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 10 (10/24)

[큭… 크흑….]

마크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목을 감싸 쥐었다. 시우는 아연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무경이 손을 댄 것도 아닌데 마크는 거칠게 멱살이라도 잡혀 목이 졸리는 사람마냥 괴로워하고 있었다. 극우성 알파의 형질이라는 게 무기처럼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걸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지금!”

시우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바람에 무릎 위에 놓였던 마크의 코트가 털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뭘 하다니. 남의 오메가한테 제 형질을 덮어씌우질 않나, 제 냄새가 잔뜩 밴 옷으로 몸을 감싸려고 하질 않나… 어느 알파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무경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을 하면서도 시우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잔뜩 살기 어린 시선은 마크를 향하고 있었고 그의 눈에서는 불이 뿜어 나올 듯했다.

“저 사람은 그냥 자기 할 일을 했고 나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한 것뿐이에요! 그리고 무엇보다.”

시우는 이를 앙다물고 무경을 노려보며 잇새로 뱉었다.

“나는 당신 오메가 따위가 아닙니다!”

마크에게 향했던 무경의 시선이 다시 시우에게로 돌아왔다. 동시에 마크가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헉, 막혔던 숨을 토해 냈다.

“내 오메가가 아니라고?”

어이없는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무경의 한쪽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타는 듯한 시선이 시우의 눈을, 입술을, 그리고 목과 가슴 언저리를 타고 내려와 배 언저리를 훑었다. 어쩐지 오싹, 소름이 돋아 시우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 봐야 좌석에 부딪혀 더 물러날 곳도 없는데도.

“얘기했잖아요. 계약은 끝났고, 우리는 남남이라고. 왜 남이 여행하는 곳까지 쫓아와 이 행팹니까? 내가 누구와 있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하면서도 시우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극우성 알파의 폭력성인 동시에 무경이 여태까지 숨겼던 어두운 일면이었고, 시우가 그것을 목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우는 본능적인 경계심으로 제 배를 감쌌다.

“계약이라….”

눈을 가늘게 뜬 무경이 천천히 시우에게로 다가왔다. 뒤로는 물러날 곳이 없어 시우는 옆으로, 좌석 창가 쪽으로 좀 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무경은 힐끗 시우 옆을 내려다보았다.

“계약에 관해서는 할 말이 좀 많아. 문제가 몇 가지 있거든. 여기서 짚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지우가 들어도 상관없다면.”

시우는 그제야 옆자리에 자고 있던 지우를 생각해 내고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이 깬 지우가 꾸물거리며 눈을 비비고 있었다. 단잠에서 강제로 깨어나는 게 불만인 듯 작은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다. 입속으로 무어라 웅얼거리면서 힘겹게 뜬 눈이 몇 번 깜박거리다 말고 휘둥그레진다.

“어… 무경이 형!”

***

지우가 깨어나면서 방금까지의 험악한 분위기가 거짓말인 듯 갑자기 연극처럼 평온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마크는 무경의 눈짓에 따라 제 코트를 주워 들고 마지못해 퇴장했다. 바로 강우에게 연락을 취하겠지만 이제 딱히 무슨 수가 있을까. 시우는 별 기대도 되지 않았다. 이제 루가노 역에 도착하면 기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무경의 사람들이 시우를 에워쌀 거였다.

저 혼자 몸이라면, 뱃속에 아이가 없었더라면, 다시 잡히는 한이 있어도 도망가는 시도라도 해 보겠지만, 무경의 곁에 딱 붙어 있는 지우나 어디 부딪히는 것조차 겁이 나는 몸 상태 때문에 언감생심 탈출극은 꿈꾸기도 어려웠다.

시우는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지우의 눈을 의식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경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기분도 아니었거니와, 마크의 냄새를 없앤다고 무경이 제게 덮어씌운 페로몬 때문에 몸이 나른하게 처지기도 했다.

머리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몸은 제가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을 기쁘게 흡수하고 있었다. 제가 지금까지 느낀 불안함과 초조함이 다 차무경 때문인데, 바로 그가 뿜어내는 페로몬에 신경이 느슨해지고 불안함이 가라앉아 버리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

“어, 근데 형 신발 왜 이래요?”

배고픈데 식당차에나 갈까 하는 얘기를 나누다 말고 지우가 문득 물었다.

신발?

뜬금없는 주제에 시우도 슬쩍 눈을 떴다.

힐끔 내려다보니 무경의 신발이 짝짝이였다. 하나는 틀림없는 그의 취향인 이탈리아제 수제 가죽 구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럽의 할아버지들이 주로 신음직한… 슬리퍼?

“기차 문이 닫히는 걸 억지로 뛰어들어 타다가 발이 걸려서 벗겨졌어. 승무원한테 들켜서 혼났는데, 그래도 슬리퍼는 빌려 주더라.”

무경이 별일도 아닌 양 어이없는 얘기를 내놓았다.

“에엑 형, 나한테는 그런 거 위험하니까 절대 하지 말라고 하더니.”

지우가 큰 소리를 냈다.

“응. 절대 하면 안 돼. 지각이라든가, 약속에 늦는다든가 뭐 이딴 이유로 하면 절대 안 되지. 까딱하면 별것도 아닌 일에 생명 줄이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 그리고 어차피 그래 봐야 폼도 구기고 별로 멋있지도 않거든. 근데,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살다 보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순간도 몇 번은 있단 말이야. 너도 크면 알게 돼.”

“에… 안 커도 알겠는데, 뭐….”

지우가 흘깃 자는 척 하는 제 형을 쳐다보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어린놈이 알기는 뭘 알아….

시우는 속으로 쓰게 뱉었다.

지우는 지금 이 상황을 제 형과 애인 사이의 가벼운 사랑싸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야 열한 살짜리가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우울한 얘기다. 열한 살 인생에 정부니 혼외 임신이니 하는 얘기가 가당키나 한 얘긴가.

무경은 지우가 형이 여기 웬일이냐고 물었을 때, 저도 휴가 중이라 스위스 여행 중이라고, 순전히 우연하게 시우 형제를 본 것처럼 말을 지어냈다. 지우는 대박이라며 거의 좌석 위에서 뛰어오를 것처럼 신나 했지만 시우는 몰래 입술을 깨물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분명 저희도 출발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탔는데 무경이 어떻게 이 기차에 있나 의아하긴 했다. 극우성 알파라고 텔레포트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헬기까지 띄운 인간이니 다이아 수저에 걸맞는 뭔가 굉장한 게 있었겠지 싶었는데… 그냥 무식하게 몸으로 부딪친 것뿐이었다니.

헛웃음이 나면서도 심장이 꽉 쥐이는 기분이었다. 뭐라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감정이 뒤엉켰다.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잡으려는 그의 집착을 끔찍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기뻐하고 있었다. 제 속에서조차 어긋나는 감정의 굴곡에 쓴웃음을 삼키며, 시우는 저에게로 향하는 무경의 시선을 무시하고 눈을 꼭 닫아 걸었다.

***

루가노 역에 도착하자, 시우 일행이 내리는 찻간의 출구 앞에 척 보기에도 수상쩍어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경이 지우를 훌쩍 들어 내려놓자 상냥한 얼굴을 한 베타 여자가 지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우가 어리둥절해서 무경을 쳐다보자 무경은 웃으면서 괜찮아, 그 누나 따라가서 차에 타면 돼, 한다.

시우는 조금 입술을 삐뚜름하게 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도망갈까 봐 지우부터 잽싸게 잡아 두는 게 눈에 빤히 보여 심사가 뒤틀렸다.

“이사님, 여기 이사님 구두가….”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한국인 남자가 구두 한 짝을 내밀었다.

“이 슬리퍼, 승무원 중엔 린턴이란 남자 찾아서 돌려주고 연락처 알아 오세요. 나중에 사례한다고.”

무경이 벗어 놓은 슬리퍼를 눈짓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주엽은 슬리퍼를 집어 들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시우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날이 서 있는 무심한 시선이 주엽의 얼굴과 슬리퍼를 훑어보고는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우스워 보였을까. 주엽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도 좀 웃기기는 했다. 저보다 한참 빠른 무경의 뒤를 쫓아 간신히 플랫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차도 무경도 없었다. 남은 건 내동댕이친 수제 가죽 구두 한 짝뿐이었다.

아니 지가 무슨 신데렐라냐고. 가려면 곱게 가지 신발 한 짝은 왜 벗어놓고 가냐고.

아니 다 좋았다. 다 좋은데 벗어 놓은 신발 한쪽을 주운 저는 왜 왕자가 아닌가 말이다. 공주 성격이 맘에 안 들긴 해도 가진 재산이 많으니 참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왜 저는 왕자가 아니고 시종이냔 말이지.

그렇게 투덜대면서도 고이 품고 온 구두 한 짝이었다. 그런데.

“호텔은요?”

그런 저의 노고도 몰라주고 무경이 주엽의 시선을 막아서며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제 오메가를 조금 쳐다봤다고 그러는가 본데, 아니, 일부러 본 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을 뿐이다. 그걸 가지고 저에게 충성하는 아랫사람을 이렇게 볼 건 또 뭔가…. 주엽은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질문을 되새겼다.

“호텔 말씀이지요…. 말씀하신 곳 스위트룸으로 잡아놨습니다. 지금 바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저녁 식사 예약도 해 놓았으니 좀 씻고 쉬시다가 식당으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요, 그럼 가죠.”

무경은 경고하듯 주엽에게 눈을 한 번 더 부라리더니 시우의 몸을 감싸다시피 하며 걸음을 옮겼다. 주엽도 그 뒷모습을 보며 최소한 인상은 한번 써 주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 그럴 수도 없었다. 주엽은 한숨을 쉬고 옆의 말단에게 슬리퍼를 넘겼다.

“방금 이사님 말씀 들었지? 처리하고 와.”

그리고는 더 거리가 멀어지지 않도록 뛰다시피 걸어 무경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이 처음인 지우는 눈도 입도 잔뜩 벌어졌다. 들어서자마자 10초간 딱 멈춰 서서 움직이질 않더니, 무경의 ‘구경해도 돼’ 한 마디를 큐 사인 삼아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지우는 식당 입구의 냉장고를 열어 보더니 당장 장화 신은 고양이 눈이 되어 무경을 쳐다보았다. 무경은 픽 웃더니,

“술 빼고 다 먹어도 되는데, 지금은 안 돼. 씻고 바로 밥 먹을 거야.”

한다. 당장은 아니라도 어쨌거나 다 먹어도 된다는 소리에 지우의 표정이 두 배 더 환해졌다.

“일단 씻죠. 위에 레스토랑에 식사 예약돼 있어요. 스위스 요리는 별거 없는데, 여기는 그래도 꽤 먹을 만하거든. 지우야, 씻고 와.”

무경이 거실 구석의 욕실을 가리켰다. 넵, 하고 달려 들어간 지우가 금세 고개를 빼꼼 내민다.

“근데 나 갈아입을 옷 없는데?”

“걱정 마, 지금 오고 있어. 씻고 나오면 도착해 있을 거야.”

무경의 대답에 지우가 우와 대박, 하고 중얼거리더니 다시 쏙 들어갔다.

무경은 소파에 걸터앉으며 조금 지친 듯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물론 제 손으로 액정을 박살낸 놈은 아니고 주엽이 새로 조달한 최신 폰이었다. 전화번호 하나를 찾아 누르더니 신호음을 들으면서 무심한 손길로 메인 침실을 가리켰다.

“저 방에도 욕실 딸려 있으니 시우 씨는 거기서 씻어요.”

시우는 무슨 말이라도 할 듯이 잠시 입을 열었다가, 뭔가 바빠 보이는 무경의 태도에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지우가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르는데 말싸움을 시작하기도 애매했고 솔직히 피곤해서 따뜻한 물에 씻고 싶긴 했다. 때 아닌 추격전에 식은땀도 흘렸고 추위와 긴장에 근육도 많이 뻣뻣해져 있었다. 시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메인 침실에 딸린 욕실도 공간이 넓었다. 바깥에 세면 공간이 따로 있고 화장실도 분리돼 있었다. 욕실 바로 앞쪽은 좁게나마 탈의 공간이 준비돼 있었는데 욕실과의 사이엔 유리문 하나뿐이었다.

유리문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침실 문에서 바로 들여다보이는 각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수증기가 서리면 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우가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랴 싶었다.

시우는 욕조 난간을 먼저 씻어 내고 거기에 걸터앉았다. 샤워기 물의 온도를 맞추어 몸에 오랫동안 뿌렸다. 훈기가 온몸에 퍼지자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사실은 욕조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임신 중에 욕조 목욕은 삼가는 게 좋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적이 있어 꺼려졌다.

향이 좋은 샴푸로 머리를 감고 스펀지에 바디 워시를 뿌려 몸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의아해서 돌아봤을 때 언제 왔는지 무경이 유리문을 열어 시우를 보고 있었다.

“다, 당신이 거기 왜….”

당황해서 스펀지를 떨어뜨렸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는데.”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무경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 듯, 그의 팔에 차곡차곡 접힌 옷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옷들을 옆 선반에 놓고 욕실 안쪽으로 한 걸음 발을 디밀었다. 그리고 유리문을 닫았다.

무경의 흰 드레스 셔츠가 대번에 축축해지며 단단한 피부에 착 감겨들었다.

“뭡니까. 나가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우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배가 차가워질까 약하게 틀어놓은 샤워기의 온수가 등 언저리로 쏟아졌다.

은은하게 퍼지는 무경의 페로몬이 시우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쌌다. 의식을 하기도 전에 몸 내부부터 찌릿찌릿 전율을 일으키며 반응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몸을 가릴 무엇도 없어, 시우는 황급히 몸을 뒤로 돌렸다.

“나가라고! 밖에 지우도 있는데 뭐 하는 짓… 읏.”

헉 소리가 나도록 세게 안겼다. 무경이 온몸을 부딪다시피 하며 두 팔로 시우의 어깨와 가슴을 당겨 안았다. 잠깐 사이에 식어 버린 목덜미에 무경이 얼굴을 부비며 숨을 들이켰다. 날 선 뺨이, 단정한 콧날이, 선홍색 입술이 보지 않아도 떠오를 정도로 생생하게 피부에 느껴졌다.

“아무것도 안 해.”

시우의 맨살에 대고 무경이 입술을 움직였다. 열 오른 입술과 뜨거운 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등줄기를 타고 전기가 올랐다.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잠시만 이대로….”

무경이 달래듯 중얼거리며 시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 딱딱한 치아가 박히고 뜨거운 살덩이가 맨살을 핥았다. 시우의 몸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틈 하나 없이 바싹 붙어 있는 상태라 젖은 바지 너머로 단단해지는 무경의 중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지만 시우는 무경의 상태보다 제 몸의 변화를 억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각인해 버린 몸은 시우의 의지와 이성에 반해 지금 저를 껴안은 알파의 페로몬을 갈구하고 있었다. 보다 강한 페로몬을, 보다 은밀하고 거친 접촉을. 입을 벌리면 신음이 새어 나올까, 시우는 입술을 깨물며 끙끙 앓았다. 하지만 무경의 손가락이 스칠 듯 말 듯 지나간 가슴 돌기는 이미 기대감에 차서 빳빳하게 섰고 성기도 어느새 반응을 보이며 조금씩 일어서고 있었다.

안 돼.

시우는 몸을 앞으로 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무경은 더 강한 힘으로 시우를 끌어당겨 제 몸에 바싹 붙였다.

“시우야….”

목을 씹을 기세로 빨아 대던 그의 입이 이번에는 귓바퀴를 핥으며 이름을 불렀다. 젖은 입김이 간지러워 고개를 돌렸지만 무경의 입술은 끈질기게 따라붙어 귓불을 물었다.

“시우야,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

달콤한 말에 갑자기 몸에 힘이 빠졌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것도 같았다.

순간적으로 늘어지는 몸을 무경이 단단하게 받쳐 안았다. 무경이 시우의 턱을 돌려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몇 번 입술을 빨다가 급하게 입을 열고 들어오는데 거부할 기운이 없었다.

그따위 입에 발린 소리, 그따위 싸구려 감언이설에 내가 넘어갈까 보냐고, 보고 싶었던 건 내가 아니라 내 몸이겠지, 머릿속으로는 싸늘하게 뱉어 주고 싶은 말이 한가득인데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무경의 입술은 어느새 시우의 가슴으로 내려와 있었고 한 손은 다리 사이를 헤집고 있었다. 한동안 성적인 흥분과 무관했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피크까지 달아올랐다.

“으응… 아앗… 흣….”

무경이 시우의 가슴을 깨물 때마다, 성기를 감아 쥔 손에 힘을 줄 때마다 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욕실은 이미 시우와 무경이 내뿜는 페로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리가 샐까 시우는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자, 잠깐만… 지우… 지우가….”

한 자락 남은 이성으로 시우는 무경의 어깨를 밀었다. 순순히 밀려 시우의 유두에서 입을 뗀 무경은 그러나 시우를 놓아주는 대신, 시우를 욕조 난간에 앉히더니 곧장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읏, 하, 하지 마….”

시우는 무경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제게서 떼어 내려 애썼다. 하지만 손가락에는 이미 힘이 들어가지 않은 지 오래였고 반면 시우의 허리와 허벅지를 움켜쥔 무경의 손등에는 핏줄이 파랗게 돋아 있었다.

“윽, 아, 아….”

시우는 허리를 굽히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어찌할 수 없는 쾌감이 머리 꼭대기부터 발가락까지 내달렸다. 발가락 끝이 확 오그라드는 순간, 현기증이 이는 것처럼 눈앞에 별이 부서졌다. 한동안 자극이 없는 생활을 한 탓인지 절정은 빠르게 찾아왔다.

“하아… 하아….”

저도 모르게 무경의 어깨로 무너져 내리며 시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경은 샤워기로 입을 헹구자마자 곧바로 시우의 입술부터 찾았다. 무경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시우가 숨이 차서 고개를 돌리는데도 입 가장자리라도 맞대려고 애를 썼다.

“힘들어… 비켜요….”

시우가 몸을 비틀어 가며 무경을 밀치고 힘들어하자 무경은 그제야 시우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는 잠자코 샤워기를 들어 시우의 몸을 씻어내리기 시작했다.

무경은 빠른 손놀림으로 샤워를 마치고 타월로 물기까지 닦은 뒤 곧장 샤워 가운으로 몸을 감아 침대로 데려갔다.

“괜찮아요? 어디 안 좋아요? 의사 부를까요?”

시우의 얼굴을 팔 사이에 가두다시피 하며 무경이 내려다보았다. 조금 흐려져서 저를 쳐다보는 부드러운 눈빛에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걱정하는 척, 연기하지 말라고.

시선을 돌리고 시우는 무경을 밀치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의사를 왜 불러요. 그냥 잠깐 쉬면 되는 걸. 욕실에서 무리한 짓을 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아….”

시우가 늘어진 게 사정 후의 탈력감이란 걸 그제야 깨달은 듯 무경의 얼굴이 머쓱해진다.

“난 또… 그럼 쉬어요. 나는 좀 씻어야….”

무경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 몸을 내려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꼴이 말이 아니다. 흠뻑 젖어서 몸에 철썩 달라붙은 드레스 셔츠와 정장 바지. 거기에 잔뜩 부풀어 성이 나 있는 중심도.

무경은 잠시 서서 시우를 내려다보았다. 몸을 돌려 이불을 뒤집어 쓴 시우는 무경과 눈을 맞출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도망치다 이제 막 잡혔는데 당장은 독이 잔뜩 오른 상태겠지. 시우의 몸을 만져 본 것만으로 급한 갈증은 풀었으니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달래면 되겠지.

무경은 한숨을 쉬고, 욕실을 향해 몸을 돌렸다.

***

시우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식욕은 없었지만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서 뭔가 먹기는 해야 했다. 지우만 식당으로 올려 보내고 혼자 남아 간단히 룸서비스라도 시켜 먹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러면 무경은 반드시 지우만 보내고 시우와 남아 있으려고 들 것이다. 그게 싫어서 시우는 군말 없이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시선은 줄곧 다른 한 곳으로 돌린 채로.

하지만 엘리베이터 내부의 양 사이드가 거울로 이루어진 탓에 지우와 이야기 중인 무경의 옆얼굴이 선명하게 시야에 잡혀 들었다. 시선을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겠지만, 바닥을 보든 숫자판을 보든 시선은 어느새 그의 얼굴로 홀린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그를 맞닥뜨렸을 땐 너무 놀랐고, 그 다음부터는 줄곧 그의 시선을 피할 생각만 하고 있어서 몰랐다. 프랑크푸르트 호텔에서 얼핏 보았을 때 창백하고 피곤해 보이던 얼굴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원래도 딱히 살집이 있는 얼굴이 아니었는데 턱이 칼날처럼 느껴질 만큼 살이 빠졌다. 핏기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안색이 창백한데다 눈 밑의 그늘도 심했다. 처음 본 사람은 무슨 지병이 있다고 생각할 수준이었다.

자신이 사라져서 마음고생으로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막상 정말로 아픈 듯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니, 지금 상태로 보자면 단순히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 뭔가 심각한 병에라도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쪽이야말로.”

시우가 중얼거리듯 말을 건넸다. 지우의 어깨와 목에 팔을 감고 장난을 치고 있던 무경이 얼굴을 돌려 시우를 쳐다봤다.

“응? 지금 뭐라고….”

“그쪽이야말로, 어디 아픈 거 아녜요? 병원 가 봤어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 채로 시우가 무심한 척 물었다.

“아….”

뭘 얘기하는지 잘 아는 듯 그가 눈 밑을 쓸었다.

“잠을 잘 못 자서. 특별히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에요. 왜, 걱정돼요?”

기대하는 눈으로 보는 걸 외면하며 시우가 쌀쌀맞게 뱉었다.

“…별로. 그냥 우리랑 있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문제 생길 수도 있잖아요.”

흣,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쓰러져도 최 비서님이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그냥 잠이 부족한 거뿐이고, 오늘은 잘 잘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내일은 괜찮을 거예요.”

“다행이네요.”

냉담하게 말하는데도 어쩐지 무경이 웃고 있는 것 같아 시우는 심사가 꼬였다.

괜히 물어봤다. 아프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신경 쓴다고 착각하는 게 싫었다. 아니, 신경 쓰는 제 속내를 들키기 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

무경의 말대로 저녁 식사는 맛있었다.

스위스 요리는 대체로 짜다는 얘기를 많이 하던데 무경이 미리 주문을 넣었는지, 음식은 시우의 입맛에 맞게 간이 약하고 재료의 맛을 많이 살린 스타일이었다.

셰프가 직접 와서 메인 디시인 스테이크가 스위스 소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는데, 자랑해도 될 만큼 육즙이나 육질이 훌륭했다.

다양한 치즈도 맛볼 수 있었지만, 치즈 맛을 잘 모르는 시우와 지우로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도 몇 개 있었다. 시우는 두어 개 맛보다 그냥 손을 놨지만 지우는 복불복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신중하게 치즈를 골라 작은 조각을 입에 넣고 오만상을 찌푸리곤 했다. 그래도 그걸 일종의 도전이라고 생각했는지 테이블에 올라온 치즈를 끝끝내 전부 다 맛보고는 알프스라도 정복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갖은 과일을 올리고 머랭과 다양한 빛깔의 아이스크림으로 멋을 부린 디저트를 마지막으로 식사가 끝났다.

지우는 배가 부르다고 난리를 쳤고 시우도 입 다물고 묵묵히 먹기만 하다 보니 은근히 속이 더부룩했다. 그 상태로 숙소에만 있기가 부담스러워서 옷을 두둑이 챙겨 입고 나와 밤 산책을 했다.

겨울의 호숫가는 추웠지만 야경이 아름다워서 산책로로 나쁘지 않았다. 무경과 신이 나서 떠드는 지우를 내버려두고 시우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걸었다. 지금 이렇게 속 편하게 다니고 있을 때가 아닌데, 지우 때문에 제대로 얘기조차 못하고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낮에 무경이 기차에서 뭐라고 했더라. 계약에 대해 짚을 게 많다고 했던가. 그 얘기를 하면 불안감에 심장이 조여 왔다.

계약. 임신 조항.

설마 무경이 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도, 유원과 강우도, 유정도 모르는데. 병원에 갈 때는 도청이나 위치 추적이 의심스러운 건 전부 놓고 갔다. 알 리가 없다. 그래. 괜찮을 거야.

나는 죽어도 너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딱 잘라서 얘기를 해 주어야 하는데, 솔직히 무서웠다. 무경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뭐라고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지지부진 시간을 끄는 꼴을 딱 잘라 끊어 내지 못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불안한 마음을 도닥이는 와중에 한참을 걸은 모양이었다. 지우가 졸린 것 같은데, 하고 무경이 말을 걸었다. 어느새 흥분해서 떠들고 있던 지우가 조용해져 있었다. 눈꺼풀이 무거워 보였다.

무경이 잠깐 전화를 하자, 거짓말처럼 어디선가 낮에 탔던 차가 나타나 그들 앞에 섰다. 갑자기 나타난 차에 지우가 우와, 하며 잠깐 잠이 깬 듯했다. 저렇게 어디를 가든 누군가가 쫓아다니는 건가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졌지만 시우는 그냥 입을 다물고 순순히 차에 올랐다.

한참을 걸어 나왔던 것 같은데 차를 타고 돌아가니 금방이었다. 같은 공간에 무경과 갇혀 있을 생각을 하니 목이 옥죄는 기분이었다.

***

걸으면서 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씻게 했다. 무경은 씻고 나온 지우를 냉큼 안아다 메인 침실의 침대 위에 눕혔다.

객실 메인 침실에 킹사이즈 베드가 하나고 다른 방에 트윈 베드가 있었는데, 시우는 저와 지우가 트윈 베드를 쓰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여기 눕혔는데 뭐. 그리고 여기 매트리스가 더 편하고 좋아요. 여기서 둘이 자요.”

이미 잠든 지우의 옷을 잠옷으로 갈아입히면서 무경이 심상한 어조로 말했다.

무경이 지우의 옷을 다 갈아입히고 일어섰을 때 시우는 무경이 다른 방에서 저랑 자자고 하지나 않을까, 혹은 이제 지우가 자니 얘기를 시작해 보자고 하지 않을까, 조금 긴장했다.

하지만 무경은 오늘은 일이 많아서 피곤하니 얘기는 내일 하자며, 쉬라는 말과 함께 뒤돌아보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

“하아….”

잔뜩 긴장해 있던 자신이 어이없을 정도로 시원한 퇴장이었다. 시우는 힘없이 침대 위에 늘어졌다.

사실 녹초가 될 정도로 피곤하긴 했다. 거의 기차에 앉아 있었으니 뻐근한 거 말고는 몸 지칠 일이 별로 없었지만, 어젯밤부터 내내 긴장한 탓에 신경이 지쳐 있었다. 외려 무경을 만난 이후로 무경의 페로몬 덕에 신경이 누그러지면서 그나마 잠을 청할 상태가 되었다.

그래.

얘기는 내일 하면 되지. 일단은 자자. 기력이 채워져야 싸워도 맑은 정신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고 다시 도망갈 방법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침대 옆 스위치로 불을 끄고 시우는 잠을 청했다. 마치 누군가 발목을 잡아채서 끌어당긴 것처럼 시우는 순식간에 수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면서 문득, 누군가 제 옆에 바싹 붙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불쾌하거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 아니라 포근하고 따듯하게 저를 감싸는 기분이라, 시우는 좀 더 몸을 웅크리고 그 품속에 파고들었다.

그가 제 목에 얼굴을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이마며 콧날이며 입술에 입을 맞추는 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가 떨어지자, 따듯한 숨이 사라지는 느낌에 되레 아쉬움이 들었다.

좀 더 해 달라는 듯이 내미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다시 입술이 닿아 왔다. 달달한 숨과 함께 한숨처럼 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사랑해, 시우야.”

***

눈은 떴는데 머리가 멍했다.

한동안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여기가 루가노의 호텔임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꿈결처럼 뒤따라오는 나직한 목소리.

‘사랑해, 시우야.’

순간적으로 흡, 숨을 멈췄다.

나도 참, 어이없는 꿈을.

시우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마른세수를 하며 헛웃음을 뱉었다. 그따위 말에 굶주리기라도 했나, 왜 그런 황당한 꿈을 다 꿨담. 빙글,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무경을 만나고, 그의 표면적인 다정한 행동에 각인된 마음이 제멋대로 설레고, 급기야 그런 황당한 멘트까지 상상하… 어?!

시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제 옆에, 무경이 누워 있었다.

베개까지 베고, 이불을 뻔뻔하게 함께 덮고서 곤하게 잠들어 있는 얼굴이었다.

이 사람… 뭐지? 아니, 대체 언제 여길 와서 자고 있는 거야?

시우는 당황해서 굳어 버렸다.

그럼 방금 떠오른 말은… 꿈이 아니었나? 아니야, 꿈이 아닐 리가.

이 사람은 행동은 다정하더라도 단 한 번도 자신을 진짜 연인으로 대해 준 적이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 따위, 당연히 할 리가 없다. 정말로 그럴 리가….

“에에… 무경이 형 여기 있네. 우리 어제 셋이서 잤어?”

뒤에서 들린 지우의 목소리에 시우는 흠칫했다. 돌아보니 방금 깨어난 듯 지우가 부스스한 머리에 잠이 덜 깬 눈을 하고 무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러니까 진짜 가족여행 온 거 같다. 침대 대따 커.”

지우가 입을 벌리고 진짜 즐거운 듯 크하하 웃는다.

“무경이 형 전에 놀러 갔을 땐 맨날 제일 먼저 일어나더니 오늘은 늦잠 자네. 얼굴에 낙서할까?”

지우의 장난기 어린 웃음에 시우는 슬쩍 무경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저 잘난 얼굴에 낙서라.

마음이 동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 상황에 그런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어쩌라고.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잘 지워지는 그림 도구가 없잖아. 안 지워지는 걸로 그렸다간 나중에 혼날지도 몰라. 이리 와, 자게 내버려 두고 우린 나가자.”

거실로 나와 대충 씻고, 어제 누가 잔뜩 사다 둔 옷을 찾아 챙겨 입었더니 8시 반이었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햇빛이 환한데다 바람도 별로 없어 보였다. 지척에 있는 호수 표면에 햇빛이 반사돼 거울처럼 부서지며 퍼졌다. 관광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아침 먹고 산책할까?”

지우에게 물었더니 좋다고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인다.

호텔 문을 열고 나가다 말고 시우는 멈칫했다. 문 앞에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지키고 섰다가 시우를 보자 묵례를 했다.

“식사하러 가십니까?”

“그…런데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남자가 시우를 저지한 다음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네. 지금 식사하러 가신다고 나오셨습니다. 아니요. 이사님은 안 계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다.

시우는 황당했다.

물론 제가 한번 도망을 쳤고, 여기까지 쫓아와서 저를 잡았으니 감시를 붙일 거라는 생각은 당연히 했다. 하지만 그저 근처에서 감시하는 정도겠거니 생각했지, 이렇게 일거수일투족을 대놓고 관리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지우도 어리둥절해서 혀엉, 하며 조금 불안한 듯 시우에게 매달렸다.

시우가 묵고 있는 층에는 객실 문이 몇 개 없었다. 한쪽 벽에 시우가 머무는 객실이 하나 있고 맞은편에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맞은편의 객실 문 두 개가 거의 동시에 열리며 사람이 튀어나왔다.

“아,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시우 씨.”

다급히 인사하는 남자는 어제 본 최 비서라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옆방에서 나온 건 어제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지우를 데려갔던 베타 여자.

“식사하러 가신다구요.”

아침 한번 먹기 엄청 힘들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네. 조식 먹고 호숫가나 둘러볼까 하는데요.”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주엽은 말을 하다 말고 저를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지우를 보더니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 지우는 저 누나랑 먼저 가서 밥 먹고 있을래? 아저씨가 형이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지우야, 가자.”

여자가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지우는 그 손을 한 번 보고 제 형을 한 번 본다. 따라가도 괜찮냐고 물어보는 눈빛이다.

“그래. 먼저 가서 먹고 있어. 형 금방 갈게.”

시우가 웃어 보였더니 지우는 냉큼 여자의 손을 잡으며 누나, 어쩌구저쩌구 하며 말을 걸기 시작한다. 어제 잠깐 본 것뿐인데 그새 친해진 모양이었다.

지우와 여자가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사라지자 손을 흔들며 웃고 있던 시우의 표정이 금방 굳었다.

“뭡니까? 나는 이제 밥도 마음대로 못 먹어요?”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주엽은 시우의 차갑게 돌변한 말투와 눈빛에 조금 버벅거렸다.

차무경의 ‘애첩’ 연시우에 대한 이미지는 주엽의 머릿속에서 계속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출발 전 처음 시우의 사진을 보았을 때 주엽은 솔직히 실망을 금치 못했다.

거대 재벌 MK 그룹 차기 회장이 될 차무경의 애첩이라길래, 최고 인기 배우의 얼굴을 수십 번은 후려갈길 엄청난 미인일 거라고 잔뜩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길에서 마주치면 저절로 시선이 갈 정도로 깨끗한 얼굴이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 미모는 차무경 주변에 이미 차고 넘쳤다. 계약 정부였다고 하니 극열성이나 열성일 거고 그렇다면 페로몬도 별 거 없을 텐데, 대체 뭘로 차무경 같은 극우성 알파를 사로잡았을까,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처음 시우를 실물로 만났을 때 처음엔 역시 너무 평범한데,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존재감이 강렬한 무경의 옆에 있으니 상대적으로 더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중을 들기 위해 가까이서 계속 얼쩡거리다 보니 시우가 보면 볼수록 더, 자꾸만 시선을 끄는 외모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이 고운 피부라든가 조용하면서도 유려한 몸가짐 같은, 직접 봤을 때 금방 눈에 띄는 부분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특유의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특히 어딘가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긴 눈매가 동생을 보며 웃을 때, 살짝 끝을 올리며 무경을 향해 화난 듯이 치켜질 때,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며 길게 내리뜰 때, 분위기가 확확 바뀌는 매 순간마다 심장을 들썩이게 하는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그제야 눈 한번 마주쳤다고 무경이 어이없이 날을 세우며 경계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저 알 수 없는 청년에게 당황스러운 건 당황스러운 거고, 업무는 업무다. 주엽은 큼큼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시우에게 물었다.

“이, 이사님은 아직 주무십니까?”

“그런가 봐요.”

시우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대답한다.

“저어, 사실.”

말을 꺼내다 말고 주엽은 경호원들을 봤다. 그러자 그들은 대번에 신호를 알아채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 끝으로 물러났다.

“이사님께서 시우 씨가 없어지고 난 뒤로 거의 못 주무셨습니다.”

“…….”

힐끗 주엽을 곁눈질하는 눈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듯한 반항적인 표정이 역력하다.

“엄…. 그래서 말인데, 식사는 객실로 올려드릴 테니 이사님 주무실 동안만 좀 곁에 있어 주시면….”

“제가 왜 그래야 하죠?”

단박에 나오는 거절에 주엽은 말문이 막혔다.

그야 댁이 애첩이니까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이 상황에 헛소리를 해서 경을 칠 인물이었으면 주엽이 이 나이에 이 자리까지 오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뭐라고 해서 설득을 하나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 이유를 몸소 보여 주겠다는 듯 객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

무경이었다.

파자마 차림에 부스스한 머리에… 심지어 무경은 맨발로 튀어나왔다. 아침에 잠든 무경을 깨우러 자택에 가 본 적도 있고 출장에 동반해서 호텔 방을 드나든 적도 많은 주엽이었지만 무경이 이렇게 흐트러진 차림새로 침실 밖을 나선 건 처음 보는지라 주엽의 입이 날파리가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쩍 벌어졌다.

“저, 저어… 이사님?”

하지만 주엽이 뭐라 하든 무경은 시야에 그를 담을 여유가 없어 보였다. 잔뜩 경직된 무경의 눈이 곧장 시우를 찾았다. 시우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도 잠깐 숨 막히는 몇 초가 흘렀다. 그리고는 깜빡, 눈을 닫았다 뜨더니 그 동안 정말 숨이라도 멎었던 사람처럼 긴 호흡을 했다.

“깜짝 놀랐어, 시우야… 여기서 뭐해?”

무경이 손을 뻗어 시우의 팔을 움켜쥐었다. 힘이 너무 강했는지 시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파요….”

“아, 미안.”

무경은 바로 손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놓을 생각은 없는지 팔을 쥔 손은 그대로였다.

“들어가요.”

무경이 부드럽게 말했지만 시우는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밥 먹으러 가려고 나온 거예요. 지우는 벌써 내려갔어요.”

“지우….”

무경의 시선이 주엽에게 향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주엽이 그의 찌를 듯한 눈길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 저 지우군은 혜린 씨와 같이 내려갔습니다. 경호도 함께 있습니다.”

“아, 혜린 씨.”

무경이 다시 시우를 보았다.

“그 사람 자격증도 있고 경험도 있고 신원도 확실한 사람이니까 걱정 없어요. 지우 잘 데리고 놀 겁니다. 일단 들어와요.”

“배고프다구요.”

시우가 버텼다.

“식사 올려 보내요.”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주엽 앞에서 무경이 끝끝내 시우를 객실 안으로 끌어당기자 주엽이 알아서 문을 닫아 주었다.

“진짜.”

문이 닫히자 힘이 조금 빠진 무경의 손을 시우가 거칠게 뿌리쳤다.

“이럴 거면 아예 가둬 두지 그래요?”

“그래도 돼요?”

너무 말간 표정으로 물어보는 말에 시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라구요?”

“그래도 되냐고. 가둬도 되면 나는 그 편이 안심돼서 좋은데.”

하.

시우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저를 정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비열한 수를 쓰고, 저를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감이라고 부르던 사람.

사랑이라니, 이런 사람이 저에게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아니 설사 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사랑의 정의는 제 머릿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 터였다.

“나는 지우랑 같이 호텔 조식을 먹고 산책을 나갈 거예요.”

시우는 현관에 버티고 서서 고집스럽게 말했다. 무경은 시우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얘기할 게 있지 않아요, 우리? 지우 있는 데선 못 하잖아. 무작정 미루고 싶은 건가, 혹시?”

“…….”

시우는 정곡을 찔려 움찔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마음속에는 속내를 다 털어 놓고 당장이라도 담판을 짓고 싶은 마음과 최대한 그 순간을 미루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담판의 순간을 미루고 싶은 것은 우선 무경이 무슨 패를 가지고 있을지 몰라 불안해서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보다는… 예전에, 무경이 저를 끌어들이기 위해 한 짓을 알고 싶지 않았던 기분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 관계를 완전하게 끝내는 순간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꾸 질질 끌다가 다시 어영부영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확실히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좀 씻고 나올게요.”

실컷 자고 났을 텐데도 피곤한 목소리를 내며 그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어제보다는 훨씬 나아진 얼굴이었지만, 눈 밑의 그늘은 여전했다.

시우가 없어진 이후로 무경이 거의 못 잤다던 주엽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렴 진짜 그랬을까. 열이 받고 신경이 쓰였을 테니 잠을 좀 설쳤을지는 몰라도, 그리 못 잔 건 아닐 터다. 과장에 거짓말을 잔뜩 섞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우는 무경의 까칠한 얼굴이 내심 신경 쓰였다. 욕실 쪽으로 향하던 무경이 문득 멈추더니 시우를 다시 돌아보아서, 시우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있을 거죠?”

“있기 싫어도 있어야 하잖아요. 밖에 감시병도 있던데.”

쌀쌀맞게 대꾸하며 시우는 소파 위에 몸을 앉혔다.

무경은 시우의 찬바람 부는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욕실 안으로 사라졌다.

***

무경이 씻고 나온 것과 거의 동시에, 마치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아침 식사가 도착했다.

직원이 밀고 들어온 트레이는 각종 음식 쟁반으로 그득했다. 한순간에 거실에 뷔페 상이 차려진 기분이었다.

견과류를 포함한 시리얼도 세 종류, 과일 주스도 세 종류, 차와 커피 주전자가 둘 다 있고, 삶은 계란과 스크램블 에그, 크루아상을 비롯한 각종 빵들, 요거트, 과일과 야채샐러드, 오믈렛, 훈제연어, 팬케이크, 치즈, 햄, 소시지….

이럴 거면 지우를 왜 내려 보냈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냥 다 같이 먹고 산책을 했어도 됐을 텐데.

커튼을 걷은 거실은 겨울 아침 햇살로 가득하고 창밖은 루가노 호수의 정경이 펼쳐져 있었다. 고급 호텔 레스토랑의 VIP 테이블이 부럽지 않은 환경이었다.

딱히 입맛이 도는 건 아니었지만 아이를 생각해서 꾸역꾸역 배를 채웠다. 다 먹고 나서는 창가 쪽으로 놓인 소파로 자리를 옮겨 입가심으로 레몬을 넣은 홍차를 마시는데 문득 옆에 앉은 무경이 심하게 조용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흘깃 시선을 던졌다.

하….

앞에 커피 잔을 놓고 앉아, 팔짱을 낀 채 어느새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잠든 얼굴을 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지만 졸고 있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이봐요, 차무경 씨.”

시우는 소파를 탁탁 쳤다.

“음?”

눈꺼풀이 무거운 듯 그의 눈이 아주 조금 열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얘기하자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죠… 근데… 식곤증인가… 왜 이렇게 졸리지….”

그가 눈을 비비며 웅얼거리듯 말했다.

점심도 아니고 아침을, 그것도 먹자마자 식곤증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시우가 소리 내어 헛웃음을 뱉었다.

“응….”

“?!”

시우가 흠칫했다. 무경이 대뜸 시우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시우의 배 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로. 무경은 시우가 움찔거리자 팔을 뻗어 허리를 감아 왔다.

“조금만, 10분만, 이러고 10분만 잡시다. 그리고 얘기해요. 얘기를….”

뭐라고 입속으로 웅얼거리더니 시우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무경은 까무룩 잠에 빠져 들었다.

***

무경은 어느 그림 앞에 서 있었다.

그림 속에서 벚꽃이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림을 뛰쳐나올 것처럼 정면을 향해 달리고 있고, 젊은 엄마가 다칠까 조바심을 내며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었다.

무경은 그림을 보면서 저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고 있었다. 그립고 그리운. 엄마가 아직 온전한 정신으로, 무경아, 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부르며 우리 예쁜 아들, 하고 꼬옥 안아 주던 시절.

손을 뻗어, 엄마의 얼굴을 쓸어 보려 하는데, 눈앞이 조금 흐려졌다. 다급히 눈을 깜박여 물기를 지웠는데도 그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황망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실내였는데, 무경은 어느새 운동장으로 나와 있었다. 어딘지 낯익은, 벽돌색 건물이 가까이에 버티고 서 있었다.

고등학교…?

퍼억.

“우왓!”

아이 하나가 무경에게 부딪혀 비틀댔다. 넘어질 뻔한 아이를 반사적으로 잡아 부축했다. 손에 잡힌 팔의 두께가 가늘다. 옅은 빛깔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서늘한 햇살에 보기 좋게 찰랑였다.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고개를 제대로 들기도 전에, 무경의 옷을 확인한 아이가 허리를 굽힌다. 무경은 제 옷을 내려다보고 또 아이의 옷을 확인했다. 저는 고등학교 때의 교복을 입고 있었고, 아이의 회색 차이나 칼라는 같은 재단의 중학교 교복이었다.

“괜찮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넌 괜찮아?”

“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멀리서 연시우,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움찔하며 그 쪽을 바라본다. 그 이름에 무경도 반응했다.

연시우라고? 이 아이가?

무경은 제 친구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지금보다 조금 더 둥근 눈, 둥근 뺨. 작은 입술. 조막만한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 그러네. 시우다. 중학교 때의 시우.

다시 한 번 무경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작은 시우가 팔랑거리듯이 제게서 달아난다. 저에게 부딪혔을 때 살짝 풍겼던 허브티의 잔향이 아주 잠깐 머물렀다 사라졌다.

베타일까, 오메가일까.

베타라기엔 진하고 오메가라기엔 약한 향.

가느다란 뒷모습을 보면서 했던 생각이었다.

연시우를 처음 만났던 날.

***

무경은 눈을 떴다.

머리가 가벼웠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근래 들어 이런 기분으로 잠을 깬 적이 있었던가.

멍한 상태로 누워 있으면서, 무경은 꾸었던 꿈의 뒷부분을 떠올렸다. 제가 고등학생 때 중학생이었던 연시우.

지금 그때 얼굴을 떠올리니 참 아기였네, 싶다. 뭐 저도 어렸었지만.

고개를 조금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파에 발을 올리고, 무릎에 어제 사다 준 스케치북 노트를 놓은 채 망연히 밖을 바라보고 있는 시우가 보였다.

저를 그려 주는 거라면 좋으련만. 무경은 누가 자신을 관찰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시우의 시선은 조금이라도 더 길게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헛된 기대를 품을 틈도 없이 풍경 스케치만이 잔뜩 그려져 있는 종이 표면이 금새 무경의 시야에 들어찼다.

쯧.

속으로 혀를 차며 무경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시우의 다리를 베고 잤던 것 같은데 지금 무경의 머리 아래 놓인 건 침실 베개였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시가 넘어가는 시간이다. 좀 아쉽기는 해도 지금까지 무릎을 신세졌다간 피가 안 통해서 다리가 저렸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째서 10분이 3시간이 되는 거죠.”

무경이 일어나는 걸 본 시우가 한숨을 섞어 말을 걸었다.

그러게. 아무리 그 동안 잘 못 잤다고 해도 어떻게 이렇게 수면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자 댈 수가 있는 거지.

하지만 덕분에 간만에 개운한 기분이었다. 금방 깨어났는데도 제법 머리가 맑았다.

“미안해요. 벌써 1시네…. 점심 먹을까요?”

잠이 묻어 거칠어진 목소리로 무경이 멋쩍게 물었다. 시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먹고 나면 식곤증이라고 누군가가 또 자 버릴 것 같아서 안 되겠어요.”

“음…. 그러면 차라도 한잔?”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봐요, 차무경 씨, 대체 왜 스위스까지 온 거예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이 무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오다니, 데리러 온 게 당연하잖아요. 나도 휴가를 얻었으니 이참에 함께 푹 쉬다가 같이 돌아가면….”

시우가 무경의 말을 싹둑 잘랐다.

“난 안 돌아갑니다. 당신이 날 데리러 올 이유도 없고, 내가 당신을 따라 돌아갈 이유도 없어요.”

“연시우 씨.”

“우리는 남남이라고 말씀 드렸죠. 계약은 그날로 해지된 걸로….”

“시우 씨.”

이번에는 무경이 재차 시우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끊었다.

“계약 얘기는 더 안 했으면 좋겠는데. 굳이 계약을 따져서 시우 씨한테 좋을 거 없어요. 계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지 요건이 충족이 안 됐어요. 약혼은 결혼에 준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결혼식을 올리거나 혼인신고를 해야 해지가 가능한 거죠.”

“그건….”

시우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무경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서 시우 씨는 지금 계약 기간에 돌발 행동을 한 겁니다. 내 허락도 받지 않고 해외여행이라니요. 계약 위반이죠. 최소 내년 3월까지는 내가 찾을 때마다 내 곁에 있어야 하는데.”

“야, 약혼자가 있잖아요. 이제 성인이 됐고… 내가 없어도….”

“시우 씨.”

무경이 한숨을 쉬었다.

“유원이한테 따로 애인이 있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 애나 나나 결혼 전부터 굳이 몸을 섞을 만큼 서로에게 마음이 없어요. 다 알면서 왜 그런 소리를 하지….”

답답하다는 그의 말투에 시우가 울컥했다.

“알기는 내가 뭘 다 알아요. 나는 결혼이 코앞인 주제에 정부를 둬야겠다는 그 발상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

바르르 올라오는 화를 누르며 시우는 숨을 들이켰다.

“차무경 씨, 당신… 대체 날 좋아하기는 합니까? 아니, 날 원한다고 하는 그 말에 사랑은 있어요?”

어젯밤의 그 고백은 대체 뭘까. 진짜 꿈이었을까, 아니면….

“난 처음부터 말했어요. 시우 씨가 내 애인이라고.”

“그건 답이 안 돼요. 애인이란 말을 가볍게 쓰는 사람도 많으니까.”

무경이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뭐가 달라져요? 사랑한다고 하면, 내 곁에 계속 남을 겁니까? 그렇다면 백 번이라도 말해 줄 수 있어요.”

하.

헛웃음이 샜다.

하기야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사랑도 중요하지 않고, 결혼도 중요하지 않고.”

시우는 중얼거렸다.

“대체 당신한테 중요한 건 뭡니까?”

도전적인 얼굴로 시우가 물었다. 마주 바라보는 무경의 표정은 가라앉아 있고 조금 어두웠다.

“…같이 있어 주는 것.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는 한숨을 덧붙였다.

“나는 행동으로 시우 씨가 소중하다는 걸 표현해 왔어요. 진짜 중요한 건 그거 아닙니까?”

소중하게라….

몇몇 사실들이 뇌리를 스쳤다.

유원이 처음 빌라에 왔던 날의 외로웠던 밤. 무경이 제 아버지에게 시우를 두고 장난감이라고 불렀던 것. 그리고 시우를 계약에 끌어들이기 위해 무경이 했던 일들.

“시우 씨. 나는 시우 씨한테 많은 걸 해 줄 수 있어요. 평생 다른 걱정 안 하고 그림만 그리며 살 수 있게 해 줄 거고, 지우도 원하기만 하면 음악 공부를 제대로 시켜줄 수 있어요. 유학도 보내고 최고의 교수진을 붙여서….”

“특별하거나 소중하지 않아도 다정하게 대할 수는 있어요. 바라는 게 있다면 말이죠.”

무경의 말을 자르며 시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똑바로 무경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나는 딱히 그런 다정함에 내 삶을 저당 잡히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당신이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당신도 내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고. 그러니까 우리는 안 맞는 거예요. 함께 할 수 없는 겁니다.”

시우의 단호한 말에 무경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시우 씨는 내가 모든 걸 버리고 당신과 결혼하기를 바라요? 그래서 이러는 겁니까?”

“그건 왜 물어요? 어차피 결혼을 깰 생각도 없잖아요.”

“…….”

“나와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당신이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면서 나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사실이죠. 그게 당신에게는 별 거 아닌지 몰라도, 내게는 내 자존감과 가치관이 걸린 중요한 문제예요.”

“연시우 씨….”

“나는요, 그냥 평범한 일반인이에요. 당신네 세계의 가치관을 나한테 강요하지 마세요. 사랑해도 결혼 못할 수 있죠. 하지만 누군가의 정부로 살아야 한다는 건 얘기가 달라요. 나한테는 친한 친구들이 있고, 가족이, 지우가 있어요. 유정이한텐 뭐라고 말하죠? 지우한테는요? 다들 내 애인으로 알고 있는 당신한테 사실은 부인이 따로 있고, 나는 그냥 찾아오면 다리나 벌려 주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어떻게 털어놓죠? 지우가 지금은 당신을 형, 형 하면서 따라도, 다른 사람과 결혼한 걸 알면서까지 따를 것 같아요?”

“나는 지우와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지만 어디까지나 우선순위는 시우 씨에요. 시우 씨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지우와 사이가 벌어지는 정도는 감수할 겁니다. 다른 사람 생각 따위 상관없어요. 나는….”

“다른 사람 생각 따위라고요? 나는 지금 내 생각을 말하고 있어요. 내가 싫단 말입니다. 친구에게, 동생에게 말 못 할 관계, 알면 경멸당하거나 불쌍하게 여겨질 관계, 그런 관계를 맺는 게 싫다고요! 당신한테는 내가 느끼는 자괴감이나 비참함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고도 날 소중히 여긴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나야말로 당신 생각 따위 상관없어요!”

시우는 감정이 넘친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손이 벌벌 떨렸다. 주먹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한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잠시 주변을 서성거렸다. 창가로 가 밖을 내다보며 입을 앙다물고 있다가 한참 만에 다시금 몸을 돌려 무경을 보았다.

표정은 가라앉았지만, 입을 열어 내어놓는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나는 당신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장난감이 아니에요.”

장난감이란 말에 무경이 움찔했지만, 시우는 그저 목소리를 떨며 말을 이을 뿐이었다.

“당신이 찾아서 가지고 놀 때만 존재 가치가 있고 나머지 시간에는 벽장에 갇혀서 당신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태어난 게 아니라고요. 나는 의지가 있고 감정이 있는 인간이에요. 내 삶이 있고 내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이 얼마나 오만하면, 타인에게 그 모든 걸 버리고 당신만을 위해 존재하라고 강요할 수 있죠? 내가 당신 정부로 계속 머물면 당신이 속한 세계의 사람들은 당신 고모가 나를 보듯 그렇게 나를 보겠죠. 무슨, 인형처럼, 한낱 소유물처럼. 내가… 자존감이 강철처럼 강하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누가 뭐라고 하든 고개 들고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해요. 나는 지금까지의 나를 형성하는 도덕과 가치관이 있어요. 지금껏 배운 도덕과 가치관으로는 그런 삶은 받아들일 수 없단 말입니다.”

하물며 나 혼자라면 몰라도, 자식마저 정부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거나, 아예 남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삶이라니! 그런 건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시우는 내놓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짓씹어 삼켰다.

“이 악물고 고개를 뻣뻣이 쳐든다고 해서 상처 받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아프다고 쉽게 울지도, 위로 받지도, 치료받지도 못하는 상처는 오히려 속으로 곪아 가겠죠. 지난 몇 개월 동안에도 나는 내 속을 터놓을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 숨이 막혔어요. 그런 시간들을 앞으로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저 끔찍할 뿐이에요. 당장은 어떻게든 버티어도, 언젠가는 나를 이렇게 만든 당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게 될 겁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그걸 결정한 권리는 당신이 아니라 내게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각인까지 했잖아.”

무경의 목소리도 조금 떨렸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솔직히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는지 어떤지도 모르겠어요. 그저 남은 건 각인의 조건 반사 같은 고정된 감정뿐이야. 내 마음과 몸은 당신의 이름 석 자에도, 목소리에도, 페로몬 한 조각에도 반응을 해요. 하지만 그게 내 진짜 감정인 건지, 이제 모르겠어요. 난 내가 마치 프로그램이 내장된 인형처럼 느껴져. 그게 당신이 진짜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격앙된 감정이 가라앉은 듯 다소 낮아진 목소리로 시우는 긴 이야기를 끝냈다. 지친 듯이 잠깐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 깔았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무경의 눈을 곧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를 강조하듯이 힘을 주면서 천천히 마지막 말을 뱉었다.

“나는 각인을 깰 겁니다. 차무경 당신과 철저하게 헤어질 거예요.”

***

“…….”

“…….”

침묵이 둘 사이를 심해처럼 감쌌다. 그러는 사이 할 말 다 했다는 듯 차분히 가라앉은 시우의 눈동자와 온갖 감정이 넘실대며 끓어오르기 시작한 무경의 눈동자는 줄곧 부딪히고 있었다.

“각인을 깨?”

한참 만에 무경이 입을 열었다. 표정에 날이 서고 낮은 목소리가 쇳소리를 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감정을 억누르듯 꽉 쥔 무경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시우는 시선을 돌렸다.

“방법을 찾고 있어요.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들었어요.”

반은 진심이고 반은 욱하는 마음에 한 소리였다. 찾아본다고 해 봤자 정식으로 알아본 것도 아니고, 도망까지 와서 자꾸 생각이 무경에게 달려가는 스스로가 짜증이 나 충동적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 본 게 고작이다.

시우가 알고 있기로도, 각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스스로 깰 수도 없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각인은 자의적으로 깨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죽거나 혹은 본인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때 저절로 깨지는 거라고 들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예외는 있듯이 간혹 스스로의 의지로 각인을 깼다는 얘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진위 여부는 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어차피 뇌가 하는 일이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세뇌를 시키면 언젠가는 깰 수 있지 않을까. 극열성인 자신이 임신도 했는데 각인을 못 깰 건 또 뭔가.

하지만 시우의 이 발언은 무경의 안에 있는 뭔가를 건드렸다. 시우가 도망을 갔어도, 저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 저에게 각인을 했다는 것으로 끊기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다고 믿으며 간신히 억눌러 놓았던 불안감이 일시에 증폭했다.

무경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보고 있던 시우는 갑자기 엄습하는 무경의 형질에 일순 숨이 막혔다. 다급히 시선을 돌리자 언제 다가온 건지 무경이 그의 옆으로 바싹 가까워져 있었다. 시우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거친 손길에 저도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시우보다 무경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다. 무경은 시우의 어깨를 잡아채, 그대로 벽에 거칠게 밀어붙였다.

“연시우.”

무경은 살기라고까지 느껴질 정도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시우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이를 갈 듯이 말했다.

“나는 너를 안 놔줄 거니까, 버티려면 각인한 상태로 있는 게 네 정신 건강에도 좋을 거야.”

무경이 저를 이런 눈빛으로, 이런 말투로, 이런 힘으로 대한 적이 없었기에 시우는 불시에 치미는 두려움을 느꼈다. 기차에서 형질로 마크의 목을 조이다시피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몸을 비틀어 그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피부를 파고들 듯 움켜쥐는 무경의 악력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놔, 놔요. 비켜요!”

겁에 질린 시우의 눈을 들여다보며 무경이 차게 웃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해? 내가 무서워? 내가 너한테 손을 댈까 봐? 그런 짓은 안 해. 넌 나한테 소중하다고 이미 말했잖아.”

무경의 건조한 손이 시우의 얼굴을 쓸었다.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졌지만 그 속에는 한껏 억눌린 감정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닿았던 손은 시우가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다시 강한 힘을 쏟아 내며 턱을 쥐었다.

조금씩 떨리는 입술에 무경의 입술이 닿아 왔다. 살짝 부비듯이 하며 달달한 숨이 넘어온다. 저절로 일어나는 충동은 고개를 기울여 입을 열고 그의 숨을 들이마시라고 명령하고 있는데, 시우는 필사의 노력으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자 무경이 시우의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꽉 물었다. 아, 신음을 토하며 시우의 입술이 열렸다. 아니, 사실 입술을 벌린 건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무경의 페로몬이 확 짙어졌기 때문이다. 온몸의 세포가 무경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면서 전신이 잔물결이 일듯 떨리기 시작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무서운데, 싫은데, 밀치고 싶은데, 몸이 떨리는 건 그를 두려워하거나 거부해서가 아니었다. 무경이 닿는 곳, 건드리는 곳마다 갈증에 몸부림을 치는 것처럼 스파크가 일었다. 뒤가 젖어 들고 있었다. 짜증이 나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시우야….”

“경찰을….”

진득하게 입안을 헤집던 무경의 입술이 떨어지자 시우가 젖은 입술을 떨며 말했다. 무슨 말을 하나, 무경의 눈썹이 의아하게 치켜졌다.

“경찰을 부를 거예요. 신고할 거라고요.”

잔뜩 거칠어진 숨을 들이켜며 시우가 말했다. 무경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의아한 얼굴로 한참 동안 시우를 들여다보았다.

그런 무경을 노려보면서 가쁜 숨을 들썩이다가 시우가 다시 독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나를 스토킹해서 납치하고 감금했다고 말할 거예요. 더 이상 나를 만지면 성폭행으로도 신고할 겁니다.”

무경의 표정이 굳었다. 입을 꽉 다물고 격한 감정이 넘실대는 눈으로 한참 동안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경의 얼굴에서 거친 기색이 사라졌다. 아니 억눌렸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뒷면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감정의 용암이 들끓는 걸 시우는 느낄 수 있었다.

“아, 경찰. 좋아요, 불러요. 아니, 내가 불러 줄까?”

무경이 시우를 놓아주며 말했다. 실제로 소파의 테이블로 돌아가 제 핸드폰을 집어 올리기까지 했다.

“이쪽은 이탈리아어를 쓰는 지방이니 이왕이면 통역까지 붙여 줄까요? 서툰 영어보단 그 편이 더 나을 테지.”

시우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 말라는, 하기 싫다는 강력한 표현이었을 뿐이다. 정말로 경찰에 신고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지만 시우 씨도 알고 있죠? 지금 상황에서 내가 굳이 집안의 권력과 자금력을 이용하지 않아도, 경찰을 끌어들이는 건 시우 씨한테 한참 불리하다는 걸.”

무경이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삐뚜름하게 비틀며 말을 이었다.

“나는 계약을 어기고 달아난 상대를 잡으러 왔을 뿐이고, 그 계약 상대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것도 통념상으로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시우 씨는 어떨까. 계약 불이행은 둘째 치고, 위조 여권으로 국경을 넘었지. 문제가 커질 겁니다. 지우까지 있는데.”

무경이 시우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시우를 무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저 평범한 일반인인 연시우 씨.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러요? 국제사범이라도 되고 싶어요? 무엇보다, 한강우, 은유원이 바라는 게 뭐일 줄 알고 이런 도움을 덥석 받습니까? 이러다 걸리기라도 하면 그 친구들이 나서서 구해 줄 것 같아요? 꼬리는 자르고 숨어 버릴 겁니다. 시우 씨, 바보예요?”

동요하는 시우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무경은 말을 이었다.

“은유원이 순진하고 착해 보여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속을 누가 알아. 그 애도 나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에요. 게다가 극우성 오메가. 이쪽 세계에서 우성이나 극우성 오메가들은 옛 황제의 정비나 다름 없어요. 정략결혼으로 시작한 관계니 배우자의 애정 따윈 처음부터 바라지 않아. 대신 극우성 알파를 낳아 후계자로 만들어 배우자의 지위와 재산을 전부 물려받도록 하는 걸 인생 최대의 목표로 알고 살지. 그래야 그 권력과 부를 자신의 것처럼 누릴 수 있거든. 유원이라고 다를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 있는 애가 배우자가 될 알파의 정부를 도망시켜? 그게 무슨 뜻일 것 같아요?”

“나는… 나는….”

동요하듯 말을 더듬던 시우는 잠깐 말을 멈추고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하다가, 이윽고 입술을 깨물며 눈에 힘을 주었다.

“나도 딱히 그 사람들이 그저 단순한 호의로 나에게 이런 도움을 준다고 믿는 건 아니에요. 그럴 이유가 없잖아. 유원이나 강우 씨나 이미 말을 했어요. 나를 이용하고 싶다고. 강압이 아닌 제안을 받았고 그걸 수용한 건 나예요. 나는 선택을 한 겁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 사람들의 돈과 능력이 필요했으니까. 그 사람들이 나를 이용했다면, 나도 그들을 이용한 거니까, 피차 마찬가지예요.”

시우의 말도 얼굴도 점점 더 열을 띠었다.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나를 이용했건, 나는 비난할 생각이 없어요. 굳이 나쁘게 말하면 서로를 이용한 거지만, 좋게 말하면 서로 도운 거죠. 나는 당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지우도 있고,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어요. 내가 원한 거예요. 오히려, 안 지 얼마 되지도 않는 타인인 그들에게 아무런 대가도 내놓지 않고 도움을 바란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들이 원하는 게 뭐일 줄 알고 덥석 도움을 받냐고요? 그들이 원하는 게 뭐든, 당신이 나에게 원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의 장난감이 되어 인생을 저당 잡히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뭐가 있겠어요?”

독을 품고 말하는 시우의 말에 무경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무경이 성큼 다가와 시우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무슨 목적으로 이용했건 상관없다고?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없어? 걔들이 원하는 게! 네 뱃속의 아이라면 어쩔 건데?”

무경이 부딪칠 듯 살벌한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이를 으득 갈며 뱉어 내는 말에 눈앞이 아찔했다. 비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벽에 부딪힌 몸이 힘을 잃고 주르륵 무너져 내렸다.

아이라고? 설마, 알고 있었어? 거짓말! 어떻게?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말보다 아이라는 말이 무경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손이 덜덜덜 떨려서 시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니야, 이러면 안 돼. 이러면… 너무 티가 나잖아. 일단은 잡아떼야….

“당신, 지금… 무슨 말을…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나 띄엄띄엄 말을 뱉어 내는 시우의 얼굴은 누가 봐도 패닉 상태라 누군가를, 더군다나 바로 코앞에서 벌건 눈을 하고 있는 차무경을 속일 수는 없었다.

“쓸데없는 소모전은 관두죠. 진료증 발견해서 병원에 확인까지 마쳤습니다. 무엇보다 은유원과 몰래 연락하던 번호를 어디서 얻었다고 생각해요?”

씹어뱉듯이 말하는 무경 앞에 시우는 할 말을 잃었다.

“…….”

“…….”

한동안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지배했다. 시우는 반쯤 넋을 잃은 상태였고 무경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무표정한 얼굴로 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약은… 계약은 무효예요.”

불현듯 침묵을 깨며 시우가 뱉었다.

“…계약?”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하고 무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시우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눈에 날을 세우고 무경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나를… 속였잖아요. 함정을 파고 덫을 놓고… 계약에 사인하도록 사기 친 거나 다름없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계약이 유효할 수 있죠? 그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예요.”

무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파악하겠다는 듯 시우의 창백한 낯을 샅샅이 훑었다.

“내가, 등신처럼, 그 사실을 알기도 전에 당신을 좋아하게 되고 각인까지 해 버려서,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왔어요. 하지만 더는 아니에요.”

무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냥 가만히 시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양심은 있어 찔려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당신 정부도 뭐도 아니고… 아이에 대해서도 그래요. 나는 그 계약서 조항을 지킬 의무가 없어요. 전부 사기니까.”

무경을 노려보며, 시우는 마침내 모두 내뱉었다.

“연시우 씨.”

무경은 한참 만에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진짜 왜 이렇게 순진하게 굴어. 아까도 말했듯이 법을 들먹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아직도 법이 정의를 구현한다고 믿어요? 법은 가진 자의 편입니다. 아직도 그걸 몰라요? 내가 시우 씨를 속여서 계약에 끌어들였다… 증거가 있어요? 확실하게, 내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시우 씨를 끌어들였다는 증거 말입니다.”

“증거는….”

시우는 강우가 보여 주었던 자료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 자료대로라면 그 의사들이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고 불법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정황까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의 돈을 받은 것까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게다가….

“의사들은 말을 안 할 겁니다. 아니 못할 겁니다. 실제로 누가 돈을 준 건지, 그 행동에 숨은 의도가 뭔지, 상세한 사실은 전혀 모르기도 하고요. 그들은 돈이 필요한 나머지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한 게 다라고 할 겁니다. 게다가 시우 씨가 알고 있는 증거는 진짜일까요? 조작된 게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 설혹 진짜라고 해도, 그게 합법적으로 수집된 자료일까요? 불법적으로 모은 거라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되지도 않습니다. 그 자료를 준 건 한강우겠죠? 그렇다면 십중팔구는 제대로 된 방법으로 모은 게 아닙니다. 내가 장담하죠.”

시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말도 못하고 얼어 버린 시우의 얼굴을 보고 무경은 한숨을 쉬었다. 허리를 굽혀 몸을 안아 일으키려는 듯 주저앉아 있는 시우에게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시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의 손을 뿌리쳤고 무경의 얼굴도 다시 굳었다. 무경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페로몬이 거칠 것 없이 확 번졌다. 시우의 몸이 힘없이 늘어지기까지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싫어… 싫다고….”

시우가 흐느적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페로몬의 힘으로 저항이 약해진 시우를 무경은 별 어려움 없이 안아 올렸다.

축 늘어진 시우를 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힌 다음 꽉 감은 눈에 입을 맞췄다.

“이제 착한 척은 안 할 거야.”

무경이 시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닌 거, 너 이제 다 알잖아, 시우야.”

***

“시우 형 괜찮을까.”

유원이 제 앞에 놓인 접시를 포크로 톡톡 건드리며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급기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차 이사님 화 많이 났을 텐데, 설마 때리거나 하지는 않겠지. 애도 있는데.”

강우는 유원의 접시를 흘깃 훑어보고 샐러드 재료를 따로 담아 놓은 접시에서 연어와 유기농 체리 토마토를 좀 더 덜어 담아 준다.

“글쎄, 괜찮지 않을까.”

접시를 다시 유원의 앞으로 밀어 주고 나서, 강우는 전화 건너편 시우 목소리를 들었을 때 무경이 지은 표정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 인간이 또라이 기질은 있어도 DV 계열의 또라이는 아닌 거 같으니까. 그리고 보고 들어온 거에도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고 했잖아. 걱정하지 마.”

“으응… 그러면 다행인데….”

유원은 강우가 올려 준 토마토를 포크로 데굴데굴 굴리다 쿡 찍었다. 하지만 역시 입에 넣기 전에 한숨부터 쉰다.

“결국 도망도 2주일을 못 넘겼네. 하기야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가 너무 많았지. 시우 형이 임신한 것도 그렇고 차 이사님이 직접 그쪽으로 날아간 것도 그렇고….”

그 점은 강우도 동감이었다. 사람을 보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쫓아갈 줄은 몰랐다. 그 속모를 일벌레가.

차무경 대체 무슨 생각이지. 미친 건가. 아니면 진짜 각인이라도 했나.

“차라리 우리가 도망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시우 형이 원한다면 넷이 같이…라든가.”

유원이 토마토를 입에 넣으며 흘깃 강우의 눈치를 본다.

“네가 끼었으면 더 빨리 잡혔겠지. 차무경뿐만 아니라 너희 집안까지 움직였을 텐데. 애당초 임산부와 애까지 데리고 장기간 도망 다니는 건 무리야.”

유원이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걸 알면서도 강우는 시선을 피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어떡해….”

유원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평소 좋아하는 연어 살을 짓이기고만 있는 걸 보니 식욕이 완전히 떨어진 모양이다.

“…….”

강우는 한숨을 쉬었다.

유원이 같이 도망가자는 얘기를 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 전부터다. 어차피 그때는 어린애였으니 강우는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흘려 넘겨 왔었다. 하지만 이제 성년도 됐고, 결혼식도 정식으로 잡히고 나니 저도 애가 타는지 제법 강력하게 의사 표시를 해 온다.

하지만 어제의 어린애가 앞자리 숫자 하나 바뀐다고 다음날 바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강우의 눈에 유원은 여전히 어린애였다. 그리고 아마 제가 첫사랑일 테고.

그런 어린애 감정에 어른인 자신이 덥석 덤벼들어, 하나의 세계가 뒤바뀔 수도 있는 엄청난 일에 쉽게 동참할 수 있겠는가. 유원을 가지겠다는 이기심 하나로 이 애가 가진, 혹은 가지게 될 그 거대한 부와 권력이라는 날개를 마음대로 앗아 버려도 되는 건가.

강우는 자신이 없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곱게 살아 온 유원이 소박한 일반인의 삶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잠시 쉬어 가는 호텔이나 식사 비용으로 별 생각 없이 하루에 쓰는 돈이 어지간한 직장인의 한 달 월급을 가볍게 넘어서는 금액이라는 걸 유원은 모른다. 아니,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 몰라도 절대 실감은 하지 못할 것이다.

도망쳐서 일반인으로 살게 된다면, 결국은 보통 사람의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강우를 원망하며 미워하게 되지 않을까? 결국엔 시든 꽃처럼 되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강우를 버리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고 지금 당장 유원을 끊어 내기에는 강우 마음도 그리 가볍지는 않았다. 아니 유원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깊었다. 단지 강우가 원한 건 시간이었다. 유원이 좀 더 자유롭게, 결혼하지 않고, 누구의 것도 아닌 상태로 저를 만나며 둘의 관계와 미래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유원이 좀 더 단단해지고, 세상을 알고, 그래서 스스로 냉정하게 결정을 내리고 선택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함께 미래를 그려 보고 싶었다. 나이를 좀 더 먹어서도 저와 달아나고 싶다고 한다면, 강우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니, 그래 주기를 바랐다.

무경과의 결혼은 아마 당사자 두 사람의 의사가 어떻든지간에 이대로는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이다. 거대 재벌 그룹 간의 결합이고, 이 세계에서조차 드문 극우성 간의 결합이다. 배경과 연령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상대는 현재 서로 외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강우는 단지 결혼이 연기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시우가 좀 더, 숨바꼭질을 하며,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애를 태우다 결정적인 순간에 결혼 연기를 요구하고 모습을 감춰 버리는 것. 그래서 애가 탄 차무경이 결혼식을 파투 놓는 것. 그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약혼이 깨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연기는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시우가 임신한 순간 실패한 거였다. 임산부에게 그런 장기전을 요구하는 건 무리였다.

자, 그러면 이제 어쩌지.

유원이 원하는 야반도주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했다. 도망의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 현재로서는 그 이후의 그림이 강우에게 잘 그려지지 않았으니까.

일단은.

강우는 한숨을 쉬었다.

차무경이 시우를 데리고 돌아오면 돌아가는 판도를 지켜봐야겠지. 그리고.

이 인간이 회사 일도 다 팽개치고 외국으로 곧장 날아 버릴 수 있는 또라이라는 걸 몰랐다는 것도 실패의 한 원인이다.

차무경이 이 바닥에 갑자기 등장한 건 그전까지 그룹의 후계자로 알려졌던 극우성 알파 장남이 사고로 죽은 후였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오랫동안 외국에서 요양 생활을 해 왔다는 것이 공식 루트로 나온 얘기지만, 정부의 자식인데 극우성 발현이 늦어서 이제야 데려왔다는 것이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사실 그런 건 이쪽 세계에서 드문 얘기도 아니었다. 첩의 자식이라도 극우성이면 정실 자식까지도 밀어내는 세계였다.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단지 확실히 차 회장의 핏줄이라는 것만 입증해 주면 되었다. 양가 간에 유전자 확인을 마쳤을 터다. 이건 이쪽 세계에서 결혼식을 앞둔 집안끼리의 당연한 절차였다.

유전자만 확실하다면 문제될 건 없었고 흔하다면 흔한 얘기라 일말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오히려 세세한 얘기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채였다.

뒤를 좀 더 캐 봐야겠다.

유원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생선살을 깨끗한 새 것으로 바꿔 주고 다시 먹으라고 눈짓하면서 강우는 질겅, 안으로 제 입술을 씹었다.

***

딱히 안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침대로 데려온 건 아니었다. 창백해져서 주저앉으니 눕혀야겠다고 생각했고,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해서 페로몬을 풀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입을 맞추려고 하자 고개를 돌려 피하고, 힘도 안 들어가는 손으로 끝까지 밀어내려고 하는 모습에 울컥 거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무경은 덮어 주려던 이불을 젖혀 버리고 시우의 위로 올라갔다. 한 손으로 두 손목을 움켜쥔 채 머리 위로 올려 꼼짝 못 하게 한 다음 다른 손으로 뺨을 쥐고 입을 맞췄다. 시우는 호흡도 빠듯하면서 입술을 앙다물며 거부를 한다.

씨발….

울컥 욕이 새어 나왔다. 눈에서 불이 나는 것 같다.

왜 이래, 너.

연시우. 너 내 거잖아. 나한테 각인했잖아. 나 좋아한다며!

무경은 턱을 바짝 잡아 올려 아랫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페로몬을 더 강하게 쏟아내자 제 몸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던 몸이 풀어지는 게 선연하게 느껴졌다. 약하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다급하게 혀를 집어넣었다.

저를 피해 달아나는 혀를 잡아 얽었다. 씹을 것처럼 혀를 잡아 당겨 물고 평소에 민감했던 입천장 안쪽 연한 살을 집요하게 훑었다.

목에서 울리는 가느다란 신음소리와 더불어 숨에서, 침에서, 시우의 페로몬 향이 묻어났다. 저를 밀어내려고 발버둥을 쳐 봐야, 이미 몸은 무경의 페로몬에 굴복한 지 오래였다.

부드러운 카디건과 셔츠를 찢을 듯이 벌려서 납작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에 시우의 향이 가득 들어찼다. 온몸의 세포가 각성하듯이 짜릿짜릿하게 깨어났다.

옷을 잡아 내리고 드러나는 돌기를 찾아 입에 무는 동시에 손을 내려 벨트를 하지 않은 면바지의 단추를 끌렀다.

바지가 헐거워지자 굴곡진 허리선을 따라 곧장 손을 아래로 내렸다. 부드러운 엉덩이 살이 손에 찰싹 붙을 듯이 감겨 왔다. 엉덩이를 움켜쥐고 제 몸에 바싹 당겨 붙였다. 앞섶이 맞닿자, 흐윽, 하고 내뱉는 시우의 숨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배를 누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 몸을 돌려 눕고 시우를 제 위로 올렸다. 계속 가슴에서 입을 떼지 않으면서 손으로 시우의 날씬한 등과 허리를, 부드럽고 탄력 있는 엉덩이와 허벅지를 쓰다듬고 주물렀다.

시우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반항할 기력도 없는 듯, 앓는 듯한 신음을 토해내며 제 위에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무경은 편하게 입고 있던 실내복 바지의 앞섶을 내렸다. 이미 제법 부푼 중심이 시우의 맨살과 맞닿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바짝 기를 세웠다.

무경은 시우의 몸을 약간 내려 중심을 맞추면서 한 손으로 시우의 얼굴을 잡고 입술을 찾았다.

“아파….”

입술이 닿으려는데 시우가 중얼거렸다.

아프다니, 뭐가.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상하게… 아파… 읏….”

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얀 이마에 어느새 촉촉이 땀이 배어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무경도 바싹 신경이 곤두섰다.

“아프다니 갑자기 어디가….”

“배가… 아… 윽….”

시우가 무경의 위에서 굴러 내리며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배? 배가 왜….”

“아, 병원, 나, 빨리 산부인과….”

산부인과 소리에 무경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둥글게 말린 시우의 엉덩이 쪽에서 하얀 속옷을 뚫고 희미하게 혈흔이 비치고 있었다.

***

“이, 이사님?”

갑자기 차를 대기시키라는 전화에 주엽은 운전기사한테 연락을 하고, 외투를 챙겨 입는 동시에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빠르게 무경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시, 시우 씨가 어디 불편합니까?”

무경의 품에는 시우가 패딩 코트를 이불처럼 두르고 안겨 있었다. 눈을 감은 시우와 입술을 깨문 무경 중 누가 더 창백한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주엽의 질문에 대답할 생각도 없는 듯, 무경은 굳은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갑자기 차를 부른데다 무경이 너무 빨리 내려온 탓에, 로비에 나와서도 3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주엽은 물론이고 차를 대자마자 운전석에서 뛰어내린 운전기사도 무경의 살벌한 기색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최 비서님이 직접 운전하세요.”

무경은 운전기사에게 키를 건네라는 손짓을 하고서는 당황한 주엽을 내버려둔 채 뒷문을 열어 시우를 태우고 자신도 올라탔다.

“뭐 합니까? 내 말 못 들었어요?”

무경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후려치자 그제야 정신을 수습한 주엽이 기사로부터 차 키를 받아 운전석에 올랐다.

주엽이 벨트를 매고 시동을 걸자 무경이 뒤에서 핸드폰을 건넸다.

“여기로 갑시다.”

핸드폰에는 내비게이터 어플이 이미 커져서 목적지가 지정돼 있었다. 병원이었다. 차에 내비게이터가 내장돼 있었지만 무경은 그것을 사용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일분일초가 급해서 미리 검색해 온 것일 수도 있고 목적지를 차 내비게이터에 남기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이곳 지리에 익숙한 운전기사를 두고 굳이 저에게 운전을 시키는 거로 봐서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의도가 뭐든, 주엽은 더 재촉하는 말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무경의 핸드폰을 고정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가는 동안, 시우는 가끔씩 가쁜 호흡과 낮은 신음만을 낼 뿐 대체로 조용했다.

무경만이 잔뜩 초조한 표정으로 간간히 시우의 얼굴에서 땀을 닦아 내며 괜찮아, 괜찮아, 조금만 참아,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호텔은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교통 체증이랄 게 없는 동네라 15분이 채 못 되어 병원에 도착했다. 진료하는 과가 여러 개 있는, 제법 큰 병원이다.

따라 내리려는 주엽에게 무경은 기다리라고 말하고 다시 시우를 안아 내렸다. 급한 걸음으로 정문 쪽으로 들어가자 미리 전화를 해 두었는지, 직원 몇이 이동 침대를 끌고 바로 나타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시우를 침대 위에 눕히고 그 옆을 따라 급하게 뛰어가는 무경의 옆모습을 마지막으로 자동문이 닫혔다. 이제 그들은 주엽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파랗게 질린 얼굴.

피가 밸 듯 깨문 입술.

지난 몇 년간 보지 못한 무경의 새로운 모습을 참 많이도 접하는 요즘이었다. 주엽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보다, 무슨 사이야, 저 둘.

***

[여행 중이신 거 같은데….]

연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중년의 여자 의사는 차트를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임신 초기에 이런 장거리 해외여행은 위험합니다. 임신한 줄 모르셨나요?]

[…….]

무경의 묵묵부답에 의사는 힐끗 시선을 들었다가 혀를 차고 싶은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위급한 상황은 넘겼다고 말씀드렸지만 완전히 괜찮다고는 장담 못 합니다. 산모가 열성이라 그렇지 않아도 조건이 안 좋은데 지금 심신이 아주 불안정해요. 영양도 고르지 못하고 피로가 쌓여 있는 데다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호흡도 뇌파도 불안정해요.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절대 안정이요.]

거듭 강조하면서 의사가 안경 너머로 구슬 같은 푸른 눈을 떼구르르 굴렸다.

[돌아가시는 일정이 어떻게 되시죠? 당장 움직이는 건 무리일 것 같은데 여유가 좀 있으신가요?]

[네… 시간은 괜찮습니다.]

무경의 대답에 만족한 듯 의사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일단 오늘은 병원에 입원해서 하루 정도 상태를 보고 내일 퇴원하는 걸로 하시죠. 퇴원하더라도 한 이틀 정도는 요양하는 느낌으로 조용한 숙소에서 얌전히 쉬도록 해 주세요. 소화 잘 되는 걸로, 영양을 따져서 식사는 규칙적으로 하시고, 당연히 관광은 안 됩니다. 2~3일 후에나 산책 정도 하시면서 몸을 좀 풀어 주고, 돌아가시기 전에도 한 번 더 들러 주세요. 비행기를 타도 괜찮은지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요.]

[네.]

무경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리고, 배우자분 말인데, 아시겠지만 배우자분의 약한 페로몬은 산모의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됩니다. 신경이나 근육을 이완시켜 주니까요. 하지만 강하면 안 돼요. 특히나 배우자 분이 우성이신 거 같으니 항상 조절에 신경을 써 주셔야 할 겁니다. 페로몬이 너무 강하면 산모의 신경을 자극하고 흥분하게 만드니까 오히려 좋지 않아요. 항상 은은한 정도가 딱 좋아요. 아시겠죠?]

[…네.]

[그리고 부부 관계도, 아직 젊으시니 힘드시겠지만 이왕 참은 김에 좀 더 참으세요. 산모가 건강하다면 초기 한 달 정도만 참으라고 하겠지만 지금 좀 위험한 상태니까 앞으로 한두 달은 더 지켜보고, 그 다음에 다시 한 번 의사 소견을 받아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별 문제가 없다고 하면 가끔씩 부부 관계를 가져도 좋아요. 부부 사이의 사랑하는 감정이나 행복한 감정은 태아 정서 발달에도 도움이 되고, 또 성 호르몬은 두뇌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관계가 거칠거나 장시간 이어지면 산모에게 부담이 되니까 적정선을 지켜야 됩니다. 체위도 배를 압박하지 않는 체위로 하셔야 하고, 무엇보다 산모의 컨디션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해요.]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뭐 그런 것들만 주의하면 임신도 크게 무서운 일은 아니에요. 산모도 젊으니 조금만 더 건강에 신경 쓰면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무경의 순순한 대답에 만족했는지, 엄격한 표정으로 훈계를 시작했던 의사가 드디어 표정을 풀고 미소를 보였다.

중년의 의사는 이 철 없는 젊은 부부가 임신한 줄도 모르고 덜컥 긴 여행을 왔고, 산모의 상태도 모르고 관계를 가지려다가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그렇게 알고 있는 편이 더 낫기도 해서 무경은 그냥 잠자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쨌거나 시우가 도망가기 전날 마지막 섹스에서, 왜 끝까지 자기가 위에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는가 하는 의문점 하나는 시원하게 풀린 셈이었다.

***

병원에 있는 동안 시우는 별말이 없었다. 지우가 어쩌고 있나 물어본 게 다였다. 잘 돌보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답을 듣고 전화 통화까지 하고 나자, 그 뒤로는 그저 눈을 감고 누워 있거나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무경도 굳이 말을 걸려고 애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잠이 든 것 같으면 옆에 서서 계속 들여다보다가 잠이 깨는 것 같으면 일부러 밖에 나와 서성거렸다. 자신이 병실에 있으면, 시우가 등 돌리고 누운 자세를 계속 고수하고 있어서 상당히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진료에서, 의사는 퇴원해도 좋다고 말하면서도 몇 번이고 절대 안정을 강조했다.

무경은 직접 운전을 해서 시우를 데리고 돌아갔는데, 그들이 내린 곳은 처음 묵었던 호텔이 아니었다. 호텔은 호텔인데 취사가 가능한 레지던스형 호텔이었다. 시우는 딱히 객실에서 요리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일부러 옮겼을까 생각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자 전복죽에 소고기 버섯 장조림 같은 한식 식사가 나와서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무경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대신에 주엽이 설명해 주었다. 그는 무경의 지시로 어제 이 호텔로 숙소를 바꾸었으며, 급하게 인근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한식 조리사를 수소문해 지금 옆 객실 주방에서 영양사 식단에 맞춰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주엽은 그런 얘기들을 하면서 시우가 감동하는 표정이라도 보일 것이라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시우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기뻐할 수 없는 그런 배려 따위, 반갑지도 고맙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굶을 수는 없었다. 영양이 고르지 못하다고 의사가 말했고 절대 스트레스는 금물이라고 당부를 했었다. 말 그대로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인데 엄마라고 하면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다니, 죄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

“형!”

억지로 죽을 다 먹고 상을 물리자, 문이 열리고 지우가 뛰어들었다. 지우가 몸에 부딪히듯이 안겨 올까 봐 잠깐 움찔한 사이, 따라 들어오던 무경이 지우의 몸을 낚아 올렸다.

“형 아프니까 그렇게 달려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아, 참. 미안. 깜박했어요.”

지우가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풀이 죽어 말하자 무경이 다시 지우를 내려놓았다. 시우가 팔을 벌리자 지우는 그제야 슬그머니 다가와서 조심스레 형을 끌어안는다.

“어제 놀다 왔더니 형이 아프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 이제 괜찮아?”

“응. 괜찮아. 걱정 마.”

지우한테도 배가 불러 오기 전에는 얘기를 해야 할 텐데… 걱정이었다. 어느 시점에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나저나 넌 아침부터 어딜 갔다 온 거야?”

아침에 퇴원하고 왔더니 지우가 없었다. 불안해하는 시우에게 무경은 혜린이 데리고 산책 나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어디로 산책을 갔었냐고 물은 거였는데 지우가 불쑥 나 병원 갔다 왔어, 하고 대답한다. 시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병원?”

“아, 별일은 아니구요. 어제 시우 씨가 피로가 쌓였다고 하니 이사님께서 지우도 호르몬과 진료를 받아 보게 하라고 해서요. 그런데 괜찮대요. 수치가 조금 불안정하긴 한데, 보통 애들도 여행 와서 흥분하고 피곤하면 그 정도는 흔들린다고 하더라고요. 더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하셨어요.”

같이 들어온 혜린이 무경과 시우를 번갈아 보면서 보고하듯이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혜린은 뭘요, 하고 상큼하게 웃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객실을 나섰다.

“…….”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신경을 써 준 무경에게도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니 그것도 빚을 지는 기분이라 싫었다.

“고마워요.”

결국 쳐다보지도 않고 무감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뭐, 별로. 쉬어요.”

무경의 말투도 건조했다. 사무적이라고나 할까, 딱 그런 말투. 시우에게는 지금껏 쓴 적이 없는 그런 말투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형… 무경 형이랑 왜 싸웠어?”

무경이 조용히 방 안으로 사라지고 나자 지우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묻는다.

“응? 싸우다니, 아니야. 누가 그래.”

억지웃음을 지으며 시우가 부정하자 지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무경 형이 그러던데. 아니, 싸웠다기보다 무경 형이 형 화나게 했다고 그랬어. 기분 풀어 줘야 되는데 당장은 풀어 줄 방법이 없다고.”

시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 왜 애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형의 표정을 읽었는지 지우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내가 먼저 물어봤거든. 두 사람 싸웠냐고. 근데 누가 봐도 그렇잖아. 둘 다 서로 쳐다도 안 보고, 말도 별로 안 하고… 옛날엔 엄청 친했으면서. 형… 왜 화났어?”

“…….”

시우는 동생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바깥바람에 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서 넘겨 주었다.

“화난 거 아니야. 그냥 형이 좀 피곤해서 기운이 없는 것뿐이야.”

***

며칠 동안, 지우를 돌보는 건 혜린에게 맡겨 놓고 시우는 말 그대로 요양을 했다. 첫날은 집안에만 있었지만, 둘째 날은 답답해서 호텔의 산책로를 걷고 사흘 후부터는 호숫가를 걸어 다녔다. 호숫가 근처의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시키고 앉아 창 밖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경호원들이 거리를 두고 따라 다녔지만 무경은 더 이상 함께 하지 않았다. 밤에 침대로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식사도 따로 했다. 잠깐 밤에 잠이 깨어 거실로 나갔을 때, 시우는 무경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낮은 전화 목소리에, 그가 밤 시간에 회사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닷새 정도가 지났을 때, 무경이 직접 시우를 데리고 다시 한 번 같은 병원을 찾았다. 비행기를 타도 좋다는 의사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음날 바로, 시우는 제네바에서 무경의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

좌석을 침대처럼 길게 눕히고 선잠에 들었던 시우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잠이 깼다. 누군가의, 라고 했지만 희미하게 풍기는 향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잠이 깨고서도 시우는 눈을 뜨지 않았다.

무경이 비어 있던 시우의 옆자리에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앉아만 있는 건지, 저를 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꼼짝 않고 있자니 몸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저절로 떨리는 걸 눈치챌까 조바심이 났다. 빨리 가 주었으면 했지만 한참 동안 무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깨어 있는 거 알아.”

이윽고,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귀에 닿았다.

“내가 보기 싫으면 그냥 그렇게 듣기만 해.”

들으라고 해 놓고, 다음 말이 이어진 건 또 한참이 지나서였다. 평소와 다른 느릿하고 어두운 목소리가 낯설었다.

“내가… 미친놈처럼 집착하고 있는 거 알아.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넌 내 유일한 숨구멍이야. 이기적이라고 하든 미친놈이라고 하든 마음대로 욕해도 좋아. 네가 날 사랑하지 않든, 각인을 깨든 그것도 상관 안 해. 난 껍데기만이라도 널 가질 거니까, 그냥 네가 포기하는 게 편할 거야.”

듣는 동안,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소름이 돋았다. 자신을 엄습하는 이 기분이 무슨 감정인지도 알 수 없었다.

“대신에, 한 가지만은 지켜 줄게. 어떻게 해서든 네 아이는 절대 못 건드리게 할 테니까. 열성을 낳든 우성을 낳든, 널 엄마라고 부르면서 네 손에서 클 수 있게 할 테니까. 그것만으로 참아. 그게 지금 내가 약속할 수 있는 전부야.”

그리고, 다시 가라앉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무경이 가만히 몸을 일으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시우는 숨을 죽였다.

더욱 낮아진, 속삭이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공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연시우. 난 너 못 놔. 아니 안 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그건 안 변해. 잊지 마.”

그 말을 끝으로 무경은 자리를 떴다. 무경의 향기와 카펫에 묻힌 무거운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져 갔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시우의 감긴 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커다랗게 열린 동공이 파랗게 짙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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