 정신아.”

“너 맞먹지 마라. 나도 형이라고 불러.”

“헛소리 안 하면. 딜?”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가 의외로 순순히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고리를 걸었다. 윤정신은 팔을 조수석 헤드에 감으며 서진에게 물었다.

“근데 뭐 먹을 거냐?”

“나 아는 곳 있는데, 메뉴 꽤 다양하니까 가서 메뉴판 보면서 적당히 시키자.”

“오케이. 우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난 그냥 디저트 맛있었으면 좋겠어.”

“그렇다는데?”

“어……. 괜찮았던 거 같은데. 내가 미식가가 아니라서 그런 거 잘 몰라.”

“맛없으면 카페 같은 곳 가서 시켜 먹지, 뭐. 나 전 여친이 디저트 환장했어서 아는 곳 많아.”

“제빵 하는 애니메이션 좋아했나 보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윤정신이 딱밤을 때리려고 각을 잡았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했을 때에야 그는 내 턱을 놔주었다.

“까분다, 자꾸.”

“때리지 마, 나 멍 잘 든단 말이야.”

“안 때려. 쪼끄매서 때릴 곳도 없다, 야.”

“근데 학교 선생님 더 아는 사람 없어? 이창선 선생님만 아는 거야?”

“박순자 선생님이랑 조재현이랑. 근데 아직 다 계시나?”

윤정신이 기억을 더듬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 익숙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 게 어쩐지 신기했다.

“박순자 선생님 아직 계셔. 신기하다. 우리 학교였던 거 보면 공부 못했구나?”

“지는. 그리고 공부 못한 게 아니고 안 한 거지. 나 그래도 대학은 갔어.”

“대학 다녀?”

“지금은 졸업했지. 난 취업 생각 없었어서 입시 준비했거든. 근데 너 이름 들어도 어딘지 모를걸? 잡대라.”

“무슨 과인데?”

“중남미어.”

“그게 뭔데? 해 봐.”

“에스파냐어. 스페인 몰라?”

“그럼 처음부터 스페인이라 하면 되지. 인사해 봐, 나한테.”

“Te quiero.”

윤정신이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서진이 작게 웃었다. 틀린 건가?

“형, 이거 맞아?”

서진에게 묻자, 그가 조금 머뭇거리다 다시 웃었다.

“스페인어는 맞아.”

“인사가 아니구나? 욕했지, 나한테?”

“사랑한대.”

“아, 씨발……. 차라리 욕을 해.”

내가 팔에 돋은 닭살을 쓸며 욕을 하자, 윤정신이 우스워 죽겠다는 듯 비실비실 웃었다.

“사랑한다는데 왜 욕을 하래?”

“언어 고문인데, 거의.”

“진심인데.”

“네 마음 거절할게.”

장난이겠지? 묘하게 아리송하다.

윤정신이 정말로 나에게 호감을 느낀다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남자라서 싫은 건 아니지만, 윤정신은 그런…… 연애 쪽으론 전혀 생각이 안 되는데. 그냥 좀 웃기고 친한 형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자꾸 이렇게 장난인 듯 아닌 듯 호감을 표하니까 부담이 됐다.

내가 불편해하는 게 좀 티가 났던 모양인지, 곧 윤정신이 투덜거리며 내 팔을 툭 쳤다.

“야. 농담이다, 농담. 인상 좀 펴라. 내가 그렇게 아니냐?”

“인간적으로는 나쁘지 않지만 그런 쪽으로는 진짜 절대. 상상도 안 가.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야, 그건 좀 상처다. 너 그럼 오랑우탄이랑 사귈래, 나랑 사귈래?”

“당연히 둘 다 안 사귈 건데? 둘 중 하나 안 고르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면 널 고르긴 하겠지만 마음은 죽고 싶을 거야.”

“뭘 또 죽음의 위기까지 가정하냐? 아무튼, 나랑 사귀겠다 이거지?”

“그런 조건이면.”

“사실 너 둘 중 하나 안 고르면 죽는 거였거든? 이렇게 되면 우리 오늘부터 1일이지?”

내가 쏟아져 나오려던 말들을 눈빛에 실어 보내자, 뻔뻔스럽게 웃고 있던 윤정신이 움칠 놀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너 눈에서 살기 나온다.”

“나도 느껴져.”

“……저기. 도착했어, 얘들아.”

그러고 보니 어느새 차가 멈춰 있었다.

서진이 조용히 안전벨트를 풀고 먼저 내렸고, 나는 뒤이어 내린 윤정신이 내미는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눈앞에 보여서 별생각 없이 잡았던 건데, 윤정신은 아예 깍지까지 끼고 나와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아, 좀. 놔.”

“사귀는데 손도 못 잡아?”

“그만 좀 하라니까.”

내가 서진에게 애절한 눈빛을 쏘아 보내자, 결국 그가 윤정신을 내 세 발자국 뒤쯤으로 격리시켰다.

“왜 그래, 너. 우기 진짜 싫대.”

“귀엽잖아.”

“그래도 싫다는데 왜 자꾸 그래.”

“그래, 이 변태야.”

“변태라니……. 솔직히 맞긴 한데. 최우기, 네 이상형 뭔데? 일단 그게 난 아니라는 거 알았고.”

“너랑 정반대인 사람.”

“야. 그럼 네 친구 걔는 어때? 전에 네가 침팬지라고 한 애.”

“너랑 동급으로 싫어, 걔도.”

“얘는? 이서진은?”

서진도 내심 궁금했는지 빤히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 장난으로 하트 여러 번 날리긴 했는데 그거야 진짜 장난이고, 진심으로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버찌가 단순히 친구로만 느껴지냐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음…….”

“어쭈, 고민하냐? 나는 1초도 고민 안 하고 차 놓고?”

“버찌는 뭐라 해야 하지……. 사이좋은 친형 같아.”

“친형이면, 얘도 못 사귄다 이거지?”

“별로 아무 생각 없는데? 일단 확실한 건 넌 전혀 아니야. 너랑은 그냥 싫어.”

“와……. 왜지? 조만간 재검사받으러 온다, 딱 기다려라.”

“놀자고 모인 건데 넌 혼자 선보러 나왔냐? 왜 이렇게 자꾸 집적거려. 관심 없다니까.”

“관심이야 차차 생기겠지.”

와, 말이 안 통하네.

윤정신은 답답해하는 내가 재밌는지 킥킥 웃었다. 서진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너 원래 양성애자였나?”

“몰랐냐? 얘기했잖아.”

“몰랐는데. 난 계속 농담하는 줄 알았어.”

“야, 농담 아니라고 하면 얘 발작해. 농담이라고 쳐.”

내가 참지 못하고 윤정신의 등을 주먹으로 때리자, 그가 온갖 엄살을 부리며 몸을 꼬았다.

서진이 안내한 곳은 한적한 곳에 있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었는데, 조명이며 인테리어며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이런 곳은 처음 와 보는 것 같았다. 평일이라 손님도 적어서 조용한 것이 딱 마음에 들었다. 윤정신도 워낙 친근한 이미지라 나처럼 이런 곳은 처음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꽤 이런 환경에 익숙한 듯 보였다.

웨이터가 따라 준 물을 자연스럽게 마시고 있던 윤정신이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작게 기침을 하며 컵을 내려놓았다.

“왜?”

“이런 데 자주 와?”

“가족 모임 있으면 꽤 오지, 데이트할 때나. 왜?”

“다들 잘사는구나. 배신감 느껴져.”

“우리 집은 그냥 그런데? 방송하면서 나도 좀 벌었고. 부모님은 찜질방 하셔.”

나도 방송이나 해 볼까? 이따 윤정신한테 수입 얼마 정도 나오는지, 장비 같은 건 어느 정도 갖춰야 하는지 물어봐야겠다.

“오늘은 이서진이 쏘는 거니까 왕창 시켜야지. 뭐 먹을래? 메뉴 아래에 간략하게 설명 있어.”

윤정신이 메뉴판을 나에게 내밀었다.

글쎄, 이런 것도 아는 사람이 시켜야지……. 나의 난처함을 읽었는지 서진이 메뉴판을 살짝 잡아당기며 주문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셰프 추천 코스가 무난할 거야.”

“그럼 그냥 그걸로 하자.”

“정신이 넌?”

“상관없어.”

“그래, 그럼.”

곧 서진이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했고, 나는 막간을 이용해 핸드폰을 보았다. 친구들에게서 온 여러 카톡과 가족 단체 방에 온 카톡들이 보였다. 

[사랑하는 어무니: 우기 현이 집에 있어~~?]

[존경하는 형님: 난 학원]

[사랑하는 어무니: 치킨 사갈까~~?]

[존경하는 형님: 좋지 ㅋㅋ]

[존경하는 형님: 언제 오는데?]

[사랑하는 어무니: 10시쯤]

[존경하는 형님: 나도 그쯤 가]

[사랑하는 아부지: (이모티콘)]

아, 치킨이라니. 하필 오늘?

[나는 오늘 놀다 갈게]

내가 그렇게 카톡을 보내자 곧 답장이 왔다.

[사랑하는 어무니: 언제 와~~?]

[나 늦어 셋이서 먹어...ㅠㅠ]

내가 늦는다고 하니 걱정이 됐는지, 곧장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코스 요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아들. 오늘 뭐 하는데 늦어?]

“나 저녁 먹고 칵테일 바 가기로 했어.”

[누구랑?]

“아는 형들이랑. 밥 사 준대서 먹고 있어.”

[그래,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집 올 때 조심하고.]

“괜찮아. 조심히 집 들어갈게.”

[알겠어. 치킨 조금 남겨 놓을 테니까 재밌게 놀다가 와.]

“응, 사랑해.”

[엄마도 사랑해.]

내가 큰 사고를 한 번 겪었던 이후로 엄마는 걱정이 많다. 나도 엄마가 마음이 여리신 걸 아니까 최대한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막 포크를 집어 드는데,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누군데 그렇게 웃으면서 사랑한대?”

윤정신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엄마라고 말하려다가, 괜히 장난을 한번 쳐 보았다.

“애인.”

“있었냐?”

“어.”

“진심? 여자야, 남자야?”

“여자.”

둘 다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별생각 없이 구라 친 건데……. 왜 속는 거지?

“……뻥인데. 엄마야.”

“와. 나 집에 갈 뻔했다, 진심으로.”

윤정신이 안도 반, 어처구니없음 반의 탄식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참 나, 내가 더 어이없다. 만나자고 한 목적이 너무 뻔한 거 아닌지? 이런 위험한 놈이랑 같이 있는데 엄마가 걱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역시 너무 늦은 시각까지 윤정신이랑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도 은근히 걱정이고.

“나 근데, 그냥 술 안 마실래. 너무 늦기 전에 집 들어가야겠어.”

맥주라도 사 들고 가면 다들 좋아하겠지? 칵테일을 포기하는 건 좀 아쉽지만……. 일단 집에서 걱정하니까.

“왜? 어머니가 일찍 들어오라고 하셔?”

서진이 샐러드를 한 입 먹으며 심상하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좀 걱정이 많으셔서. 술 마시는 것도 밤에 돌아다니는 것도 위험하니까……. 난 체력도 자신 없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역시나 윤정신이 헐레벌떡 나섰다. 저 변태 새끼…….

“내가 데려다줄게.”

“진심으로 너 자신이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럼 내가 데려다줄까? 아니면 우리 집에서 자고 낮에 가도 돼.”

“음…….”

하긴, 내가 먼저 칵테일 바 가자고 해 놓고 빠지는 건 좀 그렇나? 혼자 택시 타고 가는 거나 가족들 귀찮게 하는 것보단 이 두 사람이 데려다주는 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핸드폰을 다시 켜서 엄마에게 카톡을 보냈다.

[엄마 나 완전 짱짱 쎈 형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진짜 걱정 안 해도 돼 ㅋㅋ 집에도 데려다준대 운동하던 사람들이니까 이상한 사람 있으면 뒤에 숨어 있을게 그러니까 나 걱정하지 말고 형이랑 아빠랑 치킨 맛있게 먹어]

“집이 엄한가 보다.”

내가 바로 쪼르르 카톡까지 보내자 서진이 그렇게 말했다. 하나도 안 엄한데.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내가 막내다 보니까 아직 아기 같나 봐.”

“이서진 참 사람 볼 줄 몰라. 얘처럼 오구오구 자란 티 나는 애도 드문데?”

“너 그거 욕이지?”

“이거 봐, 엄하게 자랐으면 나한테 이럴 수가 없어.”

윤정신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족들이 나한테 많이 져 주는 건 사실이지만, 나도 고마운 걸 아니까 잘하는 편인데…….

“나 외박은 좀 그렇고, 데려다줄 수 있어?”

“콜택시 불러서 같이 타고 가 줄게.”

“귀찮게 해서 미안. 사실 사고를 좀 크게 당한 적이 있어서. 택시 타면 괜찮겠지 했는데, 막상 나와서 생각해 보니까 좀 무섭네. 엄마도 걱정하고…….”

윤정신은 그 말을 듣고 전에 내가 공익인 이유에 대해 잠깐 대화한 것을 떠올린 것 같았다.

“아, 전에 그…….”

“응.”

“내가 네 방 앞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걱정하덜덜 마라. 어차피 난 술 세니까.”

“그래. 데려다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뭐, 그래도 안심해도 될 것 같다.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비로소 코스 요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 * *

저녁을 먹고 칵테일 바에 가기 전, 서진의 집에 들른 우리는 가볍게 콘솔 게임을 했다. 방송은 막상 하려 하니 귀찮다며 윤정신이 취소했다.

서진의 집은 혼자 사는 집이라기엔 꽤 넓었다. 소파도 푹신푹신하고, 바닥에 깔린 러그도 보들보들하고……. 순간 정말 자고 갈까 혹했다. 자주 놀러 오라는데 정말 그러고 싶었다. 맛있는 것도 많고, 재밌는 것도 많고. 우리 집이랑 거리만 조금 가까웠으면 정말 자주 왔을 것 같았다.

적당히 소화를 시킨 뒤에야 우리는 칵테일 바로 갔다.

나는 도전하기 무난한 것들 위주로 시키며 맛있는 안주에 감탄했다. 그렇게 술술, 술이 잘도 들어간다 싶을 즈음에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을 느꼈다.

취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만 좀 취하는 건가? 슬쩍 눈치를 살폈는데, 역시나 두 사람은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야, 얘 알쓰다.”

“우기야, 더 마셔도 되는 거야?”

“내버려 둬, 귀여운데.”

아직 조금 알딸딸할 뿐인데. 나는 안주를 열심히 집어 먹으며 달뜨는 얼굴을 식혔다.

서진이 걱정스러운 듯 내 안색을 살폈다.

“안주 좀 더 시켜 줄까?”

“으응. 나 프레즐 하나만.”

“도수 없는 것도 있는데, 술 빼 달라고 할까?”

“아직 괜찮아.”

“이서진, 치즈도 하나 더 시키자. 이거 맛있네.”

서진이 적당히 추가 주문을 했고, 나는 내 몫으로 나온 도수 낮은 칵테일을 야금야금 마셨다.

확실히 페이스 조절을 좀 해야겠군. 안주도 맛있는 김에 안주나 축내면서 천천히 달려야겠다. 사실 소주 같은 건 진짜 잘 어울리는 안주에 마실 때나 가끔 엄청 끌릴 때 아니면 아직은 먹기 역하던데, 칵테일은 향긋하고 달콤한 게 술술 들어갔다.

“최우기. 근데 나 뭐 물어봐도 돼?”

“뭔데?”

조금 망설이는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부산을 떨던 윤정신이 곧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사고 났다는 거 있잖아.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봐도 돼?”

“벌써 물어본 거 같은데.”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그냥…… 나도 모르게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의도는 없어.”

“사실 사고라고 하긴 모호한데……. 내 잘못 아니니까 숨기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고. 근데 사람들이 내 얘기 들었을 때 묘하게 어색해지는 그 분위기가 싫어. 어설프게 동정할 때 뭔가 그, 날 신경 쓰는 그 눈빛이 너무 싫어. 그래서 얘기 안 하는 거야.”

“나 그럼 눈 가리고 들을게. 그래도 안 돼?”

“……나 그럼 몇 잔만 더 시켜 줘. 취기를 빌려야겠어. 내가 보기엔 넌 알아야 할 거 같아. 왜냐면 나한테 엄청 실수하고 있거든.”

“……내가? 나? 윤정신?”

“그래, 너, 윤정신.”

“야, 말을 하지……. 알겠어. 나 경청할게. 빨리 술 좀 더 시켜 봐.”

서진이 대답 없이 칵테일 몇 잔을 더 시켰고, 나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맛이 달콤해서 도수가 약할 줄 알았는데 빠르게 마셔서 그런지 은근히 취기가 빨리 올라왔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음, 그러니까 나 고등학교 3학년 후반에 취업할 곳 알아보던 때였는데.”

나는 차근차근, 잊으려고 애썼던 기억을 되짚어 갔다.

“나 고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부터 자꾸 치근덕댄다고 해야 하나, 자꾸 교실 찾아와서 재미없는 농담하고 말 걸고, 친구들이랑 노는데 자꾸 끼어들고 그러는 형이 하나 있었거든.”

처음에는 멀쩡해 보여서 잘 몰랐는데, 조금 보다 보니까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정신에 결함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말하는 것도 좀 횡설수설했고, 갑자기 엄청 화를 내기도 했다.

솔직히 너무 부담스럽고 싫었었다. 그래서 그가 말을 걸어올 때마다, 이야기에 끼어들려 할 때마다 은근히 무시하고 못 들은 체했었다. 욕이라도 한마디 할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별 반응 없이 조용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내면에 조용히 축적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 날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못 들은 척 교실을 나가려 하자, 그가 갑자기 욕을 하며 책상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크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놀라서 돌아보자, 그는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주변의 책상 몇 개를 더 쓰러뜨리고 물건 던지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급기야 나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치켜들었다. 

다행히 친구들이 바로 달려들어 제지해서 별 탈 없긴 했는데, 뒤집어진 눈으로 아이들 여럿에게 잡힌 채 어떻게든 나를 때리겠다는 듯 발버둥을 치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도 무섭게 느껴졌다. 악의가 절절하게 느껴져 몸이 벌벌 떨렸다. 오싹했다.

나중에 선생님들이 뛰어와서 무슨 일인지 물으며 상황을 정리하셨고, 나는 여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다 이야기했다.

악수하고 끝내라 하면 어떡하지? 이 일로 그가 어떤 처벌을 받든, 그게 퇴학이나 전학이 아니라면 나는 계속 두려움에 떨며 학교를 다녀야 할 텐데…….

다행히 죽으란 법은 없는지 그의 지난 행적까지 고려한 결과 강제 전학 처분이 내려진 것 같았다. 아마 전에도 몇 번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되어 처벌을 받은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선생님께서 그 형 이제 전학 갔으니까 안심하라고, 취업 준비나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시며 내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그게 1학년이 끝나 가던 무렵이었다.

정말 이게 끝일까?

두려웠다, 여전히. 그는 여전히 나에게 화가 나 있을 것이고, 나는 여전히 무방비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에게 있어 이 일은 아직 진행형이었다. 하교하려고 정문을 지나는데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그가 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설마, 우연이겠지. 다른 용건이 있는 거겠지.

나는 친구들 사이에 숨어 쭈뼛거리며 정문을 통과했다. 그때까지 그는 나를 시선으로 쫓기만 할 뿐 말을 걸거나 다가오진 않았었다. 그냥, 우연이었던 걸까?

그때, 친구들이 뒤를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우리를 조용히 따라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변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자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그가 사라진 골목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왠지 아직 저 골목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이후에도 종종 우리 학교를 찾아왔지만, 친구들이 대신 욕을 해 주며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니 어느 순간부터는 포기한 듯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불안해서 나는 계속 친구들과 같이 하교했고, 형이 집에 일찍 온 날이면 형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처음에는 다들 기꺼이 그래 주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그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점점 번거로운 하교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이제 혼자서 하교하겠다 선언했다. 좀 불안하긴 했지만 주변을 잘 보고 큰길로만 다니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고…….

그래도 조금 불안하긴 해서 나는 호신 용품을 바리바리 챙기고 다녔다. 힘이 굉장히 약한 편이라서 그가 한 손으로 끌어도 질질 끌려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달이, 1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자 나도 완전히 경계심을 놓게 되었다. 내가 오버 한 거였구나. 가방 정리를 하며 쓸데없이 무게를 늘리던 호신 용품들을 다 서랍 구석에 치워 놓았다.

그러나 재난은 늘 갑자기 닥치는 법이다.

그것도 상대가 가장 방심했을 때…….

간만에 밤새워 게임을 하느라 학교에선 내리 잠만 자고 졸린 눈을 비비며 하교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뛰는 듯한 발소리가 나더니 골목에서 튀어나온 사람 하나가 뒤에서 내 입을 막았다. 당황해서 허우적대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필 호신 용품도 없고……. 나는 그대로 인적이 드문 골목에 질질 끌려 들어갔다.

처음에는 뉴스 속 범죄자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며 나도 그렇게 끔찍하게 죽는 건가 했는데, 나를 끌고 온 사람의 얼굴을 보니 그였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우습게도 약간 안심이 됐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고는 다시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다. 공포감이 극도로 올라가니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일단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울면서 계속 살려 달라고, 정말 비굴하게 싹싹 빌었다. 가만히 내가 하는 꼴을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아무런 대꾸 없이 일순 발로 내 배를 뻥 차 버렸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는 그것을 시작으로 그간의 울분을 다 풀겠다는 듯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회초리 한 번 맞은 적이 없고, 학교에서도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가혹한 체벌 같은 건 대체로 면했었다. 늘 나를 지켜 주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었다. 그래서 그 폭력이 내겐 더욱 끔찍했는지도…….

아니, 정정한다. 폭력 같은 것에 내성이 생길 리 없다. 한 번도 맞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얼마나 아플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빗대어 생각할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폭력이 분명한 단위를 달고 내게 어떤 확실한 수치처럼 전해져 오고 있었다. 그건 너무도 생생했다. 제발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그런 생각만 계속했던 것 같다. 목구멍에선 비릿한 피 향이 계속 올라왔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다행히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소리를 들었는지 멍멍한 귀로 희미하게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곧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그는 욕을 짓씹으며 마지막으로 내 머리를 발로 차 버리고는 도망가 버렸다. 나는 구급차에 실려갔고, 그는 사건 현장 근처에서 검거되어 현행범으로 구속되었다.

그 일이 있고 한동안은 원래 알던,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남자 자체를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 그래서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고, 자연히 집에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늘어 갔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 이제는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러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정신적, 신체적인 후유증이 자잘하게는 남아 있었다. 그때 병실 화장실 안 거울로 들여다보았던 내 얼굴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후욱 더운 숨을 내뱉었다. 오랜만에 취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사고라고 말해서 교통사고나 재해 같은 걸 생각했을 텐데.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가 나와서 당황했겠지?

내가 이야기를 끝내자, 아니나 다를까 뭔가 싸한 침묵이 테이블 위로 감돌았다. 두 사람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놀자고 모였는데 내가 분위기를 망쳐 버린 것 같았다.

“걔는 곧 출소한다고?”

“1년 좀 넘었던 것 같아. 흉기 소지는 안 하고 있었고, 심신 미약 그런 거 때문에…….”

“와. 이서진, 너 아는 판사 없냐? 미친 거 아니냐?”

“그러게. 통원 치료 꽤 오래 했을 거 같은데……. 스토킹 범죄만 해도 징역 가능한데 폭행까지 했고. 그런데도 너무 형량이 적은 것 같은데.”

“몇 년을 살고 나오던 결국 나오는 건 같고……. 나는 나한테 복수하러 올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워.”

“집 어딘지 아는 거 같은데 이사는 한 거야?”

서진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니……. 이사는 안 했는데.”

“야! 이사를 안 하면 어떡하냐?”

“그게 좀 복잡해서. 가려고 했는데 내가 그냥 괜찮다고 했어.”

“겁도 없네. 피해자가 피해 다녀야 하는 것부터 웃기지만……. 이상한 사람 있으면 나한테 전화해도 돼. 오케이?”

윤정신이 치즈 한 조각을 포크로 쿡 찍어 내게 쥐여 주며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해 보였다. 나는 치즈를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새콤한 맛이 나는 치즈였다.

이후부터는 계속 도수 없는 것들만 마시며 취기를 가라앉혔고, 안주가 동날 즈음에는 정신이 꽤 말짱해졌다. 둘은 약속대로 나를 집 현관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나는 무사히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식은 치킨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어제 막무가내로 내 핸드폰 번호를 알아 간 윤정신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왜?”

[오, 목소리 잠기니까 더 섹시한데.]

“언제쯤 네가 정신을 차릴까?”

[참. 이런 거 싫댔지? 속은 좀 괜찮냐? 해장했어?]

“아니. 멀쩡해서 치킨 먹고 있는데.”

[해장국 사 줄 테니까 나올래?]

나갈 리가……. 참 근성 하나는 인정해 줄 만했다.

“안 갈래.”

[아, 그래. 야, 그래도 뭐 얼큰한 거 하나 챙겨 먹어.]

“멀쩡하다니까?”

[아 씨. 알겠어, 그럼. 게임이라도 들어 와.]

“이따. 끊을게.”

나는 배가 불러 와서 먹던 닭 다리를 내려놓고 커피 한잔을 타 컴퓨터 앞으로 갔다.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윤정신이 나를 반겼다.

[토라> 최우기]

[토라> 던전 가자]

[청혼> ㅇㄷ?]

[토라> 유니콘]

[청혼> 패턴 귀찮아]

[토라> 아ㅡㅡ 같이 하자]

글쎄……. 별로 던전 돌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게 하고 싶지도 않고.

[청혼> 이 겜 할 거 없다]

[청혼> 전투지 할래?]

[토라> 나 그거 안 해봤어]

[청혼> 전설의 리그는?]

[토라> 못해ㅋ]

[토라> 있는 겜 이거랑 고급시계랑 GTB5랑 데드바이문라이트]

[청혼> GTB는 내가 없고]

[청혼> 시계는 하기 싫고 데바문은 생존자 안 함]

[청혼> 걍 니 버리고 전투지하러 갈래]

[토라> 미쳤어?]

[토라> 진정해 봐]

[토라> 우리 추억의 게임 하자 ㅎㅎ]

[토라> 카트운전사 ㄱ?]

[청혼> 그럴까]

[토라> 잠만 나 방송 켜도 돼?]

[토라> 너 디코 하냐]

[청혼> 아이디는 있어]

[토라> 들어와 봐]

이제 점심시간 좀 지났는데 벌써 방송을 켜나?

시청자가 올까 싶었지만 일단 윤정신이 시키는 대로 헤드셋을 연결하고 그가 깔라고 한 추억의 초딩 게임 3선을 설치했다.

방송 매니저가 추천해 주었다고 한다. ‘카트 운전사, 크레이지 게임, 테일즈 산책’이 그것이었다. 나도 참 뭘 하고 있는지……. 이번 방송 내용은 그와 내기 경기를 하고, 시청자 참여를 하는 거였다.

처음 접속한 게임은 카트 운전사였다. 디스코드로 윤정신이 방송 시작 멘트를 하는 것이 들렸다.

[저 혼자 하면 재미없으니까 오늘 또, 게스트를 한 분 초청했습니다. 우리 방송 많이 도와주던 제 꼬봉. 청혼이랑 오늘 같이해 볼게요. 청혼 님, 우리 시청자분들께 인사 한마디 부탁해요.]

“인사하라고?”

[아. 여러분, 잠시만. 제가 깜빡하고 얘기를 안 했네요.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얘가 사실 외국에서 살다 온 지 얼마 안 돼서 한국말이 서툴러 가지고. 이 부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존댓말 쓰라고?”

[그래, 이 새끼야.]

“자기는 욕하면서. 뭐라고 인사해야 해?”

[그냥 대충 인사해.]

“안녕하세요. 토라 님의 방송 노예 최우기입니다.”

윤정신이 오버스럽게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나는 카트 운전사 복귀 유저 보상을 수령하며 아이템을 이것저것 껴 보았다.

[아, 시청자분들이 청혼 님 목소리가 퇴폐적이라고 좋아하시는데 혹시 미션 하나 하실래요?]

“그게 뭐예요?”

[채팅 읽어 주기 가능?]

“뭘 시키시려고.”

[잠시만. 도네 너무 몰렸는데? 잠깐만요. 천천히 읽을게요. ‘오빠 목소리 너무 멋있어요.’ 딱 봐도 덜렁이가 주작질 하는 거 티 나죠? 아무튼 그렇다고 합니다. ‘윤정신, 밥 먹을래, 나랑 같이 죽을래.’ 하면 5천원? 이거 좋다.]

“그걸 읽으라고? 너무 답정너 아니에요, 저거는? 윤정신이랑 밥 먹느니 당연히 죽죠.”

[이거 모르세요? 드라마 명대사잖아요.]

“아. 아, 그거구나. 소지섭이 한 거.”

[빨리하세요.]

“다른 거 없어요? 저 그냥 돈 안 받고 안 읽을래요.”

[다른 거? ……‘시켜 줘, 윤정신 명예 소방관.’ 하라고? 아, 님들. 나도 얘 같은 소방관 싫어요. 왜 자꾸 남의 이름을 갖다 붙여? 님들 이름 넣어요, 님들 이름. 그냥 네가 직접 보고 하나 할래? 근데 다 이런 거밖에 없어.]

“보여 줘.”

그가 카톡으로 사진을 찍어 보냈고, 나는 그걸 찬찬히 읽어 보았다.

나 너 좋아하냐, 사탄들의 학교에 루시퍼의 등장,이라 등 오글거리는 말도 많았고, 귀여운 척을 하게 만드는 것들도 많았다.

나는 그중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것 같은 문구를 하나 골랐다.

“소희야, 공부 열심히 해서 이번에는 과탑 하자. 화이팅.”

[아, 소희 님. 어디 사는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공부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아마 소희야가 아니고 소희 누나일 텐데……. 회춘하려고 하시면 곤란해요. 몇 살이냐고요? 말해도 돼?]

“응.”

[청혼 님은 스무 살이에요. 어려요. 애기예요, 애기.]

“미안해요, 소희 누나. 이러면 됐죠? 저 이거 그만할래요. 나 괴롭히는 것 같아.”

[시청자분들이 너 귀엽대. 여러분, 탐내지 마세요. 전에 방송에서 말했잖아요. 저랑 동거 중이라니까요?]

괜히 방송 같이하겠다고 했나? 벌써부터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절대 아니에요. 속지 마세요. 제가 오늘 게임 다 이기고 윤정신 조신한 남자로 만들겠습니다,“

[그럼 제가 이기면 볼에 뽀뽀 받을게요. 응원 부탁드립니다. 근데 하필 얘가 게임을 좀 잘해요. 본인 말로는 자기가 재능충이라서 웬만한 게임 다 잘한다고 하는데, 허세인지 뭔지 오늘 한번 제대로 보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절로 미간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아, 진짜 이 악물고 이겨야겠다. 너무 싫다, 진심으로.”

[저는 이 악물고 발가락까지 힘주고 할 건데요? 초대 받으세요.]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게임 결과는 뻔하지만, 카트 운전사는 나의 완승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윤정신이 크레이지 게임을 잘해서 1:1로 스코어가 동일해졌다.

[크, 캠프의 신. 이거 클립 올려야겠다. 인정?]

“봐준 건데 이걸 모르네.”

[이야, 추했죠, 방금?]

“오바야. 산삼인지 인삼인지 먹고 계속 풍선 줄줄 싸는데 어떻게 이겨요. 저 아이템 금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

[꼬우면 아시죠? 본인도 산삼 먹고 이기세요. 다음 게임 들어오세요. 나 근데 이건 안 해 봤는데. 아마 들어가면 캐릭터 생성해야 할 거예요. 닉네임 뭐하지? ……정시니 똥따떠 하라고? 장난하세요? 윤종신? 말고, 예쁜 거.]

“윤종신 안 예쁘다고 비하하신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취소할게요. 잠깐만, 닉네임 정했다. 최우기남친 간다.]

“아, 잠깐만요.”

[왜요?]

“오바예요.”

[나 근데 이거 장난 아니고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뭐?”

내가 어리둥절해서 묻자, 윤정신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다시 말 안 놓으면 안 돼요? 되게 좋은 거 같네, 이거.]

“왜요? 이상 성욕인가요? 말 놓으라고 난리 칠 땐 언제고.”

[달달하네, 존댓말이. 맨날 스물일곱 처먹고 스무 살짜리한테 야, 자, 듣다가. 좀 눈물 나네요.]

“아저씨. 그 노래 몰라요? 우리 서로 반말하는 사이가 되기를.”

[뭔데, 그게? ……둘이서 우리 결혼했어요 찍지 말라고요? 어떻게 그래요, 결혼을 하고 싶은데. 한참 좋아 죽을 신혼 아닙니까.]

“지랄하지 마시고요.”

[아무튼, 게임 들어오세요. ‘최우기남편’으로 친추 주세요. 남친은 하지 말라고 하시길래.]

기어코 저걸 만들다니.

“아. 삭제해.”

[어떻게요? 삭제하고 새로 만들라고요?]

“네.”

[그럼 엄청 오래 걸리는데. 방송 갑분싸 돼요.]

“그럼 닉네임 변경해요, 빨리.”

[그게 돼? ……아, 되긴 되는데 유료라고요? 안 되겠네, 그러면.]

“토라 님. 이타치가 강한 이유가 뭔지 알아요?”

[제가 존댓말에 약하다는 건 알겠네요. 아, 잠깐만. 설마? 이걸 탈주 각을 잰다고?]

내가 윤정신한테 질 리 없지만, 이걸 지면 쟤 소원 하나 들어줘야 하고, 저딴 논란의 닉과 같이 달리기도 싫고.

진짜 튀어 버릴까? 잠깐 고민하다가 방송을 생각해서 하는 수 없이 친구 신청을 걸었다.

“하……. 친추 걸었어요.”

[가면 나 삐친다. 나 뒤끝 장난 아니다.]

“알겠다고요.”

[여러분. 내 방송인데 왜 다들 쟤만 좋아해요. 님들 내 팬이잖아요. 채팅 창 막아 버릴까 보다.]

“저 인기 많아요?”

의외로 잘 먹히나? 윤정신 구독자가 10만 명 정도니까 여기서 1만 명 정도만 떼 갈 수 있어도 이득인데. 슬그머니 방송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많네요. 청혼 님 혹시 알바 푸셨나요?]

“여러분. 제가 방송 켜면 와 주실 거예요?”

[너 방송 하려고?]

“왜 반말하세요? 프로 아니네.”

[방송 하시렵니까?]

“어차피 백순데 켜 볼까 싶어서. 저 게임 많이 하고 잘해요. 윤병신 방송 보지 말고 제 방송 오세요.”

[야, 윤병신이라니.]

“윤병신이요?”

[네가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

“제가요? 아, 섞였어요. 진짜 실수예요. 아, 개웃겨.”

[……제가 정말, 귀여워서 참네요. 웃음소리 너무 귀엽죠. 근데 좀 사악하다고? 아, 그거 인정. 얘가 말을 좀 밉살스럽게 하는데, 보면 좀 귀여워요. 남의 방송에서 졸렬하게 시작도 안 한 방송 홍보부터 하는데, 여러분. 그래도 많이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하겠습니다.”

[근데 진짜 방송하려고?]

“그냥 생각 중이야. 만약 하게 되면 나 좀 도와줘.”

[그건 일이 아닌데. 아, 일단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게임 먼저 할게요.]

이번 라운드는 시청자와 팀을 이루어 먼저 3승을 따낸 팀이 이기는 것이었다.

윤정신이 자신의 팀 쪽에는 레벨 높은 사람들을, 내 팀 쪽에는 레벨 낮은 사람들을 배치했지만 윤정신 본인이 너무 못해서 스코어는 2대1로 나의 승리가 되었다.

윤정신은 팀원들의 원성을 들었다.

[나도 져서 속상한데 왜 자꾸 뭐라 해요. 저도 뽀뽀 못 받게 됐다고요.]

“이제 제 소원 들어주시는 건가요?”

[아, 네. 뭔데요, 소원?]

“저 카톡으로 보낼게요.”

[그냥 말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수줍음 타지? 혹시……?]

“아, 아니에요. 이상한 거 아니에요.”

[일단 보내 보세요. 기대되려 하는데, 막.]

또 헛소리를……. 사실 서진 형에게 들은 게 있어서 그거 부탁하려고 한 건데.

윤정신, 부모님이 찜질방 한다고 하며 동네 찜질방인 양 말하더니 찜질방은 무슨 완전 넓은 스파였다. 시설도 엄청 좋고 인테리어랑 주변 풍경도 좋던데. 서울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지방으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코스에 자주 넣는 곳이라고 했다.

내가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카톡을 하자, 그는 실망한 눈치를 했다.

[윤정신: 소원 이렇게 낭비할 거야?]

[윤정신: 너가 가자하면 당연히 가주지]

[윤정신: 그거 말할 거면서 왜 은밀한 척했어]

[내가 언제?]

[윤정신: 둘이서만 얘기하자고 그랬잖아ㅡㅡ]

[ㅋㅋㅋㅋㅋ 둘만 아는 이야기 거기서 하면 갑분싸 돼]

[윤정신: 아 기대했자나]

[윤정신: 아무튼 알겠다]

[윤정신: 근데 당일로 다녀오려면 좀 피곤할 텐데]

[윤정신: 리조트랑 붙어 있는데 자고 가 그냥]

[윤정신: 영업 24시간 아니라서 청소 시간에 나가야 해]

[나 외박하면 가족들이 걱정해서]

[윤정신: ㅋㅋ 다 같이 오든가]

[윤정신: 이용권 보내줄게 그냥 같이 와]

[헐 천사인가?;;]

[부자들은 선심 베푸는 클라스도 다른 건가]

[윤정신: 부자 ㅋㅋㅋㅌㅌㅋㅋ 내가 부자면 이서진은 뭐냐 빌게이츠임?]

[윤정신: 너니까 해주는 거야]

[내가 뭐라고...]

[윤정신: 작업 칠 땐 뭔들 못 해]

[윤정신: 달 따는 시늉도 하지]

[윤정신: 가족들한테 점수 따기도 ㄱㄲ]

[ㅋㅋㅋㅋㅋ 대박]

[근데 가족들 시간 언제 맞을지 모르겠어]

[윤정신: 요즘 비수기라 괜찮아]

[진짜 ㄱㅅ]

[담에 보은할게]

[윤정신: 헐 ㅎㅎ 기대 된다 ㅎㅎ]

[윤정신: 뭘 줄까?? 완전 두근두근 ㅎ]

[진짜 깝치지만 않으면 멋있었을 텐데 틈을 안 주네]

[윤정신: ㅋㅋㅋㅋㅋ그게 내 매력이자낭><]

[윤정신: 푸드코트 같은 것까지 내가 계산하면]

[윤정신: 부모님도 계신데 좀 그렇겠지? 그건 그냥 알아서 하고]

[윤정신: 뷔페도 있거든]

[윤정신: 나 저녁식사 끼워 주면 그거 내줄게]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한데]

[가족들도 부담스럽지 않을까...?]

[윤정신: 적당히 핑계 대봐]

[윤정신: ㅋㅋ진짜 아드님 달라고 할까]

[윤정신: 그냥 네가 나 뭐 도와준 게 있어서 내가 보답하고 싶다 그래]

[윤정신: 눈치 없이 계속 껴 있긴 나도 좀 그렇고 밥만 같이 먹자]

[괜히 부탁한 거 같아 ㅠ]

[그냥 별생각 없이 담에 한번 데려가 달라고 하려던 건데]

[윤정신: 아 혹시 나랑 둘이 가고 싶었어?ㅎㅎ]

[윤정신: 그럼 난 너무너무 좋지^^]

[ㅋㅋ...]

[윤정신: 내기 졌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윤정신: 방송 도와줘서 고맙고 니 말마따나 난 부자라서 별로 상관없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와 ㅋㅋ]

[ㅠㅠ 고맙]

[좀 멋있네]

[윤정신: 왜 나는 하트 안 주냐]

[♡♡♡♡♡]

[윤정신: ㅎㅎ나두 사랑해 자기야]

[^^;;; 점수 깎아 먹는 게 취미신지]

[윤정신: 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금 좋으면 그만]

[윤정신: 형 이제 바쁘다 방송 마무리해야 해서 ㅂㅂ]

[웅]

와. 가족들한테 언제 가자고 하지? 윤정신, 진짜 치근덕거리는 거만 어떻게 하면 참 괜찮은데. 그래도 그의 호의가 꽤 고마웠다.

그나저나 내 방송한 것도 아닌데 게스트 해 주는 것도 은근히 피곤하네. 역시 이런 건 적성에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오디오 채울 자신도 없고……. 새삼 저렇게 쉴 새 없이 떠들 수 있는 윤정신이 신기했다.

저래야 스트리머 할 수 있는 건가. 세상에 쉽게 돈 버는 방법 같은 건 없구나. 나는 미련 없이 방송을 해 보겠다는 헛된 생각을 접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