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이 지났다.
그날을 떠올리면 시우는 일이고 뭐고 도통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꿈처럼 바랐던 고백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는 걸릴 것도 없이 둘의 관계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어서도 아니었다.
‘사랑해, 시우야.’
그 말을 하던 무경의 목소리와 눈빛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아니, 아니에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없어요. 나는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날 시우가 무경에게 마지막으로 건넸던 건 부정의 대답이었다. 생각해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기다려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건 아니라고, 아닌 것 같다고, 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그를 거절했다.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하던 그는 왜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기대도 했겠지만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아니 어쩌면, 거절당할 가능성을 훨씬 더 높게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망연자실한 그를 두고 도망치듯 돌아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대답하고 돌아와서, 시우라고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마자 침대에조차 올라가지 못하고 문에 기대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돌아서던 순간 마주친, 거멓게 꺼져가던 무경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심장이 짓이겨지는 듯이 아파왔다.
시우는 여전히 각인 상태였다. 사랑한다는 말에 이렇게나 미칠 듯이 심장이 뛰고 온몸에 열이 오를 정도로 감정이 들끓었다. 불쑥불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당장에라도 무경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제 대답을 철회하고,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고 하고 싶었다. 무경은 제 잘못을 안다고 했고 시우를 사랑한다고 인정했으며 둘 사이를 가로막던 장애물도 치워졌으니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게 뭐가 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자진해서 납득하고자 하는 스스로를 억눌러야 했다.
예전에 그와 이어질 수 없었던 게 단순히 차무경의 배경 때문이었을까? 모든 것을 가진 상태에서 시우까지 가지겠다고 속이고 가두다시피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차무경 자신이었다. 게다가, 헤어질 무렵에 한 얘기는 대체 뭐였던 걸까. 그날 그의 표정과 그가 했던 말들은 시우에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지금까지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심장에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다.
그런 주제에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니. 지난 2년 반 동안 줄곧 나를 그리워했다니. 그럼 헤어지던 날의 그 모든 얘기도 다 거짓말이었다는 건가? 대체 왜.
무엇보다 시우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차무경이란 사람 자체를. 문제는 그거였다.
헤어짐을 고하던 날, 속이고 강압하며 상처 주었던 이전의 모든 행동들이 각인 때문이었다고 무경은 말했다. 삐뚤어진 제 성정과 각인이 결합해서 그렇게 과한 행동을 하게 됐노라고. 그는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으며 각인은 깨졌으니 더 이상 시우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시우에게 더 이상 감정이 없으니, 제가 할 수 있는 보상은 금전적인 것밖에 없다며 고개를 숙이던 그에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게 미어지던 가슴으로 그를 떠난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말마저 사실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대체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의 무엇을 믿어야 할까. 헤어질 때 했던 말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지금에 와서 사랑한다고 하는 말도 자신을 꼬드겨 다시 손에 넣기 위해 하는 사탕발림이 아니라는 보장은 또 어디 있냔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과거의 행동도 현재의 행동도 이해되지 않는데 미래라고 뭐가 다를까.
그러한 변덕스럽고 비밀스럽고 복잡한 성향은 그의 본질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그에게 각인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또 언제 그의 변덕에 멋대로 휘둘리다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과거의 자신은 바보였고 호구였지만, 그렇게 혹독한 이별을 겪고서도 또다시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상처와 후회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는 혼란스러웠지만, 이 정도는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 지난 2년 반을 어떻게든 버텨냈듯이.
차무경은 혼돈의 인간이고 연시우는 그냥 상식적인 삶을 살아가고 싶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가슴에 구멍을 안고 평생을 살아갈지언정 더 이상 그가 주는 혼돈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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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종료 2년 7개월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