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이 시우가 머무는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9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무경은 늦지나 않았을까 초조한 마음에 차가 도착하기가 무섭게 총알처럼 밖으로 튀어나갔다. 당황한 최 비서가 황급히 반대편 문을 열고 내려 뒤따랐다.
진명은 국내에 남고 수행 비서인 최주엽이 이번 여행에 동반했다. 혹시라도 국내에서 업무상 문제가 생기면 뒤처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했고 이쪽에서 지원을 받을 일이 생길 때도 국내에서 진두지휘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보고를 받고 대기 중이던 감시 팀장이 무경을 알아보고 달려왔다.
“상황은요?”
“아직 안에 있습니다. 보통 10시 반쯤 돼야 외출하는 패턴입니다.”
무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객실 수가 많지 않은 고풍스런 4성급 호텔이었다. 앞쪽은 대로변이지만 뒤쪽은 넓은 공원으로 조성돼 산책로가 이어진 곳이라고 들었다.
정문 쪽은 막 빨간색 대형 투어 버스가 들어서서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무경은 혀를 찼다.
“출입구가 확실히 통제되고 있는 건 맞습니까?”
“정문과 후문이 개방돼 있는데 두 곳 다 인력이 배치돼 있습니다.”
버스를 피해 빠르게 정문 쪽을 향하는 무경을 뒤따르며 팀장이 설명을 이어 갔다.
“로비에도 사람을 붙여 놨습니다. 어제 저녁 8시경에 객실로 올라간 이후로 내려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한 로비는 조금 어수선했다. 1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과 막 관광을 나서려는 사람들이 뒤섞이는 모양새였다.
“이쪽으로 오시죠.”
팀장이 무경을 안쪽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그가 누른 버튼은 7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무경의 심장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피가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팀장을 제치고 무경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703, 704, 705.
무경의 발이 멈췄다.
705호.
여기다.
이 문 뒤에 시우가 있는 것이다.
무경의 맥박이 요동쳤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요란해 심장이 귀로 옮겨 간 것 같았다.
오래된 차임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힘을 주어 누르자 띠르르르,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막 씻고 나오는데 벨이 울렸다. 시우는 의아해서 시계를 보았다. 9시 10분.
누구지.
누구세요, 하고 영어로 물으면서 문으로 다가가자 룸서비스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샤워하는 동안 지우가 시켰나. 시우는 지우가 들어간 욕실을 흘깃 쳐다보았다.
안에서 문밖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시우는 조금 망설였다. 하지만 열흘 넘도록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일이 있으려고.
걸쇠를 풀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이게 뭐야.”
무경이 쓰게 뱉었다.
팀장이 당황하여 뛰어 들어가더니 한눈에 보이지 않는 안쪽 공간과 욕실을 뒤졌다.
하지만 뒤지나 안 뒤지나 방 안은 명백하게 텅 비어 있었다. 옷가지 하나 가방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잠깐 나간 게 아니었다. 아예 호텔을 떠난 것이다.
벨을 눌러도 반응이 없어 팀장이 복제해 둔 열쇠로 문을 열어야 했을 때부터 어쩐지 기분이 싸했다. 식사를 하러 갔거나 관광을 나갔으면 이미 로비나 정문에서 눈에 띄었을 것이다.
씨발.
속으로 욕을 뱉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확 치받는 열을 못 이기고 무경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테이블에 부딪혀 흠집을 내며 튕겨 나간 핸드폰은 여지없이 액정이 쩡하고 부서졌다. 그것으로는 심화가 꺼지지 않았다. 알파의 폭력적인 형질이 터져 나왔다. 현관 수납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튼튼하지 못한 수납장 문이 레일에서 이탈하며 빠지직 일그러졌다.
무경의 과격한 형질에 처음 노출된 주엽이 거의 경직 상태로 얼어붙었다. 숨이 턱 막혀서 복도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숨어야 했다. 수납장 부서지는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몰려올까 다급하게 방문을 닫은 건 1분 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다.
팀장도 극우성의 형질을 피해 방 안쪽 벽 뒤로 몸을 숨긴 채 멀거니 굳어 있었다. 한 걸음만 가까이 있었다면 핸드폰이 강타한 건 테이블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이다. 혹시 실제로 저를 노린 것이었나. 팀장은 간담이 서늘해져 처참한 몰골을 하고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흘깃 훔쳐보았다.
두 사람이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 사이 무경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손바닥 사이로 새어 나오는 호흡만 거칠게 들썩였다.
그 상태로 죽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무경의 씩씩거리는 숨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한참 만에 무경이 마른세수를 하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지친 얼굴을 드러냈다. 형질은 언제 새어 나왔냐는 듯 감쪽같이 갈무리되었다.
“복도 쪽 CCTV 확인 가능합니까?”
가라앉은 목소리는 조금 늘어졌지만 흥분한 기색은 사라졌다. 바로 조금 전에 포악을 부리며 공격적인 형질을 쏟아내고 물건을 부서뜨린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건 좀….”
그 온도 차가 되레 섬찟해서 팀장은 말을 더듬었다.
“한국이 아니라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무경이 핫, 하고 헛웃음을 물었다.
“그래요. 그럼 그거 기다리는 동안 국경도 넘겠네.”
빈정거리며 무경은 다시 방 안을 훑었다. 단서 같은 건 없었다. 쓰레기통마저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누구 생각인지 철저하네. 시우야, 강우 그 새끼야.
“이 방에 묵었던 건 확실합니까?”
“네. 드나드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CCTV는 못 본다라….”
무경은 열이 오르는 머리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방법을 찾는데 집중했다.
“정문과 후문은 차에서 지켜보는 거였죠?”
“네, 그렇습니다.”
“내려갑시다. 블랙박스 영상 확인해야겠어요. 최 비서님은 여기 뒷정리 좀 해 줘요.”
“아, 네. 알겠습니다.”
주엽은 일순간에 평소의 모습으로 복귀해서 방을 나서는 무경의 뒷모습을 바짝 굳어서 쳐다보다가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어깨에 힘을 뺐다.
하아.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쉰다.
부서진 수납장 문이나 흠집 난 테이블 따위야 돈으로 처바르면 그만이겠지만… 자기가 묵은 방도 아니고 뻘하게 애먼 방에 와서 이 난리를 부린 이유를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지금껏 무경이 여타 다른 재벌집 탕아들에 비해 술이나 약, 섹스 문제로 비서진을 골탕 먹인 적은 없었다. 허구한 날 야근하는 것만 빼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했다.
그렇다고 무경이 가끔씩 기행으로 기함하게 만드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로 얼마 전 약혼 파티에서 갑자기 사라진 사건이 있겠다.
그날 윗사람 제대로 못 챙긴다고 상무한테 불려가 얼마나 깨졌던가. 아니 비서실장도 있는데 왜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고. 게다가 윗사람이 제멋대로 구는 걸 아랫사람이 통제할 수 있으면 그게 아랫사람이야? 최종 보스지.
사적인 영역에서의 큰일은 비서실장이 알아서 해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정신 사나운 일이 자기 차례로 돌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상당히 빡센 일정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단순히 여기 와서 오메가 하나 잡아들이면 끝나는 일인 줄 알았다. 어차피 약혼 때문에 토라져서는 쫓아와 달래 달라고 시위하는 애첩의 앙탈 같은 거 아니겠냔 말이다. 고급 호텔 스위트룸 하나 잡아 주면 상전이 제 정부를 데리고 지지든 볶든 알아서 할 일이니, 일단 잡기만 하면 편안한 여가를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역시 세상일이란 그렇게 생각처럼 쉽게 굴러가지 않는 법이다.
주엽은 땅이 꺼져라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부서진 핸드폰을 주워 올렸다. 뒷면에 동그랗게 박힌 다이아가 떨어져 나가지 않았는지부터 확인했다. 깨진 액정은 어쩔 수 없지만 투명 커버 덕분에 다이아도 백금 케이스도 다행히 멀쩡했다.
올 봄 생일에 차 회장으로부터 받은 선물 중 하나라고 들었는데 성질난다고 이 비싼 걸 막 집어 던지다니.
아, 진짜 있는 놈들 돈지랄은.
주엽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흠집 날세라 가방 안쪽 주머니에 무경의 핸드폰을 고이고이 집어넣었다.
***
“거기 잠깐.”
블랙박스 영상을 빠르게 훑다 말고 무경이 정지 명령을 내렸다.
“네? 네.”
팀장이 당황해서 스톱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왜 멈추라고 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화면에는 막 정문으로 와서 멈춰 선 대형 투어 버스가 보였고 그걸 타기 위해 몰려든 관광객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시우 형제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 이 두 사람, 좀 확대해 봐요.”
무경이 짚은 건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평범한 남자애와 동생으로 보이는 작은 여자애였다. 화면을 확대하자 화질이 조금 깨졌다. 그나마도 겨울이라 모자며 목도리를 칭칭 감고 있어 얼굴은 잘 드러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경은 가늘게 뜬 눈으로 한참 화면을 쳐다보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어… 이사님?”
어리둥절한 팀장의 말에는 대답을 않고 무경은 더 볼 거 없다는 듯이 몸을 뒤로 뺐다.
“저 투어 버스 어디로 가는 건지 경로 알아오세요. 번호판도 확인하고 운전기사와 가이드 전화번호도 확보하시고. 빨리. 바로 움직여요.”
***
“이제 그만 기분 풀어.”
시우는 맞은편에 앉은 동생에게 샌드위치와 우유를 밀어 주며 달랬다. 하지만 자꾸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억누르지 못하자, 그걸 보고 있는 지우의 얼굴은 더욱 더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니까 그렇게 웃지 말라고! 형이 입으라고 한 거잖아!”
“오빠라고 해야지.”
시우가 큭큭거리며 지적했다. 지우의 얼굴이 더 시뻘게졌다.
“그나저나 우리 지우가 이렇게 예쁠 줄 몰랐네. 꽃미남인 건 알고 있었지만 베타 남자애가 혹할 정도일 줄이야. 오메가나 베타 여자애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걸 그랬나.”
“아, 진짜 형!!”
지우는 탄식을 했다.
오늘은 지우의 11년 알파 인생에 오점을 남긴 날이었다.
***
지우가 기억하는 사건 경과란 이러했다. 어젯밤부터 좀 이상하게 굴던 형이 오늘 아침,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지우를 깨우더니 빨리 옷을 입고 나가자고 했다.
형은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치고 있었는데 그 차림새가 좀 이상했다. 폭이 좁은 청바지에 갈색 워커, 풍성한 다운 점퍼에 비니를 꾹 눌러쓰고 그 위로 후드까지 덮어 썼다. 게다가 작은 얼굴에 안 쓰던 뿔테 안경까지 걸치고 있는 거다.
딱히 눈에 띄는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보통 터틀넥 스웨터에 선이 딱 떨어지는 단정한 코트, 단화를 주로 신던 형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형의 새 옷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에게 내민 옷은 더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고 할 게 아니라, 한마디로 그냥 요란스러운 여자애 옷이었다. 치맛단을 프릴로 장식한 원피스. 초록색 코트. 거기다 곱슬곱슬한 긴 머리 가발까지.
“…….”
이걸 어쩌라고.
힐끗 형을 쳐다보았다. 열이라도 있냐고, 지금 정상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형이 평소 분위기이기만 했어도 무슨 웃기지도 않는 장난이냐며 집어 던졌을 거였다. 하지만 여자 옷을 내밀던 그때 형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좀 초조해 보였다.
지난 이 주일 가까운 기간 동안 일곱 번 숙소를 바꿨다. 편하게 관광을 다니고 있긴 하지만 쫓기고 있는 건 확실한 거 같았다. 그게 빚쟁이인지 뭐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느낌이 그랬다.
하지만 지우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저는 너무 어려서 대답을 듣는다 한들 형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괜히 캐물어서 형을 힘들게 하지 말고 최대한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고 비장한 마음으로 결심했었다.
그리고 여자애로 변장을 할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도망자의 운명.
11살짜리 아이의 마음속에는 은근한 모험심과 두근거림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쫓기는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아주 급박하거나 실제적인 위협을 당하는 것도 아니어서 솔직히 불안감이나 공포감 같은 건 느낄 수 없었다. 형이 알 수 없는 얼굴로 멍하니 있을 때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처음 옷을 갈아입고 관광객들 사이에 섞여서 호텔을 빠져나올 때만 해도 지우는 부끄럽다거나 민망하다기보다는 영화 주인공이 된 스릴감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
기차역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주문하러 간 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였다. 누군가 영어로 말을 걸어 왔다.
[이거 먹을래?]
돌아보니 안쪽 자리에 가족으로 보이는 일행과 함께 있던 남자애였다. 금발에 초록색 눈을 한 애였는데 저보다도 한두 살 어려 보였다. 작은 손으로 초콜릿을 내밀고 있었다. 맛있어 보였다. 조금 떨어져 있는 형을 잠깐 쳐다보고 그냥 받았다.
낯선 사람이 주는 건 뭐가 됐든 받지 말라고 했지만, 얘는 어린애인데다가 형이 바로 근처에 있으니 뭐 어떠랴, 싶었다.
[너 어디서 왔어? 나 미국에서 왔는데.]
남자애가 계속 말을 걸었다.
[한… 음….]
한국이라고 하려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도망자는 쉽게 신원을 누설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움… 영어 못 하나…. 있잖아, 나 제레미인데, 제레미 섬터. 넌 이름 뭐야?]
하지만 남자애는 끈질겼다. 영어 못하냐고 하고서 계속 영어로 묻는 건 뭐야.
하지만 대답을 듣지 않고서는 물러서지 않을 기세라 지우는 일단 여권에 있는 영어 이름을 댔다.
[콜린.]
[콜린? 남자 이름 같네…. 근데 너 되게 예쁘다. 남자친구 있어?]
[…….]
예쁘다는 말에 초콜릿을 베어 물던 입가가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니 상대 아이는 베타 남자애였다. 지금 저를 베타 여자애로 보고 작업 거는 거야?
지우는 인상을 쓰며 그다지 강하지도 않은 알파 형질을 한껏 풀었다. 하지만 베타 아이가 알파든 오메가든 형질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리가 없다.
계속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는 어린놈의 낯짝에 초콜릿을 처발라 줄까 생각하는데, 뒤쪽에서 흥미롭게 구경하던 서너 살 정도 위 여자애가 쿡쿡거리며 다가와 남자애를 말렸다.
[야, 쟤 알파야. 남자 친구를 사귀어도 오메가를 사귀지 베타는 안 사귈 거야. 그만 집적대.]
여자애 또한 알파여서 지우의 형질을 눈치챈 거 같았다.
[아, 정말?]
남자애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하지만 아쉽게 쳐다보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귀여운데… 난 알파든 베타든 상관없는데….]
[저 애는 상관있을 걸.]
여자애가 계속 킥킥거렸다. 하지만 그 웃는 소리는 베타 남자애가 아니라 지우의 신경을 잔뜩 긁어 대고 있었다.
지우는 잔뜩 열이 받아서 먹던 초콜릿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홱 몸을 돌렸다. 줄을 서 있다 눈이 마주친 형이 모른 척 시선을 돌린다. 형의 옆얼굴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디가 아파서 경련을 일으키는 건 분명 아니었다. 웃음을 참느라 그런 거였다.
젠장. 형까지 너무하잖아.
지우는 울컥해서 입술을 앙다물었다.
도망이고 뭐고 다시는 여자 옷을 입지 않으리라. 숙소에 도착하면 가발이고 원피스고 갈기갈기 찢어서 내다버릴 테다.
지우는 속으로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지우의 스릴 넘치는 도망자 놀이는 한 시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파국을 맞은 셈이었다.
***
어젯밤 9시 10분.
시우가 문을 열자 나타난 사람은 호텔 직원 복장을 한 여자였다. 여자가 밀고 들어온 이동식 트레이에 새 핸드폰이 숨겨져 있었다.
여자는 핸드폰을 넘겨주며 잠시 후에 전화가 올 테니 받으라고 했다. 얼마 후 정말로 울리는 전화를 받자 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우는 시우에게 위치가 발각됐다는 것, 이전 핸드폰은 사용이 어려울 것 같다는 것, 그리고 무경이 프랑크푸르트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 일단 거처를 옮겨야겠어요. 그쪽 호텔에는 이미 감시가 붙었을 테니 몰래 빠져나와야 할 텐데, 내가 현지 상황을 정확히 모르니 작전 짜기가 좀 힘드네요. 그쪽에 있는 우리 인력하고 얘기를 좀 하고 다시 전화할 테니까 그 사이에 짐부터 꾸려 놓으세요. 인적 드문 시간에 이동하면 오히려 눈에 띌 것 같으니까, 짐만 우선 다른 사람한테 맡겨서 옮겨 놓죠. 이동할 때 짐이 있으면 아무래도 불편할 테니까요.
전화를 끊고 다음 연락을 기다리며 짐을 꾸리는 동안 시우는 여러 번 두근거리는 심장을 눌러야 했다. 기껏해야 트렁크 하나이니 짐은 금방 쌌지만 널뛰는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무경이 온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뛰는 의미는 복합적이었다.
시우는 대충 싸 놓은 가방을 밀어 놓고 멍하니 침대에 앉았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묘한 설렘 같은 감각을 밟아 누르며 시우는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만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도망가야 한다. 그를 만나면 안 된다.
더 이상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살고 싶지 않고, 아이를 빼앗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를 만나면, 그의 얼굴을 보면, 제 결심이 또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자신할 수 없었다.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멍하니 방안을 부유하던 시선에 테이블 위에 놓인 여행 관련 팸플릿들이 들어왔다. 로비에서 이것저것 흥미 있어 보이는 걸 집어 온 거였다.
시우는 그중에서 아침에 출발하는 라인 강 연안 투어를 떠올렸다. 아침에 사람들 틈에 섞여 투어 버스를 타고 나갔다가 중간에 다른 교통편으로 이동하면 되지 않을까. 문제는 숨어 있을 감시자들을 어떻게 따돌리는가 하는 점인데….
어디에 숨어 나가거나 변장을 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지우까지 데리고 어디에 숨는단 말인가.
변장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그들은 어린 남자애를 데리고 있는 젊은 남자를 유심히 볼 테니까. 염색 같은 걸 하는 것도 좋겠지만 임신 중에 그런 약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지우가 호텔 TV로 보고 있는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곱슬머리에 열 살 정도 된 귀여운 여자아이가 등장하고 있었다. 프릴이 풍성한 드레스에 붉은 코트를 입고 있는 게 아주 예뻤다.
시우는 침대에 엎드려서 다리를 흔들고 있는 동생의 몸체를 훑었다. 아직 어린데다 병실에 오래 갇혀 있던 탓에 나이보다 체격이 작아서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체형이다. 괜찮지 않을까.
시우는 새 핸드폰을 들고 강우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얘기하고 저 대신 투어 신청을 해 줄 것과 저와 지우가 입을 옷을 조달해 줄 것을 부탁했다.
***
그리고 다음날 아침, 가벼운 배낭만 둘러 멘 차림으로 두 사람은 9시 출발 예정인 투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버스는 5분 정도 늦게 도착했고, 마침 무경이 호텔의 정문으로 달려오다시피 하는 것이 창을 통해 보였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줄 알았다. 예상한 도착 시간보다 너무 일렀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눌러 가며 시우는 등을 돌려 지우부터 찾았다. 지우가 무경을 발견하고 무심결에 소리라도 내게 되면 큰일이었다.
지우를 붙잡고 크리스마스트리 안쪽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지우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정신이 팔려서 이상한 기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시죠.”
30대 남자의 한국어가 명확하게 귀에 들어왔다.
멀어지는 무경의 발자국 소리가 귀에 선명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금까지 제가 있던 방으로 올라가려는 것이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쳐다도 보면 안 된다고, 시우는 크리스마스트리 뒤에 숨어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도통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목도리를 끌어 올리면서 트리 밖으로 얼굴을 조금 내밀었다. 멀리서 초조한 듯 엘리베이터의 층수 변화를 올려다보고 있는 무경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쁜 놈, 비겁한 놈, 믿을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제 의지와는 달리 마음이 멋대로 출렁였다. 하얗고 매끈하던 얼굴이 어딘가 해쓱하고 창백해 보이는 건 명확한 실제인지 그저 제 바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 손으로 쥐어짜는 것처럼 심장이 욱신거렸다.
무경이 숫자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입술을 짓씹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누구보다도 먼저 몸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빨리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시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빼서 엘리베이터 안쪽이 보이지 않을까 옆으로 몇 걸음 움직였다.
“형.”
그런 시우를 붙잡은 건 지우였다. 어느새 밖을 기웃거리고 있던 지우가 넋을 빼고 있는 제 형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형이 보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엘리베이터 앞에는 형의 시선을 끌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버스 왔는데, 안 타? 늦어서 바로 출발한대.”
그제야 시우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렇다.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는 거였다. 무경에게서 벗어나려고 바다 건너 이 먼 나라까지 왔는데 지금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마음을 추슬렀다. 지우의 작고 따듯한 손을 꼭 쥐었다.
“어, 그래. 빨리 가자.”
***
투어 버스에 관한 정보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무경은 연신 헛웃음을 뱉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블랙박스에서 보았던 영상이 도돌이표라도 찍은 것처럼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지우를 여자애로 변장시키다니. 게다가 그 빨간 투어 버스는 무경이 막 도착했을 때 정문 앞으로 들어서던 버스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버스를 타기 위해 정문과 로비 쪽에 대기하고 있던 관광객들 중에 시우가 있었다는 얘기였다. 바로 몇 미터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또다시 뭐라 말할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경은 욕설을 뱉으며 앉아 있던 차의 등받이를 내리쳤다. 앞에 앉아 있던 주엽이 또 움찔하는 것도 모르고 무경은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싸잡았다. 이러다가 울화통이 터져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버스는 라인 강변을 따라 관광하는 일정이랍니다.”
잠시 후 돌아온 팀장이 험악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조금 긴장한 투로 눈치를 살피며 보고를 시작했다.
“가이드에게 전화를 해서 다행히 바로 통화가 됐는데, 인상착의를 설명했더니 방금 아이가 급하게 아프다면서 버스에서 내렸다고 합니다.”
“버스에서 내려요? 어디서요.”
무경이 잡아먹을 듯이 물었다. 팀장이 흠칫 본능적으로 몸을 약간 뒤로 뺐다.
“프, 프랑크푸르트 역이요.”
이 자식아! 그 말을 먼저 해야지!
욕이 튀어나오는 걸 눌러 참으며 무경은 이를 악물었다. 눈에서 불이 튀었다.
“출발합시다.”
잇새로 뱉듯이 지시하며 무경은 좌석 등받이에 몸을 던지듯 기댔다. 뒷골이 당긴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무경은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창밖으로 스쳐 지나는 프랑크푸르트의 잿빛 겨울 풍경을 내다보았다. 그렇다고 독일 도시의 아침 풍경 따위가 머리에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무경은 그날 아침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경이 팀장과 함께 로비로 내려왔을 때 버스는 이미 출발하고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차로 돌아와 어제 밤부터 기록된 블랙박스 영상을 다 훑어보느라고 시간을 제법 지체했다. 그동안 시우는 그 투어 버스를 타고 신나게 도심을 빠져나갔던 거다.
여기서부터 역까지 얼추 30분은 걸릴 터였다. 어디가 목적지인지는 몰라도, 시우가 기차를 타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일단 기차가 출발해 버리면 유럽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막막해진다. 여기까지 와서 또 코앞에서 놓치게 되는 거였다.
차창 위 손잡이를 잡고 있는 무경의 손등에 파랗게 핏줄이 돋았다.
***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은 넓디넓었다. 유럽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플랫폼에는 심지어 모스크바행 기차도 보였고 공항으로 연결되는 통로 안내판도 있었다.
일단 최대한 인력을 풀었다. 티켓 판매 창구 쪽에 최우선으로 사람을 보내고, 유럽 각지를 향해 떠나는 무수한 플랫폼들도 훑어봐야 했으며 식당이나 카페 어딘가에서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스낵가도 둘러봐야 했다.
무경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기분이 아니었으므로 눈에 불을 켜고 역내를 훑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남매로 보이는 아이들을 지나칠 때였다. 금발 머리를 한 백인 아이들은 영어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툭탁거리고 있었다.
[으하하, 아무리 생각해도 웃겨. 알파 여자애인데 베타 남자애가 사귀자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어.]
알파 여자애, 라는 말에 급하던 걸음이 멈칫했다. 여자애가 배를 잡고 웃는데 그 앞에 시무룩한 표정의 남자애가 있는 걸 보니, 아마도 그 애를 놀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예쁜 걸. 알파니 베타니,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좋으면 그만이지.]
[그러니까, 이 꼬맹아. 걔는 상관한다니까? 벙찐 표정 못 봤어?]
[치잇….]
[근데 난 그 애보다 걔 오빠가 내 타입이었는데. 뭔가 예쁘게 잘생긴 느낌? 향이 아주 약하긴 한데 살짝 허브향 같기도 한 게 분명 오메가였어….]
여자애가 두 손을 모으고 아련한 표정을 했다.
[누나가 언제부터 허브향 좋아했다고. 전에는 그런 건 풀떼기 냄새 나서 싫다고 뭐라고 했으면서.]
남자애가 눈을 굴리며 심술궂게 말하자 여자애도 대번에 눈을 매섭게 떴다.
[뭐? 내가 언제!]
[게다가 그 형은 누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아 보이던데, 상대나 해 줄 거 같아?]
[뭐가 훨씬 많아? 끽해야 네다섯 살 정도일 텐데. 그 정도 차이는 나이 들면 아무것도 아니야. 아빠 엄마도 엄마가 네 살 많지만 결혼했잖아!]
[저기, 얘들아.]
거의 싸울 것처럼 으르렁대는 둘 사이를 무경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지금 얘기하는 사람들, 혹시 이 사람들이니?]
무경이 말을 걸며 블랙박스에서 캡처한 시우와 지우의 사진을 내밀었다. 낯선 사람이 말을 걸자 조금 경계하듯이 쳐다보던 아이들이 무경의 잘생긴 얼굴을 보자 금방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순순히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 사내아이가 아주 흥분해서 눈을 반짝거리며 되물었다.
[네, 맞아요! 콜린이랑 아는 사이예요? 혹시 전화번호도 아세요?]
***
무경은 자신이 콜린이랑 일행이며 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엇갈려서 난감한 참이라고 말간 얼굴로 거짓말을 했다. 아이들은 무경의 말을 순순히 믿고, 콜린 남매가 15분 전쯤에 9번 플랫폼으로 갔으며 콜린이 취리히로 간다는 얘기를 하는 걸 들었다고 알려 주었다.
무경은 우선 9번 플랫폼으로 달려갔다. 스위스 취리히 방면인지를 먼저 확인했다. 플랫폼은 비어 있었고 그 앞은 한산했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눈에 불을 켜고 둘러봤지만 시우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시선을 들어 타임 테이블을 알려주는 전광판을 살폈다. 9번 플랫폼 취리히행 열차는 9시 50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0분 전에 이미 떠났다.
무경은 망연자실했다. 기차는 직행이었고 도착 시간은 4시간 후였다. 다음 기차는 50분 후에 있었지만, 뒤차를 타고 가 봐야 시우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후일 테니 또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상황이었다.
“최 비서님.”
잔뜩 눌린 목소리로 무경이 주엽을 불렀다. 사뭇 분위기가 살벌했다.
“네, 넷.”
주엽은 무경이 사람들 보는 공공장소에서 또 난동을 부리지 않을까 잔뜩 긴장한 긴장해서 급하게 대답하다가 갈라진 소리를 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그걸 의식하고 웃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경은 텅 빈 플랫폼을 노려보며 이를 아득 갈았다.
“헬기 띄우세요.”
***
무경은 시계를 보았다.
1시 50분.
프랑크푸르트발 직행 열차는 8분 후에 이곳 취리히 역에 도착할 것이다.
무경은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초조한 표정으로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 철도 트랙으로 먼 시선을 던졌다.
헬기는 무경이 한국을 떠날 때, 유럽 내에서 사용 가능하도록 준비하라고 미리 지시해 놓은 상황이어서 가장 가까운 이착륙장을 물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지시를 내릴 때 시우를 추적하는 데 사용하리라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단순한 관광용이었다. 기차도 타고, 유람선도 타고, 자동차도 이용해서 여행하듯이, 여행 중 이동수단의 하나로 준비해 놓으라고 한 거였다. 전용기를 탔을 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시우의 얼굴이나, 신이 나서 방방 뜰 지우의 얼굴을 기대하면서.
시우를 잡으면 며칠 정도야 찬바람이 불겠지만, 지우도 있는데 뭐 언제까지 버티랴 싶었다. 휴가도 2주나 되니 여기저기 지우 데리고 놀러 다니면서 바람을 쐬다 보면 시우도 어느 정도 누그러질 테고, 그러면 어떻게 얘기를 잘해 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역시 그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변장까지 해 가며, 교통편을 바꿔 타 가며, 이렇게 추격전을 벌이면서까지 저를 피해 달아날 줄은 몰랐다. 저와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것조차 싫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를 좋아하고, 내게 각인한데다 내 아이까지 품고 있으면서!
***
“차 들어옵니다, 이사님.”
주엽이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긴 무경에게 언질을 주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멀리서 독일 고속열차의 하얀 차체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 좌석에 앉았는지를 모르니, 플랫폼을 따라 띄엄띄엄 인력을 배치하고 무경은 맨 가장자리 출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기차가 서고 승객들이 쏟아져 내렸다. 무경은 눈을 부릅떴다.
연말에 크리스마스 시즌, 그에 더해 학생들은 방학을 맞은 시점이었다. 가족 단위 여행객도, 배낭여행을 하는 대학생들도 넘쳐났다. 추적팀에는 여자애든 남자애든 열 살 전후의 아이를 중점적으로 주시해서 보라고 말해 놓았지만 무경의 시선은 어떻게 해도 시우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177cm 키에, 선이 유려한 몸매, 작고 하얀 얼굴과 결 좋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오메가 남자를.
하지만 때는 겨울이고 승객들은 두터운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도 너무 많았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모인 가족이, 출장 온 직장인들이 곁을 스쳐갔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혼자 혹은 그룹을 지어 흥분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커플들도 있었다. 따로 떨어져 걷는 이들도 있었지만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거나 거의 껴안다시피 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샅샅이 훑어보는 무경의 눈에 한 커플이 잡혔다. 알파 남자에 오메가 남자 조합이었다. 독일인으로 보이는 알파의 강한 형질이 독점욕 강하게 오메가를 휘감고 있었다. 종아리까지 덮는 긴 패딩을 입고 털모자 위에 패딩의 방한모까지 덮어 쓴 오메가는 빨강과 초록의 타탄체크 목도리로 얼굴을 반 남짓 가린 채 알파의 어깨에 얼굴을 묻다시피 하고 있었다.
손마저 두터운 장갑에 감싸인 오메가에게서 유일하게 보이는 맨살은 하얀 코끝뿐이었다. 알파의 형질에 가려져 체향 같은 건 맡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경은 어쩐지 그 오메가가, 그 작은 코끝이 신경에 걸렸다.
[저기, 잠깐만.]
무경이 영어로 말을 걸자, 알파가 날 선 얼굴로 무경을 쳐다보았다. 무경의 시선은 줄곧 오메가를 향해 있었다. 알파는 제 오메가를 더 끌어안듯이 감쌌고 경계하는 표정으로 낯선 알파에게 험악한 시선을 보냈다.
[뭡니까?]
[그쪽 분 얼굴 잠깐만….]
방한 후드로 손을 뻗자 알파가 거칠게 무경의 손을 쳐 냈다.
[당신 뭔데 남의 오메가한테 집적대는 거요?!]
알파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멀리 있던 역무원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경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억누르고 있던 극우성의 형질이 저도 모르게 확 치받고 올라왔다. 그때였다.
“이사님!”
갑자기 주엽의 목소리가 무경을 잡아끌었다.
“저쪽에 시우 군이!”
무경은 바람 소리가 나도록 얼굴을 돌렸다. 멀리서 제가 고용한 사람들이 누군가를 쫓아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으로 날렵한 몸매의 청년이 긴 곱슬머리 아이를 안고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에 앞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저도 모르게 달리고 있었다. 찬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쉭쉭 소리를 냈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쳐다보는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역 끝까지 달려간 청년이 육교 계단을 밟고 오르기 시작했다.
앞서 달리던 추적팀을 추월해 가며 달리던 무경은 문득 위화감을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헉, 헉, 이, 이사님?”
뒤따라 달려오던 주엽이 멈춰 서 제 심장 근처를 부여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의아한 듯 무경을 쳐다보았다.
이상하다.
아이를 안고 달아나는 남자는 시우와 같은 옷을 입고, 키도 체격도 흡사했지만… 뭔가 달랐다. 몸짓이나 움직임이나 그 육체를 이루는 선이나… 시우가 아니다.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무경은 몸을 돌렸다.
방금 주의를 끌었던 커플을 눈으로 쫓았다. 방금까지 플랫폼 근처에 있었던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지? 어디로 갔지?
무경의 핏발 선 눈이 사방을 헤집었다. 어지럽게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흰색 패딩 코트만을 집요하게 찾았다.
저기다!
그의 시선에 멀리 다른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걸어가는 오메가의 흰색 패딩이 눈에 들어왔다. 알파의 손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다. 역사 기둥 뒤로 사라지는 그들의 움직임은 느긋해 보였던 조금 전과 다르게 다급했다.
빌어먹을.
무경은 무작정 그쪽을 향해 달리 달리기 시작했다.
“이사님, 어디 가세요? 이사님!”
뒤에서 주엽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귀에 들려 올 리 없었다.
사람들에게 부딪혀 가며, 미안하다고 말할 여유도 없이 흰색 패딩이 있던 곳을 향해 달렸다. 사람들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사라진 곳은 또 다른 출발 플랫폼이었다.
무경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을 때 플랫폼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하얀 패딩 커플도 없었다. 기차는 출발 시간이었고 승객은 전부 탑승했으며 이미 문이 닫히고 있었다. 너무 늦은 것이다.
***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기차가 움직이고 나서야 시우는 길게 호흡을 뱉었다.
[안색이 안 좋네요. 괜찮습니까?]
앞자리에 앉은 마크가 역시 웅크리고 있던 덩치를 펴며 말을 건넸다.
[네, 괜찮아요.]
시우는 한숨을 쉬고 그때까지 두르고 있던 방한모와 머플러를 벗었다. 이마와 목덜미가 축축했다. 기차 안이 따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플랫폼에서 무경과 마주쳤을 때부터 솟아나기 시작한 식은땀 때문이었다.
“나 이제 나가도 돼?”
지퍼만 살짝 열어 둔 상태인 천 트렁크에서 웅웅거리는 어린애 목소리가 들렸다.
“아, 미안, 미안. 지우야. 답답했지.”
시우는 주변을 살피며 바닥에 놓인 트렁크 속에서 지우를 몰래 끄집어 올려 좌석 위에 앉혔다. 일등석 중에서도 별실로 분리된 특등석이라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행여 누가 보면 아동학대로 신고할지도 몰랐다.
“아니, 가만히 오래 있었으면 답답했을 텐데, 계속 움직이니까 재미있었어.”
다행히 지우는 가방 속에서 이동한 것을 별스러운 경험이라고 생각했는지 발을 달랑거리며 웃었다.
시우는 가발을 쓰느라 눌린 지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까지는 애가 재미있어 하니까 다행이지만, 도대체 어린애한테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될 일인지 모르겠다.
***
오늘 아침, 프랑크푸르트역에서 기차가 출발했을 때 시우는 일단 한숨 돌렸다고 생각했다.
호텔 로비에서 엇갈렸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하지만 취리히로 갔다가, 다시 스위스의 어디, 혹은 인접한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어딘가로 가 버리면 무경이 다시 저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20대 중반과 후반쯤으로 보이는 백인 남자 둘이 다가왔다. 낯선 이들의 접근에 순간적으로 무경이 보낸 사람인가, 하고 몸이 잔뜩 굳었다.
하지만 그들은 강우가 보낸 사람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경계하는 시우에게 직접 강우와의 전화통화로 신원을 확인시켜 주기도 했다.
둘 중 나이가 위인 사람은 마크라는 이름이었는데, 그들은 강우의 지시로 일단 무조건 시우를 쫓아와 취리히행 기차에까지 탑승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무경의 뒤를 쫓은 다른 팀원이 알려 온 바에 따르면, 무경이 시우의 뒤를 쫓아 지금 프랑크푸르트 역을 뒤지고 있으며 헬기를 띄울 예정인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그건 다시 말해 무경이 시우의 도착에 맞추어 취리히 역을 지키고 서 있을 거란 이야기였다.
마크의 제안에 따라, 시우와 체격이 비슷한 젊은 팀원이 대역을 맡아 무경의 시선을 끌고, 그 사이 마크가 시우를 데리고 달아나기로 계획을 세웠다.
지우는 여행 가방에 숨기고, 시우는 마크와 커플로 위장을 했다. 지우가 답답할까 봐 가방의 아래쪽 지퍼를 약간 열어 두었다. 시우 자신은 미약한 페로몬이라도 혹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마크의 형질을 덮어 쓰기로 동의했다.
그런데 이게 상당히 이상했다. 알파의 형질에 미묘하게나마 반응을 하는 것은 오메가로서 어쩔 수 없다지만, 이렇게 따끔따끔 통증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같은 알파라도 상대에 따라 형질에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통증을 느낀 적은 없었다.
처음 느끼는 감각에 시우는 이게 뭐지, 하고 한동안 머릿속에서 이유를 찾았다. 임신을 해서인가. 의사의 말에 따르면 임신한 오메가는 알파의 페로몬에 다소 둔감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타인의 형질에 이런 식의 통증을 느낀다는 얘기는 들어보질 못했다. 그럼 뭐가 문제지.
그때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더 있었다.
각인.
그 단어를 떠올린 순간 시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각인에 대해 시우가 알고 있는 건 일반론적인 것뿐이었다. 평생 한 사람만 마음에 품게 된다는 것. 자신의 알파가 아닌 알파의 페로몬에 둔감해진다는 것.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런 것도 있을 수 있는 건가. 통증까지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는 건가?
[왜 그러시죠? 많이 불편하십니까?]
얼굴이 조금 일그러진 시우를 내려다보며 마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에게 딱히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님을 알면서도 싫은 기색을 하는 건 실례였다. 더구나 지금은 제게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위장을 하는 상황 아닌가. 시우는 애써 표정을 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조금 현기증이 났을 뿐이에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시우는 내릴 타이밍을 찾기 위해 밖을 살피다가 플랫폼에서 무경을 발견한 순간 통증을 잊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긴장감에 머릿속까지 맥박이 뛰는 것 같았다. 통증이고 뭐고, 지금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무사히 취리히 역을 탈출했다. 한숨 돌리자 시우는 주변부터 살폈다. 그저 정신없이 마크가 이끄는 대로 뛰다시피 걸었을 뿐이라 제대로 목적지를 살피거나 듣지 못했다. 목소리를 낮추어 마크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이 기차 어디로 가는 거죠?]
[루가노요. 이게 제일 빨리 출발하는 거 같길래.]
[아, 루가노… 좋네요….]
시우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유럽 관광 책자를 뒤적거리며 스위스 공부를 할 때 눈여겨본 예쁜 도시였다. 스위스 남부에 위치한, 이탈리아 분위기가 난다던 작은 도시. 마음 같아서는 북부의 베른이나 유명한 루체른을 둘러본 후 남부로 내려가고 싶었는데 무경이 쫓아오는 바람에 곧장 루가노부터 가게 생겼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바쁜 무경이 언제까지고 제 뒤만 쫓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조만간 포기를 할 테고, 그가 철수했다는 소식만 듣게 되면 도피 생활도 조금은 느긋해질 테니까.
시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위스 특유의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질 만큼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우에게는 그 아름다운 풍광을 마냥 만끽할 여유가 없었다. 시우는 우울한 기분에 잠겨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 보이네요. 지칠 만도 하죠. 시우 씨도 좀 자 두지 그러십니까?]
앞자리에서 마크가 말을 건넸다.
시우 씨도, 라는 말에 시우는 옆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더니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지우가 까무룩 잠이 들어 축 늘어져 있었다. 시우는 혀를 차며 의자를 뒤로 젖히고 목을 좀 편하게 해서 다시 눕힌 다음, 패딩을 벗어 이불 삼아 작은 몸 위에 덮어 주었다.
[동생이라더니 형이 아니라 엄마 같습니다.]
마크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힐끗 쳐다본 눈동자는 호감을 띠고 있었지만 시우는 그 눈빛도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네, 뭐… 나이 차도 많고, 동생이 어릴 때부터 몸이 좀 약해서요.]
[그러고 있으면 다리가 좀 추울 텐데. 이거라도 덮으십쇼.]
마크가 제 외투를 벗어 시우에게 건넸다. 시우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여기 별로 춥지도 않고….]
[지금은 괜찮아도 금방 추워질 겁니다. 오메가 분들은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요.]
마크가 몸을 일으키다시피 해서 제 외투를 시우의 다리 위로 올려 주었다. 그때였다.
***
[그쪽이야말로 누군데 남의 오메가한테 집적대는 걸까.]
극우성 알파의 강렬한 형질이 차량 안을 엄습했다. 동시에 여름 숲의 청량한 향기가 난방으로 텁텁해진 객실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마크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는 것이 시우 눈에 뚜렷하게 들어왔다.
시우는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객실 차량 입구에 무경이 서 있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얼어붙을 듯이 차가웠다.
“시우야.”
부르는 목소리가 소름 끼칠 만큼 낮고 부드러웠다.
“혼자 여행하는 줄 알았는데, 그 새끼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