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장 (15/19)

16장

황제는 이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시시때때로 야릇한 시선으로 개의 몸을 훑어보았다. 만약 개의 완력이 조금만 약했더라면 진즉 그 몸을 깔아뭉개고 욕심을 채웠을 것이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개는 불쾌한 시선과 접촉을 참아 내며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랐다. 밤이 되면 황제는 잠이 들고, 그럼 잠시나마 은밀한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밤에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차현을 상상할 수 있었다.

개는 눈을 감고 첫 만남을 떠올렸다. 독에 중독된 몸은 아주 볼품없었을 것이다. 명색이 암살자라는 자가 형편없이 당했으니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공작은 강한 힘을 가졌으니, 강한 이를 좋아할 것만 같았다.

그때 만약 황제의 명령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습격자를 죽여 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조금 더 강해 보였을 테니, 공작의 호감을 사기도 쉽지 않았을까?

“…….”

무릎에 뺨을 붙이고 있던 개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빛을 띠는 검은 눈이 창문을 향했다.

방 안에 은은히 달빛이 스며들었다. 마치 바깥으로 나오라며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혼자 밖을 나갔던 날이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검은 눈이 미끄러지듯 황제의 잠든 얼굴로 향했다. 개를 등 뒤에 둔 황제는 아무 걱정이 없는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고요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

흔들어 깨우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개는 다시금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을 보았다.

잠깐, 아주 잠깐만 나갔다 오는 건 괜찮지 않을까.

고민은 짧았다. 개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기척 없는 걸음이 빠르게 창을 향해 움직였다.

창문을 밀어 열자 환한 달빛이 밀어닥쳤다. 개의 검은 눈에 노란 달빛이 가득 차올랐다.

빛을 받은 그림자가 일순 길어진 순간.

개의 신형이 방 안에서 사라졌다.

창문이 닫힌 방 안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 미간을 찌푸린 황제가 잠시 몸을 뒤척였지만, 그는 무엇이 사라졌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깊은 잠에만 빠져 있었다.

“하아.”

폐부 깊이 고였던 숨을 토해 냈다. 부연 김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개는 살을 엘 것처럼 차가운 밤공기를 헤치고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높은 담 앞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단단한 돌을 쌓고, 또 쌓아 만든 벽.

개의 시선이 울퉁불퉁한 벽을 타고 올라 하늘로 향했다.

황궁의 담은 공작저의 것보다 낮았다. 개는 손을 뻗어 딱딱한 돌을 만졌다.

이미 수십 번 공작저의 담을 뛰어넘은 경험이 있는 개에게 이 정도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그러니 넘고자 하면 넘지 못할 것도 없는데.

감히 이 벽을 넘을 수 있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황궁의 담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 같았다.

개의 표정에 미세한 금이 갔다. 체념이 배어난 손끝이 천천히 구부러들었다.

“……!”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담 너머에서 느껴졌다. 낯설지 않은 기척. 개는 뒷걸음질 쳤다.

까마귀처럼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달빛을 등지고 담을 넘었다.

개는 훌쩍 담을 넘은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제복을 벗은 남자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쉿.”

차현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개의 입술을 막았다. 개의 짧은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그는 멍하니 선 개의 등이 담벼락에 닿도록 밀어붙였다. 섬뜩한 한기가 등허리를 타고 흘렀다. 반사적으로 몸이 작게 떨렸다.

개는 달빛 아래 선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얼굴 한번 보기 힘들군.”

자신의 얼굴을 가린 남자의 손도 차갑긴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왜 얼굴이 화끈거리며 뜨거운 걸까. 그와 닿아 있는 신체 부위마다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황제와는…….”

그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작게 읊조리는 말소리는 멀었고, 마주친 눈동자는 가까웠다.

개를 바깥으로 이끈 달빛보다 강렬한 인력이 두 사람을 이끌었다.

“젠장.”

초조함을 닮은 조급함이 입술을 마르게 만들었다.

차현은 개의 입술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검은 눈동자에 미미한 파동이 일었다.

“왜…….”

뺨 위에 허전한 감각이 맴돌았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달게 느껴지는 숨결이 코끝에 닿았다. 남자의 긴 속눈썹이 내리감기고 있었다.

“읏.”

입술이 닿았다. 개는 질끈 눈을 감았다. 말캉한 표피가 부드러운 감촉을 남겼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개의 양 어깨를 움켜쥐었다. 갈급한 듯, 차갑게 식은 피부 위에 허겁지겁 닿은 온기가 화상 자국을 남길 것 같았다.

뙤약볕 아래서 아주 오랜 시간을 걸어 만난 물 같았다.

개는 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움켜쥐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뜨거운 혀가 파고들었다. 두꺼운 혀가 좁은 입 안에 가득 차자 숨 쉬기가 어려워졌다. 귓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목구멍을 핥을 것처럼 깊이 들어왔다가 입 천장을 건드리는 감각에 입 안이 녹을 것 같았다. 혀가 얽히고 비벼질 때마다 타액이 입술을 적셨다.

“우, 으응…….”

부드러운 머리칼이 버석한 벽에 닿아 헝클어졌다. 차현은 개의 턱을 잡고 틈 하나 없이 입술을 겹쳤다.

밭게 뱉어 낸 신음이 이와 혀에 뭉개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공작의 뺨에 닿아 있던 손은 힘이 빠져 그의 어깨로 내려온 지 오래였다.

개는 어지러운 머리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차현은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자신이 느끼는 감각을 공작에게도 알려 주고 싶었다. 개는 혀를 움직여 공작의 혀를 감아 보려 했다.

“하.”

그 순간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개는 허전하게 빈 입을 작게 벌렸다.

거칠게 부딪쳤던 입술이 붉었다. 입 안으로 보이는 작은 혀까지.

차현의 눈에 이성의 그림자가 물러서고 있었다.

그는 벽에 밀어붙인 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지분거리는 뜨거운 입술의 감촉에 솜털이 오소소 섰다.

차가운 손이 옷자락 안쪽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배꼽 위를 매만지는 감촉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흐읏…….”

그러나 차현의 손은 더 이상 진입하지 못했다.

목덜미에 닿은 입술에서 짧은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씨발.”

옷 사이에 들어왔던 손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커다란 그림자에 가려진 개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목덜미에 닿아 있던 입술이 오싹한 촉감을 남기고 떨어졌다.

“데리러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검은 눈이 커다래졌다.

개의 귓가에 고개를 숙였던 남자가 천천히 물러섰다.

“연우야.”

달빛 아래, 감정을 억누른 검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개는 황궁 밖으로 사라지려는 이를 붙잡고 싶다고 생각했다.

날이 밝으면 어차피 보내야 하는 것을 앎에도.

불면은 만성적이었다.

황제는 이 너른 황궁 안에서 단 한 번을 편히 잔 적 없었다. 깊은 잠에 빠지는 순간 영영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밑도 끝도 없는 죽음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자신의 어미가 그러했고, 방계의 누군가가, 또 자신의 정적이었던 누군가가 그렇게 죽어 버리지 않았던가.

짹짹―

하지만 그는 이사이 평범한 사람처럼 자고 깨어나는 삶을 반복하고 있었다. 새가 우짖는 소리에 깨어나는 아침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것을, 과거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잠을 선물해 준 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숙면을 취한 뒤에 보는 개의 얼굴은, 쓰디쓴 술을 들이켠 뒤 먹는 달큼한 안주 같았다.

“…….”

병풍 옆에 앉은 개는 언제나처럼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개의 얼굴에 미세하지만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연지라도 바른 것이냐?”

개는 잔뜩 찌푸린 황제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황제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구는 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아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밤새 자신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텐데, 입술이 저리 붉어질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사내놈이 입술을 벌겋게 해서는…….”

황제는 찝찝한 의구심을 뒤로한 채 개를 타박했다. 다만 눈길만큼은 여전히 붉어진 개의 입술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회색 박스 같은 공장 뒤편. 낡은 유니폼을 입은 직원 둘이 쉰내가 올라오는 도시락을 급히 입에 넣었다.

누렇게 변한 밥 위에 김치를 올려 허겁지겁 먹는 얼굴들이 고단했다. 한겨울,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까닭에 그들의 뺨은 벌겋게 얼어 있었다.

“켁, 켁.”

“야야, 물 마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여자가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시작하자, 옆에 앉아 있던 짧은 머리의 여자가 물을 내밀었다. 이미 몇 번이나 재사용한 페트병의 뚜껑이 노랗게 바래져 있었다.

머리를 묶은 여자는 차갑게 얼어붙은 물을 목구멍 안에 쏟아부었다. 눈과 코를 따끔하게 만들던 매운 기가 간신히 내려갔다.

“고마워.”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쓸어내린 여자가 물통을 내밀었다. 짧은 머리의 여자가 받아 든 물통을 벤치 위에 올려놓았다.

부아앙―

그 순간 매끈한 세단이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차가 지나간 도로로, 그 너머에 있는 빌딩 숲을 향해 움직였다.

고급 승용차들이 드나드는 높은 빌딩 숲. 그린 듯 아름다운 도시.

“…….”

“…….”

급히 도시락을 먹던 이들의 입이 꾹 다물렸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따로 점심시간이 없었다. 이들이 일하는 공장만이 아니라, 모든 공장들이 그러했다. 공장주에게 사원이란, 인간이 아니라 공장을 돌아가게 만드는 작은 부품에 불과했으니까.

그에 반해 저 도시에서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들었다. 그들은 일할 필요가 없기에 점심을 거르지 않고, 매일같이 취미를 즐기며, 이 공장에서 만든 사치품들을 스스럼없이 사들인다 했다.

“난 그만 먹을래.”

무릎 위에 놓인 쉰 도시락이 형편없이 느껴졌다. 짧은 머리의 여자가 김치 국물로 엉망이 된 도시락 뚜껑을 덮었다.

“잠깐만.”

그러나 공장으로 돌아가려는 이를 다른 이가 붙잡았다.

“얘기 좀 더 하다 가자. 들어가면 밤새 부품이나 만지작거려야 하는데…….”

우뚝 멈춰 섰던 여자가 다시 벤치에 앉았다.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지, 공장에 돌아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동료의 말처럼 좀 더 시간을 축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머리를 묶은 여자가 입을 열자, 단발머리의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귀 좀 대 봐.”

멀리 떨어져 있던 입술과 귀가 가까워졌다.

“내 친구의 친구가 혁명단에 아는 사람이 있대.”

짧은 머리 여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혁명단. 요 근래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단체의 이름이었다.

“진짜로?”

“응. 그렇다니까.”

고개를 끄덕인 여자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건너들은 건데…… 혁명단이 황가를 뒤집어엎을 거래.”

“뭐? 말도 안 돼! 그걸 어떻게 해!”

큰 목소리가 공터를 울리자 여자가 자신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쉿, 쉿! 완전 비밀이라고 했단 말이야.”

“……너무 말이 안 되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가 콧잔등을 가볍게 찌푸렸다가, 폈다.

“그 사람들은 계속 말이 안 되는 일을 해 왔잖아.”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혁명단은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정의의 사도처럼 해결해 왔다. 황궁에 폭탄을 설치했던 일부터, 공포의 대상이었던 안기부장의 목숨을 앗아 간 일, 그리고 이사이 수많은 군인들과 깡패들을 죽인 일까지.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이뤄 낸 혁명단이 지지를 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의 핏줄이 대대손손 황위에 오르는 나라가 아니라, 우리들이 우리를 대표할 사람을 뽑는 나라를 만들 거래. 대표로 뽑은 사람이 마음에 안 들면 마음껏 욕할 수도 있고, 더 이상 견디기 힘들면 내쫓을 수도 있는 세상……. 너무 말이 안 되나?”

“응.”

“그치?”

머리를 묶은 여자가 얼쯤하게 뺨을 긁자, 단발머리의 여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끝도 모르게 높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그래도 그런 세상이 오면 좋겠네.”

여자는 손을 하늘 위로 뻗었다. 쫙 펴진 다섯 손가락이 태양과 높은 빌딩 숲을 가렸다.

그 시각, 검찰청 내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가 국무는 돌보지 않고, 어디선가 데려온 애첩에 정신이 팔렸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황궁 밖의 세상은 이례가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지도부를 잃고 맥을 추지 못하는 군인들이 얼굴 없는 살인마에게 연쇄적으로 목숨을 잃고 있었고, 몸을 사리는 귀족들을 조롱하는 유사 언론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유사 언론의 선전지를 받아 본 국민들은 귀족의 추문을 비웃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밥상 위에서, 추문 속 귀족 흉내를 내며 그들을 희화화하기 시작했다.

희화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건 공포로 다스려야 하는 땅바닥의 인간들이, 하늘의 인간도 별것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결코 오르지 못할 줄 알았던 벽이 사실 문턱만큼 낮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경로이기도 했다.

국민들이 더 많은 것을 알기 전에, 더 많은 것을 깨닫기 전에 폭력으로 다스려야 했다. 그들은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자극적인 연예 뉴스나 스포츠 뉴스를 보며 짐승처럼 욕을 뱉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시급한 상황에 결단을 내려야 할 황제가 애첩이나 끼고돌다니? 게다가 혁명단이란 테러 단체가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는데 말이다.

“젠장, 바깥에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 줄 알아? 혁명단이 황가를 뒤집어엎는단다. 하, 누가 테러 단체 아니랄까 봐 목표부터 ‘나 역적이오’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옥상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던 검사 하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불평했다.

“씨발, 우리만 답답해하면 뭐 하냐. 황제는 좆도 관심 없는데.”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검사가 꽁초를 난간에 비벼 끄며 대답했다.

“애첩한테 눈 돌아서 국고에 있는 사치품까지 갖다 바치는 게 제정신이냐? 원래부터 제정신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신랄한 말들이 담배 끄트머리에서 떨어진 재와 함께 흩날렸다.

평소라면 황제의 눈이 자신들을 향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쯤에서 입을 다물었을 텐데.

“이 나라는 차라리 한번 망하는 게 나을지 몰라.”

내뱉는 말에 거리낌이 없었다.

바닥의 인간들이 귀족을 희화화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들도 황제가 두렵지 않았다. 애첩에게 빠져 황궁에 처박힌 이빨 빠진 호랑이가 무어가 무섭단 말인가.

“……그리고 이건 우리끼리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뭐가.”

불 꺼진 꽁초를 난간 너머로 던진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만약에 황가가 무너지고 혁명단이 말하는 나라가 세워지면, 그 자리에 검찰총장님이 앉는 거야. 그럼 괜찮을 것 같지 않아?”

“뭐?”

“총장님이라면 믿을 수 있잖아.”

어안이 벙벙한 듯 눈을 깜빡이던 검사가 입을 작게 달싹였다.

“그건…… 그렇긴 하다만.”

검찰청의 인간들은 그들이 섬겨야 할 황제보다 차현을 신뢰했다. 먼 거리에서 자신을 굽어보는 신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보살피는 부모를 더 반기는 건 동물의 본성이지 않은가. 하물며 집에서 기르는 개조차도 그러한데, 인간이라고 다르겠는가?

“난 이 나라에 질렸어.”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인 남자가 꽁초를 툭 튕겼다.

“내 한 몸이랑 가족만 건사할 수 있으면 어찌 되든 상관없잖아. 황제든 나발이든 충성심은 애당초 없었는데.”

희뿌연 궤적을 남기며 꽁초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검찰청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황궁을 바라보는 검사들의 얼굴이 싸늘했다.

온 세상이 황권의 불합리를 깨닫고 있었다. 궁인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고, 황제의 가장 충직할 부하인 비서실장조차 불안을 느꼈다.

황궁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은 머리보다 피부로 먼저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를 향하든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멸하듯, 혹은 우습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들.

하지만 다가올 재앙을 눈치챈 이들과 다르게, 황제는 여전히 침전에 박혀 바깥의 세상을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자신의 앞에 앉은 개를 향해 있을 뿐이었다.

“갖고 싶은 게 있느냐.”

“없습니다.”

신의 다시없을 피조물을 바라보는 인간처럼, 황제는 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개는 절세미인도 아니고 대단한 미남도 아닌, 그럭저럭 봐 줄 만한 외모를 가진 남자임에도 말이다.

“그럼 하고 싶은 것은.”

“나가고 싶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망설임 없이 터져 나왔다. 개는 무감한 눈동자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황제와의 대화는 항상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는 매일 개를 같은 자리에 앉혀 놓고 같은 질문을 했다. 무엇이 갖고 싶으냐, 무엇이 하고 싶으냐.

그럴 때마다 개는 항상 똑같이 대답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허어, 그놈의 바깥이 무어가 그리 좋다고. 춥지도 않느냐?”

황제의 대답도 늘 같았다. 그는 개를 결코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았다.

“…….”

개는 입을 다물었다. 이러나저러나 같은 결론이 난다면, 괜한 입씨름을 해 기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바깥의 무엇이 그리 궁금하기에 바깥 바깥 노래를 부르느냐.”

황제는 개가 입을 다물자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내 친히 알려 줄 터이니.”

바닥을 향해 있던 검은 눈이 앞을 보았다.

궁금한 게 있다면 알려 주겠다. 달큼한 제의였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공작은.”

고작 차현에 대해 말하는 것뿐인데 입이 말라붙었다. 이유를 알 수 없게 서러워졌다.

“공작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차현이 궁궐의 담을 뛰어넘어 온 날 이후, 개는 밤을 틈타 몇 번 더 그곳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차현의 기척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서늘한 달빛만이 빈자리를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개는 몇 번을 허탕 친 후에야 그가 이곳에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뭐?”

황제의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을 가른 것은 그때였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개의 시선이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혈색을 되찾기 시작한 황제의 얼굴이 요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공작?”

개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눈을 크게 떴다.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한 황제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공작이 무얼 하는지 네가 왜 궁금해하느냐.”

“저는…….”

입을 달싹였지만 나오는 말은 없었다. 아니, 말하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공작의 이야기가 나온 순간부터 황제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갑작스럽게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긴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쳤다.

“공작에게 관심이라도 생긴 거냐?”

검은 눈이 천천히 깜빡거렸다. 황제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멍한 얼굴.

“왜 대답을 못 하느냐!”

하지만 분기에 가득 찬 황제는 개의 표정을 읽어 내지 못했다. 아니, 읽을 생각이 없었다.

꽉 말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용암처럼 들끓는 가슴 안쪽에서 습관적인 의심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저 눈을 깜빡일 뿐인 개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확신했다.

“당황한 얼굴을 보아하니 맞나 보구나. 응? 언제냐, 공작이 독대를 청한다며 내 침전에 찾아왔을 때냐? 그때 관심이 생긴 게야?”

벌떡 일어섰던 황제가 허리를 굽혀 개의 팔을 움켜쥐었다. 피부를 쥐어짜듯 잡은 마른 손등 위에 뼈대가 불거졌다. 개의 미간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말하래도!”

날카로운 손끝이 아귀처럼 팔뚝을 물어뜯었다. 황제의 흉측하게 구겨진 얼굴을 거울처럼 담아내는 검은 눈에 날카로운 감정이 서렸다.

개는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아니라고 말해서, 황제가 입을 다물도록 하고 싶었다.

“…….”

그러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오는 것은 숨소리뿐이었다.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아니’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왜?

개는 입을 벙긋거렸다. 당장 눈앞에 놓인 황제의 분노도 까맣게 멀어질 만큼의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봇물 터지듯 밀려든 생각이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은 왜 황궁을 떠나 공작저로 돌아가고 싶다 생각했던가. 왜 다시 한번 차현이 황궁 담을 넘어오길 기다렸던가. 어째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길 바랐던가.

답은 하나였다.

자신이 공작에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

개가 대답을 뱉지 못하자 황제의 얼굴이 와작 일그러졌다. 헛웃음을 터트린 황제의 손에서 스륵 힘이 풀렸다.

황제는 개의 팔을 놓고 비틀거리듯 장식장 앞으로 걸어갔다. 개는 그런 황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개장 앞에서 멈춰 선 황제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도자기를 내려다보았다. 학의 모습이 새겨진 푸른 도자기가 황제의 눈동자에 비쳤다.

그는 손을 뻗어 도자기를 집더니, 곧장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와장창!

바닥에 내던져진 도자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으스러진 도자기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와장창, 와장창!

그것을 시작으로 황제는 미친 사람처럼 장식품들을 바닥에 내던지기 시작했다. 화분이 깨지며 거무죽죽한 흙과 자갈이 바닥을 더럽혔다. 곱게 길러진 난이 뿌리를 드러낸 채 사기 조각과 뒤엉켰다.

“감히, 감히!”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 황제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깨부쉈다. 그러나 부수고, 또 부숴도 머리를 지글지글 끓어오르게 만드는 분기는 가시질 않았다. 악을 질러도 마찬가지였다.

“폐하, 무슨 일이……!”

“들어오지 마!”

황제는 고함을 지르고는 핏발 선 눈으로 개를 노려보았다.

“침전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이면 누구든 죽여 버리겠다.”

이 분기가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아마, 화의 원인인 개를 죽이지 못해서일 것이다.

황제는 이를 악문 채 개를 쏘아보았다. 서슬 퍼런 파편들이 바닥을 나뒹구는 와중에도, 개는 그 사이에 고고히 앉아 있었다.

개는 황제를 바라보고 있지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저 검은 눈은 표면적으로 황제를 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 너머의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이……!”

황제는 개의 머리칼을 휘어잡고, 흰 뺨이 붉어지도록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저 검은 눈이 자신만을 향하고, 자신을 두려워하길 바랐다. 조금만 다가가도 무서워하며 반응했으면.

자신의 숨소리 하나, 발소리 하나에 반응할 개를 떠올리니 입 안이 달게 느껴졌다.

황제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당장이라도 실행에 옮기고 싶어 손이 떨렸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정하게 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랜 시간 핥아야 모두 맛볼 수 있는 사탕처럼 공을 들이고 싶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스스로 황제의 침전에서 ‘나가지 않겠다’ 말하기를, 입술만 갖다 대도 경기를 일으키는 지금과 다르게 스스로 다리를 벌리기를.

“빌어먹을!”

황제는 결국 개에게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벼루를 바닥에 내던지며 욕지거리를 내질렀다. 침전은 폭격을 맞은 것마냥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제는 씩씩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짚었다. 얇은 바늘 수십 개가 머리를 찌르는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다. 이 화를 어딘가에 풀어야만 했다.

황제의 벌건 눈동자가 가만히 앉은 개를 향해 돌아섰다.

“……그래, 내가 그놈을 너무 오랜 시간 곁에 두긴 했지.”

대상을 잃은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옮겨 갔다.

“감사원장도 의심하라 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문제는 개가 아니라 공작에게 있었던 것이다. 왜 그날 자신을 독대하겠다며 찾아온 것인가. 그것부터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건방진 새끼. 감히 황제의 것을 넘봐?”

황제는 이를 악물었다.

물꼬가 트이자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던 모든 것들이 갑작스럽게 수상쩍게 여겨졌다.

“조사가 늦어지는 것도 그자의 술수가 미친 게…….”

개가 황궁 밖에서 머물렀던 집을 찾아 박살을 내려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있는 집들’을 샅샅이 뒤져 봐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고, 조사의 기간만 길어지고 있었다.

황제는 불안해하는 애처럼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조사를 더욱 신속하게 진행하라고 명령해야겠다는 강박이 들었다.

그리고 공작 차현에 대한 뒷조사도 함께.

“…….”

개가 충격에서 벗어난 것은 황제가 고요해진 직후였다. 개는 멍한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손톱을 깨물던 황제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난장판이 된 방에 스스럼없이 발을 뻗었다.

그의 발바닥 아래로 새까만 흙과 날카로운 사기 조각이 밟혔다. 흰 버선에 더러운 흙이 묻고,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멈춰 서지 않았다.

마침내 개의 앞에 멈춰 선 황제가 작은 얼굴을 잡아 올렸다. 우악스러운 힘에 개의 턱이 거칠게 눌렸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마. 잘 생각하고 제대로 대답해야 할 것이야.”

황제의 서늘한 목소리가 침전을 울렸다.

“공작의 안부를 물은 이유가 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바깥이 궁금했습니다.”

개는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가장 최근에 만난 사람이 공작이기에, 그래서…….”

거짓말은 익숙하지 않았다. 개는 말끝을 흐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부디 ‘사마귀’에 대해 말했을 때처럼, 황제가 속아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알겠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황제는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그의 입가에 일견 오싹하게 보이는 기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 너를 어찌 의심하겠느냐.”

개의 턱을 잡아 올렸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황제는 발갛게 손자국이 남은 피부를 보며 ‘저런’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많이 놀랐느냐? 뺨에 자국이 남았구나.”

걱정하듯 뺨을 느릿느릿 쓸어내리는 황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연민이 아닌 만족이었다. 그는 자신이 남긴 손자국을 아름다운 예술품처럼 바라보았다.

“…….”

개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소름 끼치는 불쾌함이 등허리를 타고 올랐다. 당장이라도 황제의 손을 쳐 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손을 떼어 내는 순간 황제는 다시 분노에 차 날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죄 없는 누군가는 피를 보게 되겠지. 그저 황제의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개는 뺨에 닿는 불쾌한 감각을 인내했다. 고문을 견디는 건 늘 해 오던 일이었다.

“검사님…….”

끼익, 누군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차현이 몸을 돌려 문 쪽을 보았다.

“부르셨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문 앞에 선 윤재경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차현은 입을 다문 채 재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윤재경.”

“예.”

부르는 소리에 재경이 빠르게 대답했다.

“내가 널 죽이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죽이기 아까운 인재니까요. 제 유능함도 한몫하겠지만, 일단 뒤에는 아버지도 계시고…… 또 혁명단에 제공했던 자본도 저희 집안의 것이 아닙니까.”

말장난 같았지만, 이것이 재경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주장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차현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봐주는 건 이번 한 번뿐이야.”

재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거짓말을 들킨 후, 용서받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뜻밖의 일이었다.

“다음은 없어.”

“검사님. 오늘따라 너그러우신 게…….”

“널 전처럼 신뢰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야.”

차현이 싸늘하게 말을 끊었다. 재경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볼일 끝났으면 나가 봐.”

“예에…….”

재경은 힐끗 차현의 얼굴을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유 없이 터져 버릴 것만 같던 팽팽한 분위기는 어디 간 건지, 어딘가 너그러워진 인상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왜?

일순 재경은 수수께끼에 이끌린 탐사가처럼 답을 찾으려 했지만, 곧 의식적으로 생각을 끊어 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차현에게 또다시 밉보인다면 곤란한 건 재경 자신이었다.

탁.

차현은 닫힌 문을 보고 서 있다가 다시 등을 돌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의 차가운 풍경 너머, 땅벌레처럼 몸을 낮춘 황궁이 눈에 들어왔다.

“…….”

저곳에 개가 있다.

그는 갈증을 버티지 못하고 바다에 머리를 처박은 사람처럼, 다급히 황궁 담을 넘었던 밤을 떠올렸다. 살을 엘 것 같은 차가운 공기조차 느끼지 못한 채 작은 입술을 마구 헤집어 놓았던 밤.

차마 그 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섰기 때문인지, 차현은 매일 밤 상반된 두 가지 욕망에 시달렸다. 창과 방패처럼 치열하게.

자신의 뺨을 잡고 혀를 얽으려 했던 개를 생각하면 갈증이 해소되었고, 그날 새빨갛게 물들었을 몸을 떠올리면 갈증이 일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차현의 심장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온도를 달리했다.

“……너무 늦어.”

손끝이 초를 재듯 탁, 탁, 창문턱을 두드렸다. 차현은 무감한 얼굴로 황궁을 바라보며, 혀끝을 달게 적시는 생각을 천천히 곱씹었다.

지금 당장 황궁에 쳐들어가 황제의 목을 베고 개를 데려오는 건 어떨까.

탁.

창문턱을 두들기던 손끝이 그 순간 뚝 멎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차현이 하, 헛웃음을 터트렸다.

황제를 지금 죽여 버리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황제가 죽어 봤자 사상의 변화가 없다면 그저 새로운 왕조가 세워질 뿐이었다.

차현은 새로운 체제가 이 나라를 지배하길 원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기다려 온 것이고.

그는 창문 너머에 붙박였던 시선을 억지로 떼어 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

황제가 광분하며 날뛰었던 날 이후, 개는 더욱 얽매인 일상을 보내야 했다.

침전 안에 들어온 궁인에게 별 뜻 없는 시선만 주어도, 황제는 개에게 ‘저놈에게 관심이 생긴 것이냐?’며 윽박을 질렀다. 그때마다 궁인들은 자신의 목이 날아갈까 두려움에 떨었으며, 개는 황제의 노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거짓을 토해 냈다.

이 일이 몇 번 반복되자 궁인들에게 개는 황제보다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궁인들은 이제 개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허겁지겁 도망쳤다. 공포에 질린 그들의 얼굴은 여과 없이 생각을 투영해 내고 있었다.

괴물.

황제와 비서실장을 제외한 궁 안 모든 사람들이 개를 괴물과 같은 존재라 생각했다.

과거 ‘황제의 개’였던 시절이라면 그런 시선들이 아무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자신이 그런 시선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황제의 음성과 명령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으니까. 사람들이 자신을 괴물이라 생각하든 짐승이라고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개는 죄 없는 어린 인간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자의 이름이 ‘태성’이 아니라도, 그 얼굴 위로 고요히 잠든 태성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자신의 몸뚱이만 한 병을 들고 울음을 삼키던 예성이 떠올랐다.

이제 ‘무엇이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개는 ‘밖에 나가고 싶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외출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개는 자신의 앞에 앉은 황제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황제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개의 손을 주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갖고 싶은 게 있느냐?”

“없습니다.”

녹음기를 튼 것만 같았다. 황제는 이 대화가 질리지도 않는 걸까.

개는 흉터가 가득한 자신의 손등 위를 슬슬 쓸어내리는 창백한 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하고 싶은 것은 없고?”

“없습니다.”

황제는 개가 ‘나가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 게 흡족한 듯 입술을 당겨 웃었다.

“내 네게 주지육림이 갖고 싶으냐 물었던 것을 기억하느냐?”

“예.”

황제는 예전처럼 순종적으로 자신의 말을 듣는 개를 내려다보았다. 개는 저런 순순한 얼굴이 어울렸다. 감히 공작 따위에게 시선을 빼앗긴 얼굴이 아니라.

황제는 자신이 쓸어내리던 흉터 가득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울퉁불퉁한 흉측한 손마저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황제는 일순 저 손을 입에 넣고 와그작 씹어 먹는 상상을 했다. 비릿한 피마저 달게 느껴질 것 같았다.

“이번 겨울이 끝나면 너를 위해 만들어 보려 한다. 어떠냐.”

황제는 개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가만히 앉은 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전에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손을 빼내더니.

황제의 눈매가 약을 맞은 것처럼 풀어졌다. 비죽 올라간 입꼬리에 기쁨이 맴돌았다. 황제는 깍지 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양껏 음미했다.

“갖고 싶지 않습니다.”

이어진 개의 말에 한껏 고양됐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황제는 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부담이 되어서 그러느냐? 그런 것이라면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네게 주고 싶다는데 그 누가 무어라 하겠느냐.”

“…….”

말하고 또 말해도 황제는 개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것을 받는 개가 행복해할지 불행해할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저, 자신이 하고 싶다 마음먹은 것을 하고 싶어 할 뿐이었다.

거미줄처럼 제 손을 옭아맨 황제의 손을 내려다보던 개가 도륵 눈을 굴렸다. 잠시 자취를 감췄던 비서실장의 기척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폐하.”

장지문 앞에 선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침전으로 넘어 들어왔다. 애타게 개의 대답을 기다리던 황제의 미간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탐탁지 않은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을 향했다.

“무어냐.”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제는 습관적으로 ‘꺼져라’ 하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개와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들어와라.”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가까이 다가온 비서실장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일 때까지 깍지 낀 손을 풀지 않았다.

“폐하. 저자는……”

비서실장은 황제의 손과 얽혀 있는 흉측한 손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저자가 돌아올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저 더러운 짐승이 분명 황제를 망칠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비서실장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저자’라니. 내 개에게 ‘저자’라고 한 것이냐?”

황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비서실장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오나 폐하께서 비밀리에 조사하라 명하신 것을 아뢰려 하는지라…….”

비서실장의 시선이 힐끗 개를 향했다. 명백히 개의 존재가 신경 쓰인다는 눈치였다.

황제의 미간이 와작 일그러졌다.

“공작과 관련된 건이냐?”

황제는 개에게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놓고 묻는 말에 비서실장이 눈을 크게 떴다.

주름진 눈가가 개의 등을 향했다.

“…….”

인형처럼 앉은 개의 등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비서실장이 이를 악물었다. 턱이 불룩 튀어나왔다.

저자는 말이 ‘황제의 개’지 사람이었다.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 이미 황궁 바깥의 생활을 맛본 자가 어떻게 다시 황제의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은 이미 외부인이었다.

황제는 이것을 모르는가. 어떻게 외부의 인간에게 비밀을 공유하려 할 수가 있는가.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예.”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비서실장이 패색 짙은 얼굴로 황제의 앞에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는 그런 그를 보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신경 쓰지 마라. 이건 내 개다.”

“예.”

더 말씨름을 해 봤자 손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비서실장은 두 발 내딛기 위해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긴히 할 말이란 게 무어냐. 빨리 말해라.”

황제는 비서실장을 독촉하며 힐끗 개의 표정을 살폈다. 인형처럼 무덤덤했던 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커다란 파동이 일었다. 황제는 당황한 듯한 개의 얼굴을 보며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조사 결과를 듣고 개가 후회하길 바랐다. 공작의 뒤를 캐라 명한 것은 분명 ‘개가 공작에게 관심을 주었기 때문’이니까.

공작의 인생이 나락에 떨어질 것을 예감하며 절망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예쁠까.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지 않겠지. 기대감에 부푼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으나…… 공작에게 수상한 정황이 있습니다.”

황제와 닿지 않은 개의 손이 움칠 떨렸다. 입 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수상한 정황. 그것은 분명 혁명단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확실한 것이냐?”

“그것이…… 눈에 보이는 흔적은 없습니다. 다만 아귀가 맞지 않는 정황이 있어 조사 중입니다. 자세한 것은 더 조사를 해 보아야…….”

“하!”

비서실장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황제의 입술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어가 그리 웃긴지 큭큭 웃음을 흘리던 황제의 눈동자에 금세 지글지글 열기가 끓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 그 잘난 낯짝 아래 숨겨진 저열한 욕망을 이 내가 눈치 못 챌 줄 알았겠지!”

황제는 힘껏 움켜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쾅! 요란한 소리가 침전 안을 가득 메웠다.

“감히…….”

짓씹듯 내뱉은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 다녔다.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들 것처럼 섬뜩한 목소리.

땅바닥에 이마를 붙인 비서실장이 황제의 화를 부추기듯 입을 열었다.

“폐하,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확실한 물증을 가져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필요 없다.”

악의를 품었던 비서실장의 얼굴에 한순간 멍청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엇 하러 더 시간 들여 조사를 하느냐. 감히 이 나라의 지존인 나를 능멸하려고 든 자에게, 내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폐하께서 공작에게 충분한 자비를 베푸셨음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비서실장은 금세 침착함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이곳에서 평온을 잃어 가는 것은 오로지 개뿐이었다.

“죽여라. 실력 있는 암살자를 보내.”

황제의 마지막 말이 이어진 순간, 개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표적을 죽일 때에도 느껴 본 적 없는 살의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럼에도 황제의 목을 꺾지 못한 것은 당황 때문이었다.

“예, 폐하.”

등 뒤에서 들린 비서실장의 목소리에 개의 손이 움칠 떨렸다. 책상 아래 감춰진 손이 곧장이라도 목을 움켜쥘 것처럼 곱아 들었다가 펴지길 반복했다. 개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머리를 뜨겁게 만드는, 놀라우리만치 선명한 살의.

그것은 눈앞이 새까맣게 변할 정도로 강렬한 감각이었다. 태성에게 느꼈던, 혹은 공작에게 느꼈던 것과는 정반대인 섬뜩한 감정.

“이만 나가 봐라.”

“소인,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단 한 번도 황제를 해하겠다 마음먹은 적 없었다. 주인을 무는 개는 살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해하는 것을 넘어 살의를 느꼈다니?

황제의 죽음은 곧 개의 존재가 소멸됨을 의미했다. ‘황제의 개’는 황제가 없다면 존재할 수 없으니까.

“방해꾼이 나갔구나.”

비서실장이 장지문 너머로 사라지자 황제는 다시 개의 손을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개는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새까만 동공이 사냥감을 발견한 짐승의 것처럼 확장되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

지금 황제를 죽이면 암살자를 보내는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을까?

“시선이 열렬하구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오랫동안 세뇌되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가치관과 충동처럼 치밀어 오른 살의가 충돌했다. 누군가 몸속의 내장을 쥐고 뒤흔드는 것처럼 구역질이 났다.

개는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를 움켜쥐고 몸을 옹송그렸다.

“흐, 윽…….”

갑작스럽게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가파르게 치솟은 호흡의 양을 폐가 거부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러느냐!”

창백하게 질린 개의 입술에서 꺽꺽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황제는 이변을 알아차렸다. 동상처럼 앉아 있던 개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밖에 누구 없느냐! 어의를, 어의를 불러와라!”

개의 초점 없는 눈이 고함을 지르는 황제의 목을 바라보았다. 책상 아래에 있던 손이 어느새 책상 위까지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신체가 전력을 차단하듯 뇌의 신호를 끊어 버렸다. 개는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차현이 저택에 돌아온 것은 늦은 밤이었다.

기다릴 사람이 없는 곳에 일찍 돌아올 이유가 없었다.

저택 밖에서 불 꺼진 창문을 올려다보던 차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긴 코트 자락이 그의 등 뒤에 긴 그림자를 남겼다.

순식간에 방문 앞에 다다른 그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어둠에 잠겨 있던 방 안에 빛이 끼쳐 들어왔다.

차현은 방문 앞에 서서 침묵에 잠긴 방 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나갈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무성의하게 돌아섰다.

방문을 닫고 들어온 차현은, 걸쳐진 코트가 불편한지 깃에 채워진 체인을 풀었다. 그러고는 꺼진 방 안의 불을 켜려는 듯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

어둠 속에 매복해 있던 암살자의 눈이 커졌다.

순식간에 몸을 돌린 공작의 어깨에서 흰 코트가 너울거리며 떨어졌다. 그의 몸을 가렸던 코트가 바닥에 떨어진 순간 새까만 총구가 드러났다.

핏, 하는 작은 소리가 총구에서 터져 나왔다. 소음기가 장착된 총신을 빠져나온 총알이 순식간에 표적을 향해 날아갔다.

“큭!”

손톱만 한 총알은 가공할 만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허벅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고통에 일그러진 암살자의 눈과 차현의 무감정한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위치가 발각됐다. 그 사실을 깨달은 암살자는 망설임 없이 비수를 날렸다.

“……!”

그러나 독이 묻은 비수는 공작의 목에 닿지 않았다. 비수가 암살자의 손끝에서 쏘아져 나가려는 순간, 두 번째 총알이 다른 쪽 허벅지를 꿰뚫었기 때문이다. 서슬 퍼런 궤적을 그린 비수는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에 처박혔다.

피슉!

다시 한 발의 총알이 허공을 갈랐다. 이번엔 무릎이었다. 암살자의 한쪽 무릎이 힘없이 바닥에 내리 꿇렸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쉽게 당했다.

암살자는 모든 것을 보았음에도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그가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이 공작처럼 총을 가지고 있었다. 현존하는 무기 중 가장 다루기 쉽고, 순식간에 살상을 저지를 수 있는 무기. 총.

그러나 그들은 품 안에 있던 총을 꺼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완벽하게 은신한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저자는 무엇이란 말인가.

황제는 저자를 별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아니었다. 그는 한참 잘못 알고 있었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공작에게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제가 암살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도 자신보다 우위의 실력을 가진 암살자.

암살자는 자신의 양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허벅지와 무릎에 난 세 발의 총상. 이 상태로는 어찌 암살을 성공한다 하더라도 저택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암살을 성공한다는 가정 자체가 우스웠다. 저자를 이길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총이 없었더라도, 공작은 암살자를 손쉽게 살해했을 것이다.

암살자는 어금니 쪽에 끼워 두었던 독약을 혀 위에 굴렸다.

이번 임무는 완전히 실패였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탈출 방법은 하나. 스스로 독을 먹어 죽는 것.

“악……!”

그러나 독약을 깨물려던 순간 핏, 또 한번 총성이 튀었다.

이미 총알이 쑤셔 박혀 있는 허벅지 위에 다시 한 발이 박혀 들었다. 같은 위치였다. 벌어진 암살자의 입 안에서 젖은 알약이 굴러 나왔다.

“오랜만인데.”

콰직. 공작의 발에 밟힌 알약이 산산이 으깨졌다.

공작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 목숨을 노리러 온 암살자는.”

무릎을 굽혀 앉은 공작이 총을 고쳐 쥐었다. 총구가 암살자의 허벅지 위에 닿았다. 암살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크학……!”

차현은 피가 비직비직 새어 나오는 총상을 총구로 헤집기 시작했다. 검은 총구가 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암살자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차현의 목을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때를 잘못 정했어.”

그러나 그 손은 차현의 목에 닿는 대신 억센 손아귀에 붙잡혔다. 암살자의 손목을 움켜쥔 차현이 그림처럼 웃었다.

“……!”

“내 기분이 아주 좆같거든.”

고통으로 물든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차현은 그가 보는 앞에서 순식간에 손목을 꺾어 부러트렸다. 울컥 올라온 비명이 목 안쪽에서 들끓었다.

“배후가 누구지?”

차현은 일말의 동요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검푸른 눈동자에 싸늘한 감정이 스쳤다.

“뭐!”

고요한 얼굴로 누워 있던 개의 손끝이 움칠 떨렸다. 누군가의 고함이 요란하게 들려온 탓이었다.

개는 멀어졌던 의식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끊어졌던 퓨즈가 다시 이어졌다.

‘죽여라. 실력 있는 암살자를 보내.’

어제 정신을 잃기 전 그런 말을 들었었지.

개는 눈꺼풀을 퍼뜩 떠 올렸다.

공작은?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 황제가 정말 암살자를 보냈나? 그렇다면 공작은 멀쩡한가? 물론 그는 아주 강한 사람이니 죽지 않았을 테지만 만의 하나라는 게…….

“실패했다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던 개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붉은 용포를 걸친 황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그걸 실패해!”

쿠당탕.

책상에 놓여 있던 갖가지 물건들이 바닥을 나뒹구는 것이 보였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는 건지 깨달았다. 몸에 닿는 부드러운 비단의 감촉. 자신은 황제의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송구하옵…….”

“그놈의 송구, 송구! 송구할 짓을 왜 하느냐!”

노호성을 지른 황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는 불쑥 커진 황제의 등을 보며 일단 눈을 감았다.

‘실패했다’는 말은 암살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공작은 멀쩡하다는 뜻이겠지. 자세한 이야기는 잠든 척 조용히 말소리를 엿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불안에 휩싸인 황제의 잇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맴돌며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검찰총장과 안기부장의 직위를 등에 업고 방심하고 있을 때 암살자를 보내면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뒤통수를 치는 것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승리법이었으니까.

하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젠장……!”

공작에게 관심을 가지는 개의 앞에서 그의 출생을 비웃고 되는 대로 흉보았지만, 그때마저도 그 사실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현이 ‘유능하다’는 사실.

암살이 실패했다면 그는 지금쯤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황제가 뒤통수를 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차현은 어떻게 반응할까. 황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현은 아름다운 껍데기 안에 끔찍한 계책과 속내를 숨긴 인간이었다. 제 아비와 형이 살아 있었을 땐 어떠했는가. 자신을 학대하고 괄시한 이들을 끌어내리고, 그 스스로 공작위에 오르려 했었지.

대체 언제부터 준비됐던 건지도 모를, 은밀하고 조용한 계획.

그들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지만 않았더라면, 차현은 제 손으로 공작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운이 좋았다’는 평가도 받지 않았겠지. 아마 모든 이가 그의 계획에 놀라며 ‘공작’ 차현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황제가 차현의 계획을 알게 된 것은, 충성심을 증명키 위해 차현 스스로가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나 전율에 떨었던가. 이자가 나의 수하라면 대단히 쓸모가 있겠다 싶었다.

그랬었다.

“……암살의 배후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놈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폐하, 고작 공작일 뿐인 인간이 폐하를 어찌 감히……!”

아연실색한 비서실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는 까무러칠 듯 놀란 비서실장을 보다, 짓씹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공작 차현에게서 안기부장의 권한을 박탈한다 일러라. 검찰총장의 권한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번엔 더 강한 암살자를 보내. 몇 명이라도 상관없다. 반드시 죽여 버려.”

“……폐하. 더 강한 암살자를 원하신다면 차라리 ‘개’를 보내심이.”

“미쳤느냐? 이놈을 공작에게 보내자고? 어깨의 상처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아 반병신이나 다름없다 들은 것이 어제다. 그런데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황제가 다시 광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책상 옆에 기대 놓은 칼을 단번에 움켜쥐더니 새빨간 눈으로 비서실장을 노려보았다. 비서실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폐, 폐하. 저자를 보내자는 말이 아니옵니다.”

“뭐? 무슨 헛소리냐.”

고개를 조아린 비서실장이 빠르게 말을 토해 냈다.

“그것이……. 실은 폐하께서 저자를 죽이라 명령하셨던 날 이후, 몰래 거두어들인 새로운 ‘개’가 있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려 아직 폐하께 선보이지는 못했지만…… 실력은 원래의 개 못지않다 들었습니다.”

침상 위에 시체처럼 누워 있던 개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놀랍기 그지없었다.

자신 같은 암살자가 하나 더 있다고?

“지금껏 함구하여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를 벌할 땐 벌하시더라도, 그자를 사용해 주십시오. 반드시 공작의 목을 베고 돌아올 것입니다.”

“……마음대로 해라. 공작을 죽일 수만 있다면 길가의 촌부가 간다 해도 말리지 않을 터이니.”

탁. 황제가 칼을 다시 책상 위에 기대 놓았다. 비서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고, 기척을 죽인 개는 숨을 멈췄다.

새까만 어둠에 잠긴 밤. 개는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앞에 누워 곤히 잠든 황제를 바라보았다.

경계심 없이 깊은 잠에 빠진 황제를 죽이는 것은, 어린아이의 손에서 사탕을 뺏는 것보다 쉬운 일일 것이다. 지금 당장 자신의 베개를 들어 코와 입을 막으면 황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겠지.

“…….”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개는 조금의 기척도 없이 침상에서 일어섰다.

공작은 아주 강한 사람이니 자신이 없어도 괜찮을지 몰랐다. 그러나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그의 목숨이 위협당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개는 침전의 창문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넘을 수 없을 것만 같던 황궁의 담 또한 어렵지 않게 뛰어넘었다.

개의 까만 눈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작은 인영 하나를 뱉어 낸 황궁은 곧 고요에 잠겨 들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끼쳐 오는 새벽이었다. 황제는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눈을 떴다. 개가 돌아온 이후 이렇게 일찍 눈이 떠진 적이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부옇게 흐려진 시야를 다잡자, 텅 빈 침상이 눈에 가득 찼다. 고요한 얼굴로 잠든 곱상한 얼굴을 기대했던 황제는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벌떡 일어선 황제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방 안은 싸늘한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병풍 뒤에서도, 문가에서도 개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황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비서실장, 비서실장!”

비명 같은 외침에 비서실장이 황급히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는 영문도 모른 채 머리를 조아린 비서실장에게 악을 쓰기 시작했다.

“내 개가 없어졌다. 내 개가……!”

공작저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동이 트자마자 황제의 전령이 저택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다.

다짜고짜 찾아온 전령은 ‘폐하의 명령’이라며, 침입을 막는 경비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러고는 구둣발로 들어와 순식간에 공작의 방으로 향했다.

사용인들은 불안과 의문을 숨기지 않았다. 불운을 몰고 온다는 황제의 전령이 왜 공작의 저택에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

사용인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계단 위를 향했다. 그들은 부디 자신들의 주인에게 불행이 닥치지 않길 바랐다.

“……현 시간부로 공작 차현은 검찰총장과 안기부장의 직위에서 물러날 것을 명한다.”

“그렇군요.”

길고 긴 문서를 끝까지 읽은 전령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차현은 자신의 방문 앞에 선 그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더 전하라는 말씀은 없었습니까?”

“예?”

전령의 얼굴이 멍청하게 풀렸다. 현 직위를 잃는 것만으로도 절망하리라 생각했는데, 더 전할 말이 없냐니?

“어…… 없는 것 같습니다.”

전령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커피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을 툭툭 두들기던 차현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차현의 말소리를 듣지 못한 전령이 되물었다. 차현의 눈이 가볍게 휘어졌다.

“없습니다. 그리고 더 전달할 말이 없다면 이만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전령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러났다.

차현은 닫힌 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빠르게 사라졌다.

“파면으로 끝낸다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틀 전 암살자를 보냈던 황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새로운 암살자를 보내지도 않았고, 전령으로는 ‘고작’ 파면을 하겠다는 말만 전해 왔다.

분명 반란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형을 명할 거라 생각했는데.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차현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 순간 불안한 예감이 끼쳐 왔기 때문이다.

그는 손끝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예감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불안함을 떨쳐 내려는 듯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창밖에 보이는 세상을 눈에 담았다. 기울어진 저울을 보는 듯한 불균등한 풍경.

그러나 이 풍광을 보는 것도 이젠 끝이었다.

세상을 뒤엎을 일이 오늘 일어날 테니까.

낡은 슈퍼 안, 계산대 앞에 앉은 중년 남자가 물건을 봉투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다 해서 4천 원.”

“잠깐 기다려 봐.”

다른 중년 남성이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는 반으로 접힌 지폐를 지갑 안에서 빼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신문 봤나?”

“여 있잖아. 여.”

슈퍼 주인이 킬킬 웃으며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그곳엔 싸구려 갱지에 인쇄된 조잡한 신문이 놓여 있었다.

명 혁 일 보

‘혁명’이라는 단어를 거꾸로 뒤집은 제목.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국가가 인증한 언론사에서 발행한 신문이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시작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혁명단과 관련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신문.

‘혁명’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이젠 명혁일보를 보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귀족들의 치부를 낱낱이 까발리고 희화화하는 즐거운 문장들을 보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신문을 볼 때만큼은 자신들을 옥죄는 힘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신문 보니까 오늘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한다 하는 것 같던데, 맞나?”

슈퍼 주인이 신문을 뒤적이며 물었다. 그가 펼친 신문에는 볼펜 자국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맞아.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 테니까 자기들을 지지해 달라는 말이 적혀 있었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신문에 비밀스런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각 헤드라인의 첫 글자를 따면 하나의 문장이나 단어가 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그 사람들 지지가 뭐야! 나와서 도와 달라 해도 그럴 생각이라고.”

지갑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은 남자가 주먹 쥔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슈퍼 주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더니 다시 무언가를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혁명단…….”

“크흠, 큼! 저녁 뭐 먹는다고?”

“뭐?”

잘 이어지던 대화를 끊고 튀어나온 말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저녁 메뉴는 왜 물어본단 말인가?

“저기, 저기.”

흔들던 주먹을 입가에 댄 남자가 시선을 힐끗 밖으로 보냈다. 슈퍼 주인이 목을 쭉 빼고 유리문 너머를 보았다.

바깥에 검은 제복의 군인들이 장총을 메고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군인들에게선 이유를 알 수 없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슈퍼 안의 두 사람이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따라 군인들이 많이 지나다니는데…….”

“그러게 말이야…….”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철컥, 철컥.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 뒤에 멘 장총에서 장전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군모를 눈썹까지 눌러쓴 군인이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앞 뒤 양옆 할 것 없이 모두 자신보다 연차가 높은 고참들이었다. 이 작전에 투입된 군인 중 자신이 제일 짬이 적었다.

중압감에 숨이 막혔다. 군화를 신은 발에 땀이 차 죽을 맛이었다.

철컥!

군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앞에 가던 고참이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좀만 늦게 정신을 차렸으면 고참의 등에 군모를 박을 뻔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번 일은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이다!”

제일 앞에서 길을 트던 상관이 목소리를 높인 것은 그때였다.

“모두들 폐하의 성정을 알 거라 생각한다. 실패하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야, 알겠어?”

“예!”

“예, 예!”

군인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더듬더듬 소리를 내지른 건 긴장한 자신뿐이었다.

“그럼 모두 알았으리라 생각하고, 여기서부터 부대별로 나눠 갈 예정이다. 이제 각자 맡은 구역으로 흩어져. ‘개’를 찾으면 상관에게 보고하도록.”

사라진 ‘황제의 개’를 찾아오라.

그것이 군부에 직접 내려진 황제의 명령이었다.

“우리는 서북쪽을 전담하기로 했으니 따라와.”

한 명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모자를 눌러쓴 군인은 헐레벌떡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개’를 찾으라 명령한 황제가 내려 준 단서는 하나뿐이었다.

‘개는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 있을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결론을 내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가 명령한 이상 자신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쾅!

가장 가까운 집에 도착한 군인들이 문고리를 부수고 집 안에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란 여자가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무, 무슨……!”

“지금 이 시간부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네년과 네 자식새끼는 목숨 부지하기 힘들 거다.”

군화를 신고 우르르 집 안에 들어온 군인들이 총구를 들이밀었다. 새까만 총구가 살을 에는 칼날처럼 서슬 퍼런 빛을 내뿜고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품 안으로 후다닥 기어 들어온 아이를 꽉 껴안고 작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집을 수색하라는 폐하의 명령이시다. 그러니 수색이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여자의 몸이 움칠 떨렸다. 품에 안긴 아이는 제 어미의 불안을 따라 느끼는 것처럼 와들와들 떨며 중얼거렸다.

“어, 엄마. 저 아저씨들 뭐야?”

“쉿. 조용히 있어야 착한 아이지…….”

여자는 아이의 입에 손가락을 대었다. 그러고 불안하게 떨리는 아이의 눈꺼풀과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공포 때문인지 아이의 뒤통수에 닿는 손끝이 떨렸다. 여자의 입술이 이에 짓눌렸다.

“샅샅이 뒤져라!”

“예!”

우렁찬 대답이 들리기 무섭게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바닥에 흐트러졌고, 몇 개는 군화에 짓밟혀 부러지기도 했다. 아이는 그때마다 앞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움찔거렸다.

여자는 불편한 듯 몸을 뒤트는 아이를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살기 위해선 보아도 보지 못한 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손바닥이 온통 식은땀으로 젖었을 때, 불현듯 밖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켜요! 저 이 집 사는 사람입니다!”

“수색 끝날 때까지 못 들여보낸다니까! 진짜 죽고 싶어?”

“내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야 가만히 있지……!”

얌전히 여자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버둥거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아이는 제 아비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했다. 질끈 감겨 있던 여자의 눈꺼풀도 떠 올랐다.

“아빠!”

“호영아!”

순식간에 여자의 품을 벗어난 아이가 현관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달음박질치는 아이를 붙잡지 못한 채 비명 같은 소리만 내질렀다.

‘모두들 폐하의 성정을 알 거라 생각한다. 실패하면 우린 모두 죽은 목숨이야, 알겠어?’

군모를 눌러쓴 군인의 눈에 달려오는 아이의 모습이 비쳤다. 통통 튀어 오르는 뜀박질이 악마의 발걸음처럼 간악스럽게 느껴졌다.

총을 쥔 손에 땀이 배었다. 군인은 바짝 마른 입술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저 애가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선임이 입구 관리를 똑바로 안 했다며 나를 혼내면?

아니, 나 때문에 임무를 망쳤다고 화를 내면.

툭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구타를 해 오는 선임이었다. 또 맞고 싶진 않았다.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를 향해 기울어진 총구에서 불씨가 튀었다.

탕!

커다란 총성이 집 안을 가로질렀다. 젊은 여자와 남자의 비명이 이어졌다.

곧 두 발의 총성이 더 이어진 후에야 집은 침묵에 가라앉았다.

도시는 무덤이었다.

비대칭으로 이루어진 이 도시에선 수많은 사람이 실종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때로는 차에 치인 들짐승마냥 시체가 길거리에 그대로 놓여 있기도 했다. 신원 불명의 시체를 수습해 땅에 묻는 건 이제 낯설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죽음이 익숙했다.

끝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누군가에게 죗값을 물을 수 없었다. 민간의 치안을 봐준다는 깡패들이 살인마이고, 나라 곳곳을 감시하는 군인들이 살인마였다. 이 나라의 주인인 자가 그들의 만행을 묵살(黙殺)하고 있으니까.

이곳은 입을 열수록 불행해지는 나라였다. 사람들은 패배와 침묵에 익숙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

“…….”

지금까지의 침묵이 오늘에 와서야 이렇게 후회스러울 수 없었다.

노부부는 아무런 말 없이 창문 너머의 집을 바라보았다.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던 그 집. 피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그곳에선 어둠에 동화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노파가 가슴을 퍽퍽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간을 일그러트린 채 한없이 가슴팍을 두들겼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아이가 함께 산책을 나가던 모습이 아직 선연했다. 그녀는 가끔 그 모습을 훔쳐보며 미소 짓고는 했다.

부모 몰래 아이에게 사탕을 쥐여 준 적도 있었다. 그럼 아이는 방긋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고 허리를 숙였다.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겠지만.

“이제 그만하고 잡시다.”

노파를 바라보던 노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노파는 자신과 함께 오랜 세월 침묵해 온 동반자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오래된 나무처럼 검버섯이 피고 주름진 얼굴.

“…….”

이제 와 입을 열고 큰 소리로 떠들기엔 자신들은 너무 늙었다.

노파는 입 안에 감도는 씁쓸함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와아아…….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노부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새까만 밤을 밝히는 거대한 횃불이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도로를 채운 것은 고작 몇십 명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나는 곳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합류했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사람들이 늘어났다. 불길이 커져 갔다.

노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기고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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