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여름내 녹음이 우거졌던 황궁은 황폐한 겨울을 맞이했다.
차현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황궁을 성큼 가로질렀다. 두려움에 질린 듯 숨소리조차 죽인 궁인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선정문을 넘는 그의 다리 곁에서 긴 코트가 너울거렸다.
선정전 앞에 서자 비서실장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차현은 묵례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긴장이 역력한 목소리가 비서실장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폐하,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짧은 침묵이 장지문 앞을 맴돌았다. 차현은 희부연 막처럼 얇은 장지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 위에 도깨비불처럼 어른거렸다.
“열어라.”
황제의 가라앉은 목소리는 문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달칵.
장지문이 열리자 그 앞에 선 황제가 보였다. 흐트러진 용포를 입은 황제는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차현을 내려다보았다.
“폐하.”
차현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어디 하나 나무랄 것이 없는 예법.
황제는 실핏줄이 터진 붉은 눈으로 차현의 가마를 내려다보다가, 술병 주둥이에 입술을 댔다. 툭 불거진 울대가 꿀렁거리며 투명한 술을 삼켜 냈다.
“……그래. 내가 원하는 답은 가져왔느냐.”
황제에게선 짙은 술 냄새가 났다. 차현은 황제의 발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황제가 원하는 답.
“죄송합니다.”
그것은 ‘개’의 행방이었다.
“…….”
차현의 대답을 들은 황제는 우뚝 행동을 멈췄다. 찰나의 침묵이 억겁의 시간처럼 흘렀다.
“그놈의 죄송, 죄송……!”
와장창!
황제가 내던진 술병이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검은 군화 위가 깨진 사기 조각으로 엉망이 되었다.
차현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어떤 부당한 대우라도 모두 수용하겠다는 듯 고요한 태도. 그것은 오히려 황제의 화를 돋우었다.
“네 입에서 나오는 죄송하다는 말을 대체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것이냐!”
철썩!
비쩍 말라 뼈가 튀어나온 손이 차현의 관자놀이를 내리쳤다. 묵례를 하고 있던 차현의 고개가 옆으로 확 돌아갔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뺨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흰 장갑을 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차현은 끓어오르는 숨을 짧게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또, 또 그놈의 죄송하단 소리! 네가 진정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황제의 분노는 갈대밭에 붙은 불 같았다. 모든 걸 태우고 재만 남기 전까지는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은 분노.
“폐, 폐하!”
비서실장이 비명 같은 소리를 터뜨린 직후였다.
스릉.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차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너에게 한 달여의 시간을 주었지. 이제 얼마가 남았느냐. 보름? 일주일?”
차가운 날붙이가 목덜미에 붉은 실선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아름답게 빚어진 동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고개를 숙인 채 인내하는 차현을 바라보다가, 칼을 바닥에 내버렸다.
채앵!
얼어붙은 바닥과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전까지 무엇이라도 찾아와라. 찾지 않으면 정말 네 목이 달아날 테니.”
“…….”
황제는 그 말과 함께 등을 돌렸다. 용포가 펄럭이는 모습과 함께 장지문이 닫혔다. 차현은 싸늘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각하, 폐하께선…….”
뒤늦게 비서실장이 그에게 다가왔다. 전전긍긍하며 목소리를 낮춘 비서실장이 차현의 울긋불긋한 뺨을 보았다.
차현은 눈동자를 굴려 자신의 곁에 다가온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나이 든 사내는 겉으로는 공평한 척하지만, 누구보다 황제를 위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개를 버리자는 귀족 늙은이들의 말에 찬동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을 믿지 않는 황제가 유일하게 집착하는 인간이 ‘개’인 걸 알았으니까.
차현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부를 따르지 못한 벌을 받은 것뿐입니다.”
개소리.
“폐하께 안부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차현은 등을 돌려 선정전에서 멀어졌다. 흰 제복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날 선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황제가 개를 찾으리란 것은 이미 예견된 일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개를 주운 게 아니었나.
“…….”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더러운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돈화문을 넘어 나오자 검은 세단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차현은 무감한 얼굴로 곧장 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 앞에서 뜨거운 커피를 들이켜던 윤재경은 뒤늦게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차현이 서 있었다. 재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푸흣!”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지 못한 커피가 입술 새로 뿜어져 나왔다. 차현은 바닥에 튄 커피를 더럽다는 듯 피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닦으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제복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자 재경이 지저분해진 입가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재경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차에 몸을 실었다. 입가를 다 닦은 재경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손수건은.”
“버려.”
“예에.”
재경이 손수건을 콘솔 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차현은 짜증스러운 듯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뺨에 남은 손자국과 긁힌 상처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나저나 검사님, 이 잘생긴 얼굴에 무슨 일이랍니까. 허, 이것 참.”
차현은 룸 미러에 시선을 두었다. 뒷좌석을 바라보는 재경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었다. 검푸른 눈동자에 귀찮다는 기색이 서렸다.
“쓸데없는 소리 마.”
“제 걱정이 쓸데없다니요. 너무하십니다아.”
과장된 목소리를 내는 재경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황궁을 벗어난 차가 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정말 놀랐다고요! 폐하께서 검사님께 손을 댄 건 처음 아닙니까. 보고도 못 믿을 뻔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변함없이 고루했다. 감시하듯 선 군인들과 그들에게 순응하듯 몸을 웅크린 사람들.
“맞고도 가만히 있던 검사님도 놀랍지만, 폐하께서도 어지간히 급하신 모양입니다. 바깥이 이렇게 소란스러운데…….”
그러나 그 사이에서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
“아직도 개만 찾고 계신 걸 보니.”
“…….”
차현은 눈을 돌려 재경을 보았다. 싸늘한 눈동자가 운전석을 향하자 재경이 빙글 웃었다.
“하하,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안기부장의 개인 별장이 ‘퍼엉’ 터져 버린 게 얼마 전의 일 아닙니까아. 게다가 안기부장은 재미있는 영상만 남기고서 시체도 없이 사라졌잖아요? 황궁 담 너머에서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요오.”
재경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작은 균열. 그것은 얼마 전 일어난 폭발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산속에서 폭발이 일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로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쾅, 쾅……. 연달은 폭발은 큰 여파를 남기고서야 수그러들었다. 사람들은 아닌 밤중에 터진 폭탄에 의문을 가졌다.
테러는 일반 시민은 이용할 수 없는, 고위층만이 사용 가능하도록 묶인 땅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듣게 된 뉴스는 뜻밖의 것이었다. 모든 주요 언론이 ‘테러가 일어났다’는 말 대신, ‘공장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고만 떠들어 댔다. 황제 폐하의 빠른 판단으로 화재는 진화되었다며,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말 또한 빼놓지 않았다.
누군가는 언론을 믿었고 누군가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 해서 별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을 가볍게 놀렸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 영상 봤어요?’
그런 말이 퍼지기 전까지 말이다.
직접 보았다는 사람이 파다하지만 원본은 찾을 수 없는 영상.
그 영상에서 안기부장은 아랫도리에 속옷만 걸친 채 의자에 묶여 있다고 했다. 안대를 쓴 늙은 안기부장은 의자가 들썩이도록 몸을 흔들더니 이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들이, 너희 내가 누군지 알아? 이, 이 쓰레기 같은 좀벌레들이! 내가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너희 모두 탱크로 밀어 버릴 거야. 도로가 피바다가 될 때까지 총을 쏴 갈길 거라고. 내가 못 할 거 같아!
그건 잘 갖춰 입은 제복 아래 감춰졌던 안기부장의 본심이었다. 사람 목숨을 벌레 목숨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이의 지저분한 민낯.
―이, 이보게들. 내가 아는 건 다 알려 줬잖아. 살려 주시게. 어? 내가 죽인 것들은 다 죄를 지은 것들이었단 말일세. 황제의 권위를 능멸하려는 인간들을 내가 어찌 감히 살려 놓겠어! 나는 그저 황제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네.
그러나 곧 안기부장은 울며 흐느꼈다. 속옷을 노란 액체로 흠뻑 적셔 놓은 안기부장은 어딘가를 겁에 질린 듯 응시하더니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시체는 다 태워서 산에 뿌렸어. 역적에게 그 정도면 꽤 인도적인 대우 아닌가? 도, 돈은 원하는 대로 줄 수 있는……!
콰앙. 폭발이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영상은 끝이 난다 했다.
정말 있었다면 그렇게 끝이 났을 것이다.
영상 속 일은 실재했지만, 영상이 존재한다는 건 허구였다. 모든 건 소문에 불과했다.
차현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았다. 도로에 늘어선 군인들과, 그들과 눈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이 박힐 정도로 지겨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일어난 미묘한 균열.
한순간 수뇌부를 잃은 군인들은 혼란스러워 보였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군인들의 눈을 피해 무언가를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묻어 뒀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황제의 탄신일, 황궁에서 벌어졌던 테러를.
“이 일로 그들의 존재는 확실히 알려진 것 같네요.”
“그렇겠지.”
차현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예정되어 있던 일에 방정을 떨 필요는 없었다. 지금 신경 쓰이는 것은 그저, 황제의 도를 넘은 듯 보이는 집착뿐이었다. 미간이 작게 일그러졌다.
“검사님.”
차현은 시선을 돌려 재경을 보았다. 웃음기가 거두어진 재경의 눈동자가 룸 미러에 비쳤다.
“개는 황제를 궁 밖으로 이끌기 위한 미끼일 뿐입니다.”
재경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차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재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계획을 짜셨더라고요.’
윤재경이라는 남자가 황제의 밀정이 된 것은 5년 전의 일이었다. 샐샐거리며 웃는 스물두 살의 남자는 뱀 같은 눈동자로 차현의 주변을 맴돌곤 했다. 무언가를 알아내기라도 한 듯, 기묘한 눈빛을 빛내며.
‘어떻게 알았지?’
‘어렸을 때부터 퍼즐 맞추는 게임이 가장 즐거웠죠.’
윤재경이 스물셋이 된 해. 차현은 그를 눈앞에서 치워 버리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차현의 움직임보다 윤재경의 행동이 더 빨랐다.
‘검사님이 조각낸 그림을 맞춰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 뭡니까.’
재경은 샐쭉 웃으며 말했다.
‘절 이용하시죠. 저는 검사님의 좋은 두뇌가 될 수 있습니다.’
“알아.”
차현은 무겁게 침잠하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개는 미끼일 뿐이지. 그러니 그만 말해. 한 번만 더 말하면 귀에 딱지가 지겠어.”
“이 충신의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시다니요오. 섭섭합니다, 정말.”
능청을 떠는 목소리에 차현은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청에 도착하면 준비해.”
검은색 세단은 빠르게 도로를 달려 나갔다.
“개를 찾는 척이라도 해야지.”
✵
자라 보고 놀란 마음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어젯밤 개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네가 공작과 자는 사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어.’
그 말을 들은 직후, 개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목뒤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가, 일순 억울해졌다가, 다시 이가 악물렸다가, 또 태연해지길 반복했다.
그러나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도 하나의 생각만은 뚜렷했다. 개는 공작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공작을 만나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뭔가 욱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그 결과, 어젯밤 개는 바람만 불어도 화들짝 놀라 문을 바라보았다. 혹여나 공작이 찾아온 것인가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공작은 새벽 동이 틀 때까지도 병실에 찾아오지 않았다. 개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해 뻑뻑한 눈을 문질러 닦으며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병실을 빠져나가는 개의 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간밤에 차갑게 식은 공기가 피부 위로 스며들었다.
복도를 성큼성큼 걷던 개는 낯익은 병실 앞에서 멈춰 섰다. 이곳은 잎사귀의 병실 앞이었다.
망설임 없이 철문을 밀어 열었다. 새벽 동이 막 터 오르기 시작한 병실 안은 조용했다.
개는 눈을 굴려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잠들어 있는 듯 이불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
너무 일찍 온 걸까. 하지만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는 밤이나 새벽을 틈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개는 짜증 나는 일을 만드는 캡 모자 남자와 경고를 하겠다던 여자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작게 튀어나왔다. 역시 용건이 있는 잎사귀와 대화만 하고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개는 기척 없는 걸음으로 살금살금 침대 곁에 다가갔다. 고요한 얼굴로 잠든 잎사귀가 점차 가까워졌다. 개의 작은 그림자가 잎사귀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그 순간 잎사귀의 눈이 번쩍 떠졌다. 크게 뜨인 눈이 개의 얼굴을 담은 순간 빠르게 흔들렸다.
잎사귀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몸을 웅크렸다.
“……아악!”
잎사귀의 입에서 비명 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귀를 쟁쟁 울리는 소리에 개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잎사귀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했다. 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주변을 서성였다.
병실을 넘어 복도까지 닿은 비명 소리에 사람이 달려왔다. 개는 열린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 너 이 새끼.”
문 앞에 선 것은 캡 모자를 쓴 남자였다. 그는 순식간에 개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휘어잡았다.
“내가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소리에 개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은 눈이 빠르게 깜빡여졌다.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선 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모자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었다면 휘둘렀을 것이고, 총이 쥐어져 있었다면 쏴 버렸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기세는 흉흉했다.
그러나 모자는 그저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개의 멱살을 움켜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이마에 핏줄이 섰다.
“흐, 윽…….”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린 잎사귀의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모자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는 턱이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더니, 곧 개의 멱살을 쥐고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개는 속절없이 밀려났다.
힘을 주어 버티자면 버티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나, 당혹감이 사고를 정지시켰다. 모자는 멱살을 붙든 손으로 개의 가슴팍 위를 퍽 밀쳤다.
“나가! 빨리!”
기어코 두 발이 문턱을 넘었다. 병실 밖으로 나온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모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병실 안에 시선을 두었다.
“…….”
“욱…….”
그 순간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잎사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겁에 질린 동물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보였다. 개는 입을 달싹였다.
탕!
시선이 마주친 시간은 짧았다. 두꺼운 철문이 굉음을 내며 닫혔다.
개의 어깨가 움칠 떨렸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문이 닫혔다. 그대로 넋을 놓고 있었다면 코를 문에 찧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허공을 배회하던 까만 눈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개는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그저 말을 하려던 것뿐이었다. 자신에게는 이름이 없고, 소속 또한 불분명하다고. 그러므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다고.
그런데…….
개는 발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빛을 등진 발아래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어쩐지 속이 답답하게 엉겨들었다.
태성이 혁명단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날부터, 알고 있다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모습을 달리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옳은 것이고 무엇이 그른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
개가 복도 끝에 시선을 둔 건 그때였다.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다른 생각에 빠져 ‘저벅’ 하는 작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를 늦게 깨닫고 말았다.
아이가 바닥을 향해 수그렸던 고개를 느리게 들어 올렸다.
“……아저씨?”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질 것 같은 예성의 눈동자가 개를 직시했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 쳤다.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유리창은 어린아이가 기어 나가기에도 작아 보였다. 저렇게 작은 창문으로는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손안에 땀이 배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듯도 했다.
개는 자신을 바라보는 예성에게 등을 보이고선 곧장 걸음을 옮겼다. 마주치지 않은 척 지나칠 생각이었다.
“아저씨, 잠시만요!”
채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붙들리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
이른 아침, 예성은 참을 수 없는 요의에 눈을 떴다.
그간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줄여 가며 형의 옆을 지켰는데. 오늘따라 화장실에 가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어젯밤 형의 친구들이 준 음료수를 먹고 잔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예성은 요의에 발을 동동 구르면서 침대 주변을 서성였다.
깊은 잠에 빠진 태성은 어느 순간 모든 걸 잊고 사라질 사람처럼 보였다.
형이 사라진다. 그 명료한 명제가 두려워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요의를 참을 수는 없었다. 열한 살이나 되어서 바지에 실례를 하는 건 창피한 일이었다.
예성은 잠든 태성의 손을 꽉 붙잡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형, 나 금방 갔다 올게. 기다려 줘야 해?’
예성은 황급히 병실을 뛰어나와 복도 끝에 있는 공용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만난 것이다.
‘……아저씨?’
어쩐지 풀 죽은 듯 보이는 곱상한 얼굴의 남자를 말이다.
삐, 삐.
태성의 병실 안에는 기묘한 정적이 이어지고 있었다. 개와 예성은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곳을 지켜보았다.
예성은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힐끗 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흰 얼굴과 새까만 눈의 대비가 분명한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예성은 자신을 외면한 채 바닥만을 바라보는 개를 곁눈질하다가, 이내 무릎 위에 놓인 손을 꾸물거렸다.
“계속 못 봐서…… 아예 가신 줄 알았어요.”
개의 몸이 움찔 떨린 것은 그때였다. 바닥을 향해 있던 개의 눈동자가 도륵 굴러 예성을 향했다.
“형을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을 못 했는데…….”
말을 흐리는 예성의 눈두덩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억지로 눈물을 참아 내듯 일렁거렸다.
“형이 그랬어요. 누가 도와주면 꼭 감사하다 말하라고.”
개는 속이 불편하게 꼬이는 것을 느꼈다. 작은 몸뚱이를 가진 예성은 쉽게 울지 않았다. 눈물이 그득 고인 두 눈을 쓱쓱 비비는 어린아이는 답지 않게 커다래 보였다.
“감사합니다.”
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왜 자신에게 ‘태성을 살려 주어 고맙다’고 말하는 걸까.
겨우 숨만 쉬며 살아가는 사람을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저 시체 같은 얼굴을 보고도 정말로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가? 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뜨지 못하잖아.”
무감정한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온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저건 구한 게 아니야.”
예성의 눈이 커다래졌다.
“감사하다 하지 마. 나는 그런 짓 한 적 없어.”
“아저씨……?”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예성을 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병실에 있고 싶지 않았다. 병자가 누워 있는 공간 특유의 적막함 때문인지, 가슴 안쪽을 따끔하게 만드는 감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꽉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밀려들었다. 그제야 답답했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개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느릿한 걸음이 모퉁이를 돌아갈 즈음이었다. 모퉁이 너머에 있던 그림자가 개를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개의 까만 눈동자가 어둠에 묻혀 있던 이의 얼굴을 읽었다. 선명하게 기억된 얼굴. 그러나 대화를 할 시간은 없었다.
왼쪽. 개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뻗어지는 발을 막아 냈다.
퍽!
걷어차인 팔이 지잉 울렸다. 다 아물지 않은 어깨의 상처가 후벼 파이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읏…….”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개는 이를 아득 물고, 뒤이어 뻗어지는 주먹을 피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상대의 몸이 빛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재빠르게 뒤로 물러선 개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개는 자신에게 쏘아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로의 상태, 실력, 승률을 가늠하는 짧은 대치가 이어졌다.
판단은 빨랐다. 이 좁은 공간에서 싸울 경우, 유리한 것은 개였다. 여자는 움켜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풀었다.
“단원들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 말이 장난처럼 느껴졌나 보지?”
개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여자와의 거리는 고작 열 발자국 정도. 상대를 방심시킨 후 달려들기에 멀지 않은 거리였다.
“잎사귀에게는 왜 찾아간 거야. 사마귀의 병실에서 나온 건 또 뭐고.”
“알아야 하는 게 있어.”
망설임 없이 내뱉어진 목소리에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작? 그게 다라고?”
개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고작?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다른데 가서 알아봐. 이번이 정말 마지막 경고니까.”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개를 스쳐 지나갔다.
개는 태성의 병실 쪽으로 멀어지는 여자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 반대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걸어 나가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
마침내 복도 끝에 난 작은 창문 앞에 섰다.
개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차가운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비쩍 마른 나무와 무채색으로 이뤄진 풍경이 검은 눈동자에 담겼다.
고작.
개는 떫게 느껴지는 단어를 혀로 굴렸다.
누군가는 ‘고작’이라 부르는 쉬운 일조차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황궁 밖의 세상은 온통 그런 것뿐이었다. 그래서 실수를 저질렀다.
개는 다시 보게 된 태성의 고요한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투명한 창문에 작은 머리를 툭 기대었다. 바깥의 찬 기운이 흐트러진 머리칼 너머로 느껴졌다. 눈꺼풀 아래로 감춰졌다가 드러나길 반복하는 검은 눈동자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답을 내놓을 수 없는 걸, 지금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마.’
개는 아름답게 미소 짓는 남자를 떠올렸다. 부드러운 입술로 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개의 입술이 작게 달싹거렸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공작이 보고 싶었다.
✵
유난히 긴 밤. 공작은 오지 않고, 그의 수하들조차 병실 주변을 지키지 않는 날이었다.
혼자가 된 개는 밤바다를 표류하는 뗏목처럼 흔들렸다. 너무 많은 생각이 부서진 배의 잔재처럼 주변을 떠다녔고, 수면 아래 빙산 같은 고민들이 시시때때로 개의 피부 위를 날카롭게 스쳤다.
“…….”
혁명단의 사람들은 개를 반기지 않았다. 그들은 개를 경계했고, 개가 자신들에게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물론, 그들의 친절한 호의는 개도 바라지 않았다. 그들과 지금처럼 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개에겐 편했다.
다만 개는 그들의 일원인 잎사귀가 필요했다. 그가 가지고 있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개는 이해해야만 했다. 태성이 왜 그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이 불합리한 일의 원인을 알아야만 했다.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개는 여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잎사귀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먹구름이 옅게 낀 하늘이 어두웠다. 창을 두드리는 작은 빗방울이 바깥을 흐리게 만들었다. 진눈깨비인지 부슬비인지 모를 작은 입자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개는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아. 기억…….”
“……었죠.”
잎사귀의 병실 앞에 서자, 문 안쪽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까만 눈동자를 도륵 굴렸다.
어제와 같은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늦은 오후 사람이 있을 때를 기다렸다.
사람이 있으니 잎사귀도 놀라지 않겠지.
문을 밀어 열자 낡은 경첩이 끼익, 하는 소음을 내질렀다. 화기애애하던 병실에 한순간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개는 병실 안의 풍경을 보았다.
“허…….”
그리고 그곳엔 예상 밖의 사람도 있었다. 잎사귀의 병실 안에는 캡 모자를 쓴 남자뿐 아니라, 여자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개는 눈을 깜빡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여자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듯했다.
“잠깐만…….”
잎사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입을 달싹였다. 어제는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과민한 반응을 보였지만, 아직 그에게는 개한테서 들어야 하는 대답이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곤란했다.
“왜 먼저 와 있었어.”
그러나 잎사귀가 입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개의 등 뒤에 섰다.
“연우야.”
기척도 없이 나타난 공작이 개를 뒤에서 끌어안더니, 부드러운 머리칼 위에 입을 맞췄다. 보란 듯이 이어진 행동에 잎사귀는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렸다.
흰 제복을 입은 공작의 웃음기 어린 눈동자가 잎사귀를 향했다.
“…….”
병실이 당혹스러운 침묵에 잠겨 들었다. 갑자기 등장한 공작은 ‘잠자리 상대이자 충성스러운 수하’라고 표현한 남자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요사스러운 장면에 모두들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연우’라니. 고작 잠자리 상대를 이르는 것치고는 다정한 울림을 가진 호칭이었다.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놀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개였다. 개는 휘둥그렇게 뜬 눈을 들어 올렸다. 가늘게 미소 띤 공작의 눈동자 위로 즐거움이 넘실거렸다.
“왜?”
차현은 멍청히 눈을 깜빡이는 개를 내려다보았다. 물어 상처를 냈던 입술이 작게 벌어져 있었다. 입술 새로 보이는 붉은 혀가 구미를 당겼다. 작은 입 안은 혀를 넣으면 가득 차 곧 숨을 헐떡이고는 했다.
지금 여기서 입을 맞추면 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연우야.”
나긋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개의 몸이 크게 떨렸다. 검은 눈동자가 풍랑을 맞은 나룻배처럼 흔들렸다. 차현은 즐거움을 숨기지 않은 채 개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끝에서 흐트러졌다.
품 안에서 뜻대로 반응하는 몸이 기꺼웠다.
황제에게 이 모습을 보여 주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 주웠을 때의 개는 거칠었다. 인간보다는 들짐승에 가까웠고, 머리칼도 피부도 모두 날것처럼 빳빳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황제는 개를 제대로 다룰 줄 몰랐다. 눈자위가 흠뻑 젖을 정도로 우는 얼굴을 몰랐고, 성기를 문질러 줬을 때 파득 뛰는 야한 몸을 몰랐다. 그리고 구멍을 벌려 좆을 쑤셔 박았을 때, 붉어진 얼굴로 어떻게 끙끙대는지도 모르겠지.
차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개의 흰 목을 보았다. 맛을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저기.”
차현은 그제야 눈을 들어 병실 안을 보았다. 병실에는 제각각 다른 표정을 한 세 사람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왔다는 건 뭐고, 지금 이 상황은 또 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입을 연 것은 골이 아프다는 듯 미간을 좁힌 여자였다.
차현은 잠시 병실 안의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명이라. 그건 제가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차현은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흩날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안개처럼 부슬부슬하게 내리는 비, 연우(煙雨).
개가 혁명단의 일원이 있는 병실에 찾아갔다는 얘길 들은 직후, 그는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생각했다. 일회용에 불과한 이름에 많은 시간과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제 사람을 의심한 건 저쪽일 텐데.”
차현의 시선이 침대 위에 앉은 잎사귀를 향했다. 맹랑하게 눈을 빛내던 잎사귀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잎사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
잎사귀가 작은 소리를 토해 내며 눈을 굴렸다.
눈치가 빠르고 판단력이 좋다 하나, 잎사귀는 고작해야 스물세 살의 어린애였다.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의문 섞인 시선을 받으면 위축될 수밖에 없는 나이.
“저게 무슨 말이야?”
캡 모자를 쓴 남자가 물었다. 잎사귀는 대답을 보류하듯 시선을 피했지만―
“일과 관련된 건 비밀이 없어야 한다 했잖아.”
이어 여자가 입을 열자 더 이상은 버티지 못했다.
잎사귀는 멍청한 얼굴로 선 개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
잎사귀의 의심은 정당했다.
그는 개와 함께 있는 내내 ‘혁명단의 위치’를 실토할 것을 강요당했다.
개가 정말 ‘공작의 수하이자 잠자리 상대’일 뿐이었다면 혁명단의 위치를 물었을까?
잎사귀는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애초에 공작의 수하가 무슨 연유로 그런 것을 묻는단 말인가. 자신이 따르는 주인이 익명으로 후원하는 단체의 위치를 알아서 무엇 하려고? 게다가 그 일원 중 한 명을 잡아 고문까지 하며 알아내려 한다?
잎사귀는 과정과 결론에 분명한 모순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선 유감을 표합니다.”
공작은 짐짓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명화 속 인물처럼 완벽한 대칭을 그린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그건 높은 사람들이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뱉는 입버릇 같은 말이었다. 한때라고는 하나 잎사귀 또한 상류 세계의 일원이었던 적이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서약이라도 하라고 해야 하나. 잎사귀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검찰 총장인 남자에게 서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는, 마음에도 없는 서약을 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도 봐야 분이 풀리지 않겠는가.
잎사귀는 ‘제가 그 말을 어떻게 믿는데요’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공작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제 사람의 질투를 막지 못한 제 실책에 대한 사죄입니다.”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 흐트러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뭘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벙 찐 얼굴을 했고, 어떤 사람은 당혹스러운 듯 눈을 크게 끔뻑였다.
잎사귀는 전자였다.
질투? 방금 저 공작이 ‘질투’라고 말한 게 맞나?
“제게도 위험 부담이 큰 일이니 비밀에 붙이려 노력했는데……. 그게 불안함을 가중시킨 모양입니다.”
“……무슨.”
공작과 가깝게 붙어 선 개 또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개는 자신도 몰랐던 충격적인 진실에 반항하기 위해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왜, 연우야.”
“…….”
공작이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개는 고장 난 기계처럼 뻣뻣이 굳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개는 반항 의지를 잃고 시선을 내렸다. 푹 숙여진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두 사람이 거래를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설명이 됐다면 이쯤에서 서로에 대한 의문을 거두었으면 좋겠는데요.”
거래?
잎사귀에게서는 듣지 못했던 이야기에 모자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잎사귀는 시선을 피했다. 여자는 한숨을 내뱉더니 잎사귀에게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거래가 끝나면 두 사람이 만날 일도 없어진다.
잎사귀는 입을 달싹였다. 의심이 완벽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 입을 열지 않기도 힘들었다. 그는 억지로 떠밀리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잎사귀의 이야기는 그저 그런 비극이었다. 잘살던 집이 황제의 폭정으로 인해 폭삭 주저앉고, 희망을 잃고 죽으려던 자신을 혁명단의 우두머리인 여자가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
차현은 발에 차일 만큼 많은 비극보다는, 이야기를 듣는 개에게 집중했다.
잎사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개는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을 꽉 주먹 쥔 채 잎사귀를 응시하는 흰 얼굴이 진중했다.
차현은 그런 개의 눈꺼풀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곳에 고정된 시야를 가리면, 말간 눈으로 자신을 볼 것이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
손을 대지 않은 것은 이따금 깜빡이는 개의 눈 위에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얇은 쌍꺼풀 라인에 찍힌 점은 오늘에서야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내 얘기는 끝이야.”
차현이 눈을 들어 올린 건 잎사귀의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였다. 병실 안은 기묘한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개는 얼핏 보면 무감한 표정을 유지하는 듯 보였지만, 검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
잎사귀의 병실을 나서면서부터 개는 침묵을 지켰다. 생각에 빠진 듯 침잠한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일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연우야.”
일회성의 이름을 다시 입에 담은 건 충동이었다. 수면 아래 깊이 빠져들었던 개가 낚시 바늘에 꽂힌 물고기처럼 파득 뛰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개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공작은 아까부터 자신을 ‘연우’라는 단어로 부르고 있었다.
연우.
부드럽고 다정한 울림을 가진 낱말. ‘황제의 개’라 불렸던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공작의 물음을 이해했다. 무슨 생각을 했냐고?
“……폐하의 명령을 어겼으니 엄벌을 받는 건 당연합니다. 죽음을 선택한 건 그자의 부모고, 폐하께서는 응당 하셔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잎사귀와 그 부모가 겪어야 했던 불행은 그들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명령을 거부했고, 황제는 그에 따른 처분을 했을 뿐이다. 황제가 그들에게 죽으라 명령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일이 혁명단에 가담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순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울적한 기분이 드는 걸까. 황제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떳떳하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개는 눈을 내리깐 채 입술을 앙다물었다. 까만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파도쳤다. 숨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커다란 손이 뺨을 쥐어 올린 건 그때였다.
“연우야.”
차현은 파르르 떨리는 검은 눈을 음미했다. 성의 없이 지은 이름에도, 개는 성적인 접촉을 앞뒀을 때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왜, 그렇게 부르는…….”
“싫은가?”
차현이 걸음을 옮기자 가깝게 붙었던 개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어느새 개의 등이 병실 문에 붙었다. 차현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붙은 개의 귓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개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너의 자유야.”
차현은 순진하게 깜빡거리는 검은 눈을 보았다. 쌍꺼풀이 진 자리에 찍힌 작은 점도.
“네 자유로 인해 손해를 본다면 벌을 받겠지만…….”
“읏.”
차현의 입술이 눈꺼풀 위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눈꺼풀 위를 핥는 감촉에 개는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크게 움켜쥐었다.
개는 감았던 눈꺼풀을 크게 떴다. 코앞에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유쾌함으로 희게 번져 있었다.
“네가 받는 벌은 나에겐 좋은 일이니 나쁠 것 없지. 그러니 마음대로 생각해.”
입술이 붙을 것처럼 가까웠다. 숨결이 입술 위를 스쳤다.
차현은 혀 위를 구르는 단어를 내뱉었다.
“내가 널 연우라고 부르고 싶어진 것처럼.”
아무런 뜻 없이 지은 이름이었지만,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에 들었다. 차현은 자신을 향해 눈을 깜빡이는 개를 보며 입술을 당겨 웃었다.
“눈 감아야지.”
눈을 감으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 남자가 그러지 않았던가. ‘키스할 때는 눈을 감는 게 매너’라고.
그러나 개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현혹적인 말을 뱉는 입술과 맞닿으면, 멈출 수 없는 급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머리가 녹을 것처럼 뜨거워지고 몸에는 힘이 빠졌다. 죽음의 감각 같은 오싹한 느낌에 사타구니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거역할 수 없는 쾌감에 흠뻑 젖으면 어느새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는 개를 밀어붙여 흰 다리를 벌리고, 존재를 잊고 있던 신체 조직을 건드렸다.
스스로 문지를 때는 별 감흥 없던 성기가 남자의 손길에 선액을 질질 흘리는 것은 낯선 기분이었다. 곧고 큰 손이 말랑한 표피를 건드리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구멍에 좆을 쑤셔 박아 넣지 않았던가. 몽둥이처럼 커다란 좆이 박힐 때마다 내장 기관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과 함께 눈앞에 흰 빛이 튀었다. 전기에 지져진 것처럼 찌릿한 감각이 뇌리를 관통하고, 머리가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
“흣.”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공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얇은 표피 너머로 느껴졌다.
그는 개의 다리나 입술을 벌리기 전,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눈앞에 둔 포식자처럼 이를 세우곤 했다. 이건 쾌감의 전조였다. 다물리지 않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벌어지는 입술을 막지 못한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남자는 작게 벌어진 입술 새로 혀를 깊이 집어넣었다. 귓가에 닿아 있던 손이 턱을 잡아 올렸다.
두꺼운 혀가 마른 입 안을 헤집고 혀 뿌리를 쓸어 올리자 타액이 배어났다. 입 천장을 깊숙이 핥아 올릴 때마다 입 안에서 젖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읏…….”
치켜 올려진 고개 때문에 뜨겁게 달아오른 타액이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식도가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거칠한 혀의 윗면이 아래쪽의 매끈한 표면을 핥자 오싹한 감각에 생각이 어질러졌다. 두꺼운 혀가 목구멍을 쑤실 것처럼 깊이 밀려 들어왔다.
겹쳐진 입술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신음이 목구멍을 울렸다.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조차 기억해 낼 수 없었다.
흉터로 얼룩진 손이 남자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단단한 팔을 감싼 흰색 코트 자락이 손끝에 걸렸다가 미끄러졌다. 초점이 흐려진 검은 눈동자에 공작의 집요한 시선이 담겼다.
입을 맞출 때는 눈을 감는 게 예의라던 남자는, 자신도 눈을 감지 않은 채 혀를 얽었다.
“흐, 으…….”
코끝이 부딪친 순간 남자의 입술이 떨어졌다. 간신히 뜬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개는 젖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직도 입 안에 혀가 들어 있는 것처럼 이물감이 느껴지고, 깨물리고 뭉개졌던 입술은 얼얼했다.
“봐주는 건 오늘까지야.”
남자에게 잡힌 턱이 뻐근했다. 하지만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개는 눈앞에 놓인 웃음기 어린 얼굴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는 턱을 잡지 않은 손으로 개의 뒷덜미를 만졌다. 머리칼이 막 자라나기 시작한 연약한 살갗 위를 만지자 작은 몸이 움칠 떨렸다. 공작의 눈동자에 즐거움이 반짝거렸다. 개의 검은 눈이 홀린 듯 붙박였다.
“혀 내밀어.”
남자는 미소를 거두고 속삭였다.
개의 까만 눈동자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흰 얼굴에서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와 부어오른 붉은 입술이 마음에 들었다.
“빨기만 할 거니까.”
원색적인 말을 내뱉은 입술이 가까웠다. 혀를 내밀면 닿을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개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부어오른 입술 새로 발간 혀가 빠끔 내밀어진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읏……!”
작은 틈만으로도 충분했다. 차현은 입 안에 숨어 있던 혀를 끌어당겼다.
팔 위에 닿아 있는 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모양 좋은 입술에서 비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혀를 내민 개의 눈꺼풀은 꾹 감겨 있었다.
✵
공작이 바쁘단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밤새 알 수 없는 서류를 읽었고,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로 떠났다.
개는 황제의 명령하에 수많은 권력자들을 지켜보았지만, 공작만큼 바쁘게 사는 이를 보지 못했다.
이 나라의 주인인 황제조차도 그처럼 살지 않는데.
개는 겨울의 풍경을 비추는 창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제저녁, 노을이 지기도 전에 개의 등 뒤로 찾아들었던 공작은 손끝이 떨리는 입맞춤만을 남긴 채 돌아섰다.
그는 원래도 개가 아는 인간 중 가장 바쁜 인간이었지만, 요즘은 더욱 바쁜 것처럼 보였다.
……혁명단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걸까?
과거 공작은 개에게 혁명단을 쫓는 일을 그만두라 하며, 스스로 처리하겠다 말했었다. 그때의 공작은 분명 혁명단과의 접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개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공작과 혁명단의 접점은 전적으로 개의 언행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사람이, 놔두면 곧 죽습니다.’
잎사귀가 죽어 갈 때.
‘그 총 거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태성이 죽어 갈 때.
매번 공작의 도움을 받고 말았으니까.
혁명단과 접촉이 생긴 이상, 공작은 이 연관성을 쉽게 끊어 낼 수 없을 것이다. 정상적인 루트로는 의료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시설을 지원한 사람이 누구인지 되짚으면 그곳엔 공작이 있을 테고, 그건 공작이 혁명단을 지원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될 테니까.
“…….”
개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 일을 증거로 공작이 모함을 당한다면 그는 피할 수 없는 불행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개는 잎사귀의 불행한 과거사를 떠올렸다. 황제의 요구를 회피했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잃어야 했던 사람들의 비극.
공작이 바빠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는 권력의 찌꺼기를 맛보기 위해 어슬렁거리는 승냥이들이, 먹이의 냄새조차 맡지 못하도록 움직여야 할 것이다.
개는 밤새 복잡한 생각을 정리했다. 동이 틀 때까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이곳에 더 머무시는 게 어떨까요.”
개는 창문을 향해 있던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공작의 수하 중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직 어깨가 다 치료되지 않았을 텐데요.”
“…….”
개를 바라보는 수하의 시선은 명료했다. 그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밖에 나가 괜한 사고를 치지 말고 얌전히 병실에 더 처박혀 있으라고.
그러나 개의 의견은 변하지 않았다. 잎사귀의 이야기를 들은 이상, 공작에게 무리를 주면서까지 병실에 머물 필요가 없었다.
개는 병실에서 나가 저택으로 돌아가길 선택했다. 흔적을 없애기엔 그편이 더 나을 테니까.
단출한 옷가지 몇 개마저 모두 빠져나간 병실 안은 사용감이 없어 보였다. 개는 문 앞에 선 수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뗐다. 문을 막고 있는 자에게 긴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쾅!
“큭!”
짧은 대치 끝에 벽에 밀쳐진 건 공작의 수하였다. 팔이 등 뒤로 꺾인 채 포박당한 수하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개를 돌아보고 있었다.
물론 개라고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다 낫지 않은 어깨가 저릿거렸다. 미미하게 찡그려진 개의 눈동자 위에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확실히 총에 꿰뚫렸던 상처는 움직임에 제한을 주었다. 수하의 말처럼 더 치료를 받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참견하지 마.”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개는 수하의 팔을 움켜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벽에 밀쳐졌던 수하가 순식간에 개에게서 멀어졌다.
“필요 없으니까.”
개는 수하를 일별하고 병실의 문을 열었다. 목적지도 없이 복도를 걷기 시작했지만 뒤쫓아 오는 기척은 없었다.
“…….”
얼마나 걸었을까.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개가 일순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일정한 기계음이 들려오는 병실이 눈앞에 있었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자신도 모르게 태성의 병실 앞에 도착했다.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당황스러웠다. 왜 하필 이곳에 온 건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에 와서 뭘 어쩌려고?
그러나 뒤돌아 도망치기도 전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개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그곳에는 물병을 든 예성이 서 있었다.
예성은 병실 앞에 선 개를 보더니 눈을 끔뻑거렸다. 냉정한 얼굴로 ‘태성을 구한 적 없다’고 말한 개가 다시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주춤거리던 예성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당황한 개의 눈동자가 우왕좌왕하듯 흔들렸다. 어색한 침묵이 복도 안을 감돌았다.
“혹시 형 보러 오신 거예요……?”
개의 눈치를 보던 예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불편한 침묵을 깬 질문에 개는 즉답했다.
“아니.”
“아. 그, 그러시구나…….”
복도 위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물기가 맺힌 물병 위에서 작은 손이 꿈질거렸다. 개는 예성의 작은 머리통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 그러면 안녕히 가세요.”
예성은 불편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개의 옆을 지나 병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느렸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작은 기척이 끈적거리는 사탕처럼 개의 신경을 건드렸다.
“멈춰.”
복도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예성의 작은 몸이 움칠 떨렸다. 개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입을 벙긋거렸다.
‘네가 받는 벌은 나에겐 좋은 일이니 나쁠 것 없지. 그러니 마음대로 생각해.’
그러나 일순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매번 멋대로 행동하는 개에게 화를 내면서도, ‘마음대로 하라’고 이야기했다. 자유. 개는 이해할 수 없던 단어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다.
“눈을 뜰 거야, 태성이는.”
확신할 수 없는 가능성을 내뱉는 개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그렇게 만들 거니까.”
태성이 눈을 떴을 때, 그가 두려워할 게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 애의 머리를 내리쳤을 군인들을, 그 애의 삶을 위협했을 깡패들을 없애면 태성은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약속…….”
개는 어느 날의 태성을 떠올렸다. 그때의 태성은 바깥의 세상이 위험하다며, 개에게 안전을 기할 것을 약속하자고 했다.
‘형 약속 몰라요? 이렇게 새끼손가락끼리 엮은 다음에 엄지로 도장 찍는 거요.’
그때의 개는 태성에게 약속하지 못했다. 고작 손가락을 엮는 일일 뿐인데 왜 해 주지 못했을까.
“약속해.”
개는 뒤돌아선 예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추고, 겁먹지 않도록 최대한 표정을 풀었다.
예성의 눈이 둥그레졌다. 놀란 듯 눈을 끔뻑이는 예성은 말이 없었다.
개는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초조해졌다. 이렇게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때 태성은 이렇게 손을 내밀었는데…….
“……네.”
확신할 수 없는 동작에 손을 떨어트리려는 찰나, 예성이 작은 목소리를 웅얼댔다. 개는 눈을 크게 떴다. 흉하게 얼룩진 개의 손과 얽힌 작은 손이 따뜻했다.
고개를 푹 숙인 예성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
힘이 권력인 세상이었다. 대한제국은 주먹을 쓰는 자가 위세를 부리는 나라였고, 무기를 든 자가 모두의 공포의 대상이 되는 장소였다.
그들은 한 번도 피식자의 위치에 놓여 본 적이 없었다. 초식 동물 같은 인간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잘 보이고자 했다.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여자든, 손을 벌리면 굴러 떨어지는 위치에서 그들은 두꺼운 배를 불렸다.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 되던 이들. 그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커헉……!”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덩치는 어둠을 등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눈을 빛내는 남자의 얼굴이 오싹했다. 저 얼굴을 보고 기생오라비 같다 생각한 과거가 멀게만 느껴졌다.
남자의 발이 덩치의 얼굴을 콱 짓밟았다.
“컥. 제, 제발 그만. 당신 누구……!”
개의 몸이 움찔 떨렸다. 누구냐는 물음에 반사적으로 ‘연우’라는 이름이 떠오른 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덩치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에 하려던 게 뭔지 정확히 설명해야 할 거야.”
발밑에 깔린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덩치는, 조금 전까지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고 깊은 골목으로 들어가던 자였다.
“그게 네 죽음을 결정할 테니까.”
✵
검찰청 내부의 연무장 안, 아침 대련을 위해 도복을 입은 검사들이 그 널찍한 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두 명씩 짝을 지은 검사들은 테이블 위에 놓인 타로 카드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넘겨!”
쿵! 쿵!
고참의 외침과 함께 도복을 입은 검사들이 바닥으로 내쳐졌다. 자신의 파트너를 엎어 친 이들은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쉬었고, 넘어간 이들은 낙법을 취하며 몸이 받는 충격을 줄였다.
“이번엔 반대로 한다. 늦장 부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
자세를 바로 하기도 전에 매서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검사들은 허겁지겁 흐트러졌던 몸을 바로 하고 대치 자세를 취했다.
겨울임에도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등 뒤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에 도복이 흠뻑 젖었다. 매일 아침 하는 훈련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버겁게 느껴졌다.
대련 상대와 마주 선 젊은 검사의 입에서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까지 이렇게 뺑이 쳐야 하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눈을 마주친 채 경계하던 다른 검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젊은 검사가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총장님이 대련장에 안 나오신 지도 벌써 일주일이잖아.”
평소대로라면 훈련이 끝나 갈 때쯤, 2열로 나눠 앉아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검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현 검찰총장 차현과의 대련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는 총장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이들에게 존댓말을 했고,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았으며, 아랫사람에게 더러운 일을 맡기지 않았다. 여러모로 전 총장과는 비교가 되는 인물.
하지만 차현은 부재중이었다. 다른 이유도 아닌 황제의 말도 안 되는 명령 때문에.
“총장님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게 죽은 암살자를 찾는 일 때문이라니. 폐하는 죽은 사람을 어디서 찾으란 거야?”
젊은 검사가 분개하듯 짓씹자, 상대는 아연실색하며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다.
“야, 너 미쳤냐? 누가 들을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들으라고 해. 어차피 여기나 저기나 다 이 얘기뿐인데.”
상대의 몸이 움찔 굳었다. 젊은 검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차현의 뺨에 작은 상처가 난 날, 검찰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문에 휩싸였다.
차현은 공작이자 검찰총장인 남자였다.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높은 위치에 있는 이. 그런 남자에게 어째서 상처가 생긴 것일까.
그런 의문을 풀어 주듯, 때마침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제가 죽은 ‘황제의 개’를 찾는다는 소문. 차현의 상처는 황제의 개를 찾지 못한 데에 대한 황제의 분풀이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안기부장이 실종된 것도 2주가 넘었어. 그런데 폐하는 실종된 안기부장을 찾으라는 명령도 하지 않으시고, 빈자리를 채울 생각도 없으신 것 같다고. 게다가 궁 밖의 분위기가 수상한데 나라를 안정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죽은 개나 찾게 시키다니.”
씩씩거리던 검사는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언어가 되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건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미쳤다. 그러지 않고서야 죽은 사람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릴 리 없다.
“흐음.”
연무장 앞을 지나던 윤재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열린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는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이거 너무 예상대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재경은 가벼운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차현이 황제에게 맞고 돌아온 날, 재경은 일의 경위를 묻는 검사 중 한 명에게 ‘절대 비밀’을 한 가지 털어놓았다. 황제가 자신의 개를 찾고 있으며, 차현이 상처를 달고 돌아온 것은 그런 황제를 만나고 온 직후의 일이었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입이 가벼운 검사는 비밀을 지키겠다 호언장담했지만, 절대 비밀이 공공연한 사실이 되기까지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검찰청 내부에서 황제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황제의 불합리한 명령에 분개했다. 이건 황제가 공작을 압박하는 수단임이 분명했다. 죽은 사람을 찾으라니?
일각에서는 그것이 공작을 압박하는 수단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고개를 들었다. 실종된 안기부장을 찾지 않는 것도, 뒤숭숭한 나라의 사정을 돌보지 않는 것도, 황제가 죽은 개를 찾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재경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검찰청을 빠져나왔다. 불균형한 세상에 균열을 주는 일엔 거짓이 필요 없었다. 애써 무시했던 진실이 수면 밖으로 나온 순간,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하거나 불길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진실에 다가가려 애를 썼다.
“검사니임,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아.”
재경은 샐샐 웃으며 운전석에 몸을 실었다.
뒷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차현이 스륵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사람을 홀리는 밤바다처럼 너울거리는 검푸른 눈동자.
히죽거리는 재경의 눈 위로 즐거움이 서렸다.
“황궁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누군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빚어 낸 것처럼 고아하고 아름다운 껍질을 가진 남자. 그러나 그 안에는 검게 죽어 번들거리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황홀한 세계 위에 숨어든 새까만 그림자를 엿본 듯한 짜릿함. 재경은 이 이질적인 이중주를 사랑했다.
“만나기로 한 늙은이들은?”
“애가 바짝 달은 모양이더라고요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현은 룸 미러에 비치는 재경의 휘어진 눈을 바라보았다.
“매번 누가 누가 늦게 오나 대결이라도 하는 줄 알았더니, 오늘은 벌써 회담장에 앉아 쭈글쭈글한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아.”
오늘의 회담은 늙은이들이 먼저 요청한 것이었다. 두려웠겠지.
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바닥의 인간들을 개돼지만도 못하게 여기던 인간들이었다. 짓눌린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면서도 그들을 천하게 여기고, 그들의 불행을 재미있는 만찬 삼는 퇴물들.
그들에게 두려움이란 남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테러 집단이니 혁명단이니,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이 스러진 수많은 인간들이 언제 한 번 그들의 털끝이라도 건드린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안기부장의 저택이 폭탄 테러를 당한 날, 안기부장 또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실종되었다. 말이 실종이지, 그의 죽음을 짐작 못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 세력 다툼을 이어 가며 견제하던 이가 사라졌다. 그것은 안정을 추구하게 된 늙은이들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었다.
게다가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황제는, 어쩐 일인지 황궁에 틀어박혀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늙은이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이는 것이 당연했다.
대책을 세우고 싶겠지. 그래 봐야 또 젊은 인력을 갈아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는 방안만 떠들어 댈 테지만.
“저런.”
차현은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욕심 많은 늙은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비소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한심한 꼴이었다.
“그런데 검사님, 폐하께서 통보하신 날이 이제 3일 정도 남았는데……. 개에 대한 보고는 언제 하실 생각이십니까?”
별 의미 없이 토해진 재경의 목소리에 장갑을 낀 손이 움칠 떨렸다.
룸 미러를 향해 있던 차현의 눈동자에 소름 끼칠 만큼 싸늘한 빛이 스쳤다. 오랫동안 그의 곁을 함께했던 재경조차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야.”
그러나 차현의 눈에 귀기가 어린 것은 찰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곱게 접힌 눈매에 고아함이 반짝였다.
“가장 극적인 순간에 해결사가 나타나는 이야기는 언제나 통하는 법이니까.”
재경은 등골이 섬짓한 불안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가설을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속에 있을 때는 가설에 불과했던 것이, 입 밖으로 토해 내는 순간 진실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늦지 않게 가야겠죠?”
“그래야지.”
그렇기에 재경은 말을 돌렸다. 차현은 본래의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재경은 소름이 돋은 자신의 목덜미를 괜스레 쓸어내리며 운전대를 돌렸다. 차가 빠르게 회장을 향해 나아갔다.
✵
“폐하께선 어찌 이리 가만히 계실 수가 있단 말이야!”
쾅!
회장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멀끔한 제복을 걸친 노인은 중앙정보부의 장을 맡은 늙은이였다. 분노한 듯 파르르 떨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현은 무감한 얼굴로 앉아 회담장에 앉은 면면들을 느릿하게 살폈다.
“폐하께선 실종된 안기부장을 찾을 생각조차 없으시네.”
평소라면 점잖은 척 황제의 편을 들었을 노인이 침체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노인들이 말을 거들기 시작했다.
“칩거에 들어가셨다 하더라도, 이런 중요한 사안이 있는데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군!”
“폐하께서는 테러 조직이 이 늙은이들을 모두 죽여야 움직일 생각이신가?”
지랄 났군.
차현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을 입에 댔다. 뜨겁게 우려진 찻물이 입술을 적시고, 입 안에서 향긋한 울림을 남긴 채 넘어갔다.
그는 소란이 계속되는 테이블 위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
“…….”
그 순간 차현은 자신을 노려보던 한 늙은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흰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감사원장이었다.
평소라면 저들 사이에 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댔을 노인네가 조용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차현은 비식 터져 나오려는 조소를 억누르며, 미미한 미소를 입술에 걸쳤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지어진 미소에, 감사원장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그는 황제의 신임을 받는 차현과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노력이 얼마나 가상했던지, 이곳에 앉은 귀족 모두가 그가 어떤 짓까지 저질렀는지 알게 될 정도였다.
차현의 취임식 날, 감사원장은 그에게 미약까지 먹였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그 사실은 곧 웃음거리가 되었다. 꽤 커다란 입지를 다지고 있던 감사원장은 한순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의 애매해진 입지를 치고 올라온 것은 다른 권력자였다. 가장 높은 곳까지 기어 올라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추락은 하루면 충분했다.
“게다가 군인들과 용역인들을 습격하는 미친놈까지 생겼단 말이오!”
차현은 분개한 듯 바르르 떠는 노인네의 우스운 꼴을 감상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터트린 노성이 그의 주의를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미친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유쾌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황제의 개라 불리며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이가, 이제는 귀족들조차 두렵게 만드는 미친 인간으로 둔갑해 있었다.
이 사실을 알려 주면 연우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당황한 듯 새까만 눈을 깜빡일까, 아니면 별것 아니라는 듯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볼까. 어떤 식으로 반응하든 즐거운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일단은 빈 안기부장의 자리에 대한 안건을 올리는 게 어떻소.”
개는 전처럼 커다란 사고를 치지 않았다. 그러나 꼬투리를 잡아 개의 다리를 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비워 둘 수는 없는 것 아니오?”
차현은 끌어 올린 입꼬리를 감추지 않은 채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와중에도 권력을 탐하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는 자들.
“모두 알겠지만 폐하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네.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늙어 축 처진 얼굴 위로 탐욕스러운 눈빛이 번쩍였다.
“그 집에 자식이 하나 있지 않던가.”
“이미 시집간 계집애를 뭘 어쩌겠다고!”
“흠, 그렇다면 누군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하지 않겠나?”
경계하듯 서로를 살피는 눈빛들이 테이블 위에서 엉겨들었다. 그 순간 날 선 목소리가 차현을 향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감사원장이었다. 우스워진 자신의 꼴을 만회하고 싶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싶어 하는 얼굴.
“뜻에 따를 뿐입니다. 게다가 제 생각도 다르지 않고요.”
그러나 그럴수록 추해지는 건 감사원장뿐이었다. 테이블 위로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차현은 붉어지는 감사원장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낡고 낡아 삭아 없어지기 직전인 권력에 매달리는 이들이 게임에서 이길 리 없다. 그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든 이들을 비웃었다.
✵
밤은 도시의 어둠을 양분 삼는 짐승들이 눈을 뜨는 시간이다. 누군가의 불행을, 죽음을 먹고 사는 짐승 같은 자들의 시간.
과거 개는 그런 짐승 중 하나였다. 날카로운 비수를 감추고 인간을 사냥하는 짐승.
그러나 지금의 개는 자신과 같은 포식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주먹을 권력처럼 휘두르는 인간들. 비루먹은 노루처럼 마른 인간들을 맛보기 위해, 침을 질질 흘리는 하이에나 같은 인간들.
같은 포식자의 냄새를 쫓는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았지만, 어렵지도 않았다. 개는 밤의 생리를 잘 아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표적이 바뀌긴 했어도 인간을 사냥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고작 일주일 정도의 시간 만에 착실히 적응해 가고 있었다.
작은 몸이 높은 담벼락을 가뿐하게 뛰어올랐다. 개는 그 위에 서서 어렴풋한 불빛을 뿜어내는 공작의 저택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공작의 저택은 주인의 외형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 안에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없다.
공작은 오늘 밤에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개는 한숨을 내뱉으며 담벼락 위에서 뛰어내렸다. 공작이 없다는 이유로 일희일비할 필요 없었다. 그가 없다면 밤에 활동하는 것에 제약이 줄어드는 데다가 고요히 잠들 수 있으니까.
일주일간 공작의 얼굴을 아예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따금 새벽도 밤도 아닌 모호한 시각에 들어와 개의 잠을 깨웠다. 언젠가는 창문 넘어 끼쳐 들어오는 새벽빛을 가려 줄 것처럼 속눈썹을 쓸다가 눈이 마주쳤고, 또 언젠가는 바지 사이로 손을 넣어 사타구니를 더듬는 즐거운 얼굴을 맞닥뜨렸다.
‘무슨, 읏. 시, 싫…….’
자다가 성기가 잡힐 것이라 생각해 봤던 적이 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말았다.
‘섰잖아.’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만져진 몸은 예민했다. 허벅다리 안쪽이 파들 떨렸다.
단단한 손이 말랑한 성기를 쥐자마자 배 속이 뻣뻣하게 당겼다. 개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바지 안에 있는 성기가 빳빳이 서 천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체에 달린 살덩이는 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개는 다급히 발버둥을 치며 물러서려 했다. 비식 웃은 남자가 귓가에 속삭인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연우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눈동자가 동요를 담고 파르르 떨렸다.
연우.
그가 내뱉는 숨결마저 간지럽게 여겨지고, 듣는 순간 몸에서 힘이 빠지는 이름.
“…….”
창문턱을 밟고 선 개가 귀를 거칠게 문질렀다. 낮은 남자의 웃음소리와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달칵.
고요한 가운데 창문을 밀어 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가운 바람을 몰고 온 개는 어두운 방 안에 조용히 발을 디뎠다. 사람이 없더라도 습관처럼 기척을 죽이게 되었다.
창문턱에 등을 기댄 개는 신발을 벗었다. 흰 양말을 신은 발이 러그가 깔린 방 안을 두어 발자국 걸어갔다. 그 순간―
“……!”
어둠 속에서 뻗어져 나온 커다란 손이 개의 팔을 잡아끌었다.
개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꺾어 부러트리려 했지만, 커다란 손은 대응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빨랐다.
“윽.”
순식간에 벽으로 밀쳐진 개는 익숙한 체향을 맡았다. 무겁지만 서늘한 향기. 공작이었다.
개는 황급히 눈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곳에 선 남자가 미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박제한 그림처럼 고매한 얼굴.
“기다렸잖아.”
그는 어디서나 사람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그가 걸친 게 검찰청의 제복이 아니더라도, 그가 공작이 아니었더라도, 남자는 언젠가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본래 있어야 할 곳에 선 듯 여유롭고 태연한 얼굴.
“연우야.”
개의 몸이 움칠 튀었다. 검은 눈동자가 허공을 굴렀다. 깃털로 온몸을 문대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특히 귓가가 가려워 견디기 힘들었다. 개는 손을 들어 귀를 마구 비볐다.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달빛에 잠긴 방 안을 울렸다.
“어딜 갔다 왔어.”
남자는 개를 ‘연우’라 부른 이후부터 다정한 말투를 흉내 냈다.
그는 귀를 비비는 개의 손 위에 입을 맞췄다. 거칠게 움직이던 개의 손이 뚝 멎었다. 공작은 손등 위에 툭 불거진 뼈를 질근 씹었다. 얄팍한 살갗이 짓이겨지는 감촉이 오싹했다.
“흣.”
손목이 잡혔다. 공작의 손바닥에 감긴 피부가 데일 듯 뜨거웠다. 개의 눈가가 작게 일그러졌다.
공작은 귀를 가리고 있던 개의 손을 힘들이지 않고 떼어 냈다. 연우라고 불린 순간부터, 남자의 입술이 손 위에 닿은 순간부터, 개는 무력한 어린애처럼 공작에게 휩쓸렸다.
남자는 개의 한 팔을 벽에 짓누른 채 붉어진 귓바퀴를 깨물었다. 얇은 피막 위에 잇자국을 낼 기세였다. 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깨물었던 부위를 핥아 올리는 질척한 소리가 고막까지 닿아 왔다.
“우읏…….”
귓바퀴부터 귓불까지 입술을 찍어 내리던 남자가 흰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는 냄새를 맡듯 숨을 들이켰다. 솜털 한 올 한 올 오소소 서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툭 불거진 개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피 냄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벽에 눌린 손이 움찔 곱아 들었다. 가늘어졌던 눈이 크게 뜨였다. 확장된 검은 동공이 잘게 떨렸다.
혁명단 일당이 머무는 병동을 나오기 전, 개는 공작에게 말했다. ‘태성이 눈을 뜰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라고.
‘그래?’
공작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비식 웃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태성이 눈을 뜰 수 있는 세상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네가 내린 결론이 그거라면 그런 거겠지.’
그저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개는 평온을 유지하는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세히 묻지 않아도 그는 개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는 것 같았다.
“…….”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정곡을 찔러 왔을 때, 개는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작은 입을 달싹였다. 덩치를 죽였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누구의 명령도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한 행동. 공작이 비난을 한다면 왠지 길을 잃은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다쳤잖아.”
“읏.”
그때 공작의 손끝이 쇄골 위에 닿았다. 상처를 짓누르는 압력에 고통이 피어올랐다. 간신히 아물었던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송골송골 배어 나왔다.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쇄골에 난 상처는 절명한 덩치와 몸싸움을 할 때 난 것이었다. 얇은 칼날에 베인 것뿐이라 생명에 위협을 주지는 않았지만, 자칫 잘못해 목을 베기라도 했다면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개는 뻐근한 어깨를 힐끗 쳐다보았다. 다 낫지 않은 어깨가 계속 문제였다. 평소라면 쉽게 행했을 움직임도 어깨의 고통 때문에 제한되었다.
개의 얼굴에 무어라 명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실망감 같기도 하고, 불만 같기도 한 감정.
“피 냄새에 어떤 짐승 같은 자가 쫓아올 줄 알고.”
이어진 공작의 목소리에 개가 눈을 홉떴다. 복잡하게 얽혔던 감정은 한순간 날아가고, 당혹감만이 검은 눈동자 위를 맴돌았다.
“그건…….”
짐승 같은 자.
그중 제일은 ‘황제의 개’라 불렸던 개 자신이 아닐까.
게다가 짐승 같은 자가 피 냄새를 맡고 다가온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수고스럽게 찾으러 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개는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입만 벙긋거렸다.
“무방비하게.”
공작은 딱히 개의 대답을 들으려 했던 게 아닌 듯했다. 그는 비식 웃더니 개의 상처 위로 배어 나온 피를 핥았다. 따끔한 고통이 상처에서부터 피어올랐다. 개는 공작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팔뚝을 꽉 쥐었다.
“흣……?”
공작의 손이 개의 옷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마른 뱃가죽을 더듬고 올라온 커다란 손이 개의 갈비뼈를 두드리더니, 판판한 가슴 위에 솟은 유두를 건드렸다. 개의 몸이 파득 뛰었다.
개의 쇄골을 핥던 공작의 입꼬리가 가볍게 끌려 올라갔다.
“거길, 왜…….”
공작이 유두를 건드린 것은 처음이다. 야릇한 감정이 든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공작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다.
“쉬이.”
그러나 단단한 벽처럼 선 공작은 밀려나지 않았다.
그는 상처가 난 쇄골을 이로 짓씹었다. 예상치 못한 행위에 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까이 붙은 야한 몸이 긴장한 듯 빳빳이 굳는 게 느껴졌다.
“다른 곳에도 상처가 났는지 봐야지.”
공작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개의 옷을 밀어 올렸다. 천 아래 감춰졌던 마르고 단단한 몸이 어렴풋한 달빛을 받았다.
개는 뒷걸음질 치려 했다. 상처라니? 쇄골에 난 상처 빼고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작은 막무가내였고, 벽에 눌려 있는 몸은 뒤로 물러날 수 없었다. 개는 급히 입을 달싹였다.
“상처 없…….”
“넌 고통에 익숙하잖아.”
쇄골 언저리를 씹던 공작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개는 일순 숨을 멈췄다.
달빛을 받은 공작의 눈동자가 코앞에 있었다. 가늘게 휘어진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에 새파란 정욕이 넘실거렸다.
“네가 모르는 새 다쳤을 수도 있지.”
공작의 커다란 손이 유두를 비비며 올라갔다. 존재조차 잊고 있던 유두가 마찰에 의해 뾰족하게 서는 것이 느껴졌다. 개는 눈살을 찌푸렸다.
쇄골 위까지 말려 올라간 옷이 머리 위로 벗겨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으, 흣…….”
공기 중에 드러난 맨살이 차가웠다. 아니, 뜨거운가?
개는 숨을 헐떡였다. 공작의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귓바퀴를 핥고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다. 연골이 있는 곳을 느긋이 물고 빨아 당기는 감촉에 목덜미가 오싹하게 달아올랐다.
“흣……?”
개의 몸이 파득 뛴 것은 그때였다. 귓불을 잘근 씹던 공작이 귓구멍에 혀를 세웠다.
뾰족하게 세워진 혀가 귀 안으로 쑤셔 박히는 것 같았다. 개는 진저리를 치며 몸을 버둥거렸다. 생리적인 거부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쾌감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하지 마십, 싫……!”
“쉬. 연우야, 상처가 어디 있는지 알아봐야지.”
공작이 귓가에 웃음소리를 흘렸다. 버둥거리던 움직임이 둔해지고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단단한 팔을 쥐어뜯듯 잡은 개의 손끝이 약간 곱아 들었다.
공작은 비식 웃음을 흘렸다. ‘연우’는 개의 기세를 수그러들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였다.
“읏.”
공작은 얌전해진 개의 귀 뒤를 핥았다. 그러자 상처가 났다 굳은 듯 딱지가 진 부분이 혀에 걸렸다. 즐거움이 머물던 공작의 눈에 미묘한 감정이 어렸다.
“여기 상처가 있는데.”
“그건 이틀 전에 난 상처, 흣…….”
개는 신음을 삼켰다. 잠깐 떨어졌기에 안심했던 손이 다시 가슴팍 위에 닿았다. 곧은 손가락이 짙은 분홍빛을 띠는 유두를 문질렀다.
개는 공작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등이 벽에 닿아 있어 별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흐음…….”
목덜미에 얼굴을 박은 공작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개는 목덜미가 간지러워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유륜을 둥글게 문지르는 손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다. 몸이 움칠움칠 튀어 올랐다.
“그럼 여기는?”
유두를 툭툭 건드리던 손이 갈비뼈를 타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다. 개는 옆구리에 난 큰 흉터를 건드리는 손길에 마른침을 삼켰다. 사타구니 쪽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예전, 에 총장을 죽였을, 으읏…….”
목덜미 부근에서 따끔한 고통이 피어올랐다. 눈살을 찌푸린 개의 뱃가죽이 조금 오그라들었다.
열이 오른 피부 위를 콰득 씹은 공작은 미미한 미소를 입에 걸쳤다.
“전전 총장 말이지.”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예민한 귓가로 흘러드는 목소리가 자극적이었다.
“네가 내 윗사람을 죽였던 살인마라니. 오싹한데.”
“죄송…….”
“쓸데없는 말 말고 입 벌려 봐.”
개는 입을 달싹였다. ‘살인마라 오싹하다’고 말한 남자가 자신의 벗은 몸을 쓸어내리며 입을 벌릴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작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입을 벌리면 그가 입을 맞출 텐데, 아는데,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재촉하듯 눈을 맞추는 공작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공작의 입술이 개에게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개는 숨을 내뱉듯 입술을 작게 벌렸다.
“흣…….”
그 순간 입술이 겹쳐졌다.
그는 단단한 혀로 개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얽었다. 숨이 뒤섞이는 입 안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입 천장을 훑고 목구멍 속을 핥을 것처럼 혀를 집어넣는 움직임에 숨이 막혔다.
고작 혀를 넣은 것뿐인데 입 안이 가득 찼다. 가늘게 접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감겨 있던 공작의 눈꺼풀이 떠진 것은 그때였다.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검푸른 눈동자가 개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개는 부정을 들킨 사람처럼 급히 눈을 감았다.
커다란 손이 개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손의 감촉에 오싹함이 피어올랐다. 웃음소리가 입 안에 섞여 들었다.
공작은 벽에 밀쳐져 있던 개의 몸을 떼어 냈다. 등에 닿아 있던 차가운 벽이 멀어지자, 개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공작의 단단한 팔이 개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매끈한 제복을 입은 공작의 몸이 열 오른 개의 맨살과 가깝게 붙었다.
“우읏…….”
공작은 질척해진 개의 입 안을 샅샅이 훑었다. 치열을 훑고 혀 뿌리를 긁어 올리듯 핥자, 목구멍 안쪽이 가늘게 울렸다.
혀 안쪽에 고인 타액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개는 공작의 팔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제복이 개의 손아귀에 구겨졌다. 감은 눈꺼풀 안쪽이 뜨거웠다.
공작은 언제나 밀어붙이듯 개의 입술을 탐했다. 허리를 잡혔음에도 주춤주춤 밀려날 정도로. 열에 끓는 머리가 질척해진 입 안처럼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개는 어디까지 물러선 것인지도 모른 채 입술을 벌렸다. 숨이 부족했다. 흉터 가득한 손이 공작의 단단한 어깨를 꽉 붙잡았다.
공작의 입술이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개는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헐떡거리는 입술이 젖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연우야.”
개의 몸이 움찔 굳었다. 공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개의 등과 엉덩이에 길게 새겨진 흉터를 건드렸다. 깊게 패었다가 살이 차오르면서 흉측한 형태를 남긴 흉터였다.
곧고 단단한 손이 흉터를 쓸어내리더니 곧 바지와 속옷 사이로 침투했다.
“흣……?”
까만 눈이 풍랑을 맞은 것처럼 흔들렸다.
공작은 흉터를 더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슬슬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속수무책으로 끌려 내려가는 바지 사이로, 솜털 같은 음모가 듬성하게 자란 사타구니가 드러났다.
“여긴 언제 다친 거지?”
“기, 기억 안 납…….”
개는 대답을 피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공작은 물러서는 개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개를 따라 성큼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그 순간 개의 오금에 무언가 걸렸다. 방어할 새도 없이 개는 뒤로 넘어졌다.
풀썩.
개의 몸을 받친 침대가 푹 꺼지는 소리가 났다.
푹신한 침대에 파묻힌 개는 까만 눈을 끔뻑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창문 근처의 벽에 등을 대고 있었는데 언제 침대까지 밀려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끼익. 그 순간 공작의 단단한 다리가 침대에 걸쳐졌다.
그는 바지가 반쯤 벗겨진 개의 양다리를 잡아 올리더니 그 사이에 자신의 몸을 끼웠다. 흰 양말을 신은 다리가 허공에 덜렁 들어 올려졌다.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붉은 기가 감돌기 시작한 성기가 훤히 드러났다.
“잠깐…….”
개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공작에게 발목이 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개는 하는 수 없이 무릎 위에 걸린 바지라도 끌어 올리려 했다.
“연우야.”
허공에 손을 뻗은 개가 움칠 굳었다. 공작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야지.”
개는 입을 벙긋거렸다.
무릎 위에 걸쳐졌던 바지가 종아리를 지나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속옷까지 함께 바닥으로 내던져지자, 개의 몸에 남은 건 흰 양말밖에 없었다. 개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해.”
공작은 헐벗은 개와 달리 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단추를 목까지 채우고 코트조차 벗지 않은 공작은 완벽한 인간처럼 보였다. 어떤 욕망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완전한 인간.
그러나 지금 그는 개를 헐벗긴 채 미소 짓고 있었다. 휘어진 눈꺼풀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저열한 욕망의 색을 띠고 있었다.
개는 토막 난 숨을 내뱉었다.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공작의 긴 속눈썹이 차분히 내리깔렸다.
“없으면 키스나 마저 할 거니까.”
말을 할 거라면 지금 해야 할 것이다. 나중엔 신음밖에 낼 수 없을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언어가 되어 나오는 말이 없었다. 목이 꽉 멘 것 같았다.
공작의 부드러운 입술이 숨결처럼 닿았다. 숨이 절로 헐떡거려졌다. 마치 먹이가 주어지기 전, 훈련된 행동을 하는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읏.”
공작은 두꺼운 혀로 개의 입술을 핥았다. 아랫입술을 더듬고 지나간 혀가 다물린 입술 새를 건드리자, 개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오금을 잡고 있던 공작의 단단한 손이 개의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일순 찌릿한 감각이 배 안쪽을 두드렸다. 다리를 확 오므린 개가 ‘아’ 입술을 벌렸다.
“우, 응.”
그 순간 공작이 목을 울려 웃는 소리가 입 안으로 넘어왔다.
남자의 혀가 목구멍을 핥을 것처럼 깊이 들어왔다. 개는 숨을 헐떡였다. 남자의 혀는 언제나 입 안에 가득 차 숨이 막혔다. 입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한 신음이 타액과 섞여 목구멍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흐으…….”
목구멍과 입 천장이 이어지는 부분을 문대는 감촉에 목뒤가 오싹하게 달아올랐다. 허공에 들린 개의 발끝이 꾹 오그라들었다.
개는 숨을 쉬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자연스럽게 꿈틀거린 혀가 공작의 혀에 비벼지듯 닿았다.
“음…….”
공작이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미묘한 웃음기가 서린 소리. 개는 오싹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다리를 들어 올렸던 손이 멀어졌다. 허공에 들려 있던 개의 다리가 공작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애매하게 뜬 다리 아래로 공작의 단단한 허벅지가 느껴졌다.
생동감을 가지고 움직이는 몸이 가깝게 닿아 있었다. 벌어진 사타구니에 닿는 공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개는 작게 몸을 뒤척였지만, 공작은 쉽게 개를 놓아 주지 않았다.
커다란 몸으로 우위를 점한 남자가 몸을 유연하게 움직였다. 어깨 위에 걸쳤던 코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툭. 묵직한 옷이 바닥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개의 몸이 움칠 떨렸다.
“흐읏.”
코트를 벗어 던진 공작은 개의 가슴팍 위를 짚었다. 모양 좋은 손끝에 둥글게 부푼 유두가 뭉개졌다. 판판한 가슴의 살갗이 파르르 떨렸다.
공작은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 올렸다. 흰 살갗 위에 솟은 분홍빛 유두가 꽤 입맛을 당겼다.
그러나 그것보다 구미를 당기는 것은 따로 있었다.
공작은 가슴을 더듬던 손을 미끄러트렸다. 움푹 파인 배꼽을 지나 아래로 내려온 손이 개의 성기를 단숨에 움켜쥐었다.
눅진눅진하게 녹았던 몸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작은 입 안에 혀를 쑤셔 넣고 있던 공작이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섰네.”
“흣…….”
작게 벌어진 입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개는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공작의 얼굴에 무어라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쳤다. 일견 오싹하게 느껴지는, 희열 같은 감정.
“아……!”
그러나 아름다운 얼굴의 이면을 오랫동안 볼 순 없었다.
한 손에 성기를 가득 쥔 공작이 붉어진 귀두를 둥글게 문질렀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몸을 후려치듯 떨어지는 쾌감에 몸이 확 휘었다. 허리가 허공에 둥글게 들렸다.
“그만, 잠깐…….”
개는 답지 않게 도리질을 쳤다. 생리적으로 배어 나온 눈물이 속눈썹까지 흠뻑 적셨다. 그러나 남자는 성기를 문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개의 불그스름한 귀두 아랫부분을 둥글게 돌려 문지르다가, 꼿꼿하게 선 기둥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아, 읏…….”
낮은 신음이 잇새로 흘렀다. 흰 양말을 신은 개의 발이 오그라들고, 눈이 질끈 감겼다.
공작은 그런 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눈꺼풀 위를 길게 핥았다. 젖은 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떠 올랐다. 공작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에 걸쳤다.
“네 성기를 제대로 본 적 있나?”
“없, 흣, 없습니다. 만지지…….”
공작은 엉덩이를 뒤로 물려 도망가려는 개의 귀두를 강하게 문질렀다. 손끝을 세워 요도를 후벼 파듯 문지르자 개의 몸이 벌벌 떨렸다.
목이며 귀며 모두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차현은 개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파들 떨리는 살갗에서 단내가 났다.
“하, 으…….”
“모양도 색깔도 귀여워.”
목덜미를 깨문 공작이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개는 앞에 있는 이를 밀어 낼 것처럼 공작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러나 벌벌 떨리는 팔로는 그 무엇도 밀어 낼 수 없었다. 제복을 입은 몸이 맨살에 닿는 감촉마저 자극으로 화했다.
“잡아 달라는 것처럼 한 손에 들어오잖아.”
개는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공작의 손에 잡힌 성기가 터질 것 같은 와중에, 그는 자꾸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귓속에 흘렸다. 개는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공작에게 내리눌린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축 늘어져 말랑말랑한 것도 마음에 들지만, 지금처럼 꼿꼿이 서서 새빨개진 게 제일 마음에 들어. 이렇게 쥐고 있을 때 네 얼굴이 어떤지 너는 모르지.”
“그, 런 말 그만하십…….”
“연우야.”
개의 마른 뱃가죽이 홀쭉하게 들어갔다. 개의 손끝이 꽉 곱아 들었다.
배 속은 저릿하고, 사타구니는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공작이 손끝만 까딱해도, 성기를 살짝만 흔들어 줘도 맥없이 사정할 것 같았다.
“핥아 줄까?”
“……!”
개의 눈이 크게 뜨인 것은 그때였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가 남자의 말을 이해하길 거부했다. 핥는다고? 어디를?
그러나 회피는 잠시였다. 그는 개가 반응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목덜미를 물어뜯던 공작이 개의 오금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다리를 들어 올리려 했다. 개의 몸이 파드득 뛰었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공작은 개의 성기를 핥겠다 말한 것이었다.
“시, 싫……!”
극한의 상황에 놓인 사람은 초인적인 힘을 내는 법이었다. 개는 공작을 밀쳐 내고 몸을 돌렸다. 네발로 선 개는 빠르게 침대 위를 기었다.
“윽!”
그러나 얼마 못 가 목덜미가 잡혀 눌렸다. 힘이 빠진 개는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에 의해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부드러운 침대에 뺨이 짓눌렸다. 개는 까만 눈을 불안하게 굴렸다.
“흐음…….”
흉터가 가득한 등을 드러낸 채, 엉덩이만 불쑥 치켜올린 개의 치태를 공작은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의 눈이 즐거움으로 휘어졌다. 양말을 신은 발이 불안한 듯 오그라든 게 꽤 귀여웠다.
“이대로 하는 것도 꽤.”
“흐읏…….”
공작은 몸을 숙여 개의 어깨를 질근 깨물었다. 공작의 몸에 내리눌린 작은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순간 엉덩이에 와 닿은 단단한 물체는 큰 질량을 가지고 있었다. 개의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엉덩이에 닿은 묵직한 살덩이는 본능적인 생존 감각을 일깨웠다. 개는 반사적으로 앞으로 기어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공작의 성기는 사람의 신체가 아니라 검집 같은 무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뻗어진 손은 덧없이 시트를 그러쥘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등 위를 덮치듯 몸을 숙인 공작의 몸이 더 가깝게 붙었다. 어깨를 질근 깨물던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목덜미를 지나 등까지 내려온 입술은 아쉬운 감촉을 남겼다.
“우, 읏…….”
촉, 촉.
간지러운 소리가 내려앉는 등허리가 자꾸 튀어 올랐다. 빳빳이 선 성기가 배 위에 바짝 달라붙어 꺼떡이는 것이 느껴졌다. 시트를 그러쥔 개의 손등 위로 뼈가 둥그렇게 불거졌다.
공작은 긴장으로 단단하게 선 개의 날개 뼈 위 근육을 길게 핥았다.
“흐…….”
개는 눈을 질끈 감고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공작의 묵직한 성기가 허공에 들린 엉덩이에 비벼지고, 단단한 손이 미끄러지듯 마른 갈비뼈 위를 훑었다. 마른 가슴팍으로 넘어온 단단한 손이 손끝에 걸린 유두를 가볍게 문질렀다.
개는 몸을 뒤틀었다. 꼿꼿이 선 유두를 문지르는 손길에 자꾸 기분이 이상해졌다.
“흐으, 거기 이상…….”
“어디가 이상한데.”
공작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개는 입을 벙긋거렸다.
가슴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개에게 가슴이란 ‘머리, 가슴, 배’처럼 부위를 나누기 위한 단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타는 듯 뜨거울까. 입을 달싹여도 소리가 되어 나오는 말이 없었다.
시트를 그러쥔 손 안쪽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개는 머리 위에 비식 떨어진 공작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말을 안 하면 알 수가 있나.”
차현은 자신의 아래에 네발로 엎드린 개의 유륜을 둥글게 문질렀다. 매끈하고 보드라운 유륜의 피부는 만질수록 감질났다. 이상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움칠움칠 뛰는 작은 몸이 기꺼웠다.
그는 개의 등에 입을 맞췄다. 혀를 빼 달큼한 향을 풍기는 살을 핥자, 흥분으로 미미하게 젖은 살갗이 혀끝에 와 닿았다.
신음을 참는 개의 온몸이 잘게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쉽게 느끼고, 쉽게 흥분하는 몸이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황제의 개라 불린 걸까.
“연우야.”
이름을 부르자 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차현은 새파랗게 날 선 감정과 웃음기가 뒤섞인 눈으로 개의 뒷덜미를 바라보았다. 붉어진 목덜미가 먹음직스러웠다. 흉터투성이인 몸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흔적이 남지 않은 부위.
차현은 흰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는 사람처럼 이를 세웠다. 생명과 직결되는 부위를 물린 개의 몸이 파득 뛰었다.
그는 놀라 몸부림치려는 개에게 설명하는 대신 그 몸을 내리눌렀다. 버둥거리는 양손을 침대에 내리누른 차현은 목덜미 위에 만족스러운 자국이 새겨진 후에야 이를 거뒀다.
“흐으…….”
개는 자신의 몸을 강압적으로 누르던 힘이 사라지자 고개를 돌렸다. 당혹감으로 흐려진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배 위에 꼿꼿이 서 있던 성기가 반쯤 힘을 잃고 늘어졌다.
차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순진한 얼굴을 보며 미미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왜 그렇게 놀라. 설마 내가 널 죽일까 봐?”
“그런, 의미가 아니었…….”
공작은 눈물이 흘러나온 눈 안쪽을 핥을 것처럼 혀를 세웠다. 개의 눈꺼풀이 다급히 감겼다. 닫힌 눈꺼풀 위를 핥는 혀의 감촉이 선뜩했다.
공작은 어깨를 작게 움츠린 개를 내려다보며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안심해. 나는 네 주인이었던 자와는 다르니까.”
불경한 말이었다. 적어도 개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러나 개는 공작의 불순한 말에 항변하지 못했다.
몸을 일으켜 세운 공작의 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통이 들려 있었다. 언제부터 그의 손에 그 통이 쥐어져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하얀 통을 거꾸로 든 순간,
“읏……?”
엉덩이 골 사이에 질척하고 차가운 액체가 떨어졌다.
미끈거리는 액체는 엉덩이 골을 타고 흘러 다물린 구멍까지 적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감촉에 개의 작은 구멍이 꽉 조여들었다.
공작은 파르르 떨리는 검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개의 관자놀이와 머리칼 위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쉬. 괜찮아.”
“거기 읏, 싫…….”
괜찮다고 말한 남자는 어느새 개의 구멍 위에 손가락을 뭉근하게 문지르고 있었다. 윤활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구멍은 꽉 다물려 침입을 거부했다. 개는 앞으로 기어가기 위해 발끝에 힘을 주었다.
“연우야.”
그러나 공작은 녹록지 않았다. 나긋나긋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작은 틈을 내보인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단번에 쑤셔 넣었다.
“으!”
개는 시트를 그러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배출이 되어야 정상인 구멍에 무언가 쑤셔 박히자 이물감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전처럼 구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들지는 않았다.
부드럽게 들어온 손가락이 유영하듯 내벽을 내리눌렀다. 척추 뼈가 도드라진 개의 등이 파르르 떨렸다.
“흐, 읏…….”
기분이 이상했다. 엉덩이 골을 흠뻑 적신 액체가 회음까지 흘러내려 축축했다. 마치 구멍에서 흘러나온 애액에 의해 회음까지 젖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공작의 손가락이 구멍을 들락거릴 때마다 찔꺽거리는 소리를 내뱉었다. 예민한 청각을 두드리는 소리에 개는 어깨를 움츠렸다.
붉어진 귓가가 검은 머리칼 사이로 훤히 드러났다. 공작은 그런 개의 뒷모습을 음미하듯 바라보다가 벌어진 입구에 중지를 밀어 넣었다. 두 개의 손가락을 가득 문 구멍이 움찔 떨렸다.
“흐읏, 이상…….”
개의 흰 양말을 신은 발끝이 꽉 오므라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두 개나 넣었는데 아프지 않다고? 게다가 젖은 구멍 안이 공작의 손가락을 물고 술렁이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을 반기는 것처럼, 아니면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개는 공작의 손가락을 빼내기 위해 엉덩이를 흔들었지만, 그건 오히려 공작의 눈요기가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흔들지 않아도 넣어 줄 테니 기다려.”
공작은 웃음기 서린 목소리를 내뱉더니, 이내 약지마저 구멍 안에 쑤셔 넣었다.
개는 배 안을 채우는 압박감에 눈을 크게 떴다. 파르르 떨리는 검은 눈동자가 허공을 바라보았다.
세 개의 손가락이 붉은 내벽 안을 넓게 벌리다 일순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아……?”
여태 일부러 비껴 눌렀던 개의 전립선을 강하게 누른 것은 그때였다.
공작의 곧고 긴 손가락은 개의 내벽 안을 뭉근하게 쓸고 비벼 올렸다. 개의 몸이 파드득 뛰며 발끝이 옹송그려졌다. 크게 확장된 눈이 허공을 향했다. 사타구니 사이에 늘어졌던 성기가 꼿꼿하게 일어섰다.
“으읏, 흐……. 싫, 싫어! 이상해, 그만, 싫…….”
눈앞에 폭죽이 터진 것처럼 시야가 하얗게 흐려졌다가, 검게 바래지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엉덩이만 간신히 들고 공작의 손가락을 받는 것이 전부였다.
붉게 부어 벌어진 구멍으로 젖은 공작의 손가락이 빠르게 들락거렸다. 모든 감각이 순식간에 예민하게 들끓는 게 느껴졌다. 유두에 닿는 부드러운 천의 감촉마저 사포에 긁힌 것처럼 쓰라렸다.
“아읏, 흐, 하지……!”
“연우야. 똑바로 말해야지.”
초점이 풀어진 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공작이 부르는 ‘연우’는 너무 자극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공작은 뻣뻣하게 굳어 손가락을 꽉 조여 문 개의 등허리를 쓸어내리다, 곧 골반을 지나 개의 사타구니에 손을 올렸다.
“여긴 꼿꼿이 세워 놓고, 응?”
뜨끈하게 달아올라 꼿꼿이 선 성기가 한 손에 가득 쥐어졌다. 붉어진 기둥을 가볍게 주무르자 개의 내벽 안쪽이 술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의 입술 위에 조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손장난은 이쯤 할까.”
“읏……!”
구멍을 가득 채웠던 손가락이 단번에 뽑혀 나갔다. 개는 고양이처럼 휘어진 등을 파르르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벌어진 구멍 사이로 붉은 내벽이 보였다. 빠끔거리는 구멍이 투명한 액체로 젖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달칵.
그 순간 무언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는 움찔 몸을 굳혔다. 개는 이미 이 소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바지 버클이 풀리는 소리.
두껍고 단단한 성기가 구멍 위에 닿았다 여겨진 순간이었다.
“……!”
공작은 망설임 없이 좁은 구멍 안에 성기를 쑤셔 넣었다. 두껍고 뜨거운 선단이 거칠게 구멍을 벌리고 들어오자 긴 기둥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하, 아…….”
손가락을 넣었을 땐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구멍이, 공작의 성기가 파고들자 찢어질 것처럼 당겼다. 시트를 움켜쥔 개의 손등 위에 핏줄이 솟았다.
그러나 고통만이 있던 건 아니었다. 깊이 파고든 공작의 성기가 전립선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좆, 끊어 먹겠어. 연우야.”
경련하듯 떨리며 성기를 조여 문 내벽에 공작은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고통에 젖은 아름다운 얼굴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그는 픽픽 떨리는 개의 등 위에 입술을 누르며 작은 엉덩이 너머에 있을 성기에 손을 댔다.
“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공작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오른 건 순간의 일이었다.
“넣자마자 싸 버린 거야?”
“아니, 흣…….”
눈물로 흠뻑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확 조여든 배 속이 저릿거리고, 사정액을 토해 낸 사타구니는 따끔거렸다. 사정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해 봐야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귀엽게 구네, 계속.”
몸이 이상했다. 스스로 성기를 만져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공작의 아래 깔린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니, 이상한 건 공작이었다. 그는 개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뭔가 변하게 되었다. 계속, 또 계속.
“흐우, 읏……!”
그 순간 개의 목덜미 부근을 짚은 공작이 거칠게 성기를 쑤셔 박았다. 구멍에 귀두가 걸릴 때까지 빠져나갔다가 단숨에 쑤셔 박히는 감각에 숨이 덜컥 멈췄다.
“아, 으……!”
작은 엉덩이 사이를 들락거리는 성기가 쾅, 쾅, 쑤셔 박힐 때마다 내장이 밀려나는 기분이었다. 개는 힘을 준 손으로 부드러운 시트를 벅벅 긁었다. 침대 위에 희뿌연 정액을 토해 낸 개의 성기가 흔들리는 몸과 함께 꺼떡거렸다.
“읏, 네 구멍 너무 작아. 알아?”
“모, 모르……, 아……!”
조금만 움직여도 공작의 두꺼운 성기가 내벽 어딘가를 두들겼다. 숨을 절로 헐떡이게 되었다. 배 속이 너무 뜨거웠다. 등허리가 저릿거리고 발끝이 곱아 들었다. 목구멍이 뜨거워 입을 벌리면 뭉텅이진 신음이 턱턱 쏟아져 나왔다.
“밤새, 좆을 넣어 놓고 늘려 놔도 좁을 것 같은데. 흣.”
“시, 싫…….”
두꺼운 좆이 깊이 쑤셔 박힐 때마다 배 안쪽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이런 좆을 밤새 넣는다니, 죽을지도 몰랐다.
개는 도망이라도 칠 것처럼 엉금엉금 기었다. 그러나 공작은 개가 도망가게 두지 않았다. 개의 골반을 붙잡고 사정없이 좆을 처넣었다. 엉덩이에 공작의 샅이 거칠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젖은 구멍 안을 파고든 좆이 전립선 위를 콱 찍어 올렸다.
“흐……!”
순간 눈앞에 흰 빛이 튀고 머리는 녹아 버린 것 같았다. 초점이 풀린 채 축축이 젖은 개의 눈이 허공을 굴렀다. 익숙한 쾌락을 주는 아름다운 얼굴을 찾기 위해서였지만, 목덜미가 눌린 채로는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아!”
쾅쾅 내려찍히는 내벽이 저릿했다. 흰 양말을 신은 개의 발끝이 쫙 펴졌다가 꽉 오그라들길 반복했다.
눈이든 뇌든 모두 녹을 것처럼 어지러운 와중, 개는 등 뒤에 있는 남자가 공작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개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미약하게 꿈틀댔다. 잇자국이 무성한 마른 몸에 근육이 올랐다가 내려앉길 반복했다.
공작은 불편한 듯 몸을 들썩이는 개의 안에 성기를 깊이 쑤셔 놓고 허리를 숙였다.
“연우야. 큿, 가만히 있어야지.”
“으…….”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개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연우.
공작만이 개를 그렇게 불렀다.
일순 우물우물 성기를 짓씹던 내벽이 확 조여들었다. 개의 등 뒤에 놓여 있던 공작의 손끝이 짧게 떨렸다.
“하…….”
낮은 신음을 내뱉은 공작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꺼냈다.
“연우야.”
“시, 싫…….”
개는 온몸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리에 도리질을 쳤다. 고작 ‘연우’라는 이름에 배 속이 경련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머리칼 한 올이 침대에 스치는 것마저 쾌감으로 느껴졌다. 지금 이건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개는 발버둥을 쳤다.
“큿, 연우야.”
“그거 이상, 하지……!”
그러나 공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라고 말하며 개의 구멍에 좆을 쑤셔 넣었다. 쾅쾅 틀어박힐 때마다 개의 성기 끝이 끄떡여졌다. 사타구니가 뜨거웠다. 고장 난 것처럼 흘러나오는 눈물이 시야를 적셨다.
퍽.
두꺼운 성기가 개의 전립선을 찍어 올리고 더 깊이 틀어박혔다. 벌어진 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성기 끝에서 묽은 정액이 픽픽 토해졌다. 젖은 눈동자가 크게 확장됐다.
“아……. 아, 아……!”
“흣.”
그러나 개가 사정한 직후에도 공작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깊게 들어오는 성기에 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개는 시트를 드득 긁었다. 이제 또 설 것 같지 않은데 이어지는 쾌감에 배 속이 저릿했다. 전기가 오른 것처럼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개는 구멍을 움칠움칠 떨며 공작의 커다란 성기를 겨우 짓씹었다. 두꺼운 귀두가 처박힌 내벽이 경련하듯 떨렸다.
“큿…….”
퍽!
거칠게 마찰한 공작의 허벅지 근육이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구멍 깊숙이 들어온 귀두 끝에서 질펀한 정액이 쏘아졌다. 개는 숨도 내뱉지 못한 채 파르르 몸을 떨었다.
즈윽.
커다란 성기를 뽑아낸 구멍이 둥그렇게 벌어졌다가, 이내 힘겹게 오므라들었다. 공작은 힘이 빠져 개구리처럼 늘어진 개의 다리를 잡아 앞으로 뒤집었다.
공작이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개는 눈물과 쾌감에 흠뻑 젖은 얼굴로 공작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조금 흐트러졌지만, 여전히 정복을 입은 완벽한 남자.
“얼굴도 밑에도 다 젖었잖아, 연우야.”
“우읏…….”
개의 몸이 가볍게 굳었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 개를 보는 공작의 얼굴에 기묘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주인이 부주의해서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아 줄 이유는 없겠지.”
“……!”
공작은 흰 양말을 신은 개의 발목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고 슬슬 양말을 끌어 내린 자리에 입을 맞췄다.
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말릴 새도 없이 그는 그곳에 잇자국을 남겼다. 개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몸은 그것마저 쾌감으로 느꼈다.
“돌려주고 싶지 않게 됐는데.”