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와 늑대의 시간 외전 (19/19)

유유자적(悠悠自適)

가방. 나비. 다리미.

삐뚤빼뚤한 글씨가 종이에 새겨졌다. 연필을 움켜쥔 연우는 한껏 집중한 듯 입술을 앙다문 채였다.

라디오. 마술. 바가지. 사과. 아기. 자전거…….

‘가나다’를 완벽하게 떼고 단어를 외우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연필을 꽉 움켜쥔 손에 흑연이 묻어났다.

‘가’부터 ‘자’까지 쉼 없이 써 내려가던 연우가 불현듯 행동을 멈췄다. ‘자’ 뒤에 이어지는 글자가 ‘차’이기 때문이었다.

검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연우가 흉터 가득한 손으로 연필을 고쳐 쥐었다. ‘차’ 자를 쓰는 연우는 이례가 없을 정도로 긴장한 모습이었다.

차현.

마침내 완성된 단어는 앞에 쓴 글자보다 반듯하고 단정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연우의 눈동자에 뭉글뭉글한 감정이 떠올랐다. 고작 두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를 쓸 줄 알게 됐을 뿐인데, 자신이 굉장히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연우는 충동적으로 이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졌다. 종이에 붙박여 있던 시선이 번쩍 위를 향했다.

“연우야.”

맞은편에 앉아 내내 연우를 바라보던 차현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연우를 부르는 목소리는 그의 시선만큼이나 다정했다.

“아직 다 안 썼잖아.”

그러나 그와 별개로, 차현은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연우는 시선을 내려 종이를 보았다. ‘카, 타, 파, 하’로 시작하는 단어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기대감에 부풀었던 연우의 어깨가 작게 늘어졌다.

멈췄던 손이 다시금 느릿느릿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연우의 턱 밑에 손이 닿았다. 연우의 고개를 조심스레 들어 올린 차현은 잔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또 죄송하다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타박이라기보다는 칭찬처럼 들렸다. 그렇기에 연우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죄송하다는 말, 너무 많이 하지 마.’

과거에 들었던 말 하나가 뒤늦게나마 떠오르지 않았다면, 별것 아닌 말로 치부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자꾸 그러면 벌줄 거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연우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었다. 그것이 벌이란 듯이.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연우는 머리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차현이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춰 왔다.

맞닿은 입술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연우는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 새로 나지막한 숨이 흘러나오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읏.”

차현은 연우의 아랫입술을 느긋이 머금었다. 처음엔 입술로, 뒤이어 이로 짓씹었다.

연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애태우듯 이어지는 감촉에 조바심이 일었다. 혀를 얽고 숨을 나누고 싶은데, 그는 쉽사리 허락해 주지 않았다.

연우는 고개를 치켜들고 차현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더 깊이 입 맞추고 싶다는 저 나름의 의사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우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별것 아닌 걸로 사과하지 마. 너는 그럴 수 있으니까.”

느리게 입술을 떼어 낸 그가 연우의 젖은 입술을 엄지로 문질러 닦았다. 연우는 입을 벙긋거렸다.

이런 벌답지 않은 벌을 주기에 더 고쳐지지 않는다는 걸, 차현은 진정 모르는 걸까.

“마저 써. 이제 안 건드릴 테니까.”

……더 건드려도 되는데.

아쉽게도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맞은편에 다시 앉은 그가 ‘차현’이 적힌 종이에 시선을 고정했기 때문이었다.

“…….”

어깨를 늘어트린 연우는 ‘카’를 끄적거렸다. 뒤이어 ‘메라’를 적으려는데, 단정한 손이 불쑥 종이 위로 끼쳐들었다.

“이거.”

남자의 손끝이 ‘차현’을 가리켰다.

“내 이름만 글씨체가 다르네.”

보기 좋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들뜬 것같이 들렸다.

“다른 건 이렇게 무성의하게 썼는데……. 그렇지?”

눈이 마주쳤다. 검푸른 빛을 띠는 눈동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연우는 일순 숨을 멈췄다.

그는 때때로 이런 조급한 시선을 보낼 때가 있었다. 사소한 것에서도 애정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처럼.

“네.”

연우는 작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어쩐지 크게 말할 수 없었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조금 부끄러운 것도 같았다.

그 순간 남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휘어지는 눈동자에 반짝이는 기쁨이 서렸다. 아름다운 미소였다. 연우는 호선을 그리는 눈동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

그래서였다. 남자의 숨결이 아주 가깝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건.

순식간에 입술이 겹쳐졌다.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커다란 손이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벌어진 입술 새로 느껴졌다. 두터운 혀가 밀려들어 왔다.

“으, 응.”

방금 전처럼 입술만 핥고 떨어지는 키스가 아니었다. 연우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치열을 훑은 혀가 입 천장을 긁었다. 오싹한 쾌락이 등허리를 간질였다. 혀가 뭉개지는 곳마다 열이 올랐다.

“우읏…….”

틈 없이 부딪쳐 오는 키스는 거칠지 않았지만, 조급했다. 그는 연우의 숨 하나까지 모두 제가 삼켜야 직성이 풀린다는 듯 굴었다.

집요한 입맞춤은 곧장 쾌감으로 이어졌다. 목 안에서 신음이 울렸다. 숨이 가빠지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온 신경이 차현에게로 쏠려 다른 것은 인식조차 할 수 없었다. 남자가 빨아들이는 혀가 뜨겁고 화끈거려서 곧 녹아 버릴 것 같았다.

“흣.”

뺨에 머물던 커다란 손이 뒷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척추 뼈를 따라 내려오던 손이 불쑥 옷 안으로 침범했다. 고작 그뿐인 접촉인데도 어깨가 움칠 떨렸다. 심장이 요란하게 박동하고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틈 없이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연우는 감았던 눈꺼풀을 떠 눈앞의 이를 바라보았다.

차현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연우는 입술을 빠끔거렸다. 숨이 부족해 헐떡거리는 입 안에 아직도 남자의 혀가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연우야.”

그는 연우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젖은 입술이 축축한 소리를 내며 목덜미로 내려왔다.

연우가 쥐고 있던 연필은 어느새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미 연우는 차현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 있었다.

“……연우야.”

그의 목소리가 열풍이 되어 몸 곳곳을 덥게 만들었다. 뜨거운 입술이 얇은 목덜미의 살갗을 지분거렸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차현의 목을 휘감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아해.”

그의 고백은 불시에, 스스럼없이 토해졌다. 연우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늘 자극적이었다.

“하.”

연우의 목덜미를 씹던 차현이 작은 한숨을 토해 냈다. 피부에 닿는 뜨거운 숨이 그가 흥분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흣.”

차현이 내뿜는 열기가 불처럼 옮겨붙었다. 연우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손끝에 걸린 옷소매가 구깃구깃 구겨졌다.

커다란 손이 웃옷을 헤치고 들어와 움푹 파인 배꼽을 스쳤다. 성감이 스멀스멀 등골을 기어올랐다. 가슴팍에 돋아난 돌기를 건드리는 손길에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으…….”

“연우야.”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귓불에 닿은 입술이 말캉했다. 촉촉 맞부딪치는 소리가 뇌를 울렸다.

달칵.

그 순간 테이블이 치이는 소리가 났다. 연우는 혼몽한 정신을 깨우는 소음에 눈을 떴다. 차현의 다리에 테이블이 걸린 것이다.

“하…….”

장애물 탓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게 된 차현은 초조한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았다.

곧 그는 젖어 든 눈가에 입술을 비볐다. 연우의 짧은 속눈썹과 그 위에 난 작은 점까지 모두 핥았다. 쾌감이 어룽이는 눈물이 그의 혀를 달게 적셨다.

“우, 으읏.”

그 와중에도 유두를 매만지는 손길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연우의 검은 눈에 육욕에 젖어 든 얼굴이 비쳤다. 차현은 발갛게 젖어 벌어진 연우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미끄러지듯 들어와 입 안을 가득 채운 혀가 뜨거웠다. 혀가 뒤엉키며 질척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갈급하듯 부딪치는 입술이 발갛게 물들었다.

“으응, 웃.”

질척거리는 소리가 귀가 아닌 뇌를 통해 느껴졌다.

연우는 자신의 혀를 빨아 당기는 남자의 입술을 머금고 싶어 입술을 오물거렸다. 고작 그뿐인 행동. 그 행동에 일순 남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흐읏!”

다급하고 부드러웠던 키스가 거센 풍랑으로 뒤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거칠게 파고든 혀가 목 안의 숨까지 긁어 마실 것처럼 깊이 파고들었다. 목 안에서 터져 나온 신음이 엉망으로 일그러져 붉은색을 띠었다.

연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두꺼운 혀가 목구멍까지 핥을 것 같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누구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타액이 힘겹게 삼켜졌다. 입 천장을 훑고 혀를 뭉개는 남자의 숨결이 뜨거웠다. 연우의 짧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유두를 문지르던 손이 어느새 은밀하게 등허리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연우는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입술을 쫓아 고개를 뻣뻣이 쳐들었다. 숨이 부족해 머리가 핑 돌아도 상관없었다. 입맞춤을 피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흐으…….”

그러나 바람과 달리 결국 입술은 떨어져 나갔다.

연우는 눅진하게 녹아든 눈으로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연우야.”

짙은 색깔을 띠는 눈동자가 명백한 성욕을 담고 자신을 향했다. 열에 들뜬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연우야.”

입술에 닿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허리를 지나 바지 사이를 느릿하게 파고드는 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가랑이 사이가 점점 뜨거워졌다.

연우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차현의 멱살을 잡았다. 거칠게 입술을 맞대자 이가 부딪쳤다. 입술의 표피가 까진 듯 비릿한 맛이 풍겼다.

“응, 우으…….”

그러나 둘 중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속옷까지 파고든 단단한 손이 성기를 문질렀다. 뭉근한 손길로 선단을 문지를 때마다 허리가 튀었다. 젖은 입술 새로 신음이 뭉개졌다.

사정감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눈앞이 핑 돌았다. 멱살을 쥐었던 손은 힘이 풀려 간신히 걸려 있는 게 다였다. 물기에 젖어 든 연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그가 만지면 자신은 급류에 휩쓸린 사람처럼 저항할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그건 지나칠 정도로 강렬하고 중독적이었다.

남자의 단정한 손끝이 귀두의 갈라진 부분을 문지르자, 머리가 붕 뜨는 기분과 함께 배 속이 꽉 조여 왔다. 성기 끝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흣.”

연우는 급히 숨을 몰아쉬며 자신도 모르게 차현의 어깨를 밀쳐 냈다. 틈 없이 맞붙어 있던 입술이 일시에 떨어졌다.

그러나 사정의 순간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아……!”

연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확장된 검은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성기 끝에서 토해진 사정액이 단단한 손을 적셨다.

“흐, 읏…….”

“연우야.”

연우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멍한 눈을 들어 올렸다. 차현이 젖은 눈가에 입을 맞췄다. 나긋한 입술이 눈물을 쓸었다.

“연우야.”

다정한 목소리와 다르게 그는 사나운 얼굴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불룩 솟은 남자의 고간이 보였다. 연우는 입을 벙긋거렸다. 기대감에 젖은 입술이 마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입술이 다시 맞붙었다. 혀가 뒤엉키고 머리가 녹을 것 같은 쾌감이 이어졌다.

“흣.”

연우는 자신의 바지를 잡아 벗기는 아름다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차현은 어느새 테이블을 넘어와, 연우를 소파 위에 눕히는 중이었다.

“……!”

아래쪽에 단단하고 뭉뚝한 살덩이가 닿았다. 언제 꺼내 든 것인지, 흉흉하게 선 남자의 성기가 회음을 미끄러지듯 쓸고 구멍을 문질렀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그것이 곧장 입구를 파고들 것만 같았다.

“읏…….”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허공에 들린 다리를 잡아 벌린 그가 성기를 천천히 쑤셔 넣기 시작했다.

연우는 압박감에 숨을 헐떡였다. 커다란 성기가 끝도 없이 밀려드는 기분은 오싹하면서도 불쾌했다.

그러나 어젯밤에도 한계까지 벌어졌던 내벽은, 차현의 것을 아프지 않게 삼켜 냈다. 집요한 쾌락을 이끌어 냈던 성기를 기억하듯, 구멍이 우물거리며 그의 것을 끌어당겼다.

연우는 눈가를 조금 찡그렸다. 배 속이 더부룩함과 동시에 곧이어 찾아올 쾌락에 손끝이 떨렸다.

“우으……, 아!”

그 순간 두꺼운 성기가 내벽을 단박에 밀어젖히며 들어왔다. 거칠게 쑤셔 박힌 귀두가 내벽 깊은 곳을 찔렀다.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

“하아…….”

차현은 자신의 좆을 끊어 먹을 것처럼 조이는 구멍의 감촉을 느끼며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비볐다. 발갛게 달아오른 귓가를 입술로 물었다가, 목덜미에 솜털 같은 입맞춤을 남겼다. 연우의 입술 새로 단 신음이 새어 나왔다.

즈윽, 즉. 느리게 추삽질을 시작하자 연우의 내벽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차현은 압박감에 눈살을 찌푸리며, 연우의 젖어 든 눈을 몇 번이나 핥아 올렸다.

“응, 우으, 너무 흐, 안에…… 아!”

“안에가 왜, 하, 응? 연우야.”

연우는 주어지는 쾌락에 쉽게 울곤 했다. 그것이 저의 인내심을 얼마나 얄팍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고.

연우와 몸을 겹치면 머리가 쉽게 뜨거워졌다. 아니, 꼭 구멍에 좆을 밀어 넣지 않아도 연우와 관련된 일이면 쉽게 이성이 휘발됐다. 철모르는 어린애처럼 시야가 좁아져 앞뒤를 살펴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게 꼭 나쁘지는 않았다.

차현은 발갛게 달아올라 먹음직스러운 연우의 뺨을 핥았다. 눈물로 젖은 말간 얼굴에서 단내가 났다.

그는 손자국이 남은 연우의 다리를 움켜쥐고 다시 허리를 깊게 쳐 올렸다. 연우의 입술 새로 달큼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났다. 무언가 타오르는 냄새. 코 속을 마구잡이로 들쑤시는 불쾌한 냄새였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연우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막 일어난 탓에 시야가 흐렸다. 미미하게 미간을 구긴 연우가 눈동자를 굴려 냄새의 진원지를 찾았다.

“…….”

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머리를 스쳤다. 창문 앞에 선 남자는 낯익은 외형을 하고 있었다.

차현이었다.

그는 하의만 입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 물려 있는 장초에서 희부연 연기가 흩어졌다.

새벽빛을 받은 단단한 상체엔 정사의 흔적이 역력했다. 연우는 긴 실선이 남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담배?

여태껏 차현이 담배를 피울 것이라 짐작하지 못했다. 그에게선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고,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잠기운이 사라진 검은 눈이 차현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담뱃불을 빨아들일 때마다 날개 뼈 위 근육이 구물거렸다. 그 위에 난 손톱자국이 생동감 있게 일렁였다.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연우는 담배에 대한 호기심은 잊고 차현을 보았다. 무감정한 얼굴의 남자는 창문을 활짝 열어 두고 어슴푸레한 새벽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가 붉은 궤적을 남겼다.

단정한 입술이 토해 낸 연기가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아름다운 얼굴이 안개에 파묻힌 듯 흐려졌다가 맑아졌다.

마치 신기루 같은 장면이었다. 손을 뻗어 지금 그가 실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척였다. 시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창밖을 바라보던 차현이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피할 새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그는 깨어난 연우를 놀란 듯 바라보다가, 곧 자신이 들고 있는 담배로 눈을 돌렸다.

“아.”

탄성을 내뱉은 차현이 다급히 담뱃불을 창틀에 눌러 껐다. 붉게 타오르던 불씨가 일시에 사라졌다.

“왜 벌써 일어났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연우는 습관적인 미소를 짓는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그는 제 발 저리기라도 한 듯, 구겨진 담배를 커다란 손으로 덮어 감추고 있었다.

“좀 더 자.”

차현은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종용했다.

“아닙니다.”

잠기운을 떨쳐 내듯 몸을 일으키자, 차현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그는 언제 거리를 지켰냐는 듯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고집부리지 마.”

가까워진 남자에게서는 사향내와 함께 매캐한 연초 냄새가 났다.

그는 헐벗은 연우의 몸을 가볍게 눌러 눕히더니, 목 아래까지 이불을 덮어 줬다. 연우는 순순히 누우면서도 곁을 맴도는 독특한 냄새에 코끝을 찡긋거렸다.

잠결에 맡은 연초의 냄새는 분명 불쾌했는데, 어째서일까. 남자에게서 나는 향은 마치 다른 냄새처럼 느껴졌다.

“얼마 못 잤잖아.”

차현은 그렇게 말하며 연우의 눈꺼풀 위를 덮었다. 불시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나 그는 눈만 가렸을 뿐, 입을 막지는 않았다. 연우는 불쑥 떠오른 생각을 곧장 내뱉었다.

“같이 못 잔 게 아닙니까?”

“…….”

고요해진 방 안, 남자의 숨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시선을 올려 그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가려진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침묵은 낮게 흩뿌려진 헛웃음과 함께 끝났다.

“그래, 그랬지.”

그가 침대 위에 올라서자 매트리스가 눌리는 느낌이 났다. 그의 체향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연우는 입을 벙긋거렸다. 눈을 가렸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럼 같이 자자.”

차현은 연우를 끌어안고는 침대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연우는 저를 품에 안은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오묘한 빛을 띠는 검푸른 눈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 그를 쳐다본 것이 아니었다.

차현은 연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단정한 손이 말간 얼굴에 닿았다. 차현은 연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예쁘네.”

나지막하게 토해진 목소리는 연우를 고장 난 로봇처럼 만들었다. 우뚝 멈춘 연우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렀다.

제 몸에 예쁘다 할 만한 구석이 있던가. 흉터투성이인 몸은 농담으로도 예쁘다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백이면 백 모두가 아름답다 말할 남자가 제게 그런 말을 하다니.

“예뻐, 연우야.”

차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검은 눈동자가 아래로 도망쳤다. 고동색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귓가가 붉었다.

연우는 입 안으로 입술을 밀어 넣었다. 자꾸 부끄러운 소리를 내뱉는 남자를 멀리 밀쳐 내고 싶다가도, 이대로 모른 척 있고 싶어졌다.

“좋다.”

연우를 그러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마주 본 몸이 더 가깝게 붙고, 연우의 머리가 차현의 품 안에 닿았다.

연우는 눈을 깜빡였다. 차현의 입술이 자신의 머리칼에 닿는 느낌이 났다.

온화한 침묵이 방 안을 맴돌았다.

“…….”

그에게서 풍기던 씁쓰레한 연초 향이 어느새인가 옅어져 있었다. 익숙한 냄새가 몸을 감싸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연우는 슬금슬금 손을 뻗어 차현을 마주 안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품속이 가장 안정감 있는 장소로 느껴졌다.

연우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의 무게를 떨쳐 내지 않았다. 심장이 듣기 좋은 속도로 쿵쿵 뛰었다.

명예 작위를 받은 차현은 전보다 한가해졌다. 국가 시스템이 개편되어 귀족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유일한 귀족인 차현은 ‘귀족으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누렸다. 가령 의전 서열이 통령 다음이라든가, 세금 면제 혜택 같은 것이 그러했다(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현이 그렇게 말했기에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결론을 내자면― 연우는 차현에게 생긴 여유가 싫지 않았다. 그 덕에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으니까.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차현이 밖에 나갈 일이 없는 날.

이런 날에는 평소처럼 차현과 산책을 나가거나 글자를 배웠을 것이다.

하루를 비집고 들어온 뜻밖의 손님이 아니었다면.

저벅저벅. 연우는 공작저 내부에 있는 접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걸어 나가는 연우의 뒤를 차현이 쫓았다.

“형!”

달칵,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의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 아니, 태성은 안으로 들어오는 연우를 보더니 활짝 미소 지었다.

“이게 얼마 만, 어…….”

퇴원 이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태성은 연우에게 성큼 다가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려 했다. 그러나 한 걸음 채 내딛기도 전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뒤이어 들어온 차현이 태성을 내려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이군요.”

차현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태성은 쭈뼛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어, 네. 오래간만…… 이죠.”

분명 웃는 얼굴인데, 차현의 눈동자에는 차가운 기운이 어려 있었다. 태성은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차현을 힐끗거렸다.

“이제 저택에 안 와?”

두 사람의 기묘한 분위기를 흐트러뜨린 것은 연우의 목소리였다. 태성은 차현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연우를 보았다.

“그렇죠,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높이가 딱 맞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자신이 형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 그랬다.

태성은 얼쯤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사표도 냈고…… 퇴사 처리는 오늘내일 중으로 된다고 했으니까요.”

연우가 서둘러 접객실로 온 것은 이 소식 때문이었다.

태성의 퇴직 소식 말이다.

“…….”

연우는 태성을 보던 시선을 내리깔았다. 몸에서 기운이 빠졌다.

퇴원을 하면 당연히 저택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태성은 여느 혁명단 일원들처럼 국가를 위해 일하는 직업을 얻게 되었다. 공무원 말이다.

태성이 병원에 있을 땐 병문안을 간다는 명분이라도 있었는데……. 퇴원을 했으니 이제 그 핑계는 소용이 없었고, 더욱이 시종 일을 관둔다면 만날 일이 없을 것은 자명했다.

풀 죽은 연우의 기색을 알아챈 것은 차현뿐이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연우의 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단 앉자. 다리 아플 텐데.”

차현은 힘이 빠진 연우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괜찮습니…….”

연우는 고개를 내저으려 했다. 차현의 손이 등허리를 타고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

잇자국이 남아 있을 척추 뼈 부근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명백한 의도를 가진 손길에 일순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형?”

연우의 몸이 눈에 띄게 떨리자 태성이 눈을 끔뻑였다. 연우의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짐작조차 못 하는 순진한 얼굴이었다.

“남은 이야기는 앉아서 마저 하죠.”

그때 차현이 연우를 가리듯 앞으로 나섰다. 태성은 불쑥 눈앞으로 끼어든 단단한 몸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작은 이러나저러나 아름답기로는 둘째가기엔 서러운 남자였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연우의 이상 반응에 대한 의문은 씻은 듯 사라졌다.

차현은 세 사람이 모두 앉자 시종을 불러 마실 것을 가져오라 명했다. 태성은 대접을 받는 입장이 되자 안절부절못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아, 형! 저 이사해요.”

불편함과 초조함에 휩싸인 태성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지껄였다. 연우의 시선이 태성을 향했다.

“이사?”

연우가 되묻자, 태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묻지도 않은 정보들을 조잘거렸다.

“네. 원래 살던 곳은 예성이가 지내기엔 안 좋을 것 같아서요. 출근할 때 불편하기도 하고. 그래서 혁명단 어른들이 부족한 돈을 조금씩 빌려주셨어요. 빌린 돈은 차차 일하면서 갚기로 하고요!”

소식을 전하는 태성은 기뻐 보였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그와 별개로 연우의 기분은 조금씩 추락하고 있었지만.

“그럼 이제 못 봐?”

“네?”

무덤덤하게 토해진 목소리에 태성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연우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형 저, 저랑 이제 안 만나실 거예요?”

태성은 뒤늦게 경악한 얼굴로 되물었다. 연우는 미미하게 눈을 찡그렸다.

“일도 관두고, 이사도 가면 만날 방법이 없잖아.”

저가 만나 주지 않는 게 아니라 태성 쪽에서 먼저 만날 방법을 없애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만날 방법이 왜 없어요!”

그러나 태성의 뜻은 그게 아닌 듯했다. 기겁해 외친 태성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저 이사 가는데 그, 집들이 오셔야죠. 형은 당연히 온다 할 줄 알았는데…….”

태성이 말끝을 흐렸다. 섭섭한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연우는 그런 태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집들이……?”

집들이가 뭐지?

“오실 거죠?”

‘집들이’라는 것은 일단 이사와 연관된 무언가인 것이 확실했다. 태성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인 것도 분명했고.

연우는 시선을 돌려 차현을 보았다. 동의를 구하는 시선이었다.

“가고 싶어?”

연우는 고민할 새도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네가 가고 싶다는데 내가 무슨 방법으로 말려.”

연우를 향해 몸을 기울인 차현이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럽게 와 닿는 애정의 무게가 기분 좋았다. 연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뤄진 애정 행각에 당황한 것은 태성뿐이었다.

뒤늦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형이랑 공작이랑 진짜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

대체 언제부터지? 형이 공작의 정부라느니 뭐니 하는 소문이 돌았을 때는 그런 기류조차 없었는데…….

……아닌가?

“더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혼란스러운 태성의 정신을 깨운 것은 공작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태성의 몸이 움칠 떨렸다.

“예? 그, 하고 싶은 말은 없는 것 같…….”

“그럼 집들이 때 보죠.”

찻물이 도착하기도 전에 집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의에 맞지 않는, 명백한 축객이었다.

그러나 태성은 차현의 태도를 지적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이러나저러나 차현은 나라의 유일한 공작이고,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고용주였으니까.

“형, 꼭 놀러 오세요!”

태성은 결국 약속만 남긴 채 접객실을 빠져나갔다.

달칵.

연우는 태성이 사라진 문을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는데, 너무 빨리 가 버렸다. 좀 더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

어깨 위에 손이 닿았다. 연우는 자신을 돌려세우는 차현을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코앞에 놓여 있었다.

“응?”

그는 연우의 양 뺨을 움켜쥐고 이마를 부딪쳤다. 그러고는 친근함을 표시하는 고양잇과 동물처럼 머리를 비볐다.

머리카락이 사부작거리며 헝클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폐부에 바람이 든 것처럼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입꼬리에 맺혀 있던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아닙니다.”

“방금…….”

연우를 바라보던 차현의 눈이 일순 크게 뜨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연우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차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곧 별것 아니란 듯 미소 지었다.

“아니, 신경 안 써도 돼.”

그렇게 말하는 차현은 미련이 남은 듯 연우의 입술 끝을 엄지로 지분거렸다. 마치 그곳에 남은 흔적을 되새기는 것처럼.

여름의 무더운 햇빛이 땅을 적셨다.

연우는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볕을 받은 가마가 뜨겁고 살갗은 따가웠다.

“더운데 왜 그러고 있어.”

멍하니 선 연우의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연우의 머리에 내리쬐던 햇빛을 가리고 섰다.

“뺨이 빨갛네.”

차현은 열이 오른 연우의 뺨에 손을 댔다. 차가운 손이 얼굴을 덮자 체온이 한층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검은 눈이 올곧게 차현을 바라보았다.

“타자.”

그는 연우의 뺨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차 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바깥과 달리 차 안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가고 싶던 집들이인데, 가야지.”

그렇게 말한 차현은 연우를 차 안에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연우는 빛을 등진 그의 표정을 살피려 했지만, 곧장 차 문이 닫혀 그러지 못했다. 검은 눈이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그렇게 가고 싶던 집들이’라고 발음하던 그의 목소리에 가시가 박힌 것 같았는데, 착각일까.

“…….”

물론, 집들이에 대해 집요하게 묻기는 했다. 글자 공부를 하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옷을 벗고 두 다리를 벌리는 와중에도 물었으니까.

그 끈질긴 질문에 두 손 두 발을 다 든 것은 차현이었다. 그는 태성이 이사 가는 날짜를 알아 와 두 번이나 일러 줬다. 반드시 갈 거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빼지 않았고.

차현까지 뒷좌석에 오르자, 기사가 차를 출발했다. 세 사람이 탄 차는 부드럽게, 한적한 도로를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다다랐다.

태성의 새로운 주거지는 서울 근교의 신도시였다. 근처에 새로운 정부 청사가 생긴다더니, 그곳에서 일하게 된 모양이었다.

차현은 새로 지어진 아파트를 멍하니 올려다보는 연우의 손을 잡아챘다.

“언제까지 쳐다보고만 있으려고.”

“아.”

연우는 답지 않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은 일을 어색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차현은 그 솔직한 얼굴을 보다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먼저 걸음을 옮기자, 연우가 순순히 뒤를 따라왔다.

띵동.

벨을 누르자 명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집 안에서 무언가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가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문이 벌컥 열렸다. 슬리퍼를 신고 튀어나온 태성이 문 앞에 선 연우를 보았다.

아니, 연우인 줄 알았던 공작을 보았다.

“……그으, 공작님. 안녕하세요…….”

태성의 어색한 인사를 차현은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곧 그가 현관을 가리고 있던 몸을 비켜섰다.

“어, 어?”

그러자 장정 몇 명이 우르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태성의 발치에 커다란 박스 몇 개를 내려놓고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태성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자들을 내려다보다가 차현을 보았다.

“집들이 선물입니다.”

“집들이…… 선물이요……?”

자신이 알기로 집들이 선물은 주로 휴지나 그릇 같은 생필품이었다. 그런데 공작이 가져온 ‘선물’은 규모가 달랐다.

“형, 이거 게임기 아냐?”

어느새 곁에 온 예성이 ‘와’ 탄성을 질렀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이 크리스마스 산타라도 마주한 듯했다.

“그, 이, 일단 들어오세요.”

뒤늦게 정신을 다잡은 태성이 그들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내내 차현의 뒤에 서 있던 연우가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침입을 위해 창문을 넘거나 문고리를 박살 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 누군가의 집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긴장하고 싶지 않아도 연우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 지, 집이 좀 작죠……? 저, 정리도 안 되어 있고. 하하……. 아시다시피 그게, 어제 이사를 와 가지고…….”

태성의 말대로 집은 작았다(연우가 여태 보아 온 집들이 권력자의 것이었다는 걸 유념하자). 게다가 짐이 다 정리되지 않아 더 좁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전에 살던 집보단 깨끗하고 안전해 보였다.

태성은 제집을 구석구석 살피는 연우를 보다가 얼쯤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그, 공작님까지 오실 줄은 몰라서 막 대단한 건 준비를 못 했거든요……. 아, 물론 알았어도 준비 못 했겠지만, 그러니까 그게…….”

횡설수설 태성이 내뱉는 말은 그래서 의미가 뭔지 알아채기 힘들었다. 연우는 늘어지는 태성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이야.”

태성은 그제야 더듬더듬 말을 정리했다.

“이 동네에 진짜 맛있는 짜장면집이 있어요. 그…… 원래 이사 오면 짜장면 시켜 먹잖아요. 그래서 형이랑 시켜 먹으려 했는데, 공작님 입맛에는 맞으실지 잘 모르겠어서……. 역시 밖에 나가서 먹는 게 낫겠죠?”

차현은 잠시 태성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어린아이는 집들이를 처음 해 보는 것이 명백할 정도로 모든 게 어설펐다. 손님 앞에서 음식을 배달시키겠다 말하는 것이나, 그 음식이 고작 짜장면이라는 것도 그랬다.

그래도.

차현은 연우에게로 눈을 돌렸다.

‘집들이’가 뭔지 모르는 어설픈 사람은 하나가 아니었다. 연우는 배달 음식을 함께 먹자는 말에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현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미소가 떠올랐다.

“편한 대로 하세요.”

태성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낸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차현의 시선은 연우를 향해 있었다. 그 다정한 시선은 분명 사랑에 빠진 인간의 것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의심에 불과했던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공작과 형은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인 것이다.

“그, 그러면 시킬게요.”

태성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저의 당혹감이 형에게 전달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물론 공작과 형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이 꺼림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남자였고, 동성의 인간들이 연을 맺는 것은 평범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사람이기에 이해가 갔다.

나라에 하나 남은 귀족과, 평범함에서 벗어난 어딘가 이상한 형.

두 사람에겐 감히 사회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었다.

“아저씨. 같이 게임하실래요?”

중국집의 번호를 더듬더듬 누르던 태성이 고개를 돌렸다. 연우의 앞에 선 예성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게임기 상자를 들고 있었다. 연우는 그런 예성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연우는 예성의 커다란 외침에 움찔 몸을 떨었다가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태성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형은 여전히 자신이 아는 형이었다. 아니, 더 좋은 사람이 됐다.

그게 공작과 연인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상이 변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형은 여전했다. 그럼 된 것이 아닐까?

「LOSE!」

승부가 가려졌다. 연우는 자신이 들고 있는 컨트롤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번엔 좀 어려웠어요.”

예성은 벌써 열 번째 승리를 거머쥐고서 그렇게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연우가 열 번째로 패배했다는 뜻이었다.

“…….”

처음 몇 번 졌을 때는 승부욕이라도 들었지, 열 번을 내리 지다 보니 지치기만 했다. 3일 밤낮을 못 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컨트롤러를 쥔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

띵동.

그때 초인종 소리가 연우의 귓가를 때렸다. 연우는 컨트롤러에 박혀 있던 시선을 돌려 현관문을 보았다. 음식이 온 것이다.

“나가요!”

태성이 후다닥 현관으로 나갔다. 철가방에서 그릇 몇 개를 순식간에 꺼내 놓은 배달원이 돈을 받고 훌쩍 떠났다.

“주예성, 짜장면 왔으니까 게임 그만해. 형도 빨리 오세요!”

“좀 더 하고 싶은데…….”

예성은 아쉬운 듯 투덜거렸지만, 연우의 얼굴에는 화색이 떠올랐다. 드디어 게임을 그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형은 짜장면이 좋아요, 짬뽕이 좋아요?”

그릇을 식탁 위에 올린 태성이 물었다. 연우는 자리에 앉다가 행동을 멈췄다.

짜장면과 짬뽕. 둘 다 처음 들어 보는 음식이었다. 일단 식탁에 있는 벌건 음식과 까만 음식의 이름이라는 건 알겠는데……. 둘 중 무엇이 짜장면이고 짬뽕인지 알 수 없었다.

연우는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둥글게 휜 차현이 ‘왜?’ 하고 입을 달싹였다.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연우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차현이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형, 매운 거 당기시면 짬뽕 드세요!”

태성이 먼저 답했다. 워낙 자리가 좁아, 차현에게만 몰래 속삭였음에도 태성에게까지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연우의 시선이 태성을 향해 돌아섰다.

“……짬뽕 먹을게.”

태성의 말처럼 매운 국물이 먹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먹기 싫은 것은 또 아니었기에 수긍했을 뿐이다(연우는 음식에 독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거나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

하지만 먹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했다. 그릇 위에 꽁꽁 싸매진 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뜯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우는 태성을 보았다. 나무젓가락을 완벽한 11자로 쪼갠 태성이 그릇의 가장자리를 긁기 시작했다. 그러자 랩이 슬슬 벗겨져 갔다.

저렇게 하는 거군.

연우는 태성이 했던 것처럼 나무젓가락을 집었다. 힘을 주어 양쪽을 잡아 벌리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났다.

“어.”

태성이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럴 만도 했다. 연우의 나무젓가락이 한쪽만 지나치게 짧게 부러졌기 때문이다.

당황하긴 연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성과 똑같이 했을 뿐인데 젓가락이 11자가 아닌 17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리 줘.”

시야에 불쑥 단정한 손이 끼쳐 들어왔다.

차현은 연우의 손에 들린 나무젓가락을 뺏어 들고 제 몫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연우의 그릇에 씌워져 있던 랩도 순식간에 벗겨 냈다. 연우는 멍하니 차현을 바라보았다.

“이건 내가 쓸 테니까, 그걸로 먹어.”

차현은 연우가 부러트린 짝짝이 젓가락을 제 앞에 내려놓았다.

연우는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붉은 빛을 띠는 음식을 한 움큼 떴다. 붉은 국물에 흠뻑 젖은 면발에서 희뿌연 김이 올라왔다.

뜨거운 면발에 몇 번 입술을 맞춰 온도를 살피던 연우가 이윽고 입 안에 면을 넣었다.

첫 느낌은 뜨겁다는 것이었다. 미리 온도를 쟀는데도 입 안에 들어왔을 때 훨씬 더 뜨겁게 느껴졌다.

입 안에 가득 찬 면이 미끄덩거렸다. 연우는 그 낯선 식감에서 오는 거부감을 참고 면을 두어 번 씹었다.

곧 맛이 느껴졌다. 동공이 크게 뜨였다.

짬뽕은 매웠다.

그것도 아주.

통증에 가까운 얼얼함이 입술을 강타했다. 젓가락을 쥔 손이 떨렸다.

물.

연우는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물을 찾았다.

“형, 뭐 찾아요?”

“물…….”

혓바닥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아니, 비단 혓바닥만의 일이 아니었다. 붉은 국물에 젖은 입술도 조금씩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벌어진 입술 새로 절로 매운 숨이 토해졌다.

“매워?”

차현이 연우의 얼굴을 잡아 돌리며 물었다. 연우는 머뭇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을 맴도는 얼얼한 매운맛은 상처에 뿌려진 소금처럼 지속적인 고통을 남겼다.

“헉, 매워요?”

차현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놀란 듯 일어선 태성이 곧장 냉장고 앞으로 뛰어가 무언가를 꺼내 왔다.

“이거 드세요.”

태성이 내민 것은 막대 아이스크림이었다. 연우는 곧장 그것을 입에 넣었다. 평소라면 의심 끝에 조심스레 한 입 베어 물었을 테지만, 지금은 입 안의 사정이 너무 급했다. 달콤하고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 들어가자 그나마 열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황궁에 있을 때나 나왔을 때나 매운 것을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매운 음식이 이렇게 큰 파괴력을 가졌는지 미처 몰랐다.

“이 집 짬뽕 별로 안 매웠는데……. 갑자기 매워졌나? 왜 그러지?”

태성이 의문스러운 듯 중얼거렸지만, 연우는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형! 나도 아이스크림 먹을래.”

“넌 밥 다 먹고 먹어.”

연우가 혓바닥과 아이스크림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동안, 태성은 예성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차현은 제 그릇과 연우의 그릇을 바꿔 놓았다.

“그런데 형.”

얻어맞은 이마를 붙잡고 씩씩대던 예성이 불현듯 생각난 것을 입 밖에 냈다.

“우리도 아쿠아리움 가면 안 돼?”

“아쿠아리움?”

아이스크림 반을 깨물어 먹은 연우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응. 우리 반 경민이 있잖아. 저번 주에 부모님이랑 갔다 왔는데, 거기 가면 엄청 큰 물고기랑 상어 볼 수 있대.”

엄청 큰 물고기랑 상어?

물고기라면 연우도 익히 알고 있었다. 황궁 연못에 살던 잉어를 본 적이 있으니까.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유선형의 생물을 관찰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적이 있었다. 나뭇잎에 달라붙은 작은 벌레를 보며 하루를 보낸 일도 있었다. 황제가 그딴 것에 관심을 주지 말라 화를 낸 뒤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머리에 혹 난 물고기도 있대. 엄청 못생겼다고 그랬어.”

머리에 혹 난 물고기?

연우는 잉어 머리에 혹이 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주 우스꽝스러울 것 같았다(한편으로는 ‘혹이 크면 머리가 무거워서 수영을 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거 말하는 거구나. 어떤 귀족이 개인 소장 하던 수족관이 국가에 넘어갔다더니. 이제 개방했나 보네.”

수족관이라…….

머리에 혹 난 물고기가 있으면 몸통에 혹 난 물고기도 있을까? 상어는 무슨 물고기일까. 엄청 큰 물고기는 거대한 잉어를 말하는 걸까?

연우는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르기 시작한 것도 알지 못하는 듯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아쿠아리움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몸이 그쪽을 향해 기울어졌다.

차현은 그런 연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게임에서 연패하고 시무룩해하는 모습을 봤을 땐 ‘게임기를 사 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난이도를 조정하든 조작을 하든, 이기게 해 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게임기를 사 주기보다는 아쿠아리움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금도 저렇게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는데, 직접 보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차현은 손을 뻗어 연우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들었다. 생각에 빠져 있던 검은 눈동자가 차현을 향해 돌아섰다.

“녹잖아.”

차현은 웃었다. 그는 연우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얼마 전 연우의 얼굴에 떠올랐던, 그 찰나의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다.

“예, 예성아. 탕수육 먹자.”

“웁.”

태성은 차현이 연우의 손끝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는 것을 보고, 급히 탕수육을 예성의 입에 쑤셔 넣었다. 공작을 향해 움직이던 예성의 시선이 홱 제 형에게로 옮겨졌다.

태성은 예성의 불만 섞인 시선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예성아, 형이 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거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집들이는 즐거웠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랬다.

게다가 헤어지기 전에 태성이 ‘다음에 또 놀러 오라’고 말했다(공작님을 빼고 와 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즐겁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 기분은 잠들 때까지 이어졌다.

“왜 이렇게 들떴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연우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누운 차현의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얼굴에 다 써져 있잖아.”

연우는 제 얼굴을 더듬거렸다. 뭐가 묻어 있냐는 태도였다.

차현은 어리둥절해하는 연우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자, 됐네.”

차현은 말끔한 연우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 닦여 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왜 이렇게 들떴는지 이유를 듣고 싶은데.”

차현은 연우의 말간 얼굴을 보며 물었다.

“집들이는 원래 다 이런 겁니까?”

“뭐가 ‘원래 이런 거’ 같은데?”

“즐거웠습니다.”

“알고 있어도 기분 나쁘군.”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기분 나쁘다’는 말의 의중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데, 내가 어쩌겠어.”

픽 웃은 차현이 연우의 뺨에 손을 댔다. 뜨끈한 체온이 손으로 넘어왔다.

엄지로 눈 밑을 쓸자 둥글게 뜨였던 눈이 가늘게 접혔다. 차현은 작은 점이 찍힌 눈꺼풀 위에 입술을 붙였다.

연우가 다른 사람으로 인해 즐거워졌다는데 유쾌할 리가 없었다. 그는 연우를 독점하고 싶었다.

자신은 연우의 사람이니까. 연우는 자신의 사람이니까.

이 두 문장 사이에 다른 불필요한 요소들이 끼어드는 건 원치 않았다.

“좋아해.”

그럼에도 연우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 것은, 그가 품 안의 이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연우가 입을 달싹였다. 차현은 머뭇거리는 이를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연우는 천천히, 처음 말을 하는 아이처럼 신중히 내뱉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처럼 차현은 일순 눈을 크게 떴다.

“연우야. 날 좋아해?”

곧 그의 입술 새로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우는 눈을 깜빡였다. 차현의 반짝이는 표정이 보기 좋았다.

“네.”

“다시 말해 봐.”

“저도 좋아합, 읏.”

입술이 성마르게 부딪쳤다. 짧은 탄성이 터져 나온 순간, 두꺼운 혀가 입 안을 파고들었다.

숨결과 타액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차현은 갈급하듯 입 안을 파헤쳤다. 연우가 말하지 못하고 삼킨 수많은 고백의 꼬리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연우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연우는 떨리는 손을 뻗어 차현의 등에 감았다. 몸이 가깝게 붙으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열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흣!”

커다란 손이 바지 속으로 파고들었다. 연우는 덜컥 숨을 몰아쉬었다.

차현은 망설임 없이 연우의 성기를 잡아 문질렀다. 뇌리로 내리꽂히는 강렬한 자극에 연우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질척하게 젖어 드는 입술 새로 자꾸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손은 연우의 예민한 부분만을 능숙하게 문질렀다. 귀두 아랫부분의 여린 살을 엄지로 긁어 올리고, 귀두를 둥글게 문지르며 성감을 일깨웠다.

“우으, 응.”

다리가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내뱉어지지 못한 신음이 타액과 함께 목 아래로 넘어갔다.

“하읏…….”

깊게 맞붙어 있던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질끈 감겨 있던 연우의 눈꺼풀이 느리게 떠 올랐다. 눈물에 잠긴 검은 눈동자가 몽롱해 보였다.

“연우야.”

차현은 연우의 눈에 입술을 맞추고 그 위를 핥았다. 혀 위를 구르는 뜨겁고 짭짜름한 눈물에서 단내가 났다.

“으읏.”

차현의 손아귀에 쥐어진 성기가 어느새 꼿꼿이 서 있었다. 연우는 파르르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나란히 누워 있던 차현은 순식간에 연우의 위에 올라탔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

그 순간 바지가 끌어 내려졌다. 꼿꼿이 선 성기가 허공에 드러나자 일순 소름이 돋았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성기 위에 델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닿았다. 차현이 저와 연우의 것을 겹쳐 쥔 것이다.

눈물에 젖어 든 검은 눈동자가 아래를 향했다. 남자의 흉기 같은 성기가 제 성기를 덮치듯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핏줄이 울룩불룩한 성기는 언제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제 구멍이 저 두꺼운 성기를 다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흣!”

잡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커다란 손에 틈 없이 겹쳐진 성기가 마찰하기 시작했다. 연우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전기가 통하듯 찌릿한 쾌감이 목까지 치달았다. 벌어진 입에서 연약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으, 읏, 뜨겁……. 우으, 아…….”

제 성기를 덮치듯 누른 차현의 것이 뜨거웠다. 그의 열기가 제 배 속으로 번져 오는 것 같았다.

연우는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차현의 양 어깨를 움켜쥐었다. 숨이 가빠졌다.

“……연우야.”

흥분으로 낮아진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이 연우의 귓불을 더듬었다. 뜨거운 혀로 귀 뒤를 느리게 핥자, 연우의 어깨가 움칠 떨렸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핥아 올리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줘.”

“응, 뭘……. 우으, 뭘 말씀하시는…… 흐읏.”

“날 좋아한다고.”

귓가에 닿아 있던 남자의 입술이 다시 목덜미를 핥았다. 뜨거운 숨결이 살갗을 스칠 때마다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머리끝까지 치달은 흥분감 탓에 섬뜩함마저 느껴졌다.

“응?”

차현은 조르듯 연우의 목덜미에 제 입술을 비볐다. 커다란 손이 귀두를 둥글게 문질렀다. 눈앞에서 찌릿거리는 쾌감이 점멸했다.

뱃가죽이 홀쭉하게 들어가고 구멍이 꽉 조여들었다. 연우는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좋, 아합, 읏, 좋아, 흐읏……!”

차현의 손이 닿아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왜일까. 왜 그만 닿으면 이리도 흥분하고 마는 것일까.

저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쉽게도 해냈다.

“좋아합니다, 좋아합…… 아!”

“응, 나도.”

겹쳐 문질러지는 귀두 끝이 선액으로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기둥을 쥐고 문지르는 손의 굴곡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연우는 덜컥 숨을 들이켰다. 흠뻑 젖은 눈가를 비집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견디기 힘든 쾌감에 다리가 절로 오므라들었다.

다리 사이에 낀 차현의 몸이 꽉 조여들며 구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또한 흥분한 것이다. 그 사실이 어떤 쾌감보다 강렬하게 전신을 내달렸다.

“……연우야.”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차현이 곧 그 위를 아프게 짓씹었다. 날카로운 고통마저도 쾌감으로 느껴졌다. 연우는 밭은 숨을 헐떡거렸다.

“아으, 우, 읏…….”

성기를 문지르는 손길이 점점 빨라지고 있기 때문일까.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선액 때문에 남자의 손끝이 미끈거렸다. 흥분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내 연우.”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곤두선 신경을 무자비하게 들쑤셨다. 연우는 발끝으로 시트를 밀었다. 조금만, 아주 작은 쾌감만 더하면 곧장 사정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사정 직전, 남자가 손을 뗐다.

“흐으…….”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잘 보이지 않았다.

“연우야.”

차현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오싹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연우의 눈물을 닦았다.

“다리 모아 볼래?”

연우는 멍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거부할 마음은 없었다.

연우는 차현의 몸통을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를 허공에 들어 모았다. 헐렁한 잠옷 바지가 미끄러져 다리가 드러났다.

“응, 그래. 그렇게.”

차현은 연우의 다리를 잡아 제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연우는 그가 하는 대로 따르며 제 사타구니를 내려다보았다. 사정 직전에 떨어진 쾌감 탓에 성기 끝이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읏?”

그 순간 연우의 허벅지 사이에 뭉뚝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닿았다.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맞붙은 다리 사이로 그의 검붉은 성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 으…….”

허벅지를 비집고 들어온 두꺼운 성기 끝이 제 성기와 비벼졌다. 연우의 벌어진 입술 새로 가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응, 읏.”

묵직한 질량을 가진 살덩이가 허벅지 사이에 쓸리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연우는 차현이 정확히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 행위가 쾌감을 준다는 사실은 명확히 이해했다. 그럼 된 것이다.

어차피 차현은 요즘 연우에게 이상한 짓을 많이 했다. 연우의 말랑말랑한 성기를 입에 넣고 빨아 사정액을 삼키기도 하고, 이따금 연우를 애태우며 ‘넣어 달라’는 말을 스스로 토해 내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면 그는 수치스러움에 새어 나오는 눈물을 핥으면서 무지막지한 성기를 구멍에 밀어 넣었다.

이 행위도 다르지 않겠지.

연우는 미미하게 밀려오는 쾌감에 허리를 비틀었다. 허벅지를 드나드는 추삽질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부드러운 허벅지 살을 밀고 부딪치는 뜨거운 살덩이가 귀두의 아랫부분을 긁었다.

“응, 우으…… 읏.”

성기가 마찰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이상한 느낌이 가중되었다. 배 속을 찔러 오는 아찔한 쾌감이 아님에도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뇌가 뜨거워졌다. 허벅지와 성기가 모두 뜨거워 델 것 같았다.

“이거, 이상, 이상한…….”

연우는 허공에 뜬 다리를 내리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이미 다리는 차현의 팔에 붙잡혀 의지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제 허벅지 사이가 마치 차현의 성기를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큿, 연우야.”

보드라운 허벅지 안쪽 살에 비벼진 성기가 연우의 성기를 긁고 배꼽 위에 닿았다. 단단한 성기 끝이 뱃가죽 위를 두드리자 이상하게도 사정감이 치밀어 올랐다. 연우는 침대의 시트를 그러쥐고 몸을 비틀었다.

“흣, 아, 그만, 이상, 으응……!”

연우의 신음에 울음기가 짙게 배었다. 사정의 순간이 가까워진 것이다. 그러나 차현은 멈추지 않았다.

“흐읏……!”

배 속이 지끈거리며 당겨 왔다. 연우는 눈을 질끈 감고 침대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내 성기 끝에서 사정액이 길게 토해졌다.

그러나 연우의 파정이 행위의 끝은 아니었다.

“아, 아?”

연우의 허벅지에 성기를 파묻은 남자가 둥글게 솟은 둔덕을 움켜쥐었다. 작은 엉덩이가 한 손에 들어왔다. 힘을 주자 엉덩이 골 사이가 벌어지며 그 사이에 있던 밀지 또한 드러났다.

파드득 놀란 연우가 시선을 내렸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허벅지 사이로 남자의 핏줄 선 성기가 들어차 있는 것이 보였다.

흰 엉덩이 위에 자국을 남긴 손이 미끄러지듯 회음을 쓸어내렸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마침내 입구에 닿았다. 연우는 입을 벙긋거렸다.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읏!”

사정 직후의 몸은 예민했다. 연우는 숨을 헐떡였다.

입구를 꾹 짓누르는 손가락이 곧장이라도 안쪽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은 끝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낮게 욕을 짓씹은 남자가 제 성기와 연우의 성기를 겹쳐 쥐었다. 연우의 몸이 파득 뛰었다.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막 사정한 성기는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고작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것만으로도 저릿거리며 아파 올 정도로.

“시, 싫……. 앗! 그거, 응, 싫……!”

“연우야, 큿.”

허벅지에 파묻히고도 길게 빠져나온 성기가 뜨거웠다. 거칠게 흔들리는 손이 허벅지 위에 닿을 때마다 퍽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아, 우으, 그만, 응! 싫, 싫습…… 그만, 아……!”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온몸이 뜨겁고, 쓰라리고, 또 머리가 타들어 갈 것처럼 지끈거렸다. 눈물로 젖은 시야가 엉망이었다.

연우는 차현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그의 살갗에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차현은 그런 것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흐으, 읏……!”

억지로 끌어 올려진 사정감에 사타구니가 당겨 왔다. 온몸의 세포가 경련하듯 떨리는 것만 같은 기분.

일순 연우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아, 아…….”

연우의 성기 끝에서 묽은 사정액이 다시 한번 토해졌다. 직후 차현 또한 사정했다.

뱃가죽 위로 희뿌연 사정액이 느른하게 고였다. 헐떡거리는 가슴팍 위, 분홍 빛깔을 띠는 유두가 바짝 서 있었다. 쾌감에 젖어 든 연우의 얼굴이 흐렸다.

“하아…….”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은 차현이 허리를 숙였다. 그는 연우의 얼굴을 적신 눈물을 핥고 눈꺼풀 위까지 핥아 올렸다. 축축하게 젖은 눈꺼풀이 거슬거슬한 혓바닥에 쓸리자 쓰라렸다.

“연우야.”

눈물을 모두 핥아 먹은 그는 곧 연우의 온 얼굴에 입술을 맞추기 시작했다.

“연우야.”

연우는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차현을 보았다. 차현의 눈동자에는 아직 해소되지 않은 정욕이 새파랗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내일 너와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연우의 구멍을 헤집어 제 좆을 쑤셔 박는 대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렸다.

차현은 연우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선 그 위에 입술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쓸렸네.”

차현은 연우의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었다. 따끈거리는 피부 위에 벌겋게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단정한 손끝이 그 자리를 매만질 때마다 미미한 고통이 피어올랐다.

“아파?”

“……괜찮습니다.”

울음과 뒤엉켜 가라앉은 목소리로 보아 괜찮은 것 같지 않았다. 아직도 숨이 거칠었다.

“네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차현은 연우의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아파도 아픈 줄을 모르고, 아프다고 말도 안 해.”

연우는 눈을 깜빡였다. 가만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그가 연우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런 표정 해도 소용없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한 그는 연우의 목덜미를 잘근 깨물었다. 날 선 감각에 연우는 발끝을 작게 오므렸다.

목덜미를 깨물었던 차현은 툭 불거진 목울대 위에, 귓불에, 흰 뺨 위에 입술을 묻었다.

곧 입술이 맞부딪쳤다. 차현은 연우의 아랫입술을 물어 당기다가 혀로 그 위를 핥았다. 뜨거운 숨결이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으응.”

부드럽게 이어지던 입맞춤이 아쉬운 감각을 남기고 떨어졌다. 연우는 감았던 눈꺼풀을 느리게 떴다.

“어디서 이렇게 예쁜 게 나와서.”

차현은 제 이마를 연우의 이마에 툭 대더니 가볍게 머리를 비볐다.

“씻고 나서 약 바르자. 발라 줄게.”

“네.”

가까워진 차현에게서 나는 달큼한 사향 냄새가 기분 좋았다. 연우는 충동적으로 제 옆에 놓인 차현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같이 씻고 싶습니다.”

“같이 씻고 싶다고?”

놀란 듯 크게 떠졌던 차현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의 얼굴 전체에 번진 것은 화사한 미소였다.

연우는 심장의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행복이 자신에게도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네.”

저 때문에 차현이 미소 짓는 건 언제라도 기분 좋았다. 연우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차현의 웃음소리가 제 입가에도 번지는 것 같았다.

“일어났어?”

몽롱한 빛을 띠는 연우의 눈동자가 차현을 향해 굴러갔다. 부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그의 외형이 희미하게 비쳤다.

“눈에 아직 잠기운이 있는데.”

애써 밀어 떴던 눈꺼풀은 얼마 가지 않아 도로 닫혔다. 차현이 눈 위에 입맞춤을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그의 행동에선 애정의 향이 났다.

차현은 순종적으로 눈을 감은 연우를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연우는 귓가를 울리는 나지막한 웃음소리에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이번엔 시야가 제대로 잡혔다.

아침 햇살을 등진 차현의 얼굴은 새벽빛을 그린 유화처럼 아름다웠다. 연우는 홀린 듯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움켜쥐었다. 차현의 입술이 보기 좋은 호선을 그렸다.

그는 자신의 뺨에 닿은 연우의 손을 끌어 제 입술에 댔다. 말캉한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아.”

연우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손에 난 흉터를 핥은 남자가 검지를 제 입 안에 넣었기 때문이다.

그는 연우의 짧게 잘린 손톱과 손톱 밑의 살을 핥았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화상을 입히기라도 할 것 같았다. 연우의 몸이 움칠 떨렸다. 차현의 온도가, 반응을 살피는 짙은 눈동자가, 자신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연우는 차현의 입 안에서 황급히 손을 빼냈다. 차현은 그런 연우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아쉬운 얼굴로 연우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부딪칠 뿐이었다.

“오늘 너랑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가고 싶은 곳? 호기심을 짙게 머금은 눈동자가 차현을 향했다.

“아쿠아리움에 갈 거야.”

검은 눈이 크게 뜨였다. 아쿠아리움이라면 태성네 집들이를 갔을 때 들었던 장소가 분명했다. 귀족 소유의 수족관이라던…….

“갈까?”

“네.”

연우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게다가 답지 않게 고개까지 크게 주억이는 것이, 기대감이 한껏 부푼 것처럼 보였다.

“……위험하네.”

뜻 모를 말이 차현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연우는 그 의미를 묻기 위해 입술을 벌렸지만, 차현의 입술이 그 위에 닿는 것이 먼저였다.

커다란 손이 양 뺨을 다정하게 움켜쥐었다.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혀가 부드럽게 뒤엉켰다. 연우는 눈을 감았다.

그가 하는 것이라면 거친 것이든 다정한 것이든 모두 좋았다.

차연우는 차현을 좋아하니까.

그건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명제였다.

연우는 귓속을 먹먹하게 만드는 심장의 울림을 가만히 들었다.

일반인들은 접근조차 불가능했던 공간이 개방됐다. 대통령의 지시였다.

흔히 접할 수 없는 볼거리인 아쿠아리움에 사람들이 몰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보다 더 많은데.”

그건 한 달여가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차현은 매표소부터 바글바글한 인파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표를 예매해 뒀기에 저들과 함께 줄을 설 필요는 없었지만, 이런 복작거림은 달갑지 않았다. 사람이 많다는 건 곧 귀찮은 일이 늘어난다는 의미였으므로.

괜히 온 건가.

매표소의 전경을 살피던 차현이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연우가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연우는 넋을 놓은 표정이었다. 마치 영웅을 실제로 본 어린아이 같았다.

그 감상은 틀리지 않았다.

연우는 매표소에 달린 조잡한 물고기 모양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등 푸른 생선을 형상화한 모양은 새파랬다. 연우가 기억하는 잉어의 모습과는 분명 다른 모양이었다.

“들어갈까?”

“네.”

연우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물 냄새가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인파를 따라 입구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강을 마주했다. 유리관을 이어 만든 물길을 따라 색색의 열대어가 헤엄쳤다.

연우의 눈이 둥그레졌다. 노랗고 붉은, 게다가 파랗기까지 한 열대어 무리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들의 지느러미는 아주 부드럽고 얇은 날개 같았다.

예뻤다.

연우는 손을 뻗어 차현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열대어 대신 연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왜?”

연우는 손끝으로 열대어 무리를 가리켰다. 그제야 남자의 시선도 돌아갔다.

“공작새 같습니다.”

“그러네.”

무의미하게 열대어를 바라본 차현이 다시 연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미미한 열기까지 느껴지는 검은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연우가 느끼는 열렬한 흥분이 물에 푼 잉크처럼 자신에게까지 번져 오는 것 같았다.

차현은 웃었다. 사방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분명 입을 맞췄을 것이다. 몇몇 인간들은 감당하기 힘든 기쁨을 느꼈을 때 우습게도 성욕을 느끼기도 하니까. 차현은 그런 인간의 범주에 속했다.

단지 그런 기분을 느끼는 범위가 연우로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다 봤어?”

“네.”

연우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만족스러울 만큼 보지 못했는데도 차현의 질문이라 답한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생명체가 어디서 나온 걸까.

차현은 당장이라도 연우와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머리칼만 매만졌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끝에서 사락 흐트러졌다. 공을 들이면 공을 들이는 대로 티가 나는 몸은 언제나 만족을 불러일으켰다.

“들어가자.”

한동안 연우의 머리와 귓가를 지분거리던 차현이 마침내 입을 뗐다. 연우는 그의 손이 닿은 귓가가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연우를 이끌고 차현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유물을 전시해 둔 박물관 같은 장소가 드러났다. 물론, 유물이 있어야 할 곳에 고대어들이 있긴 했지만.

연우는 가장 가까운 수조에 다가갔다.

「아시아아로와나」

물고기의 이름이 적힌 패널을 더듬더듬 읽은 연우가 다시 수조를 보았다.

금용이라고도 불리는 황금색 물고기는 어두운 수족관 안을 느리게 유영했다. 연우의 눈동자가 물고기의 움직임을 따라 굴러갔다.

한동안 금용을 바라보던 연우는 걸음을 옮겨 다른 물고기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문양을 뽐내는 물고기부터 투박한 색을 가진 물고기, 비늘과 지느러미가 거의 보이지 않아 미끈한 몸체를 가진 물고기까지. 모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연우가 마침내 혹 난 물고기를 발견했을 때였다. 누군가의 손이 연우의 손목을 낚아챘다.

“연우야.”

연우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혼자 움직이면 길 잃어버리잖아.”

그곳엔 낯선 표정을 지은 차현이 있었다. 일견 초조해 보이기도, 혹은 불안해 보이기도 한 얼굴. 길을 잃은 것은 연우가 아니라 차현 그 자신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연약한 표정은 곧 자취를 감추었다. 차현은 자신이 쥔 연우의 손목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손잡고 다니는 것 정도는 되겠지.”

누군가에게 묻는다기보다는 본인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차현은 연우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연우는 앞서 나가는 차현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각양각색의 물고기에 시선을 빼앗긴 사람들은 차현과 연우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연우는 인파 사이에서 마치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연우는 어두운 바닥을 비치는 푸르스름한 물결을 보았다. 거대한 바다를 투과한 빛이 해류에 부딪쳐 부서진 것 같은 풍경.

연우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검은 눈이 커다래졌다.

벽의 한 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처럼, 바다의 아름다운 단면을 떼어 놓은 것 같은 풍경이 이곳에 있었다. 수많은 물고기들이 거대한 유리벽 너머에서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연우는 홀린 듯 커다란 수조에 다가갔다. 손을 대 보자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딱딱한 등 껍데기를 가진 생명체가 헤엄쳐 가는 것이 보였다. 연우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거북이입니까?”

차현은 물속을 유유히 지나가는 거북이를 보았다.

“맞아.”

차현의 긍정에 연우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차현과 글자 공부를 하면서 그림으로 몇 번 보긴 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저건 뭡니까?”

“가오리네.”

물살을 가르는 거대한 가오리가 웃는 얼굴로 유리 벽 앞을 스쳐 지나갔다. 연우의 검은 눈동자가 물결을 담아 반짝였다.

곧 수조 안에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물고기가 나타났다.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그것은 지느러미만큼이나 뾰족한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몸체는 회색빛이었고 흰 점이 몸 곳곳에 박혀 있었다.

“저건 상어야.”

상어. 연우는 두 음절의 이름을 곱씹었다. ‘상어’는 태성의 집에 갔을 때 들었던 이름이었다.

“…….”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사는 세상. 이곳은 놀라울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연우는 투명한 유리 벽에 남은 제 손자국을 보며 생각했다. 바다에 가면 이런 풍경을 매 순간 볼 수 있을까?

“다른 곳도 가 볼래?”

상념을 깨운 것은 차현의 목소리였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잡고 더 깊은 곳에 들어오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 시선을 보냈다.

“돌고래도 있네.”

수조 속에 흰 돌고래가 있었다. 연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돌고래의 얼굴에 묘한 장난기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돌고래가 제 주둥이를 쫙 벌려 수조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꺄악!”

선두에 서 있던 어린 여자애가 ‘엄마아!’ 하며 제 어미의 품에 쏙 안겼다. 그 애의 부모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를 꽉 껴안았다.

수조 속의 돌고래는 제가 사람을 놀렸다는 게 퍽 즐거운지 유리 벽 앞을 빙글 돌았다. 상어와 달리 둥글둥글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저러다 사고 한번 치겠군.”

차현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너랑 닮았어.”

연우는 눈을 끔뻑였다.

저 흰 돌고래와 자신이 닮았다고? 하지만 다시 돌고래를 유심히 바라보아도 닮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걸까.

아이를 놀린 돌고래는 이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물속 깊은 곳으로 헤엄쳐 사라졌다. 주변의 아이들은 그래도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탄식을 내뱉으며 계속 얼쩡거렸다.

“갈까?”

연우는 결국 의문을 풀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수족관에는 비단 물고기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펭귄도 있었고, 해달도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해달이었는데, 물에 동동 떠다니면서 가슴 위에 양손을 모으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해달은 왜 손을 모으고 있는 겁니까?’

연우는 습관적으로 차현에게 물었다. 차현이라면 세상의 모든 대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으니까.

‘글쎄.’

그러나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을 피했다.

‘내 주변에 해달을 관찰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것까진 모르겠네.’

그러고는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연우는 ‘그도 모르는 게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차현이 해달에 대해 굳이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

연우는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차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입에 물린 담배에서 붉은 불씨가 타올랐다.

‘먼저 타고 있어. 금방 돌아올 거니까.’

아쿠아리움에서 나온 차현은 연우를 차에 태우며 말했다. 연우는 제 머리를 헝클이며 미미하게 웃는 차현을 보았다. 그의 손에는 은색 지포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담배는 좋은 것인가?

호기심이 일었다. 차현이 관심을 가지는 게 있다면 연우도 그것에 관심이 생겼다. 그의 관심거리를 자신도 알고 싶었다.

눈꺼풀을 내리감은 차현의 입술에서 연기가 흩어졌다. 연우는 짧아진 담배를 짓밟아 불씨를 꺼트리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른해 보이는 눈동자가 허공을 더듬다가 차를 향해 돌아섰다.

“…….”

시선이 마주쳤다. 연우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차현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연우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몸을 툭툭 털었다. 차로 다가오는 그의 걸음이 더뎠다.

달칵. 문이 열렸다. 연우는 냄새를 맡기 위해 깊이 호흡했다. 그러나 그가 느리게 걸어오는 동안 담배 냄새가 거의 날아간 것 같았다. 옆자리에 앉은 차현에게선 불쾌한 냄새를 찾을 수 없었다.

“오래 기다리게 했네.”

“아닙니다.”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해서 그를 관찰했기 때문일까. 딱히 오래 기다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연우는 차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당신이 피우고 있는 담배를 나도 피워 보고 싶다고,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왜?”

차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를 향해 웃어 보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표정인데.”

“네.”

연우는 순순히 긍정했다. 일단 말문을 튼 이상 물어보는 건 더 이상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국민 여러분 새 시대의 장을 펼친 지 벌써…….

그러나 연우가 말을 잇기도 전에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차 안을 메웠다. 연우의 눈이 운전석을 향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혁명단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여자. 대통령이 되었다 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목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 이런.”

운전사가 당황했는지 서둘러 라디오를 껐다.

“죄송합니다.”

“다음부터 조심하시면 되죠.”

차현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운전사의 얼굴에 멋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

생경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연우뿐인 것 같았다. 한 나라의 수장이 된 여자의 목소리는 풍기는 느낌이나 어조부터 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연우야.”

연우는 뒤늦게 퍼뜩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차현의 손이 연우의 입술 위에 닿았다. 연우는 제 입술을 툭툭 두드리고 떨어지는 손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많은 게 변한 것 같습니다.”

두서없는 말이었다. 차현은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듯하더니, 이내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그래.”

연우는 제 머리를 가볍게 헝크는 손길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차현의 눈동자에는 분명한 애정과 부드러움이 뒤엉켜 있었다.

연우는 눈을 내리깔았다. 변화는 두렵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무섭지 않았다. 자신의 변화를 달가워하는 이가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한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다.

이날 저녁, 차현은 고급 한식당에 연우를 데려갔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연우를 보며 말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그제야 연우는 과거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다음엔 같이 가.’

그건 연우가 맛없는 돈가스를 먹었다고 고백했던 날, 그가 약속한 ‘다음’이었다.

차현이 밥 위에 올려 주는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연우는 그가 주는 대로 모두 먹다가 ‘배가 터질 것 같다’는 경험을 처음 해 보았다.

저녁을 먹고 저택에 돌아온 연우는, 침실 방문 앞에서 갑자기 떠오른 질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저희는 무슨 관계입니까?”

“뭐?”

잘 가고 있던 차현이 발을 삐끗했다. 그는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연우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무슨 관계냐니?

그 질문이 내포하고 있을 의미가 무엇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게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리라는 것뿐이었다.

“당신은 저를 연우라고 부르는데, 저는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겁니까?”

그러나 차현이 되묻기도 전에 연우가 먼저 목소리를 냈다.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은 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차현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연우는 제게 질렸다면 질렸다 솔직하게 말할 위인이지 ‘무슨 관계냐’고 돌려 말할 이가 아니었다.

머리를 짚은 차현이 한숨을 내뱉었다.

“네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너라면 뭐든 괜찮으니까.”

연우는 차현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 자신과 아쿠아리움에 함께 가 주고, 맛있는 식당에도 데려가 준 차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부르려 했는데, 갑자기 무어라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관계냐’ 물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차현에게 답을 얻어 내려고. 그런데 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니.

연우는 머뭇거렸다. 차현을 무어라고 부르면 좋을까. ‘차현’이라 부르기엔 그의 공작 지위가 마음에 걸리고, 공작이라 부르자니 먼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럼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그 순간 태성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몰랐다.

“형.”

“뭐?”

무덤덤한 목소리에 차현의 얼굴이 굳었다. 마치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연우는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차현의 반응을 보아하니 ‘형’이라 부르는 건 잘못된 것 같았다.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연우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불현듯 한 장면을 떠올렸다.

‘엄마!’

그건 돌고래 수조 앞에서 화들짝 놀라던 아이의 모습이었다. 그 아이는 제 어미를 부르며 그 품에 가 안겼지.

생각해 보면 차현과 저도 비슷한 사이였다. 호적에도 분명 그렇게 올라 있으니까.

“아빠.”

“……아빠?”

차현의 얼굴이 더욱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지? 연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닙니까?”

“아닌 건 아니지……. 아닌 건 아닌데.”

혼잣말도 대답도 아닌 말을 읊조리던 차현이 마른세수를 했다. 벌어진 그의 입술 새로 ‘하…….’ 하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는 ‘아빠’랑 섹스 할 생각이 드나 보지?”

저벅. 반 발자국 떨어져 있던 차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진 얼굴이 곧장이라도 입 맞출 것처럼 가까웠다.

“나는 아들과 섹스 할 생각인 아빠가 될 테고.”

그의 손이 연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체온이 전해질 정도로 몸이 가깝게 붙었다. 연우는 미묘한 감정이 떠오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되고 싶어?”

연우는 입을 달싹였다.

아빠와 섹스 하는 아들은 잘못된 건가? 가족이란 존재는 차현이 처음이니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꺼림칙하게 얘기하는 걸 보니 뭔가 잘못되긴 한 거겠지.

“형.”

연우는 그나마 반응이 덜했던 호칭을 다시 입에 담았다. 가깝게 붙은 차현의 몸이 움칠 굳는 게 느껴졌다.

“차현 형이라 부르면 됩니까?”

연우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작은 입술에서 토해지는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다. 말갛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입술이 마르는 것은 오롯 차현뿐이었다.

“……미치겠네.”

나지막이 속삭인 목소리가 입술에 닿아 흐트러졌다. 연우는 눈을 깜빡였다. 말캉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흐, 읏!”

차현은 조급하게 연우의 입술을 벌렸다. 입 안을 파고든 혀가 목 안쪽까지 핥을 것처럼 깊이 들어왔다.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우악스러운 입맞춤에 몸의 균형이 흔들렸다. 연우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덜컹!

두어 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침실 문에 등이 부딪쳤다. 순간 퇴로가 차단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공포심에 가까울 정도로 등골이 오싹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 몸을 덮치듯 누른 남자는 자신이 느끼는 부분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공포는 쾌감으로 변질되어 어느 순간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흐읏, 우, 으…….”

차현의 손이 셔츠를 걷어 올리며 들어왔다. 연우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흉터가 난 옆구리를 지나 마른 가슴팍까지 올라온 차가운 손이 유두를 건드렸다.

“응, 으읏.”

유륜을 둥글게 문지르다가 꼿꼿이 선 유두를 툭 건드리면 몸이 움칠 튀었다. 눈을 감아서 그런지 쾌감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연우는 차현의 옷을 그러쥐었다. 부족한 숨 때문인지 머리끝까지 치달은 쾌감 때문인지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를 붙잡지 않으면 곧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흣…….”

“연우야.”

입술이 떨어진 순간, 차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내가 뭐라고?”

그는 조르듯 연우의 입술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내렸다. 촉, 촉, 간지러운 소리가 입 안을 적셨다.

“응?”

“……형. 차현 형.”

거칠어져 색색거리는 숨과 함께 토해진 목소리가 달았다.

연우와 눈높이를 맞춘 차현이 눈을 휘어 웃었다.

“응. 연우야.”

차현은 그렇게 말하며 제 팔을 연우의 허리에 감았다. 그러고는 연우가 기대 있는 침실 문을 밀어 열었다.

“……!”

차현은 휘청거리며 넘어갈 뻔한 연우의 몸을 붙잡았다. 놀란 듯 커다래진 연우의 눈이 차현을 향했다. 그러나 차현은 아랑곳 않았다. 그는 곧장 연우의 몸을 안고 가다시피 해 방 안으로 들어섰다.

풀썩.

침대에 누운 연우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무게에 눌린 침대가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연우는 제 위에 올라탄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형?”

제가 누구를 어떻게 자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얼굴이 퍽 순진했다. 차현은 손끝으로 연우의 입술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어린애 덮치는 변태라도 된 기분이네.”

손에 닿는 숨결에서 단내가 날 것 같았다. 차현은 자신에게 짧은 조소를 남겼다.

“틀린 말도 아니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연우는 제 입술을 핥고 들어오는 혀의 감촉에 눈을 감았다. 두꺼운 혀가 입 천장을 쓸고 헤집을 때마다 몸이 떨렸다.

“으응.”

툭, 툭. 몸을 감싸던 셔츠 단추가 하나둘 풀려 나갔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연우의 몸이 드러났다.

차현은 흉터로 얼룩덜룩한 마른 몸을 쓸어 올렸다. 바짝 선 분홍빛 유두가 손끝에 걸렸다.

“연우야.”

“흐읏…….”

입술이 떨어지자 연우는 작은 숨소리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입 맞춘 차현이 콧잔등에, 턱 끝에, 쇄골 위에 입을 맞췄다.

“아……!”

그러고 그는 곧 연우의 가슴팍에 입술을 댔다. 뾰족하게 솟은 유두가 축축한 점막 안에 빨려 들어가자 오싹한 쾌감이 머리칼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우으, 아, 응, 거기, 흣…….”

연우는 작게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차현은 혀를 넓게 펴 유두와 유륜을 모두 핥고, 척척하게 젖은 가슴팍 위에 이를 세워 깨물었다.

평소에는 존재감도 느끼지 못하던 유두를 괴롭힘 당하고 있을 뿐인데, 쾌감이 열처럼 끓어올랐다. 연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차현의 머리칼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으니 그만해 달라는 연우 나름의 의사표현이었다.

“형, 그만……. 거기 이제, 흣……!”

그러나 차현은 연우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유두의 껍질을 벗겨 낼 것처럼 핥으며 연우의 등에 손을 댔다.

등을 쓸어내린 손이 곧장 바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엉덩이 쪽으로 손을 넣은 차현은 연우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 냈다.

“흐읏…….”

맨살에 바깥 공기가 닿자 소름이 돋았다. 반쯤 선 성기가 발갛게 달아올라 뜨거웠다.

연우는 찡그린 눈살을 팔로 가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몸이 통제를 벗어나는 감각은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연우야.”

차현은 눈을 가린 연우의 팔을 잡아 침대에 눌렀다. 그러고는 눈물로 흐려지기 시작한 눈 위에 입술을 비볐다.

“연우야.”

차현은 연우의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 내린 후에 제 옷을 성급히 벗어젖혔다. 그 아래로 단단한 몸체가 드러났다. 연우는 흐릿한 시야에 담긴 차현의 몸을 올려다보았다.

“하읏……!”

그러나 시선은 오래가지 못했다. 차현이 반쯤 선 성기를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연우는 헉 숨을 들이켜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배 속을 들쑤시는 듯한 쾌감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으읏, 아, 으응.”

가슴팍 위에 닿았던 입술은 어느새 몸에 남은 흉터를 더듬고 있었다. 연우는 오래전 아문 흉터들을 물고 핥는 간지러운 감각에 신음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쾌감에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거기 그만, 형, 혀엉, 아!”

차현의 혀에 쓸려 바짝 선 유두는 공기만 스쳐도 따끔거렸다. 성기 전체를 주무르는 커다란 손에 몸이 자꾸 비틀렸다.

연우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차현의 어깨를 밀며 ‘형’ 하고 불렀다. 그제야 차현이 입술을 떼고 중얼거렸다.

“……기분 이상하네.”

연우는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굴러 떨어지자 차현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랐다. 아니, 저것을 감정이라 할 수 있을까? 맛이 간 것 같은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졌다.

“읏!”

성기를 움켜쥐고 있던 손이 미끄러지듯 입구에 닿았다. 선액으로 젖은 손끝이 구멍을 문지르자 입구가 작게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차현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마른 입구는 침입을 쉬이 허용하지 않았다. 검지 한 마디 정도가 들어간 구멍이 뻑뻑했다. 초조한 듯 입술을 핥은 차현이 서랍장에 손을 뻗었다.

덜컹!

거칠게 빼낸 서랍장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

미끈거리는 윤활액이 성기 위로 주르륵 떨어졌다. 거의 한 통을 다 쏟아부은 탓에 윤활액이 성기를 타고 흘러 회음부와 구멍까지 적셨다.

“흐읏, 으…….”

차현의 손가락이 미끌미끌해진 입구를 비집고 다시 밀려 들어왔다. 축축해진 내벽이 방금 전과 다르게 차현의 손가락을 무리 없이 삼켰다.

“연우야.”

구멍을 벌리는 손가락이 늘어났다. 한 개에서 두 개, 순식간에 세 개까지 늘어났다. 벌어진 내벽을 들쑤시는 손가락이 어딘가를 뭉근하게 비벼 올릴 때마다 울음 섞인 신음이 튀어나왔다.

“으응, 읏, 형, 형…….”

“하.”

헛웃음에 가까운 소리가 차현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연우는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차현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구멍을 들쑤시던 손가락이 급하게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 연우야. 오늘은 좀 급해서.”

두꺼운 귀두가 구멍에 닿았다. 다 풀리지 않은 구멍은 아직 그의 성기를 삼키기엔 좁았다. 그러나 진입을 시작한 차현은 멈추지 않았다.

“……!”

“큿…….”

입구를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성기에 배 속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숨을 헉 들이켠 연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현은 제 등에 남는 상처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연우의 목덜미에 자잘한 키스를 남겼다.

“연우야, 하, 괜찮아. 응?”

연우는 등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에 뻣뻣이 굳은 몸이 천천히 이완됐다. 압박감에 막혔던 목소리가 뒤늦게 트였다.

“이거, 너무, 응…….”

울음 섞인 목소리는 제 것답지 않게 투정을 부리는 것같이 들렸다.

“형, 이거 너무, 깊…… 흐.”

“연우야. 쉬, 괜찮아.”

연우는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차현의 성기가 배 속에 가득 찬 것 같았다. 차현은 괜찮다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힘들면 내 허리에 다리 감아 봐. 응……. 그렇게.”

연우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뻗어 그의 허리에 감았다. 엉덩이가 위로 들리자 배 속을 찌르던 압박감이 좀 줄어든 것 같았다.

연우는 차현의 목에 감았던 손을 풀고, 흐릿하게 풀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그 순간 깊숙한 곳까지 박힌 성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즉, 즈윽. 성기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내벽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헉, 읏……. 으응! 흣, 아…….”

여린 점막을 열어젖힌 성기가 전립선 위를 짓눌렀다. 연우는 손에 잡히는 시트를 마구 그러쥐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치달은 쾌감에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숨을 쉬기 위해 벌린 입술에서 신음이 마구 새어 나왔다.

“응, 형, 아, 잠깐……. 너무, 우으.”

두꺼운 귀두가 배 속을 헤집을 때마다 성기가 뻣뻣해졌다. 머리를 쭈뼛 서게 만드는 열감에 뇌가 녹을 것 같았다.

연우는 차현의 허리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럴 때마다 차현의 성기가 가득 들어찬 내벽도 술렁거렸다. 연우의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연우야, 흣, 나 봐 봐.”

눈물로 흐려진 시야를 들어 올리자 차현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우리 연우, 울보네.”

“아니, 응, 아니……. 흐으, 아닙, 읏, 아닙니다.”

연우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 내벽을 쾅쾅 때리는 두꺼운 성기에 자꾸 울음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래서야 ‘아니’라고 대답한 것에 설득력이 없지 않은가.

“아니야?”

“아니, 흐으, 아…….”

연우는 몸을 뒤틀었다. 두꺼운 성기가 일순 닿은 적 없는 깊은 곳까지 치고 들어왔다. 눈가를 흠뻑 적신 눈물이 막을 새도 없이 흘러내렸다.

“이렇게 우는데.”

“흐으, 형, 잠깐, 이거…….”

차현은 연우의 눈가에 입술을 맞댔다. 열이 오른 살에선 단내가 났다. 그는 갈증이 인 사람처럼 눈물을 핥아 먹으며 연우의 허리를 고쳐 잡았다.

“예쁘다.”

연우는 점점 더 사람다워졌다. 순진한 얼굴에선 더 이상 ‘개’의 편린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이제 누군가의 개가 아니었다. 명령을 따르는 존재가 아니었다.

제 가족이고 연인이며, 하나뿐인 연우(姸偶)였다.

“예쁘다. 큿, 우리 연우.”

“싫……, 우으, 그만, 혀, 형, 나올 것 같…….”

“괜찮아.”

차현은 사정할 것처럼 꺼떡이는 연우의 성기를 잡아 문질렀다. 연우의 몸이 눈에 띄게 튀어 올랐다.

크게 뜨인 검은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벌어진 입술에서 작은 숨소리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픽픽 쏘아진 사정액이 연우의 몸 위를 적셨다.

차현은 제 성기를 끊을 듯 조이는 점막의 감촉에 이를 악물었다.

“큿…….”

차현의 성기 끝에서 토해진 정액이 내벽 안을 적셨다. 연우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벼락처럼 내리꽂혔던 쾌감의 여파가 배 속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연우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차현의 허리에 감았던 다리를 풀었다. 아니, 풀려고 했다.

“형……?”

차현은 미끄러지는 연우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허리가 다시 들리고, 내벽 깊숙한 곳에서 차현의 성기가 다시 몸집을 불리는 것이 느껴졌다. 연우의 검은 눈에 당황 섞인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왜 자꾸 형이라 불러.”

“무슨…….”

차현은 연우의 눈가를 적신 투명한 눈물을 핥았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연우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차현은 친절한 설명 대신, 쾌감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점막 안쪽을 찔러 올렸다. 연우의 입술 새로 막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함부로 형이라 부르니까 흣, 이런 거잖아. 연우야.”

“그럼, 그럼 뭐라고…….”

연우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차현은 화사한 미소로 화답했다.

“침대 위에서는 계속 불러.”

“시, 싫…….”

사정액이 고인 구멍 안에서 찔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연우는 작게 몸부림을 쳤다.

차현이 이렇게 집요하게 달라붙는 날이면 연우는 요의에 가까운 감각을 느끼며 파정해야 했다(실례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듣긴 했지만, 수치스러운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밖에서도 그러면 좀 곤란하겠지만.”

그러나 차현은 연우를 도망치게 둘 생각이 없었다. 먼저 자극한 것은 저가 아니고 연우지 않은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느지막한 오후였다. 연우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침대 맡에 놓인 동화책 두 권을 집어 들었다. 이제 제법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연우를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우는 저 스스로 동화책을 찾아 읽는 것엔 관심이 없었다. 차현은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삶보다는 죽음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가까웠던 인생이다. 그런 연우에게 동화는 너무 현실성이 없었다.

하지만 글을 읽는 습관을 들이는 데에는 동화만 한 것이 없었다.

차현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자신이 연우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연우는 이것마저 흥미 없어 하지는 않았다.

“뭐가 보고 싶어?”

차현은 연우에게 두 권의 책을 보였다. 하나는 <빨간 구두>였고, 다른 하나는 <인어 공주>였다.

그러나 두 권이나 보여 줄 필요가 없었다. 연우가 망설임 없이 <인어 공주>를 골랐기 때문이다.

“어제는 <개구리 왕자>더니, 오늘은 <인어 공주>네.”

차현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연우는 아쿠아리움에 갔다 온 이후에 바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저 자신은 모르는 듯했지만, 매번 물고기와 관련된 동화를 고르는 것을 보면 그랬다.

바다라.

차현은 <인어 공주>의 첫 페이지를 펼치며 생각했다. 아쿠아리움에 다녀온 것만으로도 이런데, 직접 보게 되면 연우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부드러운 미소를 띤 차현은 나긋한 목소리로 동화를 읽기 시작했다.

“푸른 꽃만큼이나 파랗고 보석처럼 투명한 깊은 바닷속…….”

인어 공주는 열다섯 살 생일에 선상에서 연회를 즐기던 인간 왕자를 보게 된다. 공주는 잘생긴 왕자를 남몰래 지켜보다가, 그가 탄 배가 기상 악화로 난파되는 것을 본다.

인어 공주는 해류에 휩쓸려 가던 왕자를 구해 낸다. 그러나 깨어난 왕자는 인어 공주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고, 공주는 상심하여 용궁으로 돌아간다.

“왜 왕자에게 자기가 구했다고 말을 안 합니까?”

차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연우가 있었다.

“글쎄.”

사실 답은 명확했다. 그러지 않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종이 다르니 모습을 나타내기 부담스러웠겠지. 너도 물고기가 말을 걸면 놀랄 것 같지 않아?”

잠시 고민하던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현은 비식 웃으며 연우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제야 연우는 온순한 얼굴로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가슴앓이를 하던 인어 공주는 제 언니들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그들의 도움으로 먼 곳에서나마 왕자를 지켜보게 된다. 왕자를 훔쳐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주는 육지에 대한 강한 열망을 느낀다.

결국 공주는 ‘인간의 영혼’을 갖게 해 준다는 마녀를 찾아간다. 마녀는 “인간의 아름다운 외모와 다리를 주겠다. 하지만 너는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날카로운 칼로 찔리는 고통을 느낄 것이며(연우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또한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경우 인간의 영혼을 갖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절박한 공주는 마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녀는 계약의 대가로 공주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져가고 그녀의 혀를 잘라…….

“혀를 자릅니까?”

“그렇게 적혀 있네.”

연우는 차현이 들고 있는 동화책을 확인하기 위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한참 웅얼대며 글자를 읽어 내린 연우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물속에선 지혈이 잘 안 될 텐데.”

차현은 그 혼잣말을 못 들은 척해 주기로 했다.

여하간 인간의 다리를 얻은 공주는 왕자의 곁에 머무르게 됐지만, 이미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약혼녀가 배에서 왕자를 구해 낸 은인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진짜 은인은 인어 공주인데도.

그러나 목소리를 잃은 공주가 진실을 알릴 방법은 없었다. 그사이에도 왕자의 결혼은 하루하루 가까워져만 갔다.

왕자의 결혼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온 밤, 공주의 언니들이 그녀를 찾아온다. 그들은 공주에게 칼을 쥐여 주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왕자의 심장을 찌르고 인어로 돌아오는 것뿐’이라 말한다.

공주는 그들의 애원에 못 이겨 칼을 들고 왕자의 침실로 향한다. 그러고 잠든 왕자의 앞에서 칼을 치켜든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왕자를 사랑한 공주는 결국 그를 죽이지 못하고 바다에 뛰어든다.

“……공주는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차현의 단정한 손끝이 동화책의 마지막 구절을 스쳤다.

“왜 물거품이 된 겁니까?”

“마녀가 말한 조건을 지키지 못했잖아.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죽고 만 거지.”

차현은 동화를 덮어 서랍장 위에 올렸다. 연우는 차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시체가 없는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실종입니다.”

연우에게는 별 의미 없는 말이었다. ‘개’였던 시절, 황제는 시체를 확인해야만 죽음을 믿곤 했으니까. 이건 어쩔 도리 없이 고착화된 사고였다.

그러나 그 말은 차현의 내면에 묻어 두었던 기억을 건드렸다.

연우의 시체를 찾을 수 없던 절망의 날을, 불면의 밤을, 숨 쉬는 것조차 버겁던 나날을.

“……그래.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면 그건 죽음이 아니지.”

연우는 조용한 어조로 읊조린 차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있었다. 감정이랄 것들을 모두 쥐어짜 내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얼굴.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차현의 뺨을 움켜쥐었다.

“……연우야.”

차현의 시선이 느리게 와 닿았다. 연우는 그의 얼굴에 감정이 돌아오는 순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숨을 내뱉은 차현이 제 뺨에 닿은 연우의 손을 잡았다. 잠시간 그대로 온기를 느끼던 차현은 그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연우야.”

“네.”

연우의 손바닥 안에 몇 번이나 입술을 맞추던 이는, 이내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듯 작은 몸을 제 품에 당겨 안았다. 연우는 차현의 품에 와락 안겨 눈을 깜빡였다. 차현의 체향이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너는 내 곁에 있겠다 약속했어. 그렇지?”

“네.”

대답을 들었음에도 차현은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그는 천둥을 무서워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연우는 그 품에 안겨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매번 꼴같잖은 모습만 보여 주는군.”

머리 위에서 자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우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작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저를 안은 게 꼴같잖은 모습입니까?”

“뭐?”

차현의 목소리에 당황이 번졌다.

“제가 당신 품에 안겨 있는 게 꼴같잖은 겁니까?”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차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가 꼴같잖다고?”

마치 자신이 모욕당하기라도 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뭐가 꼴같잖다는 건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제겐 꼴같잖지 않습니다.”

연우는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듯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건 연우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연우는 고개를 들어 차현의 턱에 입술을 댔다. 부드러운 감촉이 와 닿자 차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형은 늘 아름답습니다.”

연우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꼴같잖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 중 그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흣!”

그 순간 차현의 손이 엉덩이로 내려와 구멍을 건드렸다. 부어 벌어진 입구가 그의 손길에 빠끔 입을 열었다.

“아직 열려 있는데.”

커다래진 연우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다시 할래?”

차현이 웃으며 물었다. 연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제 그렇게 했는데 다시 하겠다니.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을 것이다.

“자꾸 형이라 부르지 마. 네가 부르면 이상해지니까.”

연우는 토 한 번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다시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아.”

물론, 그건 연우의 의사일 뿐이었다.

차현은 고작 ‘형’이라는 단어 하나에 반응하기 시작한 제 아랫도리를 느끼고 한숨을 내뱉었다. 이래서야 짐승 새끼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연우야.”

차현은 연우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자 불안과 경계심에 잠겨 있던 연우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잠깐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은색 지포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면서 성기를 가라앉힐 생각이었다.

“담배는 좋은 겁니까?”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뭐?”

차현은 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연우를 보았다. 은색 지포 라이터를 주시하는 연우의 눈빛에는 분명한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연우의 호기심은 곧잘 행동으로 이어지고는 했으니까.

“저도 피워 보면 안 됩니까?”

예감은 현실이 됐다. 차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당당한 연우를 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누굴 탓해. 내가 조심했었어야지.”

탁. 차현은 동화책이 놓여 있는 서랍장 위에 지포 라이터를 내려놓았다.

“하나도 안 좋아. 관심 꺼.”

“그렇지만.”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차현이 연우의 머리칼을 엉망으로 헤집었다. 순식간에 까치집이 된 연우가 둥그렇게 뜬 눈으로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나도 손 안 댈 거니까, 다른 생각 마.”

연우는 지포 라이터와 차현을 번갈아 보았다. 차현은 다시 라이터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정말 담배에 관심을 끊은 것 같았다.

“……네.”

차현이 관심을 끊은 것을 깨닫자 담배를 향했던 흥미도 떨어졌다. 연우는 미적미적 대답하며, 제 머리칼을 매만지기 시작한 차현의 손에 머리를 기댔다.

“연우야.”

벤치에 앉은 연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근사한 건물을 등진 차현의 얼굴이 보였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네.”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차현은 대답을 듣고도 안심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누가 할 말 있으니 따라오라 해도 가면 안 되고.”

“네.”

연우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불렀다고 오라 해도 가면 안 돼.”

“왜입니까?”

순종적으로 이어지던 대답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차현’이 불렀는데 왜 가면 안 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널 맡길 리 없잖아.”

차현은 흐트러진 연우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지금 내가 가야 하는 곳이 저기만 아니었어도, 널 따로 떼어 놓는 일은 없었을 거야.”

차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청사 앞 정원이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차현은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반드시 청사에 가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연우야.”

머리를 매만지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금방 돌아올 거니까 여기 있어. 알겠지?”

“네.”

연우는 아쉬운 감촉을 남긴 손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현이 떠난 자리에 앉아 발을 까딱이던 연우가 불현듯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인기척 때문이었다. 검은 눈이 한 곳을 직시했다.

그늘진 곳에 서 있던 누군가가 움칠 몸을 떨었다. 연우의 눈동자에 희미한 의문이 떠올랐다.

“아, 오랜만입니다.”

언제 주변을 맴돌았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나타난 것은 재경이었다. 차현의 보좌관이자 수하였던 남자, 윤재경 말이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다니, 이것 참 기가 막힌 우연이군요.”

연우는 눈살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작위적인 만남이 아닌가.

“용건이 뭐야.”

“하하……. 재미없는 건 여전하시네.”

재경은 싸늘한 연우를 보며 미소를 거두어들였다.

“다른 건 아니고, 공작님께 전해 드릴 말이 있어서요. 그래서 말인데 장소를 옮겼으면 좋겠…….”

“안 돼.”

연우는 재경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대답했다.

“여기서 해.”

“……아니, 뭐 대단한 곳에 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여기는 너무 훤히 뚫려 있으니까 그냥 저기.”

“안 돼.”

연우는 완고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대꾸할 맘이 없다는 의사가 분명했다. 재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용건만 간단히 하겠습니다. 공작님은 요즘 어떻습니까?”

“그걸 왜 물어보지?”

연우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공작’처럼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은 사소한 건강 상태도 극비에 부쳤다. 그 자체만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혹은 종종 그것을 악용해 공격해 오는 인간도 있기 때문이었다.

재경은 순식간에 뒤바뀐 기세에 마른침을 삼켰다.

세상에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몇 가지 것들이 있었다. 인간의 본성이나, 타고난 습관 같은 것들. 저 남자의 저런 모습도 타고난 습관인 걸까.

“……나중에.”

재경은 머리를 긁적였다.

지난 일에 미련 갖는 건 멍청한 짓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자기 뜻대로 되던가?

“나중에라도 뭔가 바뀌길 원한다면 절 찾아와 달라 전해 주십시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재경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별로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시지만…….”

“용건은 끝난 건가?”

“……공작님은 이런 인간이 뭐가 좋다고.”

꿍얼거린 재경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예에, 불청객은 이제 떠납니다. 말이나 제대로 전해 주십쇼.”

연우는 멀어지는 재경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발을 까딱거리자 그림자가 길어졌다가 짧아지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저벅, 저벅.

연우는 낯익은 기척이 제게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벤치 위에서 벌떡 일어난 연우가 어딘가로 시선을 보냈다.

“많이 기다렸어?”

차현이었다.

그는 다가오자마자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손길에 연우의 두 눈이 절로 가늘게 접혔다.

차현은 그런 연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별 뜻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와서 같이 가자고 안 했어?”

“했습니다.”

“누가?”

머리를 쓸던 차현의 손이 멈췄다. 검은 눈이 굳은 표정의 차현을 담았다.

“윤재경을 만났습니다.”

“윤재경?”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라도 뭔가 바뀌길 원한다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전해 왔습니다.”

“…….”

차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연우야, 새로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던 것을 포기해야 해. 그게 세상의 이치거든. 운이 좋으면 필요 없는 걸 버릴 수 있겠지만, 운이 나쁘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말아.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자신의 인간성이든. 그리고 대개 운이 나쁠 확률이 더 높지.”

그의 말은 이따금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제 그런 모험을 할 때는 지났어.”

하지만 연우는 실망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예전에는 ‘자유’라는 말조차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다른 것처럼.

“연우야.”

“네.”

연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순순하게 대답했다.

“바다에 가고 싶지 않아?”

검은 눈이 일순 커졌다. 차현은 놀란 연우를 보며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여행을 가자. 네가 보지 못했던 곳을 보고, 보고 싶어 했던 곳에 가자.”

커다란 손이 연우의 뺨을 감싸 쥐었다.

“어때?”

차현이 청사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이 나라의 유일한 귀족’은 어딘가로 떠나기 전에 보고를 해야 했다. 그가 타국과 결탁하는 일이 생기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여행.”

연우는 혀 위를 구르는 낯선 단어를 곱씹었다.

“함께 말입니까?”

“그래.”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얼굴이 아름다웠다.

아니, 차현은 늘 아름다웠다. 비단 외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게 그러했다.

차현과 함께 있을 때면 연우는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생겼다.

“가고 싶습니다.”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연우는 자신의 얼굴 근육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차현이 숨이 멎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건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한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또래의 평범한 인간처럼, 행복을 맞이한 사람들처럼, 연우는 웃었다.

“바다.”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잔잔한 파도 소리처럼 낮았다.

차현은 홀린 듯 연우의 입가를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는 표정은 분명 연우의 것이었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에도 웃음이 번졌다.

“그래, 가자.”

어느 평범한 날의, 특별한 하루였다.

― <개와 늑대의 시간> 외전 마침 ―

개와 늑대의 시간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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