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초 정도 얼어붙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무경은 가볍게 헛웃음을 지었다.
“봐, 제법 귀여운 짓을 한다니까.”
핸드폰 화면을 아래위로 가볍게 손가락으로 건드리면서 무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서류 봉투를 찢어서 내용물을 훑었다. 제법 격식을 갖춰서 계약 해지 요구서를 보냈다. 맨 아래에 날짜를 적고 제 이름 옆에 인감까지 쿡 찍었다. 시우가 혼자 서재에 틀어박혀서 이 문서를 작성하고 어디선가 비장한 표정으로 이 문자를 보내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무경은 피식거렸다.
봉투를 뒤집어 털어 보았지만 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딸랑 종이 한 장과 문자가 끝인 모양이다. 조금 아쉬워서 무경은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지금 시우가 어디 있답니까?”
종이를 다시 서류 봉투에 집어넣으면서 무경이 가벼운 말투로 진명에게 물었다. 어디를 가 있든 기완이 따라 붙었을 터였다. 그러나 진명의 표정은 가볍지 않았다. 난감한 얼굴로 조금 대답을 망설인다.
“그것이… 아무런 보고가 없었습니다.”
무경의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뭘 하고 있길래 보고가 없어. 전화 넣어 봤어요?”
“네…. 그런데 전화를 안 받습니다.”
결국 무경은 얼굴을 찌푸렸다.
“전화를 안 받아요? 무슨 소립니까, 그게?”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기완이도, 한 여사도. 집 전화도 응답이 없어요. 시우 군은 당연히 전화를 안 받고요.”
“…….”
꾸깃, 무경의 손에서 서류 봉투가 거칠게 구겨졌다. 진명이 흘깃 그 손을 보고 한숨을 쉬며 보고를 이어 갔다.
“지금 집으로 사람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해 놓았습니다.”
“지우는?”
“체험 학습을 떠난 상태라 당장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인솔 교사와 연결이 되는 대로 바로 연락을 주기로 했습니다.”
“다시 전화해서, 시우가 오더라도 보내지 말라고, 아니 둘 다 붙잡아 놓으라고 미리 얘기를 해 놓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유정인가 하는 그 친구 신병도 확보하고,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에도 사람 풀어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무경이 덧붙였다.
“공항에도.”
설마 외국까지는 아니겠지, 생각했지만 무경은 생각을 바꿨다. 아예 이참에 길게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새로 부착한 위치 추적기는요?”
“그게… 집에 있는 걸로….”
무경은 코웃음을 쳤다.
“다 놓고 갔나 보네. 어쩐지 답지 않게 얌전하다 했더니 당일을 노린 거였어.”
삐릿, 무경의 핸드폰이 울었다. 흘깃 내려다본 화면에는 곧 케이크 커팅식이 시작될 테니 회장으로 오라는 비서진의 메시지가 입력돼 있었다.
무경은 서류 봉투를 진명의 가슴팍에 밀어 붙었다.
“어쨌거나 오늘 이거 끝나기 전에 시우 소재 파악해서 제대로 감시 붙여 놓으세요.”
무경은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진명도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에 진명의 핸드폰이 부르르 떨었다. 작은 소음에도 무경이 멈칫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진명은 화면을 확인하고 병원 측 담당자입니다, 하고 짧게 보고한 후 전화를 받았다.
“네, 서진명입니다.”
무경은 멈춘 상태로 진명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던 진명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게 언제죠? 아니, 왜, 그걸… 아니,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뭡니까?”
전화를 끊는 진명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무경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시우 군이… 지우를 데려갔답니다.”
“언제요?”
“4시간… 전이랍니다.”
***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한 여사와 기완은 아직도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무경은 아직 잠에 취한 말투로 횡설수설하는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다시 한 번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연시우. 도망가겠다고 약까지 쓸 줄이야.
늦은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실 때, 디저트로 먹자며 시우가 냉장고에서 푸딩을 꺼내 왔다고 했다. 유명 제과점의 수제 푸딩으로 한 여사도 기완도 좋아하는 거였는데, 시우가 어젯밤 산책 길에 직접 사 와서 냉장고에 넣어 둔 거였다.
별 의심 없이 맛있게 나눠 먹고 시우가 화실에 틀어박힌 후 한 여사는 집안일을 시작하고 기완은 소파에 앉아 빨래 개는 걸 돕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보고를 하고 나서 갑작스레 너무 졸린 나머지 소파에 잠깐 앉았는데, 그 이후로는 거의 기억이 없다고 했다.
수면제라. 저 정도로 효과가 빠른 거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수면 유도제는 아닐 테고 병원에서 처방 받은 걸 텐데 언제 어디서 얻었지. 무경은 한숨을 쉬고 진명을 향해 물었다.
“CCTV는?”
“오전 11시경에 집을 나서는 모습은 포착됐습니다. 청바지에 회색 코트 차림이고 쇼핑백 하나만 들고 나간 것 같습니다.”
시우가 집에서 가져간 건 거의 없었다. 입고 있는 옷 한 벌과 제 원래 소유의 통장과 도장, 카드 등이 다인 것 같았다. 무경이 준 카드는 그가 선물한 지갑과 함께 고스란히 서재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물론 핸드폰과 시계, 태블릿도, 여태까지 여기서 그렸던 그림조차도 화실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편지라도 남아 있을까 했지만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파티 장에서 받은 몇 줄 되지 않는 문자와 계약 해지 요구서, 그게 다였다.
“사람들 푼 건 어떻게 됐습니까?”
“죄송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유정이란 친구는요?”
“오늘 하루 종일 학교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시우 군과 접촉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도 찾아간 흔적이 없고요. 일단 사람은 붙여 놓았습니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 오기 시작했다. 무경은 마른세수를 하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뭔가가 좀 이상했다. 시우가 아무리 머리를 써 본들 일반인이었다. 첩보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란 말이다. 가출할 가능성은 염두에 두었지만, 지우까지 데리고 약까지 써 가며 이렇게 치밀하게 도망을 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도망쳐서 뭘 어쩌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계약 해지 요구서까지 보내 놓은 주제에 계약상으로 정당하게 챙겨야 할 돈은 다 챙기지도 않았다. 통장에 돈이 얼마쯤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푼돈이었다. 집도 절도 없는 형편에 동생까지 데리고 얼마를 버티려고.
제대로 도망친 거라면 시우는 다시 직장을 구해야 할 거고 동생은 학교에 보내야 할 터였다. 게다가 지우는 아직 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검진과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였다. 신중한 성격의 시우가 홧김에 저지른 행동이라 보기에는 너무 무모한 감이 있었다.
결국 진짜로 완전히 사라지려는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수면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어. 그때 다시 잡으면 그만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초조감을 무시하며 무경은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듯 속으로 되뇌었다.
***
그러나 쉬이 잡히리라는 무경의 생각과는 달리 2, 3일이 지나도록 시우의 행방에 대한 작은 단서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몇 번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제보가 있었지만 확인 결과는 전부 아니었다. 공항의 출국 기록에도 시우 형제가 나갔다는 정보는 없었다. 국내에 있다는 얘기였다. 안심해야 하는 얘기였지만 무경은 슬슬 초조감에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무경은 그 이후로 줄곧 청담동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일이 끝난 늦은 시각,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돌아와서 무경은 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난방이 돌아가고 있었는데도 싸늘하고 적막했다.
새벽 시간에 정적에 감싸인 이 집을 찾은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시우가 침실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집은 어딘가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었다. 숨을 쉬고 있는 집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집은 그저 무생물이었다. 철근과 콘크리트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그냥 말 그대로 차가운 건물에 불과했다.
한숨을 쉬고 무경은 뒤적이던 시우의 스케치북을 내려다보았다. 화실에는 시우가 그리던 그림들이 가득했다. 정원의 풍경, 빨래를 너는 한 여사의 모습, 함께 갔던 놀이공원과 체험 농장, 그리고 지우의 얼굴. 그러나 어디에도 무경의 얼굴은 없었다.
무경은 씁쓸하게 웃었다.
무경은 어엿한 각인 상대였지만 시우는 지금 각인을 한 사실조차 후회하고 원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 모든 걸 다 완벽한 상태로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시우는 불행의 단초가 됐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무경으로서는 평생 시우를 옆에 묶어 두는 데 각인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무경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기적적인 선물 같은 거였다.
보던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쌓여 있던 화구 사이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화실에서 보이는 물건으로는 좀 이질적인, 명함 크기의 카드 같은 물건이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허리를 굽혀 주워 올렸다.
낯선 병원의 이름이 있고 환자 이름으로 연시우가 적혀 있었다. 진료증 같은 거였다. 내과와 호르몬과, 산부인과를 대강 망라하는 작은 가정의학과 병원이었다. 무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시우가 의외로 건강해서 지금까지 병원 갈 일은 별로 없었지만, 가야 한다면 지우가 입원한 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받도록 하고 있었다. 차씨 집안이 소유한 재단 하에 있는 병원이었기 때문에 진료 기록 확인 등 여러 가지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언제 자신은 물론 한 여사, 기완도 모르게 이 병원에 갔던 거지.
처음에 시우에게 붙인 건 시계와 핸드폰의 위치 추적 장치뿐이었다. 그것도 시우가 달아날까 의심해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주변에 기완이 없을 때 위험한 일이라도 생길까 봐서다. 목적지까지 오고 가는 것은 운전기사가 동행했지만 차에서 내린 뒤부터는 온전히 시우 혼자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당연히 도청기는 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우가 뭔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시계를 차는 걸 꺼린다든가 우진을 만난 사실을 숨긴다든가. 그리고 혼자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일도 많아졌다. 산책을 나갔다가 연락도 없이 늦는 날도 생겼다. 결국 여기저기 뒤를 캐고 다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 후로 핸드폰과 가방에 도청기까지 붙였지만 딱히 건진 건 없었다. 시우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그냥 포기한 건가 싶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더 조심했던 모양이다. 이 병원도, 아마 가방과 핸드폰을 따로 두고 찾아갔던 거겠지.
무경은 얼굴을 찌푸렸다.
***
다음날 아침, 진명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진료증에 표시된 개원 시간에 맞춰 무경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직원이 병원 이름을 대며 친절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연시우 씨 보호자 되는 사람입니다만.”
- 아, 네. 연시우 환자님… 잠시만요.
전화를 받은 직원이 환자 기록을 검색하는지 탁탁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불쑥 질문이 들어왔다.
- 환자분과는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갑자기 묻는 말에 대답이 막혔다.
“아,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배우자…는 아니고. 애인…이라고만 해도 되나?
“연시우 씨… 파트넙니다.”
약간 어폐가 있기는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대답을 들은 직원은 무언가를 기록하는 듯하더니 시우의 생년월일을 물었다. 진짜 관계자인지 확인하려는 절차인 것 같았다. 무경에게는 무슨 정보든 훤했으므로 막힘없이 답했다. 그제야 직원이 목소리를 한 톤 높여 밝게 대답했다.
- 보호자분 되시는 거 확인했구요. 어떤 용건으로 전화하셨습니까.
“보험 관련으로 정리할 게 있는데 마침 여기서 진료 받았으니 차트 기록을 좀 알고 싶습니다.”
- 아, 네에. 지난번에 산부인과 진료 받으신 건으로 처리하시려는 거죠. 아, 지금 보니 연시우 님 오늘 내원 예정으로 되어 있으신데 이따가 같이 오셔서 내역서 끊어 가시면 될 것 같은데요.
산부인과 진료라니, 무경은 잠깐 당황했다. 이 사람 뭔가 착각을 하고 있나? 연시우라는 동명이인 환자가 또 있는 거 아닌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문득 산부인과 진료가 무조건 임신과 출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 관련 질병으로 진료를 받았을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근래에 몸이 좋지 않다며 삽입 섹스를 거부하던 시우가 떠올랐다. 대체 어디가 아팠던 거지. 무경은 생각이 많아지는데 직원은 아는지 모르는지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임신 확진이시니까 내원하실 때 조심하시구요. 극열성으로 임신하는 거 엄청나게 희귀한 경운데 정말 축하드려요. 기쁘시겠어요.
그 말에 무경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임신이라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직원의 말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우가 극열성은 맞는데… 뭐… 라고? 임신?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극열성인데 임신이라뇨?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닙니까? 환자 이름이 연시우 맞습니까?”
- 네?
직원이 당황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탁탁탁 키보드를 두드린다.
- 연시우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분은 한 분밖에 없으신데요. 그리고 이분 저 기억나는데 그때 확진 받고 가시는 걸 봤는데… 얘기 전혀 못 들으셨어요? 진짜 파트너분 맞으세요?
의아한 말투로 시작한 말이 의심스런 물음으로 끝을 맺었다. 무경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시우가 임신이라니. 농담이 아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그러는 와중에 잠시 전화기 저편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말과 뭔가 대답하는 소리, 질책하는 듯한 소리가 오가더니 다른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연시우 씨 보호자 되신다구요.
“아, 네. 지금 말이 사실입니까? 극열성인 시우가 임신이라니 이해가….”
상대방이 무경의 말을 잘랐다.
-저,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원장인 민서은이라고 합니다.
“…차무경입니다만.”
- 죄송하지만 진료 기록에 차무경 씨의 이름은 보호자로 입력돼 있지 않습니다. 저희 직원이 신입이라 실수를 저질렀는데, 원칙적으로 환자 개인정보를 알고 계신다 해서 환자 본인이 등록하지 않은 분에게 함부로 차트 기록을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잠깐만요, 시우가 임신을 했다면 내 아이라는 얘긴데 어째서….”
- 저희로서는 지금 그걸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파트너분이시라면 지금 연시우 씨와 함께 계신가요?
“아닙…니다. 지금은….”
- 뭔가 궁금한 게 있으시면 직접 파트너 분께 물어보시고…. 더 자세한 걸 알고 싶으시면 두 분이 같이 오시면 되겠네요. 그럼 이만….
“잠깐만요.”
무경이 다급하게 전화기 너머의 상대를 붙잡았다.
- …네?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틀림없이 저를 상당히 무책임한, 믿을 수 없는 알파라고 생각하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연시우 보호자나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일반론적으로 물어보죠. 내가 극우성이고 내 파트너가 극열성인데 내 파트너가 임신을 한다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 …….
“의사 선생님께, 일반적인 상황을 예로 들어 여쭤 보는 겁니다.”
‘일반적인’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무경이 다시 물었다. 의사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 일반적으로는 어렵습니다. 단지 조건이 갖추어질 경우가 있어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계가 장기간 이루어질 경우, 극우성 형질이 극열성에 영향을 미쳐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서로의 사이클이 맞아떨어질 때가 있는데, 그 경우에 극우성 페로몬의 영향으로 극열성의 가임 확률이 일시적으로 높아지게 되는 거죠. 상성도 맞아야 하므로 어디까지나 운이 좋아야 하지만, 그런 조건들이 잘 갖춰지면 극열성도 실제로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대단히 드문 일이긴 하지만요.
***
의사와의 통화가 끝나고서도 무경의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시우가 아이를 가졌다. 내 아이를.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모든 게 아귀가 맞아 들어갔다.
지난 몇 주간 시우가 줄곧 나른하고 피곤해 보였던 이유. 저와의 섹스를 피하려던 이유. 그리고.
그게 토요일이었던가, 일요일이었던가. 집 근처 카페에 앉아 있을 때 밖을 지나가던 커플과 아이들을 보며 시우가 뜬금없이 아이에 관한 얘기를 꺼냈던 이유.
그때 제가 시우에게 뭐라고 했더라.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했었다. 게다가 아이가 생기면 집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뺏을 거라고, 열성이나 극열성이면 심지어 빼앗아서 다른 데다 입양을 보낼 거라고도 했었지.
맙소사.
그러면 그때 시우는 그 얘기를 고스란히 자신에게 대입을 시키며 듣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아이를 낳으면 빼앗길 거라고. 열성을 낳게 되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에게 아이를 보내고 저는 평생 아이를 못 볼 수도 있을 거라고.
무경은 그제야 깨달았다.
시우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철저히 숨어서 사라져 버릴 생각인 것이다. 다시는 제 곁에 있어 주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무경은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눌러 잡았다. 한껏 힘을 주어 눌러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
무경은 진명을 불렀다.
처음부터 찾는 방법이 틀린 거였다.
그저 별생각 없이, 시우가 지우를 데리고 어디 몰래 여행 가는 수준으로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꼬리를 감추는 데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방법으로 단서조차 잡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시우에게 그런 도움을 주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생각은 천천히 하고 일단은 행동부터 서둘러야 했다. 이미 너무 늦은 건지도 몰랐다.
“부르셨습니까.”
진명이 들어왔다.
“시우 찾는 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세요.”
“…네?”
“시우와 지우가 함께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실제 신원을 그대로 썼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마세요. 아마 따로따로 다른 일행들에 섞여서 이동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사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변장했을 가능성도 다 염두에 두세요. 어른보다는 아이를 눈여겨보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시우보다는 지우를 중심으로 물어보세요. 공항 같은 데도 그날 근무한 카운터 직원들, 검색대 직원들 다 찾아서 일일이 다 확인하고.”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무경이 진명의 질문을 차갑게 쳐냈다.
“일단 지시한 것부터 이행하고 얘기합시다. 이미 잡을 수 있는 시간을 놓쳤을 수도 있어요. 해외로 빠져나가는 루트부터 먼저 확인하세요.”
“알겠습니다.”
***
진명이 나간 후 무경은 의자 깊이 몸을 묻고 머리를 기댔다. 잠이 부족한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머리를 비우고 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터질 것처럼 머릿속을 빙빙 도는 생각들은 해결책을 얻지 못하면 절대로 떠나가지 않을 기세로 무경의 뇌세포를 갉아먹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시우의 도망을 도왔을까. 시우를 찾는 데 가장 큰 힌트가 될 수 있는 질문이지만 짚이는 데가 전혀 없었다.
시우는 일개 서민 출신 정부였다. 무경이 속한 사회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다. 알파든 오메가든 정략결혼을 한 경우라면 그런 장난감은 없는 게 더 이상한 축에 속했다. 게다가 뭔가 복잡한 잇속이 얽힌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가 그런 정부가 도망가는 걸 별 이유도 없이 돕는단 말인가.
집안사람들이 시우를 빼돌릴 이유는 없었다. 무경이 시우에게 빠져서 일을 등한시한다거나 결혼을 안 하겠다고 버티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인 차 회장은 이미 묵인했고 고모가 시우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그게 저 몰래 시우가 도망가는 걸 도울 이유는 못 됐다.
은 회장 일가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를 두는 문화는 그쪽도 동일했다. 새삼 막내아들의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위해 무경의 정부를 도망시킨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시우가 사라지면 무경이 다른 정부를 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정부가 있든 없든 유원의 위치는 굳건했고 그들에게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게다가 유원 역시 상대가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미성년이라 쉬쉬해 왔을 뿐이다. 실제로 육체관계까지 맺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상대가 집안에 있는 걸로 보고 받았다. 어차피 퍼피 러브일 테니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고.
무경으로서도 유원에게 좋아하는 상대가 있는 것이 편했다. 그래야 저에게 헛된 기대를 품지 않을 테니까. 유원에게 유독 쌀쌀맞게 굴어 왔던 것도 그래서였다.
***
“잠은 제대로 주무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불면증이 다시 도진 건 아니신지….”
청담동 빌라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어 주며 진명이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며칠째 무경의 얼굴이 창백한데다 눈 밑의 푸르스름한 그늘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니까 서 실장님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시우 행방 찾는 거에나 좀 더 집중하세요. 내일까지도 뭔가 나오지 않으면 실장님이 직접 발로 뛰셔야 할 겁니다.”
무경이 차가운 말투로 뱉으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진명은 한숨을 쉬었다.
알아서 한다고 해도 말이지….
얼굴이 저 모양이니 슬슬 비서진 사이에서도 말이 새어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사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거냐며 진명이 윗선에 불려 갈 날도 머지않았다.
하지만 건강관리 따위 백날 해 봐야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차무경이 차씨 집안 정식 후계자로 들어올 때부터 마치 지병처럼 가지고 있던 불면증이었다. 그건 집안에서도 잘 알고 있었다. 수면 클리닉에 보내도 상담 치료를 받게 해 봐도 별 도움이 안됐다. 수면제는 잘 듣지 않고 부작용만 심해서 결국 복용을 포기해 버렸다.
그때부터 공부든 운동이든 일이든 뭐든 지칠 때까지 하고 거의 기절하다시피 해서야 잠이 드는 게 습관이 됐다. 고무줄처럼 제멋대로인 그의 아침 출근 시간을 윗선에서 용인하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이었다.
무경의 불면증이 호전을 보인 건 그나마 시우가 들어온 이후부터였다. 차 회장이 시우를 계속 정부로 두겠다는 무경의 말을 큰 반대 없이 그냥 받아들인 것도 그에 대한 보고가 들어갔기 때문일 터였다. 집안에서는 흔히 말하듯 속궁합이 좋아서 그런 쪽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진명은 한숨을 쉬었다. 뭐가 됐든 제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번의 불면도 시우가 돌아오면 단번에 개선될 문제였다. 문제는 그가 쉬이 발견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었지만….
***
무경은 침대에 누워 술잔에 든 호박색 액체를 불빛에 비추어 흔들어 보고 있었다. 위스키 병은 이미 반쯤 비어 있었지만 어쩐지 전혀 취기가 돌지 않았다. 아니, 사람들을 불러 물어보면 이미 취했다고 할지 몰랐다. 눈도 풀리고 혀도 풀리고 다리도 풀렸을 테니. 하지만 정작 흐려지기를 바라는 머리는 흐려지지가 않았다.
무경은 위태롭게 잔을 든 채로 시우의 베개를 끌어안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베개에 배어 있던 시우의 체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제 코에 그의 향이 묻어난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일 가능성이 높았다. 주인이 마지막으로 이 베개를 사용한 지도 거의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으니.
무경은 베개를 품에 안고서 멍하니 생각했다.
시우의 뱃속에 내 아이가 있다.
내 아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이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해서 없던 애정이 갑자기 샘솟지는 않았다. 무경에게 여전히 아이는 불필요한 존재였다.
아이와 관련해서 무경의 마음을 지배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오메가가 자식에게 품는 애정이란 각인을 넘어서는 것인가?
무경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는 모성애라는 것이 마치 누구나 가진 본능이자 절대적 가치라는 듯 얘기하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자식보다 체면이 더 중요한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친자식을 학대하고 방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오메가가 자신의 알파보다 자식을 더 우선시하는 경우는 흔했다. 하지만, 각인이잖아. 각인도 본능만큼이나 강력한 거 아닌가? 어째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조그만 아이를 위해서 각인한 상대를 버릴 수가 있지?
그게 나라서 그런가? 나라는 존재는 각인한 상대에게서조차 선택 받지 못하는 인간인 건가?
평소에는 하지 않을 생각,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을 어두운 생각의 파편들이 하나 둘씩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혔다.
각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제야말로, 라고 생각했다. 버림받지 않을 수 있는, 선택 받을 수 있는, 강제로라도 사랑 받을 수 있는 완전한 수단을 얻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우는 저를 버렸다. 각인한 게 사실이 아니었나? 거짓말이었던 건가?
머저리 같으니라고. 갖은 애를 써서 마음을 열고 각인까지 시켰으니 이제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거였다. 얼간이가 따로 없었다.
자학을 하는 자신을 깨닫고 무경은 문득 헛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차무경이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오메가한테 버림받았다고 아주 별짓을 다 하고 있다. 무경은 어이가 없어서 혼자 큭큭 웃었다.
빌어먹을.
잔을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어질한 머리를 잠시 붙잡고 있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어차피 처음 덫을 놓을 계획을 구상하면서 시우가 평생 저를 사랑해서 떠나지 않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각인이란 게 튀어나오면서 헛된 기대를 하긴 했지만 어차피 원점으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했던가.
각인을 했든 안 했든 찾아서 옆에 잡아 놓으면 그만이다. 내 아이를 가졌다니 금상첨화이지 않은가. 아이를 붙잡아 놓으면 더는 도망치지도 못할 테니 더 잘된 일이다.
무경은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
어차피 잠들기는 글렀다. 씻고 모처럼 새벽 출근을 해 보자 싶었다. 시우에게 신경 쓰느라 일이 많이 밀려 있었다. 어느 정도 처리를 해 두어야 뭔가 단서가 발견되었을 때 온전히 그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욕실로 향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서진명이었다. 진명이 이 시간에 전화해서 할 얘기는 몇 가지 없었다.
시우에 관한 거다.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무경은 핸드폰을 낚아채듯이 집어 들었다.
“얘기하세요.”
누군지 확인할 것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말했다.
- 시우 군 소재가 파악됐습니다.
무경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딥니까?”
- 독일 프랑크푸르트입니다.
“하… 멀리도 갔네….”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숨어 있기엔 유럽이 땅도 넓고 이 나라 저 나라 옮겨 다니기도 수월하니 도망지로 삼기엔 최적이겠지만 설마설마했다. 임신한 몸에 어린 동생까지 데리고 열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를 날아가다니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지….
- 지우 군을 기억하고 있는 승무원을 찾아내서 도착지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부터는 기차역과 택시 기사들 중심으로 탐문하느라 시간이 꽤 걸려서….
무경이 진명의 설명을 잘랐다.
“자세한 경위는 나중에 천천히 듣죠. 주소 확보했습니까?”
- 네. 아직은 호텔입니다.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일단은 가까이 접근하지 말고 원거리 감시만 하라고 지시한 상태입니다.
무경은 급하게 입고 있던 잠옷을 벗어 던졌다.
“바로 프랑크푸르트로 전용기를 띄울 준비를… 아니, 그건 안 되겠네.”
급한 마음에 전용기 얘기를 꺼내다가 무경은 혀를 찼다. 전용기는 세 대였지만 두 대는 법인 소유고 하나는 차 회장 소유였다. 뭐가 됐든지 간에 지금 당장 제대로 된 사유 없이 사용 허가가 나올 리 만무했다.
“제일 빠른 비행 편 알아보세요. 최 비서한테 연락해서 일정은 다 조정하라고 하고.”
- 직접 가시게요?
전화기 건너편에서 진명이 당황한 소리를 냈다.
“문제 있습니까?”
- 아니, 차 이사님. 지금 그렇지 않아도 약혼식 이후로 위에서 말이 좀 오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분간 눈에 띄는 행동은 좀 자제하셔야… 일도 많이 밀린 상태고요….
무경은 인상을 찌푸렸다. 진명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는 잘 알았다.
유원의 생일 파티 때, 시우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고 이후 지우를 데리고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큰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시우가 한 번쯤 가출 시위를 벌이리라는 점은 예상한 바였고 생각보다 치밀한 계획 하에 달아난 흔적은 있었지만 길어 봐야 이삼 일이면 다시 소재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약혼반지를 건네야 할 시간이 임박해서 무경은 진명에게 뒤를 맡기고 파티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점점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는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생각하면서도 어느새 질겅질겅 입술을 짓이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수행 비서인 최 비서가 표정 관리를 하라고 두어 번 무경에게 언질을 주기까지 했다.
결국 유원에게 생일 선물이라며 약혼반지를 건네주는 것까지가 한계였다. 반지를 끼워 주고 박수를 받으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리고는 바로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원래대로라면 그 상태로 약혼 파티가 이어지고 당사자인 무경이 행복한 약혼자의 모습을 연기하며 끝까지 유원의 곁에 남아 있어야 그날 맡은 역할을 다하는 거였다.
무경이 급한 업무를 핑계로 파티장에서 사라지자 양쪽 집안 어른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거기에 더해 며칠 후 무경이 말한 ‘급한 일’이라는 게 정부의 행방불명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고 그 뒤로 업무까지 하나 둘 밀리기 시작하자 이제는 위에서 무경을 아직 호출하지 않은 것이 되레 이상할 지경이었다.
- 집안 어른들께서 시우 군에게 주목하지 않기를 바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시우 군 몸 상태도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하셨고. 그러면 지금 이사님께서 너무 튀는 행동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 그리고 어차피 이사님이 움직이시면 이동하는 동안 이사님의 동향이 시우 군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군가 돕고 있다면 이사님 스케줄 정도는 꿰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시우 군이 더 강하게 경계할 거고 여차하면 다시 달아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사님은 그냥 모르는 척 하고 계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한테 맡기고 가만히 기다리는 동안의 초조한 불안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제 손에 시우의 손목을 틀어쥐어야만 심장박동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갈 거다. 그래야 좀 제정신으로 잠도 자고 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명의 말은 옳았다. 무경이 움직이면 될 일도 안 될 수가 있었다. 시우는 집안사람들 의식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여야 했다. 아이를 가진 지금은 더욱 그랬다. 무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외국이니까, 괜히 문제 일으켜서 데려오기 어렵게 만들지 말고 알아서 잘 처리하세요.”
흥분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자 조금씩 냉정이 돌아왔다. 일단 소재지를 파악한 건 중요했다. 다만 발견했다고 해서 쉽게 데려올 수가 없을 따름이다. 뱃속에 아이도 있고 지우도 있는데 무리하게 끌고 올 수도 없고, 현지 경찰이라도 얽히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진다.
“일단은 내버려 두고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만 하세요. 동양인은 눈에 띌 테니 현지인 구해서 감시하라고 하고.”
- 알겠습니다.
무경의 진정한 듯한 말투에 진명이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앞으로도 변동 사항 있으면 지체 없이 보고하시고.”
- 네.
“…근데 거기 가서 지금 뭐 하고 있답니까?”
전화를 끊을 듯이 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무경이 물었다. 진명이 대답을 조금 머뭇거렸다.
- …관광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관광요?”
- 네, 지우 군 데리고 근교 마을이나 미술관, 공연장 같은 데를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무경은 기가 찼다. 뱃속에 아이가 있는 채로, 열한 살짜리 아이까지 달고 독일로 도망가서 한겨울에 관광이라니. 얌전히 제 옆에 있으면 어련히 따뜻한 계절에 알아서 이곳저곳 데리고 다녀 줄까.
“속도 편하네, 진짜….”
헛웃음이 났지만 관광을 하고 있다니 어쩐지 일상적인 기분이 들어서 긴장된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정말로 여행하는 기분으로 간 거라면, 무경이 이렇게 가슴 조이며 최악의 상황을 염려하는 건 공연한 기우가 아닐까, 사실은 마음이 풀릴 때쯤 돌아올 생각인 것이 아닐까, 내심 기대감이 싹텄다.
“수고하셨어요. 다음 보고 때는 사진도 같이 봤으면 좋겠네요. 오늘은 좀 주무시고 늦게 출근하셔도 됩니다. 아, 참, 그리고.”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무경이 덧붙였다.
“전에 말한 병원 말입니다. 시우가 몰래 다녔다는. 거기에 시우가 연락처로 어디 번호를 적었는지 좀 알아보세요. 내가 준 폰이나 집 전화로 연락을 받았을 리는 없으니 분명히 뭔가 다른 번호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텐데… 원장은 좀 깐깐한 거 같으니 건드리지 말고 어떻게 다른 방법을 써서 진료 기록을 빼 보세요.”
***
“으으… 피곤하다.”
아이답지 않게 걸죽한 신음소리를 내며 지우가 침대 위에 털썩 엎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시우가 웃었다.
“그대로 잠들면 안 돼. 씻고 자야지.”
제대로 들은 건지 만 건지 지우가 응, 응 하고 대답은 하는데 영 건성이다. 시우는 옆에 앉아서 어린 동생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방학하자마자 체험 캠프에 참가해 신나게 놀고 있었는데 불쑥 형이 나타나 해외여행을 가자고 하니 처음에는 영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역시 애는 애라 금방 잊어버리고 신이 났다.
지우는 실제로 해외여행을 하는 게 처음이었다. 아니, 비행기 타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공항에서부터 설레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긴 비행시간 동안 흥분해서 잠도 안 잔 걸 보면 알 만한 거였다.
처음에는 여권에 있는 이상한 영어 이름을 써야 하고 형과도 떨어져서 이동할 거라는 말에 불안한 얼굴을 했었다. 낯선 오메가 여성의 조카인 척 하라고 하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빚쟁이한테 쫓겨서 도망가는 거냐고 슬쩍 묻기도 했다.
황당한 상상력에 마구 웃어 줬더니 그제야 불안한 얼굴을 풀었다. 조금 사정이 있긴 한데 큰일은 아니라고, 그냥 탐정놀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있으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더니 조금 미심쩍은 얼굴을 하면서도 긴장은 푸는 모양새였다.
그 후로 다시 형과 만나서 함께 다니게 되니 그냥 속 편히 여행을 즐기는 것 같았다. 처음 외국 땅에 떨어져서 말이 안 통하는 경험이 답답할 만도 한데, 지우는 겁 없이 학교에서 배운 영어를 마구 써먹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실제로 통하기도 하니 신기해하며 외국인들과 대화하는 데 금세 재미를 붙였다. 이래서 애들이 외국어를 빨리 배운다고 하는 모양이다.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지우의 페이스를 따라가기 벅찰 때 시우는 저도 모르게 무경이 생각나곤 했다. 지우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제 형 속도 모르고 잘 놀다가도 가끔씩 아쉬운 소리를 했다.
“무경이 형도 같이 왔으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하기야 둘이 놀 때 쿵짝이 잘 맞기는 했지. 시우는 함께 놀러 갔던 때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합이 잘 맞았던 건지, 그냥 무경이 그런 척한 건지 알 수가 없긴 했지만.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무경과는 그냥 친한 친구 사이라고 얘기했지만, 지우도 눈치가 있으니 둘이 사귀는 사이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지우에게 무경과 헤어졌노라 얘기를 하긴 해야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틀림없이 왜냐고 물을 텐데, 지금은 이유를 꾸며 덤덤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시우는 지우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자신도 옆에 아예 드러누웠다.
기본적으로 일정은 느슨하게 잡고 있었다. 아침엔 자고 싶은 만큼 자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쉬고 싶을 땐 무작정 어디론가 들어가서 쉬었다.
그래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만큼 조금씩 피곤이 쌓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빨리 어디엔가 정착하고 싶었다. 사정을 모르는 강우는 쉽게 추적당하지 않도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정착지로 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시우는 빨리 안정을 찾고 싶었다. 지우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슬슬 정기적인 병원 검진이 필요한 시기였다.
“후우….”
시우는 긴 한숨을 쉬었다. 강우나 유원에게 임신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딱히 그들을 의심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아기의 존재를 세상 어느 누구도 모르게 하고 싶었다. 어차피 배가 불러 오면 알게 될 것이고 혹시 제게 준 전화를 도청했다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시우는 병원에 전화하거나 연락을 받을 일이 있으면 유원이 준 핸드폰을 이용해 왔고, 지금도 그 전화를 그들과 연락하는 용도로 쓰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해도 아직 제 쪽에서 먼저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누군가 알게 되면 무경의 일가가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라 두려웠다.
그나저나 외국 생활을 얼마나 해야 하는 걸까.
무경이 저를 계속 곁에 두고 싶다고 했지만 그건 사랑해서 한 말이 아닐 것이다. 멋대로 다정함에 혹해서 사랑에 빠지고 각인을 해 버린 건 자신뿐이었다.
가끔씩 타인에게 턱없는 집착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이상한 소유욕은 대체 어디에 기반한 것이며 그런 류의 집착은 대체 얼마나 가는 걸까. 무경이 자신에게 품는 감정은 얼마나 오래 갈까.
집착 따위 필요 없다고 완강히 고개를 젓는 내면에는 무경에게서 쉬이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
시우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아름다운 풍광을 봐도 마음이 시렸다.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오면 지우가 곁에 있는데도 외롭고 불안하고 허허로웠다. 벌써 한국이 그리웠다.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
“엄마. 엄마?”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아이가 엄마를 찾고 있었다.
어두운 한구석이 희미하게 밝아지더니 희미한 풀 향기가 흘러나왔다. 가냘픈 몸매의 여자 오메가가 구석에 앉아 품속의 아이를 어르고 있었다. 잠이 든 아이는 저와도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엄마?”
아이는 오메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엄마다. 아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엄마!”
타악.
엄마가 아이의 손을 뿌리쳤다.
“넌 내 아들이 아냐. 내 아들은 여기 있잖니.”
표정이 싸늘했다. 평소의 다정한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 나 엄마 아들 무경인데….”
아이가 얻어맞은 손을 어루만지며 훌쩍였다. 하지만 엄마는 얼굴을 돌리고 품 안의 아이만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내 아들은 무영이야. 여기 이렇게 있잖아. 아무한테도 안 줘. 우리 아기.”
품 안의 아이를 부드럽게 다독거리며 중얼거리듯이 덧붙여 말했다.
“네 엄마는 저쪽에 있잖아. 네 진짜 엄마 말야.”
엄마가 가리킨 어두운 구석에서 갑자기 화려한 오메가 여성 한 명이 나타났다. 짙고 풍성한, 다디단 향기에 몸매도 손짓도 우아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아이가 주춤주춤 여자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엄마?”
찰싹.
여자가 매몰차게 아이의 손을 쳐냈다.
“누가 네 엄마야. 우성 알파 따위가.”
차디차게 아이를 일별하고 여자는 등을 돌렸다. 또각또각 울리는 하이힐 소리와 더불어 여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아이는 내쳐진 제 손등을 쓰다듬었다. 따끔따끔 쓰라렸다.
“엄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싼 건 어둠뿐이었다.
***
젠장.
무경은 욕설과 더불어 잠에서 깼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토할 것 같았다.
***
“요새 일산 쪽은 어떻습니까?”
출근하자마자 진명을 불러 무경이 물었다. 눈은 충혈돼 있고 낯빛은 창백했다. 진명은 혀를 찼다. 저러다가 진짜 쓰러지는 거 아냐.
“일산 말씀입니까….”
게다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다. 요즘 시우 때문에 정신없는 거 아니었나.
“잘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며칠 전 정기 보고 때도 별일 없었구요. 식욕도 좋으시고 산책도 자주 하시고 건강 상태도 양호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혹시 신경 쓰이시면 전화라도 한 번 넣어 볼까요?”
“아닙니다. 그냥 생각나서 한번 물어본 거예요. 문제가 있으면 연락이 왔겠죠.”
무경은 무언가 털어내듯이 머리를 흔들고 마른세수를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 전화번호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알아보셨습니까?”
“아, 네.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진명은 옆에 끼고 있던 결재판에서 서류를 몇 장 꺼내 무경의 앞에 놓았다.
“예상대로 등록 명의와 연결 계좌 전부 차명이라 연결점을 알아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 통화 기록을 보시면.”
진명이 기록에서 번호 하나를 짚었다.
“이 번호가 유원 군이 가지고 있는 핸드폰 중 하나로 파악됐습니다. 사적인 용도로 쓰는 번호인 것 같은데 발신 위치가 주로 자택이나 유원 군이 자주 가는 장소들과 일치합니다.”
“은유원이 시우한테 핸드폰을 줬다고?”
무경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유원이 시우에게 가끔씩 연락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한 여사 말로는 그때 고모와 청담동을 방문했을 때 유원이 시우에게 상당히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했다. 굳이 자신이 끼어들어 만나지 말라고 하기도 뭣하고, 통화 내용을 들어 봐도 딱히 잡담 외에 이렇다 할 내용도 없어서 일단은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따로 전화기까지 주어 가면서 할 얘기가 있었단 말인가.
무경은 만나면 항상 어딘가 주눅 들어 있는, 저를 무서워하는 눈빛을 한 어린 약혼자의 동그란 얼굴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간만에 약혼자님 얼굴 좀 봐야겠네.”
***
단골 레스토랑의 별실로 유원을 불렀다. 유원이 머뭇거리며 들어섰다. 주위를 둘러보는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무경은 앉은 상태로 그런 유원을 흘깃 보고 시선을 곧장 그 뒤로 옮겼다. 차분한 표정으로 뒤를 지키고 있는 알파. 최근 그룹 중앙 정보팀에서 가족 경호팀으로 소속을 옮겼다고 했다. 본인 개인 경호로 유원이 직접 지명을 했다지.
무경은 유원 관련 보고서에서 보았던 사진을 앞에 있는 얼굴과 매치시키며 그 이름을 떠올렸다.
한강우.
유원의 알파다.
무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는데 경호는 내보내지.”
유원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시선은 강우에게 향해 있었다. 강우는 무경을 흘깃 쳐다보고 유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안하게 저를 쳐다보는 유원을 부드럽게 마주 보며 걱정 말라는 듯 입 꼬리를 살짝 올렸다.
무경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이건 뭐, 일방통행이라고 들었는데 쌍방향이네. 원래부터 그랬던 건가, 최근에 바뀐 건가.
강우가 문을 닫고 나가자 그 모습을 미적미적 곁눈질하던 유원이 한숨을 쉬며 다시 몸을 정면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경을 보는 건 아니었고, 시선을 바닥에 향한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다.
“뭐해? 안 앉나?”
무경의 말에 유원이 깜짝 놀란 듯이 고개를 들고 서둘러 테이블로 다가와 몸을 앉혔다.
돌려 말할 것 없이 무경은 유원의 앞으로 통화 목록을 던져 놓았다. 뭐지, 하고 의아해서 쳐다보던 얼굴이 저와 시우의 번호를 인식하자 곧장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무경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순진한 게 맞긴 한 건가. 알아보기 쉬워서 좋네.
“가장 최근 통화가 프랑크푸르트. 지금 시우가 있는 곳. 맞지?”
“…….”
입을 다물고 있어도 흔들리는 눈빛과 표정만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시우와 할 얘기가 대체 뭐야? 핸드폰까지 따로 쥐여 줄 정도로? 네가 시우와 그 정도로 친할 관계는 아니잖아?”
발현 얘기를 꺼낼 때까지 시우에게 유원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은 것처럼 유원에게 시우의 이름을 꺼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무경에게 있어 시우가 속한 세계와 유원이 속한 세계는 온전히 다른 세계였다. 섞여들 수 없었다. 유원은 비즈니스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시우는….
“시우를 빼돌린 게 너야? 이유가 뭔데? 무슨 이득이 있어서?”
빠르게 몰아치는 무경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유원이 시우의 임신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모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제 쪽에서 먼저 발설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시우가 임신을 하고 도망을 가기 위해 먼저 도움을 청했다면 유원이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무경은 열서너 살 무렵의 유원을 처음 보고, 자주 만난 건 아니었어도 6, 7년에 가까운 세월을 알아 왔다. 들리는 얘기도 그렇거니와 제가 보아온 바로도 유원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순진하고 겁이 많고 조금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저 애도 극우성을 낳아 키우는 것만이 존재 이유이고 삶의 목표인 양 듣고 자라온 상류 계층의 오메가다. 시우가, 비록 가능성은 낮아도 제 자식의 자리를 위협할 극우성이나 우성을 낳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멀리 보내 버리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
자식과 관련해서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는 존재가 오메가란 걸, 무경은 제 눈으로 보고 겪었으니 저 순진무구한 얼굴을 있는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핸드폰 내놔.”
“네?”
“이 번호 사용하는 핸드폰 꺼내라고.”
“아, 아니, 그건… 무, 무슨 말씀이신지….”
유원이 더듬거리며 시선을 피하자 무경이 혀를 찼다.
“나오세요.”
갑자기 무경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유원이 놀라서 얼굴을 들자, 쪽문을 통해 진명과 까만 정복 차림의 베타 여성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유원군.”
진명이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이고 베타 직원에게 눈짓을 하자 그녀가 까만 막대 같은 것을 유원에게 들이댔다. 저도 가끔 썼으니 유원은 그게 뭔지 잘 알았다.
“이, 이사님, 이거 왜….”
도청기와 녹음기 따위를 감지하는 기구였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막대가 삐빅 소리를 내며 붉은 빛을 발했다.
귀에 박힌 붉은색 루비 피어스와 손목시계, 옆에 놓인 작은 가죽 백팩에서도 막대는 반응을 보였다.
“왜 이러세요!”
가방에 손을 대려 하자 유원이 제 손으로 가방을 내리누르며 큰 소리를 냈다.
덜컥.
거칠게 문이 열리며 강우가 다시 들어섰다. 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유원을 일으켜 세우더니 제 뒤로 숨겼다. 눈매가 제법 사나웠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뭐 하다니.”
무경이 피곤한 얼굴을 쓸며 나른하게 말했다.
“약혼한 사이에 사적인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 거잖아? 경호원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강우는 서 실장과 정복 차림의 베타 여자를 훑었다. 그리고 다시 무경을 쏘아 보았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리고 설사 사적인 자리라 하더라도 데이트 폭력이라는 것도 있으니까요.”
무경이 피식 웃었다.
“데이트 폭력이라니, 심한 말을 하네. 나는 일단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잔데.”
“방금 한 행동도.”
강우는 가까이에 서 있는 여자와 그녀가 들고 있는 막대를 일별했다.
“충분히 폭력적으로 생각됩니다만.”
“이건 폭력이 아니라 일종의 정당방위 아닌가? 이야기를 하기 전에 도청을 차단하려고 했을 뿐이야. 사적인 얘기를 하려고 하는데 도청이라니, 너무하잖아. 걸고 넘어가려면 내가 먼저 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원한다면 그쪽, 한강우 씨라고 했나, 강우 씨도 여기 있어요, 그렇게 걱정되면. 대신 피차 도청 없이, 터놓고 얘기하도록 하지. 어때요?”
“…….”
***
결국 도청 장치나 녹음기를 다 떼어 내고 세 사람만 별실에 남았다.
잠깐의 침묵 후에 무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쓸데없이 돌아가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합시다. 시우를 유럽으로 빼돌린 게 둘이 한 짓이죠? 이유가 뭡니까?”
“…….”
“…….”
유원과 강우는 침묵을 지켰다. 한참 그들의 표정을 지켜보다가 무경은 포기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는 대기 싫다…. 뭐, 좋습니다. 하지만 시우를 빼돌린 건 사실이지. 그건 어차피 이제 와서 딴소리 해 봐야 안 통하니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 번호 쓰는 핸드폰부터 내놔 봐.”
“…….”
“은유원.”
무경이 유원의 이름을 불렀다. 유원이 움찔했다. 하지만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주먹을 꼭 쥔 손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무경은 한숨을 쉬었다.
“은유원. 내가 제정신인 한 너는 못 건들겠지. 뭐라 해도 은 회장님 막내 아드님이고 두 그룹 간에 이것저것 걸린 게 많으니까 말야. 하지만 넌 내 걸 건드렸어. 빼돌려서 숨겼단 말이지. 그럼 난 어떡할까. 귀하신 약혼자님이 하신 일이니 그냥 참을까?”
무경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목소리조차 온도가 내려가는 느낌이다.
“내가 널 못 건드리면 누굴 건드릴 것 같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의 뜻을 알아?”
유원의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강우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강우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라니.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조용히 대답하면서도 무경의 싸늘한 시선은 유원에게 꽂혀 있었다.
“내가 지금 시우 번호를 몰라서 전화기를 내놓으라는 게 아니잖아? 뭐가 문제라서 고집을 부리는 거지?”
유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조금 떨리는 손을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흰색 핸드폰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잠깐 그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무경이 간단히 한마디 했다.
“걸어.”
“네?”
“프랑크푸르트는 지금 낮이지? 걸어 봐.”
“거, 걸어서 뭘….”
“그냥 일상적인 얘길 해. 수상한 기미를 느끼지 않도록 제대로, 평소에 하던, 할 만한 얘기 같은 걸 해.”
조금 망설이다가 유원은 통화 목록을 열어 시우의 번호를 터치했다. 그리고 스피커폰을 눌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한참 연결음이 울리다 드디어 딸깍, 전화가 연결되는 소리가 났다.
- 여보세요?
시우 목소리다.
무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 형. 나 유원이.”
눈치를 보며 말하는 유원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 알아.
대답하는 시우는 유원의 상태를 눈치 못 챈 듯 나지막이 웃는 소리를 냈다.
- 여기로 전화 할 사람 너밖에 없잖아.
“어…. 그, 그렇지.”
- 근데 왜? 어제도 했잖아.
“어, 그냥 심심해서.”
유원은 무경의 눈치를 살짝 보고 계속 말을 이었다.
“누구 만나는데 시간이 좀 떠서… 형 지금 뭐해?”
- 여기 광장에 소시지 축제를 한다고 해서 와 있어.
그러고 보니 전화기 너머로 제법 어수선한 소음이 들리고 있었다.
- 점심으로 소시지랑 빵이랑 먹고 있는데 맛있네. 맥주를 못 먹어서 좀 아쉽긴 하지만.
“왜 안 먹어? 독일 하면 맥주잖아.”
- 음… 뭐, 그냥… 지우도 옆에 있고 대낮에 혼자 먹기도 좀… 근데 얼마 전까지 미성년자였던 주제에 뭐가 독일 하면 맥주냐.
시우가 또 웃었다. 작게 웃는 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 앗, 저기 지우가 뭘 엎질렀다.
갑자기 시우가 놀란 소리를 내더니 허둥지둥 일어서는 소음이 들렸다.
- 가 봐야겠어. 별일 있어서 전화한 건 아니지?
“어, 그건 아닌데….”
- 그럼 다음에 또 하자. 끊을게, 미안.
그리고 뚝 전화가 끊겼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우한테는.”
무경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한 얘기는 입 다물어. 이 폰은 복제해 놓을 테니까 평소처럼 전화하고. 다른 수 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유원에게 말하듯이 하며 무경은 강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유원의 전화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이 식사하고 가요. 이미 주문해 놨으니 금방 나올 거야. 식사 끝나면 핸드폰 밖에서 받아가고. 바보짓은 안 하길 바랍니다. 유원이 너도, 강우씨도.”
유원과 강우는 무경이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형… 이제 어쩌지….”
문이 닫히고 바깥의 소음이 차단되자 유원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강우의 옷자락을 잡았다. 강우는 유원의 손을 잡아 주었지만 얼굴 표정은 조금 묘했다.
무경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강우는 조금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단순한 소유욕 같은 게 아닌데.”
“…뭐?”
“전화 목소리 들을 때 표정이… 뭔가 달라.”
유원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르다니 뭐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글쎄….”
강우가 유원을 보며 살짝 웃었다.
“동류로서의 직감 같은 거랄까….”
***
무경은 핸드폰을 부하직원에게 넘기고 복제 후 돌려주라는 지시만 남긴 채 식당을 나섰다. 지배인의 인사를 뒤로 하고 서진명이 급히 무경의 뒤를 따랐다.
“이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휴가를 얻어야겠어요.”
“네?”
“나도 유럽 여행을 좀 해야겠어.”
***
“어디 전화하는 거야?”
무경이 나가고 한참 지나서였다. 강우가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핸드폰을 꺼내 번호 하나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유원의 물음에도 잠시만, 하면서 입술에 손가락을 대 조용히 시키더니 이윽고 신호가 떨어졌다. 강우는 핸드폰 너머에서 말하는 소리를 조용히 듣기 시작했다.
딸칵.
그리고는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전화를 끊었다.
“형 지금 뭐 해?”
눈동자를 또로록 굴리며 유원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강우는 여전히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잠자코 있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더해진 거 같은데.”
“응?”
강우는 제 전화를 톡톡 두드렸다.
“아까 차 이사가 보여 준 통화 내역 말이야. 거기 네 번호 말고도 전화번호가 두어 개 더 있었잖아.”
그랬나, 하는 표정으로 유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하나는 대충 짐작이 가는데 낯선 번호가 하나 더 있길래, 시우 씨가 차 이사 몰래 또 어딜 건 걸까 싶어서 걸어 봤는데….”
“어딘데?”
“병원. 가정의학과야. 안내 멘트로 산부인과 진료까지 가능하다고 하는걸.”
유원이 입을 딱 벌렸다. 한동안 그 표정으로 있더니 설마, 하듯이 눈을 살짝 찌푸린다.
“…시우 형, 극열성인데… 그냥 다른 데가 아파서 간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굳이 이 전화번호를 썼을까 싶어서. 아기가 아니라면 굳이 차 이사에게 감출 이유가 없잖아.”
“임신한 거면 오히려 차 이사님한테 알려야 하는 거 아냐? 아기 아빤데.”
유원은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강우는 유원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넌 네가 속한 동네 사람들 하는 짓을 보고 자랐으면서 그런 소릴 하니. 제대로 결혼한 사이면 몰라도 정부가 애 가져서 무슨 좋은 꼴을 보겠어. 애 팔아서 한몫 잡겠다는 마인드 아닌 다음에야. 넌 시우 씨가 그런 사람 같아?”
유원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형은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의외로 수월하게 우리 제안을 받아들이길래 좀 의아했는데 이런 일이 있어서였나. 뭐 정확한 건 좀 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어쨌거나 이 일이 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르겠네. 차 이사 분위기로 봐서는 우리 쪽에 더 좋은 방향으로 돌아갈 것 같긴 한데….”
“근데 시우 형한테 알려야 하지 않아? 이사님한테 들켰다고.”
“응. 알려야지.”
“그건 그렇고….”
유원이 불안한 얼굴로 강우의 팔을 잡았다.
“차 이사님 화난 거 같은데 진짜 형한테 손대면 어떡해? 나 좀 무서운데….”
“괜찮아.”
강우가 웃으면서 유원의 손을 잡아 달래듯이 어루만졌다.
“지금 그 사람은 연시우 하나만으로도 정신이 없으니까 당분간 나한테까지 신경 못 써. 그리고 이제 우리가 더 정신없게 만들어 줄 거니까.”
“더 정신없게 만든다고?”
“저치는 아직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지….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알게 해 주고 싶잖아, 저런 낯짝을 보면.”
“음….”
걱정으로 어두워진 유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강우가 웃어 주었다.
“넌 아무 걱정 말고 얌전히 결혼을 기다리는 오메가인 척 지내고 있으면 돼.”
“그래도….”
“괜찮다니까. 차 이사는 쥐고 있는 카드가 한 장뿐인데 우리는 에이스 카드에다 방금 막 조커까지 손에 넣었잖아.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패야. 걱정 마.”
***
“휴가라고?”
뜻밖의 말을 들은 것처럼 차 회장의 눈썹이 휘었다.
“네 입에서 휴가 달란 소리가 나오다니 뜻밖이구나. 예전에는 좀 쉬다 오라 해도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룹 일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이래로 무경은 사실상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할 일 없이 멍하니 있다가 잡생각에 머리를 잠식당하는 것도 싫었고, 뭐라도 해서 지쳐 떨어지지 않으면 잠이 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물론 또 다른 이유는, 거의 성인이 되어서야 차씨 가문에 편입된 거나 마찬가지인 그이기에 집안에서나 그룹에서 입지도 약하고 믿을 만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었다. 빠른 시일 내에 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었다. 어느 정도 원하는 대로 그룹의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쉴 여력이 없었다.
그동안 무경이 휴가를 간 것은 러트 사이클일 때가 유일했다. 그나마도 사나흘 정도 서울 시내에서 쉬는 걸로 끝이었고 공휴일을 포함할 때도 많았으니 휴가라고 하기에도 무색했다. 사실상 무경에게는 최근의 교토 휴가가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긴 휴가라고 할 수 있었다.
무경이 레스토랑을 나와서 다짜고짜 차 회장부터 찾은 것은 최대한 빨리 유럽으로 떠나기 위해서였다. 내일 출근해서 절차를 밟다 보면 윗선 어디선가 제동을 걸 게 분명했다. 말이 퍼지기 전에 떠나는 게 처리가 빨랐다. 아니, 당장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고 있을 기분이 아니기도 했다. 정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냥 출발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신규 사업 론칭도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으니 저도 이제 한숨 돌리고 싶어서요. 어차피 결혼하고 나면 공식적으로 일선에 나서야 하니 그 다음부터는 편하게 다닐 수도 없잖습니까.”
차 회장은 두 손으로 감싸듯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빈 손을 깍지 껴서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찬찬히 아들의 얼굴을 관찰하듯 훑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 약혼식 이후로 주위에서 성화였다. 너 불러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 한다고. 그날 약혼식장에서 사라진 게 네 정부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냐?”
어차피 조사가 끝나고 보고 받은 상태에서 물어보는 거였다. 무경은 어깨를 조금 추어올리고 덤덤히 대답했다.
“네.”
“공을 많이 들였다는 둥 장난감이라는 둥 하더니 꼴이 좋구나. 정부가 도망갔다고 약혼식장에서 제 할 일도 내팽개치고 멋대로 사라져 버리더니, 그러고 나서도 말이 안 돌 거라고 생각했더냐? 너 지금 유럽에 가겠다는 것도 그 애 때문이야? 그놈이 유럽으로 도망이라도 갔어? 그래서 지금 네가 쫓아가겠다는 거냐?”
“네.”
“네에?”
무경의 짧은 대답에 차 회장이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대답 한번 시원하구나. 네, 라니. 장난감 하나 되찾겠다고 하던 일 팽개치고 유럽까지 가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그것도 결혼이 목전인 놈이? 너 지금 제정신이야?”
차 회장의 언성이 살짝 높아졌지만 무경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하던 일을 팽개치는 건 아닙니다. 말씀드렸잖아요, 론칭은 안정적으로 끝났다고. 어차피 제가 이번에 할 일이 론칭까지라고 하신 건 아버지잖습니까.”
무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게다가 귀한 장난감이에요, 아버지. 수면제 역할까지 해 주는 장난감은 드물잖아요. 새로 구할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잃어버리고 싶지 않거든요. 국내 최고 의사에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약품도 못 고치는 병을 고쳤으니 그 정도 가치는 있지 않겠습니까?”
수면제 운운하는 얘기에 차 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하나뿐인 후계자 아들의 고질병을 차 회장이 모를 리 없었다. 보고는 줄곧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일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멀끔하게 피어 있던 얼굴이 다시 엉망이 되어 있다. 눈 밑의 그늘은 어스레한 방 안에서도 선명할 정도로 두드러져 보였다.
도움이 된다면야, 필요하다면야 그깟 오메가 하나 옆에 두는 것쯤 문제될 것도 없었다. 아들이 원한다면 직접 잡아다가 옆에 붙여 줄 마음도 있었다. 문제는 그 오메가에게 무경이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휘둘리는 거였다.
“네가 직접 움직이면 말이 너무 많아져. 그냥 있어라. 정 그 애가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 데려 오면 될 일이다.”
“고급 장난감은 정교하잖아요. 그 애 보기보다 꽤 까탈스러워서요. 제가 가야지 아무나 가서 험하게 다루다간 망가집니다. 그러면 일단 곤란해지는 건 저라서요. 제가 갈 겁니다.”
말투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내용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고집이 있었다. 공적인 일이건 사적인 일이건 무경이 차 회장과 협상을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 두말없이 받아들이고 시키는 대로 따르는 쪽이었다.
그런 만큼 일단 토를 달고 나섰다는 것은 곧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걸 이미 겪어서 알고 있었다. 고집이 있는 놈이라는 건 열아홉 무렵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드물긴 해도 사업 처리를 두고 의견이 부딪쳤을 때도 무경은 끝끝내 제 주장을 관철했다. 차 회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놈이 도망간 이유가 뭐냐? 약혼 때문이냐? 정실 자리 내줄 거 아니면 못 있겠다던?”
“그런 말은 못 들었습니다만, 정부로 있는 게 싫기는 한 것 같습니다.”
무경이 또 웃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마음에 들지 않는 웃음이다. 차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거기에 대해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하여간에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란….”
차 회장이 혀를 찼다. 한 꺼풀 누그러진 목소리에서 무경은 허락이 떨어질 걸 예상했다.
“얼마나 있을 생각이냐?”
“글쎄요. 넉넉히 2주 정도요?”
“쯧.”
차 회장이 다시 한 번 혀를 찼지만, 이걸로 얘기는 끝이었다. 허락은 떨어졌다.
무경은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돌아섰다. 방문을 여는데, 차 회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낮게 날아들었다.
“일산엔 자주 가니?”
손잡이를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경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아니요.”
어차피 제가 언제 가고 언제 연락하는지 다 보고가 들어갈 터다. 물어보는 의도는 명확했다. 제가 그룹에 들어오기로 한 이유를 기억하라는 거겠지. 그리고 정부 따위에게 휘둘려 본분을 망각하지 말라는 경고일 테고.
“그렇군. 됐다. 잘 다녀오너라.”
“…….”
등 뒤로 문을 닫고 무경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깊게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그리고는 불현듯 헛웃음을 뱉었다.
내가 지금 열 받을 입장인가.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하는 짓이 똑같은 걸 누가 누굴 욕해.
그러면서도 토기가 올라오듯 욕설이 비어져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망할….”
자괴감에 속이 다 울렁거렸다.
***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무경은 노트북으로 감시팀이 보내온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시우와 지우가 손을 붙잡고 호텔을 들어가거나 나오는 모습, 카페에 앉아 따듯한 음료를 호호 불어 가며 마시는 모습, 심지어 어제 전화할 때 얘기한, 광장에서 소시지를 먹고 있는 모습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함께 놀러 갔던 생각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한편, 저 속에 제가 빠져 있는 것에 울컥 열이 오르기도 했다.
시우도 내 생각을 조금쯤은 하고 있을까. 한다면 좋은 생각만은 아니겠지. 그래도 각인했는데, 보고 싶다는 마음도 어느 한구석엔 있지 않을까.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클릭한 다음 사진에는 지우가 인근의 성을 향해 신나게 달려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걸 보니 놀이공원에 갔을 때 성을 개조한 유럽 호텔에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한 게 떠올랐다.
어린애는 좋아하지 않는데, 지우는 꽤 귀여웠다. 함께 노는 것도 의외로 재미있었고. 순전히 시우 동생이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우와는 꽤 상성이 맞는다고 생각했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동생보다 조카 같은 느낌이긴 했지만, 그래도 조카가 너무 예쁘다는, 전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이 조금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었다.
연말이 가까우니 유럽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한껏 젖어 있을 터였다.
크리스마스라.
외국까지는 못 가도 셋이서 나름 그럴싸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생각을 했었다. 시우가 도망가면서 물 건너간 계획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만나서 유럽의 성에서 셋이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은 추억이 될 것이다.
이제 곧, 반나절 안에 시우를 만난다. 뭐가 어찌됐건, 시우가 뭐라고 하건 이제 손을 잡으면 다시는 놓지 않을 참이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