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씨가 그랬었다.
꼭 벽을 보는 느낌이었다고. 아무리 울고불고, 절실히 말해도 왜 우는 건지, 왜 고백하는 건지. 저렇게 애달아 하는 건지…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남 일 보듯 어쩔 줄 몰라 했었다고.
하지만 나는 오만했었다.
재희를 좋아했다는 그녀의 마음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내심, 나는 아니겠지. 나에게는 안 그러겠지 하며 한편으로 기대했었다. 녀석과 나는, 남이라는 단어로 칭하기엔 너무나도 가까웠고 절실했으니까. 사랑이 아닐 적에도, 마치 제 몸처럼 나를 돌보는 녀석에게 기생해 왔던 나는, 막연히 그토록 믿어 왔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 모래 위의 누각과도 같이 근거 없이 버텨 왔던 자기 위안은 보란 듯이 산산조각이 나, 연한 살점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제 와 뉘우친다 해도 소용없었다. 예기치 못한 재희의 말에 나는 오히려 그녀보다 더 처참하게 추락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예나 씨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니. 아니다. 이야기로 들은 것과 달랐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한 것 같다.
난 아직 울지도 않았고, 그저 녀석에게 사과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거절당했다. 게다가 녀석은 어쩔 줄 몰라 하지도 않았다. 정확하고 확고하게 내게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심지어 ‘믿는다’는 말과 함께.
“왜….”
어떡하죠, 예나 씨. 난… 왜 눈물도 나지 않을까요?
내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고, 재희가 그 곁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더 그래 보이는 걸까.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재희의 눈빛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분별없이 또렷이 들려온 재희의 말을 수십 번 곱씹으며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부담스러웠어?”
“그런 적 없어.”
“되게, 싫었어? 더러웠어?”
“…….”
“재희야. 우리, 꿈 아니었지. 사실 나, 정말 꿈인 줄 알았는데….”
몸을 일으킨 나는 더듬더듬 내 환자복 앞섶을 풀어헤쳤다. 덜덜 떨리는 손 때문에 단추를 제대로 잡기도 어려웠다. 재희는 그런 날 지켜볼 뿐이었다. 낯빛 하나 바뀌지 않은 재희의 시선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마치 색이 바랜 빚 문서를 내밀 듯 나는 옷을 풀어헤치고 마른 가슴을 내보였다. 너도 기억하지 않느냐고. 그때의 네가, 날 안아 주고 몰아치던 너 또한 환상이 아닌 실재였지 않냐고.
“여기, 여기. 키스 마크…. 남았잖아. 막, 어제까지만 해도 부풀어서 아팠어.”
“정현아.”
“미안해. 네가, 싫은지도 모르고 난…. 근데 난 좋았거든…. 난, 네가 그럴 줄도 모르고.”
질척거리는 걸 알면서도 나는, 변명인 척 떼를 쓰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너의 마지막 모습은 이러지 않았잖아. 사랑해 줬잖아. 고백한 건 나뿐이었지만, 그만큼 안아 줬잖아. 이제 와 생각하면 차라리 꿈이었다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따스했잖아. 그저 환상이었다면, 그저 나 혼자 음란한 망상을 한 게 전부였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었잖아.
그저 나 혼자만의 망상이라 하기엔, 네게도 조금의 책임은 있는 게 아니었냐고.
“…재희야.”
“오해하지 마.”
내 어설픈 원망을 가볍게 눌러 삼킨 재희는, 곁으로 다가와 내가 힘겹게 풀어헤쳤던 앞섶을 하나둘씩 여몄다. 난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는 재희의 손등을 쥐었다. 그때까지도 손이 후들거렸다. 재희의 체온은 여전히 따스했다. 역으로 오한이 느껴질 만큼. 여지를 두지 않는, 선을 긋는 배려.
“네가 날 좋아해도, 더럽다거나 부담스럽다거나 그런 생각 하지 않아.”
“…그럼, 왜….”
“그게 네 몸을 상하게 하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 말을 돌이키는 의도는 아닌 단순한 위로에 그친 재희의 말에 마음을 놓을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빠가, 뭐라 그랬어? 너, 파견 보낸 거지. 교수님이랑 얘기해서… 응?”
“말했잖아. 그 사람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럼, 그럼 왜…. 왜, 재희야….”
“한정현.”
얕은 한숨에는, 짜증이 다소 어려 있었다.
“넌. 내가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그건 내가 여태 너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무얼 위해서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고 있냐고. 그 고대했던 질문의 답이 오히려 두려운 건 왜였을까.
“이렇게, 굳이 힘든 이 과를 선택해서 휴일도 없이 밤낮 구르면서. 심지어 소개팅을 나갔다가도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올 만큼, 사람을 살리는 만큼 또 죽여 가면서.”
“…….”
“밥 한 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한숨 편히 자지도 못하고 내내 병원에 썩어 가면서. 그래… 네 말대로, 아픈데도 편히 쉬지도 못하면서도.”
“…….”
“너는,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
겨우, 고개를 들고 나서야 실감했다.
멀쩡해진 것처럼 보여도 살이 많이 내린 녀석의 두 뺨이, 많이 지친 듯 낮게 깔린 목소리가, 까슬까슬한 입술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편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책망받아야 할 사람은 녀석이 아닌 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날 위해서.”
“그래. 잘 알고 있네.”
이 대답이기를 바라는 동시에 아니길 바랄 만큼, 알고 있다.
내가 원한 적 없음에도 너 스스로 짊어진 삶의 무게가 얼마나 버거웠는지. 네 삶을 좀먹고 있는지.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내려놓으라고 말할 용기가 없는 내 치졸함을 알고 있기에…. 그러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아니길 바라왔었다.
“하지만 그건 네 마음이 아니고, 몸을 위해서야.”
가슴 위에 머문 재희의 손길에, 약동하는 내 가슴은 마법처럼 고요해졌다. 마치 옷자락 아래의 흉터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섬세하게 매만지는 재희의 손동작에 나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눈 하나 깜박일 새 없이 날 지그시 내려다보는 재희는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째깍거리는 내 심장 언저리를 연신 어루만졌다.
그건 단순히 내 망상 속에서 흥분을 유도하는 애무 따위의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계는 오래가지 못할 거야.”
“……!”
“너도 짐작했겠지만.”
그래. 녀석의 원대로. 메스로 가르고 톱으로 흉골을 자를 부위를 예단하는 듯한 손길에 나는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이명처럼 울리던 째깍 소리는 더욱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귓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자동으로 개폐되어 피를 토하고 역류를 막아 내는 절박한 움직임이 마치 내 의지로 되는 것처럼 작게 주먹을 쥐어야 했다. 긴장에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본 재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
“내년, 혹은 내후년이면 네가 치환술을 받은 지 15년…. 하지만 그렇게 치면 시간이 모자라. 그러니까 넌 최대한 버텨 줘야 해. 버텨 주기만 하면 돼. 적어도 5년. 아무리 빨라도, 3년.”
“…무슨….”
“내가 널, 직접 집도할 수 있을 때까지.”
그제야 나는 알아챘다. 재희가 소중히 여긴다는 ‘마음이 아닌 몸’의 의미를.
***
우스갯소리로만 여겼었다. 날 위해 흉부외과를 선택했다는 것도. 그 누구보다 앞서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누군가의 말들에도, 웃으며 넘겼었다.
왜냐면 재희가 이처럼 내게, 제 뜻을 표한 건 여태껏 없었으니까. 지금이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피해 왔었다. 나로선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부담으로 되돌아올 것을 알기에. 일부러 눈을 가리고 도망쳤었다.
하지만 이제, 퇴로는 막혀 버렸다.
“나 역시도 너와 살 부대끼는 거 나쁘지 않아. 그래…. 나도 정상인 놈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번엔 너무 심했어. 너도, 그리고 나도 최우선시해야 할 것은 네 몸이야, 네가 버텨 줘야 해. 한정현.”
“…….”
“그러니까 정신 차려. 원한다면 날 쓰레기로 생각해도 좋아. 네 몸만 따먹고 버리는 개새끼로 생각하는 게 도움이 된다면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다만….”
마지막 선고를 내뱉기 전, 작은 한숨을 쉰 재희는 연민의 눈빛마저도 지웠다.
“그깟 마음 때문에, 여태껏 지켜 온 모든 걸 망가뜨리려 하지 마.”
“…그깟, 마음…이라고?”
하지만 나의 항변은 여전히 나약했고, 감정에만 호소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만큼 재희의 진심은 단호했고, 애초에 나의 의견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평소엔 땀도 거의 흘리지 않는 내 관자놀이를 가로지르는 땀을 살며시 닦아 내는 그 엄지손가락은, 여태껏 내가 느껴 온 재희의 감촉과 다를 것이 없음에도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몸서리를 쳤다.
이 모든 배려에 담긴 네 목적을 깨닫고 나니….
“우리 스물아홉이야. 너랑 25년을 함께 살았지. 그리고… 더 오랜 시간을 살 거야.”
여태껏 그 감촉 하나하나가 날 살게 했었는데….
“오랜 시간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 거야. 살게 할 거야. 너 안 그러고도 평생 살았고, 잠깐 눈이 돌았던 것뿐이야. 네가 건강해지면, 그 어떤 삽질을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가 널 그렇게 만들….”
“넌, 나도….”
이제는 거꾸로 뒤집혀 한 걸음씩 날 나락으로 빠트리고 있구나….
“…나도 믿지 못하는구나.”
재희는 내 물음은 예상치 못한 듯 대답을 쉬이 내뱉지 못했다.
뺨에 닿은 재희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한 눈물이 미리 재희의 대답을 눈치챈 듯싶었다. 숨을 들이마시는 만큼 산소만큼의 물기가 서서히 폐부로 들이찼다. 무언無言으로 머뭇거리는 재희의 대답이, 여태껏 함께하면서도 턱없는 미래를 기대한 내 어리석음을 비웃듯, 푹 잠겨 버린 머리는 이미 사고라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난, 실패했다. 온전히….
“그래. 난, 널 믿은 적 없어.”
“…….”
“하지만, 믿지 못한 적도 없어.”
“…….”
“넌 그 기준 밖의 사람이니까.”
내게 다가와 흐르는 눈물을 닦는 손짓은, 내가 열이 날 때 땀을 닦아 주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따스했다.
“네가 정말, 네 말대로 날 ‘사랑’…한다면 날 도와줘야지, 정현아.”
그건 진실로, 터무니없이 잔인한 겁박이었다. 재희는 나의 진심을 시험함과 동시에 한 손에는 내 생명을 인질로 쥐고 있었다. 그의 안경 너머의 눈은 무너져 내리는 내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차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성이 무너지고, 녀석이 원하는 모습을 갖추길 바라는 것처럼.
때문에 나는. 재희의 그 말을 필두로 모든 변명을, 항변을 잃어버린 채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목숨을 위해 삶을 던졌다는 그 녀석 앞에서… ‘그깟’ 쓸데없는 마음 때문에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어쭙잖은 마음으로 모든 걸 무너뜨리지 마. 얼마 안 남았어.”
“…….”
“네 맘 정리하고, 몸만 생각해. 몸을 지켜. 그게 날 위하는 일이야.”
“…….”
“두 번 다시, ‘이딴 일’이 생기지 않도록….”
넌, 나랑 잔 걸 후회하니….
이불을 올려 덮는 손길은, 마치 더 이상의 어떤 말도 용서하지 않는다는 듯 단호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된 나는, 미처 고백도 하지 못한 채 받아든 이별 선고의 자음과 모음을 따로 분리해 주워 든 채로 멍하니 앉아 그 지나친 배려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통스러웠다. 어딘가가 아팠다. 하지만 그 고통은 무척이나 추상적이어서, 느껴지기만 할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어디가 아프다’고 녀석에게 미처 말할 수도 없었다.
다만, 시트를 쥐고, 그 안을 땀으로 범벅하다 못해 힘겹게 내뱉은 마지막 말은, 위태롭게나마 재희의 목덜미에 닿았을까….
“재희야.”
“…….”
“나 한 번만 안아 주면, 안돼?”
차분한 걸음으로 병실 밖으로 나서는 뒷모습이 내 부탁에 대한 재희의 대답이었다.
재희가 잠깐 머물고 지나간 흔적이 정말 꿈만 같아서, 난 링거를 놓으러 온 수간호사가 바늘을 찌르기 전까지도 하염없이, 마른 눈으로 가만히, 채 시작도 하지 못했던 내 고백의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마치 공기의 흐름을 좇듯이. 너를….
***
이틀을 더 앓고 나서야, 나는 겨우 예전의 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음의 고통이 몸의 병증으로 옮아 간 걸까. 난데없이 치솟는 열에 의료진들은 발칵 뒤집혔다. 변명을 하려고 해도 의식을 놓은 나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정신을 차린 것은 이틀 뒤, 이미 재희는 파견을 떠난 뒤였다. 당연하게도 눈을 떴을 때 나는 온전히 혼자였다.
“휴가 간 셈 칠 거예요. 요새 재희 선배 워낙 힘들어해서.”
“그런 티 안 내는 사람인데, 인간미가 난다고 해야 할까요.”
기도 삽관 신세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나는 진정제의 늪에서 벗어났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목소리로 작게나마 대답을 하며 의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재희의 빈자리 대신 나를 예의주시하는 재희의 동료 모두는, 친절하게도 녀석의 소식을 알리며 나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원치 않은 배려들이었지만 나는 저어할 힘이 없었다.
녀석은 줄곧 아니라곤 했지만, 나의 예측대로. 갑작스럽게 교수의 지시로 파견을 발령 받은 재희의 사정을 다들 자기 짐작대로 해석해 맥락을 만들어 내게 들려주었다. 최근 아팠기도 하고, 컨디션도 채 돌아오지 못한 게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파견을 나가 여유롭게 논문도 준비하면서 임상도 쉬엄쉬엄하게 되었다며, 재희로서는 뒤늦은 휴가나 다름없을 거라고들 말했다.
물론, 날 위로하려는 그들의 의도와 달리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게 지고 있던 빚 하나를 깨닫고 말았다.
그게 정말 네게는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모든 감정을 쏟아내 버렸기 때문일까. 눈물도 웃음도 어느 것도 하나 없이 바짝 말라 버린 것처럼. 나는 흐르는 시간 앞에서 초연하게 버텼다. 스스로 연민하거나 떠난 재희를, 혹은 아빠와 교수님을 원망하기에는 이미 어떤 에너지도 남지 않아서, 그저 호흡하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바닥이었다. 당연히 퇴원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입원한 내내 일상은 지루할 정도로 평탄했다. 손발이 부어서 휴대폰을 만지기조차 힘들었고, 발등 발목까지도 양쪽 다 고스란히 피투성이가 되었다. 수간호사와 의사들까지 총동원되어 내게 면목 없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고 익숙한 녀석의 입버릇을 기억해 내며 스스로를 괴롭혀 댔다.
‘따끔, 한다….’
정말 따끔했다. 내 덕분에 곤란한 듯 구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머무는 어느 공간에서나 난 제2의 재희, 3의 재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쳤다. 때문에 난 되도록 아무런 생각도 않고 그저 얌전히 말 잘 듣는 환자가 되었다.
어서 빨리, 혼자 있고 싶다. 어느 누구도 더는 내게 미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괴롭히고 싶지 않아.
녀석과 마지막으로 마주하고도 한 달은 훌쩍 지난 뒤, 나는 퇴원 가능한 수치로 몸을 회복시켰다. 오랜만에 맞이한 바깥바람에 몸은 긴장했지만, 이미 봄이 완연해져 있어 더는 춥지 않았다. 뿌옇게 물든 봄빛 하늘 아래 나만이 혼자 겨울을 기억하고 있었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두어 걸음 걷다가, 망설이는 날 눈치챈 택시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흐드러진 봄볕마저도, 그 모든 것이.
5분 남짓의 귀갓길을 마치고 나는 겨우 집에 도착했다.
모든 것이 오랜만이었지만 한편으로 익숙했다.
현관 앞에 쌓여 버린 신문들이 그동안 지난 시간을 알려 주듯 빼곡했다. 손등이 부어서 뻣뻣했지만 겨우 뭉텅이를 쥔 채 나는 집 안에 들어섰다. 숨이 갑갑한 마스크를 벗은 나는 공기 청정기부터 틀고 그것을 거실 탁자 위에 내려 두었다. 그리고 버릇처럼 바로 옷을 벗고 화장실로 향했다.
간단히 씻고 나온 나는 늘 입어 내 체취가 가득한 파자마를 입고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내 몸에 맞춘 듯 푹 꺼진 소파에 몸을 뉘이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슴 속 위태롭다는 기계 소리만이 시끄러운 이 고요는, 지독스레 익숙한 것이었다. 권태로울 정도로.
그래, 녀석의 말대로였다.
스물아홉이 되도록, 나는 이 고독에 참으로 익숙해져 있었다. 굳이 입원이 아니라 재희의 속옷을 가져다주고 돌아온 길에서. 혹은 녀석이 당직이라 집을 비운 동안, 한낮이 지나서야 일어나서 마주하던 그 텅 빈 거실. 지독히도 넓은 집.
일부러 휴대폰은 만지고 있지 않았다. 우발적으로나마 녀석에게 연락을 해 버릴까 봐. 전화할까 봐. 하지만 모텔에 쳐들어간 것과 스케일이 다르다. 강원도라는 거리도 문제였지만, 만약 또 사고를 쳐 버린다면 녀석은 이번엔 국내가 아닌 해외로 떠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애써 눌러 참았다.
평소처럼만 하면 된다. 녀석의 말대로, 스물 몇 해를 그렇게 살아왔었다. 미쳐 버린 것은 고작해야 지난 몇 달뿐이다. 엉망으로 저질러 버린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여겨 주겠다는 녀석의 호의에 기대자며 나 자신을 달랬지만, 권태롭도록 친숙한 외로움이 그것을 방해했다. 나만 멀쩡해지면, 모든 게 다 없었던 일로 돌아가는데. 그 쪽팔릴 정도로 오만했던 고백도, 없어진 일이 되어 버릴 텐데…. 여전히 그 지리멸렬한 기억을 붙들고 있는 날,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똑같잖아. 나 혼자 녀석을 좋아하고, 녀석은 일하느라 바쁘고. 죽지 못해 살아가고, 살아가느라 버티는 게 최선인 하루하루에.
게다가 나는, 그토록 원했었는데, …너와 이별하기를. 그런데 왜….
***
어리석었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단 한 번 안아 달라는 부탁마저 거절한 채 떠난 녀석이 오히려 그전보다 그리워져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참지 못하고 둘러 본 휴대폰 속에서마저 녀석의 사진 한 장 존재하지 않아 나는 급히 녀석의 서재로 들어갔다. 꽂혀 있는 졸업 앨범은 꺼내자마자 기침이 날 정도로 먼지가 부옇게 어려 있었다.
“…있다.”
녀석의 졸업 사진을 먼저 찾았다. 그리고 그 위에, 내 사진이 나란히 있었다.
안경을 끼지 않아 그런지, 조금은 젖살이 있는 것 같은 녀석의 얼굴에 나는 내 사정도 잊고 살포시 웃었다. 잘생기긴 잘생겼어. 단정한 교복에 맨 타이는 늘 내가 매어 주고는 했었다. 다 잘할 것 같으면서도 묘한 구석에서 어린애 같은 부분이 있었으니까.
지난 세월이 몇 년인데, 나는 그 졸업 사진 속 재희에게 넋이 나가서 하염없이 그 사진을 쓸고 매만졌다. 꼭 정말 만져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란히 놓인 이름. 출석 번호 순대로 재희 곁에 나란히 붙어 있는 내 사진에 한참이나 시선이 머물렀다. 사실 이렇게 펼쳐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사진을 찍기 싫어하는 만큼, 억지로 찍은 사진을 보기 싫어했던 탓에.
“…딱 봐도 환자네.”
싱긋 웃고 있는 녀석의 사진과는 별개로 딱딱히 굳은 표정에는 사진 찍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주변의 녀석들과 달리 딱 봐도 파리한 안색에 눈만 휘둥그레 크고, 그 밑엔 다크 서클까지. 게다가 녀석의 옆에 붙어 있으니 더욱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새삼 좋았다. 다른 녀석들은 다 보이지 않는다 치고, 나란히 붙은 졸업 사진이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재희와 떨어진 뒤 처음으로 가슴 언저리에 닿는 묵묵한 위로를 받았다.
어쩔 수 없다. 위로가 되는 건 늘 너뿐인 걸.
앨범을 자를까 하다가 내 것도 아니라서 나는 망설였다. 대신 나는 내 방에서 휴대폰을 가지고 내려왔다. 운동한답시고 깝치던 때에는 두어 번도 오르락내리락했는데, 한 번 오르는 것에도 숨이 차 나는 헉헉거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물론 흔들리는 손 때문에 몇 번을 찍고, 곁의 내 사진은 보이지 않게 잘라 낸 이미지 파일을 저장한 뒤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앨범을 꽂아 두고 녀석의 서재를 나섰다. 꼭 범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두근거리던 가슴은, 갑자기 울린 전화벨에 정말 자칫 잘못하면 멎어 버릴 뻔했다. 정말 깜짝 놀랐다.
“예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네. 놀라셨죠, 죄송해요. 걱정하셨죠. 네…. 아, 맞아요. 네. 파견 갔어요…. 네. 천천히 오셔도 돼요. 집에 먹을 게 여전히 많이 남아 있어서…. 네. 아니에요.”
이런, 집에 들러 주시는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아마도 내 소식을 듣고 그간 일을 쉬고 계셨겠지.
난 러그 위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은 채 우편물을 정리하며 아주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아주머니는 내 안부를 물으며 무척이나 걱정했다는 말과 함께, 한 달이 넘도록 집이 비어 당신의 일거리가 없어 다른 일과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며 내게 미안해했다. 나는 물론 하나도 거리끼지 않았다. 천천히 돌아오셔도 좋고, 정 사정이 안 되면 다른 분을 모셔 오면 되는 일이다.
다만, 매월 10일이 되면 월급이 자동 이체가 되던 탓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입금된 페이 때문에 당황해서 전화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내가 내는 것도 아니기에 느긋하게 전화를 받으며 폐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네, …네? 아. 네, 죄송해요. 네. 듣고 있어요…. 네. 그럼 제 계좌로….”
신문지 사이에 끼어 있던 전단지 한 장을 보고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대강 알겠다며 급하다며 아주머니께 둘러댄 나는, 그대로 휴대폰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휴대폰을 쥘 새가 없었다. A4 용지 정도 크기에 인쇄된 그림 하나에 나는 그 순간만큼은 한재희마저도 잊고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도 못한 데뷔네….”
낯설 리 없는 그림, 그리고 학원 이름.
결제한 것조차 잊어버리고서 뛰쳐나온 그 성인 취미반 미술학원의 이름 위에, 떡하니 내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
- 뭐 취소를 하려고 해도 연락처도 없고 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전화기 너머 원장 아주머니는 내 전화에 무척이나 민망해했다. 아마도 내게 연락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 당황한 나머지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저작권법 나부랭이를 외는 아주머니께 나는 흔쾌히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이겠다 전했다. 다만, 조건이 있노라고.
나는 거실이 아닌 내 작업실에 들어와 그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럼 내일 제가 방문 드려도 될까요?”
- 아이고, 그럼요. 학생 정도 실력이면, 하루면 될걸.
내 습작과도 같은 낙서를 어떠한 비용도 없이 넘기겠으며, 기타 수업료 환불도 받지 않겠다는 제안에 원장 아주머니는 완벽한 을이 되어 주었다. 사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여전히 손에 들린 전단지 한 장이, 다 꺼져 버린 내 불씨를 태워 주었으니까.
“그, 부탁드린 재료도…. 다 준비해 주실 수 있나요?”
- 그럼요, 바로 내가 주문할게. 그런데 캔버스는 틀을 직접 짜야 할 텐데.
눈앞에는 내가 자위를 한 뒤에 망쳐 버렸던 캔버스가 날 노려보듯 마주하고 있었다. 창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볕이 그 얼룩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캔버스를 하얗게 물들여 주었다.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았던 것처럼 말끔하게.
“캔버스는 괜찮아요. …네. 내일 뵐게요.”
각자 감격과 열의에 가득 찬 통화를 끝내고 나는 그 자리를 맴맴 돌았다. 휴대폰에서 갤러리를 열어 나는 녀석의 사진을 확인했다. 엉망이 되어 버린 밑그림 위에 나는 최대한 어느 순간의 녀석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다.
부서지는 햇볕 속,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어서 그리지 못했던 그 순간의 녀석을.
“아, 맞아….”
기대하는 것만으로, 또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터질 것처럼 너무나 두근대는 심장 탓에 나는 우선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옷장 앞에서 서성거리다 문득 나는 아주머니의 존재를 기억해 냈다. 천만 다행이었다. 계획을 자칫하면 그르칠 뻔했다.
“예 아주머니. 네…. 아 저, 사실 상태가 또 안 좋아져서…. 네. 한 한 달쯤? 다시 입원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구요. 제가 문자 하나 보내 드릴 테니 이쪽으로 나머지 금액은 입금 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네. 제가 연락 따로 드릴게요. …예. 아주머니두요. 네. 감사해요….”
***
다음 날.
약속대로 나는 미술학원에 들렀다. 그리고 꼬박 여섯 시간을 몰두했다. 결제했던 수업료를 하루치로 몰아 버린 과외나 다름없었다. 하루 만에 연필이 아닌 붓으로 표현하는 것을 배우자니 머리도 아프고 진이 빠졌지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우려했던 것보다 크게 어려운 것은 없었다. 결제한 것도 잊어버린 채 도망치듯 뛰쳐나갔을 때와는 달리, 90도에 가까운 인사를 받고 학원 문을 나선 나는 온몸 가득 배어 버린 유화 물감 냄새에 어깨를 털었다.
집으로 가기 전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나는 옆 건물의 1층으로 향했다.
“나왔나요, 사진?”
딸랑거리는 차임벨 소리와 함께 사진관 주인아저씨가 인자하게 웃으며 날 반겼다. 미술학원에 들르기 전 먼저 찍었던 사진이 벌써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참 세상이 좋아졌구나. 조그마한 사진 속의 나에게 낯설어하는 와중에도 아저씨의 친절함이 끊임없이 퍼부어졌다.
“워낙 학생이 예쁘장하게 생겨서 손볼 데도 없었어.”
“다크 서클 엄청 심했죠.”
“그 정도야 요새 젊은이들 늦게 자니까 다 있지. 더 고쳤으면 연예인 소리 들었을걸.”
“에이.”
사진 속의 날 마주하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만은 한참 뜯어보아야 했다.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닮았는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나 씨와 소개팅을 했던 그날 이후로는 장례식 꿈을 꾼 적이 없어 조금 기억을 더듬어야 했지만, 분명한 건 꿈속 영정 속 내가 웃고 있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나는 사진 한 장을 찍느라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물론 날 웃게 하느라 사진관 아저씨도 함께 고생하셔야 했다.
그나마 정말, 웃고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 어색해 보이긴 했다. 썩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병실에서 애걸복걸하며 울었던 못생긴 얼굴보다는 훨씬 낫겠지 싶었다. 아니 적어도 고등학교 졸업 사진보다는 나을 거 아냐. …그치?
“어디 취직이라도 하나?”
“아니요. …그냥 쓸 일이 있어서요.”
“그래요. 학생 인상이 워낙 좋아서 어디든 잘될 거야.”
아저씨는 친절에 나는 쉬이 감동했다. 인정에 잔뜩 주린 배는 무언가를 고를 틈이 없이, 그저 먹어 치웠다. 그 의미 없는 작은 말마저 내게는 한없이 고팠다.
“…감사합니다.”
모두, 나를 격려해 주고 있었다.
아저씨뿐만이 아니었다. 미술 학원 원장도 마찬가지였다. 내 허가도 없이 광고 전단지에다, 그것도 학원 수강생의 작품으로 내 그림을 실었던 것은 어이없었지만, 오늘 최선을 다해 내게 유화를 가르쳐 주었다. 소묘나 유화나 기본적인 명암과 구도는 크게 다르지 않아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해 본 적 없이 영상이나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기만 한 기법들을 실제로 캔버스 위에 시행해 보는 것은 내게 값진 경험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나로선 막무가내로 시행착오에 맡길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돈은 내가 지불했지만, 부탁한 유화 도구들 역시 주문한 내역을 보여 주며 꼼꼼히 그 용도를 메모해 주는 성의까지 보였기에, 나는 말끔히 그녀에게 내 그림의 저작권을 넘겼다. 그래봤자 내겐 낙서였고, 그다지 많은 정성이 담긴 작품도 아니었다. 소묘 따위, 십 수 년 간 지겹도록 그려 왔었다. 이제 더는 관심이 없었다, 그 흑백 세계엔.
***
당연히 녀석의 연락은 없었고, 종종 예나 씨의 연락은 왔지만 받지 않았다. 그게 순수한 그녀의 호의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나 자신이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음의 문제였다. 저녁에나 올 거라는 택배 기사를 기다리며 무릎을 모으고 있던 난, 고민 끝에 결국 쌓인 메시지에 답을 보냈다. 멀쩡한 정신으로 보내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재희랑 일이 좀 있었어요. 예나 씨 잘못은 아니지만 마음이 좀 안 좋아서… 미안해요.」
간극도 없이 답장이 왔다. 역시나 친절한 예나 씨는,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며 오히려 나를 걱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먼저 연락하는 일은 없을 테니, 기다리겠다며. 또한 제 연락을 무조건 재희의 의도로 몰지는 말아 달라며 작은 항변도 잊지 않았다. 나는 이모티콘을 쓰며 작게나마 사죄했다. 물론, 다른 의미로도 전부 다.
「잘 부탁할게요.」
비겁하게도 목적어를 숨긴 메시지 창을 닫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배 기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처음으로, 하늘마저 나를 응원한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네, 지금 오시면 돼요. 집에 있어요.”
…어디 한번, 시작해 볼까.
***
늘, 일부러.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밖의 세상을 그리려 노력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그리기엔 내 운신의 폭이 턱없이 좁았다. 집 안에서 보이는 세상. 넓고 아득한 고요. 그 평화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화폭 안에 담는 것만으로 나는 보이지 않는 창살 하나를 더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과 영상을 따라 그리는 건 허망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그것을 화폭에 담고 싶었지만, 비행기 한 번 타지도 못하고, 심지어 대중교통 또한 쉽지 않은 내 처지로는 무리였다.
그리고 그린다고 할지라도, 채색할 수 없었던 잿빛 풍경들은 내 캔버스 위에서 그대로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아무리 섬세하게 관찰을 해도, 아무리 심도를 더하고 밀도를 높여도, 빛을 잃어버리는 풍경들에 나는 오히려 그들을 그리는 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그리지 않았다. 올 컬러로 찬란한 세계를 그렇게 박제해 두고 싶지 않았다. 병든 내 마음을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 도피였다.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전공도 아니고 놀잇감이었기에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나 혼자만 이해하면 되는 일이었다. 얼굴 하나에 여섯 개의 표정이 담긴 머릿속을 그려도. 눈이 귀에 달린 모습을 그려도 그게 설사 징그럽다고 한들 아무도 폄하하지 않았다. 그게 자유로웠지만, 한편으론 쓸쓸했다. 혼자만의 놀이, 세상. 실제가 아니기에 자유로웠지만 외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림이 날 더 외롭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재희만은 절대 그렇게 그릴 수 없었다.
사실, 상상력이 기반인 건 다를 바 없지.
휴대폰에 찍어 둔 졸업 사진을 흘낏 한 번 보고서 끈 나는 마음껏 재희를 상상했다. 찾아 올 사람은 없었다. 택배를 받고 난 뒤, 문은 단단히 걸어 잠갔기 때문이었다.
받아 든 박스 속엔 호화로운 도구들로 가득했다. 유화 물감은 물론 석유통에, 나무 팔레트부터 수십 가지의 붓까지. 작업실은 있어도 채색 도구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한 내가, 가정부 아주머니가 부쳐 주신 돈을 고스란히 유화 도구로 바꾼 덕분에 부린 일생일대의 사치였다.
마음 같아서는 틀도 직접 짜고 싶었지만, 엉성하게 만들 바에야 이미 있는 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젤에 놓인 60호짜리 캔버스는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몇 년 전 재희를 그리려다 실패했던, 게다가 내 자위로 치욕까지 맛본 가련한 캔버스였다. 물론 어제 미리 젯소를 발라 두어 그 흔적은 말끔히 사라졌다. 덕분에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이 현실은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해도 돌이킬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 화폭은 마음껏 다시 덮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위안을 주었다.
그래서 망설임 하나 없이, 난 재희를 그리기 시작했다.
옛 버릇은 남 주지 못하는 것일까. 너른 캔버스 정중앙에서부터 섬세하게 나는 소묘하듯 재희를 그려 나갔다. 어차피 물감으로 덮어 버릴 스케치였지만 난 내 손에 익은 방식을 택했다. 그 또한 유화의 자유로움 덕분이었다. 이상하면 덮어 버리면 되니까. 덧씌울수록 탁해지는 수채화와 달리 유화는 내게 풍부한 기회를 선사해 주었다. 이제껏 주저한 스스로가 우스울 만큼 과감하게 재희를 소묘한 것도 다 그런 믿음 덕분이었다.
스케치는 쉬웠다. 내 주 종목인 소묘와 망상을 적절히 섞어서, 나는 눈을 감고도 마치 어제 일처럼 모델이 되어 주었던 재희를 캔버스 위에 재현해 냈다. 실제로는 해가 지고 어두컴컴한 밤이었지만, 내 기억 속 재희는 쏟아지는 볕을 등지고서 날 향해 환히 웃고 있었다.
마지막 만났던 그 싸늘한 표정이 자꾸 뇌리에 되새겨질 때면 나는 휴대폰 속 사진을 꺼내어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기억보다 사진 속 모습에 가까운 따스한 재희가 날 격려하고 있었다.
완성한 스케치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잠을 청한 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나는 바로 세필 붓으로 재희에게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이 또한 어려울 건 없었다. 몇 번이고 마음속에서 그려 왔던 것이었으니까. 꼭, 녀석이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학원 선생은 관찰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애석하게도 난 온전히 상상에 기대어 재희의 빛깔과 색채를 재현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다소 미화된 게 도움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진갈색의 눈동자, 그 섬세한 속눈썹 하나하나를 그려 나가면서 나는 내가 실연당한 것도 잊고 흐뭇해졌다.
가는 붓 여러 개로 피부를 그라데이션 할 때는 서툴렀지만, 남은 캔버스 하나에 다시금 손을 푼 뒤에 과감하게 칠해 나가기 시작했다. 설레는 마음에 잠을 설쳐서 그런지 조금 속이 메슥거렸다. 휘발성 기름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빛이 가득한 작업실 안에서 점차 색깔을 띠고 숨을 쉬기 시작한 재희의 그림 앞에서 나는 끼니도 잊고 온전히 몰두했다.
생각해 보면 그게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
먹는 것도 잊고 그렇게 그리기 시작한 지 일주일은 지났을까.
60호짜리를 호기롭게 선택한 게 조금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러프하게 구역을 채운 뒤 덧그리는 게 아니라 세필 묘사부터 시작한 터라 초벌을 채우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져서 나는 한참을 헉헉대야 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 컨디션이 급작스럽게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 느낄 정도였다.
뻑뻑해진 붓에 기름을 섞는 순간 의식이 아득해져 순간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다행히 피가 나는 곳은 없어서 난 그대로 일어서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호흡 소리가 귀를 울려서 머리가 아팠다.
작업실에서 기어서 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가 조금 괜찮아지면 다시 붓을 들었다. 하루에 고작해야 서너 시간밖에 집중하지 못했다. 초벌 자체가 세부 묘사인 덕에 고작해야 재희의 얼굴과 가슴선까지만 정리되었을 뿐, 묘사해야 될 것은 한참 남아 있었다. 이를 악물어야 했다.
홧김에 나는 치킨을 시켰다. 그 녀석이 예전에 혼자 먹었던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나름의 앙갚음이었다.
굳게 걸어 잠근 문을 열다가 땀이 흠뻑 젖었다. 흉한 몰골에 휘둥그레 뜬 배달원을 돌려보내고, 나는 녀석이 그랬듯 TV 테이블 위에 치킨을 내려 두었다. 호기롭게 들어올렸다 몇 조각 먹지도 못하고 다 토해 버렸지만.
그 뒤로 계속해서 신물이 올라왔다. 난 당황했다. 저녁마다 먹어야 하는 항응고제를 먹을 틈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작업을 포기한 난 그대로 거실에서 담요를 덮고 잤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보일러 소리가 봄에마저 쉴 새 없이 웅웅 돌고 있었다. 겨우 따스했다.
“…아.”
배경을 어둡게 칠하고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난 손등에 떨어진 온기를 내려다보았다. 두둑한 물감 위로 선연히 번진 건 코피였다.
지난 구토 때문에 두 알 연속으로 먹었던 게 실수였는지, 코피가 멎지 않아 난 또 그대로 작업실에서 나갔다. 코피 또한 수분이 있는 터라 그림을 망칠 수 있었다. 피를 많이 쏟아 어지럽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 밤 항응고제를 먹지 않았다. 다행히 피가 겨우 멎었다.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지만, 새벽이 되어서야 윤곽선을 마무리한 뒤 겨우 눈을 붙였다. 점차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기가 돋기 시작한 그림 속 재희가 일말의 위안이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잘게요.」
아빠의 문자에 답장을 하는 것도 큰 과업이었다. 고작해야 열 자 남짓을 치는 데에도 몇 번이나 오타가 났다. 난 컨디션이 좋을 때 따로 몇 문장을 써 두고 그것을 복사해서 답장을 보냈다.
기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건 배경을 두 번째 덧칠하고 빛을 넣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시간이 모자라서 테레빈유를 많이 썼던 게 원인이었다. 린시드와 달리 휘발되면서 내 호흡기에 직격타를 주는 것 같았다.
멈추지 않는 기침에 결국 작업실에서 나와야 했다. 왜 다들 유화를 하지 말라며 날 뜯어말렸는지 실감했다. 정말 호흡기에 안 좋구나….
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이었다. 60호라는 캔버스는 확실히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세필로 녀석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의 심도를 더하는 과정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세세했지만 난 멈출 수 없었다. 혹시라도 타액이 튈까 봐 마스크를 쓰고 그려 나갔다. 작업이 힘든 날에는 엉망이 된 붓들과 난장판이 된 걸레를 빨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물론 끼니도 걸핏하면 거를 수밖에 없었다. 식욕이 돋질 않았다.
이제는 항응고제를 언제 챙겨 먹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미친 듯이 세수를 하고, 또 물기가 묻을세라 병적으로 살갗을 문질렀다. 피부가 따갑게 부어올랐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야가 불투명해서 색이 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난감했다. 종류별로 산 흰 물감의 차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몇 번이나 버벅거리며 짠 위치 자체를 되새겨야 했다.
게다가 빈속 때문인지 덜덜 떨리는 손에 걸핏하면 붓이 어긋났다. 숨조차 쉬지 않으며 묘사를 했지만, 미묘한 색의 차이가 와 닿지 않아 그라데이션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불안한 나머지 그림 위에 계속 덧칠을 했다. 뭉개지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세필 묘사를 그만두고 좀 더 두터운 붓을 골라 든 난 그림 위에 물감을 올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게 좀 더 어울리는 듯했다.
섬세하지는 않더라도 더 따스하게. 이제는 실재하지 않는, 내 기억 속의 재희에 보다 가까웠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재희의 앞 머리칼과 흩날리는 커튼 자락, 찬란히 부서지던 빛 군데군데에 나는 손가락 가득 붓을 쥘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물론, 고작해야 두세 시간 정도가 내 체력의 한계였다.
밥 반 그릇을 죽처럼 끓여 겨우 비운 나는 눈을 힘껏 깜박여 달력을 봤다. 벌써 5월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녀석의 생일도 지나 버렸다. 재희는 얼마 동안 파견을 가 있는 걸까.
녀석의 말대로 내가 마음을 정리할 동안 다녀오는 거라면, 솔직히 말해 죽을 때까지 얼굴을 안 본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는데. 아니 그나저나, 마음을 정리했는지 확인은 어떻게 한다는 거지.
혹시나 싶어 물끄러미 전화기를 바라봐도 녀석에게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림을 말리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녀석과의 통화를 혼자 망상해 봤다. 멀쩡한 척하는 연기도 해 봤지만 민망할 정도로 그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이제는 안다. 녀석은 오지 않는다.
얼굴 외에도 몸 전체의 실루엣이 제법 리얼해진 내 그림 속의 재희를 보며 나는 마치 실제인 양 그림에 대고 물었다.
“그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생일 선물이라고 주면 싫겠지, 너는?”
녀석은 내 그림에 대해 딱히 가타부타 말한 적이 없었다. 캔버스 위는 온전히 내 영역이라고 존중해 준 덕이다. 잘했다고도, 못했다고도 평가한 적 없었기에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늘 괴상망측한 것들만 그리던 내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에 재희는 무슨 기분이 들까.
기쁘긴커녕 오히려 기분이 나쁘려나. …마음 정리하라 했더니 이렇게 제 얼굴이나 그리는 걸 알면.
생각만으로도 풀이 죽었다. 그래도, 꽤 잘 그린 거 같은데….
자화자찬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내 그림은 그럴싸했다. 마음먹고 있는 그대로를 그리자고 노력하니 괴상망측하진 않고, 정말 재희 그대로였다. 아 물론 조금의 거짓말은 보탰다.
현실의 녀석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온화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사실이었다. 현실의 재희는 어땠는지 몰라도 내가 늘 사랑했던 재희는 이 모습 그대로였다. 누구는 차갑고 또 괴물이고 사이코패스라지만, 정말 따스하게 웃을 줄 알고, 내겐 위안이었던 사랑이었다.
온통 어두운 실내에 한가득 쏟아져 내리는 빛처럼, 내 칙칙한 삶 속 유일하게 빛이 났던 녀석. 비록 녀석은 원치 않았다 해도 말이다.
한심하겠지만, 재희야. 여전히 네가 보고 싶어.
그 녀석은 부모님도 시원스럽게 잊어버리는 녀석이다. 나도 분명 잊겠지. 뭐, 처음에는 힘들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가 없다며 엉엉 울었던 녀석을 난 아직도 기억하니까. 하지만 그때는 네 살이고 지금은 스물아홉이다. 녀석은 어찌 됐든 날 깨끗이 잊어버리고 살아갈 것이다.
물론 녀석이 날 기억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아닌 내가 좋아했던 너 자신을 조금은 간직해 주었으면 싶은 치졸한 마음이 들었다. 네가 이토록 빛이 났다고. 날 위해서 살아 주었다는 말이 그 가시 돋친 말들 중에서도 나는 그저 찬란했다고.
“보고 싶다….”
그래서였다. 마음이 치밀어서, 도무지가 쉴 수가 없었다.
***
생각해 보면 난 참 운이 좋았다.
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다 이룬 셈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행복해지고 싶었고, 재희를 사랑하고 싶었다. 게다가 녀석에게서 멀어지겠다고 다짐한 것마저도 이뤘다. 버킷 리스트 달성 아닌가.
끝이 조금 어설픈 건 아쉬웠지만, 반이나마 이룬 게 어디야.
하지만 꿈을 이루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마지막 내 꿈이 날 가장 괴롭히고 있었다.
이제는 운신할 힘도 없어 나는 작업실 한구석에 침구를 두고 쓰러져 잤다. 환기를 시켜야 해서 덜덜 떨면서도 창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가 몸에 열까지 올랐다. 그나마 기침까진 나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날 하루는 그림을 말리는 겸 쉬었다.
몸은 점점 한계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데, 그림은 끝이 없어 보였다. 어느덧 약속되었던 한 달이 채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부족한 마음에 나는 그저 애가 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두 달로 질러 볼 걸 그랬나…. 하지만 재희가 내 곁에 없는 한, 한 달에 한 번은 병원에 피 검사를 받으러 갔어야 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들통이 났을 것이다.
패딩까지 걸쳐 입고 이젤 앞에 섰다. 둔탁해진 움직임에 한쪽 팔만 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는 계속 덧칠해 나갔다. 정신을 잃곤 하는 사이에 그림이 적당히 말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온전히 마르려면 적어도 몇 달은 걸리겠지만.
작업하는 덴 큰 무리가 없었다. 시력이 약해져서 거의 코에 그림을 박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야 했지만, 한 달 동안의 집중 실습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난 꽤나 능숙하게 작업을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낮과 밤이 없이, 새벽의 푸른빛에 그림 속 재희의 낯빛이 아스라이 빛날 즈음에 눈을 감고는 했다.
부디 조금만 더 버티기를. 조금만.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에도 부족한 부분이 보여 나는 의식을 잃을 때마다 오로지 그것만을 기도했다.
그리고 나를 가련히 여기신 하늘이,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요 며칠 그랬듯 작업실에서 쓰러져 자다가, 창에 쏟아지는 볕에 눈이 자동적으로 떠졌다.
이상하게 몸이 개운했다. 허기도, 구역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야도 말끔했다. 물론 작업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야무지게 아침 과일 주스를 챙겨 먹고, 붓과 걸레도 빨아서 새것으로 바꾸었다. 잘 분간하지 못했던 화이트 물감들도 말끔하게 닦은 팔레트 위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길고 긴 작업에 피로했던 몸을 어디 가고, 마치 처음 그림을 시작하던 그날과 다름없이 설레고 벅찼다. 다만, 눈앞의 그림은 새하얀 캔버스가 아닌, 완성되기 일보 직전인 게 달랐다. 혹시, 여태까지가 다 꿈이고 누군가 칠해 주고 간 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맑게 트인 시야 속, 빛을 받아 빛나는 내 그림 속 재희는 정말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어둔 배경 속에서 나를 보고 또렷이 웃고 있는 재희의 모습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내가 그렸지만 내 솜씨라고 보긴 어려울 정도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생생하게.
나와는 달리 조금 갈색으로 빛나는, 탄력 있고 부드러웠던 머리의 질감, 시원하게 미소 짓는 얼굴, 매끄러운 피부. 어깨가 넓어 자연스레 드레이프가 지는 셔츠, 길고 또 탄탄한 팔다리. 모든 것이…. 현실의 재희가 들으면 조금 서운할지 몰라도, 완벽히 화폭 안에 담겨 있었다.
오히려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잘 마무리해야 했다. 내 스스로의 마무리는 지금이 아니고서는 어렵다는 것을 난 직감했다.
유난히 밝은 볕이 인상적이었던 그날 하루, 나는 창가에 그림을 끌어다 그 햇살 아래서 마음껏 재희를 손질했다. 입체감이 더해진 재희의 얼굴은 손에 잡힐 것처럼 뚜렷하게 빛났다.
그리고 해가 채 지기도 전에, 나는 더 이상 손을 댈 곳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림과 마주 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 재능 있었구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칭찬해 주고 싶었는데, 입을 열자마자 쇳소리가 나서 소리까진 뱉지 못했다.
감격스런 마음에 그 큰 캔버스의 귀퉁이라도 끌어안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르려면 몇 달은 걸릴 것이다. 그 과정을 온전히 지켜보고, 또 바니쉬 칠까지 직접 하고 싶었지만, 난 알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쌓아 둔 세필 붓 중 하나를 골라서, 날 곤란케 했던 티타늄 화이트 물감을 묻혔다. 그리고 어둔 배경 가장 구석으로 자리를 정했다. 신기했다. 전혀 떨리지 않았다. 날짜를 모르는 대신,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니셜만 적어 내기로 했다.
H.J.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