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 7 (7/24)

“정말로 원치 않으신다면 아직 초기이니 중절을 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번 경우엔 정말 권해드리고 싶지 않네요. 말 안 해도 아시겠지만, 극열성으로 아이를 가진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잖습니까? 아마 극우성 파트너 분과 상성도 좋으시고 꾸준히 관계를 맺어 오셨으니까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가까운 사이시라면 낳는 것도 고려해 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의사의 말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건조했지만 기분 탓인지 시우를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여느 때보다 길었다.

“개인적인 상황을 모르니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임신 중절은 오메가의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일입니다. 특히나 산모분이 극열성이시니까요. 혹시 차후에 마음이 바뀌어 아이를 원하시게 되더라도 솔직히 이번 같은 행운이 다시 오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파트너분하고 잘 의논해 보시고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태아를 위해서나 본인을 위해서나 중요한 일이니까요.”

***

늦은 일요일 아침, 시우는 집 근처 카페에 나와 있었다. 뜨거운 레몬티를 시켜 놓고 멍하니 밖을 내다보았다. 늦가을이라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햇빛이 들이치는 창가는 따뜻했다.

중절이라.

시우는 제 배에 손을 올렸다. 배는 여전히 납작하고 생명이 깃든 흔적은 느낄 수 없었다.

극열성 판정을 받은 날부터 지금까지, 시우는 임신이라든가 아이 같은 단어는 저와 관련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래서 일부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불쑥 뱃속에 아이가 자리를 잡았단다. 실감이 안 났다.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은 그저 놀라울 뿐 좋다든가 싫다는 감정도 없었다. 그저 신기하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싱글맘이 되는 것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인식은 여전히 크게 좋지 않아도, 출산율이 극단적으로 떨어지면서 제도적인 개선은 많이 이루어졌다. 일이 없는 동안은 복지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일이 있을 경우에도 육아 휴직과 병원비 지원 등의 혜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우의 경우에는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우선은 도의적인 부분이었다. 무경은 이제 곧 유원과 결혼을 할 예정인데, 아무리 그들이 형식상의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혼외자인 자신이 그의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건 역시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계약서 문제도 있었다. 무경의 집안은 핏줄에 민감했다. 아이를 낳으면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아이를 넘겨야 한다는 것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동의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자기가 낳은 자식을, 어떻게 무슨 물건 포기하듯 그렇게 종이 한 장으로 포기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애를 지운다니. 살아보겠다고 저의 허약한 자궁에 이제 막 자리 잡은 아이를 없애다니. 그것도 못할 짓이었다. 생명의 존엄성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평생에… 극열성인 저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기적 같은 선물인데.

가치관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충돌하고 있었다. 뭐가 옳은 건지 뭐가 최선인지 아무것도 판단할 수가 없었다. 멍한 머리는 판단할 기능을 상실했는데 시우에겐 이걸 터놓고 의논할 상대조차 없었다.

***

“왜 여기 나와 있어요? 나 오랜만에 왔는데 혼자 내버려 두고.”

테이블에 살짝 그늘이 지더니 무경의 향이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 진녹색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자연스럽게 내린 앞머리가 대학생처럼 보이는 무경이 눈앞에 서 있었다.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무경은 줄곧 바빴다. 밀린 업무에 장기 출장이 겹쳐 시우가 있는 곳에는 거의 오지 못했다. 그 동안 두 번 정도 새벽에 와서는 시우를 껴안고 잠만 자다가 아침 일찍 시우가 깨어나기도 전에 사라지곤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깨어 보니 무경이 곁에서 자고 있었다. 눈 밑에 그늘이 진 얼굴은 창백하고 지쳐 보였다. 시우는 무경이 깰세라 조심조심 몸을 빼서 다른 방에 딸린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근처 카페에 간다는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왔었다.

“피곤해 보이길래, 푹 주무시라고.”

넓은 맞은편 자리를 놔두고 무경이 옆으로 다가와서는 자리를 만들라고 눈짓을 한다. 기껏 몸을 창 쪽으로 바싹 붙여 앉아 자리를 만들어 주었더니 옆에 앉자마자 시우의 허리를 감아서 다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바쁜 일은 다 끝났어요?”

“아직 좀. 다음 주까지는 바쁠 것 같은데, 그래도 숨을 좀 돌려야 살죠. 내가 기계도 아니고.”

엄살을 부리듯 웃으면서 무경이 시우의 눈 밑을 쓸었다.

“근데 나보다 시우 씨가 요새 많이 피곤해한다던데, 한 여사님 말로는.”

“어… 그, 그냥 좀….”

솔직한 이유를 댈 수가 없어서 말을 버벅거렸다.

“내가 너무 혹사시켰나 싶어서 좀 많이 찔렸어요. 나한테 질리거나 한 건 아니죠?”

“…….”

교토에서의 일을 얘기하는 거란 건 알았지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시우도 히트 사이클 때문에 정신을 놨었기 때문에 무경의 탓만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난감해하는 시우의 얼굴을 장난기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더니 무경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난 왜 시우 씨가 난처해하는 얼굴이 그렇게 좋지….”

“무경 씨가 변태 끼가 있어서 그런 거죠.”

시우가 부루퉁하게 뱉었다. 그 말에 무경이 조금 소리까지 내어 웃으면서 웨이터가 막 가져다 준 메뉴판을 펼쳤다.

“여기 브런치 메뉴가 괜찮았던 거 같은데, 그거 먹고 천천히 들어갈까요? 한 여사님한테는 저녁 시간에나 맞춰서 오시라고 하고. 낮에는 그냥 우리끼리 빈둥거리게.”

메뉴를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켜서 천천히 나눠 먹었다. 배가 불러서 단 디저트는 생략하고 무경은 커피를, 시우는 생과일주스를 시켰다.

시킨 음료를 앞에 놓고 시우는 무경이 당기는 대로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또 멍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커플로 보이는 오메가 남성과 알파 남성이 창 앞을 지나갔다. 한 명은 유모차를 끌고 한 명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생각에 앞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때 한 얘기 있잖아요.”

“음? 무슨 얘기요?”

한 손으로 시우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다른 한 손으론 핸드폰으로 신문을 보던 무경이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제 친구들 만났을 때, 아이가 싫다고 했던 거.”

“아, 그거.”

“그거 분위기 때문에 그냥 한 얘기예요, 아니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로,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필요를 못 느끼겠어.”

무경은 별로 뜸도 들이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평소 생각이라는 얘기였다.

“집안 어르신들이 대를 이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요?”

“뭐 어른들이야 그렇겠죠. 재산을 지키고 싶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계약서에도 있었어요. 아이를 낳으면 권리를 포기한다든가 하는 조항. 나랑은 상관없으니까 별생각 없이 넘겼지만요.”

그냥 무심코 생각난 듯이 시우는 평온한 어조로 계약서를 언급했다.

“아… 그런 조항이 있죠, 참. 뭐, 내 생각과는 별개로 그런 일이 생기면 집안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할 겁니다. 극우성이나 우성이면 데려다 키우고 열성이나 극열성이면 빼앗아서 다른 데다 입양 시키겠죠.”

테이블 아래 놓인 시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창백해진 낯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쓰면서 시우는 말을 이었다.

“다른 데 입양을 시켜요? 그럴 거면 차라리 친모에게 키우라고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예전에 그런 케이스들이 있었겠죠. 돈을 받고 물러간 후에 다시 나타나 유산 상속 분란을 일으킨다든가 뭐 그런 케이스, 그러니까 아예 둘 사이를 떼어 놓고 아이가 스스로 그 집안 핏줄이라는 걸 철저히 모르게 만드는 거죠. 이상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마치 자신은 그 집안사람이 아닌 것처럼 무경이 무감한 어조로 얘기했다.

“음… 근데 별로 재미도 없는 얘긴데 시우 씨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아뇨. 아이들을 지나가는 걸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서….”

무경은 한숨을 쉬고 목소리를 조금 가볍게 하며 시우의 머리카락을 다시 쓰다듬었다.

“말했잖아요. 난 시우 씨한테 애 생기는 거 싫어요. 동생한테도 그렇게 지극정성인데 애한테는 어떻겠어요. 나는 완전 찬밥 신세가 될 텐데.”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그럴 사이도 아닌데.”

불쑥 속 감정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무경의 손이 멈췄다. 아차, 하고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우 씨, 지금 한 말….”

“으… 피곤하네. 왜 자꾸 늘어지지. 가을 타나…. 좀 눕고 싶어요. 그만 집에 들어가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돌리며 시우는 무경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

***

“한강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유원이 부른 자리에 나갔더니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시우 또래의, 하지만 분위기는 한결 남자답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사람. 유원의 알파다.

“유원이는….”

“제가 보냈습니다. 유원이가 있으면 터놓고 얘기하기 곤란한 내용들이 좀 있어서.”

“네….”

“계약이 끝나고 차 이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시우 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혹시… 그의 정부로 계속 남아 있을 의사가 있습니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말을 돌려서 하는 법도 없이 강우가 정공법으로 치고 들어온다. 정부더러 대놓고 정부라니. 시우는 쓰게 웃었다.

“아니요. 계약이 끝나면 관계도 끝이죠. 누구의 정부로도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더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그러시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치 시우의 진의라도 캐겠다는 듯이 강우는 날카로운 눈으로 시우의 표정을 찬찬히 훑었다.

“그럼 차무경 씨에게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시우는 픽 웃었다.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누구에게 어떤 감정을 품든 그건 제 자유였다. 드러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피해를 주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네.”

“…좋습니다. 그럼 그걸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화법도 그렇다. 그걸 전제로, 라니. 결국 내 대답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거네. 마음이 통했다고 봐야 하는 건가, 이런 경우도?

“연시우 씨의 존재는 알게 모르게 상류 계층에서 꽤 유명합니다. 적어도, 차무경 이사의 사생활을 체크해 온 사람들이라면 시우 씨의 이름과 사진, 기본 배경 정도는 확보를 했겠죠. 저희는 당연히, 사돈이 될 상대니까 더욱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있고요.”

강우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시우의 눈을 더욱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일단 이걸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강우가 제 핸드폰에 연결돼 있는 이어폰을 내밀었다.

의아해서 쳐다보았지만 먼저 듣고 얘기하자는 말에 일단 받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강우가 화면에서 뭔가를 클릭하자, 먼저 낯선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낮고 거친, 꽤 연배가 있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 네 고모가 다녀갔다. 네가 청담동에 들여 놓은 아이한테 과하게 신경을 쓰는 것 같다고 하더라. 일주일에 반 이상을 그 집에 들른다면서?

- 아버지한테까지 말씀 드릴 일은 아닌데, 고모도 공연한 걱정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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