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자라니까.”
한재희 또한 인정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운이 꽤 좋다는 사실을.
“너무 자서 머리 아파.”
“넌 팔자가 백수는 못 하나 보다.”
아까까지만 해도 알몸이 되어 제 것을 품고 흐느끼던 연인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부르는 목소리에도 그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쉼 없이 타자를 두드리는 정현의 시선은 오로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말끔한 파자마 차림으로 침대에 누운 재희는 제게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그 동그란 뒤통수에 복잡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처음엔 분명 대견스럽기만 했다. 수술 전의 정현은 무언가에 몰두하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몰두는 집착을 부르고 그만큼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도전이었던 정현에겐 자신의 생존 외의 무언가에 그 에너지를 쏟을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정현이 무언가에 노력하는 모습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겨우 실감이 났다. 정현이 제 곁에서 오래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겨났다. 마치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보듯, 뭐든 돕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어느 것이든. 심지어 돈 한 푼 벌지 못해도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를.
실제 나이는 어른이어도 병으로 한참을 어린아이의 세계에서 머물러 있던 정현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아쉽지 않았다. 아니, 아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조금씩 솔직해졌다. 재희는 제가 외면했던 이기심과 마주하게 되었다.
워낙 출근이 이르기에 잠든 얼굴을 배웅 삼아 보고 가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귀가할 때만큼은 성대한 마중을 받았다. 온종일 홀로 집을 지키던 정현은 재희의 귀가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 두 팔 벌려 반기는 정현의 마중이 바깥에서의 모든 피로를 잊게 해주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요즈음 정현은 오히려 저보다 늦는 적도 많았다. 문을 열고 들어와도 소식이 없는 정현에 재희는 숨죽여 거실로 들어서곤 했다. 노트북을 붙들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던 정현은 재희가 뒤에서 끌어안을 때까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늘 뭔가에 몰두해 있었다.
‘아무래도 비용 때문에 잘 안 쓰인다는데, 무료로 그려준다고 하면 다들 좋아하지 않을까?’
큰일이었다. 그저 대견하고, 그저 자랑스럽지만 않게 되어버렸다.
“현아.”
“…왜애.”
“많이 바빠?”
“나 이거 좀 걸린다니까….”
좀 더 솔직해져 볼까. 하다못해 지금 자신을 외면한 채 눈을 떼지 못하는 그 모니터에도, 그 프린트에도. 과제에도. 키보드에도. 전부, 전부 짜증이 치민다. 아마 몸이 성치 못해서 그럴 것이다. 이 다리만 좀 더 멀쩡했어도 바로 다가가 훼방을 놓을 텐데. 현재 재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곤 이렇게 침대에서 목소리를 돋워 동정심을 유발하는 게 전부였다.
“나, 또 하고 싶은데.”
“…….”
“섰어.”
타닥거리던 타자 소리가 멈추고 의자가 팽그르르 돌아갔다. 무슨 미친 소리냐는 듯이 샐쭉이 바라보는 정현의 표정에 못내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나 죽일 셈이야? 너 진짜….”
“나 아프잖아. 환자.”
“거긴 너무 과도하게 건강하잖아. 너 전치 8주 나왔거든?”
“그건 무릎이랑 발목이고. 여긴 안 다쳤잖아.”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과거의 나를 몇 대 팬다면 분이 풀릴까. 못 이기는 척 저에게 다가온 정현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그리고 자신과 맞춰서 산 파자마를 사정없이 풀어헤치며 재희는 생각했다. 제 어리석음은 아무리 곱씹어도 질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우둔했던가. 널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나는.
심지어, 이렇게. 네 몸 안에서 이렇게 약동하는 심장마저, 폐마저.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가끔은 질투가 나는데, 어떻게.
“아, 잠깐, 천천히….”
그 못된 마음이 혹시라도 들킬까 싶어 재희는 일부러 세게 유두를 물고 빨았다. 아픈 듯 신음하면서도 정현은 재희를 밀어내지 않았다. 제 머리칼을 헤집으며 몸을 기대오는 무게감에 재희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미안해.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여전히 너의 존재감이 자꾸만 옅어지는 거 같아. 또, 네 몸에 남겨둔 내 흔적도. 자꾸 안달이 나. 이런 날 알면 너는,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진 않을까. 무섭다고 도망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아, 진짜. 나. 저거 내일… 읏.”
마치 흉골을 절개해 파고드는 것처럼, 성기가 정현의 몸속으로 들어서는 순간의 감각이 재희를 겨우 진정시켰다. 동시에 공포와 배덕감을 선사했다. 어찌 보면 메스와 다름없이, 정현을 고통스럽게도 하며 즐겁게도 할 힘이 제게 여전히 존재하는 것에 안도했다.
게다가 나는 널 살리지 못했는데도, 내가 이래도 될까, 자격이 있을까.
정현의 수술을 실패한 그날부로 한재희의 꿈은 끝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멈추지는 않았다. 아무리 잠을 자고 술을 마셔도 내일은 밝았다. 의미 없는 내일이고 미래였다. 숨이 붙어 있고 심장이 뛰기에 살아가는 것뿐. 재희는 조용히 제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정현이 자신을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다른 경우의 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선의 삶이었다. 살리지 못해도, 곁에 머무는 것.
그런 현실을 떠받치는 건 팔 할의 불안이었다. 제가 가진 능력 외의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분에 넘친 행복만큼 불안해졌다.
그 모든 게 운명이고 운이라면, 과연 이 운은 과연 언제까지 따라 줄 것인가.
차가 전복되어 부모를 잃은 그 차 사고에서도 운이 도왔다. 이번 사고도. 또 지금에서도. 그 모든 순간에 깃든 행운은 과연 언제까지 널 지키게 허락해 줄까.
“현아….”
“으응, 읏….”
손바닥에 여실히 남은 정현의 파정. 제게만 허락된 그 모든 정신과 육체. 그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자신의 몸에 극심히 끼치는 그 쾌락을 즐기면서도, 여전히 재희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사랑을 인정해도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기댈 수 없다. 뭐든 증명할 것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정현을 제 것으로 옭아맬 수 없으니까. 세상사람 모두가 인정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바로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무시했던 그 종이 쪼가리. 생각으로만 가늠했던 그 과정을 알아보게 된 것도, 모두.
정현에겐 애석하게도 이미 재희의 세계에서는 완결되어 버린 이야기였다. 그 언제 다시 주마등이 스쳐도 분명 모든 순간이 한정현뿐일 한재희의 세계의 논리는 그랬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너의 세계가 넓어진다면, 나의 품이 그만큼, 그보다 더 넓어지면 되는 것뿐이니까.
“…교수님, 네.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다음 날 오전의 일이었다. 재희가 이 교수에게 증인을 부탁하며, 허니문으로는 칸쿤을 추천받은 것은.
그리고 모든 재희의 계획이 실현되기까지 딱 네 번의 계절이 소요됐다.
재희의 계절 앓이도, 두 사람의 어떤 후유증도, 다른 모든 불안이 사라지기까지. …고작해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