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처음 발을 내딛은 바깥은 어둠뿐인 장소였다. 희부연 달빛마저도 숨어 버린 어두운 골목.
‘이름이 없는 소년’은 이지 없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는 공작을 암살하라는 첫 임무를 받고 황궁 밖으로 나왔다.
“가지.”
그의 주변에는 길을 안내할 암살자 몇이 있었다. 아니, 일단은 암살을 함께할 동료라 해야 하나.
그는 앞서가기 시작한 이들의 뒤를 쫓았다.
사실 혼자든 여럿이든 상관없었다. 황제의 명령을 완수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할 일을 다한 것이니까.
멀게 보이는 흰색 저택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지붕을 넘고 벽을 딛고 뛰었다. 어둠에 묻힌 다섯 명의 사람들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컥!”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앞서 나가던 이의 목에 날카롭게 벼려진 못이 박혀 있었다. 일순 힘이 빠진 듯 암살자가 땅으로 푹 고꾸라졌다.
“……!”
이어 두 번째. 공기를 가르고 날아온 못이 다른 암살자의 목을 꿰뚫었다.
엄청난 실력을 가진 이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뒤로 물러섰다. 무기가 날아오기 전까지는 저곳에 사람이 있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의 눈이 어둠 속을 직시했다. 떨어진 암살자의 품에서 무기를 꺼내는 흉측한 손이 보였다.
저자는 자신과 비슷한,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나은 실력을 가진 이다.
암살들이 경계하듯 바닥을 디디고 서자, 어둠 속에 몸을 감췄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곱상한 얼굴에서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어둠을 담은 듯 새까만 눈이었다.
이름 없는 소년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개……?”
그러나 나머지 암살자들은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그 남자를 보고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개는 당황한 암살자 둘을 보았다. 그들은 ‘황제의 개’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그들이 아는 ‘황제의 개’라면 황제의 침소에 인형처럼 앉아 있었을 것이다. 또한 황제의 명령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테지.
이젠 많은 게 변했음을, 이들은 알지 못한다.
개는 구태여 의문을 풀어 주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의 소년이 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개는 잠시 숨을 멈췄다.
빛을 받지 않아 희멀건 얼굴과 거무죽죽하게 죽은 눈.
소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옛 모습처럼 보였다.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을 한 소년은 죽여야 할 ‘적’이었다. 그럼에도 죽여야겠다는 살의보다는 동정과 연민이 들었다.
손끝도 다 여물지 않은 소년. 저 애에게도 시간이, 계기가 있었다면 알게 됐을 것이다. 황궁에서 보는 네모난 하늘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과 질문을 모두 통제당한 채, 한 사람에게 충성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켜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두 명의 암살자가 입을 열었다. 소년에게 붙박여 있던 검은 눈이 돌아섰다.
“비키지 않는다면 네 목을 치고 가겠다.”
“…….”
그러나 연민을 느낀다는 이유로 저자를 살려 보낼 순 없겠지. 적과 적으로 만난 이상, 누군가는 끝을 봐야만 했다.
개는 말없이 칼을 고쳐 쥐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무언의 행동.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 명의 암살자가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개는 순식간에 달려드는 새파란 신형을 보며 까만 눈을 번뜩였다.
✵
어둠을 밝히는 빛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와아아…….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겨울바람이 매서웠지만 고작 그것으로는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몇 사람의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8차선의 도로 위에 거대한 불의 물결이 흘렀다. 사람들은 도시로, 광장으로, 황궁의 앞으로 걸어갔다. 넘실거리는 불씨가 도시를 가득 메웠다.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불빛이 도시를 깨웠다.
시장 골목 안에 사는 구더기들도, 도시에 사는 여유로운 인간들도, 군인들, 검사들도 그들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물결을 보았다.
그 압도적인 장관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뒤늦게 군인들이 이 상황을 통제해 보려 했지만, 그들에겐 ‘진압’을 명령할 결정권자가 부재해 있었다.
다른 수뇌부들은 연락이 되지 않는 와중, 현재 군부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이는 준장이었다. 준장은 제복의 앞섶을 여민 단추가 하나씩 밀렸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같은 자리를 서성였다.
부하를 보내 폐하의 명령을 받아 오라 한 게 한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부하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폭도들이 자신의 부하를 패 죽이기라도 한 걸까?
초조함에 못 이긴 준장이 문을 쏘아보았을 때였다.
덜컹!
거칠게 열린 문으로 부하가 들어왔다. 준장은 땀범벅이 된 부하를 보며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폐하는, 폐하께선 무어라 하시더냐!”
부하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화, 황궁의 문이 굳게 닫혀 있어 폐하의 앞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궁인들이 궁궐을 탈출하기 시작하여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
“이 병신 새끼가!”
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솥뚜껑같이 두꺼운 손으로 부하의 머리를 내리쳤다. 뇌를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에 부하의 몸이 바람에 나부끼는 종이 인형처럼 비틀 흔들렸다.
“도망치는 궁인들을 가만히 뒀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폭도들이 궁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만으로도 병력이 부족해서…… 도망치는 궁인들까지 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몸을 겨우 세운 부하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준장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 팔로 책상을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현, 차현 공작은 어디에 있느냐. 일단 공작에게라도…….”
“멀리서 찾으실 필요 없습니다.”
문 앞에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장과 그의 부하가 황급히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 계시니까요.”
그곳엔 새하얀 제복을 입은 윤재경이 서 있었다. 뱀처럼 요사스럽게 웃은 재경은 얼빠진 얼굴들을 살펴보다, 문을 가리던 몸을 비켜섰다.
워커를 신은 발이 문턱을 밟았다. 그의 다리 위에서 흰 코트가 펄럭였다.
순백의 제복을 입은 남자는 세상에 다시없을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작.
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공작은 공식적으로 직위 해제 되었지만, 전시 상황에 준하는 지금은 그의 명령이라도 필요했다. 공작은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권력자가 아닌가.
“고, 공작! 잘 왔습니다. 바깥의 폭도들이…….”
“폭도?”
공작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준장의 눈이 멍청하게 풀렸다. 그는 조소하듯 입술을 비틀어 웃는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날 때부터 지닌 표정인 양, 그의 입가에 자리한 비웃음이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재미있는 소릴 하는군.”
차현은 멍하니 서 있는 준장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고 문밖에 선 검찰청의 인간들을 눈에 담았다. 검사들은 하나같이 충직하게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총장님밖에 없습니다.’
‘부디 저희에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검사들은 횃불이 요동치는 도시를 헤치고 차현의 저택에 찾아왔다. 그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차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황제에게 기대를 버린 이들. 그들은 혁명을 기회로 황제를 끌어내리고자 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새로운 희망이 차현이 되길 바랐다.
차현이 바라는 일 역시 그것이었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체포해.”
“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사들이 우르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곧장 준장의 몸을 책상에 밀쳐 눕히고, 그의 팔을 뒤로 꺾어 묶었다. 차가운 수갑이 준장의 양팔을 구속했다.
“이, 이게 무슨! 놔! 이 검찰 나부랭이 새끼들이……!”
준장은 이 굴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했다. 그러나 수 명의 건장한 검사들을 물리칠 수 있을 리 없었다. 악을 쓰는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아, 그리고 당신은 나가서 전해요.”
“……예, 예?”
무감정하게 준장을 내려다보던 검푸른 눈동자가 부하를 향해 돌아섰다. 아연실색한 부하가 두려운 얼굴로 차현을 마주 보았다.
“군인들은 지금 이 시간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라고.”
차현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움직이는 순간 벌집이 되는 건 바깥의 인간들이 아니라 당신들이 될 거란 이야기입니다.”
부하는 입을 벙긋거렸다. 지금 군부를 향해 총을 겨누겠다 말한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그 ‘공작’이 맞는 건가?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하고 친절하던 그 남자가…….
“가지.”
“예에.”
차현은 입을 벙긋거리는 부하를 뒤로한 채 방을 빠져나왔다. 재경은 그 뒤를 쫓아 문턱을 넘었다.
“검사님.”
“이제 그 호칭은 그만 쓰지.”
재경의 목소리에 차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재경은 잠시 깜빡했다는 듯 ‘아하’ 하는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통령님?”
차현의 걸음이 미세하게 늦어졌다.
혁명은 성공할 것이고 황권은 무너질 것이다. 그 뒤엔 새로운 체제가 세워지겠지. 대통령을 뽑는, 새로운 체제.
“농지거리할 시간 없어.”
“예에…….”
재경이 힐끗 눈치를 보며 말을 흐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가실 겁니까?”
“황궁.”
망설임 없이 토해진 한마디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그는 빠르게 군부의 건물을 빠져나가며 개를 떠올렸다. 달이 밝은 밤, 황궁 벽에 밀쳐져 입술을 받아들였던 개. 입술이며 눈가며 모두 발갛게 물들인 얼굴이 순진했었다.
그는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당장이라도 그 야해 빠진 몸을 뒤집어엎고 구멍을 벌리고 싶었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데리러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약속을 지킬 때였다.
그의 머리칼이 불씨가 섞인 바람에 흔들렸다.
✵
황궁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돈화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군가를 보호하듯, 혹은 나가지 못하게 틀어막듯.
쿠구궁.
하지만 육중한 돈화문도 차현의 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누군가 궁 안에서 문을 밀어 열자, 어둡고 황폐한 궁의 내부가 드러났다. 궁인들이 저마다 돈이 되는 것을 챙겨 도망간 것이다.
“……오셨습니까?”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던 차현이 자신의 앞에 선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떫은 표정을 지은 남자는 혁명단의 일원인 ‘모자’였다.
“제가 온 것을 별로 반기지 않는 얼굴이군요.”
차현이 웃으며 묻자 모자가 찔끔했다.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래요.”
차현은 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러고 뒤를 돌아 재경을 바라보았다.
“넌 여기 남아.”
“예?”
재경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남으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할 말이 남아 있나?”
차가운 목소리에 재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마 전 용서를 받긴 했지만, 아직 전처럼 관계를 회복한 것은 아니었다. 토를 달거나 반박할 처지가 아니었다.
“아닙니다. 다녀오십시오오…….”
차현은 풀 죽은 듯 보이는 재경에게서 등을 돌렸다.
워커를 신은 발이 돈화문을 넘자 거대한 문이 ‘쿠구궁’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넘어진 화롯불과 찢어진 옷자락 같은 것들이 전쟁 통을 방불케 했다. 궁에서 벗어나지 못한 군인들은 밧줄로 포박된 채 기절해 있었고, 몇몇만이 간신히 의식을 붙잡은 채 신음을 흘렸다.
차현은 텅 빈 황궁을 제집처럼 거닐었다. 그는 긴 다리를 뻗어 황제의 침전까지 순식간에 다다랐다.
“아.”
침전 근처에 모여 있던 혁명단원들이 차현을 발견했다.
우아한 걸음으로 걸어오는 아름다운 남자. 그는 정확한 목적을 밝히지 않고 혁명단을 지원해 온 권력자였으며, 속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인간이었다.
혁명단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공작이 무엇을 요구할지,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오셨네요.”
“다시 만나는군요.”
그런 혁명단원들의 앞에 나서 말을 꺼낸 것은 여자였다.
“혼자 들어오셨네요. 보좌관은?”
“찾을 게 있어서.”
차현의 눈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마치 좋아하는 무언가를 떠올린 어린아이처럼 상기된 표정.
여자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따금 저 얼굴에 시선을 빼앗길 때가 있었다. 딱히 미추에 관심이 없는 편임에도.
그나저나 찾을 게 있어 보좌관을 두고 왔다니. 보좌관이 알아선 안 될 물건이라도 되는 건가? 여자의 눈동자에 의심이 떠올랐다.
“궁인들이 궁 안의 물건은 이미 다 털어 갔던데, 찾는 게 남아 있을지 모르겠네요.”
외부의 적인 황제가 무너지고 나면, 그에게 억눌려 있던 모든 것들이 반동으로 튀어오를 것이다. 마치 짓눌렸던 스프링이 높이 튀어 오르는 것처럼.
그러면 어제의 동료가 내일의 적이 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나겠지.
여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황제를 끌어내리는’ 공동의 목적을 이룬 이상, 공작은 내부의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았다.
푸흐, 하는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여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있을 겁니다. 그건 나밖에 손댈 수 없으니까. 그리고 약속을 지켜 줬으면 좋겠는데.”
아름다운 얼굴에 맺혀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가셨다. 공작의 무감정한 눈동자가 여자를 직시했다.
“……알겠습니다.”
여자가 순응하듯 대답했다.
차현은 여자에게 짧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그녀를 지나쳐 걸으려 했다.
“대신 우리도 함께 황제의 침소로 갈 겁니다.”
도전적인 시선이 발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당신은 지원의 대가로 혁명이 끝날 시 ‘가장 먼저 황제와 만나겠다’ 말했었죠. 하지만 그 조건에 황제를 살해하거나, 인도해 가는 건 없었습니다.”
“내가 황제를 죽일지 그러지 않을지 감시하겠다는 겁니까?”
위협적으로 들리는 말에도 차현은 여유작작했다.
“그렇게 들렸다면 그런 거겠죠. 어쨌든 황제는 우리가 인도해 갈 겁니다. 내 손으로, 우리가 정당한 방법으로 처형할 거니까.”
여자는 습관적으로 목 위를 더듬었다. 낡은 반지가 걸린 목걸이가 손끝에 걸렸다. 여자의 얼굴에 미약한 고통이 피어올랐다.
그녀의 동생은 궁인이었고, 그저 황제의 기분이 나빴다는 이유로 죽었다. 시체는 찾을 수 없었다. 하나뿐인 동생의 유해 대신 돌아온 것은 그날 동생이 숙소에 놓고 갔다는 반지 하나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귀족들을 경호하던 일도 관둔 채 하나만 생각했다. 황제를 죽이자. 그래서 다시는 누구도 이런 비극을 겪지 않을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
“거절한다면 당신은 황제에게 갈 수 없어.”
“내 앞에서 칼을 들고 설쳐도 죽일 생각이 없으니 그만 비키지.”
차현의 목소리에 미약한 지루함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귀찮은 것을 바라보는 시선. 여자는 차현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 말 지켜야 할 겁니다.”
마침내 차현의 앞을 가로막았던 여자가 길을 텄을 때였다. 누군가 다급한 발소리를 내며 침전 쪽에서 튀어나왔다.
“이, 이 극악무도한 폭도 놈들! 감히 이곳이 어느 안전이라고 더러운 발을 들이미느냐!”
새파란 장도를 든 채 고함을 지르는 노인. 비서실장이었다.
이성을 잃은 듯 홉뜬 눈으로 혁명단을 죽 훑더니 차현을 눈에 담았다.
“공작, 공작 당신도 저 폭도 놈들과 같은 인간이었군! 하하, 하.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았어! 태생이 천박하기 그지없으니 저깟 놈들에게, 저깟 놈들과 놀아나 폐하를 배신하고……!”
“일단 저자도 포박하지.”
미간을 찡그린 혁명단 일원들이 비서실장을 둥글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비서실장이 ‘힉’ 숨을 들이켜더니 칼을 허공에 찌르기 시작했다.
“어딜! 어디에 더러운 손을 들이미느냐! 내 시체를 밟아 죽이기 전까지 네놈들은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인다!”
근력이 없는 비서실장은 칼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 무거운 쇠붙이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비서실장의 몸도 비틀비틀 흔들렸다.
혁명단원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큰일이 나기 전에 제압하자. 그들은 무언으로 합의를 보았다.
혁명단원들이 천천히 원을 좁히며 비서실장에게 다가갈 때였다.
“윽!”
때로는 미친 사람의 칼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횡으로 내리그은 칼이 때마침 혁명단 일원의 팔을 베었다. 날카로운 칼날에 붉은 핏방울이 번졌다. 비서실장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탕!
그러나 비서실장의 일격은 이어지지 못했다. 단 한 발의 총성이 황궁 안을 울렸다.
이마에 총알이 박힌 비서실장이 땅으로 풀썩 쓰러졌다.
“잎사귀 너…….”
여자의 시선이 홱 돌아섰다. 총을 쥔 이는 잎사귀였다.
잎사귀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어도 되는 인간이었어요.”
“그걸 네가 판단하는……!”
“공작 침전에 들어갔는데, 신경 안 써도 돼요?”
잎사귀에게 성큼 다가가던 여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침전을 보았다. 한 사람의 인영을 삼킨 장지문이 닫히는 모습이 보였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침상에 앉은 황제의 새빨간 눈이 장지문을 향했다.
탁.
문을 닫고 들어온 남자의 다리 곁에서 순백색의 코트가 너울거렸다.
“내 걸 돌려받으러 왔는데.”
차현은 예의를 갖춰 말하는 수고조차 들이지 않았다. 분노한 황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디에 있지?”
“네놈……! 네 것이라니! 이 제국은 나의 것이다. 어디 하나 내 것 아닌 게 없거늘! 네 것이 대체 이곳 어디에 있단 말이냐!”
침상에서 벌떡 일어선 황제가 머리맡에 놓여 있던 칼을 움켜쥐었다. 검집에서 칼을 빼어 든 그는 오만방자한 차현의 얼굴을 베어 버리리라 마음먹었다.
황제는 순식간에 차현의 앞으로 달려왔다. 머리 위로 치켜든 칼이 서슬 퍼런 빛을 내뿜었다.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차현의 얼굴에 칼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악!”
퍽!
다리에 엄청난 충격이 와 닿았다. 워커를 신은 발이 황제의 다리를 무자비하게 걷어찬 것이다.
일순 힘이 풀린 황제의 몸이 풀썩 바닥에 고꾸라졌다. 손에 쥐었던 칼이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갔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차현은 허리를 굽혀, 무릎을 꿇은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네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이 나라 어디에 있지? 너는 이 침전을 벗어나는 순간 목숨마저도 잃을 텐데.”
“이, 이……!”
굴욕적인 자세를 취한 황제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실핏줄이 터진 눈이 지금 당장이라도 피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본래라면 통쾌해야 마땅할 풍경이었다.
“연우는 어디에 있지?”
그러나 차현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얼어붙은 듯 싸늘한 얼굴에 초조함과 불쾌함이 뒤엉켰다.
“비서실장, 비서실장……! 밖에 아무도 없느냐!”
황제가 발악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차현은 무릎걸음으로 장지문을 향해 걸어가는 황제를 보았다. 그건 벌레가 어둠 속으로 황급히 기어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검에 차현의 시선이 가 닿았다. 그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검을 움켜쥐었다.
“비서실……!”
콱!
황제는 자신의 목 옆을 지나 바닥에 처박힌 날카로운 칼날을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검신 위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비쳤다.
“네가 내 강아지를 데려갔잖아.”
차현의 목소리에 황제의 몸이 우뚝 굳었다. 돌처럼 굳은 입술이 느리게 달싹거렸다.
“……너였구나.”
차현은 황제의 뜻 모를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시간 끌지 말고 연우가 있는 위치나 말하라 윽박지를 생각이었다.
“너였어! 이 빌어먹을 새끼, 끝까지 날 우롱해? 이 배은망덕한 새끼가!”
황제는 칼날에 베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주먹을 내지르고 손톱으로 할퀴려 해도 차현에겐 닿지 않았다. 하늘을 움켜잡겠다며 손을 뻗은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내 개를 되돌려 놔라. 그건 내 것이야! 내 것이라고……!”
황제는 흔들리기 시작한 차현의 눈동자를 보며 악을 질렀다.
“네가 개를 훔쳐 간 게 아니냐. 그래 놓고 이 나를 끝까지 우롱해? 감히, 감히……!”
칼을 쥔 차현의 손끝이 짧게 떨렸다.
설마.
“내 개는 어디에 있느냐!”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 같은 강렬한 충격이 뇌를 뒤흔들었다.
황제의 말은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우가 이곳에 없다.
“뭐?”
차현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내놔, 내놓으란 말이다! 그건 내 것이야!”
“…….”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황제를 비웃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끄럽게 짖어 대는 입을 다물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 발악하는 몸을 짓뭉개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머리를 진탕치기 시작했다.
반역죄라도 뒤집어씌울 줄 알았던 황제가 자신을 파면하는 정도에 그쳤던 일. 민가에 군사가 투입되어 민심이 돌아선 일. 그리하여 혁명단뿐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인간들이 혁명에 참여하게 된 일.
이 모든 게 그저 운이 좋아 일어난 일들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면?
이 모든 일에 ‘연우’라는 원인이 있었다면.
“언제 사라졌어.”
불안감이 순식간에 몸을 불렸다.
차현이 황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른 몸이 순식간에 들려 올라갔다.
“더러운 손 치워, 이 사생아 새끼가……!”
퍽!
멱살을 움켜쥔 손을 마구 할퀴며 발버둥 치던 황제의 몸이 이내 뻣뻣하게 굳었다. 차현은 벌겋게 달아오른 황제의 뺨을 보며 짓씹듯 물었다.
“언제 사라졌냐 물었잖아.”
황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독을 먹고 목숨에 위협을 받아 본 적은 있어도, 누군가에게 맞아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런 굴욕적인 자세로 사생아 새끼에게 뺨을 맞다니?
“이틀 전…….”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몸은 솔직하게 움직였다. 뇌가 울리는 고통에 손끝이 떨렸다.
직접적인 폭력은 인간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 주었다. 만인의 지존이란 황제도 결국 평범한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퍽 우스워야 할 텐데.
“……조금 더 오래 살아 볼 요량으로 한 거짓말이라면 효과적이었어.”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황제의 말대로라면 연우는 이틀 전에 사라졌다. 그런데 자신은 오늘, 황제의 앞에 올 때까지 연우의 자취를 알지 못했다.
그는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다. 군사를 풀어 민가를 뒤진 황제조차도 사라진 이를 찾지 못했다.
연우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제 어디 있는지 말해.”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리가 인식을 거부하고 있었다.
“어디 있는 줄 알잖아.”
“모른다, 모른다고!”
도망친 걸까?
하지만 연우는 ‘도망’을 칠 정도로 요령 좋은 이가 아니었다. 등을 보이느니 맞서 싸우는 것을 선택할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말해.”
어디에 있는 걸까.
“네가 알고 있을 것 아니냐……!”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이 풀렸다.
침전에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황제를 내려다보던 차현의 멍한 시선이 창을 향했다. 열린 창 틈새로 붉은 불씨가 흩날리는 밤하늘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그래. 연우가 도망을 친 것이든, 사라진 것이든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일단 그가 더 멀어지기 전에 붙잡아 두는 게 먼저였다. 추궁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차현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일단 저택에 돌아가 연우가 돌아오지는 않았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 뒤에는 수하들과 윤재경에게…….
아니, 윤재경은 일전에도 연우의 행방을 숨긴 적이 있으니 말하지 않는 게 나으려나.
“어딜 가느냐! 이 건방진 새끼가, 감히!”
그 순간 황제가 코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인력에 의해 걸음이 멈춰 섰다.
차현의 검푸른 눈이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짜증과 분노가 뒤엉킨 눈빛이었다.
“내 개를……!”
지금 이 시간에도 연우는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럴 것만 같았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그 뒤를 쫓아야 할 텐데.
‘내 개’ 같은 헛소리나 하는 입을 가만둬야 할 이유가 있나?
순식간에 몸을 돌린 차현이 바닥에 박힌 칼을 뽑아 들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뽑혀 나온 칼날이 유려한 선을 그었다.
살을 엘 것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황제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컥!”
등에 박힌 칼 끝이 가슴을 뚫고 나와 바닥에 쑤셔 박혔다.
콰득!
나무 바닥이 깊게 파이는 소리가 났다. 차현의 코트를 잡은 창백한 손에서 힘이 풀렸다.
“…….”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차현은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반듯한 손에서 핏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칼에 매듭지어진 붉은 홍조수아(紅絛穗兒)가 제 주인의 고개처럼 바닥으로 길게 늘어졌다.
걸음을 떼는 차현의 발밑으로 질퍽거리는 핏물이 묻어 나왔다. 그는 흰 제복에 튄 핏자국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장지문을 밀어 열었다.
침전 앞에 대기하던 혁명단원들이 일제히 차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제복을 적신 붉은 핏자국과 서늘하게 굳은 공작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제가 있을 침전 안은 무덤처럼 고요했다.
“……당신, 설마?”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여자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무감정한 검푸른 눈동자가 여자를 향했다.
“황제가 죽었어!”
그 순간 누군가 침묵을 깨고 외쳤다. 여자의 시선이 급히 침전 안쪽으로 옮겨 갔다.
어슴푸레한 빛이 비치는 침전 안, 누군가에게 사죄하듯 머리를 수그린 황제의 등에 칼이 박혀 있었다. 새파란 칼날을 타고 핏방울이 흘렀다.
여자는 허망에 빠졌다.
“당신 미쳤어?”
그녀가 중얼거리자 혁명단원들의 시선이 다시 차현을 향했다.
“…….”
그는 별다른 말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은 워커가 지나간 자리마다 핏빛 발자국이 묻어 나왔다.
혁명단원들은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초식동물처럼 물러섰다. 여자마저도 자신의 옆을 스쳐 가는 차현을 붙잡지 못했다.
“황제를 멋대로 죽이다니, 당신 뭐 한 거야!”
뒤늦게 침전 앞에 온 모자만이 용감하게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한 거냐고 묻잖아!”
“……시끄럽게 짖지 마. 머리 울리니까.”
“뭐?”
“비켜.”
차현은 모자의 어깨를 밀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붉은 피로 젖은 코트가 그의 다리 위에서 흔들렸다.
“저거 미친놈 아니야? 야!”
모자는 등을 돌린 차현에게 삿대질을 하며 그를 쫓으려 했다.
“하지 마요.”
잎사귀가 자신의 앞을 막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아니, 저게……!”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린 모자를 보며 잎사귀는 고개를 저었다. 무언의 반대에 모자가 입을 다물었다.
잎사귀는 조용해진 모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뒤돌아보니 공작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잘 보이지 않았다.
침전에 들어갔다 나온 공작은 왜인지 여유가 없어 보였다. 저런 상태의 인간을 건드려 봤자 좋은 꼴을 보긴 힘들 터였다.
황궁 바깥을 떠돌던 불씨가 담장을 넘어 눈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잎사귀는 하늘을 보았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오는 도시.
개개인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든, 혁명은 성공했다.
잎사귀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허탈함인지 기쁨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들었다. 입가에 흩어진 하얀 김이 공기 중에 녹아들었다.
✵
오랫동안 국가를 지배해 온 체제가 무너졌다. 이는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녹봉을 받아먹던 사람들은 한순간 직장을 잃었으며, 귀족들 또한 뒷배를 잃고 이도 저도 아닌 신세로 전락했다.
깡패들은 황제의 통제 아래서 벗어나자 목줄이 풀린 짐승처럼 날뛰었다. 경찰권2)이 부재하는 와중을 틈타 사람을 노렸다. 도둑질이나 강도질, 인신매매도 서슴지 않았다.
2) 공공의 안녕, 질서 유지와 위해 방지를 목적으로 국민에게 명령·강제되는 권한.
그러나 그들의 횡포는 오래가지 못했다.
“악! 놔, 이거 놓으라고. 새끼들아……!”
어린아이를 납치하려던 깡패가 담벼락에 밀려 악을 질렀다. 깡패의 등치에 밀리지 않는 건장한 남자 둘이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인생을 건실하게 살아야지, 이따위로 살아서 되겠나?”
하나는 제복을 벗어 던진 검사였다. 검찰청의 검사들은 지금껏 그들을 상징하던 순백색의 제복을 벗어 던지고, 이제 이 나라의 재건에 손을 보태고 있었다.
“그래, 이 깡패 새끼야. 어딜 감히 어린애한테 손을. 콱 뒈지려고!”
다른 하나는 혁명단의 일원이었다. 혁명단은 혁명이 끝난 직후부터 나라를 정상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요즘 다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가격을 더 받아! 됐어, 이것만 내고 가.”
“민재 엄마, 걱정 말고 일 나가. 우리 주승이 데리러 가는 길에 민재도 데려올게. 밖에 위험한데 어린애들만 다니게 하기 무섭잖아.”
새로운 나라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비단 검사와 혁명단원뿐이 아니었다.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들도,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들도, 길거리의 노인들도,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을 승리로 이끈 주역, 여자는 커다란 창문이 난 방 안에 앉아 서류와의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 앞에 선 잎사귀는 여자를 짠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보고를 쉬지는 않았다.
“……조직 우두머리는 이미 해외로 튄 것 같아요. 우두머리가 도망쳤으니 조무래기들은 유야무야 흩어질 거고, 깡패 무리들이 와해되는 것도 더 빨라지지 않을까 싶어요.”
“조사하느라 고생이 많네.”
눈 밑에 시꺼먼 그늘이 진 여자가 말했다. 잎사귀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 없을 때보다 일 많을 때가 차라리 나아요.”
잎사귀는 아직 한강에 가지 못했다. 모든 일이 한가해지고 자신의 자리가 없어지면 가 볼 생각이었다. 가족의 죽음이 묻혀 있는 강.
그때 가면 누군가 또다시 나를 살리거나, 혹은 스스로 나오겠지.
많은 것이 변했다. 여자는 자신의 앞에 쌓인 서류를 하나하나 모두 읽어 내려갔다.
나팔수처럼 황제의 목소리를 시끄럽게 외쳐 대고, 자극적인 뉴스로 대중의 눈을 가리던 언론사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또한 그런 기사들을 써 내리던 언론인들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처지가 되었다.
권력을 쥐고 제멋대로 흔들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탐욕스러운 얼굴로 권력을 싹싹 긁어먹던 늙은이들이, 감옥 한구석에 박혀 현실을 도피하는 꼴이란 꽤 통쾌한 모습이었다.
귀족들 중 감옥에 가지 않은 사람은 차현 공작이 유일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혁명단에 지원을 해 오던 숨은 조력자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공작은 어떻게 된 걸까. 여자는 힐끗 창밖을 보았다.
공작이 황제를 죽인 날 밤 이후, 여자는 그를 본 적이 없었다. 혁명이 끝나면 그와 아귀다툼을 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한 일이지.
습관처럼 목걸이를 만지던 여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생각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여자는 다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저 윤재경입니다.”
햇빛이 환한데도 어둠에 잠긴 것 같은 방 안. 그곳에 앉은 차현은 아무런 말 없이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
황제의 숨통을 끊고 저택에 돌아왔을 때, 그는 텅 빈 방을 마주했다. 연우가 없는 방을 본 순간 이가 악물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널을 뛰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금방 연우의 뒤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에겐 그럴 만한 인력과 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을 풀고 단서를 모았음에도 연우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시간이 흘러 일주일이 지났다. 모든 일에 집중할 수 없었고, 모든 일이 의미 없는 짓거리처럼 느껴졌다.
“공작님.”
문 너머에서 재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차현은 눈동자만을 굴려 굳게 닫힌 문을 보았다.
때로 인간은 곧 현실이 될 강력한 예감을 감지할 때가 있다. 그리고 차현은 지금 이 순간 그런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연우를 찾을 수 없을 거란 예감.
문을 바라보던 차현의 시선이 창문을 향했다. 그는 연우가 자주 앉아 있곤 했던 창문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들어가겠습니다.”
재경은 허락을 받지 않고 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그러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고개를 들어 열린 문 틈새를 눈에 담았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미학적인 방 안은 적요에 잠겨 있었다. 너른 창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공작이 앉아 있는 풍경은 마치 무채색의 풍경 같았다.
커피테이블 앞에 앉은 남자의 발밑으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의 긴 속눈썹에 맺힌 햇빛이 마른 모래처럼 버석했다.
“공작님.”
재경의 침입에도 공작의 눈은 창문에 못 박혀 있었다. 재경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가슴 한쪽에 돌이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움직여야 할 이가 숨만 죽이고 있었다. 저 무력한 남자가 자신이 알던 ‘그’ 차현 공작이 맞는 걸까.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전면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
재경이 결연히 토해 낸 목소리에도 차현의 시선은 여전했다. 그는 아예 재경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창밖만 바라보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창밖에 눈을 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햇빛을 받는 창문턱을 바라보고 있었다.
환기조차 시키지 않은 탓인지 창문턱에는 엷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빛바랜 풍경처럼 노랗게 번진 빛살이 그림자처럼 늘어졌다.
“지금 나서지 않으시면 주도권을 잃습니다. 모르시는 게 아니잖습니까?”
재경이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검사들도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공작님이 왜 나서지 않는지, 왜 행동하지 않는지…….”
그러나 재경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대앉은 공작은 재경의 목소리를 아예 듣고 있지 않았다. 한 공간에 있음에도 단절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재경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검사님.”
“…….”
원래라면 ‘그 호칭으로 그만 부르라’며 타박을 놓아야 하는데. 지금의 그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재경은 입을 달싹였다. 꺼내고 싶지 않은 화제를 꺼내 드는 것은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먹은 것처럼 껄끄럽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말을 빙빙 돌릴 수도 없겠지.
한숨을 내뱉은 재경이 작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개가 사라진 것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창문에 붙박여 있던 시선이 일순 재경을 향해 돌아섰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일주일. 재경이 알던 차현이라면, 여론을 장악해 차기 통령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도 남았을 시간.
“시체도 없고 흔적도 없다죠. 개가 사라진 게 신경 쓰이는 일이란 건 인정합니다. 황제의 끄나풀이었던 자를 살려 두는 건 갈대밭에 불씨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그자의 뒤꽁무니만 쫓으실 겁니까.”
“……고작 일주일이야.”
피곤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재경의 속에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고작 일주일이 아닙니다! 혁명단에 빼앗긴 주도권을 가져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 아시잖습니까!”
“……너와 말씨름할 시간 없어. 시끄러우니까 나가.”
재경은 묻고 싶었다. 나와 말씨름할 시간이 없다니.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낭비하고 있는 시간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 누구를 위한 시간인가.
“애초에 개는 미끼였잖습니까! 처음 계획에는 황제를 궁궐 바깥으로 이끌 만한 도구가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살려 둔 거 아닙니까? 이용할 만큼 이용하다 혁명이 끝나면 죽이려던 생각 아니셨냐고요. 그깟 미끼 하나 사라진 게 뭐가 대수라고!”
“윤재경!”
재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고성을 내뱉은 이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닥치고 나가.”
차현은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엉망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재경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퍼즐을 맞추는 놀이는 언제나 즐거웠다. 흩어져 있을 땐 쓰레기에 지나지 않던 조각들이, 맞춰졌을 땐 완벽한 그림이 되었으니까. 재경은 그것이 좋았다.
차현의 발밑에 펼쳐진 위대한 명화 조각을 모두 맞춰 보리라 마음먹은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이 수많은 조각을 맞추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렵더라도 즐거울 것 같았다.
그런데 모두 맞춰진 그림 위에서 차현의 걸음이 멈춰 섰다. 이제 딱 한 조각, 가장 중요한 한 조각만 제자리에 밀어 넣으면 모든 게 끝나는데. 차현은 퍼즐 조각을 움켜쥔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쾅!
문이 거칠게 닫혔다. 방 안은 다시 침묵에 잠겨 들었다.
차현은 얼굴을 가린 채 거칠어진 숨을 급히 내뱉었다.
‘그깟 미끼 하나 사라진 게 뭐가 대수라고!’
재경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이가 악물렸다.
분명 처음엔 그랬다. 아니,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연우를 죽일 거란 계획을 아예 배제한 건. 연우를 죽이지 않아도 성공적으로 혁명을 거머쥘 수 있다 생각했던 게…….
손끝이 짧게 떨렸다. 연우가 계획을 알게 된 걸까? 하지만 이건 처음부터 재경과 자신만 알고 있던 비밀이었다. 연우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재경과는 접촉도 없던 그가 어떻게.
“…….”
묻고 싶었다. 왜 사라진 것이냐고, 어디에 간 거냐고. 그렇게 다그치다가도 품에 안아 어르고 싶었다. 다시는 멋대로 사라지지 말라고, 시선이 닿는 곳에 있으라고.
……모든 게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지만.
손바닥에 파묻혔던 눈동자가 다시 창문턱으로 돌아갔다. 짧은 순간, 연우가 창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곳엔 발길이 닿지 않았다. 먼지 위에 닿던 햇빛이 주황빛으로, 붉은색으로 물들어 마침내 검게 변할 때까지.
✵
익숙함은 언젠가 독이 되어 돌아온다.
차현은 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 역한 냄새를 풍기는 술이 입 안을 가득 적셨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한 잔을 모두 비운 그는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잔을 내려놓았다.
쪼르륵.
다시금 잔에 투명한 액체가 높이 차올랐다. 어두운 탓일까. 술잔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속처럼 보였다. 차현은 술잔을 들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연우가 부재하는 밤이 낯설었다.
연우를 알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이런 불면의 밤을 겪어 본 적 없었기에, 그는 속수무책으로 굴복해야 했다. 거인 앞에 선 무력한 인간이 된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 매 순간, 매일 밤마다 그를 휘둘렀다.
술잔을 채우고, 비워 내고, 채우고, 비워 내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어느덧 술병이 모두 비어 버렸다.
그는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빈 술병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 느릿느릿 창문턱 쪽으로 다가갔다.
“…….”
달빛이 비치는 창문. 그는 버석거리는 먼지를 손끝으로 쓸었다.
연우는 이따금 여기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무엇을 보았던 걸까. 같은 위치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있음에도 그가 검은 눈동자에 무엇을 담아냈는지 알 수 없었다.
저벅.
차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이제 그 누구도 두렵지 않기 때문인지 기척을 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옷장 앞이었다. 망설임 없이 옷장의 문을 당겨 열자, 익숙한 체취가 훅 끼쳐 왔다. 제 주인의 성정처럼 가지런히 걸린 무채색의 옷들.
차현은 피아노의 건반을 쓸어내리듯, 부드러운 옷들을 천천히 더듬었다. 손끝에 걸리는 옷감의 재질이 낯설기도 혹은 익숙하기도 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짧은 순간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웃음기는 추락하는 유리병처럼 순식간에 부스러졌다.
그의 손이 부드러운 옷감을 힘껏 움켜쥐었다. 미소가 사라진 자리엔 가려 두었던 고통이 꺼풀을 벗고 드러나 있었다.
“하…….”
사라진 이의 흔적이 가득한 방 안, 그 흔적의 주인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차현은 시야가 비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뒤늦게 술기운이 밀려오는 듯했다.
찌푸린 눈을 두어 번 깜빡인 그는 충동적으로 손에 쥔 옷을 당겨 빼냈다. 희고 깨끗한 옷이 손에 감겨들어 왔다.
부드러운 머리칼에 코를 묻던 그때처럼 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달짝지근한 체취가 곤두선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흰 목덜미를 가득 문 것 같은 만족감이 손끝을 적셨다.
순진하게 빛나던 검은 눈이 보고 싶었다. 고난스러운 삶을 증명하듯 흉측하게 자라난 손을 입 안에 넣고 싶었다. 한없이 괴롭혀 섧게 울도록 만들고 싶었다. 마른 몸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핥고 매만지고 싶었다.
그리고 때때로,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자신이 있는 곳을 그가 ‘집’으로 여기길 바랐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서 말간 얼굴로 있길 원했다.
이 감정을 그저 성욕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얇은 바늘로 머리를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다. 옷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답을 알고 있음에도 답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은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
처음부터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았던 것은 아니었다. 혁명의 불씨가 사그라지지도 않은 첫날, 차현은 관성적으로나마 검사들에게 어지러운 나라를 정비하라고 명령했다.
‘총장님. 황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때 누군가 그런 질문을 던져 왔다. 검사들이 동조하듯 일제히 차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수백 명의 인간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기대감과, 그가 이끌어 나갈 미래에 대한 희망이 어려 있었다.
이미 차현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을 준비가 된 이들.
과거라면 바라 마지않았을 모습이었다.
‘황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얼굴들을 보며 지독한 피로감에 휩싸였다. 연료가 부족한 차를 몰고 끝나지 않는 도로를 달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집안의 골칫거리로 낙인찍혀 멸시를 당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자신 앞에 놓인 길을 끝없이 달려왔다.
아주 어릴 적엔 사생아가 아니라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자갈밭 위를 걸었다. 조금 자라서는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진흙 바닥 위를 뛰었고, 조금 더 자라서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을 파멸로 밀어 넣기 위해 달렸다.
그러던 중 아비라는 작자와 형이라는 인간이 허무하게 죽어 버렸지.
그럼에도 그는 길을 달려 나가는 짓을 멈추지 못했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어딘가를 향해 가는 일의 연속이었고, 오랜 시간 쉼 없이 달려 온 몸은 멈추는 방법을 잊었다.
아니,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황제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앉으면, 이 길고 긴 길도 끝날 거라 생각했다. 그는 허허벌판에 놓인 이 길의 끝을 보고 싶었다.
‘황제의 힘과 뜻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달려 마침내 여기까지 왔는데, 왜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 걸까.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던 길을 돌아보았다.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군데군데 멈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게다가 길에 남은 발자국은 하나가 아니었다. 익숙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발자취.
자신도 모르게 이 길 위에 연우를 올려놓은 것이다.
새하얀 눈에 찍힌 발자국처럼 깊게 파인 자국들은 지워질 줄을 몰랐다.
사실을 깨달은 순간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도무지 일을 진행할 동력이 생기질 않았다.
‘……혁명단을 도우세요. 나머지는 그쪽의 지휘자가 자세히 알려 줄 겁니다.’
차현은 검사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끝이었다.
그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연우의 흔적을 쫓았다. 그러나 연우의 뒤를 쫓을수록 원인을 알 수 없는 답답함이 그의 심장을 조였다.
연우에 대해서라면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3일이 지나서야 인정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 패착일지 모른다.
수하들은 연우의 행방 대신, 그와 싸운 것으로 추정되는 두 구의 시체에 대해 보고했다.
‘살해당한 두 명을 제외하고 암살자가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핏자국이 이어진 곳을 따라가 봤지만, 흔적이 끊겨 수색이 어려울 것…….’
‘계속 찾아.’
차현은 고요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분명 살아 있을 테니까.’
‘……예.’
그는 진심으로 연우가 살아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암살자가 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연우는 스스로 살아남을 힘이 있는 자였다.
하지만 왜일까. 차현은 그날 이후로 쉽게 잠들지 못했다.
✵
일주일하고 이틀이 지난 오후였다.
아침부터 어둑했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둑, 툭, 떨어진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쳐 부서졌다.
“…….”
차현은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은색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열자 일순간 불씨가 확 타올랐다. 그는 주황빛으로 어른거리는 불을 담배 끝에 붙이고 숨을 들이켰다. 불이 붙자마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깊게 빨아들인 연기가 폐부를 어지럽혔다. 가닥가닥 곤두섰던 신경 위로 덮개가 하나 덮인 기분이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 침대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창문을 향했다. 타닥, 탁. 비는 지루하게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가로 걸어갔다. 창문의 미세한 틈새로 차갑고 눅눅한 비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연우.”
그는 하나의 단어를 입에 담았다. 안개처럼 부옇게 내리는 비를 의미하는 단어이자, 동시에 누군가의 이름이기도 한 단어를.
‘왜 먼저 와 있었어.’
‘연우야.’
그에게 이름을 붙인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고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저 그날 안개 같은 비가 내리고 있기에, 핀치에 몰린 이가 비 맞은 강아지 같아서 그를 ‘연우(煙雨)’라 불렀다.
사실 지어 준 이름이 뭐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날 부르고 말 일회성 이름이라 생각했으니까.
‘연우’라 부를 때마다 움찔움찔 반응하던 모습이 조금만 시선을 덜 끌었더라면,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가 구미를 당기지 않았더라면, 손에 닿는 피부가 따뜻하게 감겨 오지 않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모두 부질없는 가정이다.
그는 창문을 밀어 열었다. 작은 빗방울이 창문턱으로 날려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물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빼냈다. 희뿌연 김이 허공에 흩어졌다.
“…….”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명명하는 유일한 단어였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성의 있게 지을걸.
그는 비가 내리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면 그에게 다른 이름을 붙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그날의 날씨 따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조금 더 그와 어울릴 만한 말을.
아니, 그보다 ‘비가 오니 지붕 아래 있으라’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고작 시종 하나가 죽을 뻔했던 일에는 눈물을 쏟아 내면서, 정작 제 몸은 챙길 줄 모르던 이였다. 그러니 어디선가 또 무덤덤한 얼굴로 비를 맞고 있을지 몰랐다.
치익―
차현은 젖은 창가에 담배 끝을 눌러 껐다. 짙은 회색빛의 연기가 흩어졌다.
그는 창문을 닫지도 않고 방을 빠져나왔다.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옷깃을 적셨다.
차현은 빗방울이 맺힌 구두를 바라보다 불현듯 눈을 들었다. 저벅, 어디선가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들었을 때 그는 여전히 홀로 빗속에 서 있었다.
우스운 촌극이었다. 짧은 헛웃음을 터트린 차현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
잠을 못 자는 날이 길어지자 이명이 들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주태성이 깨어났…….”
“잠깐.”
차현은 보고를 이어 가려는 수하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청력을 마비시킬 듯한 소리가 머리를 꿰뚫었다. 뇌가 팽창해 터질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이마를 짚었다.
“왜 그러십니까?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 됐어.”
수하는 주인의 날카로운 얼굴을 눈에 담았다. 몸에 밴 태생적인 아름다움은 여전했지만, 그 위에 덧씌워진 예민함이 그를 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마저 보고해.”
“예.”
혁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수일이 지났다. 바깥의 세상은 많은 것이 변했다. 오랜 세월 침묵에 휩싸였던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끌벅적해졌고, 화기애애해졌다. 공포에 경직되어 있던 예전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정세 또한 폭풍우 속의 찻잔처럼 시시때때로 변하고 있었지만, 긍정적인 변화였다.
평화로워진 세계에서 제자리에 멈춰 있는 건, 아니, 부정적으로 변화한 것은 오로지 차현뿐이었다.
“주태성이 깨어났습니다.”
“주태성?”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피로에 잠식된 머리로는 오래전 들었던 이름까지 기억해 낼 수 없었다.
“……혁명단의 일원으로 들어갔었던 그 시종 말입니다.”
수하가 힐끗 차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수하는 오래전이라 하나, 자신과 교류가 있었던 아이가 그렇게 된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머리를 다쳤음에도 다행히 인지 능력엔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재활 치료는 한동안 계속 진행해야 할 것 같다는 소견이 있었습니다.”
“…….”
주태성. 그래, 그런 이름을 가진 시종이 있었지.
태성은 연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이었지만, 그 얼굴이 안개 속에 놓인 것처럼 흐릿해 잊고 있었다.
차현은 담배를 하나 빼 손에 쥐었다.
나름, 아니 꽤 중요한 인물까지도 머릿속에서 흐려지고 있었다. 자신이 멀쩡한 상태가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완치가 될 때까지 병원에 둬. 병원을 나간 뒤에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차현은 손에 쥔 담배를 까딱 흔들었다.
연우는 그 시종에게 묘하게 집착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 데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시종을 보기 위해 돌아올 것 같았다.
“예.”
보고를 마친 수하가 훌쩍 방을 떠났다.
차현은 멍하니 바라보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화륵 타오른 불씨가 끄트머리를 새까맣게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열린 창문에 시선을 두었다. 지난한 겨울이 끝나 가고 있었다. 새하얗게 몸체를 드러냈던 나무에서 푸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
봄이 오고 있었다.
✵
오래되어 갈라진 시멘트 틈에도, 아이들이 뛰어노는 공터에도, 철거에 들어간 황궁 터에도,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새싹들이 피어났다.
가장 먼저 봄을 알린 것은 새하얀 목련이었다. 빈 가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목련꽃 아래로 아이들이 와르르 뛰어다녔다.
아이들을 세뇌하고 관리하는 권력 기관은 이제 없었다. 제 또래 아이들과 자유롭게 뛰노는 얼굴들에 웃음기가 만연했다.
“저 녀석들, 저렇게 뛰다 다치려고.”
“아무렴 어때. 저 나이엔 좀 다치면서 크는 거지.”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휴식 시간을 즐기던 중년의 남성들이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손에 쥐고 있던 신문의 헤드라인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 2주 앞으로…… 다섯 명의 후보 중 유력 후보는?’ 이것 봐. 이제 2주가 남았다네. 누구 뽑을지 정했나?”
“큼, 나는 당연히 ‘그 사람’을 뽑을 생각이야.”
단단해진 땅을 딛고 일어난 새싹처럼, 이 나라의 인간들은 강직하게 일어섰다.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한 발 한 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성시현 님 말이지? 보는 눈이 있구만!”
‘성시현’. 그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여자의 이름이었다.
여자는 대외적으로 혁명단의 리더라 알려져 있었다. 또한 무정부 상태로 혼란에 빠질 뻔한 나라에 공헌한 인물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대다수의 사람에게 지지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허, 그리고 이것 보게. 차현 공작에게 명예직이 내려질 거라네.”
신문을 보던 남자가 다음 장에 있는 기사를 읽었다. 차현이 명예 작위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공작은 받아도 되지. 안 그런가? 그 사람이 없었으면 혁명이 실패했을 수도 있는데.”
공작이 재경의 기업과 손잡고 혁명단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그리고 후원이 없었다면 혁명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공작은 대통령 후보 출마 안 하나? 출마했으면 두 명이서 불꽃 튀게 경쟁했을 텐데 말이야.”
“뭐, 딱히 권력에 관심이 없나 보지. 그러니 황제 저리 가라 하는 권력자였는데도 혁명에 가담한 게 아니겠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불현듯 생기로 가득 찬 봄을 눈에 담았다. 자유가 있는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답고 여유로웠다.
“날씨 좋구만.”
그들은 신문을 내려놓고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공기는 쌀쌀했지만 내리쬐는 볕이 따스했다. 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날이었다.
✵
원치 않았던 외출이었다. 차현은 미간을 찡그린 채 청사(廳舍) 안을 걸었다.
전제 군주제가 무너지고 대통령제가 시행된 지금, 차현은 이 나라의 유일한 귀족이었다. 청사에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 나라에 마지막 남은 귀족으로서 명예 작위를 받기 위해서.
국민들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귀족들을 모두 처형하라 아우성쳤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차현에겐 명예직을 내리자는 의견을 냈다.
그는 혁명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사람들에게 그는 유일하게 존경할 만한 귀족이었다.
“하.”
위태로운 모습으로 청사의 복도를 걸어 나가던 차현이 불현듯 머리를 짚고 걸음을 멈췄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이명이 고통스러웠다.
숨을 고르자 차차 뇌를 조여 오던 소음이 잦아들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찡그린 채 복도 끝을 보았다.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볍게 떨어지는 발소리에는 그만의 리듬이 있었다. 차현은 이 걸음걸이의 주인을 알았다.
윤재경.
마침내 복도 끝에서 재경의 얼굴이 보였다. 차현과 눈이 마주친 순간에도 재경은 동요하지 않았다. 마주칠 것을 예상한 듯한 태도였다.
“검사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군.”
그들은 불과 얼마 전의 말다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듯 태연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다. 하지만 묘하게 냉각된 분위기가 둘 사이를 감돌았다.
“황제의 뒤를 봐주던 기업들이 추징금을 내고 있다는데 들으셨습니까? 기업들을 하루아침에 문 닫게 할 순 없으니 추징금을 걷는 모양인데, 그 금액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재경이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비웃듯 픽 웃음을 터트린 재경을 보던 차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그래.”
“다행히 저희 집안은 멀쩡합니다. 혁명에 지원했던 기업 아닙니까.”
재경의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조소 같기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기도 한 뱀의 미소.
차현은 그런 재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작 이런 시답잖은 소릴 하려고 자신에게 알은척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한 대로, 오래 지나지 않아 재경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꾸밈없는 민낯으로 마주한 얼굴이 낯설었다.
“……당신이 그린 이상을 좇아 아버지를 설득하고, 혁명을 지원한 일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혁명이 성공한 이상,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된 셈이니까요. 모래성 위에 지어진 권력에 빌붙어 봤자 언젠가 함께 무너질 거라 생각했고, 맞았죠.”
재경은 말을 마치고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공작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전면에 나선다면 저는 다시 당신의 편에 설 겁니다.”
재경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차현이 ‘그러겠노라’ 대답하면, 재경은 곧장 돌파구를 만들어 올 것이다. 모든 통계를 뒤엎고, 차현이 통령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돌파구를.
“그뿐만이 아닙니다. 당신이 정계에 뜻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포기한 검사들의 마음까지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아니, 굳이 제가 나설 필요도 없이 당신이 출마하는 순간 검사들은 당신에게로 돌아올 겁니다.”
“윤재경.”
자신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재경이 말을 멈췄다.
“너는 감이 좋고 눈치가 빠르지.”
차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경을 마주하며 조금 피로해졌다.
“이미 너희 아버지가 성시현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던데. 차기 통령이 될 후보를 두고 권력을 놓은 인간에게 미련 갖는 짓 따위 하지 마. 오래 함께 일했던 정을 보아 하는 충고다.”
그 말을 끝으로 차현은 재경을 지나쳐 걸었다. 재경은 등 뒤로 멀어지려는 차현에게 물었다.
“……아예 돌아오지 않으실 겁니까?”
차현은 텅 빈 복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작 몇 발자국만 디디면 도착할 수 있는 끝이 아득히 멀어 보였다.
“아마도.”
잠시 멈췄던 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재경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차현은 그린 것처럼 완벽한 이상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나 명석한 두뇌, 새까맣게 타오르는 욕망까지 모든 게 재경이 바라는 그 자체였다. 그래서 어린애처럼 그를 자신의 영웅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런 영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영웅도 결국 인간인 것을.
재경은 마침내 꿈에서 깨어난 것을 느꼈다.
✵
타닥, 탁.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생명들이 깨어나 푸릇푸릇해진 산이 안개 같은 부슬비에 젖어 들기 시작했다.
고요한 얼굴로 잠들어 있던 연우가 눈을 뜬 것은 그때였다.
그는 멍한 얼굴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오랫동안 활동을 쉬었던지라 뇌가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
낡은 판자를 덧대 만든 천장이 한참 만에 제대로 인식되었다. 처음 보는 천장이었다. 연우의 까만 눈에 희미한 의문이 서렸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제 몸을 누인 딱딱한 나무 침대를 더듬었다.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습한 공기가 폐부로 빨려 들어왔다.
연우는 의지대로 움직여 주질 않는 몸에 억지로 힘을 실어 뒤척였다.
“더 누워 있어.”
그때 누군가 연우의 행동을 제지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목소리.
연우는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눈을 돌렸다.
✵
“……황제가 죽어요?”
태성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혁명단의 노인, 아니, 한때 김 영감이라 불렸던 이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혁명이 성공했으니 죽었지.”
“황제가 정말로…….”
태성은 믿기지 않는지 계속 입을 달싹였다. 그도 그럴 것이, 태성의 시간은 안기부장이 죽기 이전 시점에 멈춰 있었다. 김 영감이 한 말이 아니었더라면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아마 허무맹랑한 허풍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멀어진 현실 감각을 일깨워 준 것은 침대 아래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예성이었다. 자그마한 손이 태성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형, 형. 이제 밖에 나가도 안 위험해. 그러니까 형 몸 나으면 다 같이 놀러 가자!”
잠들어 있던 시간 동안 예성의 키는 부쩍 자라 있었다. 게다가 그새 조금 철도 든 것 같았다. 눈가가 불긋불긋한데도 울지 않으려 힘을 주는 게 여실히 보였다.
“그래. 네 동생 말이 맞다.”
김 영감이 예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태성은 봄볕 아래 펼쳐진 온화한 풍경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래. 다 같이 놀러 가자.”
“꼭이야.”
예성이 헤헤 웃었다. 그러자 태성은 예성의 머리 위에 자신의 이마를 콩 찧으며 ‘당연하지’ 하고 중얼거렸다.
태성은 아프다고 꿍얼대는 예성을 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현듯 김 영감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 병원비를 공작님이 다 내셨다고…….”
“아, 그게 말이다.”
김 영감이 자신의 턱을 쓸며 말을 이었다.
“혹시 공작의 정부, 기억하느냐? 눈이 새까맣고 피부는 하얀…….”
“그 사람이 왜요? 혹시 예성이한테 무슨 짓 했어요?”
태성이 날카로운 어조로 김 영감의 말을 끊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김 영감과 예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 무슨 말이야?”
“예성아, 너 잠깐 나가 있어.”
“나? 왜?”
“나가라면 빨리 나가.”
깨어난 후 처음 보이는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태성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은 김 영감이 서둘러 예성의 시선을 돌렸다.
“얘야, 잠깐 나갔다 들어와라. 이거 가지고 이 앞 슈퍼에서 과자 사 먹고 와.”
“네에…….”
예성은 김 영감이 내민 돈을 받고 시무룩한 얼굴로 병실을 나섰다.
태성은 예성이 병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입을 앙다물었다가, 예성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뭘 했는데요.”
“진정해 봐. 천천히 말해 줄 테니.”
그제야 태성이 ‘아차’ 했다.
“……죄송해요.”
“그자와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구나.”
허허 웃은 김 영감은 마치 그때의 일을 본 것처럼 이야기했다. 짧게 떨리던 태성의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네. 조금……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그것 참 이상한 일이구나. 피 흘리며 쓰러진 널 업고 혁명단에 쳐들어왔던 게 바로 그자인데.”
“네?”
태성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해가 서쪽에서 떴다는 말을 듣기라도 한 반응이었다.
김 영감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널 업고 온 그자를 봤을 때, 얼굴이 아주 창백해서 둘 다 죽는 줄 알았지 뭐냐.”
“그 사람이 왜…….”
태성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기억 속의 남자는 살을 에는 겨울바람처럼 서늘한 얼굴로 태성을 마주했었다. 그 무감정한 표정은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예성에게 손댈 것이라 협박하던 목소리가 이렇게 선명한데.
“그리고 내 계속 비밀로 한 게 있는데……. 너에겐 말을 해 줘야 할 것 같구나.”
김 영감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가 쓰러지고 나서 군인들과 깡패들의 기세가 한풀 꺾이게 된 일이 있었다. 그들을 몰래 처단한 사람이 있었거든. 그 사람이 누구인 줄 아느냐?”
“어…….”
태성의 입이 작게 달싹거렸다. 짐작 가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 왜?
“그래. 그자다.”
태성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왜…….”
“나야 알 수 없지. 자세히 묻지 않았거든.”
김 영감은 군인을 쓰러트렸던 개와 마주친 날을 떠올렸다. 어둠 속에 잠긴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리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했다.
“……이젠 알 수 없기도 하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태성이 다급하게 물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노인이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혁명이 일어난 밤, 그자도 사라졌더구나. 공작이 그자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긴 해. 하지만 아직 나타나질 않았어.”
“주, 죽은 건 아니죠?”
‘안 좋은 일이 있다’ 말한 것이 조금 전인데, 태성은 벌써부터 그가 죽었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 영감은 곱아 든 태성의 손에 주름진 손을 올렸다.
“강한 자가 아니냐. 나는 그자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 믿는다.”
손등 위를 감싸는 주름진 손이 따뜻했다. 태성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미웠는데, 다시는 형이라 부르지 않으리라 결심했는데. 막상 그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니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맞아요.”
태성은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살아 있을 거예요.”
✵
차현은 이따금 발소리를 들었다.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조심스럽고, 공기의 움직임처럼 미세한 걸음 소리.
그는 그렇게 걷는 사람을 하나 알았다.
하얀 얼굴에 순진한 눈을 가진 남자.
연우.
그는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문을 열었다. 닫힌 문을 밀어 열면, 그 자리에 거짓말처럼 연우가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눈이 마주치면 그저 말갛게 뜬 눈을 가만히 깜빡이겠지. 그러고 낮은 목소리로 ‘돌아왔습니다’ 무심하게 내뱉을 것이다.
저가 무슨 잘못을 한지도 모르고.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신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그래 주기만 한다면 그를 끌어안고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텐데.
어떤 문을 열어도 연우가 없었다. 발소리인 줄 알았던 것은 창문을 스치는 바람 소리였고, 문 앞에 멈춰 선 기척은 별 볼 일 없는 이명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문을 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짓거리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연우가 사라졌다는 것을,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달칵.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었고, 뜻밖의 사람과 마주했다.
“아.”
여자, 성시현은 노크하기도 전에 열린 문을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차현은 통령이 된 여자를 무감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방문은 받지 않겠다 말했을 텐데.”
문 앞의 사람이 연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머리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문을 열기 직전까지 들끓던 감정이 일순간 거품처럼 꺼졌다. 희열도, 절망도 없었다. 불이 꺼지듯, 인간으로서 느껴야 마땅한 감정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기분이었다.
“할 말 없으면 돌아가.”
차현은 곧장 문을 닫고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닫히는 문 사이로 불쑥 딱딱한 손이 끼어들었다.
“급하게 굴지 말고 제 얘기 좀 들어 보시죠, 공작……!”
여자는 눈앞에서 닫힐 뻔한 문을 붙잡고 버텼다. 차현은 문틈 새로 보이는 호전적인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힘을 주어 닫자면 못 할 게 없었지만, 그것마저 귀찮게 느껴졌다.
“할 이야기가 뭐야.”
“다른 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감사의 인사를 하러 왔어요.”
차현이 잡았던 문고리를 놓자, 여자 또한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녀는 힘을 주느라 뻑뻑해졌던 손을 허공에 털었다.
“나는 당신이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우리를 도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아서.”
“그럴 리가.”
여자의 말을 끊고 차현이 말을 이었다.
“내가 멀쩡했다면 통령의 자리엔 네가 아니라 내가 있었을 텐데, 감사 인사를 왜 하는 거지?”
그는 아침의 날씨를 말하듯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모든 게 귀찮고 피곤했다.
“말 끝났으면 이만 가. 피곤하군.”
달칵. 이번엔 닫히는 문을 막는 손길이 없었다.
차현은 침묵에 잠긴 방 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피곤한 날이면 작은 몸을 품에 안고 하루 종일 잠들고 싶었다.
정작 그가 곁에 있을 땐 단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
차현은 문득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습관적으로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가, 불현듯 멈칫했다.
그는 옷장 문에 달린 장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어제 이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이곳에 배어 있던 냄새가 어느덧 희미해졌음을 깨달았다. 너무 많이 욕심껏 들여다보았기 때문일까. 손잡이를 향해 뻗었던 손끝이 곱아 들었다.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 그는 창가 가까이로 걸어갔다.
“하.”
그곳에 다다르는 순간 창문턱을 짚고 머리를 숙였다.
몸을 힘들여 움직인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빴다. 뇌를 꿰뚫을 것 같은 이명이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연우가 사라진 지 두 달째, 그 달의 절반이 지나고 있었다.
✵
세상의 시간은 끊임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시간의 톱니바퀴 위를 달리던 사람들 중 누군가 한 명이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새파란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창문 앞에 선 남자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내려앉았다. 내리깔린 눈꺼풀 위에 노을빛이 어른거렸다.
“…….”
남자는 곧은 손끝으로 창문턱을 쓸었다. 손끝이 딱딱한 나무의 굴곡을 타고 흘렀다.
차현은 고요한 눈빛으로, 아무런 온기도 남아 있지 않은 자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도 그자를 찾을 수 없는 건 최소 두 가지 가능성으로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나라를 떠났거나, 아니면 어디 깊은 산속에서 죽었다고…….’
오늘 낮, 마침내 죽음이란 단어를 입에 올린 수하는 좀처럼 차현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큰 죄를 지은 죄인 같았다.
‘헛소리.’
차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은 수하는 곧장 머리를 숙여 보였다.
전혀 진전 없는 수색이었지만 이어 가기로 결정했다. 차현이 그렇게 하겠노라 결정한 이상, 그 누구도 번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쩌면’으로 시작하는 가정을 떠올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쩌면 수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연우는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돌아올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고. 이렇게까지 자취를 찾기 어려운 건 정말로,
그가 죽었기 때문일까.
차현은 떨리는 시선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그가 짧은 한숨을 토해 냈다.
“……죽었을 리가.”
갈라진 목소리가 부서지는 노을빛과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는 산등성이를 붉게 물들이는 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땅과 하늘 사이를 가로지르는 지평선이 무너지는 시간. 모든 것의 인영이 흐릿해지고 그림자와 사람을 분간할 수 없는 때.
죽음과 삶의 경계마저 무너트릴 것처럼 새빨간 노을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저벅.
그 순간, 그는 소리를 들었다.
저벅.
숨바꼭질을 하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조심스럽고, 공기의 움직임처럼 미세한 걸음 소리.
저벅.
차현은 몸을 돌렸다.
문 앞에서 멈춰 선 소리가 잠시 멈칫하더니 곧 문을 밀어 열었다.
“…….”
“…….”
문 앞에 선 남자는 키가 작았다. 어디서 무얼 했던 건지 옷은 낡았고, 손에는 온갖 흉터가 가득해 흉측했다.
게다가 머리는 어떠한가. 관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자라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옷 위로 드러난 피부 역시 거칠어 보였다.
그러나 하나는 여전했다.
“죄송합니다.”
새까만 눈동자가 바닥을 향해 내리깔렸다. 말간 얼굴이 혼날 것을 직감한 어린 짐승 같았다.
차현은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목소리보다 발이, 손끝이, 몸이 그를 향해 나아갔다.
꾀죄죄한 남자를 품에 그러안자 뜨끈한 온기가 목구멍 안을 가득 채웠다. 환희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이 둑이 터지듯 새어 나왔다.
“연우야.”
그는 오랫동안 후회했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품에 안긴 온기가 대답 대신 그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