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8/19)

외전

조운모우(朝雲暮雨)3)

3) 「아침에는 구름, 저녁에는 비」라는 뜻으로, 연인의 언약이 굳은 것, 또는 연인의 정교를 이르는 말.

차현은 눈을 떴다. 얼마 만에 이렇게 깊은 잠을 잔 건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그의 시선이 불현듯 자신의 품을 향했다.

“…….”

품 안에 가득 찬 온기의 주인이 그곳에 있었다.

연우.

일정한 속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가슴팍이 가깝게 붙어 있었다.

고요하게 감긴 흰 눈꺼풀은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에 가려졌음에도 순진해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눈가를 가린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밀자 따뜻한 체온이 손끝에 닿았다. 거칠어진 피부가 손아래서 버석거렸다.

차현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연우의 모습은 꼭 처음 만났을 때 같았다. 무엇 하나 제대로 다듬어진 게 없는 날것의 모습. 그런데 왜 처음과 다르게 눈을 뗄 수 없는 걸까.

곧고 아름다운 손이 연우의 눈 밑을 쓸었다. 빽빽하게 자라난 짧은 속눈썹이 손끝을 간질였다. 깃털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숨소리를 죽인 남자는 조심스레 눈가를 더듬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실재한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듯.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고요를 깨고 파르르 떨렸다. 밀려난 속눈썹 아래로 새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차현은 숨을 멈췄다.

초점이 흐려졌던 검은 눈이 순식간에 이지를 찾고 차현을 바라보았다. 말간 눈동자에 빛이 끼쳐 왔다. 그는 그제야 지금이 동이 터 오르는 아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차현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연우의 눈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달싹이는 작은 입술 새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지 않으려 했는데…….”

아.

연우의 눈가에서 떨어진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꿈이 아니다. 환상도 아니고, 환영도 아니다.

살아 있는 그가 자신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정말 연우가 돌아온 것이다.

“읏?”

연우는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눈을 크게 떴다. 차현이 아무런 말 없이 그의 몸을 꽉 그러안은 것이다. 단단한 품에 반쯤 얼굴을 묻은 연우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시는…….”

“연우야.”

고아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남자의 입술이 거칠어진 고동색 머리칼에 닿았다.

“내 곁에 있어.”

등에 닿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검은 눈이 일순 놀란 듯 커다래졌다. 연우는 차현을 올려다보려 했다.

“……사라지지 마.”

연약한 목소리를 내뱉는 남자는 좀처럼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연우는 입을 달싹였다.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자신이 없었던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 유약하게 구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두려움에 떠는 듯 보이는 차현을 위로하고 싶었다.

연우는 손을 뻗어 차현의 등을 마주 안았다. 접촉이라 봐야 고작 그뿐이었는데도 남자가 급히 숨을 토해 내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한 저음이 차현의 귓가를 맴돌았다.

“……당신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어서.”

“응.”

연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그러안은 남자의 손에 아직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말로는 그를 안정시킬 수 없는 걸까.

머뭇거리던 입술 새로 조그마한 목소리가 토해졌다.

“떠나라 해도 있겠습니다.”

“응.”

맞붙은 품 안이 따뜻했다.

목을 울린 차현이 연우의 머리칼에 뺨을 기댔다. 남자의 체향이 훅 코끝으로 밀려들었다. 일순 심장이 울렁거리고, 자신도 모르던 진심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이제 제가 있을 곳은 여기밖에 없고.”

“계속 말해.”

연우는 뜨거워진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아니, 눈가뿐 아니라 귓가도 뜨거웠다. 왜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한 저도 여기에 있겠습니다.”

“……그래.”

등을 감싼 우악스러운 힘이 미약하게나마 줄어들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물속에 잠기듯 천천히 잦아들었다. 연우는 코를 박은 남자의 가슴팍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계속 이곳에 있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잠든 남자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연우는 수마에 잠기듯 깊은 잠에 빠져든 남자의 품 안에서 쿵쿵 뛰는 심장의 소리를 들었다.

“…….”

얼마간 침묵을 지켰을까. 연우는 까만 눈을 들어 올려 잠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고요한 얼굴 위에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연우는 차현의 등에 닿아 있던 손을 자신도 모르게 움직였다. 툭 튀어나온 날개 뼈와 선 곧은 목덜미를 지난 손가락이 마침내 결 좋은 머리칼에 닿았다.

손끝이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쓸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혹여 잠든 차현이 깨어날까 눈치를 살피던 연우는 곧 그마저도 잊고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모래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손가락에 머리카락을 꼬아 보기도 하고, 검지와 엄지에 넣고 비벼 보기도 했다.

연우가 더듬은 머리칼은 순식간에 엉망으로 흐트러져 까치집 같은 풍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차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잠든 얼굴에 감도는 것은 오로지 온화한 평온뿐이었다.

새하얀 햇빛이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방 안이 따스했다.

차현은 겨울잠을 자는 커다란 동물처럼 보였다. 그는 시시때때로 잠들었고, 잠든 후에는 무엇도 경계하지 않는 무방비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간혹 가다가, 그는 악몽을 꾸기라도 한 것처럼 다급히 눈을 떴다. 공황에 빠진 듯 흔들리던 검푸른 눈동자가 자신의 품 쪽을 향하면, 애착인형처럼 안겨 있던 연우는 조용히 그를 마주 보았다.

‘하.’

차현은 연우와 눈이 마주친 후에야 맥이 풀린 듯 짧은 헛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자신에 대한 조소 같기도 하고, 안도의 한숨 같기도 한 웃음.

작은 몸을 그러안은 남자는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길 수 없는 수마가 거듭 눈꺼풀을 덮었다. 품에 안은 뜨끈한 체온이 가닥가닥 타들어 간 신경을 노곤하게 만들었다.

연우는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잠들고, 얼마 뒤 다시 눈을 떠 시선을 마주하는 남자의 낯선 행동에 금세 적응했다. 너른 품 안에서 남자가 눈을 뜨길 기다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의 개’로 살았을 때는 이보다 더한 기다림을 겪은 적도 있었다.

연우는 차현이 스스로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사실 차현이 잠든 내내 그를 끝도 없이 만져 댔기에, 기다렸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새벽, 연우는 문득 그의 품을 비집고 나왔다.

차현은 품이 허전해지기 무섭게 잠에서 깨어났다. 한 몸처럼 붙어 있던 온기가 떨어져 나간 것은 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작열감을 주었다.

차현은 다급히 눈을 떴다. 막 침대에서 벗어나고 있는 이의 뒷모습이 눈에 담겼다.

안 돼.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인지 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이든 연우가 자신의 곁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급히 뻗어진 손이 흉터 가득한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디 가.”

침대 위에서 내려온 연우는 자신의 팔목을 붙잡은 단단한 손을 보았다.

창백한 새벽빛을 받은 차현의 얼굴에 두려움을 닮은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여실히 드러난 날것의 감정. 남자의 얼굴에서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있던가.

연우는 당황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화장실에…….”

“가지 마.”

붙잡힌 손에 차현의 이마가 닿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거친 손과 느리게 마찰했다. 나직하게 토해 낸 한숨이 손등에 닿아 간지러웠다.

연우는 새벽빛에 드러난 마른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커다란데, 어쩐지 지켜 줘야 할 것처럼 애처로워 보였다.

“네.”

연우는 도로 침대에 앉았다. 그러자 손등에 닿아 있던 남자의 무게가 떨어져 나갔다.

눈을 한 번 깜빡인 찰나의 순간, 그가 연우의 몸을 황급히 끌어안았다. 작은 틈조차 없이 붙은 몸에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

“…….”

차현은 푸석푸석한 머리칼에 코를 대고 침묵을 지켰다. 연우는 그의 품에 가만히 안겨 밀려드는 요의를 참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가 만족할 때까지 참아 볼 생각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안겨 있었을까. 머리에 파묻혀 있던 남자의 입술이 나지막한 한숨을 토해 냈다.

차현은 미적거리며 품에 안았던 몸을 밀어 냈다. 연우는 갑작스레 떨어진 그가 의문스러워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갔다 와. 빨리.”

차현의 미간은 일그러져 있었다. 일견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

정말 갔다 와도 되는 걸까?

멍하니 깜빡거리는 검은 눈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자, 굳게 다물렸던 차현의 입술이 열렸다.

“보내 줄 때 다녀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연우는 비켜선 눈동자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가긴 가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 남자를 둬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연우는 마침내 결심했다. 빨리 갔다 오자.

“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연우가 걸음을 재촉했다. 작은 신형이 문 너머로 사라졌다.

탁.

방에 홀로 남은 차현이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연우를 삼킨 문에 시선을 두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그 짧은 순간에 연우가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 아닐까 봐 두려웠다.

“……젠장.”

차현은 거칠게 머리칼을 헝클었다.

머리로는 이 우스운 가정을 비웃고 있는데, 몸은 공포에 질려 뻣뻣하게 굳었다. 연우를 안고 있을 땐 매순간 밀려들었던 잠이 지금은 살얼음처럼 깨어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일순간이지만, 닫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 연우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차현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꽤 다급히 튀어나온 말간 얼굴의 남자가 곧장 침대로 걸어왔다.

“죄송합니다.”

까만 눈을 깜빡이며 용서를 구하는 이 남자는, 그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차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작은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따뜻한 피부가 손끝에 닿자 안도가 밀려들었다.

그는 연우의 흰 목덜미에 뺨을 기댔다. 달짝지근한 살내가 곤두선 신경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는 기분.

“늦었어.”

“……다음엔 더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목덜미에 닿은 남자의 입술에서 비식 웃음이 흘렀다. 숨결이 흐트러지는 간지러운 기분에 연우의 몸이 움칠 떨렸다.

“배고프진 않아?”

남자가 얼굴을 목덜미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버석거리는 머리칼이 그의 손안에서 헝클어졌다.

“내가 자는 동안 제대로 식사도 못 했을 텐데.”

“별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체 먹는 행위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 저택에 와 태성이 주는 음식을 꾸준히 받아먹은 게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누워 있을 순 없지.”

연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남자의 손이 손등에 닿는다 싶더니, 곧 그가 깍지를 껴 왔다. 남자의 곧고 예쁜 손이 자신의 흉측한 손과 완전히 얽혔다.

긴 잠에 빠져 있던 남자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입을 달싹였다. 분명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주 본 얼굴에 반짝거리는 감정이 넘실거렸다. 수면에 비치는 햇살만큼 반짝이는 감정의 편린들. 연우는 홀린 듯 눈을 깜빡였다.

“가자.”

남자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단단히 얽힌 손끝에 힘을 주었다.

“연우야.”

남자가 이름을 불렀다. 연우는 눈을 들어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네 이름을 바꿔 보는 건 어떨까.”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건,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였다.

“왜 그러십니까?”

연우는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자신의 이름을 왜 바꿔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글쎄.”

크게 끔뻑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차현은 난처함을 느꼈다.

왜냐고?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서두부터 그렇게 꺼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했던 수많은 후회와 생각들은, 단순히 말로 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차현은 입술을 꾹 다문 연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해 가능한 답변이 나올 때까지 침묵을 지킬 모양이었다. 그것이 연우다워서 비식 웃음이 새어 나오다가도, 동시에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결국 궁여지책으로 짜낸 대답을 토해 냈다.

“연우라는 이름은 너무 흔하잖아.”

“제겐 하나뿐입니다.”

연우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차현의 손가락 끝이 테이블 위를 두들겼다.

“뜻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신경 안 씁니다.”

작은 입술이 대답을 토해 낸 직후 꾹 다물렸다.

차현은 버석버석한 머리칼이 길게 드리워진 얼굴을 보았다. 연우는 어쩐지 토라진 것처럼 보였다. 내리깔린 시선이나 앙다문 입술이 그것을 방증했다.

아니, 실은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한 것에 가까울 테지만.

확실한 것은 그저 연우가 ‘이름을 바꾸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변명을 할까 했지만, 연우가 실망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차현은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네게 그 이름보다 좋은 이름을 지어 주고 싶어서 그래.”

연우의 눈이 홱 들렸다. 일순간 새까만 눈이 크게 흔들렸다.

미미한 혈색을 띠는 작은 입술이 두어 번 달싹거리더니, 낮은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좋은 이름과 나쁜 이름이 따로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싫습니다.”

연우는 손끝을 구부려 옷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남자는 더 좋은 이름을 지어 주고 싶다 했지만, 그런 호의는 받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가장 좋은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저는 당신이 저를 연우라 부르는 게 좋습니다.”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었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흔한 이름인지, 얼마나 형편없는 뜻을 가졌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무슨 말을…….”

대답을 들은 남자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리더니, 갈피를 잡지 못한 시선을 끝내 테이블 끄트머리에 두었다.

“하.”

차현은 입가를 가렸던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결 좋은 검은 머리가 이마 너머로 모두 넘어갔다가 푸스스 다시 흐트러졌다.

“젠장.”

아름다운 얼굴에 사나운 기운이 어른거렸다. 연우는 갑작스레 욕지거리를 뱉는 남자의 기행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눈을 끔뻑였다.

“누가 네게 그런 말을 가르쳐 준 거야.”

“……?”

그런 말?

연우는 자신이 했던 말을 되짚어 보았다. 딱히 못 할 말을 했다거나 잘못된 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남자가 욕지거리까지 내뱉은 것을 보면 무언가 잘못 말한 걸지도 모른다.

“연우야.”

하지만 ‘잘못 말한 것이냐’ 묻기도 전에 남자가 이름을 불렀다. 연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연우야.”

“네.”

차현은 맞은편에 앉은 연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간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이는 환상이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 실재하고 있었고, ‘연우’라는 이름에 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라졌던 시간 동안, 그 이름을 상기하며 얼마나 많은 후회를 곱씹었던가.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이름을 주겠다 생각했다.

“네가 좋은 것만 가졌으면 좋겠어.”

귀한 것이라면 모두 그 앞에 내려놓으리라 생각했다.

“네가 그런 것들에 익숙해졌으면 좋겠어.”

좋은 옷, 좋은 음식, 온통 좋은 것으로만 치장해, 귀한 것이 익숙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런 것들을 줄 수 있는 내가 곁에 없다면 조금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너를 뒤바꿔 놓고 싶었다.

연우는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말의 의미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한 듯 의문 섞인 얼굴. 그런 주제에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끄덕거리는 연우의 머리 위로 푸석푸석한 머리칼이 흔들렸다. 차현은 불현듯 시선을 빼앗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리 와.”

차현이 손을 뻗었다. 연우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현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연우가 자신과 조금 더 가까워지도록 손목을 잡아끌었다. 두어 발자국 더 걸어온 얇은 다리가 남자의 허벅지 사이에 갇혔다.

“연우야.”

연우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나지막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손을 뻗은 남자가 버석거리는 연우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곧 거칠거칠해진 뺨과 붉어진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연우는 쿵쿵 뛰는 심장의 울림에 따라 몸의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너는 너무 손이 많이 가.”

그렇게 말한 남자는 웃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반짝이는 감정이 넘실거렸다.

“싫으십니까?”

“아니.”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길어진 머리카락을 귀 쪽으로 넘겼다. 반쯤 가려졌던 검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엄지손가락이 눈 밑을 쓸고 지나가자 그 자리에 간지러운 감각이 남았다.

연우는 쓰다듬기 좋게 고개를 수그렸다. 언제까지고 남자가 자신의 머리와 뺨을 만져 줬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부드럽게 맴도는 다정한 손길이 기분 좋았다.

햇볕이 잘 드는 창 앞에 의자 하나가 놓였다.

창턱에 기대서 있던 연우가 시선을 들어 차현을 보았다. 의자를 창 앞에 둔 그는 하얀 천을 들고 있었다. 의자 위를 툭툭 두들기는 섬세한 이목구비에 미소가 떠올랐다.

“앉아.”

연우는 별말 없이 의자에 앉았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는 뜨끈했다. 춘곤증이 밀려들 것처럼 안온한 온도였다.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어.”

차현은 그렇게 말하며 연우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헤집었다. 버석버석한 머리칼이 남자의 손끝에 걸렸다. 연우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잘라 줄까?’

아침을 먹은 후 연우를 품에 안고 있던 남자가 머리카락을 만지며 물었다.

‘잘 자를 자신은 없지만.’

“계속 날 보고 있으면 못 해.”

차현은 고개를 꼿꼿이 치켜든 연우의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부드러운 자극에 반응하듯, 말간 눈동자가 두어 번 깜빡거렸다. 보기 좋은 남자의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똑바로 해 봐.”

연우는 느릿느릿 고개를 바로 했다. 차현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등 뒤에 선 남자가 흰 천을 연우의 목에 감았다. 목을 감싸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 작은 몸이 움찔 떨렸다. 목에 무언가가 감기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이제 자를 거야.”

찰칵, 가위 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날붙이가 가까이에 닿는 것을 싫어하는 연우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차현은 뻣뻣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슬슬 쓸어내리더니, 그 위에 가위를 올렸다.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흰 천 위로 떨어졌다.

“그동안 어디서 지냈지?”

집중한 듯 가위질을 이어 가던 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 창에 비치는 차현의 흐릿한 신형을 바라보던 연우가 뒤늦게 대답했다.

“산에 있었습니다.”

“산?”

“네.”

연우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그 순간 머리칼이 삐뚤게 잘려 나갔다. 차현의 얼굴에 희미한 낭패감이 어렸다.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죽을 뻔한 저를 거두어 치료를…….”

“죽을 뻔했다고?”

날카롭게 치솟은 목소리가 무감정하게 이어지던 말을 끊었다. 연우의 몸이 움칠 떨렸다. 고개를 들어 남자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은데, 그가 하지 말라 했으니 들 수도 없었다.

“네.”

일단 대답부터 했다. 의문 섞인 시선이 허공을 도르륵 굴렀다.

“다친 곳은…….”

그는 숨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이 허공에서 꽉 주먹 쥐어졌다.

“몸은 괜찮은 건가?”

“암살자로서의 활동은 힘들겠지만, 문제없습니다.”

‘황제의 개’로 불리던 때처럼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건 아니었다. 물론 직접 싸워 본 건 아니니 확신할 순 없다. 그래도 제 자신이 느끼기엔 그랬다.

“왜.”

목이 졸린 듯한 소리가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왜 사라졌던 거야. 데리러 가겠다 했잖아.”

“…….”

연우는 입을 벙긋거렸다.

맞다. 황궁 담에 기대어 혀를 섞었을 때, 그런 말을 들었었지.

하지만 가만히 앉아 차현의 방문을 기다리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데리러 오겠다’는 기약 없는 언약만 믿고 있다가, 그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자신은 계속해서 후회했으리라.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연우는 일단 순순히 사과했다. 과정이 어땠든 약속을 어긴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궁에 제가 아닌 다른 ‘황제의 개’가 있었습니다. 그자를 이용해 당신을 암살할 거란 얘기를 들어서…….”

“네가 왜.”

남자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목이라도 졸린 것 같은 숨소리.

“왜 네가 움직여. 위험한 걸 모르지도 않았을 텐데.”

헐떡거리던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새빨갛게 들끓는 감정이 녹아 있었다. 연우는 입을 달싹였다.

“당신이 다치지 않길 바랐습니다.”

이런 대화는 어려웠다. 연우는 그저 남자가 다시 자신의 머리를 만져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

등 뒤로 남자의 몸이 뻣뻣하게 굳은 게 느껴졌다. 숨소리마저 잦아든 공간에 짧은 침묵이 맴돌았다.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던 연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다음부터는 하지 마.”

그러나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린 남자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너는 너 자신을 더 소중히 여겨.”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검푸른 눈동자가 연우를 보았다.

그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의 머리를 잡아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연우는 투명한 창에 비치는 흐릿한 모습을 불만스레 바라보았다.

“대답해, 연우야.”

만약 다음에 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는 또다시 위험에 뛰어들 것이다.

“네.”

그럼에도 그가 원할 대답을 내놓았다.

차현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창문에 흐릿하게 비쳐 보였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연우의 희고 긴 목덜미를 더듬었다. 차가운 손끝이 살갗 위를 느리게 쓰는 감각.

뇌리를 파고드는 오싹한 느낌이 손끝을 적신 것은 그때였다.

“……!”

연우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 감각이 무어라 불리는지 알았다.

쾌감.

내벽을 파고든 두꺼운 성기에 숨조차 쉬지 못했을 때와 비교하자면 미약하지만, 분명했다.

당혹감으로 물든 눈이 작게 흔들렸다. 흰 천 아래 놓인 손끝이 확 곱아 들었다.

“화도 못 내게 하는군.”

그러나 간질간질하던 쾌감은 이어지지 않았다. 차현은 다시 연우의 뻣뻣한 머리칼을 집어 자르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삐뚤빼뚤 잘리지 않게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

연우는 손끝에 남은 찌릿한 쾌감을 곱씹으며 입술을 오므렸다.

눈을 찌르던 머리칼이 짧아졌다. 연우는 눈썹 부근까지 잘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막 씻고 나온 몸에서 달큼한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차현은 창턱에 앉아 머리칼을 더듬거리던 연우에게 다가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연우가 걸친 샤워 가운 위로 투명한 물방울이 툭, 툭, 떨어졌다. 그는 벌어진 가운 사이로 보이는 마른 가슴팍에 시선을 두었다.

“…….”

남자의 눈동자에 기묘한 감정의 파편이 떠올랐다. 연우는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은 깊은 물속처럼 오싹하고도 신비로웠다. 러나 그 안을 더 세세히 살피기도 전에 머리 위로 수건이 떨어졌다. 부드러운 천이 눈 위까지 덮었다.

한순간 시야가 차단되었다. 연우는 눈을 가린 수건을 치우기 위해 손을 들었다.

“감기 걸려.”

수건 위로 손을 올린 차현이 머리칼을 헤집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차현의 커다란 두 손이 머리를 지압하듯 물기를 닦아 냈다. 세심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손놀림. 멸시를 받았을 때도 남의 시중은 해 본 적 없는 몸이니 당연했다.

“불편하면 말해.”

차현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먹는 것, 씻는 것까지 모두 간섭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먹고 자고 씻는 일상적인 일을 불편하다 느끼면 그가 도망칠 것 같았으니까.

“불편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기우였던 모양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담담한 목소리가 뒤섞였다.

“연우야.”

“네.”

차현은 연우가 앉은 창문 너머를 보았다. 많은 것이 바뀐 도시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너는 전에도 이 자리에 자주 앉아 있었지.”

그랬었나? 연우는 눈을 끔뻑였다. 남자가 말하기 전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네가 뭘 보던 건지 궁금했어.”

“…….”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돌아갔다. 연우는 황궁이 자리했던 땅을 보았다. 터만 남은 자리엔 새로운 무언가가 지어질 준비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제가 보던 것은 이제 없습니다.”

그는 황궁이 가장 잘 보이던 자리에 앉아 늘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돌아가기 위해, 언젠가는 다짐을 위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알던 세계가 의심스러워져서.

“연우야.”

“네.”

머리를 문지르던 손길이 잦아들었다. 연우는 곧장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

“…….”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숨결이 섞일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이 억겁처럼 길었다.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곧장이라도 입술이 붙고 혀가 뒤엉킬 것 같았다. 남자의 손이 가운 사이를 파고들어 허벅지 안쪽을 벌릴 것 같았다.

“거의 다 말랐네.”

그러나 입술은 부딪치지 않았다.

연우의 머리에서 수건을 치운 남자가 고동색 머리칼을 한번 헤집고 허리를 일으켰다.

“날이 좋은데 내일은 밖에 나가자.”

“…….”

연우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일순 치솟았던 긴장감이 사라지자 아쉬운 기분이 밀려들었다.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몰래 입 맞추기엔 여러모로 신체적 능력이 달렸다. 최선을 다해 달려들어도 입술이 부딪치기 전에 붙잡힐 것이다.

“네.”

연우는 아쉬움에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현은 어느새 두어 발자국 멀어진 곳에 서서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에서 깨어나면 언제나처럼 커다란 품이 눈앞에 있었다. 연우는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끔뻑였다.

“연우야.”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검은 눈동자가 굼뜨게 위를 향했다.

“더 자도 돼.”

언제부터 깨어 있던 건지 모를 여유로운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연우의 머리칼을 쓸었다. 사락 흐트러진 머리칼이 관자놀이를 스치는 감각이 간지러웠다.

“괜찮습니다.”

내뱉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가 듣기에도 별 설득력이 없는 목소리였다. 연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자와 붙어 잔 이후로 잠이 늘어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의 체온이 고인 품 안이 따뜻하기 때문일까.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차현은 눈동자를 데룩 굴리는 연우를 보며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작은 머리통 위에 입을 맞췄다. 일순 뻣뻣하게 굳었던 연우의 몸이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고개를 푹 숙여도 미처 가려지지 않는 귓가가 붉었다. 차현은 먹음직스럽게 달아오른 귓바퀴를 입에 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푹 익은 살갗을 핥으면 연우는 쉽게 허물어졌다. 파드득 뛰는 몸과 크게 확장된 동공을 보면 저열한 욕망이 피어올랐다.

그렇게 되면 이 사랑스러운 몸의 다리를 벌리고 그 안쪽을 파헤칠 마음이 들겠지. 싫다며 우는 이의 얼굴을 보면서도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터였다.

그래서는 안 됐다. 그는 달짝지근한 살내를 풍기는 이 작은 몸을 조금 더 소중히 대하고 싶었다.

“알겠어.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나자.”

연우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 남자의 완력을 느꼈다.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해가 뜨면 밖에 나가야 하니까.”

커다란 손이 머리칼을 더듬었다.

“네가 좋아했으면 좋겠어.”

“……?”

밖에 나가는 걸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말일까? 사실 그와 함께라면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연우는 급히 입을 열었다.

“저는 나가지 않고 이대로 있어도 좋습니다.”

“……무슨 말을 못 하겠군.”

틈 하나 없이 맞물려 있던 몸이 약간 떨어져 나갔다. 연우는 단단한 몸에 붙어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현은 순진한 빛을 띠는 양 뺨을 손으로 짓눌렀다.

“자극하지 마.”

“저는 아무 짓도…….”

“아무 짓도 안 하긴. 지금도 말하고 있는데.”

연우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이제 됐냐는 듯 끔뻑이는 눈이 꽤 먹음직스러웠다.

차현은 한 뼘 정도 떨어졌던 몸을 다시 그러안았다. 뜨끈한 체온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새벽, 이따금 그는 악몽을 꾸고 깨어났지만 그건 꿈에 불과했다. 꿈과 달리 현실에는 연우가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지 연우 자신은 모를 것이다.

차연우(車姸偶).

안개처럼 내리는 비, 연우(煉雨)가 아닌 고울 연에 짝 우 자를 쓰는 연우(姸偶).

“네 이름이야.”

차현은 서류에 적힌 글자를 볼펜 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그 옆에 앉은 연우가 복잡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시선을 둬 봤자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유려하게 적힌 남자의 글씨가 참 보기 좋구나, 하는 감상만이 들 뿐이었다.

“차연우.”

남자가 연우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귀 끝에 손가락이 길게 쓸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연우의 고개가 홱 돌아섰다.

“그게 이제 네 이름이야.”

남자는 놀란 듯 파르르 떨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차현의 손이 닿았던 귀를 손으로 틀어막은 연우가 입을 벙긋거렸다.

이름 앞에 한 글자가 더 붙었다. 남자의 이름 앞에 붙은 것과 같은 글자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무슨 의미긴.”

즐거움을 담은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졌다.

“네가 내 가족이 됐단 얘기지.”

연우의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가족.

낯선 단어가 그의 좁은 세계에 추가되었다.

“생일은…….”

태연하게 말을 마친 남자가 마지막 공란에서 멈칫했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연우를 보더니 아닌 척 말을 돌렸다.

“오늘로 하자. 네가 내 가족이 된 날이니까.”

차현이 빈칸에 글자를 적었다.

5월 2일

서류가 유려한 필체로 가득 찼다. 그는 연우가 이 세계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될 서류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너른 사무실에는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차현은 누구의 시선도 없는 방 안에서 연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때까지도 멍하니 끔뻑거리기만 하던 검은 눈이 어깨를 향해 움직였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제 몸보다 작은 어깨에 기댄 남자의 자세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눈을 내리감은 그의 표정만큼은 편했다.

“오늘이 네 생일인데 선물 하나쯤은 받아야지.”

“저는…….”

연우는 눈을 굴렸다. 선물이라니. 차현의 곁에 있으면 모자랄 게 없었다. 의식주가 만족스럽게 해결되는데 굳이 갖고 싶은 게…….

“없다는 대답은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생각해 봐.”

가볍게 다물렸던 입술 사이로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우는 그곳에 시선을 빼앗겼다.

입맞춤도 선물이 될 수 있는 걸까?

입술이 들썩거렸다. 별말이 아닌데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연우는 남자의 입술에 붙박여 있던 눈을 슬그머니 돌렸다. 그 순간 테이블 위에 놓인 사탕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태성이는.”

연우의 어깨에 기대 있던 차현이 눈을 떴다.

“태성이는 깨어났습니까?”

“……아. 그 시종.”

차현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가 펴졌다.

“그게 궁금해?”

“네.”

“……이걸 선물이라고.”

짧은 한숨을 내뱉은 차현이 연우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쥐었다. 연우는 몸을 일으킨 차현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일어선 남자가 순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종이 깨어났는지 궁금하다며.”

차현은 맞잡은 손을 약하게 끌어당겼다.

“가자.”

“…….”

흉터가 가득한 손이 문고리 위에서 멈춰 섰다. 병실 앞에 선 연우는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조금쯤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마 문고리를 쥐지 못한 손끝이 천천히 구부러들었다.

“왜 그래.”

허리를 굽힌 차현이 머뭇거리는 연우를 바라보았다. 연우는 자신과 눈높이를 맞춘 남자를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다정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

“아닙니다.”

연우는 고개를 내젓고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안에 가득 찼다.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 문을 열면 태성이 있다.

자신을 저주하고 원망하던 태성이.

“……저 혼자 들어갔다 오겠습니다.”

“혼자?”

차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나 당황한 그를 앞에 두고도 연우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안 됩니까?”

“…….”

차현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는 자신만을 향해 있는 검은 눈을 마주 보다, 단호히 말했다.

“안 돼.”

미간을 찡그린 차현이 하, 짧은 한숨을 토해 냈다.

“……안 된다고 하고 싶은데.”

낮은 목소리를 읊조린 남자가 한 발자국 물러섰다.

“빨리 갔다 와. 너무 오래 걸리면 못 기다릴 것 같으니까.”

“네.”

연우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도 차현을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켠 연우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병실 안의 사람이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연우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던 태성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누구세…….”

눈이 마주쳤다. 태성의 말소리가 뚝 멎었다. 둥그렇게 뜨인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

연우는 불청객을 마주한 듯 당황한 태성을 보며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태성 또한 마찬가지인지, 병실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깨어났다고 해서 와 봤어.”

침묵을 깬 건 연우의 낮은 목소리였다. 둘 사이에 이어지는 침묵을 깨는 건 늘 태성의 몫이었는데, 먼저 말을 꺼낸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널 불편하게 하려던 건 아니야.”

태성을 보고 있던 눈동자가 스륵 아래로 떨어졌다. 저를 불편하게 여기는 태성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깨어난 것을 확인했으니 됐다.

“일어난 거 확인했으니까 갈게.”

연우는 곧장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서려 했다. 다급히 토해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잠시만요.”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렸다. 태성은 돌아선 연우를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일단 붙잡아 두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들었어요. 그, 예성이가 찾아가서…… 저를 데리고 혁명단 본거지로 간 게…….”

“맞아.”

연우가 짧게 대답하자, 태성이 곧장 말을 이었다.

“그, 그리고 또 얘기 들었어요. 제가 누워 있는 동안 깡패들이랑 군인들을 잡으셨다고…….”

연우의 미간이 작게 일그러졌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차현과 우연히 골목에서 마주친 노인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다더니.

노인이 말했음을 직감한 연우는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미안해.”

“네?”

“네 동생을 인질로 삼으려 했던 거.”

갑작스러운 사과에 놀랐던 태성이 ‘아’ 짧은 탄성을 토해 냈다. 연우는 무감정한 검은 눈으로 태성을 바라보았다.

“깨어나면 사과하고 싶었어.”

“그건…….”

태성의 입이 작게 달싹거렸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연우는 그런 태성을 보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고 싶었던 일은 모두 끝났다. 태성이 깨어났고, 그에게 사과를 하려던 목적도 달성했으니 이곳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있어 봤자 태성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이제 너와 네 동생은 안전할 거야. 잘 있어.”

“혀, 형!”

연우의 눈이 크게 뜨인 것은 태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였다. 태성은 우뚝 멈춰 선 연우의 등을 보며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다음에 또 와요. 저 그, 선물 받은 과일도 많고, 그러니까……. 다음에 제대로 얘기해요. 꼭요.”

“…….”

다음. 머지않은 미래를 기약하는 말.

연우는 심장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 다음에 이곳에 또 와도 되는 걸까? 태성은 무슨 의도로 다음을 입에 담은 거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지만, 제게 주어진 기회를 걷어 찰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연우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기다리고 있을게요.”

등을 돌려 보지 않아도, 태성이 웃고 있을 거란 짐작이 갔다. 연우는 울렁거리는 심장의 울림을 느끼며 문을 열었다.

덜컥.

“…….”

“…….”

그 순간 연우는 자신의 앞에 선 커다란 몸을 보았다. 눈을 들자 그곳에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자세의 차현이 있었다. 연우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 공작…….”

등 뒤에서 태성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쾅.

코앞에서 닫힌 문만을 보았다.

“연우야.”

병실의 문을 닫은 남자가 제 앞에 선 이의 몸을 꽉 그러안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붙은 몸이 차갑게 식은 것 같았다. 연우는 한순간 코끝으로 밀려드는 사향내를 맡으며 눈을 깜빡였다.

“네.”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차현의 귓가에 닿았다. 뻣뻣하게 굳었던 몸이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반응할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 연우는 문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연우가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손끝이 차갑게 식고 입술이 말라붙었다.

빌어먹을. 그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이런 꼴같잖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는 커다란 등에 두 팔을 올렸다. 차현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나쁜 습관이 들 것만 같았다.

연우는 종이 위에 글자를 썼다. 느릿느릿 이어진 글씨가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 냈다.

차연우

연우가 글자를 다 쓸 때까지 묵묵하게 기다리던 차현이 눈을 들었다.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연우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더 쓸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간 많은 문장들을 외워 왔지만, 뜻도 모른 채 외운 문장은 머리에 오래 남지 않았다. ‘사마귀의 상태는 여전함’ 같은 문장은 충격적이기에 뇌리에 남긴 했다만. 그걸 차현에게 순순히 알려 줄 정도로 개는 무지하지 않았다.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데 외우는 건 또 잘하고.”

턱을 괸 차현이 픽 웃으며 말했다. 연우는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사과하지 마.”

남자가 다급히 손을 뻗어 연우의 뺨을 잡아 올렸다. 희고 말랑한 볼살이 검지와 엄지 사이에 눌렸다. 입술이 절로 비죽 내밀렸다.

붕어 같은 모습이 된 연우를 보고도 차현은 웃지 못했다. 그는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연우의 볼을 누르던 손을 확 떼어 냈다.

“……그래도 글은 읽고 쓸 수 있는 게 좋아. 그러면 어딜 가든 메모를 남길 수 있잖아. 걱정하지 말라고.”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듣기 좋았지만, 어쩐지 횡설수설하는 것 같았다.

연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차현이 어딜 갈 때 ‘걱정하지 말라’는 메모를 남기겠다는 뜻인 걸까? 일단 자신은 그런 메모를 남길 일이 없으니(그의 곁이 아니라면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러니까, 가르쳐 줄게.”

초조한 기색으로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연우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등 뒤에 선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봤습니다.”

“실없긴.”

픽 웃음을 터트린 차현이 자신의 몸을 연우의 등 가까이에 붙였다. 검은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뒤에서 뻗어져 나온 단단한 손이 연우의 손등 위에 겹쳐졌다.

“자, 이렇게 쓰는 건 ‘가’야.”

그는 볼펜을 쥔 연우의 손을 쓱쓱 움직이더니 ‘가’라는 모양의 글자를 만들어 냈다.

“이렇게 쓰는 건 ‘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사향 냄새가 풍겨 왔다. 연우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졌다.

“이건 ‘다’…….”

“‘차현’은 어떻게 씁니까?”

연우는 남자의 손아귀에 쥐어진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귓가가 뜨거워졌다.

“왜, 알고 싶어?”

“네.”

“그건 가나다부터 쓸 줄 알게 되면 알려 줄게.”

장난스레 말한 남자가 연우의 머리 위에 턱을 기댔다.

“집중해.”

연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남자는 집중이 되는 걸까? 자신은 지금 남자의 숨결 하나, 손길 하나가 신경 쓰여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그러나 손만큼은 착실히 남자의 지도에 따라 글자를 써 내리고 있었다. 연우는 머리 위에 놓인 무게를 느끼며 그쪽을 향해 힐끗 시선을 보냈다.

욕실 안에 가득 찬 부연 김이 밖으로 밀려 나갔다. 샤워 가운 아래로 드러난 흰 다리에 흉터가 짙게 새겨져 있었다. 욕실 바깥으로 내뻗는 발밑에서 척척한 소리가 났다.

“연우야.”

연우는 욕실 문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문가에 자리를 잡고 있던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또 젖은 채로 나왔네.”

그는 타박하듯 연우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물이 맺힌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감기 걸린대도.”

그는 욕실 문 앞에 놓여 있던 수건으로 연우의 머리를 덮었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헝크는 손길이 물기를 거둬들였다.

연우는 힐끗 시선을 올려 남자를 보았다. 타박을 던진 것치고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이 반복되는 일상이 즐거운 것처럼.

“저녁은?”

머리를 문지르던 수건이 떨어져 나간 것은, 축축한 물기가 수건을 모두 적신 후였다. 연우는 눈을 들어 물었다.

“먹어야 합니까?”

“먹으면 좋지. 하지만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돼.”

젖은 수건이 바구니 안에 들어갔다.

“대신 들여놓은 건 먹자.”

남자의 시선이 테이블을 향해 돌아섰다. 연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간식거리를 보았다. 먹음직스러운 머핀과 쿠키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연우는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쿠키를 집어 입에 넣자 바삭거리는 소리가 입 안에 퍼졌다.

쿠키 하나를 모두 입에 넣은 연우가 힐끗 앞을 보았다. 맞은편에 앉은 차현이 새로운 쿠키를 집어 연우의 입술에 툭 가져다 댔다. 연우는 입을 벌려 쿠키를 물었다. 달큼한 맛이 혀 위를 감돌았다.

“아.”

부드러운 머핀을 한가득 입에 물었을 때였다. 빵 가루가 후드득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연우는 앞섶에 묻은 빵 가루를 내려다보다가 차현을 보았다.

“다 묻혔네.”

그는 미미하게 찡그린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빵 가루를 흘린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연우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옷에 묻은 가루를 털어 내려 했다.

“…….”

그러나 남자의 손이 닿은 것은 옷 위가 아니었다. 그는 연우의 입술 위에 붙은 것들을 가볍게 쓸어 닦아 냈다. 입술이 눌리는 감촉이 선연했다.

연우는 뭉근한 감촉을 남기는 손끝에 자신도 모르게 혀를 댔다. 입술 새로 빠끔 내밀어졌던 선홍빛 혀가 초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사라졌다.

“너, 뭘…….”

차현은 일순 황망해졌다. 화상 자국처럼 짙게 남은 감촉을 되짚었다. 손에 닿았던 말캉한 살덩이는 감춰 놓았던 욕망의 베일을 순식간에 벗겨 냈다.

덜컹.

차현이 앉아 있던 의자가 거칠게 밀려났다. 그는 난색을 감추지 못한 채 연우의 시선을 피했다.

“남은 건 먹고 둬. 사람을 시켜 치우게 할 테니까.”

빠르게 말을 토해 낸 차현이 곧장 등을 돌렸다. 연우는 방을 나가려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황급히 손을 뻗어 팔목을 붙잡았다.

“손 놔.”

조급한 남자의 표정은 싸늘했다. 연우는 그와 재회한 후 처음 보는 날 선 얼굴에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줄곧 생각해 온 의문은 머뭇거림 없이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제 입 맞추지 않는 겁니까?”

“뭐?”

“몸이 낫길 기다리면서, 돌아가게 되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생각했습니다.”

산에 있는 무료한 시간 동안, 연우를 지탱한 것은 저택에 돌아간 후에 생길 일들이었다. 돌아간다면. 그 가정으로 시작한 질문의 끝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저는 이제 무슨 일을 하든 당신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연우는 일렁이는 검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직시했다.

“이제 키스는 해당 사항이 아닌 겁니까?”

“너.”

남자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작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문 쪽을 향해 있던 그의 발이 연우에게 돌아섰다. 흉터가 가득한 손에 붙잡혔던 팔목이 한순간 연우의 턱을 쥐었다.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려.”

연우는 자신의 턱을 쥐고 들어 올린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온화한 인간의 초상처럼 아름답던 얼굴에 사나운 기색이 서렸다. 낮게 내뱉은 목소리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내가 지금 손대면 네가 멀쩡하게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연우는 일순 숨을 멈췄다. 흉흉한 기색이 떠오른 눈동자에 새파란 욕망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라도 괜찮습니다.”

“차라리 다리가 부러지는 게 나을걸.”

차현이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연우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감정의 궤적을 쫓다, 불현듯 자신의 입술에 말캉한 무언가가 맞닿았다는 것을 느꼈다.

“읏.”

남자는 다물린 연우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등골이 쭈뼛 섰다.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우, 응.”

그 순간 남자의 두꺼운 혀가 입 안을 파고들었다. 볼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연우의 목구멍까지 핥을 것처럼 더욱 깊이 입술을 맞붙였다. 한계까지 치켜 올라간 연우의 목울대가 힘겹게 울렁거렸다.

“으웃…….”

입 천장이 긁힐 때마다 손끝이 떨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오싹한 쾌감에 머리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연우는 손을 뻗어 남자의 목에 감았다. 쿠키 때문인지 입 안에서 단맛이 감돌았다.

차현은 각도를 바꿔 가며 제 혀로 가득 찬 입 안을 파헤쳤다. 마찰로 인해 뜨끈하게 달아오른 입 안을 한 톨도 남김없이 씹어 먹고 싶은 기분.

그는 자유로운 손으로 연우의 샤워 가운 매듭을 붙잡았다. 스륵 풀린 가운 사이로 마른 몸이 드러났다.

“읏.”

꾹 감긴 연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남몰래 눈을 뜬 차현은 그 장면에 시선을 빼앗겼다. 빼곡히 들어찬 짧은 속눈썹을 축축해질 때까지 핥고 싶었다.

“흐으…….”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붙었던 입술이 떨어졌다. 연우는 막혔던 숨을 한 번에 토해 내며 헐떡거렸다. 붉게 달아오른 입술과 혀가 남자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하, 젠장.”

차현이 낮게 욕을 짓씹었다. 그는 연우의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곧장 이를 세웠다.

“우, 으.”

목 위로 퍼지는 고통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생명에 위협을 받았다 생각한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쾌감이 느껴졌다.

남자는 자신이 깨물어 피가 맺히기 시작한 목덜미를 핥았다. 알싸한 통증이 배 속에 고여 사타구니 부근을 덥게 만들었다.

“으읏, 응.”

커다란 손이 벌어진 샤워 가운 사이를 파고들었다. 차현은 마른 가슴팍 위에 솟은 유두를 엄지로 느리게 문질렀다. 연우의 눈가가 한순간 가늘게 좁아지며 신음이 샜다.

“아……. 으…….”

“연우야.”

쇄골로 내려온 입술이 뜨거웠다. 단단한 손끝이 유두를 문지를 때마다 찌릿한 성감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차연우.”

“이름, 왜, 읏…… 부르시, 흣.”

짐승의 그르렁거림처럼 낮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훑는 것 같았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귓가가 홧홧해졌다.

“한쪽만 섰어.”

그는 자신이 문질러 부푼 왼쪽 유두를 집게손으로 가볍게 잡아당겼다. 검은 눈동자가 크게 확장됐다. 붉게 달아오른 유두 안쪽이 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뜨거워졌다. 연우는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황급히 남자를 밀쳐 냈다.

“아……!”

아니, 밀쳐 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차현은 손대지 않아 옅은 분홍빛을 띠는 유두를 입 안에 넣었다. 뜨겁고 거칠거칠한 혀가 유두를 핥자 순식간에 성감이 고조되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가슴팍에 머리를 박은 남자는 이제 마른 등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굴곡진 척추 뼈를 하나하나 짚어 내려가는 손길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우으, 읏.”

연우가 앉은 의자는 테이블 멀리 밀려난 지 오래였다. 힘이 빠지는 몸을 지탱할 곳은 남자의 단단한 어깨뿐이었다. 연우는 가빠지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어깨를 꽉 그러쥐었다. 유두가 퉁퉁 부어올라 저릿거리는 감각이 생생했다.

“예뻐.”

가슴 위에 잇자국을 남긴 남자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저릿한 통증은 여전히 남아 연우를 괴롭혔다. 배 속이 꽉 조여들고 사타구니가 뜨거워졌다.

차현은 초점이 흐릿해진 연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쾌감에 젖은 말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말랐다. 당장이라도 작은 몸을 바닥에 넘어트려 다리를 벌리게 하고 싶었다. 분홍빛을 띠는 좁은 구멍에 제 성기를 꾸역꾸역 넣어 울리고 싶었다.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핥는 것은 얼마나 달큼한 기분을 주었던가.

차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고통에 미약하게나마 이성이 돌아왔다.

입술을 핥은 그는 머리를 숙여 이번엔 연우의 배 위를 핥았다. 달아오른 피부에서 달큼한 살내가 났다.

“흐읏?”

그 순간 연우의 몸이 퍼뜩 뛰었다. 차현의 혀가 닿은 곳엔 움푹 파인 흉터가 있었다.

그는 살갗 위에 남은 상처마다 입술을 누르고 혀를 내어 핥았다. 그 안에 숨겨 두었던 내밀한 부분을 탐하는 기분.

“무, 무슨…….”

흉터를 하나하나 더듬어 가는 낯선 감각은 이상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쾌감과 깃털로 온몸을 쓰는 것 같은 간지러움이 공존했다.

연우는 몸을 비틀어 차현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흐읏.”

하지만 그는 그런 연우를 꽉 그러잡고 행위를 이어 갔다.

연우는 숨을 헐떡거리며 남자의 어깨를 쥔 손끝을 떨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하, 으…….”

배꼽 위에 닿았던 입술이 어느새 아랫배까지 내려와 있었다. 연우는 얼굴이 홧홧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턱에 성기 끝이 닿아 있었다.

느른하게 내리떴던 남자의 눈이 연우를 향해 들어 올려졌다.

“연우야, 섰어.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피부에 닿아 흩어졌다.

“씨발, 돌아 버릴 것 같네.”

연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차현이 커다란 손으로 꼿꼿하게 선 성기를 잡더니,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관찰하듯, 혹은 경탄하듯. 익숙하지 않은 수치심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연우의 발끝이 조금 오므라들었다.

“핥아 줄까?”

“뭐, 무……. 싫!”

거절의 말을 내뱉을 새도 없었다. 부드러운 발음을 토해 낸 남자가 단숨에 성기를 입에 물었다. 축축하고 뜨거운 입 안으로 예민하게 달아오른 살덩이가 빨려 들어갔다.

“헉.”

입술 새로 짧은 숨이 토해졌다. 연우의 눈동자가 엉망으로 풀어졌다. 온몸이 제어를 벗어난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성기가 불구덩이에 처박힌 것처럼 뜨거워졌다. 남자의 어설픈 입질에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아, 아아! 으, 싫 앗. 흐……. 시…….”

뇌의 가닥가닥이 녹을 것 같았다. 열이 오른 머리로는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싫다’는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입에선 언어가 되지 못한 신음만이 투둑 떨어졌다.

“아, 나올……. 우으, 싫, 그만!”

눈꺼풀이 눈물로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바들바들 떨던 연우가 사타구니에 있는 머리를 밀어 내려 했다. 그러나 머리칼을 잡아당겨도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연우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히, 으…….”

사정감이 흰 불빛처럼 점멸했다. 혀 뿌리에 성기 끝이 비벼지고, 두꺼운 혀가 기둥에 마찰하는 감각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불에 지져지듯 뜨거워진 배 속이 꽉 조여든 순간, 성기 끝이 부푸는 것 같았다.

“아…….”

연우는 눈물로 젖은 눈을 황망히 깜빡였다. 후두둑 떨어진 눈물이 저 자신의 허벅지 위를 적셨다.

“배, 뱉으십시오.”

차현의 입 안에 사정했다. 그건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연우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양 뺨을 잡아 올렸다.

“뭘?”

그러나 고개를 들어 올린 이의 입 안은 비어 있었다. 그는 입가에 묻은 흰 액체를 보란 듯이 핥고는 곧장 입을 맞췄다.

비릿한 맛이 감도는 키스는 이상했다. 끔찍한 거부감이 들다가도, 난폭하게 이어지는 입맞춤을 받으면 머리가 멍해졌다. 빠져나간 줄 알았던 열기가 배 속에 고여 발끝을 오므리게 만들었다.

“아…….”

아쉬운 감촉과 함께 떨어진 입술을 연우의 시선이 쫓았다. 차현은 엉망으로 흐려진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고 그의 몸에 양팔을 끼워 넣었다.

“……!”

순식간에 몸이 허공에 들렸다. 연우는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차현은 망설임 없이 걸어, 안았던 몸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이어 그가 올라서자 침대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연우는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는 곧장 연우의 발목을 잡아 양다리를 벌리더니 드러난 사타구니에 시선을 주었다. 조금 전에 사정했던 성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바짝 서 있었다. 연우는 뜨거운 눈가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성기를 보는 남자의 시선이 집요했다.

그 순간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좀 전처럼 성기를 입에 넣을 것 같았다. 연우는 허공에 달랑 들린 자신의 두 다리를 보며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시, 싫…….”

반항은 미약했다. 성기가 빨리는 게 얼마나 큰 쾌감으로 다가오는지 알게 된 몸이 머리의 명령을 거부했다. 남자의 숨결이 기둥에 닿았다. 다가올 쾌감을 예감한 몸이 바짝 긴장했다.

“……!”

그러나 남자의 입술이 닿은 곳은 성기가 아니었다. 구멍과 성기 사이에 난 여린 회음을 핥은 남자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려 하고 있었다. 벼락같은 충격이 머리에 내리꽂혔다. 연우의 몸이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파드득 뛰었다.

“하지 마, 싫어, 싫습……!”

필사의 저항에 허공에 떴던 다리가 자유를 찾았다. 두 다리를 벌린 채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던 연우가 순식간에 몸을 뒤집었다. 그는 네발 동물처럼 침대 위를 기어 나가려 했다.

“연우야.”

그러나 그 순간 차현이 연우의 몸을 붙들었다. 그는 네발로 선 몸을 뒤집어 다시 정자세로 눕혔다. 반항하려 했지만 한차례 사정을 했기 때문인지 몸에 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시, 싫습니다…….”

연우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 구멍에 손가락을 넣는 것도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입술이 닿는다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연우.”

차현은 패닉에 빠진 듯 보이는 연우의 뺨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이마를 가깝게 부딪치고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풍랑 속 판자처럼 흔들리던 눈동자에 차차 초점이 돌아왔다.

“네가 싫어하면 안 할 거야.”

차현의 목소리가 조곤조곤하게 흘러들었다. 연우는 자신을 마주 보는 눈동자를 보았다. 그의 눈은 진실해 보였다. 연우는 딱딱하게 굳었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차현은 긴장했던 연우의 몸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손끝에 걸리는 흉터마다 불그스름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가 핥고 이를 세웠던 자리였다.

“읏…….”

연우의 몸이 작게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마른 가슴팍이 가파르게 부풀고 입술 사이로 달큼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차현은 연우의 입술 위로 가벼운 입맞춤을 내리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연우야, 네가 벌려 볼래?”

그는 연우의 두 손을 끌어 오금 아래에 닿게 했다. 그 행동만으로도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연우더러 스스로 제 다리를 벌리라 말하는 것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다리 사이에 남자 몸이 끼어 있어, 더 벌린다 해도 큰 의미가 없었다. 남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걸까.

연우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욕망이 넘실거리는 시선을 마주하면, 자신 또한 그 물결에 휩쓸려 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연우는 결국 오금을 잡고 다리를 벌렸다. 집요하게 따라붙던 남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휘어졌다. 완연한 미소가 아름다운 얼굴에 피어났다.

“잘했어.”

남자는 벌어진 다리 사이로 드러난 성기를 느긋이 쓸어내렸다. 한차례 사정해 예민해진 표피에 차가운 손이 닿자 몸이 떨렸다. 마른 뱃가죽이 홀쭉하게 들어가고, 부풀어 오른 유두가 작게 떨렸다.

“흐읏…….”

차현은 파르르 몸을 떠는 연우를 내려다보며 침대 맡에 놓인 서랍장에 손을 뻗었다. 언젠가 사용했던 윤활액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 위에 찐득거리는 액체를 모두 부었다.

“아, 으.”

연우의 신음이 입술과 함께 짓씹혔다. 미끈거리는 남자의 손이 꽉 다물린 구멍을 적시고 조금씩 파고들기 시작했다. 벌어지는 구멍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축축하게 젖은 눈꺼풀이 작게 일그러졌다.

“연우야.”

오금을 잡은 손끝에 힘을 주던 연우가 시선을 돌렸다. 코앞에 남자의 얼굴이 놓여 있었다.

“읏.”

그는 부드럽게 입술을 붙여 오더니 곧 연우의 입술 새로 혀를 집어넣었다. 물속을 유영하듯 다정하게 헤집는 혀가 잦아들던 쾌감을 일깨웠다.

“흐읏, 응…….”

구멍에 박힌 손가락이 한 개에서 두 개로,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네 손가락이 모두 들어오자 압박감이 느껴졌다. 구멍이 크게 벌어지며 남자의 손가락을 우물댔다. 겹쳐진 입술 새로 남자가 옅은 탄성을 내뱉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벽을 벌리고 들쑤시던 손가락이 빠져나간 순간,

“……!”

묵직한 질량을 가진 살덩이가 입구를 벌리고 들어왔다. 고작 선단이 밀려들었을 뿐인데도 숨이 턱 막혔다.

오랜만에 받아들이는 거대한 성기는 쾌감보다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숨이 멎으며 폐가 조여들고, 내장이 밀려 올라가는 기분. 연우의 눈가에 그득 고인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큿.”

그건 차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은 남자의 눈꺼풀이 작게 찡그려졌다.

“하, 연우야.”

그는 빳빳하게 굳은 연우의 허벅지 안쪽을 느리게 쓸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우으…….”

남자가 몸을 굽히면서 삽입이 조금 더 깊어졌다. 압박감에 숨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부드럽게 목덜미를 훑는 입술의 감촉에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

벌어진 내벽 안으로 천천히 성기가 밀려들었다. 연우는 고개를 치켜든 채 압박감을 견뎠다.

“아!”

검은 눈이 크게 확장된 것은 신음이 터진 직후였다. 천천히 밀려오던 성기가 어느 순간 급히 치고 들어왔다. 쾅, 내벽의 어딘가를 찔러 올리자 작열하는 쾌감이 확 튀어 올랐다.

“하아.”

차현은 자신의 성기를 틈 없이 감싸는 좁은 내벽의 감촉을 느꼈다. 경련하듯 우물거리는 내벽이 성기를 더 깊이 끌어들이는 것만 같았다. 차현의 눈동자에 넘칠 듯 아슬아슬하게 고인 감정이 비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울음을 가득 머금은 검은 눈에 순종적인 애정이 감돌고 있었다.

차현은 간신히 쥐고 있던 감정의 수위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버렸음을 깨달았다. 이가 아득 깨물렸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이 작은 몸을 하나하나 씹어 삼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우읏, 아, 아……!”

배 속을 가득 채운 성기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무언가가 드나든 적 없는 곳까지 깊이 쑤셔 박혔던 두꺼운 살덩이가, 예고도 없이 귀두까지 뽑혀 나갔다. 내벽이 거칠게 긁히며 눈앞이 희게 튈 정도의 쾌감이 피어올랐다.

“으응, 읏, 아! 거기, 그만, 싫……!”

“연우 흣, 야.”

쿵, 쿵, 처박히는 두꺼운 성기가 내벽 어딘가를 긁고 올라갈 때마다 신음이 튀었다. 연우는 오금을 잡고 있던 손을 놓쳤다. 땀으로 얼룩진 손이 미끄러웠다. 연우는 비틀리는 몸을 시트에 비비며 숨을 헐떡였다.

“히읏, 아…….”

“좋아해.”

거칠게 허리를 쳐 올린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는 눈물로 젖은 검은 눈동자를 핥아 올렸다. 뒤늦게 연우의 눈꺼풀이 꾹 감기는 게 느껴졌다.

“좋아, 하……. 젠장.”

오랜만에 맞닿은 몸은 황홀할 정도로 완벽했다. 품 안에 가득 차는 온기와 성기를 조여 무는 빠듯한 내벽, 그리고 울음에 젖은 순진한 얼굴까지.

“읏……. 나올, 우읏. 나올 것 같, 흐……!”

거칠게 허리를 쳐 올릴 때마다 작은 입술에서 달큼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눈가를 비집고 흘러내린 투명한 눈물이 바닷물처럼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흐으, 읏…….”

연우는 뇌를 녹일 듯 치밀어 오르는 쾌감에 허우적거렸다. 남자는 전보다 집요하게 자신의 안쪽을 파헤쳤다. 경련하듯 떨리는 내벽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사정감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뱃가죽 위에 닿은 성기 끝에서 질금질금 액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초점이 엉망으로 흐려졌다. 몸이 마구잡이로 뒤틀리고, 꼿꼿이 선 유두에 닿는 공기의 감촉마저도 따갑게 느껴졌다.

“아, 우으……!”

그 순간 성기 끝에서 사정액이 튀어 올랐다. 경련하듯 떨리던 내벽이 남자의 성기를 쥐어짜 낼 것처럼 꽉 조여들었다.

“큿.”

남자의 입술 사이에서 짧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연우는 눈물 고인 흐릿한 시야에 남자를 담아냈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던 그가 자신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남자의 눈동자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욕망의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그는 막 사정한 연우를 봐주지 않고 제 것을 다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직 한 번도 사정하지 않은 남자의 성기는 흉흉했다. 핏줄이 단단히 솟은 두꺼운 살덩이가 주름 하나 없이 펴진 입구를 더 넓게 벌렸다.

“아, 시, 싫……!”

연우는 파드득 몸을 떨었다. 예민하게 선 감각을 들쑤시듯 치받힌 성기가 전립선을 꽉 짓눌렀다. 붉어진 입술에서 덜컥 숨이 토해졌다.

“흐읏……!”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신경 가닥가닥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짓이겨진 내벽 안쪽이 부어올라 쓰라렸다. 쾌감이 벌써 몇 번이나 끝도 없이 끌어 올려지고 있었다. 무서웠다.

“우읏, 흣. 으……. 아! 그만, 싫, 힛.”

“연우, 야.”

그러나 젖은 내벽은 쾌감을 조르듯 우물거렸다. 기다란 성기를 조여 무는 내벽이 먹음직스러운 색깔을 띠었다. 진홍빛으로 달아오른 연우의 성기는 꼿꼿하게 서지는 못했지만 분명 흥분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차현은 자신이 입 안에 넣고 핥았던 성기를 커다란 손아귀에 넣었다.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 너머로 전해졌다. 엉망으로 흐려졌던 연우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시, 싫어, 하지 마십……!”

“미안.”

순간 불길한 예감을 받은 연우가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기다란 성기에 꿰뚫린 채 할 수 있는 반항은 많지 않았다.

“아……!”

차현은 내벽을 들쑤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연우의 성기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앞뒤로 이어지는 쾌감이 머리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놔, 놔 주십, 으, 웃, 그만……!”

“조금만 흣, 더.”

정말 머리가 녹을 것 같았다. 이러다가 온몸의 수분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게 아닐까 두려울 정도로 눈물이 나왔다. 차현이 문지르는 귀두 끝이 칼날에 베이는 것처럼 쓰라렸다. 쿵쿵 처박히는 두꺼운 성기가 내장을 밀어 올릴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연우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조그만 반항조차 되지 못했다. 남자는 새빨개진 성기를 집요하게 문질렀다.

“흐윽, 읏, 아, 그만…….”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이 쏟아졌다. 연우는 마구 도리질을 쳤다. 차현은 그런 연우의 눈가에 입술을 묻었다. 눈물이 그의 입술을 적셨다.

“……!”

온몸을 발갛게 물들인 채 벌벌 떨기만 하던 연우가 퍼득 튀어 오른 건 그 순간이었다. 연우의 검은 눈에 당황과 초조함이 떠올랐다. 그는 차현이 억지로 문질러 세운 자신의 성기를 바라보다가, 방 안에 있는 욕실 문을 보았다.

“놔 주, 놔 주십…….”

연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턱이 바짝 들리고 한숨 같은 신음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읏, 아. 아…….”

온몸을 녹일 것 같은 사정감 끝에 터져 나온 것은 희뿌연 정액이 아니었다.

발끝이 한계까지 곱아 들어 둥글게 휘어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성기 끝에서 쏟아진 투명한 액체가 연우의 배 위를 흠뻑 적셨다.

“아.”

눈물로 흐려진 시야 너머로 당황한 듯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연우는 어린아이처럼 섧게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놔 달라고 했는데…….”

연우는 저 자신이 무어라 중얼거리는지도 알지 못했다. 한계까지 치달은 쾌감에 시야가 점멸하고 있었다. 지금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오로지 수치뿐이었다.

“……우야…….”

그의 대답은 듣지 못했다. 그 순간 필라멘트가 끊기듯 기억이 일시에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른 새벽, 연우는 불현듯 눈을 떴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눈꺼풀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뻑뻑한 눈꺼풀을 비비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제 팔목에 남은 불그스름한 자국을 보았다.

“…….”

시선을 돌리자 잠들어 있는 차현이 보였다. 연우는 숨을 죽인 채 침대를 살폈다. 그러나 어젯밤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제 분명 자신이…….

연우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일단 저에게 가장 큰 죄가 있겠지만, 그 일엔 분명 차현의 잘못도 있었다. 자신은 분명 나와 달라고 말했는데 비키지 않은 건 차현이지 않은가.

검은 눈이 조금은 타박하듯, 고요하게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눈에 서렸던 불퉁한 감정은 어느 순간 온순하게 바뀌고, 곧 순정적인 눈빛으로 뒤바뀌었다.

‘좋아해.’

열락에 들뜬 와중에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좋아, 하……. 젠장.’

꾸밈없는 목소리로 토해진 남자의 일면을 엿본 것 같았다.

“…….”

연우는 입을 달싹였다. 소리 없이 토해진 대답이 새벽빛에 닿아 스러졌다.

연우는 검은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건 역시 부끄러웠다. 그러니 남자가 깨어나면 대답하자.

연우는 남자의 가슴팍 위에 머리를 툭 기댔다.

……이런 낯부끄러운 대답을 하는데, 어제의 일로 크게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연우는 남모를 소원을 속으로 빌며 다시 스륵 잠에 빠져들었다.

― <개와 늑대의 시간> 마침 ―

개와 늑대의 시간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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