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원래대로라면 친구들끼리 오붓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 얘기들을 나누어야 할 공간에 우진과 윤성은 물론 무경까지 동석한 상태다.
우진이 윤성까지 동반해서 다시 나타나자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눈을 치뜨던 유정은, 뒤이어 시우의 어깨를 감싸고 나타난 무경의 등장에 턱이라도 빠진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다른 친구들 역시 크게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많이 억제하기는 했지만 무경의 페로몬은 여전히 주위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자리를 함께한 오메가들은 벌써부터 술에 취한 듯이 눈이 풀렸고 알파들은 바짝 얼어 있었다. 그나마 페로몬의 향기만 조금 느낄 뿐 그 영향에서는 자유로운 베타들만이 무경의 외모나 스타일을 훔쳐보며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는 상황이었다.
시우 역시 아직 얼떨떨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윤성의 정곡을 찌른 독설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을 때, 무경이 약속이나 한 듯이 나타나서 저를 구해 주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줄곧 이 모양이었다. 돌발 상황에 혼란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익숙하지 않은 무경의 페로몬이 줄곧 시우를 휘감아 정신을 어지럽혔기 때문이기도 했다.
“저기, 시우랑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전 시우가 만나는 사람 있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는데.”
처음의 충격이 가라앉자 유정은 윤성이고 우진이고 다 제쳐 두고 일단 무경에게 먼저 초점을 맞췄다. 무경은 시우의 애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같이 좀 동석해도 되겠냐며 천연덕스럽게 끼어든 참이었다.
시우는 물음표 가득한 유정의 표정을 보고 질문이 저거 하나로 끝나지는 않겠구나 직감했다. 유정은 예전부터도 그랬지만 시우가 우진과 헤어진 뒤로는 더더욱 시우에게 접근하는 알파들에게 까다롭게 굴었다. 물론 시우가 한동안 전혀 연애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새 사람을 만나 봐야 하지 않겠냐며 되레 걱정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막상 또 누가 나타나면 걱정부터 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극우성 알파가 극열성 오메가를 만난다고 하면 유정이 아닌 누구라도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볼 상황이긴 했다.
무경은 난감한 표정으로 불안하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시우를 흘깃 보더니 그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그리고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유정을 바라보았다.
“이 친구 과외 하는 집하고 아는 사이라 놀러 갔다가 우연히 봤는데 첫눈에 반했거든요. 처음엔 상대를 안 해 줘서 한참을 혼자 애만 태우는 바람에 실제로 사귀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어요.”
우오오… 하고 흥미진진한 표정들이 모두의 얼굴에 스쳤다. 썩은 얼굴을 하고 있는 우진과 윤성을 제외하고 말이다.
“근데 오늘은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아, 시우가 불렀나?”
사실 그건 시우도 궁금한 문제라 멍한 와중에도 힐끔 시선만 돌려 무경을 쳐다보았다.
“아, 그건 아니고, 여기서 놀다 갈 거라는 내용만 문자로 받았어요. 마침 오늘 일도 일찍 끝나서 친구분들한테 인사도 할 겸, 술 마실 거 같으니까 집까지 데려다도 줄 겸, 뭐 겸사겸사 해서 운전기사로 왔죠.”
무경이 시우와 눈을 마주치며 거의 눈을 찡긋하듯 하며 웃는다. 허어, 거짓말도 참 청산유수일세. 시우는 어이가 없었다. 시우가 문자를 한 대상은 진짜 운전기사인 기완이었다. 낮에 진명에게 미리 모임 장소를 알려 주라고 언질을 받았으니까 가게 이름이랑 주소를 찍어 보냈는데, 그걸 무경이 중간에서 인터셉트한 모양이었다.
“시우 선배 어디가 좋았어요?”
불쑥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이런 상황에 나올 만한 질문이긴 했지만 문제는 그 질문자였다. 모두 가자미눈을 하고 방금 질문을 던진 윤성을 쳐다보았다. 아, 저 화상, 대체 여기에 왜 있는 건데. 유정이 들으라는 듯이 투덜댔지만 윤성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무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성과 우진을 이 자리에 청한 장본인은 무경이었다. 별스러운 이야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밖에서 마주쳤을 때, 무경은 그의 등장에 얼어붙은 세 사람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우진을 보고 싱긋 웃었다.
‘지금 얼핏 듣기로 우리 시우 옛날 애인이라는 거 같던데… 뭐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같이 술이나 한잔 할까요?’
그리고는 앞장서라는 듯이 길을 비키며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그리고 황당함에 입이 벌어진 시우를 페로몬으로 칭칭 감아 정신을 못 차리게 해 놓고 등을 떠밀었다. 그 결과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관계의 사람들이 이렇게 모두 한 테이블에 자리하게 된 거였다.
“어디가 좋았냐니… 음… 전부?”
무경이 골똘히 생각하는 척 하다가 양쪽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소년처럼 웃었다.
“처음엔 얼굴이랑 분위기랑 향기가 좋았고… 그 다음엔 말하는 게 이뻤고… 계속 보다 보니 성격도 당찬 구석이 있는 게 매력 있었고? 그 다음부터는 뭐, 정수리 가마부터 새끼발가락 발톱까지 그냥 막 다 좋던데요.”
손이고 발이고 할 것 없이 다 오그라드는 닭살 멘트에 시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친구들의 환호가 오올, 하면서 놀리듯이 들끓었다. 그 사이를 뚫고 윤성의 쨍한 목소리가 다시 찬물을 끼얹었다.
“향기가 좋아요? 선배 극열성인데? 향기랄 게 있어요? 신기하네.”
윤성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말로 의아해서 물어본다는 듯이 순진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시우와 무경 쪽으로 확 풍기는 우성 오메가의 다디단 향이 진했다. 자신과 시우의 향기를 비교해 보라는 도전 의식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무경에게 끌렸거나, 혹은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심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유혹적인 향이기도 했다.
“내가 캐모마일 티를 좋아하는데.”
무경은 느긋하게 입을 열며 시우의 어깨를 당겨 하얀 목에 살짝 얼굴을 가져다 댔다. 금방이라도 코와 입술이 닿을 듯한 동작에 시우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얼굴을 붉히자 그걸 지켜보던 친구들이 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묘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우리 시우한테서 그런 향기가 나요. 머리가 맑아지고 심신이 안정되는 향기요. 그것도 이렇게, 몸을 가까이 해야만 맡을 수 있다는 점이 특히 좋아요. 정말로 가까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처럼 생각되거든. 아무한테나 마구 풍겨대는 페로몬은 너무 싸구려 같고, 게다가 진한 향기는 금방 질려요. 그리고 그쪽, 윤성 씨라고 했나.”
무경은 손으로 코와 입 부분을 쓸듯이 가리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실례인 줄은 아는데, 그 페로몬 좀 줄여 줄래요? 지금 계속 참고 있는데 좀 한계라서. 내가 단 냄새에 좀 약해요. 머리가 너무 아프네. 실외면 그래도 참겠는데 실내라서. 미안해요?”
특유의 끝을 올리는 말투로 부탁하듯 말하면서 무경이 나른하게 웃었다. 무경은 윤성을 노린 말이었지만 이 말은 일종의 광역 저격이 되었다. 순식간에 주변의 달달한 향기들이 확 줄어들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건 윤성만이 아니었다. 시우와 마찬가지로 청량 계열인 유정을 제외한 다른 오메가 두 명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무경의 페로몬에 반응해서 한껏 유혹하는 페로몬을 방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그러신가요… 뭐, 그런 거야 개인 취향이죠. 근데… 무경 씨 집안 어른들은 시우 선배 사귀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신가 봐요? 극열성이면 2세가… 아, 결혼까지는 아직 생각 없으실 수도 있겠네요.”
윤성이 달리 독한 게 아니었다. 여러 면전에서 무안을 당하고도, 아니, 무안을 당했기에 더욱 더 독이 오른 모양새였다. 페로몬은 거둬들였지만 이제는 잔뜩 독기 품은 눈으로 무경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였다. 아니 그건 사실 시우에 대한 간접적인 공격이었다. 네가 극우성 알파랑 사귈 수는 있겠지만 언감생심 결혼까지야 갈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거림이었던 것이다.
대놓고 하는 인신공격에 누구는 말리고 누구는 욕했지만 윤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참 대단하다고 할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건 무경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생각은 있어요. 아직 저뿐이지만.”
그는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얼굴 어디에도 화가 나거나 짜증을 내는 기색은 없었다.
“시우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별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그건 내가 좀 참고 기다려야죠.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극열성이 어쩌고 하는데 아직도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어요? 대체 어느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게다가 나는 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오메가들은 보통 자식이 생기면 애정이 배우자한테서 그리로 옮겨 간다면서요? 나는 자식이라도 시우를 나눠 갖는 건 절대 못 참을 거 같은데 어떻게 그러고 살지. 난 평생 나 혼자 독점하고 살아도 한참 부족할 거 같은데.”
조금 심각해질 수도 있는 주제가 또다시 오글토글한 영역으로 옮겨 왔다. 이쯤 되면 이것도 일종의 재주인가 싶다. 아니, 어디서 저런 대사만 모아서 가르치는 닭살 연애 특강이라도 듣고 왔나? 시우는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는데 무경이 마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윤성이 다시 찌를 듯한 눈빛으로 비죽이 입꼬리를 올렸다.
“잘됐네, 시우 선배. 진짜 축하해요. 솔직히 선배 극열성인 건 둘째 치고… 뭐, 다 지나간 얘기긴 하지만, 선배 처지가 너무 어려우니까 상대방 앞길을 틔워 주기는커녕 발목만 잡는다고 차인 적도 있었잖아요? 이번에는 진짜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윤성이 달콤하게 웃으면서 독설을 던졌다. 시우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건 실제로 과거 윤성이 시우에게 뱉은 대사였다. 네가 우진 선배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뭐냐고. 애도 못 낳고 의사 지망생인 그가 쉬운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도 없는 주제에. 자신은 그 모든 걸 다 해 줄 수 있으니 양심이 있으면 네가 먼저 손을 놓으라고 시우를 다그쳤었다.
사랑만 있다면 무시할 수 있는 헛소리였다. 비웃으면서 그래 봐야 우진의 마음이 나에게 있는데 네가 어쩔 거냐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 우진은 시우에게 등을 돌리고 윤성의 손을 잡았다.
“무슨 얘긴지 통 이해가 안 되네.”
무경이 별 같잖은 소릴 다 들어보겠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뱉었다.
“애인이 사랑만 주면 되지 뭘 일하는데 앞길까지 터 줘… 애인이 무슨 불도저야 로드롤러야….”
도처에서 킥킥하는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무경은 웃지 않았다.
“알파가 얼마나 무능력하면 제 오메가한테 그딴 걸 바라요? 다 퍼 줘도 부족할 판국에. 사랑하고 믿어 주고 곁에 있어 주고… 그거면 돼요. 알파가 제 오메가한테 바랄 게 그것 말고 또 뭐가 있다고.”
손가락 발가락이 다 오그라들 듯한 대사를, 무경은 표정도 말투도 진지하게, 윤성이 아닌 우진을 바라보며 뱉었다. 그 때문인지 여느 때 같으면 테이블을 치고 팔을 긁으며 박장대소할 친구들도 뭔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다가 약속이나 한 듯 우진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잔뜩 일그러진 우진의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르는 것을 시우는 무감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
돌아갈 시간이었다.
무경이 끌고 온 고급 외제차에 친구들은 휘파람이라도 불 듯한 분위기였다. 유정이 손짓 발짓 눈짓을 해 가며 전화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시우는 짐짓 못 본 척하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유정이야 당연히 시우를 추궁할 거리가 산더미 같겠지만 시우는 당장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머릿속이 터질 듯이 복잡했다. 게다가 이대로 집에 가면 줄곧 무경이 곁에 있을 테니 사실상 전화를 할 여유도 없을 터였다.
차 문을 닫자 좁은 실내는 무경의 향기로 가득 찼다. 시우는 맥박이 빨라지는 걸 느끼며 숨을 삼켰다. 한껏 억누른 향이었지만 여전히 평소의 몇 배는 짙었다. 좁은 공간에 바싹 붙어 있으니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시우는 몸을 창 쪽으로 약간 기울여 눈을 감았다.
***
“오메가 친구 한 명만 만난다더니.”
한참 말없이 차를 운전하던 무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아.
시우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거짓말했던 걸 깜박했다.
“오메가 한 명은커녕 알파가 세 명에 그중 하나는 전 애인이고.”
딱히 질책하는 말투도 아닌데 시우는 제 발이 저려서 식은땀이 솟았다.
“아, 아니에요. 다른 애들은 어쩌다가… 그,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가 멋대로 찾아온 거예요. 부른 것도 아니고….”
“근데 오늘 시우 씨 왜 그렇게 조용했어요? 원래 친구들 사이에선 그렇게 말이 없나? 나한테는 따박따박 하고 싶은 말 다 하더니.”
“그거야….”
사전 합의 없이 갑작스레 시작된 애인 역할극에, 해 놓은 거짓말이 너무 많으니 자칫하면 실수할까 겁이 나기도 하고, 거기에 무경의 페로몬이 직격탄으로….
무경의 페로몬. 세포 하나하나에 전기가 올라 찌릿찌릿한 느낌이다. 생각하니 더 의식이 되어 열이 올랐다. 시우는 다시 한 번 침을 삼키고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저기… 창문 좀 열어도 될까요?”
“음… 왜요. 시우 씨도 내 페로몬 때문에 머리가 아파요?”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수, 술 때문이에요. 열이 올라서….”
시우는 셔츠 앞섶을 좀 펄럭였다. 진짜로 더웠다. 얼굴에도 몸에도 잔뜩 열이 올랐다. 온몸이 빨개져 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무경이 곁눈으로 시우의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픽 새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술 많이 마셔도 꽤 멀쩡한 걸로 알고 있는데. 오늘은 맥주 한 컵 밖에 안 마셨잖아요?”
“어… 그게… 그러니까….”
“잠깐만요.”
무경이 차를 갑자기 틀어 옆길로 들어섰다. 인적이 드문 샛길이다. 구석진 곳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더니 갑자기 안전벨트를 풀고 시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경의 향기가 몇 배로 증폭되어 시우를 덮쳐 왔다.
“연시우 씨.”
코앞까지 다가온 무경이 눈을 맞추고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시우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솔직하게 말해 봐요. 지금 나 때문에 흥분한 거 맞죠?”
“어…어? 아, 아니에요. 이건 진짜 술 때문에 더워서….”
더듬더듬 변명을 해 보지만 얼굴은 더 빨개지고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도저히 믿어 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바싹 다가와 찬찬히 시우의 얼굴을 훑어보는 무경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시우 씨 똑똑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하지. 밑에 만져 봐도 돼요? 진짜로 흥분한 거 아닌가 확인하게.”
시우의 눈이 자동적으로 무경의 손을 찾았다. 운전석에서 몸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인 그는 한 팔로 시우의 뒤쪽 좌석 등받이를 잡고 다른 한 손은 시우의 다리 사이, 좌석 시트를 짚고 있는 모양새였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치고 들어올 수 있는 위치였다. 다리를 오므릴 수도 없는 상태여서 시우의 눈이 당황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마, 만지긴 어딜 만져요. 늦었는데 빨리 집이나 가… 읍….”
갑자기 입술을 겹쳐 와서 말이 막혔다. 따뜻하고 뭉클한 감촉이 페로몬의 영향 때문인지 여느 때의 몇 배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무경은 보드라운 살을 가볍게 눌러 비비다가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가며 가볍게 물었다. 무경의 입술이 시우의 입술을 빨아 당기다 놓을 때마다 물기 때문에 촉촉, 젖은 소리가 번졌다. 입술 안쪽의 매끈한 살을 핥으며 맛보던 혀가 숨을 쉬느라 벌어진 시우의 잇새를 가볍게 밀며 들어왔다.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 혀로 무경의 혀를 감아 당겼다. 질척하게 속살이 섞이는 감각에 저절로 신음이 새었다.
흥분한 게 아니라는 둥, 집이나 가자는 둥 말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여기가 밖이라는 사실도 시우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시우는 무경의 목에 팔을 감고 그와의 키스에 열중했다. 머리가 몽롱한 와중에도 이따금씩 스파크가 일듯이 온몸에 찌릿찌릿하게 전기가 퍼졌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거였다. 어젯밤에도 관계를 가진 상대인데 무경이 이렇게 입술이 부드러웠나, 이렇게 침이 달았나, 이렇게 혀 놀림이 야했던가. 시우는 그저 모든 것이 새롭고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무경의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왔지만 시우는 몸을 움츠리기는커녕 가슴을 살짝 내밀며 그의 손을 반겼다. 크고 따뜻하며 약간 건조한 손이 거침없이 판판한 가슴을 쓸었다. 그 간단한 손놀림에도 소름이 돋을 듯 온몸이 떨려 왔다. 시우는 유두를 피해 가슴 언저리만 쓰다듬는 손길에 애가 달았다. 연신 키스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무경의 손을 잡아 제 가슴의 중심부에 대고 눌렀다. 입술이 닿아 있는 상태에서 흣, 하고 무경이 웃음을 흘렸다.
무경이 셔츠 아래로 손을 빼면서 천천히 입술을 떼는 바람에 시우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아직 부족한데, 아직 더 하고 싶은데. 갈증이 이는 기분에 시우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무경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모습 볼 줄 알았으면 진작 페로몬을 쓸 걸 그랬나. 시우 씨가 내 페로몬을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네.”
시우의 흐릿한 시야에 나른하게 웃고 있는 무경의 얼굴이 비쳤다. 언제 옮겨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온전히 조수석으로 넘어와 시우의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무경이 옆의 버튼을 눌러 좌석을 적당히 뒤로 젖혔다. 시우의 몸도 따라서 뒤로 넘어갔다.
무경이 시우의 위로 몸을 조금 기울이고 속삭였다.
“셔츠 단추 풀어요.”
시우가 그의 셔츠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무경은 웃으면서 그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나 말고. 시우 씨 거.”
느릿한 진행에 애가 타 입술을 핥으면서 시우는 제 셔츠로 손을 가져갔다. 흥분 상태라 손가락이 떨려서 제대로 풀어지지가 않았다. 시우는 도와줬으면 하는 시선으로 무경을 쳐다봤지만 시우의 손끝만 보고 있는 무경은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거의 뜯을 듯이 거칠게 셔츠를 풀어 헤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경은 조금씩 열리는 셔츠 깃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천천히 아래로 선을 그었다.
마침내 다 열린 셔츠 사이로 하얗고 판판한 가슴과 기대에 부푼 조그마한 돌기가 드러났다.
무경이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어 시우의 유두를 건드렸다.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끝만 스치다가 시우가 신음하며 가슴을 내밀자 웃으면서 살짝 눌러 비볐다. 유두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굴리면서 가슴을 넓게 어루만지기도 했다. 시우는 애가 탔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왜 평소처럼 해 주지 않지? 왜 혀로 쓰다듬고 입술로 빨고 이를 세워 물거나 하지 않지?
시우는 팔을 내어 무경의 목을 감고 제 가슴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무경은 낮게 웃을 뿐 쉬이 시우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았다.
“왜, 왜….”
결국 시우가 원망하는 눈빛으로 헐떡였다.
“왜… 뭐요?”
무경이 빙그레 웃었다.
“왜 안 해 줘요?”
“음… 뭘요.”
“평소처럼….”
“평소처럼?”
“입으로….”
“그거 시우 씨가 싫어하잖아.”
하아…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 만하다. 아침에 아프다고, 거칠었다고 했더니 또 심술이다. 아닌 척 하더니 뒤끝이 상당하다. 초딩이냐고, 당신.
안 할 거면 관두라고 하고 싶은데, 지금 시우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앞도, 뒤도, 아니 온몸이 지금 미칠 것처럼 무경을 원하고 있었다. 정신이 혼미한 게 히트 사이클의 절정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이게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이라는 건가? 극우성이면 누구라도 상관없이 이렇게 되는 거야?
서로의 페로몬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게 알파와 오메가라지만, 시우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만큼 타인의 페로몬에 휘둘린 적이 없었다. 처음 겪는 혼란이었고 그만큼 더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시우가 알기로는 페로몬에도 상성이라는 게 있고 개인이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에 따라 호불호가 존재한다고 들었다. 영향을 받아 몸이 반응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상대에 따라 기분 좋은 자극이 되기도 하고 불쾌한 자극이 되기도 했다.
지금 시우가 극우성의 힘에 눌려 어쩔 수 없이 휘둘리고 있는 건 맞지만 극도로 기분 좋게 느껴지는 감각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대체 왜. 차무경이 뭐라고.
“해 달라고 해 봐요.”
그런 시우를 내려다보며 무경이 부드럽게 지시했다.
“……?”
“구체적으로 콕 집어서 말해 봐. 내가 어떻게 해 줬음 좋겠어요?”
입술을 깨물고 노려보다가 무경이 다시 슬쩍 스치듯 유두를 건드리는 통에 시우는 결국 자지러지듯 몸을 움츠렸다.
“…입으로….”
“입으로…?”
“핥아… 줘….”
“음… 핥기만 하면 돼요?”
“…깨물어 주고….”
“또?”
“…….”
빨아 달라고도 하고 싶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우는 입을 앙다물고 무경을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눈꼬리에 물기가 어렸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본 무경의 입가에 웃음이 매달렸다.
“이 상황에서도 고집이네. 지금 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닐 텐데.”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무경이 중얼거렸다.
“좋아요. 하지만 이건 시우 씨가 해 달라고 한 거니까 나중에 딴말하면 안 돼.”
드디어 무경의 얼굴이 내려왔다. 더운 숨이 가슴에 닿자 온몸이 오싹해지면서 솜털이 바짝 섰다. 흥분해서 꼿꼿하게 선 돌기가 기대감에 더 부풀어 올랐다. 마침내 유두가 뜨겁고 축축한 입 안에 삼켜지자 시우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뒤틀며 달뜬 숨을 뱉었다.
“흐읏… 아….”
시우는 무경의 머리를 움켜쥐고 온몸에 힘을 줬다, 풀었다 하며 척추를 내달리는 자극에 어쩔 줄을 몰랐다. 뭉클한 혀와 딱딱한 이와 뜨겁게 젖은 숨이 번갈아 주는 자극이 저릿저릿하도록 생생했다.
어느새 무경의 손이 시우의 바지 앞섶을 풀어 헤치고 속옷 안을 헤집고 있었다. 시우는 이미 앞도 뒤도 충분히 젖어서 속옷에 얼룩이 진 지 오래였다. 무경은 떨면서 액을 흘리는 중심은 버려두고 뒤쪽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젖은 입구가 움찔거리며 반갑게 무경의 손가락을 맞았다. 처음부터 두 개가 부드럽게 밀려들었고 시우는 억눌린 숨을 흐윽 뱉었다. 무경은 질척거리며 쫀득하게 감겨드는 내벽의 감촉을 즐기기라도 하듯 여기저기를 비비고 돌리며 놀다가 어느 순간 알고 있는 포인트를 향해 곧장 손가락을 깊게 밀어 눌렀다. 시우의 몸이 일순 감전이라도 된 듯 파드득 떨었다.
“핫… 응….”
내벽이 씹어 삼킬 듯이 무경의 손가락을 조이고 중심은 잔뜩 발기해서 액을 뚝뚝 흘렸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고 눈은 젖어 있는데다 촉촉한 입술 사이로 연신 달뜬 숨과 녹을 듯한 신음이 새었다.
“아… 제발… 좀 더….”
시우는 무경의 팔을 잡았다. 이제는 한계였다. 손이라든가 입이라든가, 이걸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가 않았다. 떨리는 팔을 뻗어 무경의 벨트를 잡아 당겼다.
“음… 잠깐만.”
무경이 자신의 벨트를 풀려는 시우의 손을 가만히 잡아 눌렀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더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무경이 빙그레 웃으면서 시우의 손을 자신에게서 떼어 놓았다.
“???”
시우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보든 말든 무경은 시우의 흐트러진 옷을 다시 추슬러 주고 좌석까지 원상 복구 시킨 후 매끄럽게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흥분의 한가운데에 갑자기 덩그러니 혼자 놓인 시우는 잠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됐다.
운전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을 내린 무경이 시우를 보며 짐짓 상냥한 척 웃었다.
“아직 아플 거 아녜요. 다쳤다고 약 바른 게 바로 오늘 아침인데. 하루도 안 지났으니 어쩌겠어요. 또 욕먹긴 싫으니까 내가 참아야지. 게다가 생각해 보니 우리 진짜 밖에서 이러고 있었네. 아무리 외진 곳이라지만 들킬 위험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시우는 어이가 없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 지금, 이거 일부러 그런 거야? 나 엿 먹이려고?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풀지 못한 욕구에 짜증도 나고 비참하기도 하고 창피하면서 뭔가 억울하기도 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한꺼번에 시우를 덮쳤다. 싱글거리며 쳐다보는 낯짝을 후려갈기고 싶어졌다.
개자식, 죽어 버려.
시우는 몸을 웅크리고 팔을 모아 거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직도 찌르르한 감각이 남아있는 뒤며, 징징 울리며 어떻게 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앞이며… 주위를 감싸고 있던 무경의 페로몬이 조금씩 날아가 머리가 맑아지자 여전히 몸에 남아 있는 흥분감이 더더욱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시우는 당장에라도 죽고 싶었다. 방금 했던 말이며 행동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직접 셔츠를 풀고 머리를 잡아당겨 매달리고 핥아 달라고 애원하고….
히끅, 억눌린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동 걸 준비를 하고 있던 무경이 멈칫했다.
“시우 씨?”
“…….”
“지금 울어요?”
“…안 울어요.”
하지만 목소리가 이미 젖어 있다. 무경이 어깨를 잡았지만 시우는 그 손을 뿌리치고 고집스럽게 머리를 팔에 묻은 채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우는 거 같은데.”
“아니라니까요. 어서 가기나 해요.”
시우가 이를 갈며 뱉었다.
“지금 짜증났어요?”
“네. 그럼 안 됩니까?”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짜증난 얼굴도 좀 보고 싶어서.”
미친놈.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났지만 시우는 얼굴을 돌린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만 페로몬에 취해 흥분해서 그 난리를 치고, 그렇지 않아도 창피해서 죽을 지경인데 누가 우는 얼굴까지 보여 줄까.
“어… 그냥 장난 좀 친 거뿐인데.”
반은 웃는 듯 반은 난감한 듯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래, 장난을 친 거든가, 아침에 퇴짜 맞은 분풀이를 한 거든가. 이유야 어찌됐든 극우성 알파 슈퍼갑님이 장난으로 던진 돌에 극열성 오메가 슈퍼을은 맞아 죽기도 하는 법이거든. 시우는 대꾸도 않고 고개를 돌린 상태로 잠자코 입을 악물었다.
“…….”
“…….”
시우가 입을 다무니 침묵이 차 안을 뒤덮었다. 싸늘한 밤공기가 차 안으로 넘실거리며 들어오고 정신이 맑아질수록 시우의 자괴감은 더욱 더 깊어 갔다.
“음… 아침 일로 심술부린 것도 맞긴 한데.”
갑자기 입을 다물고 있던 무경이 중얼거렸다.
“…….”
“알파들 잔뜩 있는데 나간 것도 좀 짜증났고….”
“…….”
“뭐랄까, 페로몬에 취한 것 같은 시우 씨 모습 보니까 좀… 열 받는다고 해야 하나… 평소에는 나랑 할 때 그렇게 좋아하는 거 같지 않았는데.”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시우는 슬그머니 머리를 돌려 힐끗 무경을 쳐다보았다. 운전대에 팔을 걸쳐 그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무경은 멀거니 어두운 밖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시선을 시우에게로 돌렸다. 움찔, 갑작스러워 미처 피하지 못한 시선이 맞닿았다. 무경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무경은 잠깐 그대로 시우를 쳐다보고 있더니 갑자기 창을 닫고 다시 조수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좌석을 뒤로 눕히고 곧장 시우의 바지로 손을 뻗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필요 없어요. 안 해요, 더는.”
시우가 기겁하며 무경의 팔을 잡아 밀어냈다. 무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우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툭 던지듯 말을 뱉었다.
“언젠가는 시우 씨가 페로몬 없이도 나한테 발정했으면 좋겠어.”
뭐?
말의 의미를 헤아리느라 잠깐 얼이 빠진 시우의 앞섶을 헤치고 무경이 곧장 시우의 다리에서 바지를 벗겨 내렸다.
***
“하아… 앗… 으응….”
거친 호흡과 달뜬 신음이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시우는 정신이 혼미했다. 이제 안 하겠다고 거부하던 거나 놀림을 당해 짜증을 냈던 기억 따위는 전부 머리에서 지워졌다. 마치, 무경의 진한 페로몬과 뜨거운 살갗이 닿는 감각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세계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낯부끄러운 비음만큼은 절대로 내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슨 새끼 고양이처럼 연신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무경의 손이 닿을 때마다 척추에 전기가 올랐다. 누군가 깃털로 발가락을 간질이는 양 온몸을 타고 오르는 간질간질한 느낌을 참을 수 없어서 시우는 중간중간 발가락에 힘을 주며 허리를 비틀어야 했다. 열성 형질 탓에 애액이 별로 흐르지 않는 시우인데도 벌써 아래는 흥건하게 젖어서 엉망이었다.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정신이 없는 가운데도 이따금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무경은 좌석을 완전히 젖혀 시우를 눕히고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채,손등에 힘줄이 파랗게 돋아나도록 시우의 허벅지를 강하게 쥐어 올린 상태였다. 시우의 셔츠는 완전히 풀어 헤쳐져서, 하얀 가슴팍에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빨간 유두만이 흑백 사진의 유일한 칼라처럼 도드라졌다.
이미 아까부터 바짝 흥분해서 서 있는 시우의 성기는 무경의 허리 놀림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그걸 가리려고 하다가 무경이 아래서 쳐올리는 힘에 밀려 의자 밖으로 떨어질 뻔하기도 한 터라, 결국 시우는 애써 제 모습을 외면한 채 무경의 팔과 옆의 운전석 등받이에 매달리다시피 해서 간신히 흔들리는 몸을 지탱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서도 아래를 드나드는 무경의 느낌만큼은 낯 뜨거울 만큼 생생했다. 무경은 비좁은 속살을 밀고 들어와 내벽을 비비고 쑤시며 흔들었다. 무경이 허리를 세우거나 굽힐 때마다 시우는 새로운 곳을 찔려 온몸이 움찔거렸다. 선단이 내벽을 긁고, 굵은 기둥이 좁은 입구를 드나들 때마다 제 여린 속살이 부푼 성기에 찰싹 달라붙어 조이는 감촉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무경이 제 성기를 거의 빼낼 듯이 뒤로 물러났다가 일시에 뿌리 끝까지 거칠게 박아 넣었다.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맨살이 부딪히면 맞닿은 곳뿐만 아니라 허리와 머리, 아니 온몸에 충격이 왔다. 포인트만을 노리고 집요하게 쳐올리는 행위에 시우는 온몸 구석구석에 자잘한 경련을 일으키며 자지러졌다.
그러기를 몇 차례, 마침내 꼿꼿하게 섰던 시우의 성기가 특유의 페로몬 향을 뿜으며 자신과 무경의 배에 액을 토해 냈다. 절정에 달해 경련이 일어나자 내벽이 멋대로 품고 있던 무경의 성기를 강하게 조였다.
“크… 흑….”
무경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거친 신음을 뱉었다. 마지막으로 깊게 박아 넣은 무경의 성기가 몇 차례에 걸쳐 길게 정액을 뿜어내었다. 시우는 몸속에 퍼지는 뜨끈한 기운을 느끼며 탈진한 것처럼 손을 놓고 축 늘어졌다.
“후우….”
무경이 길게 숨을 뱉으며 힘없이 늘어진 시우 위로 몸을 기울였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해 시우를 덮쳐 누르지는 않았지만,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목덜미에 묻으며 호흡을 골랐다. 시우도 가쁜 호흡을 다스리느라 판판한 가슴이 분주하게 들썩였다. 시우의 손은 아직도 섹스의 여운에 조금씩 떨렸다. 손을 둘 곳을 찾아 헤매다 카시트 양옆을 짚은 무경의 손이 닿았다.
그에 무경이 얼굴을 들었고 어두운 실내등 아래에서 열 오른 시선들이 맞부딪혔다. 시우의 눈꼬리는 발갛게 달아오르고 이미 젖은 지 오래인 눈동자는 촉촉했다. 무경이 홀린 듯이 쳐다보고 있자니 시우가 조금씩 떨리는 손을 들어 무경의 얼굴을 만졌다. 땀이 밴 이마를 훑어 내고는 고개를 살짝 들어 무경의 입술에 가볍게 자기 입술을 대었다가 떨어뜨렸다.
“젠장….”
무경이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무어라 욕설을 뱉었다. 시우는 여전히 몸속에 파묻혀 있던 무경의 성기가 갑자기 부풀어 오르는 감각을 느끼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 잠깐, 잠깐만, 이제 더는….”
당황한 시우의 손을 잡아 깍지 껴 누르면서 무경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내 마음대로 되냐고.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아니, 내가 뭐를… 아, 아윽….”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성기를 여린 속살에 거칠게 비벼 박으며 무경은 항의하는 시우의 입을 제 입으로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무경의 페로몬이 넘칠 듯이 차내에 퍼졌다.
집에 돌아갈 일이 요원한 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시우는 잠이 깨고서도 꼼짝을 못하고 그냥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온몸이 나른해서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데 이상하게 손끝 발끝은 여전히 어제의 흥분감이 남은 것처럼 찌릿찌릿 전기가 일었다.
문 쪽으로 돌아누운 상태라 등 뒤에 무경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평소처럼 등에 달라붙지 않는 걸 보면 없는 것 같았는데 고개를 돌려 확인할 기운도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렇게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으면 싶었다.
시우는 멍하니 바닥의 한 점만 응시하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다시 잠들었다가 한 여사님이 오실 때 깨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볍게,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잠기운에 흔들리듯 잠겨 드는데 갑자기 누군가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눈을 뜨자 바로 코앞에 무경의 얼굴이 있었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침대에 누워 있는 시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얼굴을 마주 바라보면서 시우는 제 뺨을 감싸는 그의 손이 참 크구나 하고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
쪽.
멀거니 보고 있자니 그가 입술에 입을 맞추며 가볍게 웃었다.
“이렇게 잠에서 못 깨고 멍하게 있는 것도 귀엽네. 아직 졸려요? 배 안 고파?”
음… 배라.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하고. 근 두 달을 꼬박꼬박 시간 맞춰 식사했더니 이 시간이 되면 저절로 공복이 느껴졌다.
“배… 고파요.”
멍하니 대답하는 게 웃겼는지 무경이 키득거렸다. 그러더니 시우의 팔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아이처럼 영차 일으키더니 제 옆에 기대 앉혔다.
“그럼 정신 좀 차려요. 세수하고 밥 먹고 나 가는 모습 봐 줘야지.”
“음….”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그대로 넋을 놓고 있었더니 무경이 웃으면서 시우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시우의 발을 제 발 위에 올리고 뒤에서 껴안아 한 걸음 한 걸음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자기 전에 샤워는 했으니까 간단하게 정신만 차리고 나와요. 아니면 내가 세수도 시켜 줄까?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세면대 앞에 세워 놓고 거울을 통해 시선을 맞추며 무경이 말했다. 마주친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근데 내가 아직 서툴러서 씻기다가 옷을 버릴 지도 모르니까… 윗옷은 아예 벗을까요?”
무경의 손이 앞으로 돌아와 시우의 파자마 단추에 손가락을 걸었다. 하나 둘 풀어 내리는 모습을 멀거니 보던 시우의 눈이 반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단추가 반 이상 풀린 상태였다. 무경은 셔츠가 열린 틈새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팍을 더듬는 동시에 드러난 목덜미에 얼굴까지 묻고 있었다. 시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아침부터 뭐해요? 출근 안 합니까?”
“아.”
무경이 힐끔 시선을 들어 어이없는 얼굴로 저를 보는 시우와 눈을 맞추더니 머쓱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잠이 깨 버렸네. 한 5분만 더 있다가 깨지.”
장난 반 아쉬움 반으로 웃더니 무경은 시우가 노려보는 가운데 다시 파자마 단추를 대충 채워 주었다.
“세수만 하고 얼른 나와요. 식사 준비 다 됐어요.”
무경이 나갈 때까지 파자마 앞섶을 쥐고 경계를 늦추지 않던 시우는 완전히 문이 닫힌 걸 확인하자 한숨을 쉬며 세면대를 쥐고 머리를 숙였다.
정신이 들면서 어젯밤 기억이 밀물처럼 밀고 들어왔다. 무경이 있는 동안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목덜미까지 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침대도 아니고, 좁고 불편한 차 안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몸이 이렇게 삐거덕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었다.
시우는 헐렁한 파자마를 펄렁거리며 제 몸을 검사했다. 시우가 아프다고 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차 안이라 단순히 자세가 안 나와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어제는 그렇게 심하게 물거나 빨아 대진 않은 것 같았다. 가슴은 여전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래도 평소에 비추어 보면 훨씬 멀쩡한 수준이었다.
단지 허리와 뒤쪽이 많이 아팠다. 허리가 아픈 건 무리한 자세 때문일 테고, 뒤쪽은 아프다고 하기에도 좀 뭣한, 뭉근한 둔통이 계속 가시지 않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아니 콕 찍어서 무경이 여전히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윽. 무슨 소리야.”
생각하고 보니 너무 민망한 상상이라 시우는 머리를 흔들며 두 손으로 제 뺨을 두드렸다. 정신 차려, 연시우. 어제는 지나갔어. 이미 과거야. 잊어버려. 머리에서 지워!
찬물을 틀어 얼굴에 끼얹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어제의 잔상은 쉽게 머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차 안에서 정신없이 몰아치듯 두 번째 섹스를 하고 나서, 시우는 지쳐 떨어져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고서도 여전히 비몽사몽인 와중에 무경이 옷을 벗기고 욕실로 데려간 것도 기억이 났다. 아 진짜. 연시우 미쳤지, 네가.
무경이 욕조에 시우를 앉힌 채로 몸을 씻겼었다. 제 몸에 받치고 엎드리게 해서 뒤에까지 손을 쓰다가… 그러다가 또 흥분해서 했던 거 같은데 내가 먼저 하자고 했나 아니면 무경이 하자고 했나… 적어도 시우 역시 몸이 동했던 건 기억이 난다. 그럼 그때도 페로몬을 썼던가? 그렇지 않으면 그 상태에서 하자고 했을 리가….
아 씨….
시우는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봐도 떠오르는 건 부끄러운 흑역사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서 괴로워해도 도무지 답이 안 나와서 시우는 그냥 분연히 털고 일어서기로 했다.
아니야. 흑역사는 무슨. 극열성 오메가가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휘둘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생리적인 거니까. 그걸 이용해서 이리저리 욕심을 채웠다면 그건 알파 쪽이 나쁜 거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아무렴.
시우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대충 씻기를 마치고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
얼굴을 마주하니 저절로 열이 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시우 씨 체력 좀 키워야 할 거 같던데, 운동 안 할래요? 좋아하는 운동 없어요? 피트니스 센터 끊어 줄까요?”
그리고 무경은 면전에서 저렇게 뻔뻔스러운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저 체력 좋거든요.”
이래 보여도 육체노동까지 뛴 사람이다. 석 달도 못 되는 기간이긴 했지만 그건 다쳐서 그만둔 거지 체력이 달려서 그만둔 것도 아니고….
“체력이 좋은데 고작 두 번 하고 기절을 해요?”
“기절한 게 아니고 그냥 졸려서 잠든 거예요.”
시우가 잇새로 뱉었다. 그리고 어제는 솔직히, 처음 겪어 보는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몸이 지나치게 반응해서 진이 빠지기도 했고.
“흐음… 근데 시우 씨 나한테 화났어요?”
“네? 아뇨. 왜요?”
“아까부터 내 얼굴을 잘 안 보잖아. 봐도 노려보듯이 보고.”
“…….”
그냥 좀 창피할 뿐인데, 도대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난 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만두려고 했는데 안 한다고 화냈었잖아요, 시우 씨가.”
무경이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미움을 받는 거지, 하고 중얼거렸다. 시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대체 그 얘기를 왜 지금 꺼내는데?
“그러니까, 그건 무경 씨 페로몬 때문이잖아요.”
무경이 빙그레 웃었다.
“응. 시우 씨가 내 페로몬을 엄청 좋아하긴 하더라. 참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내가 내 페로몬 따위한테 질투를 해야 하다니….”
아, 진짜. 지금 저거 나 놀리려고 하는 거 맞지?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노려봤더니 무경이 실실 웃으며 손을 저었다.
“또 화낸다. 그냥 장난친 건데. 그나저나 오늘은 뭐 할 거예요? 외출할 일 있어요?”
“…아뇨.”
오늘은 지우도 오후 늦게까지 방과 후 활동이 있어서 바쁘다. 저녁에 전화나 한 통 할까. 그러고 보니 유정이도 불이 나게 문자를 했겠구나.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그냥 집에서… 전에 시작한 그림 마무리하고 책이나 좀 읽으려고 해요.”
“그래요. 몸 상태도 별로일 텐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요.”
무경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시우도 무경 말대로 할 생각이었다.
불청객이라고 해야 할지,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그날 오후에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
무경이 출근을 하고 한 여사가 올 때까지의 몇 시간은 온전히 시우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넓은 집에서 음악도 TV도 틀지 않고 가만히 있다 보면 어쩐지 세상에 저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적막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 적막감은 시우의 기분에 따라 더없이 우울하거나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지없이 평화롭고 행복한 기분을 안겨 주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아침부터 그랬지만 어쩐지 멍했다. 핸드폰에는 예상했던 대로 유정의 메신저 메시지가 연타로 날아와 있었다. 당연히 대부분 무경에 관한 거였다. 한참 동안 그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시우는 한숨을 쉬면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엎어 놓았다.
전화는 할 수가 없었다. 통화를 하면 또 거짓말을 해야 되니까. 게다가 무경이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시우도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아는 거라곤 이름 석 자와 돈이 아주 많다는 것, 직함이 이사라는 것뿐이다. 개인 신상에 대해 알려 하지 말 것. 그것도 계약 조항의 하나였다.
무경은 어제 모임 자리에서 아버지가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데 저도 거기에서 일하면서 회사 일을 배우고 있다는 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렸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충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 같았지만, 얼핏 본 것만으로도 시우의 시계 브랜드를 알아내는 윤성이 그걸 믿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윤성은 무경의 차림새 역시 스캔을 마쳤을 테고, 모르긴 몰라도 무경이 걸친 옷과 액세서리의 가격 계산도 끝났을 터였다.
하아….
윤성과 우진을 만난 걸 떠올리면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음이 착잡하다고 해야 하나 울적하다고 해야 하나. 유정은 어제 일로 속이 시원하다고 했지만 그거야 제 사정을 모르니 하는 말이었다. 우진에게 미련이 있다거나 두 사람을 본 일로 마음이 아픈 건 아니었다. 그들에겐 더 이상 아무 감정도 안 들었다.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 얽히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지금 시우 자신이 처한 상황이 목을 조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시계 따위를 사자고 몸을 파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몸을 판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무경이, 상황에 맞추어 대충 떠든 거겠지만 애인이라는 거짓말에 더해 결혼이 어떻고 아이가 어떻고 하는 얘기까지 던져 놨으니… 1년 후에 무경과 헤어졌다고 하면 참 꼴이 우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이라.
극열성 오메가는 임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시우는 그에 대한 생각을 일부러 피해 왔었다. 베타 여성이든 오메가든, 임신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선택하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과 애초부터 선택지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얘기가 달라도 많이 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와 나의 아이가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 그게 시우와 같은 극열성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저와 차무경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어떻게 생겼을까. 무경을 닮았을까, 저를 닮았을까. 저를 닮는다면 형질만큼은 닮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무경을 닮은 알파 아기면 귀여울 것 같았다. 조금 삐딱한 구석이 있는 성격도 어린아이라면 그저 귀엽지 않을까. 아니 지금의 그 이상한 성격도 어릴 때부터 제대로 키우면 좀 더 밝고 온순한 성격으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시우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계약 정부 주제에. 극열성 주제에. 미쳤구나. 나 진짜 오늘 왜 이래.
시우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침부터 머리가 멍하더니 자꾸 이상한 생각만 하고 있다.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이란 게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아예 신체 호르몬 체계가 깨져 버린 게 아닐까. 멍한데다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으니.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망상이 더 폭주하는 것 같았다. 산책이라도 갔다 오자.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한 여사가 와 있을 것이다. 몸을 움직이고 한 여사를 도와 집안일이라도 하면 잡생각도 좀 사라지겠지. 시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외출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
엘리베이터와 연결되는 벨이 울렸을 때 시우는 옷을 갈아입고 양치질을 하던 중이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가까워서 한 여사가 온 건가 싶었다. 그녀는 가끔 예정보다 일찍 오기도 했고, 한 번뿐이긴 했지만 카드 키를 잊어버리고 와서 벨을 누른 적도 있었다.
시우는 칫솔을 물고 얼핏 화면에 비친 여성의 모습을 확인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버튼을 눌렀다. 다시 욕실로 가서 마저 양치를 끝내고 나오자 현관 벨이 울렸다. 시우는 곧장 밖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좀 일찍 오셨….”
시우의 말문이 막혔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한 여사가 아니었다. 시우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50대 중반의 세련된 여성을 조금 당황해서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아, 다행히 집에 있었네. 한 여사 없어? 왜 네가 나오니?”
시우의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여자가 시우를 밀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하무인격인 말투와 태도에 시우는 곧바로 기억을 떠올렸다. 에스테틱에서 본 그 여자다. 자신을 무슨 상품 취급하며 우리 차 이사 취향이 어쩌고 하던 그 여자.
시우는 조금 피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뭐지 이 사람. 왜 갑자기 여길 찾아온 거야?
“음… 거실 창 좀 열어 두지 그래. 이제 낮에는 꽤 덥지 않니? 시원한 것도 좀 내오고. 저기.”
소파 위에 핸드백을 내려놓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다보더니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시우를 향한 건 아니었다.
“거기 서서 뭐해? 들어와, 들어와.”
여자의 시선은 시우를 지나쳐 현관 밖을 향하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시우는 그제야 현관 밖에 또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열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보이는 오메가 소년이었는데 뭐랄까, 우성 오메가의 이상적인 모습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 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소년은 키가 한 174 정도로 시우보다 작고 몸체도 호리호리했다. 결이 좋아 보이는 머리카락은 잘 손질되어 윤기가 흐르고 나이 덕도 있겠지만 피부는 우유처럼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긴장한 탓인지 볼에 살짝 홍조가 어려서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크고 동그란 눈은 시우를 쳐다보고 있었던 듯, 시우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들어오라는 여자의 재촉에 소년이 고개를 푹 숙이며 시우의 눈앞을 총총 지나갔다. 가볍게 풍기는 시트러스 향기가 시원하면서도 달콤했다.
“뭐하니? 마실 것 좀 내오라니까.”
여자가 멍하니 서서 눈으로 소년을 쫓고 있던 시우를 재촉했다. 시우의 시선이 소년에게서 여자에게로 옮겨 갔다. 소파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앉은 여자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시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하냐니,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아주머니, 대체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섬세하게 그려진 여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주머니?”
“본인 소개를 안 하시니 부를 수 있는 호칭이 그것밖에 없네요.”
기가 차다는 듯이 여자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이것 봐라, 하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시우를 아래위로 살폈다.
“제대로 먹이고 입히니 그나마 꼴이 좀 나아졌구나. 근데 이렇게 되바라진 성격인 줄은 또 몰랐네. 나 차 이사 고모야.”
“…네.”
대답은 했지만 시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빤히 보는 시선은 그래서요? 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여자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네, 라니?”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이 안 되는데요. 차무경 씨 고모님이 여기엔 대체 왜 오신 거죠?”
“너… 진짜 웃기는 애구나?”
여자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시우는 여전히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쳐다볼 뿐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입장에서는 아주머니가 더 웃기는데요. 대체 고모 되시는 분이 조카 정부가 사는 집엔 뭐 하러 오신 겁니까? 그러고 보니 제가 뭐 하러 오셨냐고 지금 두세 번은 물어본 것 같은데 한 번도 대답을 안 하셨네요.”
“내가 조카 집에 오는데 너 따위의 허락을 받아야 되니?”
“집주인도 세를 놓으면 그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법입니다. 저도 계약상으로 이 집에 거주할 권리를 얻었어요. 이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차무경 씨하고 저뿐이에요. 당연히 오시려면 허락을 받으셔야죠. 최소한 차무경 씨 허락은 받으셨어요?”
“조카 만나는데 허락이 왜 필요해?”
“차무경 씨를 만나시려거든 차무경 씨 자택이나 회사를 가셔야지 여길 왜 오십니까? 당연히 출근하고 없을 시간인데.”
여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시우를 노려보더니 한참 뒤에야 다시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고는 팩 고개를 돌렸다.
“상무님이라고 불러. 싸가지 없이.”
“…그 호칭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뭐?”
“뭐 하는 상무님이신지는 몰라도 제가 아주머니 밑에서 월급 받고 일하는 직원도 아닌데 왜 상무님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제가 속한 조직의 상무님이어야 상무님이라고 부르죠.”
“저, 저, 저….”
“아주머니랑 저랑은 생판 남인데, 아주머니가 저보다 연배가 높은 여자분이시니 아주머니라는 호칭이 가장 적절하지 않습니까? 낮잡아 부르는 말도 아닌데 왜 화를 내시죠? 아주머니랑 저랑 연결점은 차무경 씨 밖에 없는데 설마 조카의 계약 정부한테 고모님 소릴 듣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녜요.”
“너, 아주 입 달렸다고 말을 함부로….”
“전 꼬박꼬박 존대하고 호칭 똑바로 했으니 딱히 말 함부로 한 건 아닙니다. 초면에 반말 찍찍 하시면서 너, 너 하신 건 아주머니 아니세요? 제가 연배는 낮아도 아주 어린아이도 아닌데 그건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뭐야! 이 몸이나 파는 천한 것이 어디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주머니가 그런 말을 하시는 건 아니죠. 몸을 사는 사람이 있으니 파는 사람도 있는 거잖아요. 계약 정부 들이라고 한 게 그쪽 어르신들이라면서요. 사람 사고파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건 천한 게 아닌가요? 아주머니나 저나 피차일반인데 뭘 그렇게 고고한 척을 하세요?”
“너, 너 아주….”
“아이고, 사모님. 여길 어떻게!!”
여자가 벌떡 일어서서 삿대질을 하는데 갑자기 사이에 끼어든 건 한 여사였다. 대치 중인 두 사람은 물론 한마디도 지지 않는 시우를 입 딱 벌리고 보던 소년도 한 여사가 왔다는 것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한 여사는 장바구니를 현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여자의 팔을 붙잡아 진정하시라고 달래며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시우에게 들어가라고 급히 눈짓을 보냈다. 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더 이상 말싸움을 해 봐야 좋을 것도 없어서 잠자코 제 화실을 찾아 들어갔다.
문을 닫고 화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시우는 긴 한숨을 쉬었다. 저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폈더니 손이 덜덜 떨렸다. 여자에게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거리를 했지만, 그 여자가 했던 말들은 온통 신경을 긁었다.
게다가 차무경의 고모라니. 나중에 차무경이 알게 되면 뭐라고 할까. 집안 어른한테 버릇없이 굴었다고 기분 나빠할까. 저를 막돼먹은 애로 보는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서 속이 후련한 한편, 마음 한구석에는 적당히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됐을 걸, 하는 후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 에스테틱에서 그 여자와 마주쳤을 때만 해도 대거리를 좀 한다고 이런 찜찜한 기분이 생기리라 여기지는 않았는데, 왜 이제는 무경의 반응이 은근히 신경 쓰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한 여사겠지. 한 여사한테 먼저 한 소리 들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어른한테 그러는 거 아니라고. 게다가 슈퍼갑의 고모님이신데 말이다.
“네, 들어오세요.”
시우는 한숨 쉬며 대답을 했다. 문이 열리자 향긋한 시트러스 향기가 사람보다 먼저 스며 들어왔다.
“저… 잠깐 얘기 좀 해도 돼요?”
동그란 눈에, 뺨에는 홍조를 띤 오메가 소년이 문틈으로 시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안 된다고 하면 그냥 갈 건가.
소년이 누구인지는 짐작이 갔다. 나이대도 그렇고 최소한 우성임이 분명한 외양에 달콤하고 진한 향기까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집에서 차무경의 약혼자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니와 만난다고 해서 이런 기분이 들 거란 예상 또한 하지 못했다. 묘하게 가슴 한쪽이 눌리는 기분. 울컥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어디선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 대체 내가 왜. 이 아이가 차무경의 약혼자든 애인이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들어와요.”
숨을 한껏 들이켰다가 울렁거리는 감정과 함께 뱉어 내며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다. 마음속 미묘한 감정의 정체는 몰라도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저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열아홉 살의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느껴지는 얼굴을 보니 제 감정에 치우쳐 막 대하는 것도 어른스럽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는 상황은 웃기지만 적어도 저 아이는 그 고모라는 사람보다는 예의를 갖추고 있으니, 자신 또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대해야 할 것 같았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들어와 조용히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시우의 눈짓에 따라 비어 있는 다른 의자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친 후 조금 멍한 표정으로 시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
“…….”
그리고 말을 안 한다. 그저 계속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탄 같기도 한 표정인데 도무지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시우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저… 할 말이란 게?”
“아, 네.”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다시 얼굴을 붉혔다.
“저, 저는 은유원이라고… 저어, 그러니까 차 이사님의… 저….”
“알아요. 약혼자분이시죠?”
“어, 네. 어떻게 아셨죠?”
소년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시우는 조금 어이가 없어서 잠깐 쳐다보다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열아홉이나 먹어서 왜 이렇게 맹탕이지. 어째 좀… 귀엽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솟아나던 복잡 미묘한 적대감과 경계심이 조금씩 옅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소년은 시우에 대해 어떤 악의나 나쁜 의도도 없어 보였다. 그냥 별생각 없는 보통 애구나,라는 생각이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그야 열아홉 살짜리 약혼자가 있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고… 저 고모님이 제가 있는 집에 달리 다른 사람을, 그것도 미성년자를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 같고?”
“아, 그, 그렇군요.”
오오, 하고 감탄하듯이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도 아닌 말에 어린아이처럼 반응하는 소년을 보고 시우는 그냥 마지막 경계를 풀며 웃고 말았다.
“자, 그래서 할 얘기란 게 뭡니까?”
“아, 네, 저기… 그… 차 이사님 말인데요… 형은 그분 안 무서워요?”
뜬금없이 들어온 형이란 호칭에 흠칫하고, 그 다음엔 질문 내용에 당황했다.
“무서워요? 차무경 씨가?”
소년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눈동자를 보면서 시우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차무경이 무섭다니. 그야 좀 복잡하다고 해야 하나, 알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다. 다정하게 챙겨 줄 때는 그지없이 어른스러운데 가끔씩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는다고 삐치거나 심술을 부릴 때는 또 애 같기도 하고… 가끔 잠자리에서 거칠게 굴 때는 있지만 그걸 가지고 폭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아파서 짜증은 났을지언정 무섭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대체적으로 다정다감한 성격이라고 생각하는데… 장난기도 좀 있고….”
“다정다감요? 차 이사님이? 장난기가 있다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소리라도 들은 것마냥 유원이 입을 쩍 벌렸다.
“저 차 이사님 꽤 오래 알고 지냈는데… 물론 실제로 만난 건 그렇게 많지 않지만요. 그래도 제대로 웃는 거 한 번도 못 봤어요. 진짜로 웃는 거 말이에요. 말씀도 별로 안 하시고 가끔씩 눈이 마주쳐도 눈빛이 너무 차가워서… 밑의 직원들도 엄청 어려워한다고 들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건 시우 쪽이었다. 학교 때 기억을 더듬어 봐도 무경이 크게 웃는 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둡거나 차가운 이미지는 아니었다. 적당히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웃기도 한 거 같은데. 그래, 제 오메가 친구가 무경과 부딪혔을 때도 친절하게 웃으면서 일으켜 줬다고 했었다. 제 친구는 그 모습에 반했다고 했던 거였고.
“음… 유원 씨가… 아직 어려서 대하기가 불편했던 거 아닐까요? 나이 차가 좀 있으니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른다든가… 그런 건 유원 씨가 나이를 먹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나이가 들수록 느껴지는 차이가 점점 줄어든다고들 하니까요.”
제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뭔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여하튼 달리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서 시우는 이렇게 유원을 위로했다. 유원은 뭐랄까, 여전히 감탄을 섞어서 뭔가 대단한 사람을 우러러 보듯이 시우를 쳐다보았다.
“형은 좀 대단한 거 같아요. 저는 솔직히 그 무서운 차 이사님이랑 같이 산다고 해서 좀… 힘들겠다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여기 왔거든요. 아까 고모님도….”
유원은 문 쪽을 흘깃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사실 그분도 무서워요. 근데 형은 막 그분 앞에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와… 진짜 멋있었어요. 저 진짜 부러워서… 제가 성격이 소심해서 집에서도 할 말을 잘 못하거든요. 부모님도 엄하시고 형이나 누나랑도 나이 차가 많이 나서… 애 취급하면서 제 말은 들어주지도 않는데, 솔직히 어른 되자마자 결혼하는 것도 전 진짜 싫어요. 막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놀고 싶은 것도 많은데….”
생각지도 못한 유원의 태도에 시우는 당황해서 말을 조금 더듬었다.
“어… 음… 결혼하고 나서도…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결혼한 생활이 지금의 자신과 같다면 딱히 못하게 하는 것도 없을 것 같은데. 돈도 넘칠 테고 집안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시간도 많을 텐데.
하지만 유원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요. 사실 저는 성인 되면 여행도 막 다니고 유학도 가고 싶은데… 아이 둘 정도 낳기 전까지는 그런 거 안 된대요. 얌전하게 차 이사님 옆에만 붙어 있으라고 하는데… 저는 솔직히 차 이사님 너무 무섭고… 아직도 차 이사님이랑 둘이서만 밥 먹으면 체할 정도거든요.”
유원의 얘기를 들으며 시우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이건 어느 시대 얘기지? 애 둘을 낳아야 유학을 갈 수 있어? 선녀와 나무꾼이야? 상류 계층에서 오메가의 지위가 이런 건가? 열성은 섹파고 우성은 씨받이야? 이 두 집안이 미친 거야, 상류 계층이 다 그런 거야?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힌 사이 유원을 찾는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 왔다. 큰 소리로 나가겠다고 대답한 유원이 급하게 시우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너무 다급하게 물어서 엉겁결에 답하고는 금방 내가 왜 가르쳐 줬지, 하고 후회했지만 유원은 이미 제 번호가 입력된 폰을 들고 방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
“고모님이 다녀갔다고요?”
“네. 사람을 붙여서 주소를 알아낸 모양입니다. 이사님이 당초 예정보다 너무 자주 들르신다는 보고도 들어간 것 같고요.”
“흠.”
무경은 재킷을 벗어 진명에게 건네고 조금 지친 듯 의자에 몸을 기대앉아 미간을 문질렀다.
“뭐 한 번쯤은 들쑤시러 오지 않을까 싶긴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그래서 시우 반응은요?”
“한 여사님이 대화 내용 녹음한 걸 보냈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켜 보라고 손짓을 하자, 진명은 한 여사가 보낸 녹음 파일을 작동시켰다. 거기에는 한 여사가 말리러 들어가기 직전까지 현관 밖에 숨어서 녹음한 내용이 전부 들어 있었다. 시우가 성격 까칠한 고모를 아주머니라 부르며 너나 나나 피차일반이라고 하는 것까지 다 듣고 나자 무경은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역시, 한마디도 안 지네. 그러게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
하지만 진명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유원 군이 함께였다고 하니 기분이 그리 좋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의도가 빤하잖습니까.”
“그렇겠죠. 내가 자주 가니 정부가 분수도 모르고 기어오를까 봐 미리 밟아 놓으려는 거였겠지. 고모님 전문 분야긴 한데… 뭐, 오늘은 제대로 안 먹힌 거 같지만.”
무경이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었다.
“…오늘도 시우 군 빌라에 가실 겁니까?”
“아니. 안 갑니다. 오늘 같은 날은 혼자 내버려 둬야죠. 생각도 좀 하게.”
“위로…해 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힐끗 진명을 쳐다보는 무경의 표정은 냉랭했다.
“뭐라고 위로를 합니까? 너 있는데 약혼자 둬서 미안하다고 해요? 아니면 사랑하는 건 너니까 마음 상하지 말라고 할까요. 시우가 딱히 날 어떻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어요.”
“…….”
틀린 말은 아니어서 진명이 입을 다문 사이, 무경은 몸을 기울여 책상 한쪽에 쌓인 서류철에 손을 뻗었다.
“이참에 그동안 밀린 일이나 하죠. 오는 주말에는 빌라에 가서 월요일 늦게 출근할 겁니다. 그때 일정 조정이나 해 주세요.”
할 말 다 했다는 듯 무경은 진명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이미 그의 시선은 펼쳐 놓은 서류에 못 박혀 있었다.
진명은 잠깐 뭐라고 할 듯하다가 그냥 묵례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는 잠시 한숨을 쉬고 자신이 금방 닫은 문을 바라보았다.
상사는 연시우의 대찬 성격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고… 아마도 시우를 상당히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거기에는 진명도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오히려… 나중에 상황을 다 알게 되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도 있지 않을까.
뭐, 알아서 하겠지만. 진명은 다시 한숨을 쉬며 머리를 털어 냈다. 집요한 사람인데다 몇 수 앞을 보고 덫을 파 두는 타입이니 자신이 걱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을 터였다. 단지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꼴은 나지 않아야 할 텐데….
***
한 여사는 시우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그녀에게 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 보이고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사실은 누군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반, 빨리 혼자 남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하지만 텅 빈 넓은 집에 결국 혼자 남게 되자 역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오늘은 무경이 오지 않는다고 진명이 문자를 보내 왔었다. 안에는 약속도 없이 갑자기 고모님이 방문한 일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도 간략하게 남겨져 있었다. 새삼스럽게 문자를 보낸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무경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가 오지 않는다는 문자를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런 날 그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계약 정부, 라는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확연히 와 닿는 날도 없었다.
그의 약혼자는 생각보다 더 어리고 순진해서 오히려 시우에게 현실감을 일깨웠다. 차라리 윤성 같은 타입이었다면 별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아니 외려 너 같은 인간한테 기가 눌릴까 보냐 하고 오기를 부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성 오메가의 분위기를 풍기며, 귀하게 자라 순진하기 짝이 없는 그의 어린 약혼자를 보고 나니 퍼뜩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단지 어리디 어린 소년 같은 분위기지만 한두 살만 더 먹어 극우성으로 발현하면 지금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될 것이다. 훨씬 고혹적이고 향기롭게 피어나겠지. 시우는 언젠가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는, 그야말로 한 떨기 꽃 같은 자태였던 극우성 오메가를 떠올리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무경은 제가 오늘 겪은 일을 전해 들었을 텐데도 언제나처럼 문자 한 통 전화 한 통이 없었다. 사실은 이게 당연한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함께 있을 때는 거리낌 없이 저를 애인처럼 대하는 무경의 태도에, 시우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제 주제를 잊고 있었다. 자신과 무경은 그저 애인 놀이를 하는 계약 관계일 뿐이라는 걸, 자신이 진짜로 신경을 쓰고 마음을 써 가며 달랠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