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연우는 온몸을 감싸 안는 체온을 느꼈다. 남자에게선 희미한 사향 냄새가 났다.
“연우야.”
낮게 가라앉아 갈라진 목소리. 그건 자신이 기억하던 소리와는 조금 다른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 아는 남자의 것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손끝을 떨리게 만들었다.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등을 안았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떨림이 밀착된 몸 사이로 느껴졌다.
“어디를 갔다가…….”
말끝이 흐려졌다. 개는 작게 숨을 토해 냈다. 등에 닿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니, 됐어. 그냥……. 그냥 이렇게.”
남자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개를 껴안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목덜미에 닿은 남자의 얼굴이 젖어 가는 듯했다.
“…….”
“…….”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로 뱉기엔 너무 적나라하고 벅찬 감정이 목구멍 아래에서 들끓고 있었다.
차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우에겐 그랬다.
온전하지 않은 몸으로 암살자 두 명을 해치우고, 황제의 개로 길러진 소년을 죽였다. 어려운 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게 될지 모른다’ 생각했을 만큼.
암살자 둘을 죽인 연우는 곧장 산으로 뛰어올랐다. 소년과 싸우기 직전, 일반인들이 가까워지는 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 이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인적이 없을 산으로 가는 게 좋겠지. 빠르게 판단을 내린 연우의 등 뒤로 소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산을 오르는 내내 대치를 이어 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살이 뜯겨 나가고 근육이 찢겼다. 이슬에 젖은 흙바닥에서 쇠 냄새가 올라왔다.
‘허억…….’
한 치 앞도 구분 가지 않는 밤의 산. 새파란 선을 그린 칼의 목적지는 소년의 목이었다.
여린 목덜미에 콰득 박혀 든 칼날이 숨통을 끊어 냈다. 소년의 신형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연우는 쓰러진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찢어진 살갗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피가 흙에 흡수되고 있었다.
그는 눈꺼풀 위로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긴장이 풀리자 만신창이가 된 몸이 비틀비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우는 어지럽게 돌아가는 시야를 억지로 바로잡았다.
돌아가자. 공작에게로, 남자에게로, 차현에게 돌아가자.
입력된 공식을 따르는 기계처럼 산을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한 발 내딛는 순간 연우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흐, 윽…….’
흙바닥을 뒹구는 몸이 차가웠다. 시야가 엉망으로 뒤흔들리고 숨이 가빠졌다. 제 몸에서 비죽비죽 흘러나온 피 냄새가 폐부까지 밀려들었다.
연우는 바닥에 뒤집어진 벌레처럼 몇 번이나 몸을 꿈틀거렸다. 다리로 바닥을 차고, 손가락으로 흙바닥을 긁었다. 손끝에 굵은 흙가루가 박히는데도 감각이 흐려져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초점 나간 검은 눈이 산 아래를 보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공작저로 갈 수 있을 텐데. 도무지 걸음을 내딛을 수 없었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죽는 걸까.
검은 눈동자에 파편화된 감정의 파동이 울렁였다.
이제야 죽고 싶지 않아졌는데.
내뱉는 숨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연우의 눈이 겨울의 창백한 하늘을 향했다. 이마에서부터 눈가를 타고 흐르는 피가 뜨끈했다.
정말 여기서 죽게 된다면…….
연우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정말 죽기 전이라면 공작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그가 안전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검은 눈동자가 창백한 눈꺼풀 너머로 사라졌다. 희고 말간 얼굴에 붉은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밤하늘에 불씨처럼 피어오른 별들이 죽어 가는 이의 모습을 고요히 지켜보았다.
사박, 사박.
연우가 정신을 잃고 짧은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곳에 찾아들었다.
기적처럼 찾아온 남자는 황제의 눈을 피해 깊은 산을 터 삼은 인간이었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연우를 주워 살렸다. 죽은 암살자 하나와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도련님 같은 남자. 그는 연우에게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더 누워 있어.’
연우는 자신을 살린 남자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계까지 내몰렸던 몸이 좀처럼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렸음에도 공작저로 바로 돌아가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남자의 호의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망가진 몸은 예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연우는 직감했다. 자신이 다시는 암살자로서 살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럼에도 후회는 들지 않았다.
차현에게 가는 암살자를 막겠다 결정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막아 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제 남은 것은 공작에게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
오랜 시간 만에, 마침내 그는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연우는 차현의 몸이 전보다 조금 마른 것 같다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아니, 아닌가?
몸의 무게가 급격히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연우는 읏,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차현의 무게를 견뎌 냈다. 자신을 안았던 팔에서 힘이 풀리고 있었다.
“……?”
연우가 의문스럽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깨에 닿아 있는 얼굴에 피로감과 예민함이 뒤섞여 있었다. 차양처럼 내려앉은 속눈썹 아래 자리한 눈 그늘과 거칠해진 피부가 그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연우는 일정하게 이어지는 호흡 소리를 듣고 차현이 잠든 것을 깨달았다. 검은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알던 차현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잠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잠든 사람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우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차현의 몸을 침대로 이끌었다. 암살자로서의 기술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테지만, 근력은 여전히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마침내 침대 앞에 다다른 연우가 차현의 몸을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밀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언제 맥없이 굴었냐는 듯, 등에 닿아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당황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이 한 번에 침대로 넘어갔다. 푹신한 침대가 반동으로 들썩였다.
차현의 가슴팍 위에 머리를 박은 개가 황급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남자가 그새 깨어난 건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평온을 되찾은 듯 보이는 얼굴이, 고르게 내쉬는 숨소리가 그의 상태를 알렸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연우는 곧 반항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귓가에 닿은 가슴에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생경했다.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 오래도록 심장 소리만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니까, ‘연우’라 부르며 미소 짓는 얼굴이 보고 싶으니까. 때가 되면 눈을 뜨고 일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연우는 고요하게 감긴 차현의 눈꺼풀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지는 노을 위로 반짝이는 별빛이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