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시우를 빤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다. 고개를 숙인 시우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무경의 눈동자에, 눈꼬리에, 그리고 입꼬리에 미소가 맺히더니 순식간에 얼굴 전체로 미소가 번졌다.
대답 없는 무경의 반응에 힐끔 살피는 시선을 들었다가 그 얼굴에 넋이 나간 건 시우 쪽이었다. 순간 시우는 자신이 데이트를 하자고 한 게 아니라 사랑한다고 말한 줄 알았다. 그가 그렇게 근사하게 웃는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진짜예요? 진짜죠?”
아이처럼 반복해서 묻는 말에 시우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한 번 환하게 웃는 얼굴이 갑자기 어딘가 울 것처럼 이지러졌다.
“뭘 하죠? 뭐 할까요?”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는 것 같은 건 시우의 착각일까.
“시우 씨, 뭐 하고 싶어요?”
“음… 무경 씨는 뭐 하고 싶은데요?”
“나는… 나는 그냥 보통 사람들이 하는 거, 평범한 거 하고 싶어요. 보통 첫 데이트에 다들 뭘 하죠?”
첫 데이트라….
학생 커플이라면 놀이공원이겠지만, 이제 그러기엔 애매한 나이이고, 이미 지우와 함께지만 다녀오기도 했다.
“음… 영화 보거나 드라이브 하고, 저녁 먹고, 차 마시고?”
그러고 보면 무경과 영화관에 간 적은 없었다. 영화는 주로 집에서 봤고, 그나마 함께 본 건 손에 꼽았다.
하기야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했어도 지우와 함께 놀러 다닌 것과 일본에 간 것 외에 딱히 무경과 외출한 일이 없었으니까.
“그럼 영화 보고 저녁 먹어요. 뭐 보고 싶어요? 예매해 두는 게 낫겠죠?”
무경이 테이블을 돌아와 옆자리에 앉으며 제 핸드폰을 앞에 놓았다. 그릇들을 밀어 놓고 함께 폰을 들여다보며 뭘 볼지, 뭘 먹을지, 어디로 갈지 검색을 했다.
“자, 그러면 내일 영화 시간에 맞춰서….”
일정을 다 정하고서 고개를 들고 보니 머리를 맞대다시피 하고 함께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터라 마주친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고 있는데 무경의 얼굴이 좀 더 다가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게 내려진 속눈썹이 닿을 듯 가까웠다.
“시,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나는 이만 집에….”
시우가 당황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 뒤따라 일어선 무경이 급하게 시우의 손목을 잡아챘다. 잡힌 손목이 뜨끈하다. 전기가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자고 가면 안 돼요?”
무경이 불쑥 뱉었다.
“네?”
목소리가 너무 어이없다는 듯이 들렸는지 이번에는 무경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
“그… 너무 늦었고….”
“…그러니까 가야죠. 집도 바로 한 층 위인데.”
갑자기 집이 너무 가까운 게 원망스러워졌다. 집이 너무 멀다든가, 차가 끊겼다거나 하는 핑계를 댈 수도 없잖아.
“…….”
“…….”
“내가 딱히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내일 일요일이잖아요….”
무경이 잡고 있던 손목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끝을 늘였다. 문지르는 건 손목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간질거렸다.
무경이 시우를 옆에 재우고 싶어 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거야 예전에도 항상 그랬다. 하지만 시우는 이상하게 지금 그때와 기분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뭐가 다른 거지. 내가 더 이상 정부가 아니어서? 동등한 관계여서?
그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후라서?
시우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내일 데이… 저기 외출하려면 빨리 가서 자야 해요.”
“그러니까 그냥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요? 아침에 일찍 가면 되잖아. 내가 깨워 줄 테니까.”
조금 조르는 투로 무경이 고집을 부렸다. 난감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냥 헛소리 말라고 뿌리치고 나가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왜지. 왜 벌써부터 흐물흐물 이러는 거야, 난.
게다가 여기는 더 이상 둘이 함께 사는 집이 아니다. 바로 위층에 지우와 혜린이 있고, 아이가 밤중에 깨서 저를 찾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침에 이 집에서 나가는 걸 이웃이 보기라도 하면.
혼자라면 모를까 지우도 있는데 공연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지는 않다. 교육상 좋지 않단 말이다.
“첫 데이트도 하기 전에 같이 자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시우가 눈을 부라렸다. 무경이 아, 하고 허를 찔린 표정을 한다.
따지고 보면 저희 사이에 첫 데이트란 말도 웃기는 건데 무경에게 그 말이 먹힌다는 게 더 웃겼다.
“게다가 지우는 지금 예민한 사춘긴데 당신한테 감정이 안 좋아요. 들켰다간 내일 외출도 물 건너가는 거라구요.”
거짓말이 아니다. 예전과는 달리 지금의 지우에게 무경은 형과 사귀다 아이까지 배게 한 주제에 집안의 반대도 극복 못하고 애인을 버린 무책임하고 나쁜 놈이었다.
이 말은 직방이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할 말도 없다. 무경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팔을 놓았다.
***
집 앞까지 따라올 기세인 무경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안 된다고 기어이 밀어내고 혼자 집으로 올라왔다. 뭔가 몸이 붕 뜬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멍하니 방으로 돌아와,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아무 생각 없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물론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억지로 눈을 감았지만 키스할 듯 가까이 마주쳤던 무경의 눈빛이 끝없이 반복될 것처럼 맴을 돌 뿐이다.
무경이 저를 사랑한단다.
며칠 전에 들은 말이 지금에서야 뒷북치듯 가슴이 설렜다.
기회를 달라고, 정식으로 만나고 싶다고 했었지. 말하자면, 진짜 애인 사이가 되는 거였다. 정부가 아니라.
그 말이 이제야 현실처럼 느껴져서, 시우는 갑자기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져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이불 속에 있자니 심장 소리는 더 크게 울리고 머리로 퍼지는 열은 더 강해지는 것 같아서 다시 후다닥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러고 있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스물일곱이나 먹고서 고작 사귀자는 말 한마디에 첫사랑 하는 사춘기 소년마냥 끙끙 앓고 있다니.
바보 같은 연시우.
이미 같이 살면서 몸을 섞고 아이까지 낳았으니 할 건 다 한 상대인데 새삼 설렐 게 뭐가 남았다고.
게다가 그렇게 나쁜 놈이라고, 못 믿을 놈이라고, 비겁한 놈이라고 욕하고 원망할 때는 언제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 넋이 빠졌다. 아무리 자신을 좋아한대도 나쁜 놈인데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짝 미친놈인 것 같은데. 진짜 말 그대로 넋 빠진 놈이다. 연시우란 놈은.
마음이 쉽게도 풀려 버린 자신을 탓하면서도 시우의 얼굴에는 자꾸 헤실헤실 웃음이 떠올랐다. 가슴이 너무 몽글거리고 간질거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몸까지 두둥실 떠오를 것만 같아 걱정이 될 정도였다.
데이트라.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시우는 일순간 얼굴이 굳었다.
데이트라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밤중이라 조용히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벌컥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당장 난감한 얼굴이 됐다.
입고 나갈 옷이 없다.
하기야 지난 3, 4년간 시우는 제대로 된 옷을 산 기억이 없었다. 여유가 없었다기보다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무경과 함께 있었을 때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새 옷이 드레스 룸에 쌓였고, 싱가포르에 간 이후에는 가지고 있던 옷만으로 차고 넘쳐서 옷을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머리는 또 어떤가.
시우는 옷장 문에 달린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삐쭉삐쭉 자란 머리는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손질이라도 잘한다면 모르겠는데 그저 드라이로 말리고 손으로 쓱쓱 정리하는 게 고작인 수준이니 제 손을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지.
그래도 명색이 처음 하는 정식 데이트인데.
약속 시간을 미루고 오전에 얼른 헤어 숍이랑 백화점을 다녀올까?
단골 숍이 문 여는 시간이 언제더라? 예약을 안 하고 가도 되나? 백화점을 먼저 가는 게 나으려나?
무경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 시간을 좀 미루자고 해야겠다. 근데 왜 그러냐고 하면 뭐라고 핑계를 대지. 솔직하게 얘기하기는 좀 민망한데.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수면 부족으로 머리는 뎅뎅 울리고 눈은 퉁퉁 부었다.옷도, 머리도 뭐 하나 해결된 게 없는데, 얼굴마저 엉망이 된 채로 데이트의 날이 밝고야 만 것이다.
***
씻고 나서도 얼굴이 여전히 부어 있어서, 냉장고에 넣어 둔 혜린의 마스크 팩을 얻어서 했다. 옷차림은 깔끔하게 하고 다녀도 피부 관리까지는 신경 쓰지 않던 시우가 안 하던 짓을 하자 혜린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출판사 사람 만나러 간다면서 무슨 소개팅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 같이 구네. 잘 보여야 되는 사람이야? 큰 건이라도 걸렸어?”
“으응… 뭐 그렇지.”
“근데 무슨 출판사 사람을 일요일에 만나? 그 사람은 주말도 없대? 그 회사는 무슨 악덕 업체냐?”
“어… 음… 갑자기 일정이 급해져서 그렇다나 봐. 나도 잘 몰라.”
시우는 대충 둘러댔다.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해서 말이 길어지면 티가 날 공산이 컸다. 지우가 아침부터 친구 만나러 간다고 나가서 꼬치꼬치 물어 댈 사람이 한 사람뿐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우는 뒤뚱거리며 달려와 다리에 매달리는 아이를 들어 올려 동그란 두 뺨에 쪽쪽 뽀뽀를 하고 꼭 한 번 안아 주고는 혜린에게 넘겨주었다.
“누나, 방에 들어가 있어.”
이제 제법 컸다고 눈치가 빤해서, 아이는 시우가 외출복을 입기 시작하면 저도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혜린이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사이에 몰래 나가야 했다.
“언제 올 건데?”
아이의 귀를 살짝 가리면서 혜린이 작게 묻는다.
“늦을 거야. 출판사 미팅 끝나고 친구들 만나서 술 한잔 할 거라…. 기다리지 말고 자.”
***
무경에게는 전화로, 집에 일이 생겼다며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미뤘다. 무경은 조금 실망하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이유를 세세히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낮에 함께 만나 나오기에는 너무 눈치가 보였으므로 아예 시내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상태였다. 들어올 때는 무경의 차를 타고 올 예정이라 지하철을 타고 나갔는데, 지하철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팔자에도 없는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슬몃 웃음이 났다.
나오기 전에 미리 전화를 해 둔 데다 이른 시간이어서 헤어 숍에서 바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간단하게 커트를 하고 머리를 손질하자 그것만으로도 한결 산뜻해진 느낌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인근의 복합 쇼핑몰로 향했다. 무경과 만나서 영화를 보기로 한 극장이 있는 몰이었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 아직 4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급한 대로, 스웨터와 바지 정도만 살 생각이었다. 입었던 옷은 내일 찾으러 오겠다고 잠시 맡아 달라고 하면 맡아 주겠지, 생각하면서 시우는 매장을 죽 둘러보다가 저에게 어울릴 만한, 그리고 무경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의 디자이너 브랜드 매장에 들어섰다. 가격대가 상당한 걸로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전혀 옷을 사지 않았으니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지. 스스로에게 변명하듯이 중얼거리면서 시우는 스웨터 코너를 먼저 훑었다.
직원의 추천도 들어가며 두 개까지는 쉽게 선택을 했는데 그중에 하나를 고르는 게 어려웠다. 아이보리색 터틀넥 스웨터와 진홍에 가까운 핑크 톤 라운드 넥 스웨터.
전자를 고른 건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이어서이기도 했지만 얼마 전 무경이 비슷한 걸 입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커플 아이템을 가지는 기분이라 괜히 마음이 갔다. 물론 오늘 무경이 그걸 입고 올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스칼렛 핑크의 스웨터는 직원의 적극적인 추천도 있었고 거울에 비춰 보니 정말로 자신에게 어울리기도 해서 집어 들었다. 하지만 역시 평소에 잘 입는 컬러가 아니라서 좀 망설여졌다. 너무 화사하지 않나 싶은 거다. 어쩐지 들떠 있는 지금 기분을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고.
잠시 그 상태로 머뭇거리며 고심을 하는데 불쑥 뒤에서 누군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둘 다 사요. 다 잘 어울리는데.”
흐억.
여기저기 사람들도 많은 데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놀라서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상태로 고개를 돌려,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고는 눈이 더욱 커졌다.
“여,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거 내가 할 말인데.”
무경이 시우를 빤히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집에 일이 있다고 약속 시간까지 늦추고선 여기서 뭐 해요?”
“그, 그냥….”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시간이나 좀 때울까 하고….”
“흠….”
무경이 시우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발끝까지 내려갔던 시선이 다시 시우의 머리에 고정되어 잠시 머무른다. 그리고 다시 손에 들고 있는 스웨터를 쳐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뭐, 나랑 같은 이유네요. 집에 혼자 있기도 심심해서 일찍 나왔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 백화점으로 들어가는 게 보이길래….”
무경은 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우의 손에서 스웨터를 가져갔다.
“긴가민가하면서 쫓아왔어요. 쇼핑할 거면 연락하지. 나 시우 씨 물건 사는 거 좋아하는데. 그런 거 같이 하는 것도 데이트에 속하지 않나?”
시우를 보며 말하는 것 같던 무경이 어느새 옷을 직원에게 넘기면서 그쪽에 말을 걸고 있었다.
“이거 계산해 주세요. 핑크는 입고 갈 거예요.”
그리고 언제 꺼냈는지 이미 직원의 손에 카드가 건네졌다.
“잠깐만요. 무경 씨, 뭐 해요?”
“뭐 하다니… 계산.”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무경 씨가 하냐구요.”
“뭐가 잘못됐어요? 애인 옷 사 주는 게 이상해요?”
진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무경이 시우가 아닌 직원을 쳐다본다.
“어머, 이상하다니요. 많이들 그렇게 하세요. 애정의 표현으로 선물하시는 건데요, 바람직한 일이죠.”
눈치 빠른 직원이 무경이 바라는 대답을 속을 들여다본 듯 내어놓으며 재빨리 결제 처리에 들어갔다. 시우가 직접 산다면 하나만 고를 것 같은데, 무경은 두 개를 다 사 주려고 하니 무경이 계산하는 게 매장으로서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도….”
시우가 무경의 곁에 바짝 붙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첫 데이트부터 옷 사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뭐 어때요. 데이트가 처음이지 만나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닌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계산을 마치고 택을 떼어낸 새 스웨터를 시우의 품에 안긴다.
“자자, 빨리 갈아입고 나와요.”
시우가 옷을 갈아입고 머뭇거리며 나오자 무경이 앞뒤로 훑어보며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정리해 준 후에 살짝 웃었다.
“역시 잘 어울리네. 예뻐요. 머리 한 것도.”
시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역시 눈치 챈 것이다. 데이트 때문에 머리하고 옷도 사러 나왔다는 것을.
“자, 이제 바지랑 구두 사러 갑시다. 봐 둔 거 있어요?”
직원으로부터 아이보리색 스웨터와 입던 옷을 넣은 쇼핑백을 받아 들며 무경이 시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직원의 미소 어린 배웅을 받으며 매장을 나온 시우는 무경의 손에 잡힌 제 손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또 조금 얼굴을 붉혔다.
“아니, 저기, 받기 싫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무경 씨 이제 이렇게 막 돈 쓰고 하면 안 되지 않아요?”
또 다른 브랜드의 매장에 끌려 들어가면서 시우가 조금 난감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는 더 이상 굴지의 재벌 후계자도 아니고, 사업하는 것도 아직 시작 단계이니 예전처럼 펑펑 돈을 쓰는 건 자제해야 하지 않나 싶은 거였다.
“아, 그게 걱정이에요?”
무경이 핏 웃었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데 아무렴 MK 유산 상속권 포기하는 대가로 아무것도 안 받았을까. 걱정 마요. 백화점을 통째로 쓸어 담을 만큼은 안 돼도 애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케어 할 정도는 됩니다.”
무경이 핏이 날씬한 슬랙스를 꺼내어 시우의 허리에 대어 보았다.
“그리고 시우 씨 물건 사는 건 내 취미 생활이라서. 그동안에도 시우 씨한테 어울리는 거 발견할 때마다 하나씩 사 둔 게 있는데, 다음에 집에 가져다 놓을 테니 와서 가져가요.”
무경이 쥐여 주는 바지를 얼떨결에 받으면서 시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날 언제 볼 줄 알고 내 물건을 사요?”
“음… 2, 3년 내엔 볼 생각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왜, 좋아하는 연예인 선물 사는 마음 같은 거, 뭐 그런 거죠. 시우 씨 팬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자, 입고 나와 봐요.”
무경이 싱긋 웃으며, 시우의 등을 탈의실 쪽으로 떠밀었다.
***
결국은 무경의 고집대로 구두까지 다 사고, 쇼핑백은 차에 가져다 둔 다음에야 상영 시간이 임박한 영화관으로 향했다.
프리미엄 커플석을 미리 예약했는데, 마치 오페라의 박스석처럼 좌석이 따로 독립되어 있는 건 처음 봐서 시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급 헤드폰도 걸려 있고, 안락해 보이는 가죽 소파는 거의 누운 상태로도 볼 수 있게끔 넓었다. 마치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 같기도 했다.
라운지에서는 음료와 스낵을 무료로 제공했다. 둘은 정석대로 팝콘과 콜라, 그리고 나초를 선택하고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앉았다.
불이 꺼지고 주위가 어두워지자 무경이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앉아 손을 잡았다. 희미한 페로몬 향이 번져 온다. 시우는 어쩐지 심장이 두근두근해서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우와, 뭐지 이거.
말로는 첫 데이트, 첫 데이트 했지만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진짜 데이트 자체가 처음인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입 안이 자꾸 말라서, 자유로운 한 손으로 자꾸 콜라만 꼴깍꼴깍 마셨다. 이러다 중간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질까 걱정이었다.
광고와 예고편 따위가 이어지고 본편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무경이 등받이에서 몸을 떼서 시우 쪽으로 향하는가 했더니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시우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무경이 시선을 내려 입술을 쳐다보며 키스를 할 듯 얼굴을 조금 기울였다. 그리고 힐끗 시선을 들어 시우의 눈을 쳐다보았다.
싫으면 밀어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한 번 쳐다보고는 무경은 눈을 내리깔고 천천히 입을 맞춰 왔다. 얼어붙은 시우는 밀어낼 생각도 못하고 그 상태 그대로 가만히 무경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물론 밀어낼 마음도 없었지만.
2년 반 만에 하는 키스였다. 아니, 정확하게 따지자면 그보다 더 길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입술이 맞물린 상태로 무경은 눈을 감은 채 조금씩 누르고 살짝살짝 비비기만 하면서, 마치 입술의 체온과 감촉을 음미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을 그렇게만 있었다.
혀를 살짝 내밀어 무경의 매끄러운 입술 사이를 핥은 것은 시우가 먼저였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무경이 갑자기 시우의 턱을 잡고 갈급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혀를 감아 빨고, 입천장 예민한 부위를 혀끝으로 문질렀다. 주위는 영화의 효과음으로 쿵쿵 울리고 있었지만 시우의 귓속은 무경의 혀와 입술이 만들어 내는 젖은 소리로 가득 차 아찔할 지경이었다.
몸이 자꾸 밀려서 옆으로 쏠렸다. 이러다가는 거의 겹쳐서 누운, 공공장소에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자세가 나올 것만 같다. 더 이상 하면 위험할 것 같아서 시우는 간신히 몽롱해지는 이성을 부여잡고 무경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영화… 안 봐요?”
가쁜 숨을 억누르며 시우가 간신히 말했다.
“어… 응….”
대답을 하면서도 무경은 여전히 시우의 위로 몸을 굽힌 채였다. 여전히 금방이라도 닿을 듯한 거리에서 무경의 눈동자가 갈증 난 듯 시우의 눈과 입술과 턱선 주위를 잡아먹을 듯이 훑었다.
좀 더 강하게 어깨를 밀면서 똑바로 앉으라는 듯 시우는 부러 엄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못한 무경이 몸을 뺐지만, 대신 잠깐 놓았던 손을 다시 잡아 왔다. 그리고 꽉 힘을 주어 쥔다.
붉어진 얼굴이 더 붉어지는 바람에 어두운데다 스크린의 빛이 어지럽게 쏟아지는 영화관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다.
“오늘 우리 집에 가요.”
손가락으로 시우의 손바닥을 쓸면서 무경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커피가 됐든, 라면이 됐든, 이유는 뭐가 돼도 좋으니까.”
차마 무경을 쳐다보지는 못하고 시우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줄곧 스크린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지만, 누가 나중에 영화 내용에 대해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을 내어 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는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밝은 햇빛 아래로 나오자 어쩐지 머쓱해졌다.
역시 분위기를 탄 거였어. 인간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민망한 마음에 여전히 무경을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시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차 마실까요, 아니면 어디 산책이라도 하러 갈까요.”
조금 붐비는 통로를 벗어나자 무경이 옆으로 붙으며 손을 잡는다. 이제는 아주 당연한 듯이 잡아 오는 커다란 손을 흘끔 보고는 시우는 무경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미소 띤 얼굴은 말갛기 그지없다. 마치 키스 따위는 전혀 한 일이 없다는 듯 담백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다. 아까 극장 안에서 저를 덮치다시피 키스하던 사람은 그가 아니었던 것만 같다. 어쩐지 억울하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시우는 조금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역시 이 사람은, 저를 좋아한다는 걸 제외하면 여전히 모를 구석이 많은 남자다.
“좀 걸어요. 계속 앉아 있었더니 좀 갑갑한데.”
***
늦가을의 공원 산책로는 일부러 쓸어내지 않은 낙엽들이 가득했다. 그 위를 걸을 때마다 사박사박 뒤늦은 가을이 아쉬운 소리를 냈다.
시우와 무경은 여느 커플들처럼 손을 잡고 천천히 호숫가 주변의 산책로를 걸었다. 햇살은 따뜻하고 공기는 쌀쌀하면서도 청량하다.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씨였다.
날씨가 좋은 주말이라 공원엔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혼자 걷거나 뛰는 사람들도 있고 저희와 같은 커플들이 있는가 하면, 근처 아파트 단지에서 온 듯 가벼운 차림새의 가족 단위도 있었다.
시우는 그중에서도 가운데 뒤뚱거리는 아이를 두고 양쪽으로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부부를 한참 보다가 힐끔 무경을 쳐다보았다. 무경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시우의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며 왜? 하는 입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웃는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혜린과 함께 집에 있을 아이 생각이 났다. 무경은 아직까지 아이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물론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입장이 반대였다면 저는 제일 먼저 아이에 대해서 물었을 것 같은데 왜 무경은 아무 말이 없는 걸까.
이전부터 그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관심이 없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 하지만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자기 아이가 생기면 달라지기도 한다던데, 그는 여전히 자기 아이한테 전혀 궁금한 게 없는 걸까. 그는 이미 저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고, 그렇다면 당연히 아이와 함께 셋이 가족이 되는 건데 그런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걸까?
혹시 생각은 해 보았지만, 여전히 탐탁지 않은 일이라 굳이 말을 꺼내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최대한 뒤로 미루고 있는 걸지도.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기분이 울적해지면서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시우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조금 움츠리고 옷깃을 여몄다.
“추워요? 따뜻한 거라도 마실래요? 아니면 어디 들어갈까?”
시우가 몸을 움츠리는 걸 눈치 챘는지 무경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시우는 무경의 눈이 따뜻한 빛을 띠는 걸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한테는 이렇게 관심이 많고 다정한 사람인데. 게다가 지우한테 했던 걸 보아도 좋은 아빠가 될 자질이 충분한 거 같은데.
무경이 아이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 여느 젊은 아빠들처럼, 아이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 바보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이를 가운데 두고 저 부부처럼 산책을 다니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라고 시우는 생각했다.
***
예약 시간이 가까워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시우가 좋아하는 해산물 요리를 와인을 곁들여 천천히, 디저트까지 먹고 나자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
일부러 술을 먹지 않은 무경이 직접 운전을 해서 돌아오는 동안 두 사람은 별 말이 없었다. 술기운에 조금 몽롱한 상태로 시우는 창밖으로 흐르는 밤 풍경을 보았다.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무경에게 잡힌 손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내리자, 시우는 모르는 사이처럼 무경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말없이 거리를 두고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각자 반대편 벽에 붙어 섰다. 하지만 무경은 당연한 듯이 자신의 아파트 층만 눌렀을 뿐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고는 시우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듯이 몸을 비킨다. 시우가 들어가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는데 뒤따라 들어온 무경이 팔을 잡아 돌렸다. 들고 있던 쇼핑백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지금까지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무경이 급하게 시우의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부딪쳐 왔다.
후두둑 몸이 밀려서 뒷걸음질을 쳤다. 무경이 등을 받치고 따라오며 벽에까지 시우를 밀어붙였다. 그리고 다시 턱을 잡아 올려 깊게 입술을 베어 문다. 잠깐 놀랐다가 정신을 차린 시우가 무경의 목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기울여 입을 열었다. 혀가 섞이고 호흡이 섞였다.
서로 끌어안고 한참을 키스하는 동안, 외투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무경의 손이 스웨터 안으로 파고들었다. 찬 공기에 노출됐던 손이 따뜻한 피부에 닿자, 시우가 움찔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뺐다.
“아, 미안. 차가워요?”
그제야 무경이 입술을 떼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손을 옷 속에서 빼내고 헝클어진 시우의 머리를 만져 준다. 하지만 그러는 무경의 얼굴은 여전히 열에 들떠 있는데다 호흡도 거칠었다.
“샤워할까요? 같이 할래요?”
물어보는 주제에 대답도 듣지 않고 어린아이 옷 벗기듯이 시우의 스웨터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시우도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 무경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팔을 들어 옷을 쉽게 벗기도록 도와주었다.
머리 부분이 걸리지 않도록 벗겨 내는 손길은 부드럽더니 막상 다 벗긴 옷은 휙 하니 어디론가 집어 던졌다. 눈이 동그래져서 날아가는 옷의 행방을 쫓는 시우의 얼굴을 잡아채 다시 여기저기 입술을 가져다 대면서, 동시에 곧장 슬랙스 쪽에 손을 뻗어 단추와 지퍼를 끌러냈다.
폭이 좁은 바지를 끌어내려 시우의 다리를 잡고 직접 벗겨 내자 곧장 팔을 잡아 침실 쪽으로 끌었다.
침실 안쪽에 있는 욕실 문 앞에서 다시 시우를 벽에 붙여 놓고 받쳐 입은 셔츠의 단추를 끄르면서 무경의 입술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풀리는 단추를 따라 무경의 입술도 점점 목에서 쇄골로, 쇄골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배로 흐르듯이 내려갔다.
“자, 잠깐만, 씻고, 씻고 나서….”
무경이 무릎까지 꿇고 앉아 얼굴을 배에 파묻자 이 상태로 어디까지 갈지 몰라서 시우가 급하게 그의 머리를 밀어냈다.
다 열린 시우의 셔츠 자락 사이로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무경의 얼굴이 떨어져 나왔다.
“어차피 하고 나면 또 샤워할 건데….”
어이가 없어서 눈에 날을 살짝 세우고 쳐다봤더니 무경이 금세 표정을 바꾸며 씩 웃는다.
“이러고 있으면 춥겠다. 빨리 들어가죠.”
***
둘이 그러고 들어가서 얌전히 샤워만 할 리가 없었다. 좁은 샤워 부스 안에 시우를 밀어 넣고 씻겨 주겠다며 맨손에 비누칠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얼른 씻자고 하더니 특정 부위에서 손이 떠날 줄을 모른다.
비눗물로 미끄러운 손길이 가슴을 더듬고 유두를 누르며 비볐다. 또 다른 손은 앞섶을 문지르며 거품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만하라고 무경의 손을 밀어내기에는 이미 시우의 머릿속도 열이 올라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시우의 손도 오랜만에 만지는 무경의 몸을 느끼기에 여념이 없었다. 넓은 어깨와 근육이 촘촘한 가슴과 꽉 짜인 등 위에서 손가락이 노닐었다.
그렇게 서로 만져 대는 와중에도 입술은 연신 질척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붙었다 했다.
무경의 손이 날씬한 등과 허리를 어루만지며 내려와 동그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바싹 제 앞으로 끌어당기자 이미 잔뜩 부풀은 서로의 것들이 맞닿았다. 무경이 허리를 놀려 시우의 것을 짓이기듯 누르자 맞물린 입술 사이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신음이 샌다.
한참을 그렇게 비벼 대다 말고 드디어 무경이 입술을 뗐다.
“시우야, 돌아 봐. 벽 짚고 서.”
거친 숨을 뱉어 가며 급하게 속삭인다. 휘청거리는 시우의 몸을 돌려 벽을 보게 세우고 엉덩이를 터뜨릴 듯이 잡아 벌렸다. 붉은 속살이 움찔거리며 무경을 유혹했다. 무경은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아플 정도로 단단하게 일어선 중심을 이미 촉촉이 젖은 입구에 비집어 넣었다.
“흐읏….”
오랜만에 맛보는 저릿한 감각에 시우는 몸서리를 쳤다. 등골을 타고 전기가 흘렀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내벽을 조이자 무경도 나지막한 신음을 쏟아 냈다.
“하아… 죽을 거 같아… 시우야….”
무경이 시우를 뒤에서 꽉 껴안으며 귓가에 뜨거운 입김을 쏟아 냈다. 손으로 턱을 잡아 키스를 하면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우의 몸이 마구 밀리기 시작했다. 무경이 시우의 앞 쪽으로 손을 넣어 반쯤 발기한 중심을 감아쥐면서 자꾸만 벽 쪽으로 밀리는 몸을 제 쪽으로 바싹 당겼다.
따뜻한 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한데 본격적으로 앞뒤가 전부 흔들리자 정신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연신 신음이 터져 나와 시우는 몇 번이고 입술을 고쳐 깨물어야 했다.
“시우야, 연시우….”
무경이 연거푸 시우의 이름을 부르며 목덜미며 귀에 입을 맞춰 댔다. 허리를 쳐올리며 포인트를 짓이길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싫어….”
또 한 번 번쩍, 하고 스파크가 인 순간에 시우가 벽을 긁으며 웅얼거렸다. 포인트를 짓쳐 누르던 무경이 흠칫 한다. 시우의 어깨를 당겨 안고 몸을 바싹 붙인 상태로 무경이 시우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싫다니, 뭐가. 아파? 어디 불편해?”
느릿하게 허리를 돌리면서 무경이 귓불을 물었다. 으응…하고 시우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샜다.
“이거… 싫어… 나도, 안고 싶어. 얼굴 보고 싶어….”
달리는 호흡을 힘들게 뱉으며 시우가 끙끙거리듯이 말했다. 하얀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져 있다. 뚝뚝 끊기는 작은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던 무경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아….”
갑자기 무경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몸 안을 빠듯하게 채우던 뜨거운 것이 빠져나가자 시우는 허전함과 동시에 한기를 느꼈다. 한순간 울컥 서러움이 들 정도의 아쉬움이었다.
무경은 시우의 몸을 앞으로 돌려 안고, 샤워기를 내려 따뜻한 물을 시우와 제 몸에 구석구석 뿌려 비눗기를 씻어 냈다. 그리고는 커다란 타월로 시우의 몸을 돌돌 싸서 번쩍 안아 들고는 곧장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무경은 작은 수건으로 젖은 시우의 머리와 제 머리를 대충 닦아 내고 또 되는 대로 수건을 휙 던진다. 시우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쳐다보는 사이에 무경은 시우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하얀 허벅지를 팔로 안아 올리고 골반을 잡아 끌어내리듯이 제게로 바짝 붙이면서 무경이 시우의 얼굴을 마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자, 제대로 얼굴 보이니까 이제 안아 줘.”
그리고 허리를 굽혀 시우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시우는 눈을 감고 부드럽게 입술을 두드리는 무경의 혀를 받아들이면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온몸이 따듯하게 맞닿는 느낌에 심장이 떨리는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잠시 후에, 여전히 뜨겁고 단단한 그의 중심이 부드럽게 풀려 있는 시우의 몸 안으로 다시 밀고 들어왔다. 짙은 페로몬 향이 침실 가득 넘실거린다. 몸 안이 뜨겁게 채워지는 느낌에 전율하면서 시우는 무경의 어깨를, 등을, 다시는 놓지 않을 것처럼 손등에 핏줄이 서도록 힘을 주어 껴안았다.
눈앞이 하얗게 터져 나가면서 정신을 잃기 직전에, 시우는 한숨을 토해 내듯이 무경의 귀에 속삭였다.
“차무경, 사랑해.”
***
눈을 뜨자, 방 안은 어슴푸레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 시쯤 됐을까. 아직 알람은 울리지 않았으니, 더 자도 되는 건가.
그나저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몸이 나른한 건지 모르겠다. 개운한 듯도 하고 늘어지는 듯도 하고.
몸을 조금 뒤척이다 제 등에 머리를 묻고 잠들어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흠칫했다. 무경이다. 그제야 시우는 어젯밤, 무경의 집에서 잤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당황했다.
으아….
잠시 얼어붙은 채,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리에 일순 혼선이 왔다.
일단은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식구들이 깨어나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하니까. 대체 지금 몇 시나 된 거지?
시우는 곤히 잠든 무경을 깨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해서 침대를 빠져 나왔다. 욕실 앞에 던져진 셔츠를 주워 들고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열어 방을 나섰다.
등 뒤로 살짝 문을 닫고 시우는 일단 길게 심호흡부터 했다. 알몸인 상태라 손에 들고 있는 셔츠를 껴입으며 전등 스위치부터 찾아 켰다.
불이 들어오자 어지럽게 바닥에 던져진 쇼핑백과 가방, 트렌치코트 등이 눈에 들어와 시우는 잠시 아연했다. 이게 웬 난장판인가 생각하다가 어제 집에 들어서자마자 무경이 달려들다시피 키스하던 생각이 나서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쇼핑백을 주워 구석에 정리해 두고 외투들도 대충 털어 소파에 걸쳐 놓았다. 뒤집어진 채 소파 손잡이에 걸쳐진 스칼렛 핑크의 스웨터도 발견되었다. 어제 무경이 날려 버리더니 여기에 불시착한 모양이다.
아, 진짜, 기껏 새 스웨터를 선물해 주구선.
투덜거리며 스웨터도 곱게 정리해서 소파 위에 놓아두었다. 일단 집에 들어갈 때는 입던 옷을 입고 가는 게 좋겠지. 혹시 누가 깨어 있을지 모르니까.
가방을 찾아 핸드폰부터 꺼냈다. 다행히 밤새 급하게 온 연락은 없고 이제 새벽 5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다행이다.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집에는 6시 전에만 올라가면 될 터였다.
일단 좀 씻자고 생각하고 거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기함을 했다. 제대로 말리지 않고 잔 탓에 머리가 사방팔방 아주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으아, 이 모습을 무경에게 보일 뻔 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시우는 급하게 샤워기 밑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틀었다. 쓰지 않는 욕실이라 그런지 욕실에는 비누 한 장밖에 없었지만 어차피 나중에 집에서 제대로 씻으면 되니까 별 상관은 없었다. 따뜻한 물이면 충분했다.
여기저기 조금씩 뻐근하게 당기는 몸에 따뜻한 물이 닿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진다. 어깨와 목에 조금 온도를 높인 샤워기의 물이 쏟아지는 걸 기분 좋게 음미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차무경과 잤다.
비누칠을 하다 말고 문득 든 생각에 멈칫했다. 첫 데이트 어쩌구 해 놓고 그날 바로 자 버리다니,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쉬워도 이렇게 쉬울 수가 있나. 시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긴 둘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 주제에 첫 데이트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했지.
멍하니 어젯밤을 떠올리고 있자니, 어쩐지 현실 감각이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지독한 이별을 했는데 그와 다시 만나 이렇게 평범한 연인처럼 데이트를 하고 몸을 나누며 행복감에 젖을 수 있다니. 어쩐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꿈만 같다, 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정신없던 와중에 뭔가 중대한 문제 하나를 놓치고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무경과 한 건 제대로 된 삽입 섹스였다.
“…….”
어째서 그게 가능했지? 무경은… 사고 이후로 성불구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아닌 건가. 다친 게 다 나았는데도 안 나은 척 했다고 했나. 아니, 잠깐, 그건 극우성 형질과 다리에만 관련된 게….
갑자기 시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무경이 또 거짓말을 한 건가? 시우는 그 말을 할 당시 무경의 절박했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말을 할 땐 거짓말 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는데.
잠시 멍하니 물을 맞고 서 있다가, 이럴 게 아니라 직접 물어서 확인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시우는 입을 꽉 다물고 샤워기를 껐다. 급하게 수납장에서 타월을 꺼내 대충 물기를 닦고 벌컥 욕실 문을 열었다.
“아, 다 씻었어요?”
언제 일어난 건지 무경이 말짱하게 깬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가 시우를 향해 일어섰다.
“…….”
왜 차무경이 여기 있는 건데?
“무경 씨, 어제….”
어쨌거나 잘됐다고 생각하며 당장 따져 물을 듯이 이름을 불렀지만 무경의 시선이 묘하게 제 몸을 훑어 내리는 것을 느끼고 흠칫 말이 막혔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급하게 나오느라 아직 알몸이었다.
젠장. 일단 후퇴.
다시 문을 닫고 축축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내부를 둘러보았지만 목욕 가운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있는 거라곤 들어올 때 입었던 셔츠뿐인데 이걸 다시 입어야 하나. 하지만 속옷도 없이 이것만 달랑 입고 나가는 것도 민망했다. 꼭 뭐… 유혹이라도 하려는 것 같잖아.
똑똑.
무경이 문을 두드렸다.
“시우 씨, 갈아입을 옷 가져왔는데.”
무경의 목소리에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몸을 문 뒤에 숨기고 눈만 빼꼼 빼서 내다보니 무경이 어쩐지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내 거라 좀 크겠지만. 그래도 속옷은 새 거예요.”
“…….”
일단 받아 입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기껏 갈아입을 옷이라고 줬는데 이전과 별반 다른 상황도 아니다. 아니, 바지는 왜 안 주는 건데.
“바지는요?”
또 경계하듯 얼굴만 내밀고 물어보는데 무경은 실실 웃을 뿐 바지를 조달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차피 금방 어제 입던 옷 입고 올라갈 거잖아요. 뭐 하러 이것저것 입어요, 그냥 편하게 있지.”
“…….”
어차피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한 사이에 내외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시우는 무경이 준 옷으로 갈아입고 주춤거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적어도 제 셔츠보다는 나았다. 헐렁한 무경의 니트는 엉덩이를 충분히 가렸고 최소한 안에 속옷도 입었으니까.
“일어났는데 시우 씨가 옆에 없어서 울 뻔했어. 어제 꿈꾼 건가 싶어서.”
민망해하는 시우를 끌어당겨 안으면서 무경이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시우의 심장이 징하며 울렸다. 꿈인 줄 알았다니. 그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어쩐지 뭉클한 감정이 솟구쳤다.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시우도 무경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행복하다….
가 아니라, 참.
또 분위기에 취해서 잊어버릴 뻔했다. 시우는 인상을 조금 쓰고 무경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봐요, 차무경 씨. 물어볼 게 있는데.”
시우는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무경을 노려보았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무경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응, 뭐?”
“나한테 무경 씨 성…기능 장애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쨌든 실제로 다쳐서… 그래서 파혼 당하고 MK에서도 쫓겨난 거라고… 그랬잖아요.”
“내가요?”
무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성기능 장애? 아, 성불구라고 한 거….”
“설마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거나….”
시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그건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에요. 시우 씨, 오해예요.”
무경이 당황해서 손을 휘저었다.
“나는 가정을 해서 말한 거예요. 그런 상황이 되면 날 버릴 거냐고 물은 거라고요.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가정이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시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가 그런 얘기를 가정을 해서 합니까?”
“진짜,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나는 진심으로 물어본 거야. 실제로 사고 후에 한동안 하반신 마비 상태였고, 형질도 떨어졌다고 했잖아요. 계속 그런 척한 건 계획적이었지만, 어쨌든 내 핏줄이라는 사람들은 그 이유로 날 버렸거든. 그러니까 시우 씨도 내가 만약 그런 거라면 날 버릴 거냐고 물었던 거예요.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거지, 거짓말을 하거나 속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진짜, 불안하니까, 내 입장에서는 절실한 질문이었다고.”
“그럼 안 아픈 거 확실해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며 시우가 재차 확인했다.
“멀쩡해요. 어젯밤에 확인했잖아.”
시우가 얼굴을 붉히며 무경을 노려봤다.
“그것 말고 형질이라든가… 러트가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음… 지난 2년 반 동안 러트가 없긴 했는데, 그러니까 후계 생산 문제와 관련해서는 MK에 딱히 거짓말한 것도 아니지. 러트가 없다면 극우성을 낳을 가능성이 없어지니까 어차피 그네들한텐 불임이나 마찬가지라. 하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오히려 편하고 좋아요. 시우 씨만… 괜찮다면.”
“…….”
본인이 괜찮다고 한다면 러트는 없는 편이 저도 편했다. 러트는 좀… 따라가기 버거운 게 사실이었으니까.
한참의 침묵 끝에 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무경 씨가 아픈 것만 아니라면 아무 상관없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 완전히 무경 씨 포기한 거 맞긴 해요? 혹시 다리가 나았다거나, 형질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그리고 아이 문제도 있었다. 시우의 표정에 희미하게 불안감이 떠올랐다. 무경이 시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다정하게 뺨을 쓸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내가 얘기했잖아. 이제는 절대로 시우 씨 곁에서 안 떨어질 거라고. 다시는 휘둘릴 일 없어요. 약속할게. 그것보다, 확인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무경이 시우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뭐든지 물어보라는 듯이 시우가 무경의 눈을 빤히 마주보았다.
“어제 나한테, 사랑한다고 한 거 맞아요?”
“…….”
잠시 머릿속이 공백 상태가 됐다. 얼핏 무경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수마에 빠져들기 직전, 흐느끼듯이 제가 뱉은 말이 떠올랐다.
‘차무경, 사랑해.’
허억.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불타올랐다. 붕어처럼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벙긋거리기만 했다.
“아니, 그게… 저….”
“혹시… 말한 거 후회해요? 아직 그런 마음이 아닌데 분위기에 휩쓸려서 뱉은 말이라거나… 그런 거면 괜찮아요. 충분히 이해하니까….”
무경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다독이듯이 말했다. 하지만 표정이 눈에 띄게 가라앉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시우는 급하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분위기에 휩쓸려서 한 말은 맞는데….”
그 말에 무경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시우는 당황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어제 그 말을 할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만… 저기, 의미 없이 한 말도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왜 이렇게 말이 꼬여. 내가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시우는 속으로 탄식을 했다.
“저기, 무경 씨가, 끝까지 무경 씨를 책임질 각오가 서면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 했잖아요? 그 각오는 예전부터 섰어요. 단지, 말할 타이밍이, 좀 더 뒤가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첫 데이트에, 그것도 잠자리에서 하기에는 아무래도 좀 가볍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생각해서 당황한 것뿐이에요.”
“…진짜예요?”
“네.”
“진짭니까?”
고개까지 확실히 끄덕여 주었다.
“네.”
“하….”
머리를 쥐어뜯듯이 쓸어 올리며 무경이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덥석, 시우를 터트릴 듯이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어제 시우 씨가 그러고 자 버리는 바람에 나는 새벽까지 잠을 설쳤어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혹시 자고 일어나면 꿈이 돼 버리는 건 아닌가…. 그래서 아침에 깨서 시우 씨가 옆에 없는 걸 알고 역시 꿈이구나 하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시우를 안고 조금씩 흔들면서 무경이 한숨처럼 웅얼거렸다. 격한 감정을 억누르듯 토해 내는 것이 느껴져서 시우는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안심시켜 주고 싶다, 확신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여기까지 돌아와서 밀당을 할 필요가 뭐가 있나 싶었다.
“나 차무경 씨 좋아해요. 좋아합니다. 아니, 사랑해요.”
시우가 무경의 허리를 마주 안으며 한 자 한 자 힘 주어 다시 말했다.
“응. 나도, 나도 사랑해, 연시우.”
잔뜩 끌어안고 연신 머리에 입을 맞추며 무경이 답했다.
“내가 사랑한다는 건, 무경 씨가 내 거라는 의미예요. 아무하고도 공유 안 해요. 나만 보고 나만 가져야 해요. 절대로, 무슨 이유로든 남한테 손끝 하나 마음 한 조각 주면 안 돼. 무경 씨도 그럴 각오가 돼 있어야 해요, 내 말을 받아들일 거면.”
무경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시우는 무경이 했던 말을 흉내 내어 선언하듯이 말했다.
“응. 나는 평생 연시우 거니까,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야.”
대답하는 무경의 떨리는 목소리에 넘쳐나는 웃음이 스몄다. 대답에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시우는 무경의 얼굴을 잡아 도장이라도 찍듯 꾹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입을 맞추며 한참을 끌어안고 있는 동안, 거실 창으로 뿌옇게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