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개의 몸을 앞으로 엎어 놓은 공작은, 빠끔거리는 구멍에 한번 더 성기를 쑤셔 넣었다. 창백하게 질린 개가 반항하는 것쯤이야 방해가 되지 않았다.
공작은 만전의 상태에도 상대가 될까 말까 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쾌락에 눅진하게 젖은 상태에서 그를 밀어 낸다? 말도 안 됐다. 물먹은 종이처럼 늘어진 개는 공작에게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았다.
개의 엉덩이를 잡아 벌려 그 안에 성기를 쑤셔 넣는 공작은 거칠었다. 닿아 본 적 없는 곳까지 벌리고 들어올 것처럼 들이닥치는 성기가 무섭게 느껴졌다. 어딘가 망가질 것 같은 감각. 하지만 그것마저 모두 쾌감으로 느껴졌다.
‘연우야.’
공작은 거친 숨과 함께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귓속에 내리꽂히는 소리는 개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가 유두를 문지르며 거칠게 출납할 때마다 눈앞이 부옇게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거려 숨이 가빠졌다.
‘하, 연우야.’
생리적으로 차오른 눈물이 눈을 흠뻑 적셨다. 온몸의 수분이 성기와 눈으로 모두 빠져나갈 것 같았다.
공작은 왼쪽 발의 양말만을 벗겨 냈다. 짝짝이가 된 발이 공작의 어깨에 걸쳐져 꽉 곱아 들었다.
개는 순간순간 끊기는 시야를 느끼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성기 끝에서 간신히 정액이 흘러내리던 순간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초점이 풀린 채 파르르 떨린 개의 눈꺼풀이 훅 감겼다.
“읏…….”
창문에 부딪친 햇살이 부스러져 창백한 눈꺼풀 위에 떨어졌다. 몸을 옹송그린 채 잠들어 있던 개가 낮은 신음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방 안은 고요했다. 밤새 젖어 들었던 침대의 시트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개의 몸뿐이었다.
개는 부옇게 흐려져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눈꺼풀 위를 손으로 비볐다. 눈 안쪽이 따끔거리고 퉁퉁 부은 게 느껴졌다.
침대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개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흐…….”
하체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상체를 겨우 지탱한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성기가 쑤셔 박혔던 배 속은 아직도 벌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주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났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을 깨물고 버티던 개는 결국 풀썩 침대에 쓰러졌다.
“…….”
개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어오른 눈꺼풀이 뻑뻑했다. 까만 눈이 도르륵 허공을 구르다가 일순 뚝 멈춰 섰다.
‘연우야.’
왜 이 순간, 귓가에 속살거리던 목소리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개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붉은 기가 떠오르더니 이내 귓가까지 붉어지기 시작했다.
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아래로 굴렀다. 슬슬 옆으로 돌아간 개의 얼굴이 베개에 푹 처박혔다. 달아오른 얼굴과 몸이 뜨거웠다.
연우.
낯설고 어색한 단어였다. 개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 공작이 입 밖에 내기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토끼를 ‘토끼’라고 부르는 것처럼 개를 ‘연우’라 불렀다. 불가침의 영역처럼 ‘황제의 개’ 이외의 것으로 불려 본 적 없는 개를, 당연하다는 듯 연우라 부르는 남자.
“연, 우…….”
혀 위를 구르는 단어가 낯설었다. 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비밀을 실토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
개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연우’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했다.
이름. 공작의 이름은 뭘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몇 번이나 곱씹었을까. 붉은 기가 가신 개의 얼굴이 창을 향해 움직였다. 창밖을 향한 검은 눈이 일정한 속도로 깜빡거렸다.
저녁이 되면 몸 상태가 괜찮아질까?
공작의 성기를 받아 낸 몸이 엉망이었다. 하체에는 힘이 들어가질 않았고, 팔은 갓 태어난 사슴 새끼처럼 덜덜 떨렸다.
그러나 쉴 수는 없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악인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들이 기세등등하게 살아가는 동안,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면 아래 잠긴 태성은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
창밖의 세상은 아직 밝았다. 그러니 시간은 남아 있었다. 모든 걸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시간.
붉게 달아오른 입술 새로 짧은 숨이 토해졌다.
해낼 것이다.
아니, 할 것이다.
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
여자는 작은 창문이 하나 있는 방 안에 앉아 있었다. 방에 앉아 정보를 고르고 선별하는 이는 혁명단의 우두머리 격인 이였다.
병실에 머물던 여자가 혁명단의 기지로 돌아온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공작의 정부인지 수하인지 모를 남자가 부숴 놓은 문을 고친 데다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던 잎사귀도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병력이 다친 이들에게 신경을 쏟는 건 인력적으로 너무 큰 손실이었다.
혁명단에겐 하루하루가 중요했다. 그들은 여론이 끓어오르기 시작한 지금의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됐다. 무슨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황제의 강압적인 진압이 잠시 멎은 데다가 사람들 사이에 파동이 일기 시작한 지금.
여자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이 생에 다시 오지 않을 적기라는 것을.
치료가 필요한 잎사귀와 사마귀, 그리고 그들을 보살필 모자만 남겨 둔 채 여자는 남은 병력에게 모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여자의 뜻을 이해해 주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딱, 딱.
바삐 서류를 넘기던 여자는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그곳엔 고개를 갸웃거리는 회색 새가 있었다. 공작의 전령 새. ‘익명의 후원자’와 공작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에 명백한 증거가 되어 준 새였다.
한숨을 내뱉은 여자는 곧장 창문을 당겨 열었다. 순진한 얼굴을 한 새가 종종걸음으로 창문턱을 넘어왔다.
“그래, 네가 무슨 죄가 있겠어…….”
여자는 먹이를 바라는 눈길로 주변을 맴도는 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새는 자신이 무슨 전서를 전하는 건지 알고 있을까.
“잠깐만 기다려.”
여자는 전령 새를 위해 항시 구비해 두는 쿠키를 꺼내 창문턱에 올려놓았다. 새가 반색하며 쿠키를 콕콕 쪼아 먹기 시작했다. 그사이 여자는 새의 발목에 묶인 쪽지를 손에 넣었다.
감사원장. 토요일. 골프장.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여자의 미간이 와작 구겨졌다.
“젠장.”
여자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공작과 직접 접촉한 이후, 간섭이 들어올 것이라는 건 예상했던 바였다. ‘익명의 후원자’라 나섰을 때도 그가 언젠가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직접 마주한 지금라면 더더욱 거리낄 것이 없지 않겠는가.
그나마 다행이라 할 만한 것은, 혁명단 또한 다음 타깃으로 감사원장을 노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과는 별개로 기분이 나쁜 것은 여전했다. 혁명단은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그림자 조직이 아니었다. 나이도, 성별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여자의 뜻에 마음을 모은 것은, 그들이 자유를 바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
여자는 노을이 지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평선을 녹일 것처럼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땅과 하늘을 모두 적시고 있었다.
과거에는 높고 청량한 하늘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지금 이 시간을 가장 열망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뒤집히고 모든 것이 흐려지는 시간.
여자의 입술 새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직의 재정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후원을 받았을 때부터, 어쩌면 간섭은 예견됐던 일이다. 아직은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니 겉으로나마 따르는 모습을 보여 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다 조금씩 선을 넘고, 마침내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면, 그때 쳐 내면 될 일이다. 그때라면 이미 일은 진행될 대로 됐을 테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황제를 끌어내리는 일도 이제 목전이었다.
구구.
여자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눈을 돌렸다. 어느새 쿠키를 모두 쪼아 먹은 새가 아쉬운 듯 여자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자.”
여자는 손에 들려 있던 쿠키를 하나 더 꺼내 내려놓았다. 신이 난 듯 회색 날개를 푸드덕거린 새가 쿠키를 다시 쿡쿡 쪼아 먹기 시작했다.
여자는 쪽지를 구겨 주전자 안에 넣었다. 그러자 얇은 종이가 물에 젖어 들더니 이내 모두 녹아 없어졌다. 푸른색 잉크만이 물과 뒤섞여 오묘한 색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
여자는 공작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잎사귀와 사마귀를 떠올렸다.
왜 항상 어리고 약한 아이들에게만 견딜 수 없는 불행이 닥치는 것일까. 과거의 여자는 알지 못했었다. 그런 불행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 이 나라가 그런 불행을 생산하고, 지속되게 한다는 걸.
“반드시…….”
여자는 작은 목소리를 중얼거리며 목에 펜던트처럼 걸린 반지를 꽉 움켜쥐었다.
조잡한 디자인의 반지는 얼마나 만진 건지 손때가 묻어 있었지만, 나름 관리된 티가 역력했다.
여자는 떠올리기 힘든 무언가를 되새기듯 눈을 꾹 감았다.
벌컥!
그 순간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황급히 목걸이에서 손을 떼어 내고 등을 돌렸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계산기(그녀는 나이가 꽤나 많았다)였다.
“또야!”
“또라니…….”
여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아’ 소리를 내뱉었다.
“또 군인이 죽어 있어. 아직 발견되진 않은 모양인데…….”
문을 열고 들어온 계산기가 불안한 얼굴로 말을 흐렸다.
범인도 이유도 알 수 없는 이 연쇄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혁명단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이 사건이 혁명단의 범행이라는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이 혁명단에 분명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우려했고, 어떤 사람은 거짓으로나마 그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라 했다.
그리고 이 갈림길에서 여자는 아직 방향을 선택하지 못했다.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이 영문 모를 사건이 혁명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치우는 게 좋을까.”
계산기가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여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괜히 손을 댔다가 흔적을 남기면 곤란하니까…….”
대체 누굴까. 갑작스럽게 어둠을 틈타 나타난, 살인마인지 영웅인지 모를 자는.
“우선은 지켜보기로 해요.”
✵
달이 기우는 밤이었다. 어둠에 잠긴 도시는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모두가 불을 끄고 숨을 죽인 밤. 가느다란 가로등의 불빛만이 지직거리는 골목은 무슨 사건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섬뜩해 보였다.
“컥.”
골목 안쪽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절박함이 묻어나는 소리가 골목 밖으로 간신히 뻗어져 나왔다. 그러나 주변엔 그를 도와줄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절망이 스며든 골목에 기분 나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깜빡.
어둠 속에서 점멸하던 가로등이 일순 촛불처럼 훅 꺼졌다.
희미하게나마 시야를 밝히던 불이 꺼지고 골목은 완전한 어둠에 잠겨들었다. 앞과 뒤, 양옆의 방향 감각이 사라지는 죽음 같은 어둠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의 발이 골목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픽.
빛을 잃고 꺼졌던 가로등에 희미한 불이 들어왔다. 골목 밖으로 나온 남자의 얼굴이 어렴풋한 빛을 받고 드러났다.
어떤 표정도 없이 싸늘한 기운을 띠는 얼굴은 희고 곱상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선명한 빛을 띠는 검은 눈동자였다.
“…….”
개는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붉은 피가 닦여 나가자 뺨에 난 상처가 드러났다.
실선처럼 길게 그어진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흰 뺨과 대비되어 보는 사람의 고통까지 자아냈다. 정작 상처의 주인인 개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걸음을 재촉했지만.
골목을 빠져나온 개는 욱신거리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완치되지 않은 어깨는 빠르게 한계를 호소했다. 아직은 눈에 띄게 악화되지 않았지만, 어느 날 무리라도 한다면 급격히 상태가 나빠질 것이다.
하지만 쉴 수 없었다. ‘태성이 눈을 뜰 수 있게 만들겠다’고 예성에게 약속했었다. 그건 손가락을 걸고 진심을 다해 한 약속이었다. 어기고 싶지 않았다.
골목을 빠져나가려던 개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골목의 입구 부근에서 두 명분의 기척이 느껴졌다. 개의 몸이 녹아들듯 어둠에 잠겼다.
“이 새끼는 오줌 빼러 간다더니 언제 오는 거야?”
검은색 제복을 입은 군인 하나가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그는 키가 땅딸막했는데, 키를 보완하기 위해서인지 몸집을 크게 부풀린 모습이었다.
쯧, 혀를 찬 땅딸보 군인이 입에 문 담배를 퉤 뱉어 냈다. 시뻘건 불빛을 발하던 담배가 희부연 연기를 내뿜으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가다가 가슴 큰 년이라도 발견했나 보지.”
그러자 장초를 문 홀쭉한 군인이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제 빈약한 가슴 위에 양손을 올리고 무언가를 주물거리는 흉내를 냈다.
땅딸보 군인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놈, 대가리에 여자밖에 없는 새끼 아니랄까 봐!”
평범한 사람들은 통행이 금지된 시간. 공무를 집행해야 할 군인들은 공무 대신 자신들의 추악함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근데 그런 년을 발견했으면 먼저 우리한테 바로 데려오지 않았겠냐? 씹, 계집년 맛본 지도 꽤 됐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폐하 탄신일 전에는 소집령도 안 떨어져서 계집애들 엉덩이 까기도 쉬웠는데. 혁명단인지 씨발인지 때문에 좆뺑이나 치고. 어휴. 말세다, 말세.”
두 군인의 등을 바라보는 개의 눈이 번들거렸다. 저들도 방금 전 골목에서 절명한 군인과 같은 부류인 것 같았다. 그들의 대화만 엿들어도 알 수 있었다.
“…….”
개는 발끝을 움찔 떨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들의 목을 비틀고 싶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처리하기엔 몸의 상태가 여의치 않았다. 개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어둠 속에 숨겼다.
지금 당장 죽이기엔 힘들다. 그렇다면 뒤쫓아서 저들의 근거지라도 알아 놓을까.
“쯧, 아무튼 정신 차리고 있자고. 감히 대한제국의 군부를 노리는 미친놈이 길거리를 나다닌다잖냐. 위에서 혼자 다니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려왔고 말이야.”
홀쭉한 군인이 말하자 땅딸보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린 두 명인데 뭐가 문제야. 씨발, 나와 보라고 해. 내가 확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테니까.”
“네가?”
“이 형님 무시하냐? 내가 소싯적에는 우리 동네에서 잘나가는 주먹이었어, 새끼야. 길거리 걸어 다니기만 해도 사내새끼들이 뻘떡뻘떡 고개 숙이고, 계집애들은 나한테 잘 못 보여서 안달이었다고.”
“허이고, 제가 형님을 못 알아봤네요! 됐냐?”
그들은 경계해야 할 살인마가 이 대화를 듣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개는 자신의 어깨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
저들은 말이 너무 많았다. 너무 심한 공해를 세상에 퍼트리고 다녔다. 그러니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저들의 목까지 비틀어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개의 몸이 조금씩 군인들에게 가까워졌다.
“……아휴, 됐다. 너 같은 돌대가리 새끼한테 무슨 얘길 하냐. 황제 폐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던데, 씨발 나라 꼴 잘 돌아간다.”
“……?”
걸음이 우뚝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검은 눈이 크게 뜨였다.
폐하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니? 땅딸보 군인이 목숨 무서운 줄 모르고 한 실언인지, 어딘가에 떠도는 낭설을 내뱉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개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야, 너 미쳤어!”
“……뭐, 뭘 새끼야! 나라님 안 볼 때는 다 그런 거지…….”
땅딸보가 말끝을 흐리자 홀쭉한 군인이 다급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들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개는 홀쭉한 군인이 내뱉는 말을 들으며 걸음을 뗐다.
죽이자.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니. 저런 말을 내뱉는 자들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저벅.
개의 걸음은 채 두 발자국을 지나지 못했다. 지나온 골목 안쪽에서 누군가의 미약한 기척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목이 비틀려 죽은 군인의 시체가 있을 골목.
“…….”
개는 골목 밖에 있는 두 명의 군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어깨에 총을 맞지만 않았더라면, 좀 더 치료를 받았더라면, 세 명을 한꺼번에 상대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총을 맞았고, 치료는 부족했다.
당분간은 몸을 아껴야 한다. 이 도시에는 아직도 많은 악인들이 남아 있었다. 몸을 일회용으로 생각하고 마구 사용해선 안 됐다.
개는 두 명의 군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일단 골목에 들어온 한 명을 입막음하고, 밖에 있는 두 명의 목을 비틀어 버릴 생각이었다. 기척 한 번 내지 않는 개의 몸이 순식간에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의 불빛이 곧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개는 시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남자를 보았다. 그는 맨바닥에 축 늘어진 시체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시체의 사인을 알아내기 직전의 부검의처럼 말이다.
무슨 목적으로 시체를 뒤적거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자를 살려 둘 이유는 없었다.
개는 쪼그려 앉은 남자의 뒤에 섰다. 싸늘한 눈동자가 남자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단번에 목을 꺾어 죽여 버렸군.”
그 순간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개의 몸이 움찔 굳었다. 당황한 개의 그림자가 남자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한참 시체를 더듬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젊은이들보다 둔화된 몸은 느렸다. 비틀거린 남자의 머리 위에서 검은 후드가 벗겨졌다.
“자네는……?”
머리가 희게 센 노인은 자신의 뒤에 선 개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개 또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빨리 옮겨야 하네. 더 늦으면 이 애는 죽을 거야.’
이자는 지난번 쓰러진 태성의 상태를 살폈던 혁명단 노인이었다. 개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
잠을 못 자는 날이 길어지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짜듯 비틀리는 두통에 눈살이 일그러졌다.
속이 훤히 보이게끔 붉은 용포 자락을 펼쳐 놓은 황제는 침상에 앉아 관자놀이를 짓이겼다. 눈 그늘이 짙은 얼굴이 거칠었다.
핏발 선 눈이 침상 앞에 무릎을 꿇은 차현을 향해 돌아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내가 네게 기회를 준.”
혈색 없는 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실핏줄이 잔뜩 터져 일견 붉게 보이는 황제의 눈에 광기가 감돌았다.
“내 개는 찾아왔느냐?”
흰 제복을 입고 고개를 숙인 차현은 순종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얼굴이 퍽 마음에 들던 때가 있었다. 그때도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전하. 저를 전하의 사람으로 받아 주십시오.’
‘저 또한 저의 형제로 인해 오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까.’
‘제게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오랫동안 바라셨던 일을 대신 하겠습니다.’
황제가 황태자였던 시절, 차현이 ‘후계자가 죽어 운 좋게 공작위에 오른 애송이’였던 시절. 그들은 서로의 목적을 위해 거래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이 있었기에 황제는 지금껏 차현을 신임해 왔다.
“아니면 곱게 죽기 위해 제 발로 이곳에 찾아온 것이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러나 지금은 저 순종적인 얼굴이 미치도록 보기 싫었다. 마치 죽기 위해 찾아온 것 같지 않은가. 이 나라의 주인이 기르던 개 한 마리 찾아오라는 명령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빨리 말해라! 네 목에 칼이 드리워져야 입을 열 테냐!”
침상에서 벌떡 일어선 황제가 바락 목소리를 높였다.
차현은 황제의 핏발 선 시선을 받으면서도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황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송구합니다’ 같은 말이 나온다면 당장 저 목을 치리라. 이 나라 어딘가에 자신의 개가 분명 살아 있는데, 그것도 찾아내지 못하는 수하는 존재 가치가 없었다.
“흔적을 찾았습니다.”
“……!”
그러나 차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
“개가 살아 있다는 흔적 말입니다.”
“……그게.”
바짝 말라 하얗게 튼 입술이 작게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린 황제가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토해졌다.
“그게 정말이냐?”
“예, 폐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차현이 순종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황제는 차현의 뒤로 길게 늘어진 코트의 끝자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개가 살아 있다.
고대해 왔던 일이었다. 개의 꿈을 꾼 뒤부터, 그가 살아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차현이 발견했다던 시체의 정체는 다른 사람이리라고, ‘황제의 개’가 죽었을 리 없다 생각해 왔다.
그런데 ‘개가 죽었다’ 단언했던 이가 ‘살아 있다’고 하니 오히려 믿기지 않았다. 자신을 놀리기 위해 불경한 거짓말을 입에 담는 것처럼 느껴졌다.
침상 앞 앉은뱅이책상을 짚은 황제의 손에 뿌득 힘이 들어갔다.
“네가 네 입으로 시체를 확인했다 하지 않았느냐. 그럼 그것은 무엇이었느냐.”
고개를 숙인 차현은 말을 고르는 듯 짧은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찰나의 시간마저 기다릴 수 없었다. 조급함에 달아오른 분노가 목 밑에서 아우성을 쳤다.
“네가 날 능멸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서 말해!”
“폐하, 개에겐 그가 ‘살았던 사람’임을 증명하는 단서가 없습니다.”
황제의 사나운 목소리가 쟁쟁 울리는 정무실 안에서, 차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수도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섬에 사는 촌부까지 폐하께서 알고자 한다면 숨길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신원과 행적은 빠짐없이 조사되고 있고, 그를 토대로 황실에 해가 될 범죄자들은 매 시간마다 잡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단조롭게 이어지는 목소리는 거짓 하나 없이 사실만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러나 개만이 아무런 단서가 없었습니다. 출생 신고 자료부터 지문, 유전자 정보, 가족 정보, 하물며 진료 기록조차 없어 시체를 찾았을 때도 시체의 크기와 옷만을 보고 신원을 추정해야 했습니다.”
황제의 몸이 움칠 떨린 것은 그때였다.
그는 아직도 개의 모습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지푸라기 같은 머리칼과 푸석한 피부, 흉터가 가득한 손.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자는 황제밖에 없었다.
“확실치 않은 정보로 혼란을 빚었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
황제는 어쩐지 목이 졸린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내 개는 어디에 있느냐.”
차현은 침묵을 지켰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제의 이마에 새파란 핏줄이 돋아났다.
“어디에 있냐는데도!”
“송구합니다.”
차현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의 입에서 침통한 목소리가 토해졌다.
“아직 위치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 나를 놀리는……!”
“살아 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순종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차현이 고개를 들어 올린 것은 그때였다. 유약해 보이기만 하는 아름다운 얼굴에 떠오른 것은, 사나우리만치 선명한 확신이었다.
아니, 그뿐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목을 베어 버렸을 만큼 불경한 감정이 차현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황제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으나, 지금은 신하의 무례를 벌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하……. 살아 있는 게 확실하다?”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뻗어진 걸음이 차현의 앞에서 멈춰 섰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보이는 황제의 눈에 광기가 맴돌았다.
“증거를 보여라.”
차현은 말없이 품속에서 빳빳한 종이를 꺼내 들었다. 황제는 그것을 빼앗듯이 들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짓씹었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쉽게 죽진 못할 것이다.”
황제의 시선이 종이를 향했다. 의심의 기운이 넘실거리던 눈이 커다래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건…….”
차갑게 내려앉은 차현의 눈동자가 황제를 쏘아보았다. 사진을 든 황제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맹렬하게 사진을 훑는 얼굴이 역겨웠다. 차현은 태연한 얼굴을 유지한 채 주먹을 꽉 쥐었다.
황제에게 건넨 것은 CCTV 영상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 찍힌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평소의 연우라면 저딴 카메라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하나뿐인 시종이 죽어 가던 날이었다면?
주변을 살필 여력 없이 앞만 보고 달렸을 이의 감정이 흐릿한 사진 너머로도 선명히 느껴졌다.
시종의 상태를 알고 하염없이 울던 얼굴을 떠올리면 아직도 입술이 말랐다. 눈물이 그득 고인 눈자위를 핥고, 발갛게 달아올라 허덕거리는 몸 안에 좆을 쑤셔 넣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주인을 자처했던 황제는, 그를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런 이에게 차현은 연우의 작은 흔적도 내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제에게 증거를 내보인 이유는 단순했다. 계획을 어그러트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어디서 찾은 것이냐!”
황제는 차현을 완벽히 신뢰해야 했다. 죽는 순간에도 왜 차현에게 배신당한 건지 의문을 가질 정도로.
“거취는 찾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 흔적을 쫓고 있습니다.”
흥분한 듯 격양된 황제의 얼굴을 보며 차현은 웃었다. 모든 게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에도 좆같은 기분이 들었다.
✵
노인을 마주한 개는 주춤 뒤로 물러섰다.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병원을 나온 뒤, 혁명단 일원과 다시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에 비해 노인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크게 뜨였던 눈이 원래의 크기를 되찾고, 놀란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눈동자에 한순간 미약한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자네였구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깎여 나간 듯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개의 흉측한 손에 닿았다가, 쓰러진 시체를 향해 돌아섰다.
‘사람의 목을 이렇게 깔끔하게 비틀어 놓을 수 있는 건 자네 같은 사람들밖에 없지 않나.’
개는 입을 다물었다.
‘자네 같은 이나 인간의 목을 비틀 수 있다’는 노인의 추론은 타당했다. 쉬운 듯 보이지만, 웬만한 악력과 기술이 없다면 불가능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건 충분한 증거가 아니었다. 이 나라의 실력자가 개뿐이던가? 아니다. 개에 비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실력자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개가 물었다.
‘말할 건가?’
노인의 추론을 부정하지 않은 것은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변명하는 것은 개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말이 짧은 친구로구만.’
클클 웃음을 터트린 노인이 작은 목소리를 토해 냈다.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혁명단과 척을 진다면, 태성이 눈을 떴을 때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러니 어떻게든 저자의 입을 막아야 했다.
개는 목소리를 위협적으로 낮췄다.
‘말할 거냐고 물었어.’
‘말할 거냐고? 그런 짓을 왜 하나?’
노인은 답이 정해진 질문을 들은 것처럼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개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눈을 끔뻑였다. 이제껏 많은 사람을 심문해 왔지만 이렇게 쉽게 만족스런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는 자네를 응원하는 편이네만.’
‘……?’
그게 끝이 아니었다. 노인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까지 내뱉었다. 개는 일순 고장 난 원숭이 인형처럼 버벅거렸다.
죽으라는 말이나 이 새끼 저 새끼 같은 욕은 많이 들어 봤지만, ‘응원한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공작조차 개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머리가 희게 센 노인은 어디가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자네가 잎사귀에게 한 짓은 유감이네. 하지만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세상을 살다 보면 느끼는 게 있지. 사람은 선과 악의 논리로 구분 지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걸 말일세.’
노인은 벗겨진 후드를 도로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 그의 얼굴이 어둠에 잠겨 들었다.
‘내 딸은 군인들의 손에 죽었지.’
겨울나무처럼 딱딱하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수많은 계절을 견디고 무뎌져, 마침내 빈 가지를 드러낸 목소리.
‘자네를 응원하는 건 그 이유 때문이야. 그러니 걱정 말게. 자네에 대한 말이 우리 쪽에 넘어갈 일은 없을 거야. 늙을수록 무거워지는 건 비단 엉덩이뿐이 아닐세.’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개는 멀어지는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골목 밖을 빠져나왔다. 홀쭉한 군인과 땅딸보 같은 군인은 어느새인가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
개는 허공에 뻗은 손을 쥐었다 폈다. 흉터 가득한 손 너머로 보이는 달빛이 어쩐지 가깝게 느껴졌다. 개는 방 안을 떠도는 달빛을 잡을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등 뒤에 닿은 침대의 감촉이 멀게 느껴졌다.
그는 이상한 노인이었다. 아니, 그 노인뿐만이 아니었다. 이 나라엔 이상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황제의 옆에 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눈을 통해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의 스승이, 황제가 ‘의문을 가지지 말라’고 말한 데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연 인간처럼, 개는 의문을 가져 버렸다.
돌아서서는 안 된다 했음에도 돌아선 인간처럼, 개는 보아선 안 될 장면을 목도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천장을 향해 있던 개의 눈이 문을 향해 돌아섰다.
커다란 그림자가 방 안으로 끼쳐 들어오고, 흰 제복이 긴 다리 곁에서 흔들렸다. 아름다운 눈이 개를 향했다.
“…….”
“…….”
공작은 아무런 말 없이 서서 개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무감정했고, 검푸른 눈동자는 무의미하게 어둠을 직시했다. 개는 침묵을 지킨 채 그를 마주 보았다.
저벅. 남자의 걸음이 떨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한번 걸음을 떼기 시작한 남자는 망설임 없이 침대에 다다랐다. 개는 어둠 속에 잠긴 얼굴을 보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
그러나 공작이 개의 위에 올라타는 것이 먼저였다. 푹신한 침대가 묵직한 무게에 푹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까만 눈이 크게 뜨였다.
“연우야.”
연우. 귓가로 떨어지는 나긋한 울림에 개의 몸이 움칠 굳었다.
“울어 볼래?”
검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울어 보라니? 고문을 받으면서 동요하지 않는 방법을 배우면 배웠지, ‘울어 보라’는 명령은 받은 적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귓가와 뺨을 모두 덮었다. 짧은 순간 숨이 멎었다.
“묻고 있잖아. 대답해야지.”
그는 나긋한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잔향처럼 남아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잘못 들은 것이라 착각할 만큼.
“…….”
개는 굳은 것 같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그러나 대답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혀 위에 목소리가 아닌 숨이 맴돌았다.
뺨에 머물던 손이 미끄러지듯 입술에 닿았다. 남자의 엄지가 벌어진 입술 새를 지그시 누르며 스쳐 지나갔다.
긍정을 하면 울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법은 여러 개였으니까. 단순하게는 눈을 찌르는 방법부터, 오랫동안 눈꺼풀을 감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 방법을 쓴다면 한 방울쯤은 생리적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남자가 요구하는 것은 그런 눈물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좆을 밀어 넣고, 버거워 눈물을 터트리는 개가 보고 싶은 것이다.
갈증이 이는 것처럼 입술 안쪽이 말라붙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널 울릴 텐데.”
부정의 말을 내뱉을 수 없다.
“연우야.”
남자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황홀한 아름다움을 가진 얼굴. 그는 전설 속 괴물들처럼 사람을 홀리는 인간이었다.
“흣…….”
남자의 단단한 손끝이 옷을 걷고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개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됐다.
옷 사이로 들어온 손이 배꼽 근처를 아프지 않게 짓누르고 있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우연일까. 남자의 손이 닿은 곳은 그의 성기가 밀려드는 위치와 비슷했다.
“손이…….”
“손이 왜.”
남자가 고개를 숙여 귓불을 씹었다. 숨결이 옮겨붙은 건지 귓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검은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뼈대가 불거진 흉측한 손이 시트를 그러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흐읏.”
옷 사이를 파고든 손이 갈비뼈를 지나 가슴까지 올라왔다. 마른 가슴팍 위에 불거진 분홍빛의 돌기를 건드는 손길이 농밀했다. 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어라 명명할 수 기분이 전신을 내달렸다. 초조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기분.
그 순간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입술 위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개는 눈을 떴다. 입을 맞춘 남자가 선명한 빛을 띠는 눈으로 개를 직시하고 있었다.
“웃.”
남자가 개의 턱을 잡아 올렸다. 작은 신음이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남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벌어진 입술 안쪽에 혀를 밀어 넣었다.
틈 없이 붙은 입 안에서 숨이 뒤섞였다. 개의 짧은 속눈썹이 파득 떨렸다.
“우, 읏…….”
눈을 감아야 하는데,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시선에 붙들렸다.
그의 눈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 파도치는 것처럼 보였다. 잔잔한 수면 아래에 감춰져 있던 파편들이 그의 눈 위에서 비산하고 있었다.
남자의 키스는 평소와 달랐다. 늘 목구멍 안쪽까지 핥은 것처럼 거칠게 파고들었던 혀가, 집요하게 입 안을 탐하고 있었다. 마치 쾌락을 일깨우는 것처럼.
혀 뿌리를 파고들었다가 입 천장을 핥아 올리는 감촉에 목뒤가 오싹하게 달아올랐다. 개의 손이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혀로 가득 찬 입 안에서 신음이 뭉개졌다.
고작 혀를 얽는 것뿐인 행위에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성기가 만져진 것처럼 배 속이 뜨겁게 뭉쳤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공작은 폐부에 남은 숨 하나까지 모두 핥아 먹을 것처럼 개의 입 안을 탐했다. 숨이 달린 개가 그의 어깨를 밀어 내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혀를 깊이 밀어 넣었다.
“하, 흐읏…….”
남자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것은 개의 눈에 어룽거리는 눈물이 맺혔을 즘이었다. 개는 발갛게 부은 입술을 벌려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맺힌 얼굴로 헐떡거리는 개의 모습은 누군가의 음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공작은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커다란 손에 밀려 올라간 옷자락 사이로 마르고 탄탄한 몸이 보였다.
공작의 두꺼운 다리가 개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침입했다. 무릎이 사타구니를 지그시 눌렀다. 순간 개의 몸이 펄쩍 뛰었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공작의 입 쪽을 막고 밀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공작은 쉽게 밀려났다. 개는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개의 손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이내 눈을 휘어 웃었다.
“……!”
공작의 혀가 개의 손가락 안쪽을 핥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의 존재감이 선명히 느껴졌다. 개는 불에 덴 사람처럼 놀라 손을 떼어 냈다.
그러나 떼어 내기 무섭게 손목이 붙잡혔다. 개는 당황해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공작은 동요하지 않았다. 단단하고 큰 손이 식충 식물처럼 손목을 꽉 옭아매고 있었다.
“만져 보고 싶었으면 말을 했어야지.”
공작의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떠올랐다.
손목을 잡아끈 남자의 목적지는 자신의 얼굴이었다. 흉측한 손에 매끈한 피부가 닿았다. 개가 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개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뤄 온 기술자였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대상의 뺨을 움켜쥔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뺨을 가만히 쥐고만 있는 것은.
“그래서 소감은?”
공작의 관자놀이 부근에 흐트러진 머리칼이 손끝을 간질였다. 개는 멍하니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소감이 어떠냐고?
“조금…… 차갑습니다. 매끄럽고, 또…….”
입 밖으로 내뱉는 언어가 어색했다. 다른 나라의 언어가 혀끝을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공작의 뺨 위에 닿아 있는 손끝이 움칠 떨렸다.
공작은 첫눈을 본 네발짐승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개를 보다,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개의 옷자락 사이에 넣어 뒀던 손을 꺼내,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더듬었다. 물기가 어른거리는 개의 검은 눈이 남자를 향해 돌아섰다.
“네가 우는 걸 본 사람이 또 있나?”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온 물음은 도통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개는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 보았다. 자신의 우는 모습을 본 사람.
“없습니다.”
“그렇겠지.”
공작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갔다. 거칠게 넘실거리던 검푸른 눈동자에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네가 이런 얼굴을 할 수 있는 걸 알았으면, 그 누구도 널 암살자로 쓰진 않았을 테니까.”
공작은 자신의 뺨에 닿은 개의 손을 침대에 내리눌렀다. 개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공작의 입술이 개의 흰 목덜미에 닿았다.
“연우야.”
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는 솜털마저 바짝 선 개의 피부 위에 이를 세웠다. 예민하게 선 감각을 파헤치고 들어오는 고통이 선연했다.
“연우야.”
“흐읏…….”
귓가에 닿는 목소리가 자극적이었다. 손끝이 곱아 들었다. 배 속에 뭉친 열기가 딱딱하게 아파 왔다.
회음을 짓누르고 있는 남자의 무릎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개는 오므린 발끝으로 침대 끝을 밀어 내며 숨을 헐떡였다.
“공평하지 않, 흐……”
“뭐가.”
목덜미를 만족스러울 만큼 짓씹은 남자가 옷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개는 가슴 위에 닿는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름…….”
“네 이름은 연우잖아.”
“그런 게 아닙, 흑.”
공작은 울렁이는 개의 목울대를 입에 넣고 굴렸다. 침대 끝을 밀어 내던 개의 발끝이 확 곱아 들었다. 뼈 위의 얇은 살을 깨무는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이름을, 한쪽만 알고 있는 건 불공평한…….”
개는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쾌감과, 낯선 질문에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불공평하다니.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개의 몸을 뜻대로 굴리던 남자가 문득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개의 목에 박았던 고개를 들고 남자가 불현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공작은 자신의 아래에 깔린 개를 내려다보았다.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 개는 자신이 지금 무슨 도발을 한 건지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작은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지.”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공작은 웃었다.
“입 맞춰 봐.”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그럼 말해 줄 테니까.”
웃음기 섞인 나긋한 목소리가 숨결처럼 스며들었다.
✵
안기부장이 실종되고 정국이 혼란스럽게 돌아가던 와중,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이 세간에 나돌기 시작했다.
‘황제가 공작에게 안기부장의 자리까지 내어 주려 한다.’
누군가는 사실에 기반한 소문이라 생각했고, 누군가는 차현을 모함하기 위한 뜬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더 큰 무게가 실린 쪽은 아무래도 후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작은 이미 황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실권을 잡은 권력자였다. 그렇지 않아도 의심 많은 황제가 이미 큰 권력을 쥔 공작에게 ‘안기부장’의 자리까지 내어 준다고? 그렇게 되면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게 될 텐데?
차라리 고양이가 생선 장사를 한다는 말이 더 믿음직스러울 만큼, 신빙성이 없는 소문이었다.
황제의 낙하산이라며 수런대던 사람들마저도 공작에게 동정의 시선을 던졌다. 이러나저러나 공작은 예의 바르고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을 시기 질투 해 소문을 퍼트리다니.
현 시간부로 공작 차현에게 안기부장의 권한을 임시적으로 부여한다.
그러나 뜬소문인 줄 알았던 소문은 현실이 되었다. 황제의 날인이 찍힌 공문이 내려온 것이다.
“안기부장의 직권을 부여받다니, 좋으시겠소.”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입니다.”
차현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하자, 원탁에 둘러앉은 늙은이들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누군가는 욱한 것처럼 쪼그라든 엉덩이를 들썩였으며 누군가는 불쾌함이 역력한 얼굴로 차현을 쏘아보았다.
‘임시적’이라 했으나, 그것이 임시로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이 자리에 앉은 인간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제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이다. 그런 자가 임시라는 명분으로 권한을 넘겨주었다? 그것은 귀족 늙은이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이런 엄중한 업무를 부여받았을 땐 버거운 표정이라도 지어야지, 나 원 참!”
불쾌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한 늙은이가 차현의 태도를 지적하고 나섰다. 차현은 미소 띤 얼굴로 늙은이를 돌아보았다.
“저보다 엄중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여기 계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버거워하겠습니까.”
“크흠, 큼!”
입에 발린 말을 내뱉자 다른 노인이 헛기침을 했다. 괜한 시비를 걸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늙은이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차현은 이 유쾌하지도 않은 풍경을 보며 비식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 냈다.
안기부장의 권한을 얻은 것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개의 사진을 팔아 얻어 낸 안기부장의 자리는 그저 역겨울 뿐이었다.
‘입만 맞추면 됩니까?’
웃음이 나온 것은 그저, 떨리는 손을 구부리는 와중에도 목소리만은 태연하던 말간 얼굴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면 침대에 엎어 놓고 울리고 싶은데.
차현은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그 발칙한 행위에 노인들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그런 행태를 지적하지 못했다. 이제 이곳에서 가장 우위를 점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차현이었다.
“…….”
침묵이 감도는 테이블 위, 감사원장은 다른 생각에 빠진 듯 보이는 차현에게 맹렬한 시선을 보냈다.
어리고 능력 있는 공작. 한때는 그것이 차현을 매력적인 청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딸애의 남편감으로 고려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젊고 능력 있는 것은 그저 그의 열등감을 자극할 뿐이었다.
감사원장의 검게 늙은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꽉 주먹 쥐어졌다.
이대로 혼자서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추악하게 번뜩이는 눈빛이 차현에게 쏘아졌다.
✵
겨울은 황폐하고 지난한 계절이다.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마저도 몸을 웅크리는 계절. 온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드는 계절이면 기울어진 도시의 격차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구름 위의 도시처럼 끝을 모르고 세워진 빌딩 숲. 그곳의 인간들은 보드라운 털로 만들어진 옷을 껴입고 너그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언제나 반짝거리는 장신구를 끼웠으며, 번쩍거리는 차체에 몸을 싣고 다녔다.
마치 길 건너의 인간들과는 태생부터 다른 종인 것처럼.
맨몸으로는 건널 수 없는 8차선 도로, 그 건너편엔 빌딩의 그림자에 가려진 낡은 건물들이 존재했다.
그곳의 인간들은 좁은 굴 안에 뭉쳐 사는 일개미 떼처럼 거무죽죽한 얼굴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행복보다 불행이, 승리보다 패배가 익숙한 얼굴들.
이곳에서 죽음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타인의 관심을 받지 못한 가난뱅이가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길을 굴러다니는 쓰레기처럼 흔했다.
집 안을 데울 온기 하나가 없어 죽어 가는 사람들. 먹을 것이 부족해 죽어 버린 인간들.
이 나라에는 언제나 죽음이 들끓었다. 패배가, 불행이, 토해 내지 못한 슬픔과 분노가 넘실거렸다.
그럼에도 나라의 보호를 받는 것은 극소수의 권력자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권력자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단 하나의 인간.
“그래. 네가 죽었을 리 없지.”
황제는 호화스럽게 꾸며진 방 안에서 구깃구깃한 사진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CCTV의 화질이 나빠 누군가를 업은 남자의 얼굴은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저분하게 기르고 다니던 머리가 짧아지고 차림새도 달라졌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자신의 개였다.
“그런데 왜 돌아오지 않는 거냐.”
대답 없는 물음이 텅 빈 방 안을 공허하게 울렸다. 하얗게 튼 입술 안에서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왜.”
황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개는 어떤 고초를 겪더라도 귀소 본능을 가진 짐승처럼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제의 옆에서만 숨을 쉴 수 있는 것처럼, 황제의 명령만이 삶의 이유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왜일까.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데 왜 자신의 옆에 돌아오지 않은 거지?
“……이 배은망덕한 것!”
일순 분노에 휩싸인 황제가 손에 들린 사진을 거칠게 구겼다. 황제의 손등에 새파란 핏줄이 섰다.
광기 어린 눈동자가 손 틈새를 비집고 나온 사진의 귀퉁이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런…….”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핏발 선 눈에 안타까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황제는 자신이 구겼던 사진을 소중히 펼치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구겨지고 펴지길 반복한 사진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황제의 커다란 손이 사진 위를 애틋하게 쓸어내렸다.
“폐하.”
그때 장지문 너머로 늙은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의 눈이 그쪽으로 돌아섰다.
“감사원장이 독대를 요청했습니다.”
“……감사원장이 말이냐?”
황제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개와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하다니. 불청객의 방문이 썩 내키지 않았다.
“기분이 내키지 않으니 돌아가라 해라.”
장지문을 바라보던 시선이 홱 돌아섰다. 황제의 시선이 향한 곳은 구겨진 사진 위였다.
“하오나 폐하.”
“돌아가라 했다.”
“폐하, 하지만 감사원장이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하여…….”
비서실장은 끈질겼다. 애틋함이 서렸던 황제의 얼굴에 싸늘한 분노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 추악한 늙은이의 이야기가 그리 중하단 말이냐?”
장지문 너머의 그림자가 우뚝 굳는 것이 보였다. 비서실장은 황제의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음을 단박에 눈치챘다.
“들라 해라. 어디 한번 들어 보기나 하지. 하지만 시답잖은 이야기라면 네 목도 무사치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폐하…….”
비서실장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황제는 손님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앉은뱅이책상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달칵.
마침내 문이 열렸다. 고풍스러운 제복을 입은 늙은이 하나가 조심스레 침전 안으로 들어섰다. 하얗게 센 머리를 말끔하게 넘긴 감사원장은 황제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한 채 넙죽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이렇게 용안을 뵙는 것이…….”
“됐다. 잡소리는 집어치워라.”
황제는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힐끗 보다가 감사원장에게 시선을 두었다.
“긴히 할 이야기가 무엇이냐?”
황제는 미친 자였다. 그는 단순히 권력에 도취한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이라 믿으면서, 인간이란 존재를 믿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이 자리에서 목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감사원장은 마른침을 삼켰다.
“폐하, 공작에게 안기부장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재고해 주십시오.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입니다. 그자가 지닌 권한이 많아질수록 폐하의 위신에 위협이 될 것…….”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구나.”
감사원장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싸늘한 음성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공작이 지닌 권한이 많을수록 내 위신에 위협이 간다고?”
황제는 넙죽 고개를 숙인 탐욕스러운 인간을 보며 살심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너희들이야말로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러니 80 먹은 늙은이들이 안기부장의 자리를 탐내며 떼쓰고, 서로를 비방하는 공문을 올리는 것 아니냐. 네가 말해 봐라. 밤낮 가리지 않고 내 명령을 수행하는 충신과, 할 줄 아는 건 앉아서 떼를 쓰는 것밖에 없는 짐승들 중 진정 추한 것이 누구냐.”
“폐, 폐하.”
넙죽 머리를 숙였던 감사원장이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광인의 눈이 감사원장을 쏘아보고 있었다. 움찔 떨린 노인의 눈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시간만 낭비했군.”
황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꺼져라. 네 얼굴을 더 봤다간 아침에 먹은 것도 올라올 거다.”
“폐, 폐하! 이 충신의 간곡한 청을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감사원장이 꺼낸 ‘충신’이라는 단어에 황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감사원장은 황제의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급히 말을 토해 냈다.
“공작이 폐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워 왔는지 어찌 모르겠습니까. 모르는 귀족이 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겠지요. 대군 저하의 승하에 공작이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알…….”
“닥치지 못할까!”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감사원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자신이 실언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감사원장이 바닥에 머리를 찧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밟으면 곧장 부러질 것 같은 늙은 몸을 새빨간 눈으로 쏘아보았다.
차현이 공작이 되기 전, 그의 아비였던 선대 공작과 후계자는 황제의 이복형제를 지지했다. 감히 황태자인 자신을 배반한 늙은 권력자들을 모조리 죽이리라 다짐했던 것이 언제던가.
그들이 어이없는 사고로 죽고 차현이 공작위에 올랐을 때, 차현은 황태자에게 찾아와 말했다.
‘전하. 저를 전하의 사람으로 받아 주십시오.’
‘저 또한 저의 형제로 인해 오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까.’
‘제게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오랫동안 바라셨던 일을 대신 하겠습니다.’
차현은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말을 실현했다.
세간에선 ‘황제의 개’가 황제의 이복형제를 죽였다고 떠들어 댔지만, 사실은 달랐다. 이복형제의 죽음은 차현이 이끌어 낸 일이었다.
그날 황제가 얼마나 기껍게 축배를 들었는지는 차현과 황제 본인만이 아는 일이었다.
“……하지만 폐하, 공작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그의 동태가 요즘따라 심상치 않습니다.”
침묵하는 황제의 눈치를 살핀 감사원장이 슬그머니 말문을 텄다. 상념에 빠져 있던 황제의 눈에 빛이 들었다.
“하, 네가 진정 돌았구나. 공작의 동태를 네가 어떻게 아느냐. 세작(細作)이라도 붙인 거냐?”
“폐하, 이 늙은이의 충심을 어찌 몰라주시는 겁니까. 제발 노신의 충언을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황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첩자를 붙였느냐 묻는 말엔 답하지 않고 헛소리만 지껄이는 입을 놔두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철컥.
황제는 제 곁에 놓여 있던 검을 쥐었다.
새까만 검집 안에 들어 있는 검이 얼마나 새파란 빛을 내뿜는지 감사원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제가 죽으면 그땐 믿어 주실 겁니까!”
황제의 발이 일순 멈춰 섰다. 감사원장의 눈에 희미한 희망이 깃들었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보루를 꺼내 든 보람이 있었다.
“폐하, 제가 죽게 된다면 공작의 동태를 유의 깊게 살피십시오. 분명 그자에겐 숨기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공작저에 밀어 넣었던 첩자들은 어느 순간 타당한 이유로 저택에서 쫓겨났다. 그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차현에게 세작을 붙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감사원장은 차현이 숨기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첩자를 붙이지도 못했는데 그딴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황제에게 의심을 심어 주는 것. 그가 진실을 마주해도 믿지 않게 되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황제라는 뒷배가 사라진 공작은 아름다운 껍데기를 가진 어린애에 불과하다. 감사원장은 검은 뱃속을 숨기며 몰래 히죽거렸다.
“네 말 같지도 않은 조언은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
“폐, 폐하. 어찌!”
당황스러워하는 감사원장을 향해 황제는 싸늘한 얼굴로 일갈했다.
“꺼져라. 두 번 말하지 않으마.”
“폐하!”
감사원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황제의 미간이 와작 구겨졌다. 그는 문밖에 선 비서실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감사원장을 밖으로 치워라. 꼴 보기 싫구나!”
“예, 폐하.”
비서실장이 들어와 깊이 고개를 숙이더니, 감사원장의 팔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감사원장의 간절한 시선이 황제에게 닿았지만, 황제는 본 체도 하지 않고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탁.
문이 닫혔다.
허망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던 감사원장의 얼굴에 새파란 분노가 떠올랐다.
짝!
감사원장은 자신의 팔을 잡고 나온 비서실장의 뺨을 거칠게 내리쳤다.
“네놈이 감히!”
“…….”
비서실장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감사원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뱀처럼 번들거리는 눈. 황제의 옆에서 오랜 시간 그를 보좌해 온 비서실장은 결코 만만한 이가 아니었다.
“네놈은 반드시 이날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눈이 뒤집힌 감사원장에게 그런 것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는 비서실장에게 경고를 남긴 채 길을 돌아 나섰다. 황폐한 황궁의 풍경이 빠르게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아악!”
감사원장이 일순 악을 지른 것은 그때였다. 차현에게 미약을 먹이는 걸 실패한 이후로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
창가 자리에 앉은 개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무채색의 겨울 풍경이 비쳤다.
“…….”
낡은 식당 안에는 한기가 돌았다. 내부를 덥히는 것이라고는 새빨간 불빛을 내뿜는 난로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온열 기구가 없어도 딱히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배 나온 양복쟁이들과, 고된 하루를 증명하듯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인부들로 가득 차 북적거렸기 때문이다. 이곳에 혼자 테이블을 차지한 사람은 개뿐이었다.
소리와 음식 냄새가 혼란하게 떠다니는 곳에서 개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개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짧은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입만 맞추면 됩니까?’
‘왜. 부족한 것 같으면 구멍을 벌려서 쑤셔 박아 줄 수도 있어.’
공작은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잘 물면 알려 주는 걸로 할까?’
그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 떠오른 순간, 커다란 손에 엉덩이가 붙잡혔다. 개는 파득 몸을 떨었다.
공작은 정말로 개의 구멍을 벌려 그 두꺼운 좆을 넣을 것처럼 굴었다. 개는 다급히 공작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개의 입맞춤은 서툴렀다. 입술을 부비고, 추삽질을 하듯 타인의 입 안에 혀를 넣었다 빼는 게 다였다. 농밀함도 쾌감도 없는 행위.
‘진짜 못하네.’
그럼에도 공작은 진심으로 유쾌한 듯 웃었다.
‘내 이름은.’
아슬아슬하게 참아 낸 인내심의 파편이 그의 눈 안에서 넘실거렸다.
차현.
개는 차현의 이름을 곱씹었다. 그의 이름은 잔뜩 녹아 찐득거렸던 사탕처럼 혀끝을 돌았다. 개는 조심스레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공작은 오늘 아침, 개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해 보라며 돈을 쥐여 주었다. 그러나 돈을 써 본 적 없는 개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가장 먼저 눈에 띈 상가에 들어와 정체불명의 메뉴를 시켰다.
“……그런데 말이야. 그 혁명단이란 거 정말 있는 건가?”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던 중, 개는 뜻밖의 단어를 들었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이 사람아! 그런 걸 왜 말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테이블에는 중년 남자가 넷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박 씨, 뭘 그렇게 또 깐깐하게 구나. 이럴 때 말 안 하면 또 언제 한담.”
“그래, 그렇고말고.”
그들은 가운데서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 숟가락을 푹푹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려 했더라……. 아, 그래! 혁명단은 당연히 있지. 암, 있고말고. 그 사람들 덕에 요즘 아주 통쾌해!”
“이 사람이 뭘 아는구만.”
테이블에 킬킬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 중 웃지 못하는 건 ‘혁명단이 진짜 있느냐’ 물은 남자뿐이었다.
“아니, 그런데 말이야. 그 혁명단이라는 게 워낙 신출귀몰해야지……. 요새 일어나는 뒤숭숭한 일들은 다 그 단체와 연관되어 있다며? 난 영 꺼림칙해서…….”
“허, 아직도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네.”
턱에 밤송이 같은 수염이 자란 남자가 쯧쯧 혀를 찼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일행들도 말을 거들었다.
“자네도 듣지 않았나. 아래 동에 사는 김 씨가 갑자기 일도 관두고 떠난 이유.”
“깡패 새끼들이 고향에 사는 아들놈 다리를 부러트렸다고 했나.”
남자 중 한 명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초록색 병을 들어 올렸다. 꼴꼴 떨어지는 투명한 액체에서 알코올 냄새가 났다. 황제의 곁에서 맡았던 술 냄새보다 고약하고 짙은 냄새.
“그건 그렇지만…….”
“이 사람아, 대의를 도모하기 위해선 이런 일 저런 일도 있는 거지.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대변해 주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숨통이 좀 트지 않겠어?”
그들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찌개를 푹푹 떠먹고 있었다.
단숨에 술을 들이켠 한 명이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대의고 나발이고 그런 머리 아픈 건 몰라! 하지만 그놈들이 깡패 새끼들 모가지를 끽, 해 버리는 건 좋단 말이지.”
남자는 고춧가루가 덕지덕지 붙은 숟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개 같은 새끼들, 언젠가 콱 뒈져 버리라고 빌었는데. 요즘 아주 살맛 나. 고놈 새끼들 벌벌 떠는 꼬라지 볼만하다니까?”
뜻밖의 사실이었다. 군인들과 깡패들을 죽이는 게 자신만이 아니었다니. 그래서 혁명단의 노인이 자신을 그냥 보내 준 건가 싶었다.
“나는 그 단체가 뭘 하든 찬성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
그들의 대화가 슬슬 끝나 갈 기미가 보일 즘이었다. 개는 자신의 시야를 가린 꽃무늬 앞치마를 올려다보았다.
“자, 학생이 시킨 돈가스.”
테이블에 커다란 접시가 놓였다. 새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바삭한 돈가스 위에 갈색 소스가 흥건하게 뿌려져 있었다. 양배추를 썰어 만든 샐러드 위에는 빨간 케첩과 통조림 옥수수가 뿌려져 있었다.
식당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는 아무런 말 없이 돈가스를 내려다보는 개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저 테이블에서 시킨 거랑 똑같은 거야, 이거.”
여자가 가리킨 테이블엔 벌써 접시를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양복쟁이가 있었다. 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식당엔 메뉴가 너무 많았고, 개는 메뉴를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눈에 보이는 음식을 시켰다.
“그리고 이건 예쁘게 생긴 학생이 왔으니까 주는 서비스.”
푸근한 미소를 지은 여자가 테이블 위에 계란말이를 놓고 사라졌다. 잘게 다진 채소로 색을 낸 계란말이는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
잠시 음식을 내려다보던 개는 옆에 있던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고기를 은색 칼로 잘라 먹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 또한 그렇게 하는 게 올바를 것이다.
뭉뚝하고 두꺼운 칼날을 돈가스 위에 대자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개는 소스에 흠뻑 젖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독을 맛보듯 작은 조각을 음미하는 개의 얼굴이 무감했다.
개는 길거리의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었다. 황제의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에도 독이 들어가는데, 바깥의 음식은 더욱 위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깥의 음식은 맛이 없을 뿐, 독은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개는 종잇장처럼 얇게 펴져 고기 맛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돈가스를 썰었다. 껍질과 고기가 헛돌아 접시는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큰 조각을 입에 넣었다. 소스에 전 돈가스가 입 안을 맴돌다 꿀꺽 목구멍 아래로 사라졌다. 개는 다시 돈가스를 찔렀다.
황홀한 맛을 가졌으나 목숨을 앗아 갈 극독이 들어간 음식 말고도, 아무런 걱정 없이 먹을 수 있는 평범한 음식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혀끝을 얼얼하게 맴돌았다.
그런 세상이 황궁 밖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
혁명단은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였다. 주말이 지나자 감사원장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감사원장이 실종된 장소에는 폭탄이 그려진 종이가 놓여 있었다. 실제로 폭발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이 실종 사건에 혁명단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표식이었다.
안기부장에 이어 감사원장까지 실종되자 원로원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들은 섬짓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안기부장이 실종됐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다음엔 누가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만을 느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다음엔 불특정인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이 실종될 것이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늙은이들은 엉덩이에 불이 붙은 사람마냥 회의를 열 것을 종용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회의에 참여하라며 연락을 취해 온 것이다. 그렇게 하면 뭔가 기막힌 해결 방법이 나올 것처럼.
그래 봐야 쓰레기 같은 탁상공론만을 내놓을 것이 분명한데.
“지금은 갈 수 없다 전해 주세요.”
오늘로 벌써 세 번째 거절을 내뱉었다. 차현의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귀족 늙은이들의 의사를 전달한 재경이 빙글 미소를 짓더니, 절도 있는 자세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차현은 답지 않게 각을 세워 움직이는 재경을 보다가, 그의 너머로 보이는 군 수뇌부의 얼굴을 보았다.
검은 제복을 입은 군 수뇌부 인간은 모욕이라도 당한 듯 만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의 매서운 눈길이 흰 제복을 입은 재경의 뒤통수를 향해 있었다. 차현은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듯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곳은 군부의 우두머리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가 허락한 자만 들어올 수 있었으며, 감히 군부 소속이 아닌 인간이 들어온 역사가 없는 장소였다.
그런데 그곳에 감히 검찰청의 인간이, 그것도 보좌관밖에 안 되는 인간이 들어왔다?
차현은 저자가 느꼈을 모욕감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와 관용은 다른 것이었다.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 모욕감을 느끼든 말든, 차현에게는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습니까?”
“예?”
차현은 이 멍청한 불청객에게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나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아이를 달래듯 나긋나긋한 말투였지만,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군부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 공간에, 군부의 사람이 아닌 이들만이 남겠다는 것이었다.
차현은 모멸감에 주먹을 말아 쥔 남자의 가슴팍을 보았다. 그곳에는 그의 이름 석 자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준장 주대식.
“아직 맞춤옷이 나오지 않아 품이 맞지 않는데, 불편하진 않으실지…….”
“괜찮습니다.”
준장은 나른하게 미소 짓는 공작의 얼굴을 보았다.
차현은 안기부장의 일을 겸임하게 된 순간부터, 검찰청에서 입던 흰 제복을 벗고 검은 제복을 입기 시작했다. 급히 공수한 제복은 당연히도 차현의 몸에 맞지 않았다. 가장 큰 치수를 가져왔음에도 팔목과 발목이 제복 아래로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완벽한 인간처럼 보였다. 실없이 웃는 것 같은 얼굴엔 빈틈이 없었다.
“주대식 준장. 더 할 말이 남아 있습니까?”
그러나 그가 옷 위에 걸치는 코트는 검찰청 소속을 의미하는 순백색의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뿌리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준장은 그 코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 뿐이었다.
“군인들과 민간 조직이 살해당하는 일이 생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폐하께서 승인해 주시지 않아 제대로 된 대비를 못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차현은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는 이를 마주 보았다. 그의 입술 위에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민간 조직이라. 언제부터 깡패 새끼들이 팔자 좋게 ‘민간’이라 불릴 수 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보고서에 적혀 있던 이야기군요.”
“예. 가장 시급한 사안이기에…….”
“우선은 두고 보죠.”
차현은 오늘의 날씨를 말하듯 일상적인 어투로 말했다. 뭐가 이상한지 느끼지 못하던 준장의 눈이 뒤늦게 휘둥그레졌다.
“예?”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못 믿는 듯한 얼굴이었다.
공작은 낙하산이라 하나, 귀족답지 않고 이성적이라 소문난 이였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이런 무책임한 말이 나왔다고?
차현은 당혹스러워하는 준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미소가 떠오른 입술이 열릴 듯 말 듯 느리게 달싹거렸다.
“황궁 바깥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준장의 몸이 움칠 떨렸다. 그도 ‘혁명단’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진즉 안기부장을 살해한 반정부 집단이었다. 반드시 처단해야만 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 집단.
“그런 상황에 군부가 살인마를 찾는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겁니다.”
차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국민들을 통제해야 하는 군부가 나약하게 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면, 사람들은 군부를 우습게 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통제력의 상실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3인 1조 체제를 유지하고, 살인마를 조심할 것을 다시 한번 당부하세요.”
“예…….”
하지만 정말 이대로 두고 봐도 되는 걸까?
언제나 기세등등하던 군인들의 얼굴에 공포심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언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순찰을 나가는 일마저 꺼려한다는 보고까지 올라오는 판국에…….
“더 보고할 게 있다면 윤재경 검사에게 연락을 남기세요.”
“윤재경 검사, 말입니까?”
그러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준장은 공작의 옆에 선 남자를 보았다. 싱글싱글 웃던 윤재경은 뱀 같은 눈동자를 번뜩였다. 그는 축축하고 음습한 늪에 빠져든 것 같은 기분에 홱 눈을 피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차현은 시선을 바닥에 깐 채 주먹을 바르르 떠는 준장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준장은 달갑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차현은 준장이 빠져나간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뒤에 가서 검사님 욕이라도 하는 거 아닙니까? 표정이 딱 그런데요오.”
“글쎄.”
군부는 차현의 영역 밖에 있던 집단이었다. 지금부터 조금씩 장악해 간다 하더라도, 검찰청처럼 완벽하게 손안에 넣기엔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반항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 버리는 것.
혁명단은 곧 전면에 나설 것이다. 만약 그때까지 군부가 멀쩡하다면, 이들은 혁명에 엄청난 방해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차근차근 무너트려야 했다. 자신들이 무너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너지도록. 혁명단이 쳐들어와도 무엇을 할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오합지졸 무리가 되도록.
“그리고 검사님, 들으셔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경은 자신의 입을 가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감사원장이 죽기 전, 황제와 독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차현의 시선이 재경을 향했다.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가?”
“비서실장이 궁인들에게 함구하라 명령한 사안이었습니다.”
차현의 미간에 작은 실금이 갔다. 비서실장이 함구를 명령한 일이라. 신빙성 하나는 확실한 사안이었다.
“보고가 늦어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는 됐어. 그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고 싶은데.”
“워낙 비밀스럽게 이뤄진 독대였기에 자세한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차현은 턱을 괴고, 테이블을 손끝으로 두들겼다. 설핏 일그러진 표정에 짜증이 묻어났다.
“…….”
감사원장이 황제에게 할 말이야 뻔했다. 그 늙은이는 얼마 전부터 차현을 실각시키고 싶어 혈안이 된 상태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차현의 인망에 흠집을 내려 했을 테지.
그게 아니라면 황제와 자신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었을 것이다. ‘공작의 행실이 수상하니 의심하라’든지, ‘공작이 은연중에 황제의 권위를 노리고 있을 것’이라 했을 것이다. 자세한 대화 내용까진 알 수 없어도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을지는 쉬이 짐작이 갔다.
“감사원장이 무슨 말을 했든 폐하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재경은 책상을 두드리며 침묵을 지키는 차현에게 입을 열었다.
“감사원장은 귀족의 권리가 황제의 권위에 버금가길 바라던 이들 중 한 명입니다. 그런 자의 말에 황제가 귀를 기울였을 리 없습니다.”
“알아.”
책상 위를 두드리던 손을 거두어들인 차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다리 곁에서 긴 코트 자락이 너울거렸다.
“그래도 동태를 살펴봐. 확실히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차현의 긴 다리가 순식간에 문 앞에 닿았다. 재경은 놀란 얼굴로 차현의 등을 좇았다. 알기로 차현이 이리 급히 가야 할 곳이 없는데, 그는 무언가에 쫓기듯 움직이고 있었다.
“검사님? 갑자기 어딜 가시는…….”
“혁명단.”
차현은 짧게 대답했다.
“일을 조금 더 빨리 진행해야겠어.”
“예?”
재경이 당황한 듯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개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황제에게 내민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 황제는 왜 차현을 불러 독촉하지 않는 걸까.
깨달음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남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순식간에 엄습해 왔다.
“지금 갈 거니 준비해.”
“당장이요?”
재경은 조급하게 구는 차현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차현은 여전히 차현이었다. 신이 빚은 것처럼 아름다운 외피 안에 음습한 욕망을 숨긴 남자. 재경을 홀린 새까만 욕망은 여전히 그의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재경이 아는 차현은 저렇게 조급하게 구는 남자가 아니었다. 하나의 계획을 이뤄 내기 위해 수십 가지의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남자, 그렇기에 변수에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대처할 줄 아는 남자.
재경은 차현이 하는 일에 한 번도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차현의 계획은 언제나 경탄스러울 정도로 완벽했고,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논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해할 수 없는 걸까.
돌이켜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차현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비식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이 아님에도.
개가 혁명단의 본거지에 무작정 쳐들어갔을 때도, 그는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다정한 인간이 아닌데도.
징조는 계속해서 있어 왔었다. 이런 징조를 애써 무시해 온 건 차현과 재경, 두 공범자였다.
“……알겠습니다.”
“가지.”
하지만 차현은 여전히 차현이었다. 재경을 홀린 그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차현은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재경은 순결한 흰색 코트를 걸친 차현의 등을 보았다. 저 커다란 등은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 없었다. 재경은 자신이 선택한 남자를 믿었다.
✵
“감사원장이 실종됐습니다.”
늙은 남자의 목소리가 침전 안을 울렸다. 테이블 위를 바라보던 황제의 시선이 비서실장에게 닿았다.
“감사원장이, 말이냐?”
“예, 폐하.”
비서실장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황제는 희끗하게 센 비서실장의 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흥미를 잃은 듯 고개를 돌렸다.
“욕심 많은 늙은이가 벌을 받았나 보군.”
황제는 테이블 위에 놓인 구깃구깃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사진 위에 툭 닿았다. 뼈대가 불거진 손끝이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질척하게 문질렀다.
비서실장은 그런 황제를 보며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바깥의 분위기가 퍽 심상치 않은데, 황제는 여전히 실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무릎걸음으로 황제 가까이에 다가갔다.
“폐하, 이것은 그리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이건 폐하를 기만하는…….”
“기만?”
황제가 반응한 것은 ‘기만’이라는 단어였다.
“감사원장이 실종된 일이 어째서 나를 기만하는 일이지? 그자는 고작해야 감사원장이고, 나는 이 나라의 지존이자 황제인데, 어떻게 나를 기만하는 일이 될 수 있냐는 말이다. 지금 묻지 않았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실언을 했습니다.”
비서실장이 머리를 찧을 듯이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날카로운 눈이 비서실장의 왜소한 몸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그리고 감사원장이 실종된 게 뭐가 문제지?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 눈이 빨개진 놈들이 어디 한두 명이더냐? 다른 놈을 앉혀 놓으면 될 것 아니냐.”
“폐하…….”
“하지만 다른 놈들은 믿을 수가 없어. 주인을 못 알아보는 개새끼는 필요 없단 말이지.”
황제는 고심하듯 턱을 쓸어내렸다. 비서실장은 그런 황제를 바라보다 조급하게 말을 토했다.
“폐하, 공작에게 감사원장의 직위까지 내리는 것은 신중하게 생각하여 주십시오.”
“뭐?”
황제의 미간이 구겨졌다.
비서실장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종된 감사원장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폐하, 공작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하.”
황제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는군. 너도 그 소리냐?”
“폐하, 소인의 고견을 제발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인간이란 권세를 얻으면 얻을수록 더욱 갈구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공작은 이상하리만치 욕심이 없습니다. 그자는 이상합니다. 곁에 두어 좋을 것이 없는 인간입니다.”
비서실장의 절절한 목소리가 침전 안을 울렸다. 황제는 무감한 얼굴로 비서실장을 내려다보더니 고요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놈의 고견은 매번 누구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는 말로 끝나는군.”
“폐하.”
“알겠으니 나가라.”
황제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폐하, 소인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비서실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방 안에 혼자 남은 황제는 테이블 위에 올라 있던 흰 도자기 병을 덥석 쥐었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투명한 술이 목구멍 너머로 꿀꺽꿀꺽 넘어갔다.
황제는 위장을 뜨끈하게 데우는 알코올의 감각을 느끼며 입술을 문대 닦았다. 핏발 선 눈이 허공을 향했다가 곧 사진으로 옮겨졌다.
“…….”
공작은 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 온 이다. 그는 단 한 번도 황명을 어긴 적 없었으며, 언제나 충실하게 명령을 이행해 왔다.
‘폐하, 제가 죽게 된다면 공작의 동태를 유의 깊게 살피십시오. 분명 그자에겐 숨기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실종된 감사원장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폐하, 공작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황제의 개’를 찾는 중요한 일까지 공작에게 맡기는 게 옳을까?
침묵을 지키던 황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지문까지 한달음에 걸어간 황제가 벌컥 문을 밀어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들어와라.”
놀란 얼굴의 비서실장이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긴히 명할 것이 있으니.”
황제의 싸늘한 목소리가 겨울의 풍경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