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 5 (5/24)

집에 돌아가는 길에 몸이 저절로 휘청거렸다. 술이라도 취한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무경의 약혼자가 극우성으로 발현했다. 그 말은 그가 당장 지금이라도 결혼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그가 결혼을 하게 되면 계약은 없었던 일이 된다. 받을 돈은 다 받고 의무는 몇 개월이나 일찍 사라지는 것이니 시우로서는 아쉬울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이어진 이야기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집에서는 몰라요. 혼자 있을 때 깨달았고, 금방 페로몬을 감췄으니까. 하지만 집에서는 3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게 해요. 다음 번 검사는 어떻게든 빠져나간다 해도, 생일 직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확진을 받게 하겠죠. 그렇게 들키게 되면….”

유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주먹을 꽉 쥐고 어딘가 단단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강우 형한테 얘기했어요. 둘이서 도망가자고. 데리고 어디든 가 달라고.”

“…뭐라고요?”

“형은 3년 전부터 회사에서 기밀 업무의 실무 담당을 하고 있어요. 아니, 회사뿐만 아니라 집안의 개인적인 일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러니까 그쪽 일을 잘 알고 있어요. 신분증 위조라든가, 자금 조달이라든가, 안전 가옥이라든가, 해외 도피라든가… 우리 쪽에서 어느 선까지 손을 뻗칠 수 있고 어디가 구멍인지도 다 잘 알아요. 그러니까 도망치면 확실히 숨을 수 있어요. 잡히지 않을 거예요. 일단 한국만 뜨면….”

“잠깐만, 잠깐만요.”

첫인상만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당돌한 계획을 늘어놓는 것에 시우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긴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니까? 아니면 첩보 영화나 소설 따위에 너무 심취한 건가?

“지금 자신이 무슨 얘길 하는지는 알고 있어요? 그렇게 둘이서 도망을 가면… 유원 씨 입장에서는 사랑의 도피일지 몰라도 집안 분들이 그… 강우 형이라는 분을 고소할 수도 있어요. 미성년자를 유인해서 납치한 걸로 몰아갈 거라고요. 그러면 범죄자로 수배되는 건데, 유원 씨는 그분이 그렇게 돼도 괜찮은 거예요?”

미처 그 생각까지는 못했는지 유원의 얼굴이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이 됐다. 한참을 그 상태로 망연자실해선 시우를 쳐다보더니 또 주룩, 눈물이 넘쳤다.

“뭐야. 그럼 나는 정말 이대로 결혼해야 되는 거예요?”

***

“진짜 자는 거예요, 자는 척 하는 거예요?”

늦은 밤, 바깥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들어온 무경이 옆에 눕더니 얼굴을 들여다보는 기척이 났다. 시우는 얼굴을 마주할 기분이 아니어서 스탠드 불을 끄고 자는 척을 하던 참이었다.

“하기 싫어서 그래요? 그럼 지금 안 할 테니까 그냥 일어나서 얼굴 보고 아는 척만 해 주면 안 돼요?”

무경이 몸을 바싹 붙여 안으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청결한 비누향이 무경의 체향과 섞여서 콧속에 스몄다.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우는 한숨을 쉬고 몸을 틀어 그를 마주 보았다.

“해도 돼요. 아니, 해요. 하고 싶어요.”

시우는 무경의 목에 팔을 감고 얼굴을 당겼다. 입을 맞대자 청량한 무경의 향이 허한 몸속을 가득 채우며 쏟아져 들어왔다.

***

“휴우….”

시우는 뻣뻣해진 목을 좌우로 젖히고 어깨를 돌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거의 세 시간째 꼼짝도 않고 화실에 틀어박혀 있던 참이었다. 머리도 무겁고 그림도 영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시우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앞치마를 벗어 한쪽에 두었다. 기분 전환 겸 차나 한잔 하고 한 여사랑 잡담이나 나눠 볼까 싶었다.

좁은 복도를 걸어 나오자 거실에는 한 여사 취향의 잔잔한 음악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거실이나 식당 쪽에는 기척이 없는데, 테라스로 연결되는 유리문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창으로 모습이 바로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정원으로 나갔거나 일광욕실에 빨래를 널러 나간 것 같았다. 빨래 너는 거라면 좀 도울까 싶어서 시우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한 여사 목소리가 들렸다.

“…니까 그렇지. 잘 지내고 있어. 엄마 걱정은 마. 정윤이 너는? 뉴욕엔 잘 적응하고 있니?”

사적인 전화인 거 같아 몸을 물리려다가 정윤이라는 이름에 움찔 걸음을 멈췄다.

“시우도 의외로 잘 적응하고 있어. 그럼, 예전에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다며. 지금은 잘 먹고 잘 입고 호강하는데 뭐. 너는 괜히 마음 안 써도 돼.”

설마 했는데 제 이름까지 나왔다. 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순간 머리가 뒤엉켰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 여사 아들 이름이 정윤이라고? 게다가 저를 알고 있어?

“딴생각 하지 말고, 어렵게 잡은 기회니까 아쉬움 안 남게 공부에만 전념해. 제대로 졸업하고 돌아오면 디자인 계열 회사에 괜찮은 자리도 하나 주신다잖아. 그러니까.”

삐빅삐빅삐빅.

갑작스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깜짝 놀란 시우가 거의 반사적으로 뒤쪽 복도로 몸을 옮겼다.

“아이고, 오븐에 넣어 둔 게 다 됐나 보다. 정윤아, 그만 끊자. 엄마 일하던 중이라. 응, 그래. 아휴, 그나저나 이렇게 새벽 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건강 해쳐서 어쩌니. 그래, 그래. 신경 좀 써. 응. 그래애.”

한 여사가 전화를 끊고 다급히 모습을 드러내더니 거실을 가로질러 식당 쪽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한 여사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시우는 재빨리 그녀가 있던 곳으로 가서 핸드폰부터 찾았다.

역시나 테라스 옆 일광욕실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던 모양이다. 테이블 위에 그녀가 놓고 간 핸드폰이 바로 보였다. 부엌의 급한 일이 끝나면 빨래를 마저 널기 위해 금방 그녀가 돌아올 터였다. 시우는 마음이 급해졌다.

금방 통화를 마친 핸드폰은 다행히 아직 잠금이 걸리지 않았다. 재빨리 최근 통화 목록을 열어 보고 아들, 이라고 표시된 최상단 전화번호를 눈으로 익혔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시우가 알고 있던 미술 학원 동료 한정윤의 번호와는 같지 않았다. 하지만 대화의 내용으로 봐서는 확실히….

여기서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시우는 한 여사의 기척을 살피고 여전히 부엌에서 돌아올 기색이 없음을 확인한 후 황급히 화실로 돌아왔다. 최대한 조용히 문을 닫은 뒤에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고, 탈진한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통화 내용을 보면 자신이 아는 한정윤이 한 여사의 아들 정윤과 동일 인물이 맞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한 여사가 자신의 아들과 그런 얘기를 나눌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아닌가. 이름이 같은 건 단지 우연일 뿐이고 자신이 일하는 집에 이런 애가 있는데, 하는 식으로 시우 얘기를 했던 걸까.

하지만 그렇게 믿으려고 해도 대화 내용이 역시 이상했다. 내가 잘 살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내가 잘 살든 못 살든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마음 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더군다나 예전에 운전기사인 기완에게 얼핏 듣기로, 이쪽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 고용 계약서를 쓸 때 비밀 유지 서약서를 따로 쓴다고 했다. 가족에게조차 차씨 집안 일은 얘기할 수 없다는 엄격한 조항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대신 조항을 어길 경우의 위약금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그리고 기완은 슬쩍 웃으며 덧붙이기도 했다. 뭐, 입 잘못 털어서 무서운 건 경제적 압박만은 아니지만요, 하고. 그러니 한 여사가 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윗사람의 정부라는, 지극히 사적인 관계인 시우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특히나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차무경의 집안에서 일해 온, 입이 무겁고 신임이 두터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정윤이, 자신도 시우처럼 싱글맘 가정이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났다. 엄마가 힘들게 남의 집살이를 하고 있는데 자신이 돈이 많이 드는 미술을 하는 게 너무 미안하다고 했었다. 뉴욕의 디자인 스쿨로 유학을 가고 싶지만 요원한 꿈이라고 얘기하며 씁쓸하게 웃던 기억도 났다.

제가 아는 한정윤이 한 여사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방금 들은 대화가 전부 아귀가 맞았다. 만약 그렇다면 정윤이 사진을 보여 줬다고 한 상대가 애인이 아니라 엄마인 한 여사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한 여사가 수행 비서인 서진명 실장에게 시우의 사진을 보여 주었고 그것이 무경에게 넘어갔던 거라고 한다면.

하지만 그게 말이 되려면 차무경이 한 여사에게 계약 정부를 구한다는 사실과 구체적으로 원하는 프로필을 한여사에게 말했다는 게 되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한 여사가 아무리 오래 일했다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신임을 받는다곤 해도 서진명 실장과 같은 종류의 신임은 아닐 것이다.

시우가 보기에 무경이 한 여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고용주와 사용인의 관계를 넘어서지 않았다. 자신의 정부로 이러한 사람을 구하는데 좀 알아봐 달라고 한 여사에게 말하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시우는 남은 오후 내내 화실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림이 잘 그려지는 날은 가끔 그런 적이 있었기에, 다행히 한 여사는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복잡하고 어수선한 밤이었다. 무경이 찾아오지 않은 것만이 시우에게 천만다행이었다.

***

“히트 하루 전부터 끝난 다음 날까지 하루에 한 알씩 드시는 거예요. 기간이 보통 사흘이라고 하셨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우성 기준으로 일주일분 드릴게요.”

의사는 컴퓨터로 처방전을 입력하며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극열성 주제에 피임약 처방이라니. 시우는 의사가 지나가듯이 한 말에 진지하게 매달리는 자신을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조금 망설였지만, 의사의 반응은 그야말로 사무적이었다. 아니, 말투만 사무적일 뿐 내용을 들어보면 시우의 기분을 충분히 배려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뭐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원치 않는 임신이 걱정되시는 거라면 지금 환자분이 하시는 행동은 옳아요. 최소한의 가능성도 차단을 해야죠. 어차피 사이클 중에는 정신이 없어서 콘돔 따위는 쓸 수도 없을 테니까요.”

***

잔뜩 굳어진 얼굴로 병원을 나온 시우는 전철역 로커에 보관해 둔 가방을 꺼내 들었다. 가방에는 책과 스케치용 노트와 핸드폰 따위가 들어 있었다. 한 여사에게는 산책을 간다고 나온 참이었다.

유원이 도청이나 추적 장치 따위를 얘기한 다음부터 시계도 핸드폰도 지갑도 공연히 신경이 쓰였다. 시계는 아예 차고 나오질 않았고 지갑 대신 현금만 약간 챙겨왔다. 하지만 밖을 나갈 때마다 한 여사가 핸드폰은 챙겼냐며 매번 체크를 하기 때문에 그것까지 놓고 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역시 병원까지 들고 가기는 어쩐지 껄끄러워 전철역 로커에 넣어 뒀던 거였다.

로커를 열어 가방을 꺼내고 핸드폰을 확인하면서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무슨 망상증 걸린 음모론자 같지 않나. 극열성 주제에 피임약을 사질 않나, 도청이 걱정된다고 핸드폰이며 시계며 지갑까지 의심하고 있으니.

특별한 일정이 있으면 미리 진명에게 얘기를 하고 어지간한 곳은 기완이 차로 데려다 주고 있었다. 시우의 대체적인 행방에 관해서 무경에게 보고가 들어갈 것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니, 보고라고 해 봐야 특별한 일이 아니면 거의 서진명 실장 선에서 그치지 않을까 하는 게 시우의 추측이었다. 도청이니 뭐니 하는 건 정말 오버였다. 사실 전에 집 앞의 병원에 간 것도 시우가 말하기 전까지 무경은 전혀 모르는 눈치 아니었던가.

역시 스스로 너무 예민하게 군 거다. 임신 문제도 정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윤이 한 여사 아들이라 해도, 그 내막은 차 이사의 취향을 아는 한 여사가 우연히 본 사진을 진명에게 건네는 식으로 연결이 된 게 분명했다.

도청이니 위치 추적이니 하는 얘기도 그랬다. 그것이 유원에게는 실제적인 위협일지도 모른다. 그쪽도 대략 굴지의 재벌가일테니 어릴 때부터 각종 유괴 위험이나 권력 싸움 같은, 일반 서민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을 터였다. 거기에 더해 지금 유원은 극우성으로 발현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참이니 더 예민하게 굴었던 거겠지.

하지만 시우는 아니었다. 일개 서민에 계약 정부인 저한테 누가 그렇게까지 한다고 이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르르 떠는지. 누가 알면 웃음거리가 되기에 딱 알맞은 일이다.

유원의 극우성 발현은, 지금은 숨기고 있다고 하지만 함께 사는 가족들에게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저와 무경의 관계가 끝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 달 후가 될 수도 있고 바로 내일이 될 수도 있다. 시한부 같은 기간이다.

사실은 피임 따위보다 무경과의 밀월여행이 시작도 전에 끝나 버리는 것이 더 두려웠다. 엉뚱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피가 말라 가느니 차라리 지금 내게 주어진 달콤함을 즐기는 게 더 현명한 일이 아닐까.

그래.

시우는 인정했다. 절망적인 현실에 몰려 마지못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지금 무경과의 시간은 저에게 다디달았다. 너무 달콤해서 행복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만큼. 끝이 가깝다는 생각에 심장이 아려올 만큼. 어차피 놓아야 할 기간 한정의 행복이라면 그동안만이라도 마음껏 단맛을 만끽하고 싶었다. 훗날 기억을 되새길 때, 몸을 팔았던 참담한 기억이 아니라 따뜻하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그를, 차무경을 떠올릴 수 있도록.

***

처음으로 전용기라는 걸 타 보았다. 일반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도 타 본 적이 없는 시우였으니, 전용기 내부의 화려함은 거의 압도적이라 할 만했다. 비행기 좌석이라기보다는 특이 콘셉트로 꾸민 사치스런 응접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시우를 무경이 재미있다는 듯이 보다가, 다음에 시간이 나면 지우도 데리고 도쿄 디즈니랜드나 놀러 갔다 오자며 웃었다.

저녁 무렵에 도착한 곳은 교토 외곽의 고풍스런 여관이었다. 일본 전통 여관이라는 곳도 시우는 처음이었다.

안내 받은 곳은 별채처럼 꾸며진 건물로, 좁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작은 일본식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멀거니 그 정경을 바라보자 무경이 다가와 시우의 허리에 팔을 감아 당겼다. 그리고 울타리처럼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키 큰 나무들을 가리켰다.

“저게 다 벚나무들이에요. 봄에 와서 보면 꽃잎이 눈보라처럼 날리는 게 아주 장관이죠. 그때 한 번 더 와요.”

내년 봄이라.

무경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년이나 떨어진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시우는 그의 곁에 없을 텐데도.

“시우 씨 혹시 싫증 잘 내는 성격이에요?”

대답 없이 잠자코 밖만 쳐다보고 있었더니, 무경이 불쑥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시우가 의아한 눈을 들어 무경을 쳐다보았다.

“어… 음… 글쎄요. 갑자기 왜?”

“아니… 요새 부쩍 나한테 관심이 없어진 것 같아서.”

시우의 얼굴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무경이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무슨….”

의도를 알 수 없어서 조금 당황했다.

“아까 비행기에서도, 며칠 만에 만난 건데 얼굴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옆에 앉아서도 계속 딴생각만 하는 것 같고. 서운해서 삐칠까 말까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시우 씨 하는 양을 보니 삐쳐도 몰라줄 것 같아서 관뒀어요. 뭐, 사람들 보는 눈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무경이 허리를 두 팔로 감아 당겨 몸을 바싹 붙이고 낮게 속살거리듯이 말했다. 다정한 눈길과 목소리에 심장이 저릿했다. 설렌다는 감정보다는 뭐랄까… 슬프다고 할까… 우울에 가까운 감정이 시우를 휘감았다.

하지만 사이클이 다가와 더욱 짙어진 향기에, 평소보다 다소 높아진 체온은 무경이 이처럼 바싹 안아 오자 의지와는 상관없이 반응했다. 복잡한 머릿속이 점점 더 흐릿하게 비어가는 것만 같다.

“아니에요. 안 그래요. 좀 피곤했을 뿐이에요. 주말 동안 지우랑 놀아 주느라.”

시우는 무경으로부터 몸을 살짝 떼어 내며 조금 난처한 듯 웃었다.

아픈 동생을 두고 일주일 동안 여행을 떠나기가 미안해서 시우는 미리 허락을 받아 주말을 지우와 함께 보냈다. 무경이 집으로 데리고 와도 된다고 했지만, 그건 역시 안 될 말이었다. 누구네 집이냐고, 집주인들은 다 어디 갔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것이며, 무엇보다 무경의 정부로서 살아가는 공간에 동생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기완이 운전해 준 차를 타고 서울 근교의 체험 농장으로 가서 주말을 보냈다. 시우도 동생과 함께 잔뜩 흙을 묻혀 가며 이런 저런 밭작물을 심기도 하고 수확도 했다. 지우는 물론 시우도 간만에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었다.

“아, 그랬지 참. 미안해요. 나도 같이 가야 했는데.”

무경이 한숨을 쉬며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일주일의 휴가를 위해 미리 처리할 일이 꽤 쌓여서 주말 내내 일을 했다고 들었다.

“일하느라 바빴던 거잖아요. 그리고 지우는 내 동생인데 무경 씨가 왜 미안해해요?”

당신은 내 가족이 아니잖아. 그런 식으로 사람 헷갈리게 하는 말은 하지 말라고, 제발.

“어, 그 말은 좀 섭섭하네. 밀어내는 거예요? 지우가 형을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이래 봬도 같이 노는 상대로는 날 더 좋아할 텐데. 같은 알파끼리 통하는 것도 있고.”

무경은 팔짱을 끼면서, 아이처럼 조금 으스대는 낯을 했다. 그 표정이 의외로 잘 어울려서 시우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의 끝에 쓴맛이 느껴져 결국은 입꼬리가 조금 이지러지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누리자고 결심해 놓고도 자꾸 머릿속을 잠식하는 그늘을 떨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고 해도 뭐 어때. 깨어나면 허망할지언정 현실이 퍽퍽하니 악몽을 꾸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차무경은 봄이 오기 전에 자신과 헤어질 것이고 극우성으로 발현한 은유원의 알파가 될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만큼은.

***

“좀 씻고 저녁 먹으러 가죠.”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시우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무경이 조금 떨어졌던 거리를 다시 좁히며 다가와 시우의 옷에 손을 댔다.

“여기 실내 온천탕이랑 노천탕 다 딸려 있는데, 어디가 더 좋아요?”

거의 이마를 맞댈 듯이 하고 속삭이면서 무경이 시우의 카디건 단추를 끄르고 셔츠의 단추에도 손을 댔다.

“잠깐만요.”

시우가 그의 손을 잡아 누르며 눈을 치켰다.

“내가 할게요.”

“음… 내가 하고 싶은데. 여기 있는 동안만 내가 하자는 대로 하면 안 될까? 내가 옷도 벗겨 주고 씻겨 주고 입혀 주고 먹여 주고 또… 재워 주고. 다 해 주고 싶은데.”

그러면서 무경은 시우의 손 아래로 제 손을 펼치듯이 하더니, 방금 단추를 푼 앞섶으로 손을 쓱 집어넣었다.

“아!”

손가락 끝이 유두를 건드려서 시우는 어깨를 움츠렸다.

“잠깐, 잠깐만!”

시우는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무경의 손놀림에 허리를 비틀었다. 가벼운 접촉에도 지나치게 몸이 민감했다. 확실히 시우의 몸은 히트 사이클이 코앞이었고, 무경이 풍기는 페로몬의 영향을 받아 여느 때보다 성감이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반응이 빠르네… 그냥 저녁은 나중에 먹을까?”

무경이 유두에 닿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중얼거렸다. 고개를 푹 숙인 상태로 시우는 몸을 비틀고 팔을 뻗어 그를 밀쳤다. 간신히 무경에게서 빠져 나왔지만 삽시간에 오른 열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난 지금 배고파요. 여기서 가이세키 정식 먹는 거 엄청 기대하고 왔단 말이에요!”

급하게 핑곗거리를 떠올려 뱉었다. 무경은 시우를 만지던 손을 아쉬운 듯 꼼지락거리면서 시큰둥하니 입을 내밀었다.

“그거야 여기 있는 동안 주구장창 먹을 수 있을 텐… 아, 아닌가. 내일부터는 더 정신이 없겠구나….”

말하다 말고 뭔가를 떠올린 듯이 혼자 중얼거리더니 무경은 금세 표정을 바꿔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맞아요, 시우 씨. 오늘 잘 먹어야죠. 체력 비축해야 되니까. 자, 빨리 씻고 밥 먹으러 갑시다.”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이 인간아!!

***

밀월여행까지 와서 왜 따로 목욕을 해야 하느냐는 무경을 억지로 밀어내고 시우는 겨우 혼자서 목욕을 마쳤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밖으로 나왔더니 무경도 이미 목욕을 마치고 이곳 전통식 차림으로 서 있었다. 푸른 줄무늬의 단순하고 가벼운 유카타에 진청색 덧옷을 걸친 모습이 상당히 이국적이면서 묘한 느낌을 주었다. 시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홀린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우 씨, 유카타도 잘 어울리네. 뭔가 청순한 듯하면서… 흠….”

무경도 빤히 시우를 쳐다보며 젖은 머리부터 맨발 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근데 옷을 좀 잘못 입었네요. 이러면 금방 벗겨져요.”

무경이 성큼 다가와 서슴없이 시우의 허리끈을 잡아 당겼다.

“와, 왓.”

옷자락이 확 벌어지자 시우가 당황해서 앞섶을 움켜쥐었다.

“애걔.”

무경이 실망한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이에요? 왜 안에 속옷을 입고 있는 건데?”

시우가 어이가 없어서 무경의 손에서 끈을 다시 빼앗았다.

“속옷 안 입는 게 경우 있는 거라고 누가 그럽니까?”

“내가.”

무경이 능청맞게 웃었다.

“밀월여행이라고 몇 번을 말해요. 속옷은 벗고 있는 게 예의지.”

기가 막혀서 대꾸한 말도 생각이 안 났다.

말없이 등을 돌려 앞섶을 정돈해 다시 끈을 묶는 동안 무경은 등 뒤에서 ‘아, 내가 제대로 입혀 준다니까.’ 하면서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

옷을 말끔히 정리하고 다시 돌아서자, 시우는 무경의 눈을 마주하고 엄한 얼굴을 했다.

“식사나 하러 가요. 헛소리 그만 하고.”

***

우와아….

옆방에 준비된 저녁 식사는 보는 것만으로도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예전에 일본 여행을 다녀온 대학 선배가, 가이세키 정식은 맛과 양은 장담 못해도 확실히 눈은 호강하는 요리라고 말한 게 기억이 났다.

처음은 두부 위에 성게와 조개관자, 캐비어를 얹은 요리, 그리고 차게 식힌 샐러드였다. 신선하고 담백한 맛이 입맛을 돋웠다. 두 번째 쟁반에는 구운 연어와 대게, 토란 등이 모양도 예쁘게 올망졸망 차려져 있었다.

“맛있어요?”

나오는 음식마다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다가 조금씩 오물오물 맛을 음미하는 시우에게 무경이 웃으면서 물었다.

“아, 네. 정말로.”

“다행이네. 간이 너무 심심해서 별로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저는 좋아요. 재료가 신선한지 간이 약한 게 오히려 더 맛있게 느껴져요.”

“응. 시우 씨는 먹이는 보람이 있구나. 맛있게 잘 먹어서.”

마치 자식이 밥 먹는 모습을 보는 듯한 얼굴로 흐뭇하게 말해서 시우는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드디어 메인 디시가 등장하자 시우의 관심은 다시 요리로 향했다. 와규였는데, 직접 익혀서 먹을 수 있도록 각자 작은 화로가 따로 딸려 나왔다. 화로에는 구워서 먹을 수 있는 석쇠와 샤브샤브로 먹을 수 있는 질그릇이 함께 준비돼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접시에 담긴 고기의 양이었다. 다른 음식에 비해 고기 양이 꽤 많아서 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가 가이세키 정식은 고기를 고작 서너 조각 주고 만다고 꽤나 불평을 늘어놓았었는데 이건 거의 한국 고깃집에서 시키는 2인분 수준이었다.

시우의 표정을 읽었는지 무경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일부러 추가 주문한 거예요. 시우 씨 많이 먹으라고.”

“아… 가,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건 없고. 나 좋으라고 그런 거니까.”

무경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우의 고기를 석쇠에 올려놓아 주며 말했다.

“…네?”

“그러니까.”

무경이 다시 시선을 들어 빙그레 웃으며 시우와 시선을 맞췄다.

“열량을 충분히 보충해 둬야죠. 밤이 길 테니까.”

***

저녁 식사가 끝났다.

일본까지 왔다고 해도 주로 비행기와 차에 몸을 싣고 있었으니 딱히 많이 움직인 것도 아닌데, 무경과 꼬박 일주일을 함께 보낼 생각에 긴장하고 있었던 건지 목욕도 하고 배도 부르자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시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이면서 대청마루에 앉아 멍하니 정원을 내다보았다. 정교하게 모양을 가꾼 나무들 사이로 작은 연못이 보이고 그 옆으로 불을 밝힌 고풍스런 석등이 사뭇 예스런 정취를 풍겼다. 어디선가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고 은은하게 울렸다.

평화롭다.

시우는 멀거니 생각했다.

너무 평화로워서 어딘가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안 추워요?”

전화를 받으러 나갔던 무경이 어느새 돌아와 말을 걸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쟁반이 들려 있고 팔에는 가벼운 무릎 담요가 걸쳐져 있었다. 그를 쳐다보다가 시우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어, 왜 웃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내가 좋은가.”

무경이 능청맞은 소리를 했다. 시우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네, 그렇다고 쳐요, 하고 대답했다. 사실은 전통 옷을 입고 능숙하게 쟁반과 담요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마치 여기서 일하는 직원 같은 포스를 풍겼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치다니.”

쟁반을 내려놓으며 무경이 투덜거렸다.

“그냥 그렇다고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네, 그래요, 그럼.”

“그렇다니, 뭐가?”

원하는 대로 대답해 줬는데 갑자기 말꼬리를 잡는다.

“뭐가, 라니… 뭐가요?”

“방금 그렇다고 했잖아요. 뭐가 그러냐고.”

웬 말장난이지, 하고 시우는 눈썹을 휘며 무경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무경 씨가 좋다고….”

무경의 눈이 휘어지는 걸 보고 시우는 무경이 노린 걸 알아차렸다. 시우가 직접 좋다고 하는 말이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음. 그 정도로 시우 씨가 날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하긴 내가 좀 심하게 멋있는 애인이긴 하죠.”

시우는 어이가 없어서 무경을 흘겼지만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뭐라고 하기에도 그래서 그냥 하, 참 하고 시선을 돌렸다.

“멋있기만 한가, 잘생겼지, 자상하지, 돈도 많지….”

한번 받아 주니 자화자찬이 끝이 없다.

“네네, 그래요. 일등짜리 애인이죠.”

시우는 적당히 하라는 듯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입을 막는 시늉을 하며 손을 무경의 얼굴에 갖다 댔다. 무경은 웃으며 그 손을 잡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느낌에 손을 잡아 빼려고 했지만 무경은 손을 놓아 주지 않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손에 닿은 입술이 손목에 내려앉더니 팔까지 타고 올라올 기세라, 시우는 억지로 팔을 뺐다. 가까이 다가온 만큼 어느새 무경의 향도 짙어져서 시우의 몸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무경은 빨개진 시우의 얼굴을 보더니 작게 웃으며 순순히 팔을 놔 주었다.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외곽이라 의외로 밤공기가 차요.”

무경은 가져온 담요를 펴서 시우의 하반신을 덮어 주었다. 시우의 입가에도 옅게 미소가 번졌다. 위에는 덧옷을 껴입고 있었지만 하반신은 유카타 차림이라 다리가 거의 다 드러나서 사실 살짝 한기가 들던 참이었다.

“그리고 이건 벚꽃주. 봄에 이 여관에서 직접 담근 거예요.”

무경이 가져온 쟁반에는 하얀 도기 주전자와 역시 흰색 바탕에 벚꽃무늬가 새겨진 작은 도자기 잔이 놓여 있었다. 도기 주전자는 마치 찻주전자처럼 보온 커버가 씌워져 있었는데 여기서는 벚꽃술을 정종처럼 데워서 마시는 듯했다.

무경이 잔을 건네 가득 술을 따라 주었다. 찬 공기에 닿자 흐릿하게 김이 오르면서 은은한 향기가 공기 중에 퍼졌다.

“향이 진하네요.”

감탄하듯이 시우가 말하자 무경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서 이거 만드는데 나름 신경을 많이 쓰거든요. 어릴 때는 향에 혹해서 먹고 싶다고 떼를 쓰곤 했는데 뭐, 아무리 그래 봐야 술이니까 먹을 수는 없었지. 이제는 먹고 싶어지면 가끔씩 찾아오곤 해요.”

술을 마시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온다고? 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울로 가져다 달라고 하면 되지 않아요?”

“음… 그런데 이상하게 서울에서 마시면 같은 맛이 안 나서. 이곳에서 이 정원을 보면서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시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여행지에서 먹은 건 돌아와서 아무리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 먹어도 같은 맛이 안 났던 것 같았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무경이 한 얘기에서 마음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어릴 때… 이곳에 놀러 왔던 거예요? 몇 살 때요?”

무경의 어릴 때, 라고 하면 시우는 그의 고교 3년생 시절이 떠올랐다. 성인에 가까운, 소년이면서도 어딘가 조금은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시절의 그. 그때보다 더 어린 시절은 아는 게 없으니까 지금 말하는 어린 시절이 언제 적 이야기인지 흥미가 일었다.

“아….”

무경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얼핏 당황한 것처럼도 보이는 표정이었다.

“음… 예닐곱 살 때쯤? 건강이 안 좋아서 여기 잠깐 살았던 적이 있어요.”

“아팠어요? 어디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우가 물었다.

“그게… 그냥 좀. 심각한 건 아니었고… 몸이 약해서 요양이 좀 필요한 정도?”

그러더니 무경은 이런 얘긴 좀 별론데,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낸 것이 실수라는 듯한 분위기였다. 단지 민망하거나 어색해하는 것과는 다른, 거북해하는 티가 역력해서 시우는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도 벽을 치는구나, 새삼 씁쓸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도 시우도, 한동안 잠자코 술만 마셨다.

***

“내가 내 얘기를 안 해 줘서 서운해요?”

한참의 침묵 끝에 불쑥 무경이 입을 열었다. 시선은 정원에 던진 채였다. 옆모습이 묘하게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무경에게서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시우는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서운한가? 서운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와 자신은 그런 걸 서운해 해도 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

“내년에 말이에요,”

시우는 대답을 안 했지만 무경은 여전히 정원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까 말했듯이, 내년 봄에 같이 벚꽃을 보러 오게 되면 그때 말해 줄게요. 나한테 궁금한 거 전부.”

내년 봄이라.

시우는 그렇게 말하는 무경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내년에 자신은 그의 곁에 없을 텐데, 내년 봄을 기약하는 건 그저 말뿐인 약속인 걸까… 아니면….

무경의 표정은 잔잔하고 말투는 부드러웠다. 시우는 문득 지금 그의 모습이, 계약 정부로 만나서 알게 된 무경보다는 고등학교 시절의 그와 좀 더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해도 돼요?”

무경이 드디어, 고개를 돌려 시우를 보더니 물었다. 가라앉은 표정에 웃음기는 없었다. 가만히 응시하는 눈동자는 다정했지만 어딘지 서늘하기도 했다. 시우는 어쩐지 한기를 느끼고 몸을 움츠렸다. 무경이 키스를 할 때 허락을 구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정말로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하지 않을 것처럼, 무경은 입을 꾹 다물고 시우의 눈만을 들여다보며 기다렸다.

“…….”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경은 그제야 조금 웃고, 손을 내밀어 시우의 뺨을 감쌌다. 밤공기에 차가워진 뺨에 무경의 손은 기분 좋을 정도로 건조하고 따뜻했다. 시우는 눈을 감고 그 온기에 얼굴을, 마음을 기댔다. 무경의 향기가 다가와 시우의 입술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

좁은 대청마루에서 시작된 키스는 점점 깊어져서, 무경이 시우를 거의 안다시피 끌고 와 이부자리 위에 눕혔을 때는 이미 옷이 엉망으로 풀어져 있었다. 덧옷은 어디다가 벗어 던졌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무경은 시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유두를 입 안에서 굴리면서 급하게 시우의 속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읏… 하아….”

성기를 쥔 무경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 시우는 금방이라도 몸을 구부릴 듯 흠칫거렸다. 혀로 유두를 간질이고 이를 세워 무는 동안 손은 부드러운 고환을 문지르다 기둥을 훑어 올리고 엄지로 선단을 괴롭혔다.

두 군데서 동시에 진행되는 자극에 시우는 고개를 들었다 놨다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갈 곳 없는 시우의 손은 무경의 어깨를 밀어내다가 이불 커버를 쥐었다가 결국은 무경의 뒤통수를 안아 당겼다.

“이걸로는 안 되겠어….”

갑자기 중얼거리더니 무경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걸친 옷도 거의 풀어져서 단단한 가슴이며 복부가 다 드러나 있었다. 시우가 흐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동안 무경은 두 손을 시우의 속옷 허리 부분으로 가져갔다. 이미 속옷은 시우가 흘린 애액으로 젖어 색이 짙어져 있었다.

“아, 저기, 잠깐만, 이건….”

뭐라고 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무경은 시우의 속옷을 익숙하게 벗겨 던져 버리고 반쯤 일어선 성기를 한 손으로 쥐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이 가서 시우는 엉덩이를 뒤로 뺐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무경이 시우의 허벅지를 잡아 누르고 다리 사이로 거침없이 얼굴을 파묻었다.

“윽… 하앗….”

뜨겁고 습한 입속으로 성기가 빨려 들어가자 충격 같은 쾌감이 갑작스럽게 들이쳤다. 시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경이 잡아 올린 다리가 공중에서 덜덜 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게 싫었다. 발가락이 저절로 오므라들고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시우는 무경이 하는 행위 중에 이것이 가장 낯부끄러웠다. 저 혼자 흥분해서 얼굴을 붉히고 신음을 지르고 토정하는 과정이 무경에게 고스란히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우가 이걸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무경이 더욱 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이젠 잘 알고 있었다.

무경은 일부러, 소리까지 내어 가며 아플 정도로 빨아 댔다. 시우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 무경의 입에 사정하고 말았다. 무경은 그러고 나서도 금방 놓아 주지 않고 몇 번을 더 빨다가 시우가 탈력감에 늘어지고 나서야 제 입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충분히 젖은 뒤는 따로 풀어 줄 필요조차 없었다. 무경은 시우의 다리를 들어 올려 제 허리에 감게 한 뒤 이미 단단하게 일어선 성기를 시우의 입구에 대고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무경의 페로몬에 녹아내린 몸은 그렇게 조금씩 스치는 자극에도 자잘하게 전율을 일으키며 무경이 들어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들어가도 돼요?”

몸을 굽혀 가쁜 호흡을 뱉어내는 입술에 쪼듯이 키스하면서 무경이 물었다. 지금 상황에 싫다고 할 수 있을 리도 없는데, 왜 새삼스럽게 물어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우가 조금 원망스러운 눈으로 무경을 올려다보자, 무경이 눈을 맞추며 웃었다.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지금 그 표정 귀여워서 좋은데.”

그리고 조금 급하게, 무경의 성기가 시우의 몸속으로 치고 들어왔다.

***

“읏… 으응… 흣….”

엎드린 채로 흔들리면서 시우는 제가 뱉어 내는 소리가 어디 먼 데서 들리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정상위로 두 번을 하고도 무경의 발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시우가 지쳐 하자 무경은 시우를 엎드리게 한 뒤 뒤에서 시우를 안았다.

‘얼굴 보면서 하는 게 제일 좋긴 한데.’

처음 뒤로 하면서 무경이 말한 적이 있었다.

‘뒤에서 하는 것도 나쁘진 않네. 시우 씨 척추도 바르고, 허리선도 예뻐서 보는 걸로도 충분히 흥분이 되거든.’

부끄러우라고 일부러 놀리는 소리인가 했는데 그 뒤로 두 번에 한 번은 꼭 뒤에서 안는 걸 보면 영 빈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우는 무경의 혀가 척추뼈를 핥아 내리는 걸 느끼면서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조금만 참아요. 오늘은 이걸로 끝낼 테니까.”

뒤에서 무경이 달래듯이 말을 걸었다. 비음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입술을 물면서, 시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읏… 흐으….”

지금 당장은 머리에 열이 올라서, 첫날부터 이래 가지고 앞으로는 어쩔 거냐, 사이클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시작하면 저는 살아 있을 수나 있을까 같은 지극히 당연한 걱정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몸 아래 깔린 이불은 이미 온갖 종류의 체액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몸이 찝찝하다든가, 이불이 이래서야 어떻게 자나 하는 생각도 없었다. 더럽든 말든 빨리 끝내고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크흣….”

마구 흔들리던 몸이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 무경이 몸속에 묻은 성기를 더 깊이 박아 넣었다.

“윽….”

시우는 맞닿은 무경의 몸이 조금 떨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느낀 따뜻한 기운이 또다시 몸속에 길게 퍼지는 걸 느꼈다.

이제 끝이다.

“하아….”

시우는 긴 한숨을 뱉었다.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잘 수 있는 것이다.

시우는 몸을 늘어뜨렸다. 제 위로 무경이 몸을 떨어뜨리면서 날개뼈를 깨물었다. 몸이 너무 노곤해서, 깨물리는 감각이 아픈 건지 간지러운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순간 또 다른 감각을 느껴졌다. 몸속에서, 이제는 기운을 빼고 빠져나가야 할 무경의 성기가 급속도로 부풀어 오르는 감각을.

시우는 퍼뜩 놀라 몸을 뒤척였다.

“자, 잠깐, 더는 못한다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내가 아까….”

쉬쉬, 달래듯이 무경이 뒤에서 시우의 몸을 껴안았다.

“더 안 해요. 잠깐만 가만있어. 가만히.”

가만히 있으라지만 말대로 하기에는 무경의 발기가 심상치 않았다. 가장 흥분했을 때보다도 더 크게 부풀어서 내벽의 압박이 거의 아플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잠깐, 아파…ㅅ, 이거… 윽….”

“알았어, 안 움직일 테니까, 가만있어요, 제발. 자꾸 움직이면 나도… 윽….”

시우를 껴안는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더는 안 한다고 하던 무경이 슬쩍 허리를 부딪혀 왔다.

젠장.

시우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계약이고 뭐고 도망가 버릴까 보다.

그로부터 20여분에 걸쳐 또다시 정신없이 몸이 흔들리고 두세 번에 걸친 긴 사정을 버틴 후에야 가라앉은 그것이 무경의 노팅이었다는 걸, 시우는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

둘째 날의 시작은 그저 평범했다. 다소 과격한 섹스를 하고 일어난 아침, 그 정도 기분이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경이 여전히 저를 안고 잠들어 있었다는 정도였다. 출근도, 아침 준비도 할 필요가 없으니 답지 않게 게으름을 부리는 건가 생각했다.

드물게 보는 잠든 얼굴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시우는 문득 어제 무경이 노팅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스런 기분이 들었다.

노팅.

어떡하지.

시우는 난처한 기분으로 가방 깊숙이 숨겨 온 피임약을 떠올렸다. 사이클 시작 전날부터 끝난 다음 날까지 꼬박꼬박 일정한 시간에 먹으라고 했는데. 어제 노팅을 하긴 했지만 사이클을 시작한 건 아니니 오늘 먹어도 되겠지.

슬그머니 제게 두른 팔을 치우려고 했더니 무경이 뭔가 불만스런 신음소리 같은 걸 내면서 더 강하게 몸을 감아 왔다. 잠이 깨는 건가 싶어 잠시 동작 그만 상태로 얼어붙었는데 금방 팔 힘이 풀리며 다시 고른 숨소리로 돌아갔다. 잠깐 무경의 잠든 얼굴을 살피다가 조심조심 몸을 빼고 옆으로 구르다시피 해서 이부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옆에는 어제의 정사로 엉망이 된 침구가 흐트러진 채 놓여 있었다. 시우가 정신을 잃은 후, 아마도 무경이 더러워진 몸을 닦고 이부자리 두 채 중 깨끗한 나머지 한쪽으로 옮긴 모양이었다.

민망한 기분에 흐트러진 이부자리부터 대충 정리했다. 그런다고 어제 저희들이 한 짓을 직원들이 모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옆방으로 가서 약부터 챙겨 먹었다. 무경 몰래 먹어야 할 텐데, 계속 제시간에 먹을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계약 정부가 피임약을 챙기는 거야 무경 입장에서 기꺼운 일이겠지만, 시우는 극열성이었다. 임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체질인 주제에 이런 걸 먹는다니, 누가 알게 되면 얼마나 가소로울 것인가.

약을 먹고 나서는 욕실로 갔다. 몸을 씻고 느긋하게 노천탕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데웠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그제야 무경이 부스스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깼어요?”

“응….”

무경이 멍하니 대답했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부스스한 머리에 반쯤 감긴 눈이 어쩐지 귀여웠다.

“씻고 오세요. 아침 준비 해 달라고 말해 놓을게요.”

“응….”

대답은 했지만 여전히 일어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시우는 웃음을 참으며 지우한테 하듯이 무경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주었다. 무경이 손을 들더니 시우의 팔을 잡았다.

“씻겨 줘….”

그리고 여전히 멍한 눈으로 시우를 보면서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표정도 말투도 귀여워서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 욕실에 같이 들어가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평소보다 몇 배는 짙게 풍기는 체향에다 팔목을 잡은 손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열기. 러트 사이클 전조 현상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무경이 답지 않게 늘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우도 줄곧 미열이 나고 있었다. 스스로는 잘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아마 페로몬도 제법 풍기고 있을 터였다. 그 상황에서, 어젯밤도 그 수난을 겪었는데 아침부터 늑대 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갈 생각은 없었다.

멍한 상태인 무경을 다독여서 욕실로 밀어 넣고 여관 내선으로 아침 식사를 부탁했다. 일반적으로는 여관의 정해진 식사 시간에 맞춰야 하겠지만, 이곳은 무경이 오너나 마찬가지라 별장처럼 이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무경의 스케줄에 맞춰 준비가 되었다.

그 뒤는 그저 평범했다.

씻고 나온 무경은 평소의 컨디션을 회복한 듯 보였다. 둘은 함께 식사를 하고 근처의 커다란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정원이라고 하지만 거의 공원 수준으로 넓게 꾸며 놓은 곳이었다. 잘 정리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잉어가 펄떡거리는 연못도 나오고 돌로 만든 작은 다리를 올려놓은 개울도 보였다. 걷다가 지치면 정자에 앉아 예술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는 나무들이나 석탑을 구경하기도 했다.

어제와 달리 무경은 시우와 조금 떨어져서 걸었다. 의아해하는 시우에게, 교외에서 갑자기 흥분해서 덮칠까 봐 그런다며 농담처럼 웃었지만 풍겨 나오는 페로몬의 양이 심상치 않았으므로 시우는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오후도 집안이나 정원에서 뒹굴뒹굴하며 보냈고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는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조금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무경은 시우의 근처에 오려고도 하지 않고 얌전히 제 몫의 이부자리에 몸을 눕혔다.

“내일부터는 정신 못 차릴 것 같으니까 오늘은 가급적 참으려고. 시우 씨 몸에 무리가 가면 안 되잖아요.”

웬일로 무경이 기특한 소리를 했다. 어둠 속에서 시우의 낯이 조금 붉어졌다.

그렇게 잠이 들었고 이틀째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나 싶었다.

***

붕 뜬 느낌에 잠이 깼다. 온몸이 뜨거웠다. 피부에 전기가 오르는 듯한, 혹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헉헉, 누군가 가쁜 숨을 뱉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 보니 그 숨소리를 내고 있는 건 바로 자신이었다. 달뜬 숨을 뱉으며 까만 어둠 속에서 시우는 목을 감싸 쥐었다. 금방이라도 갈증으로 죽을 것처럼 목이 말랐다.

나 왜 이러지. 아픈가. 독감이라도 걸린 건가.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감각에 시우는 몸을 떨었다.

“으응… 아….”

제 손으로 몸을 문질렀다. 피부가 미친 듯이 가려웠다. 가슴을, 옆구리를, 다리를 미친 듯이 제 손으로 쓸었다. 하지만 가장 급한 곳은 속옷 안쪽, 내벽 깊은 곳이었다. 뜨겁고 가려웠다. 찌르르 전기도 일었다. 가쁜 숨을 뱉으며 시우는 속옷 안으로 제 손을 집어넣었다. 여기가 어디라든가 옆에 누가 있다든가 하는 따위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한 손으로 뒤를 더듬고 다른 한 손으로 제 성기를 거칠게 문지르면서도 한없이 부족한 기분에 몸을 비틀며 바르작거렸다. 어떻게 해 주었으면, 누가 좀 만져 주었으면, 아니, 제 뒤를 누군가 꿰뚫어, 미친 듯이 박고 비벼서 이 가려움을 없애 줬으면 하는 생각만이 머리를 잠식했다.

“흐읏….”

제 손가락으로 뒤쪽 입구를 문질렀다. 이미 젖어서 액이 흐르는 그곳은 자신의 손가락조차 환영한다는 듯 탐욕스럽게 움찔거렸다. 손가락을 밀어 넣자 미끈하고 뜨거운 내벽이 삼킬 듯이 달라붙으며 조여들었다.

시우는 허리를 비틀어 제 손가락을 최대한 깊숙이 찔러 넣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제 손가락을 아무리 휘저어도 불타는 깊은 곳, 가장 가려운 곳에는 닿지 않았다.

“흑….”

답답한 마음에 짜증이 일었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다. 닿을 것 같은데 닿지 않았다. 미칠 듯한 가려움에 시우는 몸부림을 쳤다. 뭐라도 좋았다. 뭐라도 집어넣고 마구마구 쑤시고 싶었다. 이 순간만큼은 제가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발정기를 맞은 한 마리 짐승일 뿐이었다.

“시우야….”

누군가 옆에서 목소리를 냈다. 낮게 가라앉은,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생소했다. 하지만 시우는 그가 풍기고 있는 페로몬 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를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기분으로 몰고 가는, 저를 미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로부터 풍겨 나오는 냄새라는 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깨달았다.

시우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떨리는 목소리로 매달리듯이 말했다.

“이리 와요. 안아 줘. 만져 줘. 빨리.”

울 것처럼 간절하게 졸랐다. 하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만 내면서 보고 있을 뿐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차무경, 이리 오라고! 지금 당장!”

끝끝내 움직이지 않는 그에게 시우는 짜증을 담아 울음을 터트리듯 명령했다.

드디어 무경이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전신을 압도하듯 화악 달려드는 향기에 시우는 잠깐 숨을 멈췄다. 순식간에 그에게 짓눌리면서 머리가 아찔해졌다. 흐트러진 옷이 거칠 것 없이 풀어지고 속옷이 찢겨 날아갔다. 불덩어리 같은 무언가가 전희도 없이 단숨에 뒤를 꿰뚫고 들어왔다.

***

정신이 아득했다. 뇌도 손발도 뒤의 그곳도 모든 것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멍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차무경,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우를 감싼 강력한 페로몬의 주인, 그 이름 하나뿐이었다.

정확히 얼마 동안 몇 번을 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시간 감각조차 느낄 수 없었다. 밝으면 낮이구나, 어두우면 밤이구나 했을 뿐이었다.

정신이 들고 기운이 좀 생기면 곧장 참을 수 없이 몸이 가려워졌다. 아니, 가렵다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자극을 원하여 미칠 듯한 그 기분을 달리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경의 향기가 멀어지지 않기를, 무경의 손과 입술이 떠나지 않기를, 무경이 파묻은 중심이 좀 더 거칠게 안을 헤집어 주기를, 그 생각만이 오롯이 시우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입술이 닿으면 산소 호흡기를 댄 것처럼 무경의 숨을 빨아들였다. 달콤한 침이 생명수 같았다. 말캉하게 파고드는 입속 살덩이를 씹어 삼키고 싶었다.

무경이 가슴을 빨아들이고 작은 유두를 짓씹으면 시우는 좀 더, 좀 더 하고 보채며 가슴을 디밀었다. 큰 손이 마치 터뜨릴 듯이 성기와 고환을 쥐어짜는데도 고통보다는 쾌감으로 몸부림쳤다.

범해지고 범해져서 온몸이 녹초가 되어 촛농처럼 늘어져도 뒤는 여전히 뜨겁고 끊임없이 자극을 원했다. 시우의 내벽은 무경의 성기가 빠져나가려 할 때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물고 씹으며 조여들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따금씩 마주치는 무경의 눈은 저처럼 미친 짐승의 눈을 하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발정하며 매달리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았다. 귓가에서 헉헉대는 무경의 숨소리에 발가락 끝까지 짜릿함을 느꼈다. 노팅을 한 상태로 덜덜 떠는 자신을 껴안은 무경이 달래듯이 시우야, 시우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눈물이 났다.

중간중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정신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몸은 망가진 전기 인형처럼 이곳저곳에서 치르륵, 치르륵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럴 때면 무경은 그런 시우를 아이처럼 안고 미지근한 물로 씻기거나 미음처럼 묽은 유동식을 먹이고 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도 그 역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한참 씻다 보면 어느새 그에게 연결된 채 흔들리고 있거나, 미음 대신 입속으로 그의 혀가 들어와서 결국은 또 밥상 앞에서 뒹굴고 있거나 했기 때문이었다.

***

제대로 정신을 차린 것은 금요일 오후 즈음이었다. 며칠 동안 열병에 시달리다 깨어난 뒤의 기분이 이런 걸까 싶었다.

시우는 깨끗한 이부자리에 누워 팔에는 링거를 꽂고 있었다. 며칠 동안 온몸을 잠식하며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던 열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미칠 듯하던 가려움도 씻은 듯이 가셨다.

오직 물리적인 통증만이 전신을 지배했다. 온몸의 근육과 관절이 아픈 건 물론이고 입술이며 가슴, 특히 하반신의 은밀한 곳이 괴로울 정도로 욱신거렸다. 울어서 짓무른 눈을 뜨는 것도 고역이었다.

더 하라고 했다가, 그만하라고 했다가, 명령과 애원을 반복하며 흐느끼던 제 목소리가 떠올라 시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을 통째로 들어내고 싶었다.

목이 말라 마실 것을 찾아 고개를 돌리다가 나란히 놓은 옆 이부자리에 잠들어 있는 무경을 발견했다. 시우를 향해 몸을 돌리고 누운 그는 일어났다가 그냥 잠깐 누워 있으려고 했던 듯, 이불 위에 몸을 누이고 제 팔을 베고 있었다.

하얀 얼굴은 창백해 보이고 입술에는 찢어졌다 아문 듯한 상처가 있었다. 아프겠다, 생각하며 멍하니 보다가 불현듯 그것이 제가 물어뜯어 놓은 상처라는 것이 뒤늦게 생각이 났다.

얼굴이 붉어져서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잠깐 반대편 벽을 쳐다보며 얼굴에 오른 열이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눈을 감고 그러고 있다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돌아가는 일요일 아침까지, 시우는 그렇게 줄곧 누워서 시간을 보냈다. 무경과 어떻게 얼굴을 마주하나 걱정했지만 무경은 아무 일도 없었던 표정으로, 단지 시우를 몸살 같은 걸로 앓아누운 환자 취급을 하며 대할 뿐이었다.

무경도 주로 방 안에서 뒹굴며 시우의 옆에서 책을 읽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식사 시중도 목욕 시중도 무경이 직접 들었다. 사이클 중이었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가벼운 키스 외에는 시우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거였다.

교토에서의 마지막 밤인 토요일에도 둘은 따로따로 잠자리에 들었다. 시우가 새벽에 잠깐 깼을 때, 무경이 제 이불 속으로 들어와 있는 걸 발견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무경은 시우의 등에 얼굴을 대고서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아침에 다시 깼을 때 그는 이미 일어나 시우 옆에 없었다.

***

“몸 괜찮아요? 혹시 아직 불편하면….”

일요일 아침, 떠날 준비를 하면서 무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시우는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정말로, 온몸이 나른한 것 외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사실상, 실제로 아픈 건 아니었으니까 금요일부터 푹 쉰 걸로 충분했다.

여관 앞에 대기 중인 차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나지막한 담 위로 고풍스런 건물과 푸른 잎만 가득한 벚나무들의 모습이 보였다.

내년 봄은 시우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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