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Anti-biotic (10/14)

어색한 건 딱 질색이었다.

“나 먼저 가 있을게.”

정적을 깬 정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전거를 끌었다. 맨날 뒤에 타기만 해서 몰랐는데, 책가방 두 개를 실은 자전거는 생각보다 꽤 무거워 힘을 주며 밀어야 했다. 가방 내려 두고 올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학교 앞 늘어선 자전거 끝에 걸어가 잠금장치를 잠그고 힘겹게 책가방을 내려 둔다. 가방 둘의 무게 차는 현격하다. 하나는 날아갈 듯 가볍고, 다른 하나는 찢어질 듯 무겁고.

“…오래 걸리나.”

기다리지 말고 들어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둘 다 들기엔 가방 무게가 만만치 않다. 중간고사를 갓 끝낸 5월. 시험도 끝났는데 무슨 책을 이렇게 많이 넣고 다니는 거야. 정현은 무거운 가방도, 그 가방의 주인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무거운 걸 들지 말라는 조언을 주구장창 들어온 터에 정현은 손발은 가볍게 하고 다녔다. 2학년이 되어 적성에도 안 맞는 이과 수업을 듣게 되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애초에 공부에는 큰 욕심도 없었는데 교과목마저 도와주는 셈이 되었다. 간혹 무거운 게 있으면 그것을 드는 이는 따로 있었다.

“미안.”

바로 방금, 등굣길에 주변 학교 여학생에게 고백을 받은 저 잘난 누구 씨. 헐레벌떡 달려온 한재희는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분의 가방을 번쩍 들어 올렸다. 무게 때문에 휘청거렸던 정현이 기분 상할 만큼 가뿐하게.

“뭐가.”

“어? 그냥.”

제 몫의 가방까지 건네주고도 조금은 뻔뻔하게 교복의 타이를 고쳐 맨 정현은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자연스레 아까 전 얼굴을 붉히며 다가왔던 여자애가 떠올랐다.

전형적인 청순가련형. 긴 생머리에 눈이 크고, 하얀 얼굴의 청순한 여자애. 주워들은 풍문으로는 문제의 그 ‘이상형’과 무척 흡사한 외모였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었을까? 들었으니까 그래도 이야기라도 했겠지? 말을 걸어 오던 여자애를 바라보던 한재희의 표정은 그다지 나쁘진 않았다. 정현은 혼자 입술을 이리저리 짓이겼다. 어떻게 됐냐고 묻기엔 조금, 새삼스럽기도 하고. 알아봤자 뭐 할까 싶기도 하고.

좀처럼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힐끔거리던 눈이 딱 마주쳤다. 꽤 키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은 재희가 내려다봐야지만 서로의 시선이 맞물렸다. 늘 그를 올려다보곤 하는 정현으로선 그마저도 조금 짜증이 났다.

넌 왜 이 각도로 봐도 잘생겨서는.

“뭐해?”

“…아냐.”

부럽다. 어느 쪽이 부러운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고백하는 쪽도, 받는 쪽 모두 다 정현에겐 언감생심이었다. 여자애처럼 자신의 마음을 고백할 수도, 물론 한재희처럼, 한재희에게 고백받을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정현은 가볍게 동정했다. 매일 과업처럼 겪는 일과였다. 얼굴도 잘난데다가 머리도 좋은데 신체 조건마저도 월등히 좋아 저보다 훨씬 큰 보폭으로 먼저 계단을 오르는 한재희의 뒤를 따르며 정현은 폭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를 한 번 털었다. 이 과정마저도 벌써 지긋지긋하다. …깨달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생각해 보면 새삼스럽다. 하루 이틀 일인가, 한재희가 고백받는 게.

제 가방까지 거뜬히 짊어든 너른 어깨를 올려다보며 한정현은 해묵은 기억을 꺼내 들었다.

***

어린이집 5세 반에 새 어린이가 들어왔다. 같은 집에 산다는 남자아이 두 명. 형제는 아니라고 했다. 나란히 손을 잡고 들어선 아이들 모두 순하고 착해 보였다. 보통 어린이집에 처음 와 부모가 사라지면 아이들은 어련히 울기 마련이었음에도 두 녀석은 의젓하게도 울지 않았다. 그저 둘이 손을 꼬옥 붙들 뿐. 참 착하고 어른스럽네, 하고 생각하고 얕본 게 실수이며 오산이었다.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첫날부터 사건은 터졌다.

“어머, 지혜야!”

등원할 때마다 포니테일에 왕 리본을 빠짐없이 매달고 오는 지혜는 전형적인 공주님 타입이었다. 모두의 관심이 자신에게 주목받아야만 만족하는 성격으로 딱 예쁨과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게다가 보는 눈은 기가 막혔다. 어린이집 선생님부터 운전기사 아저씨까지 외모를 기준해 1등부터 꼴찌까지 순번을 매길 줄 아는 그녀의 날카로운 안목은 이미 동네에서 유명했다. 문제는 바로 거기 있었다.

새로 들어온 두 아이는 모두 참으로 눈에 띄는 외형의 소유자로 아역 배우로 데뷔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정갈한 얼굴에 오똑한 코가 돋보이는 재희는 유독 또래답지 않은 의젓한 매력이 있었다. 아직 말이 잘 트이지 않아 사교적이진 않았지만 그 덕분인지 얼굴에 걸맞게 점잖은 아이였다. 다섯 살 주제에 은근히 분위기까지 있어 후일이 참으로 기대되는 얼굴이었다.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도 재희는 될성부른 떡잎이었고 지혜 또한 그런 재희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날 간식으로 나온 요구르트는 지혜가 좋아하기로 소문 난 사과 맛이었지만 꽂힌 빨대에 입 한번 대지 않았다. 대신 재희에게 통째로 건넸다.

간택이었다. 식탐 또한 대단했던 그녀가 자신의 식후 간식을 주는 일은 이제껏 한 번도 없었다. 역대급 프러포즈나 다름없었다. 흥미진진한 상황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

“시러.”

“…!”

“너 시러.”

당차게 돌아온 답변에는 여지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사랑해야만 하고, 사랑받아야 마땅한 공주인 지혜에게는 일어나서는 안 될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말이 서툴러서겠지. 재희는 또래와 비교해 말이 느린 편이었기에 대부분의 의사 표현을 몸짓이나 행동으로 대신했다. 사회성이 부족한 편이라 차차 길러야 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선물을 내팽개친 건 그 어떤 변명도 불가능한, 확실한 거절이었다. 게다가 꽤 모욕적인.

“미아내. 지헤야 미아내.”

사실 사고가 터질 거면 이쪽이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정현이는 재희와 2개월 차이의 아이로, 선천적으로 심장이 좋지 않았다. 어린이집은 소수 반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혹시나 모를 위험에 정식 등록도 거절했었다. 워낙 재희가 사회성이 없는데다가 두 녀석이 워낙 찰거머리처럼 붙어 다니는 사정에 임시로 며칠만 다니겠다고 부모와 협의한 상태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기차게 거절을 해 놓고 재희는 지혜의 눈물에는 나 몰라라 정현의 뒤에 숨었다. 마치 다른 사람 짓이라는 듯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엉겁결에 한패가 된 정현이는 큰 눈을 깜박이며 당혹스러워했지만, 이내 울고 있는 지혜를 다정하게 달래기 시작했다. 다행히 정현 역시도 지혜의 까다로운 안목 하에선 합격을 받을 정도로 꽤 반반한 외모였다.

얼핏 봤을 때는 여자애인 줄 착각할 정도로 예쁘장했다. 결이 좋아 반짝거리는 머리칼에 커다란 눈. 핏기 없는 하얀 피부와 조곤조곤 사과하는 입술은 붉기보다는 옅은 푸른빛이 맴돌아 아픈 아이인 게 티가 났다. 하지만 아픈 아이 특유의 예민함이나 까칠함은 찾아볼 수 없이 다정한 성정이었다. 지혜를 달래는 목소리는 맑고 잔잔했다.

그래서 지혜는 제 푹 젖은 뺨에 닿는 작은 손을 내치지 않았다. 외모지상주의인 그녀는 제가 생각하기에 못생긴 사람이 저를 만지면 경기를 일으키곤 했는데, 그 까칠한 성격에도 순한 양이 되는 것을 보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사랑이 꽃피는 것인가 싶었다.

“미아내.”

“우웅, 흑.”

“지헤야, 지쨔 미아내.”

오, 눈물이 그쳐가고 있다. 그 아침드라마보다도 더한 전개와 가파른 감정선이었다. 사건을 관망하고 있던 어린이집 선생과 아이들 일동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 기대를 제대로 걷어찬 건 매번 예상 밖으로 행동하는 재희였다.

“정혀나. 가자.”

“재히야아.”

“가자아.”

마치 자기가 안 울렸다고 항의라도 하듯 정현의 뒤에 큐브만 매만지고 있던 재희는 볼이 부루퉁해져 있었다. 정현이 지혜를 위로하는 것마저도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지혜의 뺨을 도닥거리던 정현의 하얀 손을 휙 쥐더니 제멋대로 끌고 가버렸다. 체구가 비슷한데도 정현은 맥없이 휘청거리며 재희가 이끄는 대로 일어서야 했다. 다섯 살짜리의 세계는 좁다. 고작해야 대각선, 방구석이 목적지였다, 할 수 있는 최대한, 지혜와 가장 먼 곳으로 정현을 끌고 가 주저앉힌 재희는 다시 큐브를 꺼내 들었고 모두 황당함에 이루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지혜의 눈물 역시 다시 터지기 시작했다. 그 서러움과 쪽팔림은 아무도 수습할 수 없었다. 우렁찬 곡소리, 난감해하는 정현의 큰 눈이 굴러가는 소리. 조막만 한 손으로 이리저리 큐브를 굴리는 소리가 오후의 어린이집을 울렸다. 선생 모두는 혀를 찼다.

역시, 얼굴값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

사고가 있고 1년 가까이 지났다. 이젠 과거가 되어 빛이 바래고 희석되었을지는 모르나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떠도는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다만 위안이 되는 것은 시간은 분명 흐르고 있다는 것과, 그 시간의 흐름에 맞춰 아이들 또한 자라나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마치 형제처럼, 아니 그보다 더 돈독해진 아이들만이 유일하게 웃을 거리였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던 탓인지 사고 이후로 연주는 쉬이 앓아누웠고, 아무리 아이들이 얌전하다고는 하나 연약한 몸으로 두 남자아이를 돌보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하나와 둘은 감당해야 할 책임감의 무게가 달랐다.

승환과 의논한 끝에 재희만이라도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한 것은 아이의 말문이 늦게 트이는 이유에서도 있었다. 어른들마저 힘겨울 이 트라우마가 부모 잃은 아이에게는 오죽하랴. 노파심에 소아정신과에 데려가 진찰도 해 봤지만 사고나 발달 과정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만 사회성이 부족한 점은 사실이었고, 몇 번의 돌발 행동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되었다. 몸이 약한 정현은 어쩔 수 없다지만 재희는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그 점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둘의 유대는 어른들이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입원한 정현의 머리맡을 꼬박 지킬 때부터 재희가 남다르다고 생각했지만 둘의 유대감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낯을 가리는 재희는 둘째 치고 제 몸 아픈 것은 생각도 않고 재희의 손을 잡고 정현이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집은 난장판이 됐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부부는 재희와 정현 모두 어린이집에 등원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첫날부터 원장의 전화를 받았다.

“재희랑 정현이. 오늘 무슨 일 있었다면서.”

그 현장을 보지 못한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해프닝에 대해서 이야기는 들었지만, 연주와 승혁은 어련히 재희가 낯을 많이 가리는 걸 이해했고 다 사회화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정현이가 몸이 아픈 것처럼 재희는 마음이 아팠고 둘 다 한창 어리광이 필요한 나이였다.

하지만 또 없었던 일처럼 놔둘 수는 없다. 친자식이 아니라고 모든 걸 오냐오냐해서는 안 되기에 두 사람은 저녁 식사 전 아이들을 불러 가볍게 혼을 냈다. 아이러니하게도 혼을 내는 쪽이 더욱 가슴을 졸여야 했지만.

“다음부터 그러면 안 된다. 알겠니?”

쉬운 말로 온건하게. 혹여 마음 상할까 적당히 타이른 말에 영특한 아이는 의도를 잘 이해한 듯했다. 정현이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는 것과 달리 재희는 쉬이 제 잘못을 수긍했고 잘못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을 낸 후에도 시무룩해하는 기색 없이 식탁에 앉아서는 제 몫도 잘 비웠다. 과일까지 아삭거리며 잘 먹었다. 부부는 안도했다. 재희는 절대로 우는 법이 없었다. 해가 저물기 전에는. 정현이 올 때까지는.

***

온전한 밤의 시간.

노크도 없이 방에 들어선 정현은 익숙하게 옷장에서 재희를 꺼냈다. 정현의 품에 폭 안긴 아이는 눈이 이미 퉁퉁 부었고 뺨도 흠뻑 젖어 있었다. 정현은 지혜를 달래 주었던 – 낮과 별반 다르지 않은 – 손길로 뺨을 어루만진다. 정현의 작고 하얀 손길에도 재희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두 번째 닿은 입술에도 여전히 부루퉁해서, 정현은 눈썹 끝을 팔자로 늘어뜨렸다.

“화나써?”

재희는 부정하지 않는다. 간혹 훌쩍이기도 했다.

재희가 자연스러운 모든 감정을 내놓는 것은 온전히 정현과 단둘이 있을 때뿐이었다. 아이들만의 그 작은 세상에선 굳이 말은 필요 없었다. 정현은 재희의 아주 작은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아 모든 감정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희는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충분히 섬세한 아이였다. 오히려 정현은 그것이 아쉬웠다. 원래 재희는 이렇게 착하고 예쁜데.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고 오해만 했다. 아이는 그게 싫었다.

“재히야아.”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아이의 손이 서로를 맞잡는다. 눈을 꼬옥 감은 정현은 재희의 두 뺨과 콧잔등에 차례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효과는 있었다.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정현의 손을 쥔 재희는 박자를 세듯 자꾸만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라는 듯이.

“나만 할래.”

“우응. 재히랑만 할게.”

“내 꺼.”

“우웅. 마자. 재히 거 해.”

쪼옥. 소리가 나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눈매에 어렸던 서러움은 자취를 감췄다.

“걔 시러.”

맞장구를 치던 정현의 입술이 꾹 다물린다. 재희가 지칭하는 ‘걔’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걔 하지 마.”

아마도, 우는 걸 달래 주지 말라는 말일 테다.

아이의 머릿속은 단순했다. 재희는 정현 아닌 다른 누가 자신을 만지는 게 싫었다. 주는 것도 싫었다. 정현이 저 아닌 다른 누굴 만지는 것도 싫었다. 제게 건네진 요구르트병보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정현이 순간 더 싫어질 뻔했다.

어린 재희에게 세상은 둘만의 것이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침입자이며 방해자였다. 정현의 상냥함은 온전히 제게만 퍼붓는 단비가 되길 바랐다. 그 깊은 이유까진 닿지 못한 막연한 불쾌감이 아이를 까칠하게, 더욱 서럽게 했다.

“하지만 울며언 안 되자나.”

“난 시른데.”

“우웅….”

타고난 능력인지, 어렸을 때부터 타인의 감정에 쉬이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정현은 어린 나이에도 공감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개미에게도 감정 이입을 해서 툭하면 울 정도였으니, 지혜의 기분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재희는 자기가 봐도 잘생겼으니까. 그러니까 좋았겠지. 그래서 주고 싶었을 거야. 좋아하게 되고, 고백하고 싶었을 거야. 하지만 재희가 나쁘게 굴었으니,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시러.”

“그래도 그러며언. 슬프쟈나.”

“시러.”

“우웅….”

만약 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눈앞이 깜깜했다. 그러니까 작년, 울고 있던 재희에게 입을 맞추었을 때. 어제의 재희처럼 자신을 내쳤다면. 지혜가 다 뭐야. 하늘이 떠나가라 울었을 것이다. 새삼 아이는 제 손을 잡고 조물거리는 체온이 다행이다 싶었다.

“내가아, 당근 맨날, 머거주께에.”

그래서 조금은 가진 자의 여유를 부렸던 걸지도 모른다. 난데없는 당근이란 말에 재희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너 당근 실차나. 난 갠챠나. 조아.”

정현은 알고 있었다. 재희가 당근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밥을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는 말에 재희는 억지로 당근을 삼켜 댔다. 한꺼번에 입안에 넣다가 헛구역질을 한 적도 있었다. 그게 안쓰러워 정현은 가끔 몇 개 대신 먹어 주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맛없는 것들에만 익숙해졌기에 식욕이 없다면 없었지 별다르게 가리는 게 없었다.

싫다며 연속으로 도리질하던 재희의 눈이 살짝이나마 반짝였다. 재희는 그 정도로 당근이 싫었다.

“그니까아. 미아나다고 해 주쟈.”

정현은 재희가 혼나는 것이 싫었다. 당근도 마찬가지였고, 어린이집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모르지만 이렇게, 재희는 혼자 몰래 우니까. 오늘 같으면 함께 있기에 상관없었지만, 만약 제가 병원에 가느라 혼자 우는 날이라도 있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혹여 자신이 달래 주지 못하는 날에 혼자 옷장에서 잠들 재희를 생각하면 정현은 눈물이 절로 그렁그렁해졌다.

“그게 조아?”

“웅?”

“너는, 그러면 조아?”

솔직히, 좋다는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당근도, 다른 것도. 네가 혼이 나서 슬픈 것보다, 내가 참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웅….”

“알게써.”

“재히 아이차캐.”

“웅.”

마치 엄마처럼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받고 나서야 재희는 활짝 웃었다.

아, 이것이었다. 네 살, 다섯 살에도. 그리고 스물아홉. 서른까지 평생. 한정현이 한재희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그 미소. 모든 방어 기제를 풀어 버린 재희가 그렇게 웃고 나면 정현은 제가 무엇이라도 해낸 듯 벅찼다. 그래서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하지만 신기했다. 아픈 것은 싫어하는데 유독 이 기분만큼은 계속해서 맛보고 싶었다. 싫지 않았다. 그러니까 뭐든 좋아. 재희에 관한 거라면 싫어도 그저 좋다. 안도감에 졸음이 몰려와 눈을 깜박이자 재희가 손을 잡아 왔다. 그렇게 손을 꼭 잡은 채로 아이들은 이내 단잠에 빠졌다.

속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만약 열여덟 살의 한정현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었다면, 분명 외쳤을 것이다.

그런 오만함 따위 떨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염병 떨지 말라고.

그 미소에, 넘어가지 말라고. 쉽지는 않겠지만….

***

옛날부터 재희는 정현의 말은 잘 들었다. 적어도 다섯 살 때까지는 그랬다.

“미아내.”

내가 잘못했어, 까지도 대단한데 손까지 잡아 가면서 사과할 줄이야. 어제와는 딴판이 된 재희의 모습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칼같이 내치던 얼굴은 어디 가고 정말 미안한 얼굴로 손을 잡고 이번엔 제 요구르트를 건넨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어제 그렇게 울며불며하던 지혜는 어느새 수줍은 소녀가 되어 버렸다. 어설피 쓰다듬는 손에 크게 자리 잡힌 리본이 다 구겨져도 배알도 없는 지혜는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좋아했다. 덕분에 180도 바뀐 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만 했다. 과연 재희는 영특한 아이였다. 바뀐 제 태도에 모두가 살갑게 굴자 기분 좋게 웃으며 더욱 상냥하게 굴었다.

어른들은 쉬이 눈치챘다. 분명 재희 저 녀석은 여자 여럿 울리는 나쁜 남자가 될 것이라고.

“잘됐다, 정현아. 그렇지?”

오히려 정현의 상태가 오묘해졌다. 크레파스로 이것저것을 칠하고 있는 정현은 살갑게 걸어 온 인사에도 별 대답이 없었다. 못 들은 척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흘끔거리며 재희와 지혜의 모습을 보던 아이는 어설피 웃는 표정을 하며 보라색 크레파스를 연신 문질러 댔다. 스케치북 속 하늘은 보랏빛이었다.

아무리 말에 능숙하더라도 그 묘한 기분은, 다섯 살 난 아이로선 설명하기 참으로 어려운 감정이었을 것이다.

지금 열여덟 살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니, 그땐 너무 어려서 미처 몰랐다. 그 찝찝한 감정의 실체를.

내가, 한재희를 좋아하다니. 아니…좋아했다니. 좋아해 왔다니.

등교 시간에 때 아닌 해프닝을 겪은 탓인지 정현은 내내 속으로 삽질을 하느라 바빴다. 적성에도 안 맞는 이과 진학으로 얻은 유익함은 바로 면학 분위기였다. 공부에 따라오는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수업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자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아 숙면하기 좋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정현도 물론 그 일원에 속했다. 출석 일수만 채워 무사히 졸업장을 따내는 게 그의 목표였으니까.

창가 맨 뒷자리는 한정현의 고정석이었고 동쪽부터 차오른 볕에 1교시부터 잠이 들곤 했지만 오늘은 묘하게 정신이 맑았다. 솔직히 잠이 들면 어떤 꿈을 꿀지 두려웠다. 연신 낙서를 해 댔고, 무의식은 겁도 없이 자꾸만 한재희를 그려 댔다.

요사이 정현은 틈만 나면 곤히 생각에 잠겼다. 원래도 공상에 빠지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렇게 심각한 주제는 아니었다. 근래에야 자각한 자신의 오랜 감정이 당황스러웠고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치기엔 지나치게 크고 깊었다. 함부로 굴다간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결국 빠져 죽을 것 같았다. 아, 이미 허우적거리곤 있었으니까. 이제 빠져 죽는 것만 남았나.

왜 그랬을까.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눈치가 느린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정현은 과거의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다. 관심은 방향은 늘 다른 사람에게만 향했을 뿐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진 못했다.

아니, 어쩌면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계속해서 부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모르는 척 계속 묻어 두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럴 만했다. 이마를 짚어오는 손. 가까이에 머무는 온도. 귓가에 스며드는 목소리까지. 하나하나 의식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에 잠식되어 있었다. 정현의 일상에 재희는 이미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속내는 어쨌건 재희는 타인에게 호의적으로 굴려고 노력했다. 잘생긴 애가 친절하게 구니 주변엔 자연스럽게 사람이 모여들었다. 사실, 오늘 아침과 같은 일도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재희 딴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욕 먹을 일을 만들진 않았다.

덩달아 바뀐 건 또 있었다. 그전엔 제 앞에서만 착하게 굴었는데 이제는 반대가 되어 버려, 제 앞에서만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몰랐다. 배가 불렀지. 그냥 그렇게 까칠하게 살라고 둘 걸 그랬나.

예전엔 귀여웠는데. 아니, 그때도 잘생기긴 했었다. 눈물을 눈꼬리에 달고선 훌쩍이는 얼굴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확실히 되고도 남을 떡잎이었다. 한재희 사전에 역변은 없었다. 5세 아이의 것이라곤 믿기 어려웠던 콧날은 2차 성징을 거쳐 더더욱 높아졌다. 연예인 콧대라고 부를 만했다. 성형으로도 만들기 어려운 저 각도에, 안경을 쓰느라 중간에 살짝 파인 부분이 정현은 마음에 들었다. 그 굴곡이 재희의 이면을 비춰 준다고 생각했다. 길고 시원시원하게 뻗은 손가락 중간 마디가 툭 불거진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였다.

정현에게 재희를 그리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제 얼굴보다 오히려 더 자주, 오래 보는 얼굴이었으니까. 균형 잡힌 골격, 날렵하지만 강건한 뼈대. 긴 팔과 다리. 안정감 있는 목덜미. 툭 불거져 나온 목젖도. 정현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재희는 갖고 있었다. 혼자 그리는 부끄러움에 미처 그리지 못한 얼굴 대신 그려 보는 재희의 모든 신체 부위 가운데 정현이 가장 사랑한 곳은 손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저 교실 건너편. 늘 시선이 닿는 그 자리에 재희는 있었다. 가까이 있는데도 쉽게 닿을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새삼 괴로웠다.

***

때마침 점심 종이 울렸다.

책상과 의자가 끌리는 소리. 소란스러운 교실에 번쩍 정신이 든 정현은 마구잡이로 지우개질을 시작한다. 굶주린 아이들은 먼저 밥을 먹겠다며 식당으로 뛰어갔지만 어차피 정현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나중에 흔적이라도 남을까 꼼꼼히 낙서했던 교과서 페이지를 지우고 있는데 문득 누가 다가와 길게 그림자가 졌다.

“뭐하냐.”

“그림이 좆같이 그려져서.”

“진짜 좆 그렸어? 봐 봐.”

“미친.”

이과반 중에 가장 인원이 적은 반에 배치된 것은 학교 측의 배려였다. 전교생 중에 한정현이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한창 혈기왕성한 남자아이들은 아무래도 거칠고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간 다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보호자인 한재희도 당연히 같은 반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그 반은 한재희가 고른 과목인 물리와 생물을 선택하는 아이들 위주로 뽑혔다. 다만 의외인 점이 있었다. 이름이 붙어 있는 탓에 으레 정현과 재희는 앞뒤 번호를 받아 왔지만 올해만은 경우가 달랐다.

한씨가 그렇게 드문 성씨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한정욱. 한재희와 한정현 사이에 이 녀석이 끼어들 줄이야.

‘우와, 너 그럼 몸에 기계 있는 거? 대박.’

재희와 정현 사이의 출석번호를 차지한 한정욱은 좋게 말하면 격의가 없이 쾌활하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가 없었다. 정현이 심장병 환자라는 걸 듣고서 거리낌 없이 정현에게 직접 사실 여부를 물어왔다. 이런 일은 중학교 이후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악의는 없는 스타일이었다. 공부에 뜻이 없었지만 사회와 영어가 너무나 싫다는 핑계로 이과를 택한 정욱은 정현과 나란히 앉아 내내 잠만 잤다. 그리고 이렇게 점심시간쯤에 깨 눈을 말똥거리며 시답잖은 말을 건넸다.

어릴 때와 달리 이제 사회성이 없는 건 정현 쪽이었다. 사춘기와 함께 호되게 겪은 수술 후 증후군에 정현의 교우관계는 맥이 끊겨 버렸다. 불편하진 않았다. 늘 재희가 함께 있었으니까. 다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덤벼드는 또래에겐 익숙하지 않았다. 제 입으로 설명하자면 길기도 긴 데다 무엇보다 구차하고 청승맞다. 그나마 한정욱은 적당히 가벼워서 상대할 만했다.

피곤하긴 했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란 생각에 적당히 상대해 주는 정도였다. 대충 말을 끊어도 뒤끝은 없는 스타일이라 편했다.

“너무 정 없이 그러지 말고 새끼야. 나 보는 것도 한 달 뒤면 끝임.”

“왜?”

“문과로 다시 간다니까. 내 말 안 믿냐?”

“어, 진짜 가는 거야?”

“어. 반장이 담임한테 말 잘 해 줘서.”

여기서 반장은 한재희를 지칭한다.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하는 건 꽤 성가신 일이라 선생에게 예쁨을 받는 편이 아니었던 정욱으로선 이야기를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사정을 들은 한재희가 다리를 놓아 도와준 것이다.

그러니까, 한정욱이 2학기엔 다시 문과로 간다는 것은.

“어, 반장.”

그렇다면 다시, 한재희랑 붙게 되겠지.

젠장. 그래도 멀리 앉아 있을 땐 바라보는 것만이라도 좀 자유로웠는데, 그마저도 힘겨워지다니.

다가오는 장본인에 미처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정현은 교과서를 챙기는 척 고개를 숙였다. 긴 다리로 단번에 다가온 재희는 아무렇지 않게 정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밥 안 먹냐?”

“어. 먼저 가 있어.”

재희의 말에 알겠다며 교실을 나선 정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으로 향했다. 텅 빈 교실은 둘만이 남았다. 정현은 괜히 뛰는 가슴을 달래려 도시락 가방을 고쳐 쥐었다. 헌데 한재희는 도통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지. 입맛이라도 없나.

“나가서 먹을까?”

“됐어. 귀찮아. 왜?”

항응고제를 복용 중인 정현은 늘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다. 운동선수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식단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했다. 가려 먹어야 할 것이 많았다. 일반인으로선 그것도 못 먹느냐며 놀랄 것들이 수두룩했다. 채소라고 해서 무조건 몸에 좋은 게 아니었다. 특히 시금치처럼 푸른빛 채소는 일반인이라면 무척이나 몸에 좋은 식재료였지만 정현에겐 치명적이었다.

때문에 급식은 어쩔 수 없이 패스. 친구들이야 성적표만큼 중요한 식단표의 존재가 정현에겐 별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교실 맨 뒤에 보이는 식단표에서 오늘의 급식을 찾아내고서야 정현은 그 이유를 눈치챘다.

아하. 오늘 식단이… 카레였구나. 왜 바깥에서 먹자고 하나 싶더니만.

***

재희는 카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카레는 죄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카레에 든 당근이 문제였다. 녀석은 다른 건 다 먹어도 당근만은 유독 싫어했다. 익혔든 아니든 그 냄새와 식감이 싫단다.

어렸을 적부터 그랬다. 다행히도 당근은 정현도 먹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채소 중 하나였기에 한정현이 쥐고 있는, 몇 안 되는 한재희의 약점 중 하나였다. 사소한 편식이었지만 재희는 남들에게 그런 점을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꾸역꾸역 먹을 때의 표정은 마치 사약이라도 먹는 듯한 얼굴이다. 비죽한 마음이 솟아올랐다.

“귀찮은데.”

눈에 띄게 표정이 굳는다. 곤란해하고 있었다. 단둘이 있으면 욕부터 튀어나왔겠지만 여기는 학교. 유리한 건 한정현 쪽이었다. 조금 더 골려 주고 싶었지만 저렇게 사색이 되니 불쌍하기도 하고. 정현은 기꺼이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라면 사 오든지. 옥상 가 있을….”

“기다려.”

말이라도 바뀔까 두려웠던 걸까. 열쇠를 건네주고선 부리나케 뛰어가는 뒷모습에 정현은 겨우 웃음을 참았다.

***

평상시에 옥상은 자물쇠로 잠겨 있어 학생들에겐 개방되지 않았다. 대신 교직원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공간으로 담배를 피우고 작은 텃밭에 식물을 키우기도 했다. 생물 선생의 신임이 두터운 한재희만이 그것들을 돌본다는 임무를 맡고 열쇠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한재희는 열쇠를 당연히 한정현과 공유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정현 혼자서 올라가지는 못하게 했다. 떨어질까 봐 무섭다나 뭐라나.

반 농담 반 진담. 오늘 역시도 함께 밥을 먹자고 했기에 열쇠를 선선히 건네받을 수 있었다. 철제문이 끼긱, 하는 불쾌한 소리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탁 트인 시야에 정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뻐근했지만 그래도 조금 살 것 같았다.

***

체육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한정현은 운동장을 가득 메우는 사람들 사이에서 귀신같이 한재희를 찾을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정현에게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랑을 자각하기 전부터도 그랬다. 늘 한재희는 다른 색채를 가지고 정현의 세계를 종횡무진 누볐다. 정신세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물리적 세계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면 반칙 아니냐.”

다른 누구에게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떻게 저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까. 눈독 들이지 않을 수가 있어.

유난히 바르게 선 등과 허리. 너른 어깨. 긴 팔다리만큼 큰 보폭. 곧은 시선. 뛸 때조차도 중심축이 흔들리지 않는 유연한 흐름까지. 모두 제가 갖지 못한 것들뿐이어서일까. 유독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재희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빛이 났다.

곁에 있을 때는 한재희가 얼마나 빛나는지 간혹 잊는다. 너무 가까워서 전체를 바라볼 수 없다. 오늘 아침,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도 한정현은 마음 같아서는 몇 번을 뒤돌아보고 싶었다. 제가 곁에 서서는 나오지 않을 그림의 한 폭 같은 한재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저린데.

안 그래도 약한 심장, 어떻게든 이대로면 오래 살 수 없겠구나 체념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 뛰고 저럴까.”

아마도 손에 들린 건 컵라면이겠지. 그리고 저 은박지는 김밥. 식당으로 이동하는 아이들을 거슬러 재빨리 움직이는 재희의 몸놀림은 연어보다 매끄럽고 새보다 가벼웠다. 저렇게 열심히 뛰어와서 도달할 목적지가 나라니, 묘한 쾌감이 들었다.

저런, 저러다 넘어지면 어떡해. 그러나 우려하는 마음에는 따로 속내가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마음껏 볼 수 없잖아. 그러니까.

“천천히 좀 와도 되는데.”

실컷 너 구경 좀 하게.

***

환자가 먹는 도시락이라고 생각하면 다들 영양이 듬뿍 담긴 호화로운 반찬을 기대하며 눈을 빛내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보여 주면 줘도 안 먹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기름지거나 소금기 어린 음식은 모두 제외한 식단에 정현은 익숙해진 지 오래지만 서글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젓가락질 몇 번에도 사라질 양을 젓가락질로 깨작대는 정현 앞에서 재희는 라면 하나와 김밥을 묵묵히 까먹고 있었다. 가끔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면 라면 냄새가 정현을 고통스럽게 했지만. 다행히도 옥상은 탁 트여 있었다. 치미는 짜증마저도 바람이 훅하고 넘겨버려 줄 정도로.

“기분 안 좋아?”

“…내가 왜?”

“아니, 그냥.”

그래 보여서. 라고 종알거리는 입술은 어릴 때와 다름없이 자줏빛이었다. 중학교 때 수술을 받고 정현은 크게 사춘기를 앓았다. 가슴에 새로 생긴 흉터를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느 날 충동적으로 연주의 파운데이션을 그 흉터 위에 덧발랐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을 저지른 김에 푸른 입술을 립스틱으로 제법 그럴싸하게 발라 봤었다.

솔직히 예뻤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묘사처럼 하얀 피부에 까만 눈과 머리카락에 붉은 입술. 한재희는 막연히 생각했다. 다 나으면, 심장까지 다 나으면 한정현은 원래 저렇게 생긴 게 맞겠구나. 입술도 저렇게 붉어지겠구나.

한번 보고 나니 상상은 어렵지 않은 것이 되었다. 실제 입술이 푸를수록 조금 조급해지긴 했지만.

“너 상태 때문에 기분 더러워.”

“…말도 꼭 그렇게 좆같이 하더라.”

“그러니까 닥치고 밥이나 먹어. 남기지 말고.”

입맛 없는 거 들켰나. 젓가락 무게가 천근만근처럼 느껴졌지만 지레 찔린 정현은 군소리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아무래도 입맛이 쓰다. 이미 라면을 들고 마시고 있는 한재희는 김밥은 꼬다리만 남겨둔 상태였다. 해치우듯 끼니를 해결하고 그가 봉투에서 꺼낸 것은 콜라와 물. 물론 주인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다.

“안 귀찮냐?”

“뭐?”

“그 새끼.”

“아, 걔 착해.”

한정욱 이야기였다. 사실 정현의 입장에선 말을 걸어 주어서 고맙다. 배려 없는 날것 그대로의 말도 신선했다. 중학교 때야 한창 민감해 화장을 하네마네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이제 예전 일이 됐다. 오히려 지나친 배려가 정현을 외롭게 만들었다.

재희의 사회성을 걱정했던 것은 정말 모두 옛말이 되었다. 한재희는 남자 무리 사이에서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묘한 서열로 나뉘는 남자들 사회 안에서도 논외로 평가받았다. 깍두기 처지인 정현이 열외인 것과는 다른 의미였다. 흠잡을 데가 없어서 재수도 없다면 모를까. 굳이 주먹다짐으로 우열을 가리지 않아도 남 앞에 군림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물론 외모도 한몫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이제 정현이었다. 튀어나온 흉골을 가리려고 늘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고 앞사람을 보고 다닐 겨를도 없어 늘 재희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그런 정현에게 격의 없이 말을 건네 온 건 정욱이 처음이었다.

은연중에 재희가 그를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어려웠지만 느낌이 그랬다. 지는 다 어울리면서, 참견질이야. 욱하는 마음에 내내 묻고 싶었던 말을 툭 던져 버렸다. 절대 의도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야?”

“뭐가?”

“아침에 그 여자애.”

아, 하고 나직이 외는 말투는 아예 잊고 있었다는 뉘앙스다. 쓸데없는 공감능력은 다시 또 발휘되었다.

“좀 너무한 거 아니냐?”

나도 성격이 좋은 건지 타고난 호구인 건지. 아니, 이건 가증스러운 거다. 한정현은 깨달았다. 너무하다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실실 웃고 있는 이중적인 자아를. 알고 있다. 진심으로 한재희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할 리 없으니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거겠지.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여자애를 적어도 한재희가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비싯거리며 입술 새를 파고드는 미소를 떨치려 정현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아직은 유효했던 것이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던 재희의 말은.

그 말인즉슨, 정현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었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매번 이렇게 가슴 졸여야 하겠지. 혹시나 정말 사귀게 될까 봐. 좋아하게 될까 봐. 상상도 안 된다. 만약에, 만약에 정말 네가 누군가를 좋아해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지. 안 그래도 애달픈 인생, 너무나 가혹한 것 아닌가. 펼쳐진 앞날이 깜깜해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너나 잘해 인마.”

“내가 뭐?”

“몸 간수 잘 하라고.”

뭐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지껄이고. 탁 소리가 나게 도시락 뚜껑을 덮는 정현의 두 뺨이 둥그렇게 부풀어 오른다. 마른 몸에 비해 그래도 앳된 두 뺨엔 젖살이나마 남아 있다.

재희 또한 어렸을 적 정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약해빠진 주제에 오지랖 하나는 엄청 넓었던 그 작은 손. 열심히 누굴 쓰다듬고 어루만지던 작은 손은 여전히 작고 말랐다. 두 눈도 여전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눈 하나는 알아주게 컸으니까. 놀랄 때는 정말 눈알이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지는 게 재희에겐 일상의 재미 중 하나였다. 그래서였다.

“야 씨발. 학교에서는…!”

우울한 표정보다, 이 왕눈이 같은 표정이 훨씬 재밌고 귀여우니까.

쪼옥, 소리와 함께 뺨에 붙었다 떨어지는 촉감에 어김없이 정현은 재희가 좋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굴러떨어질 것처럼 크게 뜨여진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마 아프지만 않았다면, 뺨도 입술도 온통 붉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놀리고 싶어졌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정말 붉게 물들어줄까 봐.

“알아. 알겠다고.”

“진짜 미쳤냐? 양호실도 아닌데 혹시 누가 보면….”

“자꾸 나불거리면 입에다 한다.”

“…씨발놈아. 밥 먹고 더럽지도 않냐고.”

어, 나는 상관없으니까.

***

멀어져 가는 자전거를 따라 휘청거리는 걸음이 눈에 밟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돌아서던 순간 지었던 그 새침한 표정이 어른거린다. 어른거리다 못해 눈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의 얼굴보다 더 선명했다.

이 정도면 병은 아닐까 싶은데. 자조하는 웃음에마저 얼굴을 붉히는 여학생에게 한재희는 조금은 연민을 갖는다. 하지만 냉정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애석하게도 한정현이 간과한 부분이었다. 시간이 덧없이 흐르지만은 않는다는 방증. 교육의 결과.

“…고마워. 하지만 미안.”

한정현이 1을 가르쳤다면 그대로 1에 멈춰 있는 게 아닌, 그 다음 10이며 100까지 터득하는 게 한재희가 가진 재능이었다. 사회화 덕도 있었다. 다섯 살 때처럼 직설적이진 않다. 곤란한 듯한 표정과 세심한 말투. 편지를 걷어차지도 않는다. 연기까지 한다.

다만 그럴수록 마음은 오히려 더 굳건히 닫혔다.

“좋아하는 애가 있어서.”

문은, 오로지 한정현에게만 열려 있다. 여지를 줄 필요는 없었다. 필요한 건 곤란함, 연민, 안타까움을 위시한 표정.

“…너 여자 친구 없다고 하던데.”

여자 친구야 없지.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생겨서.”

그리고 이건 거짓말.

어차피 세상의 이치야 세상의 것들일 뿐이었다. 자신의 세상은, 그리고 한정현과의 세상은 다른 중심을 따라 돌면 된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기계를 뽑아 버리거나 요구르트를 내치는 식의 어설픈 행동은 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너그러이 굴면서도 더는 침범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선, 그 밖에 존재한다면야. 어차피 ‘다른 세상’이었다.

“…어떤 앤데?”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할 수는 없다. 애매한 배려는 오히려 상처를 남길 뿐이다. 재희로서는 그 정도의 원망이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음은 콩밭에, 정확히 말하면 교문 앞 비틀거리며 사라져 간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성가셔 하며 짜증 내고 있겠지. 무거운 가방에 이도 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겠지. 마르고 하얀 손은 몇 번 가방을 들추다 말 것이다. 그 크고 검은 눈이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찾던 이가 나타나면 크게 불러 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있어. 그런 애가.”

있지, 한정현.

여전히 너 말고는, 전부 다 싫어.

***

아직도 5일장이 서는 동네라지만 재래시장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아주머니의 말발을 이길 순 없었다. 의사의 권위 또한 병원 바깥에서는 별 소용이 없어, 맛있다던 사과가 무맛이었던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일은 한가로운 편이었지만 야근도 더러 있었고, 또 시간을 맞춰 간다 할지언정 물건을 고를 정도로 안목이 뛰어나지도 않았기에 두 사람은 늘 마트를 이용했다.

한정현은 요리에 소질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작 그 어떤 요리도 본인은 많이 먹지 못하는 큰 장벽을 안고 있었다. 그 고충을 모르지 않기에 한재희는 늘 사다 먹자고 설득했지만 그는 묘한 구석에서 고집을 부렸다. 초보 주부들을 위해 세트로 구비되어 있는 코너 앞에서 정현이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카레나 할까….”

그러고 보니 최근, 요리 방송에서 유명한 요리사가 만든 카레 레시피가 방송된 모양이었다. 늘 그랬듯 다음 날이면 마트에 세트로 묶어 누구누구 세트라고 홍보를 하던데 어제는 카레였던 모양이다. 아주머니는 종이컵에 밥까지 담아 시식을 권하고 있었다. 별다르지 않은 레토르트 카레와 채소 같은데. 세트로 사면 양도 계량되어 있어 편리했으니까. 한재희는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이곤 세트 하나를 카트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던 정현은 이내 그것을 다시 꺼내 판매대에 내려두었다. 신나게 영업하던 마트 직원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급격히 풀이 죽었다. 그녀에게 죄송하다고 인사를 고한 정현은 카트의 방향을 쌩하니 돌렸다. 예전 같았으면 죄송해서라도 억지로 사 왔다가 다 버렸을 텐데. 역시 세월의 힘은 대단했다.

“왜 안 사고? 한 솥 끓여다가 오래 먹으면 편하잖아.”

카트를 결국 정육 코너에 도착한다. 물론 사골 국물이면 아무거나 잘 먹는 한재희로선 달가운 목적지였지만 이 날씨엔 사골 육수 우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 카레가 아무래도 해먹기도 쉬울 테니까. 이의를 제기한 그의 물음을 건성으로 넘기며, 한편으로 친숙하게 직원과 인사까지 나눈 정현의 무심한 답변은, 그가 미처 예측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너 당근 못 먹잖아.”

“어?”

“나도 대신 먹기 귀찮고.”

늘, 이렇게 예측 불가라니까. 의외의 대답에 한재희는 제 뺨을 긁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이제 먹을 수 있는데.

물론 좋아하게 된 정도는 아니다. 어렸을 땐 예민했던 미각이 나이가 들수록 무던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채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그도 사회생활을 하는 와중에 무엇이든 잘 먹게 됐다. 짧은 훈련소 기간의 경험도 한몫했다.

하지만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한재희는 앞에 선 제 연인의 정갈한 정수리를 내려다본다. 그 작은 머리통 속에 담긴 한재희는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넥타이를 잘 매지 못하고. 당근을 싫어하고. 밤에는 엄마 아빠를 찾아서 우는 어린 아이인 걸까.

웃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는 것도 심술궂은 일일까 싶어서. 굳이 교정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흰 머리 노인이 되어 눈을 감는 날까지 그랬으면 싶다. 그 고운 마음의 결이 예뻐서. 제가 누리지 못한 모정까지 다하는 그 마음을 누리고 싶기에.

자꾸만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것도 다, 네 탓이지.

“당근 대신 감자를 두 배로 넣으면 되지. 고기 두 배도 좋고.”

“안 예뻐…. 조화가 없어.”

여전히, 한재희는 당근을 싫어하는 아이, 아니,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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