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부-15장 (14/19)

15장

“공작님?”

“아.”

상념에 빠져 있던 차현은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운전석에 앉은 기사의 등 너머로 희뿌연 빛을 내뿜는 저택이 보였다.

검찰청을 빠져나온 것이 불과 몇 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바깥의 풍경을 확인한 차현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뭘요.”

기사의 얼굴에 푸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공작처럼 친절한 사람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차현이 살인을 저질러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옹호할 만큼.

차현은 기사에게 한번 더 미소 지은 후 차에서 내렸다. 소복이 쌓인 눈이 발밑에 푹푹 밟혔다.

그는 불현듯 자신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어둑했다.

연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부연 입김 사이로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작 그런 일을 한다고 세상이 달라질 리 없는데, 순진한 믿음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이가 안타까우면서도 애틋했다.

저택 안에 들어서자 사용인들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차현은 그들을 지나쳐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 연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달칵.

어둠에 잠긴 방 안은 고요했다. 차현은 자신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방 안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고작 사람 하나가 없을 뿐인데 생동감이 사라졌다. 건조한 공기가 발치를 맴돌고 있었다.

그는 코트를 벗어 던지고 창문 앞에 섰다. 어제 내내 내린 눈이 곳곳에 남아 희게 빛나고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불현듯 창틀 위에 닿았다.

“…….”

그는 말간 얼굴로 창밖을 보던 연우를 생각했다.

연우의 피부는 물기를 빨아들이는 화선지처럼 차현의 손을 잡아끌고는 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는 계속 만져도 질리지 않았다. 손끝에 걸리는 흉측한 흉터마저도 혀를 대어 핥아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뿐이었다.

작은 입에 입술을 붙이면, 순진한 이는 곧이곧대로 눈을 감았다. 차현은 짧지만 빼곡히 들어찬 속눈썹이 내리깔리는 순간을 즐거워했다.

새까만 눈은 그대로도 음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지만,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눈동자가 눈꺼풀 너머로 사라지면 제 나이 같은 앳된 모습이 드러나곤 했다.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지나쳤을 찰나의 풍경을 포착해 내는 순간.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을 타인에 불과한 자신이 소유했다는 희열감.

손에 닿은 체온을 놓는 아쉬운 감각.

이것을 소유욕이 아니라면 달리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유리창에 비친 흐릿한 초상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현은 완연한 밤이 되어 버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온 세상의 소음이 물에 잠긴 것처럼 잦아들었다. 설핏 미간이 일그러졌다. 곧은 손끝이 창문턱을 두드렸다.

이렇게까지 늦은 적은 없었는데.

창밖을 바라보던 차현이 몸을 돌렸다. 그는 커피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처리하지 못한 서류를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오래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목까지 채워진 제복이 갑갑해 단추를 풀어 헤쳤다.

뒤를 돌아보니 세상은 어느새 완연한 어둠을 품고 있었다. 날이 밝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각. 싸늘하리만치 무감한 얼굴이 유리창 위에 비쳤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이 천천히 말아 쥐어졌다.

깊은 새벽, 연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

세상을 뒤덮었던 어둠이 태양을 이기지 못하고 져 버리는 시간이었다. 차현은 어스름한 빛이 끼쳐 오는 방 안에 앉아 허공을 직시했다.

연우가 납치당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그럼에도 ‘도망쳤다’ 확정하지 않은 것은 황제 탄신일의 경험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펼쳤던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검푸른 눈동자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일어선 커다란 몸이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와.”

혼잣말을 하듯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건 맥없이 흩어지는 말이 아니었다.

“부르셨습니까.”

창문을 밀고 들어온 남자가 차현의 앞에 부복했다. 서늘함이 맺힌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의 수하를 향했다.

“찾아와.”

내뱉어지는 목소리가 낮고 음산했다.

“당장.”

죽음은 예고도 없이 쏘아진 총알처럼 순식간에 다가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개가 아는 인간의 삶이란 매일, 매순간 그래 왔으니까.

죽음은 삶의 발밑에 늘어진 그림자였고, 양면으로 된 종이의 아래편이었다. 태양 아래 있는 한 인간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바람이 불면 종이가 뒤집어지듯 목숨을 잃었다.

개는 죽음의 양면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고, 그렇기에 때때로 삶보다 친근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왜 지금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질까.

“네 죄가 무엇인줄 아느냐?”

개는 바닥에 꿇어앉은 채 제좌에 앉은 황제의 발을 보았다. 검은 목화(木靴)를 신은 발이 세상의 중심을 밟은 자의 것처럼 커다랬다.

“…….”

황제의 물음을 똑똑히 들었음에도 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열 수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네 죄가 무엇이냐’ 묻는 황제에게 할 수 있는 답은 ‘죄송합니다’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죄송하다 말한 뒤에는? 감히 황제를 능멸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는 자신이 ‘황제에게 돌아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만이 삶의 목표였던 것처럼 달렸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황제는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선 인간이었다. 개가 아니더라도 그의 곁에서 명령을 들어줄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깊은 잠에 빠진 태성은.

개가 아니라면 누구도 그 애에게 ‘너는 안전하다’ 이야기할 수 없었다. 예성을 해치겠다 말해서 미안하다고, 다시는 네 곁에 가지 않겠다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엔 같이 가.’

맛없는 돈가스를 먹은 날, 공작은 자신에게 다음을 약속했다. 즐겁게 미소 짓는 그 얼굴이 아름다워서, 개는 다음을 기대하고 말았다.

“하, 대답도 하지 않겠다 이거냐?”

“…….”

개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죽고 싶지 않았다. 잠시라도, 1분이라도, 단 1초라도 더 살아 있고 싶었다. 황제의 앞에 선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겠지만…….

“쯧, 됐다! 그 무거운 입을 강제로 열어 봤자 기분만 잡칠 것 같구나.”

“……?”

놀란 눈이 크게 뜨였다. 개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감히 황제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며 목을 베어 버릴 줄 알았는데, 황제는 칼을 뽑아 들긴커녕 여전히 제좌에 앉아 있었다. 게다가 강제로 입을 열게 하지도 않겠다니.

저곳에 앉아 있는 게 ‘진짜’ 황제가 맞는 건가?

개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들어 올렸다. 일견 파르스름하게 보일 정도로 창백한 피부와 검게 그어진 짙은 눈 그늘, 푸석푸석해 보이는 피부까지. 외형은 분명 자신이 기억하는 황제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실핏줄이 터진 눈이 개를 직시했다. 일견 광기마저 느껴지는 음습한 눈동자. 소름 끼치는 시선에 개의 손끝이 움찔 곱아 들었다.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리 와 봐라.”

황제가 손을 까딱이며 개를 불렀다.

개는 머뭇거리며 눈알을 굴렸다. 너무 오랜만에 마주했기 때문일까. 도저히 황제의 기분을 파악할 수 없었다.

개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 죽을 것 같진 않으니, 일단 황명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개의 걸음걸음이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살아 움직이는 개를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에 기묘한 희열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옆에 선 비서실장은 달랐다. 그는 불안하고 또 불안한 얼굴로 개를 바라보았다.

죽은 줄 알았다. 그 차현 공작이 죽음을 확신했으니 반드시 죽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버젓이 살아 돌아오다니.

비서실장의 잔뜩 일그러진 시선이 개를 향했다. 저자를 황제의 곁에서 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기울였는데. 거머리처럼 다시 돌아온 개가 끔찍했다.

비서실장의 입에서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폐하!”

갑작스러운 노호성에 개의 걸음이 멈춰 섰다.

입술을 끌어 올리던 황제는 곁에 선 비서실장에게 시선을 두었다. 분노가 뒤섞인 시선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칼날이 자신을 향할지도 모른다. 비서실장의 주름진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자가 황궁 바깥에서 무엇을 하고 왔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제 본분을 버리고 황궁 밖으로 도망쳤던 자가 아닙니까. 이런 불경한 자를 폐하의 곁에 가까이 두시는 것은…….”

“시끄럽다!”

호기롭던 비서실장의 목소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황제의 고성이 전각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주름진 입을 다문 비서실장이, 사납게 치뜬 붉은 눈을 피해 눈을 내리깔았다.

“시끄러우니 넌 나가라.”

황제는 간신히 화를 가라앉히고 명령했다. 비서실장이 깊게 고개를 숙이며 연약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폐하, 위험한 자입니다. 부디 몸수색만이라도…….”

“이봐.”

그러나 같잖은 흉내는 통하지 않았다. 황제의 싸늘한 목소리가 비서실장의 목을 움켜쥘 듯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소, 송구하옵니다.”

비서실장이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오랫동안 황제의 곁에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단 한 마디만 더 덧붙여도 목이 달아날 것이다.

근본도 모르는 저 개새끼가 아니라, 황제의 곁에서 항상 충성을 바치던 자신에게 축객령을 내리다니. 굴욕을 느낀 비서실장이 개를 노려보았다.

당황한 듯 멍청하게 뜬 검은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들짐승 같던 예전과 다르게 제법 사람 꼴을 하고 있는 것 또한 거슬렸다.

입술을 꾹 깨문 비서실장이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그가 장지문 너머로 사라지자 전각은 침묵에 잠겨 들었다.

“방해꾼이 사라졌군.”

고요함을 깬 것은 황제의 쇳소리 섞인 목소리였다. 개는 숨을 멈췄다.

황제와 단둘이 있는 공간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과거엔 그렇지 않았는데.

“빨리 와 봐라.”

숨 쉬듯 당연했던 풍경이 낯설어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개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황제에게 가까워지는 걸음이 자꾸만 바닥에 끌렸다. 그러나 아무리 지체해도 결국엔 황제의 앞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좌 앞에 선 개는 무릎을 꿇기 위해 몸에서 힘을 뺐다.

“……!”

그 순간 희고 비쩍 마른 손이 우악스럽게 손목을 잡아챘다.

황제는 일부러 개의 균형을 무너트리려는 듯 힘을 주어 아래로 잡아당겼다.

“허.”

그러나 개는 흔들리지 않았다. 힘을 주어 멈춰 선 개가 당황한 듯 황제를 보았다.

자존심이 상한 듯 일그러진 황제의 얼굴이 개를 향했다.

개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뼈대가 드러난 흉기 같은 손으로 뺨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손끝을 적셨다.

고통은 두렵지 않았지만, 황제의 진노는 두려웠다. 분기를 이기지 못한 황제가 칼을 빼어 들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필히 죽게 될 것이다.

아직 죽어서는 안 되는데.

개는 얼굴을 내리칠 고통을 기다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그러나 손찌검 대신 기운이 빠진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를 악물었던 턱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검은 눈동자가 황제를 향해 돌아섰다.

“내가 힘을 들일 필요가 없지.”

벌떡 일어날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황제가 자신의 다리 위를 툭툭 두들겼다. 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손동작에 눈을 깜빡였다.

“앉아라.”

“…….”

붉은 용포를 걸친 황제의 다리 위에 시선이 맴돌았다. 개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하.”

텅 빈 무릎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개는 분명 ‘다리에 앉으라’는 말을 알아들었다. 혹독하게 훈련받은 짐승이 주인의 명령을 못 알아들을 리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건방지게 자신의 명에 따르지 않은 것이다.

황제는 심사가 크게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낯짝 좋구나. 그간 아주 잘 지냈던 모양이야. 내 말이 맞느냐?”

순종적인 자세로 꿇어앉은 개의 머리칼이 부드러워 보였다. 입은 것은 좋은 옷감의 옷이었고, 희미하게 보이는 살갗에는 혈색이 돌았다.

“바깥에선 뭘 하고 지냈지?”

황궁에 있었을 때보다 더 좋아 보이는 몰골. 그것이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살아 있음에도 황궁에 돌아오지 않고 어디서 지냈냐고 묻고 있지 않아!”

“…….”

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황제는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묻고 있었다.

어떻게 공작의 저택에 머물렀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말하는 순간 공작은 황제의 것을 빼돌린 죄로 목숨을 잃게 될 텐데.

그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감히 이 나를 속이고 죽은 체를 했지. 왜 그런 꾀를 부렸느냐.”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이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검은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죽은 체를 했다고? 그런 적도 없거니와, 황제의 눈까지 속이며 죽은 척하는 방법을 개는 알지 못했다.

“그간 입이 많이 무거워졌구나.”

“읏.”

대답을 하기도 전에 턱이 우악스럽게 붙잡혔다. 땅바닥을 보던 고개가 강제로 들어 올려졌다.

“억지로 네 입술을 벌려야겠느냐?”

포악스럽게 입술을 짓누르는 엄지가 곧 입 안에 쑤셔 박힐 것 같았다. 개는 미간을 미미하게 찡그렸다.

마주친 눈동자에 광기가 맴돌았다. 실핏줄이 터져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자위가 무른 과육처럼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니지. 아니야.”

개는 멈췄던 간신히 숨을 토해 냈다. 그악스럽게 입술을 누르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분노한 듯 보였던 황제의 눈가가 누그러들었다.

“네가 없어졌을 때 많은 고민을 했다.”

하얗게 튼 입술에서 말라붙은 시럽처럼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제에게서 들을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소름 끼치도록 낯선 목소리였다. 자연적으로 몸이 뻣뻣이 굳었다.

“다정한 주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소리다.”

황제는 개의 입술에 닿아 있던 손을 미끄러트려 뺨을 쥐었다. 뻣뻣이 굳은 근육이 부드러운 살갗 너머로 느껴졌다.

황제의 목울대가 가볍게 울렁였다. 희고 뜨끈한 살이 이리도 구미를 당긴 적이 있던가?

“뭐 갖고 싶은 게 있느냐? 그간 네 노고를 치하해 주긴커녕 모진 일만을 시키지 않았더냐.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봐라.”

뺨을 문지르는 손이 집요했다. 황제의 손이 스친 곳마다 달팽이가 지나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붙박인 듯 굳었던 입술에서 겨우 한 마디가 토해졌다.

“……없습니다.”

“드디어 그 비싼 목소리를 듣는군.”

황제의 모양 좋은 입술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왔는데 왜 이렇게 낯선 기분이 드는 걸까. 개는 멍하니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내 널 버리지 않으마.”

뺨을 매만지던 황제가 어깨를 두들겼다. 마치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듯. 그러나 왜인지 기쁘지 않았다.

하나도.

황제는 오랜만에 단잠에 빠졌다. 깊은 숙면에 든 그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평화로운 밤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병풍 뒤에 선 개는 무감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음기 가득한 자리. 이곳이 개의 자리였다.

충성스러운 개는 언제나 주인의 뒤에 서는 법이니까.

이상한 건 공작뿐이었다. 그는 개를 밖에 두지 않고 자신이 사용하는 침실에 놓았다. 같은 침대를 사용했고, 같은 것을 먹었다.

“…….”

소금 기둥처럼 가만히 서 있던 개가 무릎을 쪼그려 앉았다.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화가 났을 것이다. 공작은.

화가 많이 났을까? 너무 화를 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라도 전할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는 항상 자유를 존중했으니까. ‘황궁에 가야 한다’ 말하면 공작은 웃으며 ‘그래’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다녀와’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

검은 눈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황제가 잠든 사이 저택에 다녀오면 안 되는 걸까. 아주 잠시면 되는데. 아주 찰나의 순간이면 되는데.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운 좋게 황궁을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그사이에 황제가 일어난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공작도 온전치 못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개가 몸서리쳤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은 느리게 흘러갔다. 개는 뻑뻑한 눈을 비볐다. 장지문 너머로 희미한 빛이 비쳐 오고, 잠에서 깨어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마라.”

이른 아침이었다. 침상 위의 황제가 몸을 뒤척였다. 개는 바닥을 향해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가지 마!”

날카로운 비명 같은 소리였다. 개는 황급히 앞으로 뛰어나갔다.

병풍 바깥으로 나오자 침상에서 일어난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두려움의 빛이 선명했다.

“하…….”

그는 자신의 앞에 선 개를 보고서야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른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버석했다.

“뭘 보고 있느냐. 내 꼴이 우스우냐?”

“아닙니다.”

개는 무릎을 꿇어앉았다. 황제의 푸르스름한 낯이 개의 가마에 고정되었다. 장지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개의 피부가 하얗게 빛났다.

“이리 와라.”

황제의 마른 손이 까딱거렸다. 개는 무릎걸음으로 황제의 침상까지 기어갔다.

“머리를 숙여.”

시선이 내려가자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치는 흰 발등이 보였다. 황제가 무엇을 명령할지 알아챈 개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뭐 해, 입 맞추지 않고.”

황제는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듯 말했다. 창백한 발등이 촛불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

“어서.”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느껴지는 일.

황제는 자신의 발등에 입을 맞추는 개를 보며 기묘한 희열에 휩싸였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의 개가 다시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다. 남의 손을 탔음이 분명한데도 자신의 옆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마음 한편이 너그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 눈을 뜨면 당장에 개를 뒷조사하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을까? 개는 아직도 자신에게 이렇게 순종적인데 말이다.

충동적으로 개의 머리칼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끝에서 흐트러졌다. 실수인 척 귀 끝을 문지르자 개의 몸이 움칠 떨렸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검찰청의 내부. 외부인의 침입이 불가능한 장소에서 복면의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찾았나?”

“……죄송합니다.”

차현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수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규칙을 깨고 수하를 검찰청 안에 들인 것은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듣게 된 대답이 고작 ‘죄송하다’는 말이라니.

“씨발.”

낮게 읊조린 욕지거리에 수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차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나가. 계속 흔적을 쫓아.”

“예.”

수하가 순식간에 방 안에서 사라졌다. 텅 빈 방 안을 둘러본 차현의 입에서 짜증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검사님.”

그때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차현이 고개를 들자 재경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날 선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몸이 뻣뻣하게 긴장됐다. 아름다운 낯에 감춰져 있지만 차현은 저런 인간이었다. 모르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마주하는 서늘한 얼굴이 재경을 긴장시켰다.

“황제의 움직임은.”

“…….”

자신을 보자마자 묻는 목소리에 입술이 다물렸다.

차현은 개가 사라진 경위에 황제가 포함되어 있을 거란 가능성을 열어 둔 상태였다. 그렇기에 개가 사라진 아침, 황제의 동태를 살펴볼 것을 명령했었지.

“아직.”

재경은 입을 달싹였다.

차현의 감은 정확했다.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황제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개가 사라진 이후 호랑이 앞 여우 노릇을 하던 비서실장이 홀대당하기 시작했다. 그것만 보아도 황제의 심정에 변화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하지만 이 사실을 말해도 될지 알 수 없었다. 차현은 이미 충분히 전과 달라져 있었다.

“……아직 특별한 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재경은 결국 거짓을 토해 냈다. 자신답지 않은 일을 하는 것에 심장 한편이 불편하게 걸렸다.

“하.”

짧은 헛웃음을 터트린 차현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나가.”

그는 한참 만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석고로 빚은 듯 무감정한 얼굴이 곧 깨어질 유리잔처럼 불안해 보였다. 심상치 않은 표정을 읽어 낸 재경이 급히 입을 열었다.

“검사님. 개가 실종된 것은 예상 밖의 일이지만 지금은 앞일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황가의 핏줄만이 나라의 정점에 앉을 수 있는 제도를 없애고 그 자리에…….”

“말이 길군.”

재경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을 끊은 차현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왜. 내가 미친놈 같나?”

재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차현은 침묵을 지키는 재경을 보며 비소를 지었다.

“보고 끝났으면 나가. 진짜 미친 놈이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개는 눈을 내리깔았다. 소반을 사이에 두고 앉은 황제의 시선이 끈질겼다.

“갖고 싶은 게 있느냐?”

“없습니다.”

‘황제의 개’로 살면서 황제와 같은 상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개는 황제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그럼 먹고 싶은 것은.”

“없습니다.”

그는 비서실장의 만류에도, 한사코 개를 상 앞에 앉혔다.

개는 밖으로 나서던 비서실장이 자신에게 보낸 시선을 떠올렸다. 지긋지긋한 ‘황제의 개’가 돌아왔다는 듯 경멸 어린 표정.

“허어.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네가 달기1)라도 되는 줄 아느냐?”

1) 중국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애첩.

살갗이 따끔한 적의는 수없이 받아 보았다.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빴던 것은, 그가 자신을 ‘황제의 개’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자신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그러므로 ‘황제의 개’라 불릴 이유가 없었다.

“이젠 대답도 안 하는 것이냐?”

황제는 소반 위에 고정된 개의 시선이 불만스러워 혀를 찼다. 저 검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나긋나긋이 대답하면 좀 좋단 말인가. 예나 지금이나 아부를 부릴 줄 모르는 놈이었다.

양반다리로 앉아 있던 황제가 무릎으로 일어섰다. 그는 땅을 보는 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가까워지는 머리칼에서 비누 향이 날 것 같았다.

황제는 홀린 듯 개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손끝이 부드러운 머리칼에 닿으려는 순간.

“아.”

손이 내쳐졌다. 들어 올린 검은 눈이 당황한 듯 흔들리는 게 보였다.

“죄송, 합니다.”

개는 곧장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누군가의 손이 ‘머리에 닿는다’고 인식된 순간, 격렬한 거부감이 요동쳤다.

“하!”

황제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개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에 분노를 닮은 감정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맞을 것이다. 뺨을 처맞거나 발길질이 이어지겠지.

개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새 아주 건방져졌어. 까칠하기가 여간 까칠한 게 아니야.”

“……?”

기다려도 머리통을 징 하게 울리는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닥을 향해 있던 검은 눈이 위를 바라보았다.

“됐으니 입이나 벌려 봐라.”

황제의 마른 손이 반상 위에 놓인 다과를 집어 들었다. 갈색으로 튀겨진 약과가 입가에 불쑥 다가왔다.

“어서 먹지 않고 뭘 하느냐.”

다물린 입술을 짓누르는 약과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손끝이 곱아 들었다.

황궁의 음식은 독버섯 같았다. 정갈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그릇 안에 무슨 독이 들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입에 넣는 것은 고문과 같았다.

개는 입술을 벌려 약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신중한 얼굴로 약과를 우물대는 개를 보며 황제의 입술이 히죽 올라갔다.

“맛있느냐?”

무슨 맛인지 느낄 수 없었다. 조청에 조린 버석한 튀김이 혀끝에서 거슬거슬하게 부서졌다. 긴장으로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이것도 먹어 봐라.”

황제는 접시 위에 놓인 다른 다과를 집어 개의 입 앞에 내밀었다. 개는 역하게 느껴지는 단내를 맡으며 손을 말아 쥐었다. 삼키지 못한 약과가 아직 혀 위를 맴돌고 있었다.

“잘 먹는군.”

그러나 황명을 거절할 방법이 없었다. 개는 입을 벌려 입술에 닿은 다과를 물었다. 찐득하게 입 안을 떠돌아다니는 음식이 불유쾌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검은 눈에 어둑한 빛이 어렸다.

“황궁 바깥은 어땠느냐. 어딜 가든 황궁만 못하지 않더냐.”

“…….”

어딜 가든 황궁보다 나았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몸을 굳혔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던 거지?

“이 입은 먹을 때 빼고는 열리지를 않는군.”

황제는 입술을 꾹 다문 개를 보더니 쯧 혀를 찼다.

그는 다과상을 보고 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문밖에 시선을 두었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황제의 목소리에 궁인 하나가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조아리며 순종적으로 답했다.

“하명하실 것이라도…….”

황제는 다과를 더 가져오라 명령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

궁인이 힐끗 개를 흘기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명령은 그대로 토해졌을 것이다.

곧은 자세로 앉은 개를 흘기는 눈이 불쾌했다. 꼭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를 구경하는 시선 같았다.

평이하게 풀어져 있던 황제의 얼굴에 노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창백한 이마 위에 핏줄이 올랐다.

“감히 황제의 것에 시선을 두어?”

궁인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진노한 황제의 시선은 이미 그녀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반상을 박차고 일어선 황제가 노호성을 내뱉었다.

“비서실장!”

“예, 폐하.”

침전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비서실장이 서둘러 들어왔다. 황제가 삿대질로 궁인을 가리켰다.

“저놈의 눈깔을 파 궁궐 밖에 내쳐라.”

“폐, 폐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던 궁인이 눈을 크게 떴다. 곧장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려 했지만 비서실장이 그녀의 팔을 잡은 것이 먼저였다.

“감히 어느 안중이라고 큰 소리를 내느냐!”

“어, 어르신. 폐하, 폐하! 잘못했습니다!”

비서실장은 머리가 희게 센 노인임에도 아귀힘이 장성의 것과 다름없었다.

궁인은 비서실장에 의해 끌려 나가면서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눈알이 파일 이를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입은 화가 자신에게 옮을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침전 앞에 있던 이들이, 인간을 피해 도망가는 벌레들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

개는 열린 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궁을 떠나 있는 동안 잊고 있었다. 이것이 궁궐의 일상이라는 것을.

궁인의 눈알이 파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황제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 자체가 죄였으니까.

황제는 이 나라의 지엄한 법이자 지존이었다. 그 누구도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정말 그러한가?

“이제 네게 불쾌한 시선을 보내는 놈들은 없을 것이다.”

‘고작 황제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내 가족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이 나라에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해. 부모가 없어진 아이들은 구걸을 하고,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총칼 놀이를 하는데, 황제는 뭘 하고 있지? 눈앞에 거슬리는 것만 치워 내느라 급급하지 않나?’

이 순간 왜 잎사귀의 말이 떠오른 건지 알 수 없다.

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황제를 보며 불쾌한 습기를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저자가 큰 잘못을 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을 파내는 것은…….”

“저 궁인이 걱정되느냐?”

황제는 코웃음을 쳤다.

“황궁 바깥을 나갔다 오더니 동정심이 퍽 깊어졌구나. 아니,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별것도 아닌 벌레 같은 것에도 관심을 두고, 쓸데없이 시선을 주었어.”

과거를 돌아보는 듯한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 다녔다. 비명을 지르던 궁인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신경 꺼라. 궁인을 벌하는 것은 황궁의 주인인 내가 할 일이니, 너는 다과나 들어라.”

등 뒤에서 고요히 장지문이 닫혔다.

“뭐든 다 들어주겠다는 말에는 요지부동이더니 저깟 궁인의 눈알이 뭐라고. 너는 욕심이 없어도 너무 없어.”

타박하듯 말하는 황제의 입가에 기꺼운 미소가 떠올랐다.

개는 수북이 쌓인 다과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숨이 막혔다. 성대가 잘린 짐승이 된 것만 같았다.

황제가 정무를 보지 않는 건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시간 침전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애첩의 꼬임에 넘어간 폭군처럼 종일 침전에서 시간을 보냈다. ‘갖고 싶은 게 있느냐’, ‘하고 싶은 게 있느냐’ 묻는 황제는 입 안의 혀를 달래는 사람처럼 다정했다. 그 앞에 앉은 개가 잘 빚은 인형처럼 미동이 없어도 마찬가지였다.

“술이 달구나.”

밤이 깊어 가자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황제의 침전 안은 봄날처럼 따뜻했지만 개는 눈밭에 내쳐진 벌거숭이처럼 창백한 얼굴을 했다.

쪼르륵.

황제는 단숨에 비운 술잔에 술을 따랐다. 투명한 빛깔의 술이 특유의 냄새를 풍기며 가득 차올랐다. 일렁이는 액체 위에 방 안을 밝힌 빛 무리가 어른거렸다.

술잔을 입에 댄 황제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안주거리를 씹듯 개를 훑던 황제의 시선이 종국엔 입술에 머물렀다.

개는 손을 말아 쥐었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탓에 다리가 저릿거렸다.

탁.

상을 친 술잔에서 술 몇 방울이 튀어 올랐다. 황제는 술병을 쥐어 잔에 따르려다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돌기둥처럼 뻣뻣이 앉은 개를 향했다.

“따라 봐라.”

개는 흰 도자 병을 건네받았다. 찬 기운이 빠져나가 술이 미적지근했다.

황제가 개의 앞에 빈 잔을 내밀었다. 개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술병을 기울였다.

술을 들이켠 황제의 시선이 다시 개를 향했다. 전보다 끈적거리는 시선이었다.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시선이 개의 목덜미에 닿았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차현에게 물렸던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다행히 황제의 시선이 집요해지기 전에 술잔이 비었다. 그는 아쉽게 떼어 낸 술잔을 개의 앞에 불쑥 내밀었다.

“너도 마실 테냐?”

“아닙니다.”

개가 즉답하자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술기운 때문인가, 미미하게 혈색이 도는 입술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저 입술 사이에 좆을 쑤셔 넣었던 적이 있었다. 황후의 자리를 노린 멍청한 계집과 노망난 늙은이의 간교로 미약을 먹었을 때였던가.

몸은 타는 듯 뜨거운데 욕구를 풀 곳은 없어 눈이 뒤집어졌었다. 회임의 우려도 없고 권력을 탐할 위험도 없으니 제격이라 생각했다. 혀도 쓸 줄 모르는 작은 입을 벌려 좆을 쑤셔 박으니 곧 뜨끈하게 달아올라 쓸 만했었지…….

그땐 볼품없는 개새끼에게 욕정을 풀었다는 게 찝찝해 덮어 두었는데 말이다. 오늘따라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술을 연거푸 들이켰는데도 입이 말랐다. 황제는 입 안에 남은 씁쓰레한 맛을 모아 삼켰다.

언제 등을 찌를지 모르는 계집을 안는 것은 지긋지긋했지만, 사내놈의 엉덩이를 벌리는 것은 또 역겹게 느껴졌다. 그런데…….

황제는 고개를 가볍게 기울였다. 술기운 때문이든 뭐든 문제 될 게 있겠는가. 내 것을 내가 취하겠다는데.

쿠당탕!

술상이 뒤엎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순식간에 개의 머리 위를 덮친 그림자가 온 무게를 더해 몸을 짓눌렀다.

“……!”

방심한 개의 몸이 반쯤 뒤로 넘어갔다.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것은 순간적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지탱했기 때문이었다.

개의 손에서 떨어진 술병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황제의 축축한 숨결이 관자놀이에 닿았다.

창백한 손이 어깨를 짚었다. 개는 자신의 몸에 드리워진 황제의 그림자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몸 위로 무게를 싣는 황제의 손이 지렁이처럼 쇄골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희게 터 거슬거슬한 입술이 관자놀이에서 뺨으로 내려왔다.

은밀한 목적을 가진 손은 거침이 없었다. 쇄골 위를 지분대던 손이 갈비뼈를 지나 엉덩이 위로 떨어졌다.

그는 둥그런 엉덩이를 한 손 가득 그러쥐고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개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기억하느냐.”

흰 뺨을 핥아 올린 황제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개의 살갗이 파르르 떨렸다. 솜털이 바짝 설 정도의 거부감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네 입술에 내 남근이 들어갔었지.”

뺨에 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개는 자신과 얼굴을 마주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욕정으로 들끓는 눈에 탐욕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네 입 안이 좁은지 궁금하구나.”

뜨거운 숨결을 내뱉는 코가 콧방울에 닿아 뭉개졌다. 술 냄새가 풍겨져 나오는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칠 것만 같았다.

황제와 입을 맞춰야 한다고? 끔찍한 가정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쿠당탕.

무게를 실어 자신을 깔아뭉갠 이를 밀쳐 낸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개는 뒤로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은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밴 손이 축축했다.

차현과 입을 맞출 때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는데.

“너.”

낮게 짓이겨진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개는 급히 고개를 돌려 넘어진 황제를 눈에 담았다. 새파란 분노가 타오르는 눈이 개를 직시하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리 와.”

개는 자신도 모르게 엉덩걸음으로 물러섰다. 황제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내 너에게 정을 베풀어 주려 하지 않느냐. 응?”

그는 갑작스레 낯을 바꿔 어설픈 미소를 걸쳤다. 개를 잡을 것처럼 한 손을 내뻗은 황제의 입에서 설탕을 문 듯 달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소름이 끼쳤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저렇게 일순 감정이 바뀌지 않는다. 과거라면 황제의 저런 행동이 이상하다 생각되지 않았을 테지만, 이제는 달랐다.

황제는 정상이 아니었다.

“싫습니다.”

목소리 끝이 짧게 떨렸다.

살면서 황제의 명령에 불복했던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

황명을 거절했으니 죽게 될지도 몰랐다.

개는 손을 말아 쥐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대로 흔들리고 싶지도 않았다. 황궁 바깥으로 나가고 싶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든 웃으며 용인하는 남자가 보고 싶었다.

자유.

황궁 담 너머의 사람들이 수없이 입에 담던 단어가 숨통을 움켜쥐었다. 폐가 쥐어짜지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개는 밭은 숨을 내뱉었다. 선명하던 시야가 삽시간에 부옇게 번졌다.

“너……?”

자신은 왜 ‘싫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것을 각오해야 하는가.

아직 자신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태성에게 사과를 해야 했고, 공작과 약속한 ‘다음’을 지켜야 했다.

또 세상에 남은 무도한 자들의 숨통을 끊어 놔야 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고,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또 다른 ‘태성’이 생길 테니까.

하지만 황제의 그림자 안에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개는 황궁의 네모난 하늘 아래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황제의 손아래서 꼭두각시 인형처럼 흔들릴 것이다.

황제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그 사실을 깨닫자 둑이 터지듯 생각이 밀려들었다.

이 나라의 인간들은 왜 불행한 얼굴로 죽음을 기다리는가. 고작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파리 목숨처럼 스러지는 수많은 삶은, 배를 불리는 귀족들의 삶과 대체 다를 것이 무엇인가.

어차피 똑같이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에 불과한데.

“하.”

황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개의 커다란 동공에 투명한 물이 흠뻑 고여 있었다. 툭 건들면 와락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내가 비루먹은 네놈과 진짜 정이라도 나눌까 겁이 났느냐?”

개의 눈물은 당황과 공포를 동반했다.

황제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검은 눈으로부터 홱 시선을 피하며 손을 내저었다.

“됐다. 나가 봐라!”

죽이지 않는 건가? 의외였지만 다행인 일이었다.

“네.”

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가 침전을 나설 때까지 황제의 시선은 딴 곳을 향해 있었다.

탁.

장지문이 닫히자 겨울의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입가에서 희부연 김이 흩어졌다.

침전 앞에 서 있던 비서실장의 매서운 눈동자가 개를 향했다.

“돌아왔다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개는 고개를 돌려 비서실장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조금 더 늙었고, 조금 더 여우 같은 인상으로 변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너는 폐하의 걸림돌밖엔 되지 않는다.”

“…….”

“조심하라는 얘기다. 울상을 한 꼴을 보아하니 또 토사구팽을 당하게 생겼으니…….”

비서실장이 퍽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개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나가라는 명령에도 개는 황제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침전 앞에 서서, 자신의 처지를 일깨우는 비서실장과 있는 게 최선일 뿐이었다.

개는 어둑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차현에게 인사를 못 한 게 마음에 걸렸다. 손톱 주변에 난 거스러미처럼, 계속.

“어제는 내가 너에게 모질게 굴었다.”

아침이 되자 황제는 개를 다시 침전으로 불러들였다. 그는 화려한 자개함을 개의 앞에 밀어 놓으며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냈다.

“자, 열어 봐라.”

개는 자신의 앞에 놓인 함을 내려다보았다. 미끈한 검은색 함은 걸쇠로 굳게 잠겨 있어 무엇이 들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서 열어 보래도.”

황제가 미동도 않는 개를 재촉했다. 개는 그제야 손을 움직여 자개함의 걸쇠를 당겨 풀었다.

달칵, 하고 붉은 비단으로 감싸인 상자 안쪽이 드러났다. 개는 비단 위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보석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부족한가? 더 가져다주랴?”

“아닙니다.”

암살자에게 보석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에게 보석이란 강물에 있는 자갈보다 조금 더 반짝거리는 돌멩이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냐.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을 해라.”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개가 답답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아’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무리 달기라 불렀기로서니, 너도 주지육림(酒池肉林)이 갖고 싶더냐?”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주지육림. 말 그대로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그런 장소를 갖고 싶어 한다고?

“네가 원하면 기꺼이 이 황궁 안에 만들어 줄 수 있다. 어떠냐, 만들어 주랴?”

“원하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절로 딱딱해졌다.

황제는 개에게 갖고 싶은 게 있느냐 묻고, 더 큰 것을 앗아 가려 했다. 어제의 일만 해도 그랬다. 내내 입 안의 혀를 달래듯 달짝지근하게 굴던 이가 낯면을 바꿔 자신을 깔아뭉갰다.

이번엔 또 무엇을 앗아 갈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 무어냐. 말을 해라, 말을!”

탕!

황제가 책상을 내리쳤다. 강한 충격에 자개함이 흔들리며 안에 있던 보석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황제는 빛을 굴절시키며 빛나는 보석들을 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말을 해야 들어줄 것이 아니냐. 응?”

마른 손이 책상 위에 놓인 개의 손을 향해 다가왔다. 손등 위를 덮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개는 재빠르게 손을 뒤로 내빼며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마 위에 불룩 솟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원하는 바를 말하지 않으면 지지부진한 소모전이 계속될 것이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목구멍 아래서 들끓던 소망이 불현듯 튀어나왔다. 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가고 싶습니다.”

“뭐? 어제도 나가지 않았더냐.”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황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후원까지라도 홀로 가고 싶습니다.”

“하.”

황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 앉은 개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과거의 개라면 저런 맹랑한 말은 못 했을 것이다. 멍청한 얼굴로 ‘네’, ‘아니오’만 내뱉으며 자신의 명령을 고분고분 따랐겠지.

대체 바깥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거지?

그는 잠시 미뤄 뒀던 개의 뒷조사 건을 떠올렸다. 다시 진행해야겠군. 실핏줄이 터진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 전에 개를 어르는 것이 먼저였다.

“네게 이보다 더 귀한 보석도 줄 수 있다. 그런데 고작 후원까지 혼자 가는 걸 원한다고?”

황제는 책상 위를 나뒹굴던 보석 하나를 집어 개의 앞에 들이밀었다. 투명한 홍보옥이 황제의 눈처럼 새빨간 빛을 내뿜었다.

개는 무감정한 얼굴로 입술을 벌렸다.

“네.”

“다시 생각해…….”

“폐하.”

황제의 말을 끊는 다급한 목소리가 장지문 너머로 들려왔다. 황제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에 가 닿았다. 열린 문 너머로 비서실장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급히 가 보셔야 할 용무가.”

“미뤄라.”

황제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새빨간 눈동자가 비서실장에게서 떨어져 개를 향했다.

“폐하.”

“미루라 하질 않느냐!”

재촉하는 목소리에 황제가 바락 언성을 높였다. 비서실장은 더욱 몸을 옹송그렸다.

“하오나 폐하…….”

“빌어먹을.”

홍보옥을 움켜쥔 황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핏줄 선 주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그는 결국 보석을 바닥에 내던졌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원까지만이다.”

그는 인형처럼 앉은 개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 이상은 안 돼.”

“네.”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개는 황제와 비서실장의 기척이 멀어지길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켰다.

“…….”

침전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들이닥쳤다. 개는 힐끗 자신을 쳐다보는 궁인들의 시선을 지나쳐 후원에 다다랐다.

황제가 이용하지 않는 후원은 살풍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개는 꽝꽝 얼어붙은 연못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 주변에 선 키가 작은 나무의 가지를 꺾었다.

쪼그려 앉은 개는 비쩍 마른 나뭇가지로 바닥을 긁었다. 딱딱하게 언 땅은 잘 긁히지 않았다. 개는 나뭇가지를 고쳐 쥐고 힘을 주어 바닥을 긁어 내기 시작했다.

「사마귀」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건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황궁과 관련 없는 짓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뇌를 지배했다. 황궁 담 너머에 있을 세상을 떠올리고 싶었다.

차현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자신을 잊어버렸을까?

그는 바쁜 사람이니 개가 사라진 것에 별 관심을 두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개 스스로 황궁에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게 아닌데.

「사마귀의 상태는 여전함」

개는 어느 날 보았던 전령의 내용을 흙바닥에 빼곡히 적었다. 적고, 또 적었다. 발밑이 글자로 가득 차고, 나뭇가지가 굳은 흙으로 새까매질 때까지 글자를 새겼다.

“…….”

개의 몸이 움칠 굳은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불현듯 손을 멈춘 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 글자를 지우기 시작했다.

굳은 흙은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단순히 신발 밑창으로 비비는 것 정도로는 글자가 뭉개지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개는 신발코로 흙을 파헤치듯 걷어찼다.

“사마귀의 상태는 여전함?”

글자를 다 지워 내지도 못했는데, 누군가의 기척이 등 뒤에 멈춰 섰다.

개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황제가 서 있었다.

“뭐지?”

흙바닥을 내려다보던 황제의 시선이 개를 향했다. 붉은 눈에 싸늘한 빛이 스쳤다.

“사마귀의 상태가 여전하다는 건 무슨 소리냐.”

입을 달싹였지만 나오는 말은 없었다. 당황하긴 개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마귀의 상태가 여전하다고? 곤충 사마귀의 상태를 전령으로 받지는 않았을 테니, ‘사마귀’는 누군가의 가명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개가 아는 한 그런 가명을 가진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태성.

그러니 이것은 태성의 상태가 여전하다는 말이었다. 그런 정보가 왜 전령 새를 통해 들어온 걸까.

“글자를 읽지 못하는 네가 기억하는 문장이라면 평범한 건 아닐 텐데.”

회색 깃의 새는 개가 혁명단 내부에 들어가기 전부터 오고 가던 새였다. 목줄 찬 신세가 되기 전부터, 태성이 자신의 시종으로 배정되기 전부터 드나들던 새.

여태 공작과 혁명단 사이에 접점이 생긴 건 자신의 탓이라 생각했다. 그날 멋대로 혁명단에 쳐들어갔기에, 죽어 가는 잎사귀를 살려 달라 했기에 접점이 생겼다 여겼다.

실은 그것이 아니었다면.

공작이 그 전부터 혁명단과 내통했다면.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뇌를 울렸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공작은 혁명단과 접촉해 무슨 일을 벌이려 했던 걸까. 머리를 굴려 봤지만 그의 목적이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말해라.”

그 순간 누군가 개의 양팔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개는 혼란스럽게 뒤흔들리던 시선을 올려 황제를 보았다.

“두 번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말해.”

황제의 일그러진 얼굴에 광기가 맴돌고 있었다. 흥분한 홍채가 터질 것처럼 벌어졌다. 피를 봐야만 안정을 되찾을 것 같은 광증. 개의 양팔을 움켜쥔 손에 불긋한 핏줄이 불거졌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온몸에서 위험 신호를 내뱉고 있었다. 황제의 의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전에 진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공작이 먼 옛날부터 혁명단과 내통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떻게 고한단 말인가.

입에 아교가 붙은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날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이 내가 알아내면 그만인 것을.”

개가 침묵을 지키자 황제의 얼굴에 조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힘껏 움켜쥐었던 개의 팔을 거칠게 놓았다. 강한 악력에 들리다시피 까치발을 섰던 개가 비틀 물러섰다.

황제는 그런 개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뒤돌았다. 멀찍이 서 있던 궁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개중 한 명을 불러 가까이 오라 명령했다.

“거기 너.”

“예, 폐하.”

“비서실장을 불러와라.”

그 순간, 멍하니 풀렸던 개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황제의 붉은 눈이 개를 힐끗 돌아보았다.

“내 지시할 것이 있으니.”

마주친 황제의 시선은 단순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말할 것이라면 지금 말해라. 이것이 마지막 기회니.’

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황궁 밖에서 본 글자입니다.”

개는 황제의 곁에 선 궁인을 보았다. 황제에게서 물러나라는 지시를 받지 못한 궁인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니 당장 비서실장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다라고?”

“……밖에 있었을 때, 어린아이와 함께 있었습니다.”

굳었던 머리가 다시 회전하는 순간, 혀가 거짓말쟁이의 것처럼 유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레를 구경하던 아이가 쓴 일지를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일지?”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별것도 아닌 벌레 같은 것에도 관심을 두고, 쓸데없이 시선을 주었어.’

때마침 황제의 말이 떠오른 것은 천운이었다.

황제는 미심쩍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있어서인지 수긍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렇단 말이지.”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개의 얼굴에서는 원체 감정을 읽어 내기 힘들었다. 아마 저 무표정한 얼굴로 거짓말을 한다면 자신은 의심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개가 거짓말을 할 것이란 생각이 들진 않았다. 개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번견이었다. 자신의 등을 지키던 존재감이 없어진 시간 동안 절절히 깨닫지 않았던가.

“들어가 있어라.”

황제는 고개를 수그린 채 침묵을 지키는 개에게 명령했다.

“오늘의 외출은 끝이다.”

“예.”

개는 순순히 대답했다.

어쩐지 멍해 보이는 얼굴이 황제의 곁을 스쳐 멀어졌다. 황제는 사라지는 개의 등 뒤를 바라보다가 흙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사마귀의 상태는 여전함」

그는 바닥에 남은 삐뚤빼뚤한 글씨를 발로 직직 그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언 바닥은 원하는 만큼 깨끗해지지 않았다.

징그러운 곤충 따위를 관찰하고 적은 문장이라고?

자신의 개는 이딴 하잘것없는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황제의 미간이 와작 찡그려졌다. 땅바닥에 지워지지 않은 글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걸 보던 황제가 홱 고개를 돌렸다. 물러서지 못하고 대기하던 궁인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비서실장에게 전해라. 어린아이가 있는 집 위주로 조사하라고.”

“예, 폐하.”

“물러가라.”

황제는 손을 휘휘 내젓고 개가 사라진 길을 바라보았다. 잔뜩 구겨졌던 그의 얼굴에 불현듯 미소가 떠올랐다.

개는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등을 쫓아 붙잡으면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려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기분이군.”

기분 좋은 미소를 걸친 황제가 걸음을 뗐다. 검은 목화를 신은 발이 조금씩 빨라졌다.

‘황제가 남자를 데려왔다’는 소문은 빠르게 궁 안을 휩쓸었다. 또한 그 남자가 황제의 침전에서 벗어나질 않는다는 소문도.

고작 며칠이었지만 황제는 눈에 띄게 변화했다. 물론, 좋은 변화는 아니었다.

“폐하께서 집무에서 손을 놓으신 지 벌써 며칠째람…….”

빨래방에 앉은 궁인이 자신의 발을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려니 다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무성의하게 걷어 올린 치마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가 새빨갰다.

“폐하의 침전에 머무는 그 남자가 폐하의 애첩이라며? 밤마다 뭐 엎어지는 소리하며 폐하의 고성하며…….”

“얘!”

다리를 주무르던 궁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너 미쳤니? 여기 황궁 안이라는 거 잊었어?”

“여기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탈수를 마친 빨랫감을 바구니에 담던 궁인이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폐하께서 종일 남자 하나만 끼고 침전에 틀어박히셨는데 어떻게 그 얘길 안 해. 그리고 너도 그 얘기 하려던 거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만.”

얼쯤한 얼굴을 한 궁인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통제된 사회 속에서도 더욱 옭죄어진 공간인 황궁에선 소문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폐하가, 남자를…….’

‘……침전에서……….’

요 며칠 새 궁인들은 황제와 황제가 데려온 남자를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건 빨래방에 있는 궁인들뿐 아니라 전각을 지나는 이들과 궁궐 담을 스치는 궁인들의 입에서도 노래 자락처럼 흘러나왔다.

들끓는 소문은 마침내 궁궐 담을 넘어 권력자들의 귀에까지 닿았다. 궁궐 바깥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신경도 쓰지 않고, 애첩을 끼고 노는 황제의 모습은 부패한 권력자들을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회의가 다시 열렸군.”

권력자들이 원탁에 모였다.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몸을 사리던 귀족들마저도 모두 이 자리에 참석했다. 회의장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젠장, 폐하는 평생 관심도 없던 계집질에 빠져서는……!”

누군가가 토해 낸 노호성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불만이 끓어올랐다.

“계집질이라니? 자네는 사내놈을 끼고 노는 것도 계집질이라 하는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원탁을 뛰어넘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사선을 향했다.

“말조심하게. 대한제국의 황제가 비역질을 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하, 지금도 황제를 비호하는 멍청한 인간이 남아 있구만. 그 잘난 황제는 사내놈 바지 속에 머리 처박고 헐떡거리고 있는데, 이 판국에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해서야!”

“지금 말 다 했나?”

“뭘 다 해? 할 말 다 하려면 5일 밤낮도 부족한데 무슨 소리!”

사납게 목소리를 내뱉던 이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멱살을 잡고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는가? 국민의 말을 대신 전한다는 선전지가 나돌고, 사람들은 그걸 주워 보고 있어. 그런데 폐하께서는 이걸 통제조차 하지 않으시고……!”

“어려운 얘기 말고 대책이나 말하란 말이야, 대책이나!”

회의라는 명분으로 모인 자리가 시장통처럼 시끄러워졌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겹겹이 숨겼던 천박한 근성들이 얼굴에 드러나고 있었다.

“네 딸년 간수는 잘 하고 있나? 아, 그래. 손자가 태어났다 했지. 애들은 한눈팔면 사라진다던데, 조심해야지 않겠어?”

“이 호로 잡놈 새끼가!”

누런 이 사이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고, 목구멍 깊은 곳에 고였던 침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원탁에 놓였던 온갖 서류는 이미 갈가리 찢겨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이보게들……!”

평정을 유지한 누군가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회의장은 더 큰 고성과 욕설로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쾅!

그때 소란으로 가득 찬 회의장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늙은이들의 눈길이 회의장의 입구를 향했다.

“…….”

그곳엔 검은 제복을 입은 차현이 서 있었다. 그의 어깨에 걸쳐진 긴 흰 코트가 바람에 한차례 펄럭였다.

“다들 죽지 않고 살아 계시는군요.”

그렇게 와 달라 애원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초대도 하지 않은 자리에 불쑥 나타나다니.

차현을 비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비싼 얼굴이라 보기 힘든 거냐며 비아냥대고 싶었다.

“시끄럽게 구는 걸 보아하니 건강하시기까지 한가 봅니다.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날이네요.”

회의장에 있는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원탁을 양손으로 짚고 선 차현의 얼굴이 왠지 심상치 않았다.

“덕분에 한 번만 말해도 되겠군요.”

언제나 유약하게 웃음 짓던 얼굴에 광기를 닮은 싸늘한 감정이 흘렀다.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내뱉던 늙은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무슨 안건을 꺼낼지 모두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차현의 옆에 선 재경에게 시선을 보냈다. 보좌관인 재경이라면 차현의 이상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러분을 대표해 폐하를 뵐 겁니다.”

그러나 평소라면 샐샐대며 약을 올렸을 보좌관이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차현을 향했다.

차현의 말이 가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귀족들을 대표해서 황제를 만난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행위였다. 게다가 그 책임은 귀족들이 나눠 받아야 할 것이다.

평소라면 결사코 반대했을 일.

“회의는 이만 끝내도 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한 마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저 제복이 가진 무게가, 아니, 그가 가진 무게가 언제부터 저렇게 무거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회의장의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처럼, 차현은 홀연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윤재경이 그의 뒤를 따라 나갔다.

떠들썩하던 회의장이 수면 아래에 잠긴 것처럼 고요해졌다.

“검사님.”

“입 다물어.”

차가운 목소리가 차 안을 가로질렀다.

재경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애써 숨겼던 사실을 차현은 손쉽게 알아차렸다.

개가 황제의 손에 넘어갔다.

그 사실을 차현이 오랫동안 모르리라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 생각했다. 황제가 남자를 끼고돈다는 소문이 궁 안에 삽시간에 퍼져 나갔으니까.

하지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될 줄은 몰랐다. 황제와 관련된 움직임은 자신이 파악하고 있으니, 조금 더 그의 눈을 가릴 수 있을 줄 알았다.

‘윤재경.’

그리고 오늘 아침,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주제넘은 짓을 했지?’

차현은 타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도움이 되는 것은 너그러이 취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치워 낸다. 황제의 탄신일에 무고한 사람을 테러범으로 몰아 죽였던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재경이 아직 차현의 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일에 너무 깊게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죽여 버리기엔 재벌가의 차남이라는 재경의 배경이 걸리고, 쳐내기엔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

재경은 룸 미러 너머의 차현을 힐끔 보았다.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는 확신이 선 이상 두렵지는 않지만, 언제까지 이런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진 않았다.

달칵.

그러나 차현은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재경은 황궁으로 성큼 걸어가는 차현의 뒷모습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

차현은 서늘한 얼굴로 황궁을 가로질렀다. 침전으로 향하는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궁인들이 무어라 소곤대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마침내 침전 앞에 선 차현은 비서실장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새 더 늙은 태가 나는 비서실장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폐하를 알현하러 왔습니다.”

차현의 목소리가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진동시켰다.

주름진 입을 우물거리던 비서실장이 곤란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알현을 받지 않겠다…….”

“이사이 불만에 찬 목소리가 가득합니다. 어르신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지요.”

차현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비서실장을 직시하는 눈동자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폐하를 만나 뵈어야겠으니 고하십시오.”

비서실장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망설이듯 장지문을 힐끗대더니, 곧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려 주십시오.”

황제의 허락을 맡은 비서실장이 침전 안으로 사라졌다.

차현은 닫히는 문 사이로 드러난 침전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문틈 새로 익숙한 등이 보였다.

등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연우.

가슴을 지글지글 끓게 만드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그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저 등을 끌어내 자신의 품에 넣고 싶다는 욕망이 들 뿐이었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살냄새를 맡고 싶었다.

황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를 자신의 영역에 두고 싶었다.

탁.

장지문이 고요히 닫히며 작은 등을 삼켰다. 차현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시 문이 열리기까지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들어오시지요.”

마침내 비서실장이 침전의 문을 활짝 열었다. 차현은 눈을 들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여긴 웬일이냐.”

차현은 삐딱하게 앉아 불편한 목소리를 내는 황제를 바라보지 않았다.

“…….”

“…….”

병풍의 그림자가 진 곳에 서 있던 개와 눈이 마주쳤다. 석고처럼 굳어 있던 검은 눈동자에 파동이 일었다.

차현은 자신을 발견한 직후 변화하는 개의 표정을 보며 미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폐하.”

그러나 너무 오래 시선을 주어선 안 됐다. 황제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끝이었다.

차현은 황제의 앞에 부복했다.

“귀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하, 어이가 없군. 그래. 할 줄 아는 건 제 배를 불리는 것밖에 없는 돼지 새끼들이 뭐가 불만이라더냐.”

“궁궐 바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이 불안한 듯했습니다.”

차현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옮겼다. 그림자 뒤에 있던 개의 몸이 움칠 떨렸다. 흉터 가득한 손을 힘껏 움켜쥐고, 검은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차현은 오랜만에 마주한 개의 몸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폭도들을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을 네게 모두 일임하지 않았더냐.”

“예.”

차현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비쩍 말라 핏줄이 선 황제의 주먹이 눈에 들어왔다.

“워낙 비밀스러운 자들이기에, 잡아들이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송구합니다.”

“하, 그놈들은 늙더니 인내심마저 삭아 없어져 버린 것이냐. 잠시 기다리는 것도 못 한다더냐?”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던 차현이 힐끗 시선을 올렸다. 개의 시선이 붙박인 듯 차현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못내 기껍고 애틋하여서 외면하지 못했다.

“그놈들…….”

황제는 차현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보았다. 그곳엔 멍한 얼굴로 선 개가 있었다. 홀린 듯, 혹은 아름다운 예술품을 마주한 듯한 눈빛.

“…….”

주먹 쥐어진 황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개는 자신에게 저런 시선을 보낸 적 없었다. 그런데 고작 겉껍데기에 시선을 빼앗겨 저런 표정을 짓다니. 진짜 제 주인에게는 ‘싫다’는 불경한 말만 내뱉는 놈이!

“왜 맡은 일 하나 제대로 못 해내는 거지?”

어느새 황제의 목소리에 억눌린 분노가 섞였다. 차현은 뒤늦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불찰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한시라도 빨리 역적들을 산 채로 잡아 와라. 내 손수 그들의 사지를 찢어 죽일 것이니.”

핏발 선 눈이 차현을 직시했다.

“할 말 끝났으면 나가라. 더 이상 너와 할 말이 없다.”

“폐하.”

“나가라 하질 않느냐!”

고성이 침전 안을 쟁쟁 울렸다.

차현의 차가운 눈빛이 황제를 향했다.

“예.”

그러나 입가엔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눈동자에 떠오른 차가운 빛 역시 반달로 휘어진 눈꺼풀에 가려졌다.

차현은 장지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떠올랐던 웃음이 재 속 불씨처럼 천천히 사그라졌다.

높은 곳에 오르고, 더 높은 곳에 올라도 늘 모자랐다.

권력이란 표류자 앞에 놓인 바닷물 같았다. 갈증에 시달리는 인간은 바닷물이 죽음을 불러일으킬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것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당장의 갈증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무력한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차현의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넘어 있었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는 더 높은 곳에, 더더욱 높은 곳에 도달해야만 했다.

탁.

차현의 그림자를 삼킨 장지문이 닫혔다. 개는 그가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점점 기척이 멀어지고 있었다.

“…….”

손끝이 움찔 곱아 들었다.

공작을 마주한 순간, 수많은 밤 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고민이 휘발된 듯 사라졌다.

전령, 회색 깃의 새, 태성.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그저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자신을 다시 ‘연우’라고 불러 주길 바랐다.

새장에 갇힌 앵무새처럼 황제와 도돌이표 같은 대화만을 반복하는 삶은, 숨이 막혔다. 자유가 있는 너른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저 문 너머로 사라진 이의 등을 따라가고 싶었다.

“하. 아주 뚫어져라 쳐다보더구나.”

장지문에 못 박혀 있던 시선이 간신히 돌아섰다. 황제는 잔뜩 구겨진 미간을 숨기지 않은 채 짓씹는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공작의 얼굴이 그렇게 탐이 나더냐? 그 거죽을 벗겨 안겨 주리?”

“……아닙니다.”

공작의 벗겨진 거죽을 떠올렸다. 섬뜩한 기분에 몸서리가 쳐졌다.

“황제의 개가 고작 아름다운 껍데기에 시선을 빼앗기다니. 수치가 따로 없군.”

“…….”

낮게 들끓는 황제의 목소리에 악의가 뒤섞였다. 개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황제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저자가 어떤 자인 줄 아느냐?”

황제는 고자질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첩의 배에서 났다는 남자다. 한데 병상에 있던 공작 부인과 닮지 않은 건 그렇다 쳐도, 붕어같이 생긴 선대 공작과는 왜 닮지 않았을까. 너도 머리가 있다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호적에 오른 뻐꾸기 새끼. 그게 바로 저 공작이다.”

뻐꾸기는 산란기에 있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고, 그 새의 새끼를 둥지에서 밀어 죽이며 번식하는 새였다.

황제는 반응 없는 개를 보며 초조한 듯 탁자를 손끝으로 두들겼다.

“그런 주제에 능력은 아주 탁월했다. 머리가 비상하고 몸 쓰는 일도 곧잘 하는 편이었지. 하지만 전 공작은 장남을 후계자로 삼고 그놈만 노골적으로 편애했어. 저자는 말만 공작가의 차남이었다. 전 공작이 제 종놈만도 못하게 대하니 모두가 쉽게 보지 않았겠느냐?”

개의 눈꺼풀이 움칠 떨린 것은 그때였다. 황제는 개의 움직임을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리저리 많이도 굴러먹었을 거다. 저 껍데기 아래 있는 건 난잡하고 추잡한 것들뿐이지.”

“…….”

개는 손을 말아 쥐었다. 황제가 내뱉는 말은 너무 복잡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차현은 개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이젠 그가 없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가 없다면 별 시답잖은 것으로 웃어 줄 사람이 없었다. 그가 없으면 더 이상 태성의 상태를 보아줄 사람이 없었다.

그가 없으면, 슬퍼질 것이다.

“이리 와라.”

황제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는 별다른 저항 없이 황제의 앞에 걸어갔다.

“내 앞에 무릎을 꿇어.”

무릎을 꿇었다. 양반다리로 앉아 있던 황제가 성급한 무릎걸음으로 개에게 다가왔다.

“내게 입 맞춰라.”

“할 수 없습니다.”

가까워진 황제의 눈이 게슴츠레했다. 개는 그 소름 끼치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황급히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가로막았다.

커다란 그림자가 개의 무릎 위를 덮쳤다.

“읏!”

황소처럼 무지막지한 무게로 밀어붙인 황제의 입술이 손바닥에 닿았다. 황제의 입을 가로막은 손등이 이에 거칠게 부딪쳐 고통이 피어올랐다. 개는 미간을 찡그렸다.

“……!”

그 순간 황제가 혀로 손바닥 안쪽을 핥았다. 축축하고 뭉뚝한 살덩이가 뭉개진 손금과 흉터를 핥아 올리는 감촉이 소름 끼쳤다. 개는 벌레를 물리치듯 손을 홱 치워 냈다.

촉.

그리고 입가에 누군가의 입술이 닿았다.

개는 목덜미를 뻣뻣하게 만드는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확장된 동공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황제를 담았다.

“네가 싫다 한들 내가 못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는 자신이 한 짓이 퍽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개는 황제의 타액이 묻은 손을 등 뒤에 벅벅 문질러 닦으며 입을 앙다물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널찍한 테이블 앞에 선 여자가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제각기 다른 얼굴의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접점도 없어 보이는 이들.

이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결전의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테이블을 짚고 선 여자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커다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습니까?”

“그럼, 당연하지!”

여자의 말에 한쪽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큰소리를 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혁명단 일원이 모두 모인 자리인 만큼, 낯선 얼굴도 몇 존재했다.

“물론, 공작 그 양반이 갑자기 시일을 당기라고 압박을 하니까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양반, 또 약한 소리 하네!”

그러나 그들을 배척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한 중년 여자가 그의 어깨를 퍽 치며 외치자, 남자는 아픈 티를 내며 ‘그 힘은 여전하구만’ 하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사람은 요새 안 보이는가?”

“누구요?”

상태가 꽤 많이 호전된 잎사귀도 자리에 있었다. 그 앞에는 모자가 지루한 듯 턱을 괴고 앉아 물을 홀짝댔다.

“아, 거 있잖아. 깡패 새끼들이랑 군인 놈들 쓱싹 한다던 인간. 그 친구도 보고 싶었는데.”

중년의 남자가 ‘쩝’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자, 누군가 ‘그러고 보니’ 하고 운을 뗐다.

“그 사람 안 보인 지도 한 일주일 정도 됐나?”

“설마 잡힌 건가?”

“에이! 잡혔으면 군부가 가만히 있으려고. 온 언론에서 ‘마침내 역적 붙잡아 참수하다!’라면서 대대적으로 떠들어 댔을 텐데. 잡혔으면 진즉 죽이는 모습을 보여 줬을 거야.”

“하긴…….”

대화의 주제가 의문의 살인마를 향해 뻗어지고 있었다. 자리에 잠자코 앉아 있던 노인이 목소리를 낸 것은 그때였다.

“자자,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 하고 이야기나 마저 하지.”

의문의 살인마.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영웅일 남자. 혁명단 안에서 유일하게 그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노인이 부드럽게 화제를 바꿨다. 그의 시선이 여자를 향했다.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몇 주 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공작은 일을 빨리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타당한 이유도 없었다. 그는 그저 쫓기듯 더 빨리, 더 급진적으로 혁명을 진행해야만 한다고 말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며칠 전부터 공작의 간섭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건 익명에 숨어 깡패와 군인들을 죽이던 살인마가 갑작스레 자취를 감추었을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공작과 살인마 사이에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걸까?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근거가 없는 한 모든 정황은 추측에 불과하니까.

분명한 것은 그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혁명은 누군가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는 인형 놀이로 끝나서는 안 되니까.

“이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건지 모두에게 알려야만 합니다.”

여자의 눈에 생생한 감정이 떠올랐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때로는 물처럼 유연한 감정.

“부당한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지는 세상은 올바르지 않다고, 가장 밑에 있는 인간부터 저 위에 있는 인간까지 모두 알도록.”

여자는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모두가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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