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CH 1 (1/24)

“그러니까.”

시우는 느릿하게 입을 열며 정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부 노릇을 하라는 거네?”

정윤이 한껏 돌려서 표현한 얘기를 시우가 한마디로 찍어 뱉는다. 정윤은 잠깐 당황하는 것 같았지만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와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다면야.”

“내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형이 말한 그런 일들이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그렇게 통칭되잖아. 약혼자가 있는 사람에게 숙식이랑 생활비 제공받으면서 정기적인 섹스 파트너 노릇을 하는 거.”

“네가 전에 호스트라도 뛰어야 하나,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길래 하는 말이야. 돈 필요하다며. 호스트보다야 부잣집 정부 노릇이 낫잖아?”

정윤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웃었지만 정윤은 웃지 않았다. 여전히 진지한 그의 얼굴에 시우가 웃음을 거두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대체 어떤 면에서?”

“일단… 보수가 훨씬 좋고? 계약 끝난 후에 뒷말 나올 걱정도 없잖아. 어차피 그쪽도 쉬쉬할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덜 축나잖아. 호스트는 날마다 술 마셔야지, 여러 명 상대해야지, 가게에 돈도 뜯기잖아. 쓰레기 같은 인간한테 잘못 걸리면 별 같잖은 갑질을 당할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아무리 처음에 2차 안 한다고 못을 박아도 호스트로 있다 보면 안 할 수 없게 돼 있어, 분위기가.”

정윤은 한숨 고르고 말을 이었다.

“이쪽은 얼마나 좋아. 계약대로만 하면 손해 볼 일은 하나도 없어. 폭행 같은 게 걱정되면 사전에 계약서에 집어넣으면 되고. 밤 상대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하면 되니까 나머지 시간은 다 네 자유야. 기간도 정해져 있으니까 딱 1년만 눈감고 매여 있으면 몇 년 생활비가 그대로 굴러들어 오는 거잖아.”

황당한 얘기를 청산유수로 뱉어 내는 정윤을 쳐다보며 시우는 새삼 낯선 느낌을 받았다. 정윤은 미술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다 만난 3살 위의 직장 동료다. 알고 지낸 지 1년 남짓 지나면서 술자리에서 사적인 얘기도 털어놓고 이런 저런 도움도 서로 주고받을 만큼 친한 사이가 됐다.

둘 다 싱글맘 아래에서 자랐고, 살아온 환경이 비슷해서 그런지 가치관이나 생활 방식 같은 것도 비슷했다. 생활이 어렵다거나 돈이 필요한 사정 같은, 남에게 쉬이 하기 힘든 얘기들도 자연스럽게 터놓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러한 공감대에서 가능했던 거였다.

그런데 자기와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했던 정윤이 어떻게 저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할 수가 있는지, 시우는 통 알 수가 없었다. 새삼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우가 술자리에서 호스트 얘기를 꺼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그야말로 갑갑한 마음에 그냥 한 번 툭 던져 본 소리에 불과했다. 그걸 정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저런 얘기로까지 연결시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근데 형은 어떻게 그런 얘기를 다 알고 있는 거야?”

그냥 이런 사람도 있다더라, 하는 지나가는 가십 얘기도 아니고, 콕 찍어서 너 같은 애를 찾는 부자가 있다는데 한번 만나볼래, 라니.

“그냥 우연히. 건너 건너… 라고 해야 하나. 내 애인 아는 사람이 그 부자의 수행 비서인데 어쩌다 그런 사람을 찾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대. 20대 중반에 키가 177 전후, 호리호리하고 깨끗한 외모에 조용한 성격이고… 무엇보다 극열성 오메가일 것. 딱 너잖아.”

어이가 없어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정윤은 그런 시우의 얼굴을 힐끗 보고 잠깐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뭔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얘기 듣고 딱 너다, 싶어서 재미 삼아 애인한테 네 사진을 보여 줬거든. 왜 전에 우리 놀러 갔을 때 내 핸드폰으로 찍었던 거 있잖아. 그걸 걔가 그 비서란 사람한테 넘겼대. 그리고 아마 그 비서가 그 사진을 부자한테 보여 줬나 보지? 그래서… 널 좀 보자고 한다나 봐. 마음에 든다고.”

***

그날 얘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어이없고 황당한 얘기를 그 이상 끌고 갈 이유는 없었다. 정윤은 딱딱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린 시우를 보더니 더 이상 그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시우는 나름대로 마음을 열었던 정윤에게 낯선 위화감을 느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시우는 더 이상 정윤에게,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려운 사정 얘기를 털어놓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시우에게 그런 얼토당토않은 제안이 들어오는 건 시우가 극열성 오메가임을 정윤이 알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알파든 오메가든, 우성이든 열성이든 사회 제도적으로 차별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거의 공식적으로 불임 판정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인 극열성 알파나 오메가의 경우 결혼 상대로는 정식으로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꽤 있었다.

특히 상류 계층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축한 권력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대를 잇는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탁월한 재능이 유전될 가능성이 높은 극우성 알파와 극우성 오메가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추구해 자기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갔다.

물론 일반인들은 그러한 편견과 차별에서 제법 자유로웠다. 극열성을 타고나 혼자만의 삶을 살든, 둘만의 가정을 꾸리든, 입양 제도를 활용하든 그건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개인이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쓰레기는 많은 법이어서, 특히 극열성 오메가를 진지한 교제 상대보다는 임신 걱정 없이 놀기 좋은 상대로 생각하는 인간들도 꽤 있었다. 시우도 사귀던 사람에게 한 번 차인 적이 있었다. 주변에서 같은 경우를 본 일도 있어서 평소엔 극열성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기고 다녔다. 극열성 오메가는 히트 사이클이 닥쳤을 때 아니면 페로몬도 거의 없는 편이고 유달리 선이 가늘고 고운 우성 오메가들과는 달리 외모적 특징도 두드러지지 않아서 베타로 오인 받는 경우가 많았다.

시우는 페로몬 향이 옅은 데다 일반적인 오메가들의 달달한 과일향이 아닌 청량한 계열의 향이 났다. 게다가 일반 오메가에 비해서 키도 조금 더 컸고 외모도 섬세하지만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베타는 알파나 오메가 형질에 영향을 받지는 않아도 그 향을 느낄 수는 있는데, 덕분에 시우는 좋은 향수를 쓴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는 베타 여성의 시선을 받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시우는 베타 남성으로 오인 받아도 굳이 오해를 고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베타 여성과 사귀지도 않을 텐데 그 정도 숨기는 건 그다지 큰 문제가 안 되리라고 생각했다.

시우는 기본적으로 연애나 결혼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인 편이었다. 처음 제대로 사귄 상대로부터 버려진 과거의 여파이기도 했고 퍽퍽한 현실 때문이기도 했다. 먹고사는 것 자체가 고역인데 연애니 뭐니 로맨틱한 감정에 들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사랑이란 건 감정적 사치였다. 있는 자들을 위한 유희 같은 거라고 여겼다.

***

정윤의 불쾌한 얘기도 어느 정도 잊혀진 날이었다. 시우에게 낯선 이의 방문이 있었다. 낡은 원룸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서 있는 길가에 평소에는 보기 드문 고급 승용차가 한 대 주차돼 있었다. 당연히 저와는 상관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나치려는 찰나, 문이 열리며 정장 차림의 남자 하나가 내려섰다.

“연시우 씨, 맞으시죠?”

의아한 얼굴로 시우가 걸음을 멈췄다. 턱을 파묻고 있던 머플러를 조금 내리자, 입에서 나온 숨이 뽀얗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런데요… 누구시죠?”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시우에게 건넸다. 검은 바탕에 금박으로 글자를 새긴 명함에는 앞면에 ‘서진명’이란 이름 석 자, 그리고 뒷면에 비서실장이란 직함과 연락처만이 달랑 적혀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 소속이라는 건지도 알 수가 없는 수상쩍은 명함이었다.

시우가 힐끗 시선만 들어 서진명이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미심쩍어 하는 표정을 평온한 얼굴로 마주 보며 남자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한정윤 씨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저희 쪽 얘기를 얼핏 지나가는 식으로는 들으셨다고요.”

술자리에 마주 앉았던 정윤의 얼굴과 ‘부잣집 정부’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치는 순간, 시우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순식간에 기분이 내려앉으며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시우는 확인 차 더듬듯이 몇 마디를 더 꺼내 던졌다.

“그… 극열성 오메가를 찾으신다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 사살이다. 시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려는 감정을 간신히 눌러 다스리며 시우는 표정을 지우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이라면 헛걸음하셨네요. 관심 없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돌아서서 가려는 길을, 언제 내렸는지 또 다른 검은 정장의 남자가 민첩하게 막아섰다. 시우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짧은 머리카락에 건장한 체구를 하고 있어서 척 보아도 힘 꽤나 쓰는 사람으로 보였다. 열 받는 와중에도 헛웃음이 샜다.

“이건 뭐 하는 짓이죠? 지금 힘으로 저를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눈짓으로 젊은 남자를 물리면서, 진명이 다시 천천히 시우의 앞으로 와서 섰다.

“다 듣고도 싫으시다면 저희는 그냥 조용히 물러갈 겁니다. 하지만 얘기는 좀 들어주세요. 어떤 조건인가 하는 것만 말입니다. 저희도 그저 밑에서 일하는 입장이라, 이 정도는 해야 윗사람한테 가서 할 만큼 했다고 얘기라도 하지요. 조건만 말씀드릴 거고 설득을 하려 끈질기게 구는 일은 없을 겁니다. 30분, 아니 20분만 주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

“들어오세요.”

시우가 문을 열고 좁은 집 안으로 진명을 들였다. 생활 공간이라 그리 심하지는 않다지만 그림 그리는 사람 특유의 물감 냄새가 꽤 선명하게 끼쳤다. 창문을 여는 동안 진명이 찬찬히 방 안을 훑어보았지만 시우는 진명의 그런 시선을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기야 신경을 쓴다면 타인을 이곳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 집에 가자고 먼저 제안한 건 시우였다.

‘이런 수상쩍은 분위기로 동네를 어슬렁거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늘 처음 뵌 분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것도 내키지 않네요. 그리고… 그런 얘기를 동네 카페 같은 데서 하고 싶지도 않고요….’

시우는 잠깐 말을 끊고 뭔가 생각하는 것 같더니 힐끗 진명을 보았다.

‘어차피 집 주소 알고 오신 거지요? 그런 제안을 하시는 걸 보니 제가 어떻게 사는 지도 대충 아실 것 같고… 차라리 제 집에 가죠. 좁아서 좀 불편하시겠지만 20분 정도는 참으실 수 있으시죠?’

그렇게 들어온 시우의 집은 진명 생각보다 더 좁고 단출했지만 의외로 그리 초라한 느낌은 아니었다.

원룸 형태의 좁은 집 안에 보이는 가구는 싱글 침대와 커다란 테이블, 옷장, 그리고 의자 두 개가 다였다. 하나같이 새 물건 같지는 않았는데, 본인이 한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다 깨끗하게 페인트칠이 되어 있어 겉보기에 멀쩡할 뿐더러 벽의 색감과도 잘 어울려 나름 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캔버스라든가 물감 통 같은 그림 도구가 흩어져 있고 테이블 위에도 그림용으로 보이는 태블릿 기기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의 집이라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단지 모서리에 살짝 금이 간 구형 태블릿은 척 보기에도 굉장히 낡아 보여서 제대로 작동이나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방이 따뜻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따뜻한 거라도 좀 드실래요? 인스턴트 밖에 없긴 하지만.”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기를 권한 시우는 환기하느라 열어 둔 창문을 얼핏 보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시우 씨 드시고 싶으면 드십시오.”

시우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구석 싱크대 위에 놓인 큰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반 컵 정도 마시더니 손등으로 입을 훔치며 진명의 앞자리로 돌아왔다.

“자, 그래서 말씀하신 조건이란 게 뭔가요?”

하얀 얼굴에는 처음 마주쳤을 때 떠올랐던 황당한 불쾌감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평범한 사업상의 계약 이야기라도 하는 듯, 다소 건조한 표정과 어투로 시우는 용건을 꺼내 보라고 요구했다. 시우의 얼굴을 잠깐 훑어본 후, 진명은 들고 온 봉투에서 종이를 몇 장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계약서 초안입니다. 물론 달리 원하시는 게 있으면 협의를 거쳐서 조건 변경 가능하고요, 오늘은 몇 가지 중요 사항만 짚어 드리겠습니다.”

진명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계약서의 몇 부분을 짚어 나가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계약 기간은 1년입니다. 시우 씨가 계약에 동의하면 일단 저희 쪽에서 제공하는 숙소에 들어와서 사셔야 합니다. 이쪽 집은 정리하시고, 지금 하시는 일도 다 그만두셔야 할 거구요.”

진명은 잠깐 말을 끊고 힐끔 시우의 표정을 살폈다.

“문자로 사전 연락이 가긴 할 테지만 심하게 아프다든가 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언제든지 시간을 내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기본 조건입니다.”

“그렇겠죠. 그러라고 들이는 정부일 테니.”

남일처럼 심드렁하게 시우가 말을 받았다. 진명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자, 아직은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럼 이건 어떨까.

“가장 중요한 게 이 부분이겠죠. 금전 문제인데, 일단 계약을 하시게 되면 계약금 조로 당일 2억 원이 바로 지급될 거고요, 이후에 3개월 단위로 2억 원씩 지급되어 계약 종료 시 총 10억이 시우 씨에게 지급될 겁니다.”

뒤 페이지를 넘겨 금액 부분을 짚어 나가자 무덤덤했던 시우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진명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돈이 급한 서민에게 10억이 애 이름도 아니고. 이 정도 금액에 흔들리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지.

“카드도 한 장 드릴 텐데 그걸로 외출하실 때 식사나 쇼핑, 여타 문화생활 하시는데 쓰시면 될 겁니다. 물론 다 저희 쪽으로 청구가 되는 거니까 부담 없이 쓰시면 되고요. 생활비도 집안 관리 해 주시는 분이 알아서 식사부터 다른 생활 관련 문제 전부를 처리해 주실 거니까 따로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또 하나… 동생분이 아프신 걸로 알고 있는데 병원비 일체도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시우 씨는 계약 기간 동안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그 분한테만 충실하시면 되는 겁니다.”

진명은 말을 마치자 다시 계약서를 정리해 시우 앞으로 밀어 놓은 다음 테이블 위로 깍지 낀 두 손을 올리고 시우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시우는 여전히 동요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놀란 얼굴이었다. 부잣집이라고 들었어도 이 정도 금액을 제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저희 쪽 얘기 전해 들으시고 상당히 불쾌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평범한 월급쟁이 입장에서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이 정도 조건이면 조금쯤 무리해도 좋지 않을까요. 너무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 마시고, 그냥 편안하게 돈 많은 상대와 연애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분은 아직 젊으시고 외모도 훌륭하십니다. 성격도… 음….”

진명은 잠깐 말을 끊었다. 단어를 고르는 눈치였다.

“꽤… 점잖으신 분입니다.”

그리고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리고 이건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오프 더 레코드로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이 정도 금액은 저희 같은 사람들한테나 큰돈이지 그분한텐 딱히 돈도 아닙니다. 계약이 끝날 때 좋은 인상을 주셨다면 더 큰 금액의 위로금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수억대의 고급 승용차나 수십억대의 빌라 한 채 정도는 보너스로 받으실 수 있을 거고요. 그분 마음에만 드신다면 수백, 수천만 원대 선물도 계약 기간 동안 수시로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다 시우 씨 하기 나름이라는 거죠.”

***

10분 후 진명은 시우의 집에서 나와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의 기완에게 출발하라고 지시하고 진명은 조금 지친 표정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 차창 밖을 내다보는 그의 얼굴 표정이 미묘했다.

‘맹랑한 친구네… 늑대한테 물릴 불쌍한 토끼를 생각하고 왔는데 만만치 않겠어.’

진명은 마지막으로 본 시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쓰게 웃었다.

***

한참을 제 앞에 놓인 종이를 들여다보던 시우가 마침내 얼굴을 들었다. 잠깐 사이에 요란스럽게 흔들리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어라 말할 듯이 잠깐 입을 달싹이다가 다시 닫고, 시선을 잠깐 돌렸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피식 김빠지는 미소를 지었다. 진명은 말없이 그 모든 표정 변화를 지켜보며 조용히 시우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세네요. 이 돈. 있는 분들한텐 푼돈이라지만, 한 달에 다리 몇 번 벌려 주고 1억 가까이 받는 셈이잖아요. 밤잠 줄여 가며 닥치는 대로 일해서 저는 이거의 50분의 1을 간신히 버는데, 돈 벌기 참 쉽네요. 생각만 좀 바꾸면.”

자조적인 말투에 진명은 힐끗 눈썹을 치켰다.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탐색하려는 듯 찬찬히 시우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말을 고르는 듯 또 입을 다물고 종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우의 얼굴에서 긍정적인 답이 나올지 부정적인 답이 나올지를 가늠하기란 어려웠다.

“제가 무슨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 고급 호스트도 아닌데 억 단위라니… 아, 그런 분들은 더 비싼가요? 이건 그나마 제가 일반인이어서인가?”

불쑥 중얼거린 말에 진명은 조금 당황했다. 제 상사가 딱히 계약 금액에 상한선을 둔 것은 아니었다. 시우의 상황을 파악한 후 이 정도면 넘어오겠지 싶은 금액을 서진명이 적당히 책정했을 뿐이다. 넘어올 만한 수준이면서 동시에 계약 파기는 어려울 정도의 금액. 그런데 혹시 보기보다 돈 욕심이 더 많은 친구인가.

진명이 뭐라고 하려는데 시우가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던 듯 곧장 진명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제의는 감사한데… 라고 말하기도 좀 애매하네요. 솔직히 감사할 일은 아닌 것 같고… 뭐, 답은 거절입니다. 더 질질 끌 것도 없을 것 같네요.”

필요 없다는 듯 시우가 눈앞의 서류를 진명에게 밀어내는 걸 진명이 다급하게 잡아 눌렀다.

“연시우 씨, 혹시 금액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아니요, 이 정도도 저한테는 차고 넘칩니다. 아니다… 부족하네요. 그분이 얼마나 부자이신지는 몰라도 도저히 값을 치르지 못할 만큼 부족합니다. 제 몸뚱이 자체는 그리 비싸지 않아요. 별로 튼튼하지 못해서 노가다를 뛰어도 10만원도 채 못 받으니까요. 그런 몸을 공사판에서 굴리든 침대 위에서 굴리든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하지만 이 경우에 파는 건 사실상 제 몸이 아니잖아요. 제 자존감과 가치관을 파는 거잖습니까. 1년간 자존감 내려놓고, 가치관 뒤집어서 살라는 거잖아요. 그러니 10억을 주든 20억을 주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시우 씨, 계약서에 적힌 금액은 더 올려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그분이 시우 씨에게 만족하시면, 집이든 차든 그저….”

“저는 약한 인간입니다, 서진명 씨.”

시우가 다시 진명의 말을 잘랐다.

“집안일도, 아픈 동생 걱정도 할 필요 없이, 일주일에 한두 번 섹파 노릇을 하는 거 외에는 온전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면 제가 온전히 지금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통장엔 꽤 거액이 쌓여 있겠지만, 1년 동안 누린 호사가 몸에 밴 상태에서 그 돈이 과연 얼마나 갈까요. 저는 썩을 겁니다. 그렇게 심지가 굳은 인간이 못 돼요. 너무 쉽게 돈 버는 데 맛이 들려서 더 이상은 지금처럼 일을 못할 겁니다.”

시우는 담담한 어조로, 하지만 진명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저 터무니없는 농담처럼 호스트나 될까, 얘기하고 웃지만 그때가 되면 어떨까요. 밤낮없이 일하고 사람들 비위 맞추느라 스트레스 받으면서도 고작 수중에 떨어지는 건 생활비로도 빠듯한 푼돈뿐이고… 그러면 슬그머니 딴 생각이 나지 않을까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호스트가 낫지 않을까, 아니 또 어디서 정부를 구하는 다른 눈 삔 부자는 없을까….”

시우는 단호하게 제 앞에 놓인 서류를 진명의 앞으로 밀었다.

“이건 저한테 그야말로 악마와의 계약입니다. 유혹하지 말고 돌아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서진명 씨.”

***

진명이 나간 후 시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흰 종이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넋을 놓았다. 진명은 별말 없이 자리를 떴지만 계약서는 기어이 그냥 두고 나갔다. 그가 있는 동안은 애써 담담한 척 했지만, 혼자 남은 지금은 주먹을 꼭 쥐고 있지 않으면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모든 신경이 흥분 상태였다.

현금만 10억. 게다가 지금 가장 시우의 목을 죄고 있는 동생의 병원비는 별도다.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시우가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이었다. 끌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1년만 눈 딱 감으면 되는 거였다. 입만 다물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터였다. 서진명이 조금만 더 질기게 매달려 설득했다면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아니, 솔직히 그래 주었으면 싶은 마음도 어디 한구석엔 있었다. 못 이기는 척 넘어갈 수 있도록 매달려 주었으면. 잘난 척 나가 달라 했지만, 그를 급하게 쫓아낸 건 그 때문이었다. 되레 자신이 그를 붙잡고, 어디다 서명하면 되냐고, 금방이라도 추하게 덤벼들 것만 같아서 겁이 났었다.

그 생각이 들자 시우는 불에 덴 듯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의 하얀 종이를 다시는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주머니를 뒤져 앞서 받았던 명함도 찾아냈다. 특수 재질이라 찢어지지도 않아서 가위를 찾아내 조각조각 잘랐다. 그리고 반도 채 차지 않은 쓰레기봉투를 묶어서 그대로 바깥 쓰레기 수거함에 내다 버렸다. 그 와중에도 시우의 손은 약에라도 중독된 사람처럼 줄곧 떨리고 있었다.

***

- 어떻게 됐습니까?

전화를 받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묻는다. 조금 나른하면서도 건조한 목소리.

“어….”

상대방이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진명은 겸연쩍게 턱을 긁었다.

“안 넘어오던데요. 보기보다 성격이 있더라고요. 저 악마 취급 받았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픽 웃는 숨소리가 넘어왔다.

- 진짜 악마를 못 봐서 그렇지. 아직 순진하다니까.

“어떡할까요?”

- 뭘 어떡합니까. 계획대로 해야지. 망가지지만 않게 해서 데려와요.

그리고 뚝, 제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다. 아, 진짜 매너하고는. 매번 당하는 일이면서도 진명은 통화 종료를 선언하고 있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번져가는 차창을 톡톡 두드리며 진명은 서늘하고 단정한 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의외로 강단 있는 성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부류의 인간이 오히려 무너지기는 더 쉬운 법이었다.

망가지지만 않게, 라….

진명은 제 상사의 말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하는 일 자체가 그 친구를 망가뜨리는 짓인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

4개월 후.

진명은 상사의 서재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고 상사에게 보여 주니 손가락을 까딱한다. 진명은 전화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스피커폰을 켰다.

“네. 서진명입니다.”

- 저… 연시우라고 합니다. 혹시 기억하십니까?

“네, 그럼요.”

- 일전에 하신 제의….

지친 목소리가 낮게 울리더니 망설이듯 다시 끊긴다.

“말씀하십시오.”

격려하듯 진명이 부드럽게 말했다.

- 그거 아직 유효한가요?

한숨을 뱉으며 시우가 말을 이었다. 진명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어렸다.

“물론입니다. 언제 뵐까요?”

***

만날 약속을 정하고 통화가 종료되자 진명의 상사는 톡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4개월인가… 꽤 버텼네. 한정윤에게 실장님 번호를 물어본 게 한 달 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명은 날짜를 곱씹었다. 그렇다. 시우가 진명의 전화번호를 알아 갔으니 곧 연락을 할 거라는 정윤의 전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한 달 남짓 시우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쌓여 가는 연체 이자 속에서도 고민이 길었던 모양이다.

“생각이 많은 친구인 것 같습니다.”

흐음.

상사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숨을 뱉으며 턱을 괴고 시선을 내렸다. 건조한 표정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손에 가려진 입꼬리가 보일 듯 말 듯 살짝 올라가는 걸, 오랜 시간 보아 온 진명은 느낌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결국 저질러 버렸다.

시우는 핸드폰을 쥔 손을 힘없이 떨어뜨리고 털썩 의자 등받이에 늘어지듯 몸을 기댔다.

흐흐….

제 꼴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자존감이 어째? 가치관이 어쨌다고? 10억이 아니라 100억을 준다고 해도 안 할 것처럼 굴더니 결국 이 꼴이다. 절 기억하냐고 서진명에게 묻던 제 목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맴돌았다.

아… 젠장….

시우는 멀쩡한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아….

긴 숨을 뱉으며 시우는 제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붕대가 칭칭 감겨 어깨에 삼각건으로 매달려 있다. 다친 순간에는 그게 오른팔이 아니라는 데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림을 못 그리게 될까 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하지만 안도한 것도 잠시, 팔을 다쳐 일을 못하게 되자 갑갑한 현실이 해일처럼 시우를 덮쳤다.

지난 4개월은, 그야말로 믿지도 않는 점집에 찾아가서 액막이 굿이라도 봐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

시작은 학원이었다.

저를 둘러싼 분위기가 갑자기 묘해졌다는 자각은 있었다. 지나가면 이상한 시선으로 계속 쳐다본다든가 모여서 뭐라고 쑥덕대다가도 시우가 나타나면 갑자기 입을 꾹 다문다든가. 그래도 딱히 무슨 잘못을 저지른 기억도 없고 찔리는 구석도 없었기에 시우는 그저 꿋꿋하게 제 할 일만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학원장이 사무실로 호출을 한 것이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40대 중반의 원장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성규 씨와 문정인 씨 아시죠?”

“네. 개인 교습 받는 분들입니다. 전에는 성인반 교습생들이었구요.”

학원을 끼고 연결된 사람들이었다. 꽤 많은 수수료도 챙겼으니 학원에서 불쾌하게 여길 일은 없을 텐데 뭐가 문제지, 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배우자 분들한테서 항의 전화가 왔습니다. 그분들과 사적인 만남을 가지시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적인 만남이라니, 수업은 학원에서 이루어졌고 학원 밖에서 따로 만난 적은 없었다. 간혹 교습생들로부터 감사하다며 식사나 한 끼 사고 싶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시우는 매번 거절했다. 물론 딱히 별다른 의도가 있다고 여겨져서 거절한 건 아니었고, 단지 만나고 싶어도 시우에게 그럴 시간이 없어서 미안해하며 거절한 거였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학원에서 수업하는 것 외에 따로 만난 일도 없는데요.”

“저도 뭐, 연 선생님 하루 이틀 겪는 것도 아니고,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어요. 단지 문제는 이 소문이 어떻게 된 건지 학원 전체에 사실인 것처럼 퍼져 버렸다는 겁니다. 성인반에서도 수업 분위기를 해친다는 불만이 접수되고 학생반에서도 애들에게 나쁜 영향 미치는 거 아니냐는 학부모 항의가 속출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학원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어서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원장은 마침내 본론을 꺼내 놓았다.

“연 선생님. 죄송하지만 한동안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탁드릴게요. 내일부터 출근 안 하셔도 됩니다. 이번 달 급여는 날짜를 다 채우신 걸로 정산해 드리겠습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 일은 입소문에 신경 써야 하는 장사라는 거 이해하시지요? 조금 잠잠해지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이런 일은 시간이 약이니까요. 저희도 연 선생님 일손이 주는 건 너무 아깝습니다. 성실하시고 실력도 있으시니까 사실 어딜 가도 잘 되실 분이잖습니까. 이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좋은 말로 시우를 달랬지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명확했다. 해명한답시고 문제 크게 만들지 말고 조용히 사라져 달라는 얘기겠지.

하루아침에 학원에서 내쫓긴 시우는 참담했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한동안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일 년간 일한 이 미술 학원은 시우에게 물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규모가 큰 유명 학원이어서 교습생도 많았고 시우는 꽤 인기를 끄는 강사였기에 학원에서 소개해 주는 개인 교습까지 합치면 빠듯하게나마 동생의 병원비와 자신의 생활비를 꾸려 나갈 수 있었다.

물질적인 이유 외에도 좋아하는 그림을 놓지 않으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시우에겐 소중한 곳이었다. 학교를 휴학해 마땅히 그림을 그릴 작업실도 없는 그에게 빈 강의실은 그의 작업실이 돼 주었다. 그동안에는 시우도 현실의 시름을 잊고 창작에 몰두하는 작은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커다란 생활의 한 부분이 갑자기 쓱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애써 마음을 추슬러 다른 학원을 알아보려 했지만, 이미 대형 학원가에는 시우의 소문이 퍼진 듯했다. 이력서를 내면 연락이 없었고 전화를 하면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지금은 자리가 없다고 말을 돌렸다. 그렇다고 변두리의 작은 학원들을 알아보자니 시간은 시간대로 빼앗기고 보수는 어이없을 정도로 적어서 병원비는커녕 생활비조차 빠듯한 수준이었다.

시우는 하는 수 없이, 몇 번 해 보다 그림 그리는 손을 다칠까 봐 피했던 막노동을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사실 몸은 힘들어도 현금을 쥐는 데 그만한 일은 없었다. 아니… 없진 않나. 호스트라든가 정부라든가…. 지쳐 버린 밤에 멍하니 있다 보면 여지없이 그런 단어들이 몽롱한 의식을 뚫고 떠올라 끈질기게 시우를 괴롭혔다.

그런 와중에도 석 달쯤 지나자 그럭저럭 육체노동도 몸에 익기 시작했다. 하얗던 피부도 제법 짙게 그을고 그간 쓰지 않던 신체 부위에도 근육이 잡혔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쉬면서 동생 지우를 찾아가 놀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아. 버틸 수 있어. 시우는 주문처럼 되뇌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던 차에 나쁜 일이 겹쳐서 터졌다. 공사장에서 동료의 실수로 팔을 다치고 말았다. 당연히 더 이상 일은 나갈 수 없었고 시우는 꼼짝없이 두 달은 쉬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갑자기, 아동 병동에 있으면서 정기적으로 특수 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던 지우가 급격히 상태가 악화됐다는 연락이 왔다.

***

지우의 병은 일 년 전 갑자기 시작되었다. 감기에 걸린 듯해서 단골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호르몬에 이상이 생겼다고 했다.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난치나 불치는 아니라며 의사는 불안해하는 시우에게 크게 걱정할 건 없다고 했다. 치료비도 의료 보험이 적용될 거라고 해서 그 병원에서 치료를 시작했는데 어느 날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시우를 따로 불렀다. 생각보다 증상이 심각하니 종합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 보라는 이야기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소개해 준 병원을 찾아 갔는데 검사 결과는 참담했다. 우성 알파인 동생 지우가 원인 모를 호르몬 이상으로 열성, 혹은 베타로 변할 가능성이 있으며, 신체 전반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내분비계의 혼란으로 각종 합병증을 가질 위험이 높다고 했다. 더불어 시력과 청력에도 심각한 저하가 일어날 수 있다는 소견이 따라붙었다.

당시 시우는 졸업을 1년 앞둔 미대 3학년이었고 지우는 고작 열 살 어린 아이였다. 2년 전 싱글맘이었던 시우의 모친 역시 지병을 앓다가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형제의 수중에 남겨진 돈은 얼마 없었다. 살던 집을 더 작고 허름한 곳으로 옮기고 시우는 대학을 휴학했다.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아픈 지우를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어서 의사의 권고대로 아동 복지 병동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다행히 생활이 어려운 미성년 환자의 경우 국가 보조로 입원 생활을 하면서 치료도 받고 공부도 할 수 있는 복지 제도가 있었다. 물론 보조를 받는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적지 않았고, 지우의 경우 보험 적용이 안 되는 특수 호르몬 주사도 정기적으로 맞아야 했기에 시우는 매달 벌어들이는 돈의 대부분을 병원비로 쏟아 부어야 했다.

“미안해, 형.”

아직 어린 나이에 혼자 떨어져서 생활하는 게 많이 외로울 텐데도, 외롭다는 말은커녕 지우는 형을 보면 눈도 제대로 못 맞추고 고개부터 떨궜다.

“그런 소리 마. 누가 공짜로 해 준대?”

결이 고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시우는 아픈 마음을 감추고 웃었다.

“너는 아무 생각 말고 건강해지기나 해. 열심히 공부하고 여기 선생님들 말씀도 잘 듣고. 나중에 커서 돈 많이 벌면 다 갚아야 한다. 난 지금 너한테 투자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 그제야 슬며시 작은 머리를 들고 웃으면서 눈을 맞췄다.

“걱정 마. 내가 크면 형 보호자 노릇 제대로 할 거니까. 형은 그림만 그리면서 살 수 있도록 내가 호강시켜 줄게.”

“그래, 기대할게.”

자식들 어릴 때 하는 말 믿는 거 아니라고 공사판 아저씨들이 하나같이 한숨을 쉬며 입을 모으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들으면 기특해서 마음이 뿌듯해진다. 시우는 동생의 보드라운 뺨을 만지며, 그래도 제 외로운 인생에 이렇게 자식 같은 동생이라도 있어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시우의 인생에서 살아가는 의미라고 한다면 그림과 동생, 단 둘 뿐이었으니까.

***

그런데 그런 동생이 갑자기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시우는 자다 말고 새벽에 전화를 받고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해서 어떻게 병원에 찾아갔는지도 몰랐다. 지우는 산소 호흡기를 부착하고 온몸에 알 수 없는 복잡한 선들을 연결한 채 누워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만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이야기하며 함께 밥을 먹었던 게 고작 이틀 전이었는데.

“계속 투여해 오던 호르몬제에 갑자기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여러 가지 다른 수치들도 불안한 양상을 보이고 있고… 한동안은 중환자실에 머물면서 검사를 좀 더 해 봐야겠습니다.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드문 케이스라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담당 의사의 말을 듣고 반쯤 넋이 나간 시우에게 병원 원무과는 길고 복잡한 계산서를 들이밀었다. 기존 병원비 외에도 훌쩍 늘어난 갖가지 검사비와 진료비, 약값으로 병원비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물론 이 비용은 지우가 중환자실에 있는 동안 계속해서 불어날 예정이었다.

오늘 받은 청구서는 2주일 안으로만 계산하면 된다고 원무과 직원이 자못 친절한 척 말했지만, 팔을 다치는 바람에 일을 못하게 된 시우는 기존의 병원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추가로 불어난 병원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계산이 서질 않았다.

더는 뺄 보증금도 없었고 돈을 빌릴 인맥도 없었다. 강사로 일할 때 만든 세 장의 카드는 이미 상한선까지 현금 서비스를 받은 상태인데다 돌아오는 기한에 그걸 갚을 방법조차 막막했다. 날짜 안에 갚지 못하면 신용 불량자로 등록될 것이다. 정식 취업 시에 문제가 될 게 뻔했다. 마지막 보루로 알아 본 후원 방송은 온갖 불행한 사연이 넘쳐나 지우 차례가 돌아오기도 요원해 보였다.

직장도 담보도 없이 조만간 신불자가 될 시우가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라곤 이제 한군데뿐이었다. 사채. 시우의 주머니에는 돈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정체불명의 명함이 몇 장 들어 있었다. 예전 같으면 시선조차 주지 않을, 범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쓰레기 조각이었다. 그 종이 조각들을 떠올리자, 원금의 몇 배는 순식간에 뛰어넘는 이자 폭탄이라든가 그걸 갚지 못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인신매매라든가 장기 밀매 같은 흉흉한 단어들이 동시에 떠올라 머릿속을 소용돌이쳤다.

시우는 멀쩡한 한쪽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길이 안 보였다.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아무리 살아 보려고 발버둥 쳐도 누군가 자꾸 죽으라고 절벽으로 떠다미는 것 같았다. 차라리 죽을까. 그러면 이 미칠 듯한 고민도 스트레스도 전부 다 사라져 버리는 건가.

하지만 내가 죽으면 지우는 어떡하지. 저마저 없어지면, 지우는 누구 하나 돌봐 주는 사람도 없이 어딘가의 구호 병원에 방치돼 쓸쓸히 죽어갈지도 모른다. 이제 세상에 나온 지 10년도 안 된 어린아이인데. 내가 크면 형이 그림만 그리면서 살 수 있게 해 줄게, 하고 으스대듯 말하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시우는 허리를 펴고 이를 악물었다. 지우가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죽는다는 생각은 지워야 했다. 진창에 구를지언정 자살한다는 선택지는 있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시우는 핸드폰을 꺼내 한정윤의 번호를 찾았다. 서진명의 연락처가 필요했다.

그를 만난 지 3개월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아마 그 ‘부자’는 이미 마음에 드는 다른 극열성 오메가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알아봐야 했다. 그 사람은 물에 빠진 시우에게 남은 유일한 지푸라기였다. 아니,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

계약 성립.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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