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 2 (2/24)

“아… 아닙니다.”

튀어 나오려는 이름을 목 안쪽으로 다시 밀어 삼키며 시우는 간신히 표정을 관리했다. 자신은 불빛을 등지고 있었으니 얼굴이 그리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무경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시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놀란 거 같은데.”

“그, 그야… 자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사람이 있으니까… 요.”

“음… 그건 그렇네. 하지만 내 이름을 말하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 차… 뭐요?”

“차… 이사님이라고… 서진명… 실장님이.”

“아, 그거.”

무경은 김빠진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난 또. 어디선가 날 보고 첫눈에 반했었다든가, 뭐 그런 운명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라도 있는 줄 알았지. 재미없네.”

축 처진 모양새로 조금 투덜거리듯이 말하는 그를 보며 시우는 이대로 넘어가는 건가 싶어 안도하는 한편 조금 어이가 없었다. 첫눈에 반하다니, 로맨틱한 얘기라도 되는 듯이 말하지만 첫눈에 반한 상대를 몸 파는 입장에서 만나는 것처럼 비참한 상황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 지금의 제 처지처럼.

무경의 얘기가 완전히 빗나간 건 아니었다. 첫눈에 반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를 본 어린 날의 연시우는 차무경에게 조금쯤은 가슴이 뛰었으니까. 아니, 조금 정도가 아닌가.

***

그때 시우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시우가 다니던 학교는 중고교가 한 재단으로 붙어 있는 시스템이었다. 수업 받는 건물은 따로 있었지만 특별 활동이나 전체 행사는 함께 치렀다. 입학, 졸업 같은 큰 행사는 물론이고 전체 조회 따위도 가끔 강당에서 다 함께 했다.

처음 차무경을 발견한 건 시우의 오메가 친구들이었다. 진흙 속의 진주를 발굴했다며 새로운 왕자님 등극이라고 호들갑을 떨던 친구들이 어느 날 곁을 지나가는 고3 선배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바로 ‘진주’라고 속삭이며 시우의 팔을 흔들었다. 시우는 대여섯은 되는 무리들 중에서 친구들이 말하는 ‘진주’가 누군지 바로 짚어 냈다.

그가 당시 유별나게 눈에 띄는 스타일이었던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극우성 알파의 형질 자체를 드러내지 않았었다. 아직 완전 발현을 못한 상태였을 수도 있고, 극우성은 페로몬 조절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자유로운 만큼 일부러 형질을 풀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외양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은 듯, 약간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듯이 하고 다녔고 교복도 어딘가를 줄이거나 늘이지 않은 딱 표준 스타일 그대로였다. 성격도 조용해 보였고 학생회 활동이든 클럽 활동이든 무엇 하나 뚜렷하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는 일이 없었다.

“진짜 잘생겼다니까. 가까이서 봐야 돼. 나 진짜 코앞에서 눈 마주치고 숨이 멎는 줄 알았어. 냄새도 진짜 좋아. 우와… 때도 아닌데 힛싸 터질 뻔 했어, 진짜야!!”

가장 먼저 무경을 발견하고 찜했던 친구가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시우에게 열변을 토했고 옆에 있던 친구들도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쳤다.

“게다가 알아보니까 만능이야. 나서지 않아서 그렇지 은근히 다 잘해. 공부도 운동도 잘 하고 피아노도 친다더라.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고3 선배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하더라고. 성격도 차분하고 어른스럽고 딱 내 스타일이라니까!”

그때부터였다. 저도 모르게 그가 제 시야에 잡히기 시작한 것이. 아무래도 일단 의식을 하고 나니 시선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시우는 그때도 방과 후에 미술부에 남아 가장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새삼 깨달은 것은 미술부에서 내다보이는 학교 전경이 차무경의 주요 출몰 지역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순간 둘러보면 그가 바로 아래 내다보이는 운동장에서 제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있거나 맞은편 도서관 건물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처음에는 시야에 잡히는 그가 신기해서 가끔씩 쳐다보는 정도였는데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커튼과 캔버스를 방패막이로 해서 몰래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그리고 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스케치북 한가득 그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방학이 되자 전처럼 자주 볼 수가 없어서 마음이 안타까웠다. 일부러 학교 미술실에 나가 하염없이 앉아 있기도 했지만 뜨거운 창밖 여름에 무경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조금씩 말라 가던 마음은 개학을 하면서 다시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지만, 들려오는 건 그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소식뿐이었다. 시우의 친구들도 난리가 났다. 고등학교 교사까지 달려갔다 온 친구 말에 의하면 자퇴했다는 사실 외에는 같이 다니던 친구들도 거취를 모른다고 했다.

무슨 사정일까. 고3이라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았었는데. 조용한 편이었어도 딱히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기에 자퇴의 이유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심각한 가정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건강상의 문제라거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하는 한편 허탈감도 컸다.

사실 인연이 생길 가능성은 어차피 없었다. 그냥 동경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중3짜리에게는 한없이 어른으로 보이는 고3 선배에, 친구가 먼저 마음에 둔 사람이었다. 게다가 저는 극열성 오메가이고 그는 우성 알파. 어디를 봐도 이어질 만한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안타까운 마음인데,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나 버리기까지 하다니. 너무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좀 울기도 했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 이후의 삶이 하도 파란만장하다 보니 그때의 추억은 제 속에서 빛이 바랬다. 아니, 엄마의 병이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한 시점부터는 제게 그런 기억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아왔다. 오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의 얼굴을 불쑥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지금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그 학교에 차무경이 다녔다는 사실 자체도 좀 이해가 안 갔다. 커리큘럼이나 교사 수준이 좋은 걸로 유명한 학교긴 했지만 그거야 일반인 기준에서 그렇다는 거지 재벌이나 유력 인사의 자제가 다닐 수준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주로 학비가 엄청나게 비싼 사립 학교나 자기네 재단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학교로 몰려갔기 때문에 일반인들과 어울려 학교를 다니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그는 일반 학교를 다녔고 또 그러다 중간에 갑자기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한때는 밤잠도 설칠 만큼 궁금한 문제였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궁금한 것도 아니고, 사실 이제 와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제 뒷조사를 한다면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제가 먼저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몸 파는 신세로 만나서 선배님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데다 제 비참함을 뼛속 깊이 새기는 일에 불과할 테니까.

***

“연시우 씨.”

“…네?”

어느샌가 무경이 또다시 시우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멍해졌네요. 무슨 생각합니까?”

“어… 아닙니다, 아무것도.”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다. 아무리 잊혀진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고 해도,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맞닥뜨려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저 얼굴을 마주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조금씩 맥박이 빨라지는 기분이었다.

“정식으로 인사를 하죠. 차무경입니다.”

떨어뜨린 시선 아래로 불쑥 손이 디밀어졌다. 크고 잘 손질된 정갈한 남자의 손. 쭈뼛거리며 시우도 제 손을 내밀었다. 오늘 에스테틱을 다녀온 게 새삼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갑자기 서진명이 고맙기까지 했다. 오늘 아침의 그 거칠고 지저분한 손 그대로였다면 이 순간 꽤 창피하고 부끄러웠을 것이다. 무경의 손이 성큼 다가와 머뭇거리는 시우의 손을 잡고 꽉 쥐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시우 씨 사진 보고 너무 마음에 들었는데, 단칼에 거절했다고 해서 엄청 서운했습니다. 늦게라도 마음을 바꿔 주셨다니 너무 기쁘네요. 잘 부탁합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내놓은 말에 시우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살짝 일그러졌다. 반칙이다, 이 사람. 그런 건 계약상의 정부한테 할 말이 아니잖아. 정상적으로 만나서 진심으로 마음에 든 사람한테나 할 대사를 왜 나한테 치고 있는 거야.

***

식탁에 앉아 차무경이 음식을 데우는 걸 멀거니 바라보면서 시우는 아침과는 다른 의미로 망연자실했다. 어째서 제가 멀뚱히 앉아 있고 저 사람이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건가.

그는 돈을 주고 1년 동안 제 몸을 산 계약서상의 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평소에는 부엌일에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사람일 것이다. 시우는 소위 ‘그분’이 최소한 저에게만큼은 오만불손하고 재수 없게 굴 것이라고 각오했었다. 사람을 돈으로 사 버릇하는 사람들은 보통 제가 던진 돈 몇 푼에 엎어지듯 무릎 꿇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는 법이다. 어차피 저는 그의 노리개가 되겠노라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사람이었다. 무시를 당하고 굴욕을 겪어도 다 자초한 일이니 딱히 억울해하지는 말자고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그런데 그는 오늘 밤, 마치 마음에 드는 오메가의 환심을 사려는 평범한 알파처럼 굴고 있었다. 연애 초기, 조금 조심스러우면서도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애를 쓰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둘은 연애하려고 만난 사이가 아니었다. 그는 저를 샀고 저는 그에게 몸을 팔기로 한 관계였다. 그런 와중에 지금의 이 묘한 분위기는 대체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

무경이 출출한데 뭘 좀 먹을까요, 라고 말을 꺼내길래 시우는 당연히 저더러 식사 준비를 하라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시우 손목을 잡고 부엌이 아닌 욕실로 데려가더니, 자신이 적당히 먹을 걸 차려 놓을 테니 천천히 씻고 나오라고 하는 거다. 뭔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씻고, 탈의실 서랍장에 있는 속옷 외에는 갈아입을 옷이 없어 샤워 가운만 입고 밖으로 나왔다.

드레스 룸으로 가서 옷을 찾아 입을 생각이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무경이 그대로 오라며 손짓을 했다. 둘 다 샤워 가운 차림인 게 나름 커플룩이라 좋지 않냐고 하면서. 조금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피식 웃으며 재차 테이블 앞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금방 돼요.”

잠시 후 식탁에 올라온 건 해물 치즈 그라탱과 프렌치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였다. 둘 다 시우가 좋아하는 거라 맛있어 보이긴 했지만 메뉴 선택이 조금 의아했다. 시우는 무경의 군살 없어 보이는 단단한 몸체를 흘깃 보았다. 은근히 저녁 식사 칼로리를 신경 쓸 것 같은 몸인데…. 게다가 지금은 끼니때를 훨씬 넘긴 시각이다. 저녁 식사보다는 야식에 가까울 정도인데 괜찮은 걸까.

“어, 혹시 해물 싫어해요? 치즈를 못 먹는다거나? 미리 물어볼 걸 그랬나?”

쳐다보고만 있는 시우를 보고 무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아니에요. 다 좋아합니다. 맛있어 보이네요. 저… 이사님도 드세요.”

“이사님 말고 무경 씨.”

“네?”

“회사 부하 직원도 아닌데 내가 왜 시우 씨 이사님이에요. 우리는 사적인 관계니까 그냥 이름 불러야지. 형이라고 해도 좋고.”

맞은편에 앉으며 그가 조금 웃었다. 조금 날카로운 편인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시우는 다시 그라탱으로 시선을 떨궜다.

“드세요… 무경 씨.”

“음… 형이라고는 안 해 주는구나. 하긴, 무경 씨 쪽이 좀 더 애인 사이 같긴 하지.”

“흡.”

그라탱을 포크로 푹 찍어 올려 입에 넣다가 그대로 뱉을 뻔했다. 애인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 사람이!

“어, 왜 그래요. 뜨거워?”

무경이 켁켁거리는 시우에게 냅킨과 물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식탁을 돌아와 시우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조심해야죠. 시우 씨 어른스럽게 봤는데 이럴 땐 또 애 같네.”

냅킨에 입을 닦고 물을 두어 모금 마시자 좀 진정이 됐다. 무경은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그의 손이 닿은 등은 여전히 뜨거웠다. 얼굴이 불타오르는 게 온전히 사레들린 탓만은 아닌 기분이다.

하기야 사람에 따라 계약 기간만큼은 진짜 애인처럼 지내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 그런 거야 다 갑의 취향이겠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왕이면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면서 지내는 것보다 가짜 애정이라도 듬뿍 받으며 지내는 게 백배는 나을 것이다. 거기에 취해서 혼자 멋대로 착각하고 홀라당 넘어가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몸만 줘야 할 걸 마음까지 송두리째 내 주고 나면, 계약이 끝난 후에 상처받는 건 온전히 혼자만의 몫이 될 테니까.

“맛이 어때요?”

조심스럽게 다시 먹기 시작한 시우에게 무경이 다시 말을 걸었다.

“맛있어요.”

짧게 대답했다가 너무 성의가 없었나 싶어 다시 덧붙였다.

“재료도 다 신선하고 밥도 부드럽고. 간도 입맛에 딱 맞아요.”

“다행이네.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많이 먹어요.”

“네.”

대답하면서 힐끗 무경을 쳐다보았다. 포크를 들고 있긴 한데, 샐러드만 좀 뒤적거릴 뿐 어쩐지 계속 제가 먹는 걸 쳐다보고만 있는 것 같다.

“안 드세요?”

“먹어야죠. 그나저나 내일 오후에 한 여사님 오면 먹고 싶은 거 다 만들어 달라고 해요. 시우 씨 살이 너무 빠져서,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좀 많이 먹어야겠어.”

포크로 치즈를 말면서 그가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의미지. 시우는 생각했다. 제 사진을 보고 마음에 들어 했다고 했는데, 정작 실물을 보니 너무 살이 빠져서 실망했다는 얘긴가.

“…죄송합니다.”

“음? 뭐가요?”

“살… 아니, 관리를 잘 못해서.”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죠. 일부러 살 뺀 건 아닐 거 아녜요.”

무경이 조금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살이 찌든 빠지든 건강하면 상관없는데, 시우 씨 지금은 좀 아파 보이거든요. 그래서 마음이 안 좋아요, 내가. 마음 편하게 하고 잘 먹으면서 지내요. 금방 빠진 살은 또 금방 붙으니까.”

“…네.”

“그런데….”

한참 동안 묵묵히 먹고만 있다가 무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집은 다 둘러 봤어요?”

“어… 아니요, 아직.”

“음… 그러면 서재랑, 저 안쪽 구석방은 아직 못 본 건가?”

시우는 무경의 시선을 따라 복도 제일 안쪽에 별실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들어가 본 적 없는 방이다. 하기야 들여다 본 방이래야 침실과 드레스 룸뿐이던가.

“네. 그 전에 잠이 들어 버려서.”

“그렇구나… 난 또.”

“네?”

난 또, 라니. 뭐가.

무경이 다시 눈을 살짝 접으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나름대로 준비한 게 있는데, 시우 씨가 한마디 안 해 주려나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아무 말이 없길래 별로였나 싶어서 조금 낙심하던 중.”

“?”

“다 먹었으면 일어날래요?”

“아, 네.”

빈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식탁 위를 함께 대충 치운 다음 무경에게 끌려 침실 옆의 방으로 들어갔다. 묵직한 분위기의 방은 서재였다. 노트북과 모니터가 놓인 커다란 책상이 둘, 편안한 느낌의 크고 긴 소파에 빈 백(Bean bag)도 몇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벽을 채운 넓은 책장에는 이미 반 정도 책이 차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자 책 종류가 뚜렷하게 보였다. 미술과 관련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탐이 났지만 비싸서 살 엄두를 못 냈던 시대별, 화가별 작품 전집부터, 이미 절판되어 나오지 않는 전문 서적에다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화집, 특정 화가나 작품을 소재로 한 소설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표정이 별로 없다는 소리를 듣는 시우지만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참 정신없이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아차 싶어 뒤를 돌아보자 무경이 책상에 가볍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싱글거리며 시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요?”

“네, 네.”

무경이 책상에서 몸을 떼고 걸어와 시우의 옆에 섰다.

“미술 한다는 거 외에 다른 취향을 잘 몰라서. 나머지 칸은 직접 채워요. 침실 사이드 테이블 서랍에 카드 있으니까, 인터넷으로 주문하든 직접 서점을 가든. 하지만 책은 내가 없을 때 보고, 내가 있을 때는 나에게만 집중할 것. 그리고 저쪽도 좀 봐 줘요. 하나는 내 책상이고 하나는 시우 씨 건데.”

무경이 창가 쪽 책상을 손짓했다.

“서 실장님이 시우 씨가 태블릿도 쓰는 것 같다고 하길래.”

얼핏 데스크탑 컴퓨터의 모니터라고 생각했었는데, 둘 중 하나는 모니터가 아니라 PC에 연결해서 쓸 수 있는 대형 태블릿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휴대용 사이즈의 최신형 태블릿이 하나 더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시우는 제 집의 테이블 위에 누워 있던, 구석에 금이 간 구식 태블릿을 떠올렸다. 중고로 구입한 그걸 대체 몇 년을 썼더라.

시우가 책상 가까이 다가가 말없이 손가락으로 기기를 어루만지고만 있자 무경이 약간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을 붙였다.

“원하는 모델이 따로 있으면 내일 다시….”

“아니에요. 이게 좋아요. 감사합니다. 전부 마음에 들어요.”

“아, 진짜요? 다행이다.”

무경이 소년처럼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시우의 손을 잡고, 자, 그럼 다음 방으로 가 볼까요, 하며 그를 서재 밖으로 이끌었다. 따뜻하게 전해 오는 손의 온기에 시우의 심장이 두근 뛰었다.

무경이 집 안 가장 깊숙이 위치한 방문을 열었다. 불이 꺼져 있어 어두웠지만 문을 열자마자 희미하게 끼치는 냄새로 시우는 금방 그 방의 용도를 알 수 있었다. 물감 냄새. 무경이 불을 켰고 시우는 숨을 들이켰다. 한 벽이 전부 창으로 이루어진 아틀리에였다.

새 캔버스들이 구석 벽에 줄을 지어 섰고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화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스케치북과 연필들, 다양한 사이즈의 붓들, 물감, 물통, 파레트… 마치 화방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딴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산 거긴 한데… 혹시 뭐 부족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왜 나한테 이렇게 잘 해 줘요?”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될 걸, 왜 이 말이 불쑥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 목소리의 끝이 조금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시우 씨?”

시우가 방 안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무경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맑았던 동공이 혼란스러움으로 흐려져 있었다.

“저는 그냥… 이 집에 돈 받고 몸 팔러 온 건데요. 이렇게 잘 해 주지 마세요. 저는 좀 바보라서요… 이러시면 착각하고 헷갈려 합니다. 그냥 제 처지에 맞게 딱 그 정도로만 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참을 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책이라든가, 화구라든가, 어차피 이 사람에게는 그저 푼돈일 것이다. 신경 썼다고 말은 하지만 어차피 아랫사람에게 적당히 사 두라 지시하고는 이 집에 오기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그가 이런 걸 시킨 건 단지 새로 온 정부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좀 더 성심 성의껏 봉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뻔히 그런 걸 알면서도 결국 이렇게 어리석고 부끄럽게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아직 다 떨쳐 버리지 못한 변변찮은 자존심 때문에.

아니다. 그가 차무경만 아니었다면, 누군가 이보다 더한 자상함을 보였어도 이렇게 무너지진 않았을 텐데. 결국 꼴사납게도 눈물이 주룩 떨어져서 몸을 돌려 버렸다.

“시우 씨가.”

무경이 등 뒤에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기 오기까지 마음이 안 편했을 거란 건 잘 압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우 씨가 좋아할 만한 걸 준비해서 마음을 풀어 주고 싶다고 생각한 거뿐인데 제가 생각이 짧았나 봐요.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냐고. 당신이 뭐가 미안한데. 이상하잖아, 지금 이 상황은. 시우는 거칠게 눈물을 훔치고 한껏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뱉었다.

“무경 씨가 미안할 일이 아니에요. 제가 좀… 흥분했습니다. 죄송해요. 준비해 주신 거 전부 감사해요. 저는 단지… 어… 세수 좀 하고 와도 될까요?”

무경은 대답 대신 몸을 조금 비켰고 시우는 스치듯 옆을 빠져나가 침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시우의 모습이 사라지자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던 무경의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그는 침실 쪽으로 다가가 욕실 쪽을 살펴보고 침실 문을 확실하게 닫은 다음 거실 테이블에 놓인 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비밀번호를 풀고 단축 번호를 하나 누른 후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 네, 이사님.

몇 번 신호가 가지 않아 진명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내일 오전 스케줄 좀 미뤄요. 점심시간 이후로. 2시쯤 출발할 테니까 그때 맞춰 차 보내시고.”

시우를 대할 때와는 다른 건조한 목소리로 무경은 간결하게 지시를 내렸다.

-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 어떻습니까, 시우 군 상태는….

“나쁘지 않아요. 한정윤이 생각보다 일을 잘 했어. 취향 파악 제대로 했던데. 좋아하는 음식도 그렇고 책이랑 화실도 그렇고. 실수로라도 정윤이 한 여사 아들이란 얘기가 새지 않도록 입단속 한 번 더 시키세요.”

-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무경은 침실 쪽을 한 번 더 흘깃 보았다. 시우가 나올 듯한 기척은 없었다. 입을 가리듯이 턱을 괴고 서서 무경은 생각에 잠긴 듯 그 모습 그대로 한참을 서 있기만 했다.

***

시우가 울컥거리는 감정을 좀 가라앉혔을 때는 욕실에 들어오고서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조심스레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무경이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침실 조명이 낮게 맞춰져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직 눈도 코도 빨개서, 감정적으로 심하게 흔들린 흔적을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낼 용기는 없었다.

“이리 올래요?”

무경이 이불을 걷어 제 옆에 자리를 만들었다. 싫다고 할 입장이 아니어서 시우는 머뭇거리며 다가가 침대 위에 제 몸을 올렸다.

“?!”

대충 베개를 받쳐 헤드 프레임에 기대앉으려고 했던 건데 무경이 시우의 허리를 당겨 안아 똑바로 눕혔다. 자기 오른팔로 시우의 머리를 받치고 위에서 비스듬히 몸을 굽혀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받은 시우의 눈이 커다랗게 열렸다.

“눈이 빨간데, 안에서 울었어요?”

무경이 엄지손가락으로 시우의 눈 밑을 훑었다. 당황스럽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시우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시선을 깔았다. 얼굴을 돌리고 싶었지만 무경의 크고 건조한 손이 이미 뺨을 감싸 쥐고 있어서 돌릴 수가 없었다.

“나는, 아까도 말했지만 시우 씨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고 마음 조이면서 오래 기다렸어요. 결국 와 주신다기에 너무 기뻐서… 그래서 최대한 환심을 사고 싶었던 것뿐인데, 외려 마음을 상하게 했네요.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왜 당신이 그런 말을 하냐고.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에요. 무경 씨가 잘못한 건 없어요. 너무 잘해 주시니까 제가 좀, 감정적이 된 거뿐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무경의 손이 시우의 뺨을, 귀를, 턱선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내리깐 시우의 속눈썹이 조금 떨렸다. 무경이 손가락을 내어 그 속눈썹도 살짝 훑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시우의 달아오른 눈꼬리에, 발간 코끝에, 부은 입술 언저리에 제 입술을 대고 살짝 눌렀다. 위로하는 듯 조심스런 움직임에, 시우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잠자코 그의 입맞춤을 받고만 있었다.

무경은 마지막으로 시우의 입술 위에 자기 입술을 대고 한참 동안 누르고만 있다가 아쉬운 듯 떼어내고는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내가 이러는 것도 사실은 싫겠죠? 시우 씨한테는 그저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에 불과한데.”

아니, 낯선 사람이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몸을 팔기로 마음먹은 창부가 첫 손님으로 받은 상대가 아는 사람이라니, 그것도 사춘기 시절에 꽤나 마음 졸이며 두근거리던 상대라니, 이보다 최악의 상황이 어디 있을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 편이 백 번 천 번 나았다.

시우에게 그나마 한 가지 구원이라면 차무경은 저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차무경에게 있어 시우가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괜찮았다. 끝까지 자신이 차무경을 안다는 사실만 밝히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시우는 결심한 듯 숨을 삼켰다.

“괜찮습니다. 저… 불만 좀 꺼 주시면….”

“음… 얼굴 보고 싶은데… 안 돼요?”

“…….”

제가 거절을 말할 입장이 아님을 알면서 저렇게 묻는 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안 된다고 하면 제 말을 들어주기라도 할 셈인가.

“중간선에서 타협하죠.”

시우가 대답을 않자 무경은 손을 뻗어 스탠드의 조도를 최대한 낮췄다. 일반 나이트 스탠드보다도 더 어둑하고 부드러운 불빛이 내려앉았다. 적어도 수치심에 붉어진 표정이나 당황한 눈빛 같은 건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밝기였다.

조명을 맞추고 무경이 다시 시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시우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반쯤 어둠에 가린 얼굴인데도 심장이 뛰어서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무경의 손이 시우의 뺨을 쥐는가 싶더니 금세 약간 높은 체온의 입술이 닿았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좀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얼굴을 약간 기울여 진득하게 입술을 비비다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가득 베어 물고는 촉 소리를 내며 빨았다. 그리고는 다시 입술을 포개고 혀를 내어 시우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촉촉하고 매끈한 살덩이가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더듬다가 시우의 혀를 감아 빨아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우는 호흡이 달려서 무경을 밀어냈다. 마지못해 물러나는 무경의 얼굴을 지척에 두고 시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뱉었다. 조금 웃는 듯한 숨소리가 귓가를 덥혔다. 무경은 그러더니 그리 오래 기다려 주지도 않고 곧장 얼굴을 잡아 돌려 다시 입술을 포갰다. 몇 번 방향을 바꿔 가며 입을 맞추더니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 듯 시우의 턱을 잡아 올려 깊게 혀를 집어넣었다.

시우의 입 안을 헤집듯이 탐하는 동안 무경은 어느새 시우의 위로 올라와 있었다. 한 손은 이미 시우의 가운을 풀어 헤치고 판판한 가슴팍을 더듬는 중이었다.

“잠깐만, 잠, 잠깐만요.”

숨이 차오른 시우가 잠깐 입술이 떨어진 사이에 두 번째로 무경의 어깨를 밀어냈다. 드러난 가슴이 뿌연 어둠 속에서 하얗게 들썩거렸다. 무경의 시선이 시우의 입술에서 가슴 쪽으로 내려가는 듯싶더니 이번에는 시우가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가슴에 제 얼굴을 묻었다.

“읏….”

주변을 배회하는 기색도 없이 곧장 유두를 무는 통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좀 아픈데, 그냥 아프기만 한 건 또 아니어서 시우는 주먹을 쥐고 발가락을 움츠렸다. 새된 소리나 콧소리가 나올까 봐 시우는 이를 악물었다. 무경이 시우의 돌기를 혀로 핥고 입술에 힘을 주어 빨았다. 간간이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을 때마다 시우의 허리가 자잘한 경련을 일으키며 들썩였다.

“흐앗….”

가슴 쪽에 신경이 쏠린 틈을 타 무경의 손이 손쉽게 속옷 안으로 침투했다. 큰 손이 제 물건을 감아쥐는 감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여전히 가슴 돌기를 번갈아 빨아 대면서 성기를 쥐고 훑는 통에 시우의 몸이 생선처럼 퍼덕거렸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시우는 이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본인도 좋으니까 하는 거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무경이 저보다는 시우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 더 열중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마다 취향이란 게 있겠지만 보통은 봉사를 받으려고 정부를 들이는 거 아닌가. 물론 시우의 허벅지에 닿아 있는 무경의 중심도 여지없이 부풀어 있었기에 그가 흥분하고 있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제가 생각하고 있던 정부의 역할과 지금 상황은 어쩐지 좀 거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주위를 떠도는 페로몬의 양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저야 원래 평소 페로몬이 거의 없는데다 지금처럼 흥분했을 때나 소량이 방출될 뿐이지만 무경의 페로몬은 확실히 이상했다. 그 압도적이라는 극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우성 알파 수준도 아닐 뿐더러 열성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다. 뭐지. 아무리 조절이 자유자재라곤 하지만 섹스 중에 이렇게까지 억누를 이유가 어디에 있는 걸까.

“딴 생각을 하네. 내가 해 주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불쑥 무경이 시우의 속옷에서 손을 빼내며 말했다. 당황해서 올려다보자 무경이 대뜸 시우의 속옷을 잡아 내리더니 그대로 벗겨 바닥으로 던졌다. 이미 무경의 손에 반쯤 일어선 제 중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시우는 놀라서 손을 가져다 가렸다. 다리를 움츠리려고 했지만 무경이 이미 그 사이에 자리 잡고 앉아 강하게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있었다.

“손 치우는 게 좋을 텐데. 말 안 들으면 묶어 버릴 테니까.”

부드러운 톤으로 말을 하지만 내용은 살벌했다. 시우가 놀라서 무경의 눈을 마주 보았다. 다정하게 웃는 얼굴은 방금 전 그를 달래던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조금 다른가. 치켜 올라간 입꼬리가 조금….

생각이란 걸 길게 할 상황이 못 됐다. 무경은 아래를 가린 시우의 손을 억지로 떼고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엉덩이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입구를 살짝 매만지더니 금방 자기 물건을 갖다 대었다.

“원래는 좀 만져 준 다음에 들어가려고 했었지만… 지금 충분히 젖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힘 빼요?”

무경은 명령인지 질문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말을 하더니 갑자기 강하게 제 몸을 시우에게 밀어붙였다.

퍼억.

“윽!”

갑작스레 쳐올리는 충격에 온몸이 흔들렸다. 놀란 시우의 몸이 경직됐고 그 속에 들어온 무경도 통증을 느끼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음… 힘 빼라니까… 이렇게 조이면… 윽….”

“가, 갑자기 들어오니까… 아앗… 잠깐만… 아직 움직이면… 읏….”

무경이 시우의 위로 몸을 굽혔다. 덕분에 엉덩이가 들리고 허리가 접히면서 생각지도 못한 부위들이 덩달아 자극을 받아 시우는 눈앞이 핑핑 도는 느낌을 받았다.

“눈 들어요. 나 봐. 딴 생각 하지 말고.”

무경이 시우의 턱을 잡아들어 올렸다. 시선을 든 곳에는 다소 생경한 표정의 차무경이 있었다. 눈매는 휘어져 있었지만 눈동자는 새파랗게 날이 서 있다. 꼭 무경의 말을 따르느라 그런 게 아니라 마치 홀린 듯이 시우는 무경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지, 착하네. 앞으로도 한 가지만 명심해요. 나랑 잘 때 딴 생각은 하지 말 것. 알았어요?”

시우는 약간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사람… 말투나 표정은 차무경인데… 어쩐지 낯선 느낌이다. 뭐지, 이 위화감은?

“…….”

퍼억. 무경이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악!”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발끝이 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뭐야, 나 성감대가 이상한 곳에 있는 건가? 왜 이 자세에서….

“대답 안 하네…?”

무경이 허벅지를 쥔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알았어요! 아, 움직이지 말아요!”

숨을 헐떡이며 시우는 무경의 팔을 움켜쥐었다. 무경이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집중을 안 하니까 그렇지.”

“딴 생각, 한 거, 아니에요.”

시우가 숨을 뱉는 와중에도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쪽 생각한 거예요. 정부는 난데, 내가 이렇게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되는 건가 하고….”

“아, 그거.”

무경이 그 말에 살짝 풀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시우 씨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런 거고. 걱정 마요. 나중에는 싫다고 해도 이것저것 해 달라고 할 거니까. 그리고 한 가지 더. 앞으로 정부란 말은 사용 금지예요. 애인이란 말 있잖아. 앞으로 호칭은 무경, 우리 사이 지칭은 애인, 알았어요?”

“…….”

“또 정부라는 말을 쓰면,”

무경은 조금 뒤로 빠져나간 시우의 몸을 다시 잡아 조금 과격하게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땐 아예 사흘 동안 침대에서 못 벗어나게 만들어 줄 거니까.”

***

잠은 깼는데, 몸이 나른해서 움직이기 싫었다. 암막 커튼 틈새로 살짝 밝은 빛이 새어 들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꾸물거리기에 딱 적당한 어둠이었다.

“으음….”

몸에 감겨드는 침구의 감촉이 부드러워서 시우는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베개에 머리를 좀 더 깊이 파묻었다. 기분 좋게 수마에 굴복하면서 좀 더 자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잔상들이 있었다.

차무경. 그리고 섹스.

갑자기 얼음물 세례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우는 이불을 내던지듯 걷어차며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으윽….”

다 기억한 주제에 제 몸의 상태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갑작스런 움직임에 허리가 비명을 질러서 시우는 일어나다 말고 다시 이불 위로 몸을 웅크렸다. 아, 그러고 보니 허리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의 관절이란 관절은 다 아픈 것 같았고 근육도 여기저기 당겼다. 묵직하게 전해지는 아래쪽 통증도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어제 섹스를 한 거야, 레슬링을 한 거야.”

웅크린 채 허리의 통증이 가시길 기다리며 시우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두 번 정도 하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던 것 같은데 설마 그러고 나서 또 한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렇게 뻔뻔하게 밝히는 인간으로는 안 보였는걸.

“…….”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섹스를 할 동안은 그전과 분위기가 좀 달랐던 것도 같은데. 사람들의 성적 취향이란 게 은근히 겉보기와 다른 경우가 많다고 하니까 혹시 무경도 그런 걸지도 모른다. 왜 낮에는 점잖던 사람이 잠자리에선 입걸레가 된다든가 뭐 그런 얘기도 있잖은가.

“…….”

뭐, 두고 보면 알겠지. 시우는 한숨을 쉬고 조심스레 허리를 편 후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나저나 몇 시나 됐을까. 주위는 조용했다. 차무경은 아마 회사에 출근을 했겠지. 저는 이렇게 죽을 맛인데, 몸이 어떻게 버티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그쪽은 극우성이라 타고난 체력도 있을 테고 관리도 꾸준히 할 테니 나와 비교하는 건 좀 무리인가.

어젯밤 제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던 무경의 몸을 떠올리다 말고 시우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귓불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시우는 급하게 욕실로 향했다. 씻어야겠다. 갑자기 덥게 느껴지는 건 잠이 깨면서 체온이 확 올랐기 때문일 거다. 아무렴.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

“아으….”

샤워 타월에 비누를 묻혀 몸에 비비다 말고 시우는 쓰라린 느낌에 신음을 뱉었다. 시선을 내리니 제 가슴팍에 돋아난 돌기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어제는 통증과 쾌감이 뒤죽박죽이 되어 아픈 줄도 몰랐는데 어지간히 빨아 댔던 모양이다.

“아, 진짜….”

어떡하지. 당장 오늘 외출해야 되는데 옷에 쓸리면 꽤나 아플 것 같았다. 일회용 반창고라도 붙여야 하나.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보며 시우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입술도 좀 따가운 거 같다. 시우는 거울에 서린 김을 손으로 대충 훑어 내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역시 입술도 상당히 부어 있었다. 아래쪽에 피 멍울이 살짝 맺혀 있기도 했는데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무경의 잠자리 취향이 좀 과격한 쪽인가. 이래가지고야 몸이 버텨낼 지 모르겠다.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고 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두 번은 무리일 것 같은데.

그러다가 시우는 문득 헛웃음을 뱉었다. 나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너무 아무렇지도 않잖아. 정부로서 첫날밤을 보내고 나면 비참함과 자괴감에 죽고 싶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뭐지. 마치 그럴 만한 상대와 자고 난 아침처럼 너무 평범하게 굴고 있었다.

시우는 차무경을 떠올렸다. 계약 상대가 낯선 사람이 아닌 차무경이라서 몇 배는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차라리, 차무경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누군가와 몸을 섞어야 한다면,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보다야 한때라도 마음에 담았던 사람이 더 나은 거 아니냐고, 제 속의 누군가가 가증스럽게 속살거리고 있었다. 이런 기분은 전부 그가 저를 다정하게, 진짜 연인처럼 대해 줘서 그런 거였다. 계약 관계가 아니라 마치 애정 관계로 얽히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만드는 그의 태도가 잘못이라고, 시우는 무경의 탓을 했다.

정부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우리는 애인 사이인 거라고 하던 무경의 말이 떠올랐다. 믿으면 안 돼. 시우는 중얼거렸다. 넘어가면 안 돼. 절대로 착각은 하지 말자. 내 입장과 처지를 잊고 바보짓을 하는 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시우는 다시 뿌옇게 흐려진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선택은 이미 끝났다. 더는 돌아갈 길도 없는데 비참한 생각만 하면서 남은 1년을 우울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자. 바닥의 바닥까지 끌어내려질 상황에서 동아줄을 잡은 거지 않나. 빚도 갚을 거고 동생은 돈 걱정 없이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게다가 계약이 무사히 끝나면 시우는 더 이상 잡다한 일을 하지 않고도 제대로 된 집을 구해 지우와 함께 살면서 대학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게 됐지만, 상대는 뼈에 거죽만 남은 노인도, 배 나오고 입 냄새 나는 알파도 아니다. 젊고 잘생긴데다가 심지어 어릴 때 좋아하던 차무경이다. 성격조차 좋아서 돈에 팔려 온 저를 진짜 애인처럼 다정하고 살갑게 대해 준다. 게다가 평소의 저라면 꿈도 못 꿀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만 그리면서 살면 되는 거다. 아니,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로또도 이런 로또가 없다. 대체 어제 왜 울었는지도 알 수가 없어졌다.

시우는 이 생활을, 이 일 년을 기꺼운 마음으로 누리자고 생각했다. 제 인생에 이런 호사가 언제 또 찾아오겠는가. 어차피 벌어진 일, 제 인생에 찾아온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주어진 걸 제대로 누리고 즐기는 것도 현명한 일일 것이다.

단지 이 신기루 같은 허상을 진짜라고 착각하지만 말자고 생각했다.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때, 꿈과 현실을 구분 못하고 뿌리부터 흔들려서 스스로 망가지는 일이 없도록 그거 하나만 마음에 품고 살자고, 시우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졌다.

***

샤워를 마치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속옷 위에 샤워 가운만 걸친 채 침실 문을 열었다. 별 생각 없이 드레스 룸으로 가려다가 흠칫했다. 식당 쪽에서 음식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다. 누군가 있다.

시우는 허둥지둥 샤워 가운이 제대로 여며져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대충 말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누구지? 서 실장인가? 아니면 그… 한 여사라는 분? 아니면 설마….

“시우 씨 일어났어요?”

설마가 맞았다. 시우는 눈을 감았다. 젠장. 민망하다. 오늘 아침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인데.

“기척이 들리길래 먹을 거 좀 준비하고 있었어요. 이리 와요.”

차무경이었다.

***

“출근… 안 하셨어요?”

소고기버섯죽으로 추정되는 음식을 제 앞에 내려놓는 무경에게 시우가 물었다.

“네. 오후 출근으로 미뤘어요. 아침엔 좀 피곤할 거 같아서.”

어쩐지 낯이 뜨겁다. 시우는 숟가락을 들고 죽에 집중하는 척 하며 시선을 내렸다. 어제와 같은 상황인데 어째 어제보다 더 어색했다.

“그, 그럼 좀 더 주무시지….”

“잠은 충분히 잤고 난 개운해요. 피곤하다는 건 시우 씨 얘기지. 느지막이 일어날 것 같은데 혼자 두면 또 끼니 거를 것 같아서.”

귓불이나 목덜미가 붉어지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시우는 손으로 목을 매만지며 가운 깃을 추슬렀다.

“한 여사님이라는 분이… 점심때쯤 오신다고 들었는데….”

“응. 그러니까 그때까지 안 먹을까 봐. 봐요. 아직 두세 시간 남았잖아.”

시우도 배고프면 냉장고를 뒤져 데워 먹는 정도는 할 줄 알았다. 아니, 조카뻘인 어린 동생과 엄마의 병수발도 들던 몸이니 밥 한 끼 챙겨 먹는 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아니, 아닌가. 오히려 제 한 몸 챙기는 건 소홀하게 되었던가. 게다가 최근엔 하도 버릇처럼 굶어서 사실 딱히 배고픈 줄도 모를 때가 많았다.

아니 그거야 어찌됐든, 지금은 그저 시우에게 밥을 챙겨 먹이기 위해 출근을 미뤘다는 무경의 말이 듣기 좋았다. 그냥 별 뜻 없이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상관없었다. 저 듣기 좋으라고 일부러 그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 한구석을 간질간질하면서도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

두 달 정도가 지났다. 6월로 접어들면서 햇살이며 하늘에서도 여름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침실에서 내다보이는 정원에는 수국이 흐드러졌다. 이 기간 동안 시우가 무경에게 느낀 것은 그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다정하게 자신을 배려하고 존중해 주는 듯하다가 또 다음 순간엔 다소 난폭하고 제멋대로 굴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잠자리에서만 그런 성향을 보여서 취향이 그런 건가, 생각했지만 가끔은 그밖에도 그런 모습을 드러내는 때가 있었다.

당초 서진명 실장은 무경이 일주일에 한두 번만 저를 찾을 것이고 찾을 때는 사전에 문자로 연락이 갈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는 전혀 달랐다. 계약서에 정확히 명시가 된 부분이 아니라서 따질 수도 없는 문제였다. 무경은 수시로 찾아왔고 그것도 불시에, 새벽에 들이닥칠 때가 많았다.

떨떠름한 어조로 미리 연락을 주실 줄 알았는데요, 라고 항의 비슷한 멘트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무경은 ‘연락을 하려고 보니 이미 시간이 너무 늦길래 잘 것 같아서’ 라든가 ‘올 생각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새벽에 너무 보고 싶어져서’ 따위의 말을 웃음에 버무려 내놓고는 가볍게 시우 말을 씹었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나서 비몽사몽 간에 안기기도 했지만 조금 지나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오든 말든 그냥 잠든 상태로 무시해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날은 꼭 아침에 깨자마자 몇 번이고 안겨서 오전이 전부 날아가 버리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럴 때에도 무경의 태도와 표정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아니 오히려 말투나 표정은 더 상냥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시우는 어쩐지 새벽에 무시한 분풀이를 당하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 번 크게 당한 다음부터는 시우도 어지간히 피곤한 날이 아니면 무경이 올 때 가급적 깨어서 상대를 해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었다.

***

이날도 그런 날 중의 하나였다. 시우는 허리와 그 아래쪽에 묵직한 둔통을 느끼며 잠이 깼다. 옆에는 새벽에 찾아온 무경이 시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었다. 깨어 있을 때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옆얼굴을 잠깐 쳐다보다가 시우는 한숨을 쉬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함께 잔 날 시우가 먼저 깨는 건 드문 일이었다. 전날 몇 시에 오든지 간에 언제나 무경이 먼저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했기 때문에 오늘은 깬 김에 자신이 뭐라도 챙겨 놓자고 생각했다. 이불을 걷어 내고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갑자기 긴 팔이 뻗어와 시우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돌아보니 무경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로 시우의 허리에 머리를 묻어 왔다.

“왜 벌써 일어나… 좀 더 자요….”

잠긴 목소리가 웅얼거리듯이 말한다. 아침부터 맨살에 더운 숨이 닿는 느낌이 당황스러워서 시우는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아니, 저는 충분히 잤어요. 주무세요. 뭐 먹을 거라도 준비해 놓을게요.”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무경이 시우의 골반을 잡고 끌어내려 아예 제 아래에 눕혀 버렸다. 그리고는 바로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건 안 해도 돼요. 그런 거 할 기운 있거든 한 번 더 하게 해 주든가.”

무경은 가슴에 대고 중얼거리듯이 말하더니 혀를 내어 빨개진 돌기를 할짝 핥았다.

“앗, 잠깐만.”

시우가 인상을 쓰며 무경의 이마를 좀 세게 밀었다. 밀려난 무경이 불만스러운 듯 눈을 찌푸리고 왜? 하듯이 힐끗 쳐다보았다.

“아파요. 지금 더 하는 건 좀….”

하는 도중에야 페로몬도 돌고 흥분감에 취해서 잘 모른다지만 맨정신에는 통증만 고스란히 느껴질 뿐이다. 가슴 쪽은 이제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따가웠다. 게다가 섹스라면 어제 이미 진이 빠지도록 한데다 벌써 시간도 한참 늦은 아침이었다.

“아파요? 어디가?”

무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시우는 어이가 없었다. 눈이 없나?

“빨갛잖아요. 어제 너무… 아니, 매번….”

네가 너무 빨거나 씹어서 따갑다구요, 라고 해야 하는데 표현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경은 잠깐 눈을 깜박거리며 시우의 가슴을 한 번 보고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다시 가슴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들어 빨간 돌기를 집었다.

“아, 진짜, 아프다니깐….”

시우는 저도 모르게 짜증을 내며 찰싹, 무경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는 바로 흠칫했다. 반응이 좀… 과격했나? 흘깃 무경의 표정을 살폈다. 무경은 얻어맞은 제 손을 잠깐 쳐다보고 시우와 눈을 마주치더니 흠, 짧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는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를 내려갔다. 의자에 걸쳐진 가운을 걷어 입으면서 곧장 방을 걸어 나갔다.

화난 건가.

침대에 혼자 남은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하기야 한낱 정부 주제에 제 몸 좀 만진다고 손을 때렸으니 화날 만도 하겠지. 잘해 줬더니 기어오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저런 사람은 성인인 지금은 물론이고 어릴 때라도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맞아 본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이것도 계약 파기 조건이 되나.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 두는 게 나으려나, 생각하며 시우는 침대에서 다시 내려왔다. 하기야 을 주제에 지금까지가 너무 쉬웠지. 내가 너무 거저먹으려고 든 건지도 몰라.

자기 비하에 가까운 반성을 하며 시우도 어제 샤워 후에 의자에 걸쳐 놓은 가운을 집어 입고 뒤따라 나가려는데 무경이 다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잠깐 앉아 봐요.”

무경은 가운을 입고 있던 시우의 팔을 잡아 다시 앉히고 암막 커튼을 대충 걷었다. 환한 햇살이 갑자기 들이쳐서 시우는 부신 눈을 깜박거리며 잠깐 동안 햇빛에 적응을 해야 했다. 무경이 가까이 다가와 옆에 앉으며 손에 들고 온 뭔가를 들어 올렸다. 연고였다.

“아프면 말을 하지, 지금껏 그냥 참고 있었어요? 계속 아팠어요?”

“…….”

정말 아플 줄 몰랐다는 건가? 그렇게 빨고 씹어 놓고? 척 봐도 빨갛게 부어 있는데?

무경은 시우의 가슴을 밀어 눕히더니 가운을 헤치고 돌기 부분에 연고를 짜냈다. 백색 크림이 닿는 느낌이 차가운데다 상처가 따가워서 시우는 움찔 몸을 떨며 인상을 썼다.

“빠니까 발갛게 부푸는 게 귀여워서 더 세게 빨았는데 시우 씨가 이렇게 신경질을 낼 정도로 아파하는 줄은 몰랐네. 섹스하면서 누가 나한테 아프다고 한 적도 없고 나도 아팠던 기억이 없어서… 미안해요. 앞으로는 아프면 바로바로 얘기해요. 참지 말고. 첫날부터 아팠어요?”

“…….”

섹스하면서…라. 하기야 나이도 있으니 나 이전에도 누군가 상대는 있었겠지. 당연한 얘긴데 어쩐지 생각해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시우 씨 은근히 할 말 다 하는 성격이라고 그러던데 의외로 그렇지도 않나 봐.”

연고를 조심스럽게 펴 바르면서 무경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할 말을 다 하다니, 서진명이 한 소리일까. 가진 거 없는 사람이 할 말 다 하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된다고. 더구나 차무경과 저는 명백한 슈퍼갑과 을 사이인데 어떻게 할 말을 다 하고 산단 말인가. 게다가 새벽에 갑자기 와서 하는 거 싫다고 둘러서 얘기했는데도 상큼하게 웃으면서 씹은 주제에.

“여기 말고 또 다른 데는?”

“어… 입술이랑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시우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무경은 그런 시우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턱을 들어 올려 부은 입술을 살폈다.

“입술도 아파요? 그래도 여긴 이거 말고 다른 걸 발라야겠지… 이따가 밥 먹고 딴 거 발라 줄게요.”

그리고는 몸을 이곳저곳 뒤지듯이 검사하더니 목이며 허벅지 안쪽 제가 씹어 놓은 부위에 정성스레 들고 있던 연고를 발랐다.

“엇….”

그리고는 대뜸 시우의 골반을 잡고 뒤집었다. 속옷을 내리고 엉덩이를 잡아 벌리길래 시우가 기겁을 하고 몸을 비틀었다.

“뭐, 뭐 하는….”

“아, 역시 부었구나. 여기도 아픈 거죠? 평소엔 도통 못 보게 하니까… 불도 못 켜게 하고….”

“잠깐만요, 내가 할 테니까.”

시우가 얼굴이 빨개져서 필사적으로 바르작거렸다. 아무리 밤에 별거 별거 다한 사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아침부터, 해도 이렇게 밝은데 적나라하게 엉덩이를….

“왜요, 직접 하기는 불편하지 않아요? 내가 해 줘야 안쪽까지 제대로….”

“아, 차무경 씨, 진짜 싫다니까요!!”

시우는 거의 무경을 걷어찰 듯이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가 놀란 듯 잠시 멈칫한 사이에 시우는 황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후다닥 속옷을 끌어올리고 침대 머리맡으로 몸을 말아 올린 시우의 얼굴은 수치스러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터지기 직전이었다.

무경은 약간 굳은 표정이었다. 고개를 약간 기울이더니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시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가 싫다구요?”

그게 왜 그렇게 해석돼?

“아니, 그게 아니라… 무경 씨가 싫은 게 아니라 이러는 게 싫다구요.”

“이러는 거?”

“제 의사 무시하고 막 하는 거요.”

“내가 시우 씨 무시해요?”

“아니, 그러니까….”

말이 막혔다. 무경이 저를 무시하던가? 아니, 그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배려하고 존중해 줘서 당황스러운 경우도 종종 있다. 적어도… 섹스 이외의 상황에서는. 하지만 잠자리에서는 좀… 뭐랄까, 사람이 달라진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기에는 제 입장이 좀 그렇다. 어차피 좋을 대로 상대를 굴리고 싶어서 거액을 지불해가며 저를 고용한 것 아닌가. 하드한 SM 같은 건 거부할 수 있다고 계약서에 써 놓긴 했지만, 무경이 하는 게 그 정도 수위는 아니니 뭐라 할 권리도 없다.

“좀 거칠어요.”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앞서 불쑥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거칠어요? 뭐가요?”

“그러니까… 섹스….”

“섹스가요? 나 그런 말 처음 듣는데.”

정색하고 찌푸린 얼굴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 진짜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하긴 그렇겠지. 누가 그런 얘길 슈퍼갑 면전에서 하겠어.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겠죠.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대등하게 사귀는 분이었어요? 그랬는데도 아무 말이 없었으면… 그냥 그분도 취향이 좀 특이한 분이셨던 거겠죠.”

“…….”

이번에는 무경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조금 불안해진 시우가 흘깃 눈치를 보듯 무경의 얼굴을 살폈다. 빤히 시우를 쳐다보고 있는 무경은 표정이 잠시 지워져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고만 있더니 갑자기 무경이 헛,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할 말 다 하는 거 맞네.”

그리고는 연고를 옆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나 나가 있을 테니까 약 바르고 나와요.”

“…….”

시우가 조금 얼떨떨한 상태로 무경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무경이 문을 열고 나가려다 말고 멈칫 돌아섰다.

“앞으로는 싫은 건 참지 말고 미리미리 말을 해요. 갑자기 화를 내면서 거부하면 나도 상처받으니까.”

의외로 가라앉은 표정에 시우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문이 닫히는 걸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런 분위기가 된 거지? 마치 잘못한 게 나인 것처럼? 진짜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대체 뭘?

***

연고를 바르고 대충 씻고 나오니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무경이 늦게 출근하는 날은 항상 이랬다. 전날 한 여사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데울 뿐이라고 해도, 볼 때마다 미안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어째서 있는 집 도련님이 매번 제 정부의 아침상 따위를 차리는 걸까.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계약상의 상대일 뿐인데.

“오늘은 일정이 어떻게 돼요?”

아침을 먹으면서 무경이 평소처럼 다정하게 물었다. 방금 전의 살짝 아슬아슬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시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앞으로 1년간은 계속 볼 사람인데, 어색하고 불편한 채로 있어 봐야 힘들어지는 건 자신이 될 터였다.

“음… 동생 병원에 갔다가… 학교에 좀 들르려고 해요. 친구도 만나고 휴학 연장도 해야 해서.”

“친구 누구.”

“네?”

“친구 누구 만나는데요?”

아, 나왔다, 하고 시우는 생각했다. 요 두 달간 무경을 겪으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무경의 목소리가 유독 부드럽고 낮아질 때는 뭔가가 심기를 거슬렀다는 신호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거였다.

“…대학 친군데… 휴학 연장하려면 이것저것 부탁할 것도 좀 있고….”

“알파? 오메가?”

“…오메가요.”

“오메가 한 명?”

“…네.”

사실 연락해서 만나기로 한 건 오메가인 유정뿐이지만, 유정만 나올 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다가 어차피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으니만큼 이런저런 이유로 졸업하지 않고 학교에 남은 동기들이나 후배들을 만날 확률도 없지는 않았다. 학과와 학번을 막론하고 발 넓은 유정을 매개로 만들어진 친목 모임도 있었다. 물론 그중에는 오메가도 있고 베타도 있고… 알파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런 얘기들을 다 하고 나면 직접 가지 말고 사람을 시켜서 휴학 처리를 하라고 할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 시우는 차라리 남에게 부탁하고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뭘 하고 지내냐고 물어올 게 뻔한데 사실을 털어 놓을 수야 없으니 거짓말을 해야 할 테고, 특히나 절친한 유정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생활고로 학교에 얼굴을 비치지 못한 지도 벌써 1년 반이었다. 학교 공기도 친구들 얼굴도 전부 그리웠다. 1년 후에 복학하면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도 다 졸업해 버린 후일 테니 그전에 한 번이라도 예전 분위기를 좀 느껴 보고 싶었다.

“그래요… 저녁에는 들어와요?”

“어… 음… 혹시 오늘도 오시나요? 지금 나가면 시간이 애매해서 어찌 될지….”

시우는 힐끗 시계를 쳐다보았다. 아침 10시 반. 식사를 마치고 무경이 출근하는 것까지 본 다음 준비를 하고 나가면 벌써 점심때였다. 지우와 함께 점심을 먹고 좀 놀아 주다가 학교에 가면 결국 저녁을 먹자는 얘기로 이어질 시간이었다. 무경이 저녁 시간에 맞춰 오는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일찍 오면 9시, 그렇지 않으면 보통 11시가 넘었다.

“저녁을 밖에서 먹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9시까지는 들어올 수 있을 거예요. 저… 괜찮을까요?”

시우는 얌전히 허락을 청했다. 어차피 언제든지 원할 때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계약의 기본 조건이었다. 당연한 거 아니겠냐고 진명에게 심드렁하게 뱉었던 시우가 이제 와서 불평을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9시요… 알았어요. 카드 챙겨 가고 시우 씨가 밥 사요, 친구들한테.”

“…네. 감사합니다.”

밥을 사라니. 돈이 없어서 학교도 휴학한 주제에 무슨 돈으로 펑펑 쏘는 거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라고.

“핸드폰도 잊지 말고. 전화할 거니까.”

“네.”

과연. 새 핸드폰을 받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전화가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냥 하는 말일 거라고, 시우는 그냥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

여느 때처럼 기완이 운전하는 차에 탔더니 서진명이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난 두 달간 시우가 했던 외출이라고 해야 병원과 에스테틱, 아니면 서점과 화방 정도가 다였던 지라 처음 몇 번을 제외하고 진명이 동반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랜만이네요, 실장님. 웬일이세요?”

시우가 의아하게 물었다. 시우 입장에서는 그가 저를 계약 정부가 되도록 이끈 연결점이었으니 딱히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꾸 보다 보니 정이라도 든 건지 간만에 만나자 은근히 반가웠다.

“오늘 이것저것 변경 사항이 좀 있어서요. 동생분… 지우 군 병원 말인데, 오늘부로 VIP 병동 아동 병실로 옮길 예정입니다.”

“VIP… 네?”

순간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VIP 병동은 국가 차원에서 관장하는 의료 보험은 물론 일반 개인 보험으로도 처리가 안 되는, 일부 상류 계층의 특별 보험만으로 커버되는 곳이었다. 아니, 거기를 어떻게 지우가….

“계약서에도 나와 있지만 비용은 전적으로 저희 쪽에서 부담하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잠깐만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어요. 지금 현재 상태만으로도 충분하구요, VIP 병동이라니 거긴 너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시우를 진명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우 군이 최상의 환경에서 적절한 치료와 학교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횐데 왜 마다하시죠? 지금 있는 복지 병동은 아무래도 너무 어수선하고 부실하지 않습니까. 식사도 그렇고, 뭐 교사분들도 열심히는 하시지만 아무래도 담당하는 인원이 많고 잡무도 많다 보니… 지우 군이 나이에 비해 철이 들어서 불평은 안 하지만 여러 가지로 꽤 불편할 겁니다.”

“아….”

할 말이 없긴 했다. 형인 저는 좋은 집에서 좋은 옷과 음식을 먹으며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동생은 뭐랄까, 시설이 부실한 공립 기숙 학교에 넣어 두고 있는 셈이니… 그 이전에는 자신도 함께 고생을 하고 있었으니 미안함이 덜했는데 지금은 동생을 만날 때마다 볼 낯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형이 몸을 파는 집에 동생을 데리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지우 군이 이제 치료비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복지 병동에서 지내는 건 부당한 일입니다. 지우 군이 처음 들어올 때는 운 좋게 오래 기다리지 않았지만 복지 병동은 항상 대기자가 넘쳐나요. 그도 그럴 게 시설이 아직 많이 부족하니까요. 지우 군이 복지 병실을 비워 주게 되면 또 한 명의 어려운 아이가 국가 지원 혜택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생각하셔야죠.”

틀린 말이 아니니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 그럼 하다못해 일반 병동에….”

동생이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데 마다할 게 뭐냐고 하겠지만, 시우는 그 호사가 1년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 두려웠다. 저조차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뿌리를 지킬 수 있을까 겁이 나는데 어린 지우가 과연 1년간의 호화로운 생활 끝에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자고 하면 과연 적응을 할 수 있을까. 아니 당장, VIP 병동으로 옮기고 나서 주변의 부잣집 아이들과 위화감 없이 섞일 수나 있을까. 왕따를 당한다든가 하면 어떡하지?

“일반 병동은 저희가 손을 쓰기가 오히려 어렵습니다. VIP 병동 쪽은 저희가 거액을 후원하고 있어서 인사 문제도 그렇고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 때 움직이기가 쉬워요. 이를 테면 지금 지우 담당 의사이신 김지형 선생님이 계속 지우 군을 담당할 수 있게 한다거나?”

진명의 이 얘기는 시우의 마음을 흔들었다. 현재 지우를 담당하고 있는 의사는 단골 병원의 의사 추천으로 알게 된 사람인데 호르몬계에서는 꽤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실력은 있으나 성격이 괴팍해서 충돌이 잦다보니 복지 병동으로 좌천됐다는 얘기도 있고 사명감으로 복지 병동을 고집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시우는 뒷얘기 따위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지우의 병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시우에게 처음부터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으며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든가 다양한 복지 혜택의 신청 방안을 알려 주는 등 실질적인 도움도 많이 준 사람이었다. 그가 계속 지우를 담당할 수 있다면 시우도 지우도 마음이 한결 편할 터였다.

“게다가 지금은 지우 군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하지만 또 예전처럼 그런 긴급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습니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긴다면 복지 병동보다는 시설이 잘 갖춰진 VIP 병동이 몇 배는 나으리란 건 당연한 얘기죠.”

진명이 시우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며 못을 박았다. 시우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고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

아동 복지 병동이 오래된 공립 기숙 학교라면 VIP 병동의 아동 병실은 최신식 사립 기숙 학교에 빗대어 봄 직했다. 의료 시설은 물론이고 수업을 위해 준비된 갖가지 시설들도 감탄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다. 환아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음악과 미술 수업에 특히 공을 들인다고 하는데 음악의 경우 각자 원하는 악기를 하나씩 선택해서 심도 있게 배울 수 있다고 했다.

“형, 나 바이올린 배울 수 있대!!”

지우가 답삭 형의 허리에 매달리며 얼굴을 빛냈다. 이 아이가 이렇게 진심으로 신나 하는 얼굴을 본 게 대체 언제였더라. 시우는 잠깐 멍하니, 제 팔을 흔들고 있는 지우의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지우는 아주 어릴 때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소질이 있었는지 나이에 비해 꽤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었다. 그저 입에 발린 소리였는지는 몰라도 당시 바이올린 선생님은 지우가 바이올린을 계속 해야 한다고 엄마에게 말했고, 지우는 장차 세계 제일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겠노라 큰소리를 쳤었다. 그 말에 흐뭇해하던 엄마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쓰러지면서 어린 지우의 꿈도 그때 함께 바스러졌었다.

신이 나서 뛰어다니다가 지나가던 간호사에게 한소리 듣고도 헤헤 웃으며 제 형을 돌아보는 지우를 보며 시우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옆에 서 있는 진명에게, 시우는 입속으로 조그맣게 뭐라고 중얼거렸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진명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시우는 숨을 깊이 들이켰다가 다시 뱉었다.

“고맙…다구요. 고맙습니다. 이것저것 다.”

“아. 네.”

진명이 알 만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차 이사님께.”

“네… 음… 실장님도요. 고맙습니다.”

“어… 네….”

뜻밖의 감사 인사에 진명은 답지 않게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둘 사이에 조금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자 시우는 자리를 피하고 싶어졌다. 얼른 몇 발짝 걸어가며 급히 말했다.

“저, 의사 선생님을 좀 뵙고 올게요.”

“네. 저는 지우 군이랑 같이 여기 있겠습니다.”

***

시우는 조금 달아오른 얼굴로 서둘러 비상계단을 향해 걸었다. 울컥한 감정을 달래기 위해 좀 걸을 필요가 있었다. 악마라는 둥 모진 소리까지 했는데 결국은 고맙다고 감사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래서 사람은 함부로 악담을 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다.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격앙된 감정을 정리하고 의사를 만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또 의사 손을 붙잡고 울지도 몰랐다. 몇 번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잠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는다 싶었을 때, 다시 눈을 뜨고 걸음을 옮겼다. 담당 의사가 있는 곳은 2층 아래였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래. 1년이면 돼. 아니 이제 10개월인가? 그러면 나도 그리로 건너갈 테니까. 애는 잘 있지? 돈은 부족하지 않고?”

속삭이듯이 낮춘 목소리였지만 소음도 없이 훤히 뚫린 공간이라 내용이 똑똑히 들렸다. 게다가 아는 목소리. 지우의 담당의인 김지형이었다. 계단 중간쯤 멈춰 선 시우는 조금 난감해졌다. 되돌아가기에도 애매한 거리다. 헛기침이라도 해서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야 하나. 아니면 발소리를 내서….

“그래, 그래. 1년만 버티면 우리도 팔자 펴는 거야. 목돈 챙길 거고 이 지긋지긋한 병원장 얼굴에 보란 듯이 사표 집어던지고 갈 테니까. 그래. 너도 말조심하고, 애 듣는 앞에서도 항상 입조심 하….”

말을 하다 말고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지형의 눈이 계단을 내려오던 시우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 지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

“…….”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시우가 먼저 머리를 만지며 겸연쩍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들으려고 한 게 아닌데.”

“아, 아니… 그게….”

지형이 말을 더듬었다.

“선생님을 뵈러 가던 길이었거든요. 지우 병동 옮겼는데 계속 봐 주시기로 했다고 해서.”

“아, 네. 그거… 그렇죠.”

“저어… 어쩌다 들은 거긴 하지만… 선생님 1년 후에 여기 그만두세요?”

지형이 덜컥 놀란 얼굴을 했다. 무더운 날도 아닌데 갑자기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기분이다.

“아, 네… 저기….”

“죄송합니다. 그거야 선생님 개인사인데, 제가 지우 때문에 선생님께 의지를 많이 하다 보니 신경이 좀 쓰이네요.”

시우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 지우는….”

지형은 침을 꼴깍 삼키고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고 잠깐 호흡을 고르는 것 같더니 한결 안정된 톤으로 다시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일전에 갑자기 악화됐던 게 고비였던 모양이고, 그 뒤로는 쭉 안정세인데다 수치도 지속적으로 좋아지고 있어요. 특히 페로몬 계열은 나이가 들수록 안정되는 게 일반적이니까 전체적인 호르몬 밸런스도 갈수록 나아질 거고… 제 생각에는 1년까지 안 가도 상당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짜요?”

시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오늘 오전만 해도 서진명이 또 악화될 경우 운운하는 바람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던 터였다. 단지 예상일 뿐이라고는 해도 전문가의 말에 훨씬 신빙성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지우의 병이 발병한 이후로 그의 입에서 이렇게 희망적인 얘기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네. 그러니까 지우의 병에 대한 걱정은 접어 두셔도 될 거예요. 제가 여길 떠나도 다른 호르몬계 권위자분을 연결해 드릴 테니까요, 그쪽도 너무 염려마시구요.”

“네, 네. 감사합니다.”

시우는 기쁨에 차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시우의 얼굴을 지형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시우를 다시 불러 세웠다.

“저어, 물론 어디다 말씀은 안 하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병원을 그만둔다든가 하는 얘기는….”

“아, 네. 입 다물고 있을게요. 걱정 마세요.”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해 보이는 시우에게 지형은 조금 씁쓸하게 웃어 보이면서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

위층으로 두 칸씩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시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의사란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얘기하는 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인지 지형의 입에서 지우가 나을 거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나온 것만으로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지우가 낫는다면, 올해는 불가능하더라도 내년에는 다시 둘만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병원에는 계속 다녀야 할지 모르지만 같이 살면서 다시 일반 학교에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통장에는 꽤 많은 돈이 쌓여 있을 테니 사치만 부리지 않는다면 그 돈을 다 쓰기 전에 취직을 할 수도 있을 거고, 지우는 바이올린을 계속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미래가 희망으로 가득차는 기분이었다.

사실 앞날의 걱정을 사서 하고 싶지 않아 묻어 두고 있었지만, 갑작스레 미친 듯이 불안감이 몰려올 때도 있었다. 1년이 지나고 나서도 지우의 병이 낫지 않는다면? 그때는 통장에 돈이 있는 만큼 더 이상 국가 지원을 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일반 병동에 도로 입원을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껏 모았던 돈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겠지. 그러면 얼마 못 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아니,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정말 무서운 것은 지우가 전처럼 악화되어, 이번에야말로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만약 지우가 엄마처럼 죽어 버리면? 그래서 혼자만 남게 된다면?

이따금 그런 암울한 상상에 시달리는 시우에게 이번에 지형이 해 준 말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위안이었다. 가끔씩 타오르는 불안의 불씨를 잠재워 주는 단비.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아. 시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른들이 세상은 살 만한 거라고 하는 거겠지.

***

“저녁에 장소 정해지면 기완이한테 문자 넣어주세요. 모시러 올 겁니다.”

학교 앞에 시우를 내려주면서 서 실장이 말했다. 혼자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그냥 삼켰다. 예전에도 몇 번 얘기를 했지만 번번이 묵살당했기에 어차피 말해 봐야 소용없겠지 싶었다. 잠자코 알았다고 대답하며 차문을 닫았다.

차가 떠나는 걸 지켜보다가 몸을 돌려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쭉 뻗은 대로를 따라 길 끝 가운데로 보이는 본관과 왼쪽의 대강당, 그리고 그 뒤 언덕 위로 솟아오른 도서관 건물 등을 보니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그동안 휴학계를 내러 두 번 왔던 날 말고는 일부러 학교에 들르지 않았었다. 돈이 없어서, 돈을 벌어야 해서 학교를 쉬어야 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아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으로 기분이 가라앉는 게 싫어서였다.

오늘도 어차피 휴학을 연장하러 온 거고, 정확히 말해서 상황이 나아졌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지우가 나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온 참이라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니 더욱 친구들이 보고 싶어졌다.

사정이 어려운 동안에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얘기를 하자니 끝없이 어두운 애기만 나올 것 같고, 만날 때마다 드는 밥값이나 커피 값도 시우에겐 큰돈이었다. 형편을 아는 친한 친구들은 자진해서 사 주겠다며 나오라고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얻어먹는 일이 거듭될수록 자괴감이 들어서 시우는 점점 친구들과의 자리를 피하게 됐고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연락을 끊었다.

유정은 가장 친했던 친구인데다 사귐이 길어서 그나마 연락이 끊기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동네 친구였는데 중학교를 다른 곳으로 진학하면서 조금 소원해졌다가 대학에서 재회하면서 다시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들끼리도 가까웠기 때문에 시우의 속사정도 잘 알았다.

유정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우에게 마음만큼 도움을 주지는 못 했지만,심적으로는 항상 든든하게 힘이 되어 주었다. 가끔 시우가 바쁠 때 빈집에 찾아와서 엄마처럼 반찬거리를 만들어 놓고 가기도 하고 대신 지우를 챙겨 주기도 했다. 학교에서 해야 될 일이 생길 때 대신 처리해 준 사람도 유정이었다.

시우는 그런 유정에게조차 계약 정부 일에 대해선 말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유정이어서 더 말을 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저를 올곧게 봐 주는 친구에게 빗나간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무경의 집에 들어간 이후로, 시우는 한번 보자는 유정의 연락을 계속 피했다. 부잣집에 입주 과외를 들어갔다고 둘러대기만 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났다고 이제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역시 이 생활에 익숙해져서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곤 하지만 참 빠르기도 하지. 시우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유정이 기다리고 있는 학생관 건물의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야, 연시우, 너….”

시우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유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눈이 시우의 모습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한번 훑고 또 한 번을 더 훑어봤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시우는 멋쩍어서 머리를 쓸며 웃기만 했다.

유정을 직접 얼굴 맞대고 만나는 건 거의 석 달 만이었다. 석 달 전의 시우는 공사판 일로 그을은데다 팔을 다친 상태였고 지우마저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어 정신이 없었다. 물론 그때도 유정은 초췌해진 시우의 모습에 기함을 했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본래 모습을 회복한 수준을 넘어서 아예 스타일 자체가 달라졌으니 놀랄 만도 했다.

“야, 너 눈칫밥 먹느라 애가 영 못쓰게 되지는 않았나 걱정했는데 때깔이 더 좋아졌다? 그 집에서 잘해 주나 봐?”

“응… 뭐, 그렇지.”

“가르치는 애는 어때? 말은 잘 들어? 싸가지가 없거나 하지는 않고? 그 집 사모님이 갑질은 안 해?”

유정에게는 미대 입시를 지망하는 부잣집의 재수생 아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틈틈이 사모님이 취미 생활로 그리는 그림도 봐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워낙 돈이 많은 집이라 고액 과외비 수준으로 돈을 받고 있다고도 했고. 잘됐다고 전화로 기뻐하는 유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혼자 씁쓸해 했던 기억이 난다.

“애는… 괜찮아. 착해. 좀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긴 한데, 그것도 나름 귀여워.”

시우는 무경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사모님도 좋고. 친절하고 요리를 잘 하셔. 그래서 내가 때깔이 좋나 봐, 잘 먹어서.”

사모님의 모델은 한 여사님으로 잡았다. 얼핏 들으니 무경의 집에서 꽤 오랫동안 일을 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무경을 대하는 것도 상당히 편하고 자연스러웠고 시우가 계약 정부인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전혀 어색한 기색 없이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흠. 사모님이 요리를 직접 해? 취미가 다양하네. 요리에, 그림에.”

“그, 그러게.”

“지우는 좀 어때? 좋아졌다며. 너 갈 때 언제 한 번 같이 가자.”

“어… 어? 아니야. 일도 바쁠 텐데 뭘 그렇게 자주 와. 지난달에도 너 혼자 왔었다며.”

시우는 좀 당황했다. 지우가 VIP 병동으로 옮겼다는 걸 유정이 알게 되면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 마음이 잡히지 않았다. 언젠가는 들키겠지만 일단은 시간을 벌어야 했다. 뭔가 설명할 수 있는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낼 때까지.

“걔도 이제 좀 컸다고 제 또래 친구들하고 노는 걸 더 좋아해. 우리가 가 봐야 딱히 반가워하지도 않는다고.”

“그럴 수가!”

유정이 입을 딱 벌렸다.

“크면 나랑 결혼하자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우가 클클 웃었다.

“그게 언젯적 얘기야? 게다가 우리 지우는 너 이전에 나랑 결혼할 거라고 했단 말이야. 형이랑은 결혼 못 한다고 알려준 게 너라며? 그날 울고불고 난리 나서 달래느라 애먹었는데.”

“아, 그렇지. 그럴 때가 있었지. 그때 지우 참 귀여웠는데. 세월 참 빨라. 어느새 커서는 제 친구들이 더 좋다고 나를 밀어내다니. 정말 갈대와 같은 알파들의 마음이란.”

유정이 과장되게 탄식을 하며 제 얼굴을 감쌌다.

“웃기지마. 지우 두고 새 알파 사귄 너는 뭐냐? 이름이 규민 씨던가? 어떻게, 잘 만나고 있어?”

최근 새로 만나 한창 불타오르고 있는 애인 이름을 꺼내자 유정의 얼굴엔 금세 화색이 돌았다. 유정의 애인 자랑으로 시작된 수다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하마터면 휴학계 제출 시간을 놓칠 뻔한 시우는 허겁지겁 휴학 연장부터 하고 지도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사실 교수님은 내년에 복학해서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상태에서 만나고 싶었지만 휴학계를 내러 와서 만나지도 않고 돌아갔다는 걸 알면 서운해 하실 테니 할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사정들을 유정에게처럼 적당히 얼버무려 얘기하고 다음에 또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드린 후 교수실을 나왔더니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깔려 있었다.

잠시 도서관으로 돌아갔던 유정을 전화로 불러 함께 학교 밖으로 나갔다.

“등짝 스매싱 연타로 당할 각오는 하고 있어라.”

학교 다닐 때 자주 가던 맥줏집으로 향하면서 유정이 으름장을 놓았다. 타과 연계 프로젝트니, 동아리 활동이니, 심지어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만난 옆자리 인연까지 해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자랑하는 유정 덕분에 어쩌다 어울리게 된 친목 모임이 있었는데 그 중 특히 친한 몇몇과 연락이 닿았다고 했다. 시우가 연락을 뚝 끊고 잠수를 탔기 때문에 다들 벼르고 있다는 얘기였다. 시우는 그저 웃고 말았다. 등짝에 불이 좀 나더라도 뭐 어떠랴 싶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다 두근거릴 지경인데.

누구는 이렇게 됐고 누구는 저렇게 됐으니 기대하라는 둥 하면서 떠드는 유정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단골 맥줏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항상 앉는 자리, 가장 안쪽 커다란 테이블이 있는 좌석으로 곧장 시선을 돌렸다.

“시우야!”

“야, 연시우!”

“선배!”

제각기 시우의 이름을 불러 대며 앉아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시우가 다가가는데 친구들이 등짝 스매싱은커녕 묘하게 머뭇거리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지? 하고 조금 의아해하는 찰나 뒤에서 유정이 거칠게 욕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아, 미친… 저 새끼가 여길 왜 와?”

어리둥절해서 유정을 봤다가 다시 테이블 쪽을 돌아보자 구석 자리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일어나는 게 보였다.

“오랜만이다, 시우야.”

큰 키에 단정한 얼굴. 최근 몇 년간 시우가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거기 있었다.

“우진… 선배.”

싸한 정적이 감돌았다. 무슨 영화 속 대치 상태처럼 서 있다가 먼저 입을 연 건 우진이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잠깐 나가자.”

멍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사이 팔이 붙들렸다. 그러자 유정이 그 팔을 잡으며 시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가긴 어딜 나가. 얘는 댁하고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없거든요. 좋은 사이끼리 간만에 만나서 회포 좀 풀려고 하는데 불청객은 제발 좀 꺼져 주시죠?”

“너랑은 관계없으니까 비켜.”

“웃기시네. 여기서 제일 관계없는 사람은 댁이거든요? 양심도 의리도 감정도 다 팔아먹더니 눈치까지 팔아먹었나 왜 이렇게 분위기 파악을 못해?”

유정의 말투가 점점 험악해지자 모인 친구들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평일 저녁이라도 대학가라 실내는 이미 반쯤 차 있는 상태였다. 손님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기 시작하자 멀리 있던 주인이 알바생을 불러 이쪽을 보며 뭐라고 하는 모습이 눈에 잡혔다.

“저기, 영업에 방해되니까 일단 좀 앉지, 다들?”

시우가 뭐라고 하기 전에 총무를 맡고 있는 경환이 일어서 중재에 나섰다. 모두가 그래, 그래 하며 다시 자리를 잡는데 유정이 우진을 재차 잡아챘다.

“앉긴 어딜 앉아? 그쪽은 나가 주세요. 부른 사람도 없는데 어딜 떡 하니 와서 앉으려는 거야, 뻔뻔스럽게.”

유정이 의도적으로 ‘부른 사람’을 강조하며 경환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경환이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경환은 우진의 의대 후배니 아무래도 그쪽에서 얘기가 샌 것 같았다. 고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경환도 시우의 입장을 동정하는 쪽이었고, 언제부터인가 시우를 다시 찾기 시작한 우진에게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이들 모임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위계가 강한 의대 직속 선배이니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게 분명했다.

다시 살벌해진 분위기에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래 가지고서야 언제 상황이 정리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이건 시우와 우진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모두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는 건 달갑지 않았다. 어떻게 되든 해결은 시우 자신이 봐야 했다. 언제까지나 어린애마냥 유정의 뒤에 숨어 있을 수만도 없고.

“잠깐만, 유정아 진정해. 너희 먼저 먹고 있어. 나 잠깐만 나갔다 올 테니.”

“시우야.”

“괜찮아.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해.”

시우는 안심하라는 듯 조금 웃어 보이면서 유정의 등을 밀어 친구들 사이로 들여보냈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인 얼굴들을 뒤로 하고 시우는 웃음기를 지우며 차분한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나오세요.”

밖으로 나오자 저녁 공기가 얼굴에 시원하게 닿았다. 낮에는 꽤 햇살이 따가웠지만 해가 떨어지니 딱 기분 좋을 정도로 공기가 선선했다.

시우는 반소매 아래 드러난 팔을 조금 문지르며 잠시 제 속을 헤아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우진을 만나 놀랐다. 그래서, 그 다음은.

“…….”

생각 외로 평온했다. 여전히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울컥했던 감정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그동안 하도 여러 가지 일에 시달리면서 감정의 극점까지 떠밀렸다 간신히 되살아난 기분이라, 연애 감정 따위,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 울고불고 했나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시우는 입구를 벗어나 조금 떨어진 곁길까지 가서 몸을 돌려 우진을 마주했다. 우진도 말없이 뒤따라 걸어오다 걸음을 멈췄다. 한때는 시우를 설레게 했던 깊은 갈색 눈동자가 시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서, 할 말이 뭐죠?”

“다행이다.”

우진이 대답 대신 뜬금없는 말을 내어 놓았다.

“힘들었다고 들었는데, 좋아 보여서.”

피식, 웃음이 샜다.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시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두세 달 전의 그 끔찍한 모습으로 다시 마주쳤다면 비참함으로 땅을 파고 숨어 버리고 싶었을 테니까. 지금도 실제 상황은 보이는 것과 달리 진창이지만, 그거야 눈치 채이지만 않으면 그만이다.

“입주 과외 한다고 들었는데….”

“저기.”

시우는 계속되는 그의 말을 잘랐다.

“선배랑 여기 서서 사는 얘기나 하려고 나오자고 한 거 아니에요. 아까 유정이 말대로 저는 제 친구들 보러 왔는데, 그 시간도 그렇게 넉넉한 건 아니거든요. 할 얘기가 있다고 했으니 할 얘기만 빨리 하고 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

우진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계속되자 시우도 조금씩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할 말 없으면 갈게요. 다시는 이런 식으로 안 만났으면 좋겠네요.”

우진 옆을 지나쳐 다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는데 우진이 시우의 팔을 잡아챘다. 강하게 풍기는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시우를 휘감았다.

“뭐 하는 거야!”

시우는 반사적으로 우진의 손을 뿌리쳤다. 잡힌 팔에 후드득 소름이 일었다. 알파가 오메가를 유혹하거나 제압하고 싶을 때 흩뿌리는 페로몬이다. 저항을 못할 정도로 압도적이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오메가로부터 신체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다.

“시우야, 내가 잘못했어.”

우진이 다시 성큼 다가와 어깨를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전기가 오르듯이 덮쳐 오는 감각에 시우는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빼려고 했지만 어깨를 틀어쥔 우진의 악력은 강했다.

“이거 놔….”

“너 그렇게 상처 줘서 보내고 나 후회 많이 했어. 진짜야. 나는… 내가 내 감정을 잘 몰라서 너를 그렇게 좋아하는지도 몰랐고… 뒤늦게 너 찾으려고 하니까 넌 연락도 안 되고 집도 이사 갔다고 하고… 시우야, 나 있잖아….”

턱.

밀리다 보니 등이 골목 벽에까지 닿았다. 우진은 시우를 밀어붙인 채, 한 손으로 얼굴을 쥐고 시선을 맞추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시우는 버둥거리며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시우야,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내가 잘못한 만큼 앞으로는 정말 잘할게. 나 호르몬 전공으로 택했어. 앞으로 지우 아프면 내가 봐 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힘과 덩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빠져나가는데 실패한 시우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홱 얼굴을 들어 우진을 노려보았다. 간절함을 담고 있는 그 눈빛은 일 년 전이었더라면 시우가 흔들릴 수도 있을 만큼 절절해 보였지만 이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거부감만 더 커질 뿐이다.

“그때랑 지금이랑 달라진 게 뭔데요? 나는 여전히 극열성 오메가이고 의사가 되려고 하는 선배한테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가난뱅이야. 어차피 결혼할 사이도 아닌데 1년이면 많이 사귄 거지 왜 질기게 구냐고 한 건 너잖아요! 그리고 지우가 뭐요. 지우 아프다고 하는 것도 다 너한테 매달리려고 꾸며 대는 거짓말이라면서요. 대체 윤성이 어디다 두고 와서 나한테 이래요? 걔랑 결혼할 거니까 꺼져 달라고 했잖아!”

어깨를 밀어내며 악을 쓰는 시우의 손을 잡아당기며 우진은 마치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제 품에 껴안으려고 들었다.

“미안해, 다 미안해, 시우야. 내가 미친놈이었어. 잠깐 정신이 돌았나 봐. 윤성이와는 헤어졌어. 걔랑은 더 이상….”

“누구 맘대로 헤어졌다는 거야?”

갑자기 뒤에서 독기 품은 목소리가 들이닥쳤다. 우진이 갑자기 굳어 버리자 시우는 간신히 그를 밀쳐 품 안을 빠져 나왔다.

이윤성이 마치 제 이름이 불려서 나타나기라도 한 듯 홀연히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윤성은 우진의 같은 의대 1년 후배로, 우성 오메가에다 유명 종합 병원 원장의 외아들이었다. 시우가 속해 있던 친목 모임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함께 얽혔다가 당시 시우와 사귀고 있던 우진과 눈이 맞으면서 둘 다 모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뒤 윤성이 처음부터 우진을 노리고 일부러 모임에 끼어들었다는 얘기가 떠돌기도 했지만 시우는 그냥 귀를 닫고 말았다. 중요한 건 우진이 결국 시우를 버리고 그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윤성이 뭘 어쨌는가는 시우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둘이 그렇게 모임을 떠난 이후 이쪽으로는 걸음도 안 하던 윤성이 우연히 이 골목을 지나가다가 마주쳤을 리는 없고, 우진이 시우를 만나러 온다는 걸 알고 일부러 찾아온 게 분명했다.

“인턴에 레지던트 첫 해에 힘든 시간 다 지나고 나니까 이제 옛날 애인 생각이 나서 그래? 내 단물은 다 빨아먹었다 이거야?”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윤성이 이를 악물고 독설을 뱉었다. 우진을 노려보는 눈에 시뻘겋게 핏발이 섰다.

“넌 여기 왜 있어? 너랑 할 얘기는 다 했잖아.”

윤성을 보는 우진의 표정은 싸늘했다. 시우는 그 얼굴에서 헤어질 때 자신을 보던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 다시 한 번 피식, 속에서부터 헛웃음이 샜다.

“다 하긴 뭘 다 해. 너만 다 했잖아. 난 분명히 안 헤어진다고 했어!”

시우는 한숨을 쉬고, 서로 노려보는 두 사람 사이를 빠져 나오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런 그를 우진이 다시 붙들었다.

“잠깐만, 시우야. 내 얘기 좀….”

이렇게나 일방통행이고 제 생각만 하는 사람인 줄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시우는 있는 힘껏 잡힌 팔을 뿌리쳤다.

“미안하지만 선배, 방금 들은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지금 난 나도 이상할 정도로 선배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심지어 싫고 미운 감정조차 안 듭니다. 그러니까 선배랑 옛날처럼 돌아가는 건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불가능한 얘기네요. 나는 이제 들어가서 친구들이랑 좀 놀아야겠으니까, 두 사람 일은 둘이서 해결하고 더는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안녕히 가세요.”

“시우야!”

우진이 시우의 이름을 불렀다. 좁은 골목에 울리는 목소리가 간절했다. 입을 꾹 다물고 그를 외면하며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시우의 손목을 누군가 잡아챘다.

“……?”

우진인가 생각했더니 시우를 다시 붙잡은 건 윤성이었다. 윤성은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으로 시우를 쳐다보더니 살짝 비웃듯이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어디 호빠에서 일해요, 선배?”

“뭐?”

“야! 이윤성, 너 미쳤어?”

우진이 거칠게 고함을 쳤다. 하지만 윤성은 끈질기게 시우의 시선을 붙잡고 서서 우진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선배 지금 입고 있는 옷이나 신발은 그렇다고 쳐요. 선배 말마따나 그 엄청난 고액 과외 해서 동생 병원비 치르고 남은 돈으로 샀다고 치자구요. 그런데 이건?”

윤성은 붙잡은 시우의 손목을 들어 보였다. 시우의 손목에는 그날 아침 드레스 룸에서 무경이 골라준 은백색 체인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요? 과외 해서 얼마 받아요? 아니 무슨 유명 교수도 아니고 일개 미대 휴학생이, 어이없어서. 백 보 양보해서 선배가 그런 과외를 한다고 믿어 준들, 과외 해서 병원비고 뭐고 다 제쳐 놓고 몇 달 벌어서 오더 메이드 시계 하나에 다 털어 넣었어요?”

“지금 무슨….”

시우는 도무지 윤성이 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계? 시계가 뭐. 좋은 거라고는 생각했다. 척 보기에도 좋아 보이고 부자가 사 준 거니 좋은 거겠거니 했다. 하지만 시우도 나름대로 유명 명품 브랜드 이름 몇 개 정도는 알고 있는데, 이 시계 브랜드는 생전 처음 보는 거였다. 그래서 크게 비싼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윤성이 하는 얘기를 듣자면 마치… 마치 이 시계가 엄청난 고가의 명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호빠로도 안 되겠네. 넘버원 에이스라도 옷, 구두 다 포기하고 시계 하나만 사지는 않을 것 같으니 틀림없이 누군가 VIP 고객이 선물로 줬을 것 같은데, 고작 호스트한테 이렇게 비싼 선물을 했을 리는 없고… 선배 혹시 누구 정부로 들어앉았어요?”

“이윤성!”

우진이 윤성의 어깨를 잡아채며 내지른 소리가 골목을 울렸지만, 시우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정곡이 찔려서 숨이 막혔다. 동공이 확장되고 뒷골이 서늘해졌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버린 옛 애인이 있는 앞에서 비참하게 실체가 까발려지는 건가. 눈앞이 핑 돌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고작 손목시계 하나 가지고 참 상상력도 풍부하지.”

갑자기 공기가 요동치듯이 일시에 주변의 향이 바뀌었다. 시원한 여름 숲에 관능적인 머스크 향이 은은하게 밴 듯한 향기가 주변을 장악했다. 오메가인 시우와 윤성은 물론이고 우성 알파인 우진조차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남의 소중한 애인한테 호스트니 정부니, 못하는 말이 없네. 그쪽은 이따위 손목시계 하나 사자고 몸까지 파나 봐요?”

긴 팔이 뻗어와 시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처음 맡아 보는 강렬한 극우성 알파의, 차무경의 향기가 아찔하게 시우의 전신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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