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6. Expire (8/14)

어떤 책에서 봤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사람들은 감정이 심장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고.

뇌의 역할이 밝혀진 지금에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알지만, 심장과 닮은 하트 마크가 상징하는 뜻을 생각해 보면 여전히 영향력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다른 감정은 몰라도 특히 슬픔의 경우가 그렇다. 가슴 한쪽을 누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픈 감각을 느끼게 하는걸.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게 늘 마음에 걸렸다.

심장 이식은 어렸을 때부터 경우의 수에 들어가 있었다. 날 진찰한 의사들의 반응은 늘 같았다. 이 상태의 심장이 이제까지 버텨 온 게 신기한 일이라고. 그렇게 스물아홉 해를 보냈다. 늘 숨이 가빴고 가슴 한쪽이 콕콕 찔리는 서늘한 느낌을 달고 살았다. 조금만 무리하면 숨이 가빠 왔고, 노랗게 변한 하늘 아래 주저앉는 게 일상이었다. 객관적으로도 즐거운 삶은 아니었다.

이식술을 설명하면서 의사들은 그런 지난날은 다신 없을 것이라 내게 장담했다. 물론 반가운 말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을 보장받고도 나는 하염없이 주저했다. 그래서 그날이 오지 않도록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날은 도래했다.

첫 수술이 실패했는지도 몰랐다. 병원이 바뀐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나는 낯선 의료진들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비몽사몽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인공 심폐기로 연명해도 몇 달 못 버틸 나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을 테니까.

결국 서른 해 가까이 비실거리고 늘어지다 못해 넝마가 된 내 심장 대신, 나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심장을 달고 살게 된 것이다.

여하튼, 예전 시대의 논리대로라면 나는 앞으로 내가 아닌 다른 이의 감정을 가지고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인공 심장이 발명된 이 21세기에 믿기지 않겠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진심으로 두려워졌다. 면역 거부 등 다른 치명적인 위험보다 더욱 실재적인 위협이었다. 정말 이전의 모든 것을 잊어버릴까 봐.

…아니,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다행일지도 몰라.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눈을 감으며 나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의 말을 믿기로 하자. 눈을 뜨고 나면, 세상은 바뀌어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처럼 숨을 쉬고, 뛰고, 웃어도 아무렇지 않은. 일반인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 의존해서 살아가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과거와는 이제 안녕할 것이다. 덧붙여 너를 떠올리고도, 더는 아프지 않아도 될 세상에서 눈을 뜰 수 있기를. 불안에 떠는 나를 그렇게 위로했었다.

***

하지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병원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마자 나는 원인을 모를 이질감에 휩싸여야 했다.

정말 달라진 게 많았다. 숨이 차지 않았다. 아무리 깊고 크게 숨을 내쉬어도, 찌릿하던 가슴의 통증이 없었다. 수술을 위해 절개했던 부위의 통증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익숙해지려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초침 소리도 없었다. 조용하고 일정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낯설었다. 나를 뺀 모두가 원래 그렇게 살고 있었다는 것에 약간의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정말 세상은 뒤틀려 있었다. 생각보다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답은 없었다.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 수술 부위는 아팠지만 견딜 만했다. 무균실에서 격리되어 있었지만 밥도 곧잘 먹을 수 있었다. 조금 많다 싶은 양에도 가슴이 답답하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 외엔 늘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개흉 부위가 조금 가라앉자 나는 자연스럽게 연필과 종이를 들었다.

다신,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과거의 결연한 마음을 대번에 무시한 새로운 나는 실컷 그림을 끄적였다. 당황스러웠다. 하루하루 새 심장에 적응해 가는 몸과 달리, 내 마음은 진도가 느렸다. 어딘가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꼭, 적출된 내 심장과 함께 버려져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

장기 이식술은 리스크가 크긴 하지만 급성 거부 반응이 없다면 눈에 띄게 차도를 보인다고 한다. 특히나 심장과 폐 같은 중요 부위는 더욱 그렇다. 몸의 엔진이 바뀐 거라 혈액 순환도 호흡도 좋아지니 당연한 순리다. 그래서 일반적인 이식 수혜자는 빠르면 1주일이면 퇴원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난 경우가 달라서 석 달을 더 병원에 묵어야 했다. 내 마음만 외톨이였다. 계절마저 빠르게 흘렀고 나는 그해 여름이 저무는 것을 유리창 너머로 지켜보았다.

깊은 가을이 차차 겨울로 움직이려는 즈음이 되어서야 난 퇴원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무려 목도리를 둘러야 했다. 집에서 적당히 옷을 챙겨 온 아빠 탓을 할 순 없었다. 그건 내가 즐겨 맸던 목도리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예나 씨의 소개팅 때 하고 나갔던, 그리고 녀석이 내게 둘러 주고, 또 선물했던 그 목도리를 매고서야.

“…….”

나는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병든 심장과 함께 도려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 몸 구석 어딘가에 꽁꽁, 잘도 숨어 있던 내 마음을.

환부를 알 수 없는 통증에 난 버릇처럼 자연스레 가슴 언저리를 쥐었다. 함께 퇴원을 준비하던 아빠가 놀라서 다가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변명이나 내던지며 화장실로 도망쳐야 했다. 십자로 크게 난 흉터 언저리가,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곳이 아프다. 그럴 리 없다. 새로 받은 심장은 너무나 깨끗하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폐에 또 물이라도 찬 걸까. 엑스레이에 멀끔하게 나왔던 두 폐가 물기를 머금은 듯 숨을 쉬기 어려웠다.

대체 문제는 뭘까. 미루어 왔던 숙제에 답을 할 시간이 도래했다.

“…재희야.”

멀쩡했던 가슴이 다시 또 잠식되어 버린 것 같다. 곁에 있지도 않은 네 기억에.

***

이미 계절은 겨울에 가까웠다. 곧 첫눈이 내린다고 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지독히 황량하게만 느껴졌다.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재희와 나, 그리고 지금은 아빠와 나. 둘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채울 수 없는 공백을 떨치려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드높였다.

“보일러 바꿨어요?”

“그래. 진작 고칠 걸 그랬지.”

내게 겨울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계절이다. 하지만 몰라보게 훈기를 되찾은 집에 나는 조금은 어깨를 펴며 들어설 수 있었다. 슬리퍼 너머로도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오랜만에 들어선 집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집은 물론, 내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때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혼자 머물던 한 달여 간 거의 치우지도 않고 지내 엉망이었던 집은 온데간데없이 깔끔했다. 핏자국 또한 당연히 사라져 있었다. 내 수술을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하셨던 가정부 아주머니가 끝끝내 오셔서 청소하셨다고 한다.

물론 난 죄송하다 못해 몸 둘 바를 몰랐다. 관두신다는 말을 전하지 않고 그 돈으로 물감을 사서 그림 그린 사기꾼이 바로 나였으니까. 문병을 오셔서 하염없이 우시는 모습 앞에서 난 혀가 꼬이도록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난 후회하지는 않는다. 운 좋게 발견되어 이렇게 살아남았지만, 만약 내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더라도 말이다. 그 돌발 행동이 아니었다면, 아주머니가 속아 주시지 않았다면 난 그 그림을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사실, 지금도 저렇게 그릴 수는 없을 것 같아.

너무나 보고 싶었다. 이니셜을 쓰자마자 쓰러져 버려, 완성된 모습은 흐릿한 이미지로만 남아있었다. 창문을 굳게 걸어 잠갔지만 혹여 비가 새어 들어오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누군가가 발견해서 그림을 망치진 않았을까 또한 걱정이었다.

다른 것보다, 그냥. 너무 보고 싶었다. 내 그림이.

“재희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계절을 건너 만난 내 그림은 기억보다 더 아름답게 남아 있었다.

반년의 시간. 넉넉한 볕이 드는 곳에 놓아 둔 덕에 잘 마른 유화는 갓 완성했을 때와는 다르게 깊어진 색감으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몇 번이고 얹었던 색깔과 섬세히 그려 두었던 머리카락 한 올까지. 가로로 길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스며든 웃음도.

분명 내가 아닌 시간이, 떠도는 공기가. 그리고 넘치듯 흘러내린 볕이 나 대신 완성해 준 덕분이었다.

마르지 못해서 한 번 만져 보지도 못했던 그림에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코를 찌르는 유화 냄새에도 겁이 나지 않았다. 다만 나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날 내려다보듯 웃는 그 재희의 뺨과 어깨를 매만지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나, 돌아왔다고.

…어떻게든, 살아 있다고.

“…보고 싶어.”

넌, 괜찮았냐고. 내가 없이도….

***

“진짜 황소고집이라니까.”

“황소는 재희가 황소자린데.”

“또또. 저거 봐.”

예나 씨의 삿대질에도 나는 히죽 웃었다. 생각보다 검사 결과가 좋아 흔쾌히 주치의 선생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설레는 맘을 마음껏 표현해도 될 구석은 그녀밖에 없으니까. 조금 의도적이었다.

“질리지도 않아요? 그놈의 한재희 소리.”

“또 그 얘기 하려구요?”

“진짜 얼마나 ‘재희야’ 거리던지. 의사 간호사한테 내가 해명할 수도 없고 진짜.”

“알겠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만해요.”

되로 주고 늘 말로 받는다. 의사들은 다들 말도 잘하나 봐. 나는 민망해진 마음에 괜히 빈 컵에 입술을 적셨다. 뺨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났다. 기분 탓은 아니었는지 마주 보고 있던 예나 씨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진짜 신기해.”

“뭐가요?”

“입술 빨개지는 거 봐. 뺨이랑.”

“아….”

“정현 씨 수술 전엔 입술이 맨날 새파랬잖아요.”

딱 이 색깔이네. 내 셔츠 색깔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가락에 난 그 정도는 아니었다며 정색했다. 완전 보라색인데, 이거. 하지만 정말 그랬다며 주장하는 예나 씨의 얼굴은 세상 진지했다. 나보다 동생인데, 예나 씨는 꼭 엄마 같은 말투로 날 대견해한다. 내가 철이 없기도 하고 그녀가 유독 마음 씀씀이가 좋은 탓도 있겠지.

재희의 공백은 거의 예나 씨가 메꿔 주었다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 또한 바쁜 레지던트 시기라 찰싹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는 역할은 수준급이었다.

처음 퇴원하고 재입원을 해 결국 병원에서 다시 봄을 맞이할 때까지. 그녀는 꾸준히 문병을 와 주었다. 병실에서 서른 살 생일을 맞이한 날 축하해 주기 위해 조각 케이크를 사서 딸기만 날 주고 본인이 케익을 다 먹기도 했다. 너무 고마웠다.

금기어와 다름없던 재희의 이야기도 점차 꺼내게 되었다. 봄이 무르익고, 재희의 생일이 가까워지자 조바심이 났던 날 달랜 것도 그녀였다. 생일은 매해 돌아오는 것 아니냐며. 괜히 어설픈 몸으로 쫓아갔다가 반송되는 치욕을 겪지 말라며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더 계절을 건너 여름,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 검진 때까지도 그녀는 나와 함께해 주고 있었다.

숨길 수가 없었다. 의사들의 인맥은 실로 대단한지 예전 심혈관 센터가 아닌 이곳 병원에서도 그녀의 지인이 있던 모양이었다. 내가 먼저 고백하기도 전에 약속을 잡아 버리는 그녀의 정보력에 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예나 씨를 만나고 가는 것은 마음가짐이 달랐다. 그녀는 재희를 제외한 유일한 친구였다. 그리고 만약 재희가 곁에 있다고 해도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이제 그녀 하나뿐일 테니까. 내게는.

“선배도 분명 기뻐할 거예요.”

“예나 씨.”

“눈을 의심할걸. 안 그래도 예쁘장한 얼굴에 뺨도 입술도 빨개서. 그거 알아요? 언뜻 보면 화장한 거 같아. 블러셔 뭔지 알죠. 선배 눈 나쁘니까 안경 벗으면 더 그래 보이겠다.”

“…고마워요.”

“진짜예요. 립 서비스 아닌데.”

“알아요.”

“어우.”

나도 참 얄팍하다. 죽네 사네 하던 때는 언제고, 수천만 원을 들여 살려 놓으니까 이제 다른 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평생 같은 집에서 살았는데 한 번 그린 적 없는 집 안 구석구석을 그리다 못해 풍경화에 빠졌다. 병원에 두 번째 입원했을 땐 주변 환자들과 간호사들을 열심히 그려 주었다. 잘만 풀리면 유럽 공원에서 스케치를 내놓고 돈 번다는 그런 화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낯선 곳의 풍경을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간직하고 싶어졌다. 물론 주변에서는 반대했다. 자업자득이라고, 내가 저지른 과거의 만행이 그 근거가 되어 내 발목을 붙들었다. 나는 필사의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재희를, 찾아 오겠다고.

“무리는 하지 말아요.”

“그럼요. 어떻게 얻은 목숨인데.”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어느 시골 산등성이라 해도 한걸음에 뛰어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게 답이 아니라는 것을.

재희를 얼마나 괴롭혀서 얻은 목숨인데, 두 번 그럴 순 없으니까.

“선배가 내치면 어떡할 거예요?”

“아깐 좋아할 거라더니.”

“그 인간 변태라서, 좋으면서도 또 그럴 확률 높아.”

“맞네….”

나는 이렇게 바뀌었는데. 너는 과연 그대로일까.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애석하게도 매정하거나 안타까운 모습뿐이었다. 뒷이야기를 듣자니 더욱 속상하고, 미안해지고, 또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나로선 녀석을 위한다고 했던 말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비수가 되어 녀석의 가슴을 멍들이고 아프게 했을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럴 때면 난 재희를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아득한 기분이 되어 버리곤 했다.

조금 우스운 일이지만, 그럴 때마다 난 내가 그려 둔 재희를 마주한다. 곱게 잘 마른 재희의 그림은 변함없이 날 향해 웃고 있다. 누가 보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난 재희의 그림 앞에 서면 묘한 자신감을 얻는다.

의식을 잃던 순간까지도 놓지 못했던 붓. 절박하다 못해 피를 토하면서도 하나라도 더 담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극한의 나는 지금은 없다. 다시 그려 보라고 해도 자신이 없다. 그만큼의 절박함은 지금의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거는 일 따위, 다시는 없을 테니까.

지금의 나로서는 재현할 수 없는, 내 삶 마지막 순간에 남겨 두었던 재희는 분명, 세상 누구보다 따스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보았던 한재희를 믿는다. 심장을 도려내도 변치 않은 내 마음처럼, 너의 어딘가도 변치 않았으리라는 걸.

“모르겠어요.”

“…정현 씨.”

“어찌 됐든, 난 봐야겠으니까.”

그리고 그게, 너 역시 나였다는 걸 이제는 알아.

***

엄밀히 말하자면 ‘찾는다’는 표현은 좀 잘못된 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재희가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보의로 빼돌려서 다행이지. 군의관이면 보지도 못했을걸.”

그리고 그걸 알려 주신 분은, 내 첫 수술을 집도하셨던 이인규 교수님이었다.

지난 4월, 내 추이를 지켜보러 이 교수님이 병원에 오셨었다. 첫 수술에 대한 사과를 전하시는 교수님 앞에 나 또한 고개를 저었다. 대강의 이야기는 예나 씨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략된 이야기가 꽤 많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날 위한 배려였겠지. 내가 충격 받을까 봐 모두가 쉬쉬하고 있던 이야기들을 이 교수님을 통해 전부 전해 듣게 되었다.

내 생각보다 재희는 많은 것을 포기해 버린 듯했다. 전부 다, 나 때문에. 날 위해.

의국이나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내게 이 교수님의 이야기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재희의 지난날의 대략적인 이야기에 나는 교수님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그대로 수련의 과정을 중단한 재희는 바로 입대를 지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히 운은 좋은 놈이라, 아니면 모종의 술수를 쓰신 건지 지방에서 공중 보건의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근무지가 정해지고 난 뒤 날 찾아오신 거였다.

아무래도 내게, 긴히 부탁할 거리가 있다고.

“시간은 충분하니까, 이번엔 견학하는 정도로 해 봐요. 아버님도 걱정 많으실 텐데.”

“안 그래도 난리세요. 이제 저 하나밖에 없다고. 허튼 생각 하지 말라고.”

“다 자승자박에 인과응보야. 누가 믿겠어요.”

“저 귀에 딱지 생겼어요.”

“거기 원장님이 찍어서 데려간 놈이라, 3년 동안 쭉 거기서 일하게 돼 있어요. 여차하면 다음엔 나도 같이 가고.”

그리고도 몇 달이 지난 지금, 난 임무를 재차 확인 받기 위해 터미널 앞의 커피숍에서 교수님을 만났다.

이 교수님은 기대 반 우려 반의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재희의 마음을 돌리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며 걱정이셨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아예 꽁꽁 숨으려 했던 녀석이 과연 바로 수락하겠냐는 생각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만나서 얼굴 확인하고만 오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천성이 어디 가겠는가. 얌전히 고개는 끄덕이는 한편 마음은 딴생각을 먹고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어요, 선생님.

소아 심장에 있어 해외까지 알려진 대단한 실력자. 엉망이 된 의국에서도 고고히 살아남으신 흉부외과 권위자인 이 교수님도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내 검은 속만은 전혀 예측하지 못하시는 듯했다. 가방 속에 든 미술 도구를 확인하시곤 다음엔 꼭 자기도 그려 달라며 당부하시는 것을 보면.

“그래. 약은 잘 챙겼고?”

“그럼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서요.”

“음? 뭐?”

“그런 시골 병원에도 억제제 정도는 있겠죠?”

“노인 인구가 아무래도 많으니까, 동맥 질환 환자도 꽤 계셔서 있긴 할 텐데. 왜요?”

“…헤헤.”

“설마….”

“아니에요! 핑계가 필요해서 그래요! 당연히 다 챙겨 갈 거예요.”

열띠게 항변하는 날 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선생님은 결국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정하신 걸지도 모른다. 어느 의미에선, 그렇게 치졸한 방법을 써야만 우리의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는 걸.

“어떻게든, 성공을 기원합니다. 부탁 좀 할게요.”

“맡겨 주세요.”

***

재희가 근무하고 있다는 전남 순천이 내 첫 여행지가 되었다.

생각하면 나이 서른에 부끄러운 일이다. 배낭여행이다 뭐다 다들 여행을 떠난다는 20대를 평생 집안에서나 보낸 내게 고속버스는 언감생심이었다. 잔뜩 들뜬 나는 발권한 차표를 들고 몇 번이고 버스 앞에 붙은 행선지를 확인했다.

난 혼자 앉은 창가 자리에서 촌스럽게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직 휴가철은 아니라 버스 안은 한산했다.

버스는 나를 포함해 열댓 명을 싣고서 정시를 조금 넘겨 서서히 터미널을 나섰다. 볕이 가득 드는 것도 불편한지 모르고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첫 여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난 설레는 마음을 다스리려 애를 썼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대단한 시작이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니까.

‘미국에 데려가려고 해요. 내 팀으로.’

이 교수님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하나같이 충격적이기만 해서 나는 사실 잠깐 문맥을 읽지 못했다.

생각 외로 내 수술은 그 결과 말고도 다른 파장을 몰고 왔던 것 같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단지 의국 내의 피바람과 별개로 이 교수님은 많은 것을 깨달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결심하셨다. 미국 병원의 스카우트를 받아들이기로.

재희도 함께.

‘이곳에서, 아니 이대로 썩히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입니다, 한 선생.’

언뜻 들어서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흉부외과의의 생활이 훨씬 윤택하다는 것을. 힘든 건 다르지 않을지 몰라도 분명 삶의 질은 한국보다 몇 배 나을 것이다. 경제적인 면도 그렇고. 원래 머리도 있고 영어도 잘하던 녀석이라 의사 시험은 손쉽게 붙을 거라고 했다. 공보의 3년 기간의 여유라면 더더욱.

게다가 이 교수님의 팀으로 함께 스카우트될 경우,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미국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면서도 실질적인 수련과 실습이 가능했다. 레지던트를 중도 포기해 버린 재희는 그냥 의대를 갓 졸업하고 국시에 합격한 신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한국에서 남겨진 길은 시답잖은 의원이나 페이 닥터가 전부라고 했다.

당연히, 그대로 살게 놔둘 순 없다. 다만 두 가지 과제가 남아 있었다. 물론 하나는 재희를 설득하는 일. 그리고….

“3년이라….”

내가,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할 텐데.

바꿔치기한 심장과 폐는 건강하다지만 그렇다고 내 모든 게 건강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것을 잇는 혈관의 일부는 여전히 내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폐동맥 쪽 질환이 심각했던 내가 공중의 기압차를 이겨 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짧은 비행이야 문제없을지 몰라도 미국, 게다가 동부는 열다섯 시간이 넘는 장시간 비행을 요한다.

…분명, 제안을 들으면 잘됐다고 가 버릴지도 몰라. 동시에 날 떼어 내려고 할 것이다. 내 건강을 생각한답시고. 버스로는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더 멀고 먼 곳으로 도망가겠지.

시내를 벗어나 긴 도로를 타기 시작한 버스에 나는 차창을 살짝 열었다. 작은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막연히 답답했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서울을 벗어나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차에 살짝 멀미가 나는 것도 같았지만, 챙겨 온 음료수를 마시며 나 자신에게 작게 되뇌었다. 질 수 없지, 암.

“이 정도는 버텨야지.”

미국행과 비교하면 순천행은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다. 3년이란 시간이 무한정 긴 것은 아니니까. 나는 결의를 다지며 주먹을 다잡았다. 때마침 덜컹거리는 버스가 날 하염없이 뒤흔들었지만 말이다. 마음만은, 그리고 의지만은….

***

하지만 29년 골골거렸던 내 몸이 어디 갈까. 늘 마음과 달리 노는 게 일상인걸.

이 교수님을 통해 재희의 소재지를 알게 된 4월 이후로 난 액정이 닳도록 순천과 그 근처 지역을 검색하고 사진으로 보며 익혔다. 마음만은 이미 순천에 가 있었다. 마치 확대하면 재희가 나올 것처럼 몇 번이고 로드뷰로 근처를 확인했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접했던 터미널 주위의 풍경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반가운 마음과는 별개로, 몸은 터미널 의자에 주저앉았다. 편한 의자에 거의 반 눕다시피 해서 갔으면서도 확실히 조금 무리였나 보다. 원래 계획은 끼니도 좀 챙겨 먹고 천천히 근처를 구경하다가 퇴근 시간 정도에 찾아가 딱 마주치는 거였는데,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터미널 앞에 나란히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당장 탈 수밖에. 허기도 졌지만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상태가 나빠지면 나만 손해니까.

“학생이 어디 아픈가?”

“아, 아니에요.”

“그럼 병원에를 왜 가.”

인상 좋게 인사를 나눈 택시 아저씨가 행선지를 듣고는 거울에 비친 내 안색을 확인했다. 조금 파리해진 걸까. 예나 씨가 선물했던 립밤을 꺼낸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단번에 손님의 상태를 파악한 운전수 아저씨의 노련함에 감탄하는 것은 뒤로하고 난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뭐,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만나지 못하면, 다른 의미로 많이 아플 거 같아요.

***

‘약속을 어겨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한 선생에게 정현 씨는 그냥 환자의 의미가 아니었다는 거, 정현 씨도 알지요. 거기서 정현 씨와의 약속을 빌미로 한 선생을 들이지 못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까요? 아니, 오히려 단 하나의 공헌도 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원망하며 더 메말라 가진 않았을까요? 오히려 더 큰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요, 한 선생이 실패할 거라는 것을. 그건 녀석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정현 씨를 미워해서도 아니에요. 오히려 녀석이 정현 씨를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겠죠. 자기 자신보다 더.’

‘…그런 생각은 옳지 않아요. 성인이면 누구나, 자기 세상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어야 해요. 의사는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한 환자를 돌볼 수는 없어요. 자신에게 드는 회의감을 떨칠 수가 없을 테니까. 수술대 앞에서 의사는 신이 되어야 해요. 한 선생에겐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여하튼, 한 선생에게 정현 씨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환자였겠지만, 난 오히려 이번 기회로 그걸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 말이 서운하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봐요. 녀석은 내 기대에 부응했어요. 어떻게 되었든 지금, 정현 씨의 몸 안에 뛰는 심장을 적출해 낸 것은, 한 선생이니까. 한 선생은 자신의 꿈을 지켰어요.’

‘그걸 말해 주세요. 당당하게, 살아 숨 쉬는 심장과 폐를 가지고. 네가 해 냈다고 보여 줘야죠.’

***

상상한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널 찾아가면, 넌 어떤 얼굴로 날 맞이할까.

원망스럽게도, 이전에는 툭하면 잘만 꾸던 꿈도 이제 잘 꾸질 않는다. 간혹 가다 한 번 꾸어도 재희는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질 않았다. 그 정도로 많이 화가 난 걸까. 설레는 한편 두렵기도 했다.

정말 화를 낼지도 몰라.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냐고.

어쩌면 대견스러워할지도 모르지. 이렇게 멀쩡해졌다고.

하지만 이 교수님께 전해 들은 재희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긍정적으로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날 밀어내던,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원망하던 재희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난 고개를 저으며 택시에서 내렸다. 내 건강을 염려하는 다정한 운전기사의 말을 응원 삼아, 묘하게 침착한 가슴 고동에 심호흡을 했다. 다른 이들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제가 심장 이식 환자라, 면역 억제제 처방을 받고 싶어서요.”

“아, 네. 잠시만요. 여기 성함이랑….”

이름 석 자와 주민 등록 번호를 적어 내는데 손이 하염없이 떨려 혼이 다 났다. 직원은 때마침 이번에 흉부외과 선생님이 계셔서 다른 진찰도 도와주실 수 있을 것 같다며 내게 운이 좋다고 했다. 나는 긴장을 애써 누르며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제발, 모두의 말이 맞기를.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기를.

오히려 너무 가까운 곳에, 너무 오랫동안 함께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곁에 있을 때는 그저 현 상태에 안주할 수 있었다. 지금이 영원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이 견고한 상태가 깨어져 아예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한 내 섣부른 마음과 행동 때문에 그 평행선은 깨어지고 말았다. 친구로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돌아서던 재희의 뒷모습과 함께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모든 것을 놓아 버렸다.

***

그리고 녀석의 파견으로 생긴 두 달의 여백,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네 살 이후로 한시도 떨어져 보지 않았던 우리의 관계가 어긋나고 나서야, 나는 서로 간에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엔 미칠 듯이 보고 싶었고, 그리워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기도 했다. 모진 말로 상처 주며 떠나보내려 했던 때는 언제고. 스쳐서 마주칠 수도 없는 다른 병원에 갇힌 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새로 얻은 생명에 감사하는 것도 잊고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나를 도왔다. 재희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거꾸로 재희를 원하게 만들었다. 결국 내 자신에게 백기를 들고 만 것이다.

여전히 좋아. 네가 나를 사랑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그래도 괜찮아.

그래,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 내가 널 원했던 게 아니었듯이.

너 또한 단순한 책임감이나 반사적인 습관만으로 날 소중하게 여긴 게 아니란 걸 알기에.

“한정현 씨.”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아. 아니, 놓치지 않을 거야.

세 번의 계절이 내게 남기고 간 것은 상실과 더불어 강렬한 욕망이었다. 번갈아 드는 빛과 그림자에 떨며 나는 단 하나만은 확신했다. 그래서 남들의 생각보다 빨리 떨치고 일어날 수 있었다. 마음이 앞서, 간호사가 부른 내 이름에 달려갈 뻔한 다리를 침착하게 다스려 걸음을 옮기고, 그 문 앞에 섰다.

“들어오세요.”

열리는 문 그 너머의 음성은, 귀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네 것이 맞다. 정말이었다.

***

“아….”

그림 속의 재희가 내 눈앞에 살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밖에서 스며든 찬란한 빛을 등진 채 차트를 건네받으며 짓는 찡그린 표정. 근무 시간엔 늘 끼고 있는 안경 너머 선명한 눈매는 그대로였다.

여전한 흰색 가운. 조금 수척해졌을까. 평소보다는 짧은 머리칼이 스친 뺨 주위에 그늘이 졌다. 왜, 병원에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삶이라고 들었는데.

“환자분?”

“…!”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 선 날 의아해하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이윽고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한 순간이 무척 느리게 느껴졌다.

아….

뭔가 이상해.

분명, 이식해서 새로운 심장을 받았는데도 이러는 건 말도 안 되잖아. 혹시, 내게 심장과 폐 주신 분이 살아 계셨을 땐 너를 좋아했던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넌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 나에겐 틱틱거려도, 남들에겐 모두 친절했을 테니.

그렇지 않다면, 이럴 리 없잖아. 이 정도는 아니잖아. 분명 새 심장인데.

하고 싶었던 말, 멀쩡하게, 이제 건강해졌다고 말해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상태가 이상해졌어.

거슬리는 기계 소리 하나 없이 박동하기 시작하는 가슴 고동에 나는 나도 모르게 옷자락을 쥐어야 했다. 눈을 천천히 깜박여 봐도, 사라지지 않는다. 유화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재희.

나약하기 짝이 없던 과거와 달리 건강한 지금의 심장은 마치 제 주인을 만난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가슴 속이 막 들끓다 못해 터질 것 같아. 오히려 아팠을 때보다 지금의 심장이 난 더 두려워졌다. 이러다 자칫하면 터지는 거 아닐까. 폭탄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다 가쁘다. 어떡하면 좋아.

뺨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예나 씨가 말했듯, 재희에게도 예쁘게 보이기는 할까. 네가 좋아할까. 고동소리에 맞춰 뒤죽박죽이 된 머리는 어떤 이성적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몸을 달뜨게 할 뿐이었다. 그 한계에 도달해 잠시 비틀거린 내 몸을 반사적으로 붙든 재희의 체온이 닿고 나서야, 아. 나는 한숨을 내뱉듯 작은 목소리로 재희의 코끝을 간질일 수 있었다.

“…안녕.”

생각하고 다짐했던 모든 말을 뒤로 한 채.

내 이름조차 내뱉지도 못하고 선 네게 할 수 있던 내 최선은, 고작해야 두 글자의 인사뿐이었다.

***

눈을 뜨고 마주한 천장은 반쯤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름이 되어 해가 꽤 길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얼마만큼 잠이 든 걸까 알 수 없어 나는 시계를 찾으려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기울어진 그림자 끄트머리에 마치 그림처럼 앉아 있는 재희를 발견했다.

내 발치에서, 가만히 잠든 날 들여다보고 있던 재희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정확하게 속을 비운 링거의 바늘을 빼냈다. 일련의 과정 모두가 음소거가 되어 버린 영상처럼 적막했다. 살며시 피부 위를 비집고 나오는 피를 솜으로 꾸욱 누르는 재희의 긴 손가락까지도. 그리고 내 머리맡에 앉고서도 재희는, 그리고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간호사들도 당직 외엔 거의 퇴근하고 난 뒤인지 사투리 특유의 억양에 소란스러웠던 분위기마저도 거의 잠잠해진 뒤였다. 적막했다.

하지만 좀 색달랐다. 병원이라면 질리도록 지내 왔다고 생각하지만. 이곳은 조금 달랐다. 특유의 소독약 냄새는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적막함이 서늘하거나 또는 두렵지 않았다. 기계와 의료진들의 암호 같은 대화. 가래 섞인 기침 소리와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늘 귓가를 채우는 부산스러움과는 다른, 혹은 수술대 위에 올라가 홀로 추위와 고독과 맞서야 했던 그 순간들과는 격이 다른 고요함이었다.

여름의 볕을 그대로 물들인 빛이 방 한가득 들어왔기 때문일까. 오히려 온통 붉게 물든 시야가 날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긴장도 함께 풀려 버린 거겠지.

그러니까.

녀석에게 인사를 건넨 것까진 좋았는데. 정말 거기까지였다.

약간의 현기증을 일으킨 나는 지금처럼 병원 침대를 빌려야 했다. 검사를 위해 채혈을 하고 난 뒤 링거를 맞고 그대로 잠든 것이다. 호흡 곤란 등의 이상은 없었지만, 패기 좋게 쳐들어온 것치고는 꽤나 나약하게 굴고 있었다.

똑바로 마주 앉아서 이제는 멀쩡해진 티를 팍팍 내 주려 했는데. 스텝이 꼬여 버렸다. 우선 이 이상 누워 있고 싶지 않았다.

네가 내려다보는 거, 더는 싫어.

“…일으켜 줘.”

재희는 아무 말 없이 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등을 받치는 손길이 셔츠 너머로도 뜨겁게 느껴졌다. 녀석은 더위를 잘 탔으니까.

데는 듯한 온기에 고개를 들자 그제야 시선이 평행선에 가까워졌다.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마주 보는 재희의 얼굴은, 올려다보았을 때보다 더욱 야위어 보였다.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해가 더욱 녀석의 얼굴을 짙은 명암으로 갈라 두었다.

“큰 이상은 없어. 입원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고….”

…오히려 입원해야 할 사람은 너 같은데.

“넌 오히려 살이 좀 찌는 편이 나아, 끼니는 거르는 건 절대 안 되고.”

“재희야.”

다행이었다. 2인실이지만 따로 입원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터질 것 같았던 아까와는 다르게 침착하게 뛰는 심장에 나는 나직이 녀석을 불렀다. 조금 늦었지만.

부르는 이름만으로도, 조금 목이 메었다.

“넌 나한테 할 말이… 없어?”

“…….”

“그게 다야?”

내 말에, 녀석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지지 않았다. 또렷이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건지, 이윽고 녀석도 느릿하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그리고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찰나에 찾아들었다.

나는 스무 해 넘게 녀석을 알았고, 또 살았으며, 느껴 왔다.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고 그것을 숨겨야겠다고 자각하는 순간부터 열렬히 녀석을 지켜봐 왔다. 한정된 시간 속 최대한 많이, 여러 모습의 녀석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재희는 늘 빛나는 사람이었다. 비단 한 가지로만 빛나지 않았다. 때론 찬란하기도 했고, 가끔은 눈이 부실 정도이기도 했다. 나무 그늘 아래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 내 시야 가장 끝에서 코앞까지 단숨에 달려오던 녀석은 가끔 빛보다 빠르고, 더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녀석이 내 곁에 머무르는 게 가끔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심지어 혼자 모텔에 틀어박혀 아파할 때도 그랬다. 날 등지고 서서 기침을 토할 때도 녀석은 선명하게 빛났다. 꿈결같이 처음 날 안아주었던 그때도. 심지어 냉정히 돌아섰을 때도, 원망하며 화를 낼 때도.

나는 녀석의 다채로운 빛이 좋았다. 나처럼 그저 큰 눈이 아니라 날카롭고 때론 온유하게 빛나던 그 시선의 끝에 내가 있는 게 좋았다. 시선을 따라 뒤늦게 닿던 손끝, 서늘하기만 하던 나로선 도저히 지닐 수 없는 그 온기의 근원.

그건 내가 녀석을 사랑하는 이유였고, 역으로 다가설 수 없는 벽이기도 했다. 육체적 관계와 다른, 우리만의 넘을 수 없는 선. 녀석이 내게 쳐 둔 일종의 방어막. 날 지키기 위해 내게 닿지 않았던, 흔들림 없던 두 눈동자.

“…정말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 녀석의 눈은 빛나지 않았다. 흐렸다. 모조리 무너져,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난 당황했다. 이런 표정의 재희는 처음이었다.

“나 때문에…. 아니.”

“…….”

“내가, 널, 죽일 뻔했어.”

아니, 처음이 아니지.

나는 기억해 냈다. 옷장 속에 틀어박혀서 울다가 나를 발견하고 올려다보던 그 작은 어린아이를. 의지할 곳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져 방황하던 재희를 난 잠시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물론 그때와 다른 것도 있었다. 노을빛을 곱게 물들인 듯 충혈된 두 눈은 물기 없이 건조했고 조심스레 내뱉는 한 자 한 자는 지극히 낮았다. 울며 엄마 소리를 내지르지도 않았다. 한숨처럼 내뱉는 녀석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이윽고 눈동자마저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차분하게 녀석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관조해야 했다. 작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아픔 없이 팽창하고 수축하는 가슴이, 재희가 남겨 준 모든 것들이 멀쩡하다고 말을 해 주어야 했지만.

“물론 이런 말로 내가 너한테 저지른 일이 없어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래. 맞아.”

“…!”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

살짝,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의기소침한 아이 같은 재희에게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나는 마음을 달리 먹기로 했다. 아니라고 해 봤자, 너는 또 네 스스로의 답에 골몰하겠지.

난 안다. 나의 용서가 오히려 녀석을 참회의 늪으로 등 떠미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을. 오히려 용서의 키를 녀석에게 쥐여 주면 안 된다. 어떤 너그러움으로도 녀석의 갈라진 틈을 메울 수 없을 테니까. 심지어 나로서도 그건 막을 수 없겠지. 바닥없는 늪에 빠져들 녀석을 알기에 나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정말, 미안하다….”

“…….”

“내가 뭘 해도, 네게 진 빚은….”

“그럼.”

재희야 우리.

더는, 그럴 시간이 없어. 기회도 없고.

“내 부탁 좀 들어줄래?”

“…….”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 아냐.”

나는 믿기로 했다. 틈이 있어야, 빛도 새어 들 수 있을 테니까.

***

뭐,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난 계획을 바꿔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어때. 어찌 됐든 집에 가기만 하면 되지.

‘집부터 좀 빌릴게. 지긋지긋해, 병원.’

숙소도 구하지 않은 채로 순천까지 온 거냐며 황당해하는 재희의 눈빛을 나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내가 숙소를 왜 구하겠어. 네가 여기 버젓이 살고 있는데.

다행히 나 이후로 어떤 환자도 오질 않아서 재희는 나와 함께 퇴근할 수 있었다. 밖은 완전히 깜깜해진 뒤였다. 병원 앞 빙빙 돌아가는 로터리 앞에서 나는 속으로 팽팽 머리를 굴리며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려 애썼다. 혹시 그래도 등 떠밀면 어떡하지. 안 들여보내 준다고 난리면 어떡하지.

하지만 우려와 달리 녀석은 순순히 제집으로 나를 인도했다. 다행이었다.

“좁을 거야.”

“상관없어.”

관사로 쓰는 건물은 주변 공보의들과 함께 쓰는 경우도 많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그런 경우는 아닌 것 같았다. 녀석의 말대로 작은 아파트였지만 깔끔했다. 아니, 깔끔하다기보다 휑할 정도였다.

아침에 나온 흔적을 치우려는 듯 부산하게 움직이는 재희의 모습에 멀뚱거리던 나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돋웠다.

“나 먼저 씻어도 될까?”

“어, 거기 오른쪽.”

나는 부리나케 화장실로 들어왔다. 화장실 안 역시 생각보다 깔끔했다. 실례라는 생각도 않고 이리저리 찬장도 열어 보았다. 거의 비어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화장지 몇 개. 일회용 면도기. 여분의 치약.

가장 다행인 것은 칫솔도 하나, 딱히 수상스러운 물건도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씻기부터 해야 싶어 옷을 벗었다. 온수가 바로 나왔다. 발끝을 적시며 나는 낯선 거울 앞에서 내 몸을 둘러보았다. 인상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개흉술만 받았을 때는 그래도 일자 직선만 생겼었는데.

양쪽 폐 모두를 이식받는 과정에서 흉터 하나가 더해졌다. 가로로 완전히 그어진 긴 흉터 덕분에 내 가슴엔 의도치 않은 너른 십자가가 남게 되었다. 아물었다고는 하지만 내 흉통을 가로 지은 붉은 선은 나 자신도 아직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로 존재감이 컸다. 흉터에 익숙한 외과의라고 해도 눈은 똑같을 것이다. 낮에 병원에서 검진했을 때는 옷 아래로 청진기를 넣었기 때문에 재희는 아직 이 흉터를 보지 못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나마 엉덩이는 좀 볼만할 거 같기도 하고.”

입술을 깨문 나는 살짝 뒤를 돌았다. 한창 아팠을 때보다는 체중이 살짝 오른 편이지만 쇄골부터 등과 어깨는 여전히 뼈가 그대로 드러나 보기 흉했다. 그나마 근육이 큰 편이라는 엉덩이만 살짝 봉긋해진 게 다일까.

“에휴.”

뭐, 새삼스럽게.

이리저리 거울을 본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우선은 무리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 감사하기로 하고 나는 우선 밖으로 나가기로 했…는데 이런.

아, 미친. 속옷 안 들고 왔어. 수건도 왜 없냐.

“…재희야.”

오랜만에 주도권을 쥐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딴 걸로 우는 소리를 해야 할 줄이야.

나는 조금 목소리를 높여 재희를 불러봤지만, 답은 없었다. 결국 난 벗어 두었던 옷으로 가슴 주변만 가린 채 문을 열었다.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재희는 밖에 나가 버린 건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몸의 물기는 대강 셔츠로 닦고서 밖으로 나왔다. 여름이라 다행히 춥지는 않았다. 머리에서 뚝뚝 흐르는 물기까지는 닦을 수 없어서 나는 까치발로 수건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낯선 집에서 수건을 찾아내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원치 않게 빈집을 염탐하는 신세가 되었고….

“…흠.”

그 결과 수건 대신 발견한 건, 식탁 옆 술병과 소파 사이 뜯지 않은 담배.

확실히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현관문을 열자마자 은은히 풍긴 담배 냄새는 착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가 늘 기억하던 재희 냄새는 은은히 나던 나무 냄새였는데. 주변 집에 흡연자가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헛된 기대였던 것 같다.

그리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냉장고 문짝을 붙든 채로 재희를 맞이했다.

“미안. 네가 먹을 만한 게 집에 없어서.”

녀석의 한 손엔 커다란 비닐봉지가 담겨 있었다. 내가 들여다본 냉장고 속이 그 변명이 진실임을 증명해 주었다.

건조대에 매달린 수건을 건네준 재희는 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미친. 날이 더워서 까먹었다. 그러고 보니 나 거의 알몸이었지.

“…나 옷 좀 빌려주라.”

가슴팍을 가리고 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변명하는 재희의 말을 등지고 나는 옷부터 뺏어 들었다. 품이 큰 재희의 옷에선 다행히도 세제 냄새만 났다. 그 익숙한 체향에 조금 안정이 됐다.

***

그날 저녁은 재희가 차렸다. 신선했다. 함께 살 때는 백수인 내가 식탁을 곧잘 차렸다. 내가 아플 때에나 재희가 죽을 들고 침대로 올라오긴 했지만 이렇게 상을 차리는 재희는 또 처음이었다. 물론 딱히 메뉴에 기대는 없었다. 냉장고 속은 물과 술병이 전부였으니까. 급조한 즉석 밥에 마른 반찬들. 급하게 반찬 가게에서 사 온 모양이었다. 맛은 썩 나쁘지 않았다.

침실 하나가 겨우 딸린 집에서 밥을 먹고 나니 딱히 할 게 없었다. 한숨 잔 덕분인지 밤이 늦어도 피곤하진 않았다. 재희의 셔츠에 반바지를 걸친 난 한참을 미적거렸다. 옷이 커서 어깨가 곧잘 내려갔다.

왜 이렇게 어색하지?

녀석은 날 앉혀 두고 소주병과 재활용 쓰레기를 몇 번을 걸쳐서 가져다 버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일이 끝난 뒤엔 버릇대로 다 말리지도 않은 머리로 내가 앉은 소파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녀석이 내 얼굴을 보지 않아 한편으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궁금하기도 했다. 녀석의 얼굴이 궁금했다. 설마, 나만 어색한 걸까.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울며불며 난리를 쳐 놓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TV를 보고 있다니. 어설프게 방청객 웃음소리를 따라 웃어 보지만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적어도 녀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너 담배 피워?”

“…어?”

“병원도 관뒀다며.”

그래서 아무 말이나 물어본다는 게 너무 또 직구로 묻고 말았다. 사실 아까 발견했을 때부터 이게 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온 탓이다. 너무 본론부터 꺼낸 거 같은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의사를 하겠어.”

“…….”

“…담배는, 그냥 아주 가끔.”

다 지난 일인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녀석의 대답에, 난 조금 발끈해 버리고 말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뭐 먹고 살 건지부터 물어봐야 하나. 그렇다고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훈계부터 해야 하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봐야 하나… 아니, 물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대답을 듣기 싫었다. 1년이란 세월은 그렇게 길지 않았으니까.

만약에, 만약에 다른 사람이라도 생겼다면… 정말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야?”

“…어?”

“미리 숙소 예약해 줄게.”

그 틈을 틈타서 녀석이 먼저 공격을 하고 말았다. 물론, 악의 없는 호기심이었겠지만.

아까 대강 둘러댄 바는 그랬다. 병원은 지긋지긋해서,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하필이면 아무 차나 골라 탔는데 그게 순천이었고, 약을 깜빡해서 네가 있는 병원에 우. 연. 히. 오게 되었다고. 물론 대책 없는 거짓말이었다.

“…네가 알 바 아니잖아.”

그래서 대답이 저렇게 나와 버렸다. 미쳐 버려, 진짜….

거기서 대화는 끝났다. ‘다음 이 시간에’를 자막으로 물들이며 끝나자 이제는 심각하게 썰렁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재희는 TV를 껐고, 나는 늘어져 있던 허리를 곧추세울 수밖에 없었다.

“피곤하지?”

나는 얌전히 녀석을 따라 침실로 이끌려 갔다.

예전 우리 집에 있던 녀석의 방과는 사뭇 달랐다. 침실에는 작은 협탁과 침대가 전부였다. 싱글 침대는 나한테라면 몰라도 건장한 성인 남성인 녀석에겐 꽤 비좁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자연스럽게 날 눕혔다.

“난 일곱 시쯤에 나갈 텐데 신경 쓰지 말고 자.”

“넌 어디서 자려고?”

“밖에 소파 있잖아.”

웃기시네. 아까까지 내가 앉은 소파라면 팔걸이까지 있어서 녀석이 누우면 상체만 겨우 들어갈 정도다. 차라리 앉아서 잔다고 뻥을 치시지. 난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됐어. 여기서 자.”

“널 저 소파에서 재우라고?”

“아니….”

이번엔 내가 조금 주춤했다. 어, 그렇게 나오면….

“같이, 그냥 자.”

말하면서도 좀 말이 안 된다 싶었다. 씨발, 여기 왜 이렇게 침대가 좁냐. 하필이면….

“여튼. 같이 자.”

“정현아.”

“미안하다며.”

난 서둘러 말을 옮겼다. 말싸움엔 늘 소질이 없었다. 의사들은 왜 말도 잘하는 거야. 예나 씨에게도 그렇고 한재희한테도 그렇고. 아무튼 이 싸움은 길어지면 질수록 나한테 불리하다. 난 절대 억지가 아니라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재촉했다.

“미안하다면서, 이 정도도 못 해 줘?”

억지긴 하다. 좀 불리했다 싶었지만 걷잡을 수 없었다. 내일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몰라. 진짜 어설프게 여행 가야 할지도 모른단 말이야. 이 교수님이 분명 탐색하는 걸로 만족하라 했지만, 난 예상했다.

“나랑 자.”

다음에, 다시 다음을 기약하면 넌 또 내게 더욱 견고한 벽을 치겠지.

“내 부탁 들어주기로 했잖아.”

“한정현.”

“내가….”

다시 또, 아무 믿음도 없이 떨어져 있기는 싫었다.

“너랑 하고 싶어서 왔다고 해도, 하기 싫다고 할 거야?”

다행히 말을 더듬거나 혀를 깨물지도 않았다. 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새삼스럽지 않았다. 늘 시작은 나였으니까.

“너도 매번 특진비니 뭐니 했었잖아. 난 안 돼?”

“…….”

“그 정도 보상. 나 받을 만한 것 같은데.”

분명 그 나쁜 버릇의 발단은 나였다. 울지 말라는 위로의 의미는 어느새 짓궂은 얼굴로 녀석이 요구하면 들어줘야 하는 보상으로 바뀌어 버렸지만. 확실한 건 그 뽀뽀가 키스가 되고 몸을 섞는 결과로 흘러가면서 나 또한 위로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녀석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굳이 속이고 싶지 않았다. 서툰 말보다 차라리 작게 입이라도 맞추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사랑까진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원래 그랬듯이 평소대로 돌아가기만 해도 되는데.

“어차피 너, 아무 마음 없이도 나 잘 안았잖아.”

“…….”

“…상관없는 거 아니었어?”

허를 찔린 듯 재희의 얼굴이 굳는 걸 본 순간, 아 뭔가 잘못 건드렸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엎지른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게 되어버렸었다. 어차피 내일도 밤은 찾아들 것이고, 똑같은 상황은 반복될 것이다. 표정을 읽기 위해 재희를 바라봤지만, 도무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젠 나랑 하기도 싫어?”

도발하는 내 말에도 재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뱉어 놓고 나니 뒤늦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쪽팔렸다. 모처럼 내 본 용기는 허무한 결과로 돌아와 버렸구나 싶어서.

이제는 정말, 필요 없어진 걸까. 내 위로가. 보상이.

울컥했다. 정말 일방적이었구나. 네가 원할 때만 가능하고, 내가 원할 땐 아무 소용없는. 이런 관계가 다였구나 싶어 참담했다.

“…그래. 싫다고.”

“…….”

“알겠어. 미안. …내가 밖에서 잘게.”

안 되겠어. 온몸이 화끈거리는 기분에 나는 침대 밑으로 내려섰다.

이렇게 집까지 알았고 동거인도 없는 걸 알았으니 만족하자. 그냥 내일 서울로 올라가야겠다 생각했다. 날이 밝자마자 돌아가야지. 자포자기한 나는 그대로 방의 불을 끄고 거실로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내 손목이 녀석에게 붙들리기 전까지는.

“왜.”

“…정현아.”

그건 정말 미약한 힘이었다. 약골인 나도 팔만 살짝 비틀면 빼낼 수 있을 정도로. 손아귀도 커서 내 손목은 한 줌으로 잡고도 남는 녀석이 쥔 악력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차마 녀석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꼭, 어린아이가 옷깃을 쥔 느낌 같아서.

“괜찮아?”

“…뭐?”

“내가, 너를….”

녀석 역시 작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한숨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들떠 있는 게, 코끝의 열기로 느껴졌다. 올려다본 재희의 두 눈은 내게 사죄를 고할 때보다 더욱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주저하며 말을 고르는 동안 몇 번이고 깨무는 녀석이 입술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렇게 만져도. 괜찮냐고.”

닿은 손길이 조심스럽다 못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두려워하고 있어.

“괜찮겠어? 아무렇지, …않아?”

어떤 답을 골라야 네게 내 진심이 닿으려나.

말을 고르고 고르려다 나는, 더 이상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벅찬 마음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재희의 입술을 막지 않고서는.

***

어쩔 수가 없는 건가 봐. 어느 순간에 역전된 걸까. 이번에도 시작은 분명 내가 했는데.

돌발적인 키스에 대답하듯 자연스레 내 두 뺨을 감싸 쥔 것을 시작으로 재희는 차츰 제 주도권을 찾아 움직였다. 서툰 내 혀끝을 달래어 제 입 안 깊숙이 나를 품었다.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온몸에 나는 재희의 옷을 쥐어야 했다. 비틀거리는 내 허리를 한 손으로 잡을 때까지도 재희는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천장과 뺨 안쪽을 달래듯이 부드럽게 유영하듯 오가는 재희의 혀 놀림에 나는 자연스레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 걸터앉아야 했다.

방 밖으로 나서려다 붙들린 내 몸은 재희가 이끄는 대로 자연스레 침대 위에 눕혀졌다. 쓰러져 내리는 내 등을 받친 채로 내 위에 올라탄 녀석은 체중을 하나도 싣지 않은 채 제 팔과 다리로 버티고 있었다. 고작해야 그 손은 내 등과 어깨, 그리고 머리칼에서 멈춰 있었다. 내가 두 손을 들어 녀석의 목을 감고, 또 탄탄한 가슴을 어루만질 때까지 녀석은 몇 번이고 내 머리칼을 쥐었다 펴기만 했다.

“재희야….”

녀석을 부르는 내 목소리에 무언가 각성이 된 것처럼 눈을 뜨기 전까지는.

“음….”

숨이 가쁠 정도로 깊숙이에 혀를 넣고 내가 내쉬는 숨을 모두 들이마셨던 재희는 내가 작게 어깨를 두드리자 아쉬운 듯 겨우 입술을 떼었다.

“…괜찮아?”

“응….”

눈빛에 스친 긍정의 뜻을 읽기라도 했는지, 대답하기 전까지 내 입술과 턱 끝, 귓불 아래를 입 맞춰 오는 녀석에게 나는 ‘응’이라는 대답 대신 약해 빠진 신음부터 흘려야 했다. 고개를 꺾고 더 깊이 파고드는 녀석이 허리 아래의 무게를 내게 실어 왔다.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단단히 발기되었는지 얇은 천 너머로 녀석의 성기가 내 다리 사이에 열감을 전해 주고 있었다. 나 역시 마음은 녀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몸은 따라 주지 않는다 해도.

아, 정말 미친 것 같아.

페팅도, 또 오럴도 해 본 사이였지만 여태껏 녀석이 내게 이렇게 진한 애무를 쏟은 적은 없었다. 아랫도리는 서로 단단히 갖춰 입은 채로 손 한 번 닿지를 않은 상태임에도 나는 아랫배가 간지럽고 엉덩이에 절로 힘이 들어가 몇 번이고 들썩이며 고개를 젖혀야 했다. 혼자 애가 탔나 싶어도 다리 사이로 꾹꾹 눌러 오는 녀석의 부피감은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녀석의 입술은 내 목덜미와 귓불 근처에 있었다. 작게 숨을 흩뜨리며 어루만지고, 턱에서 목덜미로 떨어지는 그 라인을 입술로 도장을 찍듯 꾹꾹 누르고 핥는 애무에 나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녀석의 셔츠를 끌어 올렸다.

녀석이 말려 올라온 셔츠를 벗었다. 어두운 실내에 녀석의 몸도 표정도 자세히 보이지가 않아 아쉬웠다.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얼얼할 정도로 내 목을 애무하던 녀석이 내 상의를 쥐었을 때는, 불을 꺼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녀석의 손을 뿌리쳤다. 녀석 또한 고개를 들어 날 내려다보았다.

“안 돼….”

“…하아. 왜.”

“벗기지 마, 이대로…해.”

…보여 주기 싫어. 아무리 어둡다고 해도.

난 필사적으로 티셔츠를 잡아 내리며 날 빤히 내려다보는 재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본래 재희는 옷을 넉넉하게 입는 편이기도 하고, 체구가 다르기에 빌려 입은 재희의 셔츠는 품이 꽤 컸다. 내가 늘어나도록 셔츠를 내려 댄 덕분에 어깨가 그대로 밖으로 드러났고, 녀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왼쪽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하지만 아까의 섬세한 움직임과는 또 달랐다. 도드라진 부분에 녀석이 비비는 입술의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애써 신음을 죽이려 심호흡을 했다.

“읏… 아!!”

하지만 녀석의 다음 행위는 내 예상 밖이었다. 쇄골에 잔뜩 상흔을 남긴 녀석은 그것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그대로 티셔츠 위로 내 가슴을 물었다. 여름철의 셔츠는 애초부터 원단이 두껍지 않았고, 하얀 셔츠에 물든 녀석의 타액은 정확히 그 아래 내 유두 부분을 드러나게 했다.

왼쪽 가슴 위를 혀로 핥기 시작하는 재희의 애무에 나는 고개를 꺾으며 허리를 퉁겼다. 더듬더듬 녀석의 어깨를 쥐어 보지만 맨살에 손톱자국을 남길 수 없어 자꾸만 미끄러졌다. 내 애타는 손길에도 재희가 왜 허락해 주지 않느냐는 듯 이를 드러내며 치밀하게 깨무는 감각에, 나는 저절로 내 두 다리를 녀석의 허리에 감을 수밖에 없었다.

“으응, 읏… 아. 아….”

허락받지 않은 상체론 파고들지 못한 녀석의 손이 결국 내 배꼽 근처를 배회하다 아래로 내려갔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조금 풀린 긴장에 나는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쥐었다. 생머리인 나와 달리 자연스럽게 손가락에 감기는 그 갈색 머리칼마저 내 손을 애무하는 것만 같아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녀석의 이는 이제 온전히 젖어 드러난 내 유두를 잘근거리며 씹고 있었다. 젖어서 유두에 붙은 그 셔츠의 성가신 느낌이 오히려 묘한 감각을 선사했다. 고통보다 묘한 쾌감을 줬다. 나머지 한쪽도 괜히 간지럽게 느껴졌다. 이끄는 내 손을 달래듯 나머지 한쪽을 핥기 시작한 녀석이 단번에 속옷까지 내려 버렸을 땐 헉, 하고 탄성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황급히 셔츠를 쥐느라 녀석을 막을 수 없었다. 온전히 드러난 아랫도리의 열기가 부끄러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재희, 재희야….”

이윽고 내 목덜미에서 입술을 뗀 녀석이 가쁜 숨을 쉬며 자리를 다시 잡았을 때도 그저 머리가 멍한 채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휑하니 벌어진 두 다리 속에 닿는 열기가, 녀석의 입김인 줄은 모르고.

“아, 아…!”

성급하진 않았다. 빠르지도 않았다. 자연스레 젖혀진 내 둔부 사이에 키스 세례를 퍼붓던 녀석이 그대로 내 성기를 삼켜 버린 것은. 속옷 없이 노출되었던 내 민감한 부위가 온전히 먹혀 들어가자 나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크게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허리를 비트는 날 달래듯 내 엉덩이를 잡아 주무르는 재희의 커다란 손에 나는 잠시 셔츠를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내 몸짓으로 인해 말려 올라가는 셔츠를 대신해 붙들 것처럼 두 허벅지가 온전히 하늘을 향해 젖혀졌다.

입 안에서 유영하던 녀석의 부드러운 혀를 아래로 느끼자 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하염없이 재희의 이름을 내질렀다. 재희야, 재희야 제발….

“읏, 거긴… 아!!”

그리고 그 부름에 응대라도 하듯이.

녀석의 긴 손가락 하나가 내 뒤로 들어섰다. 그 생경한 침입에 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다리를 옆으로 활짝 벌려야 했다. 이물감이 들었지만 싫지 않았다. 바싹 올라붙은 고환이 흐르는 녀석의 타액에 젖어, 내 뒤 역시 녀석의 손가락을 마음껏 조여 댔다. 재희가 내 것을 물고 고갯짓을 할 때마다 조여드는 내 뒤가 부끄러워 난 어쩔 줄 몰랐다. 그만하라고 아무리 녀석을 부르고 머리칼을 쥐어 봐도 재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오늘 하루 마음대로 저를 뒤흔든 내게 복수라도 하는 듯이.

“읏, 그만…. 재희야….”

그리고 그 손가락이 두 개가 되고. 쿡쿡, 좁은 내벽을 지분거리는 재희의 긴 손가락은 이곳저곳을 눌러 쉬이 날 지치게 만들었다. 울먹이는 나의 애원에 입을 뗀 내 성기는 녀석의 타액과 새어 나온 쿠퍼액으로 엉망이었다. 어느 정도 발기는 됐으나 여전히 사정까진 이르지 못했다. 나는 아쉬운 듯 제 뺨 주변으로 흐르는 타액을 닦는 모습마저 흥분되어 부끄러움도 잊었다. 내 것보다 더 뜨겁게 표면에 닿는 녀석의 선단을 스스로 쥐었다.

그리고 자칫하면 놓칠 뻔했다. 내 기억보다도 더 단단하고, 뜨겁다는 게. 선명하게만 와 닿아서.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왜….”

“제발. 더….”

꿈이 아니라는 현실감에 나는 바짝 목이 말랐다. 겉으로 문지르며 오가는 열기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왠지 삽입 없이 페팅으로만 마칠 것 같은 두려움에 나는 녀석의 것을 이끌다 못해 직접 내 뒤로 손을 넣었다. 원래부터 체모가 나지 않는 부위라서 다행이었다. 허벅지 둘을 쥔 채로 또렷하게 내 자위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재희의 시선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나마 조금 예뻐 보이지 않을까. 아냐, 너무 가벼워 보일까. 그런데, 있잖아. 그만큼 널….

“아, 응…. 앗. 재희, 재희야….”

충분히 안을 적셔 준 재희의 타액 덕분에 움직이는 데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수치심은 가시지 않았다. 그걸 앞서는 욕망이 내 몸을 이끄는 듯했다. 마치 달뜬 날 달래듯 내 옆구리를 쓸어내리는 녀석의 손에 내 아래가 움찔거리며 손가락을 물 때마다 음란한 내가 수치스러워 더욱 뺨이 화끈거렸다. 아까 손가락으로 내 걸 풀어 준 너도, 이걸 똑같이 느꼈을 것 아냐.

손목에 와 닿으며 줄줄 액을 흘리기 시작한 내 성기도 부끄럽긴 마찬가지였다. 그저 자위라서가 아니었다. 어떤 말도 없이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재희의 시선 때문이었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렸다. 움직임을 조금 더 빨리했다. 원한다면, 네가 거리낌 없이 넣을 수 있게. 사정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애가 탔다. 재희가 눌러 주었던 그 부위를 알 수 없어 엉덩이를 흔들고, 이윽고 검지마저 넣으려던 순간, 내 손목은 단번에 제압되었다.

푹 젖은 내 오른손을 쥔 채로 재희는 날 꼭 끌어안았다.

종전과는 다른, 그저 아이들 장난과 같은 버드 키스. 하지만 이제는 살갗이 맞부딪히는 아랫도리는 우리의 키스와 사정이 달랐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쿠퍼액에 재희의 체모 또한 푹 젖어 맨살뿐인 내 다리 사이를 거칠게 비비고 있었다. 내 고환에 닿는 그 느낌이 간지러워 나 또한 녀석의 아랫도리에 내 것을 비볐다.

정말, 한계였다. 나는 최대한 내 가슴에 무게를 주지 않으려 팔꿈치로 무게를 지탱한 녀석의 가슴 사이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정현아….”

“넣어 줘, 응…?”

뒤로 하면,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등은 마르긴 했어도 흉터가 남아 있지는 않았다. 새빨개진 얼굴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엉덩이가 그나마 살집이 있으니까, 너한테 좀 더 좋은 느낌이 나지 않을까.

얌전히 엎드린 채로 나는 시트를 쥐고 있던 재희의 손등 위를 혀로 핥았다. 이윽고 펴진 그 검지 위를 뺨으로 비볐다. 등에 온전히 닿는 녀석의 가슴 고동을 따라 자연스레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넣어 주기를. 목덜미부터 허리 아래까지 쓸어내리는 손길에 고개를 꺾으며 나는 스스로 다리 사이를 벌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녀석이 넣어 주기만을.

“앗….”

“…그 자세 안 돼. 너, 숨 막혀.”

하지만 단번에 녀석은 내 몸을 뒤집어 버렸다.

다시 마주 보게 된 자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본 녀석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좀 안심할 수 있었다. 닿는 허벅지 사이로 여전히 툭툭 건드리는 녀석의 것은 아까보다 더욱 대단해져 있었으니까.

“아…. 응, 하지만, 아…!”

“정현아….”

고집을 부리려던 내 말은 그 끝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한쪽 허벅지를 들어 올린 채로 허리를 밀어붙인 녀석의 움직임에 따라 나는 입을 크게 벌리는 게 전부였다.

녀석의 것이, 내 안으로 쑤욱, 들어와 버렸다.

“읏…. 윽, 아…!”

솔직히 아팠다. 아무래도,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고작 한 번 있었던 정사. 그것도 서로 감기 기운에 취해서 멋대로 했던 그때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윤활제도 없었고 고작해야 서로의 손과 타액으로 풀어 준 게 다였으니까. 고작해야 절반은 들어갔을까 싶었는데도, 고환 근처로 음모도 느껴지지 않는데도 나는 꼭 녀석의 전부를 받은 것처럼 육중한 무게감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절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눈을 떴다. 내려다보는 녀석의 얼굴은 예상대로 미소 따윈 사라져 있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내려앉는 녀석의 상체에 따라 녀석의 것 또한 좀 더 안으로 들어섰다. 가득 벌어진 내부는 손가락 따위로는 짐작도 못 했을 만큼 거대한 것에 짓눌려 고통을 호소해 왔다.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난 애써 웃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로 녀석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녀석은 더욱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아파…?”

“아니, 읏, 안….”

“현아….”

“좀, 응. …좀 더, 들어…아!”

뒤로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에 손을 뻗어 녀석의 엉덩이를 잡았다. 재희는 그대로 멈췄지만, 애매한 곳에 걸린 녀석의 성기가 오히려 안에서 한층 두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들어오라고 하면서도 하염없이 이물질을 내보내려는 내 몸의 반사적인 반응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빨리 더, 한껏 안아 주고 싶은데.

“빼지 마….”

“…정현. 아….”

“더는, 더… 는.”

가쁜 숨에 녀석의 손이 내 셔츠 위로 올라섰다. 흐르는 눈물까진 막을 수 없어 나는 오히려 녀석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더욱 몸을 붙였다. 제 것을 조르는 내 몸의 압력에 신음하는 재희의 뺨을 쥐고 열렬히 입을 맞췄다. 비록 서툴지만, 아무것도 아니지만. 볼품없는 몸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한테서, 멀리, 가지, 마…아!”

“…….”

“가지, 마…! 아…아앗!!”

거기까지였다. 온전히 들어와 버린 녀석의 선단이 내 몸 깊숙이에 닿자 우리의 입에서는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시야는 눈물로 흐려 난 재희의 표정까진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내 몸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재희에게 나는 간헐적인 신음을 터뜨리며 재희의 맨어깨와 가슴을 매만졌다. 팔뚝을 쥐었다. 계속해 달라고. 계속, 안아 달라는 말과 함께.

“나만 보고, 싶었… 어?”

어느새 울어 버렸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네 앞에서 강해지기로 했는데. 아프다고 칭얼거리지 않기로 했는데. 네가 자연스레 내 곁에 머무르길 바라게 될 정도로 매력적으로 굴기로 다짐했는데.

“읏, 너는, 넌 정말… 괜찮았, 어?”

“…….”

“재희야, 재희, 야….”

나는 알지도 못하고 그저 네게 의존하기만 했던 지난날에서 벗어나기로 했는데. 펑펑 울어 버리고야 말았다. 건강해진 심장이 단지 빨라졌을 뿐 규칙적으로 가슴 고동을 울리어도, 아직도 적출되지 못한 무언가가 남은 것처럼 나는 아픈 듯이 헐떡이며 재희를 불렀다. 재희야. 대답해 줘. 응? 가지 않겠다고.

“아, 아, 잠깐 윽!!! 읏, 재희… 야!!”

분명 여태까지 부드러웠는데, 안으로 느껴지는 선단은 거칠고 뜨겁기만 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에 재희의 두 팔을 붙들고 길게 울어 댔지만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녀석은 가파르게 속도를 올려 움직일 뿐이었다.

이 행위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일까.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녀석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한 나는 기껏해야 녀석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름을 부르는 게 전부였다. 내 신음과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녀석의 귓가에 하염없이 속삭였다.

이제는, 아무 데도. 아무 데도 가지 말아 줘…. 응?

***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 재희는.

사정하지 못한 내 것 위에 제 정액을 사출하며 길게 숨을 내뱉었던 것 같다. 그 한숨은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나는 와 닿는 녀석의 입술에 눈을 감아버렸다. 그건 내 버릇이었으니까. 거칠지도 가볍지도 않게 서로의 숨을 머금고 뱉으며 우리는 가파른 절정에 몸을 떨었다.

몇 번이고 내 입술을 감쳐물었던 재희는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지만, 흐려진 시야에 나는 재희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녀석의 이름을 부르는 게 전부였다. 대답하듯 재희는 내 가슴 위로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늘 그랬듯 귓가를 댔다. 나의 것이 아니지만, 재희가 죽이고 살린, 그 심장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제야 밀려온 안도감에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눈을 뜨자마자 한숨부터 새어 나왔다.

망했어. 이번에는 절대로 잠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수액까지 맞았는데 아무래도 여독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의지와는 다르게 관계가 끝나자마자 정신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다행인 건, 그리 오랜 시간은 지나지 않았는지 내 곁에 재희 또한 잠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녀석 또한 피곤했던 모양이다. 이해는 됐다.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뜬금없이 내가 찾아오고, 이 밤중까지 난리 친 것을 생각해 보면. 덕분에 나는 보기 드물었던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새삼 감격스러웠다. 이렇게 무방비한 한재희라니.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종종 같이 잠들긴 했어도 깨어나 보면 침대 위엔 늘 나 혼자였다. 재희는 워낙 잠투정이 없었고 나는 그 반대였으니까. 아프고 잠들어 누워 있는 것은 대부분 내 몫이었다. 헌데 관계를 맺고 난 뒤 곤히 잠든 재희라니. 처음 봤을 수밖에.

묘하게 신이 났다. 가슴께에 고개를 묻고 잠든 재희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잠든 내 허리를 감싼 채 엎드리듯 누운 재희가 쌔근거릴 때마다 그 갈색 머리칼이 조금씩 날렸다. 몸을 살짝 틀어 내 가슴 근처에 고개를 묻은 녀석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뒤척임 한 번 없이 내 손길에 따라 곱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뭐랄까, 정말 아이 같아.

평상시엔 자연스럽게 올려다봐야 했을 만큼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센 녀석인데.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뭔가, 꼭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 밑 깊은 언저리부터 뻐근하게 들이차는 충실함에 나는 살짝 그 머리통을 그러안고서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남기고 싶어. …그리고 싶어.

“아….”

허리를 붙든 녀석의 손가락을 푸는데도 진땀이 다 났다. 재희의 팔에 나 대신 베개를 안겨 준 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찌릿하고 다리 사이로 얼얼한 감각이 스쳤다. 어떤 환부의 고통인지 모르지 않기에 그것이 생경했고 또 놀라웠다. 처음 안겼을 때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느낄 겨를이 없었다. 눈을 뜨고 나면 병원이었으니까.

적나라한 여흔이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부끄러웠다. 다리 사이의 묵직한 느낌이 아직도 뭔가가 들어가 있는 듯했다. 뺨에 홧홧 열이 올랐다. 잠들기 전 재희가 뒤처리까지 해 주었는지 깔끔하게 닦인 몸에 바지까지 입혀져 있었지만 아무래도 안쪽까진 신경 쓰지 못했을 것이다. 셔츠 안쪽도 들여다봤으면 어쩌지 노파심이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나는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조금 더 밝았으면 좋겠는데….

흉골을 절개한 상처야 아문 지 오래건만 주변에선 내게 한결같은 잔소리를 했다. 가방은 최대한 가볍게 드는 게 좋으니 이것저것 넣고 다니지 말라고.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겨서 가져온 게 다행이었다. 난 숨을 죽이곤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채색 작업에는 아직 서투른 편이었다. 게다가 수채화는 더더욱. 고체 물감과 워터 브러시의 편리성에 감동하긴 했지만 가장 익숙한 건 아무래도 연필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어두워서 색을 넣기도 어려웠다. 어느덧 반 토막이 된 4B 연필을 쥔 나는 재빠르게 스케치북에 재희를 채워 나갔다.

확실히 사진을 두고 그릴 때와는 사뭇 달랐다. 상상에 의존했던 재희를 그리는 것과 실제 재희를 그리는 것은 확연히 다른 작업이었다. 어느 면에서는 상상해서 그리는 편이 더 수월한 점도 있었다. 오히려 눈을 감으면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에 각인된 재희를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언제든 흐려지지도 않고 선명하게 존재하는 환영으로.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깊게 잠든 재희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손이 떨렸다. 마치 재희에게 손목이 붙들렸을 때처럼 가슴도 뛰었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자는 녀석을 두고 꼭 변태 같았지만, 이 작은 화폭 아래 녀석을 담아낸다는 건 여러모로 내 능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선 하나에도 잘못 힘이 들어가기도 했고, 손에 쥔 이부자리의 주름 하나마저도 모자라거나 넘칠까 봐 쉽게 그어 내릴 수 없었다. 좀처럼 쉽게 그려지지 않는 탓에 왕창 지우고 새로 그리기도 했다.

신기했다. 손을 뻗으면 분명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데. 너무 어려워.

찬란하게 빛나기보다 오히려 볕이 숨을 죽인 것처럼. 새벽빛이 겨우 새어 들기 시작하는 실내에서는 음영보다는 오히려 그 윤곽 그 자체에 손을 맡겨야 했다. 좁은 방. 그 좁은 침대에 웅크리고 잠든 재희가 차츰 완성될 때쯤엔 내 목덜미는 흠뻑 땀에 젖은 뒤였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창가에서 서서히 밝아지는 볕을 따라 명암을 넣을 때쯤 작은 소음이 내 귓가를 간질였다. 알람이 울렸다.

“음….”

칼같이 녀석의 눈이 떠졌다. 시트에 뺨을 몇 번 비빈 녀석은 베개를 쥐고 있던 손을 몇 번 쥐고 펴더니 불현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황급히 둘러보고는 방구석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난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뭐해.”

“너 그려.”

물어 오는 목소리가 유독 낮게 잠겨 있어서, 난 뭔가 죄를 지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혹시 화가 난 걸까. 다가오는 재희의 표정엔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날 선 눈빛으로 내 앞에 다가온 녀석에 단번에 내게서 스케치북을 뺏었다. 부끄러워 손을 뻗기도 전에 녀석은 관심도 없다는 듯, 그림을 보지도 않고 덮어 버렸다.

“야….”

“씻고 더 자. 목욕물 받아 줄게.”

연필까지 그대로 가방에 넣어 버린 재희는 날 가볍게 일으켜서는 침대에 눕혔다. 잠이 깬 지 언젠데. 항변하려고 해도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 시선은 녀석의 뒷모습에 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녀석의 올라붙은 엉덩이에.

발가벗은 게 부끄럽지도 않나.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올리고서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멀리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음에 안 들었나.”

…잘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나 보다.

***

묘하게 간지러운 일상은 다행스럽게도 한동안 유지되었다. 일례로, 면역 억제제.

혼자 있을 때는 알람을 맞춰 가면서 먹곤 했는데, 녀석과 함께 지내게 되니 예전 버릇 나오듯 묘하게 느슨해졌다. 나도 모르게 녀석의 앞에서는 응석을 부리고 마는 걸까. 내가 진료받는 서울 병원에 연락까지 해서 약을 처방한 재희는 시간에 맞춰 내게 물컵과 함께 약을 건네곤 했다.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하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에 애교를 대신해 녀석의 뺨에 입을 맞췄다. 충동적이었다.

귀가 새빨개진 녀석을 모른 척하며 약을 꿀꺽 삼켰다. 답례는 입술에 닿는 버드 키스 정도였지만 가슴이 참을 수 없게 간질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날 밤 처음으로 녀석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았다. 슈퍼 싱글 침대는 확실히 성인 남성 둘이 자기는 비좁았다. 하지만 난 꿋꿋이 자리를 차지했다. 마주 보기는 좀 좁아서 나란히 한쪽을 보고 눕고는 했다. 그러다 보면 의도치 않게… 녀석이 발기한 게 느껴지고는 했지만, 애석하게도 난 모른 척해야만 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정말, 뒤를 돌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안이 여전히 낫질 않아서, 조금 아파서….

아마 내가 잠든 줄 알았는지 잠시 녀석은 밖에 나갔다 왔다. 치약 냄새가 묘하게 섞인 담배 냄새에 나는 속으로 사죄했다. 미안해, 아직 좀 아파….

***

공간이 주는 차별성일까. 같은 행동, 같은 생활임에도 예전과 지금은 너무나 다르게 느껴졌다.

성인이 된 뒤에 우리는 줄곧 단둘이 살았다. 하지만 이전 집은 크기도 크거니와 너무나 익숙해서 ‘단둘’이라는 느낌을 그다지 주지 않았다. 그냥 원래 살던 집에서 재희만 곁에 남은 것 정도였다.

하지만 이 좁고 낯선 집에서 재희의 퇴근을 기다리는 일은 색다른 기분을 선사했다. 음, 그러니까. 묘하게 신혼집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만의 주책일 수도 있겠지만.

예전 같았으면 가정부 아주머니의 손길이 필요했던, 엄두가 나지 않았던 큰 집과 달리 이곳은 내가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청소가 가능했다. 베란다 창까지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바닥을 걸레질하고 나면 땀이 쫙 빠졌다. 내게는 운동 시간이었다.

재희가 퇴근하고 나면 함께하는 시간은 지루할 틈 없이 더 달콤해졌다. 나란히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TV를 켜 두고 앉아 세탁물을 개다 보면 드라마에서 봤던 그 신혼부부나 다름없는 일상이라는 것에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흘겨 본 재희 역시도 너무나 당연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새삼스럽게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까, 연인이란 게 어떻게 되는 거지.

원래 늘 둘이 살았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미 친구일 때 연인이나 부부가 하는 짓거리를 늘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섹스까지 하고 나니까 이게 선이 없는 거다. 막상 사귀고 나서도 이와 별반 다름없겠지만.

생각해보니 고백도 안 했어.

좋아하는 걸 뻔히 들켜 놓고서도 해 본 적이 없다. 뭐, 하기도 전에 거절당하긴 했지만.

“다시, 고백해 볼까.”

마음만 같아서는 이렇게 계속 살고 싶었지만, 내려가기 전 아빠와 꼭 약속했었다. 한 달에 한 번은 서울에 올라와서 규칙적으로 검진을 받고 가겠다고.

믿어달라기엔 지나치게 큰 죄를 지은 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천방지축 아들을 걱정하는 아빠의 마음을 난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 아빠도 혼자고, 많이 외로울 테니까.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막상 재희를 두고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러모로 조바심이 났다.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공중보건의인 한재희가 보건복지부 소속으로 이곳에 3년간 발이 묶여 있는 처지인 건 매우 잘 알지만, 서울과 순천과의 거리는 멀고도 멀다. 버스로도 몇 시간. 물론 전화 문자도 있고, 이제는 걸어도 받겠지만 그다지 위안은 안 된다.

장거리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재희는 늘 당연히 함께 사는 존재였다. 다신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 여태 떨어져 있던 것으로 충분했다. 다신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선생니임.”

그래. 살짝 잊고 있었다. 얘 인기인이었지.

며칠이 지나고 체력을 회복한 나는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대부분 재희가 출근한 의료원에서 일과를 보냈다. 의료원은 무척이나 한가했고, 진찰할 환자가 없는 시간엔 재희 곁에서 머물다 보니 나는 그녀들의 수작질을 모두 지켜보고 견뎌야 했다.

재희가 환자를 진료할 동안 나는 스테이션에서 얼쩡거리며 간호사들과 수다를 떨었다. 그네들은 서울에서 온 내게 호의적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나 자신보다 한재희에 있었다.

“재희쌤 서울에 여친 있어요오?”

“그을쎄에요오. 전 잘 몰라서.”

물론 그녀들은 나의 견제 따위는 절대 눈치채지 못했다. 서글프도록 익숙한 일이었기에 최대한 비즈니스로 웃어 보였지만 표정은 확실히 구렸나 보다. 어느 정도 이상은 아무도 캐묻질 않았다.

사실 그렇게 말해도 사람들은 좋았다. 구수한 사투리 덕분인지 그냥 하는 말도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일주일쯤 지나자 의료원 근처 길도 익숙해져 나는 여기저기 자주 돌아다녔다. 주 거처는 의료원 근처 벤치였다. 야무지게 스케치북에 고체 물감까지 들고서.

“워메, 참말로 화가 선상이데.”

“이거 꽁짜로 받어두 되것어?”

기본적으로는 풍경화를 그렸지만 간혹 일하시는 분들의 그림을 그려 드리기도 했다. 사실 여태껏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델로 그려 본 적이 없었기에 많은 공부가 되었다. 서울의 대학병원에서는 볼 수 없는 푸근함이 이곳에는 가득했다. 병환이 있는 분들도, 그 가족분들도 기본적으로 눈매에 서글서글한 인정이 맺혀 있었다. 그걸 빛으로 표현하는 것은 내게 꽤 큰 도전이며 하나의 수업이 되었다.

상상만으로 첫 초상화를 완성했던 내 수준에서, 더없이 큰 도약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아.”

뭐, 여전히 한재희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응?”

“마스크.”

“어?”

“마스크 쓰라고.”

어느덧 다가와서는 내 팔을 붙들고 질질 자기 진료실로 데려가기도 했다. 뭐 이상한 거 한 것도 없는데. 내가 주눅이 들어서 가면 난데없이 손을 소독시켜 주고는 갑자기 마스크를 씌운다. 뭐, 황사 마스크까진 아니고 의사들이 쓰곤 하는 부직포 재질의 마스크여서 숨을 쉬는 건 크게 불편하지 않았지만.

아이 씨, 날도 더운데.

“…적당히 해.”

이제 이미지 메이킹은 포기했는지 대놓고 정색을 해 버리는 녀석에게 오히려 당황하는 건 나였다. 하하, 원랜 저런 애가 아닌데, 타지 생활에 까칠해졌다며 뒷수습은 괜히 내 차지가 되었다. 혹시 화를 낼까 봐 마스크는 차마 벗을 수 없었다. 눈치를 잔뜩 보고 있자면, 퇴근할 때는 또 아무렇지 않아서 한숨 놓긴 했지만.

***

“재희야, 나 바다 보고 싶어.”

“바다? 섬?”

“아니, 그… 늪지대 가 보고 싶어.”

여느 때처럼 함께 퇴근하다가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녀석은 생수 여섯 개를 들었고, 나는 미안하게도 봉다리 하나를 들고 있었다. 주차해 둔 재희의 차에 가는 도중,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풍기는 바다 내음에 확 꽂혀 버렸다.

원래 오자마자 들러 보려고 했는데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고 보니 곧 여름 휴가철이다. 동해가 바캉스의 꽃이라지만 요새는 이 여수나 순천 근처로도 꽤 관광객들이 몰린다고 했다. 나 또한 사전 조사를 통해 가 보고 싶은 곳을 점찍어 두었었다. 바로, 순천만의 갈대밭과 해변.

한없이 푸르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푸른 갈대숲. 그 사이를 정갈하게 가르는 나뭇길을 담은 사진에 단번에 반해 버린 탓이었다. 가능하다면 둘이 함께 걷고, 또 눈과 손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어차피 나는 해수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그 정도의 바다가 내게는 딱 좋았다.

다만 사람이 적었으면 좋겠는데. 그림을 그릴 때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은 피하고만 싶었다. 물론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스케치북 한가득 그림도 그리고 싶고, 또… 뭐. 흠. 사람 눈 피해서 데이트도 하고 싶고.

“그래, 가자.”

“와, 진짜? 너 안 바빠? 해 지기 전에 가야 하는데.”

“괜찮아, 여긴. 그렇게 안 바쁘니까.”

확실히 꼬박꼬박 제때 퇴근하는 것을 보면 신뢰가 가긴 하는데, 워낙 바람을 한두 번 맞아 봤어야지. 나는 확인 차 몇 번이고 재희에게 다짐을 받았다. 너무 신나서 잠도 제대로 안 왔다.

가슴을 도닥여 주는 재희의 손이 아니었다면 분명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정도로.

***

넌 아직도 뭐가 그리 불안한 걸까.

“나 혼자 가도 돼.”

“너 불안해서 못 믿어.”

이럴 땐 또 주도권이 다시 넘어간 것 같기도 하고.

야, 네가 할 소리냐. 애초에 토낀 게 누군데. 입을 삐죽여 보려고 했지만 오늘도 녀석이 씌워 준 마스크 덕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택시 타고 20분도 안 걸리던데. 먼저 가서 진짜 얌전히 기다릴게.”

“같이 가자니까. 왜 그래.”

“그냥, …심심하기도 하고.”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왜긴 왜야. 너 보고 있으면 그림 못 그리니까 그러지. 게다가 나 그림 그리는 거 싫어하면서.

“다 안 올라갈 거야. 딱 갈대밭만 보고 있을게. 너 끝나고 바로 오면 되잖아.”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달리 할 말은 없는 듯했다. 어차피 퇴근까지는 서너 시간 정도. 아무리 여름 해가 길어도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이라 그때 가선 그림 그릴 게 얼마 없었다.

물론 순천만의 낙조는 장관으로 유명했다. 그 장면은 그림이 아닌 눈으로, 또 재희와 함께 보고 싶었다. 그 전까진 열심히 그림을 그려야지.

한껏 기대에 부푼 내 표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재희는 꼭 택시를 타고 가라고 당부했다. 물론 그럴 생각이었다. 좀 더 건강하다면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겠지만, 그건 몇 달 뒤의 목표로 삼고.

“볕 아래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알았다니까. 출발할 때 연락해.”

“알겠어.”

됐다는 말에도 막무가내로 나와 택시까지 잡아 날 태운 녀석은 한참이나 택시 뒤꽁무니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백미러 너머로 지켜본 그 배웅이 새삼 설레어 나는 스케치북을 다시 다잡았다. 녀석이 새로 사다 준 4절 스케치북 가득 풍경을 채워 넣을 테다.

오늘은 꼭, 그려 내야지. 한재희도 인정할 만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과 함께 나는 오늘, 고백할 거다. 이곳에서.

결연한 의지와 함께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변명하자면 막연한 충동은 아니었다. 택시 뒤꽁무니를 바라보는 재희의 반영을 보며 그냥 자연스럽게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고백을 한다면, 맨날 지겹다 못해 똑같은 병원이나 집에서가 아닌, 탁 트인 바깥에서 전해야겠다 싶었다. 고백은 좀 일상에서 벗어난 이벤트로 남아야 뭔가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첫 번째 목표는 대망의 고백 장소를 물색하고 선점하는 것이었다.평일이지만 꽤 사람이 붐볐다. 여행 온 가족 단위부터 연인들까지. 떼로 온 관광객들 사이에 유유히 혼자였던 나는 서글플 새가 없었다. 노란 햇병아리 옷을 입고 현장 학습을 나온 꼬맹이들마저도 그저 부러웠다. 나처럼 남자 홀로 나온 사람은 그럴싸한 카메라를 쥐고 있는 몇몇이 전부였다. 스케치북을 쥔 손이 살짝 위축되긴 했지만, 그래도 보무당당하게 난 걷기 시작했다.

벌써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됐다. 나도 커플 될 거야. 오늘 한 건 할 거야.

***

그리고 마치 날 북돋워 주듯.

6월, 초여름의 볕은 따사로웠다. 살짝 더운 날씨에도 마스크를 쓴 나를 희한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난 꿋꿋이 걸어 나갔다. 말 잘 들어야지. 목표는 무조건 갈대밭이었다. 공원 곳곳의 아기자기한 풍경도 많았지만, 오늘의 목적을 위해서 다음으로 기회를 미뤄야 했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와….”

나무 데크를 따라 펼쳐진 갈대밭은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혼자라는 외로움은 눈앞에 마주한 자연 앞에서 알알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렸다. 내 키를 넘는 푸른 갈대들이 넘실거리는 광경 속에서 나는 외로움마저 잠시 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관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길을 나도 모르게 계속 따라갈 정도로,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바람이 밀려들 때마다 사각거리는 갈대의 속삭임에 취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 보니 꽤 멀리까지 걷고 난 뒤였다.

***

…전망대까지 올라가긴 무리겠지.

재희가 퇴근하고 오면 어림잡아 일곱 시. 낙조 시간을 생각하면 전망대에서 보는 것은 무리였다. 멀리까지 걸어가는 것을 포기한 나는 돌아서는 길에 운 좋게 빈 원두막 하나를 발견했다.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마음을 털어 놓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챙겨 온 물로 목을 축인 난 흡족한 마음으로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마시고 남은 종이컵의 물로 나는 워터 브러시의 물을 채웠다. 연필로 스케치를 그리는 건 정말 구도만으로 끝내고 화폭 가득 푸른색과 초록색을 실컷 물들이기 시작했다. 둘러봐도 광활할 뿐인 자연은 어딜 봐도 같게, 또 모두 다른 빛으로 빛나고 있어서 굳이 보고 그릴 것도 없었다. 상상을 압도하는 시야에 나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림을 그렸다.

유화와 달리 수채화는 덧칠하면 할수록 오히려 탁해진다. 싸구려 고체 물감으로 낼 수 있는 컬러는 분명 한정적이었지만 나는 여태껏 시도하지 못한 총천연색을 써서 눈앞의 절경을 화폭 안에 담아내려 애썼다. 그늘진 곳 하나 발견하기 어려운 짙은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신나게 스케치북을 물들였다. 엉망이 되어도 좋았다. 연신 같은 광경을 다시 그리고 또 그렸다.

***

재희에게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간해선 성에 차지 않았다. 팔이 아픈 줄도 몰랐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그림을 보고 한두 소리 하는 것에도 제대로 응대하지 못할 정도로 흠뻑 빠져 있었다. 물론 시간도 금방 흘렀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통해 난 그 흐름을 알 수 있었다. 길어지는 그림자. 너울지는 빛의 스펙트럼. 짙은 빛을 연신 터치하며 나는 곧 해가 지겠구나, 하고 알아챘다.

“…늦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미 여섯 시를 훌쩍 넘어 일곱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슬슬 병원에서 출발했어야 할 시각이었다. 입장권을 일곱 시까지 교부한다 했으니 그 전까진 와야 할 텐데. 부재중 통화나 메시지 하나 없는 휴대폰에 덜컥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조금 이상했다. 녀석답지 않았다. 늦으면 늦는다고 진작 연락했을 텐데.

“…무슨 일 생겼나.”

두어 번 걸어도 전화를 받지 않자 조금은 초조해졌다. 흠뻑 빠져 있던 그림 역시도 맥이 끊겨 버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문득 붉어진 시야에 고개를 들어 보니, 이미 모든 것은 시작되고 있었다.

***

순간 재희에 대한 걱정마저 잊었을 정도로, 정말. 말 그대로. 순천만의 낙조는 절경이었다.

사진으로 구경했던 낙조와는 차원이 달랐다. 밀려드는 바람 소리에 사각거리는 갈대의 푸른 머리칼 한 올 한 올이 붉게 물드는 광경에 나는 압도되었다.

자연의 핏빛은 내가 알던 그 붉은색과는 차원이 달랐다. 오히려 강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석양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함의는 모두 거짓말로만 느껴졌다. 내 전신에 물든 피가 모두 약동하고 달아오르는 것처럼, 시야에 물든 적색을 따라 입 안 가득 탄성이 맴돌았다.

미처 붓을 놀릴 틈조차 없었다. 사진으로 남길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해가 온전히 모습을 감추고 난 뒤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이미 주변은 어두컴컴해져, 모두가 공원 밖으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나도 서둘러 짐을 챙겼다.

***

그래. 병원에 무슨 사정이 있겠지. 늘 그랬잖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다음에 하면 되지 뭐. 조바심내지 말자.

흔히 그래왔듯 자괴감에 빠지지 못한 건 낙조가 내게 남긴 에너지 덕분이었다. 확신이 들었다. 분명, 다음에 함께 이것을 본다면 자연스레 마음이 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광활한 자연 앞에서, 아무것도 숨길 것 없이 홀가분해진 이 감격을, 얼른 재희에게도 맛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따, 그러구 보니 아까 여 사고 났다는 거 들었소잉?”

“사고요?”

“삼중 추돌이 나부럿당게. 하나가 죽었다나 뭐라나.”

그리고 나는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의 직감이 맞았다는 사실을 원치 않게 확인했다. 무서울 만큼 정확하게 드러난 그 ‘사정’에 나는 아저씨를 재촉해야 했다.

낙조가 아닌 다른 붉은 색에 온통 잠식되어 있을 재희를 어서 빨리 돕기 위해서.

***

병원은 실로 아수라장이었다. 특유의 고즈넉함은 사라지고 서울의 응급실과 다를 게 없는 분위기로 변했다. 아무래도 인력이 부족한 듯 원무과의 몇 빼고는 다들 머물러 있는 사람이 없었다. 예상대로 응급 환자가 이곳으로 이송된 모양이었다.

재희는 수술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간호사에게 전해 듣기론 퇴근하기 딱 십 분 전에 구급차가 들이닥쳤다고 했다. 그 뒤로 논스톱 수술 중이라고. 이런 작은 병원에선 교대해 줄 사람도 없었다.

아무래도 작은 병원이라, 이런 응급 건은 일반적인 처치 뒤에 도심의 큰 병원 쪽으로 이송시키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 붙들고 있다는 건 아마 흉부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는 의미일 테다. 어디 이송할 새도 없을 만큼 위급한 상황에 수술실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재희가 눈에 선했다.

허탈감과 안도감. 밀려드는 복잡한 감정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원인 모를 암담함이 치밀었다. 어째서일까. 쥐고 있던 스케치북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혼자 너무 신이 났었나 보다. 근래의 평온함은 날 잠시 무디게 만들었다. 살짝 잊고 있었다. 재희는 늘 이런 삶을 살고 있었다는 걸. 버티고 있다는 걸.

마주한 현실은 지독히 썼다. 수술실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계시는 이들과 달리 나는 이기적이게도 환자의 승리가 아닌 재희의 승리를 기도했다. 그래서 최대한 그 가족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 긴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그림이 전부였다. 나는 스케치북을 꺼내 연필을 놀리기 시작했다. 수술실 너머의 재희가 잠기어 있을 핏빛과는 차원이 다른 붉은 빛을 마련하기 위해.

녀석이 나와의 약속을 잊었을 리 없다는 건 안다. 오히려 수술실에서 내내 마음에 걸려 방해가 되지 않으면 모를까. 난 녀석이 잠시나마 날 잊기를 바라며 어려움 없이 연필을 놀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잠시나마 녀석을 잊기 위해서.

잠시 눈을 감고, 압도당했던 그 풍경을 재현해 내기로 했다. 시야에 온통 붉게 물들던 광경은 물론 내 능력으로 재현할 수 있는 범위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지는 건 조바심뿐이었다. 모르는 척 집에 가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그림에만 집중했다. 그래야만 잠시나마 지난한 시간의 흐름을 잊을 수 있으니까.

다행히 나와 내 그림에 관심을 둘 만한 사람은 없었기에 나 또한 방해자 없이 그림에 온전히 집중했다. 그리고 스케치북 구석까지 붉게 물들였을 즈음에야, 수술실의 문이 열렸다.

***

수술실에서 나온 재희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나는 수술의 성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고, 하고 통곡하는 소리에 도망치듯 나는 녀석의 진료실에 들어갔다. 녀석이 곧 올 텐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웃어야 할까.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채 고민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저벅거리는 소리보다 먼저 느껴진 건 진한 소독약과 피 냄새였다. 수술복 모자를 벗으며 들어선 재희는, 나를 발견하곤 그대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괜찮아?”

애써 웃었던 것 같은데, 잘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감이 다 마르지 않은 스케치북을 등 뒤로 돌리며 나는 망설였다.

“걱정돼서 병원에 와서, …기다렸어. 너, 계속 수술….”

“미안하다.”

“…….”

“정말, 미안….”

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의연한 표정을 지었던 녀석의 가면은 내 앞에선 너무나 쉽게 해제되고야 말았다. 나는 이 표정을 본 적이 있다. 재희와 재회한 그날, 잠들었던 날 지켜보고 있던 그 텅 빈 눈.

나는 반사적으로 지금의 재희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한걸음에 다가가 녀석의 손을 잡았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집에 가자. 응?”

“…현아. 정말….”

“다 괜찮아…. 응? 집에 가자.”

한순간에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허무할 만큼.

***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의 곱절만큼 나는 스케치북을 들추며 힘껏 수다를 떨었다. 재희는 말없이 그것들을 살펴봤지만, 입에 발린 소리도 뱉지 못하고 오히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무너질 것 같은 시선에 기껏 멀쩡해진 가슴이 불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거, 낙조. 진짜 유명할 법하더라.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빨간색 별로 안 좋아했는데, 이건 진짜 내가 여태껏 본 빨간색 중에 가장 아름다웠어.”

“…….”

“확실히 가을에 더 예쁠 거 같아. 갈대밭이 금빛이니까. 나 다시 내려오면 그때 보러 가자. 가을에….”

“미안하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 버린 것 같았다. 난 서둘러 스케치북을 덮었다.

“…재희야.”

“정말….”

“왜 그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다음에 가면 되지.”

“다음….”

분명, 단단히 붙잡고 있는데도 녀석의 모든 게 허물어지는 기분이었다.

“다음에 또, 너를 실망시키면 어떡하지?”

“재희야.”

“또 너 혼자, 그렇게 날 기다리고. 상처 받고. 그렇다고…,”

녀석은 목이 메는 듯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환자를 살리지도 못했고…. 정말 무능하지.”

길게 숨을 내쉬는 재희의 모습에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는 녀석의 모습이 그려졌다, 매캐한 담배 연기만큼이나 마르고 버석한 시선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쓰디쓴 자조가.

“넌 최선을 다했어.”

“정현아, 알잖아. 최선으로는 부족해. 기억 안 나?”

심지어 재희는 나지막이 웃었다.

“최선을 다하다가 내가, 널 죽일 뻔한 거.”

“한재희.”

“난.”

마치 불을 삼켜 내듯, 괴로운 표정으로 숨을 머금었던 재희는 한참을 주저하다 허탈한 한 마디를 그렇게 토했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아무래도, 네가 원하는 그 한재희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아.”

“…!”

“되고 싶었거든, 정말로. 네 그림 속의 내가 진짜 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미안. 아무래도 부족한가 봐. 나는.”

재희의 말에 불현듯 나는 한 장의 그림을 떠올렸다. 내 욕심을 모두 내어 완성했던 재희의 그림. 그 따스한 미소. 상상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내가 사랑했던 한재희 그 자체를 남길 수 있었던 초상화를.

네가, 봤구나….

영정 사진으로 마련해 두었던 증명사진 중 딱 한 장이 사라진 것을 알고, 혹시나 했었다. 혹시나 재희 네가 그걸 가져갔을까. 그렇다면 이 그림도 봤을까. 보고 좋아했을까, 아니면 싫어했을까. 어떤 기분이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이라고 접어 두었지만 이제야 그 답이 내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너를, 더 괴롭게 만들었구나, 내가….

“네가 와 줘서, 정말 한참은 꿈인가 생각했어. 이런 기회는 다신 없을 거라고…. 네가 직접, 날 찾아와서. 예전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처음엔 믿지도 못했어. 넌 분명, 날 미워할 텐데. 싫어할 텐데.”

“아니야. 왜….”

“그러다가 욕심이 났어. 널 구해 줄 순 없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네 곁에 머무를 순 있지 않을까. 그래. 그 그림 속의 나처럼, 실제 나도 그렇게 된다면.”

“재희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 좋은 사람이 되자. 그래. 나도, 널 행복하게 할 수 있진 않을까. 혹시라도, 그렇게 될까 싶어서. 정말. 나. 노력했는데….”

내 말을 듣지 않고 중얼거리는 재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릅뜬 재희의 두 눈은 그 낙조만큼이나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히려 내 시야가 이리저리 얼룩지는 순간에도 재희의 두 눈은 메말라 있었다. 마치, 우는 법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결국 난 널 불행하게 만들 거야. 우리 엄마처럼”

“아니야. 재희야.”

“너도 절대 돌아와 주지 않을 테고.”

체념해버린 듯한 녀석의 말투에 나는 덜컥 두려워졌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어진 나는 무턱대고 녀석을 끌어안았다. 녀석은 날 밀칠 생각도, 끌어안을 생각도 않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관하기엔 너무나 큰 절망에 난 다급해졌다. 이대로 둘 순 없었다. 녀석의 목과 어깨를 그러안고 눈물을 닦아 냈다. 내가 울 상황이 아니었다.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재희야.”

너, 일 텐데….

“재희야, 한재희….”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메마른 재희의 얼굴을 보고서야 난, 내가 아주 많이 늦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늦었다. 정말 많이 늦었다. 내가 재희에게 진실로 전해야 했던 말은, ‘좋아해’ 따위가 아니었다. 달달한 고백의 말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녀석에게, 그리고 우리 사이에 제일 갈급했던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다급해진 마음에 까칠해진 녀석의 두 뺨을 쥐었다. 나를 내려다본 녀석의 공허한 눈, 올곧다 못해 부러져 메말라버린 시선에 나는 왈칵 울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제발, 재희야….

“울어….”

“…!”

“울어도 돼. 울고 싶잖아. …힘들잖아, 너…. 힘들면 울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재희는 마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영문을 몰라 했다. 그 마른 뺨을 엄지로 연신 쓸며 나는 헐떡이며 울었다. 꼭 녀석 대신 우는 것처럼. 울 자격은 내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사죄의 눈물에 가까웠다.

진작 내가 널 안아주었어야 하는데. 미안해.

“내가 매번, 울지 말라고만… 하고.”

예전부터 그랬다. 난 나 때문에 모두가 슬퍼하는 게 싫었다. 나 때문에 우는 게 싫었다. 재희도 웃는 게 예뻤으니까. 그래서 울지 말라고 했다. 계속 웃기만을 바랐다. 그게 욕심인 줄 몰랐다.

슬픈 게 당연하잖아. 노력했는데. 네 살배기가, 엄마 아빠가 죽어서 슬픈 것도 당연한 일이었잖아.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도 당연하잖아.

우는 게 나쁜 게 아니었는데. 아니, 다른 이들 앞에서라면 몰라도 적어도 내 앞에선. 너를 울게 했었어야 하는데. 내가 해 줘야 했던 건, 네 울음을 막는 것보다 함께 울어 주는 일이었는데.

그땐 내가 어려서 몰랐어. 그래서 너에게 울지 말라고만 했어. 울지 않는 널 잘했다면서 칭찬하고, 참도록 만들었어. 내가 그렇게 했어. 그게 널 외롭게 하고 한계에 몰아붙이는 말인 줄도 모르고. 난 널 그대로 가둔 채 여태껏 그렇게 살았어. 내버려 뒀어. 날 안고 있던 너 역시도 힘겹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었는데….

“…현아.”

“미안해. 여태껏, 내가 널 너무 몰랐지. 너무했지.”

하지만 서른이 된 나는 조금이나마 슬픔의 가치를 안다. 울어야 한다. 애써 괜찮은 척 끌어왔던 모든 것들은 낫지 못한 채 어디선가 곪기 마련이다. 썩어들었다. 그게 나와 재희의 흉터였다. 진작 울고 토해 냈어야 할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썩어 문드러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희야, 제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도려낸 나와 달리, 재희는 아직도 그 모든 걸 끌어안고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만 있을 수는, 없다.

“…!”

참지 못할 충동에 나는 발돋움을 했다. 그리고 입술을 맞대었다.

네 살의 내가 그랬듯, 지금의 나도 오롯이 널 보듬을 수 있다면.

물론 재희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난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으려 했다. 홀로 하는 열렬한 키스는 미숙했지만, 그래도 진심만은 전해지길 바랐다. 끝끝내 열리지 않은 입술에도 나는 녀석의 목과 어깨를 붙들고 애원했다. 제발.

“울어 줘, 울어도 돼. 내가, 네 눈물 닦아 줄게. 내가, 나 여기 있을 테니까…. 같이 울면 안 될까. 응?”

이제는, 반대로 부탁할게. 없던 일로 해 줘.

“나도, 우리 엄마처럼 널 보낼 순 없어….”

“…!!!”

털어놓은 내 말에 녀석의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녀석의 너른 가슴에 뺨을 비비며 나는 애원했다. 구차할 만큼.

“그러니까 참지 말아 줘…. 재희야, 응? 제발.”

“현아.”

“사랑, 해….”

이렇게 널 붙들기 위해서 하려던 말은 절대 아니었지만….

“머물러 줘….”

지금이 아니라면, 두 번은 오지 않을 이 순간을 위해 난 모든 것을 내려 두었다.

***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서서히 내 허리를 감싸 안는 녀석의 커다란 손의 촉감에 나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왈칵 눈물이 터졌다. 녀석의 가슴에 고개 묻고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는 거꾸로, 나를 힘주어 안는 녀석의 손끝에 온기가 서렸다.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신호로 나도 고개를 들었다. 내 머리가 푹 젖어 있었다. …녀석의 눈물로.

“아, 어떡하지….”

“왜….”

“나….”

울음을 견디다 못해 한숨을 토해 내는 재희는 마치 답답하다는 듯 내 등을 몇 번이고 매만졌다. 허리도, 엉덩이도, 어깨도. 마치 확인하듯, 열이 오른 그 뜨끈한 전신에 나 또한 느슨히 몸을 기댔다.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팠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평소완 달랐다. 알 수 있었다. 내 응석과 조름으로 달아올랐을 때와는 다르다. 저물던 해가 남기고 가던 낙조에 세상 모든 것들이 붉게 타오르듯, 녀석 그렇게 뜨거웠다. 그건 저무는 무엇이 아니었다. 붉게 물든 눈시울과 코끝. 뜨끈한 전신 모든 것들이. 다 비워 냈다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살아나 이글거렸다.

해가 넘어간 저 건너편에 아침이 돋듯, 날 절실히 원하는 녀석의 모든 행동이 내게 날것처럼 와 닿았다.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델 것처럼.

“너무, 너무 안고 싶어. 정현아….”

“…응.”

“너무, 갖고 싶은데….”

“가지면 되지.”

이제는 닦아 줄 수 있는 눈물이 녀석의 아랫도리보다 뜨거웠다. 푹 젖은 두 뺨에 난 기꺼이 입을 맞추었다. 축축했다. 뜨거웠다. 그래서 나마저 달아올랐다. 사실 녀석이 먼저 이렇게 나서지 않았다면, 내가 또 다짜고짜 녀석을 자빠뜨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코까지 붉게 달아올라서, 두 눈 가득 흠뻑 젖은 눈으로 나만을 바라보는 녀석의 그 모든 시선이 닿을 때마다 뜨겁고 벅차올랐다. 나 또한 내 전신을 녀석의 몸에 갖다 대었다. 나를 그대로 맡겼다. 짙게 깔린 신음소리에마저 어려 있는 코맹맹이 소리마저도.

“아까부터 뭐가 그리 어려워…?”

“현아….”

“안아, 제발 좀. 빨리….”

그래, …사랑스러웠다.

***

생각해 보면 늘 일방통행이었다. 뽀뽀가 키스가 되고, 애무에 이어 페팅이 되고, 삽입이 될 때까지. 늘 내가 먼저 녀석을 보채고 원했다. 나의 흥분에 녀석을 이끌었고, 나의 도발이 녀석을 손을 뻗게 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응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나처럼 지극히 초라한 몸에도 흥분해 줘서. 발기해 줘서. 그리고 넣어 줘서. 사정해 줘서….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특진비니 보상이니 뭐니, 구차한 핑계들로 점철된 결과라지만 그 시절 내 상상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거창한 미래도, 행복한 결말도 모두 사치일 뿐인 겨울이 있었다. 얼어붙고 쓸쓸해 봄이라고는 환상이고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여겨졌던 날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 모든 게 무채색으로 물들어 버린 지금. 어둠 속에서도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재희가 내 앞에 있었다.

***

유화로 널 담았던 게 미안할 정도로… 너는 이렇게 젖어 있는 데다, 투명하고 맑아서.

형언하면 오히려 빛이 바랠 것만 같은 두려움에 쉽사리 입을 열지조차 못하겠기에, 나는 얌전히 재희의 눈물을 핥는 것으로 서툰 위로를 대신했다.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그저 흐느끼던 재희는 내가 핥아 올리는 촉감에 기대어 나른한 한숨을 쉬었다.

내 몸 이곳저곳을 아플 정도로 끌어안는 악력은 약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집요해지고 거세어졌다. 옷을 찢을 것처럼 구는 재희에 밀려 뒷걸음치던 나는 무릎 뒤가 닿은 게 침대 매트리스인 줄도 모르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물론 내 뒤통수와 허리를 지탱하는 순간까지도, 재희는 내 입술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응석을 부렸다.

“안 멈춰….”

“괜찮아.”

침대에 스러져 내릴 때까지도 재희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마치 갓 태어난 강아지가 젖을 찾듯, 내 목덜미에 젖은 뺨을 문지르는 재희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나는 등을 도닥였다. 그런 나와 상반되게 엉덩이 양쪽을 잡아 쥔 재희의 손은 점점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나의 주문에 그대로 갇힌 채 멈춰 버린, 어린아이였던 네가 얼굴을 드러낸 걸까.

마치 혼이 날까 봐 눈치를 보는 것처럼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묘하게 제멋대로였다. 거기에 흥분하는 나도 답이 없다 싶었지만.

“아, 정현아….”

“괜찮아…. 응.”

안심한 듯 다가오는 입술은 거침이 없었다. 비정상적으로 뜨거웠다. 하늘을 물들이던 낙조가 네 몸 깊숙이에 떨어져 내리기라도 한 걸까. 닿는 열기가 뜨거웠다. 알몸이 아닌 네가 벌써 이렇게 뜨거운데. 내 몸에 품으면, 어쩌면 활활 타오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아오른 전신에 난 칭얼거리듯 재희의 목덜미를 감싸고 얕게 신음을 흘렸다. 뜨겁다 못해 목이 말랐다.

벌써 몇 번째일까 셀 수도 없이 입술을 부딪쳐 봐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달콤한 것처럼 내게 스며드는 녀석의 타액을 쉴 새 없이 빨아들였다. 조바심이 난 건 나뿐이 아닌 듯해 다행이었다. 재희도 이미 내 몸속에 들어온 것처럼 굴고 있었다.

손을 먼저 뻗은 건 나였다. 녀석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얼마 안 되어 재희는 알몸으로 내게 부딪쳐 왔다. 허벅지 사이로 닿는 녀석의 것은 이미 충분히 젖어 내 안으로 들어와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녀석 또한 내 바지의 헐렁한 허리춤을 쥐어 단번에 내렸다. 드러난 알몸은 늘 부끄러웠지만, 그걸 인지할 틈도 없이 닿는 열감에 나는 흐느끼기 바빴다.

“예뻐, 정말. 정말 많이….”

두서없이 내뱉는 말에 밴 코맹맹이 소리가 사랑스러웠다. 말투와는 상반되게 고환부터 쥐어 오는 뜨끈한 녀석의 손바닥에 난 신호처럼 다리를 벌렸다. 꼭, 좀 더 봐 달라는 것처럼. 예뻐해 달라는 듯. 분홍빛이 된 내 선단에 닿은 녀석이 입술 빛깔이 더욱 붉었다.

아. 못 참겠어. 온통, 시야가 붉어….

“읏…! 아, 천천히….”

아이처럼 집요하게 파고드는 체온에 눈을 감으며 직감했다. 여태까지의 관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단순히 몸과 몸이 통하는 게 전부가 아닌, 마음이 닿은 스킨십은 같은 행위임에도 확연히 다른 파동으로 다가왔다. 밀부의 결합이 아니어도, 단순히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도 그 가벼운 흥분에 나는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정말 자칫했다간 가 버릴 것처럼 아래가 다 움찔거렸다.

맘만 같아서는 어서 빨리 내 걸 핥고, 또 네 걸 넣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온몸이 뜨거워. 정말 이러다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아.

“여기, 보여 줘.”

“…아.”

“응? 제발….”

그래서 단호하게 쳐 내지 못했다. 재희의 커다란 손이 옷자락 위로 연신 내 가슴을 쓰다듬고 있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난 두 팔을 올렸다. 옷을 끌어올려 벗겨 낸 재희의 손은 공중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밉지…?”

…손끝이 닿을 때마다, 천 길 낭떠러지에 등을 떠밀리는 것 같아.

이윽고 닿은 손은 흉터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녀석에게도 익숙할, 세로로 그어진 선이 아니었다. 가슴 밑 선을 따라 내 상체를 가로로 반 잘라 버리듯 그은 새 흉터가 마치 갓 벌어진 상처인 것처럼, 녀석은 빤히 그것을 내려다볼 뿐 만지려는 시도조차 않았다. 내려다보면, 흉포하게 선 페니스는 금세라도 들어올 것처럼 꺼떡거리고 있는데도 재희는 성급하게 굴지 못했다. 내가 직접 그 손을 이끌어 흉터 위를 쓸어내리게 할 때까지.

그리고 그 손이 닿는 순간.

“아…!”

당연한 것처럼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녀석은 마치 강아지처럼 내 상처를 핥기 시작했다. 겨우 그쳤던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상하냐고, 많이 흉하냐고 물어볼 새도 없었다. 그 섬세한 혀 놀림에 모든 대답이 다 들어 있었다.

얼룩진 마음. 슬픔, 자책, 그리고 회한…. 어쩌면 벅차오르는 기쁨.

내뻗은 손을 잡아 주면서도 녀석은 핥는 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이상했다. 분명 아물었는데, 왜 이렇게 따끔거리는 것만 같지. 아니야, 단순히 이곳의 아픔이 아니다. 환부를 모르는 통증에 신음하던 나는 연신 부르던 재희의 이름을 깊은 입맞춤으로 끝마쳐야 했다.

“고마워….”

“재, 희야….”

“버텨 줘서, 정말 고마워….”

“…….”

“내가, 너를….”

공중을 수놓는 단어의 파편들. 나는 녀석의 손을 이끌어 보다 정확한 곳에 들이밀었다. 재희의 뜨거운 손바닥 아래, 녀석이 떼어 내 나에게 주었을 누군가의 심장과 폐. 이젠 귀를 갖다 대어도 시계 소리가 나지 않는 그 누군가의 심장에는 재희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가장 깊은 곳, 그 안에 네 흔적이 닿아 있다는 게. 정말 고마워.

내 말을 들은 순간. 윤기를 머금은 재희의 두 눈에 더 이상의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묘한 이채를 띠기 시작했다. 애무를 멈췄으나 굳건하게 발기해 있던 녀석의 페니스를 매만지는 내 손길을 잡아챈 재희는, 그대로 깍지를 끼고 내 위로 납작 엎드렸다. 거친 만큼, 꼭 처음인 것처럼 서툴게 움직이는 녀석에게 나는 무한히 고개를 끄덕거려야 했다.

괜찮아. 마음껏, 부디 마음껏 나를 안고 사랑해달라고.

***

여태껏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얼마나 엇갈리고, 또 몇 번을 서로 헤매었을까!

허겁지겁 걸어 나가기 바빠서. 내가 아닌 너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댄 채. 사실 어느 한순간도 이기적이지 않은 적이 없음에도, 나는. 우리는.

서로를 안는 순간조차 그래 왔었지. 가장 뜨거운 곳에 파고든 재희의 체온에 헐떡이며 나는 보챘다. 아이처럼 서툴게 움직이고, 때론 거칠어 따라가지 못할 때마저 나는 억지를 부렸다. 괜찮다고 속삭였다. 서툰 게 당연하잖아. 진심이니까. 몇 번을 그르치고, 잘못된 길을 갔다가 돌아서는 게 당연한 일이잖아.

온전히 내게는 어른스럽게만 굴려 했던 너의 민낯에 나는 환호했다. 몸을 갈라 드는 고통의 근원이 온전히 너라서. 한재희라서.

“현아, 아, 현아….”

끄트머리는 의식이 희미할 때쯤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건 기분 나쁜 잠은 아니었다. 내 온몸은 따스하다 못해 뜨거웠고, 재희의 눈 속에서 난잡하게 흔들리고 있는 난 온통 반짝이고 있었다. 물기 어린 재희가 나마저도 온통 적셔 버린 덕분이었다.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도는 내 신음은 재희라는 이름의 자모까지 뒤섞여 나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건 재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거부의 의사는 없었다. 쾌감이 임계점을 지나 고통으로 범람할 때에도 나는 그만하란 말은 않았다. 녀석도 마음껏 나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기뻤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버릇처럼 내 가슴에 귀를 대고서 허리를 쳐올리는 재희의 머리를 끌어안으려 애를 쓰는 것뿐이었다.

그 또한 의지뿐으로,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다리가 나동그라졌지만, 잠식된 쾌감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미 따라잡을 수 없이 움직이는 재희를 따라, 그 탄력 있는 배에 마찰된 내 성기에서 줄줄 흐르는 체액처럼, 내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눈물이 멎은 재희를 대신해 우는 건지도 모르지. 이제는 절정에 다다라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내 이름을 외는 재희의 얼굴엔 얼룩질 슬픔도 무엇도 없었다. 온전히 나뿐이었다. 그걸 자각하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재… 히… 재희, 야.”

“ㅅ….”

나 또한 사정의 순간이 왔다.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가르고 가장 깊숙이 제 페니스를 박은 재희가 크게 신음을 흘린 것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몸을 낮춘 재희는 입을 맞춰 왔다. 헐떡이는 숨, 서로의 혀를 맞대고 나누는 묘한 진동. 그 음성….

나는 알았다. 전신을, 그리고 의식까지 물들인 재희가 남겨진 그 신음 같은 고백을. 침대 위의 무엇이라도 좋았다. 단지 청각만이 아닌, 온 오감을 지배하는 재희의 고백에 흠뻑 젖은 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깊은 오르가슴은 나를 물밑으로 끌어내렸다. 숨이 막히지 않았다. 나는 자유로웠다.

다다른 절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

눈을 뜨고서, 난 진지하게 가위에 눌린 줄 알았다.

농담 아니고 진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했다. 거기다 얼마나 소리를 질러 댔으면 목소리도 잠겨 나오지 않았다.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 봐도 세상 편하게 잠들어 있는 재희의 그 잘생긴 얼굴이 유난히 미워 보였다.

너, 지금 사람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잠이 잘도 오지….

재희야, 재희야, 재희야. 쇳소리로 백 번은 불렀을 거다. 다행히 잠귀 하나는 밝은 녀석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내 오른 가슴에 파고들었던 고개를 들더니 싱긋 웃은 녀석은 날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정말, 온몸이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고 나서야 녀석이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그땐 나한테 감기 옮은 게 훨씬 심각했으니까.”

처음에도 이랬냐는 말에 죄인 다 된 녀석이 대답했다. 물론 폐렴 같은 병증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몸살. 근육통.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하지만 또 익숙해졌다. 내내 재희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일 년 동안 헤어져 있던 시간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는 듯 녀석 또한 날 안고 도닥였다. 덥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안겨 있다가 해가 저물었다. 덕분에 이것저것 입이 풀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해야지 생각했던 말들도 자연스럽게,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

재희는 내가 엄마의 부고를 알리지 않은 것을 서운해했다. 나는 변명했다. 두 번 다시,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슬픔이 우리 만남의 근원이 되질 않길 바랐다고. 다행히 녀석은 내 변명에 납득해 주었다.

“가끔 엄마가 나 대신 하늘나라 간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

그 지난 이야기를 조근거릴 동안, 녀석은 내 어깨에 턱을 괸 채로 작게 끄덕일 뿐이었다.

“마지막까지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진작 자기 심장 줬어야 한다고….”

내 가슴을 어루만져 준 덕분인지 다행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냥, 뭔가 개운했다. 등 뒤에서 날 껴안은 녀석의 변함없는 체온이, 규칙적인 숨결이 나를 충분히 달래 주었기에.

“유언치고는, 너무 심했지.”

“그러게.”

엄마에게는 내가 심장을 이식받은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자기가 아픈 이유로 날 돌보지 못했다며 자책하는 모습을 보기는 싫었으니까.

그러나 오히려 다행인 점도 있었다. 이식을 받지 않고도 이렇게 건강해졌다는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괴감으로 얼룩진 엄마에게, 눈을 감는 순간에는 그나마 안도할 수 있도록 도운 게 유일한 내 효도였다.

사실은, 장례식장에 고작 하루 얼굴을 내비친 뒤 재입원하게 되긴 했지만.

“그냥, 슬픈 일로 널 부르고 싶지 않았어. 그렇게 다시 만나고 싶진 않아서…. 다시 만나면, 꼭 웃고 싶었거든.”

“…고마워.”

“다음에, 나랑 같이 엄마 보러 가.”

대답 대신 재희는 내 손에 깍지를 끼며 마주 잡았다.

***

엄마의 죽음은 내게 많은 걸 깨닫게 했다. 누군가의 부재. 여백.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그 암담함과 절망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부재에 대한 슬픔은 시간이 갈수록 두터워지고 고착되었다.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성벽이 되었다. 예고 없이 치미는 슬픔은 빠질 틈 없이 나를 가두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가끔 멀쩡히 살다가도 툭 눈물이 터져 나오곤 했다. 어김없이 바닥을 치는 기분에 엄마 냄새가 남은 옷자락에 고개를 묻고는 펑펑 울고 나서야, 인정할 수 있었다.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그러니 재희 너마저, 두 번, 놓칠 수는 없다고.

만약에 내가 그대로 죽었다면 재희는 지금의 나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자신을 채찍질했을 것이다. 아픈 날 낳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눈을 감은 엄마처럼, 재희마저 그렇게 살게 놔둘 순 없었다. 그게 날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었다.

“잠을 한동안 못 잤었어. 눈을 감으면 계속, …그때의 네 모습만 보여서.”

그리고 예상대로, 아니 내 예상보다 더 힘들어하던 녀석에게.

“그런데 너 오고서부터, 신기하게 깊게 자.”

내가 살아남는 게 무엇보다 증명이고, 위로가 될 것이다. 살아 있다는 심장 고동이, 온기만이 그 해답이 되겠지. 녀석의 말대로 생존보다 더 위대한 가치는 없다는 걸 나도 알게 되었으니까.

깍지 낀 손을 들어 재희의 손등에 나는 입을 맞추었다. 예민한 피부 끄트머리는 여전히 나보다 높은 체온으로 삶을 견디고 있었다. 대답처럼 내 허리를 감싸는 녀석의 손도 마찬가지로 뜨겁고 컸다. 그 안에서 나는 부끄러움도 없이 나른해졌다.

지키겠다는 말보다 더 가까운 평온. 어느 무엇도 누구도 확답할 수 없는 내일에 맞서기보다, 그저 현재에 안주하고, 지금을 만끽하고 싶은 게으름, 집채만 한 파도가 우릴 삼키려 아가리를 벌려 드는 그 앞에서도 과감히 눈을 감을 만큼.

대책 없는 낙천가가 되어 버린 건 대체 언제부터일까!

다 아물었다는 것처럼 말하는 네 속도, 그리고 나도. 사실은 아물지 못한 상처가 남았겠지만. 차츰 나아질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다. 함께라면.

“그래도 적당할 땐 좀 깨어나 줘.”

“…미안.”

농담 삼아 던진 말에, 마치 강아지가 어리광을 부리듯 재희는 내 등에 머리칼을 비볐다. 그 감촉이 간지러워 나는 피식 웃었다. 등도 가슴도, 간질간질했다. 상처에 피가 굳고, 딱지가 얹혀 묘하게 나으려는 때 드는 간지러움마냥. 나는 그 부분이 몹시 긁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짊어진 행복의 무게감, 그 곱절로 드리워진 죄책감 앞에 나는 솔직히 항변했다.

이렇게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분명 다 괜찮을 것이라고.

***

“괜찮다니까. 진짜로.”

누가 보면 정말 비웃을 거다. 씻고 나온 녀석이 심각한 얼굴로 주삿바늘을 들이댔을 때까지만 해도, 난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큰 대학병원의 치프에, 전도유망한 흉부외과의. 그뿐이 아니다. 십 년 넘게 나한테 주사를 놓고 피를 뽑고 링거를 꽂던 녀석이 고백한 말을 누가 믿으랴. …나에게 주삿바늘을 꽂지 못하겠다니.

몸살을 크게 앓고 난 뒤, 링거 한 대 맞으면 괜찮아질 것 같아 물어본 말에 사색이 된 녀석의 대답에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수술 실패의 트라우마라고 생각하면 한편으로 이해도 갔다. 생각해 보니 다시 만났던 그 날에도 간호사가 채혈하고 링거를 꽂았지.

예전 같았으면 다른 사람이 한다는 것도 제가 하겠다며 나섰을 텐데. 안타깝기도 하고, 그 기억에 녀석이 발목 잡혀 있는 꼴을 더는 보기 싫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졸랐다. …그래도 네가 놔 달라고.

“멍들어도 괜찮다니까. 응?”

“…하아.”

연신 한숨이다. 새로 왔다는 간호사가 바늘을 꽂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안쓰러울 정도로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나는 속이 상했다. 이렇게 벌벌 떠는 줄 알았다면 하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싶으면서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대로 놔둘 순 없지.

마음을 먹고 녀석의 손등에 내 손을 겹쳤다. 흠칫 놀란 재희의 손을 힘주어 이끌었다. 이어서 바늘이 내 손을 파고들도록.

“자…. 들어갔다.”

새어 나오는 피에 당사자인 나보다 녀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윽고 정신을 차리더니 바늘을 유연하게 돌렸다. 파고드는 감촉은 분명 유쾌하지 못했지만 나는 녀석의 표정을 살피느라 잠시 통증도 잊었다.

“…미안, 아프지.”

“에이, 이 정돈 아무렇지도 않아.”

뭐, 피는 좀 났지만. 내 혈관이 타고난 게 약한 걸 어떡해. 아예 혈관을 못 찾고 헤매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야 발군이다.

하지만 녀석은 꼭 열 번은 실패한 것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달래는 말에도 영 표정이 풀리지 않는다. 테이핑으로 고정하는 와중에도 작게 한숨을 푹 쉬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눈도 못 마주치는 얼굴에 위로를 건넨 건 그 때문이었다.

“피 철철 나고 양손 모두 구멍 나도 좋으니까, 남들 말고 네가 해 줘.”

“…….”

“남들이 하는 게 더 싫어.”

답례는 늘 곱절이라니까. 뺨에 한 뽀뽀가 왜 딥 키스가 되는 건데. 깊어지는 입맞춤에 나는 몰래 웃었다.

그래, 이 정도 보상이면 피 좀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각하며.

***

그렇게, 재희의 극진한 간호와 채혈 실습의 덕분으로 난 기운을 차렸다. 다행이었다. 피골이 상접해서 상행했다면 다들 난리가 났을 테니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도 못 하고….

물론 몸과 다르게 마음은 무거웠다. 내일 아침, 버스를 타고 난 서울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일부러 퇴근길 병원까지 녀석을 마중 나갔다. 녀석은 놀라는 한편으로 왜 나왔냐고 성질을 냈지만, 나는 집에서는 볼 수 없어 한동안 그리웠던 하얀 가운의 녀석을 눈에 담았다. 예전처럼 상냥하게 굴지는 않지만, 음료수를 건네는 환자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재희를 곁에서 보며, 막연히 나는 내가 빚진 책무를 기억해 냈다.

재희 또한 묘하게 기운이 없었다. 나와 별다르지 않은 기분이겠지.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씻고 나서부터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마치 불문율처럼 내일에 대한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지만, 가는 시간은 잡을 수 없었다.

평소처럼 나란히 누웠던 날 재희가 돌려 눕히기 전까지도 나는, 내가 과도히 외로워하는 걸까 고민했었다. 코도 맞부딪힐 정도로 비좁은 거리에서 날 빤히 쳐다보던 녀석이, 이윽고 숨이 막힐 정도로 힘주어 나를 껴안고 나서야 안도했다. 긴말이 필요치 않았다. 손가락에 휘감기는 머리칼을 매만지며, 나는 품에 녀석을 안은 채로 입을 열었다.

“재희야.”

“응.”

“너, 진짜 의사 관둘 거야?”

“…뭐, 면허증은 있으니까 의원으로 어디 취직할 순 있을 거야.”

핀트가 잘못되었다. 마치 애인의 미래를 걱정하는 질문인 줄 안 모양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수입 걱정을 했다고. 페이 닥터의 봉급 이야기를 꺼낸 녀석이 더는 멀리 가지 않도록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흉부외과 말이야.”

“왜?”

“왜라니. 당연히….”

“너도 나 흉부외과 관두라고 난리였잖아.”

어, 그래. 사실 그건 맞다. 그렇게 네가 나오면 내가 할 말이 없긴 한데….

“얼마 전에도 봤잖아, 환자 죽인 거. 너까지 기다리게 하고.”

“그거야….”

“널 외롭게 할 거야. 그건, 이제 내가 싫어.”

어떻게, 네가 왔는데. 네가 우선이야. 덧붙이는 재희의 예쁜 말들에 솔직히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랬다. 레지던트 시절 동안 그 고생 하면서 구르는 걸 보면 내가 다 속이 상했으니까. 지금처럼 작은 시골에서 소소하게 진료를 하면서 살아가는 삶도 괜찮지 않을까. 1초 정도는 혹했다. 인정한다. 하지만.

“아쉽다.”

“…뭐가.”

“난, 네가 흉부외과 있었을 때가 멋있었거든.”

곁에 머물면 머물수록, 왠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희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술실의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며 너를 기다렸던 밤. 그날의 추억이 손을 대면 진물이 불쑥 오를 것처럼 아직도 생생하게 달아올랐다. 울부짖는 유가족들 앞에서 진심으로 그 슬픔을 버티다 결국에는 내 앞에서 무너져 내리던 너를 보면서, 나는 괴로워했지만.

동시에 안다. 그 괴로움의 곱절로 보람을 느껴 온 시간들을. 짙은 그림자만큼 충분히 빛내왔던 모든 흔적을 애석하게도 나는 다 들어 버렸다. 이 교수님도, 예나 씨도, 석훈 씨도. 모두가 입을 모아 내게 말했다.

수많은 생명을 살리려 애써 온 네 시간들이, 비록 내겐 고통스럽고 안쓰럽다고 한들 그저 잊으라고 하는 게 옳은 일일까.

어쩌면 배가 부른 걸지도 몰라. 조금씩 터득한 행복에 겨워 욕심을 부리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재희야.

“나야 쥐뿔 능력 없지만, 묘하게 자랑스러웠나 봐. 사람을 살리는 일이잖아.”

“죽이기도 하잖아.”

“그건 죽이는 게 아니지. 살리기 위한 과정이지.”

“…널 살리지 못했잖아.”

“재희야.”

“난 이제, 자격이 없어.”

녀석의 대답은 아무렇지 않게 들어 넘기기엔 너무 아파서, 듣는 것만으로도 조금 인상이 찌푸려졌다. 오히려 묵묵히,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말하는 녀석의 곪은 상처를 자칫하면 잊고 살 뻔했다.

그래, 다른 무엇보다, 이대로 널 패배자로 남겨둘 순 없지.

“야, 나 멀쩡히 살아 있거든?”

“정현아.”

“네가 나 때문에 포기한다는 게 더 불편하고 속상해. 물론 네 인생이니까 네가 결정하는 게 맞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 여기서 이렇게 일하는 것도 충분히 좋고 그런데, 그거야 나아중에 나랑 같이 하면 되잖아.”

“…현아.”

“지금, 지금 당장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충분히 있으니까.”

그래, 어떻게 널 이대로 놔두겠어. 아무리 행복한 나날이라고 해도, 넌 이걸 평생 안고 살 텐데.

네가 날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여 살아가는 건 절대로 싫어.

“나는 아니더라도 음. 나 같은…. 그래.”

그것만이 의사로서의 너를, 온전히 속죄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의사와 환자로 남기엔, 터무니없이 사랑했기 때문이니까. 실패와 좌절은 그걸로 됐어.

“수많은 정현이들을, 네가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의사로서의 너는, …제자리에 돌려주어야지.

***

나의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재희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난 차분히 녀석을 기다렸다. 깊게 한숨을 내쉰 녀석이 내 가슴팍으로 파고들어선, 말없이 나를 힘주어 껴안았다. 나 역시 품에 안긴 재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지금 결정하라는 건 아냐. 시간은 충분히 있고.”

“이 교수님이, 너한테 시켰어?”

“그렇기는 한데 그냥 나도….”

“응. 알겠어.”

흠칫 경직된 내 허리를 꽉 끌어안은 재희는 좀 더 깊숙이 안겨 내 가슴에 제 귀를 들이댔다.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소리를 듣는 재희의 버릇을 안다. 안정되고 싶고, 또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을.

“…고마워.”

“응….”

“천천히 생각해 볼게. …너 기다리면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게 아닐까?

임무를 다한 나는 안도하다 못해 조금 졸음이 왔다. 이제는 오히려 날 다독이는 재희의 따스하고 큰 손에 나는 긴장을 풀고 눈을 깜박였다. 가슴팍에 안긴 채 날 올려다보는 재희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

“잘 다녀와.”

“으응.”

“연락, 해야 해?”

정말 말세다, 한재희가 내게 연락 이야기를 하다니.

실로 감동이었다. 울컥한 나는 잠도 다 물리칠 수 있었다. 지난밤의 여파와 내일 올라갈 것을 생각하자니 차마 다시 안아 달란 말은 못했지만, 그 아쉬움을 달래며 그날 밤 새벽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는 내내 키스했다.

사실, 배꼽 근처를 눌러 대는 녀석의 것을 손으로 달래다 제지당했다. 얌전히 안겨 있던 녀석이 도끼눈을 부릅뜨며 내 손을 막았다. 응, 알았어. 그만 나댈게….

***

집. 그리고 병원은 여태껏 내게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의사인 아버지와 친구가 머물던 곳. 허약한 몸이 온전히 머물 수 있는 곳.

그 밖은 내게 그저 위험천만하기만 했다. 집에서 멀어질수록 난 안전을 담보 받지 못했고, 서른 해가 다 되도록 난 그 이유들을 빌미로 늘 같은 곳에 안주하며 머물렀다. 내가 그래 주기를 바라는 타인의 의지와 바람이 무형의 벽이 되어 날 가로막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나의 운명이 허락한 공간은 그 정도의 크기였다.

하지만 세상이 뒤집혀 나는 살아남았고, 그 벽을 넘었다. 익숙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다른 낯선 곳. 낮은 천장. 보다 좁은 공간. 코끝을 간질이는 공기의 체취마저 다른 빛깔을 띠는 이곳에서 어째서. 난생 처음 평온을 느끼게 되는 걸까.

내일을 확신치 못하고 그저 오늘이 전부인 삶은 여전한데도. 나는 품에 안긴 재희의 규칙적인 숨결에 희미하게나마 그 이유를 깨닫는다.

뒤집힌 건 세상이 아니라 우리였다는 것을.

스미는 벅찬 감동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심장 어딘가를 간질이는 짓궂은 온기를 되뇐다.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한다. 여기가, 내가 돌아와야 할 모든 그곳임을. 내가 지켜야 하고, 네가 지켜 줄 우리가 시작되고, 또 계속되어야 할….

나의 첫 여행이자 방황의 종식.

그 마지막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소기의 성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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