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겨울 너머로 (13/14)

지루했다. 지루할 정도로 직선으로 쭉 뻗은 길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국도와 나란히 뚫린 고속도로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싼 탓인지, 주변 차선에 함께 달리는 차 한 대 없었다. 쾌적할 정도로 줄곧 평탄하기만 한 도로를 달리는 렌터카에 낯선 향취가 묻어나서인지, 뒷좌석에서 길게 누워 있던 정현은 덜컥 겁이 났다. 곡선 하나 없이 끝없는 직선만 그리는 이 평탄한 길은 왠지 그에게 ‘길’답지 않게 느껴졌다.

여태껏 정현의 세계라고 해 봐야 한국의 서울, 그리고 근래 미국의 뉴욕이 전부였기 때문일까. 아, 절반은 살다시피 한 순천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그 모든 곳에서 겪은 길들은 전부 굽이가 있었고 그 가파른 굽이마다 이리저리 핸들을 꺾듯 긴장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 도로에서는 일부러 곡선을 넣는다고 들었다. 직선만으로 이루어진 길은 운전자를 쉬이 방심하게 해 졸음운전을 유발한다고 했던가. 그저 액셀만 밟고, 두 손을 놓아도 될 정도로 굴곡 하나 없이 평탄한 길은 그래서 정현에겐 낯설기만 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지금 그 직선 코스를 달리고 있다고 느꼈다. 지루할 정도로 안전하고, 어느 변수 없는 삶을. 그 지루함을 정현은 만끽하고 있었다. 평생 목말라 있었다, 그런 권태로움에.

어쩌면 운명이란 게 바뀌어 버린 걸지도 몰라.

장기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인생, 혹은 누군가의 운을 가져오게 된 것처럼. 낡아빠진 제 것 대신 남의 심장, 남의 폐를 얻어 살게 된 2번째의 삶은 제대로 역마살이 든 모양이었다. 이식 수술을 받기 전과 받고 난 뒤의 정현의 삶은 제법 달라졌다. 대중교통 하나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집 앞마당에도 나가기를 삼가야 했던 것은 모두 다 옛말.

멀쩡한 집을 놔두고 구만리 타국에 와 있게 된 지도 어느덧 2년차. 터미널에서 순천 가는 고속버스 차표를 쥐었을 때의 두근거림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멕시코의 섬을 횡단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꼭 남 일처럼 신기하고 희한해 정현은 졸음이 가지지 않은 눈으로 싱긋 웃었다.

“깼어?”

또 다른 의미로 신기할 만큼, 매번 떠돌더라도 함께 여전히 곁에 머무는 그.

“…아직, 멀었어?”

“좀 더 자. 도착하면 깨울게.”

운전석의 재희는 제 뒤로 들린 그 작은 숨소리에 기민하게 반응하고선 백미러로 눈을 마주쳐 온다. 아니, 마주쳐 왔을 것이라 정현은 생각했다. 보이는 것은 뒤통수와 백미러에 비친 그 선글라스 낀 얼굴뿐이지만, 그것만으로 정현은 안심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1월. 북반구의 한겨울. 하지만 이곳은 계절을 잃은 것처럼 볕이 내린다. 눈이 부시도록 따가운 햇빛에 선글라스를 쓴 재희의 모습이 새삼 어색했다. 제 위를 덮은 담요도 마찬가지였다. 뉴욕이었다면, 또 서울이었다면 고작 이 정도의 두께론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얇은 무지 티에 카디건을 입은 가벼운 차림에도 목 뒤가 눅진했다. 습한 날씨. 정현의 탄성을 자아냈던 카리브 해를 닮은 푸른빛이 정현의 시야를 물들였다. 부신 눈을 감으니 잠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속에 푹 잠기며 정현은 생각했다. 1년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아무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모양이라고.

두 사람은 겨울을 피해 끝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

혹독했다, 뉴욕의 겨울은. 그날 아침도 유독 바람이 거칠어 체감온도가 턱없이 낮았다.

“발 시려….”

타지에서 맞는 겨울은 두 사람을 보다 예민하고 날카롭게 곤두서게 했다. 사계절 서울의 추위로 충분히 단련되었다고 생각했거늘, 표시된 기온의 숫자와 피부로 느끼는 공기의 서늘함은 괴리가 컸다. 촘촘하게 선 빌딩 숲 사이를 세차게 파고들다 스치는 바람은 말 그대로 살을 에고 숨을 몰아쉬게 했다. 게다가 온돌이 아닌 마룻바닥은 아무리 카펫을 깔고 실내화를 신어도 냉기가 고스란히 올라와 하루를 내딛는 발끝을 움츠리게 했다.

한 발짝 침대 밑으로 내려서기도 꺼려지는 계절. 말 그대로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정현은 마음만 같아서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 속에서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냥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다. 한창 과제로 바쁜 시기였다.

뉴욕의 스튜디오와 브루클린의 캠퍼스를 오가느라 몸이 축났다면, 정신은 동시에 진행되는 회화 이론 수업에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말이라 해도 골머리를 앓을 판에, 어려운 학술용어를 영어로 체득하려니 말 그대로 머리가 터질 지경, 갈 길은 더욱 아득하기만 했다.

물론 F가 뜬다고 해도 정현에게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온전히 자존심 문제였다. 거금을 주고 시작하게 된 미국 유학에 적어도 소기의 성과는 거두고 싶었다. 만에 하나 낙제라도 하면, 아무래도 면이 서지 않았다. 게다가.

“…챙기지 말라니까.”

제 통학을 우선해 이사까지 해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불편을 감수해 준 연인을 생각하자면, 추위도 무엇도 떨치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힘없이 슬리퍼를 끌고 나온 부엌, 덜렁 남겨진 식탁 위의 토스트와 약 봉투를 보고서 어떻게 게으름을 피우겠는가.

도보로 5분이면 학교 앞까지 갈 수 있는 자신과 달리 몇 번이고 터널과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정신없을 와중에도 제 아침을 챙겼을 재희를 생각하자니 입이 말랐다.

…그러니 더욱, 거를 수 없지.

쓴 입을 다시면서도, 정현은 그릇에 더불어 약봉투까지 깔끔하게 비우며 그 아침을 시작했다.

***

주거지 문제에 있어 두 사람은 늘 평행선이었다. 각자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건지, 아니면 서로를 과소평가하는 것인지 몰라도 의견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첫 보금자리는 재희의 근무지 근처, 뉴욕 어퍼 이스트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였다. 이 교수가 보증부터 여러모로 도와준 덕에 병원으로부터 도보 10분 남짓 걸릴 만큼 가까운 거리가 가장 매력적이었다. 서울의 강남은 우스울 만큼의 집값을 자랑하는 부유한 동네여서였을까. 도어맨이 말 그대로 문 앞을 지키고 24시간 프런트가 출입자의 신분을 확인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 점을 재희는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집을 자주 비우는 자신 때문에 혼자 집을 지킬 정현의 안위를 걱정해서였다.

보안이 좋은 점은 분명 장점이었다, 하지만 정현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거꾸로 정현은 그 점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신장이 2미터 가까이는 되어 보이는 가드들 앞에서 정현은 그저 얼어붙었다. 애써 따 온 영어 성적은 정말 벼락치기로 그 수명을 다해 버린 건지, 굿 모닝조차 입 안에서만 맴돌아 어색한 눈인사를 하는 게 최선이었다.

가을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일정도 없는 백수 생활. 그 핑계로 정현은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재희와 함께하지 않으면 마치 미아처럼 낯선 땅에 한 걸음 마음 편히 디디질 못했다. 영어 실력도 키웠고 비자도 당당히 따 왔거늘, 마치 불법 체류자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정현은 장소만 달라졌지 신촌 집에서의 생활과 별다를 것 없는 날들을 보냈다.

재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서울에서의 생활보다는 백 배 나았다. 그땐 일주일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지만, 지금은 적어도 내 집 침대에서 편히 잠을 잘 수 있으니. 정현은 그 부분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더는 홀로 잠들지 않아도 된다.

생각지 못한 부작용은 따로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재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기가 쏙 빨린 채 돌아와 죽은 듯이 늘어져 자는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 혹시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불길한 상상에 가슴을 졸인 적도 있었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나 코 밑에 손가락을 대 보고, 몰래 옷자락 위에 손을 대 가슴이 제대로 뛰나 별 유난을 떨다 정현은 문득 깨달았다.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너도.

관계를 맺지 않아도. 곁에 잠들 때마다 제 흉터 위로 손을 대보는 재희의 습관을 아주 늦게야 이해하게 되었다.

멀쩡히 잠든 것도 혹시나, 싶어 갖게 되는 그 불안한 마음. 노심초사 곁을 지키다 밥이라도 좀 먹고 자라고 깨울 때면 칭얼거리며 품으로 파고드는 재희가 안쓰러우면서도, 또 사랑스러웠다. 오직 자신에게만 보여 주는 연약함이, 무엇보다.

***

그래서 정현은 제 대학 근처로 이사하자는 재희의 제안에 무턱대고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학교 앞으로 가는 게 낫겠지.”

학기가 시작하기 전, 무더운 여름 재희는 이사를 종용했다. 사실 통보에 가까웠다. 대부분 거의 재희의 의견에 따르는 정현이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집 앞 출근에도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출퇴근길에 운전까지 하겠다는 연인의 의지를 방관할 수는 없었다.

“난 지하철 타면 되는데. 24시간이잖아.”

“너 전에 지하철 타 보고 나한테 뭐라고 그랬더라?”

정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싸움에선 늘 이길 수가 없다니까, 뭐, 몸싸움도 다를 바 없겠지만.

실로 뉴욕의 지하철은 서울과 사뭇 달랐다. 플랫폼에 들어서자마자 풍기는 불쾌한 냄새에 정현은 반사적으로 코를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렸었다. 심지어 쥐까지 보고 기겁하지 않았던가.

첫인상이 좋지 못했던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꽤 적응해 못 탈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 돌아가기는 해도 집 앞의 라인이 브루클린을 관통하기 때문에 한 번 앉기만 한다면 편하게 등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희는 이야기가 다르다.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빴던 주제에 운전까지 하겠다니. 게다가 뉴욕의 교통 체증은 세계 둘째가라면 서럽다. 평범한 직장인과는 다른 시간대를 살기에 러시아워를 피해 다닌다고 해도, 출퇴근길 운전 그 자체가 일상에 큰 부담이 되리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그럼 내가 기숙사에 살까?”

“나 대학 다시 다니라고?”

다시 또 패배. 정현은 두 손을 들었다. 정해진 결말이었다.

경제권은 애초부터 재희가 쥐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이었다. 평생 돈을 썼다면 썼지. 정현은 정식으로 취직해 보기는커녕 아르바이트를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것에 딱히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다. 딱히 과소비하지도 않을뿐더러 돈이 모자란 적도 없으니까. 게다가 숫자에 약해 달러 계산은 딱 질색이었다.

집 계약 역시 재희의 손에 달려 있는 문제였다. 결국 네 알아서 하란 식으로 만사를 맡기고 말았다. 그래서 두 번째 보금자리는 지금의 브루클린, 정현이 다니는 대학에서 5분 도보 거리의 타운 아파트로 정해졌다.

정현은 그 이점을 만끽하기 위해 수업 20분 전, 중무장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이후 일어날 일은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채로.

***

미라클 보이. 재희의 동료들이 정현을 부르는 별칭이었다.

막상 본인은 30대가 ‘보이’ 소리를 듣는 것을 겸연쩍어 했다. 동양인의 나이 가늠에 서툰 서양인들에게는 검은 머리에 작은 체구의 정현이 그저 소년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미라클. 정현은 그만큼 유례없는 천운을 타고난 경우였다.

선천적 심기형 환자가 항응고제 복용을 제멋대로 멈춰, 생성된 그 혈전1)이 뇌혈관을 막지 않은 것도. 사고 후 늦지 않은 재희의 조처로 수술까지 무리 없이 진행된 것도. 그리고 심폐 동시 이식을 받고도 아무 부작용 없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모든 게 운으로 설명될 만큼 기적적이었다. 게다가 정현의 생존은 이 교수팀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아무리 다민족이 사는 땅덩어리라지만 백인이 아닌 그들이 대접받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실력이 중요했고, 그 증거가 정현의 생존이었다.

그래서 정현은 제 건강을 챙기게 되었다. 작은 헛기침에도 모두가 노심초사하며 정밀 진단하는 그 과잉보호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 정현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어쩌면 그럴싸한 영웅 심리일지도 모른다. 부디 이 운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게. 그래서 모두가 제 덕을 볼 수 있도록. 운을 하늘이 정한다면, 지켜나가는 것은 인간의 의지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Hello?”

하지만 그날, 이 교수의 연락을 받기 직전까지만 해도 정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미라클 보이인 자신보다 더 운이 좋은 이가 제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

겨울은 겨울이구나. 분명 한낮에 스튜디오에 들어갔었는데, 나오니 해가 져 있어 정현은 어안이 벙벙했다. 때마침 배꼽시계만이 현실의 시간을 꼬르륵 소리로 알려주었다. 멍한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정현은 휴대폰을 켰다. 그나저나 재희가 오늘은 일찍 온다고 했는데, 저녁은 어떻게 하자고 할까, 생각하며 들여다본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확인하기도 전에 새로 전화가 걸려왔다. 놀랍게도 발신인은 이 교수였다.

‘여보세요, 교수님? 무슨, 네…? 잘 안 들리는….’

‘정현아. 침착해. 잘 들어.’라고 말하는 이 교수의 목소리가 더 엉망이었다. 오히려 교수님이 침착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하고 평소 같으면 한 소리 거들 정현이었지만 그렇게 받아치지 못한 건 무언가를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 교수가 제게 전화할 일이란 건 없다. 재희에게 전달해주면 될 테니. 하지만 제게 이렇게 전화가 왔다는 것은….

- 재희가 사고가 났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우선 병원으로….

귓가에 흘러든 단어가 엉망으로 뒤엉켜 머릿속을 맴맴 돌았다. 분명 익숙하게 파악되어야 할 모국어가 영어보다 더 난해하게 들려왔다. 단어들이 조각나 파편이 되었다.

사고, 자동차, 수술…. 수술이라니.

재희가, 의사인 한재희가, 수술을 집도하는 게 아니라 받아야 한다니.

***

전화를 끊고 어떤 정신으로 병원에 도착했는지. 지하철을 탔는지, 옐로우 캡이었는지. 정현은 그때의 기억이 없었다. 어른거리는 시야. 빛과 어둠, 주변의 소음. 긴 클랙슨 소리, 오가는 앰뷸런스의 붉은 빛들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이었다.

“정현아.”

이 교수가 제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정신 차리라는 말과 함께. 푸른 눈의 외국인 사이에서 유일하게 아는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야 정현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안심했다. 응급 수술에 이 교수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건, 적어도 흉부 쪽에는 이상이 없다는 소리였으니까.

“어떻게, 어쩌다가….”

“터널에서 사고가 났던 모양이야. 다리 쪽 골절이니 크게 염려하지 말고.”

사고 정황이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으나 터널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한 차가 재희의 차를 들이받았다고 했다. 조속한 조치로 바로 응급실에 실려 왔고, 당직이었던 이 교수는 퇴근한다던 재희가 도로 응급차에 실려 온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 바로 정현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엑스레이에선 다리 골절 외엔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신경 문제 때문에 혹시나 싶어서 바로 응급 수술 들어간 거야. 너무 염려는 말고.”

이 교수는 여러 가지 말들로 정현을 위로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리 쪽으로, 오른팔과 손 부근은 타박상뿐, 신경에는 이상이 없어 이 또한 천운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모든 위로는 정현을 빗겨나갔다. 닿지 않았다. 정현에게는 오직 한 생각뿐이었다.

“이사, 가지 말걸….”

“정현아.”

“그랬으면, 그랬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

정현은 줄곧 환자로만 살아왔다. 보호자 입장은 된 적도 없었고 되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는 더더욱.

“우선 내가 사인은 다 했다. 병원비랑은 따로 보험 적용될 테니까….”

게다가 온전한 보호자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사로 병원에 취직한 재희와 달리 아직 학생 비자 신분인 정현은 재희의 수술을 보증할 어떤 자격도 얻지 못했다. 해당 병원의 의사라는 가장 훌륭한 자격을 갖춘 이 교수가 그 절차를 대신했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현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대기실 벽에 기대어 눈을 감은 정현은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시에 냉정하게 자신을 책망했다. 배가 불렀지. 무사하기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면서.

“정현아, 재희 깬 모양이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재희도 예정대로 마취에서 깨어났다. 회복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정현은 겨우 재희를 만날 수 있었다.

“…….”

“…….”

감격의 상봉을 예상했던 이 교수는 어색한 분위기에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심히 어색했다. 마취에서 깬 재희도 두 사람을 알아보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수술과 대략적 상황을 전달한 뒤에 눈치 있게 자리를 피했다.

“그래. 둘이 이야기 나눠라.”

그렇게 이 교수가 도망치고 난 뒤에도 대화는 쉽사리 시작되지 않았다. 긴 침묵을 깬 것은 재희였다.

“많이 놀랐지.”

현실감이 없었다. 하얀 가운이 아니라 하얀 병원복을 입은 재희를 앞에 두자니 정현은 쉽사리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팔에 꽂힌 링거. 퉁퉁 부은 얼굴, 찰과상을 입었는지 딱지가 앉은 뺨과 입술. 상태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다리와 왼쪽 팔까지.

“…이런 식으로 복수할 줄은 몰랐는데.”

하루아침에 엉망이 되어 돌아온 연인의 모습에 기가 막혀서인지, 다행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담담한 척 말은 했지만 정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런 각도는 처음이었다. 어색했다. 늘 제가 침상에 누워있고 재희가 자신을 내려다봤었는데.

“기껏 열심히 달아놓고, 심장마비 시킬 거 아니면….”

“현아.”

수습되지 않은 마음에 괜히 말이 엇나가기만 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우는 게 나았으려나 싶을 정도로 마음과 혀가 따로 놀았다. 재희의 목소리가 조금만 덜 처연했더라면, 하마터면 정현은 더 모진 말로 서로를 상처 낼 뻔했다.

“왜.”

“보고 싶었어.”

“…….”

마취가 덜 깨어 몽롱한지 재희는 수없이 눈을 깜박이며 정현을 쳐다보려 애를 썼다. 그 느낌을 잘 알기에, 정현은 더는 재희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살았구나….”

안도하는 목소리에 울컥 감정이 북받쳤지만, 애써 이를 악물며 정현은 링거에 부은 재희의 손끝을 어루만졌다. 다행히 아무 이상 없다는 오른손이었다.

정현을 살리고, 또 수많은 사람을 살렸던 그 손. 동시에 재희에게는 의사로서의 자신을 지키던 힘이었던. 하지만 이제는 나약하기만 한 그 손끝을 정현은 용기 내어 쥐었다. 늘 뜨겁기만 하던 재희의 손끝이 차가워, 정현은 열심히 제 손을 문대고 비볐다. 그 온기 덕분인지 재희는 응석을 부렸다.

“목말라.”

“조금만 참아. 알잖아….”

“근데 나, 또 졸리다….”

“그래. 더 자.”

“현아. 너 여기서 자지 말고….”

“알겠어. 집에 가서 잘게.”

정현의 말을 듣고서 안심이 된 건지 말끝을 흐리더니 그대로 재희는 무거운 눈꺼풀을 닫아 버렸다. 가슴이 서늘하면서도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잠든 재희의 호흡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 정현은 무거운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결국 집에 가서 자겠다는 약속은 절반밖에 지키지 못했다. 정현은 뜬눈으로 외로이 밤을 지새워야 했으니까.

***

사고의 원인은 100% 가해자에 있음에도, 며칠간 정현은 죄책감을 쉬이 떨치지 못했다. 저 때문에 브루클린으로 이사해서 재희에게 이 사달이 났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현에겐 좌절하고 슬퍼할 겨를은 없었다. 재희가 성치 못한 상황에 홀로 연민에 빠져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들이 정현의 코앞에 줄을 서 있었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과제들과 테스트 준비로 한창인 데다가, 간병 또한 남의 손을 빌리기 싫어 정현은 두 마리 토끼를 잡기로 했다. 말로는 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지만, 병실에 들어설 때마다 묘하게 응석을 부리듯 손을 잡아오는 재희의 본심을 정현이 모를 리 없었다.

수술 후 사나흘 간 재희는 통증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부위는 달라도 엄연히 외과의인 환자 본인도 머리로는 그 회복 과정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 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재희가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을 평생 처음 본 정현은 처음엔 당황하다 못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겨우 재희의 머리를 품에 끌어안고 다독이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재희에게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겨우 잠든 재희 그 곁에서 정현은 함께 잠들거나, 밀린 과제 때문에 밤늦게 집에 돌아가고는 했다.

자괴감도 그 무엇도 일상보다 우위에 설 순 없었다. 생명을 구한다거나 하는 대단한 위업은 아닐지라도 정현에겐 해야 할 것이 있었고 그 모두 오직 정현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정현은 그 모두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무력하다 못해, 모텔 문밖에서 아우성을 쳐야만 했던 과거와 달랐다.

그래서 정현도 버틸 수 있었다. 보호자로서 서명 하나 할 수 없는 초라한 처지였지만, 어떤 종이 쪼가리보다 제 곁에서야 잠드는 그 나약한 의존이 정현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주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만해졌다.

***

그리고 재희 또한 최선을 다했다. 실로 한재희의 위력은 명석한 두뇌도, 준수한 외모도 아닌 체력이었고 스스로 그것을 다시 증명해 냈다.

“꼭 쫓겨나는 기분이야.”

짐승 같은 회복력이었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재희는 골절로 전치 8주를 진단받았으나 열흘도 안 되어 실밥을 풀고 퇴원, 통원 치료를 하게 되었다. 이사하기 전 같았으면 도보 5분 거리라 무리 없었을 테지만 브루클린에서 오갈 것을 생각하면 조금 이른 퇴원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부상에도 퇴원하게 된 모든 이유는 전부 환자 본인에게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목발 짚고 수술실 들어가겠다고 떼를 쓰는 게 말이 돼?”

“봤잖아. 워낙 긴급했으니까. 내가 들어가야 그나마….”

타이밍이 좋지 못했다. 하필이면 재희가 입원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흉부 쪽 수술이 연이어 잡혔다. 몰려든 수술에 스케줄 조절이 여의치 않자 사정을 뻔히 아는 재희가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병원 입장에서는 재희의 도움이 절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할망정 환자인 그를 쓸 수는 없었다. 걸핏하면 네 시간을 넘어서는 긴 수술에 다리 골절 환자를 들여보낸다는 선택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재희 역시 제 상태로는 무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동료들이 고군분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제 처지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재희는 회진을 온 스탭들에게 거꾸로 지난 수술 건을 캐묻기 일쑤였고, 결국 이 교수가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때마침 정현도 학기가 마무리되어 집에서 재희를 돌볼 수 있는 상황. 이 교수는 명목상은 퇴원, 실질적으로는 한재희를 추방 조치했다. 오지랖 스톱이라는 개별 처방전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나아서 재활 받고 돌아오면 되지. 지금은 너 민폐 덩어리밖에 더 돼?”

“심장 아프니까 그만 말해….”

“나보다 아파 봤을까.”

“자랑이다.”

반올림에 조금 무리해서 우기면 170센티미터. 정현은 콤플렉스였던 자신의 키에 처음으로 만족했다. 재희를 부축하기에 딱 적당한 높이였기 때문이었다.

철심을 박아 무릎을 굽히지 못하는 재희는 혼자 옷을 갈아입기도 어려웠다. 그를 부축해 옷을 갈아입히고 침대에 눕히는 것만으로도 정현은 한겨울에 땀범벅이 되었다. 급히 샤워한 뒤 채 머리도 말리지 않고 나가려다 재희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머리를 말려주는 재희의 손가락에 기분 좋게 눈을 감고 있던 정현은 시계를 보고는 허겁지겁 나갈 채비를 했다. 학기 중 화실로 사용했던 스튜디오의 키를 넘겨주고 와야만 했다.

“스튜디오만 갔다가 바로 올게. 아마 늦진 않을 거야.”

“우버 타는 거지?”

“맨날 메시지 받아보면서도 그런다.”

교통사고로 이 지경이 된 처지에 그러고 싶으냐고 이 교수에게 한 소리를 들었지만, 재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현에게 우버를 타고 다니라 강요했다. 비싸긴 하지만 재희 입장에선 정현이 우버를 탑승하고 이동하는 경로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일종의 감시지만, 정현에겐 기분 좋은 스토킹이었다. 이 정도야 애교지. 덕분에 정현은 신나게 길에다 돈을 뿌리고 있었다.

“약은 옆에 물이랑 하나씩 뜯어둘 테니까 챙겨 먹고. 아 참. 화장실은 안 가고 싶고?”

“너, 묘하게 신난 거 같다.”

재희의 볼멘소리에 목도리를 휘휘 감던 정현이 윙크했다. 정답이었다.

“왜. 보은하는 건데. 아직 한 30년치 남았지.”

“복수하는 거 아니고?”

“그러니까 누가 다치래.”

“그러게.”

재희는 허탈하게 웃으며 납득했다. 정현은 나가려던 걸음을 돌려 다시 침대로 돌아섰다. 마음이 급하면서도 동시에 내버려두고 가기 싫은 마음이 가슴을 어지럽혔다. 병원에서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늘 배웅을 하는 건 자신의 몫이었는데.

제가 아닌 재희가 홀로 집을 지킨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열흘간 병원에서 실컷 놀고먹었는데도 야윈 두 뺨이 안쓰러웠다. 그래서일까, 올려다보는 시선이과 말이 더욱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겨우 진정되었다 싶은 마음을.

“정말 미안해.”

“…….”

“많이 놀랐지, 정말 미안해.”

원래대로라면 웃으며 받아치려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제야 재희가 돌아왔다는 안도감에서였을까. 겨우 실감한 걸까.

홀로 외로이 잠들던 밤에도 여태껏 한 번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삽시간에 정현의 두 뺨으로 흘러넘쳤다.

커다란 눈에서 구슬처럼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낸 재희의 오른손은 여전히 퉁퉁 부어 있었다. 수술용 니들을 잡는 데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은 너무나 값졌다. 버릇처럼 엄지로 스윽 닦아 내자 드러난 정현의 두 눈은 하염없이 그 위를 눈물로 또 적셨다.

“아씨, 안 울려고 했는데….”

“왜. 뭐 어때서.”

“넌 내가 우는 게 좋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실컷 울어 버렸다. 막상 울어 버리고 나니 조금은 개운해졌다. 재희가 자신을 지켜왔듯, 이번엔 재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정현을 짓누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재희의 말대로 불안했고, 무서웠고, 많이 놀랐다. 그 나약함을 인정해 버리니 오히려 홀가분해진 걸까. 의욕이 생겼다.

“다녀올게. 조금만 참아.”

“내가 애냐.”

“응.”

이 눈으로 어떻게 나가냐며, 토끼처럼 붉어진 눈으로 쏘아보는 정현에 이번엔 재희가 윙크를 했다.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을 수 번 되풀이하며 집을 나선 정현은, 여전히 진통제 때문인지 퉁퉁 부은 재희의 얼굴이 지독스레 못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어서 빨리 잘생김을 되찾도록 만들어야지.

***

약속대로 정현은 빠르게 귀가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재희는 열이 올랐다.

의학적 지식을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겪는 건 별개임을 재희는 통감했다. 능숙하게 제 머리 위를 손으로 짚는 정현은, 자신과 거꾸로 체득한 쪽이었다.

“내 손 차가우니까.”

손바닥에 닿은 재희의 이마에서는 미열이 느껴졌다. 통증과 함께 살짝 열이 올랐는지 입술도 말라 있었다. 처방된 항생제도 먹었으니 이제 남은 건 약효가 돌기를 기다리는 것뿐. 그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았지만, 아무것도 초조한 그들을 위안하지 못했다. 갑갑한지 뒤척이면서도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는 재희가 안쓰러워 정현은 제 입술을 축였다. 위로하듯 재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원해.”

“이게 또 쓸모가 있지.”

“응.”

그 나른한 미소에 뿌듯함을 느끼면 어딘가 조금 잘못된 걸까.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정현은 죄책감 섞인 보람으로 가슴이 들떴다.

봄마다 재희가 앓는 계절 갈이는 감염성 질환이었고, 그때마다 재희는 병원에 입원하곤 했다. 당연히 정현은 간호할 수 없었다. 소싯적에 대형 사고를 쳤던 죄를 상기해 제가 알아서 몸을 사렸다. 그게 모두를 돕는 일임을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미열은 마음 놓고 간호할 수 있다. 그 흔치 않은, 그리고 흔치 않아야 할 기회를 붙든 정현은 열에 달뜬 재희의 뺨을 찬 손으로 어루만지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래도 좀 쓸모 있는 인간 같아, 나.”

“넌 늘 도움이 돼.”

“내가 뭐 했다고.”

멋쩍은 마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농담이 아니라는 듯 재희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몇 번이고 열이 오른 뺨에 마주 댄 손은 어느새 조금 따뜻해져, 서로 비슷한 체온이 되었다. 정현의 손등을 덮은 재희의 손바닥은 여전히, 조금 더 뜨거웠지만.

“너 없을 때 나 폐인이던 거, 기억 안 나?”

“편하게 산 거지.”

“그땐 진짜, 죽지 못해서 살았어.”

“…….”

“죽으면, 혹시 너한테 연락이 가서 네가 놀랄까 봐. 죽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잘했네.”

“응.”

잠시 대화가 끊겼다. 서로 말은 않아도, 순천에서 재회했던 그 순간을 다시금 떠올린 탓이다.

“옆에 누울래?”

“…응.”

그 때문이었다. 턱없이 빨리 끝내 버린 간호에도 정현은 응석을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은 빨리 이렇게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늘, 언제든 저보다 뜨거운 재희를. 크고 단단하지만, 사실은 이렇게 나약하기도 한 재희에게 닿고 싶었다.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 속 후끈한 열기를 느낀 정현의 커다란 눈에 살짝 물기가 어렸다.

“현아.”

“왜애.”

“…무섭더라.”

다치지 않은 오른쪽 어깨를 정현에게 내주며, 재희는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히 말을 이었다.

“주마등이라고 하잖아. 그런 거 본 거 같기도 해.”

정현은 말없이 하얗게 일어난 재희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감싸 물었다. 적셔진 타액은 곧이어 서로의 입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딥 키스는 아니었다. 살포시 서로 입술을 어루만지는 것으로, 그나마 재희의 입술이 혈색을 되찾았다.

“네 살 때는 사실 기억도 안 나고.”

“그땐, 스치기엔 너무 짧았지.”

“그러니까. 리플레이 할 것도 없었을 거야.”

농담 삼아 이야기하고는 있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옆으로 누워 재희의 옷자락을 쥔 정현이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너밖에 안 떠오르더라.”

“…….”

“억울하더라고. 내 인생이. 어떻게 한정현뿐이지 싶어서.”

농담 삼아 건네는 말인 줄 알면서도, 정현은 재희를 따라 웃지 못했다.

“내가 여기서 죽으면 정현이는 어떻게 되지. 보험은 어떻게 들어 놨더라. 돈 관리 한 번 안 해 본 네가 제대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재희야.”

“설마 따라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난… 기쁠까 슬플까.”

나지막이 읊는 말에 정현은 숨이 턱 막혔다.

정현도 마찬가지였다. 늘 죽음은 제게 먼저 찾아오리라 여겼다.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재희가 없이 홀로 살아갈 삶이라니. 귀에 울린 재희의 가정만으로 정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살리겠다는 생각만 했지, 그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어. 생각할 겨를이 없었나 봐. 그래서 내내 후회했어.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잘, 하고 있었는데 왜.”

“매번 네가 괜찮다, 괜찮다 해 주니까, 좀 여유를 부렸나 싶기도 하고. 방심했던 것 같아.”

언제든, 삶은 내 예측대로 된 적이 없었는데, 미련했어. 덧붙은 말에 정현은 두 눈을 꼭 감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없어질 가정은 일부러 하지 않았고. 내가 없어질 가정은 못 했어. 바보 같지.”

“바보냐.”

“어, 공부 머리만 있나 봐.”

정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그랬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는 힘이 없는 거야.”

“…….”

“그때, 예전에… 널 살리지 못해서 느꼈던 무력감이, 다시 되돌아왔어. 그게 무섭더라.”

재희는 흐려진 눈빛으로 제 너머 무엇을 보고 있을까. 정현은 미처 가늠할 수 없는 그 순간의 공포를 어루만지지 못해 재희의 가슴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오른손으로 쓰다듬는 정현의 검은 머리칼을 몇 번 쥐며, 재희는 작게 웃었다.

“나는, 늘 건강해야 하는데.”

“맞아.”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느라 나풀거리는 검은 머리칼에 재희는 입을 맞췄다.

“그러니까 내가 미안, 이번엔.”

“용서해 줄게.”

“고마워.”

재희 역시 운이 지나치게 좋았다. 네 살 때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돌아왔고, 이번 사고에도 다른 후유장해 없이 단순 골절로 끝났다. 만에 하나 손을 다쳤다면 아예 의사란 직업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이 운은 어디까지일까.

어찌됐건 해피엔딩이라고 안심하기엔, 삶은 너무나 파란만장해 예측할 수 없지만.

“여긴, 건강한 거 같은데.”

“거긴, 늘.”

위안이 되는 건 늘 현실에 닿는 체온인걸.

위험했다. 한동안 곁에 있으면서도 닿지 못했던 체온에 목이 말랐다. 다가선 재희의 목덜미에서 나는 특유의 체향에 나른해진 정현은 젖은 속눈썹을 비비며 손으로 재희의 것을 쓰다듬었다.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 줄 것은 지키지 못할지도 모를 무형의 약속보다 달아오른 몸, 그 체온이었다.

“늘, 너무 건강해서 탈이고….”

“아, 잠깐만….”

“넌, 정말. 내가 바쁜 걸 감사한 줄 알아야 해.”

목이 마른 것은 늘, 기약 없는 해피엔딩보다 눈앞의 즐거움이었다. 언제나 그것만이 오직 불안에 물든 서로의 두 눈을 가려 줄 수 있었기에.

***

평상시에도 꾸준히 관계는 맺어 왔었다. 그 피곤한 일상 중에서도 재희의 아랫도리는 제 주인을 닮았는지 부지런하기도 해서, 어김없이 아침마다 굳건히 텐트를 치고는 했으니까. 바쁜 와중에도 간혹 제 뒤를 찌르는 것에 이끌려, 정현은 잠도 제대로 깨지 못한 채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를 사이에 관계를 맺곤 했다.

그것에 비교하면 재희의 사고 이후 오랫동안 서로에게 닿지 못했다. 그래서 부끄럼 없이 정현은 옷을 벗었다. 그리고 재희가 시키기도 전에 스스로 자세를 잡았다.

파자마 차림으로 누워 있는 재희는 그 불룩한 아랫도리만 제외하면 태연해 보였다. 다만 그 위에 팔다리로 몸을 지탱한 채 엎드려 있는 정현은 알몸이었다. 드러누운 재희의 얼굴 앞에 제 엉덩이를 내보이고, 거꾸로 제 숨결이 닿는 근처에 재희의 바지가 불룩한 부분이 닿아 있었다. 제 입구 주변을 어루만지는 재희의 뜨거운 손끝에 벌써부터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느라 정현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힘들어? 자세, 바꿀까?”

“아니…. 그냥, 그냥….”

“알겠어.”

“…아!”

움직임을 갈구하는 정현의 대답과 동시에, 입구 주변을 배회하던 재희가 검지로 그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허리가 내려앉을 뻔했지만 정현은 필사적으로 몸을 지탱하려 했다. 필사적이었다. 주저앉을 수는 없으니까. 평상시 같으면 재희에게 못 하겠다며 응석을 부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원래 정현은 기승위를 꺼리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재희의 눈앞에 제 흉터가 자리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렀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부분을 극복했지만, 유독 정현은 재희에게 제 흉터를 보여 주기를 꺼렸다. 사실 유두와 가슴 애무를 즐기는 재희는 그 체위를 좋아해도 정현이 늘 부끄러워하는 터에 강요할 수 없었다.

더불어 운동신경과는 영 거리가 먼 탓인지 위에서 직접 움직이는 데엔 요령이 생기지 않았다. 순천에서부터 주기적으로 관계를 맺어 와 삽입행위에 꽤 익숙해진 편임에도 정현은 재희가 도와주지 않는 한 혼자서 움직이는 것을 버거워했다. 아무래도 성기가 더욱 깊숙이 박히는 체위 덕에 오히려 페이스를 조절하지 못해 통증까지 느끼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수가 없었다. 무릎과 발목을 다친 재희가 움직일 수 없으니, 몸이 달아오른 제가 아쉬운 만큼 움직이는 수밖에.

“재희, 야….”

그 노력을 가상히 여기는 듯이, 윤활액을 잔뜩 묻힌 검지를 빠르게 오가며 재희는 제 얼굴 앞에 놓인 허벅지 사이를 혀로 애무했다. 끼치는 쾌감에 고개를 젓는 정현의 두 허벅지 사이가 파르르 떨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재희의 손과 혀 놀림 하나하나가 데일 것처럼 뜨겁게 느껴져 정현은 몇 번이고 몸을 틀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아, 아. 잠깐….”

“아파…?”

“으음. 읏. 아….”

“겨우, 두 갠데?”

츄읍. 하는 마찰음이 자신을 비웃는 소리처럼 들렸다. 버거운 듯 오물거리는 입구가 두 개째 재희의 손가락을 받아들였고, 정현의 신음은 더욱 짙어졌다. 앓는 소리에 재희가 입구 근처의 여린 살을 핥고 키스 마크를 남겼다. 통증을 분산시켜 주려는 듯이.

“이걸로 이러면 어떡해, 현아.”

“아아, 아…. 흐윽, 재희….”

“내 건 이거보다 훨씬 더 굵은 거 알잖아. 응?”

대답하듯 정현은 스스로 재희의 바지춤을 내리고 튀어나온 성기에 입을 맞췄다. 생각을 멈춰야 했다. 어떤 시선으로 재희가 자신을 볼까. 제 잔뜩 벌어진 뒤를 그대로 들여다보며 천박하다 여기지는 않을까. 오히려 그 짓궂게 놀리는 말에 깃드는 수치심이 제 성욕에 불을 붙인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 그대로를 드러내는 정현의 입구는 재희의 손가락을 물고 조이고 있었다. 제 것을 펠라티오를 하기 시작한 정현에 재희 역시도 웃음기를 잃었다. 크기를 순식간에 불려 정현의 목젖을 건드릴 정도로 발기해 버린 재희의 것은 배꼽에 닿도록 서게 되었고, 안쪽을 서서히 넓히던 손가락 역시 순식간에 하나가 더 불었다.

“으읏, 응, 읏! 아, 재희, 재희야.”

세 개째가 되자 더는 참을 수 없는 듯 정현은 거칠게 신음했다. 마치 피스톤질을 하듯 규칙적으로 손을 움직이는 재희는 붉게 달아오른 동그란 고환을 입 안에 담아 굴렸다. 물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한 정현 탓에 이리저리 타액이 흩어지기도 했다. 크게 낼 힘조차 없다는 듯 고꾸라진 정현 탓에 정현의 신음은 발기한 재희의 음모와 성기에 그대로 먹혔다. 그리고 그걸 윤활제 삼아 재희의 것은 핏줄까지 모두 곤두선 채로 정현을 유혹하고 있었다.

“나, 나….”

“응. 말해.”

“넣고, 싶어, 네 거….”

쾌감에서인지 부끄러움에서인지 모르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정현이 힘겹게 내뱉은 말에 재희는 대답 대신 그 하얀 엉덩이를 깨물었다. 붉은 잇자국을 남기며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정현은 탄성을 내며 주저앉았고, 그 몸을 재희가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재희의 팔에 의지해 몸을 돌려세운 정현은 그 너른 어깨를 짚으며 서서히 그 위로 내려앉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몸은 거기에 따르지 못했다. 휘청이는 몸을 다부지게 쥔 재희의 손아귀가 아니었다면, 정현은 재희의 두툼한 것을 쥔 채로 한참을 헤매었을 것이다.

이윽고 벌어진 그 다리 사이로 재희의 것이 들어섰다. 우뚝 솟은 귀두는 그 끝이 이미 푹 젖어 금방이라도 정현의 속을 꿰뚫을 수 있을 것처럼 반들거렸다. 하지만 막상 닿는 감촉은 달군 쇠처럼 단단해 정현은 무너지려는 허리를 자꾸만 일으켜 세울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들어오지 않고 서서히 넓혀가는 육중함에 정현이 고개를 꺾었다.

“아, 아아…!”

스스로 내려앉던 정현이 마치 뛰어오르듯이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반쯤 발기한 채 액체를 줄줄 흘리는 정현의 것이 재희의 배에 이리저리 부딪혔다.

“현아….”

부르는 이름에도 정현은 이를 악물며 온전히 재희 위에 제 체중을 싣지 않으려 애를 썼다. 제 배 속을 가득 채운 채 밑에서부터 밀어 올리는 재희의 것은 정현 홀로 견디기엔 버거울 만큼의 뜨거움을 담고 있었다. 쾌락과 함께 덤벼드는 고통은 수위를 넘은 지 오래였다. 바들바들 떨리는 팔과 다리가 한계를 말하고 있었지만 정현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 통증을 만끽하고 싶었다.

“아, 다…들어, 왔….”

“하아….”

결국엔 다 품어 버린 뒤 정현은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안에서 조이는 압박감에 재희는 참기 어려웠지만 힘겨워하는 정현을 어루만지고 그 흉터에 입을 맞췄다. 그것이 마치 시작 신호인 것처럼 정현은 서서히 앞뒤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 순간 안에서 더 크기를 불리는 재희의 것이 정현을 마구잡이로 헤집기 시작했다.

“좋아, 아, 좋아. 재희, 야….”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려 하는 그 서투른 몸짓에 맞추어 재희는 손을 움직였다. 움직여 더욱 깊숙한 곳으로 골반을 쳐올리지 않는 대신 발기한 채로 제 가슴께를 치는 정현의 것을 살포시 쥐었다. 기다렸다는 듯 정현의 것 끝에서 정액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재희 역시 정현의 안에 잔뜩 사정해 낸 정액들이 역류해 배와 음모가 흠뻑 젖어들고 있었다. 그 찐득한 액체가 정현의 서툰 움직임에 따라 찌걱거리며 야살스러운 소리를 냈다.

“안에, 안…에. 응, 읏.”

“아, 현아….”

“아아, 아! 읏, 윽!”

절정에 달했을 때의 버릇이었다. 오히려 소리 없이 입을 크게 벌리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정현의 모습에 재희는 정현의 것을 매만지던 손을 떼어 버렸다. 치골 위에 놓인 정현의 밀부가 떨어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붙든 뒤 살짝 안쪽을 문질러 주자, 몸을 급격히 뒤틀며 정현은 사정에 이르렀다.

“아읏, 아, 안 돼, 안 돼, 안…!!!”

사정을 마치고도 귀두 부분을 놀리는 재희의 손에 정현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도리질했지만, 재희는 아랑곳없이 문질렀다. 사정 직후의 예민한 부위와 정현의 몸 안에 여전히 육중한 부피를 자랑하고 있는 재희의 것이 동시에 얕은 부위를 문질러댔다. 그것에 속절없이 느껴 버린 정현은 비명을 지르며 투명한 것들을 재희의 가슴팍에 쏟아냈다. 사정없이 조여 대다 하체를 흔들어 대는 정현 탓에 튀어나온 재희의 것도 그 다리 사이와 입구에 흥건히 제 것을 쏘아 대며 동시에 절정에 이르렀다.

늘어져버린 정현이 제게 입을 맞춰올 때까지, 정액으로 범벅이 된 재희의 손은 늘 그랬듯 정현의 가슴 중앙, 그 심장 가장 가까이에 머물러 있었다.

***

후희는 관계보다 더 길게 이어졌다. 다만 달라진 것은 재희가 아닌 정현이 화장실을 오갔고, 또 재희의 몸을 닦아 주고 뒤처리를 했다는 점이다. 물론 중간에 몇 번이고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지만.

“이럴 거면 그냥 애초에 둘 다 벗고 할걸.”

“그러게.”

따뜻한 물로 적신 타올로 재희의 몸을 닦으며, 정현은 쉴 새 없이 자책했다. 선연한 흉터에 마치 짐승 같았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리고 상처마다 입을 맞추어 사죄를 대신했다. 덕분에 재희의 것은 또 기립했으나 도리어 정현에게 위로가 되었다. 저 혼자만 짐승은 아닌 것 같아서.

“나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지금도 괜찮아.”

또 깨닫는 바가 있었다. 관계할 때마다 재희는 정현의 가슴 흉터를 집요하게 애무하곤 했다. 그때마다 정현은 자격지심을 갖곤 했었다. 늘 재희는 제 모든 게 예쁘고 좋다곤 했지만, 속으론 그 흉터가 보기 싫어 그러는 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제 능력으론 낫게 할 수 없지만 어서 낫기를. 지울 수 없는 흉터라 해도 그 부질없는 마음을 토로하는 입맞춤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이런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도움으론 성이 차지 않는다. 정현은 현실을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막연히 요 며칠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을 꺼내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

“나도 시민권부터 얻고 싶어.”

예상치 못한 정현의 말에 재희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정현의 눈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나, 그때 사인 못해서 솔직히 서운했거든.”

“…….”

재희가 그 맥락을 짐작 못 할 리 없었다. 수술이 끝나고 이 교수에게 전부 전해 들은 바였다.

“그림은 그림이지만, 따로 일도 하고, 돈도 벌어서 노력해볼래. 아, 물론 너에 비해선 이게 월급인가 하는 수준이겠지만.”

“현아.”

올려다보는 두 뺨은 여전히 오르가슴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부끄러움 탓인지 연한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꾸로 이제는 열이 가신 얼굴에 미소를 띤 재희가 입을 맞춰 왔다. 아까와 달리, 정현이 몇 번이고 코로 신음할 정도로 길고 긴 키스였다.

“큰일이다. 나 워드 치고 자야 하는데.”

“졸려?”

“응….”

노곤한지 눈을 비비면서도 정현은 헤헤 웃었다. 아무래도 이러다간 이대로 자겠다며 침대에서 일어서는 정현의 하얀 나신은 종전의 키스마크로 엉망이었다. 그 흔적을 가만히 올려다본 재희가 입을 열었다.

“현아, 우리 여행 갈까?”

“뭐?”

재희를 내려다보던 정현은 조금 얼빠진 표정을 했다. 정현이 귀를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휴가라니. 여행이라니. 두 사람에겐 가장 낯설고 이질적인 단어였다.

“춥잖아. 쉬는 김에 여행이나 가자고. 좀 따뜻한 나라로”

애초에 외과 의사란 직업 특성상 휴가랄 게 없었다. 오프도 귀한 판국에 어디 여행을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고와 수술 일정은 예측할 수 없기에. 사실상 오프도 휴식보단 자택 대기待期조의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런 재희가 놀러 가자니, 회복하자마자 당장 수술실로 뛰어들어 갈 것 같은 인간의 말에 정현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뭐, 너 나으면.”

“그래. 알겠어.”

“근데 웬 여행…? 갑자기.”

“그냥. 너무 추워서.”

“맞아, 너무 춥긴 해. 라디에이터 틀까?”

춥다는 제 말에 이불을 자신의 턱밑까지 추어올리는 정현의 손길에 재희는 나른하게 눈을 감더니 응석을 부리듯 제 뺨을 그 손에 기댔다.

겨울을 닮아 서늘한 손바닥에서 온기를 느끼고, 그리고 그 손이 멀어지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냉기에 떤다. 제게는 가장 따스한 손. 그 손을 영원히 놓지 않기 위해.

그래서 두 사람은 떠나야만 했다. 이 겨울을 피해 어디론가, 끝이 없는 길을 따라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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